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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14:28
분 류 대림시기
ㆍ추천: 0  ㆍ조회: 3008      
IP: 211.xxx.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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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 3 주일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제 1 독서: 이사 35,1-6a.10

제 2 독서: 야고 5,7-10

복     음: 마태 11,2-11



해설

  이미 성탄이 문 앞에 다가와 그 찬란한 빛으로 우리를 감싸기 시작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림 제 3 주일의 전례는 전체적으로 기쁨에 들떠 있다. 입당송은 바울로 사도가 감격적인 어조로 필립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보낸 권고의 말을 반향시키고 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라”(필립 4,4-5). 또한 본기도도 신자들의 마음속에 기다림과 환히의 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천주여, 당신 백성이 지금 주님의 성탄 축일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사오니, 우리로 하여금 이 구원의 큰 기쁨을 맞이하여,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성대한 축제를 정성되이 지내게 하소서.”

  오늘의 독서들도 역시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보다 뚜렷하고 풍부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원래 그 내용들이 우리의 상황과는 다른 구체적인 상황을 다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것들의 주된 주제는 여전히 ‘기쁨’이다. 그 기쁨은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이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구원하러 오신다”(이사 35,4)

  그러므로 그 ‘기쁨’은 우리를 충동질하거나 들뜨게 하는 어떤 사실 앞에서 느낄 수 있는 피상적이거나 단순히 감정적인 그런 기쁨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의미 가득한 ‘기쁨’이다. 왜냐하면 그 기쁨의 동기가 우리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만나러 오시며 악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잡아일으키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되었음’을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획득한 기쁨이 아니라 베풀어진 기쁨이요, 이미 그 자체로서 구원의 ‘열매’요 ‘징표’가 되는 ‘기쁨’이다. 이러한 까닭에, 거룩한 삶을 사는 위대한 이들은 -성 바울로, 성 프란치스코, 교황 요한 23세,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등- 생활의 어려움과 고통 중에서도 기쁨의 바다에 사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게서 오신다. 그리고 오시는 그분과 함께 기쁨이 온다. 당신이 그분을 원하면 그분은 당신 가까이에 계신다. 당신이 그분에게 말하지 않더라도 그분은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당신이 그분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분은 더더욱 당신을 사랑하신다. 당신이 길을 잃어버리면 그분이 당신을 찾으러 오신다. 당신이 걸어갈 수 없다면 그분이 당신을 데려다주신다. 당신이 슬퍼 운다면 그분이 당신을 위로해주시기 때문에 당신을 행복하다”(don Primo Mazzolari).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제 1 독서는 야훼께서 뭇 민족들과 특히 에돔을 거스려 계속하셔야 될 그 무서운 결정적 싸움에 대한 이야기(이사 34장)와 뒤이어 나오는 예루살렘이 찬란한 옛 빛을 완전히 되찾아 재건됨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사 35장)을 담고 있는 소위 이사야의 ‘소묵시록’(이사 34-35장)의 일부를 전해주고 있다.

  확실히, 제 2이사야(40,29-31;41,19 등)와의 뚜렷한 중복을 피하고 있는 이사야 예언자는 앞서 적에 의해 폐허가 되어버리고 비탄 속에 고립되어 승냥이만 살고 있는(35,7) 성도의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장면이 바뀌고 도시는 유배지에서 사람들이 돌아옴으로써 활기를 되찾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도시에서 갊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믿기조차 어려워한다. 지금까지 당한 국가적 붕괴에 너무나 낙담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의 위로의 말은 특별히 이처럼 ‘겁에 질려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황무지야, 내 기쁨을 꽃피워라... 기뻐 뛰며 환성을 올려라... 늘어진 두 팔에 힘을 주어라.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꼿곳이 세워라. 겁에 질린 자들을 격려 하여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너희의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다. 하느님께서 오시어 보복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때에 소경은 눈을 뜨소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그곳에 크고 정결한 길이 훤하게 트여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라. 야훼께서 되찾으신 사람이 이 길을 걸어 시온산으로 돌아오며 흥겨운 노래를 부르리라. 그들의 머리 위에선 끝없는 행복이 활짝 피어나고 온몸은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들어 아픔과 한숨은 간데없이 스러지리라”(이사 35,1-6a,8a,10).

  보다시피, 사람들과 사물들 모두가 ‘환히’로 휩싸여 있다. 하느님의 ‘구원’은 직접적으로는 오직 그분이 종살이의 장소와 유배지로부터 다시 모아들이시어 먼데서 되돌아오고 있는 ‘해방된 이들’에게만 해당된다(10절). 그렇지만 실제로는 성서 본분에 나오는 여러 가지 시적 개념들이 표현하고 있듯이 -꽃이 피고 있고 ‘가르멜의 영광’ 즉 푸르르고 그늘이 많은 나무들도 뒤덮여 있는 사막; ‘늪이 될’ ‘뜨겁게 타오르던 땅’ 그리고 ‘샘터로 바뀔’ 메마른 땅(7절)-변모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을 감싸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기쁨’을 창출해내는 ‘구원’의 개념을 좀더 형상화시키기 위해 보는 장님, 듣는 귀머거리, 말하는 벙어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6절). 이 표현들은 구원이 인간 전체를 -육체까지고-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사실, 어떤 종류의 병이든간에 병이라는 것은 신체 전체와 지체 사이의 구조적, 관계적 불균형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그 표현들은 또한 기쁨과 구원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구원이 기쁨을 솟아나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쁨이 구원을 확장시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되는 상황에까지도 그것을 퍼뜨려 나가는 것인가? ‘기적’ -예수에 의해 치유된 ‘장님’ ‘귀머거리’들을 생각해 보라!-은 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일종의 구원의 표지이다. 그러므로 기적이 일어날 때 그것은 놀라움과 동시에 기쁨을 야기시킨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이와 같은 내용이 마태오에 의한 오늘 복음(11,2-11)에서 재차 조명되고 있다. 오늘 복음은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이 예수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인지 어떤지를 알기 위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 대목은 이해하기가 그리 쉬운 대목은 아니지만, 여기서 전제하고 있고 동시에 촉구하고 있는 기다림의 분위기라든가, 세례자 요한을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마태 3,3 참조) 자로 다시 제시하는 이유라든가 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여기서 좀 놀라운 사실은 요한이 예수를 의심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요한은 감옥에 있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마태 11,2-3). 비록 이 구절에느 정확히 메시아를 지칭하는 표현은 없지만(창세 49,10;시편 118,26;말라 3,1-3에서는 ‘오셔야 할 분’이라는 개념이 실제로 ‘메시아’라는 개념과 연결되고 있다) 문맥상으로 볼 때 메시아를 가르키고 있다. 3,11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내 뒤에 오시며 나보다 훌륭한 분”이라고 말했다. 요한이 의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예수의 대답이 자신에 대해 “의심을 품지 말라”(6절)는 권고로 끝맺어지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세례자 요한은 예수의 어떤 점을 의심했단 말인가? 아마도 예수가 아직은 종말에 오실 심판자-“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마태 3,12)-로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 강력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요한도 역시 하느님께 그분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 보다 훌륭한 면을 갖추고 있기를 은근히 기대했던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세례자 요한은 그때에 마케론데(Macheronte)의 요새 안에 있는 감옥에 있었다.(Giuseppe Flavio, Antichita giudaiche, ⅩⅧ, 116). 메시아라면 그를 위해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 말인가?

  만약 이러한 해석이 옳다고 한다면, 세례자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체계를 세워놓지 말고 그리스도를 만나보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를 우리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또 나타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쓸슬히 외양간에서 태어나셨다고 하는 사실이, 행복, 경제적 안정, 사회적 특권, 출세 등을 추구하는 우리의 자세를 비난할 때 우리가 그분께 대해 갖게 되는 ‘반감’〔의구심〕을 생각해 보라. 분명히 우리의 입장에서는 비천함과 나약함의 표징보다는 능력의 표정을 지니신 메시아상이 더 편리할 것이다!

  그러나 나약함의 표징이라고 여겨지는 그런 것들이 더더욱 강하게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이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이 보낸 사람들에게 하시는 대답의 내용이다:“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5-6절).

  예수의 이 말씀들은 분명히 이사야서 가운데 몇몇 대목들(26,19;29,18;61,1)과 관련이 있다. 그 중 한 대목을 바로 제 1 독서에서 보았다(이사 35,5-6). 예수는 ‘심판자’로서의 메시아이시기 전에 ‘구원자’ ‘해방자’ 로서의 메시아이시다. 바로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불의 외에도 재앙이나 불행을 온통 뒤집어쓰고 있는 듯한 보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 즉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가난한 이 그리고 죽은 이들까지도 가까이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행하시는 ‘기적들’은 ‘권능’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특히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일치, 구원과 동참의 행위이다. 그분은 또한 종말에 심판자로 오실 분이시지만 그보다도 앞서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신”(마태8,17;이사 53,4 참조)분이시다. 이런 까닭에, 세례자 요한은 예수께서 드러내 보여주시는 메시아의 ‘표징’들-예언자들의 메시지와 완전히 일치하는-을 보다 잘 이해하도록 요청받고 있으며 그 결과 더 이상 그분을 ‘의심할’ 여지를 갖지 않게 된다.

  이제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뒤에 그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으신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을 보러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그런데 씰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성서에, ‘너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네 갈길을 미리 닦아 놓으리라’ 하신 말슴은 바로 이 사람을 가르킨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7-11절).

  분명히 세례자 요한의 ‘위대성’은 그의 강인한 정신력과 엄격한 참회의 정신에 있다. 그래서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고 나약하고 비굴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나아가 그의 위대성은 무엇보다도 특히 그가 구약성서의 두 대목 즉 출애굽기(23,20)와 말라기 예언서(3,1)에서 미롯되고 있는 메시아의 ‘선구자’라는 사실을 보고 계신다. 전자에서는 야훼게서 당신 사자를 보내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게 하시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고, 후자에서는 야훼께서 사람들이 당신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킬 사자를 당신이 오시기 전에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바로 이러한 고귀한 사명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비록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실현될 ‘하늘나라’의 일원은 아닐지라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11절) 모든 사람들 가운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하늘나라의 시간은 그 나라를 예비한 모든 시간을 온전히 초월한다. 사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더 크다!

  그러나 그렇다고 애서 요한의 기쁨이 감고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명은 신랑이 오심을 알리는 것이었고 이것이 그가 행한 일이다:“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형제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심시오”



  요한의 기쁨은 우리를 엄습할 수 있는 불확실성과 의구심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끝내 기다림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때때로 기다림은 아무 결실도 가져다 주지 않거나 그대로 무산되어버리고 말며 또 그 기다림을 알려야 할 ‘표징’들의 의미가 약화되어버리거나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 생각되기도 한다. 대체로 우리의 생활에 연관되어 있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 신자는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즉 그의 기다림은 인내로와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천천히 완성되어가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마음 자세를 가추어야 한다.

  이에 관해 야고보는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는 부자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내리기를 성급히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던 그의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형제 여러분, 주님게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농부는 땅이 귀중한 소출을 낼 때가지 끈기있게 가을비롸 봄비를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읍니다”(야고 5,7-8).

  농부라는 개념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역동적 힘을 인식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크리스찬적 인내심은 운명적인 체념이 아니라 우리 안에 또 이 세상 안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도록 그분과 활발히 그리고 끈기있게 협력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커다란 기쁨이 있다. 즉 어떤 일이 잇더라도 하느님게서는 역사를 진행시키며 당신의 사랑과 심판의 때를 ‘가까이 접근시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음에서 큰 기쁨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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