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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0:59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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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27주일

        10. 표중관 신부(나)/16

        11. 작가미상(나)/18-무심과..           12. 이계중 신부(나)/20

        13. 강길웅 신부(나)/22                   14. 김영남 신부(나)/23

        15. 김영남 신부(나)/25                   16. 방윤석 신부(나)/27

        17. 박인근 신부(나)-없음         18. 예정출 신부(나)/29

        19. 신은근 신부(나)/29                   20 교구주보 (나)/31

        21. 전옥주 작가(나)/32           



10               연중 제27주일   마르 10, 2-16(나)  한 평생을 서로 사랑하면서

                                                       표중관  신부



진정으로 서로 조건 없이 사랑한다면 이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인가 봅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서 죽은 순간까지 항상 남고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이 특히 각기 개성이 다른 남자와 여자가 한 평생을 같이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모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듯이, 예수님 시대에만 보더라도 이혼이 매우 성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여자를 가장의 소유물이라 생각하여 마음대로 취급하였고, 유대인 법에는 여인들은 물건 취급을 받아 아무런 법적 권리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여자가 음식을 버렸거나 길에서 지껄였거나 모르는 남자와 이야기를 했거나 시부모에게 불순하거나 말하는 소리가 옆집에 들리거나 남편이 그녀보다 아름다운 처녀를 보았으면 이혼을 할 수 있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까닭 없는 이혼이 많아 예수님 시대의 여인들은 결혼하기를 매우 두려워하고 주저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요즈음 세상에도 여자들이 결혼하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그 당시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그 당신엔 이혼이 남자들만의 특권이었는데 요즈음엔 여자들에게도 당당히 이혼할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엔 물질주의와 쾌락주의가 사람들의 골수에까지 밀려들어와 결혼의 진정한 뜻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만이 결혼의 척도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물질이 결혼의 척도가 되고 있으며, 좋으면 소유하고 싫으면 버린다는 식으로 마치 한 인간을 물건 다루듯이 취급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찌 한 평생을 동고동락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못 믿고 미워하면서 원수처럼 지낼 방에야 차라리 눈물을 머금고 속 시원히 헤어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성할 때나 병든 때나 일생 동안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면서 살자고 굳게 약속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지는 모습은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진정 결혼이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이혼을 하지 말하고 하셨습니까? 잠깐 여기서 몇 해 전에 있었던 일화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어느 시골 학교에 한 부부교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부교사의 가정은 단란했고 행복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에게 갑자기 나병의 중세가 나타났습니다. 부인은 본래 자신이 미감아 출신이란 사실을 알았지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 남편에게 모두 고백하였습니다.



남편은 괴로움을 참으며 부인을 위로하였고 부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심혈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정성엔 아랑곳없이 부인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만 갔고, 어느 날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만 부디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 달라는 눈물이 벤 종이 쪽지 하나만을 남겨 놓은 채 부인은 사라졌던 것입니다. 남편은 거의 실신한 상태로 불쌍한 부인의 행방을 찾기 위해 근 삼 년 간을 헤맸습니다. 이제 남편의 꼴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이 모 나환자 수용소에서 초라한 부인의 모습을 발견하였답니다. 그리고 뛰어가 부인을 얼싸안고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면서 두 사람은 한없이 울었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마 이 두 사람이 만나서 함께 울었을 땐 하늘도 땅도 울었으리라 믿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축하면 이혼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 나름의 타당한 이유와 기구한 운명이 있었으리라 봅니다만, 한 평생을 같이 살자고 약속했으면 싫든 좋든 서로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아들딸까지 낳아 놓고 훌쩍 떠나버리면 어찌 행복하겠습니까? 구약의 법에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나병에 걸린 부인과 이혼한 남편이 있다고 해도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순수한 사랑입니까?


남들이 뭐라 해도 이 두 사람은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행복하게 살아가리라 믿습니다. 이렇듯 결혼이란 두 인격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슬퍼하면서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묻기 전에 오늘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봅니다.

 “천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부모를 더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 10,6-7). 즉 결혼이란 예수님이 말씀대로 두 육체의 결합인 동시에 두 정신의 결합, 두 생명의 결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노력한다면 험난한 인생의 가시밭길도 동고동락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할 때나 병든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항상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아멘.















11                 연중 제27주일   마르 10, 2-16(나) 無心과 어린이의 마음





하나 : 하늘도 땅도 싱그러운 물빛에 젖어 있는 가을아침, 강가에 서서 찬연한 햇살 속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본다. 바람 한 점 없는 물위에 한가로운 음악이 되어 흐르는 눈부신 고요. 저 끝없는 흐름으로써 오히려 부동의 침묵을 노래하고 있는 강과 같이 무상한 시공의 흐름 속에 던져진 「자기 실존」을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混)」이라고 불운한 시대를 살고 간 우리들의 시인은 이 지상에서의 「삶의 비밀」을 노래했다.


그 어느 곳에도 매인 곳 없이,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일체의 분별과 사념의 경지를 떠나 유유히 흐르면서도 충만한 기운과 가득찬 생명으로 일체의 것을 내어 맡긴채 흐르는 저 무위(無爲)의 흐름을 일컬어 「무심(無心)」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리로서 알고, 신비에 갇힌 「존재의 문」을 열고 「봄」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불교의 선사(禪師)들의 그 무심(無心)의 경지는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첫째 조건으로 제시된「어린이의 마음」(마르10,15 참조)과 동등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문 앞에서 필자는 아직도 흔미한 미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분명히 그 경계를 가릴 길이 없으나 「신(神)을 알아듣기는 어렵지 않지만 그 품에 안기기는 어렵다. 깨닫는 것과 안기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 먼 거리가 가로 놓여 있다」라고 한 「파스칼」의 말은 무심(無心)을 넘어서 지향하는 예수의 말씀의 행방이 어딘지 분명히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둘 : 마르코 복음 10장 1절에서 16절에는 두 가지 짧은 이야기가 소개되고 잇다. 그것은 바리사이들의 간교한 질문으로 시작되는 「이혼 논쟁」과 「어린이에 대한 예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하고 바리사이들이 예수께 물었다』(2절). 예수 시대 유대교에서 가능했던 이혼을 예수가 인정한다면 사랑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위배 될 것이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유대 율법에 예수는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써 세례자 요한과 같이 죽을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예수를 진퇴양난의 올가미 속에 가두려는 책략이 깃든 사악하고 계획적인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모세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명했습니까?』하고 질문으로 대치된다. 그들이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가 허락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는 『모세는 여러분의 그 완악한 마음 때문에 그 계명을 남겼다』고 대답하셨다(6절). 예수는 그 규정이 인간이 만든 일시적 규정이고, 창조 때부터 하느님이 세우신 법은 결코 아내를  벌리 수 없으며 남녀는 혼인으로써 영원히 갈라질 수 없는 한 몸을 이룬다고 말씀하셨다(창세기 1,27:2,24참조).

이로써 예수는 일부일처제와 결혼의 불가해소성을 천명하셨다. 아울러 남성 위주의 유대인의 사고방식, 연약한 여성을 지배하고 어린이들을 부모들의 소유물처럼 여기는 당시 유대사회의 결정적 모순을 질타하시며 어린이들을 축복하셨다(13~16참조).


셋 : 예수에게 악의 에 찬 질문으로 예수를 올가미에 가두려고 획책한 사람들 소위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로 성서에 묘사되는 이들 율법전문가와 교사, 바리사이들은 독선적인 열정과 광신적이고 맹목적인 오만으로써 무식한 사람들과 하층계급이 사람들을 업신여긴다. 이들은 똑똑하고 배운 것이 많아서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를 순순해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로 나타나고 있다(마태 18,1~5참조).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하나같이 먼저 깨닫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들」로 묘사되는 어리석은 사람들과 온갖 멸시를 받는 암․하아레츠(속세의 가난뱅이들)였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에 달린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아는 것」과의 차이이고 「앎」과 「깨닫음」의 차이 일 것이다.

 진리를 인식의 대상으로만 보아 지적인 욕구충족과 정신적 소유욕에 사로잡혀 독선과 오만으로 「두꺼운 탈을 쓴 인간」과 순진 무구한 진실로써 진리의 품에 안기는 「믿음의 인간」이라는 엄청난 차이에서 오는 것임을 성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넷 : 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란 무한한 사랑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여, 내 뜻대로가 아니라 오직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고 이 지상에서의 최후의 삶을 마감하신 예수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어린이의 마음」으로 살으신 분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하느님아버지의 외아들로서 고난과 투쟁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놓으신 예수의 삶에서 보듯이 「어린이의 마음」이란 무념과 무상으로써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의탁도 아니고, 기력과 얼이 빠져나간 맹목적 순종은 더욱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절대적 사랑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청정한 원의로 충만된 에너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섯 : 「아! 하느님…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불타는 사랑의 고백으로 꽃다운 2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현대의 성녀 「소화(小花)데레사」. 그녀의 큰 깨달음으로 제시된 「작은 자의 길」은 「하느님 앞에 어린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하느님 앞에 어린이로 있다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말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의 허무를 인식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어린이가 그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듯이, 아무런 걱정 없이 자기를 위해 그 어떤 것이든 재물을 모으지 않는 것입니다…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마침내 나는 사랑과 희생의 꽃을 꺾어 바쳐 드리는 것 밖에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이가 되었습니다…그렇습니다. 어린이로 있다는 것은 자기의 잘못을 보아도 실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자주 넘어지기는 하나, 너무 작아서 그다지 큰 상처를 큰 상처를 입 않습니다』라고 성녀는 말했다.











12              연중 제27주일   마르 10, 2-16 (나)  결혼 생활에 권태기가 오면

                                                            이계중 신부





 늦거나 빠르기거나 결혼 생활에는 소위 권태기라 불리우는 위험한 시기가 옵니다.

희망에 부푼 달콤한 밀월(蜜月)이 지나면 모든 것이 캄캄하게 보이는 시기가 오는 것입니다. 이 위험한 시기를 넘기기 위하여 먼저 대비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현대는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시대라 그런지 몰라도 조그마한 의견 충돌이나 싸움만 있어도 ‘우리 둘은 더 이해할 수가 없게 되었고 서로가 길을 잘못 들었으니 각기 길을 고쳐 걷는 것이 좋겠다.’하며 집을 나가 별거도 하고 때로는 아주 이혼도 합니다.

설령 거기까지는 안 간다 할지라도 전과 같은 좋은 기분을 가지지 못하고 먼저의 의견 충돌로 계속 말다툼이 잦고 날이 갈수록 신경이 예민해져서 전과 같이 터놓고 지내는 사이로 지내는 것이 힘들게 됩니다.



결혼이란 풀 수 없는 맺음이므로 이것을 끊거나 손상시키지 말도록 전력을 기울여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분노와 열등감에 눌리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면서도 상대의 과실과 결점을 캐냅니다. 남편이 상대가 다른 여자 같으면 쉽게 용서하여 줄 것을 아내이기 때문에 용서를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는 일반적인 남성에 공통된 결점을 다른 남자 같으며 생각지도 않을 것을 남편이기 때문에 용서를 못하는 경우 또한 흔합니다. 나의 아내, 나의 남편이면 더욱 관용을 베풀고 이해하여야 할텐데……


여기서 결혼 생활이 점점 무거워지고 결혼이전의 생활을 그리워하게 되고 만일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하고 또한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그려도 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충돌은 가끔 열심한 젊은 부부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의 정체를 바로 보아 이것을 과대 혹은 과소 평가하지 말고 또한 필요 이상으로 중대하게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피곤하거나 근심이 있거나 도는 호가 날 때 아내에게 또는 남편에게 대드는 수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상상 이상으로 간단합니다. 가령 남편이 직장에서 이유 없이 윗사람에게 꾸중을 들었다든지 또는 물건을 속아서 샀다듣지 하여 기분을 상하여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집 안에서 대수롭지도 않은 일에 하루의 분풀이를 합니다. 물론 해명되는 일은 아니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는 일입니다. 즉 분풀이를 당하는 사람에게 이해와 도움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좁은 그 사람의 아내도 매일 힘들고 피곤한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집의 일, 아이들의 일, 그 외의 일로 역시 피곤하고 신경이 예민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상대의 말을 잘 듣고 동정하고 위로하여 줄 기분에 놓여 있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충돌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에게 좀더 이해와 희생심이 요구되며 또한 매일 두 가지를 결심해 주었으면 합니다. 첫째로 자기의 불평을 너무 말하지 말고, 혹시 말하게 된다 하더라도 최소한도로 줄일 것이며, 둘째로는 상대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는 일을 좀 성의 있게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편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침묵만을 지키려고 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예의를 지키고 상대의 존경을 손상시키지 않는 의견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결혼하는 날까지 각자의 습관의 사상 속에 살던 두 어른이 결혼하는 날부터 상대의 습관과 사상 속에 자기의 것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되므로 마음을 일치시키고 완전히 조화된 생활을 구축하기에는 그것을 다루는 운전이 필요하고 다루는 동안 조그마한 사고를 일키는 것은 당연하며 여기에 이견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날이 가면서 서로의 어려움이 없어질 때, 때로는 무엇이나 닥치는 데로 말하는 수가 있습니다. 집 안팎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불평, 불만을 모조리 털어놓음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이 때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고들은 희극, 비극의 막이 집에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고 막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몰이해, 소위 권태기는 이렇게 생기는 것입니다.


옛날에 아내는 남편의 하소연을 듣고, 휴식을 주고, 조언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였고, 또 이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여성들에게 권리와 의무의 평등을 주장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옳은 것이라 하겠으나 나중에는 모르는 사이에 남편을 격하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남편은 화를 내고 아내는 나도 화를 낼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하나의 평화를 찾지 못하고 불화에 힘을 쏟게 됩니다. 만일 아내가 가만히 듣고 위로하여 주었다면 풍파가 지난 다음에 승리한 즐거움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되기 위하여서는 매일 매일 침묵과 인내의 훈련을 조금씩 쌓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여성에게 쉬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번은 부부 싸움이 잦았던 한 부인이 어떤 성인을 찾아가서 내 주인이 양순하게 되는 좋은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성인이 대답하기를 당신 주인이 화내기 시작하거든 당신은 속히 물을 한 모금 마실 다음에 당신 주인의 호가 가라않을 때까지 삼키지도 뱉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유치한 일이라고 웃을지 모르지만 입에 물을 물고 말대답을 않아는 지혜는 그때 분에 못 이겨 그런 말을 했었구나 하는 후회를 하지 않게 해 줄 것입니다.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여야 할 일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리스천이라면 적어도 주일 미사 이외에 온 가족이 바치는 짧은 기도 시간이라도 가지도 한 달에 한 번 고해 영성체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천주님의 은총이야말로 모든 평화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에게 큰 잘못이 있겠지만 모든 책임이 한 사람에게만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드러운 사랑으로 상대를 이끌어 줄 어떤 방법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어찌할 수 없는 예외의 경우도 있을 것으로 생각은 됩니다만…

 부부된 자는 양심을 살피고 책임을 느끼는 데 소홀히 하지 맑으시기 바랍니다.

13                    연중 제 27 주일   마르10,2-16 (나) 혼인은 새로운 탄생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창세 2,18~24 (둘은 한 몸이 되게 되었다) 

제2독서 히브 2,9~11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복 음 마르 10,2~16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된다) 



혼인은 각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대하고도 가장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새로운 탄생인 동시에 또한 두 인격이 하나의 인격으로 조화되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을 아무렇게나 맞이해서는 안됩니다.

혼인 그 자체를 존경할 줄 알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혼인은 동물의 짝짓기가 아닙니다. 아니, 동물의 짝짓기도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상대를 충분히 조율한 다음에 짝짓기를 하며 일단 부부가 되면 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아주 성실히 이행합니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먼저 하나가 되기 전에 서로 인격을 다듬고 새로운 출발에로의 준비를 성실히 해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아담은 하와를 보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둘이는 본래 하나였습니다.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께선 그들을 점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부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면서 동시에 인간 자신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혼인은 신성한 것이면서 장엄한 것입니다. 아무도 이 혼인의 약속을 파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죽음만이 그들을 갈라놓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혼인은 취소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어떤 생물이든지 한번 태어나면 다시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영원히 못 돌아갑니다. 병아리는 다시 달걀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나비가 다시 애벌레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집니다. 이것은 한 번의 약속이면서 또한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평생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은 거룩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고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부가 갈라선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가르는 것이요 부모를 가르는 것이며 또한 자식들까지도 가르는 엄청난 죄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경솔하게 서둘러서 하면 실패합니다.



서로 선을 본 지 한 달도 안 돼서 혼인을 하는 예를 가끔 보게 됩니다. 신자들은 이런 식으로 혼인을 해서는 안됩니다. 부부가 한 두 달 살 것이 아니요 평생을 함께 사는 일인데 적어도 6개월 이상은 서로 교제를 하며 검토를 해 보고 판단을 한 다음에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 리고 하느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혼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언젠가 시장에 나갔더니 몇 주일째 성당에 나오지 않는 자매를 만났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고 물었더니 딸 시집보내는 준비 때문에 바빠서 못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딸도 신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뭐고 하느님은 또 뭡니까. 누가 도대체 그 딸의 행복을 줍니까. 그까짓 이불이나 냉장고가 행복을 줍니까? 그 혼인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복을 빌어 줘야 하는데 오히려 그 중대한 일에 하느님을 외면합니다. 그러면 그 혼인이 뭐가 되겠습니까?



결혼 예식을 주례하다 보면 가끔 결혼 예물의 반지로서 단돈 천 원짜리 묵주반지를 내놓는 부부도 있습니다. 이유는 뻔합니다. 다이아 반지나 황금 반지는 나중에 팔아먹을 때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부모들이 그렇게 가르쳐 줍니다. 누가 뭐래도 그 반지는 무덤에까지 끼고 가야 하는데 그 중요한 예물을 팔아먹을 것부터 가르칩니다. 그러니 그 가정이 뭐가 되겠습니까?



세상에 아무리 훌륭한 혼수를 장만하고 그리고 아무리 좋은 신랑과 신부를 얻는다 해도 그 가정 안에, 그 부부 안에 하느님이 머물지 않으시면 그들은 불행합니다. 대궐 같은 집에서 산해진미를 먹는 혼인이라 해도 그들의 혼인에 하느님이 복을 주시지 않는다면 인생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혼인 그 자체를 존경해야 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아름다운 터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가정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된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 우리 모두도 그런 가정을 모델로 삼아 닮아야 합니다. 복은 예수님 만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혼인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은 바로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가정은 하나지만 거기에는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엮어진 결합체가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보배도 없으며 세상에 이보다 더 위대한 만남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모두가 행복해 져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인이 됩니다. 한번 더 말씀드리지만 혼인은 새로운 탄생입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인간이 소망하는 꿈의 보금자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혼인을 존경하고 가정을 사랑하도록 합시다.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14                  연중 제27주일   마르 10.2-16 (나)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

                                                            김영남 신부



요즘은 '변화' 의 계절이다. 시내에서까지 단풍을 보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높푸른 하늘과, 길가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노랗게 또는 빨갛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과일들을 보면 가을인 것이 분명하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무더위와, 그토록 많은 피해를 주었던 태풍과 그 후의 어두운 날들도 어느덧 지나갔다. 이렇게 계절만이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역시, 전세계적인 경제적 불안 속에서 큰 변화를 겪으며 몸살을 앓고 있다.



그 가운데 많은 인간관계가 큰 아픔을 주며 깨어져 가고 있다. 경제 문제가 그 주요인이라고 하지만, 더 큰 원인은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에 있는 것 같다.

오늘 주일의 복음말씀에서도 '인간관계'의 '깨어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특히 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맺게되는 인간관계들 중에서 가장 긴밀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부의 관계'의 '깨어짐', 곧 '이혼'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몇몇이 예수님께 와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라고 분명한 답을 주시지만, 그 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질문자들에게 반문을 하심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먼저 말하도록 유도하신다.



그들에 의하면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했다"(참조: 신명 24, 1-4)고 본다. 그런데 신명기에 나오는 “이혼장을 써주라"는 조건은 본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이혼증서는 그 이혼증서를 갖고 있는 여성이 전남편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며 이제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된다는 것을 전남편이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즉 위의 신명기의 말씀은 이혼증서도 없이 쓰던 물건을 버리듯이 자의적으로 아내를 버리지 못하도록 한 조항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연결시키시면서 하느님의 본래의 뜻에 따르려면 이혼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시며, 모세가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는 율법을 준 것은 “굳을 대로 굳어진 마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그 당시 아내마저도 소유물처럼 생각하여, 이혼장을 써주기만 하면 “아내를 버려도 되는 듯이" 쉽게 생각하던 율법해석의 잘못을 지적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율법해석과 관련하여 '굳어진 마음'(참조:시편 95,8; 에제 36,26; 히브 3,7-11; 마르 3,5)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라 하더라도, 그것들을 통해서 본디 주어진 하느님의 뜻이 제 효력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이혼'의 전거로 삼는 모세의 율법 그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 율법을 '자신들의 이기심'을 위하여 악용하는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 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심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예수님을 공박하려던 반대자들의 주장을 피해가신다.



이번 주일의 복음 말씀은 우리가 혼인미사 때 가장 자주 듣는 복음이다. 교우 부부들에게 오늘 복음 말씀은 그들의 일생에서 가장 엄숙한 자리에서 부모친지들 앞에서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서약했던 것을 회상시킬 것이다: “나는 당신을 아내로 또는 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그런데 이 서약은 결코 조건부 서약이 아니었다. 즉 상대방이 건강할 때에만, 또는 상대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일 때에만, 또는 사회적으로 성공할 때에만, 또는 상대가 아름다울 때에만 유효한 조건부 서약이 아니었다. 혼인미사 때에 신랑과 신부는 각각 자신의 약점은 물론, 상대의 약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스스로의 미래는 물론 상대의 미래에 대해서도 확실히 모르면서 “일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신의를 지키겠다"고 서약하였다.



그러기에 이 서약은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 사랑 없이는 이룩할 수 없는 것이다. 서약의 내용인 '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도 부부는 하느님께 함께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들을 부부로 짝지어 주신 하느님께서 또한 당신 성령을 통해, 그 '사랑'을 지켜 나갈 힘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늘 제1독서인 창세기 2장이 깊은 차원에서 말해 주듯이, 인간은 변화 무쌍한 이 세상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가정 안에서 볼 수 있는 '부부'의 관계와 '부모와 자식'의 관계 에서처럼 이해관계를 떠나 조건없이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지속적 인간관계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가정에서마저 그런 지속적 인간관계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많은 가정이 위기 속에 있다. 본디 가정은 인간이 인생의 첫 단계인 어린시절부터 사랑, 신뢰, 충실성 등과 같은 기본적 덕을 배우는 학교이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믿고,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학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인데, 오히려 정반대로 미움과 불신 그리고 경쟁을 먼저 배우고, 심지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야 할 부모의 관계가 비극적으로 깨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형제자매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는 이렇게 위기에 처한 가정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 곳에서는 '참 가정'을 잃었거나, 잃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따뜻한 가정적 사랑'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15          연중 제27주일   마르10, 2-16 (나)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

김영남 신부



요즘은 ‘변화’의 계절이다. 시내에서까지 단풍을 보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높푸른 하늘과, 길가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노랗게 또는 빨갛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과일들을 보면 가을인 것이 분명하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무더위와, 그토록 많은 피해를 주었던 태풍과 그 후의 어두운 날들도 어느덧 지나갔다. 이렇게 계절만이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역시, 전세계적인 경제적 불안 속에서 큰 변화를 겪으며 몸살을 앓고 있다. 그 가운데 많은 인간관계가 큰 아픔을 주며 깨어져 가고 있다. 경제문제가 그 주요인이라고 하지만, 더 큰 원인은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에 있는 것 같다.

오늘 주일의 복음말씀에서도 ‘인간관계’의 ‘깨어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특히 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맺게되는 인간관계들 중에서 가장 긴밀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부의 관계’의 ‘깨어짐’, 곧 ‘이혼’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몇몇이 예수님께 와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분명한 답을 주시지만, 그 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질문자들에게 반문을 하심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먼저 말하도록 유도하신다. 그들에 의하면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했다”(참조: 신명 24,1-4)고 본다. 그런데 신명기에 나오는“이혼장을 써주라”는 조건은 본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이혼증서는 그 이혼증서를 갖고 있는 여성이 전남편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며 이제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된다는 것을 전남편이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즉 위의 신명기의 말씀은 이혼증서도 없이 쓰던 물건을 버리듯이 자의적으로 아내를 버리지 못하도록 한 조항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연결시키시면서 하느님의 본래의 뜻에 따르려면 이혼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시며, 모세가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는 율법을 준 것은 “굳을 대로 굳어진 마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그 당시 아내마저도 소유물처럼 생각하여, 이혼장을 써 주기만 하면 “아내를 버려도 되는 듯이” 쉽게 생각하던 율법해석의 잘못을 지적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율법해석과 관련하여 ‘굳어진 마음’(참조:시편 95,8; 에제 36,26; 히브 3,7-11; 마르 3,5)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라 하더라도, 그것들을 통해서 본디 주어진 하느님의 뜻이 제 효력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이혼’의 전거로 삼는 모세의 율법 그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 율법을 ‘자신들의 이기심’을 위하여 악용하는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심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예수님을 공박하려던 반대자들의 주장을 피해가신다.

이번 주일의 복음 말씀은 우리가 혼인미사 때 가장 자주 듣는 복음이다. 교우 부부들에게 오늘 복음 말씀은 그들의 일생에서 가장 엄숙한 자리에서 부모친지들 앞에서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서약했던 것을 회상시킬 것이다: “나는 당신을 아내로 또는 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그런데 이 서약은 결코 조건부 서약이 아니었다. 즉 상대방이 건강할 때에만, 또는 상대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일 때에만, 또는 사회적으로 성공할 때에만, 또는 상대가 아름다울 때에만 유효한 조건부 서약이 아니었다. 혼인미사 때에 신랑과 신부는 각각 자신의 약점은 물론, 상대의 약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스스로의 미래는 물론 상대의 미래에 대해서도 확실히 모르면서 “일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신의를 지키겠다”고 서약하였다. 그러기에 이 서약은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 사랑 없이는 이룩할 수 없는 것이다. 서약의 내용인 ‘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도 부부는 하느님께 함께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들을 부부로 짝지어 주신 하느님께서 또한 당신 성령을 통해 그 ‘사랑’을 지켜 나갈 힘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늘 제1독서인 창세기 2장이 깊은 차원에서 말해 주듯이, 인간은 변화 무쌍한 이 세상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가정 안에서 볼 수 있는 ‘부부’의 관계 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처럼 이해관계를 떠나 조건없이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지속적 인간관계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가정에서마저 그런 지속적 인간관계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많은 가정이 위기 속에 있다. 본디 가정은 인간이 인생의 첫 단계인 어린시절부터 사랑, 신뢰, 충실성 등과 같은 기본적 덕을 배우는 학교이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믿고,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학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인데, 오히려 정반대로 미움과 불신 그리고 경쟁을 먼저 배우고, 심지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야 할 부모의 관계가 비극적으로 깨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형제자매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는 이렇게 위기에 처한 가정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 곳에서는 ‘참 가정’을 잃었거나, 잃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따뜻한 가정적 사랑’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16            연중 제27주일   마르 10,2~16 (나) 어린애 하나를 더 낳아 나눠 갖게

                                                            방윤석 신부



이건 얘기가 있다. 12년간이나 결혼생활을 해온 부부가 이혼하게 되어 재산을 이등분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다른 재산을 나누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어린아이 셋을 나누는 것은 큰 문제였다. 고민 끝에 남편은. 가장 친한 친구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자식을 반으로 나를 수 있겠는가를 상의하였다. 친구는 이야기를 자세히 듣더니 충고하였다.

「어린애 하나를 더 낳아 가지고 두 명씩 나누는 것이 가장 공평하고 좋은 방법일 것 같네!」 그로부터 이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일년을 더 살았다. 예상대로 부부사이에는 넷째 아이가 태어났다. 어느 날 충고해 준 친구는 뜻밖에도 단란한 그 가정의 식사 초대를 받게 되었다.

  

오늘의 강론 주제는 「혼인」이다. 10월은 혼인의 계절이다. 혼인이란 무엇인가? 계약에 의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인격적, 육체적인 결합이다. 혼인은 종신토록 사랑을 주고받자고 계약하는 것이며, 서로 동거생활 하기고 계약하는 것이고, 서로 도와주고 협조하기고 계약하는 것이다. 일생동안 신의를 지키고 이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분배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며, 자녀를 낳아서 이들을 기르고 보호하고. 교육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혼인 반지는 이런 계약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교환하는 물건이다. 언제나 몸에 지니기 쉽고 보이기 쉬운 것이 반지이므로 이를 선택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빼 두거나 팔아 버리거나 바꾸어 껴서도 안 된다. 이런 계약을 쌍방이 동의한 후 한 몸으로 결합됨으로써 한 가정을 이루게 된다.



또한 혼인은 하느님께서 정하신제도이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아담을 만드시고 그 짝으로 여자를 만들어 주셨다.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된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선 안된다」고 마르꼬 복음(10장6-9절)은 전하고 있다.

  

혼인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애정이다. 부부간의 애정은 그리스도와 성교회의 서로에 대한 사랑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사랑의 성격은 어떠해야 할까?



첫째로, 「항구한 사랑」이라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영원토록 사랑하신다. 「나는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부부들도 죽는 날까지 사랑이 변절하는 일없이 살아야 하겠다. 지금은 사랑하다가 나중에는 식어지는 일회용 사랑이어선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부부되는 분들에게 『항구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둘째로, 「충실한 사랑」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히 교회에 충실하시고 전 인류를 사랑하시지만, 특별한 사랑을 교회를 위해 남겨 놓으셔다. 부부들도 일반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부부 서로에게는 특별한 사랑이 있다. 이것은 타인에게 분배하지 못할 사랑이다.



셋째로, 「몰아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항구하고 충실한 부부의 사랑은 노력 없이 유지가 되지 않는다. 얼굴이 예쁘다고 해서, 성적 충동만으로 애정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애정을 끊어지게 할 수 있는 요인들은 얼마든지 있다. 성격 차이, 정신 능력이 다를 수 있고, 취미, 교양이 다르고, 경제, 건강 등등 부부의 애정을 끊어지게 할 수 있는 위험한 일들이 무수히 많다. 따라서 위험에 빠질 때마다 굳은 신앙으로 이것을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다.



무릇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를 부부 사랑에 적용시켜야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천상에서 내려오셨듯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듯이 부부들도 이렇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만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충실하고, 서로를 위해 희생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로, 애정은「공손한 사귐」이어야 한다. 욕망은 변덕스럽고 성(性)은 쉽사리 식어질 것이다. 욕망보다, 성(性)보다 더 확고한 기초 위에 혼인이 세워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두 마음의 일치이다. 부부들은 서로의 욕망을 채우고 만족하는 기계로써 남용하는 것보다는, 평등한 배우자로서 존경하고 대화하고, 양심을 살리고 서로의 온갖 행복을 조장하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이다.



오늘 1독서에서 아담은 여자에게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다』라고 외쳤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금하는 말씀을 하신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하신다.



하느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셨다. 따라서 여자는 원래 남자와 한 몸이다. 몸이 찢어진다는 것은 깊은 상처, 불구, 또는 죽음을 의미한다. 이혼은 몸이 찢어지는 것과도 같다. 행여나 이혼한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기 바란다.

18               연중 제 27 주일   마르10,2-16 (나)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예정출 신부



오늘 복음은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의 원칙을 말해준다. 단일성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맺는 혼인을, 불가해소성은 한 번 합당하게 혼인이 맺어지면 서로 갈라서지 못함을 의미한다. 부부의 결속은 이렇게 두 사람만의 관계 속에 평생 지속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새로운 혼인을 맺는 것을 단죄하신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가치관의 혼란과 윤리의식의 결여로 그게 무슨 잘못이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죄악이다.



요즘 부부들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 작년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부부 세 쌍이 혼인할 때 한 쌍이 이혼하였다. 십년전 아홉 쌍이 혼인할 때 한 쌍이 이혼한 비율에 비겨 이혼율이 많이 높아졌다. 사회의 이러한 추세는 신자부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혼한 일부 신자들은 교회혼의 본질적 특성인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을 지키기 힘든 어려운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혼인이 그래서는 안된다. 혼인은 잘해주면 계속 살고 못해주면 헤어지는 조건부의 동거가 아니다.



물론 잘못된 만남으로 가슴에 상처를 안고 결별한 부부들도 있다. 타당한 사유로 인해 갈라선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혼인은 언제나 자신의 전 인생을 거는 약속이고 전 인격을 거는 서약이어야 한다. 혼인의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다(에페5, 32). 교회와 그리스도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를 이루는 것처럼, 부부의 결합은 이러한 일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부부가 일치로 성화되고 구원의 도구가 되어 살아갈 때 혼인의 삶은 성사적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부부가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배우자에 대한 신뢰와 사랑, 이해와 협조, 포용과 용서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우리 신자 부부들은 항상 이런 자세로 혼인과 가정에 대한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서로 위해주고 받아들이며 아낌없는 사랑으로 결속되어진 그런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힘들고 어려운 일에 직면하더라도 서로의 미소와 위로로 역경을 극복해나가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처음 혼인을 약속하던 그때의 마음으로 노후에 배우자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는 그런 변치않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19                연중 제27주일 마르 10, 2-16 또는 10,2-12 (나) 행복한 가정

                                     신은근 신부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있다. 부부관계에 대한 말씀과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하라는 교훈이다. 상관없는 듯한 말씀이지만 두 가르침에는 공통점이 있다. 가족과 연관된 말씀이라는 점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모든 것이 남성 위주였다. 자녀는 물론 아내도 남편의 소유물이었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심한 경우에는 물건처럼 매매가 이루어졌고 법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시대상을 질책하시며 혼인을 하느님의 법으로 다시 선포하신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시면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대등한 결합을 원하셨고 그것이 바로 창조질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의 대등한 결합을 원하셨는가. 교리적 해설을 하자면 우리에게 창조능력을 주시기 위해서다. 우리에게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위해 부부관계를 만드셨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 창조하라고 하셨을까.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것은 행복을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었을까.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고 행복을 만들며 살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어린이는 어른이 있어야 편안해진다. 어른도 어린이가 있어야 평화스럽다. 삶의 행복은 이렇듯 조화에 있다. 그 중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조화가 으뜸이다. 혼인에 관한 주님의 말씀은 이런 각도에서 다시 묵상해야 할 것이다.



복음의 끝 부분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며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하라고 하신다. 어떤 것이 어린이의 마음인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을 대하며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이다. 힘들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에겐 모두 어린 시절이 있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주려 노력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다. 그 때의 마음은 우리 영혼 안에 있지 어디로 달아난 것이 아니다. 그때의 그 마음을 되찾아 주님께도 보여드려야 한다. 그래야 행복을 만들 수 있는 힘을 은총으로 받을 수 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된다.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된다. 한 몸이라는 이 말씀이 복음의 핵심 내용이다. 말씀은 간단하지만 의미는 쉽지 않다. 두 몸이 한 몸으로 바뀐다는 것은 두 사람의 운명이 하나의 운명으로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나의 운명과 그대의 운명이 같아졌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랍고도 무서운 일인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니 하나된 운명을 바꾸려는 생각보다 좋게 하려는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그토록 소중한 인연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쉽게 만나고 쉽게 떠나려 한다. 인생은 쉬운 것이 아니다. 삶은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사람의 본 모습이다. 두 사람의 운명이 하나의 운명으로 바뀌었으니 어찌 어렵지 않으랴. 예수님도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룩하셨다. 나의 한 쪽이 고통을 주더라도 내가 올바로 걸어간다면 운명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반복되는 매일의 삶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이 한 주간을 보내자











20                    연중 제27주일   마르 10,2-16 (나) 둘이 아니라 한 몸



서울대교구 홍보실



1. 복음 이야기

마르 10,2-16은 이혼 논쟁(2-12절)과 예수께서 어린이를 사랑하셨다는 이야기(13- 16절)로 구분되는데 여기서는 이혼 논쟁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날 바리사이들이 예수께 다가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이스라엘 남자들은 아내를 소박하여 내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신명 24,1-4).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고 버릴 마음이 있으면 이혼장을 만들어 아내에게 건네주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아내는 소박맞고 쫓겨난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혼 불가를 선언하십니다.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는 자입니다.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하는 것입니다.”(12절).



2.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는 재혼은 말할 것도 없고 이혼조차도 절대 불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부부관계를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고 보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결혼에 대한 하느님의 성스러운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입법자로서 반 이혼법을 제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즉, 법률의 차원에서 옛 법을 폐기하시고 새 법을 만드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신명기의 소박법을 빙자하여 자기 마음대로 아내를 버리는 이스라엘 남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율법 안에 사는 사람들은 여자들의 손에 이혼장만 쥐어 주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언제든지 아내를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소박법이라는 실정법의 한계를 넘어 이혼장으로 무마되는 남성들의 이기적인 욕심, 여자들의 인격을 짓밟는 행위 자체가 하느님 앞에서는 죄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사유를 들이대어 아내를 버릴까 궁리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둘이 한 몸이 되는”(8절) 부부일신의 삶을 살아갈까 궁리하라는 예언자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혼인법으로 인하여 성사(聖事) 생활을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부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결혼의 원초적인 성스러운 뜻을 되살려 둘이 한 몸이 되는 부부일신의 삶을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21              연중 제 27 주일   마르 10,2-16 (나)  어느 할머니의 동반자



전옥주 가타리나 / 작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아마도 매사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갈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신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고 허우적거리는 안타까운 몸부림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주님과 일치되기를 선언하였고,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해야함도 마땅히 우리가 지켜 나아가야 할 본분일 것입니다.



  수도 없이 되풀이 해 온 미사 때마다 우리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약속하고서 미사예절을 끝맺곤 하였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며 하느님께서 강복하신 것을 믿으며 감사하고, 복음전파에 동의를 하였지만 그 약속을 과연 몇 번이나 실행하였는지… 잠 못 이루는 밤,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 있다가 문득 이 약속이 떠오를 때면 어떤 가책으로 말미암아 방에 걸려 있는 고상을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인간사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든 지키려고 노력하면서도 주님과의 약속은 어찌 그리도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지, 정말 그 순간만은 진심으로 뉘우치기도 하였습니다. 성서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혹은 바쁘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에서라면 그것은 옹색한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지식으로 주님을 믿었고 증거하였으며, 또 인간의 지식이 대관절 얼마나 깊은 것이기에 주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도 믿지 못하느냐?”고 예수님께선 의심이 많은 토마를 꾸짖으셨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토마’처럼 예수님께서 창에 찔린 늑방과 못에 찔린 손바닥을 만져 보고서야 믿을 수 있는 의심 많고 미지근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닐런지요?



  저는 오래 전에 한 노파의 신심 어린 이야기를 듣고, 그 할머니의 믿음에 감복하고 참으로 부러워했던 적이 있습니다. 

  육신이 쇠잔하여 허리는 꾸부정하게 휜 그 할머니의 손에는 항상 묵주가 쥐어 있었습니다. 비록 보기엔 초췌하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언제 보아도 미소를 짓고 평화로워 보였는데, 특이한 것은 할머니가 버스를 탈 때 언제나 두 사람 몫의 요금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운전기사가 할머니에게 물었답니다. “할머니! 왜 돈을 더 내는 겁니까?” 그랬더니 그 할머니는 주름진 눈가에 미소를 가득 담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네… 저는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요금을 같이 내는 거지요” 그 할머니의 소박한 믿음이 긴 여운을 남기며 제게 전해져 지금도 기억 속에 살아있습니다.

  “마음이 소박하고 반짝이듯 아름다운 사람은 신과 자연을 믿게 마련이다”라는 말이 생각날 때면, 믿음으로 해서 평화롭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22                         연중 제27주일   마르 10,2-16 (나) 행복한 가정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있다. 부부관계에 대한 말씀과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하라는 교훈이다. 상관없는 듯한 말씀이지만 두 가르침에는 공통점이 있다.

가족과 연관된 말씀이라는 점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모든 것이 남성 위주였다. 자녀는 물론 아내도 남편의 소유물이었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심한 경우에는 물건처럼 매매가 이루어졌고 법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이러 시대상을 질책하시며 혼인을 하느님의 법으로 다시 선포하신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시면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대등한 결합을 원하셨고 그것이 바로 창조질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의 대등한 결합을 원하셨는가. 교리적 해설을 하자면 우리에게 창조능력을 주시기 위해서다. 우리에게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위해 부부관계를 만드셨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 창조하라고 하셨을까.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것은 행복을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었을까?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고 행복을 만들며 살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어린이는 어른이 있어야 편안해진다. 어른도 어린이가 있어야 평화스럽다. 삶의 행복은 이렇듯 조화에 있다. 그 중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조화가 으뜸이다. 혼인에 관한 주님의 말씀은 이런 각도에서 다시 묵상해야할 것이다.

복음의 끝 부분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며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하라고 하신다.

어떤 것이 어린이의 마음인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을 대하며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이다. 힘들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에겐 모두 어런 시절이 있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주려 노력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다. 그때의 마음은 우리 영혼 안에 있지 어디로 달아난 것이 아니다. 그때의 그 마음을 되찾아 주님께도 보여드려야 한다. 그래야 행복을 만들 수있는 힘을 은총으로 받을 수 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된다.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된다. 한 몸이라는

이 말씀이 복음의 핵심 내용이다. 말씀은 간단하지만 의미는 쉽지 않다. 두 몸이 한 몸으로 바뀐다는 것은 두 사람의 운명이 하나의 운명으로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나의 운명과 그대의 운명이 같아졌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랍고도 무서운 일인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니 하나된 운명을 바꾸려는 생각보다 좋게 하려는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그토록 소중한 인연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쉽게 만나고 쉽게 떠나려 한다. 인생은 쉬운 것이 아니다. 삶은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사람의 본 모습이다. 두 사람의 운명이 하나의 운명으로 바뀌었으니 어찌 어렵지 않으랴? 예수님도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룩하셨다. 나의 한 쪽이 고통을 주더라도 내가 올바로 걸어간다면 운명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반복되는 매일의 삶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이 한 주간을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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