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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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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 4 주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제 1 독서: 이사 7,10-14

제 2 독서: 로마 1,1-7

복     음: 마태 1,18-24



해설



  오늘 전례는 온통 경이와 ‘놀라움’의 징조로 뒤덮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게서는 우리늬 역사 속에 또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오실’ 때 항상 당신 도래의 ‘흔적’을 남기신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참으로 그분이신지 알 수 있으며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 바로 그분이신지를 알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놀라운 일’ 또는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질서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제 1 독서는 문체상으로 보더라도 야훼께서 ‘징조’를 보여주신다는 사실에 집중되고 있다. 그런데 아하즈왕은 그 징조를 거절한다. 그 이유는 순전히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자기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될까 두려워서이다:“아닙니다. 나는 징조를 요구하여 야훼를 시험해 보지는 않겠읍니다”(이사 7,12).

  복음은 그 ‘징조’가 사람들이 원하지 않았을 때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됨을 보여주고 있다:“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마태 1,23). 요셉 자신이 이 놀라운 일에 당황하고 있는 듯하다!

  제 2 독서도 복음의 의미 전체를 그리스도께 집중시키면서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놀라움’의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에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로마 1,3-4).



“너는 야훼 너의 하느님게 징조를 보여달라고 청하여라”



  이제, 이러한 놀라운 일, 경이스러운 일의 배경을 보다 가까운 독서 내용으로부터 분석해 나가기로 해 보자.

  제 1 독서가 언급하고 있는 이야기는 시리아와 에브라임가느이 전쟁사의 일부이다. 다마스커스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완 베가가 아시리아를 거슬러 동맹을 맺기로 결정하고서 유다의 왕 아하즈도 거기에 끌어들이여 했다. 아하즈가 반대하자 그들은 유다의 왕 아하즈도 거기에 끌어들이려 했다. 아하즈가 반대하자 그들은 유다 왕국을 쳐서 다마스커스궁의 한 아리메아인인 익명의 ‘타브엘의 아들’(이사 7,6)을 그의 자리에 앉히려고 계획한다.

  이 모든 일에 놀라서 아하즈는 주님을 믿으라고 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직접 아시리아인들의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다마스커스와 사마리아 왕국을 격퇴해주기는 했지만 동시에 유다를 한동안 속국으로 삼았다(733-732). 아하즈가 이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재난으로 나타났으며, 무엇보다도 특히 종교적 관점에서 우상숭배 의식이 보다 쉽게 침투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점에서(2 열왕 16,1-20 참조) 더 그렇다.

  예언자 이사야가 그 왕에게 하느님만을 믿으라고 권고하면서 피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서지 못하리라”(이사 7,9), 정치조차도!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추상적 믿음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을 적들의 모든 침략에서 보호하시고 구해주실 수 있으시다는 사실에 대한 굳은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의 왕자를 빼앗을 수 있는 것처럼 여겨젺던 그 ‘타브엘의 아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아하즈를 야훼께 대한 믿음으로 서둘러 이끌어 들이기 위해 그에게 신적 보호의 보증으로서 어떤 ‘징조’ -지하 깊은 데서 오는 것이라도-를 청하라고 제안한다:“너는 야훼 너의 하느님께 징조를 보여달라고 청하여라. 지하 깊은 데서나 저 위 높은 데서 오는 징조를 보여달라고 하여라”(11절). 그러나 아하즈왕은 자기의 정치적 계산(아시리아와의 동맹)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는 종교적 이유를 위선적 구실로 내세워 ‘징조’를 요구하기를 거절한다. 신앙은 인간적 계획과 일치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야훼께서는 여전히 ‘징조’를 보여주신다. 그 지조는 바로 그 왕이 신앙이 없음으로 인해 야기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일어나야 할 징조다:“다윗왕실은 들어라.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도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도 성가시게 하려는가?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늘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3-14절).

  아하즈왕은 자기 나라를 외국의 침공에서 구하고자 했다:그런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가! 즉 그가 구원을 요청했던 아시리아의 억압을 받게 된다 그는 다윗가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한 무명의 인물에게 왕위를 빼앗길가봐 두려웠다.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 야훼께서는 다윗가문을 이어주신다. 그러나 아하즈왕이 생각해썬 정상적인 계승방법이 아니라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하신다. 보다시피, 하느님은 인간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충실성의 의무를 저버리심이 없이 인간적 계산에 의한 계획을 뒤집어 놓으신다. 즉 오직 인산들이 당신의 ‘길’을 따라 것고 당신의 약속과 지혜를 보다 더 신뢰하도록 하고자 하신다.



“동정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 유명한 ‘동정녀’(ha-'almah)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우리 여기서 학자들이 다루는 연구분야에 깊이 들어가지는 않겠다. 다만 우리가 말할수 있는 것은 교회가 바로 오늘 전례의 복음으로 제시하고 있는 마태오복음(1,22-23)에 따라 그녀가 남자를 모른 채 동정녀의 몸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시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라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마태오 복음사가는 히브리인들이 제시했던 명백한 징조를 메시아적 표상으로 이미 앞서 해석했던 70인역(기원전 3-2세기)에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원문을 조금도 다치지 않고 있다.

  신약성서 저자들에 의한 구약성서의 재해석이 신자들에게 있어서 규범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는 사실은 별문제로 하고 실질적으로 본다해도 마리아는 이사야의 그 구절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된다. 사실, 그녀의 모성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볼 때 참으로 위대한 ‘징표’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은 ‘처녀’이며, 그 아들은 그녀가 이름을 지어줄 만큼 그녀에게 속해 있으며, 임마누엘(‘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는 그의 이름은 장차 메시아로서의 그의 사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역사살 어떤 인물-아하즈의 아들이며 열심한 왕 히즈키야로부터 시작해서-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되실 수 있도록 그 도구 역할을 실현시킨 사람은 없다!

  이 모든 내용은 문맥상으로 내리느 결론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하즈 왕이 다마스커스의 무명의 한 찬탈자에 의해 다윗 가문이 끊어질까봐 심히 염려하는 것을 보았다. 예언자 이사야는 ‘다윗 가문’(13절 참조)이 계속될 것이며 하느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메시아를 꽃피울 것이라고 그에게 예언한다. 그 메시아가 ‘살과 피’로써 실현시킬 하느님의 계획을 앞서 실현시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메시아는 순수한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역설적이고도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우리 가운데 오실 것이다. 이것이 메시아의 동정 잉태와 탄생의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이렇게 볼 때, 사실상 이사야 예언의 실현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대한 해석이라고도 볼 수 있는 오늘 복음의 내용을 이해하기는 더 쉬워질 것이다. 여기서 그 ‘징조’의 모든 신비스러운 점과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 ‘동정녀’가 있었는데 그녀가 어머니가 되었다. 즉 성령으로 인해 한 아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 아들은 하느님과 또한 우리 인간들과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모양으로 인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거기에 다윗가문 출신의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메시아에게 혈통으로서 다윗 가문을 이어준 것이 아니라 법적 동의와 무엇보다도 특히 사심없는 사랑과 봉사로써 그 가문을 이어주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놀랍고도’ 경이스러운 사건을 진귀한 상황이 연출해내는 새롭고 극적인 내용에 매료된 호기심 가득한 해설자로서보다는 그 사건들 자체의 ‘신비스러운’ 의미를 파악하기를 지향하는 신학자로서의 제어된 문체로 기술하였다. 그 극적 요소는 비록 신적이지만 또한 아주 인간적이기도 한 그 이야기의 인물들 가운데 적어도 어떤 인물의 마음상태를 이해하는 데는 절대로 필요한 요소이다.

  오늘의 복음 대목은 역사적 사료 외에도 믿음(신앙)의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그 첫째 요소는 이미 말한 대로 예수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인간적 차원에서 말하는 아버지가 없고 동정녀이신 어머니 자신도 오직 성령에 의해서 그를 잉태한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의 인간적 체험의 규범에 따른다면 마리아도 온전히 그의 어머니가 되지는 못한다!

  우리는 이 대목이 마태오복음의 시작이 되고 있는 예수의 족보에 관한 긴 서술에 뒤이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1).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족보에 관한 서술로써 예수를 앞서 이루어진 모든 구원사 가운데 한 ‘평범한’ 고리 정도로 생각할까 염려되어, 예수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완전히 ‘예외적’ 요소임을 말하기에 이른다. 즉 예수는 예견되고 기대하던 존재이지만 완전히 ‘규범을 벗어나 그것을 초월해 있는 존재이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다윗 가문이 하느님께 한 양자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메시아를 태중으로부터 당신 아들로 태어나시게 하시며 그를 다윗 가문에 양자로 주신다”(M. Kramer, Die Menschwerdung Christi nach Matthaus(Mt.1), in Biblica, 45 (1964), pp.1-50:이 대목은 p.48).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시지만, 우리 인간들을 섬기러 오신다. 이것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신앙의 둘째 요소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메시아에게 부여되고 있는 똑같이 상징적 의미를 지닌 이중적 명칭에 의해 드러난다:“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21절). 사실, 우리는 예수라는 명칭이 히브리 말로 여호수아(Jehoshu'a) 즉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라는 말의 번역임을 알고 있다. 예수께서 구원하실 그 ‘백성’은 물론 하느님의 용서를 끊임없이 체험하고 있는(9,8;18,15-18 참조)교회를 말한다.

  또 다른 하나의 명칭은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에 따른 임마누엘이라는 명칭인데, 복음사가는 그것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23절)로 번역하고 있다. 이 두 번째 명칭은 앞의 명칭보다 더더욱 밝히 메시아의 신비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게서 우리 가운에 오시어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 되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대신하여 나타나거나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분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다인 자신이 하느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시므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지만 인간의 주도권을 말살기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들어 높이신다. 이것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앙의 셋째 요소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협조를 구하셨다. 그것은 결코 쉽거나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그녀의 잉태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체면을 살려주려고자 하는 요셉(19-20절 참조)의 눈에까지도 부정한 여인, 거짓된 여인으로 비치게 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다윗 가문도 잇고 인간적 체면도 살릴 수 잇는 상당히 값지면서도 극적인 협조를 요청하셨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가운데 오심은 이처럼 크나큰 신앙과 또한 어쩌면 그보다 더 큰 고토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도래’와 그리고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는 그분의 성탄은 그분의 사랑을 맏는 모두의 용기있고 폭넓은 협조 없이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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