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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09:58
분 류 대림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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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4주일



7. 심용섭 신부 (나) / 13        8. 이한기 신부 (나) / 15

9. 김정진 신부 (나) / 16        10. 백명기 신부 (나) / 18

11. 최영철 신부 (나) / 20       12. 민병섭 신부 (나) / 22

13. 김성배 신부 (나) / 26       14. 결혼을 뛰어넘는 (나)/ 28

15. 강길웅 신부 (나) / 30       16. 이성우 신부 (나) / 31

17. 황철수 신부 (나) / 33       18. 교구주보 (나) / 34

19. 최인호 작가 (나 )/ 35       



7.            대림 제4주일 (루가 1,26-38) (나)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심용섭 신부



성모 마리아는 여성으로서 평범하게 사시던 분이었다. 어른으로 성장하여 약혼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루가 1,27)

그런데 어느날 은총을 가득히 받고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인사를 받게 되었다. 친구로부터 그런 인사를 받았다면 별말을 다한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인사를 받고는 ꡒ뭘요ꡓ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ꡒ이제 팔자 고치겠구나ꡓ또는ꡒ운수 대통하겠구나ꡓ하고 기뻐 날뛸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 천사의 말씀이, 지금까지 배워왔던 그분의 상식에 맞지 않았다. 가브리엘 천사가 언제 올까 하고 기다리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전하려고 그 천사가 나타났으니 성모님은 평정을 잃었다. 상식이나 습관에서 크게 벗어난 전혀 예견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성모님은 천사의 첫마디 인사에, 그때까지의 생각과 삶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흔들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새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인사말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계속 생각하였다.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성취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통하여 그 분을 뵈올 때 우리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는다. 이때 떨리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그 까닭은 하도 끔찍하고도 엄청난 일을 많이 겪어서 떨릴 만큼 큰 충격을 받을 수가 없어서기도 하겠지만 남이 겪는 공포의 사건조차 동감하기에는 우리 마음이 너무 무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하면 두려움을 공포와 동일시하고 피할 대상으로만 여길 뿐, 그것이 지니고 있는 덕스러움을 깨우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유물같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려워할 만큼 하느님 말씀에 흔들릴 수 있으면 대단히 고무적이다. 그 두려움을 없애시는 분은 하느님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에게서 그것을 거두어 주시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덕성스런 두려움도 잃고 인간이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다고 여기니까 혼란한 것이다.



사실 당황하는 마리아를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진정시켰다.

은총이 가득하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인사에 왜 그렇게 당황하셨을까.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은총을 받으면 딴 사람이 될 것임을 알리는 것이다. 모세는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받고(출애 3,12) 무력을 믿던 평범한 인간의 자세를 버려야 했다. 이런 변화는 기드온(판관 6,16)이나 사울(Ⅰ사무 10,7), 예레미야(예레 1,8)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은총을 복잡하게 분류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하느님이 곱게 보고 함께 계신 것을 말한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니 재력, 권력, 지력 등을 다 합해 놓은 것보다 더 큰 힘을 지니게 된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힘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봉사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그 은총을 인간적으로만 좋아할 수는 없다. 마리아도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예수라고 일컬어질 아기를 낳게 될 것과, 그 예수가 영원하다는 점에서 세상의 어느 나라와도 비교될 수 없는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는 또 한번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벗는 탈바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이 부르시는 대로 회개해야 했던 셈이다.



결혼을 뛰어넘는 유일한 새로운 양식의 탄생은 인간의 상식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여쭈어 보게 되었다. 하느님께 끊임없이 여쭈어 보는 것은 새로운 탈바꿈의 과정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자연스런 상식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과 예수를 낳고 그 예수의 미래에 관한 말씀을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심으로써 성취되었던 백성의 지도자 역할은 모세, 예레미야, 사울, 다윗(2사무 7,9) 등을 통하여 익히 알던 바인데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자연을 뛰어넘는 사건이 예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적인 인과론을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루가 1,37)



마리아의 물음에 천사는 친절하게 성령의 힘으로 되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하느님의 기운으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기는 경우가 있었는데(Ⅰ사무 11, 7 이하, 판관기 여러곳에 나옴) 이번에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됨을 알려 주었다.



성모 마리아는 구약에 여러번 언급되는 야훼의 종을 연상시키는 고백으로 가브리엘을 통한 하느님과의 대화를 끝맺는다.



대림절을 끝내고 예수의 탄생을 곧 맞이하는 우리도 성모님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에 흔들릴 수 있어야 하고, 곰곰히 생각하고 여쭙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느님과의 대화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이 불편 없이 오시게 된다. 그 대화는 그 분이 오시는 길을 평평하게 한다.





8.          대림제4주일(나) 루가 1,26-38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한기 신부



이 세상에서 방관자로서가 아니고 인간으로서의 할 바를 충실히 수행하도록...



오늘 복음말씀 중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말마디를 우리는 아전인수격으로 잘못 적용하고 있지나 않은지 한번 반성해 보고 싶습니다.

주님의 기도에 있는 대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조금도 우리의 노력을 더하지 않고서도 하느님의 왕국이 이 땅에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구경하려는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나 않은지요?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악에 대한 나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있지나 않은지요?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이 땅의 공기로써 호흡하고 있는 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과는 떼어버릴래야 떼어버릴 수 없는 필연적인 연관성을 갖고서 살아야 합니다. 식량문제, 인구문제, 경제, 문화, 사회문제들은 우리의 생활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나 자신과는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라도 모두 연관된 문제들이지만 나 자신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고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도 머리만 땅속에 파묻고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꿩처럼 이런 모든 심각한 문제들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려고 합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애써 변명이나 구실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다행히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모님의 말씀 중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말마디가 눈에 뜨입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 모든 문제들은 저의 미약한 힘으로써는 어쩔 수 없나이다. 주여!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하며 우리는 겸손과 신뢰를 주님 앞에 드러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이러한 겸손과 신뢰가 위선임을 잘 알고 계십니다.



만약 지금 우리 앞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보고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호되게 질책하실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진정으로 나의 이 미약한 힘으로써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이 거대한 문제들 앞에서 말입니다.



신자 여러분! 그러나 너무 좌절하거나 실망해서 자포자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시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감당하지 못할 과중한 짐을 지워주시는 그런 가혹한 분이 아니십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신앙의 귀로써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어리석음뿐이고 종교적으로 잘 훈련된 유태인의 눈으로 볼 때는 걸림돌밖에는 되지 않는 이러한 역설적인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당치도 않은 방법을 택하셔서 우리를 감탄케 하고 놀라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사랑하라. 그리고 보잘 것 없는 형제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배고파 울고 있는데 내가 배를 두드리며 먹고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먹는 음식에 유해색소나 담배꽁초를 넣어서 먹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의 눈에 고춧가루를 뿌리고서 탈취해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세상의 온갖 악이 사랑하지 않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웃이 병들고 배고프고 추위에 떨지라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부패와 부조리와 사회악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온갖 문제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대응하여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무기는 이제 무관심에서 사랑으로 바뀌어져야겠습니다. 이 세상의 온갖 문제들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지금 당장 내 옆자리에 있는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합시다. 그리고서 온 세상을 사랑으로 정복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그렇게 쉽사리 될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세주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주간도 이제는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우선 먼저 우리의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보속하는 의미에서 이제까지 자칫 소홀히 해왔던 이웃사랑을 더욱 열심히 실천함으로써 진정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수 있는 신자가 됩시다.









 9.            대림 제4주일(나) 루가 1,26-38  예수탄생의 임박

                                                김정진 신부



신자여러분! 기쁘고도 즐거운 예수님의 성탄절도 한 주일 안에 지내게 되므로 바야흐로 문 앞에 다가온 감이 듭니다. 벌써부터 우리의 마음은 설레이고 우리의 가슴은 희망과 기쁨에 마냥 부풀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주님을 기꺼이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 깊이 반성도 해야 되겠습니다. 아무 마음의 준비도 없이 또한 예수님을 영접할 자리도 마련하지 않고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불경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구세주께서 오실 날이 임박함에 대비하여 겸손하고 순종하는 정신을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일생은 겸손되이 천주성부의 뜻을 따름으로 일관하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고 순종하는 것이 당신의 음식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언제나 겸손과 순종으로 일관하신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역시 겸손과 순종의 정신으로 이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성모마리아의 말씀과 태도에서 우리는 겸손과 순종의 길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성모마리아는 정녕 우리의 모범이며 거울이며 우리의 신앙생활의 표본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루가 1,38)라고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종으로 자처하십니다.



또한 하느님의 종으로서 한평생을 겸손되이 지내셨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으며 언제나 예수님의 그늘 속에서 숨어서 살으셨습니다. 겸손의 정신은 대림절에 있어서 우리가 닦아야 할 덕행인가 봅니다. 지난 주일에도 겸손의 극치를 이루는 세례자 요한의 저 유명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들메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습니다>(요한 1,27).



성모 마리아는 겸손하실 뿐더러 또한 기꺼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순종하였습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따르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정말 하느님의 뜻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고 성요셉과 결혼하였으며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전능하신 하느님과 온 인류와 함께 하시며 바쳤습니다. 마리아께서는 특별한 은혜를 받은 하느님의 딸이었고 하느님께 봉사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언제나 따랐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성모 마리아가 보여주신 겸손과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실 성모 마리아에게 겸손과 순종의 정신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이제 우리 겨레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필연코 겸손과 순종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로서 일치하여 성모 마리아와 하늘의 모든 성인들과 더불어 주님의 오심을 애타게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와 같이 겸손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신앙과 충성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을 알려 믿게 하였듯이 우리는 미신자들에게 하느님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행복과 평화를 누리도록 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천사의 말씀을 귀여겨 들으시고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신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그 뜻을 따라 생활하기로 결심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구세주께서 오실 날을 눈앞에 둔 우리는 다시 한번 자신을 반성해보며 대림절의 정신에 입각하여 생활하였는지 살펴봅시다. 참회와 속죄의 마음으로 회개하여 죄의 사함을 받았습니까.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여 사랑을 실천하였습니까. 자비와 사랑의 구세주, 희망과 생명의 구세주께서는 우리의 희생과 보속과 사랑의 실천으로 당신을 맞이할 것을 바라신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라(마태 10,4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도 우리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마음과 정신을 정결케 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면서 이웃 사람에게 사랑을, 말로나 혀로가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써 실천하는 자에게만 성탄절은 정녕 축복과 자비와 은총의 축일이 되리라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10.                대림 제4주일(나)  루가 1,26-38 주님을 맞이할 준비

                                                 백명기 신부



오늘 우리는 성탄을 준비하는 마지막 날을 맞이했습니다. 오늘 하루해가 지면 즐겁고도 경사로운 성탄대축일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오시는데 대해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를 세례자 요한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근방을 두루 다니면서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한 회개의 강론을 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너희는 주의 길을 닦으라”고 광야에서 소리지른 것을 이사야 예언자는 7백년 전에 벌써 말했던 것입니다.



한 나라의 원수가 어느 지방을 예방한다면 그 지방 주민들은 그 원수를 맞이하기 위해 온갖 준비를 철두철미하게 해 놓고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물며 만왕의 왕이신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오시는데 우리의 준비는 어떠해야 합니까?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마음의 준비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의 길을 닦아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마음의 길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주의 지름길을 곧게 하라”(이사야 40,3)고 하였습니다. 넓고 평탄하여 다니기 쉬운 길이란 대로이고 좁고 불편하고 다니기 어려운 길이 곧 지름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름길은 빠르고 가까운 길인 것입니다. 구세주께서는 대로를 돌아 천천히 오시려하지 않으시고 지름길로 빨리 오시려는 것입니다. 이 길은 마음의 지름길입니다. 구세주께서는 받아들일 준비만 다 됐으면 조금도 지체치 않으시고 우리 마음에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지름길을 가로막아 좁게 하고 통행을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온갖 사욕편정입니다. 온갖 부정을 물리치고 정의를 실천하고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강자는 약자를 괴롭히지 말고 정욕을 누르고 정결하게 자기 몸을 지키는 것이 곧 지름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곧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구세주께서는 우리의 깨끗한 지름길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골짜기를 메우라”(이사야 40,4)고 하였습니다. 골짜기는 모든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게으르고 늘어지고 굳세지 못해서 덕행과 본분 완수의 빈자리를 뜻하는 것이니 우리는 더 한층 분발하여 마음의 골짜기를 만들지 말고 우리의 본분을 착실히 해나가야겠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각자의 본분을 게을리 했다면 그것은 마음의 골짜기가 생긴 것이므로 신자된 본분을 다함으로써 그 골짜기를 메울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산과 언덕은 낮아지라”고 하였습니다.



산과 언덕은 스스로 높이기를 좋아하고 자만자족하여 마음의 길을 막음으로써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오시려고 하시나 높아서 오실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교만심과 모든 욕심을 버리고 겸손되이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만 구세주께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지극히 겸손한 구세주를 맞이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또 죄 중에서 최초로 남긴 죄가 곧 교만한 죄인 것입니다. 이 교만한 죄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무섭고 혹독한 벌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의 길의 산과 언덕, 즉 모든 교만과 자만자족을 없애야만 겸손하신 구세주를 진심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오솔길은 곧게 트이고 험한 길은 평탄하여지라”고 말했습니다. 곧게 트이라는 것은 정직하고 진실하고 순진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온갖 거짓으로 남을 속이고 위선의 가면을 뒤집어 쓴 비뚤어진 마음씨를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험한 길을 평탄하게 하라는 것은 온순하고 인자하여 자기의 억세고 거칠은 성격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즉시 분노하고 싸우고 원수 갚을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울로 사도께서는 디도에게 보내신 서간에 “누구를 헐뜯거나 싸움질을 하지 말고 온순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을 언제나 온유하게 대하도록 가르치십시오”(디도 3,2)하고 말함으로써 억센 성질을 고치도록 교훈하였습니다. 양순하신 구세주를 맞이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온순한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성탄대축일에는 보통으로 많은 신자들이 고백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합니다. 그러나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와 은총을 충만히 받는 이는 비교적 적으니 그 이유는 준비가 부족한 점에 있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모든 허물을 고쳐 영혼의 게으른 골짜기를 메우고 교만의 산과 언덕을 무너뜨리고 구부러지고 억센 성격을 고치기를 크게 결심하지 않은 탓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고쳐야 할 결점은 영신생활의 게으름의 골짜기와 교만의 산과 언덕과 굽고 거칠은 성격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잘 살펴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로써 이 모든 결점을 고치도록 각별히 노력합시다. 이렇게 되면 “이에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도 꼭 들어맞게 될 것입니다.











 11.          대림 제4주일  (나)    신앙인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최영철 신부  



인격적 만남인 응답



오늘 주일의 분위기는 온통 메시아에게 관심을 집중하면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하느님의 역사하심의 메시지이다. 루가 복음사가는 메시아의 탄생과 예고를 부르심과 응답의 형식을 통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복음의 내용을 하느님의 부르심과 성모 마리아와 응답이라는 형식을 취해서 그런지, 다분히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내용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와 메시지 전달 즉시 성모마리아의 거부, 그리고 나서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 그러는 사이에 성모 마리아의 경청, 그리고는 응답의 순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주 대화적히고 인격적 만남의 아름다움마저 느끼게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아 예고와 잉태, 성모 마리아의 현실적인 불가능성(남자를 모르는 처녀),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의 하느님 능력에 대한 설명, 성모 마리아의 응답적인 순명, 이렇게 구성되어져 있다.

우리는 이 성서 말씀에서 그 유명한 성모 마리아의 신앙적 응답을 볼 수 있다. “나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나에게 이루어지소서"가 바로 그것이다. 신앙 즉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본보기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성모 마리아의 신앙적 순명을 당연하고 아름다움으로 볼지는 몰라도, 그러한 신앙적 응답은 나하고는 무관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가 일쑤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신앙적 가치와 현실적 가치를 별개의 영역으로 구분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이 모인 공동체에서는 신앙인이고, 비신앙인의 공동체에서는 비신앙인이 되고마는 이중 구조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탄하고 단죄하고자 하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은 이원론적 삶이 아니라는 데 그 초점을 맞추자는 말이다. 우리의 삶은 “신앙 따로 현실 따로"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되지 않을까 하는 뜻이다. 그것은 신앙적인 영역과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영역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처녀이기 때문에 잉태할 수 없다는 현실은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는 인간의 기우일 뿐이다. 즉 현실적인 것도 인간의 능력과 판단 그리고 계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성모 마리아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그런 의미의 응답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단지 하느님을 믿기에 이룰 수 있는 하느님에게로의 투신인 것이다. 진정한 현실적 가치는 신앙적 가치에 의해서 도리어 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신앙 따로 현실 따로



어느 날 어떤 형제가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1시간 30분 동안 했다. 나는 1시간 30분 동안 한 마디도 안하고 듣기만 했다. 내용인즉 자기는 성서, 말씀대로 살고 싶고 그래서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고 싶은데, 자기의 직장생활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직장은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자기의 올바른 삶을 위해서는 부적합하고 힘들다는 것이다.



자기의 직장 상사의 부조리, 그것을 모른 척하자면 자기도 그 부조리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직장을 그만두고 자기는 올바로 살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그가 이야기를 마친 후 나는 물었다. 어디서 당신의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느냐고 했다. 그는 신경정신과 의사에게, 자기 친구에게, 자기 아내에게 했단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들은 당신의 이야기를 내가 듣고 있듯이 듣더냐 했더니 그런 사람은 없었단다.  나는 말했다. 내가 1시간 30분 동안 아무 말 없이 들었던 것은 당신에게 인간적 이기심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놀라는 듯 했다.



        지금은 모르는 그분 뜻



나는 말했다. “당신의 한 가정의 가장인데, 당신의 처자식을 생각해 보았느냐? 당신의 현실을 보았느냐? 신앙이란 올바로 살기 위한 방편으로, 그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슬프고 부조리한 현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인내와 의지 안에, 하느님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믿고, 도리어. 그런 현실에 투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느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하느님의 뜻을 지금은 모를 뿐이다"라고 말이다.












12.         대림 제4주일  <루가 1,26-38> (나) 성모 영보

                                                                  민병섭 신부



  한 청년이 공원을 산책하던 중에 거지 노인을 만났습니다. 초라한 옷차림이었지만 위엄이 서려 보이는 노인은 경건한 눈길로 청년을 보고 주저하는 듯 손을 내밀었습니다. 가난한 젊은이는 저도 모르게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노인 앞을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었던 장미꽃 한 송이를 정성이 담긴 몸짓으로 노인의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습니다. 노인은 감격한 나머지 떨리는 손으로 그 청년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장미꽃을 들고 일어서서 비틀거리며 공원을 떠났습니다. 그 노인은 이제 더 구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루가 1,31-32).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드러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님의 탄생은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알리는 징표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징표'이다. 그러기에 요한 사도는 자신의 편지에서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 사랑의 징표이다. 아니 그분 자신이 사랑이셨고 그래서 세상에 사시면서 우리에게 사랑에 대해 말씀하셨으며 새로운 계명으로 사랑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7).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른다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보여 주는 증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시는 표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을 이 세상에 보여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이 있을 때만이 모든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이제 성탄의 축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성탄에는 우리 모두가 사랑의 주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아니 우리가 주님 안에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 이 세상에 참된 사랑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2000년 전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던 참된 사랑이신 예수님은 이제 우리가 다시 이 세상에 사랑으로 태어나기를 바라고 계신다. 우리가 진정 사랑의 증인으로 태어날 때 이 세상은 그리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루가 1,26-38



  루가는 주님 탄생의 예고에 관한 기사를 한 편의 예술 작품 형태로 그리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와 마리아는 세 번씩 말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을 세 번 듣게 되며, 동시에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도 세 차례에 걸쳐서 듣게 된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알릴 때는 거룩하고 외부와 차단되어 접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성전 성소에서 소식을 전하던 가브리엘 천사가, 이번에는 모든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에 있는 한 동네의 한 처녀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다. 갈릴래아는 한 사람의 예언자도 내지 못하였던 곳이다(요한 7,52). 그러하기에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조차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하였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우리는 또한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 경멸하는 하찮은 것을 선택하신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천사는 이러한 곳에 살고 있는 한 처녀에게 나타나 역사가 바뀔 가장 중요한 말을 전하고 있다. 요한의 출생시에는 성전 성소에서 소식을 전하였으나, 주님 탄생 예고는 그 처녀의 집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하느님은 성전 안에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당신의 거처를 사람들 가운데 두시게 된다. 천사의 인사말대로 마리아는 은총을 가득히 받고 있던 사람이다.



  이는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 앞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 그러하기에 옛 교부들은 “마리아는 몸으로 우리 주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즈가리야는 천사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지만 마리아는 천사의 정중한 인사말에 당황하면서 그 뜻이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마리아의 일생과 그녀의 기도 생활은 성서적인 사상들로 흠뻑 배어 있었다. 따라서 마리아는 그러한 인사말에서 드러난 기묘한 사건의 본질을 어느 정도 알아채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즈가리야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전해 받지만 그것은 자신의 아내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그 천사는 오직 마리아에게만 말을 건넨다. 마리아는 잉태하여 아기를 낳고 그 이름을 지어 줄 것이다. 여기에는 아버지나 남편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리스도가 동정녀에게 잉태되는 신비가 곧 드러나려 하고 있다. 그분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되실 것이며 또한 그렇게 불리실 것이다. 이 칭호는 바로 예수님의 본성을 가리키는 칭호이며, 이 하느님의 능력이 마리아를 감싸주실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마리아의 아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서 나단 예언자를 시켜 다윗 왕에게 하신 예언이 이 아기에게서 이루어지게 된다(2사무 7,12-16). 그리고 이러한 사건은 하느님께서 준비한 전혀 새로운 것으로 이룩되고 있다. 곧 성령과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을 통하여 이 일은 이룩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다."라는 말로 천사는 자신의 메시지를 다 전한다. 이 천사의 말은 예전에 하느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이기도 하다(창세 18,13-14 참조).

    

  이제 마리아의 답변만이 남게 된다. 이곳에서 우리는 베르나르도 성인과 같은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게 된다. "천사는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동정녀여, 낙원에서 추방당한 아담도, 그의 비참한 후손들이 당신께 이것을 애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에 거하는 조상들, 바로 당신의 조상들도 이것을 애원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당신 발아래 엎드려 이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정녀여, 속히 응답하소서. '말'을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소서. 인간의 '말'을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소서. 일시적인 '말'을 하시고 영원한 '말씀'을 받으소서"(Missus est에 대한 설교 IV, 8-9). 마리아는 천사의 메시지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 마리아는 '주님의 여종'으로서 그 뜻에 순명하셨다. 이러한 마리아의 동의에 천사는 사명을 다하고 이제 떠났다고 루가는 기록하고 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이처럼 확고한 믿음 안에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우리 자신을 그분의 도구로 봉헌하는 삶에서 이룩된다. 그리고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통해 다시 육화의 신비를 이 세상에 전하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제1독서/2사무 7,1-5.8ㄴ-12.14ㄱ-16



    오늘의 독서에서 인용되고 있는 구절의 예언은, 곧 다윗 왕조가 이스라엘 왕좌를 영원히 차지하게 되리라는 예언은 성서에서 자주 되풀이되고 있는 예언 중의 하나이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교차시키는 예언이기도 하다. 이 예언은 다윗의 직계 자손이라는 범주를 초월하는 보편적이고도 절대적인 개념들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에게는 좀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내가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14절)라는 말씀으로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비록 솔로몬이 계약을 입증하는 첫 번째 고리 역할을 한다 할지라도 그 계약을 완전히 성취시키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내다보고 계신다. 오직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메시아만이 나단의 신비스런 예언을 온전히 이루어 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이사야를 통하여(11,1) 그리고 시편의 작가들을 통하여(88.131편 등 참조) 계속되고 있으며, 바로 오늘의 복음 말씀(루가 1,32-33 참조)에서는 이 예언의 성취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구세사의 사건은 주님의 편에서 쥐고 계심을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주님의 궤가 모셔진 곳에 주님을 위한 집을 짓고자 하는 다윗의 제의와, 이와는 반대로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리라는 내용을 다윗에게 예고하는 예언자의 상반된 지시 사이의 대립을 통하여 드러난다. 주도권은 오로지 주님께 있다.

  

  더 나아가서 다윗의 왕조를 영원히 굳건하게 유지할 '후손'도 주님의 권한에 속한다. 곧 그 후손이 중단될 수도 끊겨 버릴 수도 있는 생물학적 번식의 법칙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 주실 분은 주님이시다. 그리고 결국 그 약속이 나자렛의 예수님 안에서 실현될 때에도 비록 그것이 역사의 흐름 속에 포함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역사를 초월하는 힘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제2독서/로마 16,25-27



    오늘의 독서는 로마서의 마지막 구절로서 사도가 전한 복음의 요약이기도 한 찬양의 노래를 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 두셨던 그 심오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25절)로 시작하고 있는 바오로 사도의 찬양은 우리가 마리아의 태중에 육화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더 깊이 묵상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다.



  이 신비는 비록 육화로만 사람들에게 계시되지만, 하느님께서 오래 전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계획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신비의 명백한 전조나 표징을 우리는 방금 바오로 사도가 “예언자들의 글에서 명백히 드러났다."(26절)라고 하며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 바와 같이 예언자들의 선포로 받았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빛이 사람들에게 갑작스러운 것으로, 또 무의미한 것으로 쏟아지는 일이 없이 사람들에게 확고하게 실현될 하느님의 약속을 애정을 갖고 깨어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3.      대림 제4주일 <루가 1,26-38>(나) 선행은 감춰 돌수록 더 아름답게 빛난다

                                                             김성배 신부



   선행은 감춰 돌수록 더 아름답게 빛난다. 반면에 드러내서 알리려고 하면 그 아름다움을 잃는 것이 선행이다. 자기 스스로 드러내서 알리는 선행은 선행의 가치를 잃게 된다.

 선을 행하는 것 못지 않게, 선을 행한 후에 그 선행의 가치를 잃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기의 선행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면 선을 행한 다음에 즉시 그 선행을 잊어버려야 한다. 사람이 자기의 선행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해롭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선을 알게 되면, 그 선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잊고, 교만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선은 무한한 선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선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의 선을 보고 그 선의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을 찬미해야지, 그 선이 자기의 것인 양 자기를 자랑해선 안된다. 자기의 선을 보고 스스로 자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남에게 칭찬받고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교만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선행이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채 있으면 기분이 상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알릴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자기의 선행이 알려져서   칭찬받고 존경받게 되면 흡족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돌아오는 영예를 즐긴다. 이렇게 되면 선행은 선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고 오히려 교만을 키우는 수단이 된다.



  교만은 모든 선을 부패시키는 독이다. 교만으로 오염된 선은 부패해서 선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된다. 그러기에 사람이 참으로 선하려면 자기가 선하다는 것을 모르면서 선해야 한다.

완전한 선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아 선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악으로 추락하지 않고 선한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완전한 길을 가르쳐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을 따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듯이 죽는다 (창세기 3,17)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선을 아는 것도, 악을 아는 것도, 위험했기 때문에 선과 악을 모르게 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선했다. 선을 몰랐지만 생각하는 것이 모두 선했고, 원하고 행하는 것이 모두 선했다. 자기가 선하다는 것을 모르면서 선했기에 참으로 선했고, 자기가 선을 행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선을 행했기에 참된 성덕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자기가 선하다는 것을 알면 교만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교만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선을 부패시킬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선을 알지 말라고 하셨다. 사람이 악을 아는 것도 위험했다. 악한 행동은 사람의 감성과 감각에는 달콤한 쾌락을 주지만 그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악을 모르면 악을 원하지 앓게 된다. 그러나 악을 알게 되면, 선보다는 악을 더 원하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악을 알지 말라고 금하셨다.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모르는 동안은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의 종으로 머무는 동안은, 사람이 일체의 욕망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와에게 유혹자 사탄이 다가온다. 사탄은 선과 악을 알도록 유혹한다. 먼저 선을 앎으로써 자기의 선에 대해 자만하게 만든다. 자만에 빠짐으로써 교만해진 사람은 하느님께 불순종하게 된다. 동시에 사람이 감성과 감각에 쾌락을 주는 악을 알게 한다.



악을 알게된 사람은 억제할 수 없는 갈증으로 악을 원하고 맛보게된다. 이렇게 하느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악을 맛본 사람은 하느님의 종이 아니라, 교만과 탐욕과 육욕이라는 욕망의 노예가 된다.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종이 될 때는 일체의 욕망을 지배하는 왕이 되지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면 오리려 욕망의 지배를 받는 노예가 된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다. 성모님의 이 순종은 하와의 불순종을 무효화시켰고 구세주를 세상에 모셔 오게 했다. 모든 피조물 중에 성모님만이 유일하게 「은층이 가득하신 분」이시다. 피조물로서 하느님께 받을 수 있는 모든 선을 완전하게 받으신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증언하는 대로 성모님은 당신이 그렇게 위대한 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모르신다.



  성모님은 선도 악도 전혀 모르면서 선하셨기에 완전히 선하셨다. 그러기에 절대적인 순결과 겸손과 가난을 지님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에 합당한 유일한 분이시다. 성모님은 인간의 일체의 욕망과 감정을 완전히 지배하여 하느님의 뜻에 복종시킨 하느님의 완전한 종이시다.

  완전히 겸손하고 순결하고 가난한 성모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완전한 거처가 되신다. 우리 모두 성모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 하느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해 드리도륵 하자.



14.     대림 제4주일 <루가 1, 26-38> (나)   결혼을 뛰어넘는 유일한 양식의 탄생





 성모 마리아는 여성으로서 평범하게 사시던 분이었다. 어른으로 성장하여 약혼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루가 1, 27)

  그런데 어느날 ‘은총을 가득히 받고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인사를 받게 되었다. 친구로부터 그런 인사를 받았다면 별말을 다한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인

사를 받고는 "뭘요'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팔자 고치는구나" 또는 “운수 대

통하겠구나"하고 기뻐 날뛸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 천사의 말씀이, 지금까지 배워왔던

그분의 상식에 맞지 않았다.



 가브릴엘 천사가언제 올까 하고 기다리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전하려고 그 천사가 나타났으니 성모님은 평정을 잃었다. 상식이나 습관에서 크게 벗어난 전혀 예견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성모님은 천사의 첫마디 인사에, 그때까지의 생각과 삶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흔들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듣고 새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인사말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계속 생각하였다.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성취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통하여 그 분을 뵈올 때, 우리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는다. 이때 떨리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그 까닭은 하도 끔찍하고도 엄청난 일을 많이 겪어서 떨릴만큼 큰 충격을 받을 수가 없어서기도 하겠지만 남이 겪는 공포의 사건조차 동감하기에는 우리 마음이 너무 무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하면 두려움을 공포와 동일시하고 피할 대상으로만 여길 뿐, 그것이 지니고 있는 덕스러움을 깨우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유물같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러워할 만큼 하느님 말씀에 흔들릴 수 있으면 대단히 고무적이다. 그 두려움을 없애시는 분은, 하느님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에게서 그것을 거두어 주시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덕성스런 두려움도 잃고, 인간이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다고 여기니까 혼란한 것이다.



  사실 당황하는 마리아를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진정시켰다. 은총이 가득하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인사에 왜 그렇게 당황하셨을까?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은총을 받으면 딴 사람이 될 것임을 알리는 것이다. 모세는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받고(출애 3,12) 무력을 믿던 평범한 인간의 자세을 버려야 했다. 이런 변화는 기드온(판관 6,16)이나 사울(1사무 10,7), 예레미야(예레 1,8)에게서도볼 수 있다.



  은총을 복잡하게 분류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하느님이 곱게 보고 함께 계신 것을 말한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니 재력, 권력, 지력 등을 다 합해 놓은 것보다 더 큰 힘을 지니게 된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힘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봉사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그 은총을 인간적으로만 좋아할 수는 없다. 마리아도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예수라고 일컬어질 아기를 낳게 될 것과, 그 예수가 영원하다는 점에서, 세상의 어느 나라와도 비교될 수 없는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는 또 한번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벗는 탈바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이 부르시는 대로 회개해야 했던 셈이다.



   결혼을 뛰어넘는 유일한 새로운 양식의 탄생은, 인간의 상식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여쭈어 보게 되었다, 하느님께 끊임없이 여쭈어 보는 것은 새로운 탈바꿈의 과정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자연스런 상식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과 예수를 낳고 그 예수의 미래에 대한 말씀을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심으로써 성취되었던 백성의 지도자 역할은 모세, 예리미야, 사울, 다윗(2사무 7,9) 등을 통하여 익히 알던 바인데,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자연을 뛰어넘는 사건이 예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적인 인과론을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 (루가 1,37) '



  마리아의 물음에 천사는 친절하게 성령의 힘으로 되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하느님의 기운으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기는 경우가 있었는데(1사무 11,7 이하, 판관기 여러곳에 나옴) 이번에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됨을 알려 주었다.

 성모 마리아는 구약에 여러번 언급되는 야훼의 종을 연상시키는 고백으로 가브리엘을 통한 하느님과의 대화를 끝맺는다.


   대림절을 끝내고 예수의 탄생을 곧 맞이하는 우리도, 성모님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에 흔들릴 수 있어야 하고, 곰곰히 생각하고 여쭙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느님과의 대화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이 불편없이 오시게 된다. 그 대화는 그 분이 오시는 길을 평평하게 한다.



15.          대림 제4주일 (나해)   다윗 가문의 축복              

                                                   강길웅 신부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그는 주위의 여러 세력들을 평정하여 나라를 최초로 통일시켰으며 또한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높은 신심을 가지고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이후로 다윗에 버금가는 인물은 등장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무능하고 불충실한 왕들만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점차로 '새 다윗'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 사상이 등장하는 발단이 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다윗이 하느님께 좋은 집을 지어 드리겠다는 아름다운 정성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의 갸륵한 마음만을 받으시고 오히려 다윗의 가문에 큰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즉 다윗의 후손 하나를 당신의 아들로 삼아 국권을 튼튼히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느님께 집을 지어 드리겠다는 효성스런 마음 때문에 하느님은 오히려 그의 집(가문)을 위대하게 지어 주셨습니다. 바로 그 '후손'이 예수님이십니다.



아름다운 봉헌에는 위대한 축복이 따릅니다. 부모들은 어버이날 에 자녀들이 꽃 한 송이 달아 주는 것만으로도 큰 감격과 기쁨을 만 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작은 정성을 그처럼 크게 받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축복의 비결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고 청하는 것보다도 항상 넘치고 풍요롭게 채워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봉헌했을 때도 그랬고 사렙다의 과부가 마지막 먹을 빵을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주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아니, 실제로 살아가는 각자 우리 인생 의 여정에서도 그런 놀라운 은혜는 수시로 만나게 됩니다. 봉헌은 이처럼 늘 축복과 연결이 되며 삶의 소중한 가치를 바로 거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봉헌'과 '축복'이라는 개념은 이렇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봉헌이라면 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려 주시는 것이 축복입니다. 따라서 봉헌과 축복은 서로 상대에게 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같은 길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 쉽게 배울 수 있는 진리인데도 신앙인들은 잘 모르고 있으며 또한 믿지도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다윗이 하느님께 집을 지어 봉헌하겠다는 그 갸륵한 정성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바로 '봉헌'이라는 인간의 신앙의 길을 통해서 당신 축복의 길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아들', 즉 메시아가 드디어 한 작은 처녀의 몸을 통해서 오게 된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어마어마한 축 복을 받습니다. 마리아는 본래 보잘것없는 처녀였습니다. 그녀도 일찍이 하느님께 당신 자신을 온전히 봉헌했던 소녀요 아가씨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여인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하게 내맡기셨습니다. 역시 봉헌과 연결되는 축복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새 다윗'으로 오십니다. 물론 본래의 다윗보다 훨씬 더 크게 위대하신 분이지만 다윗을 통해서 내려 주셨던 하느님의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면에서 예수님은 새 다윗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며 그의 왕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이 오시는 길은 다윗이 열어 주었으며 그의 갸륵한 정성과 충실한 신앙을 통해서 약속되어 졌던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주님께 충성심을 가지고 효도하고 좋은 것을 해 드리려는 갸륵한 신앙 안에서 그분은 언제나 새 축복을 가지고 오십니다. 우리는 그래서 다윗의 신앙을 배워야 하며 마리아의 봉헌을 실천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다윗과 마리아는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먼저 그들의 집이셨습니다.



이제 성탄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고요한 밤시간을 통해서 하느님의 거룩한 아들이 인류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다윗처럼 위대하게 봉헌할 수 있는 자만이, 또는 마리아처럼 그분의 종으로서 온전히 내맡기는 자만이 바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당신의 방이요 거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 안에 그분의 방을 마련할 때 주님은 우리 안에서 다시 태어나실 것입니다.



오소서, 주 예수여 !









16.                대림 제4주일   FIAT (이루어지소서)(나)

                                                     이성우 신부



ꡐ하루를 살면서 짜증내기보다는 길가에 뒹구는 종이 조각을 보고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생활하여,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는 날 “너는 나를 닮았구나!”라는 말씀 듣게 하소서.ꡑ

지난 12일자 가톨릭 신문에 소개된 뇌성마비 장애시인 정재한씨의 시 한 구절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버려져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았으면서도, 사무친 그리움 때문에 부모를 찾아 화해하고 이제는 사랑만이 가득한 삶을 살아갔으면 한다는 그.

대구 지하철 구내에서 신문을 팔면서 살아가지만, 신앙과 시쓰기로 모진 시련을 견디어내는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좌절하고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주시고, 보다듬어 주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인간으로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처녀 잉태라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 ꡒ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ꡓ하며 응답합니다. ꡒ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되는 것이 없다.ꡓ는 천사의 말에 완전한 신뢰의 순종을 보여준 것입니다. 인간적인 당황과 두려움을 하느님께 대한 오롯한 믿음으로 극복한 이 결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는 엄청난 일이, 구세주 메시아의 내림이라는 크나큰 축복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강생 2000년의 역사는 이렇게 한 시골 처녀의 <FIAT>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ꡐ小貪大失ꡑ이란 말이 있습니다. ꡐ작은 것을 탐하다가 도리어 큰 것을 잃는다ꡑ는 뜻인데, 바둑판에서 자주 듣게 되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네 인생살이에 더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작은 것들에 매달려 살다보면 드러나 있지 않은 보다 큰 것들을 놓치게 될 우려가 많기 때문입니다. 빙산은 뿌리가 훨씬 더 큰 법입니다. 그렇지만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부분보다는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은 저 높은 곳에서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보다 훨씬 크게 보시고, 멀리 보시고, 앞서 보시는 그분의 훈수를 귀담아 듣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삶을 가장 현명하게 사는 지혜일 것입니다. 철부지 아이에게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 것인지는 그 아이 자신보다 그를 돌보는 부모가 더 잘 아는 것처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배려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대희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했으니 이미 200번은 바뀔 만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정말 새로운 세상에서 새날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얼룩지고 망가진 세상이 아니라 창조주의 전능으로 새로워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매순간마다 내 뜻이 아니라 그 분의 뜻에 (FIAT)하며 살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17.        대림 제4주일 (나)  주님께서 보여주신 은총의 삶

                                                      황철수 신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삶의 궤적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맘때가 되면 흔히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올해의 10대 뉴스니 사건이니 하는 것도 다 그런 일의 일환이라고 여겨집니다.



외형적 사건으로서만이 아니라 내적인 의미에서도 한 해의 삶을 돌아보면 어떨까 합니다 :ꡐ한 해를 살면서 영이 충만했던 순간들이 언제였던가?ꡑ



오늘 성서의 표현을 빌리면ꡐ성령이 충만했던 순간들이 언제였던가ꡑ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단번에ꡐ성령 기도회의 감격스런 순간ꡑ을 상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런 순간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삶의 현장에서의 성령의 순간들을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오늘 주일 말씀에서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성모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ꡐ올바로 인식하는 순간ꡑ을 성령이 충만한 순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표현한다면 성령이 충만한 순간은 다른 순간이 아니라ꡐ사람을 올바로 인식하는 때ꡑ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에 가득 찬다는 것을ꡐ신비한 정신 상태ꡑ로 돌입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욱 예민한 지성과 마음으로 사람과 사물을 올바로 분별하는 순간이야말로 ꡐ영에 충만한 순간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옳게 분별하지 못한 순간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이웃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서, 남의 입장에 서는 마음에서 ꡐ영ꡑ이 부재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반대로, 남을 배려해 주차해 놓은 분별 있는 마음에서, 지위를 떠나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우리는ꡐ영ꡑ의 건재함을 느낍니다.



종교적인 삶은 세상에 살면서 성령이 이끄시는 천상의 정신을 갖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천상의 정신이란 다른 정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주신 그 정신입니다 :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 자기 십자가를 지는 마음.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는 이미 부족하나마 성령의 이끄심에 응답하며 살려고 노력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탄절에는 더욱 더 천상의 정신으로 열려져 낮은 자세로 임하신 예수님을 새로이 깨닫고 축복된 삶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18.        대림 제4주일 <루가 1,26-38> (나)

                                  지금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1. 서문 (루가 1,26-27)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지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보내시어 다윗 가문의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처녀가 결혼한 다음에도 일 년 남짓 친정에 살다가 일 년이 지나면 신랑이 신부를 시집으로 데려갑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킵니다.



            2. 메시아 탄생 예고 (루가 1,28-33)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다윗과 약속하십니다(2사무 7,1-17 참조).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1,28) 하고 인사합니다. 마리아는 이 인사에 몹시 당황하지만, 그때 천사가 마리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 그는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1,30-33) 하고 그 신비를 일깨워 줍니다.



             3. 메시아의 동정녀 탄생 (루가 1,34-37)

마리아는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1,34) 하고 반문합니다. 처녀인 상태에서 잉태하리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놀라 해명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인 성령에 힘입어 처녀의 몸으로 메시아를 잉태할 것이라고 답변합니다. 그러면서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사실을 예로 들어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마리아에게 설명합니다.



             4. 마리아의 동의와 우리의 이해 (루가 1,38)

  천사의 설명을 들은 마리아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1,38) 하고 메시아 잉태 사실을 받아들이자 천사는 떠나갑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자렛의 평범한 여인 마리아를 통해서 다윗과 약속하신 메시아 탄생을 예고합니다. 이 탄생은 마리아와 요셉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동정녀 탄생입니다.

마리아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집안의 평범한 여인이었고, 나자렛은 초라하고 하찮은 마을로 구약성서 지명목록에 한번도 나오지 않는 동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구원의 역사는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믿는 마리아와 같은 이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000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교회는 하느님의 섭리와 신비가 계속해서 실현되는 곳으로서 교회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 기쁨과 위로를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무처 홍보실

19.           대림 제4주일 <루가 1,26-38> (나)     생각하는 갈대



근세 철학의 시조로 불리는 데카르트(1596-1650)와 파스칼(1623-1662)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으며 또한 철학자였습니다. 실제로 파스칼은 데카르트를 만나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데카르트는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면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 끝에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근본명제를 확립했습니다.

파스칼은 이 근본명제를 발전시켜 그의 사상을 집약시킨「팡세」의 첫머리에 “인간은 자연 가운데 가장 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데카르트와 파스칼은 인간의 위대함을 자기존재의 사유(思惟)에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의 집을 찾아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마리아여,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가 1,28)고 인사했을 때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했던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보다 앞서 천사가 나타났을 때 즈가리야가 “몹시 당황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혀”(루가 1,12)있었던 것과는 달리 마리아는 비록 당황하기는 했으나 정신을 가다듬고 그 뜻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마리아의 답변은 즉흥적이거나 감상적인 답변이 아니라 깊은 사유 끝에 선택한 인류사상 가장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성서를 보면 성모님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란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태어나실 때 양치기 목자들은 하늘에 나타난 천사들을 보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구유에 누워 있는 어린 예수를 본 순간 ‘사람들에게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이야기합니다.’ 이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합니다”(루가 2,19). 그뿐인가요. 예수께서 열두 살 되던 해, 잃었던 예수를 성전에서 찾으신 후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고 꾸짖자 아들인 예수로부터 “나는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루가 2,49)라는 뜻밖의 말을 듣게 됩니다. 마리아는 아들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했습니다”(루가 2,51).

이렇듯 마리아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생각하는 인간’의 원형이며 파스칼의 표현처럼 ‘상한 갈대’(마태 12,20)의 나약함을 지닌 인간에 지나지 않으나, 생각하는 데에 따라서는 하느님의 아들을 포용할 수 있는 위대성을 지닌 ‘생각하는 갈대’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를 낳았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 키웠습니다. 신중하게 마음에 깊이 새기고 오래 간직하는 마음으로….

마리아, 우리 성모님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최인호 베드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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