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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위령미사
작성일 2008년 8월 13일 (수) 19:10
분 류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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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미사 강론 모음 ”
 

위령의 날(11월 2일)



복음 : 요한  14,1~6




 교회는 오랫동안 위령의 날에 우리보다 앞서가신 우리의 부모, 가족, 친지 및 벗들의 묘지를 찾아 기도드리는 전통을 지켜 왔습니다. 이 날에 우리는 죽은 이들을 기억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앞서 우리 곁을 떠난 이들을 생각하는 슬픔이 새롭게 생생히 살아나거나, 또 다른 이들에게는 벌써 잊어버렸던 그 어느 땐가의 슬픔이 되살아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묘지를 찾는 발걸음은 우리들은 진지하게 만듭니다. 슬픔은 위령의 날에 속하는 우리들의 느낌입니다. 슬픔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인간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구인 라자로가 죽었을 때 슬퍼하시고 우셨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께서 마리아 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요한 11,33)고 보고합니다. 예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하고 여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저것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 사랑했던가 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요한 11,33~36). 오늘날 우리 사회는 슬픔에 대해서 깊이 알려고 하지 않으려 합니다. 어느 심리 학자는 이런 현상을 두고 “슬픔을 느낄 줄 모르는 현대인”이라고 표현합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울지마라”하고 말한다면 ‘위로’와 ‘함께하는 마음’은 자리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에서 슬픔을 내팽개쳐서는 안됩니다. 이웃의 슬픔을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은 인간적인 공감과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죽은 이를 생각하고 마음 아파하는 오늘에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슬퍼하는 사람들 곁에 의식적으로 가까이 서는 것은 그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기도와 그들 모두를 위한 우리의 전구는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슬퍼하는 사람을 위해 마음을 쓰고 같이 슬퍼한다면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점을 분명히 밝혀주십니다.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여러분이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됩니다”(1데살 4, 13). 그리스도인의 슬픔은 혹독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입니다. 우리의 죽은 이들은 고향으로 되돌아 가셨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 있습니다. 세례와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드릴 때 마다 “주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전하며, 주의 부활하심을 굳세게 믿나이다” 하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죽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이 신앙은 위로 그 자체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위로하십시오”(1데살 4, 18)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같은 신앙의 말을 의미합니다.

 위령의 날에 무덤은 싱싱한 꽃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기도할 때 촛불을 켜기도 합니다.이 표시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무덤 앞에, 또는 위에 놓여진 꽃들은 생명이 새롭게 꽃피우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 생명이 마지막 말입니다. 무덤 앞에 밝혀진 불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 자신의 부활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불은 부활성야 전례에서 커다란 초에 불이 켜지고 어두움에 싸인 성당내부가 서서히 밝혀질 때 노래하는 ‘그리스도의 광명’이란 외침입니다.

 부활신앙은 죽은 이들을 새로운 빛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밀라노의 대주교로서 유명한 보로메오 성인데 관해 전해주는 이야기 한 토막이 있습니다. 어느날 성인은 화가에게 죽음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라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얼마 후 그 화가는 대주교에게 스케치를 보여주었습니다. 화가는 스케치에 손에 낫을 들고 있는 뼈 모양의 사람 모습을 그렸습니다. 대주교는 그 그림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대주교는 화가에게 “죽음을 그렇게 그려서는 안된다. 손에 금으로 장식한 열쇠를 들고 있는 천사로 죽음을 표현하라”하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장례미사강론<1>



                                                                                                                            독서 : 1요한 3,1~2

복음 : 요한 11,17~27







 집안의 기둥이셨던 남편과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슬픔에 잠겨 있는 유가족 여러분, 그리고 친지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고인과 작별을 해야하는 이 시간을 견디어 내기는 무척이나 힘들 것입니다. 이 시간은 더 이상 이제 “안녕히 계십시오. 또 뵙겠습니다”하는 보통의 작별 인사와는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인은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순간에 느끼는 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여러분 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디지 않으며 그냥 말을 잃어버리게 하는 순간입니다. 고인과의 작별이 너무나도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고인은 짧은 기간에 치유될 수 없는 중병을 앓고 우리 곁을 황급히 떠났습니다. 오늘부터 고인은 더 이상 우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의 자리는 이제 여러분 곁에서 가정과 병원에서 그리고 고인을 알고 있던 많은 분들에게 빈 자리로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전에 있었던 모든 것이 죽음과 더불어 의미도, 미래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여기 계시지 않은 그분의 이름으로 왔다면 고인에 대해서 하는 모든 말들은 침묵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분의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신앙의 말씀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미래를 가리켜야 하는 의무로 여기 모였다면 지나간 것과 고인에 대해 하는 모든 말들은 침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우리 앞에 누워 계시는 (     ) 형제가 죽으셨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그분이 죽기 위해서 살으셨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살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뜻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분의 삶은 이제 끝이란 말입니까? 아니면 그분은 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까? 오늘 고인은 어둡고 차가운 무덤에 묻히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잊혀지는 지나간 과거로 넘겨질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고인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인은 결코 잊혀지지 않습니다. 고인을 사랑하는 분들의 가슴 속에서는 언제나 고인은 살아 있습니다. 고인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고인은 맡겨져 있습니다. 세상에 아직 살고 있는 우리는 그분을 떠나 보내야만 하기에 마음이 아프지만 그러나 또한 우리가 고인을 사랑하는 하느님께 맡겨드릴 수 있다는 점은 우리를 위로해 줍니다.

 고인의 죽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죽은 그분은 이제 어떻게 되는가?”하는 질문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대답해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종말인 죽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난다” 고요. 살아서 주님을 믿는 이는 비록 죽더라도 살 것이라고 주님은 대답해 주십니다.

 우리 앞에 누워 계시는 (   ) 형제는 고통스러운 병상에서 마침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우리 곁을 떠나시기 이틀 전에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확실히 만났습니다. 병상 위에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의 은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주님의 몸인 성체를 모셨으며 더 나아가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성사인 병자성사까지 받으셨습니다. 고인이 살아 생전에, 수많은 아픈 이들을 낫게하고 그들의 고통을 없애기도 하고 위로해 주었지만 나은 이들이 고인을 위로하지 못했고 마지막에 만난 주님께서 그를 위로하시고 세상의 삶에 대한 큰 보상을 주시기 위해 행복이자 생명 자체이신 당신 곁에 고인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동화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고 싶습니다. 가끔은 동화가 훨씬 우리의 마음 속에 아름다운 생각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죽음이 세상이 시작되는 강가에 도착했습니다. 그 곳에는 하얀 거위 떼를 보살피는 가난한 목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한 벌의 웃옷과 바지, 한 켤레의 겨울 신발과 모자 그리고 그가 즐겨 부는 피리가, 가진 것의 전부였습니다. 이 피리는 언제나 그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죽음이 그에게 다가와서 “내가 누구인지 너는 알고 있니?”하고 묻자 목동은“네가 죽음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난 강 너머 다른 편에서 가끔 너를 보았었지.”그러자 죽음은 “내가 너를 강 건너 저 편으로 데려가기 위해 여기 왔다는 것도 네가 알고 있느냐? 하고 죽음이 목동에게 묻자 “아니, 내가 여기 있은 이후로 난 언제나 강 너머로 너를 지켜 보았기에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어“ 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죽음이 목동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그럼 이제 갈까?”하고 말하자 목동은 일어나서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조용히 그를 따라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강 건너 저 편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그는 강둑 저편을 건너볼 시간을 충분히 가졌으며 그곳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목동이 불었던 피리의 음률은 그곳에도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내적으로 그는 평화로웠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의 가까운 이웃 안에는 죽음이 살고 있습니다. 죽음이 오는 것을 알면 우리의 인생은 바뀌어 집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중요하게 여겼거나 또는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바뀌어 집니다. 죽음이 우리 곁에 다가오면 외적인 것보다는 우리 내적인 것들이 가장 중요하게 됩니다. 이것에 대해 성서는 사랑만이 유일하게 남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화가 우리에게 말하듯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연주하던 사랑의 음률만이 남아 있습니다. 바람은 그 음률을 내가 있었던 강 이편에서 강 저편으로 실어 보내 줍니다. 우리가 강 건너편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바람이 실어다 준 사랑의 음률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음률은 우리에게 강 건너의 세계가 낯설지 않게 만들어줍니다. 죽음이 목동의 어깨에 손을 얹듯이 그렇게 죽음이 고인의 어깨에도 예기치 않게, 순식간에 손을 내밀고서 “이제 떠날까?"하고 말했습니다. 고인에게도 강 건너 저편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       )는 인생의 마지막에 신앙의 눈으로 강 건너편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죽음이 그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기를 기다리시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비록 내가 물을 건너야 한다하더라도, 내 발 아래의 땅을 잃어버리더라도 그는 결코 빠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를 안고 가시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버지, 할아버지를 작별하여야 하기에 슬퍼하시는 유가족 여러분!

 고인이 살아 생전에 연주한 피리의 수많은 음률, 사랑의 음률은 남아 있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느끼시는 슬픔은 고인의 사랑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유가족 여러분, 저는 고인이 생애 마지막에 발견한 하느님의 사랑을 여러분이 계속하시기를 청하고자 합니다. 너무 슬퍼만 마시고 고인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기도로써 간청하십시오.  그 기도는 여러분이 고인에게 못다한 효도와 사랑을 계속하게 해 줄 것입니다.




































장례미사강론<Ⅱ>

복음 : 요한 2,1~12







 슬픔에 잠긴 유가족 여러분, 공동체 형제 자매 여러분!

아마도 여러분은 방금 들은 이 복음이 오늘 우리가 사랑했던 고(      )와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이 예식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의아해 하셨을 겁니다. 오히려 이 복음은 결혼식에 더 귀에 익은 말씀이 아니냐고 하셨을 겁니다. 예, 사실 이 성서귀절은 오늘 이 자리의 우리들 중의 대부분에게는 첫 느낌으로는 의아하거나 낯설은 기분을 줄 것입니다. 사랑했거나 존경했던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당연히 잔치라기 보다는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고 통곡하는 것이 더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초세기 교회시대의 돌로 된 관뚜껑에는 대부분 가나의 혼인잔치를 나타내는 조각이나 부조물이 발견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당시의 신앙인들이 죽음을 어떻게 이해했었는지를 나타내줍니다. 혼인잔치는 메시아의 재림의 표시이며 잔치는 또한 하느님 곁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의 표상이였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들어오신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잔치를 베푸시려고 하십니다. 그 분은 기뻐하고 행복한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거행하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우리의 사랑하는 고인을 위하여 당신의 희생제사 잔치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이 잔치에서 협력하는 바는 우리 인생의 항아리들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일, 우리의 고뇌와 고통, 나약함, 착한 뜻 그리고 항상 새롭게 시작하려는 준비성 등의 항아리들입니다.





오늘 이 복음에서 우리를 위로하는 바는 죽음의 인생에 있는 우리가 우리의 사랑이요, 잔치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죄없이 만날 수는 없지만 그분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항아리의 물을 최상의 포도주로 변화 시켜 주시는 분은 잔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들과 우리 인생에 속했던 모든 것은 변화시켜 주십니다. 매일 겪는 일들과 근심, 걱정 더 나아가 우리 인생이 겪는 고통의 눈물까지도 최고급의 포도주로 바꾸어 주십니다. 어려움과 시원한 답을 찾아내지 못하는 질문 속에서도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기쁨과 감사가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우리가 신앙 안에서 큰 업적을 세워야 하고 그로 인해서 천국에 도달할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바꾸어줍니다. 신앙에 관한 우리의 그러한 사고방식은 결코 옳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천국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며 그러기에 우리의 기쁨은 더욱 크고 놀라울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삶이 성공하면 그분은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을 결코 해치려, 나쁘게 하시려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온전한 자유로움으로, 완성으로 이끄시려 하십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이렇게 누워 계시는 고인은 이 성서의 결혼잔치의 기쁨을 체험하고 살고 계실 것입니다. 고인은 당신 삶에서 그냥 헛되거나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고인이 일생동안 하셨던 그 모든 것, 고인의 삶을 훌륭히 만드셨던 바 친절함과 겸손함,

남을 도와주셨던 자비와 사랑, 하느님을 사랑하심과 자녀들에 대한 남다른 지극한 모성, 손자 손녀 들에게 베푸신 마음 그 모든 것에 대한 보답을 하느님 곁에서 지금 기쁨과 행복으로 체험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고인이 살아 생전에 겪으셨던 적지 않은 괴로움과 고통, 고인의 인생을 힘들게 만들었던 바 모두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에 한 몫을 가졌으며 지금은 변화될 것입니다. 주께서 슬픔과 고통을 기쁨과 행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어떻게 바꾸어 주시는가는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히

신앙 안에서, 그렇게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손수 고통의 시간을 직접 체험하셨고 죽음의 시간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삶의 항아리를 가득 채우면 그분은 우리의 죽음 후에 그분이 베푸시는 혼인잔치, 기쁨의 잔치에 우리는 확실히 초대될 것임을 굳게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삶의 항아리를 가득 채우면 그분은 우리의 죽음 후에 그분이 베푸시는 혼인잔치, 기쁨의 잔치에 우리는 확실히 초대될 것임을 굳게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유가족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부터 “人生七十



























장례미사강론<Ⅲ>



복음 : 요한 6,37~40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루에도 수많은 죽음의 소식을 접합니다. 매일 펼쳐드는 신문에서, TV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전하는 소식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대부분은 크게 놀라지 않습니다. 신문을 덮는 것과 동시에 잊어버리거나,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잠시의 화제거리로 인용할 뿐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죽음에 놀라지도 않고 마음에 담아 두지도 못합니까?

 아마도 그 죽음은 나와 크게 상관없는 ‘남의 죽음’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건성으로 듣고 보던 남의 죽음이, 나와 상관없다고 여겼던 그 죽음이 어느 날 갑자기 내 가까이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 뿐 아니라 슬퍼지며 울음을 터뜨리게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 죽은 시신을 다시 한번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의 생전의 웃음이나, 눈에 익은 눈빛 그리고 그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들, 심지어는 그 사람과 다투었던 모습까지도 그리워합니다. 죽은 이의 차갑고 말없는 얼굴은 진정 마지막이 왔다는 인상을 심어줍니다.

그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결정적인 끝, 종말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듭니다. 이 무서운 힘 앞에서는 자신이 한없이 연약하며, 세상에서의 나의 힘자랑이 헛된 일이며, 그 어떤 놀라운 능력이 여기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 다른 얼굴에 어쩔 수 없이 매달리게 됩니다.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으로서 그분은 방금 들은 복음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시는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한 6,37.39). 주님의 이 말씀에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가 지금 고인 주위에 모여서 슬퍼하지만, 이 고인도 죽음으로 멸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비록 그분의 죽은 얼굴이 아직 살아있는 우리들에게는 차갑고, 거절하는 인상을 남겨준다 하더라도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구세 곁에 나아갔으며, 그분으로부터 인자하게 받아들여졌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유가족 여러분들도 결코 하느님께로부터 팽개쳐지지 않았습

니다.







예수님은 장례식의 이 슬프고 비통한 순간에 우리에게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에 대한 희망을 선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내게 주신 사람은 누구나 내가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입니다“하고 약속하였습니다.

 영원한 생명, 그것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고 그분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우리의 고인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녀를 버리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녀를 내팽개치는 부모 또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고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졌고,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에 전적으로 매달리며 신뢰할 수 있으며 생전에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자비로이 용서하시고 고인을 영원한 생명인 주님 품에 받아주시기를 간절히 청하고 기도합니다. 이 희망을 가지고 유가족 여러분은 비통함과 애절한 이 시간에 그 위로를 찾으며 한 마음이 되어 기도합시다.













































대세자의 장례<Ⅳ>



                                               

                                           독서 : 1고린 15,51~57

                                           복음 : 요한 6,16~21






 제자들은 캄캄한 밤에 폭풍과 풍랑에 대항하여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이 복음의 내용이 한 가정이라는 배나 한 개인의 배의 모습과도 비유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인간의 삶을 즐겨 여행에 비교하곤 합니다. 인생을 항구를 떠난 배가 거센 풍랑을 헤 치면서 목적지인 항구에 무사히 도착하는 인생할로로 여깁니다. 만약 한 가정에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신음한다면, 더 나아가 마침내 우리 곁을 떠난다면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인생의 어두운  밤이나 휘몰아지는 폭풍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어내고 이겨내기는 정말 힘듭니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연자실하거나 말을 잃어버리고 그저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 또한 이 슬픔의 고통을 겪기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위로가 있습니다. 비록 하느님은 그 모습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잡혀지지는 않는다하더라도, 인생이라는 배에 우리와 함께 타시기에 멀리 계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다, 두려워 할 것 없다”하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이어서 성서는 “제자들은 예수를 배 안에 모셔들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배는 어느새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아마도 이 말씀을 우리 앞에 누워계신 고인의 생애 마지막

시간과 죽음의 시간을 뜻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인은 오랜 세월동안 중병에 신음하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가족과 친지 또한 고인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함께 마음 아파했습니다. 매정하게도 죽음은 고인과 주위의 가족들의 고통을 비웃기나 하는 듯 들이닥쳤습니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이

시간에 주님은 “나다, 두려워 할 것 없다”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죽음 안에서도 삶과 죽음을 주관 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만나십니다. 주님 자신도, 흔히들 말하는, 인생의 꽃이라는 30대에 인간적 삶을 죽음에 빼앗기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성서가 말하듯 죽음의 잠에서 깨어난 그 첫 번째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죽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그 독침을 잃어버렸고 그 힘이 소멸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분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이제 마지막이 아닌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처럼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이 탄 배는 재빨리 그리고 쉽게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우리의 고인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항구에 안착했습니다. 고인은 힘들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뒤로하고 하느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이제 고인은 그 항구에서 아직도 항해를 계속하는 가족들과 우리들을 되돌아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곁에서 멀리 계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인생

항로에 언제나 함께 하시고 안전하고 영원한 항구에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고인을 잃고 슬퍼하는 유가족 여러분, 고인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고인이 마지막 생의 시간에 찾았던 하느님의 품에 고인을 맡겨 드렸다고 여기십시오. 우리의 하느님은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평소에 효성과 사랑이 부족했다면 고인을 위해 기도 드리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못다한

효도를 계속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죽은이가 산이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Ⅴ>









 우리는 오늘 우리의 식구인 (   )와 마지막 작별을 하기 위해서 함께 모였습니다. 오늘의 이 작별은 보통 우리가 인사로 드리는 “다시 뵙겠습니다” , “다시 만납시다” 하는 작별인사와는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고인이 우리와 함께 이곳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뵐 수 없고 고인의 남편과 자녀들은 더 이상 그분의 웃음도 듣지 못하고 화내시는 모습조차도 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분은 우리 곁을 영영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우리들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싫어합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기조차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 단 순히 “죽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돌아가셨다”고 하거나 “고이 잠드셨다” 또는 “떠나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아마도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이거나 또는 우리 자신도 언젠가 한번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하든 간에 우리에게 죽음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빨리 닥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늦게 찾아오기도 하지만, 어떻든 언젠가 모든 사람의 생명은 그 끝인 죽음을 만나 찾아오기도 하지만, 어떻든 언젠가 모든 사람의 생명은 그 끝인 죽음을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살기 위해서 세상에 있습니다. 삶의 전 시간에 죽음을 기다릴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는 동안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음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영영 떠나는 일이 항상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왜 고인이 가족과 우리 곁에 오래 계실 수 없는 지 아무리 설명해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고 그러기에 장례식은 언제나 슬픔에 싸여 있습니다.

 저는 지금 장례를 잘 치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장례는 우리가 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중요한 일입니다. 한편으로 한 사람의 육신은 관에 넣어져 땅에 묻히게 되지만, 다른 한편 그 사람은 사랑하는 가족과 우리들 가운데 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은 고인을 생각하고 고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곧 유가족과 우리들이 고인을 잊지 않는 한 고인은 우리 곁에 있음을 의미하며 우리 또한 그렇게 느낍니다. 고인이 평소에 사랑과 희생을 즐겨 바쳤던 유가족과 우리의 마음 속에 살아 계시는 그분은 우리가 슬픔에 젖어 있기만을 원치 않으시고 하느님 안에서 사랑하고 다시 활기차게 잘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장례는 우리에게 또 다른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고자 합니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인의 모습을 보았고 고인과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모습을 뵐 수도,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모습을 뵐 수도,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습니다. 후에 우리 또한 여기 있는

많은 사람과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사실은 살아 있는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제와 불목하고 이웃과 마음 상해 있다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겠습니까? 유가족과 우리들에게 생명이 아름답고 잘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교훈이 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들 각자는 세상에서 특정한 한 시간을 살기에 그 모든 시간을 서로 사랑하면서 보내지 않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은 마냥 슬퍼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면서 산

사람은 죽고 난 뒤 하느님의 곁에서 분명히 행복을 누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이시지 벌하시는 무서운 하느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슬퍼하는 유가족 여러분, 특히 자녀 되시는 여러분들은 어머님에 대한 못다한 효도를 기도로써 대신하시고 사랑의 하느님께서 어머니를 천상 행복으로 인도하시도록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장례미사강론<Ⅵ>









 추운 겨울에 시골의 논이나 밭길을 걸어 본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죽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논밭에 하얀 눈이 쌓여있고 개울은 얼어 있으며 나무는 앙상하게 벌거벗었으며 매서운 바람은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만듭니다. 죽음이 마침내 승리한 것처럼 보여지며 그 죽음은 계속 머물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자연 안에서의 죽음에 대한 체험은 그 누구에게도 언제나 계속되리라는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앙상한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꽃피는 봄이 찾아오고 곧이어 과일이 익어가는 여름이 뒤쫓아 온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자연 안에서 죽음이 승리하지 않고 생명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자연에서보다 훨씬 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죽음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의 죽음은 우리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이 됩니다. 그러기에 한 인간의 떠남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는 자주 이 같은 슬픈 이별을 겪습니다. 가장 극심한 고통은 내 가까이에 머물러 있었던 사람의 생명이 어느 날 갑자기 끝나버리고 마는 것을 지켜볼 때는 이겨낼 수 없는 고통이 나를 덮어 누르고, 그가 있었던 자리가 텅비어 있음을 보거나 느낄 때마다 슬픔에 겨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립니다. 왜냐하면 죽은 이의 얼굴에서 우리의 인생은 의문에 붙여지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이룩했던 바 그 모두가 헛되지 않았던가? 그의 수고와 노력이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는 말인가? 고인이 살아 생전에 가족과 친지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던 사랑이 진정 헛되었던가? 죽음이 마침내 승리하고 모든 것이 끝나 버리고 말았단 말인가? 죽은 이의 차가운

육신을 보면 평범한 우리의 이성과 감성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안에 자리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모든 체험들은 마치 자연의 변화가 가르쳐 주듯이 죽음에 뒤이어 생명이 따라옴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자연의 한 부분인 사람의 죽음이 왜 다른 것과 달라야 합니까?





고인이 이룩하신 업적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고인이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우리에게 선사한 사랑은 죽음을 뛰어넘어 우리에게서 그 보답을 받습니다. 우리는 고인을 우리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합니다. 우리는 고인의 평소 노력과 사랑을 하느님께서 갚아주시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이같은 우리의 마음은 우리 안에 하나의 희망을 심어줍니다. 고인에게 행하는 하느님의 사람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비록 완전하진 못하지만 하느님께 향한 우리의 사랑과 그분께 대한 우리의 마음이 끝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인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배려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고요히 누워 계시는 고인은 살아 생전에 이 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부부 사이에서, 자녀교육에서 그리고 다른 수많은 기회에 심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고인의 삶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은 저보다 더 할 말이 많으실 것입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성실하게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삶이 고인에게는 분명 쉽지 않았을 것 입니다. 그럼에도 고인은 그 고비와 위기를 극복해 내었습니다. 왜냐하면 고인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점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자기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

완성이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그의 삶은 계속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이 싸구려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 되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 또한 죽음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무덤에 차갑게 놓아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의 귀환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미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열려졌습니다.

 성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어난 그 첫 번째 분이라고 일컫습니다. 자신의 죽음에서도 하느님과 떨어져 계시지 않으셨던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인을 하느님 가까이로, 즉 새 생명에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신앙의 눈으로써 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진 고인을 맡겨 드리고자 합니다.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부족함을 충만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께 고인을 맡겨 드립시다.



























오랜 병고로 고통을 겪은 후의 죽음<Ⅶ>







 헝가리의 왕비 엘리사벳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

어느날 엘리사벳은 길을 떠나려 하다 성 안에 있는 소성당으로 되돌아가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몸에 장식한 보석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기 시작했습니다. 금팔찌며 진주 목걸이 그리고 귀한 보물로 만들어진 왕관 등을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발 아래 차곡차곡 놓으면서 “모든 것은 당신 것이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을 던져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앞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습니다.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뿐입니다. 그분을 나는 일생동안 공경하였으며 십자가에 못박혀서 높이 들리신 주님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앞에 누워 계시는 고인을 이제 지금처럼 무덤에 세워진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의 발아래 놓으려 합니다. 고인은 이제 자신의 생명을 그분께 넘겨 드립니다. 그분께 이제 모든 것이 맡겨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내가 높이 들어 올려지면, 나는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들이리라”하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인은 이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고인에게 하신 당신의 약속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녀 엘리사벳에 관해 전해오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그녀의 남편이 며칠간 여행을 떠났을 때, 왕비는 집에서 쫓겨난 한 소년을 성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 소년은 나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으며, 그의 몸은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심한 종기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그를 깨끗이 씻어주었을 뿐 아니라 약초로 상처난 부위를 싸매어 주고는 자기침대에 눕게 했습니다. 왕이 예정보다 빨리 귀가했을 때 왕의 어머니는 아들을 침실로 불러 말하기를 “왕비가 일으킨 놀라운 일을 보여주마” 하면서 그간의 일을 아들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왕은 침실에 들어서자 마자 침대의 이불을 확 제꼈습니다. 그러자 이게 왠일입니까? 왕은 소년 대신에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자기 침대에 누워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뒤따라온 왕비에게 “부인이여, 당신은 이런 손님을 자주 침대에 누이십시오”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병석에 누워있는 환자를 지켜보고 있으면 어떨 땐 이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침대 위에 모셔진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머리 속에 떠오른 이 이야기가 무슨 뜻을 가졌는지 분명해 집니다. 십자가에 달리신분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 안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 갑니다.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나눕니다. 고인(자매)이 겪으셨던 고통의 길은 이제 끝났습니다. 오랫동안 고인의 남편과 자녀들 그리고 가족은 환자를 보살펴 왔습니다. 고인은 이 세상 삶의 마지막까지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마지막까지 고인은 자비와 사랑의 손실을 느껴 보았습니다. 여기서 고인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성녀 엘리사벳의 손길을 체험하셨습니다. 성녀 엘리사벳의 성인전은 계속해서 또 다른 이야기 한 토막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성녀의 남편인 루드비히 왕은 십자군 전쟁에 나섰습니다. 불행히도 남편은 아직 성지 이스라엘에 도달하기도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 소식을 접하자 망연자실하여 성의 여러방들을 오가며 헤매었습니다. “오 하느님, 제게는 이제 온 세상이 다 죽었습니다. 내 남편이 다시 살아날 수 만 있다면 세상 전부와 바꾸겠습니다!”하며 애통해 했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가 나에게서 떠나가면 나는 그를 그리워합니다. 그는 끄없는 심연을 나에게 남겨 놓습니다. 내가 그 심연을 거쳐 그에게 도달 하기까지에는 오직 하느님의 시간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성녀 엘리사벳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 드리니다.

“주여, 당신의 뜻을 거슬러 가면서까지 저는 제 남편을 돌려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를 당신께 맡겨드리며 당신 자비의 손길에 넘겨 드립니다. 당신의 뜻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소서.”









































장례미사강론<Ⅷ>



복음 : 요한 2,1~11









 (       )형제께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주님은 그분을 병고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남편과 아버지, 형님을 잃고 슬퍼하시는 유가족 여러분, 고인은 사흘 전 병원에서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손에 되돌려 드렸습니다. 오늘 유가족을 비롯하여 친지 및 친구분들이 고인과 마지막 작별을 고하기 위해 그리고 고인이 가는 마지막 길, 묘지로 가는 길을 함께 가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고인과 관계를 맺고 계셨습니다. 고인이 속해 있었던 여러 단체나 모임 등 모든 연결고리에서 죽음은 이제 마침표를 찍고 말았습니다. 그럼 이제 그의 삶에서 무엇이 남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납니다. 얼마동안 무덤은 수많은 꽃들로 장식되겠지요! 그렇지만 그 다음에는 무엇이 따라옵니까? 우리는 고인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간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각자에게서 다급한 자신의 문제가 닥치거나 가정문제나 병이 갑자기 선고되면 고인에 대한 애틋한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고인에게 마음 속에서 하는 모든 약속들은 무엇이 되고 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물음을 쉽게 피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물음 나 자신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며 죽은 뒤에는 도대체 무엇이 옵니까?

 저는 이 물음에 우리 모두에게 들려진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 대답을 시도해 보고자 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에게는 이 복음의 말씀이 오늘 이 자리에서는 무척 낯설게, 어울리지 않는 말씀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혼인잔치, 그러니까 결혼식에 어울리는 말씀으로 다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기적을 우연히 혼인잔치에서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가나촌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초대된 하객들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손님이신 그분은 잔치집의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이제 주인, 곧 손님들을 초대하는 혼주가 되십니다. 이 점을 저는 우리의 인생에 적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도주는 기쁨의 잔치를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우리들은 각자의 삶에서 기쁨이 없는, 성서에서 말하는 잔치집의 술이 떨어지는 상황을 체험하지 않으십니까? 기쁨의 순간들은 점점 엷어져 가고 그나마도 완전히 고갈되어 버릴 때가 우리의 인생에는 많습니다. 고통의 때가 우리 삶에는 도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병고를 이겨내야 하는 때, 가정사의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얽혀져 있을 때, 경제적인 문제로 오랫동안 마음고생을 겪어야 하는 때, 마침내는 고통의 절정인 죽음의 시간을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고, 불은 꺼지며 자리는 마침내 빈자리가 됩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이 때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있는 물을 예수님께 가져다 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그분 앞에 나서서 그분께 나의 물을,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릴 수 있습니다. 포도주 대신 물을 그분께 건네드릴 수 있습니다. 기쁨대신 고통과 눈물을, 괴로움을 예수님께 드리면 하느님은 그것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물밖에 없는 빈 항아리를 받아 주셔서 좋은 포도주로 채워서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이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깊은 심연을 잘 아십니다. 그분 스스로 죽은 자들과 더불어 완전히 소외되셨습니다. 그분도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서 그분은 우리에게 미래와 더 이상 고갈되지 않는 완전한 기쁨의 때를 열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이제 자기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초대하는 사람은, 삶과 죽음에서 그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삶과 죽음에서 그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습니다. 손님이신 그리스도는 나의 죽음을 변화시킬 나의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러한 신앙을 통해서 죽은 이는 다시 살아나고 이런 희망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주님만이 삶과 죽음의 주인이십니다.















































짧은 이별과 새로운 일치<Ⅸ>





복음 : 요한 14,1~10



아내를 먼저 보낸 후 뒤따라간

남편의 죽음과 그 반대의 경우









  그리스도 신자들이 혼인을 체결할 때 사제는 신랑 신부가 서로 맞잡는 손위에 ‘죽음이 여러분을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에게는 실제로 죽음보다 더 권위있는 다른 이별관관은 없습니다. 바로 1년 전 고인은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해야만 했습니다. 오랫동안 병고로 고생하던 아내를 어쩔 수 없이 먼저 보내야만 하는 괴로움을 겪으셨습니다. 고인은 인생길의 반려자로서 서로에게 간직했던 사랑과 이별에 대한 괴로움을 짧은 시간 안에 이승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 시작하는 만남에 대한 바램으로 견디어 냈습니다. 이제 고인의 바램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고인의 자녀들은 슬픔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런 위로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시 함께 계신다”하고  말입니다. 이별의 아픔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당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비가 오늘 이 고인에 대한 이별의 시간 안에서 여러분에게도 말해집니다. 유가족 여러분의 아버지와 어머니, 죽은 모든 이들을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로 가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오셔서 그분들은 고향으로 데러가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부모님은 지금 예수께서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시는, 있을 곳이 많은 주님께서 계시는 집에 계십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그 집은 더 이상 고통도 걱정도 눈물도 없는 집이라고 성서의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죽은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부, 그리고 모든 죽은 이들은 그들이 지상에서 잠시 동안 슬픔에 젖게 한, 자기 자녀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세상에서 그의 곁에 있었던  모든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간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결합되어 그곳으로 가셨다면 우리 모두는 죽은 이들을 우리의 전구자로 여길 수 있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모든 것을 그렇게 자세히 알 수 있는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죽음의 세계에서 되돌아 온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는가?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묻는 아주 정상적이고 논리적인 사람들을 언제나 만납니다. 그러나 한 분이 죽음의 세계에서 되돌아 오셨습니다. 그 당시 죽음을 목전에 둔 그날 밤 아버지의 집에 대한 위로의 말씀을 하신 분이 죽음의 세계에서 되돌아 오셨습니다. 그분은 그날 밤 올리브 동산에서 체포되시고 다음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써 자신이 하신 말씀, 솓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하신 말씀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분을 우리는 믿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런 상황에 살았던 사람을 예수께서는 당신께로 인도하십니다. 하느님의 빛과 생명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하십니다.

 세상을 떠나신 분들이 이미 그 목적을 이루셨는지 아니면 약간의 시련을 겪으시는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빛과 평화가 그들에게 주어지기를 기도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지금도 용서와 자비의 제사를 봉헌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너그러우심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고인께서 하느님의 품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기를 마음 모아 기도드립니다.















































장례미사강론<Ⅹ>



복음 : 마태 5,1~8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복되도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슬픔은 또한 결코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고통으로 인해 삶이 파괴된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회의와 고통으로 인해 삶이 파괴된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당하는 고통이 너무 힘에 겨워 하느님을 의심하며 신앙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이 세상에서 생겨 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한 사람이 내외적 고통을 당해 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그 사람에게 가서 ‘너무 괴로워 하지마라’하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로한다면 그것은 자주 자기방어일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다른 사람의 고통과 절망, 그리고 좌절을 견디어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적극 동참하려고 완전히 준비되어 있을 때에만 그 사람에게 희망적인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라”하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분 자신은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모든 고통을, 질시와 반목, 증오와 고통, 고문과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자신을 버리셨다는 느낌을 가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에게 행복선언의 이 약속을 하십니다. 바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가까이 계신다고 알려 주십니다. “당신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겨낼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새로운 길에 대한 용기를 발견할 것입니다. 당신은 새로이 숨을 쉴 것이며 당신의 삶을 발견할 것입니다”하십니다.

 분명 여러분도 고통으로 부서지고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고통을 이겨내고 성숙해진 사람들, 자신의 운명을 이겨내는 가운데 그 신앙이 더 강해진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고통없이는 인간적 성숙이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아랍의 격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언제나 태양 빛만 비춰지는 대지는 사막이 된다.” 곧 고통은 언제나 괴로운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 삶의 한 부분입니다. 어린이가 여러 가지 어려운 과정을 겪어내야만이 어른으로 성숙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고통을 이겨내고 그것을 이겨냈을 때만이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의 고통에 한 몫을 차지할 수 있고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로 인해서 반대의 경우도 가능해 집니다. 즉, 죽을 병에 괴로워하는 사람을 찾아가거나 또는 엄청난 시련을 겪는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나 보면 어떨 때는 제가 그들을 위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제가 위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하느님의 손길을 새롭게 인식하기도 합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이는 근본적으로 고통을 피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고통과 죽음을 찾아 나서지 않으셨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것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사람을 위해서 해야만 한다면 고통과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이에 십자가는 그리스도 신앙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이는 희망이 없는 죽음의 십자가가 아니라 사흗날에 죽은이로부터 부활하신 분께로 인도하는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분께서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라는 약속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구약의 시편 저자는 지독한 괴로움 중에서도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애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야훼여.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을 부르오니,

주여, 이 부르는 소리를 들어 주소서.

 애원하는 소리, 이 소리. 귀 기울여 들으소서” (시편 130.1~2)









































장례미사강론<Ⅺ>









 수년 전 로마에서 한 진귀한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건설현장에서 터파기 작업 중에 대리석으로 된 관 하나를 찾아냈던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이 관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로마제국시대에 살았음이 분명한 젊은 처녀의 시신이 고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시신은 놀랍게도 아주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150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얼굴 선은 그 당시의 고상한 품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사랑스럽게 꾸며졌지만 잿빛으로 변해있었고 바짝 말라 있었습니다. 피부는 d이미 가죽모양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옛날 죽은 이를 미이라로 보존했던 기이한 풍습입니다. 아마도 죽은 이를 온전히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인간의 동경이 어떻게든 함께 작용했었던 모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재가 되어 사사지지 않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원래  그 모습으로 보존하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파괴되거나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것은 삶에 대한 인간의 동경 내지 갈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지가 됩니다.

 인간이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이 같은 갈망이나 동경에 그 뿌리를 둡니다. 밞을 발견하고 간직하고자 하는 욕망은 사람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워지고 싶고, 항상 젊음을 간직하고 싶어합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장품 회사들은 이 같은 인간의 욕망에 부응해서 사업을 펼칩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이나 삶에 대한 끝없는 동경은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꽃, 산과 들, 바다와 푸른 하늘에 대한 동경들은 항상 우리를 답답한 도시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것 또한 생명에 대한 무한한 욕망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을 찾아 나서거나 생명을 갈구하지 않습니까? 비록 참 사랑을 모르고 자신의 개인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조차도 생명을 찾지 않겠습니까? 나이 드신 분들조차도 어렵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삶에 대해 집착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자기 생명을 끊어 버리고자 하는 사람들도 삶에 대한 동경이 좌절되거나 회의가 와서 살기를 그만두고자 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갈망과 동경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갈망은 좌절로 판결납니다. 수 많은 병원과 무덤들은 피할 수 없는 이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우리는 생명을 끝까지 간직할 수 없습니다. 이 끔찍한 현실은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로마시대 처녀의 모습에서 증명됩니다.

 아름다운 얼굴과 고귀한 신분에 따른 품위는 이제 박물관 안에 전시되는 한 조각의 가죽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생명은 죽음으로 판결나고 맙니까? 이 같은 애통한 물음에 대한 인간적인 대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대답은 있습니다. 그 대답은 부활입니다.

 하느님의 대답인 부활은 한정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삶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은 생명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결코 허무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고인의 생애를 통하여 가졌던 행복과 기쁨, 선행과 신뢰, 희망과 사랑으로 행하였던 바, 그 모든 것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이는 곧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의지했던 고인의 삶은 결코 없어지지 않으며, 고인의 삶에서 어둡고 슬펐던 것들이 하느님의 빛 안에서 환히 밝아질 것입니다. 고인이 믿었던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소용없거나 허무하게 사라지게 하지 않으십니다.

 슬퍼하는 유가족 여러분, 세상에서의 고인의 피곤한 나그네 길이 이제 끝이 나고, 더 이상 눈물도, 슬픔도 고통도 없고 하느님의 생명과 삶에 대한 모든 인간의 갈망이 바로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이라는 점이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그 누구도 이 대답이 옳지 않다고 신앙인들에게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고인이 사랑했던 하느님께 고인을 맡겨드리는 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고인을 맡겨드리고 고인을 위해 마음 모아 기도드립시다.







































장례미사강론<Ⅻ>



                                      

                                            독서 : 로마 8,18~25

                                           복음 : 요한 4,1~18









 지금 우리는 고인이 되신(      )와 작별하기 위해서 여기에 모였습니다. 세상에서의 이 작별은 더 이상 기약할 수 없는 마지막 작별이기에 마음이 더 아픕니다. 유가족 여러분에게는 아내요 어머니인 고인의 죽음이 고통스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크나큰 슬픔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 많은 죽음의 소식을 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죽음과 유가족 여러분이 지금 겪는 죽음과는 크나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겪는 아내나 어머니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지만 우리가 매일 듣는 죽음의 소식은 남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죽음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죽음의 비통함을 직접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갈 뿐 아니라 내가 일구어 놓은 모든 관계를 앗아가 버립니다. 이성적으로는 나이가 들면 죽음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지만 마음으로는 그것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내 어머니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다는데 대해 우리는 슬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가 하느님 곁에 계시면서 계속해서 우리 가까이 계실 수 있음에 우리는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이 단순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신앙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이들은 하느님 곁에서 계속해서 살아계시며 하느님의 현존을 통해서 죽음을 뛰어 넘어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오늘 여기 있는 우리들은 이 같은 신앙을 나눕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감사드릴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가족 여러분에게는 슬픔 때문에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여러분이 겪으시는 슬픔은 내적 평화를 선사하는 위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인처럼 하느님 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이 성공하는 것은 모든이에게 당연히 주어지진 않습니다. 고인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습니다. 신앙과 희망은 그리스도 신자들을 특정짓게 합니다. 신앙은 세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드러나지 않는 실체, 곧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봅니다. 신앙은 이 세상 안에서 내가 지금 벌써 시작할 수 있는 영원한 고향, 곹 미래가 있음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희망의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희망의 뿌리이십니다. 일시적 실망과 좌절을 메꾸어 주는 그런 희망이 아니라 수 많은 난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고향으로 계속 가는 길에 대한 희망이십니다. 언젠가 새 날이 오면 하느님 안엣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하겠습니까?”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죽음을 접하고 그의 말없는 시신을 마주 대하면 우리 안에서는 체념적인 질문이 던지게 됩니다. “도대체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하고 말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스스로가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도대체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찾아내는 모든 대답은 어쩔 수 없이 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한계를 가지고 이 세상에 살았던, 우리 손으로 묻어야만 하는 고인만이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고인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살아 생전에 하느님께 자리를 만들어 드리고 하느님을 믿고, 언젠가 우리에게 자리를 주실 하느님을 바라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생명과 사랑 안에서 그를 받아 주실 것입니다”하고 말입니다. 우리의 고인은 이런 신앙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 신앙은 또한 오늘 슬퍼하는 우리를 위로해 줄 것입니다. 이 신앙은 성 예로니모의 말씀을 우리 마음 안에 새겨 줄 것입니다.

 “내 어머니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음을 슬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가 하느님 곁에 계시면서 계속하여 우리 가까이 계실 수 있음에 우리는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별의 표지<XIII>







아내와 작별해야 하고, 어머니와 작별해야 하는 유가족 여러분에게 이 시간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고인에게 하는 작별은 보통으로 방문을 끝내고 하는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말하는 일반적인 인사와는 전혀 다릅니다. 통상적인 작별인사는 또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오늘 고인에게 하는 작별은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재회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별입니다. 작별을 고해야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순간에 느끼는 마음은 도저히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으며 여러분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작별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대신 표지로나마 말을 대신할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러한 표지를 가져 오셨습니다. 바로 꽃입니다. 꽃은 기쁨과 희망의 표지이며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하는 행복의 표지입니다. 우리의 고인은 꽃의 아름다움과 색깔에 얼마나 기뻐했으며, 그 자신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꽃과 같이 살았습니다. 고인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언젠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유가족 여러분께서는 고인이 간직한 남편과 자녀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생각한 그 사랑에 감사하고 고인에 대한 사랑의 표지로 무덤 위에 꽃을 바치십시오. 또 다른 작별의 표지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고인의 육신의 땅에 묻힐 때 고인의 관을 땅에 내려놓을 것입니다. 손에 잡히는 흙은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뚜렷하게 밝혀줍니다.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 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 가리라”(창제 3,19)라고 하느님은 창세기에서 원죄를 지은 인간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고인의 삶에서 쉽게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고인은 크게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힘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 손에 흙을 쥐고 하느님께서 고인의 삶에서 흘린 눈물을 바꾸어 주시고 고인의 삶에서 잘못이 있으면 당신의 자비하심으로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가톨릭 교회의 장례식은 또 다른 작별의 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성수와 향입니다. 미사 전과 미사 후 사제는 고인에게 성수를 뿌리고 향을 피워드립니다. 그러면서 아래의 기도를 바칩니다. “당신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니, 주께서 세례안에서 시작하신 바를 완성시켜 주소서”하고 여기에서 고인의 삶의 시작에서 마침까지를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놓여집니다. 고인이 세례를 받았을 때 주께서 고인에게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이제 너는 내게 속해 있다. 나는 너에게 죽음보다 더 강한 생명을, 너의 육신이 언젠가 땅에 묻히더라도 남아 있는 생명을 주고자 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말씀대로 이루어 질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고인의 세례에서 이미 시작되었던 바 구원과 생명,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삶을 고인이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고인과의 작별이 유가족 여러분에게는 쉽니 않을 것입니다. 공허함과 아픔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렇지만 작별의 표지인 꽃과 흙과 성수와 향은 계속해서 말을 합니다. 이별이 있고 난 후 어두운 심연이 따라 오지 않고 우리가 여기 이 땅 위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고인이 생각했던 꽃과 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그 사랑을 나누면서 그리고 세상의 흙이 우리의 이불이 아니라 거룩한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의 마지막 목적임을 깨달으면서 열심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분명 죽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인 뿐 아니라 우리까지도 새롭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장례미사강론<XIV>





복음 : 마르 15,33~39  16.1~8







 모든 그리스도교 장례식은 십자가 아래에서 거행됩니다. 십자가는 죽은 이의 시신이 모셔진 관보다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행렬합니다. 사제는 관 위에 십자가 형태를 그리면서 성수로써 축복하고“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부활과 구원이 있도다”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관한 마르꼬 복음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문장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신앙을 강하게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들은 마르꼬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서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고통스럽게 죽으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아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우선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죽음의 표지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도 여기 우리 앞에 누워 계시는 고인의 고통과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고인의 마지막 날들과 요 몇 달은 십자가로 표지될 수 있는 병고로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고인은 고인을 사랑하는 가족들의 염려와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으셨습니다. 고인은 신앙인으로써 그리고 열심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생각에 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하는 주님의 말씀을 고인은 자주 들었습니다. 고인은 살아 생전에 수 없이 되풀이되는 많은 난관에서 주님의 이 요구에 부응해서 살아오셨습니다. 고인은 또한 생의 힘든 시기에 자신이 겪는 삶의 고통의 길에 예수님이 함께 걸어가신다는 진리를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넓게 펼친 구세주의 양팔은 고통과 병과 죽음에서도 그분께 믿음을 주는 사람을 안아 주십니다. 고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뒤따랐고 그것은 곧 생의 여정 안에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그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심으로써 다른 사람을 위하시는 예수님의 희생에 적극 동참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우리의 부활과 구원이 있도다”하고 사제는 묘지를 축성할 때 말합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평화가 당신과 함께”하고 말합니다. 이 평화를 기원하는 인사를 부활하신 주께서 오늘 우리 고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고인에게 평화를 선사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고통의 길에서 주님을 뒤따르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 길에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랑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부활과 그 영광의 한 몫을 차지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조용한 가운데 고인을 생각합니다. 고인에게 하느님께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주시도록 주님께 간청합시다.

 우리의 사랑하는 고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부활과 구원이 있음을 하느님 곁에서 체험하시기를 기도드립시다.























































































장례미사강론< XV >




 남편과 아버지를 잃고 슬퍼하는 유가족 여러분,

고인은 분명 가족 여러분께 완전히 속한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고인은 바로 여러분 가정의 가장이요 남편이며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유가족 여러분과 비교하면 우리 모두는 제 삼자가 됩니다. 고인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고인과 이야기를 나누셨을 뿐 아니라 함께 사셨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분의 사랑과 보살핌 뿐만 아니라 그분의 염려와 걱정, 그분의 한계와 연약함까지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 여러분 만이 고인이 여러분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그분의 자리와 의미를 가늠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러분의 슬픔과 괴로움 앞에서 침묵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족 여러분, 고인은 오늘 여러분과 함께 슬퍼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속하신 분이었습니다. 고인은 살아 생전에 우리와 같이 말했고 함께 기도했던 우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그분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그분의 빈자리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합니다. 그분은 우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분 또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짧은 시구의 대상이었습니다.





 “당신은 왔다가 희미한 발자취를 남기고 가셨습니다. 이 땅 위에 잠시 머무는 손님처럼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십니까? 단지 우리는 하느님의 손에서 왔다가 하느님의 손으로 되돌아감을 알 뿐입니다.



잠시 머무는 손님, 우리 모두는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기도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와 감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고와 느낌은 “속지 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은 내가 체험하고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실재다. 다른 모든 것은 환상이고 꿈일 뿐이다”하고 말합니다. 이에 반해 전혀 다른 방향이 하나 있습니다. 곧 “우리는 이 지상의 삶을 간직할 수 없다. 아무도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건강과 육체의 힘과 능력을 영속적으로 지속시킬 수 없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보이는 것은 또한 부서질 수도 있는 것이며 손에 잡히는 것은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언젠가 없어져 버리고 만다. 우리 모두는 잠시 머무는 과객일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하고 가늠할 수 있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는 말인가? 이 세상만이 있을 뿐인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인생의 시간뿐이란 말인가? 하는 질문을 우리는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반대의 증거, 곧 우리가 계산하고 가늠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실재가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음악과 예술입니다. 음악은 하늘의 소리이며 예술은 세기를 흘러갑니다. 두 번째는 가장 확실한 것으로써 사랑입니다. 유가족 여러분은 여러분의 남편이자 아버지께서 비록 여러분 곁을 떠나셨다 하더라도 그분을 사랑하기를 그만 두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죽음을 뛰어 넘어서 그분을 계속 사랑하실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그러합니다. 사랑은 죽음을 뛰어 넘습니다. 사랑은 죽음에 대항하는 가장 강한 반중이며 우리의 사고와 계산으로는 도저히 파악되지 않는 실재에 대한 가장 강한 증거가 됩니다. 종교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세상의 모든 실체는 끝없는 사랑으로 감싸여 있으며 그 사랑을 주체는 바로 앞의 인용한 시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단지 하느님의 손에서부터 와서 하느님의 손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임을 알 뿐이네.”

 이 진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비춥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마음으로 느낍니다. 인간은 무에서 생겨나지 않고 하느님의 손길에서 생긴 존재입니다. 인간은 다시 무로 되돌아가지 않고 하느님의 손길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심연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통과하는 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손님이 아니라 고향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고통 겪었던 그 모든 것이 죽음으로 없어지지 않고 하느님 곁에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주위에 떠오르는, 우리가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수 많은 물음들, 곧 나는 누구인가? 하필이면 왜 내가 이런 운명을 당해야 하는가? 왜 사람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왜 사람은 그렇게 죽어야 하는가? 하는 이 모든 의문에 대해 우리 앞에 고요히 누워 계시는 고인은 그 해답을 벌써 알고 계십니다.



     “당신은  왔다가 희미한 발자취를 남기고 가셨습니다.

     이 땅 위에 잠시 머무는 손님처럼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십니까?

     단지 우리는 하느님의 손에서 왔다가

     하느님의 손으로 되돌아감을 알 뿐입니다.”





















장례미사강론<XVI>





                                      

                                         독서 : 1고린 15,5~57

                                      복음 : 요한6,37~40









 세상의 수 많은 일 중에서 사제와 의사보다 죽음에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가끔 두 사람은 한 인간의 삶의 마지막 시간에 만납니다. 의사는 모든 의학적인 노력이 한계에 부딪쳐 죽음이 찾아오는 곳에서, 사제는 죽음을 뛰어넘는 신앙과 희망에 대한 말을 건넵니다.

 인간의 삶이 다양하듯이 죽음도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고령이 되어서 맞이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한창 삶을 꽃피워야 하는 시기에 죽음이 갑자기 들이닥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한창 삶을 꽃피워야 하는 시기에 죽음이 갑자기 들이닥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죽음에 직면에서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이에 대항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반대로 스스로 불러 들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죽음을 조용히 받아들입니다. 어떤 이는 길고도 힘든 죽음과의 투쟁을 겪어야 합니다. 이처럼 죽음은 다양하고 여러 가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어디서나 같습니다. 육신은 이완되고 죽음의 얼굴이 덮여집니다. 죽음이 결국은 승리합니다.

 정말 죽음이 이겼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그 무엇도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첫 느낌에서 보면 인간은 죽음에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죽음이 언제 들이닥칠지 알지 못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도망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죽음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고 맙니다. 죽음에 대항하는 힘든 투쟁과 모든 방법들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결국 패배자가 되고 맙니다.

 유가족 여러분, 그리고 공동체 형제 자매 여러분,

 임종병상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패배자로 보입니까? 진정 우리는 그 얼굴에서 평화와 고요를 읽어낼 수 없겠습니까? 무덤 주위에 놓여져 있는 화환들은 죽음이 승리한 것에 대한 표시에 불과합니까? 죽은 이와 무덤 위에 세워진 십자가는 죽음을 이겨낸 신앙의 표지가 아닙니까? 우리가 고인과 마지막 작별하는 고별식 때 밝히는 촛불은 죽음을 뛰어 넘는 하느님 사랑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의 표지가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우리의 삶을 앗아가는 죽음 위에 더 놀라운 하느님의 손길이 있음을 알며 또한 그 손은 우리를 영원한 광명에 인도하실 것임을 믿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비록 우리의 삶에서 고통과 환난을 겪더라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당신 죽음과 부활에 포함시키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고인에 대해서 이 시간 우리가 이야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고인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로마 6,8)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진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우리는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장례미사강론<XVII>










 매일 매일을 살아가면서 겪는 걱정과 수고로움 가운데서 죽음의 신비는 우리 인생의 문을 두드리며 집의 문지방을 보이지 않고 예기치 않게 살짝 넘어 들어옵니다. 이 예기치 못한 불청객은 우리의 일과 생활감각을 완전히 멈추게 할 뿐 아니라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도대체 사는 게 무엇인가? 죽고 나면 모든 것이 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수 많은 걱정거리나 염려를 우리와 같이 했던 고인은 이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사랑했던 이 세상의 고인은 더 이상 우리 곁에 있지 못합니다. 인간은 시들어 버린 꽃처럼 흙으로 다시 되돌아갑니다. 우리에게 더 이상 한 마디 말도 건넬 수 없는 죽은 이 앞에서 우리 또한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수 많은 말을 하면서도 정작 고인의 시신 앞에서는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곤 황당해 합니다. 더구나 평소 고인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나 고인을 좋아하고 사랑했던 사람의 마음은 그 앞엣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 앞에서 말을 잃어버립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인에 대한 마지막 희망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즉 죽음 안에서 새 생명이, 그것도 결정적이고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는 희망만은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 생전에 이룩했던, 그것도 사랑과 선의로 일구어 놓았던 것은 사라지지 않고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생명 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생명은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 진리를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의해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건너가신 이래 우리는 죽은 이들에 대한 우리의 마지막 바램이 생겨났습니다. 즉 죽은 이들은 이제 하느님 곁에 살아 계신다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 신앙의 약속이자 우리를 위로하는 약속이며 동시에 우리를 일깨우는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마지막인 것처럼 여겨 우리 마음을 이 세상에만 몰두하지 않도록 우리 주변을 가꾸어 가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슬퍼하고 할 말을 잃어버리는 고인의 죽음 앞에서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주께서는 고인과 함께 우리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가르칩니다. 모든 죽음은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며, 하느님 자비에 대한 희망을 우리의 기도 안에서 잊지 말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신앙 안에서 새로이 일으켜 세울 것을 일깨웁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고인을 위하여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간청합니다. 또한 우리는 아직 영원한 고향으로 가는 길에 서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하님께 간청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한 가운데 죽음이 우리를 감싸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죽음 한가운데서 새 생명이 시작된다는 진리를 믿고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이다.” 라고 주께서는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고인을 위한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인은 우리 앞에 놓여진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 안에서 살아계십니다. 고인처럼 우리 또한 죽음을 뛰어넘어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시기보다는 자비와 사랑과 약속의 하느님이십니다.























































장례미사강론<XVIII>











 한 사람의 시신이 모셔져 있는 관 앞에, 그것도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 말없이 우리 곁에 누워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한 번은 죽어야 하는 대지의 자식들이라는 사실을 가슴 아프게 깨닫게 됩니다. 이 땅을 두고 시인들은 ‘어머니의 대지’라고 표현합니다. 대지 또는 땅은 우리의 행복이자 동시에 우리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땅은 우리가 겪는 고통과 불행이지만 동시에 뜨거운 마음으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기도 합니다. 땅은 죽음의 독침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깊은 곳에서부터 영원히, 끝없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치솟은 산맥과 넓은 바다와 아름다운 절기들과 밝은 별빛을 가진 어머니인 대지는 그러나 불행한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지는 우리가 경시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만들어주기에는 너무나 빈약합니다. 대지가 주는 모든 행복은 지나가 버리고 그 끝에는 우리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서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죽음 앞에 빛나는 번개처럼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도다”하는 생명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운명은 이제 우리의 운명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선하게 살아Tejs 사람들의 무덤은 이미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의 하느님 집에서 변화되어 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묵시록에서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옥좌에 앉아 계시는 분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더 이상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다 씻어 주겠노라.”

 우리는 고인이 이미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도 될 것입니다. 주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하신 그 약속은 결코 헛된 약속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속이지 않으십니다. “나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 곁에 있노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 안에서도, 우리의 고통과 죽음 안에서까지도 드러나지 않게 숨어 계십니다. 그분은 죽음이 승리한 것 같이 보이는 곳에서도 그 죽음을 이기시는 생명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낮의 햇빛처럼, 우리가 보지는 못하지만 언제나 있는 햇빛처럼 우리 곁에 계십니다. 화산폭발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못하지만 언제나 있는 햇빛처럼 우리 곁에 계십니다. 화산폭발이 우리에게 보여 주듯이 대지는 땅 속 깊은 지층에 열과 불을 안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 안에 이미 하느님의 은총과 능력이 불타고 있어 죽은 모든 이들의 선의와 사랑을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고인을 당신 영광으로, 영원한 복락의 나라로 받아주셨음을 굳게 믿을 수 있습니다. 고인의 죽음의 시간 곁에 놓여졌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결정적인 승리의 표시가 됩니다.

 우리가 언제나 성당 안에서 만나게 되는 이 십자가는, 그리고 묘지 위에 세워지는 이 십자가는 죽음과 허무의 표지가 아니라 부활과 생명의 표지입니다.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임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슬퍼해서는 안된다고 사도 바오로는 가르쳐 주십니다. 이에 우리는 죽은 이의 부활을 믿는 이 신앙을 굳게 견지하고자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주님께 간청했듯이 우리 또한 슬픔의 이 시간에 주님께 간청해야겠습니다.



“주님,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 가십시오. 이제 하루 해가 다가고 저녁이 가까웠습니다.”

















































장례미사강론 <XIX>






요한 : 10,7~11







 유가족 여러분, 조객 여러분 그리고 공동체 형제 자매 여러분!

한 인간의 죽음은 갑자기 닫혀버리는 문과 비슷합니다. 한 순간에 관계가 부서져 버리거나 단절되어 버립니다. 살아있다면 그 사람과 어떤 형태로든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지만 그러나 죽음은 한 순간에 그 모든 것을 지나가게 만들어 버립니다. 닫혀진 문으로서의 죽음은 사람들을 서로 갈라 놓는 힘이며 서로의 관계를 파괴하거나 부숴버리는 힘입니다. 묘지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죽음의 힘을 고통스레 느끼게 됩니다. 고인의 육신이 땅 속에 묻힐 때, 생각으로만 고인과 마지막 작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고인과의 작별이 진정 마지막임을 느낍니다. 그곳에서 죽음이 고인을 우리에게서 영영 멀리 떼어놓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고인은 적어도 요 몇 년(또는 몇 달, 며칠) 사이에 닫혀진 문에 대한 체험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분의 건강, 오랜 기간에 걸친 병원에서의 투병생활은 다시정상적인 생활에 대한 가능성에서 우리를 떼어 놓았습니다. 지난 몇 달(또는 며칠) 동안에는 고인이 다시 건강해 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조차도 멀어졌습니다. 고통과 좌절의 때도 있었습니다. 모든 문들이 닫혀졌던 것입니다. 문은 삶의 상태를 드러내는 표상입니다. 나에게서 다른 사람들을 단절시켜 버리는 문도 있고, 나 자신이 의도적으로 닫아버리는 문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문은 단지 일정기간 동안 닫혀있을 뿐입니다. 문을 스스로 열려고 하는 용기나 힘이 내게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내가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문도 있습니다. 나는 짧게든 길게든 닫혀진 문을 열어야 합니다. 닫혀진 문을 통과해야만 나는 계속 살아갑니다. 이처럼 나에게 열려있는 문들은 내가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열려있는 문들은 바로 그들 곁에 있을 수 있다는 느낌을 내게 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끝날까지 살아 있는 동안 열려진 문으로 살아갑니다. 나자렛 예수 안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열려진 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받아들여직 그분을 통해서 충만한 삶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이같은 열려진 문을 찾은 수 많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열두제자 자캐오,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우리 자신들 모두입니다. 언제나 닫혀진 문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주님을 통해 갑자기 열려진 문을 통하여 새 삶을 발견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언제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바깥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십니다. 요한 복음은 “나는 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통화하여 들어오면 구원받을 것입니다”(요한 10,9)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과 연결시켜 줍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만의 열려진 문이 아니라 죽음을 뛰어넘어 들어갈 수 있는 문이십니다. 우리가 지금 미사 잔치를 거행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이 문을 통해서 우리는 슬픔에서 희망에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에서 영원한 기쁨으로 건너갈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시는 문을 통해서 고인을 생명의 나라에로 받아주셨음을 확신합니다. 고인은 언제나 이 문을 통과하길 소망하셨습니다.

주님은 고인의 이 간절한 소망을 기꺼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고인의 이 바램이 헛되지 않기를 우리 모두 마음 모아 주님께 간청드립시다.































































젊은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 <XX>






암으로 사망







 여러분은 아들 또한 형제 그리고 친구를 갑자기 잃고 슬퍼하십니다. 그의 마지막 길을 전송하고자 아픈 마음으로 여기 오셨습니다. 특히 부모님을 중심으로한 가족들은 수 많은 길을 그와 함께 걸어 오셨습니다. 그 많은 길들 중에는 기쁘고 즐거웠던 날들도 있었으나 또 한편 병고와 걱정과 염려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그 어려운 시기들을 잘 이겨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너무나도 빨리 그리고 홀연히 여러분보다 먼저 먼 길을 떠났습니다. 여러분들도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함께 할 수 없는 길을 떠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을 뿐입니다. 여러분과 비슷한 상황에서 사람을 잃고 슬퍼했던 어떤 사람이 그 참담한 심정을 아래와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너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구나. 나는 고개를 숙이고 슬퍼하네. 내 말이 여전히 네게 다다를 수 있을 지 알 수 없구나! 이제 너는 나의 도움을 더 이상 필요로하지 않겠지. 내 느낌은 공허할 뿐이란다. 나의 한 부분이 너와 함께 죽었단다. 그래도 너는 내 가까이에 여전히 남아있단다. 아직도 나는 너의 따스한 온기를 체감한다. 마치 해가 서산에 넘어간다 해도 돌로 된 벽은 얼마동안 그 온기를 간직하듯이, 나 또한 너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단다. 아직도 난 너의 말을 들으며 낮은 소리로‘엄마’하는 소리가 내 귓가에 맴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함께 살았었지만 이제 나는 혼자가 되었단다. 서로 위해주고 서로를 염려해주는 일도 이제 그만 두어야겠지. 이제는 그 뒷 애기와 생각만 할 뿐이다. 생이 얼마나 짧은지, 너의 인생이 무엇이었는지 누가 헤아려 볼 수 있을까?  수 많은 귀중한 순간들을 내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나는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단다. 내  생각은 너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것에 맴도는구나. 이제 더 이상 너를 중심으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겠구나.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나는 알고 있단다.”
저는 지금 여러분이 견뎌내는 위와 같거나 비슷한 고통스런 마음이 그렇게 빨리 없어지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고통은 순식간에 들이닥치지만 지나가기는 더딥니다. 아픔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님처럼 여러분 가까이에 머물고 여러분 마지막 날에 와셔야 떠나갑니다. 슬퍼하거나 자신의 슬픔을 몰아내지 않는 사람은 마치 다리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저 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건너갔던 곳으로 가는 것이고 이편으로는 고인과 함께 지내던 삶의 시간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또는 저편에서 이편으로 건너다니는 것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관점이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여러분께 속했던 것들이 부서져 버렸지만 회상에서는 그것을 되살려주고 보완해 줍니다. 여기서는 어떤 가치있는 것들을 잃어버렸지만  회상에서는 그것을 찾아주고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누가 우리로부터 떠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회상에서는 그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더구나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는 그는 언제나 살아 있습니다. 이처럼 회상에서는 건너가고 건너오는 발걸음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께서 고인과 대화를 하고자 하거나 사진을 들추어 볼 때 또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거나 하느님 앞에서 원망스런 기도를 드리려고 하면 언제나 “왜?”,“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왜 주님, 내 아들입니까? 왜 하필이면 내 가족, 내 친구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까? 그가 왜 벌써 죽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왜 내 아들이 그런 병에 걸려야 합니까? 왜 다른 사람은 아닙니까? 왜 세상에 그렇게 많은 고통과 불의가 있습니까? 왜 행운의 기회가 공평하게 나누어지지 않습니까? 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까? 도대체 하느님은 계시기나 하십니까? 이처럼 수 많은 의문과 원망이 내 안에서 생겨납니다.

 저는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극도의 괴로움에 직면해서 위의 질문들을 제기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적합한 대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저는 한 가지 사실만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귀한 아들의 고통과 죽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좋은 일을 하시기 위해 나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좌절, 방향과 죄, 잘못, 인간적인 부족함과 비인간적인 잔인함을 결코 원하시지도 그렇게 정하시지도 않으십니다. 고통과 죽음에는 그 어떤 시원한 대답도 있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함께 겪는 고통과 함께 하는 죽음 자체가 대답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받아 들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그분의 죽으심에 함께 하는 것이고,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또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시작과 마침에 이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께 희망을 둘 수 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은 언제나 노예와 같은 삶을 살지 아니하고 병자는 언제나 병고에 시달리지 않으며 죽은 이들은 언제나 죽음의 세계에 갇혀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박해하고 죽이는 사람이 승리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는 사람이 결정적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슬픔에 잠긴 유가족 여러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고인은 평소에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믿었고 사랑했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비록 부모님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 부모의 가슴에 못질하고, 땅에 묻기보다 가슴에 묻게 했지만 그렇더라도 하느님의 손길은 고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나 갑자기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기에 원망스럽지만 이제 우리는 그 원망을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기고 간청으로 바꾸십시다. 하느님은 그를 당신 천상복락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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