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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0:47
분 류 연중19-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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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24 주일

        12. 유진선 신부(나)/ 22

        13. 백은기 신부(나)/ 24        14. 강길웅 신부(나)/ 28

        15. 이 동 신부(나)/ 30         16. 송홍철 부제(나)/ 31

        17. 교구 주보(나)/ 32          18. 이규희 작가(나)/ 34



12.         연중 제24주일   마르 8,27-35 (나) 무신앙의 비참

                                                   유진선 신부



마태오 복음 27장 3절부터 6절에 「배반자 유다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자기가 저지른 일을 뉘우쳤다. 유다는 그 은전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 매달아 죽었다.」



이 성경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유다스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다시말하면 무신앙의 비참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옛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개인 많은 나라가 무신앙의 결과로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가 잘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특히 로마의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로마는 이태리의 일부에서 일어나더니 드디어 천하를 병탄(倂呑)하여 대국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토지에 따라서 믿는 신이 정해지는 관계로 토지가 다르면 신앙도 달랐는데 로마가 세력을 얻어 사방을 병탄하게 되면서 묘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는 정복자이기 때문에 물론 피정복국의 신을 정복한 땅과 더불어 받아들였으나 피정복국의 식민지라 무력하게 생각하여 이것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정치적으로 생각할 때 피정복국민을 다스리는 방법의 일환으로 그들이 믿는 신을 아주 무시해 버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하나의 토지를 정복하는 때마다 그곳의 신을 분포(分浦)하였다가 로마성내에 진열했던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박물관에 고물을 벌려 놓는 것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듯 많은 신을 가져다가 벌려놓고 나니 자연히 그 신들을 경멸하는 습관이 생겨지게 되고 그러한 습관은 드디어 로마인으로 하여금 자기들 고유의 신에 대하여서도 의심을 품게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의 신앙 동요의 시초이고 피정복국민들도 또한 분포되어가는 신에게는 차츰 경의를 표하지 않게 되어 드디어는 로마 천하에는 전체가 무종교 무신앙의 공기로 차게 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의 대다수는 “로마는 로마인의 품행이 어지러워짐으로서 망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더 나아가 로마인은 어찌하여 품행이 그렇듯이 어지러워졌으며 어찌하여 재력을 그처럼 극도로 낭비 남용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그들의 도덕심 종교심을 만족케할 근거가 무너졌기 때문에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부패한 신앙이 쇠약해지고 새로운 신앙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과도시대에 로마인은 한때 그 서야할 마음의 토대를 잃었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부도덕이 되고 부도덕의 결과는 한편 공공심을 없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신체를 쇠약케하여 야만인들과 싸울 수 없게까지 하고 드디어 미개인에게 멸망당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사람이 한번 영생의 신앙을 잃고 다만 이 현세 있으리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면 그 방향은 실로 그칠 줄 모르는데 이르는 것입니다. 로마인의 역사는 그 좋은 실례입니다.



로마의 문명은 앞서 있었으나 무신앙의 상태에 빠지자 도덕의 타락이 심해지고 드디어 육체의 욕망을 토대로 함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전체로 사람의 쾌락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여 그칠 줄 모르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도 매일 계속되면 좋은 줄을 모르게 되고 궁궐도 익숙해지게 되면 기쁜 곳이 되지 못하는 법입니다.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영달, 영화 끝에 그만 지쳐버려 만년에도 다도(茶道)만을 즐겼다는 이야기며, 또 로마의 네로황제는 가진 육체적 쾌락을 다 맛봄으로 만족치 못하고 로마시를 불살라 버림으로써 쾌감을 맛보겠다는 심사 등이 바로 우리 인간 심리상태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한번 정신적인 유쾌감을 잃고 육체상의 쾌락을 추구하게 되면 드디어는 이상야릇한 일을 즐기려 하고 인간의 욕망은 마침내 불행한데 까지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의 일귀족이 모든 일락을 다하던 끝에 이제는 더 할것이 없어 최후로 남은 것은 유쾌한 가운데 죽는 것뿐으로 생각하여 죽기로 결심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도중에 스스로 동맥을 끊고 자살했다는 말과 같이 육체상의 쾌락을 추구한 끝에는 언제나 이런 불상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구약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용맹스런 호걸이었습니다. 그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게릴라전술로써 원수인 불레셋 사람을 크게 괴롭히곤 했습니다.

그러나 육적 쾌락을 추구하여 불의한 원수의 여성과 관계하게된 이후 그는 자기 머리털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밝혀버리게 되어 불레셋 사람에게 잡힌 후 비참한 최후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임금 사울은 용모가 뛰어나고 키가 크며 용기가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아 왕위에 오른 후 모압, 압몬, 에돔, 불레셋, 아말렉등 여러 민족과 싸워서 늘 이기고 나라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졌습니다. 그러나 아말렉과의 싸움에는 욕심이 생겨 하느님께서 진멸하라고 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양들은 남겨놓고 쓸모없고 가치없는 낮은 것들만 진멸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의 진노를 크게 사 정신착란증을 일으켰고 드디어는 불레셋인과 싸우다가 길보아에서 그의 사랑하는 용감스러운 아들 요나단과 두 아들이 전사하는 것을 보고는 비분을 참지 못해 자기의 칼로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개인 사회 가정 국가 민족에 있어서 신앙을 잃게되면 그때 오는 것은 비참 뿐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구하느냐? 육체의 쾌락을 구하느냐는 것은 이것이 영신적으로 사느냐 금수처럼 사느냐의 분기점인 것입니다.



현재의 쾌락만을 구하고 있다면 로마인과 같이 학술도 부귀도 위력도 이것을 구할 수가 없게 됩니다.

무엇으로 이것을 구할 것인가 - 이것은 다만 종교의 힘에 의할 뿐입니다. 종교에 의해 성화의 길을 걷고 잇는 우리는 육체적 향락의 욕망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것만이 신앙의 참된 태도일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는 이것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된 신앙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고 영원한 나라로 전진하여야 하겠습니다.











13.         연중 제24주일   마르 8,27-35 (나) 인간의 고백과 하느님의 구원

                                                        백은기 신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사랑의 고백을 해보신 경험이 있으신지요? 인간을 일컬어 사랑의 동물이라고들 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려 하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남을 사랑하고 싶은 충동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애물(愛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사랑에 있어서는 상호 교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서로가 사랑을 주고 또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절대적인 분이시며,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인간을 사랑하시는데는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고 있습니다. 일찌기 우리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다 못해 사랑의 고백을 해 오셨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미 2천년 전에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외아들 예수를 인간 세상에 보내주셔서, 그로 하여금 구원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가 사랑하고 싶어하는 이에게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먼저 이 같은 고백을 하셨으니, 우리는 주님을 위해 신앙의 고백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신앙고백이라 함은 자신의 양심고백이며, 인격적 내지는 전생명적인 고백을 동반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신앙고백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은 자명하다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1

일반적으로 고백행위는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며, 그분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고, 아울러 자신의 잘못을 고발하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상대로 해서 신앙고백과 사랑의 고백을 한다는 것은, 주님을 전적으로 지지할 뿐 아니라,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하기를 원하는 것도 포함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백의 뜻 속에는 자신을 신탁하고 그분의 의도하심에 따른다는 것까지 함축한 내용일 것입니다.



사람은 인간을 깊이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느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 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즉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밝히신 것을 보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증표로 먼저 인간을 살아해야 하며,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장 40절). 특히 그 가운데서도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었으며 옥에 갇히고 인권을 빼앗기고 살며,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사는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을 돌봐 줄 때마다 바로 나에게 대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인간이 되셔서 오셨고, 사람을 위해서 역사하셨으며, 인간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것입니다. 현대 인간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하느님과 내 이웃 형제들을 모르고 살아온 점과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점,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것을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인간은 근원적인 배경을 통해서 볼 때, 원죄 이후의 인간들은 세상의 한계와 자신의 능력한계에서 항상 고독을 느끼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인간은 위대한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저 유명한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기원 후 354년 아프리카 태게스트에서(Tagaste) 출생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마니교에서 젊음을 불태웠고 쾌락과 본능에 모든 것을 바쳐버려 거의 타락한 상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를 그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의 끈질긴 눈물의 호소와 기도의 덕분으로 그는 과거의 모든 잘못을 깨끗이 씻고, 새로운 인간상 곧, 하느님의 의화된 옷을 입고 구원의 향기를 머금게 되었습니다. 그는 개종한 후 하느님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전기를 집필하였으니, 이것이 유명한 고백록입니다.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눈물의 양심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 주시여, 나는 당신을 잊었어도 당신은 나를 저버리지 않으시나이다. 이제야 당신을 부르는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주여, 어여삐 여기소서 아뢰나이다. 내가 당신의 무엇이길래 나같은 것이 당신을 사랑하라 명하시고, 아니하면, 진노하시며 엄청난 비참을 내리시리라 이르시나이까?”(고백록 제 13장 1편, 제 11장 5편). 정말 자신의 존재 깊숙이 흘러나오는 신앙과 사랑과 갈망의 호소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연민적인 하소연에 자신을 송두리채 덮어버린 결과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인식으로 끝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자기 인생에 있어서 생활 가운데 체험하고 경험한 것이라야만 합니다.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외인들도 지식과 상식으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인류 구속자이라는 것쯤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를 증거해야 하며, 주(主)가 되신다는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마태 10장 37)고 하셨음을 보아도, 주님께 대해서는 절대적인 사랑의 봉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자신을 고백하므로 성숙과 균형을 가지게 되며,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느님과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사도행전에서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예수께 대한 사랑과 충성과 열망이 얼마나 큰지를 충분히 납득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펠릭스와 아그립바 총독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사실을 해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나는 다르소에서 출생한 전통적인 유대교인이며 바리사이 사람입니다. 내가 산헤드리움의회 의원으로 재직할 때,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체포하던 사람이란 것을 여러분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루는 교인을 잡으러 다마스커스로 가던 도중 하느님의 빛을 보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난 후로는 나도 모르게 예수의 사랑에 완전히 노예가 되었고, 그분이 당신의 목숨을 바쳐 살려내신 그 사랑에 나는 빚쟁이가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열변을 토하고 있는 그에게 군중들은 저 사람은 예수 때문에 미쳐버렸다고 했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로 봐서는 사도 바울로가 예수 때문에 유대교에서 개종하였고 그리스도교회의 신학을 닦던 초대교회로 볼 때는 참으로 큰 공로자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재언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나를 아무도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는 그리스도 예수가 내 생의 전부입니다”(갈라 6장 5절, 필립 1장 21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도 사도 바울로와 같이 영혼의 낙인이 찍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세례로서 인호가 박혀있음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기 위하여 당신이 가지신 것을 모두 바치었고, 남김없이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그늘 밑에서 일생을 신음과 고통 속에서 죽어가야만 할 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헌으로 말미암아 대속을 받은 것입니다. 과연 내가 주님에게 도대체 무엇이길래 당신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고, 당신은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까?



하찮은 내가 주님 앞에는 그리도 사랑스러웁고 귀여운 존재이옵니까?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시면 질투를 내시고, 내 눈 시야에서 눈길을 돌리면 역정을 내시고, 내 마음이 곁에서 멀어져 가오면 투정을 부리시나이까? 주여, 당신은 참으로 뉘시오이까? 또 당신 앞에 있는 나는 도대체 뭣이길래 그토록 당신 열정을 다 쏟아 주시옵니까? 내 몸과 영은 오로지 당신으로부터 받았고 당신의 손에 달렸사옵니다. 주여! 당신 어전에 삼가 오로지 다 바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이 내 생명 주님을 위한 사랑의 도구로서 바치오니 받아 주옵소서.



고백은 부끄러운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느님께 맞갖도록 하는 것이며, 절대매체에 의한 가치기준을 따라 자신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일대 거사인 것입니다. 나의 자연적인 성향에서 초월적인 경향을 띠게 하는 것이 곧 신앙고백이며, 사랑의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만을 섬기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간을 위해 봉사하시며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십자가 위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심으로서, 우리 죽을 인간을 하느님 앞에 올바르게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예언을 통해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예언을 완성시키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 분께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본 사도들은 그들의 삶 속에 확신을 갖고 살았던 것이며, 예수를 주님이라 불렀으며, 그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가면서 충성을 했습니다. 또한 숫한 치명자들과 순교자들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것은, 성령의 감도가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바칠 과감한 결단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모름지기 베드로와 같이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하느님의 성자되심을 솔직히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누구도 성령의 도움없이는 예수가 구세주라는 것을 고백하기는 어렵다고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소망의 주님으로 모시도록 해야하며, 그분을 통해서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를 위해 오셨고, 또 사셨던 예수를 믿음과 사랑과 바램으로 대할 수 있도록 합시다.



끝으로 우리는 예수께서 이 시간, 이 장소에 있는 구체적인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신다면, 나는 무슨 대답으로 주 예수를 기쁘게 해드릴까하고 다같이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네 부모와 처자와 벗들과 가진 모든 재산과 명예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고 있느냐?

그리고, 너는 양심적으로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감사합니다.











14.      연중 제24주일   마르 8,27-35 (나) 고난받는 종의 메시아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0,5~9a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긴다) 

제2독서 야고 2,14~18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복 음 마르 8,27~35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이사야서에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가 네 개가 나옵니다. 그 종은 일찍이 본 일도 없고 들은 일도 없을 정도로 박해를 당해서 사람의 형상마저 일그러져 아주 비참하게 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 그 종은 때려도 가만있고 침을 뱉어도 피하지 않으며 수염을 뽑아도 대들지 않고 바보처럼 그저 당하기만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야훼의 종'은 특별한 사명을 지닌 인물로 등장하는데 그가 과연 누군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이 종은 모순되는 점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종이면 씩씩하고 영예로워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가 억울한 고난을 받기 때문입니다.



야훼의 종, 고난받는 종이 도대체 누구냐? 이것은 구약의 수수께끼였으며 일종의 감춰진 보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야훼의 고난받는 종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여 시대가 바뀌고 새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에 조명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숨겨진 미스테리였습니다. 수백 년이 지나도 그런 인물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장면은 바뀌어, 오늘 예수님은 잡신들이 우글거리는 이방인 지역을 제자들과 함께 가시다가 문득 한 가지 질문을 불쑥 던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었으며 교육이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의견은 분분했습니다. 세례자 요한 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며 그냥 예언자 중의 하나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께서 원하시는 대답이 아닙니다.



이때 예수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다른 사람은 다 착각하고 있다 해도 제자들은 과연 당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대답을 못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자신있게 말합니다. "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희랍말이고 히브리말로는 메시아요 우리말로는 구세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만이 옳게 바라보고 바르게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수제자가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도 착각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관입니다.



베드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메시아란 현세적으로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진 분이라 믿었으며 바로 그 힘으로 나라를 해방시키고 경제적으로 부흥시키며 또한 사회를 안정시키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보처럼 당신이 사람들에게 잡혀 버림을 받아 죽는다고 하시자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펄쩍 뛰면서 주님을 말렸습니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대처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베드로는 잘 나가다가 사탄으로 전락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바라보는 베드로의 믿음의 눈은 아주 위대했지만 그러나 그 그리스도를 현세적인 문제의 해결사로만 봤다면 그건 잘못입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고 야심이었으며 탐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래서 큰 꾸지람을 듣습니다. 정신이 번쩍 날 정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생활은 사탄으로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게 신앙의 모순이며 그리고 그 모순 속에서 평생 방황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메시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메시아는 이미 왔으며 그가 곧 예수님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1독서를 가지고 예수를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지적한 대로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이 끌려가시어 얻어맞고 가시관을 쓰셨으며 십자가에 못박혀 처절하게 운명 하셨습니다. 그래도 자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비굴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떳떳하고 당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일찍이 그들의 메시아가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게 신앙의 아이러니입니다.

십자가는 실로 구원의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십자가를 짊어지는 문제에서는 갈등이 많습니다. 그것이 아프고 서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거부하면 그 사실 때문에 사탄이 됩니다. 즉 하느님을 거부하는 자가 됩니다. 억울해도 져야 합니다. 거기에 놀라운 구원의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예수님이 정말 구세주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여러분 안에서 큰 일을 하실 것입니다.











15.      연중 제24주일   마르 8,27-35 (나) 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는데

                                                   이 동 신부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다.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먼저 용서를 청한다. 글 재주 없는 사람이 차례가 되어 억지로 생각을 쥐어 짜내어 쓰는 글은 읽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원칙)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 자의 기준을 누구에게 놓고 사는가에 따라서 삶의 모습과 방법은 많이 다르다. 다른 사람의 처지나 상황을 기준으로 해서 자를 사용하는 사람은 따뜻한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겠지만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사용하는 자의 기준은 그 사람을 썰렁한 사람으로 살게 할 것이다.



아파트를 짓다가 회사가 부도가 나자 입주예정자들은 농성을 하며 어떻게든 입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고, 서로 합의한 끝에 회사는 많은 손해를 보고도 아파트를 지어 주었다든가. 그랬더니 이번에는 공사가 지연되어서 입주가 늦어졌으니 지체금을 내어놓으라고 했다나. 이러한 모습이 바로 사람들의 잣대이다. 관대함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좁쌀같은 마음.



하느님은 어떤 자를 가지고 계실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라고 성서는 가르쳐 주고 있는가?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대로 갚지도 않으시는 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분, 바로 그러한 자를 가지고 우리의 처지를 돌보아 주시는 분이시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이러한 하느님을 알면서도 나는 이 가을에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하느님 저 미운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좀 해 주시지 않나요? 하면서 자신을 기준으로 한 자를 가지고 세상과 하느님을 재면서 썰렁한 가을을 맞이하고 있지는 않는지? 오히려 하느님께 먼저 우리 자신을 주시도록 청해야 하지 않을까? 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는데.











16.         연중 제24주일   마르 8,27-35 (나) 참된 죽음의 의미

                                                      송홍철 부제



저는 지난 여름 어느 날, 우연히 신물을 보던 중 뭉클한 감동을 크게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느 가난한 시골 역장의 순직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서울발 문산행 열차에 아기를 업고 내린 여인이 그 반대쪽에서 오는 열차를 보고 철길을 건너가고 있었는데 이 위험한 순간을 목격한 역장은 달려가 그 여인을 밀어냈지만 자신은 미처 피하지 못한 채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죽음이 시행착오가 낳은 어리석은 행동의 결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져 가는 세태라, 어진 일을 위해 목숨마저 바친 이 얘깃거리가 한낱 우스꽝스런 이야기로 들린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뜻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건이 가져다 준 충격은 너무나 큽니다.



비록 아귀다툼같은 각박한 세상이라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여긴 이 숭고한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게 끝나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문도 그의 사설에서 “그토록 아까운 목숨마저 한 여인과 어린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바친 그 마음씨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려주고 있다”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분은 자기를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살린 것입니다.



그런데 한층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죽음과는 견줄 수 없는 또다른 죽음이 우리 가운데서 재현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독히도 사람들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스스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까지 오셨습니다. 이토록 사랑이 가득하신 아버지는 죄와 죽음의 계속에서 시련당하고 있는 자녀들을 건져내시기 위해 저 십자가 위에서 희생제물이 되고 계십니다. 온 세상에 이보다 더 엄청난 사건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분의 자녀들은 이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녀들이 밑에서만 십자가를 우러러 볼 뿐이지 정녕 그 위에 달려계신 그분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자녀라 자처하는 우리들마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 8,29)라는 그분의 물음에 동문서답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단론자들은 그분을 마술쟁이나 용공분자 아니면 히피(Hippie)의 우두머리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분을 성자나 예언자 아니면 사회 혁명가 정도로 알고 있기 일쑤입니다. 이와같이 안타까운 현실은 예수님 당대에 군중들이 그분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로 알아들었던 것과 같으며, 그의 반대자들인 율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 분을 마귀들린 자와 정신병자로 몰아붙이던 처사와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나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이러한 자세로서는 결코 참된 죽음의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베드로 사도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선생님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1”(마르 8,29)이라 고백할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안목을 갖춘 신앙인에게 십자가는 더 이상 고통과 죽음의 상징이 아니며 오히려 생명의 상징이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십자가 위의 죽음은 구원의 유일한 지름길인 것입니다. 그 누구든지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 8,24)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교형 자매 여러분!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까지도 십자가 앞에서 두리번거려야만 합니까? 이 미사 중에 죽음으로써 봉헌되고 계신 아빠의 사랑이 미심쩍어서 그렇습니까? 우리는 더이상 그분의 죽음을 감상하거나 입술이나 혀끝만으로 사랑을 고백하지 말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진정한 믿음을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께서도 오늘 서간에서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물론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실의와 좌절이란 죽음이 따릅니다. 어떤 경우엔 이사야 예언자처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이사 50,6)라고 울부짖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마르 8,35)하신 주님의 말씀을 깊이 신뢰한다면 그 누구나 시련과 함께 오는 참 기쁨과 평화를 맛볼 것입니다.



주님과 형제를 위해 이기적인 자기를 죽이는 것만이 자기를 영원히 살리는 비결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수치의 표지가 아니라 영광의 표지입니다.











17.      연중 제24주일   마르 8,27-35 (나)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교구 주보



1. 복음이야기

오늘 복음은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27-30절),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31- 33절), 예수 추종에 관한 말씀(34-38절)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ᄀ.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27-30절)

  예수께서 어느날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로 떠났습니다. 예수께서는 가이사리아로 가시는 도중에 제자들을 향해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디까?” 하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 엘리야, 더러는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한다는 대답을 하자 예수께서 같은 질문을 한번 더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는 주로 갈릴래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의 반응을 알아보시려고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디까?”라고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단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정체를 바로 파악하여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몰라 보았지만 베드로만은 예수님의 정체를 바로 보았던 것입니다.

ᄂ.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31-33절)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고 난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영화를 누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고난을 겪고 부활하실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잡아당기며 책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물러가라, 사탄아!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시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신 말씀은 베드로가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일랑 버리고 제자의 위치로 돌아가 수난의 길을 가실 스승을 따를 생각을 하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 말씀을 “베드로야, 네 자리는 내 뒤이지 내 앞이 아니다. 네 자리는 내가 선택한 길을 따르는 것이지 네가 가고 싶은대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다” 라고 풀이했습니다.



 2. 우리의 이해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예수님의 정체를 올바로 알아보고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던 사도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께서 수난의 길을 가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을 잡아당기면서 그래서는 안된다고 만류합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고 심하게 책망합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장 큰 걸림돌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고 그분의 가르침을 이루어 드려야지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뒤를 따르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18.               연중 제24주일   마르 8,27-35 (나) 경의선

이규희 지따 / 작가



경의선 복원이 거론되면서 제 마음의 깊숙한 속안에서 먼지처럼 소리없이 부스스 일어서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마치 녹슨 선로가 그 동안 제 마음 속에 묻혀 잊혀졌다가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말입니다.

  대학에 다닐 때까지 저는 아버지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가슴의 응어리 때문이지요. 그 응어리는 복원을 서두르고 있는 끊어진 경의선과 연관지어집니다. 당시의 기관차는 왜 그다지 시동이 버거웠을까요. 덜커덩하는 우악진 소리와 함께 차체가 요동을 치는 순간, 어머니의 치마폭에 매달렸던 다섯 살짜리 계집애는 곤두박질을 치면서 여태 안주해 온 무의식이라는 보호막에서 냉큼 튕겨져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차가 밤낮 꼬박 사흘이나 달려간 곳은 하얼빈, 거기서 다시 차를 바꿔 타고 밤새껏 들어가 새벽녘에 목적지에 당도했을 때는 충청도 두메산골 반가의 종부로 장터에조차 나가 본적 없는 어머니와 어린 계집애는 초죽음이 다 되어 있었습니다. 황토색 토성으로 둘리워진 동네에서 맞닥뜨린 풍경에 계집애는 그만 여린 가슴을 데인 거지요. 미닫이 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이불 속에서 막 일어나 앉은 사람에게 “인사드려라, 아버지시다.”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던 어머니의 음성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의 생후 첫 상면을 그렇게 치렀습니다. 아버지가 배우처럼 너무 멋지셨기 때문에 철부지의 심정이 그만 뒤집혀 버린 건지도 모릅니다. 곁에 바싹 붙어있는 낯선 여자를 어린 눈에도 놓치지 않았으니까요. 당당한 듯 싶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언에 그만 힘없이 발길을 돌리었지요.

  

해방과 더불어 귀향한 아버지는 우여곡절 끝에 성실한 가장으로 정착했습니다. 넉넉지 못한 육이오 직후의 농촌에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면서까지 저를 군내 여대생 일호로 만들어 주었지만 저는 코앞의 아버지를 제치고 노상 먼 산만 보았습니다. 성서에서 돌아온 탕자를 위해 잔치까지 베풀며 크게 기뻐하는 부성애가 나오지만, 철부지 자식의 도량은 오직 가혹한 오기뿐이었던 듯합니다.

어느 날 문득 저의 시야를 스쳐 가는 아버지는 매미가 허물을 벗듯 북만주에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눈만 반짝거리는 숫검뎅, 순 농사꾼일 따름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정만이 아니라 고향일대의 농업근대화를 위해 신명을 다 바쳐 노력하고 있는 그의 참 모습이 그제서야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삭이지 못해 그토록 쩔쩔맸던 북만주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군내 일호 여대생과 같은 맥락의 그림이라는 사실이 이해될 때, 그는 이미 세상에 있지 않았습니다.

경의선이 개통되면 그 환호치는 첫 열차를 타고 막혔던 북한 땅을 밟는 길에 내쳐 저는 북만주까지 올라가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노라면 그 머나먼 극지까지 내달아야 했던 그의 이루지 못한 꿈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손에 잡힐 듯 해서입니다. 그리되면 우매한 저 자신의 진정한 꿈도 어렴풋 보이게 될지 모르고, 미루어 모든 이들이 걸어가는 길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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