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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5년 3월 19일 (토)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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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부활대축일 강론 모음 ”
 

주님 부활 대축일


1.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79)/ 2      2.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81)/ 5

3.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83)/ 8      4.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84)/ 11

5.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85)/ 14    6.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87)/ 16

7.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90)/ 19    8.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92)/ 22

9.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93)/ 25      10.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94)/ 28

11.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95)/ 31   12.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96)/ 33

13.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97)/ 36   14.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98)/ 39

15. 정진석 대주교 메시지(1999)/ 42   16. 정진석 대주교 메시지(2000)/ 44

17. 정진석 대주교 메시지(2001)/ 46   18. 이갑수 주교/ 50

19. 이문희 대주교/ 52                  20. 전주교구장/ 53

21. 윤종국 신부/ 55                    22. 함세웅 신부/ 58

23. 함세웅 신부/ 60                    24. 김몽은 신부/ 61

25. 부활하신 예수/ 63                  26. 김창석 신부/ 67

27. 김현준 신부/ 69                    28. 무덤에 가서(1)/ 71

29. 무덤에 가서(2)/ 73                 30. 김정진 신부/ 75

31. 최재용/ 77                         32. 강길웅 신부/ 78

33. 홍금표 신부/ 80                    34. 신은근 신부/ 82

35. 갈릴에아로 가시리라/ 83           36. 김정진 신부/ 86

37. 무덤을 맊았던 돌이/ 88            38. 함세웅 신부(다)/ 90

39. 김신호 신부/ 92                    40. 김영진 신부/ 93

41. 강영구 신부/ 95                    42. 최영철 신부/ 98

43. 서공석 신부/ 100                  44. 부활은 회개와 보속/ 103

45. 인간적인 주님/ 105                46. 알렐루야/ 106

47. 신선한 기쁜소식/ 108              48. 빈무덤과 부활/ 110

49. 유영봉 신부/ 112                  50. 서웅범 신부/ 114

51. 신은근 신부/ 116                  52. 여명 / 117

53. 강길웅 신부(다)/ 118               54. 강길웅 신부(가)/ 120

55. 김영남 신부/ 123                  56. 우리도 부활해야/ 125


1.                        1979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축일을 맞이하여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을 감싸주시고, 그 부활의 광명이 우리 모두를 환히 밝혀주시며, 그 부활의 기쁨이 마음 깊이에서 용솟음 치기를 빕니다.


Ⅰ. 부활의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정 인류역사에 있어서 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피조물을 위해서 새로운 차원 의 기원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을 비롯하여, 우주만상이 죽음과 멸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결정적으로 구원된다는 기쁜소식을 아울러 전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란 무엇을 뜻합니까? 인간의 지혜로써 다 규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한없이 깊은 신비입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있듯이, 부활의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어리석다고 보고 비웃는 사람은, 부활을 역시 어리석은 소리라고 비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바로 이 같은 비웃음을 받은 사람이요 (사도17,6), 또한 다른 사도들과 같이 그 역시 이 부활의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재판을 받았습니다(사도 23,6 ) .

 

이렇게 우리의 믿음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모든 내용은 부활에 달려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믿음도 헛되고,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1고 15,14). 그리스도의 부활이 뜻하는 것은 단지 그의 이름, 그의 말씀, 또는 사상이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의 기억이나 추모의 덕이지 그 자신의 생명으로 말미암아서가 아닙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뜻하는 것은 라자로의 부활과 같이 (요한 11,38-44), 죽었다가 자연 생명에로 다시 돌아온 것도 아닙니다. 이런 부활은 결국 죽음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죽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죽음을 처이기고 승리하여 불멸의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서, 죽음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로마 6,9). 부활은 이렇게 자연생명의 소생(蘇生)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야말로 참된 생명입니다. 우리의 자연생명은 죽음의 운명을 면치 못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은 죽음의 그림자도 있을 수 없고, 영원히 살고, 또 살리는 것이 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은 죽음입니다. 어떤 강한 자도, 어떤 권력이나, 지식이나, 과학의 힘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해지고 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삼키고 마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이 죽음을 - 성경 말씀대로 마지막으로 물리칠 원수인 이 죽음을(시편 8,6; 1고린 15,26) - 처이긴 것입니다. 그리하여「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이사야 26,8; 1고 15,54-55)


Ⅱ,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근원

  예수께서 이렇게 부활하심으로써 그분은 진정 우리 모두가 역시 죄와 죽음에서 구원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바로 세상을 구하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주(主) 예수」 라는 말은, 곧 예수께서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죽음까지 굴복시킴으로써, 참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고 부활의 은총으로 구원하시는 주님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 속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모두의 생명의 근원 -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불멸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셨다는 것(요한 5,2) 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 말씀대로「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샀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구원, 곧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오셨고, 또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나는 부활이 또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요한 11,25). 또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하신 말씀 등은 바로 이런 뜻에서입니다.

 

정녕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 우리의 부활이 내포되어 있다는 기쁜소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부활의 확고한 희망과 부활의 빛을 받아, 쓰여진 책이 성경이 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때문에 성경은 참으로 구원과 생명의 책입니다. 특히 사도 바오로는 거듭거듭 이 믿음과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로마 6,4-5 ; 6,9 ; 7,4 ;8,34 ; 1고린 4,14; 5,15 ; 에페

2,4-7 ; 필립 3,10-11 ,골로 2,12 ; 3,1등등). 한 마디로, 우리도 주 예수를 믿으며 살 때,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을 닮은 모습으로, 그분과 함께 영생에로 부활할 것입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1고린 15,442-44).

  예수님의 부활은, 이 같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우리 모두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Ⅲ. 부활은 하느님의 사랑의 계시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한없이 넓고 깊은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생과 십자가의 죽음에 있어서와 같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주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며, 아울러 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다 주시는 하느님의 한량없는 사랑에 접하게 됩니다.(로마 8,32) 실로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에페 2,4-5).

 

우리는 이렇듯 부활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2베드 1,4). 인간이 고귀하고 존엄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 인생과 세상이 던지는 모든 의문과 탐구, 회의와 불안, 번민과 고뇌. 소망과 이상에 대해서 주신 결정적인 해답입니다. 하느님께서 인생과 역사의 어두움을 구원의 빛으로 밝히시면서, 우리에게 생명에 가득 찬 「산 희망을 안겨주는」(2베드 1,3) 해답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실로 우리를 죄와 숙음의 예속에서 풀어주시고, 신부재(神不在)의 물질적 비인간화(非人間化)에서 구하시어, 참된 인간으로 우리를 재생시키는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정녕 우리의 자유와 해방의 주(主)이시요. 정의와 진리, 생명과 구원의 빛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의 절벽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인간세계를 갈라놓는 모든 분열의 담을 헐고, 불의와 부정, 폭력과 억압. 불평등과 차별의 뿌리를 뽑으심으로써, 당신의 사랑과 평화가 지배하는「하느님의 나라」, 이 사랑과 평화로 일치된 「메시아적 백성」 ( 교회헌장 9항) 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이스인의 차별이 없고,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의 차별 없이」(갈라 3,28),  모두가 당신안에 형제적인 유대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同上).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참으로 인생과 역사의 주(主), 그 의미 자체 이 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주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다시금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그 「산 희망」이 가득하기를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2.               1981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수난하심을 기리던 사순절은 끝나고, 이제 우리는 환희에 찬 부활절을 다시 맞이하였습니다. 오늘부터는「하느님의 백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알렐루야」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하늘에까지 메아리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가 기다하는 근본 이유는, 이 부활이 우리 모두의 부활과 영생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그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의 그 무한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와 같이 이 부활에서 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처지의 모든 삶이 여기서 의미를 찾고, 이승에서도 이미 믿음 속에 재생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는 참으로 만사는 끝난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실로 비극 중에도 비극이요, 암흑과 절망이었습니다. 특히 그를 믿고 따르던 제자들은, 이제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고 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과 세계를 구할 메시아가, 모든 이의 희망이 무참히 못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의인(義人)이라는 것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까지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빌라도는 그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유태민족의 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 미움과 간계가, 이 의인의 죽음을 강요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의 공정을 자랑삼던 로마제국의 이 고관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불의와 타협하여 무고한 사람을 죽이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여기선도 인간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순과 비극은 되풀이 되었습니다.

 

정의와 진리. 선과 사랑이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오히려 불의와 거짓 악과 증오가 다시금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예수는 정녕 죄없이 죽었고, 그와 함께 진실과 정의도 매장되었습니다.

과연 육중할 바위로 굳게 닫혀진 그 무덤, 로마제국의 힘을 상징하듯 총독이 봉인까지 한 그 무덤에서, 그 암흑과 죽음의 심연에서, 어언 빛이나 생명이 소생하리라고는 기대도,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악과 부조리가 지배하는 곳이요, 죽음이 일체를 삼키는 최후의 승리자로 남

올 것 같이만 보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예수의 두 제자들이 토로한 그 실망에서 (루가 24,21), 우리는 이같은 허탈과 좌절감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론 예수가 사람들의 손에 잡혀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하리라고 한 수차에 걸친 예언을 아주 잊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믿기에는 그들의 신앙은 너무나 약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의 부활을 얼마나 믿기 힘들어했는지는, 그 후의 성서의 이야기들이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은 토마였습니다.(요한 20,24-29).

 

실증(實證)이 없이는 믿지 않겠다는 태도는, 합리주의적 현대 지성만의 특성이 아닙니다. 이미 토마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그 상처를 만져보지 않고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순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지혜란 무엇입니까? 왜 사람이 살고, 왜 사람이 죽는지도 모르는 인간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땅에 떨어져 썩은 한 알의 밀씨가, 어떻게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지도 모르는 인간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

 

삶을 다스림과 같이 죽음을 다스리는 이는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의 판단으로서는 예수는 죽었고. 또한 영영 죽었습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이 살아 계심을 인간은 몰랐습니다. 적어도 잊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하느님이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느님"(루가 20.38)이심을 몰랐고. 모든 것을 살리시는, 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몰랐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같이 인간의 온갖 지혜와 능력조차도 달하지 못하는 그곳에서, 만사를 허무로 돌리는 그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전능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신 그 무한한 사랑이, 세상을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셨습니다. 어두움을 물리치고 생명의 빛으로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죽음을 소멸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얻어주셨습니다"(부활절 감사경).

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현실생활에 대해 지닌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인생과 역사의 참된 긍정입니다. 현세 인간사회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와 같이, 너무나 자주 선(善)보다는 악이. 정의보다는 불의가, 진리보다는 거짓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가불신사회로 불려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인생을 부조리로 밖에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구적인 것, 불멸의 가치를 지닌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삶 전체가 덧없고, 허무하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습니다. 부정(否定)의 철학. 이것이 현대인의 인생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그리스도는 부활하였습니다. 바로 그같이 선과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 유린된 곳에서, 오직 허무와 절망만이 지배하는 암흑에서, 죄와 죽음을 처이기고 빛과 생명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인간사회에서 득세하는 것은, 오늘은 불의와 부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에 있어서 결국의 승리자는, 이 모든 것을 소멸하는 진리요 사랑임을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한번 죽을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를 영영 지배하지 못하고 불멸의 생명, 하느님의 생명이 그를 영광되이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보장하고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 생명은 이미 그 영혼 속 깊이 배태(胚胎)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실로 인생과 역사의 의미 자체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에는 고통과 비애가 있을 수 있으나 부정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난과 굶주림이 그의 삶 전부일지라도,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죄와 죽음이 그를 불안과 공포에 떨게한다 해도,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죄의 용서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한신 그리스도 안에는,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히 내려졌다"(로마 5.20)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이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환난도, 곤궁도, 박해나 총칼도, 어떤 세력이나 죽음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지는 못합니다(로마 8,31-39).

 

이같이 부활은 우리의 완전한 희망입니다. 누구도 우리로부터 빼앗아갈 수 없고, 누구도 지울 수 없는 불멸의 희망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같이 큰 희망을 우리만 가질 것이 아닙니다. 날이 갈수록 희망을 잃고, 채념과 실의에 젖은 우리 이웃과 동포.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은 혼자의 것만이 아니라 모든 이의 것이며, 받기만 할 것이 아니라 땅 끝까지 줄기차게 전해야 하는 복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부활의 기쁜 소식의 전달자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올해 「이웃 전교의 해」에, 「교구 창설 150주년을」 기리는 이 뜻깊은 해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을 힘입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파스카 촛불처럼,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인생을 밝히고, 겨레를 밝히는 등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알렐루야!"


3.            1983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


1. 밤의 어두움을 뚫고 새 날이 밝아오듯, 우리를 위해 수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

의 암흑에서 생명의 빛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는 삼일만에 부활하였다.」 이것은 사도들이 목숨을 내걸고 선포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실로 이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자연 생명에로의 복귀가 아닙니다. 죽음을 이긴 참 생명으로 다

시 사신 것입니다. 자연 생명 속에는 언제나 죽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인간 생명을 비롯하여 모든 자연 생명은 언젠가는 죽음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을 쳐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명은 참된 의미의 생명이랄 수 없고,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참 생명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모든 이를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당신의 그 부활 생명으로 우리 모두를 구하시고 영원히 살리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믿는 이들에게 말할 수 없이 큰 희망을 안겨줍니다. 부활은 실로 죄와 죽음으

로 끝나고 마는 현세 세상, 그 어두움 위에 떠오른 구원의 태양입니다. 부활의 은혜는 인간

분 아니라 우주만물이 입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세상과 우주만상의 종말이 죽음이나

파멸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생명과 영광임을 말해 줍니다(묵시 21,1-4).

 

새 하늘과 새 땅 !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세계! 우리는 이것을 상상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구원의 은혜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오로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

조차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라고 이사

야 예언서의 말씀(64,3. 52,15)을 인용하여 경탄해 마지않습니다( 1고린 2,9),

 

부활은 실로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입니다. 그 신비는 너무나 크고 깊기 때문에, 우리는 파악하기도 힘들고, 믿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란, 바로 여기에 집중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과 생명은, 곧 이 부활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그리스도교 믿음의 바탕이요, 중심이며 또한 목표입니다. 이 부활을 빼면 우리의 믿음은 헛되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그것은 하나의 부질없는 이야기책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부활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진정 생명의 말씀이 되게 하고, 또한 우리의 믿음도 결

코 헛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인생과 세상 모든 것에 존재와 삶의 의미를 줍니다.


2. 부활을 믿으면서 우리가 다시금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한량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은, 가없이 크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

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7). 이 영원한 생명은 곧 부활 생명이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 생명을 주시고자 당신 외아들까지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이 외아들, 곧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죄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은 특히 죄인인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 우리와 똑같이 약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평생을 통해서 가난하게 사셨고, 언제나 억눌리고 버림받는 자와,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상처를 낫게 하셨습니다. 또한 약한 이들과 어린이들을 감싸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가장 비천하고 버림받은 자, 죄인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 아니 바로 죄가 되시어(2고린 5,21)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에 서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이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시고, 모든 이의 구원과 생명의 원천이 되게 하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정녕 「집짓는 자들이 내버렸던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시편 118,22).

 

하느님의 성자께서 이렇게 세상의 죄를 지고 죽기까지 하셨다는 것과 또한 그 때문에 하느님은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시어 모든 이의 부활 생명의 원천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진정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죄에 우는 사람, 병고에 신음하는 사람, 죽

음을 눈앞에 둔 사람, 버림받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재기(再起)와 부활의 빛을 줍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

부활 속에 자신의 부활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과의 연대 속에, 특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과의 일치 속에 죽으시고 부활 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로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2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넘어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무죄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2고린 5,21).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다 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당신과 원수가 된 우리를 당신 편에서 외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의 손길을 펴시었습니다. 다시는 그 손길을 거두시지 않으십니다.

3. 이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때마침 올해는 구원의 성년(聖年)입니다. 또한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 200주년을 기리기 위한 교구 공동체의 해입니다. 다 같이 회개와 화해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까지 주신 그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을 찾아, 다시 발길을 돌린 탕자와 같이 우리도 발길을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집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미신 그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 품에 안겨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무죄선언을 내리신 그 하느님을 어떻게 우리는 등질 수 있습니까?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고린 5,21). 사도 바울로의 이 말씀은 바로 오늘날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세계는 핵전쟁의 위험 앞에 실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일상 생활 속

에서도 불안, 체념, 의욕상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인간다움을 포기한 채 자신

을 그냥 세파에 내맡기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고린 5,21). 하느님과의 이 화해만이 오늘에 사는 우리 자신을 다시금 인간으로 각성시켜 주고, 우리의 잃은 인간성을 회복 시켜 줄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든 이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무엇이기에 단 한 사람이라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이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요, 우리 생명의 길입니다. 또한 여기에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이 있습니다. 이 사랑 속에 우리는 진정 새 인간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새 인간으로, 그리하여 우리는 드디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고, 오늘의 세상을 구원해 가는 「메시아적 백성」 (교회헌장 9항)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 가득하시길 빕니다.



4.                1984년        부활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하느님 안에서 새 세상을 믿고 희망하십시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또 다시 여러분 모두에게 참된 평화를 내려 주시도록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믿는 이들에게만 가능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 평화가 아무런 효력을 발하지 못합니다. 부활을 느끼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상 죽음을 목격하고 이를 확인했지만, 그 중 아주 소수의 사람들, 즉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처형 사실을 알고 기억했지만, 그분이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고, 영원히 사신다는 것을 알고 체험한 사람은, 믿음을 가졌던 예수님의 몇몇 제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록 아주 소수의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증거하였지만, 그 증거는 소수의 증거로 시간과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갈수록 보다 많은 사람에게 확산되어 풍부하고 확고부동한 사실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그것은 소수의 증거를 받아들인 많은 이들이, 스스로 믿음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소수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 또 이 소수의 증거를 받아들인 많은 이들이 가졌던 믿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무엇을 믿었기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앞에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주셨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시대는 절망과 좌절의 시대였습니다. 그들을 통치하던 로마제국의 압제는 갈수록 강화되었고, 이스라엘 동족의 지도자들은 이 압제자의 충복으로 백성을 찬탈하는 일을 도을 뿐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이 승승장구하는 시대였습니다. 불의를 멀리하고 하느님의 뜻을 설파해야 할 이스라엘 종교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세속적 권익을 추구하며 불의한 체제를 옹호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불의와 전적으로 타협하는 이들이 갈수록 득세하는 시대였습니다.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여 생명을 내걸고 조국을 위해, 이스라엘의 민족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싸우는 소수의 저항 세력이 있었으나, 그들의 안간힘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 채 항상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폭력과 무력에 민족의 모든 미래를 거는 이들의 격한 움직임에, 백성은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백성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목자 잃은 양과 같이 목적지를 상실한 채 이리 받히고 저리 채이며, 헤매고 있었습니다. 사회의 어느 한구석도 밝은 미래가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께서 오시고 새 세상이 임박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불의한 권세가 물러가고 힘없는 사람도 땅을 차지할 수 있는 세상, 슬픔과 눈물로 찌든 얼굴이 환하게 피어날 세상, 음모와 모략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착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올바른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세상, 박해하는 자의 폭력이 패배하고, 의인이 승리하는 세상이 바로 문밖에 다가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이 새 세상은 당시의 사회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도 전혀 그 실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는 꿈과 같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이 새 세상이 반드시 찾아오리라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이 새 세상을 믿었던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허황되고 못 이룰 꿈이라고 일축하는 예수님의 새 세상을, 제자들은 가능하다고 믿고 기대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아무리 불의와 죄악에 가득찬 세상이지만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 외아들까지 보내시어 이 세상을 새 세상으로 바꾸어 놓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자기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믿고 기대하던 새 세상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당신 부활로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순교선열들을 보십시오.

우리의 순교선열 또한 하느님이 마련해 주시는 새 세상을 굳게 믿고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지위와 권력, 부와 명예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게 그들을 짓누르고 유혹하여도 그러한 세력은 몰락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의로운 자들의 새 세상이 반드시 도래할 것임을 믿고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 믿음은 참으로 진실하고 굳세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입신출세는 물론이고, 사랑하는 가족과 자신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하면서도, 그 믿음을 함께 지켜나가고 새 세상을 함께 맞이하려 했던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00주년을 맞아 이 땅에 빛을 비추고자 하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새 세상에 대한 이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분단된 이 나라의 정치적 운명을 걱정하고 정의가 결핀된 상황을 우려하는 이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루어 질 수 없을 것 같은 새 세상이지만, 하느님 안에 믿고 희망하십시오.


이 나라의 위태로운 경제를 걱정하고 의롭지 못한 비정상적 경제 활동과 구조를 우려하는 이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새 세상이지만 하느님 안에 믿고 희망하십시오. 폭력과 방탕이 춤추는 이 사회를 한탄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새 세상이지만 하느님 안에 믿고 희망하십시오. 외적으로 갈수록 풍요로와 지고 비대해지는 반면 내적으로 빈약해지고 메말라 가는 우리나라의 교회를 슬퍼하고 지탄하는 이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새 세상이지만, 하느님 안에 믿고 희망하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당신 부활로 우리의 이 믿음과 희망에 대한 보장을 해 주셨습니다. 또 새 세상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진지하고 성실한 것이라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 앞에 당신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시고 당신의 평화를 나누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새 세상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진지하고 성실해야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수동적인 자세로 일이 이루어지기를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불의와 폭력과 죄악에 대하여 강력한 불신과 배격의 의지를 구체적으로 키워나가며, 새 세상의 도래를 위해 자신의 능력과 활동을 제공하는 능동적 삶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단숨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적인 활동은 이미 부활하시고 승리를 거두신 그리스도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는 이 그리스도의 활동을 굳게 믿고 의지하면서, 우리 자신의 노력도 최대한으로 봉헌하여 그분의 구원사업을 도와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본받아 진리를 위해 몸바치고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무자비한 전쟁이 수많은 고귀한 생명을 앗아가고 있고 상승일로에 있는 동서 양대진영의 군비경쟁은 인류의 생존을 근원적으로 위협하여, 평화란 도저히 불가능한 꿈인 것처럼보입니다. 그러나 평화는 실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고 봉헌하면 하느님은 도와 주실 것이고 새 세상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이제 곧 우리나라를 방문하시는 교황성하께서도 이 복음을 외치시기 위해, 자신의 전존재를 봉헌하시며 노령에도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으시고 땅끝에서 땅끝까지 달리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믿음의 맏 형님이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일치하여, 새 세상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봉헌을 완성해 갑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축복과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1984년 부활절에

                               서울대교구장 김 수환 추기경



5.             1985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가 오늘 여러분을 가득 채우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

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바로 여러분 곁에 현존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우리 곁에 계심을 믿고, 그분이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염려해주시고 지극한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고 계심을 믿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러한 믿음은 여러분을 온갖 불안과 두려움, 온갖 욕심과 속박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신자

라는 신분에 있는 것만으로 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제자들 중에, 어떤 이들은 예수 부활 후에도 예수님의 현존을 믿기까지 오랜 기간이 필요했던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즉시 믿음을 얻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뉘여있던 무덤 문 앞의 돌이 사라지고, 시신이 없어지고, 수의가 흩어져 있어도, 어떤 이는 처음에 단순히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간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러한 광경을 보고 즉시 믿음을 가졌습니다. 요한이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만한 구체적인 근거는 가직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눈에 안 보이고 수의만 남아 있다는 것 외에.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확증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나자렛의 예수님은 아직 그들 곁에 동행하시지 않았고, 그분이 어디엔가 살아 계신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요한은 예수님이 살아나셨음을 믿었습니다. 어찌하여 요한은 빈 무덤과 남아 있는 수의만 보고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평소부터 예수님을 각별히 사랑하고 존경하여 사도들 중에서 예수님과 가장 깊

은 친분 속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깊이 느끼고 예수님의 마음이 그의 영혼에 깊이 아로새겨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십자가상에 돌아가셨지만 그 죽으심으로 사도 요한은 오히려 그분과 함께, 살았을 때보다 더 완전한 예수님의 사랑을 보게 되었고 그 사랑 때문에 요한의 영혼에 박힌 예수님의 모습은 지워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여 깊은 일치를 이룹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완전

한 사랑에 매료된 사람은 그분과 이별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고백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사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사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이런 깊은 사랑으로 예수님과 일치했던 요한에게 있어서 빈 무덤, 흩어진 수의, 잘 개켜진 머리수건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믿도록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한 표징이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까지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 겨레와 교회에 내려주신 은총을 헤아려 보고, 그 엄청난 사랑을 돌이켜 보십시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사랑을 음미하십시오.

예수께서 끊임없는 여러분의 죄에도 불구하고 성사를 통해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 주시는 그

사랑을 되새겨 보십시오

예수께서 여러분이 쉴 사이 없이 청하는 수많은 은총을 성부께서 내려 주시도록 전구해주시는 그 사랑을 발견하십시오.

예수께서 오늘도 내일도 빵의 모습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당신 몸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계시는 그 사랑을 맛보십시오,

예수께서 여러분의 이웃을 통해 여러분을 보살피시고, 여러분의 아픔을 위로해주시는 그 사랑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의 이런 사랑을 보고 느낄 때, 예수님과 우리의 일치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빈 무덤과 수의만을 보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에 매료될 때, 우리 주변의 대수롭지 않은 조그마한 표징들을 통해 바로 오늘 우리 곁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심한 역경과 실망, 환난과 좌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하여도, 평소에 예수님과 맺은 일치가 깊고, 그 분의 사랑에 강하게 끌려 왔었다면, 우리는 새롭게 우리 주변의 하찮은 것, 조그마한 것 안에서도, 빈 무덤과 개켜진 수의 같은 부활하신 예수님 현존의 표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를 모든 고통과 절망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되풀이해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얻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부활하신 그분께 대한 믿음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이 오늘 여러분 곁에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분은 여러분을 기쁨과 평화로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6.          1987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1.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축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위에 가득하기

를 빕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서 계시더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 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쾰른 땅에 군사용으로 건설된 지하동굴 속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이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를 쓰신 분이 얼마나 깊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었는가를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의 막바지에 어둡고 습기찬 동굴 속에서도 이 분의 눈은 빛나는 태양을 볼 수 있었고, 이 분의 마음은 따뜻한 사랑에 차 있었으며, 마치 하느님이 안계신 듯 침묵만 지키시는 절망과 공포 속에서도, 이 분의 믿음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는 또 다른 전쟁들이 있습니다.

민족과 형제를 갈라놓는 사상의 차가운 대립,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기본권의 뜨거운 투쟁, 먹고살기 위한 생존의 처절한 경쟁‥‥이러한 격랑 속에서 우리는 쉽게 좌절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2. 부활 대축일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무죄하면서도 참혹히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묻히신 후, 마리아 막달레나가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전혀 뜻밖에 휑뎅그렁 비어 있는 무덤을 보았을 때, 그녀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잘 모시고, 그분께 대한 마지막 정성으로 향유를 바르고싶어했던 막달레나는 망연자실하여 사도들에게 뛰어가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죽은 모습이나마 다시 볼 줄 알았던 마지막 희망, 한가닥 위안마저 앗아간 듯한 빈무덤에서, 우리는 또한 어둡고 암담한 우리 사회현실의 반영을 보게 됩니다.

 

국민은 있어도 주권은 없고, 신문 방송은 있어도 언론은 없으며, 국회나 정당은 이름뿐이오, 힘만 있을 뿐 정치는 없는 공허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국민의 여망인 민주화가 정략의 도구로 쓰여지고, 보다 밝은 정치의 새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되었던 헌법개정의 꿈은 기만과 당리의 술수 아래 무참히 깨어졌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통치권자의 마음을 비운 결단을 기대하였지만, 막상 내려진 이른바 ‘고뇌에 찬 결단'은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에게 슬픔을 안겨주었고,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은 더 큰 고뇌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 땅 위에는 다시금 최루탄이 그칠 줄 모르고 터지며, 국민의 눈과 마음속 깊은 곳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게 되었습니다.

 

병든 사회 속에서 범죄는 날로 흉포해지고, 병든 법치 속에서 인권유린이 다반사가 되어, 드디어 성고문의 충격은 고문살인의 경악으로 이어졌지만, 사회에서나 옥중에서나 인권보호와 처우개선의 약속은 허공에 뜬 구호메 그칠 뿐입니다.

 

또한 유엔이 제정한 ‘살 곳 없는 이들의 해'를 맞이하였는데도, 철거민은 재개발의 뒤안길에서 울고, 3저(3低)의 호황 속에서도, 어제보다도 나은 것 없는 서민의 하루엔, 노동의 피로만 겹쳐가고, 생계의 막장이라는 탄광촌의 하늘마저 불황의 검은 구름이 가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진실도 없고, 정의도 없고, 사랑도 없으며, 가난한 자 약한 자에 대한 배려도, 인정도 없는 황량한 풍토 위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빈무덤 앞에 선 막달레나처럼 당황과 혼란과 슬픔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을 원망하게 됩니다. 주님은 과연 어디 계십니까? 주님을 어디에 모셨습니까?


3.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러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막달레나의 다급한 보고에 접한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차례로 용기 있게 빈무덤 안으로 들어가 ‘믿게' 됩니다. 그들이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은 빈무덤 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침묵과 공허만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은 예수는 부활하여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 복음을 좀더 읽어 내려가면,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젖어서도 빈무덤을 지키며 울고 있는 막달레나에게 "왜 울고 있소? 누구를 찾고 있소?"하고 물으시며 막달레나의 이름을 친히 불러주시는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팔을 울리고 환영 인파가 환호성을 올리는 가운데 화려하게 등장하는 분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무덤가에서 당신을 찾는 이에게 조용히 몸을 드러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도 삶에 지치고, 세상에 실망할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억울하고 슬플 때, 괴롭고 아쉬울 때, 자신의 한계와 무기력을 뼈저리게 느낄 때,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따로 불러 위안을 주시며, 당신께로 모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인간의 눈에는 빈무덤처럼 보이는 이 세상 위에 현존하시며,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인류의 역사를 살피시고 이끌어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4.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화됩니다. 한 때 비겁하던 제자들이 누구보다도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까지 바쳐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주님을 믿고, 그분 안에 사는이들에게는 이제 인종이나 민족의 차별, 자유인이나 노예의 차별도 없고, 남녀의 차별도 없으며, 모두가 형제 자매요, 그리스도 안에 하나입니다(갈라 3,28참조).

 

참으로 인간이 변하고, 사회가 변합니다. 이기주의와 죄악의 세상이, 사랑과 진리와 정의로 가득찬 하느님 나라로 변화됩니다. 믿는 이들은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었고, 모두가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가난한 사람이 없었던 초대교회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된 하느님 나라 그것이었습니다(사도 2.43-47 ;4.32-37 참조).

 

누구인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이 형제로 보이면, 그것으로 새 날이 밝아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이는 누구든지 이같이 모든 이를 형제로 보고 사랑하는 새 사람들이 될 것이고, 그들과 함께 인류역사에 새 날이 밝아올 것입니다.


5. 이제 우리도 그처럼 변화되어야 합니다. 특히 ‘성체와 교회의 해'인 올해, 우리는 모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뿐 아니라,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남김없이 주시는 그 주님을 모심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고, 동시에 그 사랑을 본받아서 우리 역시 서로 사랑하고 나눔으로써, 참으로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형제적 공동체인 교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빈무덤과 같은 오늘의 현실 속에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가운데 살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정치가 아무리 허무하다하여도 그것이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을 포기할 이유가 퇴지 못하며, 정의와 진실을 단념하는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아무리 모두가 이기주의에 흐르고 세파가 몰인정하여도, 우리들마저 사랑을 실천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같은 세상 속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쳐 사랑과 진리를 증거하시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일진대, 오늘의 현실이 허무해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 이 사회, 이 땅, 우리나라와 민족의 인간화와, 참되고 값진 삶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를 구현하며 무엇보다도 사랑을 몸소 사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이 빈무덤처럼 허망해 보이는 이 땅에 현존하심을 깨닫게 되고, 또한 이 땅의 모든 이에게 부활을 힘차게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의 축일입니다. 또한 부활절은 그 약속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축일입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는다 해도 태양을 볼 수 있고,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사랑의 힘을 믿을 수 있고, 하느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는 것같은 때에도 하느님을 믿고 희망할 수 있는 신앙의 축일입니다. 이 신앙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 빛이신 주님과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정치가 아무리 허망하고, 사회의 모든 현상이 아무리 어두워 보여도, 우리가 실망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 및 사랑의 불을 지피며 살면, 주님은 억압된 민중의 짓밟힌 인간성을 반드시 살려주실 것입니다. 마치 얼어붙었던 산과 바위틈에서 이 봄에 진달래꽃이 환히 피어나듯이, 그렇게 이 땅에도 인간다운 삶의 꽃이 피어나도록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생명의 물을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7.           1990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부활 대 축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그 생명의 빛이, 인간성 상실과 기치관의 부재의 어둠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바를 모르는 우리를밝혀주시기를 빕니다.


1. 부활의 진리는 이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좌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말씀하신대로 3일 만에 부활하시어, 우리 모두를 영윈히 살리는 주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고 말 인생의 절망과 어둠에, 희망의 빛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우리의 부활생명이심을 믿는 신앙을 지닐 때, 우리는 그 믿음에서 죽음의 절망 대신, 생명의 희망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인생이 무엇이며, 왜 사는지? 왜 죽는지 등, 거듭 거듭 의문을 제기하는 인간에게 근원적인 답을 주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복음 성경을 보면, 누구보다도 사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기를 힘들어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후에, 부활의 기쁜 소식을 목숨을 다하여 선포하고, 피를 흘리며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가르침을 받기 전에는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거나 믿기 힘들어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부활이 믿기 힘든 것은, 당연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총의 힘 없이는, 이 부활의 신비를 깨달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알아들을 수 없다 하여 이를 부정하면, 무슨 결론이 남습니까?

그것은 결국, 인생의 종말은 죽음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되고(1고린 15:17), 인생의 의미도 없으며. 인간의 모든 활

동이 무의미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큰 업적을 해낸다 하여도 결국 죽고, 썩고 말 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진리 탐구. 정의구현. 사랑의 실천.-- 이 모든 것의 의미가 없게되는 것입니다.


어떤이가 말했듯이, 불멸의 생명이 없다면, 자유를 위한 투쟁도 무의미합니다.

인생의 의미가 있고, 진리와 정의, 사랑과 자유에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영생은 있어야 하며, 영생이 있기 위하여는 부활은 필연코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요청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고, 오직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베푸시는 자비로운 은혜인 것입니다.


3. 사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목적하신 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지와 고통 속에 살다가, 어느 날 죽고, 썩고 마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죄와 죽음에서 구원되어, 당신과 함께 영원한 생명 속에서 영복을 누리며 사는 것. 이것이 하느님이 지니신 뜻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가 죄를 지었을 때,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성자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고,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부활 생명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국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느님의 사랑. 죽음보다 더 강한 그 사랑의 승리를 말합니다(아가 8,6).


우리 각자의 죄가 아무리 크고,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죽음의 힘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종말에 승리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굴복시키고 마는 하느님의 사랑임을. 그리스도의 부활이 잘 증명하는 것입니다.


4. 이러한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할 때, 우리는 자연히 이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르 12,29에서 잘 가르치고 있드시:---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 입니다.

그분은 진정 우리의 아버지로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에 앞서 섬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요한 1서 4,20에서 사도 요한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하시며, 자기 형제를 사랑할 때,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가능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15,17)고, 거듭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성당에 아무리 열심히 다니고. 기도를 많이 하고. 재를 지켜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우리 이웃을 사랑합니까? 가난한 이웃에 우리 마음을 열고 있습니까? 내가 가진 것을, 그와 나누고 있습니까? 우리는 반대로 재산을 늘리기 위해 부동산 투기를 하거나, 전세값을 올림으로써 가나한 이웃을 울리며, 그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는, 이른바 과소비로 자기 만족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부동산 투기. 전세값 인상 등으로, 가난한 이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정부는 참으로 민생문제 해결을 우선하는, 희망의 정치를 펴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복지정책을 세우고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네루의 말대로, 정치는 가난한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집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데 있어서, 절대로 필요한 기본 요건이므로, 영세 세입자나, 철거민의 주거안정을 위한 합리적 조치를 조속히 취해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가진 이들도, 이 사회의 평화를 위해서나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서, 자기 이익 추구 때문에 영세민을 울리는 악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 곧 우리 자신은 극심한 물질주의와 이기주의로, 도덕적 붕괴와 정신적 파탄을 면치 못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품지 못하고 계속 못살게 밀어내는 사회는, 축복을 받을 수 없고, 서민들로부터 삶의 의욕을 빼앗아 가는 사회는 번영할 수 없습니다. 사회는 비인간적, 반 생명적 사죄로 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태 25,31-46에서 말씀하고 계시듯이, 우리는 이웃 형제, 특히 가난한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구원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요한 3,14).


6.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죽음을 벗어나야 합니다. 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새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어두움에 갇혀있는 이 사회에, 빛을 밝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모두 자신의 무덤, 폐쇄된 자아의 벽을 헐어야 합니다.

진정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웃을 해치거나 미워하지 말아야 함은 물론, 이웃과 가진 것을 구체적으로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을 울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참으로 부활하고 구원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같은 사랑의 길을 절대적으로 가야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성찬의 삶을 사는 해에, 이같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8.               1992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진심으로 축하하며, 부활하신 주님의 은

총, 그분의 빛과 생명과 여러분 모두와 우리 사회와 온 세계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친히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시고 묻히셨으나, 3일 만에 죽음을 쳐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과 허무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인생과 세상에 모든 것을 다시 살리고 영원히 살게 하는 참 생명을 가져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그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요한 11, 25참조).

이 얼마나 크나큰 기쁨의 소식입니까?

죄와 죽음, 허무와 멸망 밖에 없고, 따라서 인생의 의미나 역사의 의미도 없으며, 만사가 모순과 부조리에 빠져 있던 그 절망과 암흑 속에, 그 모든 것을 밝히고, 그 모든 것을 살리고, 의미로 가득 채우는 구원과 생명의 빛이 터 올랐습니다. 이제 인생과 세상의 종말은 죽음과 멸망이 아니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빛이요 평화입니다.

“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시편 118,24). 그렇습니다. 진실히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입니다. 알렐루야, 알헬루야 하며 환희와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하늘 높이 울리도록 아니 부를 수 없습니다.


2. 오늘날 우리에게는 참으로 모든 면에 걸쳐 새로운 것이 절실히 요망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치, 새로운 경제, 새로운 사회를 국민이 얼마나 바라는 지는, 지난 총선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 위하여는 인간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새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인은 참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과소비, 사치, 향락과 인명 경시 풍조에서 잘 드러나듯이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에다 가치관 부재, 인간성 상실로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 전체가 윤리 도덕적으로 너무나 타락해 있습니다. 이 병든 한국인은 마침내 많은 사람들의 근면과 성실에도 불구하고 돈만 아는 한국인, 함께 어울려 살 수 없는 이기적 한국인으로 오인되어, 지금 세계 여러 곳에서 불신과 경계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경멸과 배척을 받는 경우도 없지 않게 되었습니다. 해외 여행자나 이민사회에서 야기되는 여러 문제들이 이를 잘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로 우리 민족의 운명이 이제 어떤 전환점에 도달해 있다는 감을 아니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분명히 번영과 몰락,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앞두고 어느 한쪽을 헉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신명 30, 19)고 주님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참으로 저주가 아닌 축복을 택하고 생명을 택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 모두 새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새 인간이 되어야합니다. 어떻게 이런 새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새 국회가 우리에게 그것을 줄 수 있습니까? 새 정권이 줄 수 있습니까? 돈이나 기술이 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주신 자유 의사로 마음을 바꾸지 않을 때, 하느님도 우리를 어떻게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회개하여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인간, 윤리 도덕을 아는 참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돈이나 권세보다는 하느님과 인간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 5). 누구보다도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는 참으로 사도 바울로의 이 훈계를 마음 깊이 새겨듣고 이를 생활 지표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실히, 오늘날 절실히 요망되는 그 새로운 인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3.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남은 것은 사라지고 새 것이 나타났습니다"(2고린 5,17)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정녕 죽은 것도 다시 살리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우리는 틀림없이 그분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묵은 인간을 벗고 새 인간을 입게 됩니다(골로 3,9-10 참조). 삶이 메말라가고 생명이 죽어 가는 우리 땅, 가치관 상실로 윤리도 도덕도 없이 사막처럼 황폐되고 있는 이 땅에, 다시금 생명이 소생하고 인간성이 부활하여 모든 것이 깨끗하고 싱싱한 푸르름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에제키엘서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 그 물이 강을 이루면 양쪽 뚝에 나무가 무성하여질 것이라고 하고, 그 물이 사해에 흘러 들어가면 사해의 물마저 단물이 되며 “이 강이 흘러 들어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며 살 수 있고‥‥ 어디에서나 생명이 넘친다"(에제 47, 1-10 참조)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살리는 물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실로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빵이시면서, 생명의 물이십니다. 때문에 예수님 친히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알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요한 4, 14)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분이 주시는 물 곧 성령을 마실 때, 우리는 다시 나고 그분의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 안에는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릴 것입니다(요한 7, 38 참조). 주님은 우리 모두가 이 진리를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분은 애원하시다시피 우리를 이 진리 자체이시요, 생명이신 당신께로 이끄시고자 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18)하고 초대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생명의 물로 아낌없이 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갈증,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생명에 대한 모든 갈증을 풀어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십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4.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요한 4, 10).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이라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이 말씀은, 오늘 이 시간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까?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누구신지 우리는 참으로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진실로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기를 소망합니까? 2000년대 사목 목표인 복음화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복음화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의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사람이 되고 우리 본당과 우리 교구, 신학교와 모든 수도회 모든 사도직 단체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되는 것이 곧 복음화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로써 새롭게 되고, 복음화 될 때에 우리 사회도 새롭게 되고 복음화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과 평화와 생명이 여러분과 우리 사회를 가득히 채우기를 다시금 빕니다. 








9.             부활 메시지 (1993년)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 기쁨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예수님은 당신 친히 말씀하신 대로 수난하셨으나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죽음도 멸함도 없는 참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도들의 증언으로써 잘 증거됩니다. 사도들은 본래 배운 것도 없었거니와, 비겁하리만큼 겁 많은 약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수난 때에는 모두가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한 것과는 달리 배반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렇게 약하던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영을 받은 후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목숨 바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였고, 그분만이 하늘 아래서 유일한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힘차게 증언하였습니다(사도 4,12).


사실 사도들을 비롯한 초대교회 신자들을 보면 돈도 없고, 힘도 없으며, 수적으로도 보잘것없는 작은 무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시작부터 유태인들과 대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삶은 매일매일 주의 수난과 부활의 빠스카 신비를 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박해를 이겨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때문에 겪는 고통을 기뻐하였습니다(사도 5,41). 현세적 시각으로 볼 때 아무것도 아닌 이 힘없는 집단이, 어떻게 당대에 천하를 호령하던 대로마 제국을 그 모진 박해 아래서 이겨낼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그 박해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 기뻐하고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와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참으로 부활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힘입니다. 모든 신앙의 핵심이요 바탕입니다. 때문에 가장 큰 박해자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개한 사도 바울로는, 이 신앙이 없으면 복음선교도 믿음도 헛되다고 하였습니다(1고린 15,14).


박해자에서 증거자로 변한 바울로의 회개는 주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더욱 힘차게 증거합니다. 동시에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원수까지도 용서하시는 주님의 자비, 죄인을 성인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은 사실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요,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이며, 죄에 대한 은총의 승리입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묵은 인간을 벗고 새 인간을 입습니다(골로 3,9-10).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서로는 형제가 됩니다. 그들 사이에는 유태인, 이방인의 차별이 없고, 자유인과 노예의 차별, 남녀의 차별도 없습니다(갈라 3, 28).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사랑할 줄 알고, 가진 것을 나누며,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초대교회가 이를 잘 말합니다(사도 2,44-47). 이같이 부활의 믿음이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고 용서와 화해가 있으며, 평화와 기쁨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시련과 박해를 이겨내고 죽음까지도 이겨내는 힘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언제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믿음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은 새 인간을(에페 4,24 참조) 낳고, 사귐과 섬김과 나눔의 새 공동체를 낳고, 인종과 피부색, 계급과 성별의 차이 등 일체의 차별을 넘어 서로 사랑할 줄 아는 새 인류를 낳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믿음을 확고히 지녀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목목표로 삼고 있는 ‘복음화'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서 우리 자신이 참으로 주님을 닮은 새 인간으로 다시 나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에서는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공개와 더불어 부정부패, 과소비, 사치풍조 등 이른바 한국병을 퇴치하고, 신한국 건설을 호소하면서 이를 힘있게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나라가 우리 교회보다도 앞서서 사회의 정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이 요구는, 이번 경우 그 의미에 있어서 단지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 그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도덕적, 정신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 시대의 요청입니다. 이렇게 강력히 추진되는 도덕성 회복은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우리 자신과 나라를 위해 이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됩니다. 사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사치와 낭비 및 안락 추구로 후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하고 정직하고 성실하며, 부지런히 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고통을 나누고 함께 잘사는 새 나라,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 그리스도교인들이 이 신한국 건설에 참으로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은 과연 깨끗한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비추어 청렴결백, 이웃사랑, 겸손과 봉사, 진실과 정의 등 모든 면에 투명한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오늘의 교회인 우리는 이 땅에 가난한 이가 없어지도록 가진 것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며 계층간, 지역간의 차별에서 오는 우리 사회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일치의 성사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이 땅에서 모든 이를 하나로 화합시키는 ‘일치와 희망과 구원의 가장 강력한 싹'인 ‘메시아적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교회헌장 9항 참조).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이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고, 마침내 남북분단의 벽을 허물어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래 빛과 소금의 구실, 사회를 변혁하는 누룩의 구실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분 상 사랑과 정의를 바탕으로 한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요, 건설자이어야 합니다.

 

2000년 전 교회 초창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새 인간, 새 인류가 태어났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이 땅에도 이같은 부활신앙을 바탕으로 진실로 새 인간이 태어나고 정치와 경제의 차원을 넘어서, 참으로 인간다움이 새봄과 함께 소생하고 기쁨과 희망이 샘솟는 새 나라가 건설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풍성하기를 거듭 빕니다. 

                      

                                                      1993년 예수 부활 대축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김수환


10.                1994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형제 자매 여러분,

회개와 보속의 사순절이 지나고 만상이 다시 살아나는 새봄과 함게 부활 대축일을 맞이

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시고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었을지라도 살 것이요"(요한 11,26) 하신 말씀 그대로,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부활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사도 신경에서와 같이 “죄의 사함과 육신의 부활과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라고 신앙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실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요, 복음의 본질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쳐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죄로 말미암아 죽을 운명에 놓여 있던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부활이 없었으면 인생의 말로는 죽음 뿐 입니다. 세상과 역사도 종국에는 멸망밖에 기대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인생과 세상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참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부활은 인간의 모든 부조리와 모순, 무의미에 종지부를 찍고, 인생의 모든 것이 의미와 가치로 가득 차며 빛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과 일치되어 영원히 살 인간의 소명, 그 존엄성이 부활로써 확실히 밝혀졌습니다(사목헌장 19 참조).

“의인들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마태 13,43)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미래는 영원하고 태양같이 빛날 것입니다. 이로써 인생은 찬란하고 역사는 의미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그 태양이요 그 역사의 의미이십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쁜 소식입니까?

그러기에 부활절에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 기쁨의 알렐루야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의 빛은 이렇게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밝혀줍니다. 현세의 어떤 시련도, 고통도, 죽음까지도 우리를 밝혀주는 부활의 빛을 어둡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시련과 고통은 우리 마음을 주님께로 더욱 돌리게 하고 죽음마저도 주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통로가 됩니다. 그 때문에 위령미사의 감사송은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오, 새로운 삶으로 옳아감이오니" 라고 하고, 사도 바울로는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이(1고린15, 54 참조) 라고 찬미합니다


이렇듯이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어 오심으로써, 모든 인간과 일치하였고(사목헌장 22 참조),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모욕과 고통, 수난을 겪으심으로써 죄많은 우리와 하나되시고, 모든 시련과 고통 중에 있는 이와 보다 깊이 결합하셨으며, 죽으심으로써 죽은 모든 이들과 일치하셨습니다. 뿐더러 그분은 고성소(古聖所)에 내려가시어, 빛도 희망도 없이 죽음의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모든 죽은 이들과 일체가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마침내 그 죽음의 구렁, 그 절망과 그 어둠에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이를 살리는 부활 생명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처럼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밝혀주고 시련도, 고통도 의미와 가치로 변화시켜주며, 죽음까지도 생명에로의 문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어떤 시련도 고통도 죽음마저도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때문에 주님은 부활하신 그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 20) 하고 인사하셨습니다. 진실로 이제는 부활의 빛 속에서 볼 때 모든 것은 평화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사회는 오늘날 도덕성 부재와 가치관 상실로 모든 면에 활기를 잃고 있습니다. 모두 잘 살기를 바라면서도 일하기는 싫어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이른바 국제화 및 세계화의 도전과 악화 일로에 놓여 있는 남북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가 오늘처럼 방향을 잃고 무기력한 상태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 모두가 난국을 극복하는 강한 의지로 일치 단결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농촌을 살리고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하여는 정부와 기업, 농민과 노동자, 국민 모두가 한 몸이 되어 전력투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런 의지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민정부의 개혁의 결실이 피부에 와닿지 않고, 특히 경제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통령과 정부, 여야 정치인, 사회 지도층 모두가 각자 사리사욕이나 당리당략을 떠나 나라와 민족을 일으키기 위해 자기 희생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 옛날 주님의 수난으로 완전히 희망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다시 생기를 찾을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주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사랑으로 바치겠다는 결의를 새롭게 다짐할 수 있었던 그런 마음의 전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에게 이 전기를 마련해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 민족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그 힘, 그 빛, 그 평화, 그 생명을 줄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 주님의 제자인 우리 자신입니다.

종교적 차원과 세속의 차원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삶을 긍정적으로 보고 주님을 본받아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는 것은 단지 종교인으로서 잘 사는 것일 뿐 아니라, 사회와 나라를 밝히는 빛이 되고, 사회와 나라를 침체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시며, 바로 그 사랑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인간, 온 세상을 위하여 당신의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의 심장, 그의 가슴은 참으로 이 사랑 때문에 창에 찔리고 열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예수님을 따르고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처럼 우리의 가슴도 열려야 합니다. 그분이 모든 인간을 형제로 껴안으셨듯이, 우리도 그분과 같이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은 물론이요, 외국인 근로자까지 모든 이를 인종과 국적, 피부색 일체를 초월하여 형제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한국인이 모두 이런 열린 마음으로 이웃 사랑에 산다면, 우리는 분명히 세계화, 국제화에서 이길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같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부활하셔야 합니다. 그때에는 이 땅에 희망의 등불이 밝혀지고, 우리 국민 모두가 실의와 좌절에서 일어설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과 평화의 노래, 부활을 찬미하는 알렐루야가 우리 안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땅,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질 것입니다.



11.            1995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와 기쁨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온 세상의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특별히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한 올해는 민족이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을 맞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있어 해방 50년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채 살아온 분단 50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선 오늘의 우리에게 민족의 해방과 해방된 민족의 미래를 함께 생각해 보기를 요청하십니다.

민족의 해방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통해 자유를 찾아 가나안 복지에 이르는 과정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파라오의 폭정에서 탈출한 이후 40년이 지나도록,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광야에서 헤맸습니다.

그들이 광야를 방황한 까닭은 참된 해방자이신 하느님을 배신하고,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의 생활은 그들에게 참된 해방을 위한 교육의 기회가 되었고, 이 시련의 기간을 거쳐 그들은 마침내 해방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걸었던 구원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걸어갈 참다운 구원의 방향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은 지 5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우리 민족은 동족 상잔의 쓰라림과, 분단의 고통 속에서 참된 해방을 누리지 못했고, 이 시련의 기간을 진정한 해방을 위한 준비의 기회로 삼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현대의 우상인 물질지상주의와 특정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분열되고 상처 입은 민족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음미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빠스카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죄로 물든 인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으로 믿은 이들은 연약함에서, 능력을, 수치와 모함에서 영광과 영예를, 죽음에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해방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인류의 죄를 사해주시고, 화해의 모범이 되셨으며, 진정한 평화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오늘날 민족 구성원 가운데 상당수는 새로운 우상을 섬기면서 하느님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적 소명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인마저도 민족 공동체의 진정한 화해와 구원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분단에 안주하여 형제를 단죄했으며, 민족 공동체와 인류의 구원보다는 우리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는 데에 머물렀습니다. 우리의 귀와 눈은 이기심과 우월감, 적대 의식과 의구심에 가리워져 진리의 원천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반성을 기초로 하여 우리는 진정한 화해와 일치를 위해 새로운 역사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존재 이유를 확인하며,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할 때, 우리 사이에는 진정한 대화가 비로소 가능합니다. 이 존재 이유의 긍정을 통해서 서로는 흡수통일 또는 적화통일이라는 유혹으로부터 참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동질성을 간직해 왔습니다. 우리가 서로 공유하고 있는 동질성은, 우리 민족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원동력이 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남북한의 민족 구성원 모두는 비록 서로의 차이점을 발견하더라도, 이를 강조하여 이질성을 심화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드러내기보다는 그의 장점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장점을 인정할 때, 그것은 민족 구성원 모두의 장점이 되어 민족사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족적 자존심을 공유하면서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을 굳건한 의지를 함께 키워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발전을 위한 부단한 노력을 우리 민족의 공동 자산으로 삼을 때, 근면하고 활기찬 삶의 방법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이었던 빠스카의 의미를 새롭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신비는 우리 민족의 참된 해방의 길과 미래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해방의 희생양이셨습니다. 빠스카의 어린양처럼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주신 그리스도는, 우리 인류를 하느님과 일치시켜주시고,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진정 우리의 해방자이시고 평화이십니다(에페 2, 10-14참조).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평화를 기원하시면서, 서로 죄를 용서해주라고 명하셨습니다(요한20, 19-23 참조). 그 가르침대로 제자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찬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사도 2장 참조). 이제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그저 하루 기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보여주셨던 무조건적 용서와 사랑을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광복 50년은 분명 희년(禧年)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류의 희년, 참된 구원과 해방을 위해 그리스도의 희생이 요구되었듯이 참다운 희년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희생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보다 깊이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생각과 삶의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키워가야 합니다. 사치를 버리고 검소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불신을 신뢰로 바꾸고 미움을 사랑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고 이웃의 고통까지도 함께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 역시 그리스도처럼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밀씨가 되어야 하며(요한 12,24 참조),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그 가장 큰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요한 15, 13 참조). 바로 그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을 밝히고, 우리 사회를 밝히고 온 세계를 밝히는 광명, 구원과 생명의 빛으로 우리 안에 떠오를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본받은 그 사랑과 희생이, 우리 사회의 지역간, 계층간 또는 세대간의 격차의 담을 헐고, 마침내 50년 남북분단의 벽을 허물어 통일을 가져오는 해방의 힘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같은 은혜를 풍성히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12.            1996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만물이 다시 살아나고 꽃피는 새 봄과 함께 주님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 그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이 땅과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결코 윤리, 도덕만을 가르치는 도덕 종교도 아니요, 기복 종교도 아니며, 조상 숭배처럼 성현이시지만 결국에는 죽은 예수를 섬기는 종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나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시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예수님, 우러를 참으로 구원하시고 살리시는 구세주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우리 신앙의 바탕이요 핵심이며, 참된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는 당신의 몸인 교회와 함께 계시고,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고 있으며, 그 지체인 우리도 같은 생명으로 살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를 위시하여 모든 사도들이 그 혹독한 박해를 무릅쓰고 목숨을 바치며 믿고 선포한 복음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고", 그분은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강림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성령을 가득히 받고, 자신들 앞에 달려 온 군중에게 힘차게 선포한 첫 복음의 내용도(사도 2,22-35 참조), 성전 문 곁에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하신 후 그 일을 보고 놀란 유다인들에게 증언하셨을 때에도(사도 3, 14-15 참조), 또 대사제 안나스를 비롯하여 유다 지도자들 앞에서 심문에 답변하셨을 때에도(사도 4, 10참조), 그 내용은 그들이 이교도들에게 넘겨 죽인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사도 2, 32 참조) 부활이 그 중심이었습니다.


2. 주님이 수난 하실 때 너무나 무서워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쳤던 그들이, 이렇게 힘차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당시의 유태인들에게 이것은 청천벽력 같은 말이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

러나 부활은 사도들이 굽힐 수도, 양보할 수도 없는 진실 그대로였습니다.

왜냐하면 4복음이 다 전하는 대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박해자였던 사도 바울로도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 회개한 후,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

음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고린 15,14)라고 부찰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로는 “나에게 그리스도는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 21).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 20) 라고 힘차게 말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과거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를"(필립 3, 9)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하였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분들과 함께 사시고, 함께 일하셨기 때문에, 그분들의 복음 선포는 생명력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부활은 과연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중심이요, 우리 믿음의 바탕입니다. 바로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 그 자체입니다.

 

신약 성서는 물론이요, 구약 성서까지 성서 전체가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났다면, 성서 말씀은 생명 없는, 죽은 말씀일 뿐 아니라, 모순이요 거짓입니다. 그러나 성서 말씀은 인간을 구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그 말씀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3.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는 참으로 큽니다.

그것은 곧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요,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이며,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창조 이래, 끊임없는 인간의 죄와 반역에 대한, 하느님의 한없이 크고 깊은 자비와 용서의 승리입니다. 모든 인간이 마음속 깊이에서 갈구하는 소망의 달성입니다. 이로써 인생은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불사불멸의 생명을 얻는 데 있다는 깊은 의미가 밝혀집니다.

 

동시에 인류 역사도 불의와 부정 속에 흥망성쇠만 거듭하는 것이 아니고, 정의의 승리, 사랑의 승리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대단원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진실로 인생과 역사의 의미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부활은 우리에게 다시없는 기쁨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깊이 맛보게 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 20) 하고 인사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부활의 신앙을 굳게 지니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부활만이

우리의 참된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에 대한 희망으로 삽니다. 희망이 없으면 삶은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에 따하여 참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돈이나 권세와 같은 세상의 부귀영화입니까?

이런 것이 희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한정된 의미에 불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죽음과 함께 소멸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죽음마저도 지을 수 없는 것일 때 참된 희망일 것입니다.

그것은 곧 불사불멸의 생명에 대한 희망입니다.


바로 죽음을 쳐 이긴 부활에 대한 희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분이 함께 계시는 한 우리는 참으로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4. 올해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순교 150주년이 됩니다. 이분을 비롯하여 우리 순교 선열들이 혹독한 박해 아래 죽음을 무릅쓰고 증거한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로마 6, 8)는 확고한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우리 순교 선열들에게 있어서, 부활 신앙은 박해의 시련과 죽음의 절망까지도 이겨내는 힘과

희망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힘과 희망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시대는 가치관 부재의 시대입니다.

모두가 자기 중심적인데다가 우리나라는 지금 남북 분단에 더하여 지역 감정의 깊은 골로 심각히 분열되어 있습니다. 진리와 정의와 함께 용서와 사랑, 화해의 정신이 참으로 아쉬운

때입니다.

부활의 믿음과 함께 그 믿음에서, 정의와 사랑은 반드시 이긴다는 굳은 신념을 우리 믿는 이들이 지니고 살 때에, 우리는 단지 영적으로 구원될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이 나라도 달라질 것입니다.

  정의롭고 진실된 나라, 인간 존중의 사랑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또한 이런 정신으로 다가오는 15대 총선에 임할 때, 이번 선거는 공명정대하며, 이 땅에 정의가 승리하고, 국민이 승리하는 선거가 될 것이요, 그것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자신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겨 줄 것입니다.

 

그 희망은 서로간에 신뢰와 사랑을 낳을 것이요, 계층간․지역간에 분열된 이 땅에 화해를 가져오게 할 것이며 마침내는 남북 분단의 벽을 헐고 평화 통일을 달성케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이처럼 우리 안에 가득하기를 거듭 빕니다.







13.             1997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대축일을 맞이하여 진심으로 주님의 은총과 사랑, 희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우리나라와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어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신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3일만에 그 죽음을 쳐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1고린 15,3-5 참조). 주님이 부활하졌다는 이 사실은, 참으로 우리 모두에게 말할 수 없이 끈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로써 우리의 하느님은 죄 많은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며, 당신 아들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죄와 죽음까지도 물리치시고, 우리를 기어이 부활 생명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수난하실 때 그것은 그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절망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이스라엘의 해방은 물론이요, 그들이 갈구한 하느님 나라, 진리와 정의, 사랑과 생명의 나라에 대한 희망은 완전히 허무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불의와 거짓, 미움과 폭력이요, 약육강식의 원리 속에 힘있는 자는 승하고 약한 자는 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실망과 좌절에 빠지고, 수난하시는 스승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절대로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장담을 한 수제자 베드로마저 주님이 예언한 그대로, 세 번씩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때는 참으로 밤이었습니다(요한 13, 30 참조).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암흑이었습니다. 세상은 결국 그렇다는 체념과 허무감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였습니다.


2. 그러나 부활하심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혀 참혹히 숙여졌던 예수님의 얼굴은, 영원히 들어올려졌고, 그 부활의 광명 속에 새 인간, 새 세상, 즉 하느님 나라가 나타났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결코 죽음 속에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로 하여금, 인간의 체념과 허무감, 불의와 거짓, 죄와 죽음을 쳐 이기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진실로 죽음과 절망의 지평에, 죽은 인간도 다시 살리고, 모든 이를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빛이 아침 햇살보다 더 찬란히 떠올랐습니다.

 

그리스도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라고 말씀하신 대로, 죽음이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드는 그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를 살리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승리입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써, 그를 통하여 우리 모두도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 하시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거듭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은 참으로 우리 아버지시며,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진이신 하느님께 대하여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새 한 마리, 들꽃 하나까지도 자상히 돌보시는 그 하느님(마태 6, 25-34참조)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큰 사랑으로 지켜보고 계시는지를 말씀하셨고, 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 병고에 신음하고 어둠에 잠긴 사람, 고독하고 버림받은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지를 예수님은 당신의 표양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기쁨은 죄인의 회개요,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가장 큰 바람, 오직 하나의 소망은 아들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거지가 되었지만, 탕자의 귀가는 죽은 자식을 다시 찾은 것이기에, 큰 잔치를 베풀 수밖에 없는 기쁨입니다(루가 15장 참조).

 

예수께서 남기신 이 모든 기쁜 소식-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참으로 진실된 말씀이요, 바로 구원과 생명의 말씀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우리 인간이요, 가장 사랑하시는 것 역시 우리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제자들은 아버지 하느님의 이 큰 사랑을 깊이 체험함과 동시에, 그리스도는 참으로 생명의 주이시요, 역사의 주이시며, 하느님의 힘이요 지혜이시고,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사도 4, 12 참조). 그 때문에 제자들은 이 그리스도를 목숨걸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의 길을 갈 때에, 그것이 비록 고통의 길, 십자가의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구원된다는 것을, 그것이 또한 세상 구원의 길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과연 사도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서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선포하였습니다.

3.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올해 1997년은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뜻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성자 그리스도께 봉헌된 해입니다(제3천년기 40항) .

“예수 그리스도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고 유일한 구세주"(히브 13,8참조) 이것이 그 대주제입니다.

이 뜻깊은 해에, 우리는 모두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주님, 그분만이 참으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고, 그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정치, 경제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나라의 운명 자체가 어둡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권력에 집착하여 이전투구만을 일삼고, 가진 이들의 과소비와 사치풍조에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빈곤감과 위화감은 더욱 깊어갑니다. 슬픈 일입니다. 나라를 위해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지금은 정치인들은 물론이요. 온 국민이 대오각성하여 다시 태어나야 할 때합니다. 참으로 모두 이기주의를 버리고 애국애족하는 마음으로 힘을 모아 경제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진실히 우리 마음을 밝히는 빛이십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시면서 온 세상 모든 이를 위해 모든 이의 죄를 대신 지신 그리스도, 모든 인간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당신의 목숨까지 우리를 위해 내놓으신 그리스도, 그리하여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이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계시하심은 물론이요,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우리 자신이 참 인간의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잘 밝혀주십니다.

 

이 그리스도에서 교회 안에는 물론이요 우리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존재 깊숙한 곳에 현존하시는 이 주님, 그리스도를 믿음 속에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깊이 믿고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침내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2). 여기에 오늘 우리 자신과 우리나라의 살 길이 밝혀져 있습니다.








14.            1998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과 함께 부활대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진심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은

총파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 대로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어 오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성령으로 부활하시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죄에서 구하시고 죽음에서 살리는 생명의 주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이 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래 죄와 악으로 가득찬 이 세상, 그 결과 모두가 죽음의 운명과 그 질고를 면할 수 없는 이 세상, 절망과 암흑의 땅에 구원과 희망의 빛이 새벽 햇살처럼 환히 동터온 것입니다.

진실로 사도 바울로의 증언대로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로마5,20).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인간의 종말은 결코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 불멸의 생명입니다. 우리 모두도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신 같은 성령으로 죽음에서 영생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8,11 참조). 이리하여 하느님과 같이 그 영광 속에 영원히 사는 것이 모든 인간의 소명입니다. 여기에 인간 존엄성의 가장 숭고한 이유가 있습니다(사목헌장 19 참조).


우리는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성령께 봉헌된 이 해에,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살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 부활 신앙을 확고히 심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깨닫게 하여 주시도록 간절히 빌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에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고린 15,14).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시고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그가 가르친 모든 말씀, 복음도 헛되고, 우리 인생은 구원의 희망이 없고, 부조리와 모순뿐이며, 사람이 진리와 정의를 따라 살 필요도 없고, 윤리 도덕 등 모든 가치관이 쓸모 없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그 종말은 멸망뿐일 것입니다. 세상과 역사는 그리스도를 못박아 죽인 그 미움과 폭력과 거짓 속에 끝없이 공전하는 허무일 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모순된 인생과 종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도리에 어긋납니다. 모든 인간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찾고 있는 진리와 정의, 사랑과 행복, 참생명에 대한 배반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이런 배반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쳐이기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 모두도 죄의 용서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녕 세상에 이보다 더 기쁘고 복된 소식은 없습니다.

 

부활은 진정 죽음의 어둠에 잠긴 지평에 떠오른 생명의 태양입니다. 거짓을 쳐이긴 진리의 승리요, 미움을 쳐이긴 사랑의 승리입니다. 부활 생명의 빛이 어둠에 잠긴 인생과 역사를 환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인생도, 역사도 세상 모든 것이 의미를 얻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알렐루야'의 기쁜 노래를 드높이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하며 기쁨에 용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은 참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란 바로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부활 신앙을 굳게 간직하고 살 때, 우리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절망이 있을수

없습니다.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반드시 부활한다는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하지 않게 하는 희망 그 자체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어둡고 비참할지라도 - 하늘을 덮은 먹구름 뒤에는 태양이 건재함을 믿듯 -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통과 시련, 어둠과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참으로 평화입니다. 모든 근심 걱정이나 두려움을 없애고 오직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그 사랑만이 우리를 감싸는 평화입니다. 그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습니다(요한 20,19).

이제 우리는 이 주님의 부활을 확고히 믿고 이를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심을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리는 가장 힘있는 증거는, 이 그리스도를 우리가 따르는 삶, 닮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주님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종이 되시어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봉사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죄인을 비롯한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 실망과 좌절에 빠진 사람을 더욱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요구됩니다.

특히 이른바 IMF시대에 우리 주변에는 가난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실직과 경제적 파탄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동시에 북녁 땅에서는 이미 잘 아시는 바대로 식량난이 심각합니다. 많은 이가 - 특히 어린이, 노약자들이 -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남에서나 북에서나 이 고통에 놓인 이들은 바로 우리와 한 핏줄입니다. 동포요 형제입니다. 이들의 고통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신자인 우리들은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으로(필립 2,5) 그들과 고통을 나눌 줄 알아야 하고, 가진 것을 내놓음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은 사랑의 주이신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우리 안에 사심을 가장 힘있게 증거하는 표시가 되고, 동시에 참으로 나라를 살리고, 분단의 벽을 헐고, 겨레의 통일

을 이룩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15.      부활 메시지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이미 비치고 있습니다>(1요한 2,8)

                                                                 1999. 4. 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만물이 다시 살아나는 새봄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온 누리에 가득차고, 그 생명의 빛이 이 땅의 어둡고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비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지 사흘 만에 죽음을 쳐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써 절망과 멸망, 허무와 암흑으로 끝날 수밖에 없던 삶과 세상을 다시 살려내고 영원히 살게 하는 참생명을 이 세상에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이며 희망의 빛이요 평화이시기에 가능했습니다.


“이 날은 야훼께서 내신 날, 다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자”(시편 118,24).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 날은 하느님께서 직접 마련해주신 특별한 날입니다. 실로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며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렇기에, 기쁨과 환호에 가득차서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구렁, 그 절망의 어둠에 빠졌던 우리가 이제는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사도신경)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부조리와 모순과 무의미로 가득찼던 인생의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와 가치와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금년 부활은 2000년 대희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맞이하기에 그 의미가 어느 해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 천년기에 우리는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는”(루가 4,18) 참그리스도인으로 거듭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2000년 전 부활하시어 사도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만이 아니라 ‘오늘 이곳’의 우리들 앞에 펼쳐진 현실도 바라봐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남북으로 분단되고 서로에 대한 오해와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제통화기금(IMF) 체제가 된 지도 2년째이고 새 정부의 개혁이 시작된 지도 1년이 넘었지만 사회 곳곳의 표정은 여전히 힘에 겹고,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긴급했던 상황들은 극복되었다고 하지만 과연 누구를, 무엇을 희생해서 이 극복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냉철히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힘들었던 그 상황들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대다수의 우리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맨 결과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실업자는 여전히 늘어나고 있음은 실로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모든 국민들이 서로 힘을 모으고 짐을 나누어지려고 하는 이때, 개혁의 노력이 몇몇 집단의 이기주의로 발목 잡히고 일부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언행으로 여전히 국민들에게서 외면당한다면, 우리는 오늘의 긴 어두움의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부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천년기가 교차하는 대전환의 시대에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삶을 몸소 사시다가 부활하여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참으로 마음 깊이 믿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믿음만 확고하다면 우리는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생명의 빛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 죄에 대한 은총의 승리입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낡은 인간에서 벗어나 새 인간으로 거듭납니다(골로 3,9-10).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서로 형제가 됩니다. 그들 사이에는 인종적, 민족적, 사회적 차별이 일체 없으며(갈라 3,28),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사랑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룹니다(사도 2,44-47).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보다는 ‘너’와 ‘우리’를 더 소중하게 여겼던 초대교회의 모습이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잘 가르쳐줍니다. 부활의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이처럼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남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 기쁨뿐 아니라 고통까지도 함께 나누는 구원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이미 비치고 있습니다”(1요한 2,8).

2000년 전,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빛을 통해 우리들도 새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오늘 이 시대, 이 땅에서도 우리는 부활신앙의 옷을 입은 새 인간으로서 사랑이 충만한 세상을 열어야 합니다. “잠에서 깨어나라. 죽음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리라”(에페 5,14).

오늘 부활 대축일을 맞아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 빛이 온 누리의 모든 이들과 우리 겨레에게, 특별히 희망을 잃고 어려움 속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에게 고루 비치기를 거듭 기도합니다.


1999년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대주교 정진석







16.           2000년      부활 메시지                

                                                        정진석 대주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구세주 강생 2000년 대희년이라는 특별한 해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 평화와 기쁨이 형제 자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또한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자비로우신 주님의 손길이 두루 미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남북으로 분단된 채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이 주님의 은총으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함으로써, 하나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도래하기를 기원합니다.


1. 부활은 악에 대한 사랑의 승리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하셨던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악한 세력에게 십자가상의 죽음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께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는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루가 24,21). 그러나 그분의 무고한 죽음은 제자들에게서 이 같은 희망을 모두 앗아갔습니다. 제자들은 극도의 비탄과 좌절을 안고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래아로 달아났습니다(마르 16,12 참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는커녕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에까지 이르는 경우를, 우리는 인류 역사 안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정의보다는 불의가 승리하고, 사랑보다는 미움이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삶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장엄한 선포입니다. 부활은 거짓에 대한 진실의 승리요,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입니다. 또한 악에 대한 선의 승리요,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던 연약한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머물러 계시면서 진리가 무엇인지 밝혀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히브 13,8).


2.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부활하신 주님인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제자들의 삶에는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미움과 불의를 조장하는 악의 세력에 무릎꿇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엄청난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제자들은 예수께 대한 신앙 안에서 나눔과 섬김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사도 2,43-47참조). 나아가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들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총과 수많은 신앙의 증거자들을 통하여 마음 안에 부활신앙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또 다른 증인이 되어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지닌 사람은 없습니다"(요한 15,12-13).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주위에 있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또 다른 그리스도로 여겨 가진 것을 나누고 섬김으로써, 우리는 영원한 진리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마태 25,31-46 참조).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셨습니다"(에페 2,14). 예수께서는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 희생당하셨지만, 부활을 통해 진정한 화해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통해 우리는 인간적인 폭력과 불의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겨내는 길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 속에서도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희망하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3. 공동선을 위한 정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하여 우리 국민들은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 정치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4․13 총선거를 통하여 국회의원을 새로 선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난 선거에서 각 정당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책을 올바로 제시하지 못한 채, 상호비방을 일삼고 지역감정을 부추셨습니다. 이로 인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과 불신이 더욱 팽배해졌습니다.


새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을 포함한 모든 정치인들이 하느님의 소리인 양심을 따라 정직하고 올바로 살 때, 비로소 국민들은 정치인들을 다시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사리사욕이나 당리당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일함으로써,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어야 합니다. “정치는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정당화되고 그 의의를 발견하며, 공동선에서 비로소 고유한 권리를 얻게 됩니다"(사목헌장, 74항). 이제 우리 국민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올바른 정치에 기초한 풍요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4.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향하여


그 동안 우리 민족은 불행하게도 남북으로 갈라져 대립과 갈등, 적대와 증오로 점철된 채 살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눈으로 보면, 분단 이후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대희년 6월에 이루어지는 남북 정상회담이 결코 우연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작용하는 듯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되기를 바라는 교회는, 우리 민족사에 커다란 절환점이 될 정상회당을 환영하며 알찬 결실이 맺어지길 기원합니다.


앞으로 열리게 될 남북의 여러 회담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먼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지역간 계층간의 장벽을 뛰어 넘어 하나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남과 북으로 갈린 우리 민족이 서로간의 담을 헐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신뢰와 인내심을 가지고 자주 만나고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부활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는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고 용서하며, 나눔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서울대교구장이면서 평양교구장 서리로서 북녘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민족이 서로 화해하고 일치할 수 있기를 청하며 여러분께서도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형제 자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기를 다시 한번 기원합니다.










17.         부활 메시지 (2001년)                   서울 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



“이 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시편 118).”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에 우리는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와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오늘 온 인류의 구세주로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습니다. 제삼천년기의 첫해이며, 신유박해 순교 2OO주년의 뜻 깊은 해에,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교형 자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남북으로 분단된 채 살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충만하여 하나될 수 있는 날이 도래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이 꽃필 수 있기를 간청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의미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요, 구원의 완성입니다 부활 대축일은 교회의 모든 축일 가운데서 가장 큰 축일이며 가장 오래된 축일입니다. 부활시기는 오늘부터 성령 강림대축일까지 50일간 계속되며, 이 시기에 우리는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로써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로, 죄에서 비롯된 인간의 모든 고통과 죽음의 세력이 겉이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우리들도 장차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선하신 하느님, 용서하고 축복하시는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며, 하느님께로 시선을 돌려 그분의 선하심을 실천하라는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사람들에게 말씀과 행적으로 알려주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예수를 여러분은 악인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되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사도 7,73-74).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모든 것이 끝났다면, 그분을 믿고 따르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도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써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 (히브 13,8)이 되셨습니다


2. 죽음보다 강한 주님의 사랑


성서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과, 부활의 증인인 사도들의 활약상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수는 집 짓는 사람들, 곧 여러분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사도 4,11-12).

예수께서는 더 이상 죽음의 세력에 붙잡혀 있지 않고, 오늘 부활하심으로써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으로 존재하시는 것아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 크신 사랑으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에페 2,4-5 참조).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말씀과 행적이 참으로 올바르다는 것을 보증해 주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진실은 거짓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사랑과 생명이 충만한 아름다운 나라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음 속에 부활신앙을 간직하고 있습니다만, 사회에는 죄악과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갈려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 풍조가 널리 퍼진 가운데, 사람들은 정신적․도덕적인 가치를 잃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과거에 비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으나, 아직도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전으로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되었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폭력과 불의가 난무하고 있으며, 고통과 반목이 삶의 현장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부정부패가 만연해서, 개인적 차원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불의가 집단적, 국가적, 그리고 세계적 차원에서 자행되기 때문입니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체제관리 이후, 더욱 심화된 부익부, 빈익빈 현상에 대하여 우려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남북협력의 화해 분위기도 국제 정세의 흐름에 따라 영향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서 큰 시련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겨레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특히 사회 각 분야의 지도층 인사들이 솔선 수범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정치인들은 언행이 일치된 모습으로 먼저 국민을 생각하고, 국민들에게 봉사함으로써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국민들도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서로를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남북으로 분단된 채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이 통일의 길로 들어서려면, 지속적인 만남과 사랑의 나눔을 더욱 확산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힘을 합쳐 지금보다 더 아름답고, 사랑과 생명이 충만한 나라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4.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심을 고백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이 인류 안에 새로운 빛으로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한마음 한뜻이 되어,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사도 4,32-36 참조). 예수께서 세상의 온갖 죄악과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오롯이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 때 비로소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시기를 맞아 내적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골로 3,1-2).


다시 한번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 평화와 기쁨이 교형 자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울러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자비로우신 주님의 손길이 두루 미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북으로 분단된 채,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함으로써 하나될 수 있는 날이 도래하기를 간청합니다.


구세주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 우리나라의 103위 순교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드립니다.

“이 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시편 118,24)



                                  2001년 4월 15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18.              부활 대축일 마태 28,1-10 (가) 갈릴래아로 먼저 가시리라

                                     -이갑수 주교



“주께서 오실때까지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전하며 주의 부활하심을 굳세게 믿나이다”


오늘 온세계 성당에서는 신앙의 신비를 노래하는 기쁨의 종소리가 울려 퍼져 나온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앙의 중심이요 기초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숙명적인 죽음과 생명욕에 대한 욕구의 수수께끼를 풀어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쉴새없이 발동하는 영원히 살고자하는 욕망과 틀림없이 맞이해야할 죽음의 갈등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울음으로 시작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인 매일 다가오는 고통에 의해 끝을 맺는 일이다. 왜 죽어야 하나? 무엇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하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죽음의 그늘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는 없는가? 이같은 질문은 인류역사를 통해서 계속 이어왔고 오늘도 말없이 인간은 이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다.


고통과 죽음은 절망과 아픔을 주는 것이고 아픔을 주는 것은 또한 벌이다. 매를 맞거나 감옥살이를 하거나 간에 벌은 아픈 것이다. 인생이 이 고통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연대적으로 치러야 할 벌이고 벌을 받게끔 저지는 잘못인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비극적 뿌리는 죄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을 초래한 죄를 없애기 위해서 속죄의 제물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운데 오셨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부활하신 것이며, 죽음의 원인인 죄를 없이했기 때문에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되찾아 주시려고 부활하신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 즉 부활은 신앙의 신비이며 교회는 사도들의 뒤를 이어받아 부활을 증거 하는 증인인 것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부활사신 다음 비어있는 그의 무덤을 목격하고도 제자들은 의심하였고, 주님의 시체를 항유로 바르기 위해서 여자들이 걸음을 내디디면서도 주님의 부활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무덤 앞에 가로 놓여진 돌을 누가 치워 줄것인가를 걱정했다.


문이 닫힌채 제자들이 모여있는 방에 나타나시어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도깨비나 귀신인줄로 여겨 겁에 질렸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신앙으로써만 가능하다. 제자들이 스승의 부활을 믿고 그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어떠한 고통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했다.


현재 인간의 여건으로서는 고통과 그 총결산인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부활이란 있을 수 없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 비로소 부활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기계가 고장이 났을 때 고장난 일부분만 수리한다면 얼마가지 않아서 또 말썽을 부린다. 완전히 수리하려면 그 기계를 완전히 부숴버리고 새로 만들어야 한다. 죄로 고장난 인간을 근본적으로 고치려면 완전히 부셔버리고 새인간으로 개조해야만 한다. 인간을 완전히 부셔버린다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을 의미하며, 죽음은 또한 부활에 이르는 필수조건이다.


죽음과 반대인 부활이란 형식으로 인간의 끝없는 수수께끼를 풀어준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신앙의 신비이며 이 신앙이 있기에 우리는 고통과 죽음에 희망을 둔다는 모순된 표현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전생애에 깔려있는 가시밭을 부활에 이르는 필수과정으로 알고 삶의 보람을 느끼며 웃음을 머금은채 살아갈 수 있다.


오늘의 세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의 결핍과 물질주의의 만연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 지구를 두갈래로 나누면 반은 유물론적 공산주의 이념으로 신이 없는 세계이며, 또다른 반쪽은 민주자유진영이다. 민주자유진영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삶의 목적과 행동의 동기가 현세물질의 가치에 두고있다면 이념상으로 그들은 물질주의를 따르는 자들이다. 그러면 과연 이 민주자유진영에 몸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일상생활의 목적을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을까?


이렇게 볼 때 현대는 신앙을 잃어가며 유물론이 득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는 지금 실질적으로 공산주의 이념인 유물론으로 물들어가고 이 상태로 나아간다면 인류는 결국 공산주의로 몰락하고 말 것이다.


오늘의 세계는 그 어느 때 보다 물질주의의 허황됨에서 정신을 차리고 자기의 과오를 때달으며 떠나버린 아비의 품으로 발길을 옮겨야하며 신앙을 되찾아야 할 때라고 본다.

이 신앙을 찾을 때 비로서 모든 고통과 죽음까지도 웃으며 맞이할 것이며 참된 빛이요, 희망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에로 이끄는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이 생명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실천하며 부활의 빛을 향해 걸아가야 할것이다.









19.          부활대축일 요한 20,1-9 부활하신 예수

               - 이문희 대주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참된 삶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매일같이 새로이 시작합니다. 우리가 매순간을, 살아 나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매순간 우리에게 삶을 허락하시고 우리에게 삶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아온 삶은 말하자면 이미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를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은 어제의 나는 어떻게 죽었느냐고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어떻게 죽어갔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뜻없이 죽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이 보람 있어야 하고 보람 있는 삶은 뜻없는 죽음을 낳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을 성실하고 바르게 살면 성실하고 바르게 산 사람으로 죽는 것이고 쓸데없는 일만 하고 살면 쓸데없는 일만 하고 산 사람으로 죽는 것입니다.


어제의 우리의 삶은 다시 찾을 수 없고 이미 죽음에 넘겼지만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듯이 마지막 이 세상의 삶이 끝날 때 영원한 삶이 우리에게 있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영원한 삶이 결정될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만을 행하고 살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릴 것입니다.

영원히 삶을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를 버리고 이 세상을 죽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죽음이 삶이 되는 부활의 신비 가운데 우리는 더욱 성실히 하느님이 주신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희생이 되고 희생이 영광이 되는 진리를 이 세상에 널리 펴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전하며, 주의 부활하심을 굳세게 믿나이다.”


미사 때마다. 그리고 또 엄숙한 순간에 우리는 이런 환호성을 올립니다. 오늘도, 아니 오늘따라 더욱 이 말은 새롭고 뜻깊이 여겨집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주님을 피해서 대면하지 아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그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신 바로 그 주님이십니다. 주께서 오실 때 우리는 그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사흗날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목격자들이 말을 전하고 증인들이 대를 이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굳세게 굳세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이웃 중의 많은 사람도 모르고 있습니다. 내 가족 가운데도, 내 친구 가운데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묻히신 분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분을 따라 살면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드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제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활메세지 (1999년)                  전주교구장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를 기원하며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ꡓ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이 첫 마디 말씀으로 부활의 인사와 함께 축하를 드립니다. ꡒ평화가 여러분과 함께!ꡓ


요한 복음사가는 그날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ꡒ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ꡐ평화가 여러분과 함께!ꡑ 하고 인사하셨다ꡓ(요한 20,19). 그 때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주고 싶어 하셨던것은 ꡒ평화ꡓ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ꡒ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ꡓ(요한 14, 2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인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참다운 평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평화, 일체의 두려움이나 걱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킬 힘이 있는 그런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모든 두려움과 걱정에서 구해주실 수 있는 것은, 당신 스스로 ꡒ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ꡓ(마르 14,32) 하고 실토하실 만큼 극도의 두려움과 걱정을 겪으신 다음에 그것을 이겨내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맨 처음 만나신 여인들에게도 ꡒ평안하냐?ꡓ 하고 물으신 다음 ꡒ두려워하지 말아라!ꡓ(마태 28,9-19)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걱정과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걱정거리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미 직장을 잃어 생계가 막연한 이들은 ꡒ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ꡓ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이들도 언제 실직자가 될지 몰라 불안해합니다. 그런 걱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이들 가운데에서도 건강, 자녀교육, 미래 등에 대한 걱정에 눌려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사람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는 ꡒ걱정한다고 해서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ꡓ(마태 6,27)가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는 모든 걱정의 뿌리입니다. 사는 동안에 만나는 걱정거리들은 거기서 돋아나는 싹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쳐이길 수 만 있다면 사람은 모든 걱정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과연 제자들은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로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때부터는 닫아 걸었던 문을 박차고 나가 바로 전까지 두려워했던 유다 군중을 향해 외쳤습니다. ꡒ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나자렛 예수는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되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주셨습니다ꡓ(사도 2, 22-24).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일체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바오로 사도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ꡒ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ꡓ(로마 8, 35-39).

우리 그리스도교는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참되고 보람있는 삶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주시는 분, 참다운 ꡒ길이요 진리요 생명ꡓ이심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분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 부활로 이어지는 길임을 깨닫고 그 길 전체를 걸어 가기로 한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길에 들어섰던 것입니다. ꡒ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ꡓ(로마 6, 3-4). 또한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인 <성체성사> 곧 미사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무한한 사랑의 신비를 우리 삶 속에 되살아나게 합니다. ꡒ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ꡓ(1고린 11, 26).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탄생 2천 주년을 기념하는 대희년을 바로 앞두고 있습니다. 이 대희년은 무엇보다도 사람이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ꡓ(1고린 2, 9)을 해주신 하느님의 이 위대한 능력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전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죽음과 그 그림자가 드리우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부활하신 예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참 평화와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 평화가 먼저 우리의 마음 속에 굳건히 자리잡을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와 함께 저는 끝으로 이렇게 기원합니다.

ꡒ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된 것입니다ꡓ(골로 3, 15).









21.     예수 부활 대축일 (다) 부활을 새롭게 체험하고 증거하는 삶

                                                        윤종국 신부


오늘은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부활 대축일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교파를 막론하고 다함께 경축하는 가장 큰 축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오직 부활축제만을 기념했으며, 이때부터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는 주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에 계속 경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사도들은 자신들의 신원을 ‘부활의 증인'이라고 할 만큼(사도 1,22), 예수의 부활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부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부활에 대한 신앙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독특하고도 중요한 신앙 내용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신앙 내용에 대해서 만일 누가 “부활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고 질문한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또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부활신앙의 중요성에 비해서는, 부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있지 않는 듯합니다.

오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해서, 부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실망과 좌절에서 깨어난 제자들


예수께서 붙잡히시어 처형당하신 후, 제자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기에 급하였고, 실제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본 것은, 몇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부터 제자들은 다시금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활동의 내용인즉 “죽은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의 진위를 가리기 이전에 한가지 확실한 것은, 제자들의 모습과 태도가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제자들이 겪었던 좌절과 실망,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먹구름을 한꺼번에 몰아내 버린 폭풍과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위험 인물을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르침은 전혀 새로운 힘을 가지고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니,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자기들의 스승 예수가 처형당하자, 자기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던 겁 많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성 토요일 밤, 즉 예수께서 돌무덤에 묻히신 그 날밤에, 무덤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밤은, 마치 출애굽기에 나오는 빠스카의 밤처럼, 죽음이 생명으로 바뀐 ‘대역전'의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그 대역전의 증거로 ‘빈 무덤'에 대한 기사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이상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 빈 무덤이라는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 유다인들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했고(마태 28,11-15),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부활사건은 예수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들을 구분해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죽음조차 극복할 수 있는 희망


부활은 ‘단절'을 전제로 합니다. 제자들이 겪은 단절은 바로 예수의 죽음이었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안일한 생각들, 그리고 편안하고 영예로운 전망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존 관념들은 깡그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부활은 ‘새로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러 곳에서 제자들에게 신비롭게 나타나셨다는 복음서의 증언은, 예수께서 마치 귀신이나 유령처럼 홀연히 출현했다가 다시 사라지는 식으로가 아니라, 이런 ‘새로움'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런 새로움에 대한 경험과, 새로움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부활은 ‘변화'입니다. 신약성서는 부활이 어떤 것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예수님의 부활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즉,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집트 제국의 힘없는 노예집단이었던 히브리 족속이 빠스카의 밤을 겪고 난 후, 이스라엘 백성으로 형성되었던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소수 추종자들의 무리였던 제자들이 부활을 체험하고, ‘사도들'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부활은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활동하실 때부터 지니고 계셨던 하느님의 뜻에 대한 믿음이었으며, 고난과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 확신이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줄만큼 강력한 희망이었고,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전파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매년 우리는 예수 부활 대축일을 기념하고 있고, 오늘이 바로 그 날입니다. 기념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이고,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일을 더 이상 과거의 망각 속에 묻어두지 않고, 다시 현실로 끌어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을 기념한다는 것은, 파괴적인 단절을 뛰어넘은 부활사건을, 제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그 강력한 힘을, 그리고 부활신앙으로 자리잡은 희망의 힘을, 이천여 년 전의 과거에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이 사건으로 다시 끌어내서 같은 체험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실현할 책임


성 토요일 부활성야의 전례는, 온통 새로운 변화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빛의 예식에서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건너가는 것을, 말씀의 전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넘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던 빠스카를, 성세 예절에서는 우리 자신이 세례 때 새로운 사람이 될 결심을 고백했던 사실을 다시 상기시킴으로써, 우리 자신이 다시금 새롭게 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세례를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나서, 그분과 하나가 된"(로마 6,5)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부활의 사건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고, 세례를 통해 체험한 부활사건은 매년 성 토요일의 성세 예절 때 반복됨으로써, 우리

에게 다시금 부활의 삶을 살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단절'물 전제로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현재 삶이 예수를 알기 전의 삶과 분명히 단절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옛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례받기 전의 삶이 세례받은 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예를 많이 보고, 또 스스로의 삶에서도 체험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예수 부활의 의미를 묽게 만들고 있으며, 부활신앙을 화석처럼, 박제처럼 생명력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태도는 우리 자신에게서 부활의 체험을 앗아가게 하는 것이며, 부활로 얻은 새로운 생명을 다시금 무력한 것으로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을 되돌릴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살고 전할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움과 변화를 위한 단절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통찰하고 고백하면,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직을 수행할 것인지 마음을 다잡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22.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공통)      선의 승리

                                                       함세웅 신부


교회가 권위 있게 우리에게 전하며 외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던 사도들이 체험한 바였고, 또 신앙의 여인들이 목격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을 믿고 또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무리가 피를 흘리면서도 증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걱정과 근심이 있는 우리에게, 어려운 사회에, 방향을 잃은 사회에 기쁨과 희망을 안겨 주는 힘찬 외침이기도 합니다.

 

그 기쁨은 내 마음 속에서 생동합니다. 부활하신 승리의 그리스도를 체험하였다는 기쁨, 악을 누르고 이길 수 있다는 선의 승리, 죽음을 물리치는 삶의 보증, 어두움과 썩음을 막는 빛과 소금의 구실이, 모든 의미를 새롭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야말로 부활의 기쁨을 받아야 합니다.

포기적이고 염세적인 이 사회에, 불신하고 불안한 이 현실에, 부정과 권력만이 지배하는 우리 주변에, 그래서 불평 불만, 원성만이 나오는 이 우리에게, 바로 부활의 승리와 기쁨이 더욱더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알려 주는 주님의 부활, 더욱더 착하고 의롭고 아름답게 형제적인 관계와 우애를 넓혀 주는 사랑의 가르침 때문에, 그 어떠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해결되지도 않는 현실 문제 앞에서, 부정과 악이 날뛰고 승리한 것같이 보이는 이 사회에서, 잔꾀를 부리며, 횡재하며 성공하는 그 무리 앞에서도 절대로 용기를 잃지 않고 좌절감을 갖지도 않습니다.

 

온 대지가 푸른 싹, 삶으로 격동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 마음이 부풀어오르지 않습니까? 그것은 정녕 삶의 누룩, 부활의 기운이 내 안에 움트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기도 합니다. 성세 성사로 씻기워진 나, 성체 성사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는 나, 나는 다시 뿌듯한 신앙의 기쁨과 부활의 승리를 담뿍 맛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웠던, 쓰라렸던 과거사도 돌이켜 보면,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나입니다. 그리고 어쨌든, 역사의 흐름에는 올바른 방향 제시가 항상 있었습니다 고통, 가난, 굶주림, 악이 많은 그만큼 역시 부활의 기쁨과 희망은 더 많이, 짙게 보장되었습니다. “죄악이 넘치는 그

곳에 하느님의 은총은 더 철철 넘쳐 흐른다"고 하신 사도 바울로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그것은 구체적으로 미사 성제에서 재현됩니다. 신앙으로 체험하고 행동으로 증거할 때가 바로 부활 축일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끈질긴 반복과 노력이 요구되며, 양심의 가르침을 따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고 증언하는 사람, 신앙인은 또 곧 용맹한 사람이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일치를 확신하면서, 이 확신의 무리들 모임이 바로 교회임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만민의 빛'인 예수님은, 이제 완성 단계에서 어두움을 제거하는 원천인 ‘구원의 빛'으로 나타나십니다. 부활 전야의 예전에서 바로 우리는 그 빛의 의미와 또 제대 옆에 놓여진 ‘부활초'의 상징인 사랑, 빛, 태움, 희생을 음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다'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모든 것, 우리의 신앙과 외침이 모두 헛것이었을 것이라는 사도의 가르침은 이 점을 명백하게 해 주셨습니다.

 

진정 우리, 신앙인이라면, 예수 부활이 1년에 한 번 지내는 축제, 으례 성당에서 듣는 것, 잊어 버릴만 할 때면 누가 지껄여 주는 것, 이런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바로 내 스스로가 그것을 믿고 체험하고 체험한 것을 다른 이에게 외칠 때, 예수 부활은 나의 부활이 되

는 것입니다.





  23.        주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31> (공통)           믿음과 불신

                                                    함세웅 신부


오늘은 부활 제 2주일로 그 전에는 ‘사백 주일'이라고 했었습니다. 부활주일에 새로 영세 입교한 교우들이 흰옷을 받아 입고 영혼이 깨끗하게 씻겨졌던 것을 상징한 것으로 1주일이 지난 오늘 그 횐옷을 갈아입는다는 뜻에서 그러한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당신은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불신과 고집에 찬 토마에게 하신 이 주님의 말씀은 불신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피부로 느껴야만 직성이 풀리고 눈으로 보고 감각하는 것만을 인식하는 현대인에게, 이보다 더 큰 책망의 말씀은 없을 것이며 ‘보이지 않는 사물을 확증'(히브리 11,1)해 주는 믿음의 세계로 눈을 돌린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축복받은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현대의 인간사회는(어느 시대, 사회도 그러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특히 현대사회는) 물질 만능주의, 감각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에, 표면에 나타나 있는 얄팍한 것만을 알고, 그 표지 밑에 잠재해 있는 진실된 내면적 가치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 직접 오관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에 대해서까지도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 말은 현대인들이 무수히 되풀이하는 말입니다. 아마 현대인처럼 이 말을 익숙한 말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역시, 인내로 또 자비로운 시선으로 현대인을 내려다보시며, 불신이 가져오는 비극과 불행이 얼마나 큰가를 알려 주시면서 피와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현대인의 불신이 가져온 비극과 불행은 여기에서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습니다. 돈과 권력의 가치를, 즉 눈으로 보고 직접 누릴 수 있는 감각적인 권력과 쾌락을 너무나도 숭상한 나머지, 그와 반비례해서 인간의 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인간 이하로 가치가 추락했을 때,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겠으며, 이보다 더 슬픈 비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 결과가 오늘날과 같은 사회 풍조를 자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신문 3면을 메꾸는 끔찍한 기사만 보아도 알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율법을, 인간 이상으로 내세우는 것도 역시 하나의 악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당시에 유태인들의 바리사이 파가, 바로 그러한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주님이 가장 미워하시던 것도 역시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율법도 인간의 행복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기쁨과 감사를 느끼는 자는 믿음 안에 있는 자요, 교회의 품안에서 평온함을 얻는 자는 사랑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느님 나라를 획득하는 길이며, 사랑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고 확장시키는 일입니다. 






24.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부활하신 예수

                           - 김몽은 신부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달음질을 하여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가서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곧 떠나 무덤으로 향하였다. 두 사람이 같이 달음질쳐 갔지만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곧 뒤따라 온 시몬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 가 그도 역시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수의와 함께 흩어져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그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중추를 이루는 대사건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에 대한 신앙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의 범주에 속해 있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Ⅰ고린 15,17)


그러나 무덤에 찾아간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 같다. “그 사도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 날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부활에 대한 영신적 준비가 얼마나 부족했는지, 그리고 이 일이 믿기가 얼마나 어렵고 시간이 걸렸는지 복음서에 잘 나타나 있다.


주님께서 그렇게 여러번 되풀이해서 말씀하셨는데도, 그 깊은 신비와 감동, 믿음의 기쁨이 그들의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었다.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실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그분은 죽음에 속해 있지 않고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을 믿는 사람도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더 알아듣기 힘든 믿음일지도 모른다. 현세적인 것에만 혈안되어 살고 있는 현대인들, 특히 자칭 지성인들이라 자처하는 자들에게는 더욱 더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가소롭게 여기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으로 가소로운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그것이 아니라, 저 세상의 일을 이 세상의 척도로 측정하려는 태도가 가소로운 것이며,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두뇌로 생각하려는 것이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인간적인 면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신비이다. 따라서 부활신앙은, 외부적인 것, 낮은 것, 세속적인 것, 인간적인 욕망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깊은 내면의 영혼에 성령의 감도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인간의 차원을 초월한 드높은 하느님의 차원으로 승화된 영혼만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하늘나라의 특권이다.


이 부활신앙의 특권은, 추악한 인간이 찬란한 빛을 발하는 고상한 인격자로 변모하는 신앙이요, 탐욕스런 이기주의자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이타주의자가 되어 거룩한 하느님나라의 시민이 되는 믿음이다. 그것은 곧 새생명의 시작이요, 썩을 육체가 불사의 옷으로 갈아 입음을 뜻한다. 또한 그것은 참 사랑과 참 기쁨과 참 평화를 가져다 주며,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늘나라에 속한 자로서 살아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 두십시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 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박 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 할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Ⅰ고린 15,50-53) 이어서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하고 성서의 말씀을 인용한다.


참으로 부활신앙은 영원한 생명의 강에 뿌리를 뻗고 있는 나무와도 같다.



25.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부활하신 예수



여러분도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당신이 돌아가신후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우리에게 하신 이 말씀은 우리들 개개인이 살지 않으면 않되는 테마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오주(吾主) 예수 확실히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금요일 저녁 해가 지기 전에 무덤에 묻히시고, 다음 날 새벽에 다시 살아나 부활하셨다. 이러한 부활의 의미는 결국 오주 예수 당신이 먼저 부활하시고, 우리에게 너희도 부활하리라는 것을 약속하시면서 한편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드리고 죽음의 과제를 풀어주신 사건이라는 데 있다.


성서에 나타난 또 다른 부활 사건을 보자.

한번은 오주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친구 나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자 곧 그가 살던 곳으로 가셨다. 슬픔에 잠긴 나자로의 여동생 말따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가시던 도중에 스승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나온 자매를 만나셨다. “주여, 당신이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멀리 계셨기 때문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슬픔에 잠겨 하소연하는 자매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위로하시면서 “내가 부활시킬 터이니 너희들은 울지 말아라. 너희는 내 말을 정말 믿느냐?”고 하셨다.


그러자 말따와 마리아는 “스승의 말씀을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하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말따와 마리아의 대답은 무슨 뜻이냐 하면, “스승이 말씀하시면, 어른이 말씀하시면 듣겠습니다.”라는 말이었다. 자매는 부활의 깊은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오주 예수 마리아에게 “어디다가 네 오라버니를 묻었느냐?”고 물으시자 마리아는 오라비를 묻은 장소를 가르쳐 드렸다. “가서 그 무덤에 들어가보자. 내가 그를 부활시키리라”하시자, 마리아 막달라는 예수님을 붙잡았다.


“벌써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송장 썪는 냄새가 날텐데요. 주님 가시지 마십시오.”라고 그러자 오주 예수 하시는 말씀이 “마리아야, 너는 조금 전에 내가 한말을 그대로 믿는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 네 죽은 오빠를 다시 살리겠다고 하는데 너는 못믿겠다는 말이냐?” 막달라 마리아가 스승의 말씀을 들을 때는 그저 “언젠가 죽은 사람이 한번은 살아나겠지”하는 이런 어렴풋한 신앙이었다. 그런데 당장 가서 살려내겠다 하시니 도대체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러기에 죽은지 벌써 사흘이 되었고, 가보았자 시체 썪는 냄새만 날것이니 아예 그만두자는 뜻이겠다.


이런 것이 아마 인간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오주 예수는 실제로 나자로를 부활시켰다.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 사흘이나 되는 나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당신 부활의 예표였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이라 해서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대답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거듭 말하거니와 너희 자신은 지금 얼마만큼 이것을 믿고 있는가? 어느 정도 믿고 있느냐? 이런 논제를 심각히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이 몸이 죽어서 땅에 묻혔다가 그 어느 때에 한번 이 육신이 살아나서 내 영혼과 합한다는 이 부활의 도리를 정말 믿느냐 안 믿느냐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러나 나 이제 담대히 말하거니와 신앙인이 부활 도리를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느냐? 사람은 영혼과 육신이 합해진 존재이며 사람은 천사가 아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이 합해서 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영혼은 존속한다 하더라도, 살기를 계속한다 하더라도 육신과 합하기 전에는 영혼만 살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과 육신이 합해져야만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육신 없는 인간이 완전한 인간일 것이며, 그런 인간이 누리는 행복인들 완전한 것이겠는가? 이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산다고들 말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물질에 구애를 받지 않고 순전히 이성으로써만 살 수 있다는 것이리라. 과연 그렇게 될 수 있느냐? 마치 예로니모 성인 모양으로 광야에 가서 신앙으로써만 살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예로니모 성인 역시 겉을 보면 즐거움을 누렸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맛보았다.


그도 역시 추운 것을 알았고, 더운 것을 알았으며, 그도 역시 거친 것을 아는 한 인간이었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이 같이 합해서 살지 않으면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일단 사람이 죽으면 그 육체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해체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혼만이 홀로 살아서 완전한 한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육신을 떠난 인간이 천당에 가서라도 육신이 맛볼 수 있는 음식이 그리울 것이고,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꽃이 복 싶을 것이고, 육신을 떠난 영혼도 이 세상에서 제가 사랑하던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고 싶을 것이다. 육신을 떠난 그 영혼도 역시 육신이 있어야 그 육신이 감지하는 소위 즐거움이라는 것을 맛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인간은 마땅히 그런 복락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인간에게 맺혀진 가장 큰 마음의 사랑이 있다면 아마도 어머니의 사랑일 것이다. 그런데 어머님이 보싶다고 하자. 이때 우리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혼만을 보고자 하는가, 아니면 영혼 육신이 결합된 어머니를 보고자 하는가? 아마도 영혼 육신이 결합된 어머님을 뵈옵기가 우리의 희망이요 기원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신앙인이 아니다. 해체되었던 육신이, 죽었던 육신이 그 언젠가 한번 살아서 또 다시 영혼과 합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믿음이 다 헛되다고 바오로 사도께서도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거니와 인간 생활의 목적은 행복이다. 그런데 행복이란 그 자체는 영혼과 육신이 떨어져서는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더불어서 한 사람의 인간성이라는 것이, 달리 말하자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이 영혼에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혼과 육신이 합한 소위 완전한 인간을 두고 존엄성을 운운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천주교는 어떤 종교인가? 희망을 가진 종교이다. 그 희망은 또한 어떤 것인가? 영혼과 육신이 합체된 인간으로서 영원히 사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된다. 즉 우리가 이 부활의 도리를 믿느냐 안믿느냐가 신앙의 관건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부활의 도리는 어디에 깊이 뿌리를 박았느냐 하면 인간 자체에, 영혼과 육신이 합해 있는 인간 자체에 뿌리 박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부활사건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의 상징이다”하셨다. 삶과 죽음 또는 부활을 내가 주장하는 바이며, 이 세상에서의 33년간의 삶을 통해서 내 몸으로써 이것을 내가 증명해주고, 이것을 너희에게 알려야겠다는 것이 주님의 일생이었다. 오직 예수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짚은 도리이다. 깊고 오묘하며 알아듣기 어려운 도리이다. 그야말로 진정으로 믿기가 어려운 도리이다.


마리아 막달레나 모양으로, 누가 우리에게 물었다면, 즉 “부활의 도리를 믿느냐? 혹은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얼른 “믿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며, 그것도 정말 확신에 찬 정신에서 우러나오고 우리 마음에 깊이 사무치는 대답이 되어야 한다. 마리아 막달레나 모양으로 금방 믿는다고 해놓고, “스승의 말씀이야 우리가 다 믿어야죠” 해놓고 이제 주님께서 무덤에 가자니까 냄새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겠느냐는 의구심의 표현이다. 철의 장막도 있다지만 죽음의 장막은 과연 절대적인가보다.


사람이 일단 죽은 후에 “내 죽어서 보니 모든 일이 이렇고 저렇더라”하는 사후 세계의 체험을 전해주는 예가 인류 역사에 없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던 아버지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에 아들 딸에게 “나 죽어보니까 이렇고 저렇더라”하는 말씀이 없었다. 한번 죽은 후에 죽음의 장막이 일단 내리면 그 뒤 정경은 도저히 인간 사회에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되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인류의 체험이다.


인류 역사에도 있지 않았고, 시간의 제한을 넘어서며, 내 몸이 죽어 그 뼈가 땅에 묻힌지 십년, 백년, 천년, 만년이든 한번은 무사히 살아서 내가 영속하는 영혼과 합한다는 것을 믿기가 실제로 어려운 것이다. 이것을 정말 믿고 이 신앙을 따라 산다면 많은 면에서 생각하는 점과 행동하는 점이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반신반의 하기도 하고, 그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스승의 말씀이니까 부활한다는 것을 믿었다가 또 얼른 인간의 물질세계로 되돌아와서 부활을 믿기가 어렵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흔히 당황할 수 있다는 점이 인간의 오늘날까지의 대부분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너희에게 묻노니, 이 부활축일을 맞으면서 이 기회에 스스로 네 마음에 물어보라, 과연 나는 부활을 믿느냐? 부활축일은 즐거움의 축일이라 하여 알렐루야를 노래하며 지낸다. 물론 돌아가셨던 그리스도 부활하셨으니 즐거움의 알렐루야를 부르는 것이 당연하리라. 그러나 정작 그들이 부활을 진정으로 믿느냐 안믿느냐 여기에 바오로 사도 말씀대로 우리 신앙의 기본이 있다는 것이다. 이 기본 자체를 너희가 믿느냐 안믿느냐, 여기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죽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말씀그대로 진리의 길을 따라 갈 것이다. 부활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에게는 모든 영광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확실히 깨달아서 실천에 옮긴 예가 무수히 많다. 새남터에서 쓰러져간 우리 선조 치명자들은 어떠했던가.


옥에서 나와 이제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흔연히 또 즐겁게 알렐루야를 노래부르며 걸어갔고, 목에 칼을 받아 죽을 때에 조금도 굴함이 없이 흔연히 아까운 생명을 희생했던 정신이 어디에서 솟아났겠는가. 결국 그들은 내 육신이 당장 칼에 맞아 죽어도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 어느 때 그리스도 미리 언약하신 그 날에 내 육신이 살아나서 내 영혼과 합하리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풀이해서 말하거니와 부활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기초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리스도의 제자 개개인의 생활의 기반은 부활신앙에 달려 있다. 이 부활도리를 믿는 것이 어느만큼 강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맞는 자세도 달라진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우리 육신은 영혼과 다시 만날 수 있다. 내가 너희 얼굴을 보고 싶고 너희가 또한 내 얼굴을 보고 싶은 것처럼, 영혼과 육신 역시 서로 보고 싶다는 것이 인간이다. 영혼과 육신이 자유로이 결속되어 있을 것이고 이것이 완성되는 그때만이 하나의 안간으로서 참다운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26.                       부활 대축일 마태 28,1-10 (가) 갈릴래아로 먼저 가시리라

                                    - 김창석신부



요즘 사람들은 부활절보다 성탄절을 더 성대하게 지내는 경향이 있다. 성탄절은 연말의 들뜬 분위기와 어울려 더 큰 흥분을 자아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부활절이 더 중요한 날이다. 왜냐하면 고린토 전서 15장 14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교 자체가 헛된 것이 되며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사명은 스승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일이었다. ‘사도’란 말 자체가 부활의 증인이란 뜻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스승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고 그의 빈 무덤도 보았으니까 문제없이 증인 노릇을 수 있었겠지만,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천 년이나 된다. 그리므로 이제 우리 크리스찬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해야 할차례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증인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 노릇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스스로가 부활하는 것이다.


과거에 그리스도가 부활했으니까 우리 사람들도 미래에 닥쳐 올 최후의 심판 때 모두 부활할 것이라는 말은 요즘 현대 사람들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 우리 크리스찬들이 부활하는 것만이 그리스도 부활의 가장 힘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스스로가 부활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우리 안의 신(神)이, 즉 하느님이 부활해야 한다는 말이다.

과거에 신학생이었던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주장했다. 요즘에는 신학자들 중에서도 신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신이 ‘밥’을 주지 않고 신을 믿는 사람들은 더 못 사니 그런 신은 죽었다고 주장한다.


신은 조국의 근대화와 수출 증대에 도움이 안 되니 죽었다는 말이다. 신은 호화 주택이나 고급 승용차를 주니 않으니 죽었다는 말이다.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병을 고쳐 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신은 아무 반응도 없으니 죽었다는 말이다.

왜 하필이면 내 외아들을 죽게 하고, 왜 하필 나만이 과부가 되어야 하나 항의해도 신은 아무 반응도 없으니 죽었다는 말이다. 신은 거만하고,  모든 좋은 신의 은혜이고 나쁜 것은 인간의 탓이라고 말할 정도로 무책임하니, 그런 신은 죽었다는 말이다.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신은 마음이 약한 노인들이나 부녀자들이 믿는 것이지 달나라에 가는 이 시대에 신을 믿는 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권력이 신이요, 돈이 신이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기왕에 우리가 믿던 신은 죽었다는 말이다.

왜 신이 죽었다고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그들이 신을 부인하는 것은, 신을 믿는 사람들이 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신을 믿는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프로이트의 제자 에리히 프롬은 “19세기에는 신이 죽었다고 했는데 20세기에는 인간이 죽었다”고 표현했다. 신이 부활하려면 먼저 신을 믿는 사람들, 신을 믿는 내가 부활해야 한다.

나 스스로가 부활해야 한다는 뜻은 신이 지금 내 안에 부활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신이 부활해야 하나? 십자가를 보라.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신에게 그 십자가를 피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신에게 짓밟히고 십자가의 사형수로 죽어간다. 그러한 그는 신의 아들이었다.


이러한 신이 내 안에서 부활해야 한다. 이 말뜻은 인간 앞에 무릎을 꿇고, 인간의 발을 씻어 주고 입맞추는 겸손한 신이 부활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가난할 때 우리를 고쳐주기보다는 오히려 같이 아파하는 신이 부활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죽게 되면 우리를 다시 살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와 같이 죽어 주는 신이 부활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 외아들이 죽으면 당신의 외아들도 죽게 하는 신이 부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신은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이다. 바로 내가 그러한 신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그러한 나 자신이 부활해야 한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다. 예수 부활 주일 제단 위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다. 예수가 부활했으면, 그 십자가는 없어졌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왜 부활 제단 위에 십자가가 남아 있는가? 십자가 없는, 즉 고통 없는 부활이란 생각할 수도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따지고 보면 형틀이다. 어리석음과 수치와 모순의 형틀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있을 수 없다. 이 십자가는 우리가 매일 당하는 고통이다. 누구나 다 당하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이 고통을, 이 십자가를 딛고 일어서는 것이 부활이다. 고통이 끝이 아니라 고통 후에 기쁨이 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부활이다. 원망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부활이다. 원망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부활의 신앙이다. 불상이나 성모상 앞에서 고통을 없애 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기복 신앙이지 부활의 신앙은 아니다.

마침내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고, 죽는 날이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참된 생일이라는 사실을 믿고 증거하는 것이 현재의 부활이다.


남을 위하여, 특히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고 억압받고 정의를 위해 외치다가 감옥에 갇힌 이들의 십자가를 우리기 같이 짊어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별수 없이 부활의 증인은커녕 물질 만능주의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27.       예수 부활 대축일 <마태 28,1-10. 요한 20,1-9>  기쁨 그리고 빈 무덤

                                                      김현준 신부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시편 117,24)

 

부활은 이 세상의 어떤 사건보다도 큰 사건이며, 어떤 기쁨보다도 큰 기쁨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로써 이 세상과 인류의 운명이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광명으로, 죄의 사슬에서 자유와 해방으로, 죽음에서 구원으로 인류의 모습이 새로워졌기 때문이다,

참으로 부활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역사하심이기에, 부활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뿌리이며 핵심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부활하심의 징표로서 “빈무덤"(요한 20,1)을 보여주셨다.

 

오늘 복음에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 눈물과 한숨 속에서 밤을 새우고 ‘살아계셨을 때 좀더 그분을․..'하는 후회와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희망으로 그분의 시신에 바를 향료를 들고 무덤으로 향했다, 그분과 함께 한 지난 시간과 일들, 이제는 추억이 된 그것들로 인해, 지난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서둘러 무덤으로 향했다.

어찌된 일일까? 무덤은 비어 있었고 수의는 흩어져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누가 주님을 꺼내갔구나!"(요한 20,2) 하는 말과, 지난 밤을 여기서 새우지 못한 후회감이 밀려왔다. 그때였다. “마리아!"(요한 20,16) 하는 예수님의 음성이 마리아의 혼을 일깨웠고 “라뽀니!"하고 마리아의 입이 열렸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내 형제들에게 가서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마태 28,10) 하시곤 옛날처럼 걸어가셨다.


부활은 믿음 ․ 희망의 뿌리


  그렇다. 예수님의 부활로써 이 세상과 인류는 의미를 되찾았고, 믿음과 희망을 튼튼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희망도 부질없는 소리이며, 사랑도 무의미해진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부질없는 헛소리"(루가 24,12)나 “시체를 훔쳐갔다"(마태 28,13)고 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빈무덤은 예수님의 수난에서 영광의 부활에 이르는 징표이다. 그래서 빈무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죽음이 더 이상 무덤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며, 무덤이 종착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을 비워서(필립 2,7)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비워 이웃을 위하는 삶을 살으신 예수에게, 아버지 하느님은 그분이 부활의 영광 속에 있음을 빈무덤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요, 첫째가 말째 되고 말째는 첫째 되는,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당신 진리를 내보이는 방식대로 당신 부활도 빈무덤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을 비워 빈무덤화하는 사람들이다. 그 비워둔 마음 속에 자기 자신을 비워 세상을 꽉 채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죄가 흘러들어 심장이 따뜻해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친절하고 겸손하다. 보통 사람들은 죽는 것이 아주 죽는 것이고, 비우는 것이 빈털터리 되는 것이라, 생각하여 죽기를 두려워하고, 비우기를 꺼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자신을 비워 빈무덤화하는 사람들이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용서와 반성을 통해 과거를 비우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보통 마찰 속에 어두웠던, 서운했던, 한스러웠던, 상처 입었던 과거의 기억들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살아간다. 때로는 아니 필요할 때마다 그 기억들을 “꺼내 가지고"(요한 20,2) 상대방을 비난하고 현재를 어렵게 한다, 그래서 서로의 사이가 멀어지고 절망할 때가 많다.                


과거사 아닌 현재 진행형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꺼내 갔구나"하는 과거 사실에서 부활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는 현재의 자리에서 부활을 체험하였다. 예수님은 죽은 라자로를 부활시키면서 “살아서 믿는 사람은" 하시며, 부활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과 연결시키어 현재화하신다. 그러하기에 과거의 사실을 꺼내어 상처 입히거나 잘 살려는 결심에 발목을 걸지 않고, 용서와 반성을 통해 과거를 비우고, 과거를 현재화시키는 것이 부활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부활 대축일, 우리 모두 무덤에서 부활하심을 상징하는 부활 달걀을 이웃과 기쁘게 나누며, 그 이웃과의 잘못된 과거를 지우자.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듯이 우리의 과거를 비울수록 현재 우리의 모습은 새롭게 부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은총인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28.                    부활 대축일 마르코 16,1-8 (나)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오늘은 온 세상에 위대한 기쁨을 가져다 준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온 세계의 사람들이 부활을 축하하며 새 옷을 갈아입습니다.

2000년 전 성 바오로 시대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중으로부터 부활하심을 축하하여 새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웃음을 머금고 새 음식과 술로 잔치하였습니다.


성 바오로는 “좋다. 너희 구원의 날을 마음껏 축하하며 잔치하라. 그러나 올바르게, 그리스도교적인 방식으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려면 죄와 악의와 악행을 버려야 하며, 이 축하를 재미로만 여기며 명백한 죄악 상태에 있는 사람은 참가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성 바오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해 성실하고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실로 축하하기 위해서는 묵은 죄의 빵껍질 즉, 죄를 던져 버리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빵 즉, 성실함과 진실함의 빵을 먹기 시작해야 한다고 바오로는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기원 1세기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진실과 성실에 관해 천주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1970년의 부활절에도 천주께서는 그와 같은 것을 요구하고 계실까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새 옷과 좋은 음식으로 부활을 축하하면서도 그 핵심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성도들과 교유(交遊)하기는 쉽지만 아직도 자신의 죄에 공공연한 혹은 감추어진 죄의 생활에 젖어 있으면서 부활의 의의를 진실로 축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 인사를 하고 입맞춤을 하고 나서 행동으로 배반하는 것이 그리스도 시대의 위선이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감사하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내에서의 부정(不正)과 불의(不義) 등 죄악을 못 본 체하는 것이 바오로 시대의 위선이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의 부활절인 오늘 그리스도께서 알렐루야를 노래부르면서도 악의와 악행에 머물러 있는 것도 위선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부활날 여러분의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 볼 때 거기서 여러분의 그리스도교적 생활에 어떤 불성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아마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하리라고 믿습니다. 사제인 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대해 충분한 성실성과 진실성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천주께서 오늘 성 바오로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잔치하되, 묵은 누룩과 악의와 악행의 누룩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성실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빵으로 할지니라”고. 오늘 미사 중에 천주께서 여러분에게 진실성과 싱실성을 고취시키실 때 천주께 대답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신경에서 신앙을 고백할 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음을 믿나이다”라는 대목을 각별한 정성을 가지고 외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여러분에게도 참 부활이 되도록 하십시오. 부활은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없이하고 여러분에게 진리와 그리스도교적 생명의 의미를 보여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중으로부터 부활하셨음을 믿는다고 여러분은 수천 번 신경을 외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많이 왼 신경에 대해 성실하고자 한다면 오늘 미사 때에는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신경을 외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에 성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사제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 바오로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리스도 부활하시지 않으셨으면 너희 신앙은 헛된 것이니라”고.


여러분은 성실한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오늘 이 미사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죄와 나의 죄와 세상의 죄를 위해 지금 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 미사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인 새로운 빵을 먹음으로써, 묵은 빵껍질인 죄를 던져 버림으로써 여러분의 성실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던져 버려야 할 죄의 껍질은 “오류와 허위”에 대한 묵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짓된 양심이나 게으른 양심에 속으면서 부활을 잘못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내가 옳다고,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것은 옳고 진실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인의 양심이 정당하고 진실하고 성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최고의 권위로부터 배우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면서, 신앙과 윤리 문제에 있어서 항상 진리를 추구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저 유행과 소문과 의견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른이 된 사람으로서,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오늘 부활절을 맞아 영세 서원을 새롭게 합니다. “성실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잔치하라”는 성 바오로의 유명한 말씀 속에는 이러한 서원 재신(再新)과 부활의 기쁨이 반반씩 들어 있습니다.




29.               부활 대축일 마르코 16,1-8 (나)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거룩하다 부활이여 기쁘도다 알렐루야 예수 부활 아니시면 구속사업 헛되도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계만방에 울려퍼지는 부활의 찬가를 들으며 마음으로부터 부활의 영광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영광과 기쁨은 어느 특정 인물이나 개인의 기쁨만이 아니요, 전 인류의 기쁨이요 만백성의 기쁨이며 인류역사가 시작한 이후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모든 인생들이 마땅히 누리고 만끽해야 할 영광이요, 기쁨이기에 더 더욱 그 신비의 비중이 큰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복과 영생에 관한 것이요 우리 인간의 최대 욕망인 영원 무궁한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기에 그 신비를 잠시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 인간이면 누구나 한 번은 꼭 맞이해야 하는 죽음, 그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온 세상과 인간의 역사를 깜짝 놀라게 한 기이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우리 인간이 믿지 않으면 안될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활과 규범과 인생의 최종 목적과 갈 길을 찾아 얻으며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와도 같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 함수를 속시원히 풀 수 있는 성서! 이를 일컬어 인류의 서적이라고도 하며 또한 그 역사성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멀지도 않은 2000여년전의 사실! 그 성서의 구구절절이 이어지는 부활의 역사성은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16장 1절부터 12절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이런 증언이 있습니다. “겁내지 마시오. 당신들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보시오,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입니다...” 성서의 역사성을 인정한다면 이 내용 역시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 그리스도의 부활은 멸망과 구원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구원에로의 참된 길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원과 멸망의 이정표인 것입니다.


인류의 죄악으로 죽음을 당해야 하는 인간! 죽어 땅에 묻힘으로 썩어야 하는 인간의 육체, 그래서 인간은 멸망의 심연 속에서 울고 통곡해야 했으며, 슬픔과 괴로움의 역사를 엮어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정녀 몸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세상에 오신 제2의 아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아닌 사랑 때문에, 인류에 대한 당신 사랑 때문에 돌아가셨다가 당신 예언대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멸망과 구원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방향을 똑똑히 지시해 주셨고, 실망과 괴로움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다 주셨습니다. 빵의 기적(마태오 14.13 ; 마르코 6.30) ; 나병환자의 치유(마태오 8.1 ; 마르코 1.40) ; 소경의 완치(마르코 8.23 ; 루가 18.35) ; 반신불수의 완치(마태오 9.1)등 무수한 기적과 영적으로써 인간의 굳은 마음을 풀어주시고 차가와진 마음을 뜨겁게 해주시려 무진 애를 쓰셨지만 사리사욕과 세속에 굳어져 무거워진 인간의 마음은 실감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신과 의혹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랑에 굴복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불쌍하고 가련한 인간들을 그대로 보실 수만 없으셨기에 사랑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적으로 우리 마음에 불을 놓으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렇게 기재했습니다. “당신들은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시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받을 것입니다”(16.15).


셋째 : 고도로 발달된 현대 인간의 문화 문명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구원에로의 참된 길을 가르쳐 주는 믿는 마음, 즉 신앙심을 앗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노예, 금전의 노예가 된 현대 인간의 오만 속에 신앙의 씨는 시들어가고 불신의 씨앗이 싹트고 있습니다.

이런 현대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요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의 신비야말로 신비답게 전개되어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우리의 지식과 지력을 정복하여 믿음을 뒷받침해 주고 부활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전능을 드러내 주고 있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은 눈물의 골짜기, 멸망의 깊은 구렁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영광에로의 희망과 기쁨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던들 구속사업도 헛되었을 것이며 우리의 희망도 갈기갈기 찢기고 말았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의 이 즐거움과 기쁨을 세계 만방에 떨쳐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최종 목적을 여기에서 찾았고, 우리의 행복과 영생을 부활에서 얻었으며 전인류의 구원을 이제는 발견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무한한 영광과 찬미를 드리며, 알렐루야 소리높여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30.     부활 대축일 루가 24,1-12 (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이미 굴러나

                                         - 김정진신부



“나는 부활이며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입니다.”(요한 11:26).

알렐루야 알렐루야! 신자 여러분,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이며 경사로운 날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속죄하시기 위하여 제물로 희생되시어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죄악과 죽음은 멀리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의 나라가 펼쳐지고 새로운 천지가 전개됩니다. 이 날은 정녕 하느님께서 주신 날이니 우리는 모두 기뻐하며 용약하며 경축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바탕이요 핵심이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신앙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헛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히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우리의 부활도 보장되는 것이며 부활과 결부되는 형극의 길, 고통과 십자가의 길에서 헤매이는 우리에게 필연코 커다란 희망과 행복 그리고 평화의 나라를 굳게 약속해 주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침에는 방방곡곡에서 부활의 종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치는 가운데 수많은 선남 선녀들이 경건히 합장하고 우리 주님의 부활을 마음껏 구가하며 경축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에 본당 신자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오늘의 부활절을 가장 기쁘고 성스럽게 지내기 위하여 마음의 준비와 정신적인 가다듬음을 게을리 하지 않은 점으로 오늘의 기쁨과 환희는 최절정에 달하리라 생각합니다.


신자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는 정녕 죽으셨고 또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정녕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공적 장소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미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시체를 무덤에 묻기 전에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할 책임을 진 한 병사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 때 거기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사흘만에 살아 있는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으며 또 오백명이 넘는 교우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Ⅰ고린 15:5-6).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들이 본 것을 증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이러한 사살을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기꺼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확신을 지니고 설교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문명 세계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불과 삼세기 동안에 수 백만의 신자들이 부활에 대한 신앙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목숨을 바치는 순교의 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선포하여 눈부신 발전을 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단지 이쳔년전에 있었던 하나의 역사의 사건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어 바로 현재 이 시간에 우리 가운데, 우리 교회 안에 또한 세계와 그 역사 속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믿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 각 개인 안에, 각 가정에 살아계시며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우리 가정을 성화시키시며 우리의 구원을 가져오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참뜻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에로 소생하는 것이며 새 생활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 생활양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미신자들의 생활양식이요, 둘째는 이름 뿐인 신자들의 생활양식이며, 셋째는 진실한 신자들의 생활양식입니다. 첫째 미신자들은 너무나 속이 텅 빈 생활을 하고 있으며 마치 허공에서 행복을 미친 듯이 찾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금전에서, 세도에서, 오락에서, 때로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해를 끼치는 자극성에서, 하찮은 기계장치와 물건에서, 보잘것없는 경쟁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생활은 만족스럽지 않고 죽음은 생각도 하기 싫을 정도로 무섭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이 진정 부활하여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다음 이름뿐인 신자들은 하느님과 동시에 금전을 섬기려고 하고 이 세상 것도 갖고 또 하늘나라도 차지하려고 하며 십자가는 멀리하면서 영광의 관은 얻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죄악 중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편한 대로 이따금 교회에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자기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이들은 오늘 영신의 부활을 이룩하며 새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실한 신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스럽게 부활하려면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부활한 백성이 되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에 부활한 백성임을 언제까지나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31.                 부활대축일 요한 20,1-9      부활하신 예수

                                         최재용 신부



무덤이 비었고 영웅은 살아났습니다.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마르코 16, 6) 오늘 이 중대한 소식은 전세계 방방 곡곡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인간의 중대사의 해결을 말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인류 역사의 큰 신비를 깨닫고 인간 삶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성화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면 이는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드러낸 것이며 우리 또한 영원한 삶을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느님의 존재가 증명되었고 우리의 인생가치가 영원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가르침이 헛된 것이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Ⅰ고린 15,14). 고린토 신자들에게 엄숙히 선언하신 사도 바울로의 이 말씀은 오늘에 와서도 중대하며 크나큰 위로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긴 생명의 승리 생명과 죽음의 싸움 그리스도께서 고통과 죄악을 쳐이기신 후에도 또 쳐이기셔야 할 마지막 적인 이 죽음 그러나 모든 기적 중에 가장 크고 가장 결정적인 기적 즉 부활로서 그 죽음을 쳐이겨 내셨습니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 ”(Ⅰ고린 15,55). 이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가기 위한 한 단계요 과정일 뿐입니다.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 산 이와 죽은 모든 이가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죽은 자들의 시체가 하나의 높은 피라밋을 이룬다 해도 그 봉우리는 부활한 자의 깃발이 힘차게 나부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잇고 예수님과 함께 나도 살아 있습니다.” 어둠을 이긴 빛의 승리가 찬연히 빛나고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이 승리를 한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 보시오. 사흘 안으로 내가 다시 세우겠소.”(요한 2,19) 그리스도는 이 믿음 속에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부활이며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이제 모든 고통과 수난 속에 빛이 비쳤습니다. 그 고통은 고통으로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영원한 삶의 필요한 단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세상사 모든 괴로움을 그리스도가 값있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 삶의 가치와 고통과 미래의 의의가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이 삶의 고통의 의의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요한 12,25)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미움을 이긴 사랑의 승리, 오늘 승리의 날 예수 부활은 승리의 경축입니다.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루가 23,34) 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이겠습니까? 이 큰사랑으로 예수님을 잡아죽인 유대인들의 그 증오는 그로써 끝을 맺고 이 증오는 사랑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제는 사랑의 개선가만이 울려질 뿐입니다. 이 사랑의 불은 벌써 힘차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무덤을 찾던 제자들은 그 무덤에서 시체가 아닌 위대한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매를 맞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음을 당하신 후 살아 나오신 예수님의 그 음침한 무덤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사랑의 우물이 되었습니다.


“내게는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내게는 이득이 됩니다. 나의 희망은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필립비 1,21-23). 이로써 인간의 최대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나왔습니다. 당신은 개선하신 왕이시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활하신 예수여 당신은 생명과 죽음의 주권자 되시니 만물이 당신께 환호성을 올리나이다.








32.                   예수 부활 대축일 (나해)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10,34a.37~43 (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제2독서 골로 3,1~4 (그리스도께서 천상에 계시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 하십시오) 

복 음 요한 20,1~9 (예수께서는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역사를 두 쪽으로 가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 오시기 이전의 시대를 B.C.(BEFORE CHRIST)라 하고 이후의 시대를 A.D.(ANNO DOMINE : 주님의 해)라 합니다. 그것은 역사뿐만이 아닙니다. 인류의 삶 전체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위대한 힘이 바로 당신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새로운 탄생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인해 세상은 진정 다시 태어났으며 모순과 악의 세계에서 진리와 은총의 세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실로 새로운 시대에 들어선 것이며 어둠과 모순 속에 묻혔던 세상의 수수께끼들은 다 풀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세상은 사실 모순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 착한 이들이 자주 고통 을 받으며 왜 악한 이들이 자주 떵떵거리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더구나 인생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으며 '죽음' 이라는 무서운 세력 앞에서 인류는 참으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무너졌으며 세상의 어떤 생명도 이 두려운 존재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죽음은 실로 세상의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와 같은 세상의 모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친히 죽음 속으로 들어가시어 그 세력을 꺾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죽음은 이제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은총의 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당신의 부활로써 세상을 건지셨습니다. 죽음에서 건지셨고 죄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일행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을 때 예수의 시체는 없고 천사가 거기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는 질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 천사가 말합니다. “겁내지 말라.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나 여자들은 무서워 벌벌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쳤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도대체 사흘 동안 완전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고 인류를 깜짝 놀라게 했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예수의 부활과 그의 놀라운 행적에 대한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래 그는 무식하고 믿음이 약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사회 교육을 제대로 받은 자도 아니었고 예수님 밑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쌓은 자도 아니었습니다.

더더구나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도 아니었으며 자기 사상을 논리적으로 전개시킬 수 있는 수준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무식한 베드로가 놀라운 감화력을 가지고 백성에게 전도하며 그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제자들의 증언을 믿고 우리도 그 놀라운 사건을 바로 내 것으로 받아들여 삶에 실천함으로써 세상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부활의 삶이요 또한 의무요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이미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믿어도 어정쩡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성당에 다녀도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갈등과 착각 속에서 고민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자들은 오로지 현실만을 중요시합니다. 지금 당장 잘먹고 잘사는 것에 축복의 기준을 맞춥니다. 그러니까 믿음 속에서 회의만을 갖게 됩니다. 신앙이 그렇게 된다면 비극입니다.


어떤 형제가 세례받은지 5년이 되었으나 거의 냉담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는 물론 기도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앙을 성가시게만 생각했습니다. 이 친구가 한번은 자기 동료가 암으로 죽는 것을 보고는 크게 느낀 바가 있어서 아주 열심하게 되었는데 연도회에 들어가서 봉사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삶에 은혜가 충만하게 되어 새 인생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신앙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나날이 체험해야 할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개선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미리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은혜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신앙을 세상에 증거 하도록 합시다. 어떤 처지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신앙의 기쁨을 가지고 삽시다. 예수님이 바로 여러분 안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33.          예수 부활 대축일 (다) 절대 희망인 부활

                                                     홍금표 신부


「예수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부활의 큰 기쁨과 축복이, 가톨릭신문 독자들과 독자들의 가정에 함에 하기를 기원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한번씩은 뜻하지 않는 사건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이라면, 우리는 그 앞에서 절망하게 됩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했던 사람들, 특별히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랐을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과 같은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도,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분의 죽음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 당시 현장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았을 제자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아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 그분을 믿은 것은 우리의 실수요, 우리가 가졌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고.」 

 

사실 제자들은 낙담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들이 아니라, 평소에는 예수님을 멀리서나마 동경하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그리고 정이 많은 몇 명의 여자들만이,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내게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가졌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제 모든 것은 끝이 났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역설적이고 놀라운 일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는 겁 많고 우매하던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비겁하게 도망쳤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그리고 그분을 살아 있는 분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되고,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은 이 사실을 입으로만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포를 위해 가장 소중한 그들의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앓으면서, 그 진리를 증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그들의 하나 뿐인 소중한 목숨가지도 아까워하지 않게 만들었을까? 과연 무엇이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와, 예수님의 죽음 이후, 그토록 확연한 차이를 만들어 놓았을까 ?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을 목격하였기에, 이 놀라운 변화가 가능하게 되었고, 부활이 있었기에, 절망의 제자들은, 희망과 용기의 사도들로 변화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이란,「완전한 절망에서, 절대 희망을 안겨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즉, 사람들로부터는 버림받고 단죄 받아 완전한 실패로 보이는,「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 예수님의 삶」이, 하느님으로부터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고, 그러한 사랑의 삶이 인류의 영원한 이상인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절대 희망」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는, 절망이란 단어는 있을 수 없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어렵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희망할 수 있고,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픔과 고통, 아니 죽음까지도 이제 부활 때문에 그 의미를 가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다른 이들이 아니라, 바로 이 부활의 희망을 선포하는 이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의 자리는 그렇게 희망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인류가 개발한 가장 고상한 가치인 사랑과 박애, 자비가 더 이상 삶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경제의 논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고, 특히 한국사회는 제2의 경제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직의 고통과 세계화란 미명 속에서 더더욱 힘겨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실패와 절망인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인류의 절대 희망인 부활이 잉태되고 열매 맺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고, 비록 현실이 부조리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여전히 우리가 꽃피워야 될 희망의 씨를 보듬고, 그 희망을 꽃피우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 의 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신 한번 부활의 큰 기쁨과 희망이 독자 분들과 가정에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34.        예수 부활 대축일 (루가 22,14-23, 56)(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용서하자 

                                                         신은근 신부



오늘은 부활주일, 사순절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순절 없는 부활이 어디 있겠는가. 부활이 열매요 꽃이라면 사순절은 뿌리다. 보이지 않는 뿌리다. 건강한 뿌리에서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나타나듯 사순절의 삶이 부활의 은총을 좌우한다. 그러므로 부활과 사순절은 하나의 흐름이다. 사순절의 연장선에서 부활절을 맞이해야 한다.


부활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죽음에서의 해방과 승리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이에게 죽음은 더 이상 속박이나 두려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이 끝나는 것만이 죽음은 아니다. 살다 보면 죽음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인간적 상황이나 주어진 환경이 그렇게 만든다. 죽음보다 더 힘든 삶이다. 부활의 은총은 이런 사람에게 먼저 요구된다.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힘이 부활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정지다. 주어진 상황에서 포기와 체념으로 살고 있다면 그것 역시 죽음과 같다. 예수님처럼 부활해야 한다.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렇게 하라는 것인가. 사랑과 용서다. 다시 사랑하고 새롭게 용서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어렵다.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갈수록 사람들은 소유하려 든다. 모든 것을 소유의 관점에서 판단하려 든다. 불안해서 그럴 것이다. 떠나가면 어쩌나 배반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에 그럴 것이다. 사순절 동안 우리는 절제를 연습했다. 먹고 싶은 것을 참았고 하고 싶은 것을 억제했다. 외적 행동을 통해 내적 변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다시 사랑하려면 소유의 관점을 버려야 한다. 사순절 동안 체험한 극기와 희생은 소유의 관점으로 향하는 본능에 제동장치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사랑에 대한 바른 인식은 필요하다. 그 사랑을 이웃 안에 실천한다는 것은 시급한 일이다. 예수님은 사랑을 위해 부활하셨다.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작을 결심해야 부활의 은총은 살아 움직일 수 있다.


은총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은총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에 참된 변화는 언제나 가능하다. 부활의 다음 은총은 새로운 출발이라 했다. 용서의 출발이다. 용서를 체험하면 인간은 변화한다. 용서하고 용서받는다는 이 행위를 체험하면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용서에는 하느님의 힘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순절 동안 절제를 연습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성주간 예절에서 핵심적으로 강조되었던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죽어야 용서가 가능해진다. 자신의 어떤 부분을 포기해야 용서는 가능해진다. 이것을 새롭게 출발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신비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다. 그리고 이 신비를 생활 속에 실천하며 은총에 합당한 사람이 되라고 교회는 사순절과 부활절을 제정했다. 복음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놀란다. 무덤에 갇히실 예수님이 아님을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미사 때마다 모시는 성체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남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그러니 먼저 내 자신이 부활해야 한다. 사랑의 부활을 해야 한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 내가 내 삶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남을 용서할 수 없다. 사랑과 용서의 부활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5.           부활 대축일 마태 28,1-10 (가)

                                   갈릴래아로 먼저 가시리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


만물을 소생시키는 화창한 봄철과 함께, 죽음에서 생명으로 약동하는 이 대자연과 함께 우리 교회에도 쓸쓸하던 40일 봉재성시(封齋聖時=사순시기)는 지나갔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수난의 산정(山頂)을 오르던 그 어둡고 비극적인 사순절이 지나가고 더 없이 즐거운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을 다시 맞이하였습니다.

오늘부터 “하느님의 백성” 교회가 있는 곳 어디든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알렐루야 기쁨의 노랫소리가 하늘에 메아리 칠 것입니다. 주 참으로 부활하셨으니 즐거워하고 용약합시다.


예루살렘을 위시하여 방방곡곡에서는 예수님을 박사로, 예언자로, 기적자로 환호하였습니다. 그리나 백성의 지도자들은 턱없는 광란과 포악성으로써 예수를 추적하여 그 언행을 비꼬고 트집잡고, 심지어는 신전에서까지 돌로 쳐 죽이려하더니 기어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당신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이 사형을 당한 것은 저들의 재판으로 인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늘에 계신 당신 아버지의 의향을 따르는 것이라는 것이 입증되었고, 예수는 패자로서가 아니오 승리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가 아니오 생명과 죽음의 권을 가진 하느님으로서 죽음을 당하셨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는 아직도 모든 것은 불행하고 비탄에 잠겨 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은 절망이었습니다. 왜? 이스라엘과 세계를 구할 모든 이의 희망이었던 메시아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의인이시라는 사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까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빌라도’는 그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발견치 못하였습니다.


바리사이와 백성들의 지도자들의 질투와 미움이 이 의인의 죽음을 강요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 시행의 공정을 자랑삼던 로마제국의 고관도 자기의 정치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불의와 타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도 인간사회에서 흔히 경험하는 비극은 되풀이되었습니다. 정의와 진리, 선의와 사랑이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오히려 불의와 허위가, 간계와 증오가 다시금 승리를 거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정녕 죄없이 죽었고 동시에 진실 된 삶의 보람이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과연 육중한 반석으로 굳게 닫혀진 그 무덤, 그 암흑의 심연에서 어떤 빛이 생명이 소생하리라고는 기대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부조리와 불가지가 지배하는 곳이요 죽음이 일체를 삼키는 최후의 승리자로 남을 것 같이만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워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처형을 당하셨고, 더구나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사흘째나 됩니다”(루가 24,21)라고 엠마오로 가던 예수님의 두 제자들이 토로한 그 실망에서 그들의 허무감이 단적으로 표시되어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론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의 손에 넘어 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침뱉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10,34)라고 한 스승의 예언을 전혀 잊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부활을 확신하기에는 그들의 신앙은 너무나 약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승의 부활을 믿기에 얼마나 느린 자들이었는지 그 후의 복음의 이야기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도마의 이야기입니다.(요한 20,24-29)


하지만 인간의 지혜가 무엇이냐? 땅에 떨어져 썩은 한 알의 밀씨에서 어떻게 백배의 결실이 낳게 되는 지도 모르는 인간의 지혜가 무엇이냐? 왜 사람이 살고 왜 사람이 죽는지도 모르는 인간의 궁지가 무엇이냐 말입니다.

삶을 다스림과 같이 죽음을 다스리는 이는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의 판단으로는 그리스도는 죽었고 또한 영영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다스리는 하느님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이 살아 계심을 인간은 몰랐습니다. 적어도 잊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모든 것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신비를 몰랐습니다.


그리스도 못박힐 때와 같이 현세 인간 사회는 너무나 자주 선보다도 악이, 정의보다도 불의가, 진리보다도 허위가 지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같은 사회에 있어서는 현대 실존주의가 주장하듯이 인생은 부조리로 밖에 판단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구적인 것, 불멸의 것은 아무것도 없고, 삶 전체가 덧없고 허무하다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습니다. 부정의 철학, 이것이 현대인의 허무주의적 인생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그리스도는 부활하였습니다. 바로 그 같은 선의와 진리와 사랑이 부정되고 유린된 자리에서, 오직 허무와 절망만이 지배하는 암흑에서 그는 어두움과 죽음을 쳐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의 인간사회는 악과 불의가 득세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은 실로 인생과 그 역사에 의미를 다시 부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역사의 의미 자체이라고 누가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삶과 우리의 선의, 무엇보다도 진실된 사랑이 부정적으로 끝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의미하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날 뿐 아니라 가혹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철학자도, 어느 사상가도, 그리스도 아닌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여기에 대한 절대적인 해답을 준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의 가르침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에 대한 완전하고 긍정적인 답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알려주었고 또한 길이요 진리임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같이 모든 것 위에 승리하고 죽은 모든 것도 불멸의 생명으로 소생시키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임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의 완전한 희망입니다. 누구도 우리에게서 이를 빼앗아 갈 수 없고, 누구도 지울 수 없는 불멸의 희망입니다. 교회에서는 지난 사순절 시기에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육신의 쾌락, 안목의 쾌락, 사치하고 부도덕한 생활 주변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단식하며 절제하고 희생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고복(苦服)을 입고 보속의 생활을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유는 부활이 우리의 완전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36.        부활 대축일 마르코 16,1-8 (나)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김정신신부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참으로 기쁘고도 환희에 가득 찬 승리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전인간의 구원이란 대사업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골고타 산상에서 무참하게도 십자가상에 돌아가신지 3일만에 정녕 부활하신 날입니다. 동이 트고 날이 밝아 오는 여명기에 예수님은 암흑과 죄악과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또한 악마에 대한 승리의 깃발을 드시고 무덤을 박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은 당시의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베드로, 요한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로 인하여 증명되었고 그 후 많은 학자들도 이를 신앙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신자 여러분! 오늘 아침에는 세계 도처에서 부활의 종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지는 가운데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경건히 머리 숙여 우리 주님의 부활을 마음껏 구가하며 경축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현의는 우리 신앙의 기본이며 핵심이며 따라서 부활 없이는 우리의 신앙이나 구원을 생각할 수 없고 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본질적인 의미는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 가는 승리이며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결정적인 승리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님은 죽음의 암흑에서 생명의 광명으로 옮아 갔고 죄악과 악마의 지배 하에서 자유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구원을 가져오는 파스카의 신비이며 따라서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악에서 사랑으로 현세에서 천국으로 향하게 되는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이라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간처럼 불행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현세에만 국한 된다면 우리는 무슨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저 현세에서 갖은 쾌락과 모략 중상으로 실컷 먹고 마시자 하며 그야말로 세상은 난장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리하여 인생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지 못할 것이니 얼마나 암담하고 방황하는 방랑객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정녕 부활하셨습니다. 당신이 미리 말씀하신 대로 죽은지 제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는데 먼저 베드로에게, 그 후에 열 두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Ⅰ고린토 15,5)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확언하는 것도 제자들에게는 생명을 건 일이지만 더구나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증언은 더한층 제자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중대사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을 적에는 제자들은 산산히 모두 도망쳐 버렸습니다. 어떤 제자는 옷자락을 잡히고 나서 발가벗고 도망할 만큼 제자들은 모두 비굴하고 겁쟁이였으나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나서 백팔십도로 전환되어 아주 강한 사람이 외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매를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순교를 하면서까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사실이란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이처럼 증언하고 부활을 신앙의 중심 교리로 설파하며 모든 이에게 목숨을 바쳐 가며 가르친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신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의 신비를 깨닫고 구원의 길로 용약 매진하라는데 그 뜻이 있겠습니다. 죽음에서 부활로 옮겨가는 과정이 부활의 신비라면 우리는 모름지기 죄악과 유혹을 극복하여 이에서 온전히 떠나 즉 죄악에 죽음으로써 광명과 평화와 사랑의 부활을 맞이해야 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됩니다.”(Ⅰ고린 15,17)라고 하신 성 바오로 사도는 말하였다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우리 자신이 영신상의 부활 즉 생활의 재생이나 혁신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방에서 기쁨의 부활의 종소리가 울려오며 알렐루야의 승리의 고동소리가 들려와도 우리 마음의 기쁨과 승리의 노래를 읊으지 못한다면 하등 우리에게 뜻 있고 반가운 부활절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충실하지 못하다가 회개를 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고 새 생활을 영위하게 된 이는 정녕 기쁨과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도 자기 결점과 허물을 없애며 더욱 예수님을 닮고 따르며 티 없는 길을 걷게 될 때에  기쁨과 승리의 승전가를 부를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영신으로 부활하여 신앙생활에 일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우리 다같이 노력합시다. 그리하여 마음으로부터 알렐루야의 환호의 노래를 소리도 드높이 우렁차게 부르도록 합시다. 아멘








37.           부활 대축일 루가 24,1-12 (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이미 굴러나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죄인들이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혹한과 눈 속에 파묻혀 죽은 듯싶던 초목들이 이제 봄의 따스한 태양과 수분을 머금고 싱싱하고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계절에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더할 수 없는 기쁨에 가득 차 환호성을 울립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연약하고 망상증에 걸린 격에 어울리지 않는 혁명가가 당치도 않게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하는 하느님의 모독자!

허물어진 성전을 사흘만에 다시 지으리라고 호언장담하는 허풍장이!

마지막엔 당신 제자의 고발로 힘없이 사로잡혀 빌라도 앞에 죄인으로 끌려와 심문을 받고 누구하나 변호해 주는 사람 없는데도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우기는 자칭 왕!

재판을 받고 살인강도 바라빠만큼도 대우를 못 받고 사형선고를 받아 로마 병졸들에게 따귀를 얻어맞고 침뱉음을 당하고, 무참하게도 매를 맞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로 비슬비슬 쓰러지며 올라가, 처절하게도 손발에 굵은 못으로 사정없이 박혀, 십자가 위에서 동정이나 위로의 말은커녕 !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목숨이나 건져라”(마태 27,40)고 조소를 당하시건 예수님이!

오늘 무덤을 헤치고 찬란한 광채 속에 부활하시어 사도들과 사랑하던 교우들에게 나타나시어 참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똑똑이 증거해 주신 날입니다.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이곳에 오신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예수님을 붙들고 너무도 기뻐서 놓지 않으려고 하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같이 붙잡고 헤어질 줄 모르겠지요. 놀라지 마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이곳에 계십니다.


바로 우리들 영혼 안에 와 계십니다. 마리아는 무덤에 찾아갔을 때 예수님이 옆에 계신데도 그분을 동산지기로 착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신앙이 없을 때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그리고 다른 사람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몰라보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당신들과 함께 있겠습니다”(마태 28,20)하고 약속하신 주님은 교회 안에 신자들 안에 머무시면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성사를 통하여, 말씀(성서)을 통하여, 성직자들을 통하여, 거룩한 신도들을 통하여 함께 계시며 함께 생활하시고 계십니다.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마태 18,20)하신 주님은 오늘도 이 자리에 우리 가운데 계시며 부활하신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훔쳐간 줄로 알았습니다. 3일만에 부활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은 그들이지만 믿음이 부족했나 봅니다.

그분의 말씀과 기적을 보고 그분과 함께 하던 그들이지만 참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끔 믿음이 부족한 행동을 많이 합니다.“정말 부활이 있을까? 하느님이 정말 계실까? 천국이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고통은 그것도 신앙 대문에 당하는 어려움, 다시 말해서 계명을 지키는 데 따라오는 어려움을 싫어하고 나도 남들처럼 자유스럽게 살았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현세의 고통은 과연 가치가 있을까? 현세에서 마음껏 욕망을 채우고 살면 그만이지 그 다음은 알게 뭐냐”하는 식으로 살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마치 저 유대인들이 부활하시기 전이 예수님을 우습게 보며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세상 쾌락에 대하여 약하셨습니다. 어리석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분 때문에 때로는 어리석은 자로, 미련한 자로 취급당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며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어리석음 속에서 참 지혜와 참 기쁨을 찾을 수 잇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죽을 때까지 골고타의 길을 걸어가야 할 우리들이 고달프고 슬프지만 않음은 주님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용감히 세상을 살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도 부활의 영광에 참여합시다.








38.              부활대축일 루가 24,1-12 (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이미 굴러나

                                          - 함세웅 신부



오늘 우리는 또 한번 예수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부활축일은 기쁨의 축일이요 희망의 축일입니다. 예수께서 무력하고 비참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주변의 사람들은 물론 예수님 자신까지도 성부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태 27,46) 할만큼 실망하였고, 피땀을 땅에 흘릴만큼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시기와 기만으로 가득 차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대승리를 거둔 줄로 알고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영광스럽게 다시 살아나시니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서 모든 고통과 슬픔과 절망은 다 사라지고 기쁨과 희망으로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죽지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되고 참혹하게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다시 살아날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오늘도 이 세상 도처에서 불의가 정의를 유린하고 갖은 악이 선을 짓누르며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착한 사람들이 악한 자들에게 억울한 고통을 당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의 신비를 통하여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여야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는 예수님과 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살 때에 우리의 삶은 너무나 허망합니다. 오늘날 우리 인류는 특히 우리 한국사람들은 너무나 큰 고통과 절망 중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러한 고통 중에 산다 하여도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당하신 고통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며 고통 당하시는 예수님의 숭고한 모습을 따라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스스로 극복하여 나아가고 또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로하고 도우며 협조해 나아가면 모든 어려움 안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진실되어야 합니다. 가면과 기만과 허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것들은 일시적으로 혹은 표면적으로는 어떤 이득이 있는 것같고 잘 되는 것같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이 폭로되고 밑바닥으로부터 송두리째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진실은 사람이 사는데 가장 큰 밑거름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기쁜 부활대축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고통의 신비를 깊이 깨닫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생활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작년에 신앙의 해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외적 사정에 의하여 무엇인가 아쉬움을 가지고 신앙의 해를 마쳤습니다. 이제 한번 더 구원의 원천이신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기 위하여 유리 조상들의 훌륭한 신앙을 되새겨 생각하며 우리의 신앙을 다져나아갑시다. 그리고 또한 금년에는 이웃에 대한 전교의 해를 맞이하고 있으니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우리의 고귀한 신앙을 이웃에게 전하도록 노력합시다. 신앙을 전한다는 것은 올바른 생활방법을 전하는 것이며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기쁨과 희망을 갖고 살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이웃에게 신앙을 전하지 못하면 앙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이 신앙을 반드시 이웃에게 전하여야 합니다. 희망이 없이 헤매는 우리 동포들에게 올바른 희망을 주는 신앙을 전해주는 것은 정말 참다운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우리 힘이 자라는 데까지 이웃사람들에게 전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화를 부르짖는 우리 사회의 참다운 정화운동을 일으켜 국가와 민족에게 봉사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부활대축에 받은 이 기쁨의 선물을 보답해 드리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금년에 최소한도 한 사람의 이웃에게 신앙을 전하도록 결심하고 노력함으로 주님께 기쁨의 선물을 드리도록 합시다.


오늘, 정말 기쁜 대축일을 맞이하여 여러분 각자와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큰 축복이 깃들길 축원합니다. 아멘





39.      예수 부활 대축일 (다)   순수한 마음이 없으면,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어  

                                                            김신호 신부



증인 없는 부활의 기적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시어 당신이 하신 구원 사업을 완성시킨 사실을 경축하는 부활 대축일 입니다. 부활은 신앙의 정점이요 또는 희망의 극치라는 여러가지 긍정적인 의미에서 좋은 말들로 설명이 되는 사건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 면 부활만큼 우리가 알아듣기 어려운 사건도 만나기 힘들 것입니다.

 

부활은 여러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기적을 행하시면서 조건으로 강조하신 신앙이 전제되어야만 부활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기적을 행하실 때에는 행하신 기적을 함께 목격하고 증언할 증인들이 항상 같이 있었고, 또한 군중이나 기적이 이루어진 당사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에게 이룬 부활의 기적을 이루는 순간에는 그 자리에 누구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도 부활하는 순간과 부활의 과정을 목격한 증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엄청난 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전하는 사실에 의거하여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과 같은 산업 사회로 변하기 전 우리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자리에서 삶을 이어가는 전통적인 사회의 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때에는 지금과 같은 차가운 매개체인 홍보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여러가지 소식을 전해주는 매개체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방물장수였습니다. 그들은 물건을 가지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사람들을 접촉하고 그들에게서 들은 말이나 또는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들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하곤 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모두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이나 또는 직접 사건을 경험한 본인들에게 들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순수성 잃은 산업사회

그렇지만 그들이 전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수긍하고 거기에 대해 별다른 의문점을 제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전통사회라는 단순한 삶의 구조에 기인하는 순수성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사실 이러한 순수한 마음이 있어야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복잡한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분석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벌써 받아들이기에 불가능한 사건으로 되어 버릴 것입니다. 부활을 맞으면서 우리의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40.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김영진 신부

나는 은혜롭게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부활무덤 속에 있는 제대 위에서 두 번씩이나 미사를 봉런하는 영광을 입었다.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 이제는 부활하셨기에 빈무덤이 되었고, 빈무텀 위에 작은 제대를 만들어, 그곳에서 하루종일 미사가 이어지는 곳, 순례객들의 발길이 1년 내내 끊이지 않는 예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현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묵상하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때의 아름답고 거룩하였던 묵상과 기도는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신부까지 된 나이건만, 이 세상 모든 사상가들의 생각을 뒤흔든 거룩하고 위대한 부활 사건이, 하나의 옛날 추억으로 남아가고 있음은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

믿음과 변화의 현장이었던 예수 부활 무덤이 하나의 구경거리요, 전설처럼 내러오는 이야깃거리의 한토막이 되어간다면, 이처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부활 무덤제대에서 두번이 아니라 20번, 2백번을 미사 드린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새롭게 변화되고 다시 태어나는 삶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삶


부활은 변화다. 껍데기의 변화가 아니라 속마음의 변화다. 창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성녀가 되고, 탕아 아우구스티노가 성인이 되듯 마음의 변화다. 미움이 사랑으로, 교만이 겸손으로 무례함이 감사로 불신이 믿음으로 바뀌어지는 변화다.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삶, 그것은 바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솝우화 중에 요술쟁이와 생쥐의 이야기가 있다, 생쥐 한 마리가 요술쟁이의 집에 살았는데, 고양이를 늘 두려워하며 떨었다. 그래서 요술쟁이는 생쥐가 불쌍하여 고양이로 변화시켜주었다. 그랬더니 다시 개를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술쟁이는 생쥐를 다시 개로 변화시켜주었는데, 이번에는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요술쟁이는 다시 호랑이로 변화시켜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호랑이가 된 생쥐가 고양이를 만나자 오줌을 싸면서 숨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요술쟁이는 “네가 모양(껍데기)만 바뀌었지 마음은 변화되지 않았구나. 다시 생쥐로 돌아가려무나"하면서, 생쥐로 만들어 버렸다는 이야기다,

 

부활은 마음의 변화, 생각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지, 껍데기만 바꿔 뒤집어썼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때때로 아픔을 요구한다. 심은 씨앗이 자신을 썩이는 아픔을 통하여 새로운 싹을 틔워내듯이, 부활은 아픔을 통하여 탄생한다. 속을 색이면서도 사랑을 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용서를 하는 것은 아프지만, 그러한 아픔을 통해서만 부활은 성숙되어간다.

 

19세기 최고의 시인 롱펠로는, 부인을 둘씩이나 사별하는 불운 속에서도, 아름답고 고귀한 글들을 수없이 남겼다. 그의 나이 75세 되던 어느 날, 한 신문의 기자가 찾아와 “선생은 많은 슬픔과 고통을 겪으며 살아오셨는데, 그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그리도 주옥같은 글들을 뿜어낼 수 있으셨습니까?"라고 묻자, 롱펠로는 앞마당에 있는 고목이 되어버린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올시다. 죽은 듯 보이는 저 나무에서는, 해마다 새가지가 나와 꽃도 피고 열매도 맺습니다. 죽은 십자가 나무에서 부활의 꽃이 피었듯이, 나의 고통은 나에게 새로운 꽃과 열매를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죽은 십자가나무에서 부활의 꽃이 피듯, 깨어진 알에서 날개 달린 새가 나오듯, 부활은 우리에게 자신을 바치고 죽게 하는 아픔을 요구한다.                 


변화와 아픔을 두려워 말라


자기의 자존심, 교만이라는 무덤에서 나오는 아픔, 끊임없이 기억나는 미움과 증오라는 무덤에서 나오는 아픔, 그리고 이기심과 질투, 욕망이라는 무덤에서 나오는 아픔을 통하여 부활은 탄생한다.

 

변화와 아픔을 두려워하지 말라. 쭈글쭈글한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징그러운 굼벵이가 매미가 되듯, 부활은 변화요 아픔이기 때문이다.

예수부활 무덤을 여러번 참배했다 하더라도, 자기라는 무덤에서 나오는 변화와 아픔을 회피한다면, 어찌 부활이 가능하겠는가! 어두운 마음, 흔들리는 마음, 욕심스러운 마음, 음흉한 마음에서 부활하자.

두려움과 외로움, 고통과 좌절의 삶에서 희망과 용기, 기쁨과 감사의 삶으로 부활하자. 교만으로 가득찬 무덤, 욕심과 미움으로 가득찬 무덤, 이기심과 불신으로 가득찬 무덤에서 부활하자, 그럴 때에 나는 내 마음에 죽음을 물리친 또 하나의 무덤, 죄악을 털어버린 승리의 무덤, 예수님이 부활하신 거룩한 무덤을 만들 수 있다. 주여!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깨어진 알에서 날개 달린 새가 나오듯, 미움에서 사랑으로, 증오에서 용서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41.        부활 대축일 <요한 20. 1-9>   무덤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강영구 신부



알렐루야!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형제 자매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과 평화가 풍성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사건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전대 미문(前代未聞)의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안식일 다음날 새벽 평소 예수를 사랑하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에 성묘를 갔습니다. 삼우(三虞)날 새벽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무덤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군가가 예수의 시체를 훔쳐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제자들도 달려왔습니다.

제자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예수의 시신을 감쌌던 수의가 흩어져 있었고 예수의 모습은 간 데 없었습니다. 예수를 무덤 속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대 미문의 사건인 죽은 사람의 부활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야말로 모든 것의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들이었기에, 그토록 무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었던 스승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시며, 사랑과 자비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무덤에 갇혀 계실 리 만무한 것입니다. 비록 무력하고 무능한 모습으로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분이 무덤에 그냥 머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무덤이란 무엇입니까? 그 음습하고 기분 나쁜 무덤이란 무엇입니까? 암흑과 죽음의 세력이 머무는 곳이 무덤입니다. 악마와 그 졸도들이 머물러 썩어 가는 곳이 무덤입니다. 악을 일삼고 죄악에 몸담고 있던 자들이 그 벌로 받는 것이 죽음이고 그 죽음의 결과로 갇혀서 썩어 가는 곳이 바로 무덤입니다.

 

죽은 자들이나 머물러야 할 곳에서 생명의 주님을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무덤 가운데서 찾아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악마의 편에 서서 악을 일삼는 자들과 자신의 안일과 안락, 이기심의 충족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 부정과 불의와 야합하면서 이웃과 형제들을 짓밟는 사람들,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여 함정에 빠뜨리는 사람들, 정직하지 못한 생활로 자신의 배를 불리는 사람들, 돈과 재물을 섬기기 위하여 하느님을 버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음습한 무덤이 어울리고, 이런 사람들을 무덤에서 찾아야합니다.

 

사실 이런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죽이는 사람들이고 이웃과 형제들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죽음이 지배하는 어두운 무덤으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죽음이 지배하는 무덤이 썩 잘 어울리고, 그 무덤의 주인공들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는 도대체가 무덤이 어울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죽음의 지배를 받으면서 무덤 가운데서 죽은 자들과 함께 머무실 수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당신을 완전히 낮추시어 인간이 되시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던 예수께, 무덤이란 당치도 않는 장소였습니다.

더구나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몸소 실천하시고, 가난하고 작은 자들의 편에 서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던 분이, 무덤 가운데서 죽은 자들과 어울려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예수를 모함하고 조롱하고, 매질하고, 그리고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사람들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예수의 삼십삼 년의 생애가 끝장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분의 시체를 죽은 자들이 머무는 무덤에 안치하고, 큰돌로 그 입구를 막고는 손을 탁탁 털면서,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그리고 예수라는 엉터리 같은 인물 때문에 벌어졌던 소동은 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야말로 크나큰 착각이었습니다. 그분이 묻혔던 무덤은 비어 있었고, 부활하신 그분을 만났던 사람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자기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로 정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사도 10, 41-42).

  예수 사건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분이 죽음의 지배를 받을 수도 없었고, 죽은 자들과 함께 머물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증언대로 그분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무덤의 문을 열고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 사건이 그 날 이후 이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은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 사건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 사건은 사랑과 자비, 진리와 정의는 결단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모함, 백성들의 소동, 로마 통치자들의 폭력 등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 수는 있었어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빛이신 분을 암흑이 지배하는 무덤 속에 가두어 둘 수 있습니까? 거짓과 위선이 어떻게 진리를 덮어 누를 수 있습니까? 죽음이 어떻게 생명을 이길 수 있습니까? 힘과 폭력이 또한 그분을 무덤 속에 가두어 둘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부활 사건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에서는 전대 미문의 엄청난 사건이지만, 사랑과 진리와 정의는 결단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세례를 받아서 부활하신 예수를 주님, 혹은 그리스도라 신앙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지배하는 그 음습한 무덤에서 썩어 가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덤의 문을 열고 죽음의 권세를 쳐부수신 그리스도,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과 광명을 주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당연히 부활의 삶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랑과 평화,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서는 삶이어야 합니다. 거짓과 위선은 이 세상을 무덤과 같은 곳으로 만듭니다. 거짓과 위선은 그 속에서 사는 자신도 죽이고 이웃과 형제들도 죽이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예로 들어 봅시다. 남편이 아내를 속이고 아내가 남편을 속이고 부모가 자식에게 거짓을 가르치고, 그래서 자식이 부모를 속이면,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게 됩니까? 그런 가정이 생명이 약동하는 살아 있는 가정, 빛으로 가득 찬 밝은 가정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 가정은 죽음의 어둠으로 가득 찬 묘지 같은 가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이 밝은 세상이 되려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생활을 과감히 청산해야 합니다.

 

미움과 증오, 이기심과 탐욕도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과 이 사회를 무덤 같은 곳으로 만듭니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증오하고, 복수하고, 죽이고 빼앗는 사람들이 사는 가정은 사랑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악귀들이 모여 사는 무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죽음의 세력이 판을 치는 악귀의 세상입니다.

베풀 줄도 나눌 줄도 모르면서 자신만 배부르겠다고 눈에 불을 켜게 되면, 모두가 악마로 변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무덤 같은 곳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에게 도대체 이런 삶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머무실 수 없었던 것처럼 그분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도 어두운 삶 속에 머물 수 없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생활, 정직하고 바른 생활, 나누고 베푸는 생활이야말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어울리는 생활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면 모두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정의와 진리를 실천하는 생활은 이 세상을 밝게 만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의 부활은 우리가 기념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하고 살아야 할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어두운 무덤을 박차고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지난날의 어둠의 생활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새로 태어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권력과 향락과 재물을 섬기고 추구하던 생활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로, 나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생활에서 나누고 베푸는 생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복수하고자 하던 생활에서 사랑하고 용서하는 생활로, 거짓스러운 생활에서 밝고 정직한 생활로 건너가야 하겠습니다.

 

부활 사건을 빠스카(pascha)라고 부릅니다만, 빠스카란 과월, 곧 건너간다는 말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광명으로, 속박에서 자유로, 거짓에서 진실로, 복수에서 용서로, 미움과 증오에서 사랑으로 건너간다는 것입니다. 곧 부활은 우리가 살아야 할 신비입니다.

 

우리는 자칫 부활의 영광만 바라보면서 부활 뒤에 숨어 있는 십자가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기 위하여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외면하지 맙시다.

진리와 정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기 위하여 따라오는 십자가를 외면하지 맙시다. 용감히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부활의 영광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합시다.

 

다시 한 번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과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풍성히 내리기를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42.                주님 부활 대축일 <요한 15,9-17>  서로 사랑하여라

                                                                  최영철 신부



삶의 어두움 벗긴 사건


오늘, 예수 부활 대축일의 전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신비와 우리의 생명과 삶의 근본적인 내용을 볼 수 있다. 예수 부활이란 사건은 현실적으로 모든 어두움과 혼돈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온 사건이다.

 

우리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나는 점점 늙어 가는데, 그리고 결국은 죽고 마는 이 생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등 숱한 의문으로 둘러싸여진 우리의 삶의 의혹과 어두움을 벗긴 사건이 예수 부활이란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의 생명 즉, 삶은 죽음으로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현실적인 증언이고, 이 부활이란 사건으로 우리 인간에게 끊임없이 약속하시고 보여주었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새로운 삶의 출발이 되게 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방향과 나의 생명의 의미, 내가 존재해야 할 미래의 모습 등 우리 인간존재의 모든 것에 대한 확실성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것의 현실화를 이룬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일은 당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제자들의 목숨건 증언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12제자를 부르신다. 그들은 그 부르심에 전적으로 따른다. 베드로 사도 같은 분은 목숨을 내걸고 따르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온갖 기적과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참하면서 큰 희망의 삶을 살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사건 앞에서 너무나도 허약하게 무너지는 것을 또한 볼 수 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 숨어버리고, 사도 베드로마저 세번씩이나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정하면서 배반한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당시의 메시아관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당시의 메시아관으로 볼 때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전 세계와 인류를 지배하시는 분이어야만 했다. 제자들은 그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따랐으리라 하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믿었던 메시아인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사건 앞에서 자신들은 속았다고 단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서 달아나 숨었으리라는 짐작은 능히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제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잡히면 죽을지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외쳤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자들이 목숨을 내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외쳤다면, 그 부활의 사건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만약에 그런 사건이 없었다면 제자들의 목숨을 내건 그런 행동은 있을 수 없었음을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행동은 한 두 제자가 아니라 모두의 행동이었다. 결국 제자들은 예외 없이 치명한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사실이었음을 볼 수 있고, 그것은 또한 목숨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진리, 즉 목숨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진리의 발견이 아니었나하는 것이다.          


새로운 나눔의 출발점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예수부활 사건은 모든 어두움과 혼돈으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부활 사건 앞에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 라는 실천적 차원으로 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푼이라도 더 가져야 되겠다는 탐욕에서의 해방, 너를 이겨야 되겠다는 승부욕에서의 해방이 참다운 부활의 현실적 모습이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푼이라도 나누겠다는 나눔의 가치, 너도 나와 동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인간에 대한 가치에로의 해방이 부활이란 사건의 현실적인 모습이 아닐까 한다.







43.       예수부활 대축일 (특강) 교회 이기주의를 극복하자

                          교회는 나눔의 학교/

                           우리 생활 속의 베풂 안에 ‘부활 예수’가 계신다.

                                                     <서공석 신부>



예수의 부활 축일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고 제자들이 증언하기 시작한 날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의 자세 변화와 그 후 교회의 출현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살아 생전에 예수께서는 교회를 세우고, 제자들에게 권한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체포되시자 절망 가운데 도피한 제자들입니다.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도 믿기가 힘들였던 모양입니다. 복음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마르코 복음(16장)에는 제자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후에 이 부분을 옮겨 적은 마태오 복음은 믿지 않았다는 말을 삭제하고 "몇몇은 의심을 품었다"(28,17)로 고쳐 놓습니다.

제자들은 죽은 "예수가 살아있다고 주장"(사도 25,19 참조)하면서 박해 당하고 죽어간 사람

들입니다.


깨달음과 삶의 변화는 동시에 일어난다

제자들은 예수에서 살아 계실 때 3년 가까이 그분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께서, 하느님과 같이 살아 계시다는 그들의 확신은,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하신 말씀들과 행적들을 회상하면서, 그것들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들의 깨달음과 그들 삶의 변화는 동시에 일어납니다. 예수께 대한 그들의 말과 그들의 삶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요한 복음은 "진리의 영이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것입니다"(16, 13)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과 구별되지 않는 증언들은 각각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편집되어 복음서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증언들 안에 있고 이 증언은 삶과 혼연일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없는 부활하신 예수께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12,26)는 말을 전합니다. 제자들의 회상 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행업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그분 삶의 기원이기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우리도 예수가 사신 삶을 살면 하느님의 자녀 된다는 사실을 동시에 말합니다.

 

그들의 회상 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설교는 '하느님의 나라'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는 구약에 하느님이 모세와 계약을 맺으실 때 "나 너와 함께 있다"(출애 3,12)는 말씀의 연장이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우리 삶의 공간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아직은 충만히 살지 못하기에 하느님 나라는 다가오는 현실이지만, 또한 이미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루가 17,20-21 참조).


우리는 하느님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만 생각하기에, 흔히 하느님 나라를 미래의 실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감옥에 있는 요한 세례자가 파견한 사람들이 예수에게 "당신이 오실 분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마태 11,5)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불행을 퇴치하고 사람들을 살리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친 대로 하느님은 율법 뒤에 숨어서 사람들을 심판하고

벌주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살리고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함께 계심인 '하느님 나라'는 구원이고 기쁨입니다.

 

예수님이 당신 생애를 요약하여 최후만찬에서 "받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 "이는 내 계약의 피로서 많은 사람을 위해 쏟을 것입니다" (마르 14,22-24)는 말씀은 당신 안에 있었던 하느님 생명이 어떤 베풂이었는지를 표현합니다. 그래서 성찬은 우리 예배의 중심입니다. 하느님의 베푸심에 참여하고 삶을 통해서 그것을 육화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베푸심을 알았더라면" (요한 4,17)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4,23) 것이 진실한 예배임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의 베푸심에 참여하는 것이 진실 된 예배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우리 안에 베푸심의 진리를 펼칩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은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 누구든지 진리에 속하는 사람은 내 소리를 듣습니다" (요한 18,37)고 말씀하십니다. 권력과 재물에 모든 보람을 두고 있는 빌라도는 이 베푸심의 이야기를 전혀 모릅니다.


약자의 흔한 마음과 하느님 마음은 통한다


"진리가 무엇이오? 베푸심의 이야기는 인류 역사 안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전승은 역사 안에 이 베푸심이 다양하게 육화된 모습들이 이루는 흐름입니다. 이 베푸심은 병자들에게는 병 고침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낙인찍어 소외시킨 사람들에게는 죄의 용서로 표현됩니다. 사람들은 "사실 죄인이지!"(루가 7,39)하면서 사람을 하느님이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루가 7,48)고 선포하십니다.


사람들이 돌로 치려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살려 놓으신 이야기를 전하면서, 요한 복음은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8,12)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느님의 베푸심은 살리고 용서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불쌍히 여긴다', '측은히 여긴다', '가련히 여긴다'는 표현들을 복음서에서 제거하면 뜻이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강한 자와 화려한 자의 말이 아니기에 성서 안에서 우리는 무심히 보아 넘깁니다. 인류 안에, 그것도 약자들 안에 흔하디 흔한 마음들과 하느님의 마음은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한국의 대도시에는 화려하게 지은 성당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하느님의 베푸심을 배우고 우리가 변신하는 공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미사참례의 의무를 하는 곳, 나와 내 가족을 위해 하느님의 축복을 비는 곳, 그리고 공짜는 없으니까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돈도 조금 바쳐야 하는 곳으로 생각하지나 않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미사에서 '주는 몸'이신 예수님을 받아 모셨으면, 우리 주변을 위해 베푸는 사람으로 변신할 것입니다. 본당은 그 지역 주민들에게 베풂의 장소로 보여야 합니다. 옛날과 같이 구호품을 주는 곳으로 만들자는 말이 아닙니다.

성당 시설물을 지역 주민들에게 개방하는 것도, 많은 차량으로 주민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도, 지역 주민들의 필요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하느님의 베푸심을 사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최후만찬을 하신 다음 "나는 여러분 가운데 섬기는 사람으로 처신합니다" (루가22,27)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도 섬기고 베푸는 사람이 될 것을 촉구하십니다. 우리 삶 안에 나타나는 베풂의 이야기 안에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진실 된 예배가 있고,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우리와 함께" (마태 28,27)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44.       주님 부활 대축일 : <사설>   

                              부활은 회개와 보속을 통해서 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 25)라고 선포하신 말씀을 그대로 증거하셨다.

우리는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로마 6,9)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부활 대축일을 경건하고 확신에 찬 마음가짐으로 맞는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 생명의 길을 열렸다. 사악하기 그지없어 새까맣게 오염된 인간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은총의 빛을 쐴 수 있게 됐다. 육신의 멸망을 앞두고도 그 사실을 모른 채, 한시적인 삶의 순간순간을 탕진해온 인간,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육체와 정신을 기사회생(起死回生)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은 죽음 앞에 여릴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할 뿐 아니라, 인류 사회의 구조악(構造惡)도 부순다. 부활은 하느님을 부정하고 모독하는 이데올로기, 인간성을 훼손하는 제도적 폭력, 인류를 말살하려는 핵무기, 부정과 부패의 사슬 등 모든 반이성적 해악을 물리쳐, 하느님의 나라가 현세에 임하도록 정화하고 쇄신한다.

  영광의 부활 대축일을 맞은 우리는 죽음의 끝에 부활을 맞는 이 벅찬 기쁨을 만천하에 전할 의무를 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 21)고 하신 바와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온 누리를 감싸고, 희망이 용솟음칠 수 있도록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을 다짐해야 한다.


벅찬 기쁨을 만 천하에 전할 의무


그러기 위해서 우리 신앙인들은 눈부신 부활의 아침에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성화(聖化)해야 할 것이다. 부활은 회개와 보속을 통해서 온다. 회개와 보속을 소홀히 한 채 교회력(敎會曆)으로만 부활을 맞은 사람, 회개와 보속을 부활 대축일로 마감하고 다시 죄악의 구렁텅이로 밭을 들여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부활의 의미를 모독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회개와 보속은, 부활의 전제조건이다. 동시에 그것은 부활을 실천하는 규범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찬미하면서도 스스로 부활의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지으면 곧 회개하며, 이에 따른 보속을 이행함으로써 세상의 죄를 탕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활은 신앙인의 자기 쇄신을 요청한다.

 

다음으로 신앙인들은 부활의 이념으로 우리 사회를 줄기차게 정화해야 하겠다. 우리 사회는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래 광범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은 '윗물 맑히기'로 국한되고 있다.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른바 복지부동 풍조가 공무원 사회에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개혁이 악의 뿌리를 잘라내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개혁을 주춤거리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윤리관, 가치관의 부재에 있다고 우리는 본다.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부활 메시지에서 "우리 사회는 오늘날 도덕성 부재와 가치관 상실로 모든 면에 활기를 잃고 있다"고 진단하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 모두가 난국을 극복하는 강한 의지로 일치 단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활의 이념에 맞닿는 개혁


개혁은 세상의 죄를 씻어 밝히자는 것이요, 불의를 제압해 정의를 세우자는 것이며, 사악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잘 살자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혁은 타락한 윤리관, 사악한 가치관을 바로잡는 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개혁은 부활의 이념과 맞닿는다고 말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세상의 죄악을 물리치고 부활하셨듯이, 우리는 지위의 높고 낮음, 고향의 차이, 성별, 재산의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않고 개혁을 성사시키기 위해 자신의 사소한 이익이나 기득권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공동선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 "밀 알 하나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한 12,24)는 말씀에 따라 '땅에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이 되어야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개혁을 무력화하려는 세력들에게 충고하고자 한다. 개혁은 가진 사람의 재산을 빼앗고, 그들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 개혁은 잘못된 관행, 오도된 비리와 부패구조를 청산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병폐가 '기득권'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할 규범은 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망치고, 사회를 해치는 독소일 뿐이다.

독소를 지닌 채 건강해지기를 바랄 수는 없다. 따라서 개혁을 거부하는 사람은 악에 기대어 육신과 영혼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부활은 해와 같이 찬란하고 밝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그것을 거스를 세력은 없다.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찬미하며 자신과 사회를 쇄신하기 위해 기도하고 결단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셨다. 알렐루야!








45.           부활 대축일 (가)          너무나 인간적인 주님




예이츠(Yeats, 1865-1939)는 아일랜드 특유의 유현(幽玄)하고 환상적인 정서를 통해 세계적인 시인이 된 사람입니다. 1923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아일랜드 자유국가 성립에 공헌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조국 아일랜드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이츠는 25세의 청년 시절, 고향 이니스프리 섬을 그리워하는 서정시를 발표합니다.

“나 이제 일어나 가리. 이니스프리 섬으로 가리/ 가지 얽고 진흙 발라 조그만 초가집 지어/ 아홉 이랑 일구어 벌꿀 치면서/ 벌들 잉잉 우는 숲에 나 혼자 살리/ 그곳 평화 깃들어 조용히 날개 펴고/ 귀뚜라미 우는 아침 노을 타고 평화는 오리/ 밤중조차 환하고 낮엔 보랏빛 어리는 곳/ 저녁에는 방울새 날개소리 들리는 그곳/ 나 이제 일어나 가리, 밤에도 또 낮에도/ 호숫물 출렁이는 그윽한 소리 듣노니/ 맨길에서도 회색 포장길에 선 동안에도/ 가슴에 사무치는 물결소리 듣노라”


주님은 부활하신 후 최초로 여인들에게 나타나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곳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마태 28,10).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든 단숨에 갈 수 있으셨습니다. 심지어 문을 뚫고 들어오기도 하셨습니다(요한 20,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약속 장소를 갈릴래아로 정하셨을까요. 갈릴래아는 예루살렘에서 400km 정도 떨어진 먼 곳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마태 17,23)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자신의 말씀이 실현된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일부러 집합 장소를 갈릴래아로 정했을까요.

제자들을 부르신 곳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산상설교를 하신 곳도 갈릴래아 호숫가입니다.


주님이 갈릴래아를 사랑하셨던 것은 승천하신 후 천사들이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사도 1,11)고 말했던 것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갈릴래아 호숫가로 부르시고 마지막으로 “아침식사까지 만들어주신 것”(요한 21,12)은 그분께서 그곳을 사랑하셨음을 극명하게 드러내보이신 것입니다.

예이츠가 런던의 회색 포장길에서도 이니스프리의 물결소리를 꿈꾸었던 것처럼 주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갈릴래아의 물결소리를 꿈꾸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예이츠의 시처럼 ‘이제, 죽음에서 일어나 갈릴래아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분인 것입니다.

                                              최인호 베드로 / 작가


 








46.       예수 부활 대축일 <마태 28,1-10> (가)  알렐루야



목련과 부활 꽃


아름다운 봄에 부활절을 맞았다. 온갖 식물이 소생하는 싱그러운 봄이다. 성급한 꽃망울은 만개한 지 이미 오래다. 목련도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다. 나무에 목련꽃이 피었다고 생각해보면 목련은 부활절과 너무나 상통하는바가 많은 것 같다. 십자나무에서 꽃이 피었으니 아름답게 피어난 그 꽃을 부활꽃이라 할까? 예수님은 꽃이 되어 피어나셨다. 특히 더러운 물에서 수면 위로 아름답게 피는 연꽃처럼 예수님은 피묻은 십자가의 더러움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셨다.


예수님 부활의 의미


각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부활이야기를 각기 다른 형태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하나다. 로마인들이 처참하게 못박아 죽인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 그분의 부활은 라자로의 부활이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부활과는 다른 부활이다, 라자로나 야이로의 딸은 다시 죽었으나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하며, 그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는 이 세상의 삶과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삶으로 부활하셨다. 그분은 다시 죽지 않으셨다. 그분은 생성소멸의 법칙에서 해방되시어 영원히 사신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영원히 부활하리라는 희망으로 가득 차있다. 그 희망은 죽음도 두렵지 않게 만드는 벅찬 희망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1고린 15,14)고 말씀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의 길에서(루가 24,15), 티베리아 호숫가에서(요한 21,1),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요한 20, 14),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요한 20, 19) 나타나신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7,21)하고 축복해 주시며 이 기쁜 소식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라(루가 24,47)고 말씀하셨다,

 

오늘은 기쁜 날이다, 신자들에게 아마도 오늘은 최대의 명절이다.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오늘이 기쁜가? 기쁘다면 얼마나 기쁜가! 기쁘지 않고 그저 그런 날로 여겨진다면, 혹은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날이라 여겨진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 속에 바벨탑을 열심히 쌓는 사람들은, 즉 물질과 명에의 탑을 쌓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늘이 그저 그런 날일 것이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루요, 미사전례가 길고 성가대가 길게 성가를 부르는 질력나는 그런 날일 것이다. 과연 나는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어봐야할 것이다.

 

예수님 부활에 즈음하여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은 돋보인다. 당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특권을 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번째로 뵙는 특권은 대단한 특권이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남정네들에게 전하는 특권도 받았다.

아직도 이 세상은 남성의 권위가 여성보다 우월하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절은 여성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는 날이기도 하다.


복음의 메시지


만일 오늘 예수님이 부활하시면 누가 제일 먼저 그분을 만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 특권을 주실까? 성직자일까? 수도자일까? 평신도일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일까? 혹은 어쩔 수 없이 거리의 여인이 되어 매일매일을 눈물로 살아가는 가련한 여인일까? 오늘은 기쁜날, 주님을 찬양하는 날이다. 그러길래 부활찬송에는 “용약하라, 하늘나라 천사들 무리‥‥‥”라고 노래한다. 천사들도 용약하는 오늘은 내 인생의 해답을 얻은 날이다. 나도 부활하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부활찬송에는 또 “오 복된 탓이여! 아담이 지은 죄․…………."라고 하였다. 인간의 죄로 그리스도가 오셨고 부활도 맞이하게 되었음을 역설로 표현한 것이다,


이날을 슬퍼할 수 없다. 근심․걱정을 제쳐두고 우리의 부활을 묵상하면서 주님을 찬양하자,

모든 어려움을 몰아내시고 광명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의 마음 속에 혹시라도 맺힌 것들이 있다면 모두 풀고, 용서하고 이 기쁜 날을 경축하자.

 

오늘은 온 가족이 별스런 음식을 장만하여 함께 나누며 알렐루야를 불러보자. 끝이 안보이는 어려운 경제여건을 타개하는 길은, 주님의 부활을 믿고 그분으로부터 힘을 얻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알렐루야!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공통) 언제 들어도 신선한 기쁜소식



부활아침은 생각만해도 상서롭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독일 윈스터 교구 신학원에는 「요한네스 부르스」 Johannes Bours라는 덕망이 매우 높으신 할아버지 신부님이 계셨다. 이분은 그의 마지막 저서 「내가 새벽별을 주리라」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서 전체에서 가장 뜻깊은 아침이 무엇이냐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것은 부활아침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아침에 죽음이 생명으로 변했다는 소식이 온 땅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결정적으로 긍정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요한네스 부르스 신부님의 이 말씀을 회상하면서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해본다.

 

오늘 복음은 부활의 첫 증인들을 부활신앙으로 이끌었던 것이 바로 「사랑」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기쁜소식은 성 금요일의 깊은 슬픔과 충격 속에 있던 사람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빈무덤을 보거나, 그에 대한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가는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빈 무덤」의 사실은 해석을 필요로 하고, 믿음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빈 무덤」을 처음 본 막달라 마리아의 처음 반응은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라는 걱정아 가득 찬「놀람」이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소식을 듣고 빈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놀람이라고 볼수 있다.


그런데「빈무덤」에 대한 이들의「놀람」은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가지고 있던「사랑」에 의해「부활」에 대한믿음으로 변해간다. 「빈 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었다」는 제자가 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예수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불린다는 사실 자체도 이 점과 관련이 있다. 그 제자가「빈 무덤」의 사실과「잘 개켜져있는 수의」의 사실을 넘어서서 그 사실에 깊이 담겨있는「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예수께서 그에 대해 가지셨던 사랑과 예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던 그의 사랑이었다.


이 점은,오늘 부활주일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한 복음서 안에서 바로 다음 대목인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만남」의 장면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 금요일의 충격 속에 깊은 슬픔 속에 잠겨있던 마리아를 일으켜 세워 「빈 무덤」으로 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황량한 무덤 가에서 울고 있던 그에게 들려오는 (동산지기로 밖에 보이지 않던) 낯선 사람의 소리, 곧「마리아야!」라는 소리를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즉시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도 바로 그 사랑이었다. ,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부활신앙」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만으로는 부족하였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주님께서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셨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몸소 두려움과 실의에 차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가 발현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있다. 

 

부활 축일의 의미는 부활전야 미사 때 있었던 「빛의 예식」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제시된다고 생각된다. 「빛의 예식」 때에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성당」은 많은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잘 표현해 준다. 우리 주변에는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갑작스런 사고로 평생을 침대라는 십자가에 못박혀 살아야 하는 사람들, 중병 중에 있는 사람들, 갑작스런 실직 등으로 극심한 가난 속에 살아야하는 사람들, 노년의 외로움, 또는 오랜 세월 함께 해왔던 인간관계의 단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과거에 지은 큰 죄 때문에 도저히 떨처버릴 수  없이 깊은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삶의 어둠들은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우리 인생의 가장 깊은 어둠이라 할 수 있는「죽음」이라는 어둠의 다양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 부활의 메시지는 이런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참으로 이 모든 어두움을 밝혀줄 수 있는 참 빛이시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어두움이 아무리 깊다하더라도, 「죽음의 어두움」 한 가운데에서까지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부활에 관한 기쁜 소식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줄 사명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부할 전야 「빛의 예식」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인 부활 초에서 서로 서로가 빛을 전달받았듯이 ,우리도 우리가 전해 받은 그 ‘그리스도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나는 삶은 결국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이런 삶을 살아갈 때 ‘부활 대축일’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언제 들어도 마음을 신선한 신앙의 기쁨으로 설레게 하는 ‘기쁜 소식’이 될 것이다.








48.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공통)         빈 무덤과 부활 신앙



지난 95년도에 가톨릭 신앙생활 연구소에서 한국 천주교 평신도의 신앙생활 실태를 종합조사 한 적이 있었다. 그 중에서 부활에 대해 전혀 혹은 별로 믿지 못하겠다고 한 응답자가 약 30%에 이른다는 놀라운 사실을 읽은 적이 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걱정스러운 사실임에는 틀림이 없다.

 

부활은 인간의 생명이 연장되거나 죽은 후 소생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이 세상의 삶과는 전적으로 다른 영원한 하느님 생명에로 드높임을 받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영원 속에 현존하는 하느님 안에서의 삶인 것이다.

 

이번 주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 사화 중에서 빈 무덤의 이야기이다. 무덤을 찾아 간 제자들의 당황하는 모습이 잘 그려지고 있다.

다른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이 죽으신 후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극진히 장례를 치른다. 그 때 큰돌을 굴려다가 무덤을 막았다(마태 28,60).

또한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빌라도에게 청하여 무덤에 경비병까지 세우고 무덤을 봉인하게 한다.(마태 28,62-66),

 

혹시라도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다가 숨겨놓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소문을 내면 시끄러워지니 미연에 방지했던 것 같다. 누구도 시신에 손을 대지 못하게 철통같이 경비를 하게 된 사건이 오히려 예수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제공한다.

아무리 인간들이 지혜와 힘으로 무덤을 막고 지켰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사흘동안 무덤을 방문하는 전통적 관습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죽으면 바로 영혼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사흘동안은 영혼이 시체 가까이에 머물고 있다는 전통적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한 첫 사람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였다.

  성서에서 보면 그녀는 창녀로서 ‘일곱 귀선'이 들린 여자인데,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새롭게 태어난 인물이다. 예수님도 그녀를 몹시 사랑하셨던 것 같다.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때 가까이 있었고, 장례를 지낼 때도 그 현장에서 모든 것을 낱낱이 지켜본 인물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제자들이 도망간 자리를 지키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슬픔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예수님이 죽은 후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안식일 다음날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다. 그러나 그녀가 발견한 것은 텅 빈 무덤이었다. 그녀는 당황했고 황급히 베드로에게 알린다. 곧이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무덤으로 달려가 보니 역시 빈 무덤이었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핵심이고 기본이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어버린다(1고린 15,17) 그러나 부활은 믿음 없이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다. 인간적인 지혜나 두뇌로는 아무리 따져보아도 부활을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활은 초자연적인 하느님 계시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믿음은 특별한 은총이다. 그 무엇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신비의 은총이다.

 

빈 무덤에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 물론 빈 무덤이 예수 부활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실제로 체험했던 것이다. 만약 우리도 진정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부족한 생각이나 판단, 의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가끔 빈 무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황과 허탈감, 좌절 등 빈 무덤의 체험은 오히려 더 큰 믿음으로 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믿음의 성숙은 자기수양이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믿음은 하느님의 계시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수용성에 있다. 그래서 믿음은 신비요 은총이다.

  부활사건은 논리나 철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활은 믿음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초자연적 신비이기 때문이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현(體現)하고 증거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활을 굳건히 믿고 부활의 삶을 철저히 살아야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깨달아야 하겠다. 이번 한 주간, 빈 무덤에서 허탈하고 당황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굳건히 믿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49.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공통)       

                                주님과 함께 죽는만큼 부활

                                                               유영봉 신부


  묵상 : 주 참으로 부활하셨다, 예수께서 참으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는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활신앙은 선(善)이 악(惡)을, 빛이 어둠을, 진리가 거짓을 이긴다는 믿음이다, 신자생활은 매일 죽고 부활하는 삶이다.


예수부활은 신화(神話)인가?


한 예비신자가 교리를 꾸준히 잘 듣더니 갑자기 교리반에 나가기를 거부했다.

이유인즉 성당에서 사람을 바보 취급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까지는 봐주겠는데, ‘예수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으라니 말이 되나! 사람을 바보취급해도 유분수지!"하면서 화가 나서는 이제 성당 교리반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자기 아내에게 선언했다는 것이다,


예수부활은 우리 부활의 보증이다

 

영원히 살고 싶은 염원을 지닌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은 없다, 아무도 건너보지 못한 죽음의 심연을, 제자들은 실망하고 공포에 질려 뿔뿔이 흩어져 숨어 지냈다. 그러던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 “예수는 부활하여 우리에게 나타났고, 우리는 그분을 보았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기도 했다. 그분은 살아 계시며, 그분이 바로 우리가 조상 대대로 기다려 온 메시아다"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마침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사형을 당하였다. 그들은 결국 “예수는 부활하여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외치며, 목숨을 바쳐 예수의 부활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가 부활한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 때, 우리도 그분처럼 죽음을 넘어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모인 공동체가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부활과 발현이 없었다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사도들의 순교도 없었을 것이고, 사형수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는 그리스도교는 역사 안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야말로 예수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1945년 8월15일에 대한민국이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듯이, 2천여년 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예수라는 분이 부활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임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예수부활에 대한 믿음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1고린 15,14)고 하셨다. 그분이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신부님은 예수부활을 참으로 믿습니까? 믿는다면 왜 믿습니까?"하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이렇다.


주 참으로 부활하셨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고 빌라도가 그 총독으로 있을 때, 예수라는 인물이 실제로 살았다는 것은 대개 인정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으로 기대하며 그를 추종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유다 전통신앙을 모독한 자로, 선동가로, 정치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다. 예수 외에도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사형수는 많았다.

현세적 성공을 기대하며 예수를 따랐던 제자와 똑같은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뛰어넘어 부활하신 것이다. 그분은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 I고린 15, 20)이 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등산로를 개척하듯 죽음을 넘어 부활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이심으로써 죽음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신 구세주가 되신 것이다.


그러면 죽음의 심연을 뛰어넘은 예수님의 승리는 어디서 왔는가? 예수부활은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요한 5,44)하신 말씀을 철저히 사신 그 사랑의 결실이었다. 우리도 "원수까지 사랑하는 철저한 사랑"을 살 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내 음식이다"하신 그분처럼 살 때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5-26)하신 그분의 말씀을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부활은 우리 부활의 보증이다


나날이 부활하는 삶


우리는 지금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운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실직과 파산으로 인해 사회 혼란이 우려되고, 이혼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어느 때보다도 고통을 서로 나누는 사랑이 절실한 요즘이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다, 기쁨과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 나 자신에게 죽는 만큼 우리 안에 있는 부활의 씨앗은 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서로 사랑하기 위해 매일 이기적인 나 자신에게 죽고 매일 부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부활신앙을 사는 것이다,








50.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공통)        오늘의 기쁨을 영원히

                                                               서웅범 신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과 힘이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전례를 거행하며 하느님의 구원신비를 묵상하고 그분께 깃은 흠숭과 찬미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례 가운데 특히 예수부활 대축일의 전례는, 다른 때보다 훨씬 더 우리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신비를 잘 느끼게 해주며, 우지의 마음을 환희와 기쁨/감사로 채워주는 것 같습니다.


부활성야 미사 때, 깜깜한 성당 안이 신자들의 손에 들린 촛불들이 발하는 영롱한 빛으로 가득 채워지고, 그 가운데「부활찬송」이 낭랑히 울려퍼지는 그 모습은 참으로 신비롭고 거룩하기만 합니다. 또 장엄한 오르간 전주와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불러지는 승리와 환희의「대영광송」은 가히 모든 전례의 압권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부활 대축일의 아침 공기는 다른 날보다 유난히 더 싱그럽게만 느껴집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나를 위해 부활하셨다!」라는 기쁨과 감사의 마음 때문에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이 감사와 기쁨은 우리를 더 큰 쇄신과 신앙의 성장에로 이끌어줍니다. 부활신앙은 그리스도 신앙의 근간이며,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 그 존재와 이유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특히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 말씀이 더욱 의미있게 들립니다.「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지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비참한 처지의 한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착한 새 주인이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주었습니다. 더구나 큰배에 재물을 가득 실어주었고 또 원하는 곳 어디든지 그곳에 정착해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감사했고 부푼 꿈을 안고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는 항해 도중에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배는 침몰했고 그는 목숨만을 겨우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한 낯선 섬에 간신히 도착한 그는 잠시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그곳 섬나라 사람들은 이 사람을 보자 곧 그를 자기들의 왕으로 모셨습니다.

그것은 「바다에서 표류해 온 사람을 무조건 1년간 왕으로 섬기고, 그 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항무지 섬으로 쫓아버리라」는 그들의 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왕이 된 그는 참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어리석지 않았던 그는 자기가 지금 누리는 부귀영화에 집착하여 그것에 푹 빠져 살기보다는, 1년 후의 일을 생각하며 그 준비를 하는 데에 소홀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시간을 내어 자주 황무지 섬을 찾아가, 그곳에 거처를 만들고 논밭을 일구고 여러 과일나무를 심고 꽃밭을 가꾸었습니다. 또 샘물도 팠습니다. 1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다시금 법에 따라 그 황무지 섬으로 가게 되었으나, 그곳은 이미 모든 것이 다 잘 준비가 된 상태인지라 그곳에서 여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왕으로 살 때, 부귀영화에 미혹 당해 자신의 신분/처지를 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다 버리고 떠나야 할 그 섬의 물질적 풍요와 명예와 영광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이 노예를 자유인으로 풀어준 주인이 바로 하느님/예수님이십니다. 그가 왕으로 1년간 산 섬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입니다. 그가 미리 준비한 또 다른 섬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는 원죄로 인해 죄의 노예가 되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불행한 처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우리가 영원히 머무를 곳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잠시 거쳐 지나가는 곳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죄에 대해 죽고 새 사람으로 부활한」 우리들은 천상 것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성실히 살되 세상 물질과 명예/권력의 노예가 되어 결국 부활의 기쁨을 잃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51.          예수부활 대축일 <요한 20,1-9> (공통) 

                “누구라도 죽어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장소가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겠는가.”                                                                                                                                                                                         신은근 신부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주인공은 예수님이지만 우리에게도 조연의 몫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린이들은 날마다 빠른 속도로 자란다. 어린이가 자라지 않고 성장을 멈추면 큰 일이다. 육체적으로만 자라고 정신적 성숙이 따라가지 못해도 걱정이다,

 

영세하고 몇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어린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영세하고 10년이 지났는데 예비신자 때보다 신앙심이 더 약해져 있다면 이것 역시도 잘못된 것이다. 왜 믿음을 가졌는지, 믿음 안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할 수 없다면 원인을 찾아야 한다. 지식이 부족하면 채워야 하고, 체험이 부족하면 깨달음을 청해야 한다. 그리하여 믿음이 자라나게 해야 한다.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믿음의 꽃과 열매를 경험하면 신앙은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삶의 동반자로 바뀐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점검이 부활을 맞이하는 조연자의 첫 번째 몫이다.

 

믿음은 바치는 행위다, 애정을 바치고 시간을 봉헌하고 정성을 드려야 한다, 그래야 자라난다. 예수님도 생명을 내놓으셨기에 부활하실 수 있었다. 봉헌하지 않으면 세월이 가도 신앙은 자라나지 않는다. 그러니 차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한다. 봉헌하는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조연자의 두 번째 몫이다,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놀란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스승의 부활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토록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죽였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란 말씀도 여러 번 들었는데, 이제 와서 깨닫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활은 지식이 아니고 은총이기 때문이다, 부활사건은 머리로 깨치는 노력의 결실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우리도 청해야 한다, 주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부활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길 청해야 한다, 빈 무덤은 무엇인가. 그분의 무덤이였다. 누구라도 죽어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장소였다. 나에게도 빈 무덤은 있다. 자신을 포기하고 죽어야 할 장소가 있다. 그곳이 어딘가, 우리들 조연자가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다. 관계란 늘 어렵다. 굳어진 탈을 쓰고 사는 것은 아닌지, 마음의 문을 닫고서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다른 어떤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간관계에 평화가 빠져있다면 청해야 한다. 꼭 주시기를 청해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겠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면서 언제나 평화를 기원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말씀에 담긴 의미를 우리는 묵상해야 한다.

희년은 기쁨의 해다, 금년 부활절엔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달라진 인생을 살아야한다. 우리들 조연자의 결정적인 몫이다.








52.          주님 부활 대축일 (나)         여   명



봄이 부활절과 함께 온다는 것이 언제나 감격적이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별 느낌이 없이 봄이 오고 부활도 오고는 했다. 그것은 아마도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선 자의 슬픈 깨달음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사실 봄이 예전의 봄과 같지가 않은 것은 어쩔수가 없는 것이 새소리도 훨씬 드물어졌고 꽃도 빨리 이울 뿐아니라 날씨도 일정하게 변하지를 않는다. 사람도 변했다.

무지막지하게 나가는 사람도 많아졌고 예의를 요구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선수를 치며 화를 내는 이도 많아졌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은 더 많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든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상대방을 이용해 먹으려드는 태도들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의 윗층 아파트 사람들은 아래층에 대한 신경은 전혀 안쓰고 사는 참으로 편하게 살아가는 가족이다.


그들은 발에 쇠징을 박았는지 어찌나 쿵쿵거리며 밤낮으로 걸어다니고 난리가 난 것처럼 사는지 아래층은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래도 천주교 신자가족이고 주일미사는 안 빼고 다니니 모범된 교우측에 든다고 할 말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공청소기로 주로 한밤중에 온 집안을 청소하는데 대개 밤 11시 이후가 보통이고 그집 주부는 해산하는 여인의 목소리 같은 고함소리로 세 자녀들(중고교생 둘과 대학생 하나)을 온갖 욕을 섞어가며 혼내는 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다는 것인데, 거기에 더 혼절할 일은 그 주부가 피정도 꽤 자주 다니는 대단히 영성적 관심이 높은 신자라는 점이다. 이쯤 되면 혼란을 느끼게 된다. 계절의 혼란보다 더한 마음의 사태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길이 없어진다.


인생은 본래 단순하지도 간단하지도 않은 것인 줄은 알고 있다. 인간의 역사가 어둡고 잔인한 일들의 연속이었다는 생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따르는 이들의 이름이니,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름값은 해야 도리일 것이다.


그 윗층 가족의 사연을 놓고 내게는 그런 면이 없는지 거울에 비춘 듯 비춰 생각해 보면서 양심이 아파졌다. 세상에 맞춰 산답시고 쉽게 적당하게 살아오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이 무거웠다. 사실 이번 사순시기 동안은 예전보다 극기도 적었고 희생도 덜 했다. 건강을 고려해서 먹는 것도 여느때와 다를 것 없이 먹으며 지나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랬으니 자선을 더하게 될 수는 당연히 없게 되었다. 극기희생한 만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애초에 사순시기에만 좀 더 열심히 해보려고 마음먹은 것이 잘못이었으리라.

이제는 부활을 맞이했으니(마음이 그러니 제 힘으로 알껍질을 깨고 나오지 못하고 밖에서 남이 깨줘서 겨우 부화된 병아리마냥 불편하지만) 부활 신앙을 또 누리기로 다짐을 해본다.



첫째, 남에게 어둠 불쾌감 같은 것은 좀더 덜 쏘여주는 하루가 되겠다.

둘째, 남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를 쓰되 설치지는 않겠다.

셋째, 말보다는 귀로 듣는 쪽이 더 행복이라는 걸 한 번 느껴보겠다.(죽음에서 살아 부활을 나눠주시는 예수님은 불쌍한 마음안에 빛을 비춰주시니 찬미받으소서. 아멘  








53.        예수 부활 대축일 (다해)  죽음을 넘어가신 예수님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10,34a.37~43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제2독서 골로 3,1~4 (그리스도께서 천상에 계시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복 음 요한 20,1~9 (예수께서는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다) 


오늘은 참으로 위대한 날입니다. 교회 전례로 봤을 때는 오늘이야말로 일년 중에 가장 크고 높은 날입니다. 예수 성탄이 기쁜 것도 바로 오늘이 있기 때문이며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이유도 바로 오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이 있음으로 해서 세상은 그 의미를 가지며 인생은 그 삶의 보람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셨습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뿐만 아니라 온갖 선과 악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그분 은 명쾌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세상은 진정 죽음으로 끝장이 아니었습니다. 악한 사람이 아무리 잘먹고 세도 부리며 떵떵거린다 해서 절대로 부러워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저편에는 다른 세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사실 죽음에 대해서는 아주 깜깜했습니다. 안 보이니까 더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안으로 들어가셔서는 죽음의 휘장을 걷어 내시고 보니 그 뒤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너무도 소망스럽고 너무도 행복한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인류에게는 참으로 큰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인류는 이제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고 영원한 삶의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어떤 자매가 어린 딸을 잃고는 너무도 슬퍼했습니다. 딸은 너무 도 예뻤고 영리했으며 또 착했습니다. 죽을 이유도 없었고 부모가 또 악하게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딸은 교통사고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느님이 정말 계시다면 세상에 어떻게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 날 수 있는지 그녀는 참으로 분하고 원통했습니다. 세상과 하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자 그 자매는 더욱 괴로웠습니다.


삶 자체가 저주요 원수요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수녀님이 우연히 찾아와서는 딸은 필경 다시 부활하여 하느님 곁에 편하게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엄마는 수녀님의 말씀에 너무도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어둡게 닫혔던 세상이 활짝 열렸으며 죽은 딸에 대한 희망 때문에 그녀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실로 예수님 때문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망가지고 부서지고 파괴되었던 모든 요소들이 이제 제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땅은 축복받은 땅으로 변화되었으며 심지어는 고난도 죽음도 다 은혜요 축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세상을 건져 주셨습니다. 새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그 열쇠였습니다. 부활이 그 해답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저주였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다." (신명 21,23; 갈라 3,13)라고 성서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후로는 십자가는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저주를 혼자 다 뒤집어쓰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믿지 않는 이들에겐 십자가는 부끄러움이요 저주이지만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십자가는 진정 하느님의 힘이요 은혜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죽음 속을 들어가셔서 죽음의 저주를 다 깨뜨리셨기 때문에 죽음도 이제 은혜가 됩니다. 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원래 죽음은 인류의 최대의 적이요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 속으로 들어가시니까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생의 끝장이 아니요 새 삶을 열어 주는 관문이요 또는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부활뿐만 아니라 우리는 정신의 부활, 생활의 부활, 그리고 마음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실패할 때가 있고 알게 모르게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새롭게 부활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사람은 어떤 의미로든지 죽어봐야 새롭게 태어납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루가 15,11~32)에서 작은 아들이 알거지가 된 후에야 새 인생이 되었던 것과도 같습니다.

어떤 형제가 자기 동료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그 동료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자기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면박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계속 크고 작은 상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는 할 수만 있으면 복수를 하고 싶었고 그 동료를 생각만 해도 밥맛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기도회에서 그 형제는 미움에서 해방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내적 치유를 인도하시던 신부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누군가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기도해 주는 것이 올바른 치유의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는 자기 동료를 위해 기도함으로 해서 자기가 오히려 치유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건너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새 삶의 세계를 열어 주시어 닫혔던 세상의 모순을 풀어 주셨기 때문에 세상은 이제 절대로 불공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두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위대한 새벽을 늘 바라보도록 합시다. 거기에 우리의 참 미래가 있습니다.

     







54.       예수 부활 대축일 (가해)    부활은 죽음의 보상이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10,34a.37~43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제2독서 골로 3,1~4 (그리스도께서 천상에 계시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 하십시오)

복 음 요한 20,1~9 (예수께서는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다) 


세상에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인류 최대의 적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이 무서운 것은 죽음 그 자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또한 그 속 을 다녀온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그 캄캄한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분에 의하면 죽음이 꼭 무섭고 두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활이라 는 위대한 세계가 죽음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죽음은 실로 은총과 축복의 관문이었습니다.

인생은 진정 죽음으로 끝장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무도 억울하며 세상 만사 우주 전체가 모순이 됩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완성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세상에는 부조리가 많습니다.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모순들이 많습니다. 한마디로 혼란이요 엉망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세상은 절대로 모순과 부조리로 끝장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기에는 걸림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한 사건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머리로써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불에 타 한줌의 재로 변한 것이 다시 생명을 가진 나무로 변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 장면을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모두에게 나타나신 것도 아닙니다. 한정된 아주 소수의 사람에게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는 그 내용을 모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 그분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구하나 믿지도 않았고 호기심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이 비어 있다고 외쳤을 때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주제 파악을 못했습니다.


아무도 제자들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랬을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우리에게 오신다고 해도 미친 소리쯤으로 무시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갇혀 있는 자기 자신밖에 바라보지를 못합니다. 그 이상은 절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죽음은 인간의 일이요 부활은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제 친구 중의 어떤 형제가 아주 괴물이었습니다. 세상에 자기밖에 몰랐으며 얼마나 이기적인지 살아가는 그 모습이 참으로 치사하고 유치했습니다. 사회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너는 팔자 소관이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인가 보다."하여 신앙을 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공동체 안에 큰 해를 끼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부가 되고 한참 후의 일이었습니다. 뜬금없이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부부가 1년 전에 세례를 받았다고 했으며 하나 있는 아들은 신학교에 보내고, 하나 있는 딸은 수녀원에 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가 농담하는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화재를 만나 꼼짝없이 죽는 것인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서는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걸레조각 같던 그 성질들은 다 사라져 버렸고 하느님 앞에 자기를 부술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되 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친구 안에서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했는데 그는 그 속담을 뚫고 지나갔습니다. 저 사람은 아주 지옥에 갈 놈이라고 내가 점을 찍어 놓았는데 그 판단과 멸시를 훌쩍 넘어서 지나갔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부활을 실감나게 묵상합니다.


부활하기 위해선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의 새벽은 절대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을 믿기 위해서도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만이 믿음의 문이 참되게 열리며 그 열린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을 앞당겨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진정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주님이 백 번 부활하신다 해도 자신이 부활하지 못하면 신앙은 허깨비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지금 여기서 부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 날의 새벽이 장엄하게 돌아온다 해도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새 세계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또한 새로운 광명의 세계로 부르십니다. 따라서 먼저 믿고 그리고 우리도 악습의 잠에서 깨어나 새 삶을 살도록 합시다.

모두에게 부활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55.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언제 들어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신선한 기쁜 소식

                                                              김영남 신부


부활아침은 생각만해도 상서롭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독일 뮌스터 교구 신학원에는 “요한네스 부르스(Johannes Bours)”라는 덕망이 매우 높으신 할아버지 신부님이 계셨다.

이분은 그의 마지막 저서 “내가 새벽 별을 주리라”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서 전체에서 가장 뜻깊은 아침이 무엇이냐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것은 부활아침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아침에 죽음이 생명으로 변했다는 소식이 온 땅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결정적으로 긍정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네스 부르스 신부님의 이 말씀을 회상하면서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해본다.


오늘 복음은 부활의 첫 증인들을 부활신앙으로 이끌었던 것이 바로 ‘사랑’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기쁜 소식은 성금요일의 깊은 슬픔과 충격 속에 있던 사람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빈무덤을 보거나, 그에 대한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가는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빈 무덤’의 사실은 해석을 필요로 하고, 믿음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빈 무덤’을 처음 본 막달라 마리아의 처음 반응은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라는 걱정이 가득 찬 ‘놀람’이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소식을 듣고 빈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놀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빈무덤’에 대한 이들의 ‘놀람’은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가지고 있던 ‘사랑’에 의해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변해간다. “빈 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었다”는 제자가 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불린다는 사실 자체도 이 점과 관련이 있다.

그 제자가 ‘빈 무덤’의 사실과 ‘잘 개켜져 있는 수의’의 사실을 넘어서서 그 사실에 깊이 담겨있는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예수께서 그에 대해 가지셨던 사랑과 예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던 그의 사랑이었다.


이 점은, 오늘 부활주일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한 복음서 안에서 바로 다음 대목인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만남”의 장면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금요일의 충격 속에 깊은 슬픔 속에 잠겨있던 마리아를 일으켜 세워 ‘빈 무덤’으로 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황량한 무덤 가에서 울고 있던 그에게 들려오는 (동산지기로밖에 보이지 않던) 낯선 사람의 소리, 곧 “마리아야!”라는 소리를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즉시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도 바로 그 사랑이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부활신앙’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만으로는 부족하였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은 주님께서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셨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몸소 두려움과 실의에 차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가 발현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 축일의 의미는 부활전야 미사 때 있었던 ‘빛의 예식’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제시된다고 생각된다. “빛의 예식” 때에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성당”은 많은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잘 표현해 준다. 우리 주변에는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갑작스런 사고로 평생을 침대라는 십자가에 못박혀 살아야 하는 사람들, 중병 중에 있는 사람들, 갑작스런 실직 등으로 극심한 가난 속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 노년의 외로움, 또는 오랜 세월 함께 해왔던 인간관계의 단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과거에 지은 큰 죄 때문에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이 깊은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삶의 어둠들은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우리 인생의 가장 깊은 어둠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어둠의 다양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 부활의 메시지는 이런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참으로 이 모든 어두움을 밝혀줄 수 있는 참 빛이시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어두움이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죽음의 어두움” 한 가운데에서까지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부활에 관한 기쁜 소식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줄 사명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부활 전야 “빛의 예식”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인 부활 초에서 서로 서로가 빛을 전달 받았듯이, 우리도 우리가 전해 받은 그 “그리스도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나는 삶은 결국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이런 삶을 살아갈 때 “부활 대축일”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언제 들어도 마음을 신선한 신앙의 기쁨으로 설레게 하는 기쁜 소식이 될 것이다.





56.       예수부활대축일 <요한 20, 1-9> (가)     우리도 부활해야 한다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주인공은 예수님이지만 우리에게도 조연의 몫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린이들은 날마다 빠른 속도로 자란다. 어린이가 자라지 않고 성장을 멈추면 큰 일이다. 육체적으로만 자라고 정신적 성숙이 따라가지 못해도 걱정이다.

영세하고 몇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어린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영세하고 10년이 지났는데 예비신자 때보다 신앙심이 더 약해져 있다면 이것 역시도 잘못된 것이다. 왜 믿음을 가졌는지, 믿음 안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할 수 없다면 원인을 찾아야 한다. 지식이 부족하면 채워야 하고 체험이 부족하면 깨달음을 청해야 한다. 그리하여 믿음이 자라나게 해야 한다.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믿음의 꽃과 열매를 경험하면 신앙은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삶의 동반자로 바뀐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점검이 부활을 맞이하는 조연자의 첫 번째 몫이다.

믿음은 바치는 행위다. 애정을 바치고 시간을 봉헌하고 정성을 드려야 한다. 그래야 자라난다. 예수님도 생명을 내놓으셨기에 부활하실 수 있었다. 봉헌하지 않으면 세월이 가도 신앙은 자라나지 않는다. 그러니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 봉헌하는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조연자의 두 번째 몫이다.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놀란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스승의 부활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토록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란 말씀도 여러 번 들었는데 이제 와서 깨닫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활은 지식이 아니고 은총이기 때문이다. 부활사건은 머리로 깨치는 노력의 결실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우리도 청해야 한다. 주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부활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길 청해야 한다. 빈 무덤은 무엇인가. 그분의 무덤이었다. 누구라도 죽어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장소였다. 나에게도 빈 무덤은 있다. 자신을 포기하고 죽어야 할 장소가 있다. 그곳이 어딘가. 우리들 조연자가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다. 관계란 늘 어렵다. 굳어진 탈을 쓰고 사는 것은 아닌지, 마음의 문을 닫고서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다른 어떤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간관계에 평화가 빠져있다면 청해야 한다. 꼭 주시기를 청해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겠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면서 언제나 평화를 기원하셨다. ꡐ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ꡑ 이 말씀에 담긴 의미를 우리는 묵상해야 한다. 희년은 기쁨의 해다. 금년 부활절엔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달라진 인생을 살아야 한다. 우리들 조연자의 결정적인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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