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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8월 9일 (토) 20:45
분 류 연중25-30주일
ㆍ추천: 0  ㆍ조회: 5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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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30주일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제 1독서 : 출애 22,20-26



제 2독서 : 1데살 1,5c-10



복  음 : 마태 22,34-40



 오늘 전례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드높이 찬양하고 있다. 하느님은 모든 가치체계의 최정상에 군림하셔야 하며 우리는 그분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마태 22,37) 전존재로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삶이 인간으로서의 삶이 됐든 크리스찬으로서의 삶이 됐든 모든 삶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 전례는 동시에 이웃사랑도 강조하고 있다. 이웃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오 증거로서 인간을 통하여 하느님의 위대성을 반영시킨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느님과 인간은 결코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두 실체이다. 왜냐하면 상호 필연적인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특히 현대 세계의 물질 중심주의적 무놔는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을 설교하고 또 그분의 윤리적 영신적 요구를 가르침으로써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비난을 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유치증을 고찰하는 데는 포이에르바하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참고하면 충분할 것이다 : “하느님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가난해져야 한다 : 하느님이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하느님은 자기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질투하는 이기주의의 자기 도취일 뿐이다”(L. 포이에르바하, L'essenzadel cristianesimo, Feltrinelli, Malano 1975, 3 ed., pp.47-48).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첫째 계명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가르치신다 :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을 마치 동전 한닢의 양면과도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가난하게 하시지’ 않고 오히려 당신 자신의 ‘모상’대로 만드실 만큼 들어높여주신다.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그러면 복음 내용을 살펴보자.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 전체 가운데서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특징적인 내용 중 하나를 전해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몇 마디 안되지만 압축적인 표현을 통해 당신 계시의 새로운 면과 독창적인 면을 모두 종합해주고 계시다.

  “그때에 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34-40).

  이 대목은 세 공관 복음서가 다같이 전해주고 있으나 그 양상은 같지 않다. 루가복음(10,25-28)에서는 예루살렘 ‘논쟁들’에 관한 대목들 이전에 나오는 예수의 그 유명한,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에 관한 큰 단편(9,15-19,28) 가운데 삽입되어 있으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서론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반해, 마르코복음(12,28-34)에서는 문맥의 상황이 마태오복음의 경우와 비슷하다. 하지만 논쟁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다. 실제로 끝부분에 보면, 예수께 질문을 했던 율법학자가 “그렇습니다”(12,32) 하며 예수의 대답에 찬사를 보내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12,34)라고 말씀하신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이미 언급했듯이 불꽃튀는 예루살렘 논쟁들(22,15-46)의 문맥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다른 공관 복음서에는 없는 서두 형식의 구절들(“그때에 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물었다”:34-36절)에서 볼 수 있듯이 논쟁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매우 이상하고 역설적인 사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앙심을 가득 품고 예수께 접근하면서도 자신들의 악의에 찬 의도를 위장하기 위해 사랑에 대한 논쟁에 관심이 있는 척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내적 모순은 별개 문제로 하고, 어째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36절)라는 평범한 질문을 그리스도께 던짐에서 ‘함정’의 가능성을 보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사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유명한 ‘쉐마(shemà)의 기도’(‘들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원문 shemà에서 비롯된 기도 명칭)의 장엄한 첫 대목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신명 6,4-5). 이 기도는 줄곧 유다인들의 신앙과 신심 전체의 종합으로 여겨져오고 있다. 사실 루가복음에서는 율법학자 자신이 대답을 하고(10,27) 예수께서 그 대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계시다.

  그러면 이 질문 어느 구석에 음흉한 책략이 들어 있는가? 미루어 생각건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제시하시면서(바로 조금 앞에 나오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 혼인잔치의 비유를 상기해 보라) 그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첫째 계명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는 듯한 그리스도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품지 않을 수 없었던 의심에다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네 마음을…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반면에 예수께서는 그러한 의심과 관련된 문제는 불분명하게 내버려두신 채 다른 모든 계명들에 대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이 가지는 절대적 수위성을 신명기의 표현 자체를 빌어 재확언하신다:“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마태 22,37). 그리고 그 말을 봉인이라도 하시듯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씀하신다:“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38절).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거부하거나 바꾸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강조하고 활력을 불어넣어주신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특히 예수 자신의 생활, 그 중에서도 특히 성부께 대한 ‘순명’(필립 2,8 참조)의 행위로써 받아들이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증거된다.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의 요구를 철저히 실현시키시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증거의 모습에 대해 오늘 영성체송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시고,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 제물이 되셨도다”(에페 5,2). 제 2 독서에서도 사도 바울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린 것”은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1데살 1,9)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종합적 본질에 비추어 볼 때 그 의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물론 신약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있어서 더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그 계명이 더 쉬워졌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이 지상의 순례자로 있는 동안 결코 이러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 실제로 어느 누가 마음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윤리신학자들은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삶의 한 순간인 바로 지금부터 복음이 요구하는 대로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한 세밀한 분석들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들을 어떻게 평가하든지간에, 매우 객관적 성향을 띠는 순수 윤리학에서는 만일 어떤 사람이 원칙적으로 또 깊은 사고의 결과에 따라 그 순간에 하고 있는 그 이상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마음의 준비를 하거나 열망하기를 거부할 때는 더 이상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윤리신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흔히는 완덕을 향한 열망이 어떤 일정한 범주에 속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부과되어 있는 절대적 의무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이미 하고 있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해야 할 의무를 제외한 채 완덕을 열망해야 할 절대적 의무란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절대적 의무라는 그 의무를 아직 갖고 있지 않다고 가정만 하면서 지금 해야 하는 사랑마저 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게 뭐란 말인가?…진정 우리가 오늘 우리 자신의 내적인 자세를 사랑에 열어놓고자 한다면, 우리는 마치 내일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오직 내일 있게 될 사랑의 모험에 오늘 우리 자신을 투신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마음 자세를 거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오늘이 오늘 있어야 하는 모습대로 있지 못한다면, 내일 역시 내일 있어야 할〔내일의〕 사랑이 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오늘이 내일의 선재요건으로 인식되고, 또 오늘부터 내일의 요구에 따를 때만이 오늘이 있어야 하듯 내일이 있게 된다. 또한 사랑이 만일 진정 앞으로 나가는 과정중에 있는 것이며 지금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주어지는 미래를 향해 펼쳐져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필립 3,13 참조), 오늘 있는 것 보다 더 크게 퍼져나가는 한에 있어서만 오늘을 위한 참된 사랑도 있게 된다”(K. Rahner, It comandamento dell'amore, Paideia, Brescia 1964, pp.29-30).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지만 예수의 응답의 본래 의도는 세상 만물에 대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가지는 우선성을 재확인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그 사랑과 이웃사랑을 상호 내적 ‘친밀성’을 통해 한데 묶어놓으려는 데 있다:“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39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확실히 레위 19,18을 상기시켜주고 계시다. 하지만 그 의미를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우에서처럼 자기 동족에게만 국한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확대 적용시키신다.

  예수께서는 가치체계를 유지하신다:즉 ‘첫째’ 계명이 역시 ‘가장 큰’ 계명이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모든 사물의 우위에 있다고 하시며, ‘둘째’ 계명은 모든 사람―자기의 원수라 할지라도(마태 5,43-48 참조)―에 대한 사랑을 부과하는 계명이라고 하신다. 그러면서도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을 상호 내적 ‘보충성’과 ‘일치성’의 관계를 통하여 거의 하나로 묶으려 하신다.

  어째서 두 계명간의 상호 ‘보충성’을 말씀하시는가? 그분의 관점에서 볼 때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성서 전숭에 의하면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창세 1,26-27참조) 만들어졌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피조물보다도 사람의 창조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창세 1,31 참조). 둘째로, 육화의 신비 이후 하느님의 ‘모상’이 인간의 얼굴과 마음에 더욱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삼위의 신비 자체에 잠길 수 있을 만큼 그분과 가까워졌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드리는 그 사랑과 ‘유사한’ 사랑―비록 구조 자체로는 똑같지 않지만―으로 인간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여정은 보통 바로 형제들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요한은 다음과 같이 매우 현명한 권고를 우리에게 하고 있다:“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 4,20-21; 요한 14,25. 21; 15,17도 참조).

  그래서 마태오복음에만 있는 오늘 복음의 결어(“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40절)에서는 두 계명의 일치성과 동질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두 계명 안에서 모든 계시 즉 율법과 예언이 ‘종합’되고 있음도 단언하고 있다. 하지만 그 ‘종합’의 의무는 현재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지워져 있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통해 그 ‘종합’을 생기있고 활력있게 이루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소위 “계약의 법령”(출애 20,22-26; 21-23장)에서 취해지고 있는 오늘 제 1 독서는 이미 구약성서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 특히 보다 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외국인, 고아, 과부 등)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강력히 요구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곧 이웃사랑은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느님 야훼께 대한 ‘충실성’을 드러내는 필수적인 표현방법이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지 않았느냐?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아라…너희 가운데 누가 어렵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주게 되거든 그에게 채권자 행세를 하거나 이자를 받지 말라. 만일 너희가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호소하면 자애로운 나는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출애 22,20-26).

  이 모든 규정들의 특징적인 내용은 그 당시의 엄격한 사회적 관습이나 시대적 환경에 비추어 깜짝 놀랄 만한 ‘박애주의적’ 정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아가 그 규정들에 담겨 있는 종교적 시사 내용에 있다: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자기 형제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하느님 야훼 자신이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애로우시기”(26절) 때문이다!

  형제들을 선하게 또는 악하게 대하는 것은 하느님 자신을 그렇게 대하는 것과 같다(마태 25장 참조). 하느님은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엄히 벌하실 것이다:“너희가 그들을(과부와 고아)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 호소하면, 나는 반드시 그 호소를 들어주리라. 나는 분노를 터뜨려 너희를 칼에 맞아 죽게 하리라…”(22-23절). 비록 아직 완전치는 않지만 이미 우리는 복음의 내용에 접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신(神)중심주의적’인 이러한 ‘박애주의’를 회복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이야기를 제쳐놓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복음을 ‘인간화’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현대적 유혹을 탈피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이웃형제들―신자이든 비신자이든―에게 베풀 수 있는 봉사도 관대해지고 열성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이간은 아무것도 아니다”(J.P. Sartre)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오히려 만일 우리가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 있어서 하느님을 다시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께 ‘첫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는다면, 인간은 스스로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거나 다른 사람들 내지는 심지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사물들의 노예가 되어버릴 것이 뻔하다.

  이 때문에 우리 모두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셨듯이 그 두 계명의 ‘종합’을 이루어나가야 할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마태 22,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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