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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0:41
분 류 연중19-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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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22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22 주일

        9. 김몽은 신부(나)/ 16         10. 이명기 신부(나)/ 17

        11. 공한영 신부(나)/ 19        12. 양석현 신부(나)/ 21

        13. 강길웅 신부(나)/ 22        14. 신은근 신부(나)/ 24

        15. 김영남 신부(나)/ 25        16. 김영진 신부(나)/ 27

        17. 교구 주보(나)/ 29          18. 이규희 작가(나)/ 31



9.             연중 제22주일  마르 7,1-8. 14-15. 21-23 (나)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인간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김몽은 신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 몇 사람이 함께 예수께 몰려왔다가 예수의 제자  몇몇이 손을 씻는 의식을 치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원래 바리사이파 사람들 분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전통에 따라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잘 씻는 법이었고 또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먼저 반드시 몸을 씻는 의식을 치르고 나서 음식을 먹었다.



그밖에도 그들이 지켜야 할 많은 관습에 따라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 같은 것을 씻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내게서 말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인간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 이 말씀은 바로 당신들과 같은 위선자를 두고 한 예언입니다. 당신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인간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으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여러분은 내 말을 잘 알아들으시오.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더럽힐 수 있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힙니다>. 안으로부터 곧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악한 생각이 나와서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죄를 짓게 합니다. 이와 같은 악한 것은 모두 안으로부터 나와서 사람을 더럽힙니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형식적인 신심행위의 위선적인 믿음에 대한 경고를 들려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는 의식을 치르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께 율법의 전통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따지러 들었다. 그 당시 유대인의 전통으로는 음식을 먹지 전에 반드시 손을 씻는 예절을 치룬 다음에 먹기로 되어 있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이와 같이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사야서 (29, 13)의 말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내게서 말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인간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무색케 하여 돌려보내신 후, 다른 사람들을 불러모으시고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여러분, 내 말을 잘 알아들으시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잘 들으시오.>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더럽힐 수 있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힙니다. > 그리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즉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악한 생각이 나와서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죄를 짓게 한다>고 전제하신 후. <이와 같은 악한 것은 모두 안으로부터 나와서 사람을 더럽힙니다.> (마르 7,21-23)라고 단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신명기 6,5)는 계명과는 달리 마음은 이미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이 세상의 일에만 열중하면서도 외형적으로 아주 깊은 신심이 있는 척하기 위해, 쓸데없는 외형적인 행사만을 중요시하는 바리사이파들의 위선적, 형식적인 믿음에 대해 예수님은 통렬히 힐난하셨다.


그것은 비단 그 옛날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 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씀이다. 완전히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는 대신에 종교적인 행사만을 중요시하고, 그런 외적 행위만을 (즉 신심 행위의 외부적인 행위만을) 바치면 된다는 그러한 믿음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믿음이다. 우리는 외부로 드러나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우리 마음에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성당에는 열심히 나오고 미사에도 경건하게 참례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세속 사람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면 그런 신심은 거짓 신심인 것이다.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는 이유는 미사에서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무한한 은혜와 사랑을 받고, 그것을 이웃에게 나누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은혜와 사랑을 자기 혼자서만 간직하고, 또 행동으로서도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런 신심 행위는 사실 죽은 믿음이다.


우리는 미사에 참례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착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하며,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당에는 다녀도 그의 생활은 조금도 성화되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은 형식적 외부적인 믿음이지 진정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이런 믿음을 경계하신 것이다.











10.   연중 제22주일  마르 7,1-8. 14-15. 21-23 (나)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자!

                                                             이명기 신부



오늘 첫째 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내 말에 아무것도 보태거나 빼지 말고 내가 명하는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독서에서는 말씀을 듣기만 하지말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는 사도 야고보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복음에서는 “이 사람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다”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난하시는 예수님의 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둘째 독서에서 “말씀을 듣지만 말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권고하십니다.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몇 번이고 음미해 볼 만한 말씀입니다.

 교리를 배운다든가 강론을 듣는다든가 이 모든 말씀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듣기만 해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정신차려 듣는다든가 감탄사만 연발해 가지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조건 실천만 하면 됩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이에 대한 해답이 저절로 나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이 사람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십니다. 그러면 왜 이들이 이런 비난을 받았습니까?


단순히 오늘 복음만 보고 “왜 당신 제자들은 음식을 들기 전에 전통대로 손을 씻지 않느냐?” 고 힐문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오히려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난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거기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따지고 실천하는 데는 아주 철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정확히 십일조를 바치고 자선도 곧잘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하는 양을 볼 것 같으면 가관입니다. 기도를 한답시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고 남을 비웃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단식을 할 때는 부러 세수도 안하고 얼굴을 찡그리고 다님으로 재 지키는 표시를 합니다. 자선을 할 때는 나팔을 불어댑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예수께서는 못마땅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오늘 이들을 비난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말만하고 실천이 없는 자들이라 위선자들이라고 호되게 꾸짖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어떤 정신으로 그 말씀을 실천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런 바리사이파적 신앙생활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계명을 지키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하겠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 모양으로 순전히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아마도 없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끌려다니듯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일이니까 그저 미사에 참여하고 판공 때라니까 성사를 보고 대죄가 된다니까 마지못해 계명을 지키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서는 위험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계속하다가는 순전히 체면 때문에 또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는 지경에까지 빠지게 됩니다.


또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비슷한 말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매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성체를 영하고 아침 저녁 기도를 충실히 바치면서도 그의 실생활에서는 조금도 신앙인다운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속마음은 없이 바리사이파식으로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고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예수님께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러면 이런 비난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사도 야고보는 오늘 둘째 독서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진실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11.   연중 제22주일  마르 7,1-8. 14-15. 21-23 (나) 하느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

                                                        공한영 신부



하느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예수님을 모시고 기도하는 삶이며 그 생활에 이웃사랑이 따르는 것이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연중 제 22주일입니다. 6일동안 하신 일들은 다 잘 끝났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할 일을 가지고 있고 잘 해 보려는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일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잘 해 보려고 하면 더 안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느끼는 것은 그 일에 대해서 무지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와 이웃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 대할 참된 예배 - 이는 사람으로서 가장 잘 해야할 일종의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매일 하는 일이라서 그런지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예배하는 것인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무지하므로 하느님을 헛되이 예배한다고 오늘 복음은 책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것입니까?



 1. 기도하는 삶

하느님께 대한 참된 예배는 성부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삶은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가운데에서도 가장 겸손한 일입니다. 겸손한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을 확인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 앞에 나아가 하느님 면전에 서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성서에 바리사이 사람과 세리가 성정에서 기도하는데 세리는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유창한 말로한 바리사이의 기도보다 진정으로 기도한 사람은 세리였다고 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아의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겸손한 기도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은 겸손되이 기도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곧 하느님을 참되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2. 진정한 이웃 사랑

그러나 참된 예배는 겸손한 기도만이 아니고 거기에 진정한 이웃 사랑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도의 양면성이라 합니다. 갈릴리 회보(77-5월)에서 다음과 같은 감명스러운 기사를 읽은 일이있습니다. 칠곡 피부병원에서 젊은 한 쌍의 결혼식이 있었답니다. 엠마 원장은 꽃을 꺾어 식장을 꾸몄습니다. 그리고 천을 사서 손수 만든 면사포를 신부에게 씌워 주었고, 이불, 옷가지, 살림 살이도 정성껏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식이 임박하고 보니 결혼 선물이 없었습니다. 엠마원장은 자기 손가락에 끼워있던 두 개의 반지를 뽑아서 큰 것은 신랑에게, 작은 것은 신부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습니다.



감격에 찬 그들은 “싫어요, 원장님!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반지는 받을 수 없습니다.” 하며 거절했습니다. 엠마원장은 “결혼이란 그렇게 행복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앞으로 살다 보면 어려운 고비도 많이 당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이 반지를 보며 굳게 사세요. 이 반지는 나에게는 아무 의미없는 물건이지만 그러나 두 분에게는 매우 소중한 결혼기념이 될 것입니다.” 하며 자기의 반지를 신랑, 신부에게 끼워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감명시킨 것은 넘치는 이웃사랑입니다. 샤를르 드 푸코 신부는 “누구든지 이 미소한 사람 하나에게 선을 베풀면 곧 예수님에게 베푸는 것이요, 이 미소한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으면 곧 예수님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그는 자기가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의 비참을 덜어 줄 것이며 이런 사람이야말로 얼마나 빨리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웃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참다운 예배는 성부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 분의 이름으로 겸손되이 기도할 뿐 아니라 이웃사랑이 따르는 생활인 것입니다. 기도와 사랑으로 하느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면서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는 질책을 면할 것입니다.

                                                                 아멘.











12.    연중 제22주일  마르 7,1-8. 14-15. 21-23 (나) 첫 번째 수난예고

                                                      양석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처음으로 당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신의 죽음에 대하여 입을 떼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길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길은 처음부터 빗나가기 시작합니다.



ꡐ빗나감ꡑ은 예수님 편에서나 제자들 편에서나 모두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내가 가야할 십자가의 길을 가도 되겠구나 생각했는데 제자들은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반면에 제자들도 큰 충격을 받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한 메시아의 모습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강력한 메시아의 모습이었는데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에 대하여 이야기함으로써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베드로는 절대로 그럴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보고 예수께서는 ꡐ사탄아 물러가라ꡑ고 호통을 치십니다. 베드로의 반발을 보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길이 어떨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그 길은 평범하고 넓은 길이 아니라 험하고 좁은 길입니다. 즉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길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요구조건은 자아부정과 십자가의 수락이라는 두가지입니다. 자아부정은 무조건 자기 자신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데 반대가 되는, 즉 걸림돌이 되는 자아를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비로소 좁고 험한 길을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그 길이 평안하고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의 길은 그 길이 험하고 고생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그랬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길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바로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일상생활에서 오는 고통과 피하고 싶은 일들, 신자답게 살아야 하는 갈등 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잘 참고 견디어 나가면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ꡐ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3.      연중 제22주일  마르 7,1-8. 14-15. 21-23 (나) 법이 곧 생명이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신명 4,1~2.6~8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은 한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못한다. 주님의 계명들을 너희는 지켜야 한다) 

제2독서 야고 1,17~18.21b~22.27 (여러분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복 음 마르 7,1~8.14~15.21~2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국가에는 법이 있습니다. 법이 있음으로 해서 나라의 안녕과 질서가 유지됩니다. 법이 없다면 사회는 온통 파괴와 혼란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권력자에게는 법이 또 잘못 남용될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 정가에선 '법대로 하자.'라는 말이 유행이었습니다. 즉 법의 근본 정신은 외면하고 그 껍데기만 가지고 사건을 다루자는 것입니다. 법을 남용하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종교에도 법이 있습니다. 법이 있음으로 해서 신앙인의 삶을 올바르게 규정하고 종교의 본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나 종교의 법 자체도 남용될 수가 있습니다. 마치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요술 방망이로 둔갑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지적하신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옛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자신들의 권위를 높였고 반대로 백성들의 삶은 엄하게 규정함으로써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법은 본래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함인데 그들은 자기들 식대로 뜯어고쳐서 신앙의 은혜와 기쁨을 마치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청결 문제에 예민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여자 가 아이를 낳으면 부정합니다. 아들을 낳으면 40일 동안 부정하고 딸을 낳으면 80일 동안 부정합니다. 부정을 벗기 위해서는 정결 예식을 해야 합니다. 피부병 환자나 나병환자는 부정하며 이방인과 이방인이 만진 음식과 그릇도 부정합니다. 이방인이 밟았던 땅을 밟아도 부정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시장에 다녀왔을 때에는 그가 묻혀 온 더러움 때문에 몸 전체를 깨끗이 씻어야 했습니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합니다. 그것도 아무렇게나 씻어서는 안됩니다. 규정대로 씻어야 합니다. 즉 깨끗한 물을 두 손에 받아 손을 자기 앞으로 들어 물이 손목까지 오게 했다가 손바닥을 주먹으로 닦습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아래로 향한 채 손목에서 물을 부어 땅으로 떨어뜨립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역시 부정합니다. 그러니까 신앙 자체가 복잡해졌습니다.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지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 면 그 법은 악법이며 없애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은 악법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어떤 뚱뚱한 신부님이 사순절에 '희생과 절제'에 대해서 강론을 하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웃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본래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또 절제와 희생의 삶을 손수 실천하십니다. 그러나 배가 나온 뚱뚱함 때문에 말에 권위가 서지 않아서 믿지를 않습니다. 마치 신부님은 배불리 먹고 신자들은 굶으라는 뜻으로 들렸던 것입니다.



위선과 모순은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도 선생도 종교인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행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강요한다면 그것은 모순이요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지도자들은 특히 그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어떤 냉담자가 죽어서 지옥엘 갔더니 거기엔 뜻밖에도 자기 본당 사목회장이 먼저 와서 방 하나를 지키고 있더랍니다. 냉담자는 너무도 반갑고 기뻐서 회장을 붙잡고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나야 못된 짓만 해서 예까지 왔지만 당신같이 열심한 사람이 뭣하러 예까지 왔느냐?"하며 껄껄대며 웃었습니다. 이때 회장이 그러더랍니다. 옆방에 신부님이 계시니 조용히 하라고.



황당무계한 얘기지만 가슴에 찌르는 교훈이 있습니다.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지 못할 때 그 책임도 크지만 신부가 신부답게 살지 못할 때 그 책임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도자부터 솔선수범해서 법을 지키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법의 정신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의 법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영광이요 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러나 그 믿음의 성실성 여부는 법의 준수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의 법을 존경하면, 어폐있는 말 같지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존경해 주십니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그저 듣기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저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또 하느님을 기만하고 속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법이 좋은 것만큼 우리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의무도 막중합니다. 법을 존경하고 법의 정신대로 살도록 합시다. 그리고 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14.       연중 제22주일  마르 7,1-8. 14-15. 21-23 (나) 마음을 씻는 일

                                                    신은근 신부



유다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율법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였다. 하늘이 내려준 음식을 그냥 먹어선 안된다는 의미가 이렇게 발전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 관습을 조상들의 전통이라 하여 완벽하게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는다. ꡒ손만 열심히 씻으면 뭐 하느냐. 중요한 것은 마음을 씻는 일이 아니냐 .ꡓ 유다인들은 떨떠름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서를 인용하시어 당신 말씀을 뒷받침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멀리 떠나있구나. 그것은 하느님을 헛되이 예배하는 것이다.

손 씻는 행동에 커다란 의미를 두었다면 왜 손을 씻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중요하다. 조상들의 전통 때문이란 말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손 씻는 것은 율법적인 행동이 될 수 없다.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마음을 씻는 한 방법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씻는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씻어야 할 것들을 나열하신다.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다. 이것들을 다 씻어내야 하는가. 아니, 다 씻어낼 수 있겠는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시작해야 한다. 도움의 은총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성한 몸과 깨끗한 영혼을 주셨다. 끝까지 간직해야 하는 것이 도리다. 육체는 매일 깨끗이 하면서 영혼의 더러움은 방치하고 있다면 곤란한 일이다. 음식을 먹기 전 유다인들은 철저하게 손을 씻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성체를 모시기 전 영혼의 깨끗함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 말을 들으시오.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힙니다. 얼마나 장쾌한 말씀인가.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셨기에 이런 말을 하실 수 있었다. 당시엔 음식이 사람 위에 있었다. 먹으면 율법을 어기는 음식이 수두룩했다. 음식 자체가 윤리성을 지녔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타파하신다. 음식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것을 먹고 대하는 사람에게 윤리적 책임이 있다고 하셨다. 어찌 음식뿐이겠는가. 사람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겠는가.



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고 나오는 말과 행동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했다. 자신도 더럽히고 남도 더럽힐 것이다. 영혼의 깨끗함을 되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은 주어져 있다. 남에게 나쁜 말을 하고 악한 행동을 하면 언젠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아픔을 주면 아픔이 돌아오고 기쁨을 주면 기쁨이 되돌아온다. 타인에게 선을 행하고 자선과 희생을 베풀었는데 결국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수없이 들어왔다. 선행이 결국 그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만들고 그의 마음을 깨끗하게 했던 것이다. 그의 운명 또한 밝아지지 않겠는가.











15.          연중 제22주일  마르 7,1-8. 14-15. 21-23 (나)

전통은 무엇인지,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김영남 신부





  지난 5주간 동안 계속 우리는 주일 복음으로 요한 복음서 6장의 말씀을 들었는데, 이번 주일부터는 다시 전례주년「나해」의 본래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의 말씀을 차례대로 듣는다. 오늘 복음은, 식사

전에 손 씻는 관습과 관련된「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이야기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식사 전에 손을 씻느냐, 안 씻느냐 하는 것은 매우 사소한 문제다. 하지만 「정결례법」레위 11-16장과 관련된 문제들(예컨대 오늘 복음에 나오는「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별」등)은, 유다인 출신 신자들이 공동체의 대다수였거나, 그들이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초창기 교회에서는 큰 문제였다. 특히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 과정에서 상당히 큰 파장을 가져오는 문제였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르넬리오의 현시를 비롯하여, 사도 바오로의 여러 편지들에서 나오는「음식규정들」과 관련된 글들(예컨대 1고린 8,8-9: 로마 14,14-15)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음식문제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초기 신자들에게 있어서, 오늘 복음에 전해지는「손 씻는 예식」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 교회가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을 잡아준 말씀이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빵을 먹은 일을 두고 예수님께, 그의 제자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저버린다고 논쟁을 걸어온다. 여기서「조상들의 전통」이란 모세율법에 대한 율법학자들의 전통적 해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조상들의 전통」을 저버린다는 공박에 대하여 예수님은,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지, 마음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던 백성과,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치는 지도자들을 질책하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사 29,13; 참조: 이사 1,16-17)을 인용하면서, 실상 당신의 반대자들이「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고 비판하신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오늘 주일복음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인간들이 자신들의 전통적 해석을 내세워 중요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구체적 예를 하나 드신 다. 그것이 곧「코르반-서원의 관행」에 관한 말씀이다. 「코르반」 (마르 7, 11)은 히브리어로 「봉헌물」을 뜻하는데,「코르반-서원」의 관행에 의하면, 사람들은 그들의 부모님 공경에 사용될 재산을「코르반」즉「성전을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이라고 서원을 하면, 그 재산은 하느님께 바쳐진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어, 부모님 공경에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코르반-서원」이라는 관행을 교묘하게 내세워, 정작「부모를 공경하라」는 중요한 하느님의 계명을 사람들이 어기고 있음을 지적하신다. 부모공경은 입술로만이 아니라, 물질적, 신체적 공경을 포함하는 것이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묘하게「코르반-서원의 관행」을 악용하여 자녀 된 의무를 저버리고 있는 위선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군중들과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하느님과의 친교를 참으로 가능하게 해주는「정결함」이 과연 무엇인가」에 관하여 그들을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반대자들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과 같은 사소한 규정을 사람들이 지키는지 여부에 관하여는 날카롭게 관찰할 줄 알면서도, 또 그러한 규정을 지키는 데에는 그토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그러한 행위들이 생겨나는 근거요, 그렇기에 훨씬 더 중요한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대하여는 오히려 소홀히 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신다. 마음속은 악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데도, 그것을 보지도 못하고 닦으려고도 하지 않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비판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15절). 루가 11,39-40의 다음 말씀도 같은 맥락에 있다: “지금 너희 바리사이들이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지만, 너희 속은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시지 않았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비판하신 것은「조상들의 전통」에 따른 규정들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전통적 규정들을 지킨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 규정들이 본래 의도하였던「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있던 사람들의「굳어진」 마음이었다. 사실, 코르반-서약의 전통도, 본디 하느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섬기고, 하느님의 계명을 더 잘 지키기 위해 생겨난 전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전통이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도구로 사용되는 절과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마음이 비뚤어져 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계명과 훌륭한 제도도「악의 도구」로 악용될 수가 있다는 점을 본다.



  하느님의 계명을 더 잘 지키려고 시작한 일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적 욕심이 담긴 이러 저러한 해석이 덧붙여져, 오히려 그「하느님의 뜻」을 가리게 하는 때가 있다. 일찍이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이 점을 신랄하게 지적하였는데,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시작한 일이라 하더라도, 혹시라도 그 일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는 늘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살아야 한다.











16.   연중 제22주일  마르 7,1-8. 14-15. 21-23 (나) 입술 신부, 발바닥 신자  

                                                       김영진 신부



신학교 시절 친구들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 중 하나는 '입술'이다, 나의 아랫입술이 합죽이처럼 튀어나와 붙여진 별명일게다. 썩 마음에 내키는 별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반 아이들이 가졌던 말똥이니, 똥자루니, 멍키니 하는 것들보다야 얼마나 세련되었는가. 어쨋든 별명이 입술이 되고 나서부터는, 성서를 대할 때 한가지 내 마음을 때리는 구절이 생겨났다.

그것은 바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하는 말씀이다. 입술만 나불대며 행동이 없는 신앙인을 누군가 ‘입술신자'라고 했는데, 생각해보면 친구들이 나를 입술이라 불렀다는 것은, 아랫입술이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평생 입술신부 노릇밖에 못하리라는 선견지명도 있었던 듯하다.


사실 신부가 된지 어언 십 수년이 되어 가는 지금에도, 나는 여지껏 입술신부 노릇만 하고 있지 않는가. 남보다 믿음이 강하지도 못하면서 믿음이 강한 척, 기도를 게을리 하면서도 기도를 열심히 하는 척, 그리 점잖치도 않으면서 점잖은 척하며, 위선적인 삶을 살아왔으니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약간의 가면을 쓰고 산다고는 하지만, 내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볼 때마다 쓰고 있는 가면이 숨어있는 내 마음과 너무 멀리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스위스에서는 해마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파스나스'라는 잔치가 열린다고 한다. 사순절이 되고 나면 음식도 절제해야되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해야 될 것이니, 그 이전에 실컷 먹고 즐겨보자는 의미라 한다.

이때 구세군이라는 단체에서 내걸고있는 슬로건이 있는데, 그 글귀가 ‘하느님은 가면 뒤를 보신다'는 것이라 한다. 사순절 기간만이라도 내 가면 뒤의 삶을 살펴본다는 의미일 게다. 종교의 예식은 좋은 것이지만, 그 예식이 우리들 마음에 반영이 될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마음이 변하지 않고 있는데 할례가 무슨 소용이고, 세례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하느님은 가면 뒤를 보신다"



  오늘 성서에서는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 의견충돌을 빚으신 것을 말해준다. 율법학자들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더라도 손을 씻는 행위 등의 예식을 중요시하고 있고, 예수님은 “마음을 씻지 않으면서 손만 씻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더러운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들, 흙이나 먼지, 기생충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다"고 하셨다.

즉 안에서 나오는 것은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등인데 이러한 악한 생각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최근에 출판된 신간 중 최기식 신부의 ‘로만칼라와 빈무덤'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며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이 만든 로만칼라 속에 묻혀 살았던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가 사셨던 빈 무덤의 삶으로 바꾸고자 노력하는, 한 사제의 체험적 몸부림이 담겨진 책이다.

교회라고 하는 권위와 법과 예식이 울타리가 되어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이제 다시 걸어가야 될 길은 보호해줄 권위도 법도 예식도 없는 예수의 빈무덤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빈무덤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중상, 교만 등이 아니라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용서, 친절, 진실, 온유 등의 것이다,

  

막스비어의 소설중 ‘행복한 위선자'라는 것이 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로드헬은 매우 비양심적인 악인이었다. 그는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야비함이 돌출적으로 튀어나와, 사람들은 그의 얼굴만 보아도 피하고 두려워했다.

그는 어느 날 아름답고 순결한 미어리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 소녀는 얼굴이 무섭고 야비한 사람과는 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로드헬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인자해 보이는 가면을 쓰고 청혼을 하였다. 결혼한 후에는 자신의 야비한 성격과 비양심적인 악한 마음을 억누르려 애썼으며, 참을성 있고 너그럽게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 하나가, 사랑하는 아내 앞에서 로드헬의 가면을 무자비하게 벗겨 버렸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가면이 벗겨졌을 때 거기에는 야비하고 악한 마음이 서려있는, 독기 있는 무서운 얼굴이 아니라 거룩하고 너그러운 얼굴 모습이 나타났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하나의 교훈을 준다, 그것은 사람은 누구나 숨기고싶은 추한 모습이 있으되, 날마다 노력하는 만큼의 선한 모습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행복한 위선자 로드헬의 가면



어쩌면 우리 모두는 부족하고 위선적이며, 때론 야비할 수도 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다는 것, 자신이 쓰고 싶은 가면과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입술신자로서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있으되, 언젠가는 마음으로도 하느님을 공경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지금은 발바닥 신자로서 성당에 왔다 갔다 할 뿐이지만, 언젠가는 내 한몸이 뜨거운 선교사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하느님은 가면 뒤를 보시는 분, 그분께 갔을 때, 내가 그분 앞에서 쓰고 싶었던 가면, 내가 그분께 보이고 싶었던 가면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되어,  막스비어의 소설 주인공 로드헬처럼 행복한 위선자로 변화되었으면 좋겠다.











17.    연중 제22주일  마르 7,1-8. 14-15. 21-23 (나) 법보다는 사랑과 은총을

교구 주보



1. 복음이야기

마르코 복음서 7,1-23에는 바리사이들과 예수님 사이의 조상 전통 논쟁이 담겨 있습니다. 이 단락에는 특히 세 가지 유다교 율법 전승, 곧 정결법(1-8절), 코르반법(9-13절), 금기식품법(15-23절)이 나타나 있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정결법과 금기식품법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ᄀ. 정결법(세정법 : 1-8절)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이 예수께 와서 그분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빵을 먹는 것을 보고 어째서 정결례를 무시하고 부정한 손으로 빵을 먹느냐고 따집니다. 유다인들은 식사 직전에 한 움큼 물로 반드시 손을 씻습니다. 특별히 더럽기 때문에 씻는 것이 아니라 그냥 법이기 때문에 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고 빵을 먹었기 때문에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이 예수님께 따졌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섬기지만 마음은 멀리 떠나 있도다. 헛되이 나를 떠받드나니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기 일삼는 도다”(6-7절).

  하느님을 섬긴다 하지만 실상 인습에 얽매어 있는 자들의 삶을 탓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인습을 따르는 문제이지 결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아니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ᄂ. 금기식품법(15-23절)

  레위 11장과 신명 14,3-21을 보면 정결한 식품과 불결한 식품을 가려 놓았습니다. 예수 시대 유다교는 이 금기식품법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불결한 식품으로는 돼지고기, 쥐고기, 뱀고기, 토끼고기, 낙타고기, 개고기,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낙지, 오징어, 문어 따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금기식품법을 과감하게 철폐하셨습니다. 금기식품법을 폐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1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을 더럽힐 수 있는 것이란 없습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힙니다.”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고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말씀입니다. 자연의 음식물이 아니라 인간의 결단이 사람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는 유다교의 율법에 있는 정신은 저버리고 형식과 율법 규정에만 얽매어 있는 유다인들의 삶을 질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식사 전에 손을 씻고 안 씻는 것은 단지 위생상의 문제이지 결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음식이 사람을 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소행들이 사람을 추하게 만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교회 역시 교우들로 하여금 법보다는 사랑과 은총을,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여기면서 자유롭게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아끼는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18.            연중 제22주일  마르 7,1-8. 14-15. 21-23 (나)

이규희 지따 /작가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있던 첫날 저는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생사조차 알길 없어 애를 태우다 끝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못이 된 사람들이 오십 년 만에 살아서 돌아와 첫 상봉을 하는 기막힌 장면입니다. 서로 부둥켜안은 그들이 울면 저도 울고, 웃으면 저도 웃었습니다. 장성한 뒤 오십 년이라는 세월은 한 사람의 생애에 해당하므로 대개 자녀의 경우 육십 세를 넘어섰고 부모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팔구십 대였습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아들만은 알아보았나 하면, 아들을 보는 순간 정신을 놓은 어머니도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생각나서 사흘이나 잠을 못 잤어,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이렇게 고향에 와서 모두 만나볼 수 있는 건데…” 북쪽에서 온 고령의 여인이 역시 고령의 남쪽 시누이와 끌어안고 뺨을 비비며 한숨쉬듯 토해내는 말이었습니다.



서리서리 맺힌 한이 여인의 입에서 안개처럼 번져 나오는 걸 느꼈습니다. 그 한이 어디 그녀뿐일까요. 너무 고령이어서 석상처럼 앉아 도무지 반응이 없는 아버지 앞에서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리며 실성할 듯 목놓아 우는 아들도 잊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 그냥들 다 목놓아 엉엉 쳐 울었습니다. 저렇게 쳐 우는 것이 고령인 저들에게 건강에 해로울 텐데 하는 염려가 될 정도로.  타의에 의해, 그렇지 않아도 작은 나라의 허리를 졸라 분단시킨 삼팔선은 저들의 핏줄에까지 잔혹한 분단을 가져온 것입니다.

우리 민족 그 누구도 분단의 철조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저 이산가족들과 동질의 아픔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저들의 상봉화면 앞에서 꼼짝없이 발이 묶이어 버린 것도 그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이번엔 선정된 백 명씩에 한한 만남이었습니다만 남북한에 있는 이산가족 전원을 이런 규모로 또 이런 방식으로 상봉을 시키자면 앞으로 천 년이 걸린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앞으로 천 년 동안이나 목놓아 울어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입니까.

  

마지막 날 워커힐에서 헤어지며 차마 놓을 수 없는 서로의 손을 끝내 놓는 순간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은 단 한마디입니다. 통일. 통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성 피부처럼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육이오의 상흔이 원체 깊었던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이 땅에 또다시 그런 동족 상잔의 피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한 마디로 그는 우리 민족의 유다입니다. 공정하게 평등하게 평화적으로 정성을 다해 우리 모두가 합심하면, 그 날, 통일의 꽃을 활짝 피워낼 그 날은 머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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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말씀과 전례 2008-08-09 4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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