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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09:59
분 류 대림시기
ㆍ추천: 0  ㆍ조회: 5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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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4주일

1. 정철수 신부 (가) / 2         2. 조원행 신부 (가) / 3

3. 김정진 신부 (가) / 6         4. 함세웅 신부 (가) / 7

5. 김현준 신부 (가) / 9         6. 강길웅 신부 (가) / 11





  1.               대림 제4주일(가) 마태 1,18-24 누가 대장부인가?

                                                  정철수 신부



신중하게 하느님의 일을 식별하자.



오늘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절의 마지막 주일인 대림4주를 맞았습니다.

교형자매 여러분은 모두 주님의 오심을 맞는데 에 손색이 없도록 그 동안 잘 준비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기다린다는 일은 지루합니다. 더구나 절실하게 만나야 할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더욱 지루하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다리던 사람을 만났을 때의 즐거움은 기다리던 지루함이, 그리고 그 초조함이 크면 클수록 더 커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림절 동안 주님의 오심을 절실하게 기다리셨던 분들은 주께서 오시는 날에 크나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정말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뭐가 그리 아슬아슬하냐구요? 당시 유대 풍습에 의하면 간음한 여자는 돌로 쳐죽였다는 사실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요셉성인께서 까딱 잘못 생각하셨더라면 성모 마리아는 뭇 사람의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물론 대중의 예수님 역시 같은 운명이었겠지요.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구세사에 큰 역할을 한 분들을 여럿 들 수 있습니다. 구약의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여러 예언자들을 들 수 있고, 구약에 이어 신약이 시작하는 성자의 강생에 성모 마리아와 성요셉의 큰 역할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예수님의 양부인 성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전 신약성서를 통해서 성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3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 낭독 시에 들은 대목에서 그리고 호적을 하러 유다지방에 가신 것, 마지막으로 성탄 직후에 헤로데의 손으로부터 피해 이집트에 피신하신 것, 이것이 모두입니다. 그러나 이 3번 모두가 성자의 강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우리의 성경대목에 눈을 돌려봅시다.

성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는데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약혼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자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이 임신을 했다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약혼녀로부터 배신당한 사실 앞에 복수를 꾀할 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당시의 성요셉에게는 단 한마디의 고발로 당장 돌에 맞아 죽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복수의 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자다운 신중함과 너그러움 그리고 겸손함을 지니신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성요셉의 인간됨이 바로 성자의 강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성요셉이 꿈에서 어렴풋이 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생시에 생생하게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데는 성요셉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관심하게 지내버리고 맙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사소한 이익들 때문에 하느님을 배반하기까지 합니다. 이래 가지고서야 어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성서에서 본 성요셉과 같이 우리의 일상생활이 모두 그리스도의 사업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에게 비록 손해되는 일이 있더라도 감수 인내하며, 각자 일상생활 안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노력합니다. 이웃과의 사소한 오해나 시비거리를 진정 하느님의 왕국을 위해서 모두 참아 받고 성요셉처럼 너그러움을 가지고 겸손하게 살아갑시다. 그렇게 살면 그 안에 주님이 현존해 계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로써 자주 주님과 대화하고, 성체성사를 합당한 준비 후에 자주 배령함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가까이 살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야만 주님은 우리에게 낯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친한 벗이 될 것입니다.



종말의 날 엄위로운 심판관으로 다시 오실 우리의 주님을 기다리며 일상 생활에 충실하고, 기도와 성사에 충실함으로써 주님과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심판 때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 어깨에 다정스럽게 손을 얹고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주님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절치통곡함이 있을 것이고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즐겨 용약하게 될 것입니다.











 2.            대림 제4주일(가) 마태 1,18-24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조원행 신부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고 오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지금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기대하며 아울러 준비하는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을 준비하기 위해 정부에서 간소화를 부르짖고 있지마는 그래도 상점 백화점으로 몰려들어가 한 아름씩 사들고 나옵니다. 백화점 정면의 대형 산타클로스 호화찬란한 크리스마스 나무 장식은 성탄절이 다가옴에 따라 길거리의 사람들을 더욱 설레게 합니다. 비록 길거리의 징글벨 노래 소리가 전보다 줄어들었어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기쁨과 웃음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예술제 등으로 성탄을 준비하고 있고 어른들은 어른들 나름대로 방을 꾸미거나 성탄나무 장식을 하거나 해서 성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오실 날은 사흘로 임박했습니다. 구원의 때, 사랑의 날이 박두했습니다. 만민을 다같이 동등하게 구원하시고 사랑을 베푸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살고자 하십니다. 이렇게 큰 축복을 가져오시는 예수님을 합당하게 준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임마누엘을 합당하게 준비하고 있는지 생각할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현대인의 대다수, 더구나 많은 신자들까지도 임마누엘 내림의 본 뜻을 잊어버리고 외도하는 수가 있습니다. 성탄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화려한 축제 기분일 수가 많고 아울러 오가는 선물 보따리 아니면 적어도 성탄카드, 심지어 외부에서는 이런 기회에 뇌물을 통해 한 자리 따보자는 야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도 누구나가 공인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볼 때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결코 이렇게 사치스럽고 화려한 분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안에 내려오시는 예수님은 일부 여유있는 사람에게만 오신 것은 더욱 아닙니다. 또 예수님은 물질적 영광을 주시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동등한 사랑을 주시어 모든 이 서로서로가 사랑하게끔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제 대림절 막바지를 지내면서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 볼 때 물론 아무도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성탄을 준비한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큰 선물을 상사에게 갖다드리면서 “이것은 뇌물이 아니라 그 동안의 감사에 대한 인사일 뿐이다”하고 생각할 것이고 집안을 멋있고 아늑하게 꾸미면서 “좀더 알찬 성탄을 위해” 아니면 “아이들 교육을 위해” 또는 “오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맞이하기 위해” 등등 고상하고 바람직한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또는 대부분은 물가파동 등으로 인한 경제적 난관 때문에 우리 집에서는 아무 것도 사치스럽거나 화려하게 할 것이 없으니 나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진리를 잊고 있습니다.



복음에 (의인) 요셉은 꿈을 꾸기 전에 이미 마리아의 일을 그냥 덮어두기로 작정하였었습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볼 때 약혼녀의 배신은 혈기왕성한 남자에게 있어 보통 참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론 꿈에 천사가 나타나 해명해 주었기 때문에 오해는 풀렸지마는 이미 몽중해명 전에 남의 잘못을 용서해주고 더구나 눈감아 주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은 참된 진리를 잊고 있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성탄의 성대한 준비나 자기 나름대로의 성실한 의도 모든 것이 물론 다 필요한 것입니다. 왕중 왕이시며 우리의 하느님이신 당신이 몸소 우리에게 오시는데 아무리 성대하고 성실한 준비라도 그 오심에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칫 잊기 쉬운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께서 마치 다 개인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나와 친한 주위 사람들에게만 오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 사치스럽게 물질적으로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나 즐거운 성탄이 와도 경제불황으로 혹시 꼬마들이 용돈이나 달라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는 우리에게나 이 추운 날씨에 육교 위에서 빨갛다기 보다는 까만 살을 내놓고 떨고 있는 거지 아이 위에나 공평하게 오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아울러 우리에게 우리 몇몇 친구나 잘 아는 친지들만이 아니라 지하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털구두만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손을 내밀고 엎드린 모녀에게까지도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동정이 머물기를 강력히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실로 지금은 우리 모두의 사랑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것도 받기만 하는 사랑이나 또는 주기만 하는 사랑 이것보다 서로서로의 상호적 사랑을 요구하는 때입니다. 물론 상호적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는 각자가 자기보다 다른 이에게 눈을 돌려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유한 사람의 의무만은 아닙니다. 부유하건 가난하건 예수님의 공평한 사랑을 아는 우리 모든 신자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물론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의 은혜로 모아진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주어야만 하느님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이 받기만 하는 것은 더욱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는 것을 주라 하시지 않고 자기의 것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친한 친구를 사랑하는 것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신 것 같이 남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요긴한 것이라도 자기보다 더욱 필요한 사람에게 줄 때 하느님의 영광은 더욱 빛나고 그 공이 알차게 천주 대전에 기록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부자이건 가난한 이건, 또는 길거리의 소년이건 간에 모든 이의 가슴에 스며나갈 때 진정한 성탄이 있고 그야말로 임마누엘이 우리 안에 완전하게 머무르실 것입니다.

 3.           대림 제4주일(가) 마태 1,18-2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예고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 마리아에게서 탄생되리라는 가브리엘 대천사의 예고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의 독생성자인 예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신다는 것은 인류 역사의 일대 충격적인 경사로서 인간세계에 대전환을 몰아오는 획기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비천한 인간이 되신다는 사실보다 더 심한 비하와 겸허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놀라 기절한 만한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우리들 인간을 사랑하시고 은총과 자비와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예수님 자신도 인간으로 화신하여 구원사업을 당신 사명으로 여기시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기꺼이 부르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신 점에 우리는 더욱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들 인간에 있어 일대 희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원조 아담하와가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른 탓으로 천국의 문이 굳게 닫혀 버려 어떠한 힘으로도 그것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벨의 의로운 피도, 모세의 열성도, 아브라함의 굳은 신앙도, 예언자들의 충성도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만이 사람이 되셔서 당신의 보배로운 피와 죽음의 대가로서만 능히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의 성자들이 4천년 동안이나 메시아 구세주를 기다리는데 얼마나 애태우며 열망하였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자 여러분! 전 인류가 이처럼 고대하던 구세주께서는 급기야 이 세상에 탄생하시리라는 예고가 있고 그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기쁨과 희망과 평화와 행복을 담뿍 갖다 주시는 예수님이 내려오십니다. 그분을 맞이하는 우리의 심정은 어떠해야 하겠으며 어떤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들레헴 말구유에 가난하게 탄생하셨습니다.



왕중의 왕이시면서도 호사롭게 왕궁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서민층보다도 못하게 쓸쓸한 외양간에서 외로이 태어났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자라서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좋아하시며 기쁜 소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하셨습니다(마태 11,5). 또 그의 설교의 중심사상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마태 5,3). 언제나 불우하고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신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성탄날 밤에 고요히 오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그의 길을 같이 걸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가난하고 불우하고 불쌍한 동포들이 많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바로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크리스천들은 보육원이나 양로원, 혹은 병자들, 감옥에 갇혀있는 자들은 찾아서 위안과 희망을 불어주며 따뜻한 손길을 펴 줍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님께 해드리는 정신으로 기꺼이 봉사하며 일에 보람을 느낍니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와서 영원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맞아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 25,35 이하).



이같은 예수님의 고마운 말씀에 선한 자와 의인들은 <예수님!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대접해 드렸습니까>하고 물으니 <너희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아기를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은 깨끗하고 불우한 자를 도와줄 줄 아는 가난한 정신이 요구되며 아쉽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안을 안겨주는 크리스마스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번 성탄 축일을 계기로 사방에서 본당의 온정과 원조를 청하여 왔습니다.



우선 우리 마음이 깨끗하여지고 아기예수를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앞서야 하겠습니다. 그리된다면 다른 지차의 것은 절로 따라올 것이고 이번 크리스마스가 정말 평화와 축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아멘.











 4.            대림 제4주일 <마태 1,18-24>         예수 탄생의 경위

                                                       함세웅 신부



대림절 4주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메시아가 탄생한 그 연혁을 오늘 다시 아로새겨 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한 하느님의 위대하심,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아담과 에와, 호기심 때문에, 교만 때문에, 불성실 때문에, 아차 한 번의 실수, 그 실수가 인간에게 고뇌의 길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비극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고뇌와 비극 속에서 하느님은 하나의 불빛을 제시하셨습니다. 아주 멀리 있는 불빛, 메시아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벨을 죽인 카인의 살해 사건, 노아의 홍수, 바벨탑의 이야기, 어찌 보면 인간은 죽이고 질투하고 또 하느님께 심판을 받으면서도 어차피 하늘을 대적하는 인간 우상화의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높은 건물을 세울 줄 알지만, 허물어진 바벨탑의 이야기를 잊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떠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가? 금단의 열매를 계속 따먹지는 않는지? 무죄한 아벨을 또 죽이지는 않고 있는지? 또는 순 인간 중심으로 외적인 탑만을 올려 쌓고 있지는 않는지?

  

여기,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부모와 친척을 떠나 내가 제시하여 줄 저 땅으로 얾겨 가거라!"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은 계속 나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내가 떠나야 할 땅, 그것은 내 이기심, 욕심, 허영심, 죄악의 생활, 불의의 생활일지 모릅니

다. 내가 꼭 옮겨가야 할 땅, 그 땅은 나에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헌신적 삶, 양심적 생활, 사랑의 생활입니다. 아브라함은 선뜻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였건만 나는 주저하고 망설이고 내 묵은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의와 죄악을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 그에게는 노예 근성이 남아있습니다. 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신 하느님의 업적을 보면서도, 한 끼니의 밥 때문에, 또는 고기국 한 그릇 때문에 묵은 생활에 미련을 갖고 있는 나, 나는 하느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옹고집장이일지도 모릅니다. 사막에서 잠간의 괴로움이 너무나 힘들기에, 멀리 있는 불빛의 땅, 회망의 땅, 행복한 약속의 땅까지 가야 할 여정이 너무나 멀기 때문에 원망과 탄식과 불평을 한 이스라엘 백성, 그 백성의 불신앙을 꾸짖고 안타까와하면서도, 내가 그러한 노예 근성의 장본인이라는 것은 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한심한 신앙인입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이러한 인간을 저버리지 않고 기다리며 부르십니다. 그리고 기적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예언자, 왕, 현자들을 통하여 계속 무쇠 같은 백성의 마음을 녹이시려 노력하십니다. 때로는 사막에서, 때로는 귀양살이와 유배 생활에서, 때로는 전쟁의 비참과 굶주림을 통해서, 때로는 폭압과 폭정을 통해서, 때로는 폐허를 통해서, 이 백성을 단련시키시고 교육시키셨습니다. 모두가 실망하고, 모두가 좌절감을 갖고, 모두가 하느님을 떠나, 방탕한 생활, 불의한 생활, 사치와 허영, 비양심적 생활을 해도 여기, 오로지 하느님만을 두려워하고 경외한 ‘작은 무리'가 있습니다.



‘작은 무리'는 이스라엘 구원의 보증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뵐 수 있는 특권을 가졌고, 그 ‘작은 무리'는 새로운 백성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멀리 반짝이던 불빛, 그 불빛에 나는 가장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나는 '작은 무리'중의 하나, 나에게는 권력도, 배경도, 재물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만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마음 때문에 나는 행복하고 기쁘고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만민의 왕, 우리의 구세주, 그분이 왕궁에서도, 집안에서도 아니고,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상태인 말구유에서 탄생되셨습니다.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을 진정 노래할 수 있는 신앙인일진대, 나는 내 주위에 있는 가장 비천한 형제에게 미소를 지어야 합니다.

  

다윗왕의 기도가 되울려 옵니다. “나는 호화스러운 왕궁(체드루스 집)에 살고 있는데, 하느님은(하느님의 궤) 천막 속에 계시다니 될 일입니까?" 















 5.           대림 제4주일 <마태 1,18-24>(가) 성탄을 기다리며

                                                       김현준 신부



우리 사제관 전화 벨소리는 좀 자주 울리는 편이다. 토요일 오후나 주일 오전은 더 자주 울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여기다 쓸 수 있는지 모르지만, 설악산을 찾아왔다가 ‘대자연 구경도 하느님 공경 다음'이라는 열심한 신자들이 미사 시간을 물어오는 전화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 연거푸 울리는 전화벨소리는 좀 다르게 느껴진다. 미사 시간을 묻는 전화가 아니다라는 것을 나는 안다. 기다리던 첫눈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도 겨울이 시작되는 12월 대림 첫주일 강론 때에 첫눈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주일학교 어린이 열명, 중․고등학생 열명에게 피자를 사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렇게 해마다 우리 성당아이들은 첫눈을 기다리고 그 첫눈 소식을 나에게 제일 먼저 알려준다. 작년에는 첫눈소식을 은진이와 상윤이가 제일 먼저 알려주었는데, 올해는 지영이와 경미가 알려준다. 나는 첫눈도 첫눈이지만 첫눈이 온다는 소식을 그래서 더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고 그 소식을 빨리 알리고 피자도 먹기를 기다리는 우리 아이들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세주 오심을 기다렸다.  오늘 대림초 4개가 다 켜진 것은, 그 기다리던 사간이 꽉차고 임박하였음을 알려준다, 그 기다리던 구세주 오심의 성탄의 첫 소식은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제일 먼저 알려진다. “다윗의 자손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불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마태 1,20-21)



        첫눈 기다리는 아이처럼



전능하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동반자로 불리어, 구원의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요셉은 비록 다윗 가문 출신이지만 나자렛 시골 사람이었다. 하느님은 그 요셉을 신뢰하였고, 그래서 인류 구원 사업의 중요한 배역을 맡기셨다. 박수를 많이 받고 주목받는 배역은 아니지만, 성탄의 막을 여는 몫이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육화'와 ’임마누엘'의 신비의 막을 열고, 막 뒤를 돌보는 몫이다. 요셉은 인간의 머리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일평생 자신에게 맡겨진 그 힘든 배역에 충실하며 드러나지 않게, 남이 모르게(마태 1,19)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오늘 복음 속의 요셉을 상기시켜주며, 또한 성탄이라는 무대에 출연하는 ‘나'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동시, 한편(동극 발표회․김종상)을 나누고 싶다.

'학급 동극 발표회에서, 무대에서 제일 오래 서는 배역을 제가 맡았다고 했을 때, 그렇게도 기뻐하시던 어머니께서 막상 오늘 발표회를 보시고는, 왜 그렇게도 화를 내셨어요? 무대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무슨 배역이냐고 하셨지만, 요란하게 꾸미고 나오는 왕자와 공주는 하지 못하고 하필이면 느티나무냐고 하셨지만, 이 동극에서는 느티나무가 제일 중요하다고요.

  

사건이 모두느티나무 밑에서 벌어지는 데, 제가 거기 서 있지 않으면 왕자나 공주도 소용이 없다고요. 팔을 높이 펴들고 서 있기가 힘들기는 했지만, 계속 무대에 선 것은 저 혼자뿐이잖아요. 여러 사람에게 박수는 받지 못했어도 제가 맡은 배역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느티나무 같은 사람 요셉        


느티나무의 모습이 요셉 같지 않습니까? 사람을 돌보는 하느님뿐만 아니라 사람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도, 느티나무 같은 사람을 제일 필요로 하지 않겠습니까? 성탄 전야제 행사나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이 느티나무의 배역을 맡은 어린이-요셉처럼 그런 마음가짐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얀 성탄! 눈이 와서 이 세상이 눈으로 덮인 하얀 성탄보다, 구세주 오심으로 이 세상과 인류가 죄와 어둠에서 구원되는(마태 1,21) 하얀 성탄이 어서 빨리 왔으면‥‥










6.          대림 제4주일 (가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강길웅 신부


사람들은 자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느님보다는 세상을 더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정 말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할 줄 아는 지혜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그 것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계산이 아니라면 인간의 큰 업적도 가치가 없게 됩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유다의 아하즈 왕이 인간의 계산만 했습니다. 그는 하느님보다는 우상을 더 섬겼고 하느님께 의탁하기보다는 자기의 외교적 수완이나 또는 세상의 지혜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라가 어려울 때 자기 아들을 죽여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기도 했으며 성전의 집기들을 갈취하여 이방인 나라에 선물로 주기도 했습니다.



이에 예언자 이사야가 찾아와서 그런 식으로 나라를 구하려 하 지 말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여 매달려 보라고 충고하면서 하느님께 어떤 징조를 구해 보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아하즈는, 자기는 차마 하느님을 시험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도움을 외면했습니다. 이사야는 여기서 다윗 가문의 왕들에게서는 어떤 희망이 보이지 않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다윗은 그야말로 훌륭한 왕이었지만 그러나 그 후대의 왕들은 하나같이 썩은 왕들이었습니다. 이에 이사야는 말하기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먼 장래에 한 사람의 탄생을 마련 할 것인데 그는 임마누엘로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의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느님의 속성을 가진 인간의 존재가 누구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려 온 임마누엘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 걷는 인생이 아닙니다. 아무리 실패했어도 버려진 인생이 아니며 아무리 큰 죄를 지어 교도소에 들어갔다 해도 포기된 인생이 아닙니다. 어떤 절망의 처지에서도 그분만 붙들고 뉘우치면 언제고 용서받을 수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처럼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으시며 또 앞으로도 늘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옛날에 한 열심한 신자가 살고 있었는데 착하게 살다가 천당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떤 날 지상에서의 과거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자기가 걸어온 발자국 옆에는 또 하나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더랍니다. 그는 비로소 자기 생애의 여정에서는 언제나 하느님이 함께 계셨음을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떤 때는 간혹 하느님의 발자국이 나타나 있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그 시기와 장소를 알아보니, 그때는 어김없이 그가 큰 곤란과 어려움 중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착한 영혼이 하느님께 여쭈어 봅니다. “주님은 제 생애에 언제나 함께 계셨는데 왜 제가 곤란 중에는 하느님이 함께 걸어주지 않으셨는지요?"



그러자 하느님은 대답하시길, “그때는 내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네가 나를 짊어지고 갔기 때문에 내 발자국은 없고 네 발자국만 있었던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가 어려웠을 때 그때가 바로 하느님을 모시고 걸었던 은혜로운 때였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내가 기쁠 때는 나보다 더 기뻐하시고, 내가 슬플 때는 나보다 더 염려를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역경을 만나서 어려울 때는 감격스럽게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믿고 의지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의지할 때보다 더 흐뭇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할 때는 하느님께 큰 기쁨이 되어 드리는 것이며, 하느님이 또 우리에게 의지하실 때는 우리에게도 큰 기쁨과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그 기쁨과 영광이 때로는 지독한 아픔과 슬픔으로 드러날 때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 존재를 맡기고 의지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때문에 더 큰 고난과 역경의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임마누엘의 탄생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 줍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 인생하고 안 계신 인생하고는 삶의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이 다르고 은혜가 다릅니다. 따라서 오실 주님을 경건하게 기다리면서 새해를 축복으로 활짝 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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