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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8월 9일 (토) 20:44
분 류 연중25-30주일
ㆍ추천: 0  ㆍ조회: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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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연중 제 29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29주일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제 1독서 : 이사 45,1.4-6



제 2독서 : 1데살 1,1-5b



복  음 : 마태 22,15-21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태 22,21). 이 구절은 보다 널리 알려져 있고 자주 인용되면서 해석하기가 어렵고 또 복음절 입장을 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절은 일정한 ‘정치적’ 행위에 대한 지침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모든 인간적 행위들 즉 단순히 ‘세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행위들에 대한 하느님의 ‘수위권’에 대해 시사하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회적 ‘정치적’ 차원을 비롯한 모든 인간적 삶의 차원을 포괄한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주석을 통해서 살펴보게 될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그러한 인간적 차원들 가운데 어느 것과도 동일시되지 않는다.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



  오늘 제 1독서는 어떤 세속적 왕권이나 왕좌라 할지라도 멈춰 세울 수 없는 이러한 하느님의 보편적 ‘통치권’의 표지 아래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제 2이사야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재건을 예고한 후(이사 44,24-28), 오늘 제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그런 특별한 사명을 수행할 도구로 페르샤의 왕 고레스(기원전 557-529)를 택하신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잡아주어 만백성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제왕들을 무장해제시키리라. 네 앞에 성문을 활짝 열어 젖혀 다시는 닫히지 않게 하리라. 나의 종 야곱을 도우라고 내가 뽑아 세운 이스라엘을 도우라고 나는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너에게 이 작위를 내렸다. 내가 야훼다. 누가 또 있느냐? 나밖에 다른 신은 없다. 너는 비록 나를 몰랐지만 너를 무장시킨 것은 나다. 이는 나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해 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에까지 알리려는 것이다. 내가 야훼다. 그가 또 있느냐?’”(이사45,1.4-6).

  이 대목에서 나타나고 있는 놀라운 사실은 성서적 전승에 있어서 오직 장차 오실 메시아에게만 해당되는 명칭들이 고레스에게 부여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로 정확히 말해 mashìach 즉 ‘메시아’를 뜻하는 “기름부어 세워진 이”(1절)라든가 또는 “목자”(이사 44,28)라는 명칭 같은 것들이다(이태리어판 예루살렘 성서에서는 “너는 내 목자가 되어라”라고 번역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말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너는 내 양을 쳐라”라고 번역되고 있다:역주자). 이것은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양살이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함으로써(기원전538) 그들을 도와주는 행위가 실제로는 선민 가운데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정점을 이루게 될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구원을 계획을 촉진시키는 행위가 되리라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한 도구로서 당신을 알지조차도 못하는 이방인의 왕을 쓰신다는 점이다(4-5절). 이같은 사실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을 보다 더 높이 들어올리는 데 기여할 것이다;그분은 당신의 능력과 또한 당신의 사랑이 어째서 지역에 의해서도, 문화나 종족의 특성에 의해서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적어도 어떤 일정한 종파의 순수한 특성을 이해될 수 있는 종교적 행위에 의해서조차도 얽매여 있지 않는 것인지를 이와 같은 식으로 입증해 보여주신다:“이는 나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에까지 알리려는 것이다”(6절).

  그러므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활동하신다. 물론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분은 교회 밖에서도 활동하신다. 하지만 그분의 목적은 항상 당신 ‘백성’의 구원적 사명을 증대시키고 확장시키는 것이다. 즉 이방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일 때라도 그분의 기준점은 항상 이스라엘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을 입증해준다:첫째로,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에 의해 파견되어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선택된 ‘백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신비로운 역사신학이 존재하며;둘째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일치하여 작용하는 내면적 구조와 의미에 근거하고 있는 사실들, 제도들, 인간 개체들 속에는 참된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레스는 비록 하느님을 모르면서도 자신의 공정하면서도 지혜로운 정치감각으로써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참여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추진시킨다.

  ‘정치’는 어느 누가 하든지―비록 신자가 아닌 경우라 할지라도― 그 본래의 규범에 따라 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공동선을 실현시켜 나갈 때에 가치있는 정치가 된다.



“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의 속을 떠보느냐?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자, 이제 오늘 복음 내용을 들어가 보자. 오늘 복음은 지금까지 말한 주제를 부분적으로 다루면서도 아주 원척적인 형태로 확대시켜 다루고 있다.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서 비록 약간의 차이점들을 보이긴 하지만―이점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공관 복음 셋이 다  이 전해주고 있다(마르12,13-17;루가20,20-26참조).

  이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주일들에 주석한 세 개의 비유가 중간에 삽입됨으로써 나뉘어지게 된 예수의 권한에 관한 논쟁(21,23-27)이후 예루살렘 시대에 있었던 네 개의 논쟁들(지금 이 논쟁:22,15-22;죽은이들의 부활에 관한 논쟁:22,23-33;첫째가는 계명에 관한 논쟁:22.34-40;다윗의 자손에 관한 논쟁:22,41-46)가운데 하나이다.

  논쟁의 분위기가 매우 무겁고 긴장감이 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에게 올가미를 씌울 트집을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모양으로든 예수를 위험한 함정은 바로 ‘정치적’인 함정이다. 사실 어떤 모양으로든 예수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가는 일은 이 정치적 책략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 정치적 책략에 의한 구실은 만일 정치적 전복의 혐의가 재판과정에 있어서 사실상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더더욱 증대한 의미를 띤다.

  자, 어떻게 사건이 전개되었는가 보자:“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러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올가미를 씌울까 하고 궁리한 끝에 자기네 제자들을 헤로데 당원 몇 사람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의 간악한 속셈을 아시고 ‘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의 속을 떠보느냐?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하셨다.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자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하고 물으셨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하고 말씀하셨다”(마태22,15-21).

  무엇보다 먼저, 이제까지 ‘바리사이즘’이라는 전통적 개념에 부여되고 있는 위선의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이중성을 간과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자신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음흉한 진짜 의도를 숨기기 위해 존경심어린 훌륭한 미사여구 뒤에 자신들을 감추려고 애쓰고 있다. :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16절).

  그들의 속셈으로는 이러한 아첨의 말들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와 같은 그런 심각한 문제에 관한 본능적인 신중한 자세로부터 쉽게 이탈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리고 나서 일단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면 대화의 방향을 자기들이 세워놓은 목표를 향해 밀고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러한 위선적 태도는 오히려 예수를 더 찬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즉 그분은 기회주의자나 타산주의자가 아니며 인간들의 마음에 드는 것보다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보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하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의 전생애는 이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특히 십자가의 죽음으로 처해질 재판과정에서 나타나는 그분의 태도는 이러한 사실을 더 잘 입증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빌라도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선언하신다 :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요한19,37).

  불행히도 그리스도 신자들과 심지어 교회의 핵심을 이루는 ‘사목자들’조차도 이러한 진리에 대한 증언을 꾸준히 해오고 있지 못한다 ; 교회 내부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바리사이즘의 잔재가 남아 있다. 교회와 관련된 문제들이 항상 평온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러한 철저한 진실성을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구체적인 말씀을 통해서도 드러내 보이시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반대자들의 위선적 가면을 벗기신다:“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의 속을 떠보느냐?”(18절).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전혀 예기치 못했던 명쾌한 대답을 해주심으로써 자칫하면 로마의 협력자로 몰리거나 아니면 광신적인 회복주의자로 몰릴 수 있는 정치적 궤변에 말려듦이 없이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신다.

  사실, 이 경우에 예수의 반대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게임은 아주 쉬워 보였을 것이다:만일 예수께서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내야한다고 대답하시면, 그들은 그 당시 로마의 억압에 치를 떨며 특히 열성당원들의 지취 아래 혁명과 전복을 꾀하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께 대한 불신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고; 또 만일 세금을 내지 말라고 대답하신다면, 로마 정부에 대한 적대적 반역자로 당국에 그를 고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과연 함정이 완벽하게 짜여졌던 것일까?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문제를 아주 근본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신다. 즉 ‘예’, ‘아니오’를 답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정치적 사회적 규정들이 인간들이 살고 있는 역사 속에서 어느 정도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일치하며 또 어느 정도로 성실히 그 계획의 실현을 돕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문제로 보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해 있었던 상황에서부터 출발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황제에 의해 만들어진 돈을 상거래시에 사용한다는 것은 그들이 사실상 로마에 예속되어 있음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신다. 즉 황제의 통치권이 합법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로 함축적으로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하시는 다음과 같은 말씀에 담긴 의미이다 :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하셨다.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자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하고 물으셨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자...”(19-21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즉시 말씀하시는 것처럼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라”는 말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지만 예수의 대답이 여기서 멈추고 말았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조금씩   조금씩 로마를 거슬러 벌이는 대량학살의 위험을 무릅쓴 투쟁에로 몰고 가고 있었던 열성당원들에게는 분명히 부족했던 판단력과 지혜를 드러내 보이는 것 외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21절). 이 구절의 혁신적인 중요성은 뒷부분에 있다. 하지만 이 뒷부분은 앞부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카이사르로부터 출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도착점은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속에서의 ‘카이사르’와 ‘하느님’



  예수께서는 카이사르와 하느님을 강조하시면서도 항상 뒤섞여 혼돈되기 쉬운 그 두 실체를 내지는 그 둘의 활동 영역을 명백히 구분하신다. 고대 동방의 관념 특히 이집트인들의 관념형태에 따르면, 왕은 모든 현실적인 일에 있어서 마치 신과 같이 취급되었다. 이러한 관념은 로마에까지 이르렀고 그렇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황제들을 ‘주님’(kyrioi)이라고 불렀다(1고린8,5참조). 현대 사상에 있어서도, 특히 ‘전체주의적’ 사상에 있어서 모든 진리와 윤리성의 원천을 국가나 당이나 또는 사회적 계급이라고 여기고 있는 점을 잘 생각해 보라. 역사가 인간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그 두 실체를 구별하시며 그것들이 각기 요구하고 있는 서로 다른 행동을 뚜렷이 구별하신다. 마치 열성당원들의 생각처럼 하느님께서 오직 자신의 현존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일종의 지상적 ‘신권정치체제’를 필요로 하신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이미 이방인 고레스가 하느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이’라고 불릴 수 있었음을 보았다.

  이것은 아무리 넒은 정치 영역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차원을 망라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차원은 정치 영역을 무한히 넘어서 간다. 바로 이런 까닭에, 주님께서 잠시 주셨다가 거두어가신(1978년 8월 26일-9월 29일) 교화 요한 바오로 1세가 감명 깊은 담화(1978년 9월 20일자 담화)를 통해 한 말처럼 ‘인간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는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

  하지만 두 실체는 구분되면서도 또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국가와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의무는, 국가가 내게 모든 인간 생활에 있어서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는 하느님과의 진실된 종교적 관계를 실현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한에서 타당성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런 까닭에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라는 전혀 예기치 않은 획기적인 단언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이 말은 국가를 그 기능과 구조의 다양성을 통해 완성시켜 나가야 할 정치적 ‘봉사’자체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사실 지금 이야기는 정치 조직체의 입장에서 믿는 이들의 양심을 위한 어떤 종교적 공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데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런 것은 말하나마나이며, 그 이상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를―단순한 시민으로서든 국가의 법과 여러 가지 활동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든―포함하게 되는 ‘정치적’ 봉사 자체는 정의와 평등과 형제애 그리고 모든 사람에 대한 존중 등 정확히 말해 ‘공동선’의 요구를 실현시킴으로써 그에게 있어서 마치 ‘하느님께 바쳐지는’ 예배처럼 느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이런 경우에만 ‘인간의 나라’는 비록 ‘하느님의 나라’ 그 자체가 결코 될 수는 없다 할지라도 틀림없이 그 성장을 돕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비신자라 하더라도 우리가 이미 강조했듯이, 만일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대로 “참된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필립 4,8)을 항상 추구하는 근본적으로 성실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어느 정도 실현시켜 나갈 수 있다.

  어째서 이 모든 사실이 오늘날 크리스찬들―그들이 사회에서 어떤 책임을 맡고 있든지간에―의 ‘시민적’ 양심에 심각한 문제들을 던지고 있는지를 분명하다 : 한 예로서 낙태 문제를 생각해 보라.

예수께서는 정치적 봉사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라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봉사가 하느님의 요구를 존중하고 실현시킨다는 조건이 선행될 때의 이야기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권리와 그것을 세상에-시민 ‘불복종’을 감행해서라도-선포하고 증거해야 할 크리스찬적 ‘양심’의 신성불가침적 장벽을 모든 세속적 권력-민주주의적 권력이라 하더라도-의 탈선과 부패를 막기 위해 세워놓으셨다.

  바로 여기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21절)라는 대단히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마지막 구절의 ‘혁명적’인 새로운 사상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 모두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분명히 이 같은 사실은 신앙의 빛과 사랑의 정신 그리고 항상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는 희망으로 성숙된 크리스찬적 양심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가 데살로니카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한 오늘 제 2독서의 내용이 바로 이에 관한 것이다. 그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그들의 복음적 메시지에 대한 친밀한 일치를 태도를 상기하고 있다 :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 모두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을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1데살1,2-3).

  이렇듯 강한 종교적 노력의 분위기 속에서 살 수 있는 크리스찬이라면 다른 많은 형제들-신앙이 다르더라도-과 접촉을 하며 살게 되는 시민 공동생활에도 어떤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그들에게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지만 ‘카이사르’ 위에 계신 분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행위를 포함한 모든 행위의 올바름을 판단해주는 ‘최종적’ 가치요 결정적 기준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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