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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1월 31일 (목) 23:24
분 류 연중2-7주일
ㆍ추천: 0  ㆍ조회: 3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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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연중 제 6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6주일



옛 사람에게는 그렇게 일러주었으나 나는 달리 말하노라.



제1독서 : 집회 15,15-20

제2독서 : 1고린 2,6-10

복  음 : 마태 5,17-37

해설



  이 주일의 독서들 간에는 어떤 사상적 연속성이 있다. 그것은 ‘율법’과 그 율법을 표현하고 있는 여러 가지 ‘계명’들에 주제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복음’과 ‘율법’이 사실상 대립되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율법’도 ‘복음’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야훼의 법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시편 118의 일부를 전해주고 있는 오늘의 응송에서는 ‘율법’에 관한 주제가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 시편 118은 서로 다르지만 어느 정도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8개의 개념들(법, 증거, 계명, 규정, 언약, 말씀, 판단, 길)로 구성되어 있는 22개의 시절(詩節)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 신적 계시에 대한 감동적인 찬양으로 가득 차 있다.

  “야훼의 법을 따라가는 사람들, 그 생활 깨끗한 이 행복하도다. 당신의 계명을 지키며, 마음을 다하여 주를 찾는 사람들 복 되도다…은혜를 내리시와 당신 종을 살리시고, 당신의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내 눈을 열어주소서. 당신 법의 묘함을 나는 보리이다…나를 가르치시어, 당신의 법을 지키게 하소서. 이 마음 다하여 지키리이다”(시편 118,1-2. 17-18. 34).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것은 통속적인 도덕적 가르침도 아니고 애매모호한 스토아적(금욕주의적) 사상 - 목표달성을 위해 오로지 인간의 불굴의 의지에만 의존하려 하는 - 도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요구하는 바에 대한 ‘지혜로운’ 묵상이며 또한 그분의 ‘법’의 ‘묘함’을 바라보고 ‘행하고’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도록 보다 훌륭한 깨우침과 성실한 의지를 청하는 기원이다.

  제1독서는 자유 의지에 근거하고 있는 윤리성의 근원 자체에 대한 집회서의 사상을 전해주고 있다. ‘법’은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으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 인간은 잘못할 때라도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 - ‘죽음’을 초래한다 할지라도 - 이 자율적, 인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 손으로 이루어지는 ‘죽음’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일종의 ‘비극적’ 위대성이다. 그러나 그러한 점이 비록 자신들의 ‘법’을 갖고 있기 하지만 그들 존재 자체의 본성적 운명에 따르는 돌이나 광물 그리고 동물로부터 인간을 근본적으로 구분시킨 점이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며 주님께 충실하고 않고는 너에게 달려 있다. 주님께서는 네 앞에 불과 물을 놓아주셨으니 손을 뻗쳐 네 마음대로 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 있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로 받을 것이다” (집회 15,15-17).

  여기서 말하는 ‘죽음’과 ‘생명’은 물질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윤리적’ 개념이다 : 사실 ‘생명’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게 해 주는 하느님의 ‘법’을 받아들여 그분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에, ‘죽음’은 그 하느님의 계획을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하는 좌절의 한 형태이다. 따라서 인간의 참된 위대성은 ‘생명’을 선택할 수 있음에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특히 인간은 비록 항상 하느님의 계획에 종속되기는 하지만 그 자신의 조물주가 된다 :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악인이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고, 또 죄를 범하라고 허락하신 적도 없다’(20절).



법 ‘내면화‘



  오늘 복음은 다소 길다(마태 5,17-37). 하지만 사실상 후반부(21-37절)는 전반부의 개념을 여러 가지 예를 들어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며, ‘법’이라는 것은 오직 ‘내면화’될 때 다시 말하자면, 인간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변화시키는 그 본질적 성향이 이해될 때만이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이 ‘사랑을 하라’는 적극적 계명으로 바뀌지 않는 한, 나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죽이기를 계속할 수 있다.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계명이 내 사고 자체를 명백히 할 만큼 ‘충실하고’ 진실 하라는 계명으로 바뀌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거짓 맹세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른 모든 계명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흔히 이야기하는 법의 ‘구체성’이나 ‘조문(條文)’ 그 자체가 아니라, ‘법’에 ‘생명력을 부어주고’ 또한 그 법을 선성, 진실, 형제적 이해, 순종, 하느님과 인간들에 대한 충실성의 자발적 표현이 되게 하는 법의 ‘정신’이다. 이렇게 법이 변화될 때 그 법은 이미 ‘복음’ 즉 ‘은총’이 된다. 왜냐하면 성령의 힘에 의해 거의 자발적으로 내면으로부터 행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자 이제, 거의 사료 전체가 마태오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산상수훈 가운데서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오늘 복음의 내용을 분석해 보자.

  첫째 부분(17-19절)은 마태오복음의 독자 가운데 아마도 그리스계 출신인 일부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의 주장을 반대하여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즉 그들은 옛 ‘율법’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전히 무너졌다고 주장했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희랍어로 plerósai)왔다’고 언명하신다.

  ‘완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 다음 계속 이러지고 있는 대립적 문장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완전하게 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고 바울로 사도의 가르침(“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율법은 끝이 났다” : 로마 10,4)대로 마침내 구약이 그리스도를 통해 ‘충만한’ 의미를 취한다는 의미로도 알아들을 수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전자의 의미로 보아도 사실이고 후자의 의미로 보아도 사실이다 : “분명히 말해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18절).

  여기서 예수께서 쓰시는 장엄한 표현에 주목해 보자 : 구약 전체를 종합해서 표현하고 있는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천지’와 같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계시되었고 또한 계속해서 계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제외되지 않으려면 그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들을 하나라도 어기지 말고 또한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라고 권고 하고 있다(19절).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옳게 살지 못한다면…”



  과거의 것과 단절되지 않는다고 하는 그 사실은 ‘연속성’을 그저 단순한 반복의 의미로 축소시킬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나자렛 예수와 더불어 이 세상에 ‘정의’의 새로운 척도 즉 하늘에 계신 성부의 ‘뜻’을 알아듣고 이행해야 할 새로운 척도가 들어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즉시 다음과 같은 질책을 덧붙이신다 :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절).

  이 구절은 후반부(21-37절)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보다 드높은’ 정의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해석했던 ‘옛 정의’ 사이의 치밀한 비교를 여섯 번이나 계속해서 다루고 있다.

  이 대목에서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유다계 출신의 그리스도 신자들로 구성된 또 다른 공동체와 논쟁하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 그들은 분명 구약성서의 모든 자세한 규정들을 ‘완전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기껏해야 ‘율법’을 해석할 수는 있으나 어떤 새 율법을 줄 수는 없는 그런 한 위대한 ‘선생’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마태오는 예수께서 시나이 산의 법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던 모세보다 훨씬 위대한 ‘새’ 모세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심을 입증하고자 한다. 사실, 예수께서는 그 법 가운데 어떤 것들을 수정하시며 무엇보다도 특히 그것들을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말씀하신다. 반면에 모세는 오직 야훼의 대변자로서만 말한다. 계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반복구가 인상적이다 :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21.27.33.38.42절). 그러므로 예수는 ‘선생’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구원의 결정적 메시지를 가져다주는 ‘계시자’요 ‘예언자’이다.

  산상수훈 전체를 통해서, 특히 이 충격적인 대립적 표현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의 투철한 메시아적 의식을 드러내신다.

  ‘율법’의 의미를 얄팍한 궤변술로 약화시켰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인간의 외면성과 내면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율법의 원초적 의미를 되살려냄으로써 그 율법을 인간의 삶의 매순간에 그리고 모든 행동, 사고 혹은 감정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의 완전한 ‘현현’이 되게 한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식으로 율법을 ‘엄격하게’ 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실현을 쉽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을, 외면으로 나타나는 것과는 항상 다른 모습을 갖게 하는 가면이 아니라 인간의 진실한 거울로 만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기 자신과의 분열이나 갈라짐이 없는 인간의 재형성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새로운 ‘정의’의 ‘법’을 제시할 때 베풀어 주신 ‘은총’의 결실이다.



“너희는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다 : ‘살인하지 말라’”



  그 다음에 계속 이어지는 예증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인간을 내적 균형으로부터 시작해서 재형성시켜 나가고자 하시는지를 구체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제5계명, 제6계명 그리고 부분적으로 제2계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그것들은 어째서 그러한 계명들이 인간의 윤리성이 솟아나오는 내적 뿌리 즉 ‘마음’에 근거할 때만이 의미를 갖게 되는지를 인식시켜주고 있다.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중앙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라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21-22절).

 벌칙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 : 지방법정에서 중앙법정으로 넘겨지고 마침내 지옥불의 형벌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벌의 가중은 실제적인 살인행위 그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분노의 내적 감정 또는 다만 말에 의한 가해적 행위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 첫째로, 선과 악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둘째로, 자기 자신의 명예나 다른 사람의 명예 때문에 형제를 무시하거나 그의 명예를 훼손하려 하면 이미 그를 ‘죽이는’ 것이다. 사실,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 것은 영역에서 그를 떼어버림으로써 그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볼 때,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원한을 맺고 있는 형제와 ‘화해’하라는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권고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다 :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23-24절). 여기서도 모든 내용이 내면생활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참된 ‘제물’은 오직 인간의 ‘마음’으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깊은 내적 감정인 사랑과 용서로써 이루어진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예증은 다 같이 간음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이 경우도 악한 욕망, 건전치 못한 감정의 동요, 욕정과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표현되는 부정한 탐욕이 생겨나는 내적인 근원을 비난하고 있다 :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27-28절).

 이러한 원의 외에도, 어떤 경우에 자기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한(신명 24,1;말라 2,14-16 참조) 모세법 자체에 의해 규정되어 있던 그런 구체적인 경우도 간음죄로 단죄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엄숙히 말씀하신다 : “누구든지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면, 이것은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32절).

  ‘이혼장’은 실질적으로 두 배우자의 어느 편에서든 이미 범했거나 또는 언젠가는 범할 수 있는 간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모세법이 경우에 따라 간음을 허락할 수 있다는 사실에 미루어 간음의 선동적 요인으로 보고 그 법을 고치시는 데 그치지 않고 아주 폐지하신다.

  예수께서는 내적 상태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하시면서도 성문화 된 법의 ‘교육적’ 기능도 인식하고 계신다 : 법이 그 교육적 목적성을 외면한 채 인간들의 악한 성향이나 영신적 타락을 합법화시켜주게 되면 더 이상 법으로서의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그런 법은 악의 공범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악을 정당화시켜주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폐지시키는 것이 좋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구약의 정의와 새로운 정의를 대립시키고 있는 마지막 예증은 맹세에 관한 것이다 :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그리고 주님께 맹세한 것은 다 지켜라’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땅은 하느님의 발판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예루살렘은 그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다…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33-35.37).

  맹세는 이웃을 불신하는 행위이다 :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주고받는 말이나 약속의 보증으로서 하느님의 ‘이름’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사실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 있어서 하느님의 ‘이름’은 분명 결정적 유대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만일 형제를 믿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마음으로써가 아니라 말로써 하는 그 단순한 맹세의 형식만으로 서로 간에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오히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이중적 거짓 맹세가 되지 않겠는가?

  바로 이러한 ‘이중적’ 거짓 맹세를 범할 가능성을 피하도록 하기위해 예수께서는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34절). 여기서도 예수께서는 근원적인 문제를 제시하신다 : 거짓은 인간의 내적 자기 분열의 성향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스스로에게 충실하기를 요구 하신다 : ‘예’ 가 됐든 ‘아니오’ 가 됐든 입술로 표현되는 것이 마음속에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말을 보다 더 굳게 믿게 하려고 ‘덧붙이는 것’은 ‘악에서’(37절) 즉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요한 8,44)인 사탄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산상수훈’과 새로운 ‘정의’



  이상 내용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그리스도 신자가 ‘율법’의 요구를 실현시켜 나갈 새로운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그 네 개의 대립적 표현들은 산상수훈 가운데서 다음 두 가지 행복의 의미를 실질적으로 해석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형제를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를 ‘바보’나 ‘미친 놈’이라고 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 간에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또 하느님과의 대 ‘화해’를 실현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순수한 마음과 정신을 갖고 있어서 그들의 표현에 있어서 이중성을 띠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한다) 만나는 여자에 대해 음란한 생각을 품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보다 드높은 ‘정의’는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참된 행복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며 그 행복의 한 표현이다. 이런 까닭에 정의는 법적 명령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복음적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베풀어주시는 선한 의지와 사랑에 대한 보충적 선물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께서 ‘완성하러’ 오신 ‘율법’은 율법주의나 전통적인 도덕주의와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없이 ‘은총의 선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복음은 우리가 두려움을 느낄 만큼 아주 엄격하고도 매서운 요구를 하지만 반면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항상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주는 ‘은총’에 의해 그 요구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힘도 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입니다”



  제2독서는 이러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즉 바울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복음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천지창조 이전부터 미리 마련하여 감추어두셨던 지혜”(1고린 2,7)라고 말하고 있다.

 오직 성령의 힘에 의탁하는 사람만이 그 지혜를 체험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 “이 세상 통치자들은 아무도 이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주셨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 지혜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경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통찰 하십니다”(1고린 2,8-10).

  우리는 성령의 선물을 받고 있기 때문에(로마 8,2-4 참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과하시는 율법을 성취시킬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을 가르치실 때 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총으로 가르치시며,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 배운 것을 성실하게 실행할 마음을 주시고 또한 실제로 실행하도록 하신다. 즉 그분의 가르침은 하고자 하는 본성적 능력만이 아니라 원의 그 자체와 원의의 활동까지도 도와준다”(S.Agostino, 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originali: PL,4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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