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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7년 12월 28일 (금) 17:42
분 류 성탄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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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성가정 대축일 강론 모음 ”
 

 성가정 대축일





1. 조순창 신부/ 2                      2. 김정진 신부 / 3

3. 홍금표 신부/ 5                      4. 가정 성화는 부모의 표양/ 7

5. 윤병훈 신부/ 10                     6. 한상호 신부/ 11

7. 임병헌 신부/ 18                     8. 성가정의 의의/ 19

9. 조창래 신부/ 21                     10. 조승균 신부/ 23

11. 이정운 신부/ 25                    12. 사랑의 공동체/ 27

13. 조순창 신부/ 29                    14. 서경윤 신부/ 30

15. 김영식 신부/ 33                    16. 김현준 신부/ 35

17. 김상호 신부/ 37                    18. 김성배 신부/ 38

19. 행복은 마음 속에/ 40              20. 함세웅 신부/ 42

21. 강길웅 신부/ 43                    22. 교구주보/ 45

23. 교구주보/ 47                       24. 장영희 교수/ 49

1.         성가정 축일 (나) 루가 2,22-40

              ꡔ감사하며 기도하고, 진실 되고, 사랑과 희생으로 좋은 가정 이룩하자ꡕ

                                                                조순창 신부



예수 성탄절의 축제 기간 중 그 첫 주일인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세분으로 이루신 나자렛의 거룩한 가정을 우러러 기리며, 이 성가정에 비추어, 우리 가정 안에서의 나의 위치와 도리를 반성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면서 가족을 위해 서로 기도하는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로서 사람이 되시어, 피조물인 인간을 부모로 모시고 이 세상에 오신 아들 예수님, 다윗 가문의 요셉, 그른 마리아와 약혼했으나 혼인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아, 구세주의 양부가 되신 의인이신 아버지 요셉 성인입니다. 동정 모친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나, 주님의 종으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함께 인류구원의 속죄 고통을 나누신 어머니이셨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그 가정은 거룩한 가정이었고, 우리 모든 가정의 모범이십니다. 아버지는 요셉 성인처럼 신의를 지키고,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처럼 사랑이 깊고, 아들은 예수님처럼 효성스러워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갈 때에 그 가정은 우리를 구하고 행복하게 하며, 날로 새롭고 성장케 하는 작은 교회요, 지상의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인 남편은 고달픕니다. 어머니인 아내도 끝없는 분주한 일에 지치게 마련입니다. 자녀도 공부와 부모의 기대와 앞날의 걱정으로 희망보다 부담이 더 큰 그늘 속에, 허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남편은 직장이나 사업에 시달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가정보다 밖에서 억지로 피로를 풀고, 가족 앞에 폭군의 횡포를 부리기 쉽고, 어머니와 아내는 자리 한 나는 살림 일에 찌들기보다 늙기 전에 시샘의 갖가지 모임에 더 분주하기 쉽고, 자녀들은 수나 많으면 몰라도, 고작 하나 둘에 어린 마음의 하소연을 이해하고 들어주지 않아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학비나 용돈을 타내는 말밖에는 더 이상의 대화는 않는 가운데서, 서로의 담을 높게 두텁게 쌓아 가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자녀의 도리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며, 효자의 기도는 들어주시고, 장수할 것이며, 죄를 지어도 부모 섬긴 공으로 죄는 용서받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며, 어버이는 ‘자녀들을 못 살게 굴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용기를 냅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를 성전에서 율법대로 바친 것과 같이, 정성스런 감사 예물과 함께, 우리 가정과 온 가족을 하느님께 봉헌합시다.

여러분의 부모는 훌륭하십니까? 아니라고 하여도 부모는 부모이심은 어쩔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아내는 좋은 아내입니까? 여러분의 남편은 믿음직한 남편입니까? 부족을 탓하기보다는 감사하십시오, 부부란 두개의 반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임을 명심하시고, 유쾌한 동반자를 만듭시다. 여러분들의 자녀는 희망이 있습니까? 아쉬우면 부모님 스스로를 마음의 거울에 비춰 보시고, 더 훌륭한 부모가 되기로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고 진실 되고 사랑하며, 희생하고 감사로써 좋은 가정을 이룹시다.



우리 본당은 은혜 넘치고, 말씀 풍성하고, 이웃과 기쁨 가득하고, 영세 가족이 날로 늘어나고, 새 성전의 꿈을 실현하는 한 해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1014명 새 영세자에 축복합니다. 새 성당의 기본 설계 투시도도 완성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봉사와 헌금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본당 공동체로서 온갖 활동에 동참하시고 참여하시는 신자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2.               성가정 축일 (나) 루가 2,22-40 크리스챤의 가정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성가정은 우리 신자들의 가정의 표본이요, 거울이요, 등대이며 귀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가정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나자렛 성가정에서 예수님은 건강히 자라시면서 지혜가 가득 찼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우리 신자들 가정에서도 성가정을 본받아 부부간의 사랑과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 속에서 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크리스챤 가정은 말하자면 작은 교회입니다. 성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각 가정 안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즉 가족이 모여 하느님께 다같이 기도하고 감사 드리고 용서도 빌고 속죄도 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소리가 각 가정에서 흘러 나와야 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 말씀은 각별한 교훈과 각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태어나신지 얼마 안 된 예수 아기는 마리아와 요셉의 품에 안겨 성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모세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성모 마리아는 정결 예식을 행하였고 또한 <누구든지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고 주님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예수 아기의 봉헌식을 거행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는 전연 없었고 또한 마리아께서도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심으로 정결예식을 받을 필요가 하등 없었으나 겸손한 마음과 하느님의 계명을 잘 준수하는 모범을 주시기 위하여 끝까지 잘 따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율법정신을 알았습니다. 성가정이 우리 가정에게 주는 교훈과 모범은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과 열렬한 사랑은 하느님의 계명을 알뜰히 준수하는 데 있다고 성 요한은 말씀하였습니다.



가정은 자녀가 부모한테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배우는 곳입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는 가운데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가정, 신앙과 기쁨이 깃든 가정, 함께 기도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화목 하는 가정은 천국을 약속 받은 하느님의 가정이요, 천상 가정입니다.

주일이면 으레 온 가족이 성당에 나와서 나란히 앉아 미사에 참여하는 모습은 적이 아름답기만 합니다. 이 가정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깃든 가정이며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축복 받은 가정입니다. 하느님을 멀리하고 성당에 발걸음을 끊고 신앙생활에 무관심한 태도로 나온다면 어찌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받는 가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미 도끼를 나무뿌리에 대셨다(마태오 3,10)고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 종말은 비참해질 것입니다.



가정은 사회와 국가의 안정과 번영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그가 주는 영향은 막대합니다. 요즈음 십대 소년 소녀들의 탈선 행위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방에서, 카바레에서, 유흥가에서 그들의 행동은 뜻 있는 이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그 외에 살인, 강도, 사기, 불륜, 도덕의 타락, 갖가지의 부정 부패 및 사고 등은 이 사회와 이 나라의 앞날을 어둡게 합니다. 또한 암영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세계의 저명한 인사들의 말에 의하며 이러한 모든 퇴폐적인 풍조는 가정 교육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며 그리고 모든 범죄와 폭력과 현대인의 부정적인 기질은 모두가 종교의 후퇴 내지는 소극성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기본 인격은 생 후 5, 6세까지의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정평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인격 형성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며 가정 교육에 좌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의 속담은 참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영국 속담에 <사랑은 집안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사랑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소박한 곳에서 싹이 트게 됩니다. 가정에서 사랑이 싹트게 되어 가족 사이에 사랑과 평화가 오고 가고 하면 저절로 집밖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다라서 사회도 국가도 밝고 명랑해지게 마련입니다. 가정에서는 어버이들이 자녀들과 늘 대화를 통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때로는 친구도 되고 때로는 지도자도 될 수 있는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밖에서는 이웃 사람들에게 좋은 말씀, 애정이 깃든 미소, 마음의 위안, 그리고 정신적 원조를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전통적인 가정과, 가정의 건전성과 가치가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가정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율법과 부모의 권위에 대한 존경심은 성가정 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듣는 거와 같이 부모에게 효도를 다 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후히 상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가정은 모두 성가정을 본받아 모두 하느님께 축복받는 가정, 사랑과 평화 속에 단란하고 행복한 제 2의 성가정을 꾸며 나가도록 굳게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3.               「성가정」주일 <루가 2,41-52>  하느님의 자리

                                                         홍금표 신부





오늘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성가정」축일을 지내며, 우리 삶의 보금자리이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기본 요소인 가정의 중요성을 뒤돌아보며, 가정의 성화를 위해 기도한다. 특히 오늘과 같이 가정이 위기에 처해 있는 현실에서, 우리 가정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모든 가정의 모범인「성가정」의 교훈을 되새긴다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성가정」하면 뭔가는 모르지만 막연하게 나마 거룩하고 평화롭고 행복이 넘치는 가정,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가득한 무지개 빛 가정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기에 「성가정」을 본받는다라고 기도 할 때, 우리 마음의 한 부분은 우리가 가지지 못했지만 「성가정」이 지녔을 법한 행복이, 우리 가정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반적인 우리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가정」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가정은 우리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상이한 가정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가정」은 우리가 기대했던 행복과 평화가 넘치는 무지개 빛의 가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가정, 우리 가정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불행의 요소를 두루 갖춘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가정이었다. 요셉의 직업은 장인이었는데, 이 말은 막일을 하던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던 말이었다. 오늘날 인건비가 비싼 한국 땅에서도 일일 노동자들의 삶이 고단하다면, 2000년 전 지도에도 잘 나타나지 않을 정도의 작은 도시 나자렛에서 막노동으로 삶을 살아갔을「성가정」의 경제적 모습은 쉽게 상상이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둘째로 이 가정은, 부부간의 불신과 오해가 있는 가정이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은 처녀가 정혼을 한 다음에도 동거생활을 하지 않고 약 1년간 친정에서 살게 된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잉태하게 된 시기는 바로 이 1년간의 친정에서의 생활 중 즉, 첫 번째 결혼과 두 번째 결혼 사이에 아기를 갖게 된다.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는 많은 오해와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요셉은 남 몰래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게 될 정도로 이 「성가정」에도 극복해야 할, 오늘날 우리 가정이 가지고 있는 불신과 갈등의 요소를 똑같이 가지고 있던 가정이었다.

  

세 번째로, 이 가정은 자식의 불효가 있는 가정이었다. 오늘 복음에도 그 한 면을 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열 두살 되던 해 과월절 때,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부모는 아들 예수를 잃어버리게 된다. 때문에 부모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 어렵게 성전에서 그 아들을 되찾게 된다. 그 때 부모의 애타는 마음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란 황당 무계하기 까지 하고, 성질 급한 한국 사람이라면 한 대 두드려 맞았을 소리. 그리고 더하여 예수님의 공생활 시절,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자면 술주정뱅이요, 악령 들린 사람, 죄인들하고 어울리는 상놈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들이 걱정되어 찾아간 어머니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라는, 너무나 매몰차고 어미의 가슴에 상처를 주기에 충분한 말씀.

  

네 번째로, 이 가정은 고통이 있는 가정이었다. 인간에게 가장 많은 고통을 주고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은, 서양인들에게는 배우자의 죽음이고, 동양인에게 있어서는 자식의 죽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성가정」은 이 두 가지 사건을 동시에 겪은 가정임. 남편을 일찍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외아들마저도 자신의 눈앞에서 처절히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고통을 감수해야 만 했던 가정이, 바로 이 가정이었다.

  

바로 이러한 모든 불행의 요소를 가지고 있던 가정이 바로「성가정」이었다. 그러면 무엇일까? 성가정의 이런한 모습이, 분명 우리가 본받고자 하는 진면목은 아닐진데,「성가정」을통해 우리가 본받아야말 할 교훈과 모범은 무엇이란 말인가 ? 그것은 아마도「성가정」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자리(활동공간) 때문이리라.

  분명 「성가정」은 모든 불행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가정」은「하느님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 중요한 선택과 결단의 순간「하느님의 뜻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와 여백」이라는, 참으로 우리 신앙인들이 두고두고 생각해야만 할 소중한 보물을 간직하고 있었던 가정이었다는 것이다.

  

고통의 순간에도, 이해 못할 아들의 행동과 불효의 순간에도, 이해 못할 임신으로 이혼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이 가정을 이끌어 간 것은 인간적 판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그 가정을 이끌어 가는 중심축이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이 활동할 수 있는 자리와 공간을 마련해 드렸다는 것이「성가정」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












4.               성 가정 축일

                                  가정 성화는 부모의 표양으로부터



서울 명일동에 사는 이 아무개(45 스테파노)씨는 며칠 전, 고2 아들과 대화를 나누다 깜짝 놀랐다. “대학에 진학하면 무엇을 전공하고 싶냐"고 묻자 아들이 대뜸 “돈을 많이 벌려면 어떤 학과에 가야 하는 거예요?"하고 되묻는 것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어디에 쓰려고?"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잖아요. 저는 이 다음에 돈 많이 벌어서 운동장같이 넓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제일 좋은 승용차 타고 다닐 거예요‥‥‥‥ 이씨는 그 날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부족한 것 없이 길렀고, 초등학교 때부터 성당주일학교에도 열심히 다닌 아들인데, 벌써부터 황금만능주의에 물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화가 사라진 현대의 가정

“부모의 책임이 크지요. 그동안 아들의 몸'만 키워줬지 '마음'을 키워주지 못했어요,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관 교육을 소홀히 한 겁니다. 이제 와서 무슨 수로 아들의 가치관을 바꿔 놓을런지 걱정이에요,"

  

이씨의 뒤늦은 자각과 고민은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상당수의 부모들은 지금 자녀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고, 느끼며 가치관을 형성해가고 있는 지에 대해 관심조차 없다. 자녀에 대한 주된 관심사는 학교성적일 뿐, 그들에게서 어쩌다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적 행태가 나타나면 “요즘 애들이 다 그렇지․․"하는 말로 넘겨버리기 일수다. 일상사에 지친 부모와 부모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공존하고 대화가 사라진 곳이 오늘날 우리 가정의 현주소다.

  

가정은 인격과 태도가 일차적으로 형성되어, 한층 더 풍요로운 인간성을 길러내는 최초의 학교(사목헌장 52항)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가정에서 인성교육이나 가치관 교육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 보니, 자녀들은 입시경정 위주의 학교, 황금만능주의가 범람하는 사회, 감각적이고 홍미 위주인 대중매체 등을 통해 ‘위험스런' 가치관을 습득해가고 있다.

  

청소년의 ‘삶의 가치에 대한 평가체계', 즉 가치관은 가정․사회․학교환경 등에 의해 좌우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정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가정은 다른 환경보다 청소년의 인격 및 가치관 형성에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어린이들의) 가정경험은, 어른이 되어 지녀야 할 태도를 강하게 좌우합니다. 따라서 가정은 어린이가 세상과 맨 처음으로 접하는 장소이기에, 첫 번째 평화의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96년 평화의 날 담화)"라며, 가정을 첫 번째이자 가장 기초적인 학교라고 강조했다.



교육 전문가들은 자녀에게 건전한 가치관을 심어주는 효과적인 방법은 대화라고 말한다. 서울대 교육학과 문용린 교수는, 특히 부모와 자녀간의 애정 어린 대화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청소년의 건전한 가치의식은 주변환경과 의 진지한 대환 속에서 형성된다. 그런데 자유스럽고 진지한 대화는, 서로 신뢰하고 아껴주는 애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대화는 학교나 사회보다 애정 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가정에서 가능하다.

부모는 자녀들이 학교와 사회로부터 얻게되는 스트레스와 갈등을 자연스럽게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부모들이 먼저 모범 보여야

그는 이어 부모와 자녀간에 진지한 대화가 생각보다 없지 않은 것에 대해 “훈련을 필요로 하며, 습관화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엄마가 저녁에 가족과 둘러앉아 하루 중에 일어난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는 등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부모보다 친구에게 먼저 고민을 털어놓는 이유는, 가정 안에 이 같은 대 화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또 부모의 모범은 자녀들의 가치관 습득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축적에 혈안이 되어있는 부모, 낭비와 사치를 일삼지만 주위의 불우이웃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부모의 밑에서, 건전한 경제적 가치관이나 박애정신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가치관 형성의 방법적 측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자녀에게 어떤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하는가이다. 대다수 부모들은 극도의 이기주의와 배금주의가 넘쳐나고, 이로 인해 온갖 사회악이 발생하는 이 혼탁한 사회 속에서, 자녀에게 어떤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의식구조 속에 ‘정직하면 손해본다’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는다'‘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다'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가치관이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적어도 신자라면, 종교에서 그 ‘알맹이'를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를 통합하고, 조화하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종교적 교육이념을 강조한 교육학자 포스터조차도 “종교적 갈망만이 이기주의를 억제시키면서, 보다 인간다운 성격을 형성시켜 주고, 도덕률에 순응할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종교에 기초한 가치관 교육이 중요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주님의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시편 36,9)'하는 말씀처럼, 세계와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시각을 공유하는 것입니다(98년 청소년주일 담화)"라며 자녀에게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 사물을 바라보도록 가르칠 것을 당부했다.

  자녀들이 무엇을 얼마만큼 가졌느냐보다 ‘어떤 인간이냐'를 중시하고, 참된 정의감과 사랑, 그리고 공동체 정신 등을 습득하기 원하면, 그에 관한 교육은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종교 교육 도움 받아야 성과 

교육학자인 대전성모병원장 윤주병 신부는 “종교교육은 청소년 인격교육의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교육은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랑과 정의, 책임감과 협동심, 자제력과 순명 등을 배우게 하여, 참다운 인간화와 형제애를 도모하는 인격을 형성한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간성 교육도, 종교교육의 도움을 받아야 효율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청주 양업고 교장 윤병훈 신부는 “부모가 신앙생활을 통해 얻은 가치, 교회가 복음에 바탕을 둔 가치를 청소년들에게 알려줘, 그 가르침을 ‘양심의 길잡이'로 삼게 하는 일은, 그 어떤 사명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모의 신앙적 모범과 교회의 적극적인 종교교육, 그리고 사회의 건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수원교구 청소년국장 박종만 신부는 이를 가정과 학교 교회와 사회 등 청소년을 둘러싼 주변환경의 ‘공동책임'이라고 말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청소년들의 가치관은 우리 가정과 교회, 사회의 모습을 왕성하게 빨아들이면서 굳어져 가고 있다, 이들의 가치관은 새천년기 복음화와 21세기 한국사회의 ‘미래모습'이다.













5.              성 가정 주일        가정의 정체성이 흔들리면/

                                               왜곡된 가치에 청소년 오염

                                                              윤병훈 신부

          

가정은 작은 교회라 일컫는다. 기초교회가 건강해야 모든 공동체가 밝아진다,

가정의 기초는 부부이며, 중심은 믿음과 사랑이며, 목표는 따뜻한 부부생활과 올바른 자녀교육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기초와 중심, 목표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결국 가정의 정체성이 흔들려 걱정이다. 

  

또 하나 걱정은 가정 사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본당에서, 가정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세상은 놀랍도록 변화하며, 총체적 위기상황에서 살아가기 위해 적절한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데도, 교회공동체는 사회와의 접촉과 대화가 구체적이지 못하고 있다.

  

이미 세상은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너무도 많이 변해있는 세상을 직시하자. 각 본당은 가정사목이 ‘어디로 향할 것인가'라는 분명한 목표를 설정한 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원론적인 것을 정립하고 시작해야 한다.

  

첫째로 중요한 것은, 가정이 부부와 부모 자식간에 따사로운 관계와 서로에 한 욕구충족의 자리로 바로서야 한다. 가정은 따뜻함과 욕구충족의 역할을 잃어감으로, 상호가치간의 혼란스러움을 초래하며, 서로에게 깊은 상처의 장이 되고있다.

  

둘째로, 질적 가치 기준이 분명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가족들 각자는 복잡하고 다양한 가치들을 지니는데, 요즘 가족들은 서로간의 만남 없이, 모두 바람처럼 스쳐 지나므로, 마냥 얽히고 설킨 상태에서 생명가치가 살아날 리 없으며, 속사정을 읽을 수나 있겠는가?

  

가정에서, 어른의 전통적 가치와 신세대 가치 사이는 너무도 상이해, 억지로 눈높이를 맞추려 하지만, 부모와 집 떠난 자녀들과의 사이에는 불협화음만 높아졌다. 그러기에 가족 구성원에 원칙이 있어야 한다. 왜곡된 가치, 올바른 가치 등 다양한 가치들이 각자 나름대로 질적인 세계에 남아있는데, 서로간의 갈등만 심화되고 있다.



이제 분명한 원칙이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최근에 절대적인 가치가 상대화되고, 상대적인 가치가 절대화되는 마당에, 교회에서 신앙교육을 통하여 생명가치, 공동선을 만들고 협력하는, 더불어 사는 삶과 사랑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정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소중한 가치들이 분명하게 구성원들 머리 속에 입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가정과 본당 구성원들이 성사적인 삶으로의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성사는 보여 줌이다. 그리고 하느님으로의 일으켜 세움이다. 삶 안에서 강생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는 역할을 다 해야한다.

공동선을 지향하는 가치를 어른들이 보여 줄 때,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들이 떠오를 것이다. 가정의 목표는 부부가 성사적 여정을 계속함으로써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고, 사목자들은 구체적으로 가정과 연계하여, 삶 속에서 양질의 체험들을 신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공허

한 신자들의 마음에 충만함을 주는 것이다. 만일 가정이나 본당이 자기정체성을 확인하지 않으면, 왜곡된 가치에 오염되어 따사로운 터전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6.                성 가정주일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

                                                              한상호 신부



        머리말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세계의 장래는 가정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작은 교회인 가정 공동체가, 바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첫번 공동체이며, 미래의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할 중요한 공동체임을 강조하고 계시다.

  

이러한 교황님의 말씀은,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곧 병들어 가는 가정에서부터 나온 부산물이며 결과이기 때문에, 복음적 가르침에 기초한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로의 회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잘 지적하고 계시다.

  특히 오늘의 한국 사회는 급격히 밀려온 산업화와 외국문화의 영향으로 감당해 내기 어려운 변화의 물결 속에, 많은 혼란과 진통을 겪고있다. 생산위주의 경쟁적 사회분위기 속에서 극도로 팽배해 있는 개인주의와 향락주의는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가족제도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많은 가정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노력을 들여 찾고 재정비 해야할 크리스천 가정의 참 모습이 무엇이며, 주님께로부터 받은 참 소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뜻 있는 일이라 하겠다.



        1. 현대 가정의 위기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발표에 의하면, 88년 한해동안40만 9천명이 결혼하였는데, 그 중에 10.7%에 해당하는 4만 4천 쌍이 이혼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숫자는 해방 직후인 1946년의 47%에 비하면 배 이상 늘어난 것이며, 앞으로 더욱 빠른 속도로 이혼율이 증가할 전망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법정이혼 외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시적이고 장기적인 별거까지 계산한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엄청난 숫자의 부부들이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가정의 파탄으로 부부 당사자들 뿐 만 아니라, 그들이 돌보던 수많은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노부모들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들의 탈선과 범죄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사회 환경적인 여러 까지 요인들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욱 직접적인 원인은 그들을 품어주고, 이끌고 나갈 삶의 뿌리인, 그들의 가정이 흔들리고 있거나,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고갈된 가정, 대화나 이해어린 타협보다는, 우격다짐이나 폭력이 판을 치는 가정,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보다는, 세상을 손해 보지 않고 사는 요령을 가르치는 가정,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남을 이겨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바보나 패배자로 낙인을 찍는 가정, 삶의 깊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심어주기 보다는, 사치스러운 옷까지나 물건으로 때우려는 가정, 이런 가정에서 어떻게 건전하고 바람직한 후손들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노부모님들은 어떻게 살고 계신가? 옛날보다 오래 사시는 노인들을 위해,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우리의 미덕인 효를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해 봐야 한다. 부부중심, 자녀중심의 가정 분위기 속에서 소외된 채 불안하고 고독한 마음으로 눈치를 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노인들이 많이 있다.

  

서로 모시지 못하겠다고 다투는 두 아들을 위해, 스스로 세상을 하직한 부천의 어느 할머니

사건이나, 제주도에 효도관광 시켜드린다고 모시고 갔다가 내버리고 달아나는 어떤 아들과 며느리의 이야기는, 요즈음의 세태를 잘 말해주고 있다. 어른을 존경하고 모실 줄 모르는 가정에서 어떻게 효성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미래의 가정을 기대할 수 있을까?

  

생명에 대한 경시풍조 역시, 현대가정을 위기로 몰아 넣는 위험한 요소임에 분명하다. 자녀는 하느님의 가장 귀중한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실수 때문에 생긴 두통거리로 여기는 부부들이 많이 있다. 한 해 동안에 무려 2백만이 넘는 어린 영혼들이 세상구경을 하기도 전에 살해당하고 있다. 자기 자신들의 안락과 평안을 위해, 그렇게 쉽게 처리해 버려도 된단 말인가! 오늘 내가 살고 있는 가정이 접하고 있는 위기상황은 무엇이며, 그러한 문제들을 나는 지금까지 어떠한 마음과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해 왔는지 생각해 보자.



        2. 현대생활과 우리 가정



  사람은 누구나 가정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며, 훌륭한 가정을 이루어 보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바람과 노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생산과 경쟁위주의 산업사회로부터 많은 영향과 도전을 받고 있다. 교황님 말씀대로 오늘의 가정은 “다양한 세력들"에 의하여 파괴와 변태의 위협을 받고 있다.

  특히 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산업화, 도시화, 전문화의 물결은 우리 고유의 가족 형태와 기능에 많은 변화를 초래했으며, 외래문화의 유입과 함께 성윤리를 비롯한 우리 고유의 가치체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로, 급격한 가족형태와 기능의 변화는 우리 가정에 많은 혼란을 초래하였다. 산업사회로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가부장권이 약화되었고, 지역적, 사회적 이동이 빈번해 지면서 개인 위주, 부부 중심의 핵가족을 지향하게 되었고, 가족 중심이 아닌 개인 중심의 사고방식과 함께 종래의 가정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가정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전통적 가정은 생산과 소비를 함께 하는 집단생활이었고, 자녀들의 교육과 양육을 위하여 가장 영향력이 큰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소비생활만을 중심으로 하게 되어, 가족이 흩어짐으로써 가정의 대화가 줄어들게 되었고, 교육방법도 점점 제도화되고 전문화됨으로써, 교육의 책임이 정규 교육기관으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부모와 자녀간의 정서적 유대가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자녀를 낳지 않으려는 가정이 늘어나게 되었고, 부모와 자녀간의 유대가 인간적 사랑으로 강화되기보다는, 경제적 합리성이나 이해타산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면서, 가족관계가 비인간화되는 위험을 보이고 있다.

  

종교적이며 오락적인 가정의 기능 면에서도 딸은 변화를 볼 수 있다. 출세위주의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현대사회의 분위기에서, 가정은 신앙이나 종교적 가치를 심어주기 보다는 경쟁에서 승리하는 요령과 힘을 제공하기에 바쁘고, 상업적이고 전문적인 오락기구들로 인해서 가족 간의 친교와 결속을 다지는 여가를 이용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러한 핵가족화, 가족 기능의 변화와 역할분담의 혼동 등은 현대가족에게 다양한 사회문제를 제시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족의 불안정 문제와 노인 문제, 청소년 문제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두번째로, 우리 가정에 위협을 주는 요소로는 생산위주의 물질만능주의와 경쟁적인 사회 분 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 물질위주의 현대사회 속에서 남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더 많은 부를 누리며 살기 위하여 우리 가정들은 많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일과 직장을 가장 우선으로 여겨야 하는 현대인들은, 가정생활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부부가 함께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녀들조차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자녀들 역시 입시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있다.

  

이러한 생존경쟁에서 오는 불안과 긴장, 그리고 과로한 업무는 원만한 가정생활에 많은 장애를 일으키고 있고,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로 정신적 장애를 일으키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불건전한 향락문화에 젖어드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도대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바라는 “남부럽지 않은 가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세번째로, 오늘날의 자유스러워진 성윤리와 결혼관이 우리의 가정을 위협하고 있다. 동아일보 70주년 사회조사에 의하면, 젊은 세대일수록 성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와 함께, 어려운 결혼생활은 일찍 청산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부부로 맺어지면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과거의 결혼제도 보다는, 살기 어려우면 빨리 해결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결혼이라는 제도에 구속을 받기보다는, 혼자 자유롭게 독신으로 살겠다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의 많은 가정은 신성한 두 인격체의 영원한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계속적인 투신과 나눔이라는 결혼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망각해 가고 있는 듯하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의 가정들은 오염된 한강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참된 가정의 진정한 모습을 찾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면 현재 우리 가정에 위협을 주고있는 요소들은 무엇이고, 나는 그리고 나의 배우자와 가족들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극복하려고 노력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자.



        3.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가정



  첫째,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삼위일체의 사랑과 일치와 통하는 것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영원히 사랑으로 일치하시는 것처럼, 부부는 일생동안 서로 사랑 안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며, 서로 깊이 믿는 가운데 신의를 지키며, 새 생명의 출산과 양육에 협력함으로써, 하나로 일치된 작은 교회를 이룬다는 것이다.

  

참다운 가정 공동체는, 우선 한 몸이 된 부부의 사랑으로 시작된다. 어버이를 떠나 한 몸이 된 아담 내외! 서로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영원한 동반자 아담과 하와(창세기 2,24)야말로, 일치의 극을 이루는 부부 모습의 원형이다. 일생 서로 사랑하기로 결심한 부부, 과연 현대의 부부들은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한 몸으로 결합되어 살고 있는가?

  

한 몸과 알몸은 아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아무것도 가리거나 감출 필요가 없는, 손해를 보거나 끼칠 여지가 없는, 서로 믿고 못 믿고 할 처지가 아닌, 서로 이기고 지고를 따질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완전히 서로에게 개방된 두 알몸의 결합이 아니라면, 부부가 진정으로 한 몸을 이루리라고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사랑 안에 진정으로 한 몸 됨의 기쁨과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많은 부부들의 공통된 체험이며, 거기서부터 초래되는 많은 현상들로부터 심한 상처와 아픔을 겪고 있다.

  

지난 해 이혼한 사람들 중의 60% 이상이, 성격이 맞지 않거나 불만스러워서라고 이혼 사유를 밝히고 있지만, 사실은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함께 살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께서 특별히 배려해 주신, 나에게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사람", “함께 있기 때문에 살맛을 느끼고, 활력을 얻게되는 절대적인 존재", 그래서 “어떠한 일들이 닥치더라도 부등켜안고, 함께 울고 웃으며 계속 살아가고 싶은 존재"라는 느낌을 배우자로부터 받지 못할 때, 결혼생활은 활력을 잃게되고 만다.

  가정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부부사랑의 흘러 넘치는 힘은 자녀사랑, 부모사랑, 친척사랑을 포함한 전체적인 이웃사랑의 핵심이 된다. 부부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은 자녀사랑이나 이웃사랑은, 가정 공동체의 균형을 마비시킬 위험성마저 내포하는 경우가 있다.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전폭적인 자기 증여, 끊임없는 희생과 화해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이다. 전폭적인 자기증여라 함은 바로 조건 없이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는 “거저 줌"을 의미한다. 서로간에 “거저 줌"의 사랑이 없는 가정은 인간적 일치를 이를 수 없다.

결혼서약 중에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며 존경하겠다."는 배우자의 약속은 이를 잘 반영해 주고있다. 또한 여기에는 죽을 때까지 신의를 지키겠다는 확실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일시적인 동거나 계약결혼 같은 것은, 결혼의 깊은 의미를 상실한다고 보겠다.

연약한 두 사람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은, 많은 어려움을 갖게 마련이다. 현 교황은 “부부들은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일을 교회에 계속 상기시킨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부부 서로가 결혼생활을 통하여, 고통을 함께 나누고 희생으로 사랑함으로써,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희생으로 자기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재현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하겠다.



“성격이 맞지 않는다." “함께 사는 것이 너무나 피곤하고 힘들다." “이젠 매력도 없고 재미도 없다."는 등의 이유로, 함께 살기를 거부하는 것은,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다. 결혼생활은 즉석에서 단숨에 배를 태우는 인스턴트 음식이 아니라, 정성을 들여서 오래 끓이고, 뜸을 들여야 제대로 맛을 낼 수 있는 음식에 비유할 수 있다.

  그래서 가정생활에서 끊임없이 요구되는 것은, 가족 구성원들간에 이루어지는 이해와 관용, 그리고 용서와 화해이다. 서로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경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용서를 청하며, 넓은 마음으로 용서를 해주는 가정이야말로 성숙된 그리스도인 가정이다.

  

성숙된 가정 공동체의 형성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보겠다는 가족들의 열망과 의지 속에 이루어지는 “진정한 대화(對話)"이다. 아무리 가까운 인간관계라도 대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대화는 언어를 통한 대화뿐만 아니라, 마음의 표현이 잔뜩 어린 ‘무언의 대화'(無言의 對話)를 포함한다. 오고가는 말이 없는 가정, 아무 느낌도 나타내 보이지 않는 무표정하고 무감각한 가정에서, 어떻게 생명력 있는 삶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대화는 자기 주장만을 애써 나타내려는 소란스러운 의견교환이 아니라, 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진실 된 마음으로 주고받는 것이다.



가족들간에 오고가는 칭찬, 격려, 인정과 사랑의 표현은 살맛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또한 남의 이야기를 관심 있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들어주는 것이 대화에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요즘은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들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인 가정은 믿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믿음을 키우는 공동체요, 믿음을 전파하는 공동체이다. 신자부부는 전 생애를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그리스도 정신으로 충만하여, 날로 더욱 자기완성과 상호성화에 전진함으로써, 공동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사목헌장 48항).

  오늘날 믿음을 가진 부부로서 복음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세상으로부터 밀려오는 많은 유혹과 시련을 극복하며, 세상을 비추는 빛과 소금으로 살기 위해 신앙은 가정의 핵심이 된다. 신앙 안에서만 우리 가정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하게 되고, 감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정 공동체의 성화(聖化)를 위해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활중심에 놓고,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화와 형제애를 지향하면서, 가정을 신앙의 분위기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 가정은 인간의 생명을 전달하고 교육하는 것을 부부의 고유한 사명으로 알아야 하며(사목헌장 50항), 부부는 이 의무수행을 위하여 하느님의 창조의사에 따르는 인간교육을 시켜야 할 권리와 의무를 하느님께 위탁받고 있음을 절실히 느껴야 한다. 그러므로 가정은 신앙을 받아들이고 배우는 첫 신학교(primum seminarium)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풍요로운 인간성장에 기본이 되는 신앙교육보다는 입신출세주의적, 진학위주의 지적교육에만 골몰하고 있지 않은가? 신앙교육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청소년 시기에 공부만을 해야 한다고, 종교생활이나 교육활동을 중지시키는 부모도 적지 않은 듯 하다.

  이러한 생활환경 안에서, 자녀의 신앙교육은 기대하기 힘들다. 신앙교육이란 교리지식의 전달만이 아니라, 생활의 증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의 신앙교육의 첫 교육자로서 말과 행동과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자녀교육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관심을 통하여 자녀들을 성장시켜야 한다.

  

우리의 가정은 성사생활(聖事生活)과 기도생활(祈禱)을 통하여 신앙 공동체로 성숙할 수 있다. 가정의 성사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맺으신 사랑의 계약이 기념되고 새로워지며, 또한 성체성사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그들 스스로 맺은 혼인의 계약을 위한 힘을 발견하고, 이를 키워나갈 수 있다고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다. 또한 같은 빵을 나누는 사랑의 성찬을 통하여, 한 솥의 밥을 나누어 먹는 가정 공동체의 심오한 신비가 드러나기도 한다.

  

가정 안에서의 공동기도는 일치와 화목을 통한 가정 공동체의 성숙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 다. 가족이 공동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가정은 교회의 “가정지성소"(家庭至聖所 Sanctuarium domestium)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할 수 있는 공동기도를 마련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바쁜 생활 중에서도 서로 손을 잡고, 하루를 봉헌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평화스럽고 반성과 화해를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또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바치는 아침, 저녁기도와 삼종기도 그리고 묵주의 기도를 통하여 신앙생활의 리듬을 유지하게되며, 작은 교회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게 된다.



특히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을 당한 자녀들에게 축복이나 기도를 해준다는 것은, 말보다 훨씬 큰 기쁨과 용기를 북돋아줄 것이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부모의 기도와 축복을 받는 어린이의 순진한 모습에서, 오히려 부모들도 기도가 무엇이며, 기도의 힘이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모는 부활이나 성탄과 같은 전례시기를 따라 적절한 장식이나 행사를 베풀어줌으로써, 자녀들의 신앙심을 더욱 효과적으로 길러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복음을 세상에 전파해야 하는 소명을 갖는다. 그러므로 많은 현대인들을 혼돈으로 몰아넣는 그릇된 가치관이나 윤리질서에 대항해서 투쟁해야 하며, 정의롭고 올바른 사회건설을 위해서, 혼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

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함은 물론이며, 실천적인 사랑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열망과 함께, 특별히 우리 주위에서 가난과 병고, 착취와 억압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에 대한 사랑과 실천적인 배려를 베푸는 것이다.

  “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정 사도직으로서 “버림받은 어린이를 양자로 받아들이는 일, 나그네를 친절히 접대하는 일, 학교운영을 도와주는 일, 약혼자들이 결혼을 더 잘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일, 교리공부를 거들어 주는 일, 경제적 내지 윤리적 위기에 처한 부부와 가정을 도와주는 일, 노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할 뿐 아니라, 경제발전의 혜택을 노인들에게 공평하게 돌아가게 하는 일"(평신도교령 11항)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결국 부부사랑과 일치에서 나오는 힘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 공동체가 평화의 사도로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7.               가정성화특강              '대희년과 가정'-      

                                                             임병헌신부  



        가정은 하느님 사랑이 숨쉬는 장소


현대 사회는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탈산업사회는 대표적으로 세가지 특징을 갖는다.  우선 기존 질서의 파괴이다. 기존의  상징과 관념, 질서, 전통적  사고방식은 인정받지 못한다. 또 관계 단절로 인한 소외현상이 나타나고 이로  인해 인간은 개인주의화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 관계로  이뤄진 가장 기본적 단위인  가정도 위협을 받고 있다. 또 이러한 탈산업사회로 들어서면 점차 하느님의  부재를 주장하게 된다. 사람들이 점차 종교와 신앙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희년은  무엇인가? 단순히 교회가  정한 해이기 때문에 기뻐해야 하는 날이 아니다. 대희년은 구원 선포를 체험하고 그  기쁨을 누려야 하는 은총의 시간이다.



  구약성서를 보면 죄는 하느님을 외면하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희년은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하느님을 향해 고개를 돌려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실존을 체험하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즉  희년의 첫째 의미는 하느님은 살아  계시며 다른 누군가로부터 소외당하고 외면당해도 항상 내 곁에 계신다는 믿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희년의 기쁨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가정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하느님의 사랑이 숨쉬는  장소이다. 즉, 가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사랑까지 내포하는 곳이다. 



또 가정은 사랑이 충만하도록 노력해 나가는 장소이다. 가정은  이미 이루어진 완성형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노력하며 늘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 아울러 가정은 하느님의 사랑이 가시화되는 장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어떤 도구를 사용해 인간에게 보여주신다.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낼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 혈연으로 이뤄진 가정 공동체이다. 가정은 하느님이 사랑을 전하는 도구이며 그러한 사랑을 가장 크게 체험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따라서 탈산업사회의 부정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정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가정을 이루고 가꿔 나가는 구성원 공동의 노력 속에서 대희년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가족간의 사랑, 하느님과의 사랑이 가정에 충만하도록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부터 갖자.




8.            성가정 축일 마태오 2,13-15;19-23        성가정의 의의



가정이란 한 지붕 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들이 사는 곳을 말한다. <나자렛> 예수의 가정도 이렇게 갖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를 특히 <성가정>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천주시요 거룩하신 예수께서 친히 살으신 까닭이다. 우리 나라에만도 경복궁이나 창덕궁, 남대문까지 국보로서 소중히 또 길이 보존하며 감상하게 하는데 하물며 예수께서 살으시던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하는데는 아무런 이의(異意)가 없을 것이다.



둘째 이유는, 가정이 천상적 또는 영적 결연(結緣)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性)으로써 맺어진 가족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중성도 있지만 여기에는 불성(不性)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승화되어 천국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 따라 장가도 시집도 안가고 다만 하늘의 천사와 같아서 결혼이 다시없다.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무성(無性)이다. 성(聖)에 대한 인간의 관념이 성(性)과는 직결되지 않는 것 같다. 성가정의 구성원들은 알로이시오 성인께서 하신 말씀대로 <육체 없는 인간> 이거나 <육체 있는 천사>들인 것이다. 영적 혈연(血緣)으로 맺어진 가족이다.



셋째는, 둘째 이유와 좀 비슷하지만 좀더 적극성을 띤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예수께는 해당이 안될지 모르지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는 역시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천국을 위해 즉 구원에 들어가기 위해 인간은 어차피 가족의 유대를 풀어버릴 뿐만 아니라 증오로써 이를 거부해야 한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마태오 10,35-36).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르코 10,29-30). 버림으로써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버린 것까지 되찾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안배에는 지상가족으로써 천상대가족을 이룬다는 계획이 들어 있다. 기껏해야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더러 예수님의 당신 성부를 “하늘에 게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 뿐 이시다”(마태오 23,9)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대가족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 “잘 들어라.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겠으나”(마태오 8,11)라고 예언하시고, 당신 나라에서 당신과 마찬가지로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루가 22,30)하셨으니, 이렇게 되면 성 바울로의 말대로 우리는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소 2,19). 이 하느님의 대가족에 한 몫 끼인 가족이라면 이미 성가정이 아닌가? 이런 가정이 현재 예수님의 가정밖에 없다. 이것이 넷째 이유다.



다섯째 이유는 교회와 관련되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배필이요, 마리아는 이 교회의 어머니도 되고 요셉은 그 보호자다. 이처럼 가족이 총동원해서 <교회-가정>을 만들어 <나자렛> 성가정의 연장(延長)이 되게 하고, 이 <교회-가정>을 통해서 여기에 속한 모든 가정을 성화 시키려고 한다. 천상 대가족 이전에 지상 대성가족이 되게 한다.

이런 임무를 다하는 가정이라면 성가정이 아닐까?



끝으로 윤리적 이유 때문에 <나자렛> 가정은 성가정이 된다.

즉 가정의 각 성원이 자기 신분의 할 일을 완전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비의 임무는 가족의 의식주를 보장하고,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 같이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들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즐겨 배우게 기르는 것이다. 어미는 자기 남편의 권리를 의식하고 한 남자만 알며 자녀들의 장래를 위하여 남편과 함께 계획하며 자기 집을 명예롭게 하고 자녀들에게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교시해 주는 것이 임무다. 자녀들의 임무는 부모 한에서 주께서 친히 위임하신 권위를 인식하고 그들을 하느님을 상징하는 대표자로 알아 예수처럼 순종하며 연로한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다.



<나자렛> 가정이 그랬다는 증언을 레오 13세 교황에게서 들어보자. 그는 요셉을 가장의 모범, 마리아를 주부의 표본, 그리고 예수를 자녀의 본보기라 하며 “요셉 자신도 자기 식구들의 끼니를 벌어야 했고, 예수께서도 손수 한 직업을 맡아 일을 하셔야 했다. 그 때문에 지혜가 가득 차고, 없는 것이 없을 이 분들이 빈한함을 택하려고 그런 부귀를 내던지고 예수와 마리아와 요셉이 함께 사시고자 하신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라고 하였다.



3년을 <나자렛>에서 살고 30년을 전도하셔야 했을 예수가 이와 반대로 하신 것은 확실히 성가정 육성과 완성이 얼마나 중요하고 제 일차적인 것인가를 알려주실 뿐만 아니라 이의 본보기가 되시려는, 또 천상 대가족을 이룩하시려는 의도가 있어서가 아닐까?

 9.             성가정 축일  마태오 2,13-15;19-23 주님을 모신 성가정

                                                            조창래 신부



신자들로 하여금 성가정의 의미를 깊이 인식하고 온 가족이 함께 성가정 건설에 힘쓰게 한다.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쯤 될 때까지 평범한 한 가정에서 평범한 한 사회인으로 자라셨습니다. 전세기의 우리 선배 크리스쳔들은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있었으리라 상상할 수 있는 평화와 순종과 사랑의 모범에 감동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1892년 성가정 축일을 제정하고 우리들의 가장생활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흠숭할 수 있게 했습니다.



가정은 처음으로 미소가 발견되는 곳입니다. 아기는 어머니를 알아보고 미소를 짓습니다. 이것은 동물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기의 인간적 의식은 가정에서 형성됩니다. 누군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습니다. 가정은 한 인간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접하는 사회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조부모 등 모두가 가정을 바탕으로 발견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는 그야말로 다른 분, 즉 하느님에게로 향한 우리의 생활이 시작하는 곳도 바로 이 가정입니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한 인격의 거의 대부분이 가정에서 이미 형성된다고 합니다. 최초의 교육인 초등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성격이 형성된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가정생활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정을 보다 거룩하게 축복하시고자 성사로 제정하셨기 때문에 우리 크리스쳔에게 있어서 사랑 속에 하나가 된 성가정은 분명히 천국의 모습을 앞당겨 실현시키는 것이 됩니다.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인간이라도 이 사랑의 보금자리를 생각하고는 감동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로 이루어집니다. 갓 결혼한 새 부모도 미구에 생길 자녀와 함께 가정을 설계합니다. 따라서 순전히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의 배타적인 가정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부부는 서로의 사랑을 통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송두리째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쳔 신앙의 요소는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부부의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을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가정의 성패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받은 것만큼 주고 준 것만큼 받아내야 한다는 우리 인간의 타산으로 가정을 이끌어 갈 수는 없습니다. 부부간의 그리고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마치도 그리스도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주신 것과 같이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가정은 그 가운데 그리스도를 두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한 인간입니다.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과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는 서로의 노력이 없이는 성가정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자녀들이 참된 사랑을 깨닫게 하고 또 그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가정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방금 들은 제2독서는 남편과 아내, 또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 핵심적인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부부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만나서 이루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혼인성사는 여기에 다른 제 3자가 절대로 개입할 수 없고 또 부부 중 누구도 제3자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가 아무리 타락했다 할지라도 이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부부는 근본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배우자를 인정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원만한 부부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하는 헌신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결혼의 성공은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부부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한 도구로 생각해선 안됩니다. 자녀는 부모의 허영의 도구가 아닙니다. 가기 싫어하는 학교에 강제로 집어넣고 급기야는 성적이 떨어지니 공부 못한다고 구박하는 부모, 죽어라 싫어하는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우라고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들볶는 부모, 그리고 자기들이 골라준 배우자 외에는 어느 누구하고도 결혼할 수 없다고 횡포를 부리는 부모들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자녀는 부모의 반복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의견과 적성을 잘 보살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로서 자녀에게 해야 될 가장 큰 임무는 생활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부부의 애틋한 사랑은 자녀들이 올바르고 순수하게 자라게 합니다. 악표양은 절대 금물입니다. 부모의 모범은 자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자녀들은 자신의 생명을 부모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택한 생명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순종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효도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물론 갈등과 알력도 있습니다. 문제는 부모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여 자신의 성숙에 도움이 되도록 하느냐에 있습니다. 연수약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무가 조용히 섰고자 하나 바람이 멎지 아니하고, 자식이 효도를 다하려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순명입니다. 자녀는 자신의 생활에 대해 부모에게 자주 자신의 마음을 열고 함께 얘기를 나눔으로 부모의 권고를 받아들이고 순명 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도 늦기 전에 말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기쁨도 또 슬픔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가정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부부의 애틋한 사랑은 기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삶은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만남 없이는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녀를 가장 이상적으로 키우는 것은 기도할 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자녀가 불효할 수 없고 사회의 낙오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부모를 도와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역시 기도입니다. 자녀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부모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축복 받은 우리 크리스쳔의 가정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와 요셉의 성가정을 본받은 가정입니다. 기도하며 일하는 가정, 웃음을 나누는 흐뭇한 가정, 순간보다는 영원을 향해 갖가지 십자가를 함께 지고 부활의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가정은 진정 행복한 성가정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모신 성가정을 이룩합시다.









                    

 10.                   성가정 축일 (가) 마태 2, 13-15;19-23

                                                             조승균 신부



성탄 후 첫 주일인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교회에서 제정한지 6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왜 성가정 축일을 제정했는가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이 하나의 작은 교회이며, 사랑의 보금자리이기에 하느님의 뜻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나오듯이 2,000년 전의 성가정과 오늘의 가정들을 비교해볼 때 성가정은 오늘의 우리 가정들이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자녀에 대한 걱정, 시대의 불안정에서 오는 불안과 긴장감들을 성가정도 똑같이 겪었다는 사실에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가정은 헤로데가 죽기 전까지 박해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긴장이 항상 성가정에 도사렸고, 에집트의 이민 생활에서 겪는 서러움과 멸시 속에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간 소시민적인 가정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가정은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보아 결코, 유복한 가정이라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성가정을 교회에서는 세상의 모든 가정의 모범으로 삼아 따르게 하는 데 있어서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그것은 바로 가장인 요셉이 권위로써 가정을 이끌어 간 것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으로 가정을 이끌어 갔고, 마리아 역시 남편과 자식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으로, 예수는 부모에 대한 공경과 순명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셉의 가정은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느님이 주신 가정 안에서의 각자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문경에 위치한 음성 나환자촌에 갔을 때, 그곳에 살고 있던 한 소녀가 저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소녀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동료학생들이 미감아 라는 사실을 알고는 같은 좌석에 앉기를 거부할 뿐 만 아니라, 점심 식사 때는 자기 혼자 쓸쓸히 식사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체육시간에는 나병균이 바람에 날려 전염된다고 멀리 떨어져서 운동하던 동료들의 멸시와 소외감을 맛보면서 학교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 소녀는 이런 학교 분위기에서 공부하느니,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살할 결심을 굳혀 가고 있던 어느 날 그 소녀는 자신을 위해 뭉그러진 손으로 노동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밤마다 자기를 위해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부모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 소녀는 삶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던 것이고,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이제부터는 자신을 미워하고 소외시키는 학교 동료들에게 쏟을 것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동료들에게 친절과 관심을 갖고 대한지 1학기가 지나자 서서히 자기를 이해하고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생기더니, 이제는 많은 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저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만일 이 소녀의 부모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만 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하는 가운데 삶을 덧없이 살아갔더라면, 이 소녀의 장래는 어떻게 됐을지 여러분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소녀의 부모는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 가운데서 묵묵히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했고, 어려운 처지에서도 자녀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쏟았기에 그 소녀는 부모를 통해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정이라는 작은 교회 안에서 부모나 자녀간에 사랑이 교류될 때,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존경심이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만일 한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나 자식, 형제와 자매가 자기들의 고유한 의무인 사랑의 교류를 소홀히 했을 때에 가정 안에서의 복음화는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그것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가정 축일을 맞이해서 우리 가정이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서로가 아껴주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와 성실성이 필요합니다. 부부는 부드러움과 사랑으로 결합되어야 하며, 부모는 사랑과 이해로써 자녀를 보살피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명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정 안에 항상 머물도록 기도하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1.              성가정 축일 (나) 루가 2,22-40 그리스도적 가정이 되자!

                                                         이정운 신부



성가정 축일입니다. 해마다 주님의 성탄절을 지낸 다음 주일을 성가정 축일로 지내기로 정한 교회의 전례와 복음적 권고를 교회의 지향을 따라 신자가정이 절감해야 하는 날입니다. 크리스쳔 가정이 예수 마리아 요셉 세 식구가 살던 태고적 향수를 느껴 그것을 현실로 생활화하라는 현대 교회 안에서의 교회의 힘찬 가르침입니다. 가정의 시원과 하느님의 안배하심에 대한 교의적 해석은 고사하고,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적 가정의 의미와 그 실현을 생각해야겠습니다.



교회는 왜 전례력을 따라서 주님의 성탄 하신 축일 다음 주일을 성가정 축일로 정하였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면 서도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비천한 인간의 모습을 지니신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당신이 설정하신 가정을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이 인간의 가정 안에 머무시면서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하심을 우리 스스로가 알고 그 뜻의 기쁨을 지녀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야겠습니다.



요셉 마리아 예수께서 사시던 가정의 가난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우리는 알아들어야 합니까? 아니면 평화와 사랑과 기쁨이 깃들었던 가정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까? 우리들이 생각하는 속담 속에 ‘가난이 싸움’이라는 속담을 우리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물적 여건만이 행복의 기본이 된다고 우리는 알아야 합니까? 하루에 목수일 품값으로 세 식구가 살아야 했고, 그나마도 일거리가 없을 때엔 쉬어야 했던 안타까움 속에 지녔던 가장 요셉의 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길쌈과 바느질로 가장을 도우며 하느님의 아들을 보살펴야 했던 마리아의 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루의 일을 마친 후엔 흔들리는 등불 밑에서 성조들의 이야기와 성서를 읽으면서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을 궁구하며 기도하는 세 식구의 영상을 그려보아야 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며 자라나는 어린 그리스도의 맑고 총명한 얼굴을 그려보아야 합니다. 집안에 가구라고는 요새 흔히 우리들이 집안을 꾸미는 가구나 식기구 또한 편한 침구들을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생각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교회는 이 세상에서 이 가정이 우리의 모범이 된다고 가르치고 축일을 정하여 기리고 있습니까?



예수 마리아 요셉 이분들이 살던 가정은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요셉은 가장으로 항상 일터에 나갈 때나 일을 하면서나 가정과 자신과 또한 하느님의 능하신 섭리와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활하였다고 나는 믿습니다. 마리아는 부족한 생활 환경 안에서도 어린 그리스도를 돌보며 ‘구원의 하느님은 전능하신 주’라는 찬미의 노래가 그칠 새 없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스도는 양친의 가호와 사랑 안에서 자신이 구원의 성업을 세상에 이루기 위한 단련을 하며 부모님의 일을 돕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거룩한 품성으로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기 위한 섬세하고도 치밀히 단련하며 항상 부모와 함께 성전에 나아가 기도하는 모습을 우리는 절감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 우리는 가정을 현세적 생활의 방편으로 하느님께서 설정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혼인과 비유하여 말씀하셨고, 사랑과 평화의 보금자리로 구원을 가정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성서의 구구절절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우리 옛 문답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할 본분, 자녀가 부모에게 할 본분, 더구나 예비자 교리 강화 시에 주님의 계명을 배울 때에 가정의 중대성을 이미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복잡한 사회의 현실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제거한다고 우리는 믿어야 합니까? 사회적 현실이 자녀교육의 그리스도적 의미를 터득하는 데 방해하고 있다고만 생각해야 합니까? 현세의 조류가 성가정의 거룩함과 덕스러움을 모두 빼앗아간다고 생각을 해야만 하겠습니까?



일터에서 퇴근길에 친구들과 주막에 들러서 세상일을 궁구하여 시간이 자정이 가깝도록 이야기해야 하고, 과외 수업을 통해서 지식을 얻을 욕심으로 모든 기도를 송두리째 버리고 국어 수학 자연에 머리를 파묻어 버린 채 기도 없는 학업으로 우리는 살아야겠습니까? 또한 주일에도 휴일에도 우리는 기도하는 집으로 우리가 정한 곳에서 한시의 반성도 없이 유흥가 산과 들 오락장에서의 소일 그것이 바로 현세 가정의 실태라면 너무나 가혹한 비판이 되겠습니까?



하느님께 기도하는 가정, 하느님을 배우는 가정,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와 연결되는 가정, 가장이 솔선수범하고 그 가족을 따르게 하면서 정말로 우리는 2천 년 전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의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여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다운 가정이기를 비는 바입니다.

  

12.           성가정 축일    루가 2,22-40         사랑의 공동체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또한 한 해를 마무리짓는 연말에 즈음하여 지난 일년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 얼마나 용서와 사랑의 공동체다운 모습을 갖추어 왔는지 반성할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가장으로서 어머니로서 자녀로서 내 자신이 우리 가정의 분위기를 밝고 화목하게 하기 위해 얼마나 힘써 왔는지 돌이켜보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웃하여 사는 두 가정이 있었습니다. 한 가정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대 가족 이었고, 또 다른 가정은 젊은 부부만 사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가족을 가진 한 가정은 웃음꽃이 피어 항상 화목한 반면에, 젊은 부부만 사는 가정은 사흘이 멀다고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젊은 부부만 사는 가정의 남편이 이웃집의 화목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우리는 둘만 사는데도 매일 싸워야 하고, 여러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데 저토록 화목하다니 왜 그럴까?” 그래서 그 젊은 가장은 어느 하루 날을 잡아 소주 한 병을 사들고 이웃집 가장을 찾아갔습니다. 술을 한잔 권하며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저씨네 가정은 대가족인데도 웃음꽃이 떠날 줄 모르고, 우리는 둘이 사는데도 매일 싸움만 하는데, 그렇게 화목하게 지내시는 비결이 있으면 말씀 좀 해주십시오!”



화목한 가정이 되기 위한 비결을 묻는 젊은 가장의 이와 같은 부탁에, 그 아저씨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당신네 두 분은 모두 아주 훌륭하시고, 우리 가족은 하나같이 모두 바보들이기 때문이죠.” 젊은 가장은 도무지 그 말에 이해가 안 갔던지,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그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웃 집 가장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가정이 화목한 비결을 자상히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내가 출근하기 위하여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거울 있는 곳으로 가다가 그만 물그릇을 발로 차 물을 엎질렀습니다. 그때 나는 제 아내에게 용서를 청했습니다. “나의 부주의로 물을 엎질러 미안하오!” 그랬더니 제 아내는 도리어 제게 용서를 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니어요, 제가 머리가 모자라 그만 물그릇을 그 곳에 놓아두었으니 제 잘못이지요.”



그런데 그 옆에 게시던 저희 어머님께서도 며느리한테 질세라 한 말씀 거두어 드립니다. “아니다, 나잇살이나 먹은 내가 그것을 보고도 물그릇을 그대로 두었으니, 내가 바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해 바보가 되려고 하니, 싸움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가정은 미사 시작할 때, 우리 모두가 외우는 기도문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철저히 실천하는 가족이었기에 화목한 가정일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3,18-21) 화목한 가정이 되는 비결은 순종과 사랑임을 다음과 같이 일러주고 있습니다. “아내 된 사람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써 해야 할 본분입니다.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모질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 된 사람들은 무슨 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어느 어린이의 미담입니다. 어느 날 주일학교 선생님께 봉투 하나를 내밀면서 “선생님, 이거 무슨 좋은 일에 써주세요.” “뭐가 들어 있지?” “5천원이요.” “5천원? 이 5천원이 어땠다는 거지?” “저, 말예요. 선생님, 제가 지난 번 부활절 때 영세 받았는데 참 기뻤어요. 그래서 전 예수님이 이렇게 기쁘게 해주셨으니까 나도 예수님께 무엇을 한 가지 라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매주 용돈을 조금씩 저축했거든요. 엄마도 좀 보태주셨지만 거의 제 돈이지요. 써 주시면 좋겠어요.” 그 선생님은 그 돈을 남쪽에 있는 나환자촌에 보냈고, 얼마 후에 정중한 감사장이 나환자촌에서 이 소년에게 날아 왔습니다. 소년의 기쁨은 대단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내일 모레면 이 해도 다 갑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또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각자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아내의 남편으로 그리고 아버지로서 할 본분을 다 했는가?



나는 아내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성실히 수행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자녀로서 부모님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실행했는지를 반성할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밝아오는 새해에는 우리 가정 안에 진정 용서와 사랑의 주님을 모실 수 있도록 이 미사 중 간절히 기도합시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가정의 화목한 모습은 바로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이나 실수를 자기 탓으로 돌리려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미덕에서 나왔습니다. 5천원을 모아 나환자촌에 보낸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의 창조적인 사랑은 부모님의 보이지 않는 실천적인 표상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저는 어는 화목한 가정의 한 학생이 쓴 글을 소개하면서, 성가정 축일 강론을 마칠까 합니다. “저희 가정은 가난합니다. 그러나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저희 가정에는 감사해야 할 일이 꼭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가정의 식사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우리 가정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비록 식탁에 맛있는 음식은 없지만, 가족들이 하루를 지낸 재미있는 이야기와 유쾌한 분위기, 서로의 이야기를 즐겨 귀담아 들어주는 사랑으로 식탁이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그 어떤 맛있는 음식보다도 이 사랑과 대화의 분위기가 더 좋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보금자리가 내 가정이란 것을 다시 한번 깊이 느꼈습니다.”



끝으로, 새해를 맞이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교우 분들의 가정에 더욱 충만하고 화목한 가정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13.         성가정 축일 (다) 루가 2,41-52 신앙·봉사·사랑·효도로써 가정을 천국삼자

                                                                 조순창 신부



오늘은 나자렛의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 세분으로 이루어진 성가정을 우리 모두의 가정의 모범으로 삼자고 마련된 날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와 우리 가족 서로의 노력으로 더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갈 다짐을 새롭게 하며, 가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가정 주인입니다.



가정이란 말은 언제라도 정다운 말입니다. 부모와 자녀 또는 부부와 형제들로 이루어진 가정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제도이며, 사회 구성의 가장 작은 기본 공동체이며, 이는 흩어져서는 아니 될 섭리적 관계입니다.



효도는 가정 윤리의 기본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하느님은 “효자가 기도하는 것을 주님께서 들어주신다”고 하셨고, “부모가 섬긴 공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역경에 처했을 때에 구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부모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모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며, 예수님의 본을 받을 때에는 행복하고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2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뽑아 주신 사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 받는 백성들인 여러분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사랑을 실천하라”고 교훈 하십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가족 윤리의 중심입니다. 요셉 성인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사랑하며 목수일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가족 사랑으로 가정일을 부지런히 돌보았으며, 예수님은 부모 사랑으로 기쁨과 희망의 샘이 되어 주셨습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일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수치입니다. 기쁨의 척도는 얼마나 부자이고 가난한가에 있다기보다는, ‘얼마나 열심히 일하며 정당한 대가로 떳떳이 사느냐’에 달려 있다면,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사랑으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여 삶의 참보람과 기쁨을 누려야 할 것이며, 거기에 하느님의 축복이 점칠 것입니다.



신앙으로 하느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구원의 열쇠입니다. 나자렛 가족이 걱정이나 고통이나 아쉬운 것이 없어서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고통은 더 컸었습니다. 약혼중의 잉태에서 구유 탄생과 피난, 목수로 가장이 꾸려 가는 가난한 살림들의 고민은 우리들보다 더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중에서도 효도와 사랑이 극진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최선을 다하여 맡은 직분을 서로서로 다하셨기에 하느님 은혜 속에 복되고, 그래서 고통 중에도 인류 구원의 원천으로서 가정의 표본으로 삼는 것입니다.

신앙이 부족하며 기도하지 않고, 서로 불신하며, 사랑이 부족하여 불행의 탓을 서로 돌리고, 그래서 미워하며, 구제 불능이라 판단하고, 핀잔을 주며, 절망하여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살 때에는 희망이 없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하느님이 맺어주신 좋은 가정입니다. 금년 한 해가 다 가는 오늘, 지난 한해를 돌이켜,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시고, 사랑하시고, 하느님께 기도하여 주십시오. 신앙과 봉사와 사랑과 효도로 가정을 천국으로 삼읍시다. 끝으로 우리 본당 가족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본당을 위해서 봉사해 주시는 봉사자 여러분! 성전건립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고, 정성어린 헌금을 하여 주신 여러분께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우리 본당 모든 교우 가족 여러분, 감사합니다. 행복하십시오.













14.         성가정 축일 (다) 루가 2,41-52         “희생 없이 성가정 안돼”

                                                                 서경윤 신부



본당신부도 아닌데 어쩌다 혼인미사 주례를 하게되었습니다. 강론 중에 새 가정을 이루는 신랑 신부에게 장차 요셉,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을 본받아 모범적인 성가정을 이루며 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에 어떤 분이 어떤 가정이 성가정인가를 물었습니다. 나는 「가족 모두가 성인이 되면 성가정이지」하고 얼버무려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강론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고 면박을 주며 그 자리를 피해버렸습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에 내가 아는 가정들을 꼽아가며 어느 가정이 성가정인지 가려내 보려니까 한 가정도 없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성가정에 대한 내 기준이 잘못되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아버지는 요셉 같은 분, 아들은 예수 같은 분을 찾아보려니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가정이 성가정입니까? 가족 모두가 성인들로 구성되면 성가정입니까? 지금까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기준은 너무 막연하고 비현실적입니다.

가정은 관계를 기초로 하여 형성된 단위입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가족이 모두 성인이라서 성가정이라기 보다 가족관계가 거룩해야 성가정이라 생각됩니다. 관계가 거북하다는 것은 그 관계 때문에 자기는 희생되는 것입니다. 성가정의 요셉은 그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낳은 자식도 아닌 예수를 길렀습니다. 신앙 때문에 실제로는 장가도 못간 셈입니다. 마리아가 동정이었고 하니까 말입니다. 자기의 일생으로 치면 마리아와 예수를 위해서 인생을 망친 꼴입니다.



마리아는 또 어떻습니까?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되었습니다. 일생동안 요셉에게 참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을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인생을 망친 꼴이 마리아도 요셉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 부부는 이 땅에 구원자를 위탁받아 낳고 기르느라고 자신들은 희생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어떻게 희생되었는지는 소개할 필용도 없습니다. 희생의 깊이가 깊은 만큼 그 만큼 거룩함의 높이도 높습니다. 성가정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타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희생이란 말이 요즘처럼 빛을 발해야 할 시기도 없을 것입니다. 결혼식에서 반지를 교환하는 행위도 공허해 보입니다. 본시 반지에는 인감도장이 함께 있어서 반지를 주는 것은 곧 자신의 모든 것을 위임하는 뜻이라야 하는데 결혼을 하면서도 자기의 재산을 따로 관리하는 마음 한구석에는 일단 유사시를 대비하겠다는 생각이 남아있고 그런 맘이 있는 한 자기 배우자에게 전적으로 신뢰하느님 하는 말들이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둘만 낳아 잘 키워보겠다고는 했지만 적게 낳은 마음속에는, 자녀를 많이 낳아 그들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하며 희생되고 싶지도 않고 나도 내 삶을 내 나름대로 즐기고 편히 살고 싶어서 적게 낳은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는 한 어찌 자녀와의 관계가 성스러울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녀들이 말은 않지만 더 이상 동생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를 압니다. 즉 자식을 위해서 전부를 희생 할 수는 없다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어떤 어린이는 자기 어머니가 왜 병원에 갔다 왔는지를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너희 둘만 키우기도 힘들다는 말을 쉽게 들어 왔습니다. ·자녀 때문에 더 이상 고생하고 싶지 않고 희생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잉태된 동생도 병원에다 버릴 만큼 강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습니다.



자녀를 위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포기한 부모를 만난 예수였기에 예수 자신도 이 세상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매사를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며 점점 이기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희생이란 단어의 가치를 새삼 아쉬워합니다.



성가정은 자기 가정만을 위한 성가정이 아님을 잘 보여줍니다. 성가정 또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희생된 가정입니다. 아들이고 하나밖에 없는 예수는 다 키워놓고 보니까 나이 들어도 장가들어 손주 안겨 줄 생각은 않고 며칠씩 들어오지도 않고 사람들 모아놓고 설교하는 걸 한다고 해서 한번은 찾아갔더니 홀대를 해 보냈습니다.



하긴 어린 때부터 끼가 있어서 오늘 복음 성서에서는 12살에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잃어버리고 성전에서 다시 찾았을 때 부모는 놀랍고 반가와ꡔ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ꡕ고 말하자 예수는 ꡔ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ꡕ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 눈에는 천하 불효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정이 성가정이었습니다. 가정도 자기 가족들만의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개방되어 있어야 합니다.



잘 보이는 벽에 걸어둔 십자가는 장식품도 아니고 집 지켜주는 부적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새롭게 하고 이를 위해서는 내 자신이 가정을 위한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함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가족간의 관계·가정간의 관계 그리고 세상을 향한 관계가 헌신을 통해서 거룩해져야 하겠습니다.



이런 관계는 곧 우리 가정을 하느님께로 향한 개방으로 안내하여 성가정을 이루어 줄 것입니다.












15.             성가정 축일 (다) 루가 2, 41-52 기도하는 가정을 이루자

                                                       김영식 신부



몇 년전 어느 주일 미사 중에 저는 너무도 흐뭇한 정경을 보았습니다. 바로 제 앞좌석에 행복하게 보이는 한 젊은 부부와 두 살 정도의 귀여운 아들이 재롱을 부리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무척 귀여운 아이였습니다. 저는 미사 중에 무심코 그 젊은 부부를 바라보았습니다. 아기 아빠는 미남에다 좋은 체격을 가진 신사였습니다. 그러나 어울리지 않게도 성당 안에서 더구나 미사 중에 시커멓고 테가 굵은 안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유심히 보니까 그 사람은 분명히 장님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반사적으로 그 옆의 아기 엄마를 보았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모습, 잘 빗은 머리, 화려하지 않으나 깨끗하게 입은 옷을 보니 보기에는 틀림없이 정숙하고 얌전하며 매력 있는 부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굴을 보는 순간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하게 얼굴이 얽었고 화상을 입었는지 군데군데 붉은 반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행복스럽고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인가 어둡고 걱정스러운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빠가 만약 눈을 뜬다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지금보다 더 불행할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나 아빠는 육안으로 광명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히 마음의 광명이 있었습니다. 옆에는 사랑하는 최고의 부인과 그 재롱둥이 자식, 더구나 그 마음 안에는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의 가정을 한번 살펴봅시다. 우리들의 삶은 공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또한 우리 부모님들이 창조한 사랑의 결실이며 열매입니다. 부모님들은 이 열매를 더욱 더 빛나게, 아름답게 나타내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고 계십니다. 아빠의 출근, 자식들의 등교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잠든 고요한 새벽에 곤히 잠자는 아빠와 자식들의 단잠을 깨울까봐 조심스럽게 아침 조반을 준비하는 어머니, 하루의 고된 일과 업무에 시달려 보기보다 더 늙은 아빠, 누구를 위한 고생입니까? 부모의 은공도 모르고 탈선하는 문제 학생들, 결혼하면 언제 보았다는 식의 자식들, 신문 사회면을 꽉 채우는 비행들, 누구의 잘못일까요?



우선 우리 가정을 한번쯤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너무 겉모양에만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는지요? 자식들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먹고사는 데 불편만 없으면 가정은 행복하고 원만한 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장님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그 아들은 무척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기가 성장하여 학교에 다니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학생의 부모님과 자기 부모님의 다른 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빠는 장님, 엄마는 곰보이니 열등의식을 안 가질 수가 없습니다. 자연히 문제아동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질을 갖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그렇게 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부모에 비해 하잘 것 없고 병신이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아낄 줄 아는 사람들이며 굳은 신앙으로 생활 속에 모범을 보여주는 기도하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그를 보고 “병신 아들, 병신 아들” 하며 조소할지라도 그 아이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큰 소리로 “난 너희들보다 더 사랑 받고, 행복한 부모님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부모님의 따뜻한 애정, 기도하는 모습,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이에 가슴 깊이 박혀있어 생활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저는 몇 해 전에 친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은 아버님이 안 계시고 엄마와 두 아들만 있는 집안입니다.



아버님은 6.25때 육군 소령으로 전사하셨고 어머님은 조산원으로 두 아들을 키웠습니다. 그 때 두 아들이 다 신학교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현재, 큰아들은 독일 유학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고 둘째는 신품을 받아 오늘도 본당 사목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전 그 가정에서 크나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또한 아들 모두를 하느님의 도구로 바친 어머님의 희생심이 어디에 있나를 알았습니다. 아침엔 일찍 일어나 아침 미사에 참석하고 취침 전에 함께 모여 저녁기도와 로사리오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저희 집하고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때의 일을 잊어버릴 수 없었습니다. 역시 이런 가정에서 훌륭한 하느님의 도구가 탄생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설날 또는 추석이 다가오면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의 절도 받고 재롱도 보고 싶을 것입니다. 이 가정에는 이러한 사실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습니다. 이웃집의 소란함과 대조적으로 쓸쓸함, 적막감, 이러한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신앙생활 때문입니다. 이 신앙생활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계속된 기도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도 재물과 돈만으로 행복될 수 없고 또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울 수도 없습니다. 오직 좋은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크리스쳔 가정답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렵고 짜증스럽고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기도로써 밝은 표정을 되찾읍시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어도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합시다. 엄마는 가정에서, 아빠는 직장에서 수시로 기도하며 아침저녁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습관을 기릅시다. 기도하는 가정만이 성가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쳔의 생활이며 “만민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이 미사 중에 성가정 될 수 있도록 열심히 간구합시다.















16.        성가정축일 <마태 2,13-15;19-23>(가) 모닥불 사랑과 화로불 사랑  

                                                          김현준 신부


  ‘아내가 집이다'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놀란적이 있었다. ’부부 사이에 제일 자존심을 세운다'라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놀랐었다,

 ‘아내가 집이다'라는 이 말은 48년간 결혼생활을 하신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내를 돌보면서 깨달았다는 고백의 말씀이다. 두 달 가까이 하루도 집에서 자지 않고 병실에 가서 아내를 돌보며 같이 있을 때, 아내는 무척 고마워했고 주변 사람들도 놀랐으나, 실은 아내를 돌보기 위해서라기보다 아내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집이 내 집이 아니라, 아내가 바로 내 집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더라는 것이었다.

 

성가정 축일인 오늘 마태오 복음에는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라는 구절이 네 번이나 반복하여 나온다.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알려줄 때,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일러줄 때이다. 요셉은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 두번의 일러줌을 그대로 실행한다. 요셉이 없는 ‘아기와 아기 어머니'라는 그림이 가능할까? 아기가 없는 아기 아버지와 아기 어머니가 가능할까?



"아내가 바로 집이다"



  아기와 아기 어머니, 아기아버지는 가정의 기본 구성요소이다. 이들은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공동체이다. 그 운명이 같은 공동운명체이다. 한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봄이 오면 같이 싹을 틔우고, 바람이 불면 같이 흔들리고, 눈비가 오면 같이 맞는 운명 공동체이다.

나자렛 성가정은 마굿간의 출생, 헤로데의 박해, 이집트 피신, 나자렛 귀환 등 고통스럽고 힘든 사건을 함께 겪어내며 운명을 같이한다.



동해안 최북단 K본당에 있을 때였다, 신자 6백여명의 시골 성당이었는데, 남편이 신자가 아니기에 여러 제약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활동하는 부인들이 있었다. 그 남편들이 참 고마웠다, 그래서 부부함께 모이는 모임을 만들고, 이름을 ‘미비회'라고 했다.

어미, 아비(집회 3,3)들이 함께 모인다는 뜻에서 끝글자 한자씩을 따서 지은 이름이지만 ’도둑 제발 저린다'고 그 비신자 남편들은 “저희들은 미비한 사람들입니다"라고 모임에서 인사를 하기도 했다. 한 달에 한번 정도 식사를 같이하는 단순한 모임이었지만 일년 후쯤 그 남편들은 모두 ‘미비한 사람들'이란 딱지를 떼고 성가정을 이루었다. 그 모임에서 이런 말을 했다.



가정은 운명 공동체"



부부간의 사랑이란, 연애할 때와 다른 사랑이 이어지는 것이지요. 연애할 때는 모닥불 사랑입니다. 그때는 불꽃이 센 모닥불 같은 감정이 오가기 때문에, 상대방이 다 보이지 않습니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마주 앉으면 모닥불의 불길과 그림자 때문에, 마주앉은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결혼한 후의 사랑은 화롯불 사랑입니다. 모닥불의 불씨들을 모아 화로에 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화롯가에 앉으면 맞은 편의 사람이 잘, 그리고 가까이 보입니다. 재로 묻어둔 화롯불은 춥다고 들쑤시지만 않으면 밤새도록 불씨를 유지합니다. 가정에서 화롯불을 들쑤시는 행위, 이를테면 상대방을 누구와 비교하지 않으면 그 불씨는 오래 갑니다. 서로가 화롯불의 재를 덮어주듯 서로의 단점을 덮어주고 다독거려줄수록 사랑의 불씨는 오래가고 따뜻한 성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도 서로를 존경하라는, 비교하지 말라는 뜻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사람이 가정에 성공하면 다 성공한 것이다. 가정에 성공하지 않고는 그 어떤 성공도 공허한 것이다. 자녀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자기 부모일 때, 그 가정은 성공한 가정이다. 가정은 인간성을 길러내는 ‘기초학교'이며, 신앙심이 싹트는 ’작은 교회'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선택에는 변경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변경할 수 없는 것도 있다. 혼인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다시 변경할 수 없는 선택이다. 따라서 그 선택이 최고가 되도록, ‘거기에 머물러' 그 자리가 최고의 선택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거기에 머물러' 살았다, 이리하여 ’나자릿 사람', '나지렛 성가정'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17.    성가정 축일        예수님의 성가정을 닮자

                                                             김상호 요한 신부



성탄 후 첫 일요일을 우리 교회는 성 가정 축일로 지냅니다.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이 이룬 가정은 평화와 기쁨 속에서 행복이 넘쳤습니다. 우리들도 이 가정을 닮아서 우리들 가정에도 평화와 행복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의 축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 인생은 참 기쁨이 무엇인지,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가정의 평화를 바라지만 사실로는 우리들의 가정이 만족할 만큼 평화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이 이루어 놓은 가정의 평화를 우리들도 배울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가정의 평화는 파랑새처럼 멀리서 운이 좋게 날아오는 것도 아니고 또 누가 나에게 선물로 주는 것도 아닙니다. 가정의 평화는 내가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객관적인 여건이 가정의 평화를 크게 결정한다고 말씀하시고 싶어합니다. 객관적 여건이란 즉, 좋은 가정과 훌륭한 부모와 충분한 경제적인 힘 등을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적으로 부여받은 여건입니다. 이런 객관적인 여건을 자기 힘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단지 주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여기서 생겨나는 질문은 객관적인 여건이 한 가정의 행복을 결정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부자의 자식들은 다 행복하고 권력가의 자식들은 다 우리보다 행복하더냐 라는 질문입니다. 객관적인 여건을 잘 이용하면 가정의 행복에 큰 도움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그 좋다는 여건이 오히려 독이 되어서 그만큼 가정이 더 파탄이 나는 것을 우리들은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좋아 보이는 여건도 또 우리가 보기에 나쁜 여건도 그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가정과 우리들 가정의 객관적인 여건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가정이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예수님의 가정보다는 부자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나라는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식민지 수탈을 당하고 있었음에 비해서 우리들은 자유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다.



성가정은 나쁜 여건 속에서도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가 최선을 다하여 살아간 결과 성가정을 이루었고, 우리들은 그보다는 좋은 여건 속에서도 서로가 최선을 다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엉뚱한 방향으로 노력한 결과 지금 이 정도로 내가 누리는 가정의 평화일 뿐입니다. 성가정을 이루는 올바른 방향으로의 노력은 하느님의 뜻이 너와 나 우리 가족들을 통하여 우리 가정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오늘 축일을 통하여 배우도록 합시다.




18.     성가정 축일 <루가 2,22-40>(나)     “참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기쁘게 고통을 겪고”                                                             김성배 신부





사람들 눈에는 격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강해 보인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고, 잘 참고 견디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통이나 슬픔 또는 모욕을 평온한 마음으로 참아 견디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강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참고 견디는 것은 자기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런 것들을 잘 참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감정을 다스릴 힘이 없기 때문에 감정이 이끄는 데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미워하고 원한을 품고 분노하게 된다.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힘이 있는 강한 사람이고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힘이 없는 약한 사람이다.



참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고린토1서 13장의 사랑의 송가에서 사랑의 첫째 특성을 참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1고린 113,14)

사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상대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 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조건 없이 아낌없이 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희생 위에만 꽃필 수 있다. 사랑의 크기는 희생의 크기로 측정된다. 희생이 더 클수록 그 만큼 더 위대한 사랑이 되고, 희생이 완전할 때 완전한 사랑이 된다. 참는다는 것은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이다. 많이 참는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희생한다는 것이고 그 만큼 많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참을성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를 희생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혀 참지 않는 사람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참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다. 참아야만 자기 기분에 상관없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친절할 수 있다. 참아야만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을 수 있다. 참아야만 무례한 사람에게도 예의바르게 대할 수 있고, 사욕을 품지 않고, 화를 내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참는 것을 괴롭지 않고 기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의 행복만을 원하고, 그의 행복만을 위해서 행동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에게 기쁨을 주는 기쁨만으로 만족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기쁘게 고통을 겪고, 사랑하는 상대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 사랑하는 상대에게 영광을 주기 위해서 기쁘게 모욕을 견딘다.

  

사랑은 강하다. 사랑보다 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랑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력해진다. 사랑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주게 한다. 한 마디로 사랑의 능력은 무한하다. 사랑은 바로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느님은 전능하시다.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무한히 사랑하시는 능력이다.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참된 힘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만이 사람을 착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냉혹한 이기주의로 차디차게 얼어붙은 사람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사랑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사람에게 내어 주시기 위해 당신자신을 버리고 비우시는 사랑의 극치이다. 이렇게 당신자신을 온전히 사람에게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완전히 자기를 바치는 사랑으로 응답한 분들이 계셨다.



이 분들이 바로 오늘 복음에 소개되는 대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부모로 선택하신 성모님과 성요셉이시다. 예수님은 지상생애의 대부분을 예수님, 성모님, 성요셉으로 이루어진 성가정에서 보내셨다. 성가정은 완전한 가정생활의 모범이다.

성가정에는 완전한 행복이 있었다. 가난한 살림이었고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더 할 수 없이 완전한 행복이 성가정을 채우고 흘러 넘쳤다. 그 것은 성가정에는 하느님께서 계셨고, 따라서 완전한 사랑이있었기 때문이다. 성가정에는 오직 사랑만이 있었다.



서로 상대방을 위해서 자기를 아낌없이 희생하고 바치고 내어주는 사랑만이 있었다.

예수님, 성모님, 성요셉 세 분 서로간에 오고가는 모든 눈길은 사랑의 눈길이었고, 주고받는 모든 말은 사랑의 말이었고, 모든 행동은 서로에게 기쁨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성가정에는 완전한 부부사랑과 완전한 부모사랑과 완전한 자녀사랑이 있었다.



가정의 모든 불행은 사랑의 결핍에서 온다. 사랑은 성실하게 사랑하는 남편, 충실하게 사랑하는 아내를 만든다. 사랑은 애정 깊게 보살피는 부모, 효성 지극한 자녀를 만든다. 사랑은 결점을 참아 주고 잘못을 용서하고 요구하지 않고 준다.







19.        성가정 축일 <루가 2,41-52>   행복은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봐요!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가정은 기본적인 사회요, 작은 교회」입니다.

신학적인 강론 말씀을 드리는 것보다, 가족 구성원들의 진솔한 사랑 이야기를 직접 듣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어느 시골 본당신부로 있을 때 교우들에게 편지를 써 오라 하여, 성가정 축일에 강론 대신 읽어준 적이 있었습니다. 가족간의 사랑의 편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드리는 편지입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는데 오늘 아침 당신이 불쑥 던진 말에 나의 마음은 왠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양 멍하니 창 밖만 바라다봅니다. 당신과 만나 결혼한지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지났군요.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결혼해 한집에서 살다 보니, 힘든 때도 많았다고 봐요. 타의든 자의든 아무렇게나 던지는 당신의 말이 저의 가슴에는 앙금으로 쌓이네요. 이렇게 펜을 들고 보니, 지금껏 살아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오네요. 당신은 언제나 돈, 돈 하는데 전 그게 못마땅해요. 물론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도 많이 쌓이겠지요. 그렇기에 돈이면 최고다, 안되는 일이 없다.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물론 돈도 있어야지요. 하지만 돈의 노예가 되다 보면 자기의 삶을 찾지 못하잖아요.

  

행복은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봐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자기 자신의 생활에서 만족을 찾아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해지고, 억만장자도 자기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아 불행하다고 느끼면 불행한 거랍니다. 행복의 기준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여보, 당신과 나는 같은 배를 타고 먼 미지의 나라로 항해하는 것과 같아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배 안안서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아옹다옹하면 결국 그 배는 파산에 이르고 말 것이예요.



가다 보면 험한 풍랑과 비바람 속과 같은 때도 없다고는 볼 수 없잖아요. 당신과 제가 배를 잘 운전해 가야만 우리 두 아이도 평화로운 가운데 정서적으로 잘 자라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우리 두 아이 착하고, 바르고, 예쁘게 자라 학교에서 우등생인 것을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자식농사는 백년농사」라는데,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당신은 욕심이 많고, 무슨 일이든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으로 생각을 하시는 데, 이것 좀 고쳐주세요. 여보 저의 소원은 당신 몸과 마음 건강하고, 자기 맡은 임무에 충실하며 모든 것 하느님께 맡기고, 우리 자녀 지금과 같이 잘 자라 주며, 하느님의



말씀 속에서 생활하고, 성가정을 이루어, 모든 가정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 소망이라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나, 이 세상에서 당신을 제일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은 당신의 아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당신의 아내가!”



다음은 고등학교 1학년 딸이 엄마께 드리는 글입니다.

  “텅 빈들의 앙상한 가지들만이 12월의 싸늘함을 더해줄 때 나의 어머니는 무슨 걱정으로 하루를 여실까요? 하늘에서 눈꽃이 내릴 때면 마냥 좋아만 하는 딸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희들을 위해 애쓰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글로써 잠시나마 위로해 드릴까 합니다.

  벌써 14년이란 세월이 흘렀군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론 여자의 힘만으로 수많은 날들을 오직 자식들만을 위해 희생하시는 어머니!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지요. 그 날도 어김없이 어머니는 서둘러 일터로 향하시다가, 꽁꽁 얼어붙은 내리막 길에서 넘어져 어머니의 몸은 그만 피멍으로 얼룩져 버렸고, 주위분들의 부축하에 간신히 일어서게 되셨을 때, 집에서 쉬어야 한다는 말에도 개의치 않으시고 아픈 몸을 이끌고 일터로 가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다 늦는 날이면 주인의 따가운 눈총을 잘 참아 내셨던 나의 어머니!

  하루는 멀리 떨어진 외딴 곳으로 나물 캐러 가셨을 때, 한 뿌리라도 더 캐시려다 그만 막차를 놓치고는 무섭고 험한 길을 한밤중에 몇 시간이나 걸어오신 적이 있지요. 그때 나는 평소에도 몸이 약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갖가지 나쁜 상상만을 하게되었고,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지요. 밤 늦게서야 다리가 아파 절룩거리며 걸어오시는 어머니가 너무도 초라해 보여, 나도 모르게 화를 내며, 왜 이렇게 늦었냐는 나의 철부지 같은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녁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 날밤 저는 눈물이 뒤범벅된 채로 잠드신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며, 진정으로 어머니의 가슴속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은 나물 한 뿌리의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대한 강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시의 여유 없이 지난날을 홀로 두 사람 몫을 일해 온 대가로, 지금은 지칠대로 지친 어머니는, 밤이면 더욱 괴로워하셨고, 가끔 앓는 신음소리에 저는 잠 못 이루고 어머니께 괜찮으시냐는 물음으로 아픔을 대신할 수밖에 없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성모상 앞에 촛불을 켜고 함께 기도드릴 때, 그 동안의 삶의 고통들을 잊으시고 행복해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이제는 저도 행복을 조금은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자연의 법칙 속에서 저도 조금은 생각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고, 이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사는 사람들, 참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보이는 것에만 현혹되어 사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살아야 할 어머니의 고마움과 희생을 생각하며 성서의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귀절을 가슴깊이 묵상하면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딸, 어머니께 착한 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딸 올림!”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들의 글을 통해 여러분들이 어떻게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지 일깨워 드렸습니다. 교우 여러분, 부디 주님을 가장으로 모시고 주님의 뜻을 가족 안에서 이루도록 노력하며, 주님께서 우리 모두 의 가정에 축복과 은총을 주시도록 기도드립시다. 새해에 주님의 축복 많이 받으십시오.



20.                성가정 대축일 <루가 2,41-52>         소년 예수

                                                          함세웅 신부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교회는 이 축일을 예수 성탄 다음 주일에 지내도록 새 축일표에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성가정이 얼마나 행복스러웠느냐, 또는 돈이 많았느냐 하는 등의 우리의 관심사를 하나도 말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탄생되었고, 어떻게 공생활을 시작하여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무엇 때문에 죽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기술해야 하는 경우에만 마리아와 요셉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복음사가의 진의나 성경의 참뜻을 곡해하는 갈라진 형제(많은 프로테스탄트 신도들)들은 마리아와 요셉의 위치를 필요 이상으로 낮추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예수님이 공생활 중 제자들을 가르치셨을 때에 “당신의 어머니는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하는 탄복이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하고 대답하셨습니다(루가 11,27-28 참조)

  

또 다른 경우, 예수님께서 전교하시던 어느 날, 성모님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뵈려고 왔을 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입니까?"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시며 내 형제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내 형제이며 자매이며 어머니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오 12,45-50 : 마르코 3,31-35 : 루가 8,19-21)

  

더더욱 오늘의 복음 말씀(루가 2,41-51)은 예수의 소년 시절의 행위를 말해 주고 있는데, 예수를 잃고서 걱정하던 중 3일만에 다시 찾아 반가와 하고, 또 꾸중하는 부모님께 '어찌해서 나를 찾았습니까?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겠습니까?"하며 대답하는, 어찌 보면 무례한 자녀의 태도에 우리는 약간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에서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성모님이나 요셉 성인을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논증을 삼는다면, 그것은 상식을 벗어난 사람의 억지이며, 복음기자들의 뜻과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유치한 생각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위의 모든 성경 말씀은 인간적, 혈연적, 가정적인 관계보다 영신적 신앙의 관계가 더 고귀하고 차원이 높다는 것을 일러 주기 위할 따름입니다. 부모님에 매여 있고, 친척에 매여 있고, 가정에 매여 있는 그 예수였다면 그는 마리아의 예수, 나자렛 한 가정의 예수일 뿐이지, '나'의 예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나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예수'는 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탄생한 예수라고 해서, 그를 꼭 이스라엘인이라고만 주장하려는 그런 식의 곁과도 나을 수 있읍니다.

  

그러나 오늘 축일의 참뜻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가정의 행복을, 축복을 우리에게 말해 주기 위함입니다. 가정도 신앙도 모두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 둘은 항상 상반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상반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어느 것을 택하느냐하는 문제에 '하느님의 뜻'을 우위에 놓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를 떠나 도망나간 예수를 생각할 때 요셉과 마리아는 안타까왔고, 또는 때려 주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예수님편으로 볼 때 부모님들이 걱정하시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떠나 속을 썩여야 했던 그 예수님이, 오늘 축일의 주인공입니다. 그에게는 또 다른 가치관이 있었고 더 높은 세계가 있었기에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가치관을 인정하고 그래서 성당에 모여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더 큰 뜻을 품고 자질구레한 것을 잠깐 뒤에 두고 말씀입니다.



오늘은 이번 해의 끝 주일입니다. 그리고 곧 새해가 옵니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의 차이, 그것은 6월 30일과 7월 1일의 시간 차이와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12월 31일은 나를 엄습합니다.

묵은 때를 벗으라는 속으로부터의 외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다짐을 하라는 1월 1일의 명령이 있습니다. 그래서 달력을 바꾸면서 희망을 갖고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줄달음치며 또 주일이면 꼭꼭 우리의 발걸음이 성당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계의 반복과는 다른 의식적인 나의 행위이기에 값어치 있고, 그것이 곧 신앙입니다.

  반복하고 늘 새로 시작하는 자세가, 기도하는 사람의 몸가짐이기 때문입니다.















21.                성가정 축일 (가해)   가정을 존경하자  

                                                           강길웅 신부




벌써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의미깊은 이 날에 교회 전례는 가정에 대해서 묵상하도록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 탄 다음 주일이 항상 성가정 축일입니다.



모든 크리스천 가정은 성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자렛에서의 요셉의 가정처럼 예수님이 그 중심이 되고, 요셉과 같은 아버지, 마리아와 같은 어머니의 성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정이야말로 하느님의 모습과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데서 오는 축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즉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축복과 은혜가 되며, 반대로 부모를 무시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행과 저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모는 하느님의 분신입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예절 중의 예절이며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고 또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 비일비재하니 부끄럽고 통탄스러울 뿐입니다. 부모에게 효도를 거부한다는 것은 자신이 인간이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일입니다.



어떤 자매는 배움이 많아서 똑똑하고 또 신앙 안에서도 열심한 데, 그런데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모시지 않고 있습니다. 시내 변두리에 방을 하나 얻어서 거기서 지내게 합니다. 남편이 당신의 어머니를 모시고 싶어도 부인이 반대하니까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매가 남보다 더 배우고 더 열심히 봉사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위선에 불과합니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남편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해 주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붙이고 싶습니다. 즉 모든 남편들은 자기 아내를 존경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존경받는 남편이 되며 또 그 자녀들이 존경받는 사람이 됩니다. 아내를 무시하면 남편이 무시받고 또 무시받는 아버지가 됩니다.



특히 부모는 자기의 어린 자녀들까지도 존경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존경받는 가정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 교육도 책임감 있게 지도해야 합니다. 어떤 부모는 무슨 학원 보내기 위해서 자녀를 교리나 미사에 빠지게 하는데, 참으로 큰일낼 부모들입니다. 하느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가 하느님을 모독해서는 안됩니다.



부모가 하느님을 참되게 공경하면 자녀가 그 부모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다 그렇게 보고 들으면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하느님을 무시하면 그 자녀들도 자기 부모를 무시합니다. 역시 그렇게 보고 들으면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자녀들 앞에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를 잘 분별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믿는 것만큼 믿음의 은혜를 받고 존경하는 것만큼 존경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도 받습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로써 요셉과 마리아를 들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과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존경하시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찮은 인간을 존경하신다는 말이 어폐가 있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나,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하느님의 법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하느님이 친히 그 인생을 존경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가정이나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하고 말을 잘 들으며 예절이 바르면 선생이나 부모도 그를 존경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지 않으면 그 가정은 믿는 가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둘이 나 셋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당신 친히 그곳에 머무시겠다고 하셨는데 함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가정엔 주님이 머무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거기 안 계신다면 그 가정은 이를테면 지옥입니다.



지옥 같은 세상을 사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남편이 원수고 아내 가 원수며 자식이 원수고 부모가 원수입니다. 이런 가정은 남편이 있어도 아내가 외롭고 아내가 있어도 남편이 외롭습니다. 자녀가 있어도 부모가 외로우며 부모가 계셔도 자녀들이 외롭습니다. 우리가 바보처럼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정말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특히 우리들 가정 안에 머무시려고 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이 영광을 받고 싶어하시며 또 그 자리를 빌어서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신 성 가정을 이루도록 합시다. '가화만사성'이라 했습니다. 성가정을 이룰 때 내년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뜻대로 은혜롭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22.           성가정 축일 (루가 2,41-52) (다)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예수 소년기로써 신약성서 가운데 오직 루가 복음서에만 나옵니다.

예수 시대에 열세 살 이상되는 남자들은 과월절, 오순절, 초막절, 이렇게 세 차례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했습니다.

 예수는 열두 살 난 소년이었으므로 순례할 의무가 없었지만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 소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남았으나 예수님의 부모는 그 사실을 모르고 하룻길을 갔다가 뒤늦게야 알고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서 사흘만에 성전에서 잃었던 아들을 찾았던 것입니다.



소년 예수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 앉아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면서 율법 교사들과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성전에서 소년 예수를 보고  "얘야, 우리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 보아라, 네 아버지와 내가 애타게 너를 찾았단다" 하자 소년 예수는 "왜 찾으셨어요?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어요?" 하면서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은 신약성서에 수록된 예수님의 맨 첫 번 말씀이요 소년 예수께서 발설하신 단 한가지 말씀입니다. 소년 예수께서는 세상의 아버지(48절의 '네 아버지')보다 하느님 아버지(49절의 '내 아버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머니만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새겨 두었습니다.



소년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가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지냈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직 루가 복음서에만 실려 있는 예수 소년기는 예수님에 대해서 두 가지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소년 시절부터 놀랄만큼 지혜로우시고 탁월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지혜를 소유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소년 예수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율법 교사들과 담론을 벌이면서 그 총명함과 탁월함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46.47절).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네 아버지와 내가 애타게 너를 찾았단다" 하자 소년 예수는 하느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서기 27년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예수님이 나자렛 회당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가려고 사람을 들여보내 아들에게 면회왔다고 전했습니다. 예수는 오랜만에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 보시오,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이런 이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마르 3,33-35). 이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삶으로써 맺어지는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분의 섭리에 의탁하는 삶을 통해서 성가정의 모범을 보여주신 마리아 요셉의 가정을 본받아 우리 그리스도인 가정 모두가 성가정이 되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우선 그리스도인 가정의 모든 어머니들은 뜻밖의 일을 만날 때마다 놀라면서도 동시에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간 사려 깊은 성모님의 처신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을 부모의 소망을 채우는 도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성모님처럼 그들을 이해하고 끝까지 신뢰하는 모습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영신적 가정 관계를 가꾸어 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자녀들의 몸과 마음이 소년 예수처럼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모든 일에 부모에게 복종하시오. … 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기죽지 않도록 들볶지 마시오"(골로 3,20.21).












23.                  성가정 축일 (루가 2,41-52)   아버지의 집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예수 소년기로써 신약성서 가운데 오직 루가 복음서에만 나옵니다. 예수 시대에 열세 살 이상되는 남자들은 과월절, 오순절, 초막절, 이렇게 세 차례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했습니다. 예수는 열두 살 난 소년이었으므로 순례할 의무가 없었지만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 소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남았으나 예수님의 부모는 그 사실을 모르고 하룻길을 갔다가 뒤늦게야 알고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서 사흘만에 성전에서 잃었던 아들을 찾았던 것입니다.



소년 예수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 앉아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면서 율법 교사들과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성전에서 소년 예수를 보고 “얘야, 우리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 보아라, 네 아버지와 내가 애타게 너를 찾았단다” 하자 소년 예수는 “왜 찾으셨어요?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어요?” 하면서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은 신약성서에 수록된 예수님의 맨 첫 번 말씀이요 소년 예수께서 발설하신 단 한가지 말씀입니다. 소년 예수께서는 세상의 아버지(48절의 ‘네 아버지’)보다 하느님 아버지(49절의 ‘내 아버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머니만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새겨 두었습니다. 소년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가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지냈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직 루가 복음서에만 실려 있는 예수 소년기는 예수님에 대해서 두 가지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소년 시절부터 놀랄만큼 지혜로우시고 탁월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지혜를 소유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소년 예수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율법 교사들과 담론을 벌이면서 그 총명함과 탁월함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46.47절).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네 아버지와 내가 애타게 너를 찾았단다” 하자 소년 예수는 하느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서기 27년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예수님이 나자렛 회당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가려고 사람을 들여보내 아들에게 면회왔다고 전했습니다. 예수는 오랜만에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 보시오,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이런 이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마르 3,33-35). 이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삶으로써 맺어지는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분의 섭리에 의탁하는 삶을 통해서 성가정의 모범을 보여주신 마리아 요셉의 가정을 본받아 우리 그리스도인 가정 모두가 성가정이 되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우선 그리스도인 가정의 모든 어머니들은 뜻밖의 일을 만날 때마다 놀라면서도 동시에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간 사려 깊은 성모님의 처신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을 부모의 소망을 채우는 도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성모님처럼 그들을 이해하고 끝까지 신뢰하는 모습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영신적 가정 관계를 가꾸어 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자녀들의 몸과 마음이 소년 예수처럼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모든 일에 부모에게 복종하시오. … 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기죽지 않도록 들볶지 마시오”(골로 3,20.21).     ---------서울대교구 홍보실

 24.                  성가정 축일 (루가 2,41-52) (다)  마음 항아리



미국의 유명한 경영대학원에서 어떤 신부님이 시간 쓰는 법에 대해 특별 강연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항아리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주먹만한 돌들을 집어넣기 시작했습니다. 항아리 위까지 돌이 차자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네” 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이 이번엔 자갈을 항아리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항아리를 흔들어가며 채우니 자갈이 계속 들어갔습니다. 항아리 위까지 차자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이제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다시 “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이 이번에는 모래를 붓기 시작했습니다. 항아리 위까지 차자 다시 물었습니다. “이제는 가득 찼지요?” “네” 학생들이 답했습니다. 신부님은 다시 물을 항아리에 가득 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신부님은 물었습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보여드린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학생 중 하나가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스케줄이 꽉 찼다 해도, 언제든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닙니다.” 신부님이 대답했습니다. “자갈이나 모래를 먼저 집어 넣으면 큰돌은 결코 집어 넣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 속의 큰돌, 즉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우선적으로 여러분의 마음의 항아리에 집어 넣으십시오.”

  

우리들 삶의 큰돌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가족이 우리의 큰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의 항아리에 그 큰돌을 먼저 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을 위해 시간을 쓰고, 남에게는 친절하게 대하지만, 오히려 가족에게는 시간을 아끼고 함부로 무시하기도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리라고 강요합니다. 자갈, 모래들을 먼저 집어 넣다가 항아리가 가득 차버려 큰돌은 넣지 못할 텐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가장 큰돌, 우리 마음의 항아리에 제일 큰 자리를 차지해야 할 큰돌은 주님임을 우리는 내심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님을 마음 속에 먼저 담는 일을 잊기 일쑤입니다. 



  요새 우리 학생들 사이에서는 삼행시 짓는 것이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세 자로 된 말의 머릿자를 따서 그 글자로 시작하는 문장을 짓는 거지요.  그런데 지난번 우리 학생 하나가 ‘가족’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FAMILY로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라는 문장을 지었습니다. 참으로 멋지지요?



  가족에게 ‘사랑합니다’ 라고 말해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안 납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 주님도 걸핏하면 마음 항아리에서 꺼내 놓았었지요.  소중한 것을 먼저 기억하는 지혜로 사랑 고백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리고 주님, 사랑합니다.        

                                             장영희 마리아 /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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