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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연구
작성일 2008년 11월 27일 (목) 20:19
분 류 성탄시기
ㆍ추천: 0  ㆍ조회: 3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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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탄대축일 강론모음 ”
 

구유경배 

구유경배 신심은 5-6세기경 에페소 공의회(431)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성모 마리아 대성당(로마소재)에 사람들이 베들레헴의 구유 유물을 모시게 되자 대성당 곁에 구유경당을 건설하면서 유래되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성탄에 이 경당에서 베들레헴에서 행해지는 것과 비슷한 밤 전례를 지내기도 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구유는 1223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유래한다. 성인은 베들레헴을 방문해 예수님이 누워 계셨던 구유를 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보잘것없음과 가난함 속에서 사람들에게 오셨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성인은 하느님의 아들이 가난과 궁핍 속에서 사람들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하고 싶어서 교황 호노리오 3세의 허락을 얻어 구유를 만들어 대중 앞에서 공개하였다. 이는 성인이 신자들에게 성탄의 참된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구유를 만들어 꾸미는 풍습은 프란치스코 회원들에 의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처럼 구유의 본래 모습은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이었는데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날처럼 화려하게 채색된 구유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구유 제작에 관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특히 18세기를 전후에서 독일에서는 일반 가정에 성탄 구유가 토착화되어서, 구유는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의 관습이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와 내 가정에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구유를 만들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구유는 성탄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복음을 진정으로 믿게 되고 자녀들에게 신앙을 체득시키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즉 목자들이 서 있는 곳에  나도 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바로 참여요 관심이며 친교이기 때문이다.

 구유라는 것은 예수 탄생의 구체적인 한 자리를 상징할 뿐이지만, 그 보이는 자리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동참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는 바로 내 안에 탄생하는 것이다.

구유는 말씀의 식탁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형상이 될 수 있다.  "구유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님 탄생의 위대한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한다. 구유는 베들레헴의 순박하고 소박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그것은 복음이 되고 그리스도교 정신을 가르치는 수업의 현장이 된다. 가난하고, 작고, 이른바 세상이 가치를 두고 있는 것들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오셨다. 가난한 이와 미천한 이들 그리고 소외된 이들이 그분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시어 모든 간격과 장애와 두려움을 없애셨다."

교회는 말씀과 형상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신앙이 들음으로써만이 아니라 봄으로써도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구유를 만들고 그것을 봄으로써 성탄의 신비인 육화의 의미를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신비 앞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성탄절의 단어들:

①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

②노엘: 노엘(noel)이란 프랑스어로 크리스마스를 뜻하는 말.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1. 말씀읽기:요한1,1-18

2. 말씀연구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이와 같이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 그리고 하느님의 독생 성자가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강생의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자 핵심 되는 교리입니다. 요한복음은 로고스 찬미가로 복음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1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세상 창조의 그 먼 순간,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벌써 말씀이 계셨습니다.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콜로새1,17)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하느님과 말씀의 위격적 일치와 결속관계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공생활을 하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늘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늘 기도하셨고, 성령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씀이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은 말씀의 신적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기에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육화(인간의 몸을 취하신)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지상 활동은 바로 이 본성에 근거합니다.



2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은 만물에 앞서 존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하느님의 속성도 표현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독립적이며 대등한 차원에서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로고스(말씀)는 1세기의 헬레니스트의 문화계에 일찍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그리스 말입니다. 이 말을 전 우주의 활동적 신적 원인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낼 수 있었던 그 말이, 같은 본성의 일치에 있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계를 보다 알맞고, 또 당시의 환경 속에서 보다 더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에 로고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고유 명사로서 로고스,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말씀의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 밀접한 일치의 생명입니다. 함께 계셨다는 것은 단순히 함께 있다는 표현보다는 공동생활, 밀접한 관계를 표현하는 데에 알맞은 것입니다. 말씀은 하느님이십니다. 말씀이 하느님으로서의 본성을 가지셨고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하느님이신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도 하느님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영원성, 그분의 위격성, 그리고 신성을 요한 복음사가는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말씀은 모든 생명의 근원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말씀을 통하여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은 그분을 통하여 확대되어 완성에 이릅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을 주시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리고 생명 그 자체 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의 빛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은 창조와 더불어 생명의 원천이요 빛을 주며, 생명은 인간을 위한 빛이고, 빛은 인간에게 생명의 힘입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빛은 어둠을 비추어 몰아내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현재도 미래도 어둠이 빛을 이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둠과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존재들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어둠은 결코 생명의 빛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제압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둠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등진 인간세계, 곧 하느님의 빛에 의해 아직 비추어지지 않는 인간세계를 뜻합니다. 또한 이런 어둠으로 인해 소경이 되거나 악의 세계로 타락한 인간 자신도 가리킵니다. 따라서 어둠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빛을 거부함으로써 생긴 결과입니다. 결국 어둠은 하느님을 등진 죄의 결과입니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임무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예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께서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러 왔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온 것입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었습니다.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신원에 대해서 늘 말 해 왔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 더욱 높은 사람으로 평가해서 요한을 빛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예수님은 빛 그 자체셨고 요한은 하나의 등불이었습니다. 이 등불은 아침 햇빛이 찬연히 하늘을 비출 때까지 필요합니다. 하지만 태양이 떠오르면 등불은 필요가 없습니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세상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피조물 안에 계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였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세계의 생명이요 빛으로서 인간이 알아볼 수 있도록 가까이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둠을 더 사랑했기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어둠으로 그 빛을 덮어 버리려 했습니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이 세상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은 하느님을 충분히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사람은 피조물에게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였고 말씀의 빛을 분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씀은 세상에 당신이 오실 것을 오랫동안 예언자들을 통하여 알리셨고, 마지막으로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를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말씀을 거부하였습니다.

 말씀은 모든 사람들의 빛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 빛을 맞이하도록 결단을 촉구했지만, 오히려 말씀과 가장 밀접한 사람들, 즉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은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유다인들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다인들을 통하여 세상 모든 이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유다인들이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초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모두가 빛에 대하여 눈을 감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 들였고, 그분을 믿었습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온 그분의 계시를 굳게 지키고,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신비스러운 권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된다는 것은 육체적 출산이 아니고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탄생입니다. 이 영적 탄생의 원인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어, 당신 본성에 참여하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 14)는 사도 요한의 증언을 따라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일을 “강생” 또는 육화라고 표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피2,6-7)

 이와 같이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 그리고 하느님의 독생 성자가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강생의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자 핵심 되는 교리입니다.

 그렇다면 왜 말씀이 사람이 되셨는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나이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의 말씀이 한낱 사람이 되셨을까요?  전능하신 하느님이 유한한 인간으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의 “나”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①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1요한 4, 10). ②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 16). ③ 우리에게 거룩한 표양이 되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 29). ④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 4)하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즉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과 같이 거룩한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탄생한 이유를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인데 구태여 인간이 되지 않고서도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들처럼 결코 이해타산 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역사 안에 직접 개입하심으로써 그분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이렇게 무조건적이며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분의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분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수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사람이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무슨 낯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어떻게 아버지 앞에 서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돌아오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강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허’입니다. 비하는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심은 비하라고 하지 않고 “비허”라고 합니다. 그런데 비허라는 말을 한방에서는 소화불량으로 몸이 쇄약해지고 식욕이 떨어지는 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기 비허는 그런 뜻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시어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심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진정으로 하느님이시고, 아버지와 똑같은 본질을 지니신 분, 곧 아버지 하느님의 신적 본성과 영광도 영원히 함께 지니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처럼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강생하시는 순간부터 인간으로서도 존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고 “죄 많은 인간의 모습”(로마 8, 3)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의 나약함과 미천한 신분을 함께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들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것은 우리들 가운데 자신의 천막을 치셨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법은 한 천막 아래 친밀하고 따뜻하게 모이는 유목민의 습관을 생각하게 하는 동시에, 구약의 회상, 팔레스티나를 향한 40년간에 걸친 히브리인들이 천막 아래서 보냈던 사막의 생활, 거룩한 장막, 예루살렘 성전을 회상하게 하는 것입니다(탈출 25,8; 1열왕8,10;에제키엘37,27). 거룩한 장막과 예루살렘의 성전은 선택받은 백성에게는 하느님께서 사시는 집이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본 것을 증언합니다. 예수님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보았고, 그분의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이심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본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고, 뒤에 오실 그분이 메시아라고.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라고. 바로 영원히 존재하고 계시던 로고스, 즉 말씀이십니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는 것은 은총 뒤에 은총이 덧붙여지는 것입니다. 만일 먼 거리를 걸어 갈 때 중간까지 누군가가 차를 태워줬고, 내리자마자 다른 사람이 또 태워주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은총은 모두 로고스의 충만에서 용솟음쳐 쇠사슬의 고리처럼 이어지고, 언제나 끊임없이 인간의 협력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육화한 말씀의 영광을 본 증언자들은 그분의 충만함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바로 그 은총까지 실제로 받았기에 그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모세를 통하여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예수님에 관해 기록한 증언자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준 모세와 은총과 진리를 가져온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대립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을 뿐입니다. 사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진리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이었던 모세는 심히 불완전한 율법밖에는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율법은 피해야 할 악을 보여 주고 있었으나, 그것을 피하게 하는 데에 필요한 힘을 충분히 줄 수 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율법은 그림자와 상징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을 낳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키지 못하니 당연히 죄의식만 쌓였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규율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해 버리셨습니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이 말씀은 아들을 아버지와 구별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별과 일치가 동시에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로고스로 말미암아 진리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그 자체로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만큼 알려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그분께서 바로 하느님 아버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요한 복음사가는 그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큰 빛을 보고, 그 빛을 향하여 나아갈 때, 나는 말씀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뵐 수 있으며, 빛과 은총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예수님의 성탄을 나는 어떻게 감사하며 축하였습니까?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당신 백성에게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을 포함한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예수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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