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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14:26
분 류 대림시기
ㆍ추천: 0  ㆍ조회: 6825      
IP: 211.xxx.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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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 1 주일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제 1 독서: 이사 2,1-5

제 2 독서: 로마 13,11-14

복     음: 마태 24,37-44



해  설



  전례주기상으로 바로 오늘 다시 시작되고 있는 대림절의 ‘신비’를 이해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대림절은 주님의 ‘도래’ 또는 주님의 ‘다가오심’을 기념하여 거행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도래’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또 계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림절은 과연 주님의 어떠한 ‘도래’를 기념하여 거행하며 또는 되새기거나 갈망하고자 하는 것일까?

  2천여년 전의 그리스도의 ‘역사적’ 도래는 이미 과거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건을 기념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 사건은 시간상 항상 먼 과거의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교회는 대림절의 여정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그 역사적 도래를 기념하는 성탄의 찬란한 빛과 만나게 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대림 첫 주의 전례는 성탄과의 만남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뒤에가 아니라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미래를 또한 열어 보여주고 있다. 즉 대림 첫 주의 전례는 언제 오실지 그 어느 누구도 모르며 “하늘의 천사들도 또한 성자께서도 모르며 오로지 성부께서만이 아시는”(마태 24,36 참조) 그리스도의 ‘마지막’ 도래에로 우리를 향하게 한다. 동시에 그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교 신자생활 가운에 무한히 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하여 성바울로는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읍니다”(로마 13,11)라고 말하고 있다. ‘구원’은 오직 단 한번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 생활을 끊임없이 쇄신시키고 변모시켜 하느님 앞에 명백히 드러나게 하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개개의 구원적 ‘사건’ 모두가 또한 주님의 ‘도래’인 것이다.

  어쨋든,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펼쳐지는 주님의 이 모든 도래가 그분께서 육신을 취하시어 오신 첫 번째 도래에서 그 진실되고 깊이있는 의미를 취한다고 하는 사실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에서 대림의 신학적이면서도 전례적인 복합적 가치가 드러난다. 즉 우리는 대림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속에서 싹트는 선(善), 아니 더 나아가 최상선에 대한 모든 희망과 원의를 성취시켜줄 어떤 사물 또는 어떤 인물에 대한 ‘기다림’을 중심으로 하여 펼쳐지는 거룩하면서도 세속적이고, 개별적이면서도 집단적인 역사 전체를 알아듣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칼을 보습으로 만들 것이다”



  이사야 예언서에 의한 제 1 독서(이사 2,1-5)가 입증해주고 있듯이 ‘기다림’은 이미 아주 먼 구약시대로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정치적 종교적 위기를 맞고서 하느님의 도우심보다는 인간적 결속에 의지하려 했을 때(이사 7장 참조) 선포된 그 예언의 내용은 성도가 우뚝 솟았던 시온산으로 묘사되고 있는 선민의 역사 안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의 목적을 밝히 보여주고 있다. 즉 그 목적은 지상의 모든 민족들을 주님의 ‘말씀’의 인도와 비추심에 따라 모으고 그 중 한 가문으로 하여금 전쟁을 영원히 종식시키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 왕국이 아하즈 왕에 의해 전쟁(시로에프라임 전쟁: 기원전 734-732)에 휘말려들때 다음과 같이 모든 전쟁의 종식을 예고한다.

  “장차 어느 날엔가 야훼의 집이 서 있는 산이 모두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만국이 그리로 물밀 듯이 밀려들리라. 그때 수많은 민족이 모여와 말하리라. ‘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께서 계신 성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자. 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느니.’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아니 하리라. 오, 야곱의 가문이여, 야훼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자”(이사 2,2-5).

  이 대목이 미가 예언서 4,1-3에서도 거의 같은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며, 그 때문에 학자들간에 어느 것이 더 오래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는 이사야 예언서의 원전성을 믿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관심을 쏟을 문제는 원전 비판의 문제가 아니라 이 예언적 대목이 담고 있는 ‘신학적’ 의미이다.

  이 대목에 들어 있는 기본적 사상은 다음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첫째,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당신의 법과 말씀을 선포하실”(3절) 주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의 말씀을 모든 민족들이 듣게 됨으로써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일치와 보편적 화해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과연 이러한 모든 내용이 환상적 계시일까, 아니면 실로 신빙성 있는 예언적 소식일까? 현실적 입장에서 보게 되면 그것은 한낱 환상적인 꿈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지만, 반면에,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간절한 소망에 눈을 돌려 본다면, 그 예언이 이미 실현되기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의 일치와 보편적 화해를 향해 역사의 신비스러운 힘을 모아 추진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예언자의 말들을 그대로 방치해둘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줌으로써 역사를 개진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 첫 번째 구체적 공간은 ‘형제애’와 ‘평화’가 진실로 실현되어야 할 공동체 즉 ‘멧부리 위에 우뚝 서서’(2절) 찬란히 빛나고 있는 예루살렘 공동체-모든 민족들을 불러모음의 상징적 표지가 되고 있는-이다. 이 모든 내용이 교회의 상징적 의미와 또한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짊어져야 할 기능이 진정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와 전인류의 일치의 표지이며 도구’(「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1참조)가 되어야 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듣기는 어렵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이사야의 기록은 결코 끝나지 않는 ‘주님의 도래’의 길들 즉 그리스도의 최초의 도래로부터 교회(새로운 예루살렘)와 세상과의 약속,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다른 무엇보다도) 활동을 통한 새 인류의 힘겨운 성장,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끊임없이 ‘오시는 분’(사도 1,4 참조)을 만나러 가는 여정임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노아 때처럼...



  그분과의 이러한 ‘만남’들을 조금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교 신자는 늘 ‘깨어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오랜 기다림 속에서 엄습되는 잠이나 피곤함의 유혹을 극복해야만 한다. 마태오에 의한 오늘 복음은 이 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보다 폭넓게 발전시킨 ‘깨어 있음’의 주제(마태 24,42;25,30)를 여러 가지 비유(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등등)를 더붙여 이끌어 들임으로써 ‘종말론적 담화’의 부록 내지는 해설 역할을 하고 있다.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를 만나 모두 휩쓸려 갔다. 그들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홍수를 만났는데,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이렇게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24,37-42).

  매일매일의 생활레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 외에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사람들이 태평하게 살던 노아 시대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회상과 비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불시에’ 찾아오시리라는 사실을 망각한채 매일매일의 일상적 삶의 문제에만 몰입하거나 압도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홍수 사건 때처럼 주님의 ‘오심’에 따르는 위협적이며 위험스런 상황에 관한 점이 그것이다.

  그런데 홍수 사건은 파괴와 저주의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위한 구원의 기회이기도 했다(창세 7,11-23 참조). 임하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항상 다음과 같은 형태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내롭게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처럼 당신께 개방되어 있고 당신 말씀을 온순히 다르는 사람은 구원하시고, 반면에 당신을 배척하고 당신의 원의를 귀담아듣지 않고 마음을 당신께로 향해 들어 높이지 않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멧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41절).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사실은 얼핏 생각하기에는 불확실하지만, 하느님의 공의하신 판단에 의하면 확실하다. 그러나 그 상징적 표현은 우리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하느님 편에서 주어질 그 확실성을 어째서 지금 이 순간에 갖지 못하는 지를 말해주고 있다. 즉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오시고자 하시는 그날이 언제이든간에 두려움과 ‘깨어 있음’으로 그분을 기다려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42절). 이 구절은 전대목을 통해 반복되고 있는 말로서(25,13도 참조)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드러나게 될 감추어진 간계로 충만해 있는 아주 평온한 듯한 상태의 속임수에 말려들지 않는 밤의 파수꾼처럼 잠으로부터 기습당하지 않도록 깨어 있도록 노력할 것을 강조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짤막한 비유는 적이 면밀히 계획하고 있는 ‘갑작스런 습격’의 상황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43-44절).

  도둑은 언제 침범할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도둑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항상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오시는 그리스도를 도둑에 비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시고자 하시는 그때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깨어 기다림’의 의미를 말해주고자 한다. 이렇게 볼때, ‘깨어 기다림’은 주님께서 우리 생활 가운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루시는 그 모든 ‘도래’를 하나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마지막 ‘도래’에 대해 더 잘 준비하는 우리의 정신적 자세를 의미한다. 이에 관해 성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말하고 있다: “두번째 오심에 놀라지 않기 위해서는 첫 번째 오심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Enarrat. in Psalmos, Ps 95,14).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성바울로는 제 2 독서에서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제시하고 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읍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로마 13,11-13).

  이것은 잠자지 말라는 권고에서 더 나아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권고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과거 생활 모두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빛’ 속에서의 삶이기는커녕 죄악이라고 하는 ‘밤’에 붇혀 있는 ‘잠’에 불과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활에 들어와 계신 지금은(신앙을 통해) 그 ‘밤’을 애석하게 여기지 말고 ‘대낮처럼’ 살아가야 한다.

  이 모든 상징적 개념들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만남에 대한 근본적인 ‘결단’을 혹구하고 있다. 그분과 거불어 ‘때가 차게 되었다’(갈라 4,4 참조). 그 결과 어느 누구도 방탕하게 지내거나 불의하게 행동할 수 없는 ‘구원’의 마지막 국면이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가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왔읍니다”(11절)라고 하는 것은 이제 좀더 가까워졌을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마지막 결정적 만남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이미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더 강렬히 실현되어가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떤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마지막 ‘도래’는 우리의 생활과 역사 가운에 이루어지는 다른 모든 ‘도래’의 종합이요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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