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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5월 30일 (금) 18:44
분 류 연중8-1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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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9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9주일



         13. 안충석 신부(다)/ 26                  14. 신덕(다)/ 31

         15. 이계중 신부(다)/ 32                  16. 교회의 번영을 사랑으로(다)/ 33



13               연중 제9주일   루가 7,1-10 (다) 백부장의 신앙

                                                                     안충석 신부



오늘 복음성경에 믿음이 두터운 백부장의 신앙생활 태도를 보니 지난 주일에 제가 만나뵌 분들이 저의 눈앞에 어리는 것입니다.



병자 영성체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자기 일생을 교육자로서 깨끗이 살으신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자기 슬하에 자손도 없이 사시다가 노년에 그만 중풍이 걸리신 채로 육신이 전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부인만이 자기 육신을 대신해서 모든 시중 일체를 돌보아 줄뿐입니다.



정말로 그 할머님을 뵈올 때마다 몸과 마음이 쇄잔할 정도로, 눈시울이 뜨겁고 아름다운 인간상을 보게 됩니다. 하루는 돌아가시겠다고 해서 부리나케 병자의 성사를 드리고 막 돌아서려는 찰나였습니다. 그 할머니는 피곤하고 지친 모모가 마음으로 저를 붙들고 오늘 복은 성경의 백부장처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그래도 할아버지는 더 살으셔야만 합니다.” 비록 육신은 거의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지만, 그다지도 지칠 정도로 두 몸뚱이 노릇을 해야만 했던 할머니였건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과 의지는 할아버지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저는 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간절히 간구 드리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생 6․70평생 부부로 육신이 쇠잔할 때까지 살아오다가 이젠 중풍으로 두 몸뚱이 역할까지 죽도록 시달리면서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삶이며 인간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삶의 의지가 이런 사랑의 대인관계가 아닌가? 현대인들은 이런 사랑의 대인관계를 끊어버리고 사느니, 못 사느니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이 세상에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라도 엿본 듯이 저의 가슴은 뭉클하였던 것입니다.



지난주일 본당 신부님의 강론 말씀대로 동대문 지역 성당 건립을 위해 본당 신부님과 제가 여러분들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그런 감정을 느꼈었습니다. 방금 말씀 드린 중풍환자인 남편을 섬기는 할머니처럼 모두들 이 세상을 살아나아 가시기에 직장에서 가정에서 지치고 피곤한 몸을 이끄시며 몰려오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그분들에게 중풍 걸린 남편을 섬기시는 할머님처럼 이 세상 살아 나아가시는 삶의 지주가 무엇이냐고 무슨 힘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나를 밤늦게까지 이야기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일상생활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넓고 넓은 이 나라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밀집해 있는 동대문 지역에 기십만의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눌 재물이 없다는 것만으로 나는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안해도 된다는 말인가?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든지 나만 잘 살려고 한다면 나 자신도 살 수 없는 세상이라면 이젠 무엇인가 다른 생활 태도로 시급히 바꾸어야 할 때가 아닙니까? 너와 나 우리가 같이 살 수 있는 공동 삶의 터전을 지금 당장에 눈앞에 보여 달라는 동대문 지역 기십만 명의 부르짖음을 왜 어째서 우리는 외면하여 버리는 것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중풍이 걸리셨나 귀가 먹으셨나 도대체 저들의 소망을 어떻게 하실 작정이신가? 그것을 못 들으실 리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에게 그런 일을 전적으로 맡겨 놓으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였다고 나 아닌 다른 영혼들을 사랑의 증인으로 하느님 앞에 데려갈 것입니다. 나의 영혼 구하는 길이 보다 더 좋은 길이 없음을 인간 그리스도의 지상생활이 너무나도 잘 증명해 주지 않습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세상 재물을 하느님 앞에 가져갈 수는 없는 일이며 다만 그 부정한 재물로나마 이 세상 살아 있을 동안에 부지런히 벗을 만들어 그 인간들을 증인들로 하느님 앞에 데려갈 수 있을 뿐입니다.



정말로 이 세상을 잘 살 것을 믿으려고 나의 곁에서 서 있던 선의의 인간들은 외인과 구별되지 않은 위선의 신자생활 태도에 망설이고 놀라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와 나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공동 사람의 터전인 교회를 통한 진정한 나의 살길을 내게 보여 달라는 생사의 외침을 신앙인들 이라면 어떻게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도 모른 체한단 말입니까?



우리들은 자유와 살길을 찾아 월남할 때 또는  6․25전란 때우리 생명의 일부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우리 재산을 모두 내동댕이쳐도 우리 육신 생명 하나 살자고 피난살이의 피눈물나는 역사의 진리를 깨달은 체험자들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생활능력 하나로 그야말로 맨손으로 나의 피와 땀과 수고로 오늘날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재물의 한계를 체험하고 굶주린 창자를 빵 한 조각으로 채우며 재물의 귀한 것을 뼈저리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때 우리들의 신앙은 우리 일상생활의 의지와 지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지주가 과연 신앙생활을 파묻어 놓고 또는 은행에 저금해 놓고, 통장 하나들고 평생 쓰지 않고, 그러다가 엉뚱한 사람한테 도적 맞는 것처럼 죽을 듯이 날뛰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때 가난한 이웃 사람이 오히려 위로의 말을 합니다. “그 구멍에 돌멩이를 파 놓고 금 덩어리라고 하고, 부도가 난 공수표라도 진짜 수표로 알고 살면 될 것이 아닙니까? 어차피 그것이 진짜 금 덩어리이건 진짜 수표이건 이 세상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줄 정도로 쓰지 않을 것이니까.” 하더랍니다.



몇 백 몇 천만 원의 재산이 있더라도 쓸 줄 몰라서 가난한 우리와 이 세상 생활이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정말로 우리들이 현재 당장 갖고 있는 재물이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살아가는 데 대체 얼마만큼 도움을 주고 있단 말입니까?



기실, 우리들은 지금 현재 전쟁의 체험자답게 살아나가고 있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바야흐로 우리 세대가 가기 전에 우리가 체험한 인간 역사의 진리를, 우리 삶의 능력을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만 합니다.



전란 속에 육신 생명과 영신 생명을 지켜온 피와 눈물로 값있게 번 재물을 값있게 쓸 줄 알아야만 합니다. 전란 속에서도 잿더미 위에서 맨주먹으로 오늘과 같은 피눈물나는 재물을 얻고 살아갈 수 있는 꿋꿋한 생활 능력이나 자기 부모님들의 그런 생활 능력이나 신앙의 유산이란 내 부모님들의 피눈물나는 재산으로 눈에 보이는 교회를 지어온 그 성당에 다니면서 기구하며 일하면서 그런 생활력과 신앙을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재물의 유산만 물려준다면 3대 가는 재벌이 없다는 말처럼 뜬구름이나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대체 남은 것은 또 무엇입니까? 부모님의 생활 능력이나 신앙의 유산이 눈앞에 보이는 교회 하나 없이 멀리 떨어진 성당에를 여러분의 자녀들이 다닐 수 없어 그들의 신앙생활은 물위에 기름 돌 듯이 동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성당 거리만큼이나 그들의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이 날로 따로따로 멀리 떨어져만 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 나이가 되 때 과연 여러분만큼이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는지 여러분 자랄 때와 지금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는지 여러분 자랄 때와 지금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비교해 보시면 잘 알 것이 아닙니까? 지금 이 미사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을 위해서는 동대문 지역에 성당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여러분들은 성당에 오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대문구에 사는 기십만 명의 외인과 여러분의 자녀들과 그 숱한 냉담자들을 위해서 아들 딸 출가시키듯이 불가분 분가를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이런 이야기로 시작해서 여러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몸에 지셨던 패물이나 귀중품까지 대여섯 개 내 놓으시고 곳곳에서 오늘 복음성경의 장면처럼 두터운 믿음의 백부장 같은 분들을 얼마든지 만나 뵐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할머님은 혈혈 단신으로 자기 삶의 지주는 그리스도란 듯이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살고 있는 전세 20만원을 몽땅 바치시는 데는 정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께서는 자기 패물과 현금 5만원을 바치고 더 가진 것이 없어서 그 날부터 보따리 장사를 하여서라도 바치겠다고 오늘도 거리를 헤매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전세 10만원을 빼어 쪼들릴 대로 쪼들리는 자기 생활 속에서도 2만원이란 자기 재산의 큰 부분을, 조금 돈 있는 이들에겐 2백 만원, 2천 만원에 달하는 돈을 선뜻 내 놓으실 때 저에겐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그들에게만 너무 큰짐을 지우는 것이 아닌가?



극도의 빈곤을 겪고 있는 사람은 필요한 것을 재물에서 얻어 가질 권리가 있다고 이번 공의회 사목헌장에서 말씀하셨는데 신앙이란 그들에게 가뜩이나 살기 어려운데 그들에게만 그런 큰 부담을 전담시킨단 말인가? 신앙이란 그들을 괴롭히는 것인가? 오히려 그들에게는 재물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어디 여러분들이 답변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그들의 삶의 지주가 신앙이란 것을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눈에서 역력히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한편 의식주 걱정 안하고 제집이라도 버젓이 지니고 있는 자들은 너무나도 비례가 맞지 않으니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또는 우리가 살 내 짐을 짓겠다는데 자기 월급봉투는 자기 나름대로 다른 데에 모두 쓰고 빈 봉투를 덜렁 집에 들고 들어와서는 아내와 자녀들이나 자기 가정을 사랑한다는 말뿐이라면 그게 무슨 사랑이냐고 당장 야단이 날 것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우리의 본래 집인 이 본당에 오셔서 하느님과 이웃을 한집안 식구로 사랑한다고 기구를 바칠 때 나는 내 자신의 집이자 하느님의 집을 짓는다는, 용도가 명확하고 주변이 눈에 보이는 목적을 위해 나는 무엇을 주저하고 망설인단 말입니까?

우리 일생의 단 한번 나의 필생의 사업으로 이런데 나의 재물은 안 쓰고 “온 세상을 다 얻는다 해도 자기 영혼의 해를 입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들은 집안을 통하여 이 육신 생명과 재물의 한계와 귀중함을 체험으로 깨달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깨달은 진리를 위해서 영생을 위해서 우리는 전란 때처럼 우리 재산을, 우리 생명을, 자유 생명, 아니 영생을 위해 투자하는 구령사업에 손쓰실 수가 없으시단 말입니까?



이제 우리 세대는 어느새 황혼이 깃들고 내일의 찬란한 영원한 생명인 태양이신 주님의 생명으로 새벽을 기다립니다.

언젠가는 오늘 복음 성경에 중풍들린 사람처럼 우리 육신이 굳어져 버려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 육신 생명과 영신생명 모두의 주인일진대 그에 대한 신앙을 거부하는 세상은 영원한 죽음의 생지옥 같은 세상뿐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동대문 지역에 그리스도께서 거처하시고 우리가 거처할 공동으로 같이 살 수 있는 삶의 터전을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오늘 복음의 백부장처럼 두터운 믿음으로 성실한 대답을 들으십시다. 이 미사 중에도 이 미사 드리는 신부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성체성사라는 물질로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어 내려오시는 성체를 높이 드시고 그야말로 기막히는 봉헌의 큰사랑을 외치십니다.

“보라! 천주의 어린 양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소이다.” 하실 때 과연 여러분들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실 것입니까?



 오늘 복음에 백부장 대답처럼 “주여 내 안에 주를 모시기에 당치 못하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하시지 않습니까? 저 피 흘리시는 십자가상 사랑으로 당신 생명을 주시고 또 비천한 떡과 술의 물질 현상으로까지 자기 자신 전체를 내어 주시는 주님의 큰사랑을 거절하시는 분은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성체를 모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의 피와 살이 안 되는 것은 우리가 음식을 안 먹으면 육신 생명을 지탱할 수 없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살으시는 주님의 집을 우리가 마련 못한다면 주께서 우리 일상생활 속에 함께 거처할 곳은 대체 어디란 말입니까? 여러분 가정에서 한 식구가 탄생하였다 해서 더 가난하고 못 살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새로 난 아기 때문에도 한 식구의 생활 능력이 더 강하여지고 더 벌어야 하지를 않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우리 가정의 한 식구 이상으로 알고 생활 하셔야만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성경에 나온 백부장 대답처럼 “주여! 내 집에 주를 모시기에 나는 당치 못하오나, 그러나 한 말씀만 하시면 내 종이 곧 낫겠습니다>” 하고 성실과 진실로 대답하십시다. 그 때 주께서는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쪽과 서쪽에서 몰려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더불어 천국 잔치에 참석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 나아가 거기서 이를 갈며 땅을 치며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백부장 같은 두터운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돌아가 보십시오. 믿음대로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주께서는 백 배 천 배 만 배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바로 그 시각부터 우리들의 삶은 나아질 것입니다. 아멘. 









14                 연중 제9주일   루가 7,1-10 (다) 신덕



“주여, 내 아들이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Capharnaum 이란 도시에 Herode 의 신하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린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좋다는 약은 다 써보고 의사도 골고루 다 불러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때마침 영적 행하시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듣자 유일한 희망을 걸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길을 떠났습니다.



하루 길을 걸어서 Cana 촌에 이르러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빨리 Capharnaum 으로 내려가서 내 아들을 고쳐주십시오.” 하고 예수께 청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길 : “기적과 놀라운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합니까?” 하시며 오히려 핀잔을 주셨습니다. 좀 이상합니다. 그러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보여주시기 전에 마음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마음 준비는 특히 겸덕과 신덕입니다. 먼저 겸덕을 시험하시느라고 핀잔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은 “주여, 내 알들이 죽기 전에 내려오셔서” 하며 겸손되이 청했습니다. 겸덕 시험에 패스했습니다.



둘째 시험은 신덕입니다. “돌아가십시오. 당신 아들은 살았습니다” 하셨습니다. 아들이 금방 죽을 것만 같아서 조급한 마음으로 빨리 내려 가시자고 했는데 이런 대답밖에 듣지 못한 대신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 같았으면 “여하간 내려가십시다. 내려가서 손이라도 한 번 덮어 주십시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신은 “예수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종들이 마중 와서 아들이 완쾌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이것



이 오늘 주일 복음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완전하였던 대신의 신덕을 예수 친히 완전케 해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신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 능히 죽어 가는 아들의 병을 낫게 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기적만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더러 내려가시자고 졸라댔습니다. 불완전한 신덕이었습니다. 사도 성 도마의 믿음을 비슷했습니다.



일찍이 예수 친히 도마에게 “너는 보고야 믿으니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더욱 행복하다” 하셨습니다. 대신의 불완전한 신덕을 완전케 하시려고 “기적과 놀라운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합니까?” 하셨던 것입니다. 이같이 불완전한 신덕을 가진 사람은 대단히 많습니다. 요새도 가끔 “복음에 기록된 종류의 기적이 오늘 우리 앞에서 이루어진다면 누구나 다 하느님을 믿을텐데” 하며 기적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 친히 비유로써 말씀하십니다. 부자와 나자로의 얘기가 그 것입니다. 호의호식하던 부자도 죽고 그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던 거지 나자로도 죽어 나자로는 천국에 가고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다는 얘기가 그 것입니다. 부자 말이 “나자로를 우리 집에 보내어 남은 식구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데로 오지 않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만 들으면 되지 않느냐” 하였습니다. 부자는 또 말하기를 : “아닙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가면 꼭 보속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 “저들이 모세와 예언자의 말도 믿지 않았다면 죽은 삶 중에서 누가 간다 해도 믿지 않으리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덕이란 것은 기적으로 강요당하지 않습니다. 기적으로 강요된 신덕은 아직 불완전한 신덕입니다.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대로 올바른 신덕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그 것입니다. 오해 사람들은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하고 믿는 것은 모두 다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덕은 가르치신 하느님의 권위 때문에 아직 확실히 깨닫지 못한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그것입니다.



내가 믿는 것은 내가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가르치셨으니까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절대적인 순응을 요구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조건 없는 신덕을 요구하십니다. 대신의 신덕은 조건 없는 신덕이 되었습니다. 무수한 순교자들의 신덕도 이런 조건 없는 신덕이었습니다. 사도 성 요한이 말씀하신 :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신덕이니라”하시던 그 신덕이었습니다. 우리도 조건 없는 신덕을 고백하면서 신경을 외웁시다. 아멘.











15           연중 제9주일   루가 7,1-10 (다) 조언이냐 표양이냐

                                                                이계중 신부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에 ‘웅변은 은이오 침묵은 금이라’ 하였습니다. 사실 아무리 훌륭한 웅변이라 할지라도 착한 표양 만큼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 잡아당기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웅변은 사랑을 선동하지만 표양은 사람을 끌어 잡아당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웅변이나 강론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백만의 군중을 한 손에 쥐게한 케사르의 웅변이나 그리스도 자신의 산상 강론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감명을 주고 그들의 마음을 끌어 잡아당긴 것은 그 산상 강론 보다 그의 표양이었습다.



우리 교우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못박기 위해 군인들을 지휘하던 백부장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그리스도의 착한 표양과 훌륭하게 맞이하시는 죽음을 보고 그만 감동되어 ‘과연 천주님의 아들이구나’하고 감탄하면서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묵묵히 계셨는데 어떻게 백부장을 회두시켰습니까? 이는 그리스도의 침묵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을 가진 그의 표양의 힘이었습니다.

우리도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말로 들어내기에 앞서 실제 행동으로 들어내도록 힘서야 하겠습니다.  내가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내 말이나 태도나 행동을 보고 놀라서 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착할 수가 있느냐? 고 이상히 생각하고 알아볼 때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착한 말과 태도와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때는 무조건 그 사람도 천주교 신자가 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주님을 공경하는 증거이고 천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교육시킬 때도 부모들의 좋은 표양은, 가령 화목하고 기도하고 부지런함을 보여주는  것은 몇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표양은 반드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랫사람의 좋은 표양도 윗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세한 교우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 자녀의 좋은 표양을 보고 천주님을 믿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좋은 표양은 자기나 남에게 극히 이로운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악한 표양은 극히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탑을 쌓기는 힘들어도 허물기는 쉽듯이 좋은 표양이 남에게 그 영향을 즉시 미치게 합니다. 특히 판단력이 약한 어린이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정결하지 못한 소설, 영화에 나오는 상스러운 말, 나쁜 만화책 등은 전염병의 만연과 같이 어린이들의 순직하고 정결한 마음을 물들게 하고 감수성이 강한 학생들과 젊은이들을 다시 일어나기 어려운 함정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어린이들에게 악한 표양을 주는 사람들에게 엄히 경고하시어, ‘나를 믿는 이 미소한 자 중 하나라도 범죄케 하는 자는 차라리 제 목에 나귀가 돌리는 맷돌을 메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좋은 표양을 보여줌으로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냅시다.











16          연중 제9주일  루가 7,1-10 (다) 교회의 번영을 사랑으로



세계가 한결같이 물질문명만을 추구한 나머지 오늘날의 인간들은 무의식 혹은 물질문명의 유혹에 빠져있음을 봅니다. 가정은 파괴되고 도덕적 생활 윤리생활은 그지없이 외면되어 인간의 격화, 육욕생활의 합리화, 향락주의, 성 윤리의 혁명, 투쟁과 잔인에 대한 쾌감등을 선동하여 도덕적 타락을 재촉하고 있으며 또한 신의는 땅에 떨어진지 오랩니다. 이와 같이 이기적 사욕이 있는 곳에 다툼이 있게 되고 자기의 이익만 구하는 곳에는 불화 이외에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스위스의 힐티(Hilty, Carl)가 「허영은 인간의 천성 중에서 가장 악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악덕, 질투, 증오, 거짓, 부정의 온상이다」라고 한 말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당초에 하느님의 영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낙원에서 추방당한 이후 인간의 모습은 한결같이 추하기만 해졌습니다. 인간은 파스칼이 말한 대로 천사와 짐승의 생리를 아울러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적인 요소보다 짐승의 요소가 더 강한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비추이고 있음을 나의 편견적인 의식구조에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자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만 하면 그 이상 살육을 감행하고, 자기의 먹을 것, 슬 것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대대로 먹을 것, 쓸 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부정을 저지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인 것 같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욕심의 바다에서 날마다 썩은 냄새가 흘러나와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돈과 물질에 대한 욕심의 바다에서 날마다 썩은 냄새가 흘러나와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돈과 물질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게 커질 때, 또 지위와 권력에 대한 애착심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강력해질 때, 우리 인간이 얼마나 더러워지고 또 악착스럽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피부로 날마다 의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쩌면 차마 저럴 수가 있을까」하는 실망과 탄식을 늘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죄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소유하는 일에만 집착하고, 주려고 하지 않을 때 땅 위에는 언제나 부정, 빈곤, 증오, 다툼이 끊이지 않을뿐더러 우리를 분열시켜 마침내는 적을 만들 것입니다.



오늘의 문명구조, 문화구조, 경제구조, 정치구조, 사회구조 모두가 욕심이 잉태하여 낳은 사생아적인 사회구조인 것입니다.

근대화라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합니까? 정치적 경제적인 발전을 의미합니까? 「슈바이처」는 인간정신이 성장하지 않는 여하한 진보도 진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현대문명의 불행한 특징은 인간정신이 성장하지 못하고 몰락하였다는데도 불구하고 외면적인 문화가 전진한데 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사막도시의 고층 건물 같은 것은 문화일 수 없습니다. 후진국의 강력한 근대화란 인간정신을 억압해 놓은 채 그러한 고층 건물만 급속히 이룩해보자는 노력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발전을 촉구한다고 무리한 사회윤리를 강요합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개인 정신의 성장에서 오는 즉 개인윤리의 바탕에서 솟아난 봉사정신에서 온 사회윤리만이 참다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채찍질 밑에서 수행된 인간윤리는 인간정신의 몰락만 더욱 촉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충족할는지 모르나 결코 행복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역시 확신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일시적이요 곧 시들어 가는것 뿐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참다운 행복과 진수를 맛볼 수 없습니다. 어떠한 수작을 부린다 하더라도 모조(模造)이며, 형식적인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이 더 할 대 없는 행복인양 착각하고 지내는 정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행운이나 명성이나 권력 부귀 따위는 표면적이고 조건적인 것이어서 만족보다는 불만이 있고 그것이 무너지면 사람의 꿈도 인간적 신앙도 산산조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는 더욱 물질주의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으며 마침내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다 못해 하느님을 죽이는 대 사건마저도 서슴치 않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부익부, 빈익빈의 그 도수가 날로 성장해가고 있는 현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개인과 개인이 그러하고 사회와 사회, 나라와 나라가 그러합니다. 이는 확실히 착한 지향과 노력이 인간자체를 망각하고 그릇된 길을 지향하고 있는 현실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청사진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인간 개개가 각각 발전하도록 소명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계획은 만인이 보다 더 소유하고 보다 더 인간답게 존재함과 동시에 만인의 아버지, 하느님의 아들들로서 완성, 두 가지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결코 부익부, 빈익빈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한 나라만의 치부(致富)나 어떤 한 지역만이 발전하고 어떤 개인만이 잘 살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형제들이 골고루 충족된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십니다. 즉 모든 인류가 총체적이요 종합적이요 조화된 발전, 이를테면 「적분적인 인간발전」만이 그 인간과 동시에 인류를 복되고 만족스럽게 하는 사회를 만들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곤란하나 가장 본질적인 것은 -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때에도 이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 생명은 모든 것이기에 생명은 하느님이요 생명을 사랑함은 하느님을 사랑함이라」고 톨스토이는 선언하였습니다. 『전쟁과 평화』우리시대처럼 사람의 생명이 초개같이 짓밟히는 때도 없었으려니와 그 존엄성을 캐내려고 몸부림치는 때도 없었을 것입니다. 「생명은 하느님이요 생명을 사랑함은 하느님을 사랑함이라」는 데도….



물론 한 평생 살아가기란 힘든 일입니다. 어느 때보다 생존 경쟁이 심한 현실 속에서 육신사정을 돌보기가 얼마나 힘든가는 생활인이면 누구나 느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더욱더 형제애를 발휘할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가져라」라고 하지만 하느님은 「주시오」라고 하신, 즉 그리스도는 에로스적(욕구적)인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적(모성애 같은) 사랑으로써 말입니다.



행복은 인정사회(人情社會)에 사는 백성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각자 각자의 것은 각자 각자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제것을 남에게 주는 사랑, 받는 것보다 주는데 기쁨을 느끼는 사랑의 덕(德)위에서 만이 행복한 사회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참된 교회의 번영은 우리 모두가 「가난한 나자로와 한 식탁에서 식사할 수 있는 형제애」를 가짐으로써만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에게 물질의 유혹이 손을 뻗쳤을 때 그 악에 가담함으로 생기게 되는 이득 때문에 미약한 선을 짓밟아 버리고 마는 일이 있어서야…



동양에 「췌훼동시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두 마리 새의 입 부리가 동시에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암탉이 알을 품은지 18일 전후에 알속에서 새끼가 밖으로 나오려고 껍질을 그 연한 입 부리로 쫀다 합니다. 이 소리를 듣고 암탉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밖에서 쪼아 드디어 새 생명이 빛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을 「췌훼동시지」라고 합니다. 즉 입 부리로 쪼는게 동시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시로 동양인의 체취가 풍기고 동양인의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의 념(念)이 서려있고 동양인의 아늑한 따스함이 괴어있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인간 대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사라지고 인격 대 인격의 화합함이 없어지고, 생명 대 생명의 만남에 의한 환희가 자취를 감춘지 오랜 것 같습니다.

“인간은 사물을 초월했다. 그러므로 사물은 이제 인간의 신이 될 수 없다”고 「울스 폰 발다사르」는 말하였고 또 예수님은 “당신이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당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시오”(마태19,21)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물질에 앞서 사랑으로써 교회의 번영을 이룩하는데 전력을 기우려야할 것입니다.

화목과 사랑과 평화가 있는 가정을 우리는 복된 가정이라고 합니다. 사회도 그러하고 교회도 그러하고 국가도 그러하고 세계도 역시 그러합니다.

물질만능시대에 메말라 가기 쉬운 현대사회 특히 현대 교회에서는 더욱 애정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꽁꽁 얼어붙은 물질문명을 눈 녹이듯 녹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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