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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1:00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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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27주일

        22. 조순창 신부(다)/34

        23. 김몽은 신부(다)/35                   24. 강길웅 신부(다)/36

        25. 강길웅 신부(다)/38                   26. 함세웅 신부(다)/40

        27. 변희선 신부(다)/41                   28. 김신호 신부(다)/42

        29. 강영구 신부(다)/44                   29. 정민수 신부(다)/47

        30.작자미상(다)-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신앙/50



23                        연중 제27주일   루가 17, 5-10 (다) 

103위 시성의 영광은 한국민의 삶의 귀감, 진실되게 살아갑시다.

                                                           조순창 신부



9월이 지나고 10월이 되었습니다. 10월은 ‘로사리오 성월’이면서 또 ‘전교의 달’이니 은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9월의 복자 성월 마지막 주간에 대단히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곧, ‘한국의 순교 복자 103분께서 모두 성인 품에 오르시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참으로 한국 교회 200년 역사에 가장 큰 이 경사는 순교 정신의 승리이며, 우리의 정성어린 ‘시성 시복을 위한 기도’의 결실입니다.


이 영광은 무엇보다도 103위성인 성녀 여러분의 것이지만, 순교는 하였으나 복자위에 오르지 못한 모든 순교자께 드려야 할 것이며, 우리는 순교 정신으로 무장하여, 복음을 전하고 순교자의 믿음을 본받을 결의를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이와 같은 기쁜 소식을 들으며, 또 새로운 10월을 맞은 첫 주일에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입니다.


구원 얻을 믿음의 첫째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내하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진실한 신자라면 병들었다 해도, 실패하였다 해도, 유혹이 있다 해도, 박해가 있다 해도, 두려움이 없이 시련을 이기는 ‘인내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1독서에서는 유다 나라가 칼데아인의 침략으로 패망의 길을 가고 있을 때에, 예언자 하바꾹이 애원의 기도를 드립니다. “야훼께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는 언제 들어 주시렵니까?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고,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



절망의 처지지요, 애원의 기도에 하느님이 응답하셨습니다. “네가 본 현시는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 끝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쉽게 오지 않더라도 기다려라. 기어이 오고야 만다. 그 현시는 ‘멋대로 설치는 악인은 망하리라.”는 경고와,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信實)함으로써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신실(信實)함으로써 살리라’는 말씀은 귀중한 말씀입니다. ‘신실’, 이것은 하느님 말씀의 변함 없음을 믿고, 어떤 고난 앞에서도 하느님 뜻대로 성실히 살면 ‘구원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고난과 시련 앞에 두려움 없이 인내하며 신실하게 삶으로써 구원을 얻으십시오.


구원 얻을 믿음의 둘째는 하느님 은혜의 선물을 잘 간직하고,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혜 주심을 늘 부족하게 느끼거나, 늘 잘 해 주시다가 어찌 한 번 잘못 했다고 해서 지난 공(功)을 다 엎어버리고, 은혜를 소홀히 하고 배은하면 신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생활에서 기억이 은혜일 수 있는 것은 고마운 은혜에 감사할 때이며, 망각이 은혜일 수 있는 것은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잊을 수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2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께서 “은총의 선물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그대가 맡은 훌륭한 보화를 잘 간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를 간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사십시오. 구원 얻을 믿음의 셋째는 ‘능력 있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 헌금을 많이 못하고, 아는 게 없어서 전교도 못하고, 시간이 없어서 보아도 못한다면, 믿어도 능력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는데, 우리도 같은 기도를 드립시다. 그러면,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미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삼켜라.”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라 하고 말씀하신 대로, 무슨 일이나 하느님 뜻이요, 믿음으로 하는 일이면, 믿음의 능력으로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성령은 힘과 사랑과 절제를 주실 것입니다.

힘도 능력이요, 사랑도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며, 절제도 멸망을 막아주는 능력입니다.

시련을 이기는 인내의 믿음, 은혜를 간직하고 감사하는 믿음, 무슨 일이나 이를 수 있는 봉사적 능력의 믿음이 곧 신실히 될 것입니다.









24                           연중 제27주일   루가 17, 5-10 (다)

김몽은 신부



오늘의 복음에서는 믿음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이며, 믿음을 가지고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들려주고, 종으로서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명시해 준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사회에서는 죄악의 유혹이 있게 마련이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동시에 남의 잘못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더 큰 믿음을 갖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당신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가지고 바다에 그대로 심겨져라’ 하고 말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일이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믿음의 힘은 그보다 더 강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제까지 원수처럼 미워하던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형제와 같이 다정한 사이로 변하는 일은 뽕나무가 바다에 심어지는 것 같은 기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믿음의 힘은 이와 같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에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서 더욱더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내면에서부터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은 미신행위나 다른 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랍니다.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여원하기 때문입니다.”(Ⅱ고린 4,18)


오늘의 둘째 테마는 겸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즉 종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들려줌으로써, 주님 앞에 종으로 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가르친다. 종은 주님의 시킨 일을 마땅히 행해야 하며, 그것을 행하지 않을 때는 종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종이 주인이 시킨 대로 일을 수행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는 없다. 주인의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하고 나서도 오히려 종된 몸으로서는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10)라고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신다.


자기가 무슨 특권이 있어서 남을 지도한다든가 남보다 특출한 재주를 가져서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면으로 볼 때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실 정도로 당신이 신분을 낮추셨다는 사실을 망각했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하겠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다. 재산, 지혜, 아름다움, 힘 등등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자기 개인의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토지를 하느님으로부터 산 사람은 없으며, 얼굴의 미모나 지혜와 지식이 자기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즉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과도 같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조물주(하느님)의 뜻을 준해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종” 중에서도 “보잘 것 없는 종”이라는 겸허한 마음가짐은 신앙인의 참다운 자세라 하겠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겸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인간은 아무리 잘 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정확하고 완전하게는 행하지 못한다. 항상 미숙하고 불충분하게 밖에는 사명을 이행하지 못한다. 항상 미숙하고 불충분하게 밖에는 사명을 이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과, 인간이 거기에 협조한다는 이 사실을 동등하게 생각함은 큰 잘못이다. 참으로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보잘 것 없는 종” 임을 알고, 조금도 자랑할 줄 모르는 사람을 말한다.











25               연중 제27주일   루가 17, 5-10(다)  수고는 오로지 믿음의 몫

                                                            강길웅 신부



믿음은 지금 당장 무엇을 얻기 위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믿는 순간 믿음의 은혜는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세상은 줄 수 없는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세속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속적인 축복이 담겨져 있긴 하지만 그러나 믿음은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믿음 때문에 고생스럽다 해서 걱정할 일이 아니며 기도한 내용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언제고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축복은 기어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깊은 강을 건너야 하며 높은 산을 넘고 또 어두운 굴속을 통과해야 합니다. 거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제1독서(하바 1,2-3:2,2-4)에 나오는 하바꾹은 원래 유명한 예언자는 아니었습니다. 하바꾹서를 보면 중요한 메시지도 없습니다. 다만 의인은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여느 성서처럼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바꾹이 살던 기원 전 7세기의 이스라엘은 의인들은 박해받고 악인들은 설쳐대며 세상을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신앙으로 보았을 때, 이 같은 사실은 대단히 큰 모순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상 받아서 잘 살고 악한 사람은 벌받아서 못 살아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이지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의 처사가 도무지 못마땅하기만 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억울함을 하느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때 하느님이 대답하시기를 『끝 날은 받듯이 찾아온다. 쉬 오지 않더라도 기다려라. 기어이 오고야 만다. 멋대로 설치지 말아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높은 이상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것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가 지금 당장 주어진다고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결과는 서서히 이루어지되 마지막에 가서 완성이 됩니다. 따라서 세상이 혹 우리를 속인다 해도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주 겉으로 금방 드러나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허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주 이 세상에서는 깊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마치 그분의 모습처럼 우리가 만지고 붙잡지 못할 때가 아주 많습니다. 바로 거기에 갈등이 있으나 또 바로 거기에 믿음의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다 소중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믿음을 달라』고 주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능력이 주어지는 믿음을 달라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어떤 야심을 채울 수 있는 힘이나 지혜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다분히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어떤 보상을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엉뚱하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아무리 내 제자라 하지만 너희는 종으로서 지금 당장 상 받을 생각을 말고 그 저 내가 시키는 데로 끝까지 수고하라』는 것입니다. 즉 밭에서 하루종일 땀흘리고 주고 했다하여 상을 기다리지 말고 다시 주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마지막까지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이 답답하고 짜증스러우며 지루하고 피곤합니다. 그러나 그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고달픔을 미리 깨닫고 시련과 역경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은혜는 사실 그런 캄캄한 굴속을 들어가야 만날 수 잇습니다. 세차게 부는 강풍을 만나야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금은 뜨거운 불 속에서 정렬이 되듯이 우리도 시련과 고통 속에서 순수한 믿음으로 성장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그 분의 뜻하심에 승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편견이나 아집, 또는 자존심이나 고집을 깨트려야 합니다. 신앙에 세속적인 야심은 불살라 버려야 합니다.


의인은 진정 믿음으로 삽니다. 돈으로 사는 게 아니고 지식이나 권력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억울하고 답답하며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믿음에 의심이 생기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주님을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진정한 은혜는 지금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은혜는 누가 뭐래도 믿는 순간부터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기다립시다. 시련의 강물을 마지막 건널 수 있을 때 우리는 참 은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26                연중 제 27 주일   루가17,5-10 (다) 수고는 오로지 믿음의 몫  

                                                  강길웅 신부



제1독서 하바 1,2~3;2,2~4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제2독서 2디모 1,6~8.13~14 (그대가 우리 주님을 위해서 증인이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시오) 

복 음 루가 17,5~10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믿음은 지금 당장 무엇을 얻기 위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믿는 순간 믿음의 은혜는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세상은 줄 수 없는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세속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속적인 축복이 담겨져 있긴 하지만 그러나 믿음은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믿음 때문에 고생스럽다 해서 걱정할 일이 아니며 기도한 내용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언제고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축복은 기어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깊은 강을 건너야 하며 높은 산을 넘고 또 어두운 굴속을 통과해야 합니다. 거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1독서에 나오는 하바꾹은 원래 유명한 예언자는 아니었습니다. 하바꾹서를 보면 중요한 메시지도 없습니다. 다만 의인은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여느 성서처럼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바꾹이 살 던 기원 전 7세기의 이스라엘은 의인들은 박해받고 악인들은 설쳐대며 세상을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신앙으로 보았을 때, 이같은 사실은 대단히 큰 모순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상 받아서 잘 살고 악한 사람은 벌받아서 못 살아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의 처사가 도무지 못마땅하기만 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억울함을 하느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때 하느님이 대답하시기를 “끝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쉬 오지 않더라도 기다려라. 기어이 오고야 만다. 멋대로 설치지 말아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높은 이상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것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가 지금 당장 주어진다고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결과는 서서히 이루어지되 마지막에 가서 완성이 됩니다. 따라서 세상이 혹 우리를 속인다 해도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주 겉으로 금방 드러나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허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주 이 세상에서는 깊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마치 그분의 모습처럼 우리가 만지고 붙잡지 못할 때가 아주 많습니다. 바로 거기에 갈등이 있으나 또 바로 거기에 믿음의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다 소중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믿음을 달라."고 주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능력이 주어지는 믿음을 달라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어떤 야심을 채울 수 있는 힘이나 지혜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목적은 다분히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어떤 보상을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엉뚱하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아무리 내 제자라 하지만 너희는 종으로서 지금 당장 상 받을 생각을 말고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끝까지 수고하라."는 것입니다. 즉 밭에서 하루 종일 땀흘리고 수고했다 하여 상을 기다리지 말고 다시 주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마지막까지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이 답답하고 짜증스러우며 지루하고 피곤합니다. 그러나 그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고달픔을 미리 깨닫고 시련과 역경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은혜는 사실 그런 캄캄한 굴속을 들어가야 만날 수 있습니다. 세차게 부는 강풍을 만나야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금은 뜨거운 불 속에서 정련이 되듯이 우리도 시련과 고통 속에서 순수한 믿음으로 성장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그 분의 뜻하심에 승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편견이나 아집, 또는 자존심이나 고집을 깨뜨려야 합니다. 신앙에 세속적인 야심은 불살라 버려야 합니다.



의인은 진정 믿음으로 삽니다. 돈으로 사는 게 아니고 지식이나 권력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억울하고 답답하며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믿음에 의심이 생기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주님을 외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진정한 은혜는 지금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은혜는 누가 뭐래도 믿는 그 순간부터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기다립시다. 시련의 강물을 마지막까지 건널 수 있을 때 우리는 참 은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27                 연중 제27주일   루가 17,11-19 (다) 저는 보잘것 없는 종입니다.       

                                                            함세웅 신부



한국의 현 실정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극도로 긴장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현 시점에서 민주 시민으로서 양심적인 크리스천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듯합니다. 고질화된 사회 풍조는 우리의 판단력을 둔화시켰으며, 일단 판단을 내린 것을 실천하는 데 커다란 용기를 요구합니다.

  

이런 실정 아래서 지혜로운 판단과 그 판단을 과감히 실천하는 용기의 원동력은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정신 곧 복음 정신입니다. 오늘독서에서 바울로 사도께서는 복음 정신을 생활 원칙으로 삼으라고 권고하십니다. (2디모 1,3) 그 복음은 고난이 함께 따른다고도 아울러 말씀하십니다. (2디모 1,8)

  

우리 모든 신자들은 각자의 처지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하느님께 봉사해야 합니다. 많은 어려움 중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대로 노력해야 합니다. 공무원, 기업인, 회사원, 교직자, 노동자, 학생, 상인, 언론인, 기타 직업인으로서의 우리의 처지를 반성하고 나는 내가 처해있는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하느님의 종으로서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세상 만물 어느 누구보다 공경하고, 하느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자녀를 기르고 교육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로서 모범 된 생활을 해야 하고 하느님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파해야 합니다. 검소한 생활로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진실과 정의를 목숨같이 아껴야 합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진리와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수한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섬기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은 우리가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의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자기 임무를 다하지 않는 종은 벌받을 것이라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우리가 종으로서 충실히 일했다 하더라도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이지 결코 하느님으로부터 감사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능력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건강, 지능, 재산, 기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공짜로 받았습니다. 우리의 생명까치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선행을 하였다고 하느님께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결코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요구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이제 로사리오 성월을 맞이하여 성모님께 열심으로 기도하며 “주님의 종이오니 당신 뜻대로 내게 이뤄지소서"하고 기도하신 성모님을 본받아 충실하고 겸손한 하느님의 종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28                 연중 제27주일   루가 17,5-10 (다)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변희선 신부



  오래 전에 강원도 고향에 있는 우리 집의 산자락에 더덕을 재배한 적이 있다. 서울의 경동시장에서 더덕 씨를 샀는데 한 홉이면 500~600평에 부릴 수 있었다. 이 씨는 하도 작아서 바람에 날아갈 정도였다. 내가 예수회에서 수련을 받고 있는 동안에 더덕 씨를 뿌린지가 6년이 되어서 아버님께서 서너 가마니 정도의 더덕을 캐셨다.


  한 홉에 불과했던 더덕 씨가 자라서 6년이 되니, 고향의 친지들이 가끔씩 캐어 잡수시고도 서너 가마니가 넘어가는 더덕이 생산되었다는 소식은, 내게 농부들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와 비슷하게 자신의 온갖 정성을 들여 키운 자녀가, 부모님의 기대와 희망 이상으로 훌륭한 인재가 되었다면, 그들의 보람과 기쁨은 얼마나 클까? 어느 부모가 자녀가 잘 성장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며, 자녀들이 잘 될 것을 믿고 싶지 않을까?



  이렇게 부모가 자녀의 미래를 믿고 희망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부모와 자녀가 서로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의문스러운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가정의 불신풍조는 사회 전반에 걸친 불신을 조장한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가 일하는 서강대학교에서도 날이 갈수록 교수와 학생간의 인사하는 모습이 자꾸만 줄어만 간다.



  나는 지난 7학기 동안 계속해온 교양필수 과목인 신학적 인간학이라는 수업시간을 통하여 교수와 학생들 사이의 신뢰를 구축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번 학기의 신학적 인간학 수업에는 200명이나 수강하고 있는데, 세 차례에 걸쳐서 북한산 등반을 함께 할 예정이다. 이 계획은 여러 모로 어려움도 많겠지만 스승과 학생들이 바위산에서 서로 협동하고 자연을 체험할 기회를 만드는 것이기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학생들끼리 그리고 제자와 스승이 서로 믿는 사이를 만들기 위하여 어려운 산행을 시도하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이 신뢰를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시험을 부과하지 않는다. 시험은 학생들이 공부를 잘 하도록 격려하는 의미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경쟁하도록 하며 스승은 서로의 답안지를 보지 못하게 감시해야 하고 - 그것은 불신을 조장한다 - 교수는 제자들이 얼마나 공부했나를 비판적인 눈으로 살피게 된다.



  나는 학생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신뢰하기에, 가능하면 자신들의 생각을 많이 말하도록 하려고, 내가 아는 것을 말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자유로이 토론하고 발표하게 배려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나의 의도를 잘 믿지 않던 학생들마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토론을 위하여 열심히 준비한다. 이제 수업은 교수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 가는 것임을 실감한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믿음과 불신을 동시에 안고서 살아간다. 누군가를 믿으면 희망이 생기지만 믿을 수 없으면 절망이 찾아온다. 겨자씨는 더덕 씨와 비슷한 크기지만, 겨자나무는 어른보다 더 크게 자란다. 믿음은 자라나서 큰 희망을 이루지만, 불신은 번지면 번질수록 우리를 절망의 늪으로 빠지게 한다. 믿음과 불신의 차이는 처음에는 아주 작은 듯해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엄청난 차이를 보여준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루가 17,6)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믿음(신앙)이 처음부터 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잘 심으면 엄청나게 크게 자란다. 그러나 아주 작은 불신이라도 그대로 두면 믿음의 삶을 살 수 없도록 만든다. 결국 겨자씨 만한 믿음과 사소한 불신의 차이는 하늘(천국)과 땅(지옥)의 차이로 발전한다.











29                 연중 제27주일   루가 17, 5-10 (다) 내 믿음의 크기는?

                                                    김신호 신부



 산업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많은 것을 잃어버린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덕목이나 가치기준이 혼란을 겪고있고, 선과 악의 기준이 모호해져가고 있으며, 정말로 인간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가치로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게 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기준의 혼란 속에서 우리 사회는 확실한 기준점을 또한 잃어가고 있다.



  수 없이 많이 포착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과연 어느 것이 사실인지도 불분명해지고 있고, 또한 어느 것이 믿을만한 신뢰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기준도 모호해지고 있다. 어떤 사랑이 푸념처럼 말하는 ‘요즈음 세상에 믿을 것이 있어야지' 하는 소리가 우리의 현실을 조금은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뢰할만한 인물도 점점 줄어들고 있고, 신뢰심을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가 참작할 사실은 있다. 옛날에 거룩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간 것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산 것처럼 전해지는 이면에는, 그 사람의 모든 삶이 베일에 쌓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적나라하게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이러한 인간상이 성립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불신에 길들여진 우리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요즈음 TV드라마에서 방영되는 임금에 대한 사극을 보면 알 수 있다. 옛날에 그토록 사람들에게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였던 왕도 평범한 삶의 역학구조에서 분석해보면 존경을 받을 만한 면도 가지고 있지만, 존경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결점이 많은 보통 사람보다도 어느 면에서는 더 못한 삶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많은 사람들의 사생활이 노출되고 있고, 노출된 사실은 재빨리 전파되므로 이러한 많은 정보 속에서,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채 사람의 가치가 평가되고 있고, 또한 평가되는 가운데 사람들의 존경심은 비례적으로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역시 사람이 성스럽게 보이려면,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하고 가리어진 상황 속에서 사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서양에서 전해오는 이야기 가운데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기의 속옷을 빨아주는 사람 앞에서는 영웅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적인 면에서 이 말은 인간 세상의 현실적인 단면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제자들의 청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게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라는 대답을 하고 계신다. 이것은 실제로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사실은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우리 자신들 스스로가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느니, 또는 믿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느니, 진실이 실종된 시대에 살고 있느니! 하면서 이 시대를 진단하고, 이 사회를 평가하는 현실에서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더 무게를 갖고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순수성 통해 믿음 회복



  예수님은 분명히, 겨자씨 한 알 만한 지극히 작은 신앙이라도 있으면 믿기 어려운 현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하여, 예수님은 정말로 믿을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으로써 그들의 신앙이 부족함을 지적하셨다.

제자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판단을 받았다면, 불신에 찬 세상에서 불신에 길들여진 우리는 더 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믿음을 회복하는 길은, 사람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노력이 있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가능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옛날 사람들이 모르는 상태에서 임금을 절대자로 받아들인 것같이 우리도 복잡한 삶 속에서 순수성을 회복할 때에,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고 예수님께 대한 순수한 신뢰심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키워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30                    연중 제27주일   루가 17,5-10 (다) 종이 해야 할 일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27 주일입니다. 벌써 9월도 다 지나가고 10월에 접어들었습니다. 온 누리가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는 이 시기에 우리의 신앙 생활도 결실을 거두는 시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로부터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종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종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 종이 하루 종일 들에서, 농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종에게 수고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또 저녁을 먹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루 종일 일에 지친 종에게 저녁밥을 짓도록 했고, 주인이 저녁밥을 먹는 동안 시중을 들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또 집에서도 주인의 시중을 들었다고 해서 그 종이 칭찬받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렇게 힘들게 일하고 난 후에도 ‘저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종의 태도가 아니겠느냐?” 바로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우리 인간이란 누구인가? 특별히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누구이며,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가 하느님의 종입니까?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7장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노예라도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의 자유인이 되고, 자유인이라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시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인간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본래 우리 인간은 악의 세력과 죄와 죽음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삼으시려고 하느님께서 치르신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죽음과 악마의 세력에서 해방된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6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죄의 권세를 벗어나서 이제는 정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온몸을 더러운 일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기어 불법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온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종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종의 신분이라는 것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입니다. 종은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종이 된다는 것은 주인의 권한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종이 하는 일은 종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일입니다. 주인은 종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은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주인의 일을 하고도 그 어떤 보상이나 대가 혹은 칭찬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불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우리를 죄와 죽음과 악마의 세력에서부터 해방시키시려고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예수를 주님이라,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종, 주님의 종이 되어서 그분의 권능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생명과 권능에 참여하여 당신의 일을 하도록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시키시어 당신의 종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는 당신의 종인 우리에게 하느님은 믿음의 힘을 주십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여러분은 겨자씨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겨자씨는 정말 작은 씨앗입니다. 새까맣고 작은 씨앗인데 마치 채송화 씨앗처럼 생겼습니다. 이렇게 작은 씨앗 같은 믿음이라도 뽕나무를 뽑아서 바다에 심겨지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도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힘은 그보다도 훨씬 더 큰 일, 아니 우리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근원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7장 20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산을 옮길 수 있을 만큼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그러면 그 힘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을 지닌 그 사람에게서 나옵니까? 결코 그렇지 알습니다. 그 힘은 하느님의 능력과 권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하느님의 힘과 권능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이란 자신을 온전히 비워서 하느님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거나 혹은 재물과 돈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는 사람, 돈과 재물과 권력의 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이런 사람은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돈과 재물과 세상 권세의 종이지 하느님의 종은 아닙니다. 이런 사람 안에 하느님의 힘과 권능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돈과 재물과 권력의 총이 되어 돈과 재물과 권력의 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권능에 의지하지 않고 돈의 힘으로, 권력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권능은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로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종이 된 사람은 돈과 재물과 권세를 믿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믿듯이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 권능과 능력의 팔에 내어 맡깁니다. 우리 인간은 참으로 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한히 강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 산을 옮길 만큼 강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하느님의 그 무한하신 능력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무한히 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강함은 나약한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으로 불러 주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종의 직분이 무엇입니까? 종의 직분은 첫째로 주인의 말씀과 명령에 복종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명령하셨습니까?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종으로서 주인의 명령과 말씀에 순종함은 너무나 당연한 처사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서로 용서하여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는 것은 다 함께 사는 길이며 더불어 사는 방법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고, 천국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서로 나누고, 서로 베풀라 하셨습니다. 서로 나누고 서로 베풀면 다 함께 풍요롭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명령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의 종의 신분이라는 사실만 깨닫는다면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이 세상의 노예, 돈의 노예, 재물과 향락의 노예가 되어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주인이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자신을 망각하는 처사이지요. 이 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약게 살라. 남을 짓밟아라. 자기의 탐욕을 충족시켜라.”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의 명령을 따르게 되면 여기 미움과 증오가 시작되고, 싸움과 분열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죄를 짓게 되고 죽음이 옵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노예가 되어서 그 명령에 따르게 될 때에 거기 지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느님의 종이 되어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나누고, 베푸는 생활을 했다고 해서 자신을 자랑하거나 그 대가를 바랄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게 성실히 살고도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그 다음으로 종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인을 위해서 헌신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인이신 하느님을 위해서 헌신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인으로서 성실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부는 신부답게, 수도자는 수도자답게, 평신도인 여러분은 평신도답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곧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가장은 가장답게, 주부는 주부답게, 자식은 자식된 도리를 다하면서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 그리고 성당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곧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레지오 단원은 레지오 단원답게, 평협 임원들은 평협 임원답게 자신에게 맡겨진 책무를 다하는 것이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세우거나 아무 것도 자랑할 건더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죄와 죽음의 노예살이에서 신음하는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권능을 드러내시도록 성실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도록 합시다.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31           연중 제27주일   루가 17,5-10 (다) 기도를 잃은 시대에 로사리오를 굴리며

                                                      정민수 신부



그리스도의 자녀인 우리는 마귀와 죄를 끊어버리고, 사도신경을 통해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커다란 어려움들을 겪게 됩니다.



 1. 믿음은 또 하나의 눈


그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선택과 결단을 통해 이러한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가야 함을 알지만, 믿음이 부족한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을 원망하고, 믿음에 대한 회의(懷疑)를 갖게 되며 방황하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이 부족한 우리가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 달라는 청을 드릴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마르 4,31). 그 씨는 크기가 바늘구멍 정도가 될까 말까 하게 아주 작습니다. 이렇게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과 하느님께 대한 복종이 있다면, 우리는 뿌리가 강해 폭풍에 시달리면서도 600년이나 견딜 수 있다는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 육지에서 바다로 옮겨 심을 수 있고, 이 산더러 저리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되는(마태 17,20) 경이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느님께 대한 겨자씨만한 믿음은커녕, 자신이 정한 작은 결심 하나도 마음먹은 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세상 모든 만물과 우리의 삶 자체를 하느님의 빛으로, 곧 하느님의 시각으로 보는 눈입니다. 그러기에 믿는다는 것은 삶의 새로 깊이를, 새로운 의미를,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며(2고린 5,7),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과 인간의 생존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믿음이란 지성을 가지고 따르는 것이며,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신 하느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내 삶의 모든 면에서 영향을 미치기를 바란다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과 믿음으로 만날 때에 내 삶은 곧 하느님의 것이 되며,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에 따라서 내 인생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암흑으로 덮이는 내 인생항로를 밝은 빛으로 비춰주고, 믿음의 눈으로 새로운 항로를 찾아 헤쳐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항상 주께서 나와 함께 걸어가 주시길 바라게 되며, 하느님과 믿음으로 만날 때에, 내가 그분을 믿고, 그분의 확실한 인도 속에서 편히 쉴 수 있게 됩니다.



2.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러한 믿음이 성모 마리아 안에서 완전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실제로 마리아는 당신의 사자(使者)를 통해 말씀하신 분께 ‘순종하는 믿음'을 드러내면서,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셨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성모님은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여겼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마땅히 해야 했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또한 종은 어떤 보상을 바라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해야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10)라는 겸손한 고백만이 필요하기에, 성모님은 구세주의 어머니이면서도 드러나지 않게 겸손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교회의 원형이시며, 참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으로 공경합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야고 2,17). 믿음이라는 또 하나의 눈에 매사에 순종하는 겸손함을 지니셨던 마리아는, 평생을 구세주이신 아드님 곁에서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셨기에, 우리는 특별히 5월을 성모의 달로, 그리고 10월 한달을 로사리오의 현의를 묵상하며 성모님께 기도합니다.



기도시간이 짧아지고 묵상이 부족한 이 시대에 로사리오 기도는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묵주의 길이도 점점 짧아져, 이제는 손가락에 끼고 다니면서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친숙해졌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친숙한 로사리오 기도를 하는 동안, 우리는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게 되며, 우리는 이웃과 함께'구원되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믿음이라는 또 다른 눈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깨달았다면, 그것을 나만의 것으로 간직할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생 활을 마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신 말씀도 바로, “너희는 가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마태 28,18)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모범을 본받아 순종하는 믿음으로,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선교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1고린 9,16).



3. 선교의 황금어장을 위해



복음선포의 의무를 부여받은 우리는, 이웃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고, 진리를 선포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느님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되기를 바라십니다"(1디모 2,4).

그러기에 선교의 대상에서 그 누구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선교를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과 어린이들에게 먼저 해야 하겠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지내게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전해져야 할 것입니다.



힘든 현실생활 속에서 쉽게 좌절하고, 고통에 허덕이는 젊은이들에게 이 소식은 전해져야 합니다. 특별히 정든 가정과 부모형제, 친구들을 떠나 낮선 곳에서 가장 혈기왕성하고 자유분방한 20대 청춘을 철저한 규칙과 규율 속에서 생활하게 되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들은 고독과 그리움, 고된 훈련 속에서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어렵기만 합니다. 성사생활을 하기엔 성당이 너무 멀리 있고, 기도하기엔 너무나 피곤한 것이 그들의 현실이기에, 우리 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의 가족이며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와 노력만 있다면, 군대라는 사회는 가히 선교의 황금어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군생활 동안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분과 함에 지 낼 수만 있다면 우리 사회와 민족의 미래는 한층 밝을 것입니다.



희망의 2천년대에 다가서면서 신앙의 순례를 계속하고 있는 오늘, 우리 모두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 오로지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군종사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군생활에 지쳐 있는 우리의 사랑스런 자녀들이며 친구들인 형제들과 사제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은 따뜻한 위로의 편지 한 통 띄워보내지 않으시렵니까?

 “야훼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 94).













32                연중 제27주일   루가 17,5-10 (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신앙



 묵상 :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을 참 생명의 시작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영광으로 생각했다. 죽음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겐 불가능이 없다. 최소한의 의무만을 하면서 크게 생색을 내는 것은 참 신앙이 없다는 증거다.



    뽕나무나 산을 옮기는 믿음



 오늘 예수님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며 청하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하신다. 다른 복음에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

기로 옮겨져라'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 17,20)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실증이라도 하듯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스완쿼트라는 마을에 1874년 성당이 세워졌는데, 신자들은 원하는 자리에 성당을 세우지 못하고, 그 근방 다른 자리에 성당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땅 주인이 땅을 팔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원하는 자리에 성당을 세우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당을 짓고 헌당식을 가진 지 2년이 지난 1876년 9월17일 엄청난 폭우와 폭풍이 그 지방에 몰아쳐 성당은 폭풍우에 90여m나 떠밀려, 신자들이 그토록 원하는 자리에 정확하게 옮겨졌다. 이렇게 하느님의 손으로 성당이 이사를 하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땅 주인도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성당 이름도 ‘하느님의 교회'라고 바꾸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107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 때, 콜로세움(원형극장)에서 사자 밥이 되어 순교하셨다. 성인은 스미르나의 주교 성 폴리카르보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청하는 것은 단 한가지 하느님께 바치는 내 피의 봉헌을 허락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밀로서 그리스도의 순수한 빵이 되기 위하여, 짐승의 이빨로 고운 가루로 갈아지기를 바랍니다"하며 순교의 열망을 피력하셨다.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을 새 생명의 시작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영광의 순간으로 여겼다. 수많은 신자들을 사자 우리에 처넣은 네로 황제는, 달려드는 사자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성가를 부르며 태연히 죽음을 맞는 그들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고 한다. 죽음을 영광으로 여기며,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이렇게 신앙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교회사 안에서 보게 되는 수많은 기적적인 사건과 상상을 초월하는 신앙의 승리는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런 신앙의 힘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무신앙적인 적반하장



  오늘 복음은 언뜻 보기에 신앙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종과 주인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종은 주인의 명령대로 다 실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나서 “저희는 보잘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고 말하라고 하신다.



  우리 주변에는 가정을 알뜰히 돌보면서 평일미사는 물론, 레지오나 신심단체 활동을 통해 환자 방문과 전교, 본당행사 때의 노력봉사, 피정 참여 등에 열심한 신자들이 많다. 그리고 많은 후원회에 가입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신자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항상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다고 신앙 안에 겸손해하는 이들을 본다. 그런가 하면 평소엔 냉담을 하고 있다가 부할이나 성탄 때 판공성사만 겨우 보고 또다시 냉담을 하면서도 “그래도 판공성사 봐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라"는 식으로 적반하장인 대축일 신자도 적지 않다.



  그리고, 어쩌다가 작은 봉사라도 하면 동네방네 떠벌리며 자기자랑을 하는 이들도 있다. 신앙적인 자세가 전혀 없어, 모든 것을 이해타산적으로 보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찌들은 이들에겐 봉사활동은 ‘노동력 착취'요 감사헌금은 ’금품 사기'정도로 보일 것이다.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이기에, 그들의 시야는 이 현실 안에 갇혀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하느님, 당신은 내 삶에 끼여들지 마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하는 자세로 하느님을 실생활 안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항상 자신의 얄팍한 계산으로 살아갈 뿐이기에, 죽는 날까지 결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주는 신앙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믿는 만큼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신앙도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다"고 하셨다. 우리도 이 미사 중에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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