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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1:11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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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30주일

        1. 함세웅 신부(가)/1                     2. 함세웅 신부(가)/3

        3. 김정진 신부(가)/5                     4. 강길웅 신부(가)/7

        5. 첫째가는 계명(가)/9                   6. 첫째가는 계명(가)/12



1                연중 제30주일   마태 22,34-40 (가) 악한 소작인

                                                             함세웅 신부



한없이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은 마냥 시원하기만 합니다. 가을이 되면 농부들은 추수에 일손이 바빠지게 마련입니다. 추수가 끝나면 소작인들은 땅 주인과 결산을 하고 미리 계약된 얼마의 소작료를 받게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해괴한 소작인들의 소행을 읽게 되고, 땅 주인의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인내심을 읽게 됩니다.

  

우선 오늘 복음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포도원인 당신의 백성들을 소작인으로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의 권위를 외면한 채 주인이 보낸 많은 심부름꾼들을 냉대하고, 때려 주고, 나중에는 죽여 버림으로 정면으로 주인에게 도전하였습니다.

주인은 자기 외아들을 보내면 소작인들이 꼼짝 못하려니 했으나, 외아들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진노한 주인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모조리 살해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소작인들이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의 행동에 있어 그렇게 놀랄건 없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에는 심한 불경기로 노동자들은 불만에 가득 차서 반항적이었을 수 있고, 그렇다면 지주의 아들을 제거하려고 하는 사건이 일어날 법도 한 것입니다.

이런 사건은 오늘날도 혹시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늘 선동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폭력 혁명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사태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공이니 멸공이니 하지만 ,가장 좋은 반공의 방법은 빈부의 격차를 줄이려고 최대한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오늘 복음은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우선 오늘 ‘특권과 책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많은 특권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좋을대로 일하도록 자유롭게 하여 주었습니다. 하느님은 공사장의 감독과 같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어떤 과제를 주실 때, 그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맡겨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언제인가는 누구에게나 결산의 시간이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결산의 시간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으로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과 시간 안에서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요? 나에게 주어진 권리와 자유는 나에게 어떤 책임 추궁의 원인이 될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분명 나에게 주어진 권리와 자유는 결산 보고의 자료입니다. 우리의 권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된 우리들의 특권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해야 할 특권, 하느님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당할 특권(사도행전 5,41)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러한 특권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남용하여, 하느님께 계획적으로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 결과는 멸망뿐이고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기는 것뿐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보다 독특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없는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된 우리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위치에 있으면서, 그에 상당하는 책임을 완수하고 있는가? 공무원으로서 주어진 권리를 부끄럼 없이 사용하는가? 기업체의 일원으로서 주어진 권리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책임과는 관계가 없는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동시에 교육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리와 의무는 무엇일까? 학자로서 하느님의 자녀된 나의 권리와 의무, 학생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된 나의 권리와 의무, 상인으로서 나의 권리와 의무는 순조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두번째로, 오늘 복음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신뢰와 인내, 심판에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기시듯, 하느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과업을 맡기셨습니다. 이로부터 인간에게는 권리와 책임이 유래됩니다. 인간이 맡은 바 직책을 수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 종종 반기를 들고 항거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꾸자꾸 자기의 파견자를 보내시고, 파견자가 학대받고 살해를 당해도, 당장에 복수하러 달려오지 않는 포도원 주인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회개하고 당신의 뜻을 따라오기를 기다리시며 참으십니다. 그러나 결국은 최후의 날이 오고야 만다는 것을 비유

는 말해 줍니다.



그 심판은 아주 엄한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맡겨 주신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 자들로부터 빼앗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위해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될 때, 그 가치는 상실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최후의 심판은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예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로써 예수께서는 명백히 자기 자신을 다른 예언자들의 계열 이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보다 앞에 온 자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하느님의 이름으로 파견된 사람들이었으나, 그러나 하느님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희생을 오늘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장차 무슨 일이 닥쳐올는지 예수님께서 분명히 알고 계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죽을 수밖에 없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응시하면서, 한 발 한 발 그 길을 걸어 나아간 것입니다.





2             연중 제30주일   마태 22,34-40 (가) 첫째가는 계명

                                                함세웅 신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과연 이웃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명백한 대답과 그에 따른 행동 지침을 제시해 줍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무엇이냐’하는 이론적 설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실천적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구약의 유대 사상에도 보편적 사랑의 개념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족적인 배타적 관점에서 이해되었기에 이웃이란 개념도 주로 한정된 의미로만 설명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한계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웃의 의미를 성화 시켰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르코 12,31) 이 말씀은 이웃이 나 자신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족과 형제적 틀에만 얽매여 있던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놀라운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이웃은 하느님과 직결되면서 이웃 사랑은 곧 하느님 사랑이라는 새로운 정식이 생겨납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40)라는 성서 말씀은 이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웃이란 독자적 개념이 아닙니다. 나와 하느님과 맺어지는 관계에서 그 참뜻이 나타나며 구체적으로 사랑의 의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기에, 이웃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의 척도가 되며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고 나 자신의 구원을 결정짓는 핵심적 요인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웃 사랑의 보편성을 강조하시면서 원수와 반대자들도 사랑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사랑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사람을 하느님과 가까워질 수 있고 그분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가 10,29) 하고 이웃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나 이웃을 정의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실천한 사마리아 사람을 제시하며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39)고 명하십니다. ‘과연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란 문제로 바뀌는 것입니다.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마태오 22,36; 마르코 12,28)를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0,25)로 바꾸어 물은 루가는 영원한 생명에 초점을 맞추어 실천적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정적 구원의 계기를 얻었음에도 그것을 알지 못했고 활용하지도 못했습니다. 반면,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경멸 당했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억울한 형제에게 다가가 치료해 주었습니다.

유대 전통사회에 있어서 동족인 사제, 레위인이 보다 가까운 이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배척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 이웃이 되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실천하고 본받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정녕 우리에게 새로운 내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간 사제와 레위인의 행동은 오늘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참으로 우리 사제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반성케 합니다. 강도 당한 사람이 오늘도 도처에  있지만 우리 사제들은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 억울한 사람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소외된 이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예수의 제자가 되는 표지입니다.



80년대의 한국 교회는 억눌린 형제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일차적 사명은 복음선포이다. 교회의 근본 소명은 신자들의 사목이다. 교회의 존재이유는 신자들의 성화이다.’ 등 여러 가지 주장을 통하여 감옥에 갇히고, 짓눌리고, 억압받는 많은 형제들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진정으로 어느 부류의 사람에게 이웃이 되고 있습니까? 권력자의 들러리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 아픈 그 현장에서 부모, 형제, 친척을 잃고 울부짖고 있는 그 가족들에게 우리는 진정한 이웃이 되지 못했습니다. 작년 5월 광주 사태의 현장에 있었던 어느 성직자는 그 비참한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장으로 달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 문득 기억에 떠오른 것이 바로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였답니다. 사제는 말만 하는 사람이지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면서 반성했다 합니다. 그 성직자는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가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여기에 바로 신앙인의 고뇌가 있습니다.



지난 1월, 이란에 오랫동안 인질로 억류되었던 미국인들이 풀려났습니다. 이때 많은 심리학자들은 이들이 혹시 ‘스톡홀름 징후’에 걸리지 않았나 염려했습니다. 스톡홀름 징후란 피억류자가 억류자와 함께 오래 동거함으로써 억류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또는 동정하게 되는 정신분열 심리 상태로 인해 올바른 가치관을 상실한 병입니다.

달리 말하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허위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이 마비되거나 상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심리학자들이 염려한 스톡홀름 징후란 사실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병인 것 같습니다.



요사이 우리는 가치가 전도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허위가 판을 치고 온갖 구호와 그럴 듯한 단어가 난무하고 있지만 그 참뜻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도된 가치관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뿐더러 병에 걸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사회적 스톡홀름 병에서 우리 모두가 치유되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37)라는 명령 외에 다른 뜻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강도 만난 억울할 사람,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에게 버림받고 사제와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에게 외면 당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이방인에게 전달되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걸어간 길은 동화의 길입니다. 인성을 취하시고 강생하셨으며, 소외된 자들을 벗으로 맞이해 그들과 함께 하셨으며,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 죽기까지 하신 예수는 바로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습니다. 예수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과 같이, 가장 작은 형제에게 사랑을 베푸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사순절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원사의 사건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자선을 베풀고, 기도하고, 단식하라는 마태오 복음 6장의 말씀은 사순절의 특징을 일깨워 줍니다. 자선, 기도, 단식, 이것은 모두 이웃 안에서 그 참뜻이 밝혀집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단식에 대해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어 주고 멍에를 풀어 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이사야 58,6-8)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예수의 죽음, 그것을 우리는 전 인류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과 이웃을 하나로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이웃과 일치, 동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관련된 모든 사건은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의 사건이고 동시에 하느님의 사건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다른 이웃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특히 외면당한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 준다는 것,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이며 완덕이요, 우리의 구원입니다.











3              연중 제30주일   마태 22,34-40 (가) 첫째가는 계명

                                              김정진 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에 바탕이 되고 기반이 되는 핵심적인 문제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즉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구약의 온갖 율법과 예언의 정신이나 신약의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모두 이 두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의 한 율법 전문가가 예수님을 떠보려고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것입니까?”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자그마치 613조라는 계명이 있었는데 큰 계명과 작은 계명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작고 가벼운 계명은 속죄만 하면 용서함을 받을 수 있었으나 크고 중한 계명 위반자는 사형에도 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율법 전문가는 가장 큰 계명에 관하여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그 당시 어떤 율법학자는 “그대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마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이며 다른 계명은 이의 해석에 불과하다”고 하며 최고의 계명을 이같이 설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마태 23,27)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며 구약의 신명기 6장 5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셨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구약의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둘째 계명도 첫째 계명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고 대담하게 말씀하신 점에 크게 유의해야 되겠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요, 기본적이고 첫째가는 계명이라는 데는 모두가 인정하고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꼭같이 중대한 계명이란 것은 지금 처음 듣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다른 어떤 덕행보다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더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여하에 따라서 크리스천 생활은 성공하거나 실패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첫째 원수까지 사랑하라(마태 5,43)고 하셨고 이어서 잃었던 양 한 마리의 비유(루가 15,4)와 탕자의 비유(루가 15,11) 그리고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요한 8,3)등 수없이 그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네가 천사의 말까지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고... 내가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역설하여 마지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밀접하게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즉 이 두 가지 사랑은 그 중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께 대한 참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어떤 아들이나 딸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듯이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도 피를 흘리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성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한편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 없으면 형제에게 대한 참사랑도 없습니다.



신자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깨달은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참사랑은 말로나 혀로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실천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진실히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마태 7,21) 하느님의 계명을 성실히 준수하는데(요한 15,10. 14)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에 관해서는 성 야고보 사도가 적절히 표현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에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편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보 2,16)



끝으로 결론 짓는다면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사람 하나 하나의 얼굴로서 하느님의 모습을 뚜렷이 보며 하느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타인을 존중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저편에서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아가 가까이 가서 그들의 고통이나 슬픔에 공감하여 그들에 대한 사랑이나 봉사를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4          연중 제 30 주일   마태 22,34-40 (가) 사랑은 하느님의 본질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출애 22,20~26 (너희가 과부와 고아를 해치면 내 분노하리라) 

제2독서 Ⅰ데살 1,5c~10 (성자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복 음 마태 22,34~40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오늘 성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사랑처럼 인생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것도 없으며 사랑처럼 인생을 환하게 밝혀 주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그래서 위대합니다. 사랑은 인생을 아주 풍요롭게 채워 주며 또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도 해줍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는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지만 특히 약한 자들은 하느님 사랑의 초점이 됩니다. 즉 병든 자, 헐벗은 자, 그리고 과부나 고아들은 누가 돌봐 줄 사람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주 외롭고 고달픈 자들입니다. 그들에겐 붙잡을 것이 하느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사랑의 특별한 대상자가 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건강하고 튼튼한 자녀보다는 병들거나 불구된 자녀에게 부모의 관심이 더 크게 됩니다. 누가 돌봐 주지 않으면 안되는 자녀에게 부모의 애정이 쏠리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누가 혹 불구된 그 자녀를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부모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베푼 것이 바로 당신에게 베푼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냐.'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첫째는 하느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라고도 하셨습니다. 사랑은 다시 말해 하느님의 본질이며 율법의 본질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에게는 613조목이나 되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지켜야 할 계명이 너무 많아서 모두를 다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한지도 몰랐습니다. 율법의 조목만 풍성했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법의 본질과 그 정신을 몰랐습니다. 바로 거기에 신앙의 모순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법이 좋아도 백성이 지키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오히려 법이 있다는 것 자체가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래서 위대한 사랑의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는 채 죄만 크게 짓게 되는 모순 속에서 고생만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사실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로 이해되고 해석되는 하느님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무시하고 있다면 그 하느님 사랑은 위선이며, 또한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 역시 잘못된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못된 길을 참 사랑인 양 걸어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사목회 임원으로서 열심히 봉사할 뿐만 아니라 교리 상식에도 밝았습니다. 그분 얘기를 들으면 믿는 은혜가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단점은 당신 맘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레지오 문제로 누군가와 언쟁이 있었는데 몇 달이고 그 사람하고는 상종을 않는 것을 보고는 우리가 참사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맘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쁜 사람을 사랑하고 돈 있고 세력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도 심지어는 강아지나 돼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한 이웃 사랑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랑을 말합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 사랑이며 동시에 이웃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죽지 않으면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다 얻는 것이 됩니다. 잘먹고 잘살아도 사랑이 없다면 지옥입니다.



그러나 헐벗고 못살아도 사랑을 하고 있다면 그는 천당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합시다. 그것이 참 하느님 사랑입니다.











5                연중 제30주일   마태 22,34-40 (가) 첫째가는 계명





오늘은 연중 제30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이웃사랑, 특히 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출애굽기의 제3부인 계약편으로 십계명의 정신을 따른 법규정집 중 약자보호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서는 특히 나그네, 과부, 고아,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보호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 이전의 상식에 속하는 인간성에 기초한 하느님의 요구이며 명령입니다. 몸 붙여 사는 자들은 비록 노예는 아니지만 전쟁과 천재지변 등으로 뜻밖에 집과 재산을 잃고 하는 수없이 다른 이에게 종속된 삶을 살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며, 과부와 고아는 가장을 잃었기에 사회적으로 보호장치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은 돈이 없기 때문에 궁핍한 가운데 돈 많은 사람들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부류의 약자들에게 사랑을 베풀도록 명하십니다. 그 누구도 날 때부터 절대적인 부귀영화를 보장받은 것은 아니기에 서로 돕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히브리인들은 오랫동안에집트의 노예살이의 압제, 억압, 수탈, 가난 속에서 시달렸던 뼈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러한 과거를 생각해서라도 어려운 이웃을 잘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호소와 바램을 하느님께서는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법의 기본정신입니다.



우리는 이미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타난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뜻을 묵상한 바 있습니다. 야훼란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주시는 분, 아니, 울부짖는 백성들과 꼭 함께 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하느님은 그 존재상 약자들 편에 서 계신 분입니다. 그 때문에 이 시대의 신학의 기본입장을 「자유와 해방」이란 관점에서 종합한 1986년 3월 22일 바티칸 교리성성의 훈령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사랑”(The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올바른 뜻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에 대해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의 하느님과 부자들의 하느님이 따로 있는가?”하면서 억지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성서는 배제적 입장을 취한 것이 아니라,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했다는 하나의 결단을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권력자나 부유한 이들은 사회신분상 많은 것을 보장받고 있는 기득권의 사람들입니다. 이들보다는 억눌려 있고 가난 때문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눈길을 두는 것은 바로 인정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스나 전철을 타면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합니다. 지체 부자유자를 만나면 그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권리를 빼앗긴 가난한 이들에게 마땅히 펼쳐 보이라는 거이 성서의 기본정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인륜이기도 합니다. 인륜의 원칙에 대해 누가 왈가왈부할 수 있습니까? 특히 성서는 저당 잡힌 자들에게 너그러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가 만일 이불과 담요를 저당 잡혔다면 돈을 못 받았어도 해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이자도 중요하지만 그 이자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이불을 덮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교훈입니다. 원래 이자를 받는 것은 성서상 합당치 않습니다. 사랑과 도움의 정신으로 그냥 꾸어주는 것이 성서의 근본사상입니다.



다만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이러한 제도가 용인될 뿐,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걸맞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리스천의 중요한 윤리원칙을 얻어 낼 수 있습니다. 나의 보장받은 위치가 결코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되며, 또한 나의 재물이 타인의 생존권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웃권리에 대한 존중과 애덕과 사랑은 권고 이상의 의무성을 띤 하느님의 강력한 요구임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 호소하면, 나는 반드시 그 호소를 들어주리라. 나는 분노를 터뜨려 너희를 칼에 맞아 죽게 하리라.”



제2독서는 데살로니카 전서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공동체의 교우들이 신․망․애 삼덕 안에 성실한 삶을 살고 있음에 대하여 기뻐하며 이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은 주님과 사도들의 모범적 추종자들임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데살로니카의 교우들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자기들만 간직하지 않고 주변의 도시에 널리 전달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선포에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복음선포란 기쁜 소식의 단순한 전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업적을 되새기고 그것을 본받는 행위이며 실천입니다. 그 구체적 내용은 하느님 중심의 유일신사상, 그리스도 중심론, 그리고 종말론에 기초한 희망의 삶을 뜻합니다. 그 첫째는 필연적으로 하느님을 제1의 가치와 목적으로 하여 사는 삶, 곧 철저한 유일신 사상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 생애의 모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온갖 우상숭배와 거짓예배는 마땅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입니다.



나자렛의 예수, 그분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며 철저하게 이웃을 위해 살다가 죽어간 분입니다. 그분의 언행, 그분의 가치를 어떠한 경우에도 앞세울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우리는 다시 다짐해야 합니다. 끝으로 종말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꼭 다시 오시리라는 확신입니다. 하느님께서 꼭 우리 모두의 선업을 갚아주시리라는 희망 안에 우리는 매순간, 매일, 최선의 삶을 또한 다짐하고 있습니다. 엄포적 의미도 있습니다만 하느님의 엄한 심판과 진노 앞에서 우리는 그 어떤 변호자를 요구하게 됩니다. 약한 우리 모두의 변호자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감히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은 십계명을 요약한 사랑의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십계명에 기초한 여러 세부적 법규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248조항의 명령법과 365조항의 금령법으로, 합하여 613조목이나 되었습니다. 법조항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다원화되고 복잡해졌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께서는 복잡한 이 사회를 단순화시키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단순하신 분이시고, 사랑의 본질 또한 단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613조항의 법, 십계명, 그것은 사랑 하나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기만 한다면 문제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1독서에 언급된 약자보호 규정도 이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먼저 내어주는 행위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죽이면서 이웃에게 먹이가 되는 희생제사입니다. 사랑은 그래서 이웃과 동화되는, 하나가 되는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작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예수님을 바로 사랑 자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예수님, 당신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며, 우리 또한 사랑이 되어 당신 안에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6               연중 제30주일   마태 22,34-40 (가) 첫째가는 계명





Ⅰ.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

율법학자가 예수께 “선생님, 율법 중에서 가장 중대한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질문하였을 때 그가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이런 질문을 하였는지 의아스럽습니다. 하여간 주께서는 유대인들이 하루에 두 번씩 외우는 십계명 중의 첫째 계명을 인용하시어 대답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정을 다하고 지력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나 자주 듣습니다. 그래서 별로 심각하게 듣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대단히 중대한 것입니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인격과 인격사이의 관계라는 그리스도 주장을 지적하는 말씀이니 만큼 우리에게 중대한 것입니다. 종교는 사랑하는 인격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인격과 그 이웃 사이의 관계입니다. 이 사랑은 상호적(相互的)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되 사랑 받지는 못한다면, 이 사랑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짝사랑은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역사는 하느님의 백성과 그들 각자에 대한 하느님의 끊임없는 인격적 사랑의 기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볼 수 있는 인격자로서 나타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작용하셨고 그들을 위하여 행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노예로부터 행방 시켜 주셨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벌하시는 데 있어서도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은 벌을 받는 중에도 하느님께서 그들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천주가 주님이신 백성은 복되도다. 당신 유산으로 뽑으신 그 겨레로다.”(화답송)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이 되시어 그들 앞에 서 계신 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의 아들입니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성자이십니다. 주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Ⅱ.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하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유대인에게 있어서보다 우리에게 있어서 더 쉽습니까? 이 세상에 지금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명확한 문제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사랑을 생각할 때, 자연히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사람 - 가령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나 애인이나 자녀나 친구 같은 살아 있는 인격 -을 생각합니다. 사랑은 인격자와 인격자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참으로 살아 있는 인격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상호적(相互的)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귀한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들어 높이고 우리를 완성에로 이끕니다. “인격은 사랑 안에서 생명에로 이릅니다. 사랑 안에서 사람은 자기가 어떠한 자인가를, 자기의 내면의 영혼이 어떠한 자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골든브른너).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사랑 없는 인생은 비참하고 불행한 삶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사랑하도록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인간에게 대해서 마음을 꼭 닫고 있다면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까닭에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상상한다.”고 페기는 말했습니다. 사제는 그의 백성을 사랑해야 합니다. 수도자들도 성교회를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맡기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Ⅲ.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문제

그런데 문제 거리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사랑하기가 유대인에게 있어서보다 우리에게 있어서 더 어렵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시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더 잘 이해하며, 유대인에게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베푸신 하느님의 역사를 깨닫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말씀에서 또한 하느님이 우리 앞에 실제로 계심을 알려주는 모든 것으로부터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성사의 위로, 전례의 힘 그리고 심지어는 고통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잠깐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회상해 봅시다.



우리는 인간적인 사랑에서부터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로 올라갈 수 있는지 배우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면, 하느님을 사랑할 준비가 가장 잘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는, 하느님께서 이처럼 해 주신 데 대하여 마땅히 하느님께 감사하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위험인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기주의는 인간적인 사랑뿐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사랑 받는 편 - 하느님이시거나 사람이거나 사랑 받는 편 -에서 모든 것을 보지 않는 한, 사랑은 자랄 수 없습니다.



Ⅳ. 주님의 사랑의 가장 좋은 증거인 성체성사

인간적인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은 둘 다 약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인주의와 이기심에 떨어질 위험 중에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끊임없는 보충과 발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하느님을 무심히 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모두 인격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서로 인격자로 대해야 합니다.



사랑의 가장 좋은 증거는 나의 사랑 받는 이가 남한테서도 사랑 받도록 원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전교 활동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거하는 근본적인 것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약하고 우리도 연약하니 만큼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큰 은혜 - 곧 주님의 사랑의 결정적 증거인 성체성사 -로써 우리를 도와주시러 오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정을 다하고 지력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을 순종할 원의와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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