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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군인주일 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10월 4일 (토) 08:51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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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
 

군인주일 강론 모음

죽음을 부르는 욕심

김영춘 신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는 끔찍한 폭력과 죽음이 이어집니다. 포도밭 임자가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소작인들로부터 소출을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냅니다. 소작인들은 소출을 내기는커녕 종들을 붙잡아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에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합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포도밭을 차지하기 위해, 상속자인 아들마저 죽입니다.



비유에서 포도밭을 차지하려는 소작인들의 욕심은 주인의 종들과 아들을 죽이게 합니다. 욕심이 죽음을 불러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에게도 소작인들의 욕심이 있었습니다. 뱀의 유혹에 빠져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게 된 것도 그들의 욕심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그들에게 죽음이 찾아옵니다. 하느님처럼 되고자 했던 그들의 욕심이 인류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하고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합니다.



창세기에 이어 나오는 카인의 이야기도 욕심이 불러온 비극입니다. 자신의 제물은 외면당하고 동생 아벨의 제물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자, 카인은 아벨을 죽입니다. 카인의 시기와 욕심이 죽음을 불렀습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카인의 이야기는 인간이 지닌 욕심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피가 우리에게도 흐릅니다.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면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을 배반하게 되고, 카인처럼 자신의 가장 가까운 혈육마저도 죽이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비유에 나오는 포도밭을 내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 묵상해 봅니다. 많은 사람이 나의 포도밭에, 곧 나의 삶 안에 들어옵니다. 피로 맺어진 가족, 가까운 이웃, 성당의 형제자매, 직장 동료, 그리고 내가 발길을 옮기는 삶의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빌리자면, 주인이 포도밭에 보낸 사람들입니다. 주인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고, 종들은 하느님께서 나의 삶의 터전에 보낸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포도밭 소작인들처럼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들을 폭력과 죽음으로 맞아들이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삶의 포도밭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환대하기보다는 그들을 배척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그들을 사랑하기보다 미워하고, 칭찬하기보다 헐뜯고, 인정하기보다 시기하고, 자랑으로 삼기보다 무시하기도 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거절하고 내치는 많은 경우는 나 자신만의 포도밭을 차지하려는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힐 때입니다. 그리하여 포도밭에 침범하는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무장된 욕망의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고,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죽음과 같은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비유에서처럼 하느님께서는 나의 삶의 포도밭에 당신의 종들과 아들을 보내십니다. 소작인들은 포도밭을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욕심에 눈이 멀어, 포도밭을 찾아온 이들을 죽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나의 삶을 나 자신의 사리사욕으로 채우려 하면, 나의 삶의 터전에서 만나는 이들을 해치게 됩니다. 내 인생의 터전에 찾아오는 이들을 나의 욕심에 사로잡혀 배척하면 나의 삶이 처참해지지만,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으로 환대하여 맞아들이면 나의 삶이 구원으로 이끌어집니다.


삶의 포도밭 

 김현신 신부 

우리는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각자가 소중하게 가꾸어야 할 삶의 포도밭을 도지로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포도밭을 소중하게 가꾸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포도밭에서 풍성한 결실을 거두려면 문제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우리들 각자의 자세이다.



신앙인이란 주인, 곧 하느님으로부터 ‘삶의 밭’을 받아 풍성한 결실을 거두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소작인’에 불과하다.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곧 자기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생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제때에 도조를 바쳐야 할, 다시 말해 언젠가 죽어야 할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소중하고, 땀을 흘려 가꾸어야 할 하느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인이 지녀야 할 자세는 삶을 하느님의 선물, 즉 ‘은혜’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같은 하느님의 은혜를 저버릴 때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하듯,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이사 5,4)라는 책망과 심판을 하느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신앙인으로서, 도조를 바쳐야 할 소작인으로서의 분수를 잊고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 안에서는 하느님과 형제들을 보고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 21,35)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삶’은 그 자체를 소유함으로써가 아니라, 이웃 형제와 ‘나눔’으로써 비로소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 형제들과 진실한 삶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우리가 받은 삶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에 감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삶의 포도원에서 풍성한 기쁨과 결실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삶의 결실을 거둘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형제 여러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중략)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필리 4,6-9).



비록 현재의 삶이 고통스럽고 원망스러울지라도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써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그 소중한 삶을 이웃과 나누도록 하자.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듯이, 하느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렵지만 그분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시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우리 삶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평화를 드러내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밭을 맡기시고 사랑이라는 소출을 끊임없이 원하고 계십니다. 

  홍성훈 신부 

오늘 연중 제27주일 특별히 군인주일을 맞아 서두에 군대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합니다.

남자라면 누구나 자기가 군생활했던 곳이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군대말로 ‘빡세다’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저역시 마찬가지로 그리 편안하지 않은 곳인 강원도 양구 21사단에서 일명 ‘땅개’라고 불리는 보병생활을 하다보니 여러 추억거리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군생활의 대부분을 대암산이라는 산꼭대기에서 지내다 보니 종교활동을 나가기란 무척이나 어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대후 약6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배차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당에 가볼수가 없었습니다. 신학교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를 참여하던 생활에서 본의아니게 6개월이라는 냉담생활을 하며 미사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깨닫게 되는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매일 저녁 야간 근무에 나서면서 묵주도 챙겨갈 수 없어 손가락으로 새며 기도하던 그 시간에 한쪽귀는 고참의 찬란했던 사회생활을 듣기위해 열어두면서도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던 한가지 기도는 “예수님, 당신의 살과 피를 한번만 모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6개월간의 냉담기간, 그 시간은 저에게 있어 포도밭을 놓아두고 소출을 기다리며 잠시 떠나간 주인을 그리워 했던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 시간도 잠시뿐, 격오지였던 산에서 내려와 주둔지로 부대이동을 하여 사단 성당에 수월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간도 흘러 오대장성이라는 병장이 되어 내몸조차 내힘이 아닌 후임병들의 힘을 빌어가며 그 어떤 때보다 편하게 지내다 보니 포도밭주인에 대한 그리움은 온데간데 없이 종교활동 시간에 시작되는 주말 아침드라마의 유혹에 정신을 팔고, 달콤한 한숨의 낮잠에 육체를 팔고, PX 전자렌지에 돌아가고 있는 냉동만두에 시선을 빼앗기며 그렇게 포도밭주인이 보내온 종들을 죽이고 마침내 그 아들까지 내 마음속에서 죽이는 진정한 냉담을 하며 한주 한주를 보냈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 한달 순교자 성월을 보내며 박해시대 목숨을 담보로 하고 수십리길을 헤쳐가며 신앙생활을 하였던 순교자들에 비한다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편하고 풍요롭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가’라는 묵상을 하면서 지난 군생활동안의 제 모습에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밭을 맡기시고 사랑이라는 소출을 끊임없이 원하고 계시고 이에 당신의 수많은 종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마침내 당신의 소중한 아들마저 보내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속을 온갖 유혹과 욕심들로 가득채워 보내온 종들뿐만 아니라 그 아들마저 죽이고 있지는 않은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포도밭을 맡기듯 당신의 말씀을 맡겨주신 주님을 잊고, 수확의 기쁨을 희망하며 포도밭주인을 그리워하던 세례때의 열정을 잊고 욕심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종들을 죽이고 가난하고 아픈 병자들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까지 외면하고 죽이며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다시한번 되돌아보는 이번 한주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아멘. 


 소출을 바라시는 하느님 

  문화미디어국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태어나서, 죽을 때 생전에 누리고 가졌던 것 중에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더 나아가서 모든 생명체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 중에서 사람만이 이 진리를 깨달은 존재이면서 동시에, 유일하게 그 진리를 망각하고 또 애써 외면하면서까지 진리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무는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다음, 계절이 바뀌면 열매와 잎을 떨구며 가진 것들을 버립니다. 동물들은 자신들이 먹어야 할 만큼만, 살아남기 위한 만큼만 먹고 보관합니다.



유일하게 인간만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먹고, 모으고, 쌓아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어놓기도 힘들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었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관리를 그들에게 맡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관리를 맡은 소작농의 신분임을 망각하고 주인 행세를 하려고 했던 것이고, 맡겨진 것에 대한 주인의 소출 요구를 무시하고 소출을 독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 지위, 권한, 신분 등을 자신을 배불리는 데에만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맡겨두셨던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고,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하느님 나라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방법,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밭의 주인인 하느님께 “소출”을 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던 나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에서부터 재물과 재능까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밭”입니다. 그것을 나만 즐겁게 하고, 나를 배불리는 데에만 사용한다면 우리 역시도 하느님 나라를 빼앗길 것입니다. 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빌린다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필요 없어져서 주인으로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의 주인도, 하느님 나라의 주인도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까지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이라는 밭에서 포도나무로, 소작농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인이고 우리는 소작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소출을 거두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빌려주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군인주일 담화문 

  이기헌 주교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도 바오로 탄생 2000주년의 은혜로운 해를 보내면서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전후방 각지에서 조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육․해․공군 및 해병대 장병들을 기억하며 이들을 돌보고 있는 군종 사제들의 사목활동을 위해 아낌없는 기도와 후원을 보내는 군인 주일입니다. 해마다 10월 첫째 주일을 군인 주일로 지내는 것이 벌써 마흔한 번째를 맞이합니다.

그동안 군사목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군인들과 또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군종 사제들과 함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금년은 우리 군이 창설된 지 60년이 되는 회갑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창설된 우리 군은 우리 정부의 성장과 함께 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생존의 위험 속에서 늘 버팀목이 되어왔습니다.



정부수립 당시 세계 속에서 그 존재가 미미하였던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 10위를 자랑하는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지난 8월 베이징에서 있었던 올림픽에서는 세계 강대국들을 제치고 금메달 13개를 획득하여 세계 7위라는 쾌거를 올렸습니다. 이 모두는 우리 민족이 얼마나 강하고 우수한 민족인가를 입증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루는 데 함께 하며 튼튼한 보루가 되어왔던 군이 이제 회갑이라는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60년 회갑을 맞이하기까지 군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최근 여러 해에 걸쳐 지속되었던 이념의 대립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여, 군의 위치가 많이 흔들려졌고 약해지기도 하였으며 그 결과 군의 기강이 많이 해이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60주년인 회갑은 육십갑자(六十甲子)의 한 순간이 끝나고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점은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군은 더욱 새로워져야 하고 새로운 변혁을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최근 모 방송국에서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아 국민들에게 가장 신뢰받는 집단을 묻는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 군대가 1위(57.7%)를 차지하였다고 합니다. 조사를 실시한 방송국에서는 “5.16쿠데타로 18년, 12.12쿠데타로 13년, 국민들에게 독재와 억압의 상징이었던 군대가 이제는 국민에게 가장 신뢰도 높은 집단이 되었다”라고 논평하였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전 세계 첫 이데올로기 전쟁인 ‘6.25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우리 군은 국난 극복의 최일선에서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하는 데 온몸을 던지고 불살랐습니다. 또한 나라가 연이어 위기의 국면에 이를 때마다, 그것이 제2의 연평해전이건 대규모 수해나 산불, 그리고 유통대란 등 각종 재난이건 여러 국가적 환란 속에서도 우리 군은 국민 곁에서 ‘국민의 군대’로서 헌신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다시금 국민의 가장 깊은 신뢰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우리 군은 또 다른 60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새 정부는 “정예화된 선진 강군 육성”을 국방 비전으로 제시하는 가운데 ‘국민과 함께 하는 국민의 군대를 지향하겠다고 강조하였으며, 군 안에서도 강한 군대가 되려는 변화의 바람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전보다 더 강도 높은 훈련과 교육을 받고 있는 군인들에는 마음의 휴식과 위안이 필요합니다. 바로 여기서 군종 사제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군종 사제들이야 말로 쉼이 필요한 군인들에게 참된 휴식을 주고 따뜻한 위로와 함께 힘을 불어 넣어주는 사람들이며 이들에게 참된 마음의 휴식처는 군 성당입니다.

변화와 혁신이 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때, 우리 군인 신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모범을 보이고 스스로 변화에 앞장을 서야하겠으며 군을 지켜보는 전국의 모든 형제․자매들은 군인들을 위하여 기도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아시다시피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바오로 탄생 2000년을 맞이하여 바오로의 해를 선포하셨는데, 바오로해의 취지도 신자들 신앙생활의 변화와 혁신을 바오로 사도 안에서 찾아보자는 데 있습니다.



바오로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를 믿는 이들을 열성적으로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갈라 1,13-14). 그러나 바오로의 삶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다가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로 주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는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거침없이 복음을 전했던 불굴의 투사였습니다. 유다 지방의 작은 믿음의 공동체로 시작했던 그리스도교는 바오로 사도의 노력으로 로마제국 전체로 전파되었으니, 그의 회심과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변화와 혁신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확신에 찬 바오로는 “형제 여러분, 다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필리 3.17)라고 말합니다. 열정과 헌신이 늘 몸에 배어 살아가는 군인 신자들이야말로 바오로 사도를 열정적으로 본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군은 ‘강한 전사’. ‘강한 군대’가 되고자 쉼 없이 파이트 투나잇(Fight Tonight)을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밤 당장 전투가 시작되더라도 승리할 수 있는 군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와 혁신’이 이렇게 강함을 위해서라면 이 강함의 추구는 군의 정체성의 추구가 아니겠습니까, 이를 위해 끊임없이 훈련하고 무장하는 군이지만 국민의 무한한 지지와 신뢰가 없다면 결코 글로벌(Global) 강군 육성은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주님의 말씀 위에 굳건해 지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욱 담대하게 선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 마음 돌리려는 끊임없는 회심과 주어진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세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이들의 정체성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라고 강조합니다.



군인 주일은 보편교회 안에서 군인들과 일반 신자, 군인신자들과 교회, 군종 사제와 모든 교회가 서로서로 일치를 이루고 기도와 격려의 통교를 이루는 주일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군인들에게 격려를 보내며 기도하고, 군인신자들은 신자로서의 삶을 다짐하고, 교회 공동체는 군복음화를 위해 애쓰는 사제들을 위하여 기도와 물질적인 도움으로 격려를 보내는 날입니다.



그동안 여러분 모두의 따뜻한 격려와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특히 금년 한해 전국 곳곳에서 연무대 육군 훈련소 성전 건립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도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 번 기도와 격려를 부탁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언제나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시기 기원합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이럴 수가 있는가? 

  정지용 신부 

참 희한한 일이다. 밭의 주인이 포도밭을 만들어 놓고, 밭에서 일할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밭을 맡기고 먼 곳으로 떠났다. 시간이 지나 포도를 수확할 때가 가까이 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게 한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이럴 수가 있는 가? 소작인들은 주인의 몫을 보내는 것이 당연함에도 그리하지 않고, 주인이 보낸 종들을 매질하고 죽이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종들을 다시 보내도 마찬가지, 심지어 주인이 아들을 보내자 ‘저자가 상속자다.’하며 그 아들을 죽이고 상속 재산을 차지하겠다고 한다.

이런 배은망덕한 일이 어디 있나. 밭을 만들고 일자리를 주었더니, 감사해 하며 소출의 일부를 바치기는커녕, 오히려 그 밭을 차지하겠다고 나서다니…. 도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이럴 수가 있는가?



대학교 합격자 발표가 나오던 시기였다. 수험생 자녀를 둔 어머니와 몇몇 자매님들이 모인 자리에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 자리에 있던 수험생 어머니가 바로 그날 자신의 자녀가 대학에 합격했다며 기뻐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자매님이 농담조로, “그러면 어서 성당에 가서 감사헌금 내야겠네.”하고 말을 건넸다. 그 말을 들은 수험생 어머니는 웃으며 며칠 전에 이미 봉헌했다고 대답했다.

수험생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순간 생각에 잠겼다. ‘아, 이런 분도 계시는구나? 이런 방법도 있구나? 다 끝나고, 모두 얻은 후에 감사드리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할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드리고, 결과를 보지 않고도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이구나!’



포도밭의 소작인들은 자신들에게 밭을 마련해 주고 일할 수 있게 해 준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는 못할망정, 주인의 몫을 내어주어야 함이 당연한 일임에도 더 큰 욕심을 부리고 있다. 오히려 욕심이 지나쳐 주인의 종들을 죽이고 아들까지 죽이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들의 결말은 불 보듯 뻔하다. 그동안 감사할 줄 모른 채 누려온 것들을 빼앗기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법이 참으로 다름을 느낀다. 누구는 더 가지려고 하는 인색한 삶을 살고, 누구는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기쁘게 지낸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실천하기까지 어려움이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감사하며 살면 더 감사할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나에게 감사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행복한 삶이 다가옴을 기억하자.


신고합니다! 

  김기현 신부 

“백-마! 신고합니다!”



“대위 김기현은 2005년 7월 1일부로 삼사관 학교에서 제 9 보병 사단으로 전입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백-마!”



지금부터 정확히 3년 3개월 전의 이야기입니다. 삼사관 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9사단으로 발령을 받으며 사단장에게 신고를 했습니다. 계급은 대위였습니다. 군대에 처음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금 모든 것이 낯선 그때의 기분이란?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마음은 그야말로 어리버리한 이등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별 두개인 사단장은 스테파노라는 신자였습니다. 참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래도 군대에서 해야 할 것(신고)은 해야 했습니다. 갓 전입온 신입 장교니 기합이 든 척이라도... 지금은 말년 차.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지나간 군생활을 돌아봅니다.



처음이란 낯설고 어렵습니다.



군에서 군종신부들은 병사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많이 합니다. 인성교육, 자살예방교육, 분노조절교육 등등 결론은 주어진 의무인 국방의 의무를 잘 해서 건강하게 전역하란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면 저는 자주 병사들에게 군생활은 원래 어려운 것이니 당황하지 말라고 일깨워 줍니다. “너희들이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은 분명 어려운 삶이다. 왜냐하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이 처음 경험되어 지는 것이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다.” 학력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처음 군에 들어온 신병들은 그야말로 측은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모든 것들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니 아마 죽을 맛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고, 가족이 보고 싶고, 친구가 보고 싶고, 애인이 절실히 그리워집니다. 그 그리움 속에서 그들은 소중함에 대해 알고, 남자가 되어갑니다.



신부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군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그래도 만만찮은 삶에서 조금 더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만한 곳으로 성당을 찾습니다. 그래서 유독 성당에는 이등병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용기 있는 친구나, 밖에서 신앙생활 나름(?) 열심히 했다는 친구들은 저에게 와서 말을 겁니다. “신부님 저 누구누구입니다.” “아! 그래. 어디서 왔냐?” 이것저것 물어보고, 혹 제가 아는 곳이면 아는 체를 한껏 합니다. “신부님! 열심히 나오겠습니다!” “그래, 기도 열심히 하고 성당에도 열심히 나와라!” 낯선 곳에서 ‘신부’라는 호칭을 부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들에게는 위안이 될 것입니다. 육군 대위는 밖에서 자주 볼 수 없었지만, 신부는 그래도 뭔가 편하고, 뭐하나 줄 것 같고, 익숙한 모양입니다. 신부를 편안하게 생각해줘서 다행입니다.



독에 물을 붓습니다.



군생활이 익숙해지고 계급이 올라가면 성당에도 뜸해집니다. 그렇지만 열심히 나오겠다는 이등병의 말을 믿어 줍니다. 쵸코파이가 몽쉘통통으로 바뀌어도, 크림빵이 피자빵으로 바뀌어도, 국수가 자장면으로 바뀐다 해도, 그들에게 달라지는 것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뭔가 더 비싼 것, 좋은 것을 먹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먼 훗날 그들은 잠시나마 그때 성당에서 먹었던 간식은 정말 맛있었다고 기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좋을 것을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기다림을 기억하며 오늘도 물을 붓습니다.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을 앞둔 친구들이 인사를 합니다. 짧지 않은 군생활에 힘든 일도 많았지만, 성당에서의 일들이 힘이 되었다며 감사함을 전합니다. 그런 친구들을 볼 때면 마음 한 켠이 짠해집니다. 대견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앞으로 겪게 될 세상에서의 어려움들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잘 이겨 낼 것이고, 또한 이곳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과 신앙의 경험이 미약하나마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힘을 주시듯이, 그들에게 그분의 사랑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마태 21,33-43. 이사 5,1-7. 필립 4,6-9.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유대교 지도자들을 포도밭 소작인에 비유하였습니다. 포도밭이라는 말은 오늘의 제1독서인 이사야서가 이스라엘을 지칭하여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은 좋은 열매를 생산하지 못하는 포도밭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이 ‘포도밭을 일구어,..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는 말은 이사야서(5,2)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소작인들이 그 아들을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는 말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밖에서 처형당하셨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초기 신앙인들의 말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밭에서 소작인인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 밭의 임자이신 하느님의 아들, 곧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끝에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라는 시편(118,22-23)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소출을 잘 내는 백성이 그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끝맺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분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중심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그리스도 신앙입니다(1고린 3,11 참조). 오늘 복음은 포도밭 주인에게 악하게 행동한 소작인들과 같이, 하느님에게 충실하지 못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잘못으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격을 잃고, 새로운 신앙공동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라는 자각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즉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유대교와 결별한 것은 점차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 계시다고 믿는 신앙인들을 유대교 지도자들은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을 회상하면서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 제사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유대교 지도자들과 견해를 달리하였습니다. 기원 후 66년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거부하면서 전쟁을 일으켰고 4년 동안 항쟁하다가 70년에 패전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마르 13,2) 파괴된 성전과 더불어 폐허로 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참상을 보면서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결과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새 이스라엘이라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인류역사 안에서 말씀하고 일하십니다. 예수님도 역사 안에 태어나서 역사 안에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역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입니다. 삶의 시대적 현상을 외면하고 과거에 발생한 원칙이나 제도를 절대시하면, 역사 안에 일하시는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한 사명을 자각한 것은 동족이 이집트에서 학대받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사실을 시대적 징표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선하신”(출애 33,19) 분이었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고 하느님에게 귀 기울인 결과, 모세는 이집트 탈출이라는 대역사를 성취하였습니다.



유대교 사회가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외면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시대의 징표를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한다고 축복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말씀 혹은 그분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도 시대의 징표를 읽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옛날 것만 옳다고 고집하면, 역사 안에 일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위해 구원으로 들리는 하느님에 대한 말이라야 합니다.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말이 유럽 중세에 발생하였습니다. 그 사회는 그리스도교 문화권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교회 밖에 있다는 사실은 문화적 혜택을 받지도 못하고 사람노릇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같은 말만 반복하면, 타문화 혹은 타종교에 속하는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한다고 매도하는 행위가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는 일입니다. 오늘은 다(多)문화, 다종교 사회입니다. 교회 밖에도 문화적, 영성적 깊이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말을 반복하면, 하느님을 왜곡하는 독선적인 말이 되고,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배타심과 미움을 배설하는 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짐진 여러 분은 모두 나에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마태 11,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고 과거의 것만 고집하던 율사와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은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 어깨에 지우고 자신은 그것을 나르는 데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고 비난하셨습니다.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 자비로운 하느님을 외면하고, 율법과 제사에 대한 과거의 해석에 집착하고 그것만을 고집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세상에는 신분 따라 인간의 실효성이 정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로이 다양한 정보를 받아 소신껏 실천하며 자기의 존엄성을 실현합니다. 오늘 경직된 사회 제도와 조직은 사람들의 실효성을 떨어트립니다. 기업들은 계장, 과장, 국장이라는 경직된 직위 중심보다는 해결해야 하는 사안 별로 팀을 만들어 팀장을 중심으로 효율성 높은 경영을 합니다. 인간의 창의력이 인간의 존엄성으로 보이는 오늘입니다. 오늘은 명령하는 높은 사람 있고, 복종하는 아랫것들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교회는 과거 신앙의 유산을 현대인을 위해 새롭게 해석하며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남녀의 성차별이 없는 오늘입니다. 과거 남성만 허용되던 분야에도 여성들이 활발히 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성은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교회의 교계제도입니다. 이혼이 급증하는 오늘의 사회입니다. 이혼의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교회라야 합니다.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함께 토의하고 결정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자비로우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실효성 있게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세상을 위해 하느님이 기대하시는 소출을 내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



한 사람을 위한 미사 

  김종섭 신부 


얼마 전 주일 교중 미사에 성체분배를 하는데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주세요.’ 하는 표정으로 한 병사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얼굴에 잔뜩 미소를 지으며 ‘그래~ 안녕~ 넌 본명이 뭐니?’ 라고 물으니 ‘일병! 박 oo’ 라고 대답합니다. ‘멋진 이름이구나. 그런데 천주교 신자는 아닌 것 같다. 이것은 성체라고 하는 것인데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아야만 받아먹을 수 있는거야. 미안하지만 그냥 들어가야 하겠구나.’ 그리고 그 미사 후에 그 병사는 예비신자 등록을 하였습니다. 8월 말에 한 명, 9월에 한 명의 병사가 예비신자 교리를 받겠다고 등록했습니다. 수 백 명, 수 천 명은 아니었지만 저는 정말 기뻤습니다. 예비신자 신청서 한 장을 보고 이렇게도 기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저는 공군 1 전투비행단에서 사목 중인 공군 군종사제입니다. 육군과는 다르게 공군은 참으로 병사 한 명이 귀합니다. 병 생활이 편하고 외박이 잦기도 하겠거니와 요즘 젊은이들에게 ‘신앙’ 이 그다지 호감으로 와 닿지 않는 세태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공군은 전투기를 중심으로 모든 인원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이건 간부들이건 자기가 맡은 그 부분에만 전문적이고 세부적인 일을 합니다. 마치 공장에서 어떤 기계를 만들고 그 기계를 각자 분업하여 자기가 맡은 부분만을 담당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소 개인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병사의 수에 비해 거의 동등한 수로 군인가족들이 있다 보니, 공군에서 군종신부로서 사목한다는 것은 한 명 한 명을 상대로 하는 일이며 군인 가족들 한 가정 한 가정을 돌보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직은 임관한지 3개월이어서 그 깊이를 알 수는 없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히려 몸이 하나라는 어려움을 새삼 절실히 느낍니다. 한 명 한 명, 한 가정 한 가정을 일일이 다 신경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사람을 만나고 상대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한 명 한 명과의 관계를 잘 해내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여러 명이나 단체를 상대하고 어울리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한 명을 만나는 일에는 참으로 어색해 합니다. 그런데 공군 군종 사제로 일을 하자니 저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아하~ 왜 이렇게 부족한 나를 하느님께서 군종으로 보내셨고, 게다가 공군 군종 신부로 보내셨는가? 그 이유를 알겠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군종 사제로 시작하는 마당에 ‘사제의 길’ , 그 깊이를 조금은 더 느끼고 있습니다. 아니, 완전히 ‘사제’ 를 새롭게 써나간다는 생각마저도 듭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었던 ‘미사’ 가 있습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영창에서 수감 중인 한 형제와의 미사입니다. 수년간 냉담을 한 그 형제를 찾아 나서서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마음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나누고 예수님의 몸을 나누었습니다. 창살 안에서 어두컴컴한 형광등 아래서 한 사람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한 명 한 명을 얼마나 크게 사랑하시는지를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이를 찾아 나서는 일이 군종 신부의 일임을 배운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흔히들 군을 ‘선교의 황금 어장’ 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 황금어장 이면에는 분명 집을 떠나서 새로운 곳에서 적응해 나가며 힘겹게 살아가는 한 명 한 명이 있습니다. 그 한 명을 낚아서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젊은이 한 명 한 명이 고독과 외로움,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이 곳 군에서 살아갑니다. 군인 한 명 한 명을 위해 기억해주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 한 명을 위한 저희 군종 사제들을 위해 기억해주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한 마리 길 잃은 양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군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축복을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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