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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성령...
작성일 2003년 6월 6일 (금)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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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강림 대축일 강론 모음 ”
 

성령 강림 대축일


         1. 강길웅 신부(가)/2                  2. 서석희 신부(나)/4

         3. 김영진 신부(나)/5                  4. 강길웅 신부(나)/7

         5. 교구 주보(나)/8                    6. 김명순 박사(나)/9

         7. 강길웅 신부(다)/11                8. 김형수 신부(다)/12

         9. 김대군 신부/16                    10. 박지환 신부/19

        11. 강현홍 신부/20                    12. 박기주 신부/22

        13. 윤임규 신부/24                    14. 허성규 신부/26

        15. 김정원 신부/28                    16. 조순창 신부/29

        17. 김정진 신부/31                    18. 정덕진 신부/33

        19. 최기산 신부/34                    20. 유영봉 신부/36

        21. 서웅범 신부/38                    22. 강영구 신부/40

        23. 김영남 신부/44                    24. 이규철 신부/46

        25. 김신호 신부/48                    26. 허영업 신부/49

        27. 신은근 신부/56                    28. 함세웅 신부/57

        29. 생명의 숨/59                      30. 신앙의 원리/61

        31. 성령은 누구신가/63               32 성령의 상징들/65

        33. 최인호 작가/67                    34. 성령의 열매/68



1               성령 강림 대축일 (가해)  “성령을 받아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2,1~11 (모든 신도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제2독서 Ⅰ고린 12,3b~7.12~13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복 음 요한 20,19~23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성령 강림 대축일을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오순절은 구약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 말은 '펜테코스테 (Pentecoste)'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50'이라는 숫자를 말합니다. 구약에서의 오순절은 과월절부터 시작하여 50일째 날에 거행되었는데 성령 강림도 구약의 오순절 날에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때가 부활부터 시작하여 5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성령 강림이 구약의 오순절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오순절은 본래 농경 축제로서 그 해의 첫 곡식을 하느님께 감사의 뜻으로 봉헌했던 것을 기념하는데 과월절, 초막절과 더불어 유대인의 3대 축제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뀜에 따라 농경 축제는 계약 사상과 연결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이 에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받고 계약을 맺은 것이 꼭 50일째 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은 뒤에 율법에 따라 생활했다면, 신약의 백성들은 성령 강림 사건 뒤에 성령에 따라 살게 됩니다. 실제로 주님의 제자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얼마나 크게 변화되었는지 모릅니다. 겁쟁이요, 바보요, 무식했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얼마나 능력 있고 지혜로우며 담대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본격적인 전도 사업에 들어갔다 해서 이 날을 교회 창립일로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선 일찍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제 당신이 입으셨던 육신을 감추시고 새로운 모습으로 제자들 곁에 계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육신이 보이진 않아도 주님이 계실 때와 같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기 위해선 성령이 오셔야 했습니다. 마치 육을 가지고 오신 사건이 성탄이라면 영으로 새롭게 찾아오신 사건이 성령 강림입니다.


성령은 누구십니까?

언젠가 모 성당의 임원들에게 성령에 대해서 물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성부가 아버지요 성자가 아들 예수님이라면 성령은 그럼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서로 눈치만 보며 대답을 못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까지는 아는데 성령이라는 개념은 머리에 잘 잡히지 않는가 봅니다. 아마 대부분이 그럴 것입니다.


성령은 사실 이해하기가 애매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똑같은 위격을 가지신 독립된 존재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하나로 어우러지는 단일체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다름 아니고 바로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함께 뿜어 나오는 기운이요 영입니다. 또는 사랑이나 능력이라 말할 수도 있으며 힘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하는 힘, 아들을 아들답게 하는 능력이 성령입니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을 빼면 하느님은 빈 껍데기가 됩니다. 마치 기름 없는 자동차와도 같습니다.


믿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믿는 우리에게서 성령을 빼 버리면 우리는 마치 허수아비 신자에 불과합니다. 겉은 번지르르하니 그럴 듯하지만 속은 알맹이가 없는 빈 깡통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마치 깨진 독에 물 붓는 격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런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성령 세미나를 통해서 은사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상한 언어도 하고 치유의 은사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환자 방문과 철 야기도, 또는 교회 봉사에 앞장을 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독선이 심하고 아집에 묶여 있으며 남을 험하게 판단하는지 모릅니다. 한번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용서가 없습니다. 어느 땐 신부님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위 은혜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자기 지혜에 걸려 쓰러졌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주 은사에 집착합니다. 그것은 마치 꽃처럼 아름답고 근사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근하게 드러나는 열매가 더 중요합니다. 사랑이니 절제니 친절이니 온유니 하는 것들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하게 요청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강림하신 성령께서는 여러분에게도 머무시기를 진정 원하십니다. 그것은 또 예수님의 약속이면서 동시에 그분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깊은 믿음과 진실한 회개로써 그분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도록 합시다.


"오소서 성령이여."







2                 성령 강림 대축일 (나)  "때를 기다리며"

서석희 신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아무리 귀하고 급한 일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렇게 빨리 세상에 내 보내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보통 수준을 조금 밑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똑똑하고 배운 사람들은 사사건건 사실을 보고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계략을 세우며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머리를 잘도 굴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기에 대해 그 어떤 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늘 동문서답하기가 일쑤이며 깨닫는 것도 너무 느려빠진 것 같은 모습입니다. 오히려 더 많이 받은 모습입니다. 니고데모도 처음에는 답답한 소리를 하지만 나중에는 담대한 제자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또한 병든 친구를 예수님 앞에 내렸던 친구들도 목적을 위해 머리쓰는 방법이나 믿음이 특출했던 쓸만한 사람들이었고 백부장도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가운데서는 보지 못했노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단 한번 만남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자기 마을 사람들을 모두 예수님께로 인도하였을 뿐 만 아니라 예수님이 그 마을에 머무시도록 하였지만, 반면에 열두 제자들은 그만큼 시원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 모두는 조연이고 12제자가 주인공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예수님 부활, 승천 후 성령을 충만히 받은 제자들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답답하고 느리고 굼뜨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확신에 찬 영적 지도자의 모습이 되어집니다. 바로 그러한 역동적인 변화의 힘은 성령강림 사건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도행전 2장의 모든 사람들이 다 12제자처럼 쓰임 받았지는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차이는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그것은 바로 3년이 넘도록 예수님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다니며 모든 것을 보았고 들었던 훈련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서의 다른 사람들보다 둔하고 답답해 보여도 결국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이  성령강림 후에는 드디어 하나씩 깨달아지고 확신이 되고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 되어 그들 스스로 체질개선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이 어딘가 모르게 더디고 굼뜨게 느껴지고 기도해도 답답한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바라보며 힘을 얻으십시요. 예수님을 3년동안 따라다녀도 잘못 깨달았지만 결국 성령강림 후 모든 진리가 깨달아지며 담대한 사도로 변화된 모습처럼 복음을 듣고 묵상하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때가 되면 안되던 것 마저 더 크게 쓰임 받는 도구요, 통로가 될 것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3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나)   신바람 신앙생활

김영진 신부


무엇이든지 선입견을 갖고 대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나의 경우 우리 천주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운동에 대하여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졌었다. 조용하고 엄숙하며 차분해야 되는 전통적인 천주교회의 기도 모습이나, 전례관습과는 다르게 손벽을 치고, 손을 흔들며, 무용을 해대고 ‘아멘'을 외쳐대는가 하면, 방언을 한다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 등, 모두가 어렸을 때부터 내가 젖어온 천주교회의 기도와 전례 모습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었다.

거기에다 좀 알만한 신부나 수녀들도 상당수가 성령운동하면, 일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하여 나도 성령운동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말하며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다,

신부가 되어서 몇 년이 지나 광산촌에서 본당 일을 할 때, 밀려오는 신자들에게 교육을 시켜야 하겠기에 이것저것을 지켜보았으나, 지식 유무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적인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때 서울에 있는 한 교우가, 성령세미나를 신자들에게 하게 하면 좋겠다고 여러번 말했으나, 나는 대꾸도 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원 말씀의 집에서 성직자, 수도자 성령세미나가 있다는 엽서를 받고 마음이 흔들렸다. 성령세미나에 대하여 교육을 한번도 안 받고서, 부정적인 생각만 계속 고집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나의 부정적인 생각을 없애보려고, 그 교육에 거듭 두 번 참석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여전히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성령세미나를 좋아하는 교우들도 있으니, 그들을 위하여서라도 본당에서 배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 자신도 성령세미나는 다른 것이 아니고, 나 자신에게 고착된 내 마음의 창문을 열어, 하느님과 타인을 향하게 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닫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람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할 때, 자기 껍질만 두껍게 만들어 인간사회 속에서도 폐쇄적이 되고, 고집쟁이가 되기 쉬우며, 이기적이고 교만의 죄에 떨어지기 쉽다. 그러나 타인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이해심과 너그러움, 그리고 기쁨과 평화, 인내와 겸손의 자세를 갖게 된다.

 

이 마음의 문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을 열 듯, 또 한낮에도 방안의 공기를 우주의 기운과 일치시키려 창문을 열어젖히듯 자주 열어야 된다. 너무 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으면, 문이 녹슬어 망가지게 되고, 또 안에 있는 탁한 공기가 사람을 못쓰게 만든다.

 

성서에서 보면 성령을 하느님의 입김, 혼, 숨결이라고도 하였으나, 또한 바람이라고도 표현하였다. 막힌 곳에서는 바람이 일지 않는 법, 자기 껍질이 두껍게 쌓여져 막혀버린 사람에게서 어떻게 성령의 바람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저 푸른 대지를 향하여 창문을 열 듯 이웃과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의 창문을 열어보자. 방안 가득히 신선한 바람을 집어넣듯 마음 가득히 성령바람을 모셔보자. 탁한 방안의 공기를 새롭게 바꾸듯이 ,탁한 마음의 상처를 씻어내고 새롭게 새 살이 돋도록 하자.

 

얼마 전 서울방송(SBS) 명사특강에서 연세대학교의 황수관 교수가 ‘신바람 건강학’에 대하여 강의를 했다. 강의 핵심은 웃으면서 기쁘게 살자는 것이다. 그럴 때 몸도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항 교수의 신바람 건강학 강의를 들으면서, 신앙인들에게도 신바람 신앙생황을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성령바람이 바로 신바람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성령바람은, 신바람 신앙인이 되도록 사랑, 기쁨, 평화, 너그러움, 인내, 관용, 성실, 양순, 절제를 가져다 준다.


사랑․기쁨․평화 주는 성령바람


또 성령바람은, 무서움에 떨던 제자들을 용감하게 하였듯이, 용기를 주고, 무능한자를 유능하게 하며, 분열된 이들을 하나로 엮어준다. 가난과 병고와 고독, 슬픔, 괴로움 속에서도 실망과 좌절을 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며, 생활고로 찌든 얼굴에 활짝 웃는 웃음을 선사한다, 영혼이 없는 사람이 죽은 사람인 것처럼, 성령이 없는 신자와 교회는 죽은 신자, 죽은 단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성령은 바로 신자와 교회를 혁신시키는 혁명가라는 것을, 나는 그간의 성령세미나 강론을 다니며 체험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실 적에, 구경 나왔던 시몬은 군인들에 이끌려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옆에 설 수 있는 영광과 은혜를 입었듯이, 나도 마지못해 참석하게 된 성직자, 수도자 성령세미나를 통하여, 그리고 수없이 불려 다니고 쫓아다닌 성령세미나를 통하여, 형식적이고 고착된 신앙생활에서 용기와 인내, 사랑과 기쁨을 주는 성령바람을 만나는 은혜를 입었다, 누구든지 신바람나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싱령바람을 향하여 마음의 창문을 열자.






4             성령 강림 대축일 (나해)   성령은 하느님의 기운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2,1~11 (모든 신도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제2독서 Ⅰ고린 12,3b~7.12~13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습니다)

복 음 요한 20,19~23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구약에서는 성령을 히브리말로 '루아흐'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에서는 '프네움마'라고 하는데 입김, 숨결, 호흡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에 '세찬 바람이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찬 바람은 바로 힘찬 성령의 충만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숨을 내쉬시며'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숨을 내쉬셨다.'는 말씀의 뜻은 주님으로부터 성령이 직접 발산되셨다는 표현이 됩니다. 즉 다른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열흘만에 성령을 보 내 주셨는데 오늘 요한복음을 보면 부활 발현과 함께 예수께서는 바로 성령을 내주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성령강림이 동시에 있습니다.


성령은 천주 제3위로서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에게 발산되어 나오는 기운(능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하는 것이 성령이며 아들을 아들답게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신비롭게 일치시키는 것이 성령이며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드러내는 것이 성령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에게서 성령을 빼면 하느님은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마치 휘발유 없는 자동차와도 같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약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정성들여 가르쳐 주셨고 깨우쳐 주셨건만 그들은 여전히 진리를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안 계신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요 사공 없는 나룻배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이 떠나신다는 뜻을 계속 암시하시자 그들은 불안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협조자가 바로 성령입니다.


주님이 안 계신 캄캄한 세상은 이제 성령이 밝혀 줄 것이며 부족한 지혜와 지식은 성령이 채워 줄 것입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복음을 전파할 담대함도 성령이 줄 것이며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낫게 할 치유의 능력도 성령이 줄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성령으로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처럼 하게 될 것입니다. 언변도 기적도 그분이 다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 받았습니다.


오늘 독서에 보면 배우지도 못한 제자들이 동시에 여러 나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감동적인 대중 설교를 통해 한꺼번에 3천 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다른 곳에서는 장정만도 오천 명이 예수님을 믿게 만들었습니다. 오죽잖은 인생이 지식인과 부자와 세도가들을 압도합니다. 성령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은혜를 생활에 실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윤기있게 번쩍번쩍 빛나는 삶, 재미있게 신이 나는 기쁨의 삶을 신앙 안에서 구현시켜야 합니다. 만일에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바보요 멍청입니다. 좋은 선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쓰레기통을 뒤지는 서글픈 존재들입니다.


한 자매가 있는데 얼굴엔 늘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얼굴은 예쁜데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니 아들 중에 하나가 정신 지체자였습니다. 자매는 그것이 항상 고통이요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 안수를 받고 나서는 근심과 불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전에는 아들 땜에 못 살 것 같더니만 성령의 은혜를 받으니 아들 땜에 살맛이 나게 됐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사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어둠을 빛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킵니다. 무엇이든 사람으로 하여금 살맛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그릇이 깨끗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철저한 회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쥐어짜서 진정으로 뉘우쳐서 회개할 때 성령은 찾아 주십니다. 아니 그것마저도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참된 회개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소망합시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회개합시다. 이것이 능력을 얻는 길입니다.






5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서울대교구 홍보실


1. 복음 이야기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맨 처음으로 무덤에서 울고 있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날 저녁에 예수께서는 공포와 불안에 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보냅니다”(요한 20,21). 이 파견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당부이자 마지막 당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세상구원”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이 사명을 마치시고 세상을 떠나가시면서 “나도 그대들을 보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선교와 제자들(교회)의 선교의 동일성과 연속성을 일깨워주는 매우 뜻깊은 말씀으로 오늘 교회는 세상으로 나가서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한 가지 사명을 명시하여 “누구의 죄든지 그대들이 용서해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굳이 사죄권에 국한시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권한이 개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 모든 곳곳이 썩었다 할지라도 교회만큼은 도덕과 양심의 보루로서 세상과는 질적으로 달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올바른 성령관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령을 어떤 초인간적, 초자연적인 신적 능력 또는 그런 현상으로 생각하여 성령을 비인격화하고 사물화하는 오류에 빠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 강림시 예수님을 통하여 오신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서 우리의 위로자 변호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성령과 성령이 주시는 은사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성령과 은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은 성령을 축복의 항목이나 재산의 항목 정도로 전락시키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능력이요, 베푸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이라 하겠습니다.


셋째, 성령은 우리에게 세상에 나가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을 위한 선교 공동체로 존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복종하는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의 생일인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선물을 듬뿍 받아 그 재능을 교회 공동체의 이익과 복음전파를 위해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6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나)   주님의 손

김명순 루피나/영문학 박사


어느 주일,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차대전 후 모든 것이 파괴된 독일에서 병사들이 허물어진 성당을 복구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상이 산산조각이 난 것을 보고는 천신만고 끝에 수많은 조각을 붙여서 제 모습을 갖추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주님의 양손만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실망해서 앉아 있었는데, 한 병사가 일어나 제단 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놓았습니다.

없어진 주님의 손/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주님의 손을 대신합시다.

이 글귀로 말미암아 이 성당은 유명해졌고 많은 교우들이 이 성당을 찾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손은 과연 어떤 손일까요?


첫째, 주님의 손은 기도하는 손입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가 하느님께 두 손 모아 감사와 찬양의 마음을 표현하거나 두 손을 하늘을 향해 활짝 펴고 세상의 것보다 하늘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치려는 듯 기도하십니다.


둘째, 주님의 손은 치유의 손입니다.

십팔 년 동안이나 병마에 사로잡혀 허리가 굽어져서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자에게 “여인아, 네 병이 이미 너에게서 멀어졌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자 그 여자는 즉시 허리를 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루가 13,10-13).

어렸을 때 배가 자주 아프던 저를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손으로 제 배를 살살 문지르면서 “엄마 손은 약손이다”를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면 배가 따뜻해지면서 아픔이 사르르 사라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데, 어머니의 사랑이 치유의 효과라는 것을 언제나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사랑의 손을 펴서 치유하신 예를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 백부장 하인의 중풍병, 베드로 장모의 열병 등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셋째, 주님의 손은 강복하시는 손입니다.

영원한 사제이신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어린이를 앉히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습니다.


넷째, 주님의 손은 기적의 손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 바다 위를 걸으신 기적, 바람을 잠재운 기적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전능은 피흘리면 싸매 주시고, 눈물 흘릴 때 닦아주시는 사랑이 가득한 주님의 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과연 얼마만큼 주님의 손을 닮아 가족에게 지역 공동체의 어려운 동료에게 도움과 희망을 주었는지 반성해 봅니다. 주님의 손을 대신 할 수 있는 조그마한 힘이라도 주십사고 오늘도 저는 두손 모아 기도 드립니다.







7               성령 강림 대축일 (다해)  성령의 은혜로 살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2,1~11 (모든 신도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제2독서 Ⅰ고린 12,3b~7.12~13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복 음 요한 20,19~23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오순절은 과월절, 초막절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입니다. 오순절을 희랍어로는 '펜테코스트(Pentecost)'라고 하는데 이 말은 '50일째의 날'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의 오순절은 그렇습니다. 가장 큰 명절인 과월절(빠스카 축제)을 지내고 꼭 50일째 되는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며 또한 그 해의 첫 농사인 밀 수확을 통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축제입니다. 그런데 이 오순절이 바로 신약의 성령 강림과 연결이 됩니다.


신약의 빠스카 축제인 부활이 지나고 꼭 50일째 되는 날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셨는데 이 날은 또 바로 구약의 오순절 축제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성령 강림이라는 신약의 오순절은 구약의 오 순절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채워 주고 완성시켜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자신의 빠스카를 통해서 구약의 빠스카를 참되고 완전하게 성취시켜 준 것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밤새워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을 선발하셨지만(루가 6,12~16참조) 그러나 제자들은 거의가 무식한 겁쟁이였으며 예수님이 떠나신 뒤의 교회를 이끌면서 신도들을 지도하고 복음을 전파 할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지성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님의 날'이 오면 재수좋게 '한 자리'가 주어지지 않나 하는 야심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예수님의 3년 동안의 전도생활의 업적은 이제 다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웠던 제자들마저도 끝까지 주제 파악을 못했으며 가뜩이나 오합지졸이었던 그들은 뿔뿔이 다 흩어질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업적은 다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그때의 상황은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묘한 일이었습니다.


그 날도 제자들은 두려워서 다락방에 모여 숨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뒤의 세상은 실로 황량한 벌판에 내던져진 어린 고아와 같았습니다. 로마의 힘과 유대인들의 세력이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있는 집안을 가득 채우며 혀같은 것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 성령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전에 약속하신 '협조자'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협조자가 누굽니까? 그는 놀랍게도 하느님 자신의 영이요 기운이었습니다. 다시말해 하느님의 그 놀라우신 능력이 제자들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뒤집어지고 세상이 뒤집어집니다.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바보 같은 제자들이 여러 가지 외국어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했으며 로마의 권력과 유대인들의 세력이 살벌한데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뿐만도 아닙니다. 말 한마디로 앉은뱅이를 고쳐 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성령의 은혜가 절실하게 요 청됩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의 기쁨을 잃고 있으며 신앙을 통해서 오는 은혜의 맛을 모르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으며 기도를 한다 해도 형식적으로 하는 이가 태반이고 성서도 읽는 이가 드물며 말씀의 생활을 못하니 사랑의 에너지가 채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기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계에 기름이 없으면 잘 돌아가지 않습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차라도 굴러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 도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아니, 하루만 굶어도 힘을 못쓰게 됩니다. 성령은 바로 그런 음식이요 기름이며 에너지입니다. 영의 에너지입니다.


에너지라는 표현을 해서 죄송스럽지만 실제로 성령은 하느님의 에너지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하는 능력과 힘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성령을 받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이 하느님의 힘을 내게 됩니다. 인간에게서 하느님의 에너지가 나온 다면 안되는 것도 없고 못할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성령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는 진정한 회개에서 오며 감사에서 오고 또 용서에서 옵니다. 눈물 흘리는 깊은 회개와 그리고 뜨거운 감사,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참된 용서가 아니면 성령의 은혜는 기대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어떤 은혜를 간구하십니까? 그러면 다시 회개합시다.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또 용서합시다. 그러면 그분이 당신 뜻대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8                 성령강림 대축일 (다) 오소서, 성령이여!

김형수 신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가 이르렀을 때, 그분은 사도들에게 “다른 빠라끌리도”를 보내주시겠다고 선언하셨다(요한 14,16).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이 진리의 성령을 예수께서는 빠라끌리또라고 부르신다. 빠라끌리또란 ‘위로자', ‘협조자' 흑은 ‘변호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기서 ‘다른' 흑은 두번째 빠라끌리또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그분 자신이 우선 첫번째 빠라끌리또이시기 때문이다(1요한 2,1). 그분은 과연 기쁜 소식을 가져다주신 첫번째 빠라끌리또이시다. 성령께서는 그분 다음에 또 그분을 통해 오시어, 교회를 매개로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사업을 세상에서 계속 추진하시는 것이다.


그 불꽃을 내리소서 - 성력과 교회의 시대


오순절 사건은, 빠스카 주일에 이미 같은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일이 결정적인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아라"하는 말씀으로 그분을 건네주셨다. 그때 다락방 안에서 ‘문을 잠근 채' 일어났던 일이 오순절 날 사람들 앞에서 외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때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다락방문을 박차고 나가, 예루살렘 주민들과 축일을 기해 거기 모인 순례자들을 향해 나아가, 그리스도를 중거하였다. 이렇게 해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중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중인이 될 것이다"(요한 15, 26-27)하신 예수의 말씀이 실현되었다.

 

“성자께서 성부께로부터 지상 사명으로 위탁받으신 일을 마치신 다음, 오순절의 날 성령이 파견되어 오셨다. 그리하여 성령이 항구히 교회를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 신자들이 한 성령 안에서 성부께로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성령은 생명의 영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 솟아오르는 샘이시다(요한 4, 14).

이 성령을 통하여 성부는 죄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며, 마침내는 그들의 죽은 육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시키실 것이다(로마 8,10-11)"(교회헌장 4항).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순절을 교회의 탄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교회의 시대는 그 막이 열린 것이다. 교회의 시대는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기도하며, 하나로 모여 있던 사도들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시작되었다.


더러운 것 씻으소서 - “성령을 받아라"


오늘 듣는 요한 복음과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빠스카 사건들의 서두에 같은 다락방에서 들려주셨던 말씀들과 대조시켜 생각해야 한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성령을 통해 이어 나가시겠다고 누차 밝히셨다.  사람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위에서 '숨(영)을 거두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이제는 영광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권능을 가지고 “그들 위에 숨을 불어넣으셨다".


주님께서 오셨을 때 거기 있던 사람들은 기쁨에 싸여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리라"(요한 16, 20)고 하시며, 수난 전에 그분 자신이 약속하신 그대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후의 만찬 때 고별사에서 선언한 중요한 내용이 실현된 것이다.

다름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는 분으로서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모셔다'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그분을 모셔온 것은, 그분 자신의 ‘떠남'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 성령을 주실 수 있었던 것은, 말하자면 당신 십자가 수난의 상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그분께서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의 부활을 확증하는,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지을 수 없는 죄책으로 남아 있던 십자가의 상처를 굳이 보여주시며, 성령을 건네주신다. 이것은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해' 성령을 주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사도들의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한) 죄에 대한 용서였고, 게다가 예수께서 직접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신 것은, 그들로서도 교회 안에서 다음 후계자들에게 그 같은 권한을 넘겨주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이 권한은, 성령의 구원적인 활동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마음의 빛'이 되심으로써, 즉 양심을 밝혀주는 빛이 되심으로써, “죄를 드러내 밝히신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악을 깨닫게 하고, 동시에그 를 선으로 인도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따라서 죄의 용서를 위해서, 필요 불가결의 조건인 인간의 마음의 회개는 성령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내적 통회를 전제하는 참다운 회개 없이, 또 자기 삶의 태도를 바꾸겠다는 성실하고 확고한 결심이 없이는, 죄가 “사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성령은 인간의 죄, 이 세상의 죄를 밝히 드러내고, 동시에 용서하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 죄로 인한 하느님의 아픔, 하느님의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수난, 죽음, 부활 안에서 구원하는 사랑으로 바꿔주는 분이시다.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창조와 구원의 역사 전체에서,  성령이 이룩하신 가장 위대한 업적은 바로 ‘강생의 신비'이다. 강생은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던" 분, “당신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던"(요한 1,14)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아직도 우리 안에, 교회 안에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서 현존하시는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바울로 사도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사람들"(로마 8,14)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인간 안에 ‘하느님의 자녀로 되는 변화'는 강생의 신비를 통해, 즉 영원한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새로남 혹은 거듭나는 삶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당신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실 때"(갈라 4,6) 이루어진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아들로 삼아주시는 영을 받게 되고,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로마 8,15). 이처럼 성화의 은총으로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성령의 업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시편 작가의 입을 통해 "당신께서 얼(영)을 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누리(세상)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 하며 노래한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1고린 12,3)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자신을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궁전으로 생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을 힘입어 자신을 정화하고 성화시키는 가운데, 세상 안에서 “세상의 모습을 새롭게 하는 일"에 기여함으로써 명실공히 하느님의 성령의 자녀로 성장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9                 성령강림 대축일 <성령은 누구이신가?>

김대군 신부



“성령은 누구이신가?" 이 질문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우리를 매우 당황하게 만든다.

천주교를 믿는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을 뿐더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표시로, 모든 공식적 기도 전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성호경을 외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입교하는 예비자나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으례히 성부는 누구이시고, 성자는 누구이시며, 성령은 누구이신지를 설명해야 할 입장에 놓이곤 한다.

성부와 성자께 대하여는 우리 인간의 부자(父子)관계가 있고, 또 “천지창조사업"과 “인류구속사업으로 그 하시는 일을 설명하여 어느 정도 이해시킬 수 있으나, 성령께 대하여는 그 명칭 자체가 비물질적일뿐더러 어떠한 형체로써 비유하거나 상상을 하게 함이 매우 어려움으로, 그 개념을 갖도록 해주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단순히 초대교회로부터 전해져 오는 전통교리의 문답을 외우면서, 예수께서 계시하신대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하는 정도로 얼버무리거나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것이 10여년 전부터, 개신교에서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오던 “심령 부흥회"나 “성령운동"이 우리 교회 안에서도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고, 4-5년 전서부터는 대대적으로 시도되어, 현재 그 참가자 수가 십만을 넘는 경지에 이르렀다.


소위 “방언"이나 “치유", “예언"이나 “구마" 등,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마디들이나, 일부 분별없는 사람들의 지나친 언행으로 인하여, 성령운동에 대하여 나쁜 선입견이 많은 교우들에게 생긴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면에 성령운동을 통하여 새로운 열성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그 생활이 아름답게 변하며, 놀라운 치유를 경험한 체험담을 듣고 보면서, 성령으로 인한 새로운 삶에 대하여 막연한 기대를 갖는 교우들도 많이 있음도 사실이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영은, 특별히 하느님께 뽑혀 귀하게 쓰일 사람들에게만 내리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백성을 구원할 모세나, 다스릴 장로들,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예언자들, 주의 백성을 이끌고 다스릴 왕들에게 내리시고, 특히 전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께 내리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어느 사람에게 주의 영이 내리셨다는 말은, 그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띄고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였고, 그 사람에게는 인간의 자연적 능력 이상의 초자연적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을 뜻하였다.


그 능력이 어떤 때는 솔로몬 왕에게서처럼 놀라온 지혜와 지식으로, 어떤 때는 삼손에게서 처럼 무지무지한 힘으로, 어떤 때는 각종 예언과 분별로서 나타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그와 함께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한편 요엘과 에제키엘,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불리운 사람, 특별한 사명을 띈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되어 온, 주의 영이 장차 올 시대에는 많은 사람,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런 다음에,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 늙은  이들은 꿈을 구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그 날 나는 남녀 종들에게도 나의 영을 부어 주리라"(요엘 3,1-2).

 

한편 인류의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이루어진,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성령으로 일관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이 성모님께 잉태되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었으며,"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아가" 단식하시면서 기도하시었다.


그리고 공생활 도중 당신의 구세주로서의 모든 놀라운 행적들, 즉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이들에게 해방을 알려주며, 눈 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는” 모든 것이, 바로 주님의 성령이 당신에게 내리셨기 때문임을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말씀하셨다. 또한 당신이 마귀를 제압하고 쫓아내심도, 바로 성령의 힘으로 인한 것임을 말씀하셨다(마태 12,28).


동시에 당신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는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요한 15,15~17).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요한 16,7). 그리고 그 성령께서 오시면, 그들을 깨우쳐 주시고, 굳세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바라고 기다리며 기도하기를 명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6, 12).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친히 숨을 내부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주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2-23). 구약에서는 특별한 사명을 떤 사람에게만 주어졌던 주의 영은, 이처럼 예수님에 의하여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약속되었고 주어지게 되었다.

 

이는 성령강림 때의 현상과 사도들이 세례를 받은 사람들 위에 손을 얹음으로 성령이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현상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내리신 주의 영은 예수께서 미리 말씀하셨던 대로, 예수의 말씀을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 마음을 깨우쳐 주시어,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신념을 갖게 해주었다. 또한 믿는 사람들에게 오신 성령께서는, 놀라운 지혜와 언변을 주시어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보호해 주셨고, 놀라운 기적과 능력으로써 그들을 협조해 주셨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고, 그분의 인도하심대로 살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요한 3,5)고 하셨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로마 8,9)고 하셨다.

 

성령의 선물을 바오로 사도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신다. 첫째는 봉사의 은사이고, 둘째는 성령의 열매이다. 봉사의 은사(카리스마)는 성령의 놀라운 힘, 또는 능력을 말함인데, 이것은 개인의 성덕과는 관계없이 공동체의 이익과 교회의 건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시는 것으로서, 바오로 사도는 1고린 12장과 14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계신다. 실제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의 은사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으나, 바오로 사도가 특별히 꼽고 계시는 은사는 대충 9가지이다. 즉 지혜, 지식, 믿음, 치유, 기적, 예언, 영의 분별, 이상한 언어, 이상한 언어의 해석이다.

 

그리고 성령의 선물 중에서 우리 각자의 생활에 가장 중대한 변화를 주는 선물인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신다.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육체의 욕정을 채우려 하지말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정을 거스릅니다.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갈라 5,16-17.22). 이들 9까지 열매야말로 우리 인간의 모습을 하느님의 모상답게, 아름답고 거룩하게 해 주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 이외에, 성령의 선물로서 언급되는 것이 성령의 칠은으로서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고 있다.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이사 11,2). 이를 교회는 전통적으로 일곱가지로 분류했다. 즉 슬기, 통달, 의견, 굳셈, 지식, 효경, 두려워함이다. 이는 우리의 영혼을 밝히 비추고 믿음을 굳게 하여, 그리스도를 용감히 따르고 증거할 수 있게 해주는 도움의 은총이다.


사도 요한은 그 서간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 예수에서는 “누구든지 내 계명을 지키면 그 안에 머물겠다"고 하셨고, 당신의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사랑은 우선 용서해 주는 것이다. 미워하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아니한다. 용서하는 마음으로 모든 증오심을 몰아내자. 주님이 내 안에 주인으로 오시어, 나의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변화시켜 주시고, 나를 선하고 아름다운 삶에로 나갈 수 있게 이끌어 주시기를 바라자.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주님께만 집중하여 주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 믿는 이 모두의 목표가 되었으면 한다.






10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박지환 신부


ꡔ오소서 성령이여ꡕ

봄이 되니 겨우내 죽은 듯하던 나무 가지 끝에서 새 잎과 꽃봉오리가 싹터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위에 얼어죽어 말랐던 나무 가지에서는 봄이 되었는데도 또 봄이 다 가고 여름이 되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겨울 동안에는 죽어 마른 나무 가지와 얼어 잠든 가지를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봄이 되어 생명의 기운이 통하는 가지는 생명의 표지이니 잎과 꽃이 나옵니다. 생명력이 통하여 흐르는 나무 가지는 봄의 햇살이 오기를 기다려 성장을 시작합니다.


이제 성령 강림 대축일이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하여 흐름으로써 우리를 성령의 사람으로, 성령의 궁전으로, 성령의 도구로 만들어 남들에게까지 가시고자 하십니다.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나무 속과 껍질과 뿌리와 줄기에 물기가 통하여 흐르며 움직이는 생명력처럼 우리의 몸과 맘과 말과 행위 속에는 성령께서 계시며 성령께서 흐르듯 지나시며 적시듯 가득 차시며 깨끗이 하시며 힘차게 하시며 자라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며 굳세고 의롭게 하십니다.


우리의 말마디 속에 그 말소리 속에 그 말 뜻 속에 그 말을 적은 글 속에 성령께서 오실 수 있으며 계실 수 있고 오시고 있어야 하며 살으시고 움직이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과 행동, 마음과 생각이 성령께서 좋아하시고 즐기시고 기뻐하시도록 꾸미고 마련하며 삼가고 다듬도록 합시다. 우리는 음식을 준비하고 방을 치우고 방석을 깔고 집안을 치우고서 손님을 오시라고 초청합니다.


신자 여러분! 「오소서 성령이여!」라고 기도하기 전에 성령께서 오실 수 있도록 사실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준비하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예를 들어 성령께서 도저히 우리에게 오실 수 없도록 무준비 상태 또는 잘못된 준비 상태에서 성령을 오시라고 목청 높여 아무리 노래하고 기도하여도 성령께서 오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실 수가 없습니다.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생명력이 흐르지 않는 나무는 봄이 와도 소용이 없고 나무 노릇을 못하듯이 성령이 통하지 않는 신자, 성령이 흐르지 않는 말과 행동과 생각의 주인인 신자들에게는 하루 속히 성령께서 오실 수 있고 와 머무르실 수 있도록 먼저 힘써야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령께서 우리 본당에 우리 공소와 우리 가정에 우리 각자 자신 안에 충만히 내려오시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나서 기도를 바칩시다.

성령께서 오시는 길은 일곱가지가 있으니 곧 칠 성사입니다.

명백하고 정확한 이 일곱 대문을 잠가 놓고서 막아 놓고서 울타리와 담을 넘어서 오시라고 소리지르며 손짓을 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며 성령을 조롱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오소서 성령이여!」라고 우리는 성령께 떳떳이 간곡히 청하며 기도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이 성령강림 대축일을 계기로 우리의 영혼 상태와 신앙생활을 재점검 재정비하도록 합시다.






11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강현홍 신부


ꡔ성령이여 강림하사 힘과 용기를 주소서ꡕ

그리스도 신자의 생활은 계속되는 전투상태요 그리스도교 정신은 용감무쌍한 정신입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성령의 강림을 받은 이래 그리스도교 군인의 장수로서 말에 있어서는 용기가 있었고 행동에 있어서는 대담부적(大膽不適), 박해를 당해도 부동함이 산과 같았습니다. 첫째로 말에 있어서 용기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이제까지 담력은 적고 겁이 많아 주님을 버리고 도망도 치고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공포심은 여전히 가시지 않아 유대 사람들을 무서워하여 실내 깊숙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성령으로 충만되자 용기는 전신에 넘쳐 실내에서 뛰쳐나와 공공연히 주의 가르치심을 설파했던 것입니다.

유대사람을 향하여 당당히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책망하고, 여기에 대하여 뉘우침을 권유했던 것입니다. 체포되어 매를 맞고, 이후는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설교를 해서는 안된다고 금할지라도 우리는 보고 들은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계속해서 전도를 했던 것입니다.


사도들뿐이 아니요 순교자, 박사들도 관리나 민중이나 반대자 앞에 서서 무서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고 태연하게 같은 대답을 반복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 용기, 이 말의 용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자기의 신앙으르 공표하고 자기가 믿는 교를 변호하고 자기가 믿는 교의 뛰어나는 점을 세상에 널리 설파 선전하기 위해서는 이 용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외교인들 가운데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신앙을 공표해야 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공장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일상 교제에 있어서 기회는 너무 많아서 걱정일 정도입니다.

신자 여러분!


성령의 은혜를 빕시다. 힘을 구합시다. 주저치 말고 얼굴을 붉히지 말고 용감하게, 대담하게 신앙을 공표하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권고할 용기를 구합시다.


둘째로, 저들의 행동은 대담 부적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재주도 없고 이름도 없고 돈도 없는 대부분이 무식한 어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선전하고 세계를 귀화시킨다는 것은 아무리 대담하고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도저히 저들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느낄 정도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사도들은 성령의 힘으로 굳세어지게 되자 조금도 주저치 않고 정복사업에 착수하여 대대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우리도 우선 우리 자신의 정복을 시작합시다. 성령의 힘을 구하여 용감하게 우리 자신과 전투를 합시다. 사욕과 전투하고, 악습과 전투하고, 악마의 유혹과 전투하여 이긴 후 주위 사람들도 정복하도록 힘씁시다.


셋째로, 박해를 당해도 부동함이 산과 같았습니다. 사도들은 박해를 당하여 매를 맞고 투옥되고 조롱당하고 능욕을 당했습니다마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런 곤욕을 즐거운 것이라 기뻐했습니다. 박해자들도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당황할 정도였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순교하였습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는 십자가를 보자 “아, 착한 십자가여, 오랫동안 갈망하고 주의해서 사랑하고 찾아 헤매었던 십자가여”하고 기뻐 뛰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싸우는 장소입니다.

신앙을 완전하게 하고 꽃이나 열매있는 신자가 되려면 박해를 면키 어려운 것이니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2디모테오 3,12)하고 성 바울로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면키 어려운 박해, 그 박해를 타개하기 위해서, 아니 주님을 위하여 당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기 위하여는 성령의 힘이 크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기도합시다. 열심히 기도합시다. 사도들에게 저런 힘을 주신 성령이 역시 우리에게도 같은 힘을 주실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열심히 성령께 기도 드립시다.






12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박기주 신부


ꡔ성령과 함께 사는 생활인이 되자ꡕ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성부께로 돌아가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당신께서 가시는 중대한 이유는 성령을 보내고저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당신들에게 더 유익합니다. 내가 떠나가면 협조자를 당신들에게 보내겠습니다.”(요한 16,7)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씀도 들려주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당신들에게 보내주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시오”(루가 24,22)


오늘 독서인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오순절이 되었을 때 신도들이 모두 예루살렘 한곳에 모여 있었는데 바람 같은 세찬 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우더니 불길 같은 혀들이 가가 사람 위에 내리자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모신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을 통하여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1고린토 12,3.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 어떠했었나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본시 무식하고 우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악인의 손에 잡혀죽고 또 부활하실 것을 적어도 3차나 미리 말씀하셨지만 죽으신 다음에는 그만 실망 낙담하였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사도 1,6)하고 여쭈어볼 만큼 예수를 현세적인 군주나 혁명가로 생각하여 이스라엘 독립과 제패만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가득히 받은 다음에만 그들은 모든 것을 확실히 깨닫고 자기들의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들었으니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먼저 전도를 시작하여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사도 2,38)고 대중에게 열성적인 설교를 한 결과 삼천 명이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 날이야말로 천주교회의 창립이 완성된 날이고 본격적인 복음 전도의 활동을 개시한 날이 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또한 애덕이 깃든 공동생활을 하여 남들이 칭찬한 초대 교회의 신자들처럼 그들 사이에 성령이 실재하는 결과로서 일어났던 일들이 오늘날에도 또한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성세성사와 견진성사로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의 많은 이들이 성세와 견진을 받지 않은 것처럼 즉 성령이 내 안에서 살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고린토 전서 12장과 14장에 나오는 황홀한 은혜인 방언, 예언, 통역, 치유 같은 특별한 은혜는 초기 시대보다 오늘날 현저히 적습니다만 오늘날에 있어서 성령의 은사는 보다 일상적인 - 알기 쉽고, 교훈적이고, 유익하고, 봉사적인 - 것인 만큼 부엌이나 안방, 학교, 공장, 회사 출퇴근, 버스 안에서건 간에 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 말씀대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 그리스도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해서 모든 이에게 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량, 신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디아 5,22)


이것들은 아무리 높이 평가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한 고귀한 것들로서, 일생을 안방과 부엌에서만 자녀들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의 숨은 사랑일 수 있으며, 불우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서 병원이나 구호 기관에서 봉사하는 간호원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탄광 깊은 곳에서 종일 탄만 캐내는 성실한 광부일 수도 있고 권력 있는 정의로운 정치 지도자, 돈 많은 친절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 중에서도 아빠 하느님은 결코 나를 잊지 않으신다는 숨은 인내일 수도 있고 고요한 기도 중에 온 세상을 구원하고저 하는 갸륵한 뜻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혁명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교회 역시 새로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혁명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도 교회는 쇄신되어야 하며 과거 어느 때보다 믿음에 기초를 둔 신자들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은사가 절실한 현대입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을 현대인에게 전하며 주님 안에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을 할 때만 가능합니다. 마치 태양광선이 죽은 나무도 비추고 산 나무도 비추지만 거기에 일으키는 영향은 아주 다르듯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는 사람과 성령을 떠나 죄악 속에 사는 사람과의 차이도 아주 다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이 세상의 물과 같습니다. 물은 그다지 드러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없어지고 나면 모든 것이 변하고 죽음만이 감도는 황막한 사막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이 우리에게서 떠나신다면 자신은 물론 온 세상에 기쁨과 즐거움, 웃음과 미소, 사랑과 생명은 사라질 것이며 어둠과 죽음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량, 신실, 온유, 절제를 따라 우리의 일상생활을 거룩히 지내고 내 이웃에 봉사할 수 있을 때만이 성령은 참으로 우리 안에서 생활하실 것이고, 또한 오순절에 사도들이 불타는 혀처럼 맹렬히 전도에 나선 것같이 우리 사회도 성령의 불로 조용히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13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윤임규 신부


ꡔ우리 마음 안에 계시는 성령ꡕ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장면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냥 흘려들은 이 독서는 아주 중대한 순간을 얘기합니다. 극적인 순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치는 것을 본 제자들은 실망과 공포로 제각기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으신 사건이 단순한 실패로 끝나지 않고 성부께서 그분을 부활시키셨고, 그분이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남을 본 제자들은 하나씩 예루살렘에 집결하여 예수께서 생시에 말씀하신 대로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스승의 비참한 죽음으로 인해 용기를 잃은 그들은 성령께서 오시자 용기 있게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혁명적인 선포를 하게 됩니다.

즉 “당신들이 몰아 죽인 그 예수가 살아났다 말이요”라고 외칩니다. 정말 재판정의 판결을 허위라고 뒤엎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용기 있는 발언을 하게된 이면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때문이요 성령께서 그들 마음에 그리스도를 증언할 용기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성령”에 대해 대단히 낯선 느낌을 갖습니다. 뭔가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는 거리가 먼 분으로 여깁니다. 성삼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버지이신 성부께 대하여는 우리가 자주 기도 드리고 좀 알듯하지만 그 두 분께서 말하시는 성령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실정입니다. 오늘날 우리와는 달리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히브리인들은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분의 활동까지 말합니다.


성령이라는 말은 성서에서 “영”, “바람”, “숨결”, “불”, “비둘기”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을 자연현상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옛날 히브리인들은 자기들이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자연현상들을 자기네들이 체험한 하느님의 활동에 직접, 간접으로 연결시켜 말했습니다. 자연 활동과 하느님의 체험, 양쪽 다 그들은 체험한 것입니다. 성령, 즉 거룩한 영은 하느님 야훼의 숨결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숨결은 진흙으로 빚은 인간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며 예언자들에게는 자신을 잊고 예언직을 수행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성세성사 때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는 성령이 머무시는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성세성사를 받음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서 여기 모여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은 그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당신들과 함께 계시며 당신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4,17)


또한 사도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도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요한 4,13)라고 한 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라고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우리에게 성령을 증언합니다. 즉 성령의 은혜는 사랑의 은혜이며 사랑 속에 사는 것은 은혜 자체이신 하느님의 영을 영접하는 얼이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당신 자신을 활동 속에서 계시하시며 그 활동은 외부적인 표징으로 나타나실 때도 있으나 주로 내심의 변화, 내심의 움직임들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사랑을 품고 행동으로 사랑을 드러낼 때 성령의 활동을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2천년 전 유대아 땅에 태어나신 예수라는 분을 오늘 우리 사이에 계시는 주님이시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도 우리의 힘이나 우리의 이성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도 본적 없는 그분을 평안한 마음으로 뜨거운 사랑을 느끼면서 “주님”하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리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친밀하게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아 초대교회 사도들에게 감동적인 위력으로 나타나신 성령을 우리의 마음속에 항상 느끼며 살아 갈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면서 성령이 우리 마음에 활동하심을 깊이 느끼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도 사도들처럼 용기 있게 다른 비신자들에게 “예수는 부활하신 주님, 생명이시오 사랑 자체이신 주님”임을 기꺼이 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요한 4,13)






14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허성규 신부


ꡔ성령을 받아라ꡕ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강림 날 성령은 마치 홍수처럼 은총을 교회에 쏟으셨습니다. 이것을 형용하기 위하여 오늘 제1독서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사도들 위에 강림하여 바로 당신 자신이 사랑의 성화를 그들의 마음에 붙이셨습니다. 그래서 승천 후 제자들의 신앙은, 이전보다 더 교리를 탐구하고 그리스도를 한층 더 멀고 높은 곳 즉 성부의 우편에서, 성부와 동등한 곳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신앙이 순화되고 영화되며 보다 활발하고 보다 더 실천적이 되었으므로 그 ‘생활한 강물’은 산처럼 그들의 영혼에 흘러 넘쳤습니다. 성령강림 날 베드로는 수천명의 유대아인을 앞에 놓고 예수님을 선전하였습니다.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즉 하느님을 죽인 죄를 힐책하며, 주의 부활을 증명하였습니다. 회개하여 세례를 받으라고 한 껏 소리를 질렀지 않았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자는, 그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있어서, 그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힘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선언을 다시 되풀이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라는 교회의 고백에 참가하는 자는 하느님의 영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지혜와 지식의 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즉 하느님의 백성이 예배하는 단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영의 은사입니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자유로운 사색, 과학적 연구, 혹은 일반적인 철학적인 분석’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힘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나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언하는 메시아다. 내 안에 하느님의 영이 활동하고 계신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천주성으로 인하여 성부와 함께 성령을 발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교회와 영혼에 선물로 주시는 성령은 비할 데 없는 은총입니다.


성령은 천주 성삼에 있어서는 사랑의 위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선물, 이 성령의 파견은, 다른 모든 은총과 샅이 오직 그리스도의 공덕에 의해서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스러운 수난이 맺은 결실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하느님의 깊은 경륜을 헤아려 그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성령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확인의 표를 찍어 주시고 우리 안에 거처하십니다.


성령은 자신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시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사람들이 지니게 하십니다. 성령은 신자들의 마음을 자기한테 잡아당기시는 게 아니고, 자신의 사랑의 불로 그들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여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시고 또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성령이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성령강림날로부터 교회는 전 세계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국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함께 이 왕국을 다스릴 자는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시작된 성화사업을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성세성사로서 성령을 받고, 견진성사로서 한층 더 풍부하게 성령을 받았지만, 다시금 언제 보다 윤택하게 성령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보다 밝은 빛, 보다 강한 능력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이 심오한 활동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성령강림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


성령강림 축일이 다만 옛적의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신비가 지금에도 재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뜻을 합하여, 열렬한 맘으로 성부께 성령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고, 겸손하고 즐겁게 성령께 충성을 다합시다.






15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김정원 신부


ꡔ성령이여 임하소서ꡕ

부활, 우리 주님의 부활을 회상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즐겁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인해서 즐거운 날을 보내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천만 뜻밖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경이의 말씀은 다름 아닌 제자들을 떠나가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처럼 즐거움을 되찾았던 제자들에게는 두려움과 슬픔이 다시 쌓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주께서 떠나신다는 것이 그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대로 그들과 함께 그들 곁에만 남아 계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아마 우리도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주님을 눈으로 뵈옵고 그 목소리를 들으며 가까이 모실 수 있으면 그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런 생각이 옳지 못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 도리어 여러분의 마음을 근심에 싸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하자면, 내가 떠나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합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옹호자이신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습니다.”(요한 16,6-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떠나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한층 더 신비스럽고 힘있게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사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복음을 통해서, 그리고 성사를 통해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가까이 모시며 살았으면서 성령이 오시어 그들에게 통달함의 은혜를 주시기까지는 예수님을 참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이 오신 다음에는 아주 딴 사람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제서야 참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고 예수님이 그들 안에 영원히 머물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그 옛날 사도들에게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임을 알게 하셨고 그들이 듣던 바를 올바르게 깨닫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참된 신앙과 희망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약속하신 바와 같이 죄악이란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요 하느님의 사랑을 배척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의를 가르쳐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 성취하신 영광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며, 권력과 재산과 쾌락이라는 세상의 그릇된 표준들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추구할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승리는 이미 우리 주님의 것이고 인간들의 악함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확신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겸손하게 인내하며 살도록 성령께서는 권유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리 인생에 성령께서 꼭 필요한 분임을 깨닫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세를 받았고 견진성사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일상생활이 아직도 슬픔으로 지배되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성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일상생활의 의무와 인생의 고통과 시련을 대하는 태도가 성숙되지 못하였다면, 더구나 우리가 괴로운 인생살이를 비관한 나머지 세상을 피하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성령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것이나 덕을 닦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고 지옥과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성령은 또 다시 우리에게 필요한 분임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는 구원되었으나 그러나 구원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지금은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은총을 청해야 될 때입니다. 금년에도 성령께서는 주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완성하시고자 우리 인생에 내려오실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여러분에게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요한 16,13)라고 약속하신 주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틀림없이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는 성령이며, 오소서. 신자들을 한 한마음 한 뜻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이시여,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주께서 명하신 바를 사랑하고, 약속하신 바를 바라게 하시어 덧없는 속세에서도 참된 기쁨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을 두게 하소서.”






16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조순창 신부


ꡔ구원과 행복을 찾자ꡕ


오늘은 오순절에 신도들이 성령을 가득히 받음으로써 새 시대가 시작된 것을 경축하는 날이요, 교회 창립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멈ㄹ러 있어라’는 분부에 따라, 늘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습니다만, 한편으로 기다리는 희망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앞날에 대한 불안도 가졌습니다.

우리는 사실 새로운 발전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가졌으나, 지난 한 주간은 광주 일원의 사태로, 많은 희생의 보도를 듣고 마음이 아프며, 또한 걱정도 많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내일에 희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민주 정치의 발전과 사회 안정과 경제 성장을 바라며, 젊은이들에게 기대를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의 현실 그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으며, 국민 그 누구에게 기대를 할 수 있으며, 그 어느 사태가 바람직한 것입니까?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모습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공경하며, 서로 사랑함으로써 참 행복을 누리게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을 못 믿고 교만하여, 이웃과 담을 쌓고 탐욕에 차서, 서로 미워함으로써 온갖 고통과 비참과 불행을 겪게 됐습니다.

태초(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인류원조에게 갖가지 은혜를 주시며, 자유의 소중한 값을 체험하기 위하여, 금령으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시면서 “먹으면 죽으리라”하셨으나, 그 말씀을 못 믿고 오히려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마귀의 말을 믿고 죄를 지었습니다.

오늘을 불신시대라고 합니다. 서로 마음의 벽을 쌓고, 이웃과 담을높이 쌓고 살아갑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서로 못믿어하고, 근로자와 기업주가 서로 못믿어하고, 위정자와 국민이 서로 못 믿는 현실이 되어 불행은 더욱 커가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명을 거역한 것은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 때문이었지만,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서로 핑계를 댄 것 같이, 잘못의 죄의식은 없고, 책임감도 없으며, 참회보다는 남의 탓으로 돌리고, 참회할 줄 모르고,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더 큰 불행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분수에 맞지 않는 거을 탐하며, 얻은 것에 집착하여, 독선과 이기심 때문에 가진 것을 나눌 줄 모르고, 끝내는 너도 나도, 가진 자도 없는 자도 불행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이제 새날은 와야 합니다.

곧, 불신에서 믿어 주는 오늘, 분열에서 일치된 오늘, 미움에서 사랑으로 화합하여야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새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불신하던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가득히 내려오심으로써 진리를 위해서 몸바치는 자들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는 사도들이 됨으로써 인류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교만으로 하느님을 떠나고, 바벨탑에서 말이 서로 통하지 않음으로써 민족과 파벌과 지역 분파가 생겨, 분열과 투쟁을 거듭하던 인류의 역사 안에 일치의 성령이 오심으로써 말의 장벽이 무너지고 놀랍고도 감탄할 은사로 인류가 하느님의 새 백성으로 하나가 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자기만을 아는 이기심으로 질투와 미움이 생기고, 형이 아우를 죽이는 성경의 첫 살인 사건 이후, 처절한 전쟁의 역사 안에 사랑의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교회에서 고백성사로써 죄를 사해 주고, 서로 이해와 용서로 화해하며, 가진 것을 서로 나눔으로써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는 새로운 이상적 새 시대의 막을 열어 주셨습니다.

복음이 선포되고 새 시대는 시작되었으나, 하느님의 뜻과는 너무나도 먼 현실입니다. 제자들에게 내려오신 성령께서 오늘 우리 마음과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나라에 강림하시어, 불신과 이기심과 미움을 버리고, 믿음과 일치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참 구원과 참 평화와 참행복이 가득하게 되기를 간구합시다.

우리는 진정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복음ㅂ의 전파자가 되고, 나만 옳고 남은 그르다는 독선을 버리고, 단합하는 역군이 되어, 무엇이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사랑으로 희생하여 내놓을 수 있는 신자가 됩시다.

“오소서 성령이여, 믿는 이들 마음을 충만케 하시며,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더러운 것 씻으시고, 메마른 것에 물 주시고, 병든 것 낫게 하시고, 굳은 것 부드럽게 하시고, 찬 것 뜨겁게 하시고, 비뚠 것 바로잡으시고, 하느님 믿는 모든 이들에게 성령의 은사 선물 가득히 내려 주소서!”

(1980. 5. 25.)






17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김정진 신부


ꡔ성령의 은혜와 활동ꡕ

신자 여러분!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첫째는 인류가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아 새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날입니다. 둘째로 오늘은 가톨릭 교회가 탄생되고 또한 완전히 성숙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세와 견진을 받음으로써 성령의 은혜와 초자연적 생명의 활동에 힘입어 용이하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고 또한 성령을 받아 교회의 성실한 일원이 되어 평화와 기쁨 속에 백성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또 하느님을 백성에게 전해 줌으로 온 인류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늘나라에서 하나로 일치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도행전은 성령강림에 관하여 그 놀라움과 흥분과 기쁨의 모습을 극적인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사도 2,1-13). 즉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가르쳐 주신 모든 것을 깨닫고 확신시키기 위해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같은 소리 중에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 사도들은 온통 딴 사람으로 변하였고, 성령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여 사도들은 즐겨 용약하며, 군중을 가르치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입으로 숨을 내부시며 말씀하시기를 <당신들은 성령을 받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천주 성령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제일 먼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에 내려오셔서 예수님과 같이 살고 계십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고 영세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습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시는 등 예수님의 전생에는 성령의 인도로 점철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있어 시종 일관하였던 사랑의 정신은 오로지 성령의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천주 성부께서는 당신 독생성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가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헌데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예수님과 결합시키고 하느님을 가까이 뵈옵게 하시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성자와 성령은 사람의 두 팔과 같은 것으로서 성부께서는 이로써 우리를 포옹하고 계십니다. 성자께서는 단 한 번 인류의 역사 속에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에 나날 새로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주시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어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또한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드시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시켜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고 살게 하십니다.


성령이라 함은, 그 글자를 설명하자면 <성스러운 숨쉼> 또는 <성스러운 바람>이란 뜻입니다. 즉 <하느님의 바람> 또는 <하느님의 숨쉼>이란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실 적에 숨을 불어 넣으셨고 성령께서 위에 강한 바람과 함께 내려오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령은 하느님의 무한한 힘을 소유하신 숨쉼입니다.


태초에 하느님은 흙으로 아담을 빚어 숨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영세 예절 때 사제는 영세자의 얼굴에 세 번 입김을 불어 주며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부터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의 바람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적인 힘, 이 세상에 생명을 가져오게 하는 힘, 무엇보다 강력한 하느님의 힘을 생각하였습니다.


신자 여러분! 성령은 하느님의 강력한 힘이란 것이 사도들로 인하여 웅변이 증명되었습니다. 세차게 불어 온 바람같은 성령을 받자마자 사도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바깥 세계를 두려워한 나머지 문을 닫아거는 등 그처럼 겁이 많은 자들이었으나 이제는 당당히 군중을 향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모든 신자들에게 약속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의젓이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자신의 매력이나 뛰어난 웅변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 첫 번 설교 때 무려 3천명을 회개시켰고 두 번째 설교는 5천 명을 회개시켰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교리 서적이나 시청각 자료나 환등기나 영사기도 없었습니다. 오직 성령의 일곱 가지은혜로 힘과 용기를 얻은 사도들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사방에 두루 다니며 전파하였습니다.


교회는 여러 세기를 통하여 위험을 당하고 도전을 받았지만 언제나 균형을 잃지 않고 꿋꿋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성교회를 안전하게 인도하시고 교회의 혼으로서 활동하시며 지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임하소서 성령이여, 우리 마음에 용기와 힘을 주소서. 마귀와 세속의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어 마침내 영생의 해안에 무난히 다다르게 하소서. 아멘.






18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정덕진 신부

ꡔ성령의 활동ꡕ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여러분과 더불어 이 거룩한 축일을 경하해 마지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에집트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홍해를 건넌 것을 기념하는 축제가 바로 빠스카였습니다. 다음 성령강림은 그들의 또 하나의 축제인 펜테꼬스테 축일에 이루어졌습니다.


펜테꼬스테는 오순절이라고도 하며 빠스카 후 50일 후의축제를 말하는 것으로 이 축제는 옛적에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온 유대인을 대표한 모세에게 십계석판을 내려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유대백성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모두 준수하겠습니다”하는 서약을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기념하는 축제로 펜테꼬스테(오순절)라는 축제를 지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다음 베드로를 위시해서 모든 사람들과 그 외 많은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시자 한편 쓸쓸하기도 하고 서운한 생각도 있고 또 유대인들의 박해도 무서워하여 문을 굳게 잠그고 고개를 움츠리고 기도하며 맥없이 있었지만, 그러나 희망은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때 광경을 살펴보면 “마침내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 같은 소리가 별안간에 하늘에서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불길 같은 혀들이 그 자리에 나타나 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켜 주시는 대로 그들은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사도 2,1-4)


이것은 처음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강림하시던 때의 모습입니다. 강림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사도들은 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한 국가의 개국 기념일이 있다면 성령강림이야말로 우리 교회의 새 기원을 이루고 새 교회정신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날입니다. 여기 성령의 특징으로 세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강림하시는 순간 큰 바람과 같은 소리가 났다는 것, 불의 혀 모양으로 나타났다는 것, 즉 바람 불혀입니다.


1) 자연현상에서 바람은 얼마나 큰 힘을 가졌습니까? 부는 바람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도 없거니와 그 힘은 무한한 것입니다. 저항할 수도 없을 정도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째 모두 뽑힌다든가 모든 가벼운 물건은 다 날아가고 마는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2) 불의 힘은 모든 것을 태웁니다. 정화시킵니다. 소독을 합니다. 처리가 곤란한 더러운 것들을 태워버릴 때 그 고마움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3) 혀는 언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사상과 이념을 뜻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명과 심적 세계를 혀로서만 타인에게 발표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전달, 사상의 전달의 표상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자연 현상에서의 역할에서 미루어 성령의 작용은 너무나 뚜렷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사도들에게 넘치는 힘을 주셨고 죽음 칼 창 기타 모든 박해에서 이기고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신앙과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용기를 주셨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시자 세상은 선과 악이 뚜렷해졌습니다.

모든 부정과 불의는 물러가야만 했습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도록 사랑의 불을 사도들에게 놓아주셨습니다. 또 자기들의 진리를 혼자만 간직한 채 머무르지 못하게 되었고 전교 활동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견진을 이미 받았습니다. 세례 때에도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에게 주셨던 같은 은혜로 무장되어 자기의 신앙을 지키고 사회에 봉사하며 역경에서도 진리를 증거하며 전교 활동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19            성령강림대축일 <요한 20, 19―23>  '성령의 상징들'

최기산 신부


: 내 방에 약 15cm되는 쥐 한 마리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아침에 응접실에 나가 보니 온통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큰일이었다. 끈끈이를 사다가 이 구석 저 구석에 놓았으나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가지 단서를 남겨놓았다. 난초를 뒤집어 놓고는 뿌리를 파먹은 것이었다. 목이 마르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 놈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왜냐하면 물로 유인하면 걸려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날 밤 작은 물그릇을 방 한 구석에 놓고는 그 주변을 끈끈이로 온통 막아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나가보니 그 놈이 끈끈이에 걸려서 찍찍거리고 있었다. 쥐는 약은 동물이다. 끈끈이가 해로운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목이 말라죽을 것 같으니까 하는 수 없이 달려들었다 걸린 것이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에게 있어 물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성령을 물로 표현하는 이유는 영혼에게 성령은 물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ꡒ물은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탄생과 풍요를 의미한다ꡓ라고 가르친다.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시들어간다.


바람(숨) : 성령은 숨(바람)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숨을 쉬지 않으면 인간은 죽은 것이다. 뚱뚱한 사람 하나가 장가를 가서 첫날밤을 지내는데 어찌나 코를 골아대는지 그만 신부는 겁에 질렸단다. 그도 그럴 것이 코만 고는 것이 아닌 가끔씩ꡐ무호흡증ꡑ증세까지 보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코를 세게 골다가 잠시 아무 소리도 없으니 남편이 죽었나 걱정했을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숨쉬는 사람이다. 인간의 영혼도 숨 같은 성령께서 함께 계셔야 살아있는 것이다. 성령강림 때 성령께서는 바람소리와 함께 임하셨다. 바람소리와 함께 임하신 성령을 받고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졌다. 새 사람이 되었다.


이 세상에 바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어떤 과학자는 ꡒ신부님, 바람이 없으면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ꡓ라고 말한다. 바람은 무더위를 몰아낸다. 찜통 더위를 몰고 온 공기가 움직이지 않고 계속 머물고 있으면 많은 사람이 ꡒ헉! 헉!ꡓ 대다가 죽을 것이다. 그뿐인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몰고 온 공기가 움직이지 않고 몇달 계속 머물면 결과는 처참할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공기를 계속 맡을 때에는 답답하지만, 비 바람이 몰아쳐서 나무가 몇 개쯤 부러지는 상황이 지나고 나면 공기는 맑아진다. 바람이 더러운 공기를 몰아낸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우리에게 생기를 주신다.


불 :ꡒ도둑이야!ꡓ하고 소리를 지르면 나오지 않는 사람도 ꡒ불이야!ꡓ하면 나온단다. 불이 무섭기는 무서운가 보다. 그러나 불이 없으면 인간이 어찌 살겠는가! 불이 없으면 어떻게 문명이 발전했겠는가? 불은 열을 낸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불이 있기 때문이다. 불꺼진 방,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오는 방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불은 힘을 낸다. 불이 있기에 공장도 돌아가고 배도, 비행기도, 자동차도 움직인다. 전기가 없으면 어떻게 높은 빌딩을 올라가겠는가! 30층, 40층되는 빌딩을 걸어서 올라가면 등골이 빠질 것이다.


불은 빛을 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아니 등잔도 촛불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자. 불이 없으면 암흑의 세상이고 두려움이 몰려든다. 이외에도 불은 정화시킨다. 더러운 것을 태워서 깨끗하게 한다.

이렇게 인간의 생존과 관계 있는 불을 성령의 상징으로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이런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다.


복음의 메시지 :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하셨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려고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성령을 받으셨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셨다. 3년간의 일을 마치시고 이 세상을 떠나실 때가 되자 당신께서 받으셨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바로 오늘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날이다.


사도 바오로는 ꡒ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ꡐ예수는 주님이시다ꡑ하고 고백할 수 없다ꡓ(I고린 12, 3)라고 말했다. 심지어 ꡒ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ꡓ(로마 8, 9)라고 말했다. 세례와 견진성사는 성령을 받는 성사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있는가? 그것을 체험으로 느끼고 있는가?


우리는 신비의 교리를 많이 믿고 있다. 강생구속의 교리, 즉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교리를 인간의 이성으로 다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더구나 삼위일체의 교리와 성체의 교리 즉 하얀 빵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지성만으로는 깨닫기 힘들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굳센 믿음으로 나갈 수 있다. 신비의 교리는 신비한 방법으로 깨달을 수 있다. 즉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의 은사는 7가지 : (이사 11, 2―3)와 9가지(Ⅰ고린 12, 8―10)가 있다. 성령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은사와 열매를 주신다. 이 모든 은사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들이다. 성령의 열매는 9가지(갈라 5, 22)가 있다. 이는 개인을 위한 열매들이다. 요즘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성령은 공동체를 깨면서 활동하시지는 않는다. 사목자의 지도를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영광을 도모하는 사람, 돈을 요구하는 사람, 공동체를 깨는 사람, 종말을 얘기하면서 겁을 주고 희망을 꺾어 버리는 사람들은 요주의 인물이다.






20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 19-23)(공통)   성령으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자

유영봉 신부


묵상 : 사도들은 성령을 받아 예수가 그리스도(구세주)임을 깨닫고는 다락방을 박차고 나가 자신들이 깨달은 바를 힘차게 전하였다, 사도들의 말을 듣고 3000명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교회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성령을 받은 자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신(神)과 통할 수 있는 능력


합천본당에서 첫 사목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교리반에 잘 나오던 40대 부인이 2주째 결석을 하였다. 사정을 알아본즉, 죽은 시어머니 귀신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보통 때는 가만히 있다가 귀신 기운이 돌면 완전히 죽은 시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그 집을 방문했을 패에도 신기(神氣)가 돌아서인지, 목소리도 시어머니 목소리로 변할 뿐만 아니라, 촌수도 바꿔서 시아버지를 보고 “여보!"하며 삿대질을 하고, 남편을 보고는 "야, 이놈아"하면서 어머니 행세를 하였다.

 

우리는 주변에서 갑자기 '신이 내렸다'며 무당이 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신 내림 굿'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이 내려 무당이 되는 사람을 '강신(降神) 무당'이라고 하다. 어쨌든 인간은 신접(神接)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신과 통할 수 있는 신통력이 있는 존재인 것이다, 잡신(雜神)이 내리면 무당이 되고, 그리스도의 영(靈)인 성령이 내리면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힌 참 신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들이 성령을 받는 광경을 전해주고,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며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아라"하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교회의 개교(開敎)기념일


다락방에서 무서워 떨고 있던 제자들은 오순절 축일에 성령을 가득히 받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고, 다락방을 박차고 나와 용감하게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증언하였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성령을 받아 가르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000명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들 위에 성령이 쏟아부어져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으며, 깨달음을 얻어 새로워진 사도들은, 예수가 주님이시라고 세상을 향해 외쳤고, 그 사도들의 설교를 들음으로써 이 지상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도들의 무리가 생겨나,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며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도, 또한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를 통해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1고린 12, 3)고 하셨다.

성령강림축일은 교회의 생일이다, 이렇게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백성,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복음전파의 사도 되어야


우리가 참으로 성령을 받아,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된다."(로마 10, 9)

이는 나자렛 사람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죄의 용서를 받고,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아라"하시며,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셨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평화를 체험하게 되면, 그 기쁨과 평화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그 본질상 선교의 공동체인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本性上) 선교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2항)고 선언한 바 있다. 하느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셨고, 또한 예수님은 온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성령을 주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셨다.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도록 이 세상에 파견된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아듣고도 전하지 않는 사람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무덤에 가두어 놓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아직 한사람도 교회로 인도하지 못하였다면, 그 사람은 새순(筍)이 돋아나지 않는 죽은 가지와 같다.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요즘, 사도들로 하여금 생명을 바쳐 세상 곳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신 성령의 활동이 더욱 아쉬운 때다. 나는 살아있는 가지인가?






21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내가 왜 이럴까?”

서웅범 신부


요즘엔 별로 그럴 일이 없지만, 본당사목을 할 때에는 가끔 단체모임의 여흥시간에 노래를 불러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간 유행가 가운데, 가사가 제대로 다 기억나는 것을 하나 골라 불렀었는데, 그것이 그 이후 한동안 저의 단골 메뉴곡이 되었었습니다.

그 노래 제목은「장미 빛 스카프」, 그 가사가 「내가 왜 이럴까?」라는 것으로 시작되는 노래였습니다. 성령강림에 대한 묵상을 시작하며「내가 왜 이럴까?」라는 이 말이 화두(話頭)처럼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을 보면, 그 안에, 「내가 왜 이럴까?」라는 자문을 했을만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도들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대해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또 그 말을 듣는 사람들 역시, 사도들의 말이 자기네 말로 또렷하게 들림에 대해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가 왜 이럴까?」라는 생각들을 했었을 것입니다 (제1독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 바오로 사도 역시, 「내가 왜 이럴까?」라는 생각을 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박해하던 자신이, 이제 그분의 열렬한 추종자로 변화가 된 그 현실을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설명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


그리고 복음말씀에 나오는 제자들의 머릿 속에도 분명 「내가 왜 이럴까?」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숨어있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또 특히 그분께서 보내주신 협조자 성령을 체험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로 변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유명해져 있더라」라는 말처럼, 어느 순간 문득「변화된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기쁨과 희망을 느끼게 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제게는 너무나 신기하기만 한, 그래서「정말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가 왜 이럴까?」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하는 한 작은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담배에 관한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시작하여 근 13년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사람체질에 따라 흡연의 해악 정도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겠지만, 사실 제게 담배는 맞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피우면 골치가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피울 때의 그 기분과 습관 때문에, 그것을 끊지 못하고, 하루에 한 갑 이상을 족히 피우는 작은 골초였습니다.


그 사이 수없이 금연을 시도했지만, 또한 그 숫자만큼 결심은 여러 가지 이유로 쉽게 깨져버리곤 했었습니다. 그러기가 13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9년 전 어느 날 문득, 「이제는 정말 끊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그날 시도된 금연은 신기하게도 오늘날까지 잘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른 분이 피우는 담배연기 냄새가 싫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직접 피우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가 않습니다. 「정말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전에 수없이 끊고 다시 피고 할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적어도 이 담배문제에 있어서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내 의지, 내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의 신비」(?)가 신앙적이고 영적인 면에 있어서도 자주, 그리고 더 깊이 체험되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의지, 내 힘은 부족하지만 겸손한 마음과 성실한 실천 중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영육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소박한 일상(日常) 가운데서 커다란 의미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우리를 채우시고 변화시키시고 완성시켜주실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드려야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사랑이요 감사일 따름입니다」라고 말씀드릴 날이 쉬이 올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 온 누리가 새로워지리이다!






22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

강영구 신부


오늘은 우리 교회 최대 축일의 하나인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흘이 지난 오순절 날이었습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과월절을 지낸 후 50일이 되는 날 추수 때에 거둔 햇곡식을 하느님께 바치는 큰 축제일입니다

추수 감사절과 비슷한 축제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온 세계에 흩어져서 살고 있던 수많은 유다인들이 이 축제일을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보내 주시겠노라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 한 집에 모여서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세찬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하늘에서 불혀와 같은 형상의 성령이 모여 있던 제자들 위에 내려왔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모여 있던 그 집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은 이미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성령 곧 하느님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은 옛날의 제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고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순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여 왔던 사람들이 바람 소리 나는 곳 곧 제자들이 모여 있던 집으로 몰려왔습니다. 그 때 베드로 사도가 그들 앞에 나서서 예수 사건에 대하여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갈릴래아 지방말로 예수 사건을 증언했지만, 모여 온 사람들은 모두 자기네 나라말로 베드로의 말을 알아듣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11장에는 인류가 하나로 뭉쳐서 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데, 교만한 인간들은 바벨탑을 쌓음으로써 자신들의 능력을 하늘 아래에서 뽐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말을 흩어 놓으셨습니다. 그러자 인간들은 서로 말이 통하는 사람들 끼리끼리 모여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말이 통하지 않고 의사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말이 통하고 의사가 통하는 사람들 끼리끼리 뭉쳐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도둑놈은 도둑놈끼리, 협잡꾼은 협잡꾼끼리, 제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자기들끼리, 부자는 가난뱅이들을 끼워 주지 않고 부자끼리, 가난뱅이들은 가난뱅이들끼리, 권력자들은 권력자들끼리, 뭐 이런 식으로 유유상종하면서 서로 벽을 쌓고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말이 다르니 의사 소통이 되지 않고 생각이 다르니 정을 주고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끼리끼리 모여 살다 보니 집단 이기주의와 패싸움이 일어나고 세상은 갈가리 찢겨진 채 불행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이 내려오심으로 인하여 인간을 흩어지게 했던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장벽도 함께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빈부 귀천의 장벽도 무너지면서 거기 새로운 백성 곧 하느님의 백성이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민족인 하느님의 백성 안에는 언어와 민족의 장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를 주님으로 받들어 섬기는 새로운 백성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그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이 강림하신 이 날을 대축일로 지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데, 새로운 이스라엘이자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 날이기 때문입니다. 구세주 메시아의 오심을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구세주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분을 배척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12지파를 뿌리로 한, 옛 이스라엘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의 12지파 대신에 12사도를 뿌리로 한,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새 이스라엘 곧 교회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새 이스라엘 곧 교회를 태어나게 한 힘, 그 교회를 살아 있게 하는 힘은 오늘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불혀의 형상으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영 곧 성령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이미 성령으로 성별(聖別)되고 축별(祝別)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성령을 받았다는 표시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고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합니까? 우선은 늘 새롭게 태어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하느님의 능력인 성령으로 새롭게 되었듯이, 우리도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얽어매고 있는 구태(舊態)와 구습(舊習)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게으름과 안일, 안락과 나태 가운데 안주하면서 자기 자신의 틀을 깨뜨리려 하지 않는 사람들, 새로운 생활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미 받은 하느님의 영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들이며 새로움에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행전을 읽어 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사도 행전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과 백성들이 새로움에 도전하는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은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언제나 변화하며 새롭게 됩니다. 그러나 죽어버린 생명은 변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썩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살아 있는 생명 안에는 혼이 머물러 있고, 죽은 생명에는 이미 혼이 떠나고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은 생명은 악취를 풍기면서 썩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비추심에 따라서 사는 신자들은 늘 열심히 기도하면서 나날이 거듭나는 생활을 할 뿐 아니라, 그 삶에 의욕과 활기가 흘러 넘칩니다. 그리고 그 생활 가운데서 기쁨과 평화를 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면서 냉담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구태와 구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나태와 안락 속에 머물면서 변화되기를 싫어합니다. 혼이 떠난 시체가 냄새를 풍기면서 썩어 가듯이, 이런 사람들의 삶은 썩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십니다. 불안과 초조, 염려와 근심 걱정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지금 안주하고 있는 그 안일과 안락이 사라지거나 깨어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오는 불안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는 도전도 없고 발전도 없습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그런 사람들의 삶도 썩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 6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영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늘 거듭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들 위에 내리신 성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들을 허물고, 모두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은 일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영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일치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치의 사도가 되어서 하나 되려면, 너와 나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허물과 약점을 너그럽게 참아 주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나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도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서로를 용서해 주고 용서받음은 가장 확실한 일치의 방법입니다. 용서해 주고 용서받으면 너와 나 사이에 쌓여 있는 장벽을 허물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하나로 얼싸안을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이웃과 이웃이 서로를 용서하면 하나가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치의 능력이요 힘이신 성령을 슬프게 해드리지 말고, 서로 용서하고 받아 주는 생활을 함으로써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립시다.

 

그러나 서로를 갈라놓고 또 갈라지도록 이간질하고, 또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나 악령의 짓이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나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활을 하면 서로 갈라지게 마련입니다. 미워하고 증오하면 갈라지게 됩니다. 나의 안일과 편함만을 찾으면 갈라지게 마련입니다. 여기 지옥이 있고 지옥은 악령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악령이 활개 치는 곳에는 어둠과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성령의 강림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우리는 이 새 시대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성령이 활기 차게 활동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놓읍시다. 그리고 성령의 비추심과 인도하심에 겸허하게 순종하는 생활을 합시다. 여러분의 나날의 삶이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빕니다.






23                성령강림 대축일요한 20,19-23 (공통)

김영남 신부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주신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주시며 하시는 동작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셨다”는 말에서 “숨을 내쉬다”라는 표현은 창세기 2,7에 나오는 다음 말씀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새번역).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기 전에 아담은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스승 예수님의 죽음 후에 제자들의 공동체는 생명력이 없는 ‘죽은 공동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오늘 복음말씀의 시작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문을 닫아 걸고 있었을 만큼, 두려움에 ‘얼어붙어’ 있었다. 자기들 속에 폐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스승 예수께서 그들 한 가운데로 다가오시어 ‘당신의 평화’를 주시고 당신의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시자, 그들은 용기를 내어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요한 복음에 의한 “제자들의 성령 받음” 대목의 이런 역할은 성령강림 대축일인 오늘의 전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대목에서 더 강조되어 나타난다. 루가 복음서-사도행전을 보아도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고부동하게 믿게되고, 두려움 없이 적대적인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해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은 성령을 받게되면서부터이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죽어있던 것이나 다름없던 제자 공동체가 스승 예수님이 보내시는 성령을 받은 후에 생명력이 넘치는 공동체로 살아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전체의 구조에서 볼 때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출발점에 해당되는 사건인데, 사도들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앞으로 있을 증인으로서의 긴 여정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힘을 받게된 셈이다. 성령은 초대 교회의 탄생에서 뿐만 아니라, 그 성장 및 생활 안에서도 원동력의 역할을 하였다. 


성령이 우리의 교회생활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관련하여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의미깊은 말을 하였다: “성령이 없으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물며,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고,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에 불과하며, 귄위는 권력이고, 선교는 선전이며, 예식은 의고(고풍)주의이고, 윤리적 행위는 노예적 행동이다.”

참으로 날카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기에, 한 문장 한 문장 그 뜻을 나 나름대로 새겨본다.


“성령이 없으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삶이 아닐 때, 하느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는 관련이 없는 분이 되어 버린다. 말만 신앙인이지,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물며”: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체적 신앙과는 상관이 없고, 과거 역사 속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한 인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 이런 정도의 의미밖에 차지하지 못할 때, 자연스럽게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게 된다”. “성령이 없으면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에 불과하며”: 성령의 차원이 없다면 교회는 복음증거의 삶을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학교, 병원, 사회사업단체 등 수많은 단체들을 운영하는 거대한 조직체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한 곳에서 ‘권위’라는 것은, 능률을 올린다는 명목하에, 남을 누르기 위한 ‘권력’으로 변질된다. “성령이 없으면 선교는 선전이며”: 성령의 차원을 잃어버리면, 교회의 선교는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기쁨이 되는지를 전하는 ‘복음전파’가 아니라, 어떤 회사의 광고 선전처럼 되거나, 자기 단체의 세를 불리기 위한 방편으로 변한다.


성령을 떠나 사는 삶은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진리와 사랑”을 떠나 사는 삶이다(참조: “진리의 성령”에 관한 요한 16,13). “예수님의 진리와 사랑”을 떠나게 될 때, 교회가 생명력을 잃고, 매력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교회의 창립일이요 생일’이라고도 볼 수 있는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의 임하심을 정성스럽게 기도로 청해야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그런 ‘사랑과 진리’를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겠다. 


특히 오늘 복음의 시작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처럼, 무섭게 변모하는 세상의 흐름 앞에 겁을 먹고 자기 속에 움츠려 들고 있는 공동체의 경우, 또는 공동체의 창립 초기의 유연성과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거대해진 조직 속에 현실유지에 급급하며 경직되어 가는 공동체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생기’를 빼앗아 가는 주범은 바로 ‘죄’이다. 생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이 ‘죄’를 극복해야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로 그 길을 알려준다. 고해성사야말로 우리의 영적 생활에 생명을 주는 “주님의 생명의 숨결[영]”을 다시 받는 은총의 길이다. ‘성령’은 우리를 죄의 지배하에 있는 노예생활로부터 해방시키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숨결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준다.

“주님, 보내시는 당신 얼에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오늘 화답송 시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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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인자하신 천주성부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으니...”라고 시작하는 고해성사의 사죄경의 말씀은 오늘 복음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요한 복음에서 ‘성령’은 예수님의 죽음-부활의 선물(은총)이다 (참조: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으시지 않아서 영이 [아직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9]).






24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15,26-27:16,12-15>(공통) 감사와 봉사의 불을 지펴주소서

이규철 신부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 올 일들도 알려주실 것이다.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요한 15,26-27:16,13-14)

요셉 신부님 !이 가방 주인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연락을 할만한 주소도 없고 본명은 적혀 있으나 성함을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수원교구 공원 묘원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제의를 정리하고있는데, 한 할머님이 가방 하나를 가지고 오셔서 하는 말씀이었습니

다. 가방을 열어보니 미사 수건 하나, 프라스틱 성수병 한 개, 묵주가 들어있는 묵주 주머니 두 개, 기도서 한 권, 성교예규 두 권, 두툼한 비닐 봉투 하나, 그리고 손수건 하나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습니다.

  기도서를 뒤져보니 1960년 12월24일 영세, 1975년 6월 20일 견진성사, 1984년 10월 27일 혼인성사, 그 밑으로는 성모님의 충실한 딸이 되고 싶은 M..D‥‥ 본명은 마리아 도미칠리아? 마리아 도미니까? 마리아 데레사? 마리아 도로테아 ? 마리아 디모테아? 일 테지만 이름도, 주소도, 전화 번호도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면서 두툼한 비닐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십일조 교무금 카드와 새 성당신축 봉헌금 카드를 비롯하여 성소후원회, 제대회, 연령회, 군종후원회, 교도소후원회, 외방선교회, 우술라회(수원교구 신학생 후원회), 안나회(원주교구 자선단체 후원회), 주일학교 자모회, 양로원 후원협력자회, 보육원 (고아원)후원회, 꽃동네 후원회, 라자로 마을 후원회 등등 후원회 카드만 무려 열여섯개였습니다만 카드마다 주소와 이름은 없고 M.D.)로만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쓰면서도,「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 4)고 하신 뜻을 조용히 따르고자 카드마다 M.D)로만 기록하지 않았겠는가?

  소속 교구와 본당 이름은 명시되어 있었으나, 연락할 방법이 없어 혹시나 하고 기도서를 다시 펴 보았습니다. 기도서 본문이 시작되는 앞 백지에 「여러분 안에 계시면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의 성령입니다」(필립 2,13)라고 하신 말씀을 적어 놓은 것을 보면, 분명히 성령 은총 안에서 온전히 성령께 의탁하며 사시는 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곳 저곳으로 연락하여 가방 주인을 알게 되었고, 다음날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만나기 전에는 연세가 지긋이 든 분인줄로 생각했습니다만 막상 만나고 보니 신부로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남 1녀를 둔 30대 후반, 큰 자녀가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이요 막내가 아직 유치원에도 들어가지 못한4남매의 어머니였습니다.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기에 애기 키우는데 도움은 되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요즘 세상에 가족이 8명이나 되니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겠는가? 그런 가운데서도 온전히 믿음으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보며 신앙적으로 고맙기도 하고, 성령기도회를 지도하는 신부 입장에서 대견(?)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요셉 신부님! 「어떻게 애기 4명이나 키우십니까? 요즘 세상에‥‥ ? 묻고 싶으시지요? 저도 결혼하기 전에는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9남매의 막내로서 많다는 그 자체가 이런 저런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자라났기에, 애기는 하나만 낳고, 그 대신 열심히 하느님께 봉사하는 일이 더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공무원 집안에서?‥‥

  두 번째 아이를 가졌을 때 성령세미나를 받았습니다. 성령 안수를 받을 때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어머니로서 할 일이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내 마음대로 사는 세상인가? 내가 낳고 싶다고 낳고, 낳아 기른다고 안 낳을 수 있는 일인가? 내가 행복하고 싶다고 행복해 지고, 불행해 지기 싫다고 불행해 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누가 창조주이신 하느님 노릇(?)을 대신 하겠다는 말인가?」 요즘 시세(時世) 말로 하느님과 야! 자! 놀이를 하겠다는 말입니까?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1고린 12,4~7참조). 「여보시오,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르오! 여보시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여보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거요?」(루가 22,57~67)세 번이나 배반하던 베드로가,「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 2,36)라고 소리쳐 외치자, 그 자리에서 3천여명이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저 사람들 술에 취했군!? (사도 2,13)하고 빈정거림을 받은 제자들을 본받아 우리도 성령에 취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고통 중에도 희망을, 슬픔 중에서도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신앙증거로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살아 움직이는 크리스천 활동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고 하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인의 길일 것입니다.






25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 19-23> (공통)   신자들을 묶는 끈

김신호 신부


인간이 모여 구성된 사회 안에는 많은 행사들이 있게 마련이고, 사람들은 또 이러한 행사에 참석한다. 이렇게 볼 때 행사란, 인간의 모임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행사장에 모이는 사람들은 서로 아는 관계에 있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를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은, 서로 공통으로 갖고 있는 관심사나 이해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신자 한 분은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장소에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참석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요즈음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사람들을 모이게 아는 촉매제 역할의 상품이나 기념품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이러한 기념품이나 상품을 받기 위해 그런 모임에 많이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참석은, 주최측에서 보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사람을 모으는 목적만을 주최측이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도 주최측이 목적을 이루는데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주최측이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모이게 하므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도는 주최측의 의도를 만족시키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罪없는 상태가 平和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아 교회의 창립에 대한 의미출 생각하면서, 예수님께서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요한이 전하는 복음을 읽었다.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어떤 특별한 목적에서 모인 것이 아니고, 다만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함께 있으면 좀 덜 무서울까 하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능적인 이유에서 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런 목적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한 자리에 모여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이들에게, 분명한 목적의식을 심어주고 계신다. 즉 그들에게 평화를 기원함으로써 평화를 실현하라는 삶의 방향과 성령을 주심으로써 죄를 사하는 권한을 주고 계신다.

 

평화와 죄를 사하는 권한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 죄가 없는 상태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이러한 상태는 바로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기본 취지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고 이러한 죄 사함을 통하여 평화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이행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로부터 사도들이 위임받은, 교회를 창립한 목적에 해당될 것이다.

 

교회는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모였지만, 모인 목적은 동일하게 나타나는,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의 신비체에 속한다.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면 서로가 모르는 상태에서, 이러한 강한 연대감을 가지는 단체는 구성시킬 수도 없고, 또 구성이 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한결같은 상태로 지속되고 발전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어떤 제국이나 또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성격상 세속에서 형성된 실제의 현상들은 교회와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교회는 분명히 성령의 작품이라는 사실과 성령이 늘 함께 하는 단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敎會는 성령의 작품 

교회에 속하는 모두는, 그러므로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 나갈 수가 있게 되고, 이러한 성령의 작용은 신자 모두를 연대감으로 묶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바로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내려온다는 사실이 확증되고, 또한 우리들에게 교회의 특징을 이해하도록 인도한다. 교회는 이처럼 성령의 도우심으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도록 설립된 단체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이러한 화해와 일치에 역행하는 삶을 계속하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삶이 될 것이다, 성령과 함께하는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음미하는 계기를 가져야 하겠다.






26         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동) 죄를 사하는 권한

허영업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걸고 떨고 있는 제자들 사이로 들어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하신다. 예수님께서 건네신 평화의 인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자주 또는 전례시에 통용되던 관례적 인사였을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평화의 인사는 의미 심장하다. 왜냐하면 '평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첫 선물이다.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자신의 고별사에서 그 선물을 약속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14,27).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를 믿는 이는 모든 사물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해방된다.

   

  사실 평화는 전 인격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 평화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서 곳곳에서 평화는 구원의 개념과 일치해서 사용되고 있다(마르 5,34; 루가 8,48).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평화에 관한 일'로 요약하고 있다(루가 19,42; 사도 10,36).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는 평화의 하느님이시다.


  평화의 하느님께서는 전 인격, 곧 몸과 영혼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분이시며(1데살 5,23 참조),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좋은 것을 준비하시는 분이시다(히브 13,20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시다(에페 2,14-17 참조). 하느님과 함께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결과이다(로마 5,1.10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를 믿는 이들에게 준 풍성한 구원 은혜이다. 따라서 평화는 구원을 이루는 믿음에 결부되어 있다. 믿는 이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한가운데 서신 것처럼(요한 20,19) 제자들 삶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곧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유혹을 견디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체험도 믿음의 전제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면서 파견하고 계신다. 곧 이제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도들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사도들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구체적이거나 실제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오늘날 성령의 도움으로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 신앙인들도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을 충실히 따를 때 삶의 발자국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시공을 초월하시어 영원 속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감으로써 그분을 의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현존의 체험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오로지 의심하지 않고 믿는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활동하신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교회도, 신앙의 삶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에게 성령께서 내리시어 그들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셨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에게도 내리시어 그렇게 하시기를 열심히 바라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요한 1,33) 분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새 생명으로 탄생한 우리는 마음과 정신의 새로운 변화를 체험하고 온전히 회개해야 한다. 악의 사슬과 유혹을 끊어 버리겠다고 약속하고, 또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날 것을 다짐한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의해 새로운 삶에 인도된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을 없애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을 촉구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 새로워진 사람으로서, 그 새로워진 상태를 계속 유지해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세상을 초월하는 깊은 가치를 확인시켜 주고 진리를 깨닫게 만들어 준다. 그 믿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안에 변화를 일으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 높은 이상을 향하여 개인적인 만족을 미루고 늘 새로워지기를 요청하시며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기"(로마 12,2 참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삶 속에서 잘못된 기존 가치관을 버려야 한다. 나를 포기함이 바로 참된 삶이고, 죽음은 생명이며, 버림으로써 얻게 된다(마태 17,25; 19,21.29; 마르 8,35; 요한 12,24-25 참조)는 것을 확신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새로 태어남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론이나 개념으로가 아니라 구체적 삶의 실천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존재로서 새롭게 살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고 오직 그 신자들인 우리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으로 선택하신 사람들로서 '빛'으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마태 5,14-16 참조)

    부족한 우리 자신을 일깨워 주시고 채워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        게 하소서."


    제1독서/사도 2,1-11


  초대 교회 탄생을 알리는 성령 강림 기사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불 혀 모양을 하고 사도단을 중심으로 신자 공동체에 모인 집 안에 나타나신 사건과,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한 설교와, 초기 예루살렘의 신도의 삶을 전해 준다.

   

  ‘오순절'이라는 그리스어 단어, '펜테코스테스'는 '50'이라는 숫자를 뜻한다. 원래 오순절은 첫 보릿단을 수확할 때 지냈던 가나안 농경민들의 맥추절에서 비롯되었다. 히브리인들은 과월절 첫날부터 시작하여 7주간을 보내고, 시반 달(음력 5월) 6일에 이 명절을 지냈다. 루가는 이 오순절에 성령께서 내리신 사건을 초대 교회의 창립과 선교 활동에 연결시킨다. 이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얼마 안되는 소수 유다인들이다. 이들은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하였고, 이를 본 어떤 사람들은 이 신비로운 사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어떤 이들은 "새 포도주에 흠뻑 빠졌군." 하고 부정적 판단을 내렸다.

   

  그러자 사도단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나서서 군중에게 설교했다. 이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사람들은 삼천 명 가량이나 되었다. 이들은 이미 예루살렘에 돌아와 정착해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나누며 빵을 떼고 기도하는 일들에 전념하였다." 선교 일선에 나서기 앞서 예루살렘 초기 공동체는 조용하고 거룩한 생활로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성령 강림의 역동적이고 압도적인 묘사와 대조를 이룬다.

   

  원래는 감사제였던 오순절이 후에 구원사적 의미가 더해져서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선사받은 사건(출애 19--24장 참조)을 경축하고 그 시나이 산 계약을 갱신하는 축제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옛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거쳐 율법을 지키는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로 들어가게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성령 강림이라는 새로운 시나이 계약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구약의 성취요 완성인 이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결정적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을 루가는 강조하고 있다. “바람", “불"(2-3절)과 같은 표현도 구약성서의 하느님께서 계약을 발현하시는 장면(출애 19,14-19)과 결부시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신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새로운 계약과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2사무 22,16; 욥기 37,10; 에제 37,9-14; 요한 3,8 참조), '불 같은 혀들'(출애 3,2; 19,18; 에제 1,13 참조)이라는 표현도 하느님의 능력으로서 성령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온 집 안을 가득 채우고', '불 같은 혀들이' 사람들에게 '내려 앉았다'는 것은 성령께서 그들을 가득 채우셨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루가는 이 기사에서 신학적 사상을 전달하고자 했다. 초대 교회의 탄생과 시작은 예수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성령의 놀라운 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인종과 나라의 온갖 장벽과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이다.

   

  루가의 성령 강림 이야기는 두 가지 전승, 심령 기도 현상과 당대의 지리 학자들과 역사 학자들이 흔히 사용하던 인종 목록을 수용했다. 심령 기도 현상을 간략히 소개하면, 1세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종종 무아지경에 빠져 기이한 말들로 지껄이곤 했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밑도 끝도없이 횡설수설하는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이를 성령의 특별한 은사로 여긴 나머지 이를 체험한 이들은 자부심이 대단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열등감을 갖기도 했는데 바오로는 이를 여러 은사들 가운데 가장 낮은 은사로 평가 절하하였다.

  

  모든 민족이 사도들의 설교를 자기네 모국어로 알아들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이 사도들을 통하여 이 세상 모든 이에게 전파된다는 구원의 보편주의를 반영한다. “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프리기아, 밤필리아, 이집트, 또 키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방 사람들"(9-10절)에서 유의해서 보면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지경의 인종들을 나열해 놓았다.


  루가는 당대에 통용되던 인종 목록을 기록하면서, “유다"(9절), “유다인들과 유다교에 개종한 이방인"(11절) 등을 삽입함으로써 마치 이스라엘이 세계의 중심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구체화된 평화의 복음이 교회의 성교 활동을 통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세상에 퍼져 나간다는 루가의 보편적 구원을 시사하고 있다.

  

   “유다인들과 유다교에 개종한 이방인"은 9-10절에서 나열한 각 지역 출신 유다인들의 총칭이겠다. 곧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다인들"(5절)을 가리키겠는데 이들 가운데는 인종상의 유다인들이 있고, 인종상으로는 비록 이방인들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유다교를 택한 개종자들도 있다. 이 모든 표현은 복음이 유다인, 이방인, 개종자들, 이방인들로 확산되는 것을 예시하기 위해 루가가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제2독서/1고린 12,3ㄴ-7.12-13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말은 참된 영을 받았는지 여부를 가리게 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4절)은 '은사들이 배분되어'라는 의미이다. '배분'의 의미로 번역된 희랍어는 신약성서 전체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차이, 다양성'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다."(7절)는 표현은 각자에게 '영을 드러내는 은사가 베풀어진다.'는 뜻이다. 여기서 “영의 드러남"이라는 말은 바오로가 말하고자 하는 성령의 선물은 내적인 것이 아니라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것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주어진 선물이다. 그런데 그 다른 은총의 선물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이다(7절).

   

  여러 번역본들에서 바오로가 은사들의 교회적 유익성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원문은 다만 '유익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사실 모든 은사가 '공적인 유익'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은 분명히 영의 선물인 은사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것은 "말하는 사람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이에 비해 예언의 은사는 교회를 앞세워 자기 자랑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바오로가 은사의 공익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은사에서 '개인적인 유익'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몸과 그 지체들"(12절)의 비교는 바오로의 창작이 아니다. Titus Livius의 유명한 우화에는 이 비교가 기원전 490년 경에 Menenius Agrippa라는 사람이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바오로 시대에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우주를 거대한 몸으로 생각하여 우주의 수많은 존재들의 상호 관련성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바오로의 독창성은 이 "몸과 지체들"의 비교를 놀랍게도 “그리스도"에 적용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도 그렇습니다."라고 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12장 27절의 말을 보면 여기 12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몸은 단지 여러 지체의 집합으로가 아니라 그 지체들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생명체일 수 있게 하는 중심 원리로 간주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당신 인격 안에서 당신을 믿는 수많은 신앙인들의 무리를 하나의 생명체처럼 묶어 하나의 살아 있는 공동체로 남아 있게 하는 중심 원리로서 이해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의 독특한 교회관을 본다.


  그에게 교회는 단지 개개의 그리스도 신앙인의 집합체 정도가 아니라, 각 부분들이 긴밀히 통일 조직되어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유기체처럼, 개개의 신앙인들의 그리스도와 인격적 결합을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하나의 생명 공동체이다.

  

  13절의 “한 성령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비록 그 예식이 물로 거행되지만 궁극적으로 '성령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에서 '으로'라는 전치사는 세례의 결과 영세자가 누군가와 인격적으로 결합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해 준다. 그런데 이 결합은 동등한 자격의 두 인격체의 결합이 아니라 사람이 물 속으로 들어가 잠기듯이 수세자가 자신의 전 삶을 예컨대 '그리스도 안으로'잠기게 하는 결합이다.


   복음/요한 20,19-23


  “유다인들이 무서워서"(19절)는 제자들의 공포와 불안을 시사하는 데 역점이 있다. 곧 복음 사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됨으로써 그런 상태에서 해방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돌무덤에서 나오시고 제자들을 향해 닫힌 문을 열며 다가가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닫힌 세상을 열린 세상으로 바꾸시려고 닫힌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다가가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시어 한가운데 서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적극적인 주도권이 시사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 발현은 완전히 예수님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20절)이라는 인사말은 유다인들이 나누는 평상시 인사말이다. 그러나 약속한 “평화"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기원하시면서 제자들이 공포와 불안을 이겨 내도록 격려하시는 의미가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실제로 만났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루가 복음서에는 “옆구리" 대신 “발"로 표현되고 있다.

   

  제자들의 파견이 아들의 파견에 참여한다는 의미보다는 파견된 실존의 권위에 더욱 중점을 두는 의미다(20절). 곧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그리스도론적 파견 사상이 시사된 것이다.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22절)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생명'을 주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뜻한다.


  “성령을 받아라."(23절)라는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 성령은 '죄의 용서'에 관한 권한과 함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사실상 초대 교회에서는 믿는 이 모두가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받고 또한 죄의 용서와 함께 새로 태어난다고 여겼던 것이다. 죄의 용서에 관한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셨지만(23절) 그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권한이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한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선물인 동시에 위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죽음의 결실을 제자들의 권한으로 부여하신 것이다. 그 결실은 바로 구원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이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는 구원인 예수님의 보편적인 속죄로써 이루어지게 되고,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구원의 원천이 폐쇄된 채 그대로 머물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27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성령체험은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체험이다

신은근 신부



성령께서 오시던 날 제자들은 무서워서 숨어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기적의 자리에 있었고, 기적의 음식을 먹었던 그들인데 숨어있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중풍병자가 일어났던 현장을 목격한 그들이다. 그런데 무서워서 숨어있다니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은 당당하게 죽음의 길을 걸어갔는데 사도들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지만 순교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던 것이다. 순교자들에겐 하느님의 이끄심이 있었고,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힘과 용기가 있었다. 주님께서 주셨던 것이다. 하느님의 이 개입을 우리는 성령의 활동이라 말한다. 그러나 제자들에겐 아직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없었다. 성령께서 공적활동을 드러내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제자들이 어느 날 모습을 바꾸었다. 영적 힘과 에너지를 지닌 사람으로 돌변하였다. 죽음을 초월한 얼굴로 군중 앞에 나타났고, 당당하게 소신을 말했던 것이다. 며칠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넋을 빼앗기지 않고서 가능한 일일까. 실제 그들은 정신을 잃을 만큼의 체험을 했다. 전 존재를 흔들어버린 체험이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만났고 깨달았고 느꼈던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의 감각 속에 당신 존재를 심어주셨던 것이다. 성령체험이었다.

성령체험은 이렇듯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체험이다.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체험이다. 인간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망각하고 주님의 전능하심만을 보는 체험이다. 제자들은 이 체험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용감하지 앓을 수 있으랴. 성령께서 오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제자들만이 그런 은총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누구든 변화한다. 용감한 사람으로 바뀐다. 그분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확신을 갖고 인생을 살게 한다. 얼마나 귀한 변화인가.


제자들은 두려움을 극복한 뒤 평화를 체험한다. 일찍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평화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분은 발현하실 때마다 이 말씀을 하셨다. 평화만이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음을 아셨던 것이다. 성령체험을 한 제자들은 그 뒤 한번도 평화를 잃지 않았다. 그들은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다. 아무리 말은 물이라도 흐르지 않으면 썩기 마련이다. 고인 물은 상하기 쉽고 새 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끝내 말라버림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


제자들의 위대한 점은, 성령체험을 끊임없는 은층으로 만들었다는데 있다. 그들은 생활 속의 변화와 실천으로써 이 체험을 살아있게 했던 것이다.

신앙생활은 우리에게도 평화가 되어야 한다. 믿음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원인을 찾아야 한다. 두려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우리에겐 두려움을 극복하며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체험을 한 제자들에게 가장 큰 은총은 기쁨의 생활이었을 것이다. 막연한 두려움이 확실한 기쁨으로 바꿔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이 변화와 체험을 우리도 청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오신 아버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28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깨달음과 진리의 성령

함세웅 신부


구원사의 단계를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천주 성부의 창조 사업, 성자 예수의 강생 구속 사업, 천주 성령의 강림과 내적 쇄신 및 성화 사업, 오늘은 바로 이 세번째의 내용을 강조하는 축일, 즉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에 대한 개념이 사실 우리 신자들에게는 모호하고 애매합니다. 그것은 삼위 일체의 신비 자체가 오묘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변의 예로써 천주 성삼의 내용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 아기가 어머님 품에서 태어나서, 보호받고 양육되며 자라납니다. 그리고는 일정한 연령이 되면 철이 들고, 모든 것을 깨닫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아기를 낳아 준 엄마, 기르고 양육한 엄마, 자라나면서 깨닫게 해 주는 엄마, 틀림없는 한 어머니의 모성애에 기반을 둔 기능에 의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분명 다른 과정과 단계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아기가 철이 드는 과정, 깨닫는 과정을 거치는 완성의 의미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창조된 인간은 구약의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역사를 통하여 성장해 왔으며,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건장한 모습을 지녔지만, 아직 진리를 터득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신 다음에도 활동을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결단력과 행동할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힘이 세차게 바람처럼 불어와서 온 땅을 채우고, 사도들의 마음에 불꽃을 일게 하셨습니다.

 

모든 묵은 것을 치우는 세찬 바람, 그 세찬 바람은 하느님의 기운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불꽃은 또한 모든 묵은 것, 모든 어두운 과거를 말끔히 태우시고 정화시켜, 그야말로 새 시대를 전개시키며, 인간을 은총의 사람으로 만들어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창조, 그것은 분명 양심의 인간을 재촉하는 것이며, 그 무리들의 모임에 활력을 줍니다. 그 활력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어두움의 나와 빛의 나를, 겁과 두려움과 망설임의 나와 용기와 신앙과 확신의 나를, 완전히 구별해 주며, 미래의 나에게 박차를 가하는 희망의 불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강림 축일을 교회의 창립일이라고 전례에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계시는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서’라는 표현도 바로 이것을 의미해 주며, 또 다른 의미로 성령은 바로 ‘교회의 영혼'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정신 없는 인간, 영혼 없는 육체,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잃고 맙니다.


성령 없는 교회, 그것은 그 표현 자체가 모순이고, 그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런 모임은 관광이 나 오락을 목적으로만, 하루 또는 일정한 기간 동안 모이는 그러한 것의 가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정신력, 또는 영혼은 그 자체로서 인격 (Persona)을 이루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기능 하나 하나가 각기 다른 위격 (Persona)입니다. 이 서로 다른 위격이지만 똑같은 하느님이시기에 이 신비를 우리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동일성, 삼위 일체, 천주 성삼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모습대로 비슷하게 창조된 인간, 그 인간 안에서 성 아우구띠노는 바로 성삼의 모습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인간 정신력의 위대함, 이성과 감정과 의지와의 미묘한 관계, 그것은 분명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부의 기능과 작용은 확실히 구분되지만 동일체에서 연유되듯이 성부, 성자, 성령의 구원사에서 인간과 맺는 관계가 다르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에 의한다는 것, 이것을 우리는 합리적인 관계에서 이해하고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힘은 온 땅을 채우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을 증거하는 힘을 주시며,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은 바로 교회의 절대권을 보장해 주시기도 합니다. 바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칩으로 죄를 사하고, 맺고 푸는 천상적 권리를 교회가 받았고,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 의하여 계승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해 주신 성령은 사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신앙인들인 우리를 위한 것이며,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성령의 은혜로 충만한 기쁨을 느끼며, 새 시대에 새로운 신앙인으로서의 각오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내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 그들 자신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6-19)






29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기 전에 아담은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주신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주시며 하시는 동작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셨다」는 말에서 「숨을 내쉬다」라는 표현은, 창세기 2,7에 나오는 다음 말씀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새번역).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기 전에 아담은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스승 예수님의 죽음 후에, 제자들의 공동체는 생명력이 없는「죽은 공동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오늘 복음말씀의 시작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문을 닫아걸고 있었을 만큼, 두려움에「얼어붙어」있었다. 자기들 속에 폐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스승 예수께서 그들 한 가운데로 다가오시어 「당신의 평화」를 주시고 당신의「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자, 그들은 용기를 내어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요한복음에 의한「제자들의 성령 받음」대목의 이런 역할은 성령강림 대축일인 오늘의 전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도행전 2장의「오순절 성령강림」의 대목에서 더 강조되어 나타난다.

루가복음서-사도행전을 보아도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고부동하게 믿게되고, 두려움 없이 적대적인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해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은 성령을 받게되면서부터이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죽어있던 것이나 다름없던 제자 공동체가, 스승 예수님이 보내시는 성령을 받은 후에 생명력이 넘치는 공동체로 살아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전체의 구조에서 볼 때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출발점에 해당되는 사건인데, 사도들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앞으로 있을 증인으로서의 긴 여정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힘을 받게된 셈이다.


성령은 초대 교회의 탄생에서뿐만 아니라, 그 성장 및 생활 안에서도 원동력의 역할을 하였다. 성령이 우리의 교회생활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관련하여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의미 깊은 말을 하였다: 「성령이 없으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물며,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고,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에 불과하며, 귄위는 권력이고, 선교는 선전이며, 예식은 의고(고풍)주의이고, 윤리적 행위는 노예적 행동이다」


참으로 날카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기에, 한 문장 한 문장 그 뜻을 나 나름대로 새겨본다. 「성령이 없으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삶이 아닐 때 ,하느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는 관련이 없는 분이 되어 버린다. 말만 신앙인이지,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물며」 :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체적 신앙과는 상관이 없고, 과거 역사 속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한 인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스도가우리의 삶에 이런 정도의 의미밖에 차지하지 못할 때, 자연스럽게「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게 된다」. 「성령이 없으면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에 불과하며」 : 성령의 차원이 없다면 교회는 복음증거의 삶을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학교, 병원, 사회사업단체 등 수많은 단체들을 운영하는 거대한 조직체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한 곳에서 「권위」라는 것은, 능률을 올린다는 명목하에, 남을 누르기 위한 「권력」으로 변질된다.


「성령이 없으면 선교는 선전이며」 ; 성령의 차원을 잃어버리면, 교회의 선교는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기쁨이 되는지를 전하는 「복음전파」가 아니라, 어떤 회사의 광고 선전처럼 되거나, 자기 단체의 세를 불리기 위한 방편으로 변한다.


성령을 떠나 사는 삶은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진리와 사랑」을 떠나 사는 삶이다. (참조: 「진리의 성령」관한 요한 16,13). 「예수님의 진리와 사랑」을 떠나게 될 때, 교회가 생명력을 잃고, 매력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교회의 창립일이요, 생일」이라고도 볼 수 있는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성령」의 임하심을 정성스럽게 기도로 청해야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성령으로」새롭게 태어나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그런 「사랑과 진리」를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겠다.


특히 오늘 복음의 시작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처럼, 무섭게 변모하는 세상의 흐름 앞에 겁을 먹고 자기 속에 움츠려 들고있는 공동체의 경우, 또는 공동체의 창립 초기의 유연성과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거대해진 조직 속에 현실유지에 급급하며 경직되어 가는 공동체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생기」를 빼앗아 가는 주범은 바로「죄」이다. 생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이 「죄」를 극복해야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로 그 길을 알려준다. 고해성사야말로 우리의 영적 생활에 생명을 주는 「주님의 생명의 숨결(靈)을 다시 받는 은총의 길이다.

「성령」은 우리를 죄의 지배하에 있는 노예생활로부터 해방시키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숨결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준다.

「주님, 보내시는 당신 얼에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 (오늘 화답송 시편 중에서)






30              성령 강림 대축일 신앙생활의 살아 계신 원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강림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같은 사실은 예수께서 교회의 모든 내용을 만드신 분이며, 성령은 교회가 교회로서 존립하고 활동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성호경을 통해 성령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모든 일을 시작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언어와 개념상으로 어느 정도 묘사할 수 있는 성부와 성자에 비해 성령께 대한 이해는 그리 높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성령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삼위의 신비를 알게 되었으므로, 성령께 대한 이해도 성부와 성자를 분리해서는 불가능하다.

성령이 결정적으로 계시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나타내주는 장면이 예수 세례 장면이다.

 

예수의 세례는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예수 위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강림하여 하늘로부터의 말씀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한다.


예수 세례 장면에서 나타난 비둘기는, 메시아 위에 강림하여 새 창조의 순간을 여는 영을!

그리고 이 영을 받아 새롭게 탄생되는 메시아의 백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하느님의 부성적 사랑을 나타내는 표지이기도하다.

   

또한 교회를 세상에 탄생시키고 초대교회가 열렬한 사명으로 복음선포에 나설 수 있도록 이끈 것은, 예수 부활체험이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묻히신 예수께서「주님으로 부활하셨다」는 이 부활체험은 「주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신앙 고백이다.

따라서 부활체험은 다름 아닌 성령체험이다.

  

성령강림 보도에서 불로 표상되는 영(靈)은 사람들을 내적으로 정화하고, 그 안에 열정을 불어 넣어주며, 변화시키는 심리적 힘이며, 불혀는 하느님이 하시는 큰 일들을 전하는 선포와 신적 훈계의 선포를 가르킨다. 영(靈)은 사람들을 내적으로 변화시키고, 자유롭게 하며, 그들을 새 공동체로 모으는 하느님일 효력 있는 행위이다.

성령강림 때 성령은 사도들을 변화시키고 정화시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를 인도하는데 필요한 은사들을 사도들에게 주셨다.

 

언어의 은사는 말씀의 선포능력과 일치를 드러내는 표지로, 이 은사를 통하여 바벨탑을 전복시키는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사도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을 하였지만, 한데 모인 사람은 각기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었다. 영은 구별되는 사람들을 일치시키시는 힘인 것이다.


이러한 성령강림은 교회 시작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성장을 위해 계속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성령은 교회의 일치와 보편성의 근원일뿐 아니라, 교회가 복음 선포를 하는데 있어서 누리는 자유의 원천이기도 하다.

또한 성령은 갖가지 은사를 통하여 교회를 건설하고 성장시키며, 신도들로 하여금 자기 현존을 체험하게 한다. 은사들은 성령께서 자기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로서 상당히 다양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은 성령 칠은(七恩)이지만, 이 칠은은 7이라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를 존중하여 만든 것이고, 성령의 은사를 일곱가지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은사는 하느님이 주시는 무상의 선물, 은혜의 선사로 특별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신기하고 특수한 은사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이 영을 통해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을 총칭한다.


이 은사의 목적은, 첫째는 신자들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여 하느님의 몸이 되는 교회를 세우는데 있고, 둘째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위해서다. 모든 믿는 이는 한 세례로 한 성령을 받아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그리스도 몸의 성장을 통해 지체들 모두를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인간 성숙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

 

결국 성령의 은사는 다르지만 그것의 목적은 교회의 건설과 한 분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성령은 2천년 전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지금 여기 우리 안에서 구체화시키고 실현시키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고 믿음을 불러일으키시며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계승하고 성숙시키면서 활동하시는 분이다.

 

결국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살아있는 원리이다.

이러한 믿음 아래서 교회는 성령을 교회의 영혼이라고 한다. 인간의 육체가 영혼에 의하여 살아 있듯이, 교회도 성령에 의하여 살아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는 말은 결국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믿는다는 것이다.






31               성령강림 대축일 :   성령은 누구이신가


성령은, 그리스도의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인간성을 성부의 오른편에 앉게 하시어 영광스럽게 하신 원동력이시므로, 또한 그리스도와 결합된 모든 믿는 이들을 영광스럽게 해주실 원동력이시다. 그래서 교회 전통은 성령을 교회의 영혼이라고 한다. 인간의 육체가 영혼에 의하여 살아있듯, 교회도 성령에 의하여 살아있다는 말이다.

 

성령께서 교회의 魂이시라면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 역시 성령이시다.

성령은 성화의 은층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할 자격을 부여하시어 새사람이 될 힘을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성령께서는 사람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초자연적 덕성을 주시어, 사람이 구원진리를 올바로 믿게 하시고,그 믿음에 의지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허락하신 영생을 바라며, 모든 피조물 위에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열정을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은 신자 개인을 성화시키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교회를 성화시키신다.


예수께서 교회의 모든 내용들을 만드신 분이시라면, 성령은 교회가 교회로서 존립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분으로 교회 일치와 보편성의 근원일 뿐 아니라, 교회가 복음선포를 하는 원천이 되시는 분이시다.


         성령강림


교회의 전례력은 부활시기가 성령강림 대축일로 마감된다. 이는 성령강림이 예수부활과 별도의 사건이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강림과 함께 초대교회가 기쁘고 담대히 복음선포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부활 체험이었다.

그러나 예수부활 이후에도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조심스러운 상태에 있던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야 기쁘고 담대하게 이방인들과 유다인들에게 이 예수부활을 증거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성령강림과 예수부활은 서로를 비추는 빛으로 성령강림은 부활신비의 절정인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첫번째 증언(사도 2,14~36)을 통해 3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아 세례를 받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생활을 하게되는데, 이들의 모임이야말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강림일을 교회의 창립일로 기념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


성령강림은 교회의 시작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성장을 위해 계속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성화은총으로 오늘날에도 계속적으로 은사를 베풀어주신다.

성령의 그 여러가지 도움을 흔히 성령칠은이라 하여 슬기, 지각, 의견, 지식, 용기, 효경, 경외심을 일컫는다.


슬기는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세속 사랑보다 귀하게 아는 지혜를 말하며, 지각은 구원진리를 인간 지력의 한계 내에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의견은 선악에 대한 바른 판단력을 도우며, 지식은 믿을 것과 믿지말아야 할 것을 식별하는 은사이다.

용기의 은사는 신앙생할에 수반하는 모든 장애를 극복하며, 효경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더하게 하고, 경외심은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상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은사이다.

 

그러나 이 칠은은 완전을 상징하는 7이라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를 존중하여 만든 것이고, 성령의 은사를 일곱가지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은사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 특별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특수한 은사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거저 주시는 선물을 총칭한다.

 

이 은사는 신자들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여, 하느님의 몸이 되는 교회를 세우는데 그 첫번째 목적이 있고, 둘째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위해서다. 아울러 셋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결국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건설과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 하나가 된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 성령이 거처하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성령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며 그 은사를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여야 한다.






32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공통)   성령의 상징들


  내 방에 약 15cm되는 쥐 한 마리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아침에 응접실에 나가 보니 온통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큰일이었다.

끈끈이를 사다가 이 구석 저 구석에 놓았으나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가지 단서를 남겨놓았다. 난초를 뒤집어 놓고는 뿌리를 파먹은 것이었다. 목이 마르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 놈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왜냐하면 물로 유인하면 걸려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날 밤 작은 물그릇을 땅 한 구석에 놓고는 그 주변을 끈끈이로 온통 막아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나가보니 그 놈이 끈끈이에 걸려서 찍찍거리고 있었다. 쥐는 약은 동물이다. 끈끈이가 해로운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목이 말라죽을 것 같으니까 하는 수 없이 달려들었다 걸린 것이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에게 있어 물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성령을 물로 표현하는 이유는 영혼에게 성령은 물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물은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탄생과 풍요를 의미한다"라고 가르친다.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시들어간다.


바람(숨)

성령은 숨(바람)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숨을 쉬지 않으면 인간은 죽은 것이다. 뚱뚱한 사람 하나가 장가를 가서 첫날밤을 지내는데 어찌나 코를 골아대는지, 그만 신부는 겁에 질렸단다. 그도 그럴 것이 코만 고는 것이 아닌 가끔씩 ‘무호흡증' 증세까지 보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코를 세게 골다가 잠시 아무 소리도 없으니, 남편이 죽였나 걱정했을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숨쉬는 사람이다. 인간의 영혼도 숨같은 성령께서 함께 계셔야 살아있는 것이다.


성령강림 때 성령께서는 바람소리와 함께 임하셨다. 바람소리와 함께 임하신 성령을 받고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졌다. 새 사람이 되었다.

이 세상에 바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어떤 과학자는 “신부님, 바람이 없으면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라고 말한다. 바람은 무더위를 몰아낸다. 찜통 더위를 몰고 온 공기가 움직이지 않고 계속 머물고 있으면 많은 사람이 "헉! 헉!" 대다가 죽을 것이다. 그뿐인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몰고 온 공기가 움직이지 않고 몇달 계속 머물면, 결과는 처참할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공기를 계속 맡을 때에는 답답하지만, 비바람이 몰아쳐서 나무가 몇 개쯤 부러지는 상황이 지나고 나면 공기는 맑아진다. 바람이 더러운 공기를 몰아낸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우리에게 생기를 주신다.


  “도둑이야!"하고 소리를 지르면 나오지 않는 사람도, "불이야!"하면 나온단다. 불이 무섭기는 무서운가 보다. 그러나 불이 없으면 인간이 어찌 살겠는가! 불이 없으면 어떻게 문명이 발전했겠는가? 불은 열을 낸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불이 있기 때문이다. 불꺼진 방,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오는 방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불은 힘을 낸다, 불이 있기에 공장도 돌아가고 배도, 비행기도, 자동차도 움직인다. 전기가 없으면 어떻게 높은 빌딩을 올라가겠는가! 30층, 40층 되는 빌딩을 걸어서 올라가면 등골이빠질 것이다.

 

불은 빛을 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아니 등잔도 촛불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자. 불이 없으면 암흑의 세상이고 두려움이 몰려든다. 이외에도 불은 정화시킨다. 더러운 것을 태워서 깨끗하게 한다. 이렇게 인간의 생존과 관계있는 불을 성령의 상징으로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이런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하셨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려고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성령을 받으셨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셨다. 3년간의 일을 마치시고 이 세상을 떠나실 때가 되자 당신께서 받으셨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바로 오늘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날이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할 수 없다"(I고린 12, 3)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 9)라고 말한다.

세례와 견진성사는 성령을 받는 성사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있는가? 그것을 체험으로 느끼고 있는가?

 

성령의 은사는 7가지(이사 11, 2-3)와 9가지( I고린 12, 8-17)가 있다. 성령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은사와 열매를 주신다. 이 모든 은사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들이다.

성령의 열매는 9가지(갈라 5, 22)가 있다. 이는 개인을 위한 열매들이다. 요즘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성령은 공동체를 깨면서 활동하시지는 않는다. 사목자의 지도를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영광을 도모하는 사람, 돈을 요구하는 사람, 공동체를 깨는 사람, 종말을 얘기하면서 겁을 주고 희망을 꺾어 버리는 사람들은 요주의 인물이다.






33                성령 강림 대축일   거짓 평화를 주지 말라

최인호 베드로/작가


‘서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성베네딕토(480-547)의 생애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기도하고 일하는’ 베네딕토 수도자들의 규칙서를 남김으로써 모든 수도자들의 기초를 완성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의 전기를 저술한 성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베네딕토가 저술한 단 하나의 규칙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토는 뛰어난 분별력과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서술하였다. 그분의 성품과 생활을 더 자세히 알려 하는 사람은 그분이 행동으로 가르친 모든 내용을 이 규칙서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이 몸소 생활하셨던 것과 다른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숨겼지만 규칙서는 ‘분별력이야말로 모든 덕행의 어머니’라고 부른 그의 말처럼 ‘뛰어난 분별력’과 ‘명쾌한 표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베네딕토규칙서」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 아들아, 스승의 계명을 경청하고 네 마음의 귀를 기울이며 아버지의 훈시를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있게 채움으로써 불순종의 나태로 물러갔던 그분께 순종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거라.”

이 규칙서의 제4장에는 74가지의 계율이 있습니다.

“첫째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로 시작되는 계율은 5번째에 “거짓 평화를 주지 마라”고 가르칩니다.

그 당시 수도자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서로 평화의 입맞춤을 나누곤 했습니다. 베네딕토는 ‘손님을 받아들임에 대해서’란 항목에서 손님들을 진정 사랑의 친절로 받아들여야 하며 기도를 바치기 전에 하는 평화의 입맞춤은 ‘악마의 속임수’이니 위선적인 평화의 입맞춤은 하지 말라고 경계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어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두 번이나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두려움에 떨고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그리스도 평화의 상징인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두려움은 ‘어쩔 줄 모르는 기쁨’으로 변하게 됩니다. 주님은 붙잡히시기 직전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4,27).

주님의 말씀처럼 이 세상이 주는 평화는 베네딕토 성인의 표현처럼 ‘거짓 평화’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평화에는 손에 박힌 못자국과 옆구리에 찔린 창자국이 없습니다. 그것은 억압된 평온과 강요된 침묵의 거짓 평화인 것입니다. 인간 존재로서의 해방과 평등의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이 세상 권력자들이 외치는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평화를 빕니다” 하고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그 평화의 인사 속에 그리스도의 참평화가 깃들어있는지, 아니면 성인이 경계하였던 악마의 속임수인 거짓 평화가 깃들어있는지 진심으로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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