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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강론모음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14:47
분 류 성탄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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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탄 대축일 밤미사 ”
 

   예수 성탄 대축일



 15.            예수 성탄 대축일 (가해)    세상에 오신 하느님      

                                                       강길웅 신부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 년 동안 기다렸던 메시아가 드디어 다윗의 고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다윗의 고을은 베들레헴으로서, 베들레헴은 다윗의 출생지이며 고향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이었습니다. 유다는 본래 약소국의 미미한 존재였지만 다윗에 의해서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제압하여 통일 국가를 이룩하였고 그래서 만방에 그 위세를 떨쳤던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또 신앙심도 깊었던 왕이었으며 진정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겸손한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의미에서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후대 임금들은 하나같이 무능하거나 부패한 왕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솔로몬도 타락된 삶 때문에 자식의 대에 이르러서는 나라가 두 동강이 나 버렸고 그리고 차례로 멸망하게 됩니다. 백성들은 그래서 못난 왕들 때문에 실망하고 또 실망했으며 망조가 든 나라 꼴을 보면서 백성들은 다윗과 같은 새 왕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 신앙의 시초가 됩니다.



그 후 여러 예언자가 등장하여 메시아 시대를 예고하였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처녀의 몸을 빌어 오신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수백 년 동안 기다려도 다윗처럼 강력하고 힘있는 왕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셨습니다. 아 무도 예기치 못했을 때 그분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메시아를 알아본 자들이 없었습니다.



오늘 천사가 목동들에게 그랬습니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 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아, 얼마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습니까. 드디어 구세주께서 오셨고, 드디어 메시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왕이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실 때문에 속았으며 그러기 때문에 아직도 자신들 안에 그리스도를 영접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아이러니였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서도 하느님을 배척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현세적인 의미에서의 왕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자로만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눈이 닫힌 채 엉뚱한 메시아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지만 안 믿습니다. 오히려 무시하고 깔봤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우리 마음을 다윗의 고을로 만들고, 또한 베들레헴의 마구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탄생하시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작고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수백번 오신다 해도 그 인생 안에 탄생하시지 않습니다. 성탄이 와도 성탄인 줄을 모르고 새 날이 와도 새 날인 줄을 모릅니다.



어떤 노름꾼이 노름에서 해방되어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지난날의 잘못된 삶을 고백하면서 웃다가 울다가 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해 주셨습니다." 그는 정말 다시 태어났으며 예수님이 그 사람 안에서 탄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탄생하시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성탄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이 기도를 하고 또 얼마나 많이 봉사를 했느냐 하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보다 일차적인 문제는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할 수 있는 겸손과 그리고 회개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회개가 있다면 어떤 살인 강도도 구원받습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처럼 그야말로 논스톱으로 천당에 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공로가 많고 또 열심히 살았다 해도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그 겸손과 회개가 없다면 주님이 들어오라고 해도 안 들어갑니다. 막말로 아니꼬워서 안 들어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듯이 우리도 그처럼 내려가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춰서 회개하는 자 안에서 특별 한 의미로 태어나십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세상을 구하러 오셨다 해 도 그가 진정 작은 마구간이 되지 못한다면 주님은 올해도 그 안에 탄생하시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믿음의 기쁨과 수고가 물거품이 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작은 자(베들레헴)가 되고, 또 우리 모 두 낮은 자(마구간)가 되도록 합시다. 그때 우리는 아기 예수님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참되게 영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복된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22.              성탄절 강론   (다)  희망의 성탄                신은근 신부





사람들은 모이면 누구랄 것도 없이 걱정과 개탄을 쏟아낸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 많은 돈들은 어디로 갔는지 한다는 사람들은 무얼하고 있는지 불만의 소리는 끝이 없다. 사회전반에 걸쳐 불안이 깊게 자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내년을 생각하면 누구나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이런 와중에서 우리는 성탄절을 맞고 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길목에서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오셔서 무얼하실 것인가. 다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는 그분께 우리는 무엇을 희망하며 청해야할 것인가. 새천년을 넘기면서 우리가 해야 할 과제다.



첫째는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다. 역사 안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셨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셨고 반신 불수를 일으키셨다. 사탄을 몰아내셨고 문둥병자에게 새 삶을 되찾아 주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힘을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이제 그 하느님의 힘과 권능을 다시 우리 안에 심어주시길 청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음을 드러내야 한다. 불평을 넘어 신뢰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음을 드러내야 한다.



둘째는 희망이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 어린이는 그 자체가 희망이며 기쁨이다. 어린이는 누구나 믿고 신뢰한다. 어떤 가능성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다. 당신께 희망을 두는 사람을 돕기 위해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어린이의 모습을 지닌다면 희망은 우리 안에서 자란다. 그러니 몸은 어른이더라도 어린이의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은총이다. 그런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을 희망의 눈으로 바꿀 수 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는 여러분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입니다. 오늘 밤 구세주께서 이 고을에 태어나셨습니다. 복음에서 천사는 목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밤을 새우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목자들은 누군가. 신앙을 지키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그러니 두려워 말라는 천사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말씀이다. 그리고 두려움을 떨쳐버릴 이유는 구세주께서 오셨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니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일상사 안에서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며 사는 모습이기도 하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기쁜 성탄절이란 뜻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이렇게 성탄절엔 기쁨을 나누었다. 그런데 올해는 이 말에 힘이 없다. 나눌 기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탄절이 기쁜 이유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올해도 진정 기쁜 성탄절임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기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기쁜 것이다. 나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기에 힘이 없는 것이다. 다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희망을 주시길 오시는 예수님께 청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는 성탄절이 되어야 한다. 현실 자체는 불안하지 않다.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없기에 불안을 느낄 뿐이다.



아기 예수님처럼 다시 태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은총을 성탄절에 청하자.












 23.          예수성탄 대축일 : <사설> 거룩한 사랑, 거룩한 변모





영광의 성탄 대축일이 왔다, 죄악에 물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사랑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하여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맞는다. 지금 온 누리에 구세주의 구원의 은총과 평화가 넘쳐흐르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가 있으셨기에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 멸망의 늪을 헤치고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들어섰다. 예수 그리스도는 강렬한 생명의 빛을 죄인인 우리들에게 비춰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후에 우리는 슬픔도, 절망도, 증오도, 탐욕도 분쟁도 극복하고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 될 것을 다짐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어야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지만 피조물인 우리들 인간으로 오셨다. 그분은 인간 위에 군림하지 않고 연약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셨다. 그 분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29)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가. 그분의 멍에를 메고 배우고 있는가.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의 부담을 얼마나 덜어주고 있는가. 가난과 질병과 억압 속에 허덕이는 우리들의 소외된 이웃과 사랑으로 하나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일치하지 못한 채 미사 예절 속에서만 그분을 만나는 형식적인 신앙인이 되고 말 것이다,



 둘째, 우리는 성탄 대축일을 맞아 낮은 곳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야 한다.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초라한 말구유는 그분의 지존하신 신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분은 공생활 때에는 머리 둘 곳도 없는(루가 9,58) 나그네셨다. 오늘날 일부 신앙인들이 편안하게 살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미사에 참례하는 것과는 사뭇 동떨어진 삶을 예수 그리스도는 사셨다. 스승은 온유하고 가난한데 제자들은 거만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가.

  

특히 요즘 우리 사회는 권력을 쥔 사람,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들의 위선적 행각이 폭로되면서 많은 국민이 경악하며 허탈 상태에 빠져 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참극을 빚었고, 불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그것을 썼으며, 권력자에게 돈을 대준 대가로 거액의 이권을 챙긴 사람들이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은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그런데 범법자들이 다수 서민들의 진실한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행위를 했기 때문에, 그 충격파가 전국을 휩쓸고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전직 대통령이 2명이나 구속되고, 검은 돈과 관련된 정치인들의 가면이 벗겨지는 충격 속에서, 분노와 탄식을 금하지 못하는 선량한 국민들을 위로해야한다. 이 스산하고 캄캄한 비자금 정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둠을 몰아내는 빛으로 오신 것처럼, 이 땅에 법과 정의와 양심을 되살리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도록 위정자들을 독려하고 국민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줄 수 있어야 하겠다.



  셋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기 전에 참회해야 한다.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성탄 메시지에서 전직 대통령의 구속사건을 거론하면서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 13, 12)라는 말씀을 인용한 후 "생각해보면, 역사적 의미를 지닌 이 기회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지적했다.

김 추기경은 이를 부연하여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바로 섬으로써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해석했다,

  

우리는 큰 시련이나 재앙을 겪을 때마다 우리 죄를 뉘우치고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빈다. 우리는 구속된 전직 대통령들이나, 떳떳하지 못한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들에게 무한정 돌을 던질 수는 없다, 그들은 권력에 눈이 어두워지기 쉽고, 돈에 약한 우리들 인간의 약점을 좀더 많이 가졌을 뿐이다, 우리는 그들을 보복과 단죄의 차원에서 응징하기보다는 법과 양심에 따라 처리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 속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성탄 대축일을 맞아, 우리들은 그분처럼 사랑하고, 그분처럼 낮은 곳으로 임하면서, 그분을 맞기 전에 참회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셨다. "여러분은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빛은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습니다."(에페 5,7-9)











 24.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미사 마태 1, 1-25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택시 기사들을 보면 “시간이 금”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러나 요즈음은 “시간은 생명이다”로 바뀌게 되었다. 의사의 왕진이 늦어서 응급치료를 못 받으면 곧 죽게되는 일이 많으니 어찌 시간이 화급하지 않은가?



우리는 곧잘 시작이 없다, 촉박하다, 지루하다고 한다. 뚜렷한 개념도 없으면서 시간에 대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시간은 쉬지 않고 계속 흘러 그야말로 인정사정 없이 가고 움직이고 변하고 있다. 이래서 우리는 흐르지도 변하지도 않는 시간을 생각하게 되고 갈망한다. 그래서 젊음이, 사랑이, 행복이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되기를 갈구한다.



영원에 대한 갈구인 것이다. 영원은 시간처럼 가고 오는 그런 과거나 미래, 장단이나 변화가 없다. 오직 오늘만이 있을 뿐, 항존(恒存)하는 것이다. 시간은 영원의 한 부분도 영장도, 더구나 단위도 아니다. 시간은 동적이고 다수이고 찰나적인데 비해, 영원은 정적이고 단수이고 영구적이다. 따라서 불변하다. 시간은 끝도 있고, 매듭으로 이어지는데, 영원은 한도 끝도 매듭도 없다. 시간을 아무리 합쳐도 영원이 될 수는 없다. 또 시간은 나눌 수 있지만 영원은 하나라서 시간으로 재거나 산출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 살다가 내일 없어질 순간의 삶을 사는 이른바 촌각충(寸刻虫)이다. 영원을 바다라고 하면 시간은 그 바다 위에 뜬 배와 같다. 이제 영원이 시간 안에 들어오는 불가능한 일이 놀랍게도 성사되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신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강생이다.

하느님의 지혜와 전능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일을 이룩해 놓으신 비사(秘事)다. 이처럼 하느님에게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고 성사시킨 데에는 꼭 한가지가 작동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어린 것에 대한 엄마의 거동을 보면 꼭 바보처럼 되어 보이듯이 하느님의 사랑도 전화력을 갖는다.



사랑하는 이는 그 사랑의 대상 앞에서 강하되고 무능해진다. 그 대상이 되지 못해 죽고, 되어서도 죽는다.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람이 되시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사람을 끝가지 사랑하다 못해, 또 그렇게 사랑하느라 죽으신 것이다.

오! 하느님의 죽음이여! 사랑의 극한이요, 극치가 아닌가?

그렇게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이라 한다. 이런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를 믿고 사랑하겠는가!











25.          사랑의 메시지 (김정수 신부 강론집 「나해」)에서



아기 예수님의 눈길

오늘 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련한 우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시려고 이 세상에 태어나신 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신 이래 예언자를 통해 단신의 구원의지를 펴 오셨으나, 당신의 성자를 직접 보내시어 전 인류 구원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몸소 개입하시어 죄악의 그림자로 그늘진 인간의 생애를 완전한 당신의 창조물로 만드시기 위해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온 천하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그것도 고대광실(高大廣室) 드높은 궁전이 아니라 동물 우리 속에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로써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하늘에서 단 한마디만 말씀하시면, 모든 인류가 넉넉히 구원되고도 남을 일을 직접 당신 아드님을 우리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내려보내신 하느님의 뜻하심을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류를 창조하신 이래 인간들의 행위가 죄로 타락할 때면, 참다 못하시어 응징을 하시면서도 구원을 약속하신 자비의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 가운데 오시는 이유는 단 한 마디 표현해서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사랑을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 인간에게 몸소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허구이며 위선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확연히 심어주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택하신 곳은 권력과 부를 거머쥔 지배층이 아니라 권력이나 부와 거리가 먼 빈곤하고 소외된 계층이었습니다.

구유 위에 누우시어 맑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묵상하며, 우리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이웃과 굴절된 사회 정의 때문에 억울한 희생을 강요당하는 사람들, 당장 의식주도 해결할 수 없어 거리를 헤메는 이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메마른 인정과, 입으로만 사랑을 떠벌리는 우리의 위선을 보시는 아기 예수님의 눈동자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이 밤은 흥정망청 먹고 마시는 밤이 아니며 고성방가로 거리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밤은 결코 아닙니다. 차분히 우리 마음을 정돈하여 우리에게 오신 사랑의 아기 예수님께 감사의 예를 드리고, 불행을 당하고 있는 우리 이웃에게 무관심했던 우리 자신을 자성하며,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평화와 가호를 비는 밤이 되어야 합니다.



I.M.F라는 경제적 한파를 겪으면서 많은 부모들이 양육을 포기하여 거리를 헤메고 있는 어린아이들과 부모의 사랑 없이 보호 시설에서 외롭게 이 밤을 보내고 있는 아기 예수 또래의 아기와 어린이들의 슬픈 눈망울을 떠올리며, 그들의 눈동자에서 아기 예수의 눈동자를 발견할 수 아는 사랑과 신앙의 안목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우리 마음에 사랑을 심어주러 오신 주님의 모습을 보려면 먼저 고통받는 우리의 이웃과 버림받고 눈물이 맺혀있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이 땅 위에서 펴시려고 오신 아기 예수 앞에서는 권력과 경제적인 부가 우선하는 인위적인 사회 정의는 한낱 물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실천하는 사랑을 몸소 보여 주려고 오시는 주님을 본받고 우리 이웃에게 주님 사랑과 평화를 심는 새로운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 저희는 당신께서 이 세상에 사랑과 평화를 심어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으며, 죄악에 오염된 저희를 깨끗하게 하시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음을 잘 알고 있나이다. 오늘 밤에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티없이 맑으신 마음이 보잘 것 없는 저희들의 거울이 되시어 저희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 주시며, 저희 이웃에게 당신의 사랑과 평화를 전파하는 참다운 일꾼이 되게 하소서.

사랑이 깊으신 성모 마리아님,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를 낳아주셔서 감사드리나이다.

저희도 성모의 자녀가 되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 있게 도와주시고,

하느님께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26.         선포와 봉사 (강론길잡이1 「나해 대림절·성탄시기」)에서 

                                              이제민 신부 



        1. 인간의 탄생 - 어른들에게 전하는 아기의 메시지



인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행복과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 지금의 처지가 어떠하기에 인간은 거기서 벗어나 구원되기를 원하는 것일까? 구원을 갈망하면서 인간은 어떤 처지에 놓여지기를 바라는 것일까? 새로운 처지에 도달한 인간의 구원된 모습은 어떤 모양을 띠고 있을까? 성탄은 이런 물음에 대하여 답변을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성탄 날, 그리스도인은 인류가 갈망해 오던 구세주께서 오셨다고 기뻐한다. 아기 예수는 구원된 인간의 원형인 ‘새 인간’이다.



그런데 구원의 이 기쁨을 해마다 노래해왔건만 세상은 나아진 것 같지가 않다. 성탄을 축하하는 민족의 수는 해마다 늘어만 가는데, 축배의 잔에는 구원을 체험한 인간의 기쁨이 아니라 인생을 즐기려는 인간들의 탐욕이 가득하다. 범죄는 늘어만 가고 인간의 마음은 온갖 고민으로 속박당하는 것 같다. 이 세상 어디서 구세주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을까? 어디서 우리는 가난이 되어오신 아기 예수의 숨결을 들을 수 있을까?



        2. 아기와 어른



세상이 참 기쁨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구세주가 찬란한 옥좌에 앉은 대왕의 모습이 아니라, 초라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구세주라면 어쩌면 막강한 왕으로 왔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인간은 강한 것(강력한 정부, 강력한 교회)으로부터의 지배는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약한 존재를 무시하고 지배하려는 힘의 논리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세주가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인류가 갈망하던 구원이 이 아기에 달렸다고 믿기에는 그분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구원의 신비가 주어져 있다.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 존중받는 날, 인류는 구원을 체험할 것이다. 화려함과 강함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 날, 인류는 구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류는 구세주 아기의 비참함과 무력함에는 아랑곳 없이 비정할 정도로 능력 있는 어른의 눈으로만 주님의 탄생을 바라보았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어른들의 눈에는 성모님의 난처한 처지나 가난한 요셉의 입장, 아기 예수의 처량함은 보이지 않고 다만 그 아기 예수가 그들의 구세주라는 것만이 보였다. 하느님이 무력한 아기 예수로 오셨다는 사실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다만 그들을 구원해 줄 구세주가 오셨다는 도그마만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직업과 힘을 뽐낼 수 있는 화려한 잔칫상을 차려놓고 그 앞에서 성모님도 요셉도 흥겹게 즐기며 낭만적인 밤을 함께 지새우기를 바랐다. 구세주 탄생의 노래를 부르면서도 구원을 체험하지는 못했다.



이리하여 2천년이 넘도록 인류가 성탄을 기념해왔지만 세상은 으레 능력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베풀어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돈과 직업 가진 자들로 세상은 다스려지고, 실업자나 무능력한 자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직업과 직무를 장악한 능력 있는 자들이(교회 안에서도 돈 없는 자는 회장직을 맡기가 어렵다) 무력하고 없는 자들 위에 군림한다. 노인, 어린이, 청소년, 실업자 등 무능한 사람들의 운명은 힘있는 자들의 손에 달려있다.



인류의 미래도 마치 그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평화의 유지는 그들의 손에 달려있으며, 그들은 전쟁을 일으켜 인류를 파멸로 몰 수도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매일 수만 명의 어린 생명들이 기아로 숨져가는 사이에 권력을 쥔 어른들은 어마어마한 금액(일분에 거의 2백만 달러)을 무기구입에 퍼붓는다. 경제논리로 무장한 어른들은 바다를 오염시켜 온갖 물고기를 떼죽음당하게 할 수도 있고, 환경을 오염시켜 지구를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별로 만들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지구의 자원과 에너지원을 마구 써 고갈시킴으로써 후손들에게 막중한 빚을 넘겨 줄 수도 있다. 어른들의 횡포로 마구 잠식당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는 어른들이 바로 신이다.



능력 있는 어른들은 인간의 삶을 돈으로 환산하려 한다. 직업과 수입이 없는 무력한 사람은 아예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 사람 대접을 받기 위해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기를 쓴다. 그렇게 차지한 재물은 좀처럼 내어놓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 한다. 그리하여 힘과 권력을 쌓는다. 역사적 교훈을 통해 자기만을 위한 소유가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련만, 역사적 교훈을 외면한 채 사람들은 소유로써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위신과 체면을 세우고자 한다. 그리고 돈과 권력으로 포장한 명예를 내세운다.



부와 권력과 명예가 지배하고 경력이 우선시 되는 세상에서 작고 힘없는 어린이는 돈만 드는 짐이다. 어린이는 권력을 향하여 나가는데 방해가 된다. 그리하여 어린이는 어른들로부터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때로는 학대받고 생명의 존엄성에 상처를 받는다. 어린이는 어른들에 의해 어린이가 아니라 ‘작은 어른’이 되도록 강요받는다. 어른들의 눈에 어린이들은 소비자일 뿐이다.



어린이들을 위한다는 옷과 장난감도 어린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른들의 돈벌이용 도구일 뿐이다. 유명 메이커의 옷을 입은 어린이들은 더 이상 어린이로서가 아니라 작은 어른, 애어른으로서 행동한다. 어린이를 어른을 닮은 어릿광대로 만드는 세상에서 어린이의 순수성을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어린이의 순수가 되찾아지는 날, 그 순수가 존중되는 날, 인간성이 회복될 것이다.



        3. 인간성 회복



성탄은 바로 이 어른들의 힘의 신화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성탄은 어른들의 이 폭력적인 주권을 경축하는 행사가 아니다. 성탄은 새로 태어난 아기의 무력함을 축하한다. 그 무력한 아기가 세상의 구세주임을 경축한다. 성탄은 아기의 축일이다. 이는 커다란 변화이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맺어주는 의미를 지닌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어른의 세계에 새 시작을 알리는 시간이다. 어린이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시간이다.



새로 태어난 아기 예수와의 만남은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어른됨을 극복하고 어린이의 순수성을 회복하여 인간이 되도록 한다. 아기 예수와의 만남은 사람들이 모든 형태의 계급주의(위계질서)를 아기로 오신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관조하고 이를 통해서 파국을 극복하고 인간화의 길을 걷게 한다.



성탄은 어린이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어린이의 순수성과 천진난만함을 되찾아준다. 아기 예수는 어른을 인간되게 한다. 우리 모두는 자기 안에서 이 아기를 찾아 인간이 되어야 한다. 여관집의 주인도, 초원의 목동도, 궁중의 헤로데도, 동방의 박사들도, 구유의 마리아와 요셉도 발가벗은 이 아기를 통해 인간이 누구인지 배워야 한다.



성탄은 어른들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어른주의에 사로잡히지 말아라. 삶의 원천으로 다시 돌아 오라. 하느님의 순수와 젊음을 만끽하라. 어린아이를 애어른으로 만들지 말라. 하느님의 젊음과 어린 아이의 순수를 발견하라.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아들 딸들이며, 예수의 형제 자매들이며, 모든 인간들을 공동체로 부르고 새 하늘 새 땅을 창조하실 성령의 담지자이다.



        4. 새 역사의 시작



아기 예수의 탄생과 함께 인류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지고 있다. 마태오는 예수의 족보를 밝히면서 새 인간의 가문을 빛내기에는 너무 많은 죄로 얼룩져 있는 부끄러운 인물들까지 나열한다. 부끄러움을 드러낸다는 것은 인간의 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오가 이런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은 것은 예수의 탄생이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처녀잉태도 예수의 출생이 성령에 의한 것임을 말해준다. 구원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힘을 가진자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인류의 역사가 말구유에서 탄생한 보잘 것 없는 아기를 중심으로 새롭게 쓰여지고 있다. 아기로 태어나신 구세주 예수는 어른의 힘을 무력하게 만든 새 인간, 성령의 인간이다. 성령의 인간은 남자와 어른의 힘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야훼께서 구원하시다’라는 뜻인 예수는 새 인간의 이름이다. 이 이름에는 인간과 하느님의 모든 원수를 굴복시킨 완전한 승리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예수는 새 인간으로서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은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말이다.



성탄,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한다. 그리스도는 이미 탄생하셨다. 탄생을 축하하는 인류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다. 구세주는 우리들 마음 안에 아기로 이미 탄생하셨다. 문제는 이미 우리 마음 안에 탄생하신 그분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성탄의 기쁨과 구원을 느끼기 위해 인간은 단순히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만 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스스로 성령의 인간, 새 인간이 되어야 한다.













27.               예수 성탄 대축일 밤미사 루가 2, 1-14 구세주 탄생

                                                           김영환 신부



        성탄의 참 뜻



오늘도 차거운 감방에서 살을 여이는 추위를 겪고 있는 수많은 죄수들이 있습니다. 또한 불을 때지 못해 싸늘한 방에서 감기에 누워있는 병들과 가난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자 여러분, 이러한 고통에 잠긴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감옥에서 해방되고, 병에서 건강을 바라고, 따뜻한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면 하는 것이 이 불행한 사람들의 소망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 누가 이런 불행한 처지에 있는데 그를 구해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목마르게 그 사람을 기다리겠습니까? 또한 우리의 선조들은 일제하의 36년 동안 그 얼마나 쓰라린 체험을 했습니까? 그 중 우리 민족 자체를 말살하기 위해, 우리의 글과 말을 못하게 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외국으로 피신을 갔습니까? 이들은 무엇을 위해서 일을 했습니까? 오직 해방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해방을 가져다 줄 사람이 온다면 그 사람을 얼마나 고대하며 기대렸겠습니까?

2천년전 이스라엘 자은 고을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이러한 인류의 고통과 불행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이 태어났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분의 생일 바로 오늘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셨으며 또한 영원히 죽지 않는 특은까지 주었습니다. 특은을 받은 인같은 행복에 겨운 나머지 자기의 처지를 생각 못하고 하느님과 같은 지위를 탐내고 불순명하여 모든 특은과 행복을 빼앗겼습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불행도 바로 우리 조상의 불순명의 대가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의 불행을 불쌍히 생각하시고 그 죄를 대신 보속할 분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택했습니다. 성자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도 우리와 같은 죄인의 형상으로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천주이면서 인간의 형태로 나신 예수는 참 하느님이시고 참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서 중계자 역할을 맡으셨고 인간의 잘못을 대신 속죄하여 주셧습니다. (중계자의 역할, 예수의 처지, 누군가는 하느님께 잘못한 큰 죄를 대신해서 용서받을 속죄자의 처지에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것을 설명).



(불순명의 죄는 참된 수명으로 속죄해야······ 그래서 그리스도는 순명으로 속죄했다. 지위높은 사람에게 잘못했으면 그 지위높은 사람고 같은 정도의 높은 사람이 속죄해야 참된 속죄가 된다)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한다는 것은, 죄없는 분이 우리의 잘못을 자기의 잘못으로 여기고 속죄했기 때문에, 고통도 그만큼 컸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억울하다는 말이 잘 쓰입니다. 그것은 내가 당하지도 않아야할 고통을당했을 때나 죄없이 죄인 취급을 받았을 때 특히 잘 쓰입니다(억울한 경우의 예를 실감나게 말해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는 억울한 것이 아닙니다. 인류를 불행에서 구하기 위해 스스로 죄인 취급을 자원했기 때문입니다. 받기 싫은 벌을 억지로 받은 것이 아니라 종의 잘못을 지체높은 주인이 스스로 짊어지고 고통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목저응로 예수님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에는 천주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마음이 좋은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했습니다. 마음 좋기야 남의 죄를 대신 속죄할 만큼 좋은 분이 어디 있겠으며 그것도 지체 높은 분이 자기 종의 잘못을 위해서 생명까지 버렸다면 그것보다 더 큰 속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은 이기주의 세상에 친구를 위해 속죄해도 큰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왕이 보잘것없는 종을 위해 생명을 버렸다면 인류 역사상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인데도 인간의 죄를 위해 속죄하고 고통받고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바로 이 속죄를 위해 예수님은 세상에 태어났고 태어난 그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속죄한 분에게 보답해야 한다. 보답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분과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해야하고 불우한 형제에게 사라을 베풀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말해주는 것이 좋다)

이런 복된 날을 맞아 우리는 어떻게 생활을 정리해야 할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날의 세상은 불의와 부정, 모든 거짓과 사기로 가득찼고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남의 불행도 생명도 무관심한 시대입니다. 또한 정서는 메마를대로 메말라 거리에 사람이 죽어가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 각박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과연 크리스쳔답게 사는 것일까요(세상의 부정부패와 악을 말하며 나도 거기에 한 몫을 들고 있다는 것을 강조). 나도 만일 그러한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라면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크리스쳔입니까? 메마른 가슴에 희망의 그리스도를 심어주어야 할 우리가······



신자 여러분, 그리스도가 악의 한가운데 태어났듯이 우리도 이 세상 한가운데 또 다른 그리스도로 태어납시다.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악이 있는 곳에 알을 제거하시고 불행이 있는 곳에 행복을 심어주시고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어주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태어났지만 그에게 보답해야할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그리스도답게 살아야합니다(우리의 사명을 인식하고 철저히 살 것을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불우한 이웃을 돋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 말로써만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성탄을 축하하지만 진정으로 축하와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나는 과연 이번 성탄을 맞이해서 무엇을 했나 반성해 보고 참 크리스쳔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성탄의 은총이 우리 가정에 풍성히 내리도록 이 미사 중에 열심히 기도합시다.















28.              구세주 오시는 날 밤

                                                김정진 신부





전인류가 그처럼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아 구세주께서는 드디어 천사들의 환호 속에서 목자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면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구세주께서는 마리아에게서 탄생하리라는 천사의 예고가 있은 후 나자렛에서 나시리라는 세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 도시는 구약성서에서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듯이 다윗의 도시인데 이 곳에서 목자 다윗은 성소를 받았고 기름 발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참된 아들이며 주님의 양떼를 인도하는 참된 목자가 탄생하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런데 베들레힘에는 예수님을 맞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느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여관의 자리가 없었다는 것은 숙소가 없었다는 뜻이지만 또한 「여관」에는 예수 탄생이란 거룩한 신비를 맞을 의로운 자리가 없었다는 뜻도 됩니다. 말구유에 탄생하여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셔야 할 예수님에게는 화려한 꾸밈이나 장엄한 의식같은 것은 전혀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은 별만이 반작이는 고독과 적막 속에서 탄생하셨고 동물들이 음식을 먹는 돌로 되어 있는 말의 여물통이 예수님의 요람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맏아들, 즉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가난과 함께 인간의 비참과 연약함을 그대로 지닌 하나의 참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또한 예수 탄생의 장면은 이렇게 비천하고 가난합니다. 더 뚜렷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가난을 명료하게 드러내 줍니다. 비록 비천하고 겸손하고 가난한 티가 철철 흐르고 있지만 그분은 가난하고 불우한 자에게 풍요와 부를 나누어 주실 분이십니다.



신자 여러분! 이처럼 겸비하고 가난하게 태어나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미미하고 가난하며 무식한 들판의 목자들에게 구세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당시 쟁쟁하던 권력가들이나 헤로데왕이나 고관 대작들의 인사들은 이 기쁜 소식에 접하는 영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허영과 교만으로 차 있으며 물욕과 탐욕으로 충만되어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고 알 리가 없었습니다. 소란하고 야단법석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오실 리가 만무합니다. 예수님은 정녕 고요한 한밤중에 오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순진하고 깨끗한 마음 가운데 조용히 내려오십니다. 매우 지치고 외롭고 가난하고 고달픈 우리들 인간에게 그 풍성한 축복과 함께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담뿍 안고 내려오십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의 사랑받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14)라는 천사들의 축하의 노래소리는 오늘의 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더 돋우어 줍니다.



신자 여러분! 오늘은 정말 한없이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예수 탄생의 예고 시에도 이미 (기뻐하십시오(하이레.)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자여!>(루가 1,28)할 적에 마리아는 메시아 시대가 도래함을 무척 기뻐하였으며 엘리사벳을 방문하고서도 <내 구세주를 생각하는 기쁨에 날뛰고 있다>(루가 1,47)고 읊었습니다. 오늘 예수 탄생시에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고하는 일련의 천사들의 무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하노라>(루가 2,10)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진정 우리에게 완전한 큰 기쁨을 안겨 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은 하느님의 영원하고도 무한한 기쁨입니다.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이같은 기쁨에 참여하며 기쁨에 젖어 있게 됩니다. 우리 신자들은 하느님의 기쁨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고백성사를 봄으로써 자기 허물과 티를 말끔히 씻고 천상 아기를 기꺼이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얼마나 기쁨 속에 살게 되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신자들 중에서도 오늘의 참된 기쁨을 맛보지 못한 채 외면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를 맞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으며 그들의 마음은 저 베들레헴의 마굿간보다도 더 차고 어지럽습니다. 예수님이 그런데 태어나실 리가 만무합니다. 여기서 안젤로 살레시오의 시 한 귀절을 소개합니다.

<그리스도 베들레헴에 천만 번 태어나셔도 그리스도 네 마음에 나시지 않는다면 네 영혼은 영영 버려진 것,> 아멘.







30.           만백성에게 이 기쁜 소식을

                                                            변기영 신부



오늘 밤 하느님이 우리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 본래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인식 능력이 부족한 까닭에 그를 도저히 알 수도, 볼 수도, 감당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으므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심판하거나 꾸중하거나 책망키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시고, 진리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만일 신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요한 밤, 갓난아기로 오신 하느님을 우리는 환영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왕림을 맞이하는 우리 인간 하나 하나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라면 대다수의 사람의 생존과 복리를 위해 소수의 이익과 의사는 말살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은 전 인류의 대다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하나 하나를 사랑하시므로 착한 이나 악한이나, 살인하는 자나 살인 당하는 자나 하느님을 욕하는 자를 위해서까지도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왜 오셨을까요? 그것은 그분이 우리 인간을 몹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하늘나라로 올라가 그와 동거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지 못하시고, 그 기간을 단축하러 빨리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후에 천사처럼 신화되어 그와 하나되기 전에 그는 인간화되어 내려오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만나러 오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며 신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 즉 강생의 길을 따라가면 하느님다운 신화, 즉 구원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이 길이 현세에서 훌륭한 학자나 정치가, 예술가가 되는 것보다 더 더욱 심원하고 궁극적인 완성방법입니다. 이 하늘나라의 길을 열어주시는 아기 예수께 뜨거운 환영과 감사와 찬미를 마음껏 드려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많은 이가 우리를 속입니다. 국회의원 출마자는 유권자에게 헛된 공약을 남발하는 경우도 있고, 의사도 환자를 속이고, 친구도 애인도 부부간에도 서로 속이지 않는 자가 몇이나 있습니까? 우리 자신도 우리를 속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탄생하신 그리스도는 속을 수도 속일 수도 없는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 밤에 촛불을 밝혀 들었습니다. 제 살과 뼈를 태워 어둠 속에 빛을 발하는 촛불처럼 그리스도는 이처럼 자기를 버리고 불태워 세상의 빛이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뜨겁고 그으름 나는 물리적 초 대신 이 세상에는 희생과 봉사로 빛나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초가 있습니다. 바로 신자 개개인라는 초입니다.



가정과 직장과 길거리, 우리 각자가 처한 곳에서 우리는 초와 같이 살과 뼈를 바쳐 타야 하겠습니다. 명예욕, 물욕없이 자신을 다 바칠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벗이 될 수 있으며 그와 한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영광스러운 성탄 밤에, 우리는 이제 남은 일생을 한 토막의 초로 태우겠다는 결심을 아기 예수께 성탄 선물로 바칩시다.

















31.             아기 예수의 탄생은 온 인류의 기쁨

                                                                   김기수 신부



탄생의 참 의의를 알려주고 우리의 책임은 이 기쁜 소식의 증인이 되는데 있다.



존경하올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밤 구세주 아기 예수의 거룩하고 기쁜 성탄을 맞이하여 강생하신 아기 예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각자 마음과 가정에 깃들이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니 온 인류는 하느님의 구원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던 중 드디어 오늘 밤 베들레헴에서 천사들의 환호소리와 함께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멸망의 구렁 속에서 헤매이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약속대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밤에 아기 예수의 탄생을 진심으로 기뻐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여 미사성제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밤 이 미사에서, 다시 한 번 아기 예수가 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어찌하여 아기 예수의 오심이 온 인류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가 깊게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바와 같이 아기 예수는 탄생의 순간부터 인간의 권세에 귀속되어 강한 자의 뜻에 굴복하는 약자로서 가난과 함께 인간성의 비참과 연약함을 그대로 지닌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지만 천사들은 “하늘 높은 곳에는 천주께 영광, 땅에서는 그의 사랑받는 자에게는 평화”라고 찬미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는 비록 가난하고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지만 아기 예수의 탄생은 진정한 의의가 있기에 천사들의 환호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느님의 외아들 독생 성자가 우리 죄 때문에 또 당신의 생명을 풍부히 주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이 인성을 취하시고 비천한 몸으로 오셔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영광이 온 누리에 빛나고 모든 사람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인류는 하느님의 사랑과 죄의 사함을 받게 되었고 우리 모두가 아기 예수의 모습과 같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기 예수의 오심으로 천주성이 비참한 인간성과 결합되어 인간이 하느님의 영원한 영광과 행복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실지로 아기 예수를 통해서 당신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주신 것입니다.

즉 인간이 죄악에서 벗어나 천주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기 예수의 탄생의 신비요, 참 뜻이요, 은혜입니다.



이러한 성탄의 참 뜻을 우리가 깊이 깨닫지 못한다면 성탄은 아무런 가치를 우리에게 주지 못하지만, 반대로 깨달을 때 어찌 아기 예수의 탄생이 인류에게 희열을 가져다주는 기쁜 소식이라 아니 하겠으며 우리는 참된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제 진정으로 벅찬 기쁨을 마음에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먼저 이 기쁨을 모든 이에게 전파하는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증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들은 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형제들로서 서로를 진심으로 도우며 용서하고 진실되이 회개하여 회개의 산 증거를 행동으로 드러내야할 것입니다.



지금 현 시대는 이 기쁨을 잘 알고 있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불행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들을 광명으로 인도할 메시아를 오시게 하기 위해서 진정으로 그의 진리와 사랑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기 위해서 우리는 무사 안일주의와 타성과 자기 구령을 위해 사는 이기주의를 과감히 벗어 던지고 전 세계 사람들이 아기 예수의 오심의 참 뜻을 빨리 깨닫고 그 구속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날 아기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책임이요, 우리는 깊이 마음 새겨야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임을 깊이 통감하고 아기 예수의 적극적인 증인이 될 때 하느님 나라 건설의 역군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아기 예수의 은총이 풍성히 우리들 안에 내리시길 빌면서 우리 모두 미사 중에 “하늘 높은 데서는 천주께 영광, 땅에서는 그의 사랑받는 자들에게 평화!”를 만방에 힘껏 외치도록 다짐합시다.







32.        예수 성탄 대축일 새벽미사 루가 2, 15-20 목동들의 조배





이 미사는 흔히 목동들의 미사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오늘 복음을 들으면 왜 그렇게 부르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 밤 미사의 복음에서 우리는 천사가 베들레헴 근처 들에 있던 목동들에게 나타난 구세주의 탄생하심을 알린 장면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이제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온 백성에게 큰 즐거움이 될 기쁜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니,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나셨다.” 천사의 이 말씀대로 목동들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구세주를 찾아뵙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아침 복음 말씀은, 이 기쁜 소식이 목동들에게서 어떠한 효과를 나타냈는지 알려 주십니다. 그들은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님이 알려 주신 이 사실을 알아보자”하고 소리치며 달려갔습니다. 성서에는 목동들이 어떻게 해서 아기 예수님을 찾았는지 아무 말씀도 없지만, 목동들에게 이 기쁨을 알려 주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셨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뵈옵고 어떻게 하였는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무척 기뻐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께 무슨 선물을 갖다 드렸을 것입니다. 목동들이 늘 지니고 다니는 소박한 것이었겠지만 하여간 무슨 선물을 드렸을 것입니다.



잠시 동안 말없이 사랑에 넘치는 흠숭을 드린 후, 목동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목동들은 들에 천사들이 나타났던 사실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말씀드리고 즉시 읍내로 뛰어가서 이 소식을 알렸고,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은 목동들의 말을 듣고 모두 놀랐습니다.



그런 다음 목동들은 그들의 생활 터전인 들로 돌아가 양 떼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듣고 본 바에 대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목동들의 생활이 전혀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목동들을 보셨습니다. 이 순박하고 가난하고 깨끗한 목동들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한 첫 사도들이었던 것입니다. 항상 그러하였고 또 항상 그러할 것입니다.



마리아로 말하면, 이 모든 것 - 이 놀라운 밤으로 끝난 지난 아홉 달 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을 가슴에 간직하여 마음 속으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우리도 목동들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우리가 어떠한 종류의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동들은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들” 즉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고, 아울러 메시아를 고대하며 하느님께 충실함으로써 이 사랑을 표시할 줄 아는 진실하고 정직하며 겸손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야심가도 아니었고 교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줄을 알았고 하느님께 의탁했습니다. 우리도 만일 그와 같다면 그들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미사 때 목동들의 경험을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우리가 예수님을 뵈옵기를 고대하고 원해야 하며 그분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아기 예수님은 말로 우리에게 일러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분이 계시다는 그 자체로써, 곧 온전히 성부께 의탁하고 계시는 겸손하고 가냘픈 아기로 계시다는 그 자체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회개하여 나처럼 어린이가 되지 않는 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 예수 아기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즉 아기 예수님을 그저 보고 사랑하기만 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전체를 그분게 열어 드리십시오. 그러면 그분은 여러분 안에서 사시고 자라시며, 여러분을 아기 예수님과 같게 만들고자 여러분한테로 오실 것입니다. 보고 사랑하며 그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마리아께서 하신 것처럼 이 모든 것을 마음 속에 품고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해서, 그 말씀과 표양과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생각하면 할수록 목동들이 행한 것을 우리도 행하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목동들처럼 생활의 터전으로 돌아가 우리가 듣고 본 바에 대해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큰 빛이 오늘 우리들 위에 비치리니, 주님께서 우리 위해 나심이로다. 그 이름은 묘하신 분, 하느님, 평화의 임금, 영원의 아버지라 일컬을 것이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입당송).













 33.                 기쁜 소식은 가난한 자들의 것

                                                         김기수 신부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고 하느님께 사랑받을 수 있다.



우리는 몇 시간 전에 아기 예수님의 강생의 기쁜 소식을 기념하여 미사성제를 드렸고 이 밝아오는 새벽에 우리는 또 기쁜 소식에 환호하며 아기 예수 앞에서 정성되이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미사의 복음은 우리가 밤 미사 때 들은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복음으로써 천사가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후 목자들은 바로 이 기쁜 소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찬미하였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의 기쁜 소식이 그 시대의 권력가나 고관들에게 전해지지 않고, 가장 가난하고 미소하고 무식한 들판의 목자들, 즉 멸시받고 영예도 존경도 받지 못하는 목자들에게 최초로 전해졌는가에 대해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이는 허영과 교만과 물질에 미쳐있는 세속적인 부유한 마음을 가진 자 보다는 진정으로 가난하고 버림받고 비천한 이들을 위해서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셨다는 것을 말하며 이 기쁜 소식은 가난한 자의 것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현 시대에 이 기쁜 소식을 전해들을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가난한 자들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요?



돈이 없어 궁핍한 자입니까? 아니면 판자촌에 사는 이들입니까? 아니면 거리의 거지들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이 가난한 자는 복음에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즉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정신적으로 부유한 자들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풍부해도 마음이 가난한 자를 말합니다. 또한 재물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 가난이 불행이 아니라는 진정한 마음으로써 재물의 쇠사슬에서, 즉 물질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재물에 온 마음을 바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진정 가난한 자는 정신적으로 가난한 자로써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견책하며 기꺼이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사람들, 자기의 관점을 재검토하는 사람들, 놀라움을 목자들처럼 순수히 받아들이는 사람들, 자기 정신의 진정한 변화를 일으킨 사람들,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겸손해 하며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들, 당연한 일이란 없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현실을 직면하고 겸손과 순명의 정신으로 살며 가난의 산 모범인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자”인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는 우리가 평온한 상태에 있기를 원하지 않고 책망을 듣고 고통을 참아 받으며 하느님의 음성으로 인해서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여행을 떠날 때, 또 평화와 위안과 안정과 무사, 세련됨과 사회적 기쁨에 대한 열망과 아름다움과 물질주의와 황금만능주의에서 과감히 탈을 벗어 던지고 해방될 때, 또한 우리 안에서 나날이 자신의 고통에 대한 결단들을 기뻐할 수 있을 때 진정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참으로 태어나실 때부터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가장 비천하게 세상에 오셨고, 세상보다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의 드높은 신분에 따라 생활하지 않고 살으신 가난한 자의 모형인 아기 예수의 길을 참으로 따를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 대가로써 하느님께서 잔치를 베풀 때 먼저 초대받고 믿음이 부유한 사람이 되고 언약하신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한 목자들처럼 천사의 기쁜 소식을 받는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성탄 새벽미사를 봉헌하면서 진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혹시라도 지금까지 어두운 마음 즉 재물에 너무 집착하는 부유한 마음이 있었다면 태양이 어두움을 물리치고 광명을 주는 것 같이 과감히 이 기회에 물리쳐 버리고 이 기쁜 소식은 언제나 가난한 자의 것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 일상 생활 중에 언제나 가난한 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아기 예수께 이 미사 중에 기도합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34.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김몽은  신부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지존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시어 베들레헴 성밖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왕자로서 궁궐에서, 부자로서 호화주택에서 태어나실 수도 있으셨지만,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자기의 집 나자렛에서가 아닌, 객지인 베들레헴에서, 여관도 얻지 못해 양의 우리의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시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로 태어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탄생치 않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자기의 대제국과 속국들에게 호구 조사의 칙령을 내려, 보다 효율적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징병을 감행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 사실은 이 지상의 권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국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예수님의 탄생은, 세계 역사 안에서 일어난 명백한 역사 사건임을 입증하는 현실이다. 즉, 이것은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 안에 정확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실제적인 사건임을 말해준다.



구유에 탄생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도시의 여관에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을 맞이할 수 있는 의로운 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자리는 누추하지만, 추악한 인간의 탐욕에 물들지 않고, 정욕의 불로 오염되지 않은 곳을 하느님께서 미리 택하시어 예비하신 곳이다.

한편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최초로 전해들은 사람들도 역시 가난한 목동들이었다. 지식인이나 부유한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어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웃음과 모욕을 가했을지도 모르며, 더 나아가서는 박해를 가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헤로데 왕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실재로 발해의 독수를 뻗쳐 애매하게도 무고한 어린이들을 무수히 학살했던 것이다. (마태 3,16-18 참조)



진정 하느님께서는 인간적인 외적 화려함이나 지위 따위를 조금도 필요로 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하느님을 아는 데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생각과는 달리,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욱 소중히 여기사, 외면적인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구유에서 탄생하사 십자가상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실 예수님에게는 화려한 장식이나 장엄한 예식 따위는 전혀 합당치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가난한 마음, 겸손한 인격, 소박한 인간성 안에서만 탄생하신다. 성탄을 맞이해서 우리는 지금 우리의 마음가짐을 재점검 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나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마음의 가난이란 탐욕이나 교만, 불평이나 시기심이 없음을 뜻한다. 순수한 마음은 겸손, 사랑, 평화, 용서의 마음이다. 바로 그러한 마음의 소유자에게만 예수님은 강림하시는 것이다.











35.        예수 성탄 대축일 낮미사 요한 1,1-18 말씀이 사람이 되심

                                                             조창래 신부



가까이 오신 하느님

신자들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생활하게 한다.



교우 여러분, 먼저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지상에 나타난 오늘의 이 벅찬 기쁨이 여러분들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기쁨이 단순한 구경꾼으로서의, 혹은 주위의 분위기에서 오는 것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와이 섬을 태평양의 낙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백여 년 전만 해도 하와이는 숱한 나환자들이 뒤끓는 더러운 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이들을 몰로카이라는 섬으로 이주시켜 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몰로카이는 산 송장들이 썩어가는 생지옥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용감한 젊은 사제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분이 바로 다미안 신부님이었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몰로카이 외딴 섬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나환자들의 정신적, 도덕적, 경제적 지도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인간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향유할 수 있었던 그였지만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고 마침내는 세인들로부터 버림받은 병자들을 찾아, 고도에 들어가 사랑과 봉사의 생을 마쳤던 것입니다. 그는 쫓겨간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마침내 자신도 나병에 걸려 생을 마칠 때까지 진정으로 그들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는 사랑으로 자신을 온전히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을 전해 줍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당신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의 표시입니까!



요한 복음서의 서문은 2000년 전에 우리와 함께 사셨던 예수님의 탄생이 하느님에 의한 것이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간은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하느님과 동고동락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당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창조의 계시를 해오셨고 마침내는 당신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강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한 인간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역설을 말씀이 강생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표현보다 더 극적으로 나타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에 대한 관념에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0년 전에 탄생하신 예수님은 그분의 지상 생활의 역사적 환경, 지리적 환경, 그분의 조상, 그분의 가족, 그분의 직업, 그분의 육체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탄생하셨고 자랐으며, 노동하고, 고통받고, 죽으셨으니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입니다. 한편,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천상으로부터의 증거, 사도들과 제자들의 증거, 당신 자신의 증거, 기적과 예언들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한 위격 안에 계시는 두 본성에 대해 예전에는 많은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교회는 말씀이 육이 되셨다고 이 신비를 의심치 않고 믿어 왔습니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셨으며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이 사랑은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 독생 성자로 인하여 살리시고자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여기에 나타났습니다. 사랑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어 당신 아들을 우리 죄를 보상하기 위한 속제로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동등한 지위에 애착됨이 없이 오히려 자기를 비우고 비천한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대한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우리와 밀접히 결합해 오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영접해 드려야 합니다.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사랑 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을 우리도 닮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은 하늘 위에 감추어져 계신 절대자가 아닙니다. 바로 나와 같은, 아니 나보다도 가난하고 찌든 형제들 속에 계시는 분입니다. 다미안 신부님이 병자들을 찾아간 것은 그들 속에 계시는 주님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일생은 자신을 깡그리 주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희생을 거절하고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아니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마굿간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겸허한 자세는 이것을 잘 드러내 줍니다.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셨던 주님은 오늘 또 다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세주 탄생의 알림을 받고 조배하러 달려간 순직한 목자들 같이 겸허한 자세로 아기 예수님께 조배드립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탄생의 감격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매 순간의 어려움을 참고 견딤으로써 아기 예수님께 선물로 드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따사로움을 헐벗고 굶주린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의 고통을 위로함으로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의 업적을 그들에게도 전달하는 오늘의 새로운 아기 예수가 됩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바로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오신 이 벅찬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전을 주셨다”(요한 1, 13).]



          1. 성탄의 뜻



어제 밤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경축할 때 우리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성탄 축하가 무르익은 이제 성교회는 우리가 성탄의 뜻을 더 깊이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이 미사의 복음 성경은, 어제 밤에 탄생한 아기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드님이실 뿐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시었으니, 말씀은 곧 하느님이시라.” 태초에 그러니까, 시간이 있기 전 영원으로부터 예수님은 항상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우리가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계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조성되었고, 그분 없이는 아무 것도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주님이시요 창조주이십니다. 봉헌송에 있듯이 “하늘도 주님의 것, 땅도 주님의 것, 땅덩이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주님께서 내셨나이다.”



        2. 왜 말씀께서 사람이 되셨는가?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머물러 계시었다. 우리는 그 영광을 직접ㅈ 보았으니, 그 영광은 은총과 진리에 충만하여, 성부께로부터 오신 독생 성자의 영광이었다.” 그러면 그분이 왜 사람이 되셨습니까? 이 세상이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그분이 인류의 빛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빛이시었고, 어두움이 그 빛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지향도 없이 갈팡질팡 헤매던 그 오랜 세월이 끝을 맺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땅 끝마다 우리 주님의 구원하심을 보았으니, 땅이여 모두 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그 구원을 드러내 보이시고, 만 백성 앞에 그 정의를 드러내 주셨도다”(화답송).



        3. 성탄이 우리에게 뜻하는 것



예수님의 성탄이 금년에 우리에게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나셨으며 살으셨고 가르치시며 교회를 세우셨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구원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구원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영원한 기쁨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우리한테서 십자가와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님은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부활 후 제4주일에 성교회는 성 바오로의 말씀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다시는 죽지 아니 하시니, 죽음이 다시는 그이를 지배하지 못하리라.” 만일 우리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시다면, 그분의 지체인 우리도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가치있는 것이 되게 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것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고통 뿐이기 때문입니다. 고통 안에서 그리고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탄생을 경축하는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구원하는 동료 구속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우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들뜬 기분으로 보내기만 하면 되는 줄로 여기는 교우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충만한 기쁨이요 빛이며,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미리 맛보는 기쁨이지만 - 무섭게 심각한 것입니다. 성탄은 예수께서 우리 삶 속에 탄생하심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당신 땅에 오셨으되, 그 백성이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여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결단코 우리에게 해당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4. 성탄은 우리의 축일

우리의 인생살이가 얼마나 어려운 지경에 있든지 간에 오늘은 우리의 축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이시요, 우리 구세주이시며, 우리 어두움 속에 빛을,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 평화를 가져다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그분을 모셔들이기를 원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아기가 태어나고, 우리를 위하여 아들이 주어졌으니, 그분은 주권을 어깨에 메시고 그분의 이름은 놀라운 의견의 사자라 일컬으리라. 너희는 새로운 노래를 불러 드려라. 묘한 일들을 하셨음이로다”(입당송). “거룩한 날이 우리 위에 밝았으니, 만 백성아, 어서 와 주님을 흠숭하라. 오늘날 큰 빛이 세상에 내려 오셨음이로다”(층계송).

그분은 그분을 영접하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권리를 주실 것입니다.















36.               영원한 의로움의 계시

                                                    전재국 신부





크리스마스인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양상을 묵상하도록 새로운 성체성사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탄생과 당신 아버지의 생명에 일치하는 신비를 묵상하기로 하자.

새로운 성서 구절을 들으면서 세 번의 미사를 봉헌하는 오늘은 일년 주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중심을 이룬다면, 예수님의 성탄은 또 다른 역할을 한다. 지산의 탄생으로부터 언제나 새로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탄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요한 복음서의 서두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이 말씀은 강생의 신비의 핵심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의 밤을 비추는 새로움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 새로움이란 요한 복음서의 서두를 요약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섭리와 그리스도를 통한 심혈을 우리에게 제시하기 위하여 복음사가는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 과정은 구세주가 오시는 길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서언의 세 단계로 표현된다. 사도 요한은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통하여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단계를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요한은 첫 번째 단계에서 새로운 창조를 계시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새로운 탄생을, 그리고 세 번째 단계에서는 새로운 계약을 계시한다.



매번 새로움이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는데 모든 새로움의 유일한 원천이 소개된다. 요한은 새로 태어난 아기의 때에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의 밤을 비췄고,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며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계시한다.



세상의 빛이신 이 말씀을 묵상해 보자. 그리고 예수 탄생의 신비를 여러 각도록 묵상해 보자. 먼저 창세기 서두에 나오는 말씀을 즉 하느님은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묵상하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시작이 있었고, 이 세상에 우리는 태어나고 이 세상에서 자라난다. 그런데 하느님이 원천인 태초부터 그의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고 사도 요한은 말한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1, 3)



단순한 말씀이며 두 가지 기본적 신비를 우리에게 계시한다. 하느님의 생명과 세상의 기원이다. 이 세상은 창조되었기에 존재하며, 하느님이 이 세상의 영원한 원천임을 말한다. 그러나 유일한 하느님께는 시작이 없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을 때, 하느님은 이미 살아 계셨으며 홀로가 아니었다. 요한이 당신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한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을 통해서 하느님은 완전히 드러나며, 이 외아들은 당신 아버지와 하나이시며, 이 아들은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아들의 영원한 탄생의 신비이다. 예수는 당신 아버지의 생명으로 사시는 분이며, 죄와 죽음의 어두움을 비추기 위하여 오늘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이다. 이 신비는 두 번째 단계에서 명백해진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다.” 우리 가운데 오신 말씀은 사람으로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하느님 아들은 당신의 생명을 인간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인간적 생활을 시작하신다. 인간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살기 시작할 수 있도록 예수는 인간이 되셨다. 따라서 예수 성탄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인 것이다.



그런데 이 새 창조를 하느님께서는 시초부터 원하셨다.

인간이 그의 죄로 말미암아 생명을 잃었다면 하느님은 생명의 원천으로서 그 생명을 다시 주시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구원 역사의 시작으로서 요한 복음서 서두의 세 번째 단계의 구약과 신약인 것이다.



구약의 계약에서 법이 주어졌고, 이 법은 인간들에게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이 법은 무력하였고, 인간들을 속박하였다. 신약의 계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에게 은총과 진리를 주셨다. 은총이란 당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명이며, 진리는 당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인식인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인간들에게 전달하면서, 예수는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영원한 기쁨을 주는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할 수 있도록 인간들을 인도하신다.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계약이 성탄날 예수가 사람이 되심으로써 시작된다. 역사가 끝날 때 당신 아버지의 영광 속에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이다. 이 두 내림 사이는 새 탄생의 시기와 예수가 주신 은총을 받아들이는 신앙의 시기가 놓여 있다.



이 새로운 탄생이 요한 복음서의 서두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예수는 빛으로 태어났고, 우리 모두가 빛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며,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당신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분이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 표시가 바로 새로 태어난 아기 예수이며, 당신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의 일생을 통하여 이 사명을 수행할 것이며, 그 사랑을 위해서 희생하실 것이다.

우리에게 공자로 주어진 이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어린 아이의 절대적인 신뢰심을 가지고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은 신뢰심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상징이다. 당신 아버지께 대한 하느님 아들의 영원한 사랑의 선물을 받아야 한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성탄의 신비는 우리에게 희망의 원천과 은혜의 충만함을 드러낸다. 한편 예수가 태어나신 밤은 구원 역사의 시작에 지나지 않지만 히브리서에 계시된 대로 중요한 계기인 것이다. 우리의 희망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희망의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영원한 생명의 완성이 새로 태어난 이 아기 예수를 통해서 드러난다.

우리가 지금부터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신앙으로써 예수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기쁜 마음으로 이 날을 축하하도록 권고한다. 예수 성탄의 신비를 깨닫고 희망의 생활을 하자. 기쁜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면서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았고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자. 그리고 그의 진리와 은총을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전파하자.






 37.                예수 성탄 대축일 <루가 2,1-14> 성탄은 왜 기쁜가?



        성탄절에 생각나는 사람

  

성탄절만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딸 다섯을 낳고, 아들을 고대하며 또 배불뚝이 아줌마가 되어 있던 체칠리아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는 3대 독자 집에 시집와서 내리 딸만 다섯을 낳았던 것이다. 아무리 딸을 많이 나으면 무슨 소용인가? 시어머니는 아들을 못 낳으면, 씨받이라도 들여서 대를 이어야 한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체칠리아야말로 시편의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파수꾼이 새벽을 그리워하듯" 그렇게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 이미 그녀는 만삭의 몸이었다. 그녀는 나를 잡고 울면서 “신부님, 아들 낳게 기도 좀 해주세요"라고 애걸하였다. 1970년대엔 아직 우리나라에 소위 양수검사라는 것이 보편화되지 않았던가 보다. 그때까지도 태중의 아기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러마고 대답하몄다. 그리고 그녀를 잡고 애절한 기도를 드렸다. 나의 기도는 간절하였다, “주님,  이 여인에게 아들을 하나 주십시오, 그리하여 지금껏 천대받던 생활을 청산하게 하여 주십시오!" 진실한 기도였다.

 

어느 날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에 전화가 오면 틀림없이 병자성사를 요청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누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날도 나는 좋진 않은 소식인가 싶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보세요!"하자마자, “신부님, 저 아들 낳았어요"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체칠리아의 전화였다. 체칠리아는 울고 있었다, 아들이라는 의사의 말에 수년에 걸친 핍박과 수모가 다 사라졌던가 보다. 나는 축하한다고 말했다,



가슴에 맺혔던 한이 다 풀어지는 듯 그녀는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새 생명의 탄생이 모든 이에게 체칠리아처럼 그렇게 기쁘고 행복할까?

예수님의 탄생일을 맞아 과연 체칠리아처럼 그렇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할 수 있을까?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였나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의 기쁨



예수님이 탄생하셨다. 원조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인간 모두가 그리도 그리워하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탄생하셨다. 창세기 3장15절, 즉 인간에게 구세주를 보내주시겠다던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날이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천대받고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다, 소박데기라 불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임으로 부르게되었다.

  

예수님께서 왕궁의 황금빛 침대에서 탄생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 같은 사람이 과연 그분의 성탄을 기뻐할 수 있었을까? 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흠숭하며 따르기에 너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너무나 높은 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모습으로 비천하게 탄생하셨다.



이 세상의 어느 누가 마구간에서 탄생하는가? 그분의 탄생이 가난하셨기에, 가난하고 비천한 인간들의 친구가 되실 수 있으셨다. 그분의 족보를 보면, 그 누구의 것보다도 시원치 않다. 그분의 조상 중에는 창녀도 있고, 이방인도 있다. 더군다나 간통한 여인까지 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가문을 택하여 이 세상에 탄생하셨을까? 만일, 그분이 고상한 가문의 후손으로 오셨다면, 혹은 귀족이나 왕족의 후손으로 오셨다면, 많은 고상하지 못한 가문의 사람들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는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어느 한 부류의 사람들만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고 인류 전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위하여 오셨음이 그분의 가계에서도 드러난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이미 오셨다. 오늘은 그분의 오심을 축하하는 날이다, 그분은 인간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시려고 오셨다. 예수님은 악마를 내쫓기 위하여 애쓰고, 나병이나 반신불수 병을 없애시려고 노력하셨다. 그뿐아니라 죽은 자의 시체에 혼을 불어넣으시어 살리시는 기적도 행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가난이나 병고를 없애시려고만 오신 것이 아니다. 지금도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이 세상에 오신 것일까?



그분은 인생의 해답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 해답이란 구원이다, 영원한 생명이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께 이 세상의 모든 고난들을 해결해달라고 애걸한다. 현세의 복을 갈구한다.

그러나 그분은 대답치 않으신다. 그래서 소원성취를 해준다는 신흥종교로 많은 신자들이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다, 예수님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오셨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분은 영원한 평화, 영원한 안식, 영원한 생명, 영원한 복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 성탄 대축일

김광수 요셉

1. 제1독서 : 이사 9, 1-6

  이사 9,1-6은 교회 안에서 전통적으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되는 텍스트이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다”(5절)는 성탄 전례에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본문은 용어, 주제, 전승, 구원 약속 등을 볼 때에 유배 이후 시대에 쓰여졌음이 분명하다. 유배 이후에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한 종말적 메시아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 이 사실을 뒷받침 해 준다. 저자는 미래의 메시아에 대한 예고로 동시대의 청중과 독자들에게 현재의 어둠이 지나고 빛이 다가오리라고 그들을 위로하며 격려한다. 이를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1절은 빛과 어둠의 대립을 주제로 한다. 종말 때의 하느님의 행위는 창조 사건과 비교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혼돈의 상태로부터 우주의 질서를 창조하셨듯이(창세 1,2-3 참조), 현재 혼돈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새롭게 바꾸어 주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 곤경 속에 놓여 있는 이들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 곧 구원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는 이들은 마치 추수 때와 같은 즐거움과 전리품을 나눌 때와 같은 기쁨을 체험할 것이다. 이런 기쁨은 한 아기의 탄생으로 충만해 진다. 이 아기는 새로운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즉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 이다.  이 왕은 경륜가 이며, 구원을 위한 능력을 부여 받은 자이며, 영원한 아버지이자, 평화의 왕이다. 이 왕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제한이 없고, 정의와 공정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2. 제2독서 : 디도 2, 11-14

  오늘 독서가 예수님의 탄생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탄생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계시의 한 결과라는 점에서 그리스도 신자의 삶 안에, 성사적 삶 안에 심지어는 윤리 도덕적 삶 안에서 이를 보고 있다. 즉 이 “탄생”은 세말에 이르러선 영광 중에 오실 최종 계시가 되겠지만 지금 벌써 성사들 안에 역사하여 사람들을 새롭게 쇄신시키고 윤리 도덕성 안에서 사람을 구원의 증거자로 만든다. 오늘 독서는 그리스도 신자의 삶 전체를 종합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즉 독서 안에 성탄의 신비 십자가의 제사 성사적 생활 그리스도적 증거의 의미 그리고 영광에 대한 희망 등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의 꿈란 공동체에선 메시아에게서 두 가지 모습을 보았다. 하나는 아아론 가문의 사제적 메시아상이었고, 다른 또 하나는 다윗 가문의 왕적 메시아상이었다. 비슷한 현상을 우리는 신약성서의 예수 탄생사화에서도 발견한다. 성모님(루카 1,5.36)과 요셉(마태 1,25; 루카 2,22; 이사 43,1; 시편 2,7)과 연관해서 나자렛 예수님 안에 두 메시아상을 함께 보고 있다.

3. 복 음 : 루카 2, 1-14; 루카 2, 15-20



  루카 2,1-20은 예수님의 탄생기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2,1-5: 예수님 탄생의 때와 장소, 6-7절: 예수님의 탄생, 8-20절: 목자들의 이야기이다. 성탄 밤 미사 복음의 핵심은 메시아 탄생과 목자들에게 그 소식을 선포한 것이고, 새벽 미사 복음의 핵심은 목자들이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이다.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태어나신 아기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기다려온 구세주, 메시아시라는 것이다.

  호적 정리를 하기 위하여 다윗의 후손인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서 의무를 수행한다. 베들레헴은 다윗 왕가의 조상인 이사이가 태어난 곳이다. 여기서 마리아는 다윗의 후손 예수 아기를 출산한다. 주님의 천사가 맨 먼저 목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린다. 루카 복음에서 목자들에게 선포된 메시지는 두 가지다. 첫째, 구세주 탄생에 관한 선포다. 천사의 메시지는 ‘기쁜 소식’의 선포이며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기쁨’이 될 소식이었다. 천사는 태어나신 예수님을 ‘구세주’, ‘주님’, ‘그리스도’시라고 하면서 세 가지 존칭을 예수님께 적용한다. 이러한 기쁜 소식은 이스라엘의 희망,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직결되어 있다.

  미가의 예언에 따르면 베들레헴은 ‘다윗의 아들’이 태어날 고을이다(5,2-4). 천사는 미가의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선포한다. ‘오늘’ 태어나신 것이다. 루카 복음에서 ‘오늘’이란 말은 종말론적인 구원의 실현이라는 특별한 여운을 갖고 있다(참조 : 4,21; 19,9; 23,43).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고 해서,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했다.

  두 번째 천사의 선포는 첫 번째 것과 성격이 다르다. 선포라기보다는 차라리 찬송이다. 이 찬송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이 부르짖었던 환호와 형식상으로 같다 ‘영광’은 하느님의 현존하심과 인간을 위해 취하신 강력한 행동을 경험하고 인자함을 의미한다. ‘평화’는 전쟁이나 재난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지고지선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대표한다. 여기서 평화는 하느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백성 간에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 하심을 의미한다.



강론의 주제들



1. 하느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 인간에게 오셨다.

2. 세상의 삶들은 희망과 공포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삶이다. 이런 삶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으로 다가 오신 분이 계시다. 그분은 가난과 약함의 상징인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인간의 눈으로는 그분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없다. 내 안에 오실 그분을 깨어 기다리자.

가해 예수 성탄 대축일 밤미사 강론



사랑하면 알고, 알면 보이나니



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  오늘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의 환호 인사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밤에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만한 소식을 들었고, 또 그 사실을 경축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 소식이란 다름 아닌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2천년 전 베틀레헴에서 밤새워 양을 돌보던 목동들에게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우리들에게 알려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먼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아기 예수님이 갖다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들의 가정에 충만히 깃들길 기도드립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구원자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며 미카 예언자가 기록했고(미카 5,1),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알고 있었듯이 메시아가 태어나실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수많은 왕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대를 이은 왕들은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렸고 그중 뛰어났던 솔로몬왕도 항구하게 하느님 뜻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아들 대에 이르러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북 왕국과 남 왕국이 차례로 멸망하고 백성들은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지요.

백성들은 노예살이에서 그들을 구해줄 제2의 모세를 그리며 탈출을 희망합니다. 그 후 여러 예언자들이 메시아 시대를 예고했고, 구체적으로 메시아는 처녀의 몸을 빌어온다(이사 7,14)는 예언도 들려왔습니다. 그렇게 수백년을 기다렸지만 그분은 오시지 않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려왔던 메시아를 알아 본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언제 오실지 어디서 태어날지를 몰라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 탄생사화를 종합해 보면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소문만 들었을 뿐 만나지 못한 사람들과 구별되어 나옵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들판에서 밤새워 양을 치던 목자들, 별의 인도로 동방에서 예물을 준비해 찾아온 박사들,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리라는 성령의 예언을 받은 시메온(루카 2,26), 밤낮으로 단식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섬겼던 ‘한나’라는 예언자뿐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아기 예수님 탄생을 알았음에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아기 예수님을 기다렸으며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실 지도 잘 알고 있었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태어나신 아기를 죽이려고 했던 헤로데 임금과 그 병사들입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구원자가 가까이 계셨지만 그들은 결코 구원자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과 기대가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바로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고, 관심이 있으면 멀리 있어도 잘 보이는 법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요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의 눈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 시대의 이러한 어리석음이 그대로 우리 시대에도 답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이 밤을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아무 생각 없이 들뜬 분위기에서 보내고 만다면 우리는 나에게 오신 예수님을 결코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우리들의 이웃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우리 자신들이 욕망을 따르는 삶에서 길을 틀어 하느님의 길을 따르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나만을 생각했던 이기심에서 벗어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약한 자, 병든 자, 헐벗고 굶주린 이들과 감옥에 갇힌 자들과 함께 계셨고, 그들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5장).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들 사이에 보내 주신 이 밤과 같이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이웃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고, 그들과 함께 임마누엘의 하느님이 지금 이 땅에 내려오셨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바로 우리들의 욕심을 버리고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려는 마음의 준비부터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여 사랑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는 헤로데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맞이한 목자들의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부터 변화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하고, 눈이 맑아져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과 사랑을 함께 나누며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주시기를 청하며 이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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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나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말씀과 전례 2008-11-17 3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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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6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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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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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이유-필독**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2007-12-13 2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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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7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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