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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09:53
분 류 대림시기
ㆍ추천: 0  ㆍ조회: 7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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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3주일

9. 주님 생각에 (나) / 18            10. 김성배 신부 (나) / 20

11. 광야에서   (나) / 22            12. 정주성 신부 (나) / 24

13. 광야에서   (나) / 26            14. 김영진 신부 (나) / 28

15. 경규봉 신부 (나) / 30          16. 함세웅 신부 (나) / 31

17. 강길웅 신부 (나) / 33          18. 심용섭 신부 (나) / 35

19. 민병섭 신부 (나) / 37          20. 교구주보 (나) / 42

21. 최인호 작가 (나) / 43          



9.            대림 제3주일 <요한 1,6-8. 19-28>(나) 주님 생각에 기쁜 내 마음





 “주님(야훼)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이사 61,10)

  대림 제3주일 제1독서에서 읽을 수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로 이어전다. (원문에 충실한 직역이 아니므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래서 '나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고 내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환호 용약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는 물론, 신앙인에게까지도 이런 고백은 한없이 멀게 느껴진다.

도대체 기쁠 일이 훠 그리 있겠으며, 그 기쁨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조차 뭐 그리 대단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은 때이기 때문이다.



  또 세속이 제공하는 기쁨(?)이 얼마나 많고도 다양한데,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겠느냐고 할만한 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느님은 부담은 될지언정 기쁨의 원천이라고 여겨지기에는 거리가 멀기도 하려니와, 구체적이지도 않다. 소위 좀 생각한다는 사람 가운데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 하느님이란 존재에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인류가 얼마나 큰 갈등과 전쟁에 시달렸느냐고 하며, 하느님이 오히려 인류에게 고통의 원인인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요구를 하고 싶은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금의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기쁠 일은 별로 없다. 순간의 조각에 불과한 기쁨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모여 이루어 놓은 틀은 방향을 잃고 몰락을 향하여 간다는 의구심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교회 안팎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 구분과 상관없이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믿는 경정으로 말미암은 인간 관계의 파괴, 인위적 제도가 자아내는 부패성외 근본원인에 대한 몰지각, 인간의 한계로 말미암은 자연에 대한 자연적 접근의 산발성과 단편성 및 불균형성,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에 대한 인위적 접근 실험의 연속, 그 접근 자체가 지니고 있는 허구성을 진리라고 하는 주장 등이, 몰락의 시작이라는 견해를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



 기쁠 수 있는 이유도, 여유도 없다. 그러나 정말 기쁠 수 없는 까닭은 기쁨 자체가 썩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연이 파괴될 때에는 여러 조치를 마련하느라 분주한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자연-사랑, 평화, 정의, 자비, 봉사, 믿음, 희망, 일치, 화해, 깨달음 등-이 썩는 데에는 속수무책이다. 기껏 그런 것은 썩을 수 없고 썩었다고 하면 이미 그렇게 불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겪는 일상 생활은 썩은 웃음, 색은 기쁨을 보여 준다.



  보이지 않는 자연은, 체험될 때 일어나는 사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관계 안에서만

체험되는 것이다, 바른 인간관계 속에서만 썩지 않게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참된 기쁨이 있어야 바른 인간 관계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순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지 못하면 악순환으로 바뀔 수 있다.



  여기에서 기쁨이 부패할 수 있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교황께서도 이미 경고한 바 있는 세계화라는 틀은, 삶을 경제 체제의 측면 하나로 피라미드화하는 것이므로 끊임없는 경쟁관계와 숫자로 환원시키는 과정을 삶의 틀로 삼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지금 전세계는 컴퓨터화하여 가므로 이 과정을 외면하기는커녕 더 증진시키고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어디 경쟁이나 숫자화의 체계로 계산되거나 환원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니 파괴된 인간 관계에서 참된 기쁨이 나올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참된 인간 관계의 복원을 위하여 참된 기쁨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 다른 “곳"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 대림 제3주일의 이사야서 61장 10절의 말씀이다. 하느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어야 참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 인간의 체제에서 비롯되는 기쁨이 아니다. 따스한 햇살, 살갗에 기대는 아기의 얼굴같이, 다가오는 바람같이 위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뜬구름 잡는 듯한 기쁨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관된 성실을 뜻하는 하느님 정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랑, 신부의 새 모습과 견줄 수 있고, 자연이 보여주는 생명력과 같은 기쁨이다. (이사 61,17-11) .



  그런 순수한 기쁨을 누린 분이 없다면, 그것 또한 우리 생활과 동떨어진 것 같겠지만, 그렇지 않다. 아기를 낳지 못하던 한나가 아기를 얻고 본능적인 기쁨에 머물지 않고 “내 마음

은 주님 안에서 용약합니다"(1사무 2,1)라고 찬양하고, 성모 마리아께서도 같은 찬미와 고백(루가 1,46-47)을 엘리사벳에게 들려주고 있다.



  신자들에게는 주님이 참된 기쁨을 누리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 기쁨을 누림이 바로 세

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인간 관계를 복원한다. 그 기쁨은 본적과 주소가 분명한 기쁨이고, 기쁨도 방향도 확실하여 썩지 않고 순수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기쁨이 하느님의 뜻에 기원을 두었음을 말하고, 기도와 감사가 따르는 것임을 밝힌다. (제2독서) 그러기에 자신있게 “늘 기뻐하십시오"라고 권고한다.

쓰리기 종량제도 중요하지만, 우선 썩은 웃음, 썩은 기쁨 좀 버리자. 하느님 안에서 그분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릴만큼 기쁜지도 짚어 보아야겠다.





10.           대림 제3주일 <요한 1,6-28> (나) 

                     사람이 자신을 알면 생명을 얻고 모르면 생명을 잃는다.

                                                             김성배 신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낯선 존재이다. 자기의 참된 모습이 자기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알려지지 않은 채 감추어져 있는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된다. 사람이 자신을 알면 생명을 얻고 자신을 모르면 생명을 잃

는다. 그러기에 자신을 아는 지혜만큼 사람에게 소중하고 필요한 지혜도 없다. 그러나 자신을 아는 지혜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얻기 어려운 지혜이기도 하다. 자신을 아는 지혜는 사람이 가장 애착하는 자기 만족을 버려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됩니다.”(요한 11,8)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감추어져 있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죄의 속성자체가 어둠 속에 제 모습을 감추고 숨는 데 있다. 죄는 사람의 생각이 접근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제 모습을 감추고 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죄를 식별하는 감각이 있다.



  그리고 이 죄를 식별하는 감각은 하느님을 감지하는 감각과 짝을 이루고 있다.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을 감지하는 감각이 살아 있을 때 죄를 식별하는 감각도 살아있게 된다.

  사람은 자기의 생각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두 신비의 영역을 대면하고 있다. 하나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1디모 16,16) 하느님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짙은 어둠 속에 자신을 감추고 있는 악의 영역이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빛을 받아야만 자기의 생각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이 두 신비의 영역을 볼 수 있게된다.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는’ (에페 1,18) 하느님의 빛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어둠 속에 제 모습을 감추고 숨어있는 죄를 드러내어 밝힌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감지하는 감각이 예민할수록 우리 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 더 예

리한 감식력을 갖게 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예리한 빛으로 죄에 대해서 가장 예민한 감식력을 가졌던 분들이 성인들이다.



  성인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분들이다. 마음의 눈이 하느님의 빛으로 밝혀질 때, 사람은 하느님과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느님의 빛 속에서 자신을 볼 때는 자기의 비천함을 보기 때문에, 교만과 자애심을 버리고 겸손과 자기 이탈의 정신을 얻게 된다. 동시에 하느님을 볼 때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기 때문에, 하느님을 더 완전히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된다. 바로 여기에 영성생활의 요체가 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을 아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이탈하면 할수록 죄를 식별하는 감각이 무뎌지게 된다. 마침내 하느님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단절되면 죄를 식별하는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가장 절망적인 죄인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죄 중에 있으면서도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는 터무니없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자기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된 자화상을 만들어 낸다. 실제의 자기는 무지하고 무능하고 비천한 죄인임에도, 이 자화상 속의 자기는 지혜롭고 유능하고 위대한 의인이 된다.



  이 거짓된 자화상은 자기의 교만과 자애심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사람은 그 속에서 흡족한 자기만족을 누리게 된다. 죄는 회개함으로써만 용서받는 길이 열린다. 회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은 자기의 죄를 인식하는 것이다. 자기의 죄를 인식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회개가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속에서 죄를 식별하는 감각이 죽으면 그 사람은 회개가 불가능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눈은 빛이 있어야 볼 수 있다. 건강한 눈은 빛을 보는 것이 즐겁지만, 병든 눈을 빛을 보는 것이 괴롭다. 그래서 건강한 눈은 빛을 반기지만 병든 눈은 빛을 피한다.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은 죄다. 죄로 병든 마음의 눈에는 하느님의 빛이 괴로움을 준다. 모든 죄의 근원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교만과 자애심이다. 사람에게 자기의 죄를 보게 함으로써 자기의 비천함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빛은 교만과 자애심을 손상시키는 타격이 된다.



  그래서 죄를 버리겠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의 빛을 배척하고 거부한다. 죄인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하느님의 빛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빛이시다. 죄의 어둠 속에 잠겨 자기의 모습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볼 수 있는 빛을 주러 오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이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회개하여 생명을 얻고, 이 빛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죄인으로 단죄를 받는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요한 3,19-20).













  

11.        대림 제3주일 (나)해 요한 1,6-8. 19-28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서 계십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성탄절에 대한 기다림으로 가슴이 뜁니다. 올 성탄절에는 함박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어떤 이는 성탄 전야제 행사에 나갈 준비에 바쁩니다. 학생들은 밤샘 파티 계획에 분주한 마음이고, 꼬마친구들은 성탄 때 받을 선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동안 잊고 지낸 친척 은인 친구들에 보낼 성탄카드를 준비하는 이들도 눈에 뜨입니다. 성탄절에 대한 기다림과 기대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는 듯 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성탄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세례자 요한을 통해)조금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서 계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세주의 대림을 무척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구세주로 믿으려 했습니다. 요한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즉 구세주가 아니오.” 그리고 마지막 답변은 구세주의 대림을 고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의 충격이요, 도저히 받아드려질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구세주 그리스도는 이미 와 계신데, 너희는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이러한 내용의 말씀입니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성탄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성탄 구유를 만들어 예수 아기를 구유 안에 모십니다. 매년 12월 24일 자정에 탄생하시는 예수님을 올해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2천년 전에 탄생하신 그 분과 매년 12월24일 자정에 탄생하는 예수님은 다른 분일까요? 2천년 전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예수님과 우리가 매년 기다리는 예수님은 같은 분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우리 모두가 한 번 즘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주님은 2천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대림절을 지내며 우리가 주님을 기다린다고 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이 언제나 오실까 하고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기다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분은 이미 세상에 오셔서 지금 그리고 항상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 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모든 이 안에 계십니다. 내가 매일 대하는 가족, 친구, 낯선 사람... 모두와 함께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하고 다가감으로써 우리 가운데 계신 그 분을 알아보고 만나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강자와 약자, 믿는 사람 안믿는 사람, 모두 전부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이미 오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일년을 돌이켜 볼 때, 얼마나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주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까? 체험하고 만날 수 있었습니까? 성교회는 일년에 한번만이라도 어둠을 가르고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직접보고 만나게 해 줌으로써, 오로지 사랑 때문에 오시는 주님을 잊지 않도록 상기시켜줍니다.

  

왕위에 오를 왕자가 백마를 타고 신부감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겨우 어느 빈민가에 아름다운 처녀를 발견한 왕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로 삼을 수 있을까 고민하였습니다. 물론 왕의 권력과 금력으로 당장 데려올 수도 있지만 그런 짓은 마음과 조금도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자는 진정한 사랑으로 결합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충신의 조언으로 결국 왕자는 화려한 왕실을 떠나 비천한 목수가 되어 그 처녀의 가난한 마을에 가서 살기로 했습니다. 둘은 아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고 서로 진정한 인간 애정으로 깊어 갔습니다.

드디어 정혼하기에 이르렀을 때 왕자는 그의 신분을 밝히고 왕비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마침내 둘은 아주 훌륭한 왕과 왕비가 되어 자기 백성들을 잘 다스렸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인간의 모습으로 이미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가난한 처녀와 결혼 한 왕자의 이상의 사랑으로 탄생하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분을 잘 알지 못할 눈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말은 우리 마음에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서 계십니다.”

  

그렇다면 일 년 열두달 중 성탄 밤에만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와 계심을 느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일년 열두달이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오신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생활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왕자가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자신이 사랑한 처녀의 비천한 신분을 취한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신 그 결단을 우리도 내려야 합니다. 일년 열두달 성탄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우리도 우리의 신분을 우리의 모습을 낮추어, 보다 비천한 보다 보자 것 없는 보다 고통받는 이웃에게도 다가가야 합니다.

  

고깃국을 먹는 사람은 결코 수제비를 먹은 이웃을 사랑 할 수 없습니다. 회전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차디찬 마루 바닥에 누워있는 이들을 따스하게 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겹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을 매만져 줄 수가 없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이 진정 가슴 벅찬 기쁨으로 변화되기 위해 우리는 우리 가운데 이미 와 계신 주님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와 계신 주님은 수제비로 끼니를 때우는 이요, 차디찬 마루 바닥에 누워있는 노인이요, 나보다 힘겹게 살아가는 환자일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으로부터 기쁜 성탄이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이제 열흘 앞으로 다가온 성탄절에 남 모르게 자선을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맙시다. 아무도 모르게 연탄 한 장이라도 좋으니 필요로 한 이웃이 있으면 찾아 나누어줍시다. 숨은 일도 보시는 주님은 당신께 드리는 최대의 성탄 선물로 받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멘!











12.              대림 제3주일 (나)해 요한 1,6-8. 19-28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정주성 신부



“당신은 누구요?”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닦으라고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백성의 마음에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자기 마음속에 곰곰이 생각하기를 “요한이 혹 그리스도인가?”(루가 3,15)하고 요한의 신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재빨리 예루살렘에서 제관과 시종을 요한에게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이에 대답하여 세례자 요한이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면 누구요? 엘리야요?” “아니요” “그렇다면 당신은 예언자요?” “아니요”라고 다시금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장치 올 엘리야, 예언자 이 세 가지는 당시 유대국민의 관심거리인 대표적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아주 딱 잘라서 아니라고 부정하였습니다. 참된 겸손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하겠으니 당신이 누군지 좀 알려주시오” 세례자 요한은 겸손되이 이사야 예언자가 말씀하신 자기의 사명, 자기는 그리스도의 선구자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즉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전하는 전령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세례자 요한과 같이 참다운 겸손을 배우며 자아반성을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모실 준비를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에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관과 시종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하고 확실하게 물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인들도 자기를 살펴 자기 자신을 알아보기보다는 남을 묻고 살펴 타인을 알려는 경향에 젖어 있습니다. 왜 사람은 자기를 살피기보다는 남을 살펴 알려는 호기심에 사로잡힙니까? 이것이 다 사람에게 고통스런 큰 결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숨을 데를 찾고 있을 때 하느님은 아담아,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하며 아담 자신의 존재를 캐어 물으셨습니다. 인류의 자아반성은 이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당신은 누구요?”하고 남에게 물어 남을 알려고 하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나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구원사업과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반성하고 자아를 향상시키지 아니하고 착하고 거룩한 자가 된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오라지 겨우 큰 허물만을 간신히 피해서 영원한 삶을 목적하든지 성인과 같이 완덕의 절정을 목적하든지 상관있느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본떠 자아반성을 끊임없이 함으로써 완전한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자기를 아는 좋은 방법은 저녁마다 하루 동안에 나의 모든 생각, 말, 행실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상인은 저녁에 가게문을 닫으면 즉시 주판알을 굴리며 하루의 손해와 이익을 계산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교우들도 저녁기도(만과) 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하루의 자기 행동을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오늘 하루 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말했으며 행동하였는가? 내가 반드시 해야할 일을 궐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살핀 후 무슨 잘못된 점을 발견했으면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다시금 아니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는 동시에 이 결심을 실천에 옮기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빌 것입니다.



하루 동안에 내 영혼, 내게 맡겨진 가정의 영혼을 생각하고 손해와 영신상 이익을 성찰하고 점검해 나가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까? 또한 이렇게 하루하루를 뜻있게 보내는 우리 가정은 참말로 복된 가정이며 이러한 집안은 단 하루를 살아도 영원한 삶을 이 세상에서부터 살아나간다고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여러분! 유대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라고 하였던 질문을 우리도 우리에게 자주 해봄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 물어보고 반성하고 완전한 자 되기로 힘쓰십시다.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한 사람이 되시오”(마태오 5,48).

13.       대림 제 3주일 (나)해 요한 1,6-8. 19-28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신뢰와 기쁨으로 주님을 기다림



대림시기 시초부터 우리는 기다리면서 생활하였다. 안간 생활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기다림이 있다. 근심과 불안 가운데서 기다릴 수도 있고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기다릴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기다리는 그것에 달려 있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어떤 사건으로서 불의의 사고나 언쟁이나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또는 인간이 소망하는 희소식으로서 병의 쾌유라든가 아기의 탄생이라든가 성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살고 있다. 기다리다 지쳐서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대하던 것이 성취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다른 것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가 매년 대림시기를 맞이하는 것은 모든 신자로 하여금 가장 기쁜 소식을 회상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의 내림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게 해준다. 신자들은 이 기쁜 소식을 믿고 있고, 이 기다림의 원천이 바로 기쁜 소식인 것이다. 불안에 떨고 있고 무관심한 사람들과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이 기쁜 소식을 나누어야 한다.



복음은 구세주 예수의 내림을 이미 수행한 하나의 커다란 사건인 것이다. 복음은 또한 앞으로 올 재림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아들의 영광 가운데 오시는 내림을 뜻한다.우리는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복음을 전파할 것인가? 우리가 오늘 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 질문에 답을 주고 있다.



먼저 요한 복음서를 들어보자. 교회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두 구절을 읽게 한다. 세례자 요한은 청중들이 고대하던 사람처럼 드러나는 동시에 신자들이 고대했던 모델처럼 나타난다.

요한은 어떻게 군중들을 동요시켰는가? 그는 어떻게 오셔야 할 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외쳤는가? 그는 회개의 표시로서 세례를 받을 것을 유대인들에게 외쳤다. 그는 설교를 통해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다. 지난 주일에는 마르코 복음사가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들려준 바 있다. 오늘은 요한 복음사가가 하느님 백성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예루살렘에서 온 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무슨 자격으로 세례를 베푸냐고 요한에게 묻는다. 그들은 요한의 설교에 무관심하였고, 모든 복음사가들은 그들이 요한의 사명도 믿지 않았으며 그의 세례도 원치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들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죄인들임을 자각하면서 이 메시아의 길을 준비해야만 했으나, 사제들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기들로부터 아무런 사명을 받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다른 민족들을 지배할 수 있는 메시아, 승리를 가져오는 메시아였다. 예수는 이러한 고대에 실망을 안겨 주었고, 그들의 교만함을 책망하셨다.

  

세례자 요한은 전혀 다른 분을 고대하였다. 그의 사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명이었다. 자기보다 뒤에 오는 분을 증거하는 사명이었고, 사람들 가운데 이미 와 계시는 그분은 세상의 빛이었다. 이와 같은 사명을 받은 요한이었지만 뒤에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기 위하여 겸손되이 봉사하였을 뿐이었다. 요한은 모든 신자가 지녀야 할 겸손의 모델이었다.

 

크리스천인 우리는 겸손되이 기다려야 한다. 주님의 겸손을 닮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증거자가 될 수 있겠는가? 주님이 세상의 빛으로서 사람들에게 나타났을 때, 측근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그분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 진리를 설교하는 가운데서 주님은 언제나 마음이 겸손한 스승으로서,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하셨고, 당신의 사랑을 자유롭게 믿는 사람들만을 제자로 삼으셨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도 이 세상의 위인들이 개선하는 것처럼 주님이 오시리라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당신 아버지의 나라를 시작하시고 당신의 영원한 기쁨을 겸손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실 그때, 당신의 내림은 영광스러운 내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광스런 내림은 우리가 축하할 성탄 축일의 사건으로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처럼 고요히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인 우리는 겸손한 증인으로서 세례자 요한처럼 참 빛이신 주님의 내림을 고대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굽힐 줄 모르는 희망을 드러내는 신뢰심을 가지고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이사야서와 데살로니카서를 통하여 이사야와 바오로는 왜 우리가 신뢰심을 가지고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이사야서에서는 이사야가 성령의 은혜를 받고 사명을 수행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는 구원되어야 할 모든 가난한 자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예수 자신도 이 예언자가 지적한 사명을 수행한다고 선언하셨다. 그 어느 예언자보다도 아사야 예언자는 성령을 받은 분으로서 그리스도로부터 온유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뿐 아니라 이 복음이 주님의 재림때 실현되리라고 예언한다. 구원이 필요하다고 겸손되이 자각하는 모든 이들은 결국 가난한 이들로서 마지막날에 구세주의 내림을 믿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바오로도 주님의 내림을 신뢰심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신자들에게 외친다. 왜 신뢰심을 가져야 하는가?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들을 성성에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며,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하심에 굳은 신뢰심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부르심은 무기력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신뢰심은 계속적인 기도로써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를 빚어주고 성화 시켜 주시는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기도하는 한 우리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도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서 살아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고, 힘을 얻을 수 있다.

  

바오로는 신뢰심과 함께 기쁨을 가지라고 외친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주 예수께 희망을 건 사람이 어떻게 기뻐하지 않고 감사드리지 않으면서 주님의 내림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 동정마리아가 바로 우리들의 모델이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의 전례에서 마리아의 기쁨에 넘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주님의 어머니가 되실 마리아는 마음이 설레이는 가운데 아들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주님은 이미 탄생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주님의 재림하실 것을 희망하고 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구원을 고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가까이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기뻐해야 하며, 특히 성체성사에 참여할 때 우리의 기쁨을 드러내야 한다. 성체야말로 지금부터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표시이며, 재림 때 당신 아버지와 함께 영원한 일치에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표지인 것이다.











 14.          대림 제3주일 <요한 1,6-8. 19-28>(나)     우리는 더욱 작아져야 한다

                                                                 김영진 신부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한 치과병원에서 지난 9월18일 치료를 끝내고 집으로 내려오던 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하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를 수없이 뇌까렸다,

내용인즉 경기도의 어떤 도시에서 32평 아파트에 사는 어머니들이, 24평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자기의 아이들과는 같은 반에서 공부하도록 할 수 없으니, 반 편성을 따로따로 해달라면서, 자녀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나와 3일 동안 농성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24평에 사는 아이들이 32평에 사는 아이들을 때리고, 그 아이들의 물건을 훔쳤을 뿐만 아니라, 24평에 사는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주는 가정 교육이 문제라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의 이야기도 라디오에서 나왔는데, 어떤 아이들은 서로 싸운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싸웠지만 별문제를 느끼지 못했다는 듯 말하기도 했다. 자라나는 아이들끼리 놀다보면 때로는 싸움을 하기도 한다. 싸움하는 것을 잘했다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엄마들이 나서서 자녀들이 공부할 수 없을 만큼 학교에서 농성하는 모습이란, 그것도 32평, 24평을 나누는 모습이란 깊이 생각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1평짜리 집도 없는 나같은 사람이 볼 때도 32평이나 24평이나 도토리 키재기 같아 보이는데, 굳이 구분을 한다면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아니라, 가진 자와 조금 덜 가진 자의 구분이 있을 뿐일텐데, 그것이 그렇게도 큰 벽을 만드는 이유가 된다니 여간 슬픈 일이 아니다.         



        돈과 명예에 가리워진 하느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자신이 지닌 위치나 소유나 입장 때문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되이 엎드리기를 힘들어하는 이들이 어디 학교에서 농성을 했다는 그 어머니들뿐이겠는가. 생각해보면 겸손을 말하고 싶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내가 그래도 신부인데 그렇게 할 수 있나, 도대체 신부를 뭘로 알고 있나"하는 따위의 생각으로, 겸손이 자리해야 할 마음에 교만과 아집과 독선을 그 얼마나 품어왔던가.

겸손한 말 한마디는 타인에게 사랑과 희망을 심어주지만, 교만한 말 한마디는 타인에게 좌절과 증오심을 심어주며, 겸손한 말 한마디는 자신을 성숙시키고 타인을 일으켜 세우지만, 교만한 말 한마디는 자신을 멸시받게 하고 타인을 아프게 찢어 놓는다.

  

미국의 유명한 웅변가 무디 목사가 하루는 어떤 곳에서 15분간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연설을 하였는데, 연설이 끝나자 청중 속에 있던 대학교수 한사람이 “무디 선생, 당신의 15분 연설 중에 16곳이 문벌적으로 맞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한다.



교수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얼마나 틀리고 있는가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무디는 “교수님, 저는 배운 것이 부족하여 그렇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저는 배운 것이 없어 무식하긴 해도 인류를 사랑하사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데, 교수님은 그 많은 학식을 가지고 인류구원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지닌 학식과 위치와 입장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교만으로 채웠으며, 대장간 출산 무디의 마음을 아프게 찢었던 것이다,

  

복음에 나오는 세자 요한은 요즘 말로 말하면 낭만이 넘치는 사나이요, 말 한마디로 가슴을 적셔주는, 마음이 아침 이슬 같은 시인이다. 그의 모습은 낙타 털옷에 가죽띠, 들꿀과 메뚜기를 잡아먹는 낭만주의자처럼 보여지고, 자신을 일컬어 오직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라든가, 주님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존재라든가, 하는 표현은 얼마나 겸손한 시인의 표현인가.



이처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자신을 우러러 보며 찾아왔던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그리스도께 자라를 마련해 드리고자 하는 놀라운 겸손으로 대답하시는 모습, 그것이 바로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 아닐까?

세자 요한에게서는, 자신이 지닌 명예나 명성, 인기나 위치 때문에 생겨날 수 있는 교만이나 타인과의 벽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을 숨기고 낮추며, 오직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드러내려 함으로써 “그분은 날로 커지셔야 하고 나는 날로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는 말씀을 몸으로 사셨다,



        겸손․낭만이 넘치는 사나이 요한

옛날 한 시골 소년이 낚시를 하는데, 낚싯대 대신에 나뭇가지를, 낚싯바늘 대신에 구부러진 핀만을 가지고 많은 고기를 잡았다. 그런데 도시에서 온 어떤 이는 최고의 낚시 도구을 가지고 오랫동안 낚시를 했어도 한 마리도 못 잡았다. 마침 낚시를 끝내고 돌아가는 소년에게 도시의 낚시꾼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잡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소년이 말하기를 “성공의 비결은 저를 드러내지 않고, 제가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세자 요한도 자신을 우러러 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빛이 아니요, 다만 빛을 증언하는 광야의 소리일 뿐이며, 뒤에 오시는 위대한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하면서, 자신을 숨기고 겸손되이 엎드렸다.

나는 누구인가! 조금 더 넓은 집에 산다는 것, 조금 더 머릿속에 지식이 있다는 것, 조금 더 높은 명예와 높은 위치에 올라가 있다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가리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돈이 많아 하느님을 버리고, 장사가 잘 되어 주일을 못 지키며, 지식이 많아 하느님 말씀을 외면하는 이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언제나 나를 첫 자리에 두고 그리스도는 나보다 뒤에 두며 살아왔던 나의 삶. 이제 그 교만의 삶에서 벗어나 2천년 전 요한이 살았던 겸손의 삶,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신 삶이 나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5.        대림 제 3주일(자선주일) (나)  주님을 맞이하는 삶

                                                     경규봉 신부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삶을 사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주님을 기다리는 삶의 자세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했고, 세리와 같은 죄인뿐만 아니라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도, 또한 군인이나 정치 지도자에게도 즉,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회개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 것을 가르쳤다. 요한의 삶과 가르침이 숭고하고 거룩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기도 하였으며,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도 대단히 많았다.

때문에 당시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던 많은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곧 메시아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대사제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도 그에게 사람들을 파견하여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물을 정도였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러한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에 응해 그리스도인 척 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적어도 침묵을 지킴으로써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고 사람들로부터 추앙 받고자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역할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도록 준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고, 자신의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ꡒ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ꡓ라고 물을 정도로 자신의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거나 교만하지 않으며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다. 자신은 오시는ꡐ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며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ꡑ고 말할 정도로 겸손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예수님으로부터 칭찬 받았다.



따라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삶의 자세는 자신을 잘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는 것이다. 자신의 신원이 무엇이고, 자신의 임무와 책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가정과 사회, 교회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잘 알고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맡은 바 임무와 책임을 완수하고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어야 한다. 나아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겸손해야 한다. 주어진 책임과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결코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하지 않으며,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제자가 되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에 넘치게 될 것이다.  











16.           대림 제3주일 <요한 1,6-28> (나)    요한 세자의 아름다운 겸손

                                                           함세웅 신부



점점 싸늘해져 가는 날씨가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겨울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대림환에 촛불이 한 개 더 켜졌습니다. 그만큼 빛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주여, 주의 은총으로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또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 하며,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옵소서'하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구세주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아름다운 마음 자세로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자세를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배웁니다.

  

오늘의 복음(요한 1,6-28)은 먼저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고 빛을 증거하기 위하여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로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그분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임무를 띄고 왔는데,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매혹되어, 그를 그의 위치보다 더 높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 복음의 이 대목은 그리스도의 위치가 침해되는 지위를 세례자 요한에게 주었던 당시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요한 세자를 혹평하거나 그의 지위를 과소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이지만, 결국 그의 위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에 예속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이 기록될 당시, 몇몇 지방에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높은 지위를 부여하기를 원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그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저자는 의식적으로 요한이 아니고,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의 이 대목은 오늘날에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점을 말해 줍니다. 어떤 경우에 그리스도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교하는 사람의 설교 또는 강론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설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진행되고 있으나, 청중 중에 어떤 이는 그 설교를 하는 사람의 말솜씨라든가 설교자의 목소리가 어떻고, 제스처가 그럴싸하다든지 등의 관심을 나타내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상의 내용보다는, 십자가상이 얼마나 값이 있는 것인지 그 외적인 본래의 의미와는 아주 동떨어진 것에 집착을 가지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저 사람이 가진 묵주는 5천원짜리인데, 저 사람은 그 묵주를 얼마나 아끼는지 다른 사람이 그것을 만지면 몹시 화를 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의 성물로써의 묵주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귀중품으로 간직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그 재산을 이용하여 인간 생활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고, 인간의 완성을 위해서 사용해야 의미가 있을 것이나, 그 반대로 재산을 위해서 인간을 희생시키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을 우리는 항상 느끼며 삽니다. 이런 주객이 전도된 의미를 모르는 소유나 삶은, 이번 대림절을 통하여 본 의미를 다시 찾아야겠습니다.



하여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파견된 세례자 요한을, 본래 그의 위치 이상으로 과대평가하고 있던 사람들을 향하여 들려주는 말씀이며, 또한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무엇도 최고의 지위에서 그리스도를 밀어내서는 안된다는 점을 힘차게 들려주십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고, 엘리아인가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모세가 약속한 위대한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26-30절에 보면, 유태인들이 요한 세자에게 와서 예수가 세례를 주고 사람들을 가르치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가더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예수를 비난하리라고 기대했으나 요한 세자는 “그분은 흥하셔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대답

하였습니다.

  

요한 세자는 예수님의 신 끈을 풀기에도 부당한 자라고 자기를 가리켜 말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노예가 되기도 부당하다고 자기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요한 세자의 아름다운 겸손을 보여 줍니다. 그는 사실상 자신의 위치가 아니고 단순히 전령자요, 전달자요, 예비하는 자로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위대한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무대에서 주역이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임무 이외의 지위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마음의 준비를 모든 사람들이 가질 때, 온 세계는 좀더 아름답고, 진정한 의미의 성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겸손한 마음 안에 진정 그리스도는 가까이 임하실 것입니다.

  

남은 대림절을 겸손한 마음으로 준비하며 그리스도 오시기를 간구합니다. 분명 그리스도는 겸손한 목동들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오실 것입니다. 













 17.          대림 제3주일 (나해)    '항상 기뻐하십시오'          

                                               강길웅 신부





오늘 성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해마다 교회는 사순절과 대림절이라는 전례시기 안에서 회개를 선포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성찰과 반성의 시간을 갖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주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요 또한 그 길만이 주님의 부활을 자신의 부활로 체험하는 올바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교회가 통회 속에서 항상 울고만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사순 제 4주일과 대림 제 3주일은 오히려 기쁨을 묵상하며 대축일을 준비하게 합니다.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고달픈 처지에서도 주님을 생각하면 온 몸에 힘이 생기고 기쁨이 솟구칩니다. 1독서에서 외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줄 메시아가 오시니 하느님께 감사와 기쁨의 찬미가를 드리는 것입니다. 고달픈 이들에게 주님보다 더 기쁨을 줄 자가 세상 천지에 누가 있겠습니까?



특히 믿음을 가진 우리들은 누구보다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되며 혹 자기 죄로 인생이 크게 실패했다 해도 생명이 살아 있다면 그는 주님 안에서 희망이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느님 사랑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하고 외쳤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늘 우리 가운데 분명히 서 계십니다. 따뜻한 아버지로서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서 계시며, 강한 주님으로서 지혜와 힘을 가지고 서 계십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믿는 사람하고 믿지 않는 사람하고는 은총의 차이가 다르게 됩니다.



같은 업종에서 서로 장사를 하는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한쪽은 식구도 많고 병자도 있으며 늙으신 부모도 모시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바람 잘 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항상 싱글벙글이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으냐?"하고 물으면 그는 늘 같은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니 좋지요." 저는 그 친구의 기쁨을 바라보면서 제 자신을 반성할 때가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식구도 적고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늘 짜증이요 불평과 불만이 많았습니다. 장사가 잘 되는데도 부부간에 화목하지가 않으며 술만 마셨다 하면 집안에 난리가 납니다. “도대체 무엇이 불만이냐?"하고 물으면 그 친구도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세상이 뜻대로 안됩니다." 맞는 말입니다. 주님이 함께 동행하심을 모르니 세상이 뜻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삭막하고 고달픕니다. 평생 슬프게 방황하게 됩니다.



오늘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뜻이라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기쁘게 살지 못 하느냐? 그리고 왜 많은 사람들이 감사를 드리지 못하고 불평 속에 서 사느냐?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없는 인생은 사막에 오아시스가 없는 인생입니다. 하느님께 자기를 열고 대화하지 않는 인생은 뜨거운 여름에 겨울옷 입고 땀을 흘리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기도가 없으면 세상을 거꾸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특히 '자선주일'입니다.



참 사랑은 받는 것보다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에 남에게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받지 않아도 될 완전한 부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는 그렇습니다. 베푸는 사람은 늘 채워지게 되고 자기 것이라고 늘 움켜 만 쥐는 사람은 항상 부족하여 불안하게 됩니다. 나누지 못하는 사람, 이 사람들은 재물이라는 감옥에 갇힌 자들입니다. 억만 금을 가지고 있어도 그는 묶여진 존재입니다.



참 기쁨은 베푸는 데 있습니다. 남을 기쁘게 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비로소 기쁠 것입니다. 없는 자들에게 나눠주고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보십시오. 참 기쁨이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특히 기도를 해 보십시오. 하느님을 통해서 느끼는 기쁨과 그리고 무한한 감사가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18.           대림 3주일 (자선주일)    <요한 1,6-8. 19-28>(나)

                   “주님(야훼)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ꡓ(이사 61, 10)

                                                         심용섭 신부



대림 제3주일 제1독서에서 읽을 수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ꡒ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ꡓ로 이어진다.(원문에 충실한 직역이 아니므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래서 ꡐ나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고 내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환호 용약한다ꡑ고 이해해야 한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는 물론, 신앙인에게까지도 이런 고백은 한없이 멀게 느껴진다.

도대체 기쁠 일이 뭐 그리 있겠으며, 그 기쁨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조차 뭐 그리 대단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은 때이기 때문이다.



또 세속이 제공하는 기쁨(?)이 얼마나 많고도 다양한데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겠느냐고 할 만한 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느님은 부담은 될지언정 기쁨의 원천이라고 여겨지기에는 거리가 멀기도 하려니와 구체적이지도 않다. 소위 좀 생각한다는 사람 가운데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하느님이란 존재에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인류가 얼마나 큰 갈등과 전쟁에 시달렸느냐고 하며 하느님이 오히려 인류에게 고통의 원인인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요구를 하고 싶은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금의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기쁠 일은 별로 없다. 순간의 조각에 불과한 기쁨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모여 이루어 놓은 틀은 방향을 잃고 몰락을 향하여 간다는 의구심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교회 안팎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 구분과 상관없이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믿는 경쟁으로 말미암은 인간 관계의 파괴, 인위적 제도가 자아내는 부패성의 근본 원인에 대한 몰지각, 인간의 한계로 말미암은 자연에 대한 자연적 접근의 산발성과 단편성 및 불균형성,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에 대한 인위적 접근 실험의 연속, 그 접근 자체가 지니고 있는 허구성을 진리라고 하는 주장 등이 몰락의 시작이라는 견해를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 기쁠 수 있는 이유도, 여유도 없다.



그러나 정말 기쁠 수 없는 까닭은 기쁨 자체가 썩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연이 파괴될 때에는 여러 조치를 마련하느라 분주한데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자연―사랑, 평화, 정의, 자비, 봉사, 믿음, 희망, 일치, 화해, 깨달음 등―이 썩는 데에는 속수무책이다. 기껏 그런 것은 썩을 수 없고 썩었다고 하면 이미 그렇게 불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겪는 일상 생활은 썩은 웃음, 썩은 기쁨을 보여 준다.



보이지 않는 자연은, 체험될 때 일어나는 사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관계 안에서만 체험되는 것이다. 바른 인간 관계 속에서만 썩지 않게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참된 기쁨이 있어야 바른 인간 관계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순환 관계를 바르게 정리하지 못하면 악순환으로 바뀔 수 있다.



여기에서 기쁨이 부패할 수 있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교황께서도 이미 경고한 바 있는 세계화라는 틀은 삶을 경제 체제의 측면 하나로 피라미드화하는 것이므로 끊임없는 경쟁 관계와 숫자로 환원시키는 과정을 삶의 틀로 삼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지금 전세계는 컴퓨터화하여 가므로 이 과정을 외면하기는커녕 더 증진시키고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어디 경쟁이나 숫자화의 체계로 계산되거나 환원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니 파괴된 인간 관계에서 참된 기쁨이 나올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참된 인간 관계의 복원을 위하여 참된 기쁨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 다른 ꡒ곳ꡓ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 대림 제3주일의 이사야서 61장 10절의 말씀이다. 하느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어야 참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 인간의 체제에서 비롯되는 기쁨이 아니다. 따스한 햇살, 살갗에 기대는 아기의 얼굴같이, 다가오는 바람같이 위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뜬구름 잡는 듯한 기쁨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관된 성실을 뜻하는 하느님 정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랑, 신부의 새 모습과 견줄 수 있고 자연이 보여주는 생명력과 같은 기쁨이다.(이사 61,10―11)



그런 순수한 기쁨을 누린 분이 없다면 그것 또한 우리 생활과 동떨어진 것 같겠지만, 그렇지 않다. 아기를 낳지 못하던 한나가 아기를 얻고 본능적인 기쁨에 머물지 않고 ꡒ내 마음은 주님 안에서 용약합니다ꡓ(Ⅰ사무 2, 1)라고 찬양하고 성모 마리아께서도 같은 찬미와 고백(루가 1,46―47)을 엘리사벳에게 들려주고 있다.



신자들에게는 주님이 참된 기쁨을 누리는ꡐ곳ꡑ이 되어야 한다. 그 기쁨을 누림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인간 관계를 복원한다. 그 기쁨은 본적과 주소가 분명한 기쁨이고 기원도 방향도 확실하여 썩지 않고 순수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기쁨이 하느님의 뜻에 기원을 두었음을 말하고 기도와 감사가 따르는 것임을 밝힌다.(제2독서) 그러기에 자신있게 ꡒ늘 기뻐하십시오ꡓ라고 권고한다.



쓰레기 종량제도 중요하지만 우선 썩은 웃음, 썩은 기쁨 좀 버리자. 하느님 안에서 그 분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릴만큼 기쁜지도 짚어 보아야겠다.













19.              대림 제3주일 <요한1,6-28> (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민병섭 신부





    우리 나라 조선 시대 때 한 임금이 백성들을 보기 위해 성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성밖 30리쯤 되는 동네에 한 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앓아서 병석에 누운 그의 어머니가 탄식하는 말이 “나라님의 백성이 되어서, 한 번도 상감님을 못 뵙고 죽는다는 것은 평생 유감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는 말을 아들이 들었습니다.



  그 이튿날 아들이 효성이 있어 어머니를 업고 임금님 성에 가서 높은 언덕에 올라가 기다렸습니다. 임금이 가마를 타고 오다가 우연히 맞은편 언덕을 바라보니 나이가 서른쯤 되었을 더벅머리 총각이 늙은 여자를 업고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늙은 부인이 젊은 남자의 등에 업혀서 멀리 임금이 탄 가마를 바라보면서 자주 자주 오른손을 들어 눈물을 씻으면서 만수무강을 축수하는 모양이 보였습니다. 업은 총각도 업힌 노인에게 가마가 보일 수 있도록 자주 자주 치키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하였습니다.



  옛날 좋은 임금들은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였기에, 그 임금도 타고 가는 가마를 멈추게 하고 그 늙은 부인과 젊은 청년을 앞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모자의 마음을 깨달은 임금은 돈 백 냥과 쌀 한 섬을 내리며 늙은 어머니를 잘 모시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모자의 충성심과 또 젊은이의 효성에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근처의 다른 마을에 사는 청년이 이 광경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해 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며칠 후 임금이 다시 행차한다는 말을 듣고 자기 어머니를 등에 업고 그 언덕에 올라갔습니다. 임금은 그 길을 지나다가 효자가 있던 언덕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도 며칠 전처럼 젊은 사람이 늙은 부인을 업고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임금은 사람을 보내 그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 청년은 임금 앞에 와서 자기는 50리 떨어진 조그만 동네에 사는 촌사람으로 임금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병든 어머니를 등에 업고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또 돈 백 냥과 쌀 한 섬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백성들이 그 청년을 칭찬하기는커녕 오히려 항의하였습니다. 청년이 50리 밖에 산다는 것이나, 어머니가 임금님을 뵙기를 원했다는 것이나, 청년이 효자라는 것 모두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성문 바로 밖에 살고 있으며, 본래 망나니로 어머니에게 불효하고 어머니가 빨리 죽지 않는다고 어머니를 구박하고 때리기까지 하는 것을 보았다며 항의를 하였습니다.



  신하들은 백성들의 항의를 듣고 임금에게 상을 주는 것을 취소하자고 여쭈었습니다. 임금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상을 취소하지 말고 오히려 더 잘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임금은 “그 청년이 본래 불효자라 하더라도 이번은 효자의 흉내를 낸 것이다. 효자의 흉내를 낸 것이야 나쁠 것이 어디 있는가."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을 주었던 것을 취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청년을 불러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라고 가르치고 상을 주어 보냈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참으로 진짜 효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림 제3주일인 오늘 전례의 핵심은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으며,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 시대의 기쁨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고 있다.

한편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모든 관심을 자기보다 뒤에 오시고 또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시지만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에게 집중시키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명이며 여기서 그의 기쁨이 이루어지고 있다(요한 3,29-30 참조).

곧 비록 그 자신은 무대 뒤편으로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관심이 그리스도께 쏠리게 된다는 사실에서 그의 기쁨은 충만해진다.



  우리가 이러한 기쁨을 얻기 위해서 우리도 세례자 요한과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을 생각하며 그분을 위해 우리 자신을 봉헌할 수 있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주님께 바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 줄 수 있는 마음, 그리고 주님의 삶을 본받는 삶에서 시작한다. 비록 완벽한 삶이 아니라 할지라도 위의 이야기처럼 우리도 효자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그런 삶이 그리고 임금과 같이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이 우리 삶은 진실로 변화된 삶이 되고 주님께 합당한 삶이 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슬픔으로 질식되어 삶에 권태를 느끼는 이 세상에 대해 좀더 확신에 찬 모습으로 기쁨을 드러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복음/요한 1,6-8.19-28(나)



   오늘의 복음은 세례자 요한에게 관계되는 세 구절(6-8절)을 요한 복음의 머리말에서 분리시켜 그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그분께 대한 계속적인 증언과 연결시킴으로써 그의 증언이 구원의 역사 속에서 갖는 위대성과 사명을 전하여 주고 있다.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6절)으로 소개하여 그를 이미 오랜 동안 침묵에 파묻힌 예언 시대의 희망을 꽃피우는 예언적 사명을 가진 사람으로 밝히고 있다. 동시에 복음 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사명의 본질은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려 왔던 빛 곧 메시아가 아니라 바로 그 빛을 증언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요한 복음에서 증언은 늘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증언은 언제나 예수님의 인격을 직접 인식하고 체험하며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늘 상충과 대립과 판단의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곧 진실과 거짓, 빛과 어두움, 신앙과 불신 등을 여러 방법으로 가려내는 심판 과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판 과정의 관점이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신원을 묻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임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 자세는 올바르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이 아니라 심문하는 식의 논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진리 앞에서의 개별적이고도 인격적인 결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보낸 사람들에게 보고하고 그들의 결정이 어떠한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참된 '진리', 곧 예수님을 뵙지 못하고 또 알아뵙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태도는 이와 완전히 구분되고 있다. 많은 사람에게 추종을 받고 있지만 그의 태도는 겸손하였으며 진실하고도 진리를 존중하는 모습이다. 그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도 아니었다. 또한 옷 입는 모양과 생활 양식(2열왕 1,7-8 참조)으로 미루어 생각할 수 있었던 엘리야, 곧 말라기 예언서(3,1-3.23.25)의 내용에 따라 ‘주님의 날'을 준비해야 했던 그 엘리야도 아니었다.



  그리고 출애굽의 기적적인 일들을 새롭게 하고 또한 그러한 능력을 능가하면서 모세의 뒤를 이어야 했던 예언자도 아니었다(신명 18,15; 요한 3,14 등 참조). 그는 오직 '빛'을 증언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며, 이사야가 말한 대로 “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사 40,3)이다. 공관 복음에서 이 말은 이사야의 예언이 요한을 통하여 입증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인용만 되고 있지만, 요한 복음 사가는 이 말을 바로 요한의 입을 통하여 나오게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고 볼 수가 있다.



  이것은 요한 복음에서 역사적인 것보다는 신학적인 면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하나의 '소리'로서 희망과 구원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달할 뿐이다. 더구나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에도 부당한 존재라고 선언함으로써 그가 알리고자 하는 분의 위대성을 증언하고 사람들이 그분께 대한 갈망과 원의를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이처럼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행위에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께 자리를 마련하여 드리는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진실하고도 성실하며 겸손한 자세가 있어야만 성탄의 신비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다.



       제1독서/이사 61,1-2.10-11



   오늘의 제1독서에서는 ‘결혼식'이라는 상징적인 묘사로써(이사 61,10) ‘기쁨'의 경사스러운 초대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말한다. 이사야는 한 신비스런 인물의 도래와 사명을 예고하고 있다. 그는 가난한 이들, 약한 이들, 압박받는 이들을 보호하고 돌보아 줄 것이다.



  루가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이 성서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심으로써 그분의 공생활이 시작되고 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 이 말로써 그 예언이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선언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기다려 왔던 바로 그분이시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하고 그분을 죽이려 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니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리 설정해 놓은 모습에 따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하기에 혁명가는 혁명가로서, 평화주의자는 평화주의자로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나자렛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이며, 모든 사람 특히 아무도 생각해 주지 않는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고 이 세상 어디서나 존재하는 포로들과 옥에 갇힌 이들을 해방시키고, 찢긴 마음들을 싸매 주라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다.



  특히 오늘의 제1독서의 두 번째 구절 "주님께서 우리를 반겨 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안식년과 관계를 갖고 있다. 그 안식년은 50년마다 성대하게 거행되었으며, 그때에는 사람들을 모두 자기 부족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한 모든 사람이 자기 재산을 되찾게 해 줌으로써 사람들과 재산, 모든 것의 해방을 선포하고 실시하였다(레위 25,8-17 참조).


  이러한 해방의 선포는 이미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었으며, 또한 성탄 때마다 우리 가운데 다시 오시는 예수님에게서 선포되고 있다. 참된 해방, 그것은 어느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제2독서/1데살 5,16-24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뜻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 권고가 연이어 나타나는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는 모두 한 뿌리에서, 곧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영에서 자라 나온 꽃들이기 때문이다. 그 성령은 끊임없이 모든 일에서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과 함께 있도록 작용한다. 온갖 악이 자행되고 있는 세상에서 늘 기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생활 환경은 우리가 늘 기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더구나 허다하게 겪게 되는 불쾌한 체험과 모욕적인 행위들은 우리의 마음에 언제나 감사의 정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속 생활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영적 생활은 깨끗한 희생 제물을 사르는 불과 같이 세속 생활을 변화시켜 하느님께 대한 찬양이 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영의 인도로 사는 사람은 가장 어두운 현실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가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만약 태양을 향해 산다면 그림자는 언제나 우리 뒤에 있을 것이지만, 우리가 뒤로 돌아선다면 모든 그림자는 언제나 우리 앞에 있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영으로 산다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선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어 바오로 사도는 19-20절에서 영적인 선물을 멸시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21-22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곧 모든 역경에서도 선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마음가짐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가져야 한다는 것을 23-24절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준비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다시 뵙게 되는 그 날에도 항상 기뻐하며 기도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것을 말한다.











 20.        대림 제3주일 <요한 1,6-28>(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1.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요한 복음 1장 6-8절은 머리말에 해당하는 말씀(로고스) 찬가(1,1-18)의 한 부분입니다. 복음서 작가는 말씀 찬가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두 번 언급합니다(1,6-8.15). 이 구절들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증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가 씌어질 무렵 이스라엘에는 두 부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세례자 요한을 추종하는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신봉하는 그룹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네 스승을 빛으로 신봉한 데 대하여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고, 다만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한 증인이었을 뿐이라고 강조합니다(6-8절).



         2.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



요한 복음 1장 19-28절은  세례자 요한의 신분․정체에 관한 질문과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의 의미에 관한 질문으로 짜여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제관들과 레위지파 사람들(19-28절),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29-34절), 그리고 자기 제자들(35-42절)을 상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합니다. 세례자 요한 자신은 오직 ‘주님의 길을 바르게 하라고 광야에서 부르짖는 이의 소리’(23절)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때 파견된 바리사이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라면 왜 세례를 베푸는 거요?’(25절 참조)라고 묻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베푼 세례는 메시아적 의미를 가지는 그런 세례가 아니고 다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마르 1,8)을 알려 주기 위해서 행한 ‘물의 세례’일 뿐이며(요한 1,31.33), 세례보다는 자신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3. 우리의 이해



  우리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을 알려주는 유일무이한 계시자이며,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달리 하느님을 알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임’(요한 17,3 참조)을 깨달아 모두에게 증언한 분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 당시에 세례자 요한은 얼마든지 자신을 ‘메시아’로 내세울 수도 있었지만 자신은 단지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너도나도 자신만을 앞세우고, 또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면서 이익을 추구하려는 이 시대에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신선한 선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희년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세례자 요한처럼 내 자신이 아닌 내 주위를 둘러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무처 홍보실











21.      대림 제3주일 <요한 1,6-28>(나)             보이지 않는 손



서양에서는 하느님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고 부릅니다. 이 유명한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입니다. 그의 명저인 「국부론(國富論)」에서 개인의 이기심에 입각한 경제행위가 결국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이바지하며 이러한 사적 이기심과 사회적 번영을 매개하는 것은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이후부터 경제뿐 아니라 사회․역사․문화․예술의 발전을 이끄는 힘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학설로 등장하게 됩니다.



특히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던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은, 신학과는 정반대의 대표적 학설인 진화(進化) 속에도 ‘보이지 않는 손’의 끊임없는 창조가 깃들여 있으며, 이 끊임없는 창조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이론을 ‘진화자로서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사상은 21세기를 맞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홍수와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 종교와 지역간의 갈등으로 인한 끊임없는 전쟁과 살상, 기아와 질병, 성의 타락으로 인한 정신적 빈곤과 끝간 데를 모르는 과학만능주의와 물질중독 등 얼핏 보면 한줄기 희망조차 없어 보입니다. 이 절망의 시대에 우리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 중심에 서서 새로운 창조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샤르댕의 주장은 21세기를 맞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처음 말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질문을 받자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요한 1,26)라고 대답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불의 세례’(마태 3,11)로 새로운 천지를 창조하실 예언자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을 때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19) 하고 인사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슬픔과 불행을 물리치는 ‘보이지 않는 손’이며 모든 두려움을 평화로 바꾸는 새로운 창조의 중심임을 스스로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 그들의 ‘한가운데’에 서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것의 중심입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았으며(마태 28,19)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써 하늘과 사람의 중개자가 되셨으며,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물리친 승리자가 되시고 마침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의 슬픔을 ‘어쩔 줄 모르는 기쁨’(요한 20,20)으로 바꾸고 공포를 ‘평화’로 바꾸기 위해 우리 한가운데에 서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그분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어리석은 인간들인 것입니다.

                                    최인호 베드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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