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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1:04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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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28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28주일

       10. 김창식 신부(나)/17

        11. 김명은 신부(나)/18                    12. 조광호 신부(나)/20

        13. 함세웅 신부(나)/23                    14. 강길웅 신부(나)/25

        15. 김영남 신부(나)/27                    16. 방윤석 신부(나)/29

        17. 박기준 신부(나)/없음                  18. 신요안 요한 신부(나)/31

        19. 신은근 신부(나)/32                    20. 작자미상(나)-낙타가 바늘귀로../33

        21. 교구주보 (나)/35                     22. 전옥주 작가(나)-즐거운 나의 집/36

        23. 작자미상(나)/37



10           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30 (나) 낙타가 바늘귀로, 부자청년

                                                      김창석 신부



예수님이 태어난 고장에는 두 개의 큰 호수가 있는데, 하도 커서 둘 다 바다라고 불린다. 북쪽에 있는 것이 갈릴레아호이고, 남쪽에 있는 것이 사해이다. 이 두 큰 호수는 요르단강으로 연결되어 있다.

북쪽의 갈릴레아호는 여러 갈래의 작은 강들로부터 물을 받아들여서 큰 요르단강으로 흘려 보낸다. 물이 들어왔다 나가면서 계속 흐르니까 많은 물고기와 해초가 서식하고 있다.

반면에 남쪽의 사해는 해변보다 약 4백미터나 낮아서, 요르단강뿐 아니라 다른 강들로부터 받아들이기만 하고 내보내는 데가 없기 때문에 물이 죽어 있다.



그래서 사해에는 물고기나 해초 등 생물들이 서식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죽은 바다인 것이다. 물이 졸아들어 그런지 염분이 유난히 많아서 수영을 전혀 못하는 사람도 가라앉지 않는다. 이러한 사해를 욕심쟁이의 본보기라고 부른다. 사해는 받기만 하고 주는 것이 없으니까 그 안에 아무 것도 살 수 없듯이, 욕심쟁이도 받는 것만 좋아하고 남에게 줄 줄 모르니까 그 속에서 아무 것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인간의 육체도 먹기만 하고 배설을 안하거나 운동을 안하면 에너지가 축적되어 뚱뚱해지고 각종 병이 생겨서 살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남에게 준 것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가져갈 수 있지만, 주지 않은 것은 가져갈 수 없다고 했다. 남에게 주어야 천국에도 갈 수 있다는 말인데, 가만히 살펴보면 부자일수록 주는데 인색한 것 같다.



교회에 헌금하는 이들의 말을 들으면 수입이 적을 때는 십일조 내기가 아깝지 않은데 수입이 많아질수록 아까워진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오 19,24)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복음 성서에도 없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복음사가들이 기록하는 것을 잊었다고 한다.



루가복음 14장 33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다 한다”고 강조했다. 주지 않으면, 즉 나누지 않으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인 것이다.

11         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30 (나) 낙타가 바늘귀로, 부자청년

                                                                   김명은 신부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인생을 뜻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 살 나위도 없다. 그런데 성서는 인생을 헛사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무책임한 삶이다. 부모와 형제에게 슬픔과 고통을 주고, 이웃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주며, 하느님이 주신 고귀한 소명을 전부 헛되게 하고 마는 경우를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겉으로는 책임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은 삶을 말한다.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회피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는 않으며, 힘든 일은 하지도 않고, 하더라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한다.(마태 23,4-5)



오늘 성서의 말씀은 부와 재산과 명예가 우상시되는 오늘의 시대 속에서 미지근한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하느님 말씀에 따르는 삶의 결단을 요구한다.

오늘 복음에서 한 부자 청년은 어린이들을 축복하시고 길을 떠나시는 예수를 부리나케 쫓아가 진지한 물을 던진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흔히들 모세 율법의 십계명을 자기 생활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었지만, 이 젊은이는 율법만으로는 뭔가 부족함을 느껴왔던 것 같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지 십계명을, 그 중에서 실질적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는 이웃에 대한 계명만을 회상시킬 뿐이다. 예수님께서 굳이 설명하시지는 않지만,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로서 드러낼 것을 은연중에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자 이 젊은이는 예수께서 지적하시는 잘 지켜왔노라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그러면서도 만족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종교적 열정을 대견해 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길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젊은이에게 구원의 완전한 길을 가르치신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리고 나를 따르시오” 가볍게 던진 예수님의 말 한마디! 당신께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우리네 사람들에게는 마음속 깊은 곳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희생적 요구는 젊은이에게나 오늘의 우리에게나 하나의 수수께끼와도 같다. “나는 이제까지 율법을 어김없이 지켜왔고, 재산도 열심히 일해서 정당하게 모았으며 간간이 자선까지 베풀어 왔는데.... 꼭 재산을 포기하는 것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가?”



사람들은 흔히들 재산이나 부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듯 말들 하지만, 우리는 그것 때문에 헐뜯고 싸우고 심지어 소중한 목숨까지도 앗아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사실 인간의 끊이지 않는 재물에 대한 욕망은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인간을 가장 철저하게 그리고 가장 인간적인 존재로 머물게 하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재산의 노예일 수가 없다. 인간은 자유 속에서 인간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이 젊은이 역시도 재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삶의 안식을 얻고자 했던 젊은이의 슬픔은 예수님의 요구자체가 아니라 그 큰 희생을 감수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명이신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참 생명을 얻고자 하는 젊은이의 청에 진정한 자유를 주는 합당한 요구였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보다 그리고 모든 자연적인 청빈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방금 전 알렐루야로 노래했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재음미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할 때 그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필요한 일꾼을 부르셨다. 오늘도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고 본받고 재현해야할 각각의 소명을 받고 있다.



오늘 제1독서는 지혜로써 각자가 부여받은 소명에 눈을 뜨고 충실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탈레스에 관한 일화이다. 밀레토스 지방의 어느 젊은이가 어부에게 돈을 주면서 고기잡이를 부탁했다. 그런데 어부가 던진 그물 속에는 물고기 말고도 황금으로 된 물병이 하나 들어 있었다. 어부와 젊은이는 서로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싸우다가 결국 법정에 가서 고소를 했는데 법정에서도 판결이 나질 않아 마침내 델포이 신전에서 신의 뜻을 묻기로 했다.



신의 대답은 “물병은 가장 지혜 있는 자의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금물병은 철학자인 탈레스에게 보내어졌다. 그러나 탈레스는 자신이 가장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다른 현자에게 보냈다. 결국 피타코스, 비아스, 솔몬 등 ‘그리스 칠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보내어졌지만 돌고 돌아 탈레스에게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자 탈레스는 그



황금물병을 델포이 신전에 헌납해 버렸다고 한다.

오늘 독서가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해 주는 끈이다. 지식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교리시간이나 강론을 통해 듣고 배우는 것은 지식이 된다. 지혜는 그것을 행동으로 드러내어 빛을 발하는 것이다. 결국 지혜가 없는 지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지혜이어야만 한다.



솔로몬은 바로 이런 지혜를 청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겸손에 탄복하여 부와 명예까지도 함께 주셨다. 그리스의 현자들이 서로의 지식을 내세웠다면 황금물병은 아마 일곱조각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쪼개어졌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지식이 아닌 지혜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다. 하느님의 은총은 지혜 있는 자를 세상의 빛으로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의 신앙은 지혜를 간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지식으로 간직하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오늘 제2독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의 결단을 촉구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할 때는 한없이 연약하고 힘없이 보이기만 한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의 삶에 생명을 주시는 살아 있는 힘이다.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당신 말씀을 통해 당신 백성을 이끌어 왔으며, 그 말씀은 우리에게 생생한 구원의 손길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의 운명을 과감히 던져야 한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분명 심판날에 예리한 쌍칼날로서 우리의 삶을 진실과 거짓으로 뚜렷하게 구분할 것이다.


신앙은 삶의 결단이며 또한 투쟁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참된 소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소유에서 떠날 수 없었던 젊은이가 곧 나 자신이 아닌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제자들의 구원의 의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특별한 보상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희생을 격려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부르심이다. 그러기에 신앙은 부르심에 끊임없이 응답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시대를 달리해도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새롭게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신다.









12           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30 (나) 낙타가 바늘귀로, 부자청년

                                                      조광호 신부



1990년대 서울의 강남은 한마디로 또 다른 하나의 「대한민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궁궐같이 지어진 거대한 식당들이 한 집 건너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흥청거리는 거리마다 세계의 온갖 유명품들이 찬란한 불빛 아래 행인의 눈길을 유혹하고 있다. 그곳에 위치한 유명 백화점들은 세계의 그 어느 유명 백화점과도 견줄 만큼 화려하고 호화로운 물건들로 가득 차 있고, 잘 차려 입은 여인들로 장내는 온통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그 누가 이러한 백화점만을 보고 오늘의 한국을 얘기한다면 우리나라는 그 어느 선진국보다도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나라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발자국만 비켜서면 깎아지른 듯한 산비탈에 게딱지처럼 달라붙은 판자집들의 응어리진 삶의 숨막히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빈민촌의 시장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아낙네들의 삶의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른 눈빛과는 달리 호화 백화점의 여인들의 눈빛은 인간의 정상적인 체온에 잘 순응된 품위있고 정숙하고 세련된 여유를 띄고 있음은 그 누가 보아도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자렛 예수가 선포하신 「행복선언」은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복되어라, 지금 굶주린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루가 6,20 이하 참조)라고 선포되고 있으니 그 누가 이 말씀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부자들이 오히려 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이점을 많이 지니고 있지 아니한가. 그들은 자선금을 듬뿍 낼 수도 있고, 온갖 피정과 기도모임, 세미나에 참석은 물론 원한다면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도 가난한 이들보다 더 쉽게, 더 많이 할 수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생계에 쪼들리는 가난한 이들은 주일미사는 물론 교회의 모임이나 봉사활동은 엄두도 낼 수 없을 뿐 아니라, 때때로는 어쩔 수 없이 교회의 가르침을 거슬러 살아야 할 때도 많을 것이다.

그들은 남보다 더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교회 안에서 마저 소외되어 대접받지 못하고 밀려난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이 복되다 하고 부자들은 구원받기가 지극히 어렵다고 하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마르 10,23-27 참조)



어떤 이는 예수가 말씀하신 부(富)를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 더 역점을 두어 말하지만 이러한 설교는 때때로 부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느님과 돈’ 사이(마태 6,24) 즉 ‘압바와 맘몬’ 사이에는 결코 화합 할 수 없는 대립을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고 부자 청년이 찾아 왔을 때 예수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다. 즉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태 19,21 이하 참조)

외적으로 아무런 흠잡을 데 없이 성실하고 건실한 부자청년(마르 10,17 이하 참조)에게 우선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선하신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을 교정시키셨다. 예수는 우월감과 자기정당성의 확신에 차 있는 그 젊은이가 자기환상을 깨고 마음속에 초월적이고 지고한 선을 향해 마음의 눈을 뜰 것을 종용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29절)는 예수의 말씀은 이 부자청년에게는 틀림없이 가혹한 요구의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과 재산에 얽매인, 끝없는 인간의 소유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예수와 같은 운명을 나눌 것을 제자가 되는 첫째 조건으로 예수는 요구하고 있다. ‘맘몬’이란 확실히 ‘돈’ 이상의 존재임엔 틀림이 없다. 맘몬이란 인간의 내면에 무섭게 살아 있는 교활한 세력이요, 그것과 결탁한다면 세상의 온갖 행복, 즉 세상에서의 성공과 안전을 보장받으리라는 ‘악의 신비’에 자리잡은 어둠의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유혹기사에서 나타났던 돈과 명예, 그리고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일체의 소유욕, 그것은 지식과 지위, 권력, 재능 그 모든 물질적 정신적 소유의 세계를 일컫는 것일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허상을 신봉케 하고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게 하는 ‘인간의 우상’을 맘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하늘나라를 향한 ‘새로운 인간상’으로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약함과 실패, 끝없는 자기비하의 길로 ‘야훼의 종’의 길을 선택하는 것임을 예수는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부(富)는 하느님의 축복이지만 많은 이웃이 고통을 당하고, 굶주릴 때 그들을 외면하고 끝없는 욕심으로 축적할 때 ‘피’가 된다. “만일 누가 가난하다면 다른 누군가가 더 차지했거나, 물려받았기 때문이고, 더 가진 이 몫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전까지는 도둑질한 물건으로 남는다”고 교회의 교부들은 한결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많이 가졌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만큼 하느님과 이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 그 책임이란 진정한 포기와 나눔으로 ‘스스로 선택하는 가난’일 수밖에 없다.



세상의 가난한 이들의 그 ‘강요된 가난’이 인류의 죄라고 한다면 이러한 복음적인 ‘선택한 가난’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교회의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걸었던 길이 바로 이러한 가난이었음은 두 말 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은 가난으로써만이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한 우리 시대의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의 말은 그 핵심을 극명하게 드러낸 말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행복과 ‘백배의 축복’(30절)이 이러한 가난에 있음은 그 포기와 나눔의 정도에 따라 인간이 맛 볼 수 있는 신적 기쁨과 평화의 정도가 다르다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누가 이 길을 그리 쉽게 자기 힘으로 갈 수 있을까. 오직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절대 사랑에 신뢰하는 길. 하느님의 뜻만을 찾았던 그 ‘나자렛 예수의 길’만이 우리에게 그 은총의 힘을 내려 주시리라 믿는다.

근심하는 빛으로 예수를 등지고 떠났던 부자청년, 가진 것이 많아서 버리고 떠나기가 더 어려웠던 그 청년의 뒷모습에서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오늘 이 시대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물질적 재화와 정신적 소유가 ‘하느님 나라를 위한 축복과 성사’가 되는 날을 기다려 깊어 가는 가을 마른나무 가지에 앉은 새처럼 나는 오늘 이 저녁 언젠가 도래할 새 하늘, 새 땅을 그려본다.





13               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22 (나) 무엇을 해 야 할까

                                                           함세웅 신부



우리 모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평생 동안 억만원을 꼭 모으겠다고 목표를 세워서, 구천 구백 구십 구만 구천 구백 구원을 모았다고 합시다. 이제 1원만 더 모으면 평생 필업인 억만 원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 돈을 어떻게 버나 궁리하며 길거리를 오가던 중에, 거지의 동냥통에 있는 1원짜리 서너 개를 보고서는 '아 ! 저 동전 중에 하나가 내 것이 된다면 나는 억만원을 채울 수 있을 텐데 !'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물론 이 부자는 그 많은 돈을 부정한 행동으로 번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강도 노릇을 해서 번 것도 아닙니다. 그도 노력을 해서 번 것입니다. 그는 나머지 1원을 벌기 위해서 동분서주할 것이며, 억만원이 채워지면 또 다른 억만원을 목표로 세워 또 노력할 것입니다. 그는 기도도 착실히 잘하고, 주일에는 성당에 와서 미사 참례도 하고, 부모와 자녀, 친지들에게도 마음 상하지 않고 잘 지내는 그야말로 한마디로 무난한 신앙인, 무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을 잘 지킨, 착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르코 10, 17-22)



그는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진 것을 쏠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착한 부자 청년은 이 대답에 침울한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우리 모두 무난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를 더 요구하십니다. 우리 모두 또한 착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뭐, 이 정도면 됐지 ! 나는 주일에 헌금을 내 나름대로 바치고, 교무금도 내고 또 악한 일도 하지 않고 사는데 ! "하며 자족감에 빠져 있는 수가 있습니다. 이 자족감에 빠져 있는 우리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침울해질 수 있는 우리입니다.

  

부자는 천당에 가기가 무척 어렵다고 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하신 예수님 말씀에 그만 기가 질려서, 무슨 뜻이냐고 질문합니다.

  

부자다 또는 가난하다 하는 것은 물질이나 돈이 많다, 또는 적다하는 외적인 물량의 척도로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복8단, 즉 여덟 가지 행복된 사람의 조건 중, 첫번째 나오는 말씀은 그냥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하지 않았고,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매우 가난하지만, 욕심이 많아서 남의 것을 탐만 내고, 자기의 현재 위치를 불평이나 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난한 가람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온갖 사리사욕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부자는 사랑이 없는, 자선심이 없는, 이기적인 부자를 두고 말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난한 이와 부자에는 네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① 마음으로 가난하고 실제로 가난한 이들-(자기 위치에 기쁨을 느끼는 착한 사람, 착한 신앙인)

  ② 실제로는 부자이지만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남을 돕는 착한 자선 사업가)

  ③ 실제로 가난하지만 마음에는 사리사욕이 있는 사람들-(자신의 현재 위치에 불평불만만 하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

  ④ 실제로 부자이고 마음의 부자(이기주의자)-(구두쇠형)

  

과연 우리는 이 네 가지 부류에서 어느 형에 속하는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에게 굶어 죽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환경에서, 풍부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가르침입니다. 다마 이러한 재물, 또는 환경, 지위에 너무 집착되어, 이런 것에는 온 정신을 쏟으면서 우리의 신앙 생활, 하느님께 관한 내적 생활, 이웃을 위한 사랑의 행위를 등한히 하는 마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모인 우리 교우 모두는 다 착한 신앙인들이며, 또 열심인 분들입니다.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도 모두 지켜왔습니다.

  “너, 꼭 하나가 부족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세 가지 반응이 난타납니다. “어휴, 그것은 못하겠군!"하며 떠나가는 무리와 “그것은 약간 곤란한데"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부자 청년의 형과,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하는 제자들의 모습.


그리스도교의 사랑, 애덕에는 '이 정도면 됐다'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더 벌어서 더 큰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그만큼, 하느님을 위해서 남을 더 도와줘야겠다는 애덕이 동반될 때, 비로소 우리는 신자의 보람과 애덕을 맛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도와주는 기쁨, 애덕의 기쁨, 이것이 바로 천국의 기쁨이며, 성인 성녀의 기쁨입니다. 











14                   연중 제28주일  마르10, 17-22 (나)

우리의 봉헌은 떳떳한가. 그러면 무엇이 내 것입니까.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지혜 7,7~11 (나는 지혜와 비교하면 재산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제2독서 히브 4,12~13 (하느님의 말씀은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복 음 마르 10,17~30 (가진 것을 다 팔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하느님과 재물!



이것은 신앙 안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도전해 오는 문제요 갈등입니다. 대단히 송구스럽게도 재물이 하느님보다 더 매력 있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믿는 이들도 하느님보다는 재물 앞에 머리를 숙이고 비굴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지혜'야말로 어떤 재물보다도 뛰어나게 위대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 보물은 지혜며 그 지혜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재물이 있다고 저자는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지혜가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 자신입니다.



세상에 하느님보다 더 소중한 보배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얻으면 세상을 다 얻은 것이며 하느님을 잃으면 세상을 다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믿는 이들마저 땅의 재물에만 집착되어 있습니다. 열심한 사람들 중에도 상당수가 재물에 갇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젊은이는 아주 훌륭한 신앙인으로 보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거의 완벽하게 지켜 왔습니다. 바른 양심을 가지고 아주 성실하게 살았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놀랍게도 그것은 위선이었습니다. 실제는 율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했을 때 그는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오라고 해도 안 갑니다.



바로 이런 것이 신앙의 모순입니다. 자신은 십계명을 잘 지키고 봉사를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재물에 묶여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비굴한 처신을 합니다. 사람이 봉헌이 떳떳지 못하고 나눔이 온전치 못하면 위선자가 됩니다.



돈이란 이상한 마력이 있어서 고상한 사람, 치사한 사람이 돈 앞에서 갈라지게 됩니다. 하다 못해 사람들이 화투 치는 모습을 봐도 돈 몇 푼에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도 돈 앞에 자기 신앙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아보기 위해서는 교무금을 얼마 내고 있는지 장부를 들춰보면 대충은 압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언젠가 성탄 면접을 할 때 제가 교무금에 대해서 상당히 심도있게 강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십일조는 바라지 않지만 십일조의 반은 내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 봤더니 그때 신자들의 양심을 한 순간에 볼 수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많은 신자들이 자신을 속였습니다. 있는 사람들이 더 감췄습니다.



십일조의 은혜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 은혜는 누가 뭐래도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마태23,23). 그러나 십일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것은 자칫 위선도 되고 바리사이파 신앙도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십일조의 반도 하느님 앞에 봉헌하지 않는 것 도 문제입니다. 그것도 역시 위선일 수 있으며 바리사이파 신앙 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성의껏 낸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성의'가 대단히 애매해서 어떤 사람들에겐 백분의 일, 이백분의 일도 안됩니다. 믿음이 자갈이면 자갈이 나오고 믿음이 모래면 모래가 나옵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래서 믿음을 보배로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땅에 쌓은 재물은 녹이 슬거나 좀눠주고 베풀어 준 것이요 또한 하느님께 봉헌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니라고 송구스러워 하겠지만 그것만이 진정 '내 것'이 되어서 나를 영원히 채워 줄 것입니다. 땅에 쌓은 재물은 결코 내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이 쌓고 높이 쌓았다 해도 그것은 결국 하느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봉헌을 더 떳떳하게 하도록 합시다. 봉헌은 진정 축복입니다. 은혜입니다. 하늘에 재물을 더 쌓도록 합시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마르10,23).



먹어서 아무리 많이 쌓아도 우리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땅에 쌓은 재물은 결국 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쌓은 것만이 내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그러나 하늘엔 관심이 없고 땅에만 관심이 큽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상에 '내 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이름으로 부동산이 수만 평 등기되어 있고 내 비밀번호로 수백억이 예치되어 있다 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잠시 맡겨진 것입니다. 심지어는 내가 얻은 내 마누라도 내 것이 아니요 내가 낳은 자식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잠시 맡겨진 것이요 때가 되면 주님께 다 돌려 드려야 합니다.







15              연중 제 28주일   마르 10,17-30(나)

‘예수 추종’을 포기한 어느 부자.

하느님의 뜻을 ‘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 그리고 ‘재물의 나눔’

                                                                        김영남 신부





오늘 복음말씀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로 끝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우선 몇 개의 계명을 열거하신 다음 “이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이시는데, 이 말씀에는 질문자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그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자 질문자는 즉시 “그 모든 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라고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한다. 그런데 이 대답을 듣고 예수님은 그 질문자를 ‘대견해 하시면서’도 그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루가복음서에 나오는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를 보면 이해가 잘 된다. 그 비유에 나오는 부자 사람은 살인강도질이나 도둑질과 같은 큰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나, 문간에 누워 병으로 괴로워하며 굶주리고 있던 라자로와 같은 사람들을 모르는 체했기 때문에 사후(死後)에 그런 벌을 받아야 했다. 비슷하게 오늘 복음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큰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거나, 율법에서 하라고 명하는 것을 어기지 않았다는 소극적인 삶만으로는 부족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을 포함하는 실행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사실 율법서 자체는 근본적으로 이런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예컨대 신명기). 예수님은 율법이 가지고 있는 이런 정신을 잊어버리고, 율법서의 문자에만 매달리며 그 문자대로 지켰느니 안 지켰느니 하며 따지고 살던 사람들에게 율법의 근본정신을 일깨워 주신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 질문자가 위의 예수님의 요청을 듣고 그만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적으면서 그 이유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인다.

질문자가 떠나간 뒤에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에는 재물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나온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가장 큰 짐승인 낙타와 가장 작은 구멍인 바늘귀를 연결시키신다. 문자 그대로 이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부자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제자들도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며 서로 수군거릴 정도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나오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라는 격언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부자를 재물에 대한 애착에서 해방시켜 그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말씀은 참다운 신앙실천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려낼 수 있는 기준 하나를 오해할 여지없이 분명히 가르쳐 준다. 그 기준이란 바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재물을 나누고 사느냐 아니냐’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질문하였던 부자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데’ 있어서는 탓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 뜻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에게는 흠잡을 것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듯한 이 질문자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결국 ‘재물에 대한 애착’이라는 ‘걸림돌’에서 넘어지고, 예수 추종을 포기하고 말았다.

오늘의 ‘나’는, ‘우리’는 어떠한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진지하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지만,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소명의 길’에서 비틀거리고 있지는 않은가? 사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도 ‘진지하게’ ‘영생의 길’을 추구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 “달려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질문을 하는 그의 태도와 그의 대답을 듣고 ‘대견해 하시는’ 예수님의 긍정적 반응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진지한 태도를 끝까지 견지하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재물은 분명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큰 도구가 될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 재물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남아, 결국에는 하느님도 이웃도 다 잊어버릴 정도로 교만과 허영의 도구가 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도구로 사용될 때, 본디 선물로 주어졌던 그 재물은 구원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되고 만다. 성서는 많은 재물의 소유가 탐욕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자주 경고하고 있다. 성서에 의하면 탐욕은 온갖 죄악의 온상이다. 오늘 복음 말씀은 신앙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뿐 아니라, 단체적 차원(교회의 단체, 기관)에서도 반드시 명심해야 할 말씀이다. 예수님의 정신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관심사에서 ‘재물’이 결코 윗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한다. 재물이 윗자리를 차지하면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서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6              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30 (나) 그 놈의 돈이 뭐길래

                                                      방윤석 신부



「만약에 잭팟(Jackpot)이 터져서 6백만불을 거머쥐게 된다면?」 도박의 도시 라스베가스에 들어갈 때면 으례히 서로 약속을 한다.

첫째로 동전 한푼이라도 꿔주거나 받지 말 것. 왜냐하면 내가 꿔준 돈으로 횡재했으니 나와 반씩 나눠야 한다고 대들지 모르니까(실제로 그런 재판이 많다고 한다).

둘째는 내가 땄어도 너희들에겐 저녁 한끼 근사하게 낼테니까, 그 이후론 서로 안면몰수 할 것.

세째로 돈 땄을 때를 대비하여 미리 기자 인터뷰할 것을 생각해 둔다.

네째로 그 돈을 챙겨가지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잠적한다. 돈 꿔달라는 사람이 많을 터이므로. 그리고 안갚을 것이 뻔하므로‥‥이젠 약속이 다되었다.



도시로 들어오니 후드드득! 후드드득! 돈 쏟아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하다. 부푼 가슴을 안고 덤벼본다. 그리고는? 웬걸, 몽땅 털리고 만다. 아까의 약속은 즐거운 헛소리일 뿐이다. 그놈의 돈이 뭐길래 그렇게도 못가져 안달일까? 하긴 나에게 누가 1억쯤 거저 준다면(그럴리야 없겠지만) 정신이 산란할 것이다. 분심이 들 것이다. 이 돈을 어찌 해야하나? 어디다 써야하나?

  

이 하늘 높은 시월에, 웬 느닷없는 돈타령이냐고? 그러나 요즘 세상 돈 때문에 신세망치는 사람이 많으니 조심하라는 뜻에서, 아니 정당하게 벌고, 제대로 돈을 쓸 줄 알라는 뜻에서 말하는 것이다. 돈 철학을 엉성하게나마 늘어놓으려 한다.



옛날 우리나라 동전은, 가운데 구멍은 사각형이고 겉은 동그랗다. 그 이유는 이전에는 하늘은 둥글고 「천원(天圓)」, 땅은 네모나다「지방(地方)」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동양의 사고에 근거해서 동전 겉은 하늘을 뜻해서 둥글고, 안은 땅을 생각해서 네모구멍을 뚫은 것이다. 이것은 곧 「천원지방(天圓地方」으로 온 천지 온 누리에 돈이 통용되라는 뜻이다.



그리고「돈」이란 말도, 돌고 돈다 해서 생긴 것이니 돈은 자꾸 돌려야 한다. 돈을 감추어두면 안 된다는 뜻이다. 선거자금이니 ,비자금이니, 안정기금이니, 떡값이니, 음성적 수입이니, 뭐니하고 돈을 감추면 썩게 된다는 것이다. 돈이 썩으면 윤리도 양심도 썩게 된다. 옛날 돈은 가운데 구멍을 뚫었으므로 그 돈을 눈앞에 바짝 갖다가 대어도 구멍을 통해 세상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 동전은 구멍이 없다. 그래서 막힌 동전을 눈앞에 바짝 갖다 대면 캄캄하다.



이렇듯 요즘 사람들은 돈을 눈앞에 두면 도덕이고, 윤리고, 철학이고 할것 없이 인격 전체가 캄캄해진다. 사람이 검어진다. 황금흑사심(黃金黑士心)이다. 그러므로 막힌 동전이라도 옛날 것처럼 뚫고 보는 지혜가 있어야 돈을 이기지, 돈에게 잡혀서는 검은 인생을 살게 된다. 감옥에 엮여 들어간 사람들의 인생이랄까.



옛날 동전은 그 이름이 상평통보(常平通寶)였다. 1633년 인조 11년 김육(金堉)이 건의하여 시작되었다. 상평(常平)이란 말을 풀이해 보자. 돈은 항상 잘 유통되어야 한다. 있을 때 저축하고 없을 때 활용해야 한다. 곡식도 마찬가지로 수확기에 많이 비축했다가 빈궁기에 풀어야 한다. 이래야 경제가 상시평준(常時平準)이 된다. 이 말을 줄여 상평(常平)이라 했다.

오늘 가난해도 내일 부자가 될 수 있고, 오늘 부자였다가 내일 가난해질 수도 있다. 정신차리고 대비해야 한다. 상시평준이 상평이고, 이런 유통이 되는 보물이 통보(通寶)라면 자연스럽게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다.



나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바로 상평일 것이다. 특히 자선사업에 쓰는 돈은 어느 면에서 상평통보이다. 그러므로 내게 재산이 있다고 움켜쥐기만 하고 내놓지 아니하고 주지아니하는 사람은 유무상통(有無相通), 상하평준(上下平準)의 자세가 없는 것이다. 아무튼 돈을 잘 써보자. 잘 쓰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모든 정치가들이 권력을 잡을 당시에는 국민들에게 민주복지국가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사회복지를 위해 괄목할만하게 해놓은 게 무엇인가? 별로 없다. 노인문제를 해결했나, 장애인이 자긍심 갖고 살도록 해결했나? 가난한 자에게 혜택을 제대로 주었나, 수입이 많았으면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었나, 도로 표지판이라도 제대로 해서 사고를 줄이려 했나, 도대체 상평(常平)위해 노력한 흔적이 안 보인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부(富)와 재물(財物)에 대해 훈계하신다. 어느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이 청년이 「그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면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나서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 청년은 부자였기 때문에 근심 중에 떠나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 이는 부 자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가 구원의 방해 요인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씀이다.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지혜이신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내걸고 결단을 내릴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18           연중 제28주일   마르10,17-30 (나)      한 줌의 재라도

                                             신요안․요한 신부



어떤 신부님이 한 모임에서 강의를 하던 중 질문을 던졌답니다.

ꡒ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낙타도 바늘귀를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ꡓ

모두들 대답을 못하고 있는 가운데 어떤 형제가 손을 들더니 대답을 하더랍니다. ꡒ신부님, 낙타를 죽여서 한 줌의 재로 만들어 그 재를 바늘귀로 통과시키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말을 나눈 부자 청년은 일생동안 법을 잘 지켜왔노라고 말합니다. 그는 ꡒ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ꡓ라고 내놓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대견해 하셨고 그의 과거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를 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더 큰 희생과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포기하고,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껏 아무 문제없이 착하게 법을 잘 지키고 살아온 청년에게 그런 과도한 요구를 해야만 하는가? 만일 그렇게 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ꡒ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ꡓ 제자들마저도 수군거립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렇게나마 법과 계명을 지키고 그래도 큰 죄는 안 짓고 살고 있는데 ꡐ이 정도면 된 것 아니냐?ꡑ 하는 마음이 앞서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나와 관련된 것만 잘 지키고 내 가족, 내 공동체만 잘 운영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그런 삶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생명을 버리려니 두렵고, 애착을 버리려니 두렵고 두려워 슬프게 떠난 부자청년의 모습이 왠지 마음 아프게 그려집니다. 그 분을 따를 때 주어지는 백 배의 애정과 백 배의 고통과 백 배의 사랑이 힘들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백 배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백 배의 고통이 따름을 알기에 그 고통이 싫어 부자청년처럼 슬프게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분을 따를 때 무한한 열정과 희망과 버림을 가질 수 있기에, 한 줌의 재가 되어서라도 바늘귀를 통과하는 낙타가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19          연중 제 28주일 마르 10, 17-30 또는 10, 17-27 (나) 부자 청년 이야기

                                     신 은근 신부



복음 말씀은 재물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다. 살아가면서 하루라도 생각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재물이다. 어떤 이에겐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하고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런 재물을 많이 가진 청년을 오늘 주님은 만나신다. 그리곤 그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다. 그러나 청년은 망설인다.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미적거리다가 제자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예수님은 그에게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뒤에 오라 하셨던 것이다. 그 말씀이 그를 낭패하게 만든다. 이유는 무엇일까. 재물이 아까워서 그랬을까. 나누어주는 것이 억울해서 그랬을까. 그건 아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이 청년을 붙잡은 것이 아니다. 청년을 붙잡은 것은 재물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재물의 위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재물의 힘이 예수님의 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재산을 나누어 준 뒤에 오라고 하셨다. 재물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꿀 수가 없었다. 예수님과 함께 재물의 위력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길을 가고 만다.



청년이 떠나자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비유로 말씀하신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하신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다. 그만큼 어렵다는 표현이다. 어떤 사람이 부자이겠는가. 우리는 재물이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부자는 그런 사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가 말하는 부자는 재물의 힘이 하느님의 힘보다 강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재물을 많이 소유한 사람보다 재물의 위력에 굴복하여 재물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들이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부자들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함을 느낀다. 누구나 궁핍함을 경험한다. 만족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재물이 많건 적건 이 표현은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객관적 판단으로 저 사람은 부자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나는 부자가 아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다, 나는 늘 부족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인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보기에 저 사람은 가난하다, 별 볼일 없다, 이렇게 판단하더라도 그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분명 부자인 것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구원에 도달한다. 구원은 만족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나에게 맡기며 내 힘을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우리는 재물이 최고라고 말해선 안된다. 세상은 그렇게 말하더라도 우리는 그 위에 주님의 능력이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복음의 끝에 베드로 사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왔음을 고백하자 예수님은 백배의 상을 약속하신다. 그 약속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든 내세에서 이루어지든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말씀에 희망을 걸면서 살아갈 뿐이다.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늘 세상으로 쏠리게 한다. 그리하여 물질 뒤에 계시는 하느님을 쉽게 망각하게 한다. 재물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믿는 우리들은 깨끗한 부자들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구원에 도달한다. 구원은 만족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나에게 맡기며 내 힘을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우리는 재물이 최고라고 말해선 안 된다. 세상은 그렇게 말하더라도 우리는 그 위에 주님의 능력이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복음의 끝에 베드로 사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왔음을 고백하자 예수님은 백배의 상을 약속하신다.

그 약속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든 내세에서 이루어지든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말씀에 희망을 걸면서 살아갈 뿐이다.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늘 세상으로 쏠리게 한다. 그리하여 물질 뒤에 계시는 하느님을 쉽게 망각하게 한다. 재물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믿는 우리들은 깨끗한 부자들이다.(끝)











20          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30 (나) 낙타가 바늘귀로, 부자청년



우리 모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평생 동안 억만 원을 꼭 모으겠다고 목표를 세워서, 구천 구백 구십 구만 구천 구백 구십 구원을 모았다고 합시다. 이제 1원만 모으면 평생 필업인 억만 원을 채우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 돈을 어떻게 버나 궁리하며 길거리를 오가던 중에 거지의 동냥통에 있는 1원짜리 서너 개를 보고서는 ‘아! 저 동전 중에 하나가 내 것이 된다면 나는 억만 원을 채울 수 있을 텐데!’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물론 이 부자는 그 많은 돈을 부정한 행동으로 번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강도 노릇을 해서 번 것도 아닙니다. 그도 노력을 해서 번 것입니다. 그는 나머지 1원을 벌기 위해서 동분서주할 것이며, 억만 원이 채워지면 또 다른 억만 원을 목표로 세워 또 노력할 것입니다. 그는 기도도 착실히 잘하고, 주일에는 성당에 와서 미사 참례도 하고, 부모와 자녀, 친지들에게도 마음 상하지 않고 잘 지내는 그야말로 한마디로 무난한 신앙인, 무난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을 잘 지킨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착한 부자 청년은 이 대답에 침울한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우리 모두 무난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를 더 요구하십니다. 우리 모두 또한 착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뭐, 이 정도면 됐지! 나는 주일에 헌금을 내 나름대로 바치고, 교무금도 내고 또 악한 일도 하지 않고 사는데!”하며 자족감에 빠져 있는 수가 있습니다. 이 자족감에 빠져있는 우리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침울해 질 수 있는 우리입니다.



부자는 천당에 가기가 무척 어렵다고 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그만 기가 질려서 무슨 뜻이냐고 질문합니다.



부자다 또는 가난하다 하는 것은 물질이나 돈이 많다, 또는 적다하는 외적인 물량의 척도로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복팔단, 즉 여덟 가지 행복된 사람의 조건 중 첫 번째 나오는 말씀은 그냥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하지 않았고,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매우 가난하지만 욕심이 많아서 남의 것을 탐만 내고, 자기의 현재 위치를 불평이나 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온갖 사리사욕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부자는 사랑이 없는, 자선심이 없는, 이기적인 부자를 두고 말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난한 이와 부자에는 네 가지 부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마음으로 가난하고 실제로 가난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위치에 기쁨을 느끼는 착한 사람, 착한 신앙인을 말합니다.

둘째, 실제로는 부자이지만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남을 돕는 착한 자선 사업가 등을 일컫습니다.

셋째, 실제로 가난하지만 마음에는 사리사욕이 있는 사람들 즉, 자신의 현재 위치에 불평불만만 하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넷째 부류의 사람들은 실제로 부자이고 마음의 부자 즉 구두쇠형의 이기주의자를 가리킵니다. 과연 우리는 이 네 가지 부류에서 어느 형에 속하는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에게 굶어 죽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환경에서 풍부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가르침입니다. 다만 이러한 재물, 또는 환경, 지위에 너무 집착되어, 이런 것에는 온 정신을 쏟으면서 우리의 신앙 생활, 하느님께 관한 내적 생활, 이웃을 위한 사랑의 행위를 등한히 하는 마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모인 우리들 모두는 다 착한 신앙인들이며 또 열심인 분들입니다.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도 모두 지켜왔습니다.

“너, 꼭 하나가 부족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세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휴, 그것은 못하겠군!”하며 떠나가는 무리와 “그것은 약간 곤란한데”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은 부자 청년의 형과 “우리는 모든 것은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하는 제자들의 모습.



그리스도교의 사랑, 애덕에는 ‘이 정도면 됐다’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더 벌어서 더 큰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그만큼 하느님을 위해서 남을 더 도와줘야겠다는 애덕이 동반될 때, 비로소 우리는 신자의 보람과 애덕을 맛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도와주는 기쁨, 애덕의 기쁨, 이것이 바로 천국의 기쁨이며, 성인성녀의 기쁨입니다.











21            연중 제28주일   마르 10, 17-30 (나) 영원한 생명의 길

교구주보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자가 추종을 거부한 이야기(17-22절), 부자는 구원받기 어렵다는 이야기(23-27절), 그리고 추종과 보상에 관한 이야기(28-31절)입니다. 이 세가지 이야기는 따로 전해진 것을 마르코가 편집한 것입니다.



ㄱ. 부자가 추종을 거부하다(17-22절)

  어느날 부자가 예수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십계명 후반부, 곧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의기양양하여 그런 계명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하자, 예수께서는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부자는 근심하면서 물러갔습니다. 이 부자는 재산에 집착한 나머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추종과 재산 둘 중에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불행히도 재산을 붙들고 늘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데 있어서 때로는 양자택일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것은 고스란히 챙기고, 자기 즐길 것은 다 즐기면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이들에게 주는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ㄴ.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23-27절)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재산을 가진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특별히 아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자들을 멀리하지는 않았습니다. 본디 이 단락은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씀인데 마르코가 ‘부자가 추종을 거부한 이야기’(17-22절) 다음에다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23절)와 ‘부자가’(25절)를 덧붙인 것입니다. 따라서 원래의 뜻은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구원받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느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읽는다면 사람들이 지나치게 재물에 관심을 갖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과장법을 사용하여 황금만능주의를 경고하신 말씀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ㄷ. 추종과 보상(28-31절)

  이 단락은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고 진실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종말에 백 배의 보상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다 보면 현세에서는 어려움도 많이 겪겠지만 우리의 역사가 다하는 날 백 배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지니고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22             연중 제28주일   마르 10, 17-30 (나) 즐거운 나의 집

전옥주 가타리나 / 작가



 ‘즐거운 나의 집(홈 스위트 홈)’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어린 시절부터 어른에 이르러서까지도 언제나 즐겨 부르게 되는 노래입니다. 

  비단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민족에게 애창되고 있는 이 ‘홈 스위트 홈’의 노랫말은 미국의 ‘존 하워드 페인’이라는 사람이 지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분은 일생동안 한 번도 가정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노래 가사를 지을 때,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무일푼으로 비참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사랑이 꽃피는 가정을 그리며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애절한 소망을 여기에 담은 것입니다. 그가 절친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정으로 야릇한 얘기지만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정의 기쁨을 노래하게 한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이라는 맛을 모르고 지냈으며 앞으로도 맛보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1년 후, 그는 사는 집도 없이 길가에 쓰러지듯 초라한 일생을 마쳤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모습이건 간에 가정이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과 가족이 얼마나 소중하며, 또 얼마나 많은 행복을 주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회적 가치관의 혼돈 속에 방황하고 있으며, 가정의 소중함을 모르고 쉽게 가정을 파괴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니, 어쩌면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를 눈을 뜨고도 앞을 못 가리는 청맹과니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가정이 주는 행복이란 그 어떤 환경과 빈부의 차이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 아무리 호화스런 집과 별장을 가졌다 해도, 가족간의 사랑과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쓸모 없는 헛간과 무엇이 다를까요. 오히려 갖지 못해 아쉬워하고 갈망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단 협소하고 초라한 집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서로의 믿음과 사랑이 오갈 때 그 가정이 참다운 가정으로 행복을 누리는 집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가정에서 또는 직장, 그리고 객지에서는 더 많이 기쁨과 그리움을 담아 부르는 노래,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진정 세상이 제 아무리 넓고 아름답다 하여도 내 가족과 함께하는 집보다 더 편안하고 그윽한 곳은 없을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사랑의 주님께서 맺어주셨고 지켜주시기에 우리 모두는 이 ‘즐거운 나의 집’ 안에서 이렇듯 평화롭게 사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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