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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0:55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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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26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26 주일

        7. 김영진 신부(나)/ 12         8. 강길웅 신부(나)/ 14

        9. 조광호 신부(나)/ 16         10. 최재용 신부(나)/ 18

        11. 이승구 신부(나)/ 20        12. 방윤석 신부(나)/ 22

        13. 신은근 신부(나)/ 24        14. 정천봉 신부(나)/ 25



7.     연중 제26주일   마르 9,38-43. 45.47-48 (나) 껍데기는 가라

                                                        김영진 신부



18년 전 보좌신부 시절 첫번째로 고니꼴이라는 공소를 갔다. 자전거를 타고 토끼 길처럼 나있는 산길을 가는데는, 본당에서 2시간30분이나 걸렸다. 찻길이 없는 곳인데도 공소 건물을 세를 수 있었던 것은 6․25때 헬리콥터로 재료를 날라다 준 미군 군종신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산비탈을 깎아서 밭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는 고니꼴 사람들은 거의 다 천주교인이었다. 천주교를 박해하던 시절 하나둘씩 산 속으로 숨어들다 교우들이 마을을 이룬 것이다. 교우들이라야 어린아이까지 합쳐서 40여명,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신부가 오는 날은 동네의 경사가 있는 날처럼 깨끗한 옷들을 꺼내 입고, 함께 먹을 술과 음식을 준비하곤 했다. 교우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날, 나는 고해성사를 주고 나서 미사를 시작하려다 말고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본당수녀가 미사짐을 챙겨주었는데 영대(제의 속에 걸치는 것)를 빠뜨렸기 때문이다. 신학교 전례시간 때 배우기를, 영대가 꼭 있어야 한다고 배웠는데, 그것이 없으니 미사를 어떻게 하나! 안하자니 교우들이 실망할 것 길고, 하자니 미사를 불경하게 봉헌하는 꼴이 될 것 같고 하여 망설이다가, 결국 말씀의 전례만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럽지만 갓 신부가 된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선배 신부께 말씀드리니 “이 사람아, 신부가 미사드리는 것이지 제의가 미사드리나? 벌거벗고 미사드리면 미사가 안되나?"하면서 꾸중하였다. 훗날 군종신부 훈련 중, 어떤 신부의 영명축일 날 한밤중에 일어나 훈련받는 신부들끼리 팬티만 걸친 채 미사를 드리면서, 나는 “제의가 미사드리나, 신부가 미사드리지"라고 말한 선배 신부의 말씀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벌거벗고 미사드리면 ‥‥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보면, 법과 형식과 제도에 얽매이는 사람들을 꾸짖는 대목이 나온다. 모세가 선택한 70인 지도자중에서 조직과 형식과 제도를 일탈한 두사람, 즉 엘닷과 메닷이 있었는데, 이 두사람에 대한 제재를 요구하는 여호수아를, 모세는 형식과 제도보다 내용과 은총을 앞세우며 꾸짖는다,

또 요한이 예수께 사도들 중에 속하지 않는 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좇아내고 있어서 못하게 막았다고 하자, 예수께서는 조직과 제도 밖에서도 얼마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일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며 형식과 제도에 얽매인 요한을 꾸짖으신다.


천주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지난날의 조직과 형식, 법과 제도 등에 치우쳤던 점을 반성하고. 말보다는 행동이, 형식보다는 내용이, 제도와 조직보다는 말씀과 은총이 더 중요함을 천명하고 있지만, 아직도 영대 하나 때문에 미사를 못드렸던 나처럼, 조직과 형식, 벌과 제도의 무거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여전하다.

  

오늘날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벌과 제도인가, 말씀과 은총인가? 교회와 그 조직원들이 제도와 형식의 이름으로 은총과 내용에 제동을 걸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식인종 출신의 아프리카인이 영국의 유명한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는 아프리카 어느 추장의 아들로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10년후 백인 동창생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다가

그를 만났다. 영국에서 유학까지 마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추장이 되어 있었다. 다른 동족들과는 달리 추장은 양복을 입고 매우 세련된 모습으로 동창생인 여행객을 반갑게 맞아 식사를 대접했다. 식사시간에 보니 추장은 다른 식인종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고기를 먹는 것이었다. 여행객은 놀라서 “아니 영국에서 명문대학까지 나온 분이 어떻게 사람 고기를 먹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추장은 한 손을 높이 들어 보이면서 “아, 그래서 나는 이렇게 포크로 먹고 있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다른 이들은 손으로 먹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의 차이지요"라고 말했다 한다. 이 추장은 공부를 하였는데 본질은 접하지 못하고 껍질만 보고 왔던 모양이다.



마음이 변하고 내용이 변화되어야 하거늘, 풀로 만든 옷이 양복으로 변하고, 손가락으로 먹던 음식을 포크로 먹듯이, 껍데기와 형식만 바꾼 것은 변화라 할 수 없다.       



법과 제도에 얽매인 교회



인간을 영육의 존재라 말하고, 우주의 원리에도 음양의 양면성이 있듯, 구원의 원리에도 신과 인간, 은총과 자연, 말씀과 형식, 성령과 제도 등의 양면성이 있다. 이 양면성은 조화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너무 감정적인 것에 흘러 오류를 범하는 것이 개신교라면, 아프리카 추장이 손가락으로 먹던 음식을 포크로 먹듯, 껍데기와 형식만 변화된 것이 천주교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여호수아와 요한처럼 교계제도와 정통신학과 교리를 중요시 여기면서도, 모세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제도와 형식을 넘어선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이 되도록, 말씀과 은총과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해야할 것이다.











8.     연중 제26주일   마르 9,38-43. 45.47-48 (나) 법보다 크신 하느님의 사랑  

                                                    강길웅 신부


제1독서 민수 11,25~29 (너는 지금 나를 생각하여 질투하고 있느냐?)

제2독서 야고 5,1~6 (당신들의 재물은 썩었습니다) 

복 음 마르 9,38~43.45.47~48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신앙을 보호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선 제도나 법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신앙이 그것에 묶여서는 안됩니다. 그와 같은 모순이 신앙의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존재해 왔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보다 넓게 열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깊은 것입니다.



1독서에서는 바로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건너 에집트를 탈출했을 때는 그 백성의 수가 장정만도 60만 명이었습니다. 아마 딸린 식구를 합치면 백만 명이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큰 백성을 이끌고 이동한다는 것 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많이 생겼습니다.



특히 서로 싸우는 시비가 생겨서 각종 소송 사건이 많아지게 됩니다. 모세 혼자서 소송 사건을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장인의 충고에 따라 장로들을 뽑아 그 문제를 분담시키는데 이때 뽑힌 장로가 70명이었고 이들을 성막으로 불러 하느님의 영을 부어 주는데 웬일인지 두 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도 자기 집에서 영을 받아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한쪽에선 비난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모세가 나오라는데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사건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여호수아가 앞에 나서서 어떤 벌이나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모세가 달래면서 그러지 말고 오히려 그런 형태로라도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영이 내리길 바라야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축소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오늘 복음에도 나옵니다. 사도 요한의 보고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감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요 또 그들과 어울리는 자도 아니기 때문에 못하게 막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말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오늘 성서의 대목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넓게 열려져 있습니다. 불교 신자나 개신교 신자, 심지어는 무당 할머니들에게까지도 하느님의 사랑은 존재합니다. 좀 억설 같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이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지옥에 빠졌다 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나 슈바이처 박사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 해서 그들이 구원을 못 받는다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정상적인 길은 물론 천주교이지만 그러나 우리 교회 밖에서도 구원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아무 교나 믿으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불교를 믿는 사람이 자신의 종교가 최고의 구원의 길이라 판단하여 양심을 바르게 갖고 선을 이웃에게 베풀면서 살았다 했을 때 그를 보고 당신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니 구원을 못 받는다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절대로 구원이 없다고 한다면 그는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착하게 살기를 아주 간절하게 요구하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고 상을 받지만, 대신에 죄를 짓게 하는 사람은 빠져나가지도 못하는 큰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찍어 버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뽑아 버리라고까지 하셨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의 자세를 성실하게 가져야 합니다. 옛날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법에 아주 능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만이 법을 온전하게 지킨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구원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많은 죄를 안겨 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은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면서도 아직도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들만이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부하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이 보다 넓게 열려져 있다는 것을 모르며 또한 그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선택된 백성이면서도 원으로의 길은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어떤 법이나 제도에 묶여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초월합니다. 그렇다고 법이나 제도가 가치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법이나 제도는 분명히 하느님의 은혜를 보다 효과적으로 나누고 보존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법을 성실히 지키고 제도를 존경하되 그러나 먼저는 바른 양심 안에서 착하게 살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믿음의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9.           연중 제26주일   마르 9, 37-47(나) 무형의 걸림돌

                                                   조광호 신부



 ■하나 : 모짜르트의 고향 오르트리아 「살쯔부르그」는 모짜르트의 명성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도시이다. 거대한 알프스산맥의 웅대한 기운이 잠시 숨을 죽인 살짝 강변의 도시 「살쯔부르그」는 천재 모차르트의 번뜩이는 예지와 예리한 감성이 음악의 전통성과 서로 어울려 감미로운 고전음악의 극치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인간문명이 조화를 이룬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구라파 중세도시 형태가 모두 그렇듯이 이곳 역시 절대군주시대의 화려했던 교회의 모습을 오늘날에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곳이다. 도시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주교좌 성당을 중심으로 나란히 베네딕도 수도회와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하려하고 웅장한 위용으로 지나간 시대 교회의 그 엄청난 권위와 영화를 말해 주고 있다. 지금도 로마시대의 유적의 발굴이 계속되고 잇는 그곳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나는 하해 여름을 지낸 적이 있다.



천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 수도원은 수 백년 묵은 문서고와 도서실, 각종 미술품으로 그야말로 수도원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곳 이였다. 나는 그곳에서 이 세상에서의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더 없이 귀한 체험을 할 수 있는 보람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둘 : 그러나 그 수도원에 가던 첫날부터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성무일도를 드리는 지하경당 중앙 통로 바닥에 바닥 돌로 놓인 어느 주교의 조상을 모든 수도자들이 밟고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위엄에 찬 주교관을 쓰고 지팡이를 든 주교의 얼굴, 너무도 뚜렷한 그 상을 밟고 지나는 것은 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 석상을 피하여 한 발자국 돌아갔지만 태연히 그 얼굴을 밟고 지나는 그곳 수도자들의 태도에 대한 나의 의구심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마침내 그 해 여름이 다 지나는 어느 주일 오후, 나는 우연히 그 경당에서 만난 노(老) 원장에게 나의 의문을 털어놓았다.


아흔이 가까운 백발의 노신부님은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경당 바닥을 응시하며 『저분은 마르틴 루터가 한 때 몸담았던 아우구스틴 수도회의 원장 이였답니다. 저분은 세상에서 교만하게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를 대신 밟아 줌으로써 그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예기치 못했던 그의 대답은 나에게 참으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신부님의 빛나는 눈빛에 너무나 무거운 여운이 깔려 있었기에 나는 더 이상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마르틴 루터의 원장이었던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어떤 연유로 하여 그 곳에 묻히게 되었는지, 나는 그 내력을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그곳을 떠나 왔다. 어쩌면 그 원장신부님의 말씀은 나의 호기심을 송두리째 앗아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도자로서 한 생애를 투신했던 삶, 그리나 지금은 저 차디찬 돌 바닥에 걸맞지 않은 관을 쓰고 누워있는 낯선 사람, 영원한 침묵으로 그는 살아있는 수도자들에게 삶의 모든 비밀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셋 : 이 지상의 교회는 「자애로우신 어머니」로 표상 되고 있다. 넘치는 사랑으로 자녀들을 꾸짖고 타이를 뿐 아니라 끝없는 용서로서 그 품에 맞아들이는 어머니와 같이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머니들이 때때로 그 자녀들을 자기의 욕망과 허영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듯이 교회의 지도자들도 성서에 표현되는 「작은 이들」의 어깨 위에 놓인 멍에를 풀어 해방을 선포하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죄의 올가미를 씌우고 마치 하느님의 은총을 스스로 분배하고 관리하는 약삭빠른 청지기처럼 그들을 불모로 잡고 세상의 권력과 영화를 누렸던 「타락한 교회」가 세계 도처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기심」이라는 인간의 뿌리깊은 죄성(罪性)을 간파하신 예수는 당신의 제자들의 지배욕과 독점욕을 철저히 경계하셨다.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는 그들을 꾸짖으시고 나무라셨다(마르코 9,38-41 참조). 성민 의식에 사로잡혀 공동체 밖에 있는 일들을 철저히 배제하는 제도화되고 경직된 종교적 독선을 예수는 「작은 이들」의 걸림돌(스캔들)이 되는 행위로 간주하셨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조직 속에서의 「소속」과 「무소속」, 제도교회의 「인준」「비인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착한 행위에 있다고 말씀하셨다(40절 참조).


예수에 의해 시작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은 사회적 지위나 교육수준을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과 완벽한 조직력을 갖춘 강자위주의 체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공동체」특히「작은 이들」이 앉을 자리가 마련된 공동체 일 때 비로소 진정한 하느님의 공동체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넷 : 그러므로 예수는 공동체에서 소외되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표상하는 「작은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들을 예수는 무섭게 저주하고 있다(42절 참조).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하여 남을 모질게 대하고 증오와 원한을 맺게 하여 하느님과 인간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게 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느님을 부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거스르는 「악마적 걸림돌을 놓는 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온갖 부정과 사기로 이웃에 대한 불신의 폭을 증폭시키고, 원망과 원한의 악순환의 질곡으로 하느님의 「작은 이들」을 몰아 넣는 이들의 행위와 행동(손과 발), 그 부정한 의지(눈)를 끊어 버릴 때 이들 스스로도 구원을 얻게 된다는 고 것을 「손과 발, 눈이 없는 불구의 몸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낫다」(42-48절 참조)고 성서는 우리에게 히브리적 비유로써 표현하고 있다.


■다섯 : 「한국 갤럽 조사연구소」가 최근 펴낸 「한국과 세계 청소년의 의식」조사 보고서에는 우리사회는 너무나 「가문과 배경만을 중시한다」는 청소년이 무려 74%를 차지하고 「빈부의 격차, 근면한 사람이 푸대접받는 사회」로 우리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경찰청의 「90년도 범죄백서」에는 우리나라 자살자가 한해에 무려 7천5백 여명에 이르고 그중 생활비관자가 3천 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삶의 맛을 일찍부터 잃어버린 우리들의 청소년들과 삶을 비관하여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수많은 우리들의 이웃들에게 「무형의 걸림돌」을 놓은 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오늘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징검돌」대신에 이들 앞에 놓은 「이 시대의 걸림돌」은 과연 무엇일까. 그 「걸림돌」을 우리가 단호히 거절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오늘의 교회는 이 사회에 참된 희망이 무엇인지를 선포할 수 없을 것이다.


어둠에 묻히는 가을저녁, 창가에 앉아서 나는 그 언젠가 살쯔부르그 수도원 지하경당의 석상을 조용히 밟고 제단에 오르는 그곳 수도자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그 침묵의 행렬이 무거운 어둠을 뚫고 지나는 투명한 바람같이 나의 내면을 흔들며 지나는 것을 오늘 이 저녁, 다시 눈여겨본다.











10.        연중 제26주일   마르 9, 37-47(나)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최재용 신부



 근세에 있어서의 세계 최대의 발견은 텔레비전이나 인공위성이나 컴퓨터가 아니라 실로 어린이들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실 어린이들이 우리들에게 준 바의 깊은 지식은 현대 교육의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2천 여년 전에 이미 이 사실을 간파하시고 그의 주변에 모여온 사람들에게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에게서 이상적인 하느님의 자녀의 모습을 찾아내어 어린이의 정신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자의 첫째 배울 바이며 이 어린이의 순수한 뜻을 거역하지 말도록 일깨워주십니다. 이러한 명백한 가르치심을 예수께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교회가 아이들을 돌보는 일없이 오히려 악한 표양을 보여 줌으로써 작은 악마를 만들어 놓는다면 크나큼 교회의 잘못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우리 어른들 안에 받아들이도록 일깨워주고 계시는가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는 순진한 마음입니다. 선입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른들은 편견이 너무도 많습니다. 눈 뭉치로 만든 눈사람처럼 굴러가면 굴러가는 데로 따라서 그 주위에 있는 흙이라든가 지저분한 모든 것을 묻혀 가면서 커집니다. 갖가지 미신, 각양의 편견을 보십시오. 유치원 아이들에게서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이들은 어떤 누구이든 함께 즐거이 놀고 함께 유쾌하게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장해 감에 따라 백인 혹인 종족을 가리고 씨족을, 집안을 가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 발견하여 이렇게 말하고 생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편견을 갖고 있는 어른들에게서 머리 안에 깊이 주입되는 것입니다. 어린이에게는 무당도 굿도 없으려니와 잡다한 불신의 미신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주일학교에서 어린이의 벗이 되고 종교교육의 귀한 사명에 충성하려는 자들은 먼저 이 점에 있어서 어린이에게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순진한 어린이를 인도하려면, 마땅히 스스로 순순한 자가 아니어서는 안됩니다.


그 둘째는 신뢰심이 강한 것입니다. 어린이만큼 부모 형제 자매를 신뢰하고 선생을 믿는 자는 없습니다. 어린이는 자기의 무력(武力)을 알아 자기보다 나이에 있어서 지력에 있어서 앞선 자를 잘 신뢰합니다. 어른은 사람을 의심하고 더욱 현대에선 우선사람을 보면 자기를 이용하려는 자로 더 심하게는 도둑으로 생각하라는 것을 곧잘 표어로 삼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스스로에 의뢰를 하려 들지만 하느님께는 신뢰를 두지 않으며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참다운 도리를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이 어른입니다.


그 셋째는 직관하는 것입니다. 어른은 이유와 까닭을 앞세우고 핑계를 내세웁니다. 그런데 종교상의 일, 하느님의 일은 이치만으로는 체득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종교적 진리는 배우는 것이 아니고 주어짐을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받아들이는 것이며 여기에는 이유와 까닭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어린아이가 되어 땅에 엎디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는 순수한 정신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아이들의 이 인격을 존중하시고 어른들인 우리에게 그 인격을 배울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느님의 택하심을 입고 귀한 종교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을 입은 자는 돌이켜 마음을 새롭게 하고 맹진하기 바랍니다. 그릇된 편견이나 우월감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춤으로써 어린이의 마음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뢰와 복종과 감사와 보은에 더욱 더 정진하면서 어린이의 덕을 본 받기로 합시다.


“아, 아름답도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자기 탓으로 어린이에게 악한 표양을 준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악의 씨를 넣어주는 것이고 그들에 의해 우리는 심판대 위에서 변호자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11.     연중 제26주일   마르 9, 37-47(나)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삶

                                                          이승구 신부



 지난 주일은 우리의 고유명절인 추석이었다. 우리 본당에서는 주임 신부님의 배려로 제대 앞에 제수를 차려놓고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가 끝난 다음에는 모든 신자들이 가족 단위로 조상님들을 기억하면서 제사를 드렸다. 나도 미사를 마치고 제사를 지내면서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헤아려 보았다.



죄를 고백할 수 있는 자들의 기쁨



어른들은 자주 “자식 낳아 길러 보기 전에는 부모 속(마음)을 모른다”고 하신다. 그러니 신부인 나는 결국 영원히 어버이의 그 깊고 넓은 사랑을 알 길조차 없고 깨닫지 못할 것 같다. 살아 생전에 보여주신 사랑과 따뜻한 배려를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부모님 세상을 떠나시고도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그 자리가 얼마나 컸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생명을 넣어주시고, 생각할 줄 아는 자유로운 존재로 낳아주셨으니 말 안 듣고 제멋대로 굴어서 더 고생하시고, 세상의 틀이나 권력에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시키시느라 사람으로 오셔서 고통받으시고, 지금도 여전히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 여전히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사랑해주시겠지만 잘 느끼지 못하고, 다 알듯하면서도 차마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나의 모습인지라 안타깝기만 하다.


오늘 제1독서에 모세는 나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모세는 살아 있는 동안 하느님을 알아보는 현명한 사람, 깨어 있는 사람으로 내 눈앞에 나타난다. 여호수아는 행동을 함께 하지 않은 두 장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만을 터뜨리지만, 모세는 그런 장로조차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니 온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본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마음을 열도록 분명히 말한다. “차라리 모든 사람이 나보다 더 하느님의 사랑을 못 보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하느님께서 나보다 더 이 사람들을 사랑해주셨으면 좋겠다.” 참으로 모세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으로 대접받기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기를 고대하는 겸손한 사람이기에,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 안에서조차 ‘일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어떤 보고서를 읽으면서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오랫동안 아프리카 하면 시커먼 사람들이 옷도 잘 갖춰 입지 않고 거의 자연과 동화되어 사는 장면을 상상해 왔다. 그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서 한 사제가 신자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그 모임에 진지하고 활기에 넘쳤다. 모인 사람들이 자유롭게 한 사람씩 일어나서 죄를 고백하는 순서였는데, 이상하게도 일어선 사람이 죄를 다 고백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기쁨에 넘쳐 하느님께 감사 드리는 노래를 불렀다.

이 사제도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데 다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노래를 불렀다. 그때 비로소 이 사제는 모인 사람들이 ‘죄의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죄의 내용에 귀 기울이고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죄를 고백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의 노래를 힘껏 불러대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죄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죄를 고백하도록 용기를 주고 회개의 마음을 주신 하느님과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감사와 노래를 부른 것이었다. 죄의 내용으로 사람을 저울질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토록 사랑이 흘러 넘치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이 모임은 얼마나 멋지고 성령으로 가득한 모임인가! 이들이 바로 모세처럼 하느님의 깊은 뜻과 활동하심을 알아차리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닌가!



 오늘날의 우상인 안락과 물질


그러기에 오늘 복음 말씀은 닫히고 얼어붙은 내 마음을 열고 힘없고 약한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 마구간에서 부모 없이 한순간도 살 수 없었던 당신의 연약한 모습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신다. 오늘도 무분별한 철거로 내쫓기는 가난한 사람들,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경쟁에 뒤진 거리의 아이들, 에이즈로, 공해로, 온갖 장애로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은 여전히 현존하고 계심을 알아보도록 내 닫힌 마음을 열라고 독촉하신다.


내가 비록 가톨릭 교회의 사제이지만 나보다 앞서 더 깊고 넓은 마음으로 일하는 비고리스도인들을 위험스런 눈초리로 경계하지 말고, 그들 안에서 더 힘차게 눈초리로 경계하지 말고, 그들 안에서 더 힘차게 활동하실는지도 모르는 하느님의 영을 발견하라고, 고통받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의 지지자요, 주님의 지지자임을 알아보라고 촉구하신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하신 주님께서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져라”, “손을 찍어 버려라”, “눈을 빼 버려라”, “발을 찍어 버려라”하시니, 자주 죄를 빠지는 내가 이 말씀대로 실행한다면 이 몸뚱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눈과 손과 발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인체의 중요한 부분들임에 틀림없지만, 이것이 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불필요해한 것들이요,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가 되고, 오히려 남을 해치고 남에게 죄짓도록 한다면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리라.



눈과 손과 발뿐 아니라 우리가 받은 모든 것과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의 활동하심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목적이 눈이나 손과 발등의 육체가 편안하도록 하기 위해서 재산을 모으고, 안락한 장치를 늘려간다면 이것이야말로 무서운 우상숭배가 아닐까 한다.



사랑의 모험으로 기적을 일으킬 때



그러므로 오늘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부자들에게 경고한다. 여기서 부자란 꼭 돈이 많아서만 부자가 아니요, 눈과 손과 발등을 편하게 하고자 온갖 안전장치를 끌어 모으는 데 급급한 사람들 모두를 뜻함일 것이다. 나의 몸뚱이를 편안하게 하고 싶고 고통에서 무조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바로 부자의 마음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못 살겠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아우성에도 아랑곳없이 자기 재산만 긁어모으고, 땅이 죽어가고 생명이 죽어가더라도 “나는 모르겠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자”는 태도들이 바로 부자의 태도요 이런 태도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경고를 한다.


“안전해지고 싶은 욕구를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모험을 시작하라”,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들 안에서 얼마나 힘차게 활동하시고 기적을 일으키시는지 눈뜨고 보라”는 외침인 것이다.

 이제 나도 마음을 열고 보이지 않게 기적을 일으키시는 성령을 발견하는 모험에 뛰어들고 싶다. 살아 생전에 차마 헤아리지 못했던 부모님의 사랑을 간간이 느끼듯, 여전히 마르지 않고 흘러 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을 늘 깨닫고 싶다.











12.  연중 제26주일   마르 9, 37-47(나) 순교자적인 확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방윤석 신부



오늘 제2독서의 내용은, 부자들에 대해 질책하는 사도 야고보의 말씀이다. 『당신들의 재물은 썩었다. 많은 옷가지들은 좀먹어버렸다. 금과 은이 녹슬었다』고 말한다. 금과 은이 녹슬리 없지만, 썩은 상태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또 『일꾼들 품삯을 가로챘다. 사치와 쾌락으로 지냈고, 마음은 욕심으로 가득 채웠다. 죄 없는 사람들을 단죄하고 죽였다』고 말한다.

  

신문을 읽어보면 부정부패가 정치면의 단골 메뉴이다. 국민들도 예외가 아니다. 담합인상, 폭리, 개인 이기주의, 동네 이기주의 등 온갖 못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의리, 성실, 정의, 도덕, 교양, 윤리 등은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자가용 천 만대 시대다. 기존의 윤리 도덕 외에 교통 도덕이 하나 더 첨가되었다. 그러나 정착이 안되어 형편없다. 앞으로 얼마나 많이 죽어야 정신차릴까? 온 천지에 정의의 물결은 사라지고, 불의만 홍수처럼 가득 차 있다.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말은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인데, 요새는「물가는 하늘같이 높고, 교통이 마비된다」고 해석한다.

  

이조 말기 우리 순교자들의 시대는 어떠했을까? 역시 부정부패, 매관매직, 각종 불의가 만연했었다. 당시는 끝없는 당쟁과 처절한 복수의 시대였다. 임금에게 아부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면 정적을 가차없이 유배시키거나, 사약을 내리게 했으며 삼족을 멸했다. 이 때 요행히 살아남은 아들은 아버지의 원수를 피로써 갚는 것이 효도였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시대였다.



그 당시는 또한 사상적인 공백시대였다.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유교의 윤리는 약육강식의 윤리로 전락했다. 유교 윤리는 잘 되어 있는 데, 권력자들이 사악한 마음으로 자기들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그것을 이용했다. 예를 들면 상놈이 말타고 갈 때, 양반이 지나가면 말에서 내려야하며, 만약 안 내리면 때려서라도 내려 걸어가게 했다. 그래도 상놈은 아무 말 못했다.



칠거지악, 삼강오륜, 삼종지의 등의 도덕률은 강자(强者)만을 위한 도덕률이었다. 따라서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우리 모두가 잘 살 순 있는, 즉 평화공존, 민족번영, 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철학 또는 사상이 절실히 요구되던 때였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섰던 분들이 계셨으니, 바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선각자들이었다. 권력자들이 만든 불합리한 인간의 정의를 하느님의 정의로 바꾸어 놓는 수고를 하신 분들이 순교자들이다.



새로운 사상인 천주교 신앙으로 무장하고 망국을 부추기는 여러 악습을 타파하기 위해 일어섰던 것이다. 민중 봉기나, 가두 시위로써가 아니라 천주교 신앙에 입각한 새 철학, 새 사상, 새 학문의 전파로써 말이다. 그리하여 양반상놈 계급의 타파를 부르짖었으며, 여자 및 어린이들에게도 인권의 귀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한글로 쉽게 교리서를 만들어 한글 보급에도 앞장섰으며, 신학문 체계를 정립하고 가르치기에 힘썼다. 그들은 이를 위해서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한 눈 팔지 않았으며, 그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가르친 길로만 가려고 노력했으며, 그것이 정의가 아니라면 눈을 뽑고 손을 찍어 버린다는 각오로 그 길을 걸어갔다.



예수님께서 분부하신대로, 외골수로 그 한 길만을 갔다. 이 길만이 너와 내가 사는 길이며, 우리가 사는 길이며,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이 길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부하지도, 뇌물주지도 않았고, 사기쳐 먹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부정부패에 맞서서 끝까지 싸웠던 것이다. 그 가르침대로 사랑으로 다스리며, 끝까지 굴하지 않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였다.

  

순교자 성월을 보내면서 우리도 시대의 징표를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도 이조 말기나 별로 다를 게 없다. 정치는 민주 개혁으로 가는가 했더니 다시 보수고 복귀해 버렸다. 사람들의 마음도 점점 사악해져 간다. 공해로 우리의 터전인 땅도 쓰레기장이 됐고, 사상도 쓰레기고 가득찼으며, 마음도 쓰레기장화(황폐화) 되어가고 있다. 누가 이런 상황을 정화할 수 있을까?



우리 천주교가 해야 한다. 우리 각자는 순교자들처럼 우리 신앙에 대해 흔들림 없이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밀고 나가야 한다. 우리에게도 순교자들이 가졌던 확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순교자 성월을 보내면서 순교자 분들의 유훈인 신앙의 확신과 실천적 용기를 되새겨 보자. 그리하여 하느님의 정의가 이 땅에 세워지고,  그 바탕 위에 민주화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자.











13.          연중 제26주일   마르 9, 37-47(나) 어린이처럼

                                                   신은근 신부



예수님은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다. 다 큰 어른이 어떻게 어린이가 된단 말인가. 어른인 우리는 어린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처럼 어린이와 같이는 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선 어린이의 특성을 보자.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나이가 어릴수록 더하다. 갓난아이에게 엄마가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육체적 성장뿐 아니라 정신적 성장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런 어린이처럼 우리도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다. 엄마와 함께 있는 어린이가 항상 편안해지듯 우리도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서 행복해지라는 것이다. 그런 느낌과 감정을 체험하라는 것이다. 어린이가 엄마를 바라보며 살 듯 하느님을 의지하며 살라는 것이 주님 말씀에 담긴 메시지다. 어린이처럼 되라고 해서 툭하면 토라지고 응석부리는 그런 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떻게 하면 어린이처럼 사는 삶이 될 수 있을까.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오늘의 삶은 너무 바쁘고 복잡하다. 이전에는 단순했던 것들조차 복잡한 것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잘 사는 것과 바쁘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바쁜 사람이 꼭 잘 사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줄 너무 쉽게 착각하고 있다.



오늘 기억하는 성녀 소화 데레사는 단순한 삶을 성덕으로 끌어올린 분이다. 평소 자신이 사용하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심지어는 순간의 생각까지도 누군가를 위한 희생으로 바친 분이다. 그 누군가는 선교지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와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위해 성녀께서는 일상사의 단순한 삶을 정성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포교사업의 수호자가 되었다. 선교활동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온 몸으로 그들을 위해 살았기에 풍부한 은총을 하느님으로부터 허락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생활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극기와 노력없이는 불가능하다. 명강의를 하는 선생은 핵심 부분을 쉽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실력을 갖추고 있다. 절제와 훈련 없이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단순한 삶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핵심을 꿰뚫는 훈련과 복잡한 삶을 쉽게 만드는 절제를 갖추어야 주어진다. 그래서 주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셨다. 그들이 엄마를 의지하듯 하느님을 의지하며 살라고 하셨다. 이것이 어른인 우리가 어린이로 돌아가는 길이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복음의 말씀을 일생동안 실천하며 살았던 데레사 성녀를 기억하며 우리도 단순한 삶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자.











14.   연중 제26주일   마르 9, 37-47(나) "신앙은 하느님께 향한 효도"

                                                        정천봉 신부



몇해 전 통계에 따르면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존속살인이 평균 9일에 1건, 폭행은 1일에 3,2건씩 일어나고 있단다. 요즘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효자, 효녀 이야기는 먼 옛날 있었던 일처럼 생각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엇그제가 추석명절이었다. 이런 절기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살아계시건 돌아가셨건 부모님이었을 것이다. 효도는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향한 것이기에 그러고 보면 신앙 역시 효도임이 분명하다. 신앙도 결국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향한 효도인것이다.

그런데 아주 못되게 흐르는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부모님이나 하느님께 드리는 효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사실 하느님께는 훨씬 높아야 할 효도의 수치는 우리에게 신앙의 효도를 새삼스럽게 되돌아 보게 한다.



오늘 복음의 두 아들 가운데 누가 효자인가? 첫째인가? 아니라면 효자는 있는가? 첫째가 좀 낫지만 진짜 효자는 못된다. 바로 진정한 효자의 성공사례를 오늘 미사의 2독서에서 소개하고 있다.



ꡒ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서ꡓ라는 표현으로 효자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다. ꡒ나는 길이다ꡓ하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효도의 길을 새삼 생각해 본다. 신앙은 생활이다. 그저 대답만 잘하는, 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치며 사는 생활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효도의 모범은 첫째 아들도, 물론 둘째 아들도 아닌 두 단계를 뛰어넘는 좋은 욕심(?)을 내라고, 그래서 진짜 효자, 효녀가 되라고 나를 깨우쳐 준다.



신앙인치고 불효자는 없다. 사실 아버지 하느님께 향한 효도는 당연히 부모님께도 이어지는 것이기에 두 효도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부모님께 불효할 수는 없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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