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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0:48
분 류 연중19-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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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24 주일

        19. 김정진 신부(다)/ 36        20. 최익철 신부(다)/ 37

        21. 장인남 신부(다)/ 40        22. 김신호 신부(다)/ 42

        23. 변희선 신부(다)/ 43        24. 강길웅 신부(다)/ 45

        25. 강영구 신부(다)/ 47        26. 죄인을 용서(다)/ 50



19.            연중 제24주일   루가 15,1-32 (다) 잃었던 한 마리 양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 주 예수께서 당신의 잃었던 양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얼마나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더구나 죄인들을 사랑하시는가를 똑똑히 말씀해 주십니다. <당신들 중에서 누가 양 백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흔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두고 그 잃은 양을 찾기까지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않겠습니까?>(루가 15,4)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정말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이 회개하기를 절원하시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의로운 사람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려 오셨습니다.(루가 5,32) 생각해 보건대,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며 세상 사람 중에 의인이 있다면 극소수일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에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읍을 벌하시려고 하셨을 적에 의인 열 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의인이랑 가뭄에 콩나듯 매우 희소(稀少)한 존재임을 알 수 있는 반면, 죄인들을 세상 도처에 널리 퍼져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예수님은 이처럼 많은 죄인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인류 전체를 구하사 영원한 행복에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막연하게 죄인 대중을 상대로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 하나 하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찾아 다니시며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잃어버린 양 하나를 위해서 다른 양 아흔아홉마리보다 더 애쓰시고 염려하시다가 급기야 찾은 양을 위해서 잔치까지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하느님은 이 세상 죄인들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사 모두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고 요한 사도는 말씀하셨고, 성 바울로 사도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어 주셨는데, 거저 주시지 않을 것이 무엇이겠는가?>하고 말씀하셨으니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관대와 용서로 죄인들을 대하며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하늘나라를 약속해 주십니다.



신자 여러분! 여기서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10세 가량의 한 어린이가 있습니다. 그가 이웃 마을에 가신 어머니를 찾으러 길에 나섰습니다. 그는 제나름으로는 자신 있게 찾아가는 것같았으나 실제로 그와 반대인 방향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도 또 걸어도 이웃 동네는 좀체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린이 앞에는 겹겹이 싸인 산밖에 안 보였습니다. 그는 점점 당황하기 시작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는 걸어온 방향도 잃고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을 못할 지경이고 되돌아가려고 해도 엄두를 못 냅니다. 그는 사방으로 헤매기 시작합니다. 가도 또 가도 첩첩산중이며 그는 가시덤불과 엉겅퀴에 찔려 몸은 상처투성이입니다. 땀은 비같이 흐르고 온 몸은 목욕한 것같이 땀에 흠뻑 젖었고 울음소리도 안 나옵니다. 몸은 지쳐서 이제는 한 걸음도 내디딜 힘조차 없고 목메어 부르던 어머니 소리도 안 나옵니다. 이름 모를 고운 새의 소리도 이제는 원수처럼 들립니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가 짙은 땅거미가 깔리는가 하였더니 어느덧 어두운 밤이 엄습하였습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한 깊은 산속의 칠야(漆夜)입니다. 멀리 가까운 데서 구성진 여우 소리와 으르렁대는 맹수의 소리들이 연거푸 들려와 몸에 소름이 끼쳐지더니 무서움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립니다. 어린이는 마침내 땅에 쓰러져 정신을 잃은 상태입니다.



이때 마침 한 나그네가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엇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가까이 가서 보니 한 어린이었습니다. 「불쌍한 어린이」하고 일으키니 그는 새 정신이 나듯 「아저씨!」하고 달려들었습니다. 나그네는 어린이를 등에 업고 사람 하나를 구하였다는 보람을 느끼면서 산에서 내려와 어머니 품에 안겨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 대한 어느 학자의 주석(註釋)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이야기에 나오는 나그네는 물론 예수님이시고 길을 잃고 산중에서 헤맨 어린이는 죄인을 상징합니다. 죄인들은 생활의 목적 의식도 없고 일정한 방향도 못 잡습니다. 그저 길 잃은 양과 같이 세상에서 헤매이는 인생행로를 걷고 있으며, 갈팡질팡하는 무궤도적인 인생도상에 서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허무하고 뜻이 없는 인생이겠습니까. 들에 핀 꽃과 같은 영화나 들풀과 같은 인생살이에 하느님을 모르고서야 어찌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참다운 행복의 길을 가르쳐 주며, 영원한 평화와 기쁨과 생명의 나라로 안내해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신뢰하며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켜나감으로써 불쌍한 인간이 되지 않도록 다 같이 경각심을 일으키도록 합시다. 아멘.











20.        연중 제24주일   루가 15,1-32 (다) 고통뒤에 오는 것

                                                 최익철 신부



“눈물없이 저녁에 빵을 구워보지 못하고 엄동한천에 돌을 베개삼아 잠자보지 못한 놈은 아예 같이 앉아 인생을 논하지 말라.” 이것은 오스카 와일드의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 생활에 따라 대소의 차이는 있을망정 한 두 가지씩의 걱정이 있게 마련이며 고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외된 사람은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중에서 어떤 사람은 남달리 참혹한 고통을 겪는 수가 있습니다. 극도의 가난과 병고로 처참한 상황에 놓여진 이들도 있으며 못견디게 괴롭거나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완전히 헤어날 수 없어 보이는 고독의 늪속에 깊이 박혀 허우적이며 영구히 머무는 듯 절망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합니다. 죽도록 슬퍼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하고 이런 고통의 찌꺼기까지 마시지 않을 수 없기도 합니다. 가혹하다 생각되어지는 비참은 온 몸에, 뼈마디 마디에 사무쳐 마치 죽음과 같은 어둠을 맛보기도 합니다.



불행과 재앙을 모면하고 행복과 평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강력한 욕구 때문에 때로는 엉뚱한 일들까지 벌어집니다. 이러한 고통은 악인의 적은 선을 보상하기 위해, 선인의 적은 악을 보상시키기 위해 고통이나 재앙을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과거 성인들은 일이 잘 될 때 오히려 주께서 후세에게 나를 버리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했으며 이와는 반대로 고통을 받고 있을 때는 안심했다고 합니다.



내가 고생함으로써 누구에겐가 봉사하는 것이라면, 또 나의 고통이 하느님께 무엇인가 다소 도움이 되었다면, 내가 희생되는 것은 행복일 수도 있는 것이며 하느님이 내게 내리시는 큰 선물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앓는 자식에게 마음이 더 쏠리듯 내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느님은 더 가까이 계셔 주십니다. 또한 자신 스스로도 주께 가까이 다가서게 됨을 느낄 것입니다. 내게 닥친 상황을 좀더 긍정적으로 받아드릴 수 있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고통 속에서도 지치거나 피로하지 않을 것이며 절망도 자포자기도 하는 일없이 평화로움 속에 자기 자신을 지탱해 나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고통이 그분을 흉내낼 수 있을까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분에게는 위로나 위안이라고는 그림자조차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끊임없는 고통에 둘러 쌓여 있어서 죽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고통을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 가셨던 분이십니다.



창조주로서 피조물이 되시어 그같이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당신 말씀대로 인간 중에서도 말째가 되셨고 그야말로 천지 개벽이래 세말에 이르기까지 둘도 없는 말째가 되신 것입니다. 그 까닭에 그분은 모든 사람을 다 동정도, 위안도, 이해도 해 주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구원하시고자 제일 밑에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다 겪으셨기 때문에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실 수 있으셨고 또 인간미 넘치는 분으로 우리에게 계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피눈물이 마르도록 울어보지 못한 사람, 목이 쉬도록 부르짖어 보지 못한 사람, 극빈에 허덕여 보지 못한 사람, 팔다리가 솜같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 뼈가 으스러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해보지 못한 사람, 거듭되는 액운에 부서져 보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벗이 될 수도 없고 그런 불행한 사람에게 무슨 말을 던질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불행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이여, 안심하십시오. 말째가 되신 예수님이 언젠가는 그 눈에서 눈물을 모두 거두어 주실 것이며 감미로운 위안을 듬뿍 안겨 주실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우리는 거의 다 너무나 피상적이고, 표면적이며 형식적이고 기회적입니다. 너무나 안일한 것만 찾습니다. 조그마한 고통에도 즉시 불평하고 금방 죽기나 하듯 몸부림칩니다. 사실은 행운의 길은 트이기 시작했는데 이를 마다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이 어떻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할 수 있으며 한다해도 곧이 들리겠습니까? 입으로만 소리내는 얌체가 아닙니까? 무엇인가 절실히 느껴야 그 부르짖음도, 기도도 진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짜 아파서 소리 지를 때 엄마는 달려옵니다. 구원도 이렇게 해서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대문에 말째가 되셨는데 우리는 그분을 위해 무엇이 되어 보았습니까? 땀을 흘려 보았습니까? 피를 흘려 보았습니까? 그 이름을 부르느라고 목이 쉬어 보았습니까? 그분을 섬기고 사랑하느라고 아파 보았습니까?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이제 고뇌에 찬 얼굴들을 들어 어려웠던 순간들을 그리스도 안에 묻어 봅시다.



서양 격언에 “냇물의 돌을 치워버리면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유수같이 흘러가는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고통이란 돌을 치워버리면 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고통을 맛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강한 끈기를 낳고, 그와 같은 끈기에서 희망이 솟아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로마 5:3-4)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참는 생활이 하루 이틀 이어 간다면 앞날에 커다란 발전을 기대해 봄직할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바로 우리의 선구자들이 쌓아 올린 터전이며 역사의 수레바퀴가 와닿는 곳입니다. 이 수레는 지금까지 그렇게 왔듯이 또 그렇게 굴러 갈 것입니다. 결코 단순한 길만은 아닐 것이며 때로는 지나온 과거보다 더 험준한 잿길이 가로 놓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주님이 걸어오신 길이며 구원으로 향한 길인 것입니다. 나약한 우리 위해 손을 벌리고 서 계신 주께서 당신이 지니셨던 고통을 보여주십니다. 그리스도가 거기 계십니다. 가장 비참하고 볼품 없는 인간이 되어 계신 그리스도를 보며 고통은 순금을 만들기 위한 불임을 생각합시다.











21.     연중 제24주일   루가 15,1-32 (다)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 아버지

                                                              장인남 신부



한번은 어린이들에게 “제일 가기 싫은 곳이 어디냐?”하고 물어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어린이들은 ‘병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땐 병원에 가기를 참 싫어하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유독 감기에 약한 체질이었는지, 가는 감기, 오는 감기 빼놓지 않고 걸리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으레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제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주사를 맞게 하시곤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병원, 무서워했던 주사를 맞도록 내 두 손을 꼭 잡으시던 어머님을 어렸을 때는 무척이나 원망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어머님의 사랑때문이었구나!’하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 부모님치고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님이 어디 있겠으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이 비록 지금 당장은 감사할 줄도 모르고 원망만 하더라도, 부모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식이 잘되도록 자식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해주시려 하고, 원망을 달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같이 크신 부모님의 사랑을 우리는 바다와 같이 넓고 태산같이 높다고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은 무한히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부모님의 사랑에 비교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란 당시에 정치적으로 배척받고 종교적으로 지탄받던 몹쓸 사람들, 낙인찍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꺼려 멀리하거나 차별 대우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님이 자식들을 못난 자식, 잘난 자식 차별하지 않고 한 마음으로 사랑하듯이, 하느님은 재산, 지위, 성별, 나이, 신분 등 모두 다른 우리들을 사랑으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의 교회 안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형제들입니다. 부모님 사랑이 바다와 같이 넓다면, 우리 모두를 아들 딸로 불러주시는 하느님 사랑은 얼마나 넓고 큰 사랑이겠습니까?



또한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예외없이 결점과 약점을 지닌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이며, 아버지의 재산을 방탕과 허비로 소진한 탕아입니다. 방황하며 방탕하고, 죄에 찌들고 악에 물들은 우리는 정말 하느님 앞에서 ‘감히 아들이라고 불리운 자격이 없는’(19절)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방탕했던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인자하신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듯이 하느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며, 험난한 밤길을 마다하지 않고 목자가 길잃은 양을 찾아 나섰듯이 하느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넓고 큰 부모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의 보금자리인 것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인자와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품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입니다. 이제까지의 생활이 나빴다고 해서 “나같이 죄인은 이제 틀렸어” 또는 “이거 어디 면목이 있어야지……”하고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자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이 죄악과 결점에서 일어나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기쁨으로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우리를 맞이하시기 위해서 잔치를 준비하십니다.



아버지는 죄를 뉘우치며 돌아오는 아들을 내쫓거나 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성대한 잔치, 행복과 기쁨의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이 잔치는 바로 하늘나라의 잔치이며, 이 기쁨은 천국의 기쁨입니다. 우리들이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올 때 하느님이 베푸시는 기쁨은 곧 천국의 기쁨, 무한한 사랑의 기쁨입니다.



이제 우리는 미사를 드리고 나면 다시 각각 가정과 직장으로 돌아가서 일상생활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얼마나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부모의 은공을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효자식’이라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우리 자신은, 하느님 앞에 얼마나 온당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다시 한번 지금까지의 생활태도에 대해서 고쳐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내 생활이 나빴다고 해서 절대로 실망하거나 낙담하지는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넓은 사랑을 가진 분이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자애로운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기쁨을 함께 누리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오직 죄악을 털고 일어나 하느님 품에 안겨서 용서를 청하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우리를 부르시고 용서하시며 성체로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받아 모시는 이 미사에서, 우리 자신을 반성하여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주시도록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열심히 기도드립시다.











22.      연중 제24주일   루가 15,1-32 (다) 못나도 내 자식!

                                                     김신호 신부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자식을 키워 가는 과정에서 자식과의 사이에 갈등과 의견차이가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자식들이 어린아이일 때에는 그래도 부모가 오히려 물리적인 힘의 경쟁에서 우위에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일방통행적인 순조로운 관계가 유지될 수 있으나, 자식들이 커가면서 이러한 힘의 우위성이 상실되어 갈 때가 되면, 부모가 겪는 갈등의 폭은 더 넓어지게 된다.



  자식들이 이제 성년이 되고, 자기의 몫을 한다고 생각이 될 때에는 힘의 균형은 깨지고, 물리적인 힘이 자식에게로 기울게 되면서, 자식이 부모의 마음에 차지 않거나, 기대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부모는 배반감 같은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순조로운 상태에서 시작하여 순조로운 상태를 유지하고, 순조로운 상태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처음부터 갈등적인 요소가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여 갈등적인 관계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부모와 자식이 갈등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면, 이것은 참으로 살아가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되고 만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우리는 천륜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이것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지 인간이 결정한 일이 아닌 것으로, 하나의 윤리 도덕적인 기준을 삼고 있다.



          부모․자식 관계는 천륜



  윤리 도덕의 근본을 이루는 효의 개념이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산업화라는 사회변화를 통하여 붕괴되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요즈음 자식을 둔 부모 중에서 자식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고 사는 부모는 별로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만큼 우리는 변한 세태 속에 살고 있고,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많은 우려를 낳게 한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회개하는 자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사실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과 잃어버린 은전 그리고 잃었던 아들에 대한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물질 우선주의에 물들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나, 잃어버린 은전에 대한 비유는 이해하는 데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마도 물질의 가치를 내면의 가치보다 현대인들은 우선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잃어버린 양이나 은화를 찾는 노력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보충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관대한 父母



 그러므로 내면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마음이 없을 때, 이 두 비유는 매우 생소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잃었던 아들에 대한 비유는 이러한 앞에 나온 두 개의 비유보다는 우리의 상황적인 면에서 볼 때 훨씬 더 현실성을 반영하고 있다.

  부모 자식 관계는 천륜에 해당되므로 ‘못되어도 내 자식'이라는 생각을 부모들은 가지고 있고 ’내 자식인데 어떻게 하겠느냐'는 체념어린 생각에 기초한 자비심을 부모들은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식에게 관대한 마음을 기성세대에 해당되는 부모들은 가지고 있으므로, 오늘복음에 나오는 작은 아들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잘못한 자식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이 있겠지만, 자식이 개과천선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실제로 결심한 사실을 보여줄 때에 부모들은 이러한 자식을 다시 자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어있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만약에 인간들이 이러한 자비심을 나타내고 있다면,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어떠한 태도를 취하시겠느냐! 하는 것은 아주 명확한 답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보다 더 넓은 자비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한 사실은 정말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회개하는 마음과 결심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심은 회개하는 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의 회개하는 삶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할 것이다.











23.       연중 제24주일   루가 15,1-32 (다) 하느님의 사랑은 비경제적인가?

                                                                변희선 신부



 요즈음 꾸준한 화젯거리는 좋든지 싫든지 경제문제 일게다. 근대 자본주의 경제 이념의 아버지 격인 독일의 막스 베버라는 학자는 「건강한 자본주의의 요체는 예측 가능성이다」라고 말했다.「예측 가능성」은 경제 문제에 있어서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보자. 7,80년대에 서울의 강남지역에 땅값이 수백배까지 폭등했다. 이 점을 미리 예측한 일부 땅 투기꾼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졸부」즉, 졸지에 부자가 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다. 이처럼 「예측 가능성」의 부작용도 있지만 긍정적인 경우가 더 많다.



  그것은 이「예측 가능성」이, 특정한 경제 공동체의 「공동선_1과 「경제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애쓰게 마련이고,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는 예측이 가능해야 돈을 어디론가 투자를 하든지, 소비를 하든지, 아니면 저축을 하든지를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다. 정부도 국민들의 세금을 모아서 앞으로 필요한 공공사업에 투자를 해야 하는데, 어떤 사업이 가장 중요하고 공동선에 이바지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 국민을 위한 정부의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네 삶은 예측 불허의 연속이기도 하다. 지난 여름의 수해는「게릴라식 폭우」라서 기상예보가 거의 불가능한 경우였다. 대부분은 자신들의 죽는 때를 예측하지 못한다. 이처럼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가 매우 많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 세 가지를 들어 비유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에서 흔히 일어났던 일들, 즉 양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잃은 경우, 은전 열 닢 중에서 하나를 잃은 경우, 두 아들 중에서 한 아들을 잃은 이야기 등이 나온다.



  이 상황을 요즈음 말하는 소위「경제논리」에 비추어보자. 양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는 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흔 아홉 마리를 내버려두고 한 마리 길일은 양을 찾아 헤매는 것은 비경제적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한 마리에 집착하다가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 양에게 소홀해서야 되겠는가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은전의 경우도 양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들이 두 명이 아니라 열명일지라도 그 중에서 하나를 잃으면 부모의 슬픔은 어떨지 상상해보자.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다. 한 자녀일지라도 부모 자신의 목숨 이상으로 귀

할 수도 있다. 한 마리의 양, 한 닢의 은전도 경우에 따라서 매우 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가 뜻하는 의미는 사뭇 다른 면도 있다. 가령 길을 잃고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헤매는 양의 입장에서 서서, 그 심정을 헤아려보자. 비록 짐승이라서 인

간의 언어로 표현을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주인을 찾아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은 얼마나 가련한가? 은전 한 닢이라도 좋은 주인에 의해 멋지게 쓰임을 기대했던 희망은 어디로 갔는가! 더욱이 부모를 떠나버리고 절망에 빠진 자녀의 마음이야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이렇게 예측하기 어려운 곤경에 처한 양, 동전,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주인, 부모님, 하느님께서 자기를 찾아줄 것을 기대하고 희망하는 마음일 것이다. 즉 자신의 잘못이 아무리 크고, 아무리 어려운 곤경에 처해 있더라도 자신을 찾아내 주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면 그(것)는 최선을 다해 존재할 의미가 생긴다.



  결국 자신의 잘못으로 아무리 쓸모 없는 인간으로 여겨지고,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더라도 하느님만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하실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비합리적이고 비경제적인 듯한 진짜 하느님의 경제학을 살 수 있게 된다.











24.    연중 제24주일   루가 15,1-32 (다) 잃은 것이 뭐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출애 32,7~11.13~14 (이 애원을 들으시고 주께서는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셨다) 

제2독서 Ⅰ디모 1,12~17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복 음 루가 15,1~32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성서를 통해서 볼 때 인간의 역사는 온갖 죄악으로 점철된 범죄의 역사입니다. 인간은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세상 끝 날까지 범죄를 일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또 끈질기게 인간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을 달래시며 용서하고 계십니다. 인간 하나 하나는 정말 하느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자녀들입니다. 오늘 세 독서는 모두 우리에게 감동적인 내용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1독서는 하느님을 저버리고 모독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모세가 하느님께 간절하게 매달리는 장면이며, 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죄 많은 과거를 상기시키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3독서인 복음에서는, 세 비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하느님은 길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셨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번째 비유인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성서의 꽃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문학사상 가장 완벽하고 훌륭한 단편소설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 많은 인생들입니다. 어제 용서받았지만 오늘 다시 용서받아야 하고 내일도 역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죄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인생의 여정은 필연적으로 실패를 통해서 걸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이 더 크게 빛나는 것입니다.



언젠가 TV에서 서커스의 놀라운 묘기를 보면서 단원들이 그 같은 묘기를 감동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는 수백 번, 수천 번의 실수의 반복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없이 실패를 거듭하지만 그러나 끝내는 하나의 묘기를 마스터할 수 있듯이 인간의 완성이라는 것도 역시 그런 것입니다. 실패가 없으면 성공도 없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실패가 따르지 않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으며 실패는 또 아프고 부끄럽지만 실패를 통해서 인간은 자기 완성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가 저질렀던 모든 죄의 잘못도 틀림없이 하느님 안에서의 완성을 이루는 데 일종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모 잡지에 매월 수필을 기고할 때 저는 정말 그 작업을 하 고 싶지 않았습니다. 배당된 분량은 원고지 7매였는데 이 일곱 장의 원고를 완성하려면 원고지 30장은 찢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글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소질도 없는 일이기에 제발 그만 좀 하게 해 달라고 해도 잡지사에서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입니다. 우연히 그 잡지사에서 모 문인과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분이 제 글을 아주 재미있고 감동 깊게 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도 부끄럽고 황송해서 "당신이야말로 글 쓰는 전문가이지만, 나는 정말 쓸 줄도 몰라서 매월 원고지를 수십 장씩 찢어 발겨야 한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분도 그랬습니다.



자기도 명색이 소설가지만 한 장의 글이 써지지 않아서 밤새 몸부림을 칠 때가 있으며 서너 매의 글을 쓰기 위해서 수십 장의 원고지가 휴지통에 쑤셔 박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분들은 펜만 들면 술술술 글이 물 흐르듯이 써지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어떤 예술가, 어떤 과학자, 어떤 성직자도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실패의 연속을 딛고 일어서서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고 위대함이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잘 할 수 있다면 하느님은 인간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결국은 인간의 실패와 범죄 위에서 빛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나 범죄까지도 아름답고 위대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나려는 의지와 결심 때문이지 인간이 오로지 그 실패와 범죄에 탐닉되어 있다면 그것은 정말 꼴불견이요 구제불능입니다. 거기엔 아무런 아름다움도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우리 자신을 진실되게 바라봐야 합니다.



하느님은 길 잃은 자를 찾아 오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길 잃은 줄을 모르고, 자기가 눈 닫힌 줄을 모르며, 또 자기의 귀가 닫힌 줄을 모른다면 그는 영원히 구제불능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은총을 만나기 위해선 우리 자신의 실패와 죄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실패를 찾아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딛고 일어섭시다. 하느님의 은총이 바로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25.    연중 제24주일   루가 15,1-32 (다) 작은아들의 깨달음과 아버지의 사랑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24 주일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비유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비유 말씀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대부분 이 비유 말씀을 탕자의 비유라고 합니다만, 사실 이 비유 말씀의 주인공은 집 떠난 아들이 아니라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 말씀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십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오늘 예수께서 들려주신 작은아들의 비유에 의하면 인간은 배신하고 반역하면서 홀로 서기를 원하나, 사실은 영원히 홀로 설 수 없는 어설픈 존재라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홀로 서기를 시도합니다. 만일 작은아들이 자기가 누구이며 또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었더라면 그런 어설픈 짓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언제나 몽매하고 미련한 것처럼, 작은아들도 자기가 누구인지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하였기에, 감히 독립을 선언하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기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지, 맨주먹으로 아버지를 떠나서 독립하겠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거두어서 모두 현금으로 바꾼 다음, 007가방에 현금을 가득 채운 후에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미지의 세계로 향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의지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작은아들은 자신의 수중에 들어 있는 돈에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수중에 돈이 있는 동안 그는 든든했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많은 친구들도 있었고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그는 참으로 유쾌하고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여자들과 술과 향락 속에서 그는 아버지와 아버지 집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 자신이 누리고 있는 그런 방탕한 생활이 파멸의 시작인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중에 언제까지나 돈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자기 주위에 친구들과 여자들이 함께 머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이 이 세상 재물과 돈의 허망함, 그리고 인심의 야박함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의 일입니다. 언제까지나 자신의 수중에 남아있을 것 같은 돈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돈이 있을 때에 자신과 어울리던 친구들도 수중의 돈이 떨어지자 모두 떠나가고, 온갖 아양과 교태를 다 부리면서 따라다니던 여자들도 언제 보았더냐는 식으로 그를 외면하고 만 것입니다.

  엎친 데 덮친다는 식으로 때 맞추어 그 지방에 엄청난 흉년까지 들게 되었습니다. 그 도시 사람들은 자기들 살기에 바쁜 나머지 불행에 빠진 작은아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작은아들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어떤 사람의 집에서 돼지를 치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는데도 아무도 그를 도와 주지 않았고 따뜻한 밥 한 그릇 주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그는 돼지가 먹는 구정물 찌꺼기를 건져 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부호의 아들이었던 작은아들이 인생의 가장 낮은 밑바닥에 뚝 떨어져서 돼지들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하인들도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데, 집 떠난 작은아들은 더럽고 냄새나는 썩은 음식을 돼지들과 함께 먹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난 아들의 비참한 모습은,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입니다. 돈이나 재물을 좀 지니고 있을 때, 젊고 건강할 때, 재능과 재주가 있다고 자만할 때,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바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없이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대체 재물이 란 무엇이며 돈이란 무엇입니까? 젊음은 무엇이며 건강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그런 것을 바탕으로 해서 홀로 서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며 어리석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간이란, 자신의 운명의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내일, 아니 한 시간후의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면서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재물이 있다고, 돈을 좀 지니고 있다고, 그리고 젊고 건강하다고 자만하면서 그것들을 믿고, 하느님을 떠나서 홀로 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요?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최후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돼지우리 속에 앉아서 더러운 구정물을 마시고 있는 작은아들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다행하게도 작은아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고, 지니고 있던 것을 모두 잃고 빈털터리 알거지가 되었을 때, 눈을 뜨게 되었고, 자신의 그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 발가벗은 적나라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늦게나마 그가 눈을 뜨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자신의 모습이 아버지의 집에 있는 하인보다도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게 되면, 한 마리의 짐승에 불과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아무리 겉으로 화려하게 호의호식한다 할지라도, 그는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만 못한 것입니다.

작은아들은 돼지우리 속에 앉아서 바로 이 점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작은아들은 모든 것을 다 잃고 빈털터리 발가숭이가 되었을 때 깨달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란 본래 미련하고 우둔해서 자신이 무엇을 좀 지니고 있을 때는 본래의 자기 모습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신이 지닌 돈을 자랑하고, 쥐꼬리만한 능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지위를 자랑하면서 오만한 자세로 살아가게 됩니다. 인간본래의 자기 모습이 아닌, 온갖 장식품으로 치장된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인간은 언제나 어리석게 살 수 밖에 없고 그 어리석음이 작은아들처럼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돼지우리 속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서, 아들로서가 아니라 하인 중에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한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작은아들이 파멸 직전의 비참함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아버지께 희망을 걸게 된 것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 작정이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인으로 저를 써 주시고, 밥이라도 배부르게 먹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리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배신과 반역에 비하면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은 얼마나 한량이 없으신지요?

아버지는 아들이 집 떠난 이후 하루도 그 아들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들은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까맣게 잊었어도, 아버지는 늘 아들 걱정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는 늘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이나 동구 밖에 나가 서성이곤 했습니다. 그랬기에 저 멀리 거지꼴로 돌아오는 아들을 한눈에 알아보고 뛰어가서, 작은아들을 껴안고 입맞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바로 이런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인간이 죄짓고 배신하여 당신을 떠났어도, 언제나 우리가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우리를 언제나 반갑게 맞이하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거지꼴이 되어서 남루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맞아주면서 그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를 목욕시켜 더러움을 씻어주고, 좋은 옷을 입혀주고 가락지를 끼워주어 아들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 아들이 죽지 않고 돌아왔음을 기뻐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그 한량없는 사랑과 자비 때문에 새 생명을 얻게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한 일이란, 아버지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일과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일, 그리고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쳐 드린 일밖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받아 주어서 새 삶을 누리게 해주십니다. 작은아들이 유일하게 한 일이란, 제 발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앞에 드러내 놓고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나약함, 그리고 죄 많음 밖에는, 하느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고 회개하여, 그분에게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새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구원과 새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자랑할 만한 공로를 쌓았거나, 공덕을 닦아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앞에 서면 언제나 죄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 중에 살면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간들의 죄가 크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그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죄인이긴 하지만,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언제나 문을 열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 안에서 새 생명을 누리는 생활을 합시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26.       연중 제24주일   루가 15,1-32 (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느님



묵상 : 예수님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데 일생을 바치셨다. 오늘 복음의 세가지 비유는 신약성서 중 가장 아름다운 말씀이다. 하느님이 죄인과 잃어버린 이들을 사랑하는 분임을 깨달을 때 참된 신앙인이 된다.



   윤락여성에게 봉사하는 수녀님



  하루는 평소 잘 아는 수녀님이 방문하셨다. 그 수녀님은 서울역 근방 윤락가에서 윤락녀들을 돌보고 있는 분이셨다. 이야기를 하는 중에 윤락여성들의 실태와 갖가지 사연, 그들을 돌보는데 따르는 어려움들을 들을 수 있었다. 함께 있던 나이가 좀 드신 아주머니 한 분이 “수녀님들이 '그런 것들'한테까지 신경을 쓰면서 봉사를 해야 합니까?"하며, 쓰레기 같은 것들을 위해 그렇게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투로 못마땅해 하였다. 물론 그냥 보기도 아까운 천사같은 수녀님들이 윤락가에서 일한다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는 식으로 교회는 죄인들과는 확실한 선을 긋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많은 신자들이 ’미혼모들의 집'이나 윤락녀들을 위한 교회의 시설과 활동에 대해 깊이 이해를 하지 못하고, 속으로 ‘망할 것들',’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교회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를 똑바로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인가?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믿고 있는 신(神)의 모습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생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신관(神觀)에 따라 신앙생활도 달라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참 모습을 가장 잘 알려주신 분은 계시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신가? 오늘 복음에는 ‘잃었던 양 한 마리', ’잃었던 은전', ‘잃었던 아들'의 비유가 나온다. 예수님 시대엔,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는 로마에 발붙여 동족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고, 자기들도 떼어먹는 세리는 민족의 배반자란다. 그들은 창녀와 함께 대표적인 죄인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삼으셨고, 세관장 자케오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회개한 죄녀 막달라 마리아의 집을 자주 드나드셨다. 또한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자를 “다시는 죄짓지 말라"하시며 용서해 주시기도 하셨다.



  뿐만 아니라, 형제들을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주변에는 오늘 복음의 말씀대로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이 광경을 보고 율법학자들과, 가장 열심하고 경건한 자로 자처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해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하며 못마땅해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들을 향해 오늘 복음의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비유들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신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죄인들을 벌주고 심판하기 위해 정의의 칼날을 세우고 휘두르시는 분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헤매시고,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죄인들이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고 당당히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항상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과 ’잃은 자'를 찾으시며 사랑하신다"는 사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선포하신 기쁜 소식 즉 ‘복음'인 것이다,



  하느님의 비할 데 없는 사랑



  예수님은 “아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고 하셨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히 보여주신다, 일찍이 신학자 한스 큉은 “인류역사상 ‘죄인들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가르친 분은 예수님 외에는 없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도 결국 그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 등, 당시 지도자들과 예수님의 신관의 차이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예수님은 일생 동안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전하셨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놓으시고 죽으셨다,"(로마 5,8)



  한마디로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하여 ‘잃어버린 자들과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려면 우리도 형제들을 거듭거듭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하느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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