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모음
강론을 위한 자료실
       
 
전체글 보기  
       
 logos
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8월 9일 (토) 20:44
분 류 연중25-30주일
ㆍ추천: 0  ㆍ조회: 4033      
IP: 218.xxx.54
http://missa.or.kr/cafe/?logos.1181.
“ 가해 연중 제 28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28 주일



하늘 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제 1 독서 : 이사 25,6-10a



                제 2 독서 : 필립 4,12-14, 19-20


복  음 : 마태 22,1-14



  혼인잔치의 비유는 바로 앞의 두 개의 비유 즉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5)에서 이미 다루어진 신학적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예수의 역사뿐만 아니라 초기교회의 역사 및 스스로 구원에서 제외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 자신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들을 접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른 복음사가들보다 더, 사람들―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이건 이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이 된 사람이건―이 그리스도의 호소와 복음의 요구에 직면하여 취하는 구체적인 태도들을 통해 이미 드러나고 있는 하느님의 ‘심판’의 극적 특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오늘 혼인잔치의 비유를 해석하면서 전체적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선 강조해야 할 점은 오늘의 제 1 독서와 복음이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해주고 있는 형태에 다른 예수의 비유 속에서는 제 1 독서의 내용이 상기되고 있는 것이 역력하다.



“야훼께서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사실, 좀 뒤늦게(그리스도 강생전 5세기) 집필된 것이 분명하며 학자들이 보통 이사야의 ‘묵시록’이라고 일컫고 있는 이사야서 대목에 의한 오늘의 제 1 독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초대하시고 계신 크나큰 ‘잔치’를 신선하고도 생기 넘치는 개념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히 베푸시는 기쁜 구원의 잔치를 뜻하며 유다의 전승 속에 퍼져 마침내 신약성서에 이르게 되는 ‘메시아적’ 잔치에 대한 사상의 표현이다.

  “이 산 위에서 만군의 야훼,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살진 고기를 굽고 술을 잘 익히고 연한 살코기를 볶고 술을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이 산 위에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우던 너울을 찢으시리라…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야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주시리라. 이것은 야훼께서 하신 약속이다. 그날, 이렇게들 말하리라.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구원해주시리라 믿고 기다리던 우리 하느님이시다. 이분이 야훼시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야훼시다.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자.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야훼께서 몸소 이 산을 지켜주신다’”(이사 25,6-10a).

  참으로 아름다운 내용이다. 단순히 잔치의 성대함 때문만이 아니라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상징적 의미 그 이면에 내포되어 있는 내용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먼저 깊은 인상을 던져주고 있는 내용은 그 초대의 ‘보편성’이다. 즉 모든 민족들이 초대되고 있다(6절. 7절); 그들은 시온산을 향해 몰려들고 있다(7-10절). 그리하여 시온산은 장차 모든 민족들이 모여 와서 유일하신 참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중심지가 될 것이다. 이사 2,2-6에 언급되고 있는 장중한 장면을 상기해 보라: “장차 어느 날엔가 야훼의 집이 서 있는 산이 모두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만국이 그리로 물밀 듯이 밀려들리라…” 바로 모든 이들의 ‘어머니’인 교회가 이사야 예언자에 의해 미리 시사되고 있다.

 둘째로 고찰해야 할 내용은 그 잔치는 목적을 잔치 자체에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대‘향연’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거기에 초대된 손님들 사이에 친밀한 인식과 우정을 야기시키기를 지향하고 있다. 이것이 차라리 신비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 표현들 야훼께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우던 너울을찢으시리라.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7절 의 의미라고 여겨진다.‘얼굴을 가리우는’‘너울’은 하느님께 대한 무지와 영신적인 눈멀음을 뜻한다.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무지와 영신적인 눈멀음은 식사를 같이 나눔으로써 실현되는 상호신뢰와 상호인식의 교류를 통해 없어지게 된다.

  또한 그 잔치는‘기쁨’과 생명력, 평온과 안정감을 고취시키고자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죽음’이 영원히 없어질 것이며 모든‘눈물’이 닦아지리라(8절)고 한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이사야 예언자는 이 크나큰 연회의 개념으로써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베푸실 종말론적 ‘구원’을 예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기쁨에로 초대하고 있는 결론 부분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이분이 야훼시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야훼시다.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자”(9절).

  오늘 응송의 후반부도 야훼의 각별한 배려를 아주 감미롭게 노래 하고 있다;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우정의 잔치에 초대하실 뿐만 아니라 손수 그 잔치를 ‘차리신다’:“내 원수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향기름, 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외다”(시편 22,5). 시편작가는 먼저 정감어린 ‘목자’의 비유로써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한 후, 여기서는 그분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과 평온의 상태(“내 원수 보는 앞에서”)를 연회의 상징적 개념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한다.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을

불렀으나 오려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이 모든 상징적 개념들과 그것들이 뜻하는 실체의 전체적 배경이 하느님의 자비라는 사실을 확실히 되새기고 계시다: 즉 하느님은 당신 자비로써 모든 사람들을 당신 ‘아들’의 성대한 ‘혼인’잔치에 초대하신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구약성서의 본문과는 달리 관심의 초점을 야훼의 각별한 배려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자신과 자신의 아들의 기쁨에 초대하고 있는 그토록 관대한 ‘임금’의 행동 앞에서 초대받은 이들이 취하는 태도에로 옮기고 있다.

  또 한 가지, 여기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비유의 장막을 넘어서 한 가지 비극적 역사적 사실 즉 복음을 거부함으러써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고 구원을 스스로 저버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분명 이 모든 사실은 즉시 보게 될 것처럼 교회에 크나큰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교훈은 그러한 역사를 밝히 드러내 보여줄 수 있었던 비유에서보다는 ‘역사’자체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자, 이제 비유의 말씀을 들어보자:“하늘 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을 불렀으나 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서 이제 잔칫상도 차려놓고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하고 일렀다.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그래서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버렸다. 그리고 나서 종들에게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오너라’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리하여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마태 22,2-10).

  이 비유는 여러 가지 접촉점을 갖고 있는 앞의 비유(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는 달리 루가복음(14,16-24)에서도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복음사가 자신들의 서로 다른 신학적 의도에 따라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루가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 준비된 ‘잔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오복음에서는 ‘아들’의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마련하는 어떤 ‘임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루가복음에서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기 전에 종들을 한 번만 보내고 있지만 마태오복음에서는 두 번 보내고 있다.

  더구나, 마태오복음에서는 문학적 체계상으로는 걸맞지 않으나 의미상으로는 분명한 내용 즉 자기의 군대를 풀어 그 ‘살인자들’이 살고 있던 ‘동네’ 전체를 파괴시키는 ‘임금’에 관한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있다. 동네가 “불길에 휩싸였다면”(7절), 그런데도 임금의 초대를 기다리며 “길거리에서”(8절) 한가로이 지내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 비유를 통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교훈적 가르침 외에도 어떤 참된 ‘역사적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같은 사실을 부분적으로나마 비유 자체에 첨가시킴으로써 방금 말했듯이 비유의 체계 자체가 어느 정도 혼란스러워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감안해야만 비유의 올바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 ‘동네’의 불은 분명히 70년 예루살렘의 파괴를 암시하고 있다 ;복음사가는 그것을 임금의 ‘종들’의 초대를 거절했을 분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 중 일부는 ‘잡아 죽이고’ 또 일부에게는 학대를 가한(6절) 행위에 대한 벌로서 해석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종들’은 분명히 구약의 예언자들과 또한 예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여기서 초대받은 무례한 사람들로 표상되고 잇는- 에게 제일 먼저 보내신 사도들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대되어 첫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우리가 두 아들의 비유에서 들었듯이 자칭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세리와 창녀들”(마태 21,31)과 특히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구원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 결정적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구원의 잔치에 초대를 받고 그에 응답하여 그 잔칫상에 앉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님의 집 즉 교회의 식탁에 앉기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요구하는 어떤 ‘행동적’ 요구에도 응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루가복음에는 없는 이 비유의 마지막 부문의 의미인 것 같다. 사실, 이 마지막 부분에는 앞의 내용과 잘 일치되지 않는 요소들이 들어있다:예를 들자면, 마지막 순간에 혼란스럽게 모아진 많은 손님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복을 갖추지 않아서 쫒겨났다고 하는 사실 같은 것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학자들은 이 부분을 마태오 복음사가가 앞의 비유 내용과 일치시키기 위해 일부 개작했을 가능성이 있는 다른 비유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자, 그러면 비유의 내용을 보자:“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를 보고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왓소?’ 하고 물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어쫒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11-14절).

  그 사람이 침묵을 지키고(12절)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가 잘못을 느끼고 잇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한편, 그 잘못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벌이 너무 무거우며 묵시록적 표현대로라면 구원의 나라로부터의 결정적인 추방 즉 영원한 처벌(마태 8,12참조)을 뜻한다. 그렇다면 과연 ‘예복’을 갖추지 않은 것이 설사 중대한 잘못이라 할지라도 사회적인 결례 그 이상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러면 이 문맥에서 ‘혼인예복’이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잇는가? 이미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잔치의 식탁에 “나쁜 사람 좋은 사람”(10절) 할 것 없이 모두 모였다는 앞 문장에서 발견된다:예복을 갖추지 못했던 손님은 분명히 ‘나쁜사람; 의 부류로 판단될 것이다. 이 모든 내용은 좋은 씨앗 가운데서 가라지가 번성하는 교회의 신비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 하느님의 ’심판‘은 유다인들 가운데서 도는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초대받은 것‘만으로는’구원받기에‘ 불충분한 교회 내부에서조차 행해진다.

  이것이 이 비유를 끝맺고 있는 마지막 구절에 담긴 극적 의미이다:“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14절). 이 구절은 구원될 사람의 수가 많다거나 또는 적다거나 하는 데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다만 신앙에의 ‘불립’이 곧 ‘구원받기에’ 불충분한 교회 내보에서조차 행해진다.

  이것이 이 비유를 끝맺고 있는 마지막 구절에 담긴 극적 의미이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14절). 이구절은 구원될 사람의 수가 많다거나 또는 적다거나 하는 데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다만 신앙에의 ‘불립’이 곧 ‘구원’을 결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고자 할 뿐이다. 하지만 하늘 나라로부터 쫒겨남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라시는“(1디모 2,4)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협력 부족에 완전히 달려 있다.

  그러므로 ‘혼인예복’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나라의 결실로 제시되었던 실체 자체 즉 삶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구체적인 정의를 뜻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천상 성부의 뜻을 채운 자만이 영원한 잔칫상에 참여할 준비를 함으로써 뽑힌 이들의 대열에 들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결실을 내지 못할 때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처럼 꺾여져 불속에 던져질 자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W. Trilling, Vangelo  secondo Matteo, vol. Ⅱ, Città Nuova Ed., Roma 1968, p. 206).

  착한 행실의 ‘결실’을 내야 할 이러한 의무는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서 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무거울 것이 틀림없다. 사실 이 비유가 루가복음에서처럼 단순한 어떤 잔치가 아니라 합당한 혼인‘예복’까지도 요구되는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2절)에의 초대라는 상징적 의미를 통해 암시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보다 큰 ‘사랑‘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내용은 하느님께서 육화의 신비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무한히 큰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실현시켜야 할 관대하고 개방된 사랑의 의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늘 전례의 본기도도 바로 이 사랑의, 또 사랑을 통한 행업을 우리 마음에 되새겨주고 있는 것 같다:“주여, 비오니, 당신의 넘치는 은총으로 항상 우리를 이끄시고 밀어주시어, 언제나 선업에 열중하게 하소서.”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매우 정감어린 짤막한 바울로의 편지에 의한 오늘 제 2 독서는 필립비인들이 그에게 에바프로디도를 통하여 보내준 경제적 도움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는 감사와 더불어 자기 자신의 사도적 사명은 어떤 외적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사도직의 모든 ‘결실’은 그의 ‘능력’의 유일한 원천이신(필립 4,13)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의탁에서 비롯한다고 한다. 그밖의 다른 것은 비록 어느 정도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라도 그에게 별로 중요치 않은 것들이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리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여러분은 나와 고생을 같이 해주었습니다. 한량없이 풍요하신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필립 4,12-14. 19).

  보다시피,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차원에서 사랑의 ‘결실’을 볼수 있다. 하나는 신자들이 이루는 ‘결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스승을 크나큰 사랑으로 보살펴준다. 또 다른 하나는 바울로 사도가 이루는 ‘결실’이다: 그는 자기 신자들의 사랑에 감사하면서도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주님을 위해 살거나 죽거나 어떤 경우에도 진실되이 자신을 적응시켜 나감으로써 자신의 사도적 의무를 결코 게을리하지 않는다.

  0
3500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1287    
연중25-30주일
나해 연중 제 28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6098
  1286    
연중25-30주일
다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6166
  1285    
연중25-30주일
나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13236
  1284    
연중25-30주일
다해 연중 제 26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4333
  1283    
연중25-30주일
나해 연중 제 26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6482
  1282    
연중25-30주일
다해 연중 제 25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3275
  1281    
연중25-30주일
나해 연중 제 25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4318
  1280    
연중19-24주일
다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4925
  1279    
연중19-24주일
나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5778
  1278    
연중19-24주일
다해 연중 제 2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4564
  1277    
연중19-24주일
나해 연중 제 2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7929
  1276    
연중19-24주일
다해 연중 제 22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5000
  1275    
연중19-24주일
나해 연중 제 22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5999
  1274    
설,추석
한가위 강론모음 2008-09-06 4783
  1273    
혼배
혼배미사 강론 모음 혼인, 결혼, 주례 2008-08-13 10383
  1272    
장례
장례미사 강론 모음 위령미사 2008-08-13 11674
  1271    
사순시기
가해 재의 수요일 강론 2008-08-09 4333
  1270    
연중25-30주일
가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 말씀과 전례 2008-08-09 5243
  1269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 말씀연구 2008-10-25 4034
  1268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5546
  1267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2008-08-09 3833
  1266    
연중25-30주일
가해 연중 제 29주일 주일 강론 모음 말씀과 전례 2008-08-09 4165
  1265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29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4871
  1264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29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2008-08-09 3502
  1263    
연중25-30주일
가해 연중 제 28주일 주일 강론 모음 말씀과 전례 2008-08-09 4033
  1262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28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4409
  1261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28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2008-08-09 3425
  1260    
연중25-30주일
가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말씀과 전례 2008-08-09 4262
  1259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군인주일 강론 모음 2008-10-04 5543
  1258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말씀연구 2008-10-04 3583
1234567891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