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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1월 1일
작성일 2007년 12월 29일 (토) 00:06
분 류 성탄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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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 강론모음 ”
 

1월 1일




<평화의 날>

        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99.1.1)/2

        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2000.1,1)/4

        3. 신은근 신부/7                   4. 이계중 신부/8

        5. 정성우 신부/10                 6. 이영식 신부/12

        7. 유영숙(미리암)/14



<신년 대담>

        8. 정진석 추기경(2001년 ; 요약)/16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

         9. 강길웅 신부(나)/20           10. 김영진 신부(나)/22

        11. 강길웅 신부(다)/24           12. 강영구 신부/26

        13. 변희선 신부/30                 14. 유영봉 신부/31

        15. 주님의 뜻대로/33                     16. 인간의 행복은/35







1              평화의 날   인권 종중은 평화의 비결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1999.1.1)



1. 약 20년 전에 선의를 지닌 모든 사람에게 보낸 저의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에서 저는 인권 존중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대희년을 한 해 앞둔 새해를 시작하며, 저는 세계 곳곳에서 평화를 사랑하고 이 세상에 평화를 굳게 다지고자 하는 모든 분들, 정치지도자, 종교지도자 여러분과 함께 참으로 중요한 이 주제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2. 인권 존중은 인류의 유산

인간의 존엄은 초월적 가치입니다. 우리 눈앞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나치즘, 파시즘과 같은 이념의 결과를, 그리고 인종 우월주의, 국수주의, 민족 배타주의와 같은 허황된 통념의 결과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인간 존엄에 대한 모독은 그 근거가 무엇이든 어떠한 형태이든 어디서 일어나든 결코 그냥 넘겨서는 안됩니다.



3. 인권의 보편성과 단일성

1998년은 세계 인권 선언 채택 5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세계 인권 선언은 인류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지닌, 타고난 존엄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인정이 전세계의 자유와 정의, 평화의 토대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권 선언이 전인류를 위하여 정해놓은 수준을 모든 경우에서 존중한다면, 인권의 보편성과 단일성에 대한 긍정이 개별 권리의 행사에서 문화적, 정치적 차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4. 생명권

그러한 첫째 권리가 생명에 대한 기본권입니다. 인간 생명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신성불가침한 것입니다. 최근 유전공학 분야의 발전은 매우 불안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의 과학 연구가 인간에게 봉사하려면, 그 모든 단계에서 면밀한 윤리적 성찰이 따라야 합니다. 한 인간의 존엄과 생명권에 대한 어떠한 침해도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5. 인권의 핵심인 종교 자유

종교는 인간의 가장 깊은 열망을 표현하며, 인간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인간 관계에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종교 자유는 인권의 핵심입니다. 종교 자유는 불가침 권리이므로, 개인이 양심의 요구에 따라 종교를 바꿀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은 모든 상황에서 자기 양심을 따르도록 요구받으며, 결코 양심에 거슬러 행동하도록 강요될 수 없습니다.



6. 참여권

모든 시민은 공동체 생활에 참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신념은 오늘날 일반적인 공감대를 얻고 있습니다. 선거조차도 특정 정당이나 개인의 승리를 위하여 조작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모독하는 이러한 행위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국제 공동체 안에서 국가와 민족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크게 변화시키는 결정들에 참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7. 극심한 차별

가장 비극적인 형태의 차별은 인종 집단과 소수 민족들에게 생존할 수 있는 근본 권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별은 그들을 억압하거나 강제로 이주시키거나 그들이 어느 민족인지 더이상 분간할 수 없도록 민족 정체성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국제연합 외교회의에서 정관을 승인한 국제형사재판소가 건실한 법률적 토대 위에 세워진다면 세계 차원에서 실질적인 인권 보호에 점차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8. 자기 성취의 권리

모든 인간에게는 발전할 수 있는 타고난 잠재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자신의 인격을 충만하게 실현하고 사회 환경에 적절히 자리잡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어린이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하여야 합니다. 그들의 앞날의 성공은 교육에 달려있습니다.



9. 연대를 통한 세계 발전

급속하게 진전되고 있는 경제․금융 제도의 세계화는 세계의 공동선과 경제적, 사회적 권리행사를 보장할 책임 주체를 시급히 설정하여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0년을 눈앞에 둔 지금, 되도록 많은 나라들이 현재의 어려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관련 기관들이 합의에 이르고자 하는 진실한 의지를 가지고 대화를 나눈다면 만족스럽고 확실한 해결책에 이르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10. 환경에 대한 책임

인간 존엄의 증진은 건강한 환경에 대한 권리와 이어집니다. 땅과 바다, 기후, 식물계와 동물계에 가해지는 심각한 파괴의 위험은 모든 나라, 특히 부유한 국가들에게 현대문명의 전형적인 소비주의 생활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요청합니다. 실제로 자연 자원과 그 올바른 사용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촉구합니다.



11. 평화에 대한 권리

어떤 의미에서, 평화에 대한 권리 증진은 다른 모든 권리에 대한 존중을 보장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일부 지역에서 평화 확립을 위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협상을 계속하기로 결심한 용기 있는 정치지도자들에게 큰 갈채를 보내야 합니다. 각국 정부에서 살상 무기들의 제조와 판매, 수입과 수출을 규제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무기의 대량 불법거래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12. 인권의 문화는 모든 이의 책임

여기서 저는 우리가 이 모든 인간 권리를 보호하는 데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인권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저는 특별히 대중매체의 역할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중매체는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나아가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대중매체가 상호이해와 평화증진을 주창하여 이루어졌던 대화와 연대의 고귀한 활동에는 마땅히 갈채를 보내야 합니다.



13. 결단의 때, 희망의 때

새로운 천년기가 바로 눈앞에 다가오고, 많은 이들의 마음은 더욱더 정의롭고 우호적인 세계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한 열망은 실현될 수 있고 또 실현되어야만 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삶의 척도로 삼아 살아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이러한 맥락에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인간 존엄의 선포자가 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대하여, 이사야서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너는 나의 두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49,15-16).

이 사랑을 나누라는 초대를 받아들입시다! 그 사랑 안에 모든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비결이 들어있습니다. 새로운 천년기의 여명에서 다 함께 평화를 이룩하도록 합시다.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2                              평화의 날 메시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2000년 1월1일)





이것은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천사들의 환호입니다(루가 2,14 참조).

대희년은 이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에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이 메시지는 인류의 참으로 진정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토록 뜻깊은 새해를 바라보며, 저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소원을 빕니다. 평화는 가능하다고 저는 모든 사람에게 단언합니다. 평화의 추구는 인류가 아무리 죄악과 증오와 폭력으로 일그러졌다 하더라도 하느님께 한 가족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의 메시지이고, 희년의 메시지이며, 새 천년기를 시작하는 저의 바람입니다.



우리는 전 인류가 근본적으로 한 가족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될 때에만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인류 가족 안에서만 신분과 인종과 종교를 불문하고, 온갖 차이와 구별을 넘어 또 그에 앞서 개인의 존엄과 권리가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와서 국가 간의 전쟁 횟수는 줄어들었습니다. 이 사실은 위안이 되긴 하지만, 국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무력 분쟁을 생각할 때 그 양상은 매우 다릅니다.

우리 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분쟁에서 죄 없는 어린이와 여성, 아무런 무기도 없는 노인들이 고의적인 표적이 되어 온 끔찍하고 잔혹한 장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러한 장면들이 너무도 많아서 결단력과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방향을 전환하여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저의 신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무력 분쟁에서 당사자간의 협상은 물론이고 국제 단체와 지역 단체를 통하여 중재와 화해를 충분히 시도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에 대한 숭고하고 막중한 임무는 한 가족이 되고 또 한 가족임을 인식해야 할 인류의 소명에 깊이 뿌리 박혀 있으며 지구 자원의 보편적 용도에 대한 원칙에 그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는 이 때,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간적 양심을 몹시 괴롭히는 한 가지 문제는 무수한 사람들의 빈곤입니다.

개발도상국에서든 번영하는 부유한 국가에서든 가난한 사람들은 당연히 ‘모든 사람을 위하여 더욱 의로우며 동시에 번영하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물질 재화의 용익권과 자신의 노동 능력을 유용한 결실을 위하여 제공할 권리’를 주장합니다.

한 가족을 이루도록 부름 받은 인류가 아직도 빈곤으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21세기를 시작하는 지금, 무려 14억이 넘는 인구가 극빈 상황에서 살고 있으며 개발 정책 모델의 재고를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갈수록 세계적인 차원을 띠는 현재의 온갖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보편적 도덕 가치들에 대한 의식의 강화가 과거보다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평화와 인권의 증진, 내전과 무력 분쟁의 해결, 소수 민족과 이민의 보호, 환경 수호, 질병 퇴치, 마약과 무기 밀매상과의 전쟁,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부패의 척결 등 이 모든 문제는 오늘날 어떠한 국가도 독자적으로 대처할 수는 없으며, 전 인류 공동체가 관심을 가지고 공동의 노력을 통하여 대처하고 해결하여야 합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하신 첫 인사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라진 것을 하나로 합치시고, 죄악과 증오를 없애시며, 인류에게 일치와 형제애에 대한 소명을 일깨워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는 형제애와 진실과 평화의 정신으로 차 있는 이 새로운 인간의 기원이시고 그 전형이시며, 또 모든 사람이 이 새로운 인간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희년 동안 자신의 주님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가 되라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한 평화의 표지요 도구가 되라는 소명과 사명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교회가 복음화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은 평화를 위하여 일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하느님의 하나인 양 떼로서 만민 가운데 솟은 깃발처럼 온 인류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하며, 천상 고향을 목적지로 삼아 희망을 안고 나그네길을 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심각한 장애가 있지만 평화를 위한 노력은 많은 사람의 아낌없는 협력에 힘입어 날마다 끊임없이 불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희망의 표징입니다. 평화는 끊임없이 지어지고 있는 건물과 같습니다. 평화의 건설에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 가정 안에서 평화의 모범이며 증인으로서 자녀들에게 평화를 가르치는 부모

- 모든 분야의 지식과 인류의 역사․문화 유산에 들어 있는 참된 가치를 전하여 줄 수 있     는 교사

- 국제적 차원의 정의와 연대를 요구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노동의 존엄을 위한 오랜 투쟁   을 확대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남녀 노동자들

- 평화와 정의의 증진을 위한 확고부동한 결단을 자신의 정치 활동과 그 나라 정치의 중심으로 삼는 정치 지도자들

- ‘평화의 일꾼’이 된다는 것이 자신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최전선에서 흔히 부족한 자원   을 가지고 활동하는 국제 기구 종사자들

- 세계 곳곳의 다양한 상황에서 연구와 활동을 통하여 갈등과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헌신하는 비정부기구 회원들

- 진정한 신앙은 결코 전쟁과 폭력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교회 일치 대화와  종교간 대화를 통하여 평화와 사랑의 확신을 전파하는 신앙인들 이들이 평화 건설에 참 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저는 특별히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생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젊은이들은 그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학교와 대학에서, 일터에서, 레저와 스포츠에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서 끊임없이 평화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내면의 평화, 여러분 주위의 평화, 언제나 평화, 모든 사람과 이루는 평화, 모든 사람을 위한 평화!



교회가 평화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 하는 이 희년에 우리는 자녀다운 신심으로 예수님의 어머니를 바라봅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어머니의 자애로운 은혜를 우리에게 너그러이 베풀어주시고 인류가 연대와 평화 안에서 한 가족이 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000년 1월1일

세계 평화의 날을 기념하며

1999년 12월 8일,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3                          평화의 날   (루가 2, 16-21)

신은근 신부



어느새 새해가 되었다. 어제의 태양과 하늘이지만 오늘을 우리는 새해의 첫 날로 하자고 약속한다. 이것은 새롭게 출발하자는 다짐이다. 2000년이 가고 2001년이 된 것이다. 숫자 놀음 같지만 세상은 바뀌었다. 시각에 변화가 오면 현실도 바뀌는 것이다. 하늘과 나무와 산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결국은 변화에 목적이 있다.



복음에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전해들은 목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가난하고 소박했던 그들은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발견하고는 천사의 말씀이 옳았음을 느낀다. 자신들의 눈으로 구세주를 보고 감명받았던 것이다. 어떤 느낌을 얼마만큼 받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전 생활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주님을 만나면 누구나 변화한다. 만남 자체가 은총이기 때문이다. 목동들은 아기 예수님과의 짧은 만남에서 일생을 바꿀 은총을 받은 셈이다. 우리도 아기 예수님을 만났기에 변화의 은총은 주어져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새해 첫날의 공식행사로 미사를 봉헌한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우리 생활의 중심으로 모시는 것이다. 특별히 오늘 1월1일은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고백하며 이 출발에 함께 모신다. 왜 그렇게 하는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어머니이며 인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께서는 자녀들이 기쁨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오늘 평화를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한다.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란 칭호가 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이다. 그분께서 마리아를 어머니로 하여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키우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이기에 스스로 알아서 성장했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갓난 아이였던 예수님은 소년기를 거쳤고 청년기를 거쳤다. 그리고 그 삶의 변화에 늘 마리아께서는 어머니로 계셨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누구든 소년에서 청년으로 바뀔 때 자신만의 아픔과 성숙을 경험한다. 그 와중에 마리아께서는 어머니로서 함께 하셨다. 그분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선언은 예수님과의 혈연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이 구세주의 구원사업에 동참자가 되셨음을 공인한다는 표현과 같다.



모든 어머니들은 평화를 기원한다. 그러기에 성모님께 평화를 청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다. 우리의 가정과 삶의 현장에 평화의 은총을 청하는 것은 성모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평화를 위한 노력인지는 잘 모르고 있다. 평화는 말에서 시작된다. 모든 약속이 말에서 시작되듯 평화는 언어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말이 폭력적이라면 평화는 그 사람 주위에 머물지 않는다. 평소 나누는 말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과 가족 안에서 평화스러운 말이 오고 가야 한다. 평화를 투쟁과 정복의 결과로 생각해선 곤란하다. 평화는 인내와 절제와 일치의 결실이다. 우리 자신과 가정 안에서 먼저 이것이 이루어져야 평화에 다다를 수 있다.



평범한 여인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아무도 어머니에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올 한 해, 기쁨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자.











4                 평화의 날 ,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이계중 신부



오늘날의 세계는 공포의 세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중동과 동구를 위시한 세계 여러 곳에서 전쟁과 분쟁이 일어나고 있고 또 언제 핵폭탄이 폭발하여 인류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지 모를 이런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평화는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됩니다.



오늘날의 평화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소수 지도자들만의 걱정거리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어 평화를 위해 모든 이가 아낌없는 헌신을 해야 하겠습니다. 평화는 알아듣기 쉽게 질서의 유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서로 다른 물질적 이해 관계에 이루어지는 표면적인 균형이 아닙니다. 평화는 인간적인 차원에 속하는 내적인 질서입니다.



인간의 이지적, 윤리적, 본성과 진리, 덕의 결실과 관계되는 질서인 것입니다. 이 이지적, 윤리적 질서는 모든 인간의 기본 인권과 정의를 존중하고 상호조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양심에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비추시는 빛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야 하겠습니다.



그 빛은 우리를 밝혀주고, 모든 오류와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정화시키며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기도하고 당신의 뜻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대화를 끊이지 않고 계속해 갈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가 비록 하느님의 선물이라 할지라도 이를 계속 추구하고 굳건히 하도록 노력해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의 활동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를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전교 생활을 시작하실 때부터 평화를 위한 새로운 자세를 불러 일으켜 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 5장 9절에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글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하시고 어떠한 복수도 하지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끝없이 용서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보다 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신해야 하겠습니다. 굶주림, 빈곤, 질병 등과 싸우고, 버려진 이들을 돌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을 예방하고 저지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인다고 해서 쉽게 평화를 성취시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까닭은 인간의 힘은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모자란다는 겸손을 잃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평화를 우리에게 위탁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의 책임인 평화를 얻기 위하여 우리의 할 바를 해야 하겠습니다. 평화는 먼저 말한 대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얻기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고 또 그 분만이 참된 평화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우리를 당신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게 하시고,

모욕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불화가 있는 곳에 평화를 세우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고 또 그렇게 생활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인류의 파멸 위기 앞에 나 같은 미소한 존재의 기도가 또는 힘이 평화를 이룩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미소한 기도가 합쳐지면 하느님의 대전에 커다란 기도가 되어 하느님의 자비를 끌어내릴 수가 있고 조그마한 힘이 합쳐지면 장사의 힘보다도 더 커져서 공산주의라는 마귀의 큰 충복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파티마의 메시지는 이미 이런 부탁을 우리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던 신앙 대회를 보십시오. 80만 교우들의 하느님께 대한 찬양은 얼마나 훌륭하였습니까? 십자가까지 나타나는 기적이 나타났고, 그것이 실제 기적인지 아닌 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비록 그런 일을 제쳐놓고도 신앙 대회 이후 얼마나 전교가 잘 되고 있습니까? 나 하나의 힘은 미소하지만 이 미소한 힘이 합쳐지면 하느님 대전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여 나부터 열심히 기도합시다.



이 땅 사방에서 하느님께 바쳐 지는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이루고 또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믿음을 갖고 열심히 기도합시다.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의 평화를 허락하소서.











5             평화의 날  마태오 5,1-12 하느님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

정성우 신부



우리가 산다는 것은 한마디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제로써 한 해를 보내고 오늘 새롭게 한 해를 맞이하는 우리는 무엇보다 올해가 행복한 한 해가 될 것을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덟 가지 행복의 메시지를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로부터 시작되는 오늘 예수님의 행복에 대한 가르치심은 언뜻 수긍이 잘 안가는 이야기 같이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보다는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하는 새마을 노래가 훨씬 땀을 흘리며 행복을 찾고 있는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할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세상 물정에 어두운 종교적인 몽상가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약삭빠른 청지기의 비유나 과부를 재판하는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 등으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세상 사정에 어둡기는커녕 오히려 통달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신의 많은 사회적 정치적 부조리를 모르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악폐들을 거슬러 혁명가로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구속 사업이 혁명보다는 인류에게 더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하느님이 우리 마음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하면 자질구레한 문제들은 하느님께서 덤으로 다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일까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서 마음을 몽땅 비워 놓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육욕으로 가득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고 마음이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평화가 없습니다.



마음이 돈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 명예나 권력욕에 가득한 사람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고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고 그들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평화가 머무를 수 없습니다. 마음에 하느님이 아닌 한 무엇이든지 가득히 자리를 잡고 있다면 그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마음이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고 하느님의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걱정과 고민으로 가득한 마음이 부유한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부자입니다. 자기 죄에 대하여 울고 번민할 뿐 자비하신 하느님께 나아가지 않고 주저앉아 있기 때문에 부자인 것입니다. 성교회는 아우구스띠노처럼 큰 죄인이었던 성인은 많았지만 평화를 잃고 번민만 하는 성인은 없었습니다. 깡통을 찬 걸인이라도 그 마음 속에 미움과 질투가 가득하다면 그 사람도 마음이 가난하지 않고 부유한 사람입니다. 이



렇게 마음이 가난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늘 나라에 속하는 기쁨과 평화와 사랑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기보다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불쌍한 사람은 배가 고파 울고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마음 속에 하느님의 평화가 머무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적인 쾌락만을 얻기 위해 성의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처럼 사실은 성에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돈의 노예,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권력의 노예, 미움으로 질투고 고민으로 마음이 가득한 자유롭지 못한 노예들, 그들이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고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 평화, 행복을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는 메울 수 있어도 그들의 엉뚱한 욕심은 채워질 날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마음의 가난이 결코 비참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비참함과 청빈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비참함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비참함이 아니라 마음의 가난입니다. 올해도 우리는 보다 윤택한 삶을 위해서 많은 땀을 흘릴 것이며 이러한 노력은 하느님 뜻에 의합하는 좋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부유층만의 소유물도 아니고 노동계급만의 소유물도 아닙니다. 우리는 억지로 노동계급에 속할 필요는 없으며 또 부유층에 속한다고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마음을 가난하게 가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평화 안에 사는 일입니다. 우리 동양의 격언에도 마음이 고요해지면 신에게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허황한 욕심으로 뒤끓지 않고 고요한 중에 느끼는 하느님의 평화는 우리가 경험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새해에 우리는 잘못된 방법으로 끝내 손에 잡히지도 않는 행복의 파랑새를 찾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생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천국이 저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6                                평화의 날

이영식 신부



오늘은 “평화의 날”입니다. 고(故) 바울로 6세 교황께서 1968년부터 새해의 이 첫날을 평화의 날로 정하시고, 선의를 가진 모든 국가와 민족들이 평화의 깃발 아래 모여들기를 호소하시면서 “이 깃발이 현대 문명의 배를 가장 높은 항구로 향해 인도해 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 모든 신자들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특별한 기도를 바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우리 서로 평화의 인사로 새해인사를 나누고 하루 속히 세계에 평화가 정착되고 이 새해에 전개될 모든 사건들이 정의에 입각한 안정을 수반하는 평화 속에 진행되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 드리면서 교황성부께서 높이 드신 평화의 깃발 아래 모여든 대열에 참여하여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행복한 사람”(마태 5,9)이 될 것을 다짐합시다.



사실 평화는 모든 민족들의 소망이며 전 인류가 가장 높은 이상으로 평가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절실히 추구하는 평화가 오늘날 갈수록 더욱 위협받고 있는 세계정세이며 특히 남과 북으로 양단되어 서로 총칼을 겨누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황은 더욱더 절박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협에 직면하여 평화를 수호하여야 할 우리의 사명은 중대합니다.



오늘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인을 바울로 6세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 위협이란 국가들 간에 건재하는 이기주의로 인한 위협과 마땅히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할 생활권과 인간 존엄성을 박탈하여 어떤 백성을 절망상태로 몰아 넣는 폭력의 위협… 몇몇 국가들의 막대한 경비를 투입하여 인류를 전멸시킬 무서운 무기를 보유함으로써 무기에의 의존도가 크게 증대됨으로써 생기는 위협, 상호 논쟁점이 이성에 의한 수단, 즉 법과 정의와 공평에 의해 해결되지 않고 제지와 살인적인 무력에 의한 수단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풍조로 인한 위협들입니다.”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국가와 민족의 차원에서 이러한 위협들을 제거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일은, 주로 나라를 다스리고 민족들을 지도하는 사람들의 임무라고 생각하였지만 먼저 우리 각자가 각성하고 그 책임은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자신들이 이같이 무서운 위협을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이기적인 사고방식과 행동,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태도, 완력과 기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풍조,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는 우리각자가 집단을 이룰 때 오늘날의 세계와 같은 전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 것입니다. 평화를 수호하려면 우리 자신 안에서부터 위협하는 요인을 뿌리뽑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참된 평화’의 뜻을 명백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평화를 단순히 전쟁이 없고 분쟁이 없는 상태라고 소극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평화는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근본가치이며, ‘참된 평화’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사하시는 초연한 선물임은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려고 강생하셨습니다.



성탄날 천사들이 선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평화를’ 하고 말씀하였고, 주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여라”(마태10,12) 하셨으며,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오늘 네가 평화를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시며 눈물을 흘리시고 한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과의 이별을 슬퍼하고 있을 때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가며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14,27)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참된 평화를 주시려고 떠났습니다. 평화를 일시적으로 인류에게 대여하신 것이 아니고 영구히 우리들의 소유물이 되도록 주시고 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평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요한14,27)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참된 평화는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마태5,39). 이 말씀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신앙을 가졌다는 많은 신앙인 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쪽 뺨을 치는 자에게 내밀어야 할 왼쪽 뺨,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주어야 할 겉옷, 오리를 억지로 가자하는 자와 같이 걸어야 할 십리, 저주하는 자에게 하여야 할 축복… 이와 같은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이 질문은 모든 인간 사회와 국가, 그리고 국제 관계의 영역에 던지고 싶은 질문이며, 우리 각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깊이 이 복음의 말씀이 스며들 때 평화에 도전하는 우리시대의 위협이 사라질 것이고 참된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고 바울로 사도는 말합니다.(에페2,14). 그리고 그분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에페6,15).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무저항주의의 모범을 보이셨으며 그의 복음은 분명히 무저항주의입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며 그들을 불살라 버릴 까요”하고 말하는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루가 9,55)



겟세마니에서 한 제자가 주님을 잡으러 온 자 중 한 사람의 귀를, 칼을 빼어 베었을 때 그 귀를 낫게 하셨고, 무력으로 제자들이 당신을 수호하기를 원치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요한 18,11)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범은 악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고 순수한 수동적 태도도 아닙니다.



적극적인 반응이었으며 절대적 사랑이, 사람이 되신 분이 악을 향하여 그 사랑을 던지시는 응답이었습니다. “복음의 평화는 인간을 연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폭력 충동과 호전성을 이성 있는 남성적 미덕과 진정한 인도주의가 충만한 마음으로 바꿔주는 것입니다”(바울로 6세 메시지).



우리는 항상 평화를 거론해야 하고 세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구축하며 수호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복음의 교훈, 즉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교훈에서 사회를 쇄신할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기도입니다. ‘평화를 위한 유일한 무기는 기도’라고 교황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로써 우리는 평화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찾고 기도로써 세계를 쇄신시킬 에너지를 얻고 기도로써 우리 각자의 마음속 깊이 잠재해 있는 증오심과 난폭성이 무엇인지 내적으로 또한 진지하게 자문할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이 희망찬 새해 아침에 마음에서 우러나는 간구를 드립시다. 그리고 교황 성부께서 높이 드신 평화의 깃발아래 모여들어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 됩시다.











7                  평화의 날   숨어있는 아름다움에 대해

유영숙(미리암)



1999년 새 달력을 걸며 잊고 있던 어릴 적 일이 떠올랐다. 음력 섣달 그믐인 까치설날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세고 귀신이 신발을 신고 간다고 어른들이 말했다. 신발을 엎어놓고, 졸린 눈 비비며 안 자려고 안간힘을 쓰다 깜빡 눈을 뜨면 아침이었고, 내 눈썹은 하얗게 세어있었다. 귀신이 내 운동화 훔쳐갔다고 금세 훌쩍이며 현관부터 쫓아나갔던 기억…



유난히 형제들의 놀림감이 되었던 내 바보 같은 생각 중에는 ‘정말 어린애가 커서 어른이 되는지 지켜보겠다’, ‘기필코 동산을 넘어가서 떠오르기 전의 해를 만져봐야겠다’는 결심 따위가 있었다.

그 바보도 50대가 되어 그 시절의 순진함은 사라졌지만 ‘작심삼일’일지언정 새해는 항상 일출의 기억과 연결되어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석굴암에서, 정동진에서, 일출을 볼 때마다 그 감회가 달랐다. 그 중에서도 ‘과연 저것은 태고의 태양이구나’라는 최초의 느낌은 공룡능선 산행 때, 능선에 올라 막 봉우리 사이에 자태를 드러내는 선홍빛 불덩어리를 보았을 때였다.


박명(薄明)의 첩첩산 봉우리 사이에 그림같이 동그란 선홍빛 태양이 얼굴을 내밀더니 심상찮은 거대한 불덩어리로 변하며 천지를 붉게 물들이던 충격… ‘천지창조가 저랬겠구나, 2천 년 전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광야에 바로 저 태양이 저렇게 떠올랐겠구나’ 하는 관상에 이르며 말로 표현할 길 없는 경건함에 젖어들었다. 남은 산행을 위해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여러 가지 상념으로 마음은 숙연해졌다.



…하느님은 천지창조의 감격을 인류 대대로 맛보게 하시려고 영원히 죽지 않는 태양을 만드신 건가, 하루가 참 크다는 생각, 이 작은 걸음으로 첩첩산도 넘는데 긴 세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하잘것없는 걱정들에 매달리느라, 무턱대고 휩쓸리느라, 부주의로 인해, 무계획으로 인해, 게으름으로 인해 낭비한 것들을 반성하고 산에서처럼 매일의 생활에서도 이정표를 확인할 일이라고 마음먹는다. 무엇보다, 가치있는 것과 누추한 것들이 선명이 분간되는 것도 일출의 광경이 주는 힘이다. 비록 산에서 내려가면 텁텁한 어제의 일상으로 복귀하고 말 내 깜냥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아파트의 먼지 낀 옥상 위에도 창조의 그 날부터 변함 없는 그 태양이 똑같이 떠오르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말 가치있는 일들이 무엇이라는 것도…

세상에 사기꾼만 득실거린다고 생각한 것은 신문 외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일 게다. 콘크리트 숲 아스팔트 위에만 살던 사람이 세상은 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장애인들과 한 주라도 어울리지 못하면 그 냄새가 그리워져 사는 재미가 없다는 이들의 얼굴은 천사 같았다.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을 모시는 이냐시오의 집 사람들에게서는 풀향기가 났다. 행당동 철거민 단지에 갔을 때 집 앞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낭자한 소리는 내가 사는 아파트촌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파릇하고 힘찬 노랫소리였다.



빈민과 함께하는 이들, 벽지의 선교사, 노동자를 위한 일생, 초인적 인내로 글씨를 써 주를 찬미하는 서예가, 슬퍼도 해처럼 웃는 얼굴… 우리 땅에는 조용하고 겸손해서 보이지 않으면서 썩기를 바라는 밀알들이 그렇게 있었다.



아스팔트 위의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다. 함께 두리번거려 보자고, 세상엔 우리가 감동할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숨어있을 거라고.

요즈음 지구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특히 성서를 근거로 하여 종말이 다가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것을 믿지는 않지만 괜히 기분이 이상합니다.











8                        신년 대담 (2001년) (요약)

교구장 정진석 대주교



1. 대희년의 의미와 성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5년 전부터 대희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좋은 계획을 세웠고 교회 전체가 대희년 기간에 이를 실천하였습니다. 대희년에 신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큰 은총을 입었고 새 신자들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우리 신자뿐만 아니라 국민 대다수가 대희년에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습니다.  



2. 사목방침과 시노드

   저는 2001년 사목교서에서 교구의 사목방침을 크게 세 가지를 언급하였습니다. 즉 ꡐ소공동체와 선교ꡑ, ꡐ새천년기의 교구 시노드ꡑ, ꡐ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교회의 역할ꡑ이며 이를 잘 실행하기 위해서 세부지침도 마련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새 천년에 열릴 교구 시노드는 함께 가자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대교구 신자들은 130여 만 명이며 신부는 690여 명, 수도자는 3000여 명 정도가 됩니다. 사목에 있어서는 하느님 백성 전체의 의견을 골고루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천년기,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고 있습니다. 서울대교구의 신자 수도 인구 수에 대비할 때 10%를 달성하였습니다. 그런데 교구의 신자 130여 만 명의 소리를 어떻게 종합하느냐가 과제입니다. 시노드 준비위원은 골고루 의견을 취합하기 위한 사람들인데 그들의 모임을 시노드 대의원회의라고도 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대표로 뽑은 사람의 의견을 잘 반영해야 합니다. 교구의 현상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진로를 제시해야 합니다.



3. '지역 주교' 제도 도입 검토

  현재 서울대교구에는 신자가 130여만 명이며 사제는 690여 명, 수도자는 3000여 명이 있습니다. 이처럼 큰 교구의 사목을 교구장 혼자서 다 감당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2년여 전부터 지구장 제도를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지구장 제도는 오래 전부터 독일의 큰 교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서울대교구에서 지구장 제도는 지금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나의 지구에 속한 성당은 12개  정도입니다.

  

저는 큰 교구를 사목하기 위해서는 지구장 제도와 함께 보좌주교들이 지역을 담당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지역 주교' 제도를 신설해볼 계획입니다. 인구가 1000만명이 넘는 도시는 세계에 15개 정도가 있습니다. 물질문명이 발달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이처럼 큰 도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천만이 넘는 도시들이 생겼고 서울은 세계에서 10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천만도시의 사목에 대해 교회의 행정 학자들 사이에는 두 가지 사목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거대도시에서 하느님 백성의 원활한 사목을 위한 방안 가운데 첫째는 교구를 분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본당을 나누는 분할과 같습니다. 그러나 서울은 행정단위가 하나이기 때문에 교구를 분할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의 경우에는 주변에 있는 다섯 개의 자치시가 그 자체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시를 독립된 교구로 만들어 현재 5개의 교구가 있습니다.

  

학자들이 제시한 둘째 방안은 '지역 주교' 제도를 도입하는 것입니다. 서울 주변의 도시들은 도시기능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교구를 분할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구 분할상황까지는 아니고 절반쯤 자치하는 '지역 담당 주교' 제도의 도입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웨스턴 민스트 교구를 참조하여 의견을 수렴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런던은 템즈강을 기준으로 하여 교구를 남북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북쪽에 있는 교구가 웨스턴 민스트 교구입니다. 이 교구에는 5명의 보좌 주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역주교(Area Bishop)로 불립니다. 그들은 보좌 주교로서 각 지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맡은 지역은 독립된 교구는 아니지만 교구장으로부터 상당한 위임을 받아 준 교구장으로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웨스턴 민스트에서는 이 제도를 25년 전에 도입을 하였으며 현재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런 제도를 도입한 것은 실제로 주임 신부가 가정방문을 해보면 인구수 3만 명이 상한수에 해당됩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교구장이 한 달에 2곳을 사목방문해도 일년에 몇 군데밖에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5년에 1번은 본당이나 기관 수도단체를 사목방문해야 합니다. 그 외에도 주교는 성무활동과 일반적인 행정업무, 견진성사와 여러 성사의 집전, 성직자 부모님의 장례미사등을 집전해야 하는데 무리가 많습니다.



  서울대교구의 경우에 지역을 분할하게 되면 본당 70개 정도가 적당할 것입니다. 현재 서울에는 226개 본당이 있는데 셋으로 나누어도 70곳이 넘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천주교 전 신자는 400여만 명이며 서울대교구에 1/3인 130여만 명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처럼 큰 교구의 효율적인 사목을 위해서 보좌주교들과 의논해서 지역으로 담당하면 어떨지 연구 중에 있습니다. 저는 작년 하반기에 사제 평의회 때도 신부님들에게 이 제도의 도입을 위해서 의견을 수렴하고 연구하자고 말했습니다. 다양한 교회 구성원들의 의견을 폭넓게 들은 후  우리 서울대교구의 실정에 맞는 '지역 주교'제도를 실시할 예정입니다.



4. 교회- 친교와 사랑의 공동체

   하느님 백성의 신앙생활은 친교와 사랑으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친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적당한 규모가 되어야 합니다. 성당의 규모는 사랑의 친교가 이뤄질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의 행정단위에서 동은 인구 3만 명이며 그 수가 넘으면 동을 나누게 됩니다. 천주교회도 인구 3만 명에 본당이 1개가 있으면 맞을 것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인구가 4600여 만 명이지만 전국의 본당은 1200개 정도입니다. 약 300개가 더 신설되면 인구 3만 명에 본당이 1개가 되는 것입니다. 신설되어야 할 300개의 본당 중에서 서울대교구의 과제가 큽니다. 서울의 인구는 약 1300만 명이므로 본당은 430개 정도가 되어야 하지만 226개에 불과합니다. 서울대교구는 앞으로 200개를 더 늘려 본당 공동체를 친교의 공동체로 만들 것입니다.

5.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정치

   정치의 목적은 국민 전체의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계층이나 당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실망하는 것은 정권 담당자나 야당에 있는 사람들이 국민전체의 이익보다 자기 정당, 당리당략을 우선시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이 국민 전체를 위해서 노력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지지를 받게 될 것입니다.



6. 정의로운 사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만들어주신 세상에는 많은 물질과 재산이 있습니다. 재화는 인류 전체의 공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개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가 골고루 잘 살기를 바랍니다. 공기와 땅 등은 인류의 공동재산입니다. 따라서 자연환경을 훼손해서는 안됩니다. 자연은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려면 사회정의가 실현되어야 하고 그래야 국민 전체가 행복하게 됩니다. 이익의 공정한 분배를 위해서 기업가는 기업가의 윤리를 가져야 하고 노동자는 노동자의 윤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공평한 분배가 이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국가는 정의에 입각하여 공정한 분배가 이뤄질 수 있는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집단 이기주의적인 파업이나 모임은 국민 전체가 합심해서 극복해야 합니다. 

    

7. 균형을 갖춘 삶의 추구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도 있습니다. 육신에는 물리법칙이 적용되지만 영혼에는 윤리법칙이 적용됩니다. 사람은 윤리법칙을 지켜야 하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지난 20세기에는 물질문명이 발전하였고 그 점이 부각되었습니다. 정신이나 영혼의 면은 소홀하여 균형이 깨져 풍요롭게 살고 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빈약해 행복감이 덜합니다. 지난날 물질의 풍요를 추구했다면 이제는 정신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더 가꾸어야 합니다. 문화는 물질적 측면보다 영적이며 정신적인 측면을 고양해 줍니다. 21세기는 문화적인 발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 국민은 예전에는 가풍이나 도덕 관념이 있어서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렸으나 이제는 조급하고 여유가 없습니다. 남을 생각하고 도와주고 기다리며 배려하는 국민 운동을 일으켰으면 좋겠습니다.

   

8. 인권이 존중되는 통일

   지난해에 열렸던 남북 정상회담은 남북간에 커다란 물꼬를 터준 역사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이산가족의 만남은 아주 시급하며 중대한 과제입니다. 이산 가족들이 더 많이 서로 만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지금은 100명씩이기 때문에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만나면 몇 십년 몇 백년이 걸려도 다 못 만날 것입니다.  면회소를 설치하여 생사확인도 해야 합니다. 다방면의 분야 즉 문화, 체육, 경제적 교류가 여러 가지로 이뤄질수록 통일이 앞당겨질 것입니다. 우리는 인격과 인권이 존중되는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남북한 백성 전체의 기본적인 인권이 존중되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종교단체도 크게 기여할 수 있습니다. 



9. 방북의 조건

   지금 우리 민족에게는 종교나 신앙 문제보다도 이산가족 문제가 선결되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들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면 종교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아직 시기 상조입니다. 교황님의 방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북한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것 일뿐  실질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측은 하지만 몇 명이나 있는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등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교황청에서는 이미 수차례에 걸쳐서 북한에 사제의 상주를 요청했지만 북한에서는 아직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에 사제가 상주할 수 있을 때 교황방북의 논의는 활발해 질 수 있습니다. 저의 방북문제 역시 그런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10. 인간생명은 최우선의 가치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인간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선용이나 악용은 인간의 도덕에 관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도 평화적으로 이용하면 인류에게 큰 혜택을 주지만 원자폭탄은 인류의 파멸을 초래합니다. 생명공학의 문제도 과학을 선용할 것인가? 악용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조금이라도 악용한다면 부작용은 엄청날 것입니다. 생명공학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최우선하는 윤리가 꼭 필요합니다. 



11. 언론의 선용

   교회의 매스 미디어 종사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평화방송, 평화신문, 가톨릭신문과  같은 매체는 교육적인 기능과 오락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화방송과 같은 교회의 언론은 교육적 성격이 강합니다. 전파는 하느님께서 주신 큰 선물이고 소중하며 귀중한 재산이므로 선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방송을 남용하거나 악용하는 경향이 있어서 문제입니다. 방송은 국가전체에 유익한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건전한 오락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국민을 계도하는 역할도 해야 합니다.



12. 신년덕담

   우리는 새천년 , 새세기를 본격적으로 여는 2001년을 맞이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을 주셨으니 어떻게 선용할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 자신과 주위 사람, 국가와 민족 전체를 위해서 어떻게 선용할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일년 내내 건강하시어 소원을 이루어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 자라 훌륭한 일꾼이 되도록 기도 드립니다. 장차 그들이 우리 나라와 민족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큰 일을 하기 바랍니다. 노인들께서는 노후를 즐겁고 건강하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신자 여러분과 국민 여러분의 영육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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