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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0:51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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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25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25 주일

        7. 조순창 신부(나)/ 12         8. 김몽은 신부(나)/ 13

        9. 김영남 신부(나)/ 14         10. 강길웅 신부(나)/ 16

        11. 신은근 신부(나)/ 18        12. 함세웅 신부(나)/ 19



7.           연중 제25주일   마르코 9,30-37 (나) 섬기는 자가 되어야 

                                                          조순창 신부



수확의 계절인 가을, 추석이 다가옵니다. 금년은 풍년들었고, 공휴일도 덤으로 하루가 더 있는 연휴여서 더욱 좋습니다. 그러나 풍년을 맞기 위해서 가뭄 등 갖가지 시련을 이긴 결과이지만, 쌀값이 떨어져서 특히 농가는 걱정입니다. 그렇지만 찾아갈 고향이 있고, 가면 반겨 줄 가족이 있을 때는 좋은 귀향길이지만, 갈 곳도 없고 반겨 줄 사람도 없고 보면, 추석이 다가오면 어수선할 뿐, 낙엽처럼 쓸쓸한 휴일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는 사람은 어차피 함께 살게 마련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소속된 공동체를 이루어서 살아가며, 공동체는 모여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공동체이니, 하느님 믿는 연분으로 만나고, 형제애를 나누기에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 때문에 함께 모인 우리에게, 오늘 주시는 말씀은 ‘죽어야 산다는 신비’ 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소중한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더구나 있는 모든 것은 제 값이 있습니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값이 있고, 흠 있는 것은 흠 있는 대로의 값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하느님이 주신 생명 값을 해야 당연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잘 살아야 하고, 오래 살아야 하고, 값지게 살아야 합니다. 잘 사는 것은 하느님을 믿고 사는 것이요, 오해 사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고, 값지게 사는 것은 하느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돈의 가치를 알려면, 돈을 벌어 보기도 하고, 가난하게도 살아 보고, 돈을 값있게 써 봐야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삶도 경험해 봐야 더 잘 압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인생의 의미가 어데 있는지, 하느님의 지혜로만 알 수 있고, 죽음의 희생과 사랑으로 봉사하여, 죽음과 은혜의 체험을 함으로써 더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 역사 초창기에 복음 전파의 선구자 이 벽 요한(1754-1786)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한국 교회 창립을 이 승훈 베드로께서 영세한 1784년으로 정하고 있습니다만, 그 5년 전인 1779년에 벌써 이 벽 선생의 나이 25세에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과 함께 광주땅 주어사와 천진암에 모여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는 강학회를 열어, 복음을 믿고 신앙을 이미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이조 시대 전통적인 유교 사상에 반기를 들고, 서양 문물과 천주교를 도입하여, 침체한 한국 사상계에 새 활로를 모색한 혁명가였습니다.

  

당대에 이름높은 무반가(武班家)에 태어났으나, 벼슬길을 버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사시면서, 이 겨례의 구원을 위하여 전도와 기도와 보속과 묵상으로 31세의 짧은 생애를 마친 그분은, 어둠에 빛을 밝힌 세례자 요한과도 같으신 분으로서, 이 땅의 예언자이셨습니다.

그는 세상의 가치에 죽어서 영생의 생명으로 부활한 구원의 신비를 몸소 사신 증인이십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우리에게 다음 세 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 시련과 시험을 받더라도 넘어가지 말고 인내하며, 굳은 의지로 살아야 한다고 깨우쳐 줍니다.

둘째, 시기심과 이기적 야심으로 분쟁을 일삼으며, 욕심을 부리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도 하는 이 세상에서, 편견과 위선을 버리고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라고 깨우쳐 줍니다.

  

셋째,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여, 우리의 소중한 시간이나 지식과 재물을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봉헌하며, 자존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어린이처럼 약자인 이웃을 도와주며, 사랑으로 봉사하라고 깨우쳐 줍니다. 그리하여, 거짓을 버리고, 진실되게 살며, 무관심과 단절을 넘어서 나눔으로써 폭력과 횡포가 아닌 봉사로 독재의 유혹을 물리친 사랑의 협동으로 살아감으로써 부활의 신비 안에 값지게 살아갑시다.











8.        연중 제25주일   마르코 9,30-37 (나) 섬기는 자가 되어야 

                                                                김몽은 신부



사실 우리는 다 기적 속에 묻혀 살고 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다 기적이요 은총이다. 그러나 이런 기적을 자신이 직접 보고 싶다면 우선 십일조를 바쳐 보라고 강권하고 싶다.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본다.


 1) 10남매를 둔 부모가 있었다. 노부모까지 모시고 식구는 모두 14명으로 이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엄마는 병원의 문턱이 닳도록 다녔다. 비용은 생활비의 거의 반이 지출되곤 했다. 하루는 신부님의 호소를 듣고 주님께 미안하게도 생각되어서 용단을 내려 병원에 들어가는 만큼의 교무금을 내 보았다. 3개월을 계속했을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들이 하나도 앓지 않더란다.

그 후도 그는 십일조 내기를 계속했다. 딸 한 명이 서울대학교에 합격하고 두 살림을 하던 직장에서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면서 식구가 한 집에 모여 살게 되었다. 지금도 자녀들까지 제각기 십일조를 바친다.

  

2) 거제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처음으로 부임한 신부가, 성당이 없어서 사가를 빌어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무원들이 심심치 않게 찾아와서 재산세를 독촉했다. 번번이 구구한 설명을 해야 했다. 그래도 성당을 짓기가 어려우므로 이 본당 신부는 거기가 성당임을 입증하기 위해 우선 성모동굴을 만들기로 작정하고 그 비용 20만원을 낼 만한 사람을 물색했으나 좀처럼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생각 끝에 그 신부는 좀 낫게 산다는 교우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교우는 난색을 표하면서 요 몇 해 동안 고기잡이에 기백만원의 빚을 져서 자기로서는 헌금할 힘이 없다는 고충담을 털어 놨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신부는 한참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먹고살기 위해 기백만원을 빚졌으면 하느님을 위해 20만원을 더 빚져 볼 수 없느냐고, 그제야 그 교우는 신부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성모동굴은 미구에 완성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기적이 일어났다. 그 교우는 계속 어업이 순조로와 그 해 안에 모든 빚을 다 갚을 수가 있었다.

  

3) 방송인 곽규석씨과 그의 빚에 얽힌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빚을 갚기 위해 곽씨는 그야말로 맨발로 뛴단다. 월수 100만원 중 15만원은 생활비로, 10만원을 11조로 제하고 나면, 나머지 75만원은 빚장이들이 다 가져간단다. 10만원마저 내라면 별도리 없이 “10만원을 안 바치면 당신네들은 내게서 한 푼 못 받아 간다”고 한다는 말을 그의 동생에게서 들었다. 기적을 보는 눈은 바로 이런 것이다.











9.         연중 제25주일   마르코 9,30-37 (나) 섬기는 자가 되어야

                                                          김영남 신부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세 번에 걸쳐 당신이 수난 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예고해 추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이 예고를 전하면서, 제자들이 수난 하실 것이라는 이런 스승 예수님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를 수난 예고 바로 다음에 전해주며, 곧 이어서 그러한 제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고쳐주시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준다.



지난 주일에는 첫번째 예고의 말씀을 들었고, 이번 주일에는 두번째 예고의 말씀을 듣는다.

둘째 예고가 들어있는 오늘 복음말씀이 첫째 예고와 셋째 예고가 들어있는 대목들과 다른 점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말씀으로만 일깨워 주시지 않고, 어린아이를 감싸 안으시는 상징적 행동으로써 가르치신다는 점이다.

  

마르코 복음서 전반부의 여러 이야기에는, “이 사람(예수)이 도대체 누구냐?”라는 식의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질문이 여러 번 나온다. 그런데 그런 일련의 질문에 대한 정답은 “선생님은 그리스도(메시아)이시다”(마르 8,29)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주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그러한 모범답안적 고백 후에도「예수님이 어떤 의미의 메시야이시냐?」라는 문제는 남아있다.

왜냐하면 당대의 일반 군중이 기대하였던 메시아의 모습은 주로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강력한 정치군사적 지도자로서, 이민족의 지배에서 불쌍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는 분이셨는데, 예수님의 실제 삶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그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인 독자들은, 초기에 예수님의 권능에 찬 말씀과 기적들을 체험하면서 드디어 메시아가 왔다고 생각하며, 환호하던 군중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의 말씀을 듣거나 수난하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 받았을 충격을 충분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충격을 복음사가들은 제자들의 태도를 통해 잘 보여준다.



예컨대, 지난 주일의 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듣고 다음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그러나 분명히 스승 예수님을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에서 나왔을 베드로의 그런 행위는,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해 행하시는 구원행위를 막는「사탄의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호된 질책의 말씀을 들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9)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두번째 예고가 나오는 오늘 복음 말씀에는, 수난하시게 될 예수님을 전혀 이해 못한 제자들의 태도로서「제자들의 자리다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스승 예수님은 장차 많은 고난을 당하실 것이라는데, 제자들은 엉뚱하게도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그런데 문제는 구체적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오늘의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태도가 깊이 남아있다는데 있다.



우리도 머리와 입으로는 “예수님은 구세주이시고, 그분께서 십자가상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셨다”라고 고백을 하지만, 실제의 삶은 어떠한가?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입으로는 “메시아(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지만, 수난하시리라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첫째 자리」나 찾았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 신앙인들도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문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생존을 위해- 「경쟁」 속에 미친 듯이 살아가야 하는 일반 세상살이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수난하신 주님을 믿고 산다고 하는 신앙인들의 공동체, 곧 교회 안에서마저 「높은 자리」,「영향력 있는 자리」를 둘러싼 불미스러운 일들이 없지 않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런 사실은 우리 신앙인들이 얼마나 자주 「복음의 말씀」을 명심해야 하는지를 더욱 일깨워 준다. 오늘 복음과 같은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회개」를 요청하는 말씀이다.



「자리 다툼」을 하였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가르침을 주신다. 먼저「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말씀으로 가르치신다. 그리고 곧 이어 그 말씀을 실행으로 보여주시며 가르치신다: 「어린이 하나를 그들 앞에 세우시고 그를 안으시며」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타깝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행동에서 어린이는 “순진 무구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상징한다. 즉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어린이를 감싸 안으시는 행동은, 제자들이 “약하고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런 삶이 바로 사랑 때문에 십자가까지 지고 가시는 스승 예수님을 뒤따르는 제자의 삶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러한 “사랑과 섬김”의 제자의 길이 바로 “참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점이다. 그 행복은 먼 훗날 죽은 다음에 비로소 얻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이겠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이 세상에는 이런 참 행복을 증거해 주는 분들이 적지 않게 있다.











10.     연중 제25주일   마르코 9,30-37 (나) 고통은 삼켜야 한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지혜 2,12.17~20 (그에게 아주 수치스러운 죽음을 한번 안겨 보자) 

제2독서 야고 3,16~4,3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복 음 마르 9,30~37 (사람의 아들이 잡혀 넘어가게 될 것이다.)



신앙의 길은 축복의 길이며 동시에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상반된 길이 신앙 안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믿는 이들에게 큰 갈등이 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복을 기대하는 자는 먼저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며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또 꼴찌부터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아이러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드러나는 영광만을 기대했는데 그분이 먼저 죽어야 한다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는 마음 속엔 현세적인 축복에 대한 기대만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의 언덕으로 올라가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십자가가 생기면 신앙을 내던지고 하느님을 외면합니다. 신앙은 그래서 어리석게 보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악인들이 선인들을 무시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지혜서를 썼던 기원 전 2세기경은 그리스 세상이었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발달한 그리스인들이 봤을 때 무력하게 보이는 하느님의 지혜는 일종의 웃음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교 문화권에서 많은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결국은 인간의 지혜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것이 지혜서를 쓰게 된 동기요 또한 사상이었습니다.



선인들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

이것은 세상 끝날 때까지 인류가 자신에게 던지는 외로운 질문입니다. 악한 이들이 고통을 받고 선한 이들은 당연히 평화와 기쁨을 누려야 하는데 왜 세상의 현실은 거꾸로 드러나고 있느냐. 도대체 이런 모순 속에서 믿음은 또 무슨 해답을 주느냐. 바로 그와 같은 질문이 예수님에게서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한 선인의 대표적인 케이스였습니다. 그분은 생전에 좋은 일만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 주셨고 병자를 고쳐 주셨으며 죄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참 삶의 기쁨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대가는 모욕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으로 세상을 구하셨습니다.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인간을 건지셨습니다. 구원의 방법치고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어리석게 보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의 위대한 뜻이었습니다.



고통은 비록 마귀의 유혹에 빠진 인간의 죄에서 왔지만 그러나 인간을 죄에서 건질 수 있는 힘은 선인의 억울한 고통이었습니다. 오늘의 세상에서도 선인들의 고통이 세상을 구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자신을 치유시키며 역사를 전진시킬 수 있는 것은 선인들의 고통 때문입니다. 억울한 이들의 희생 때문입니다. 만일에 이러한 하느님의 위대한 신비를 사람들이 깨닫고 있다면 그는 보다 행복한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어떤 가정이 있는데 남자가 바람을 피워서 딴 살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가정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셋이나 있는데 부인은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언젠가 그녀 가정을 방문했을 때 부인이 그랬습니다. 남편 덕분에 예수님을 알게 된 것만 해도 자기는 남편에게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한 여자의 희생이 한 가정을 건지듯이 한 사람의 억울한 고통이 세상을 건질 수 있습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요 피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에는 특별한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진정 선한 사람들의 고통에 의해서 용서받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희생에 의해서 구원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몇 년 전 국회 청문회와 또한 문민정부 초기의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 공개를 보면서 누가 과연 행복한 사람이냐 하는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하느님 앞에 떳떳한 사람, 비록 억울하게 당하긴 했어도 깨끗하고 의로웠던 사람이 결국 마지막 승리자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특히 선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억울한 사건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선인들이 비록 고통은 받아도 절대로 망하지는 않습니다.

악인들의 눈에는 선인들이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선인들의 억울한 아픔은 바로 세상을 죄에서 건지고 멸망에서 구하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참 모습을 고통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서 직접 억울한 고통을 통해서 세상을 구하셨습니다. 우리는 또다른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희생을 실천할 때입니다.











11.     연중 제25주일   마르코 9,30-37 (나) 섬기는 사람

                                                         신은근 신부



으뜸이 되려면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다. 틈만 있으면 깔아 뭉개려 드는 것이 세상이다. 어떻게 받아들여야겠는가. 현실과 동떨어진 말씀으로 들리지 않는지. 도대체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가. 복음의 끝에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안으시고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셨다. 당신 이름으로 남을 돕는 것이 섬기는 것의 핵심이라는 말씀이다.



어린이는 누구인가. 도움을 바라는 사람이다. 특별히 나에게 있어 어린이는 내가 책임진 사람, 나의 도움없이는 살기 어려운 사람, 운명적으로 내게 맡겨진 사람을 말한다. 이들에게 도움을 주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섬기는 것이다. 어떻게 돕고 섬길 것인가. 이런 경우 사람들은 물질을 먼저 떠올린다. 있어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질을 주는 것만이 돕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시대엔 희망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더 확실한 도움이 된다. 특별히 희망은 모든 이가 바라는 것이다. 실망을 딛고 일어서게 했다면 그를 살린 것과 같다.



그러니 가까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들을 실망시키고 멍들게 하고 있다면 생활을 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섬기는 것이다. 잘못 맺어진 인연이라 생각해서도 안된다. 부정적인 시각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만남은 신비다. 소중히 여기면 반드시 결실이 돌아온다. 어두운 생각으로 밝은 운명을 기대할 순 없는 일이다. 나는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남이 귀중하게 생각하길 바란다면 잘못된 것이다. 나는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겨주길 청한다면 이것 역시도 잘못된 것이다. 먼저 가까운 사람을 귀하게 대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꼴찌가 되어 섬기라고 하셨다.



희망은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평범한 칭찬과 격려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활력과 힘을 준다. 사랑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행위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대수롭지 않은 말과 행동에 이 힘은 파괴된다. 때로는 그것이 절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가까운 사람이 주는 큰 상처는 잘 참는다. 그러나 작은 상처는 서로가 소홀히 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쌓여 부정적 시각을 만들며 운명을 그늘지게 함을 알아야 한다.



희망은 노력해야 우리 곁에 남는다. 그리고 그 노력의 첫자리는 긍정적 시각을 주고받는 일이다. 그러니 운명적으로 맡겨진 사람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도록 애써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섬기는 행위다. 자신에게 맡겨진 운명적 관계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보자. 그들을 섬기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12.      연중 제25주일   마르코 9,30-37 (나)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세웅 신부



 “주여, 이것은 님에게 드리는 저의 기도입니다. 이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렁거리고 울리는 이 기쁨과 슬픔을 조용히 참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내 사랑이 기도에 충실하듯 님에게도 충실하게 하시고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권력이나 욕심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는 더 높은 곳에 마음을 바치고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는 하찮은 일엔 초연할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의지와 힘과 결단이 오직 사랑으로써 님에게 맡길 수 있게 하옵소서.”

  

인도의 시성 R. 타고르의 ‘님에게 드리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삶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는 시간은 영원한 주님의 세계에 비추어 볼 때 하나의 짧은 시험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원한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짧은 시험기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간을 주님의 뜻대로 살며 주님 안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하찮은 일에만 정신을 쏟고 더 높은 무한한 영광의 세계에는 무관심합니다. 하나의 작은 시련기를 안일하게 보내기 위하여 영원한 주님의 세계를 등지고 있습니다. 도둑질, 살인, 사기, 헤아릴 수 없는 범죄를 저질러가며 이 짧은 기간을 목적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옳은 일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이 시험 기간을 보내 버립니다.

  

다시 말해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땅에 묻혀 버리는 것입니다. 올바른 일도 못하고 나쁜 일도 안 하고 그저 방관만 하는 이러한 삶을 주님은 결코 원하지는 않습니다. 행복하여라, 하늘나라가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들 그들의 것이니… 이렇게 주께서는 산상의 설교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짧은 생애를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며 어떻게 생활을 해야지만 영원한 행복의 세계에서 주님과 함께 살 수 있을 것인지를 우리 모두에게 가르친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가 땅에 묻힘은, 사람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말은 시험기간이 끝났음을 뜻하는 것이지 결코 죽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들은 마음 속에 주께서 산상에서 가르치신 내용을 되새기며 생활을 해 나가야 겠습니다. 그래서 이 짧고 작은 시험 기간을 끝내고 주님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옳은 일에 굶주린 사람들, 이러한 말씀과 같이 우리는 항상 올바른 것을 찾아 헤매며 올바른 일의 성취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래서 권력이나 욕심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고 더 높은 곳에 마음을 바치고 이처럼 우리 마음을 괴롭히는 하찮은 일엔 초연할 수 있도록 주님께 부탁합시다. 우리가 진실로 주께 청하건데 주는 우리에게 그러한 힘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끝으로, 주께 다시 한 번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사, 우리 모두들이 우리의 마음을 끄는 하찮은 일에 초연하게 하고 더 높은 곳으로 우리의 뜻을 바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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