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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작성일 2007년 12월 28일 (금) 17:46
분 류 성탄시기
ㆍ추천: 0  ㆍ조회: 2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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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성가정 대축일 강론 모음 ”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성탄 8부내 주일)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제 1 독서 : 집회 3,3-7.14-17a

제 2 독서 : 골로 3,12-21

복 음 : 루가 2,41-52



해설

성탄 대축일이 지난 후 즉시 이어지는 이 주간에 교회가 성가정 축일을 지내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을 9개월 동안이나 태중에 모셨던 마리아와 또한 그 분의 탄생의 신비를 크나큰 사랑과 분별력으로써 비밀히 간직했던 요셉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그분의 육화의 신비를 거행할 수 없다. 더우기, 그렇듯 널리 생생하게 알려져 있는 말구유의 장면은 모든 인간들의 생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다. 그 역사의 세 주역들을 즉시 상기시켜준다.

실제로, 성가정 축일은 성탄의 신비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그 자체의 독립적 의미-특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를 지니고 있다.

사실, 교회가 이 축일을 지내며 의도하는 바는 ‘그 성가정’이 이루어진 순간부터 주님의 공생활이 시작될 때까지, 그리고 그분께서 죽고 부활하시는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겪은 모든 인간적 체험을 신자들로 하여금 인식케 하여 그 성가정을 찬미하고 모범으로 삼아 따르게 하는 데 잇다. 오늘의 본기도는 이와 같은 내용을 들려주고 있다:“성가정의 빛나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천주여, 우리로 하여금 성가정의 덕행과 사랑을 본받음으로써 마침내 영원한 주님의 집에서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하느님께서는 가정이 오늘날 교회를 위해서든 일반 시민 사회를 위해서든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계시다. 만일 우리가 서로간에 사랑의 막을 다시 짜기를 시작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가정 안에서 사랑하기를 배우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사랑하기를 배우지 못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교황 바오로 2세께서 제 3 차 라틴 아메리카의 주교총회를 개회하시면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가정삼고의 우위성이 있다:“가정사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십시오. 미래의 복음화 사업은 대부분 ‘가정교회’에 의존해야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분야에 우선적으로 헌신하십시오. 가정교회는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또한 생명과 인간 품위에 대한 존경심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가정사목은 가정이 점점 더 보다 많은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만큼 더 중요합니다. 이혼과 피임과 낙태를 조장하는 온갖 선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들이 사회를 파괴하고 있습니다”(1979. 1. 28.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하신 담화)



부모를 공경하라



가정이라고 하는 내용이 풍부하고도 뚜렷한 세계는 성서의 여러군데에서 여러가지 특수한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 세계는 외적으로 볼 때 작고 단순한 것 같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어려움, 긴장감, 몰이해, 고통 등 실로 극적인 사건들로 가득차 있다. 바로 이런 까닭에 현대사회에서 어떤 이들은 가정을 초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가정을 사랑이 지속되는 동안만 계속되는 기회주의적인 집단으로 대치하고 자녀들을 국가의 공공조직에 맡겨버리는 일까지도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은 인간의 성장이 아니라 실패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 다른 사람들, 특히 자녀들에게 항구히 자신을 베풀어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사회는 보다 더 추잡한 이기주의적 사회가 될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 존립할 능력이 없게 된다.

반면에 성서는 모든 가족관계-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등-가 사랑이라는 기본법에 근거하고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집회서에 의한 오늘의 제 1 독서는 이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거기서는 “부모를 공경하여라”(출애 20,12)라는 제 4 계명을 상호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일련의 문맥을 통해 그 계명을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사회적 이익뿐만 아니라 특히 종교적 이익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해석해 주고 있다.

“아비를 공경하는 것은 자기 죄를 벗는 것이며 어미를 공경하는 것은 보화를 쌓아올리는 것이다. 아비를 공경하는 사람은 자기 자식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구하는 것을 주님께서 들어주시리라. 아비를 공경하는 사람은 오래 살 것이며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어미를 평안케 한다”(집회 3,3-6).

결과적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가정을 원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은 부모님들의 마음속에는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자녀들의 마음속에는 부모들에 대한 사랑을 넣어주셨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랑의 교류의 법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만일 부모와 자녀들이 하느님께서 그들을 당신 사랑의 계획 속에 다시 넣어 보시듯이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모든 것이 더 아름답고 밝게 빛날 것이며, 또한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성서 본문은 오늘날 우리가 입고 있는 사회적 혜택이 없었기 때문에 옛날에 보다 더 자주 있을 수 없었던 그런 경우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아들아, 너는 네 아비가 늙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말아라. 그가 설혹 노망을 부리더라도 잘 참아받고 네가 젊고 힘있다고 해서 그를 업신여기지 말아라. 아비를 잘 섬긴 공은 잊혀지지 않으리니 네 죄는 용서받고 새 삶을 이룰 것이다”(집회 3,12-14). 그리고 여기에다 전례상으로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구절을 덧붙이고 있다:“자기 아비를 저버리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어미를 노엽게 하는 것은 주님의 저주를 부르는 것이다”(16절).

여기서 가정적 현실이 내포되어 있는 종교적 차원이 또다시 드러나고 있다. 즉, 부모와 자녀들은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파괴하거나 변경할 자격이 없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초월적 계획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부모에 대한 고유의 의무를 채우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고, 반대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또한 부모가 어려울 때 도와드리는 것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희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과 같다.

보다시피, 성서는 모든 사람에게 가정을 정당화해 왔고 또한 정당화시켜 나갈 사회적 근거를 초월해 있는 가정의 모습, 즉 훨씬 더 풍요로운 역량을 갖추고 있는 가정의 모습을 제시해주고 있다.



모든 것 위에 사랑이 있습니다.



제 2 독서는 가정을 보다 깊은 종교적 관점에서 고찰하면서 어째서 가정의 원천이 오로지 사랑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바울로 사도가 골로사이인들에게 새로운 신앙의 자세로 살도록 권고하면서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용서의 모범을 상기시키는 자리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들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생겨나게 된다. 그 공동체 안에서 각자는 자기가 형제로서 받아들여지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형제로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성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골로 3,12-14).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교 신자 사이에는 대립이나 원한같은 것이 생길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만일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우리 자신의 무사안일과 자만심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모든 것이 다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 사랑은 우리를 갈라놓지 아니하고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해준다(14절 참조). 사랑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와진 존재’로서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기본적 규범이라고 한다면, 그 법이 이미 자연적 유대관계를 전제하고 또한 상호 애정과 연민의 정을 크게 요구하는 가정 그 자체의 구성원들에게도 유효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덧붙여 말하자면, 사랑의 법은 특히 가정에서 보다 더 적합하고 비옥한 경작지를 얻게 된다. 사실, 바울로 사도는 바로 이와 같은 사랑의 폭넓은 내용에 비추어, 언뜻 보기에 그 당시의 윤리적 경향에 견주어 볼 때 별로 특별한 내용이 아니었던 가정적 의무 가운데 어떤 것들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성바울로는 가정을 사랑의 보다 높은 차원의 요구에 상응하게 끌어올리고 또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새로운 계획에 일치시킴으로써 가정의 본성을 그리스도교화시킨다.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18절)또는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20절)이라는 바울로 사도의 특별한 표현양식이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믿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림으로써’가정은 그 다양한 특성 때문에 받게 되는 사사로운 유혹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계획과 항구히 일치하게 된다:“그리스도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여러분 안에 살아 있기를 빕니다”(16절).

“아내된 사람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본분입니다. 남편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모질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자녀된 사람들은 무슨 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어버이들은 자녀들이 못살게 굴지 마십시오. 그들의 의기를 꺾어서는 안됩니다”(18-21절).

남편의 역할이 되었든, 부모의 역할이 되었든 그 고유한 역할 때문에 남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우리 시대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 바울로 사도의 시대에도 있었다. 이 때문에 바울로 사도는 남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거나 못살게 굴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리스찬적 정신은 특히 오늘날 주변의 모든 위협 때문에 퇴폐하고 파탄에 이를 지경에 놓이게 되는 가정과 같은 ‘자연적’조직체에도 새로운 힘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준다.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루가복음사가만이 전해주고 있는 오늘 복음의 내용은 성전에서 예수를 잃어버림에 관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루가복음사가가 의도하는 바는 ‘그리스도론적’인 목적 즉 예수의 참된 신원과 사명을 알려주고자 하는데 있다. 사실, 이야기 전체가 관심을 기울이고 해석하는 핵심적 내용은 어머니께서 상심에 차서 하시는 꾸중에 답하는 예수의 응답 가운데 들어 있다 :“왜 나를 찾으셨읍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예수께서는 성부와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그분은 당신을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끌어갈 성부의 뜻을 행해야만 한다. 이 놀랍고도 떼어버릴 수 없는 ‘의무’는 예수의 생애 가운데 결정적인 순간들을 하나하나 엮어나감으로써(루가 4,43; 9,22 ; 17,25참조) 마침내 그로 하여금 성부의 영광에 들어가게 할 것이다(루가 24,26.46-47참조). 예수의 유년시절에 관한 이 이상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성부의 ‘뜻’에 따라 온전히 봉헌되리라는 예언적 전조같은 것을 본다.

반면에 성가정 축일에 바로 이와 같은 성서 대목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교회의 의도에서 보면 이 대목은 분명히 성가정 축일이라는 전례적 신비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럴 만한 근거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의 가족이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여행한다는 사실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루가 2,41참조). 그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종교적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신명 16,16 ;출애 12,1참조). 예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42절)즉 히브리 어린이들이 종교적으로 성숙됨을 인정받게 되는 열세 살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예수께서 성전 부근에 머물러 계셨던 사실을 이해시켜주기도 한다(46-47절 참조). 성전에서는 ‘교사’들이 회당에서 성서를 봉독 할 수 있는 자격과 아울러 신앙상으로 성인으로 인정받아야 했던 어린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정은 종교적 행위에 개방된 가정이었으며, 그러한 종교적 행위를 가정이 그 본래의 모습을 실현시키기 위해 모든 것이 필요없는 듯 여겨질 수 있다. 또 사실이 그렇다.

하지만 루가복음사가는 이와 같은 사실을 이야기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나 기도,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등의 종교적 행위가 우리 가정이 티없는 공동체를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향기를 부여해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를 일깨워주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를 성전에서 잃어버림은 나자렛 가정의 평온한 생활에 있어서 마치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분위기는 마리아가 괴로움에 시달리며 사흘만에 성전에서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던”(46절) 예수를 발견하였을 때 비탄스럽게 하신 말씀 속에 나타나고 있다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48절)”.

이와 같은 사실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전혀 아무런 번민-몰이해, 갈등, 오류, 실패, 질병,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또는 젊은 사람의 죽음 등으로 인한-이 없을 만큼 이상적으로 조직되고 행복스러운 가정이란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느님께 대한 신뢰’만이 그러한 고통을 덜어주며 가정의 구성원들을 더욱 친밀히 결합시켜주고 그들에게 보다 더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다.

루가복음사가는 자신의 격렬한 이야기를 거의 목가적인 주석으로써 끝을 맺으면서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 같다:“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51-52절). 괴로움과 고통이 생활을 붙잡아 두지는 못한다. 반대로 하느님을 통해 보여지는 괴로움과 고통은 생활을 보다 역동적이고 풍요롭게 해준다.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루가에 의해 주의 깊게 비춰지고 있는 마리아와 요셉의 태도는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또한 번의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방금 복음을 통해 마리아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는 내용을 들었다. 바로 전에는 예수의 부모가 예수의 말(50절) 즉 어머니의 비탄에 찬 말씀을 듣고 예수가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한다(48-49절 참조).

그러므로 그 ‘아들’의 태도와 말속에는 어떤 ‘신비스러운’사실이 들어있다. 즉 적어도 그 아들의 공생활이 시작되기까지 그에 대해 앞서 체험했고 또한 체험하게 될 그 모든 사실에 비교해 볼 때 더욱더 알 수 없는 그런 사실이 들어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신비’는 우리뿐만 아니라 그의 부모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인간 특히 자녀들과 같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그리고 성장과정에 있는 모든 인간 존재 속에는 ‘신비’가 들어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하느님의 빛에 비추어 자녀들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들이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는 아주 민감한 지각 능력을 갗추어야 할 것이다. 흔히 자녀들의 ‘길’은 부모들이 생각하거나 원하는 ‘길’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충만한 믿음으로 그들의 길을 달려나갈 수 있도록 그들을 존중하고 또한 용기를 복돋아주어야 한다. 특히 그 길이 교회 안에서의 사도직에 대한 부르심에 고양된 길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모와 자녀들은 하느님께서 그들 각 개개인에게 원하시는 바를 발견함에 있어서 서로서로 도와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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