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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09:54
분 류 대림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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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3주일

1. 강우일 주교 (특강) / 2       2. 오실분이 당신(가) / 4

3. 정절수 신부 (가) / 6          4. 조순창 신부 (가) / 8

5. 김현준 신부 (가) / 10        6. 강길웅 신부 (가) / 12

7. 변희선 신부 (가) / 14        8. 당신은 가짜 (가) / 15



1.      대림절 특강 (3주일) 義와 慈悲의 기쁨을 노래하라

               각자 위치에서 정의를 실천할 때 참된 기쁨을 누림   < 강우일 주교 >





대림 3주일인 오늘 전 세계 교회는 한마디로 용솟음치는 기쁨을 노래합니다. 첫째 독서인 예언자 스바니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수도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어라," 이

말씀을 받는 응송에서도 우리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위대하시니 기뻐하며 찬미하여라"하고 화답합니다.

  

둘째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제 여러분,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성서에서 이렇게 반복해 외치는 이 기쁨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성서 말씀은 우선 일차적으로는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로니아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온갖 서러움을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제 적국이 멸망하고 해방의 때가 을 것이라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사실은 아주 더 훗날 이뤄질, 더 큰 해방과 희망의 내용을 담고 있는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남의 나라 지배를 벗어나서 독립하는 정치적인 해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주님이 몸소 이스라엘을 찾아오시어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악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을 괴롭힐 수 있는 어떠한 고통도 영원히 씻어 없애버리시는 인간 역사의 완성의 때가 결정적으로 온다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쁨에 가득차 있는 스바니야와 바오로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쁨이 있는가? 우리들의 삶에 기쁨이 넘쳐흘러 다른 이웃에게 '기뻐하십시오'라고 나눠줄 우리 자신의 기쁨이 있는가?

 그동안 우리나라 사회는 모든 사람이 잠 안자고, 놀 것 안 놀고 정말 정신 없이 일해왔습니다. 세계 다른 나라들이 1백년 걸릴 것을 30년에 달성하는 속도로 상당한 수준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올림픽도 치르고 엑스포도 치르며 다른 나라 사람의 칭찬도 듣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국민 모두가 기쁨을 느꼈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배가뒤 집어지고, 비행기가 떨어지며, 건물이 무너지고, 다리가 주저앉는 대형사고를 겪으면서, 우리는 기쁨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라 일을 책임진 이들이 개인적인 명성에만 매달리고, 공무원이 문책을 두려워해서 책임져야 할 일은 기피하고, 세금 걷는 이들은 국민에게서 거둔 세금을 자기 주머니에 바꿔 넣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느꼈던 기쁨은, 진실한 기쁨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우쭐한 기분에서 나온 공허한 기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실된 기쁨은 상황이 바뀌었다고 그렇게 쉽게 식어버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여름 아침 이슬처럼 잠시 반짝이다 사라지는 기쁨이 아니라, 사도 바오로처럼, 스바니야 예언자처럼 참된 기쁨을 차지하기 위해선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성서 안에는 또 한 분 깊은 기쁨을 간직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분은 세자 요한입니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는 자신의 명성, 인기 같은 것은 염두에 없었습니다. 요한의 기쁨의 원천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이뤄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가 실현되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기쁨을 보면서 오늘 우리가 진정한 기쁨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누군가를 비판하기 전에, 제도를 논하고 법률의 미비함을 탓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각자의 처지에서 해야 할 정의를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교 선생님은 봉투를 거절하고 봉급에 만족하며, 공무원은 과외의 보수를 요구하지 말고 국민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고위층은 특권을 행사하지 말고 서민들의 고충에 동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용주는 고용인을 가족처럼 대우할 줄 알고, 기업인은 기업의 이득을 사회의 혜택 받지 못한 이들에게 환원해야 합니다.

  

남의 집을 짓는 노동자는 자기 집을 짓는 마음으로 안 보이는 구석구석까지 정성껏 손질하고, 식품을 가공하는 사람은 자기 자녀에게 먹이려는 마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북한 동포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이들을 기억하여 낭비하지 말며, 값비싼 새 옷을 사기전에는 헐벗은 가난한 나라, 이웃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이를 낭비하기 전에 하느님이 오랜 세월 걸려 씨뿌리고 가꾸신 나무를 생각하고, 구정물을 하수구에 흘려 보내기 전에 하느님이 솟게 하신 맑은 시냇물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자그마한 행동들이, 당장엔 우리 생활에 불편을 주고 불이익을 준다 하여도 그 불이익을 감수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의와 자비를 우리 각자가 사는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실현해 나갈 때, 우리 개인과 사회 전체가 참된 기쁨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이 원하시는 의와 자비를 실현하며 기쁨에 가득 찰 때, 하느님께서도 그런 우리를 보시고 기쁨에 넘치실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기쁨은 하느님의 기쁨과 통하게 됩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루살렘 시민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시온아 두려워 말라, 기운을 내어라. 너를 구해내신 용사, 네 주 하느님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여름 이슬같이 공허한 기쁨이 아니라 참된 기쁨을 찾아 나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우리를 오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며 더덩실 춤을 추시게 해드리지 않겠습니까?













 2.          대림 제3주일 (가)해 마태 11.2-11 오실 분이 당신이오니까?





세자 요한은 일찍이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하시고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주셨습니다. 그 요한께서 오늘은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시어 ꡒ마땅히 오실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흑은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리이까ꡓ라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께서 그것을 모르시다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물어 보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요한이 다른 모든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적국 로마를 쳐부수고 참된 이스라엘민의 왕권을 회복하여, 이스라엘이야말로 만백성 중에 간택된 민족이란 것을 입증할 만큼 영광스러운 정복자를, 위풍당당한 군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바로 요한이 헤로데 왕이 그 계수를 아내로 취한 것을 공격한 죄로 감옥에 갇혀 괴로워하고 있던 때가 아닙니까? 헤로데는 진짜 유태인도 아니면서 유태인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이 쿠데타를 기다렸다는 것은, 오랜 세월 기다려 왔으며 지금 눈앞에 서 계신 구세주의 쿠데타를 기다렸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오실 이가 당신이오니이까ꡓ--요한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질문 뒤에는 이런 듯이 포함되어 있습니다--ꡒ당신이 구세주시라면, 당신은 구세주이신데 왜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왜 나를 감옥에서 꺼내주시지 않습니까?ꡓ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흔들릴 때 이 일을 생각합시다. 세자 요한께서도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을. 예수의 대답은 당신이 그러한 종류의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요한에게 일러줍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 제52장 13절부터 15절까지와 53장의 이른바 ꡐ고통받는 종ꡑ의 신비스런 노래를 빌어 당신의 정체를 묘사하십니다. 예수는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실 이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여 모든 종류의 속박으로부터 풀어 주실 이신 것입니다. 죄는 인간이 천주께 자신을 바치지 않고 인간 자신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인간을 괴롭히는 온갖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천주의 사랑으로 인간의 죄에 대항하심으로써 정복하실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에게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자는 복되도다ꡓ고 말씀하셨음직합니다. 이 말씀은 요한에게는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였을 것입니다. 요한은 헤로디아의 딸의 요구로 목이 멀어질 때까지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를, 감옥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자기 자신과 헤로데와 관련시켜서 곰곰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보다 먼저 오시어 그리스도의 생애와 참혹한 죽음까지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때에 요한에게 물으셨던 말씀을 오늘 우리들에게도 묻고 계십니다--ꡒ너는 어떤 종류의 교회를 원하느냐? 영화와 권세와, 큰 빌딩과 높은 탑과 방대한 신자로써 그 승리가 증명되는 그런 교회를 원하느냐ꡓ고. 교회도 메시아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나게 하는 고통받는 천주의 종이라는 것이 인정될 것입니다. 교회 건물 안에서 설파하는 천주의 말씀만으로는 넉넉지 못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천주의 말씀을 설파하기만 하고 듣기만 하였지 행동화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메시아께서는 그 당시 가난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 마귀를 쫓아내 주신 사람 또는 문둥병자같은 사람들 사이에 주로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서 하신 기적들을 보고 예수를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가톨릭 신자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성공도 못하고, 아름답지도 못하고, 매력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가족 중에도,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다든지, 인정미가 없다든지, 사려가 깊지 못하다든지, 눈치가 없다든지 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물어봅니다--“나는 이 세계를 위해, 이 나라를 위해, 이 마을을 위해, 이 단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ꡓ라든지, 아니면 “나는 내 인생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ꡓ라고 물어 봅니다. 우리는 고통받는 종의 신비 속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해답인지 아십니까.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가, 악과 혼란과 포악함과 냉정함에 대해 용서와 사랑으로 대항함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하는 산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세속적으로는 결코 성공을 하지 못했습니다. 천주께서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 나타내 보이도록 마련하신 계획은 되어 있지만, 사도와 사도간에, 제자와 제자간에, 이 파와 저 파간에,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간에, 지도자와 피지도자간에 있었던 의견의 대립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현대적인 표현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많은 의견의 대립이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옛날 요한에게 말씀하셨듯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나에게 대한 신뢰를 잃지 아니하는 자는 복되다ꡓ고. 지금은 요한의 그것만큼 커다란 신앙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 안에서 우리가 맡은 직분은 무엇이며, 그리스도를 세상에 대해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대림 시기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 열렬한 그리움을 느끼며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오소서, 주 예수여, 오소서.ꡓ











 3.         대림 제3주일 (가)해 마태 11,2~11 오실 분이 당신이오니까?

                                                    정철수 신부



‘오신다던 사람’ 성실하게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자.

우리는 지금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사천 년 동안이나 기다렸던 메시아를 4주간에 걸쳐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를 대림절이라고 하고 오늘로 3주째를 맞았습니다.

우리는 드물지 않게 무엇을 기다렸었고 불과 몇 시간 후에 무엇인가 또는 누군가를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다방에서 또는 집에서 애인이나 친한 벗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절실하게 만나야할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함을 가져다줍니다.



자모이신 교회는 이러한 초조함 속에서 낭군, 즉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역시 초조함 속에서 그러나 기대에 부풀어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2천년 전에 이미 세상에 오신 주님을 또 다시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모든 의미의 예수님의 오심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단 완전히 세상에 오신 주님의 강생을, 그리고 우리 인간의 반려로서 이 자리에 오시는 주님의 현존을, 나아가 세상마칠 때 영광중에 엄위로운 심판관으로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 이 모두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메시아를 고대하고 그의 길을 앞서 닦았던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다림에 지쳐서 혹은 기대에 부풀어서 “오실 분이 바로 당신이십니까?” 하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대단히 칭찬했습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메시아의 선구자로 기도와 고행의 생활로써 자신을 닦았고 뿐만아니라 설교를 통해서 기도와 고행을, 그리고 회개를 권고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준비시켰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왕국이 임하기 위해 의․식․주의 어려움을 스스로 택했고, 열성을 가지고 오심을 준비하다 체포당하고 투옥당하는 고초를 겪었으며, 마침내는 그러한 일상 때문에 죽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열렬히 메시아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준비시킨 요한에게 예수께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요한처럼 열렬히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이웃에게 주의 오심을 준비시킨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 몇 가지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오늘 복음을 중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사치와 쾌락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하십니다. 사치한 옷을 입은 속된 사람은 왕궁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요한처럼 광야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기에는 너무나 감각적 쾌락과 자질구레한 일들에 눈이 어두워져 주님을 보아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쾌락의 생활이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주님을 찾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둘째로, 바람이 부는 데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기도와 선생을 항구하게 계속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요한과 같이 용기있게 초지일관해야 됩니다. 우리의 이기적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할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셋째로,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표시로 사랑을 가르쳐 주십니다. 당신 스스로 사랑을 실천하시고 그 표시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으며 앉은뱅이를 걷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지금 목매이게 기다리는 우리의 주님은 질병에 허덕이는 자들과 가난하고 설움받는 사람들 편이 되셨습니다.



이상에서 말한 세 가지 점을 요약해 본다면 우리가 이 대림절에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가 있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화려한 곳을 입고 왕궁에 있는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겠으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처럼 되지 말고 확고한 신앙에 뿌리박은 사랑의 기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활 속에 그리스도를 모셔들이고, 다음으로 우리가 모여 들인 그분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활 안에 그리스도를 모셔들이도록 이끌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즉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전해주어야 합니다. 안전하고 안락한 먼 곳에 서서 동정의 뜻만 표시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소질과 특기는 우리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사용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에도 사용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요한과 같이 고통을 당할 각오도 해야 됩니다. 요한 세자처럼 주님을 열렬히 기다리며 주님의 오심을 스스로 준비할 뿐 아니라, 이웃 형제들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안일을 미련 없이 버리는 사람이라면, 요한 세자처럼 주님의 대단한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아멘.













4.              대림 제3주일 (가)해 마태 11.2~11 오실 분이 당신이오니까?

                                                     조순창 신부



서로 탓하지 말고, 기도해 주며, 선하게 살며, 하느님께 복종하자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도 반이나 지나가는 지금, 숙연히 지난 1년을 돌이켜 볼 때, 보람보다는 후회가 많은 오늘, 예수님의 성탄과 재림을 기다리는 이 대림 3주일에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에게 더 큰 희망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자 이사야는 오늘 제1독서에서 들은 바대로, ‘메마른 땅 황무지에 꽃이 피고, 그들의 하느님께서 오시어 원수에게 보복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고, 사막에 샘이 터지고, 메마른 곳이 샘터가 되며, ‘거룩한 길’이라 불릴 크고 정결한 길이 훤하게 트여, 부정한 자와 맹수들이 얼씬도 못 할 길, 야훼께서 되찾으신 사람만이 이 길을 걸어, 아픔과 한숨을 간 데 없고, 끝없는 행복과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들 것이라는 예언은, 이스라엘에게 고난중에도 큰 희망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요한 3,16). 때가 찾서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의 약속의 실현을 오늘 복음에서 선언하십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당신이 자란 나자렛의 회당으로 들어가시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를 펴신 다음에 “주님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을 전하라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에게 시력을 주고, 억눌린 사람들을 놓아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대목을 읽으신 후,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성서의 대목이 오늘 여러분이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깊은 감명을 받고 탄복하였으나, 가파르나움에서의 기적을 행하기를 요구하므로 그들의 가운데를 지나 떠나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구세주로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낫게 하시고, 죄를 사해 주시고, ‘영원히 마르지 않을 생명수의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길’ 이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죄악과 불행에서 건져 주시어,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하여 주시는데, 여기에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능력,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는 ‘거룩한 길’,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께서 하신 이런 일을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리시오. 이사야의 예언대로 맹인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내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을 행복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앞 못 보고, 못 듣고 말 못하고, 팔다리가 불구이고, 병들고 묶인 사람, 때 거리 없이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눈밝고, 귀밝고, 말할 수 있고, 팔다리가 성하며, 매이지 않는 이, 가진이들인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듬뿍 받은 것이니,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보고 듣고 건강하고 자유스러워도,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차라리 눈감도 못듣고 매여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을 신앙의 눈으로 뵈옵고, 하느님의 구원의 진리를 듣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증거하고 전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열심히 살아가면, 병들어도, 묶여도, 가난해도, 하느님의 능력과 은혜로 잘 참아 견디며, 자유롭고 푸짐한 마음으로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구세주를 나 나름으로 그리는 구세주이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얽매이고 죄많고 불구로 고생하는 이들과 함께 계시는 구세주를 믿고, 하느님의 뜻이 나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생활과, 하느님을 모시면서 사도 바울로의 교훈과 같이 ‘서로 탓하지 말고, 기도하여 주며, 세상 사치와 쾌락보다는 마땅히 해야 할 선한 일을 하여, 시기심과 이기적 야심보다는 자비를 베풀며, 위선을 버리고 진실하며, 오만과 탐욕을 버리고 겸손히 하느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길을 가는 성인들의 삶이요, 구세주의 대림을 희망을 갖고 기다리는 우리들의 생활입니다.’








5.      대림 제3주일    <마태 11,2-11> (가)     예수님의 술래잡기

                                                                      김현준 신부



  토요일 오후면, 넓은 성당마당이 아이들의 소리로 가득 찬다. 공차기, 제기차기, 구슬치기, 고무줄 넘기, 술래잡기‥‥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들의 놀이 문화도 변하는 것 같다. 같은 제기차기도 예전보다 차는 방법도 다양해졌고, 여자아이들도 즐겨한다. 딱지와 구슬은 더 화려해졌다,



  술래잡기는 노래가 다양해졌다. 나도 예전엔 구슬치기와 제기차기를 즐겨했다. 가끔 술래잡기도 했다. 그때는 노래로 술래에게 묻고 술래는 답하면서, 술래잡기를 했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잠자는 중이다. 잠꾸러기 아니냐? 세수하는 중이다. 멋쟁이 아니냐? 밥 먹는 중이다. 반찬은 뭐니? 개구리 반찬. 죽었니? 살았니? 죽었다! 하면 움직이면 안되고, 살았다! 하면 잡히지 않도록 도망가는, 그래서 움직이거나 잡힌 사람인 술래가 되는 술래잡기를 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군중들 앞에서 혼자 술래잡기를 하신다,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하면서 요한의 모습이 잡히길, 군중들이 요한이 뭐하는 사람인지를 알아듣게 증언하신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그런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예언자냐? 그렇다!"(마태 11,7-9)



           정의를 말하는 사람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일 위대한 예언자로는 모세를, 제일 위대한 왕으로는 다윗을 그리며 그 인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모세와 같은 예언자처럼 ‘이미’ 이 세상에 왔지만. ‘아직' 확연히 드러나지 않은 하느님의 아들과 그 나라를 알리고, 미리 길을 닦는 예언자로 요한을 증언하신다."

  그렇다! 요한은 예언자다. 예언자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뼛속에 스며들고,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목구멍까지 가득 차서, 가두려고 애썻으나 할 수 없어 받은 ‘말씀'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다. 마치곱사등이처럼 평생 ‘말씀'을 등에서 내러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



  예언자는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다. 제 것을 제 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말하고, 제 때에 제 말을 하는 사람이다. 예언자는 미래의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보고 들은 것(현실)을 술래잡듯이 잡아서 말하는 사람이다.



  사제는 무엇으로 성장하는가? 하는 질문이 있다면, 사제는 매일 미사 봉헌을 통해서 그리고 고해소를 통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고해소에 앉아서 혼자 이 질문과 답을 해 보며 “보러 갔다 왔습니다!”라는 고백을, 서양 신부님들은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친척집 잔치를 보러갔다 왔다는, 그래서 주일 미사를 빠졌다는 고백인지? 영화를 보러갔다 왔다는, 그래서 나쁜 것을 보았다는 고백인지? 점을 보러갔다 왔다는, 그래서 미신을 섬겼다는 고백인지? 우리네 생활 속에서 ‘본다’는 말을 잘 쓰며, 다른 성사는 ‘받는다’고 하면서, 왜 고해성사는 ‘본다’고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사제는 “듣고 본 대로”(마태 11,4)를 단순히 듣고 본대로만이 아니라, 성찰과 반성을 통한 듣고 본 대로를 전달받는, 그래서 한층 깊은 들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누구보다도 듣고 본대로를 말하는 예언자의 소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 예언자적 소명을 예수님은 요한에 대한 증언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모두가 예언자다 되어야



   그렇다!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마태 11, 3)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에 우리 모두가 예언자 요한보다 더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돈의 질서를 깨뜨린, 제 자리에 있어야 할 돈이, 제 자리에 있지 못하고 뇌물이 되어버린 노태우 비자금! 제 자리에 있어야 할 서열과 권력이 제 자리에 있지 못하고 하극상과 반란이 되어버린 1212! 거짓과 폭력이 난무하고, 듣고 본 대로 알려지 못하고 왜곡되어버린 5.18!



  정말 이런 일들이 다시는 왜곡되거나 힘의 논리에 짓눌리거나,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감시하고, 제 말을 제 때에 하는 예언자가 되어야겠다.
















6.            대림 제3주일 (가해)    주여, 우리를 구하러 오소서      

                                                    강길웅 신부



떠돌이 나그네에게 정든 고향집보다 더 아늑하게 그리운 곳도 없습니다. 고생이 많고 시련이 크면 클수록 고향은 더 간절하게 그리워집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처음 조상 때부터 계속해서 나그네길을 걸어왔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을 버리고 사막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뒤에 그의 후손이 에집트에서 사백여 년의 노예생활을 했고 시나이 반도에서는 사십 년의 방랑생활을 했으며 바빌로니아에 끌려가서는 오십 년이 넘는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서기 70년에 로마에 멸망한 뒤에는 장장 이천 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떠돌이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고국에 정착하려는 유대인들의 염원은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도 더 간절하고 더 애틋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는 바빌론 유배시의 이야기입니다. 기원 전 590년 경 에 유대인들은 오천 리나 멀리 떨어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서운 징벌이었으며, 이젠 다시 고국에 돌아갈 희망조차 없었습니다. 나라는 망할 대로 망했으며 백성들의 민족 정신도 쇠퇴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는 포로생활에 짓눌려 있는 유대인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해 폐허가 된 유다의 사막과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될 것이며 꽃과 열매가 풍성할 것이고 겁에 질리고 고통에 찌든 백성들에게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광스럽게 고국에 돌아가는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이 직접 찾아오실 때에 이루어집니다. 소경은 눈을 뜨고 벙어리는 입을 열며,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뛰어다니게 됩니다. 소경에게 오직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눈을 뜨는 것입니다. 벙어리에게 오직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절름발이는 정상적으로 걸어가는 것이 제일 큰 꿈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오시면 그 모든 소망이 다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냐고 물어봅니다. 요한은 그때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자신은 이제 죽을 것이 뻔한데 모두가 애타게 기다렸던 메시아가 정말 예수가 맞는지 어쩐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어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내가 메시아다.", 또는 "아니다."라 는 명쾌한 대답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의 제자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자기 스승에게 전하도록 일러줍니다. 그것은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뛰어다니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죽은 사람까지 살아나는 아주 굉장한 사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와 같은 사건들을 보여 주고 들려 주셨느냐. 그것은 이사야가 이미 수백 년 전에 예고한 하느님이 직접 찾아오시는 현상의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로 메시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옛날 예언자들이 말한, 메시아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 주심으로써 확신케 했던 것입니다. 요한과 그 제자들은 이사야서 35장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덧붙이시기를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도 의심했으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의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을 의심하며 메시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그들 신앙의 모순입니다.



우리는 지금, 메시아시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을 기다리는 것은 하느님이 직접 인간으로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은 마지막 날에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께 대한 기다림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이 오시는 날은, 죄로 병든 우리 모두에게 참된 구원의 날이 됩니다. 해방의 날이 됩니다.



여러분에게 오직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분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꿈이 있다면 그게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바로 그 소망과 꿈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참된 평화와 행복은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찾아야 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 불구자들입니다. 돈만 알고 세속에만 깊이 빠졌던 병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절름발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떠돌이였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제멋대로 헤맸던 방랑자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립시다. 고향 같은 하느님을 애타게 찾아 기다립시다.









7.              대림 제3주일 <마태 11,2-11> (가)       도토리 키재기

                                                          변희선 신부



  며칠전에 어머님의 생신이라서 우리가족들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조카들의 키가 부쩍 커 보였다. 중학교 3학년인 형님의 큰아들 경준이와 우리 형제들 가운데 키가 제일 큰 남동생이 키를 재보았더니 거의 같았다. 그런 와중에 다른 조카들도 각자 키를 재느라고 부산을 떨었다.



  요즈음 사람들은 여러모로 비교 게임을 즐긴다. 누가 싸움을 제일 잘하는가 비교하느라고  링 위에서 상대를 쓰러뜨리는 권투시합이 인기가 있는가 하면, 제일 어여쁜 여성을 가려내기 위해 많은 돈을 쓰면서 각종의 미인 대회를 개최하고, 어느 나라가 돈을 가장 많이 버는가를 비교하고 경쟁하다가 급기야는 경제 전쟁이 노골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수년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라는 잡지에 웰스라는 이름난 역사학자가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인가를 질문한 적이 있다. 여러모로 답변을 연구한 끝에 결국, 세 번째 위대한 인물로는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 둘째로는 인도 출신의 부처님, 첫째로는 예수님을 꼽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웰스가 예수님을 순수한 인간으로 보고, 다른 인물들과 비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 자신은 누구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생각하셨을까? 예수님의 답변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욱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요한)보다는 크다.」(11절)

 이 말의 의미는 분명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도 하늘나라에서 가장 미소한 사람 보다 작다. 왜 그런가? .

  사람은 아무리 위대하고, 잘나고, 능력이 있고, 돈이 많고, 재능이 있어도 하느님의 위대하심, 능력, 권능에 비하면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임을 통하여 그분과 일치할 수 있고, 예수님을 따름을 통하여 그분과 하나 될 수 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예수님과의 친교를 통하여 위대함 자체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세상은 인간 중심적인 노력과 재능, 그리고 무한 경쟁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서로 비교하고 시샘과 열등감으로 빠져들어만 간다. 우리는 남들과 비교하는 사이에 하늘로부터 공짜로 선물로 받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소홀해진다.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나름대로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이웃과 조화를 이루며 지낸다. 사람도 자기 자신의 그릇이 있고, 그 그릇에 걸맞게 채우면 된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은 감옥에서 자기 나름대로 기다리던 메시아(구세주)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3절).」 요한이 기대한 메시아는 악인들을 엄하게 벌하고 권능을 보여서 백성들을 따르게 하는 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병자를 고치고, 죄를 용서하신다.



  예수님께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찬한 세례자 요한마저도 일종의 비교 게임에 빠져 있었다. 그는 아직도 하느님 나라의 위대함을 인간적으로 보려는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우리가 기대하는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 최고의 수능 점수, 높은 자리, 커다란 상, 대단한 업적, 권력, 돈, 인기 등등인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내려주신 은층의 선물만이 참된 자아를 채울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당신은 대림절에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가장 위대하고 귀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예수 아기)입니다」











8.           대림 제3주일     <마태 11, 2-11>  (가) “당신은 가짜 아냐?”

                                                      (자선주일)





  가짜 세상이다. 약사도 의사도 가짜가 있다니 웬말이냐? 오늘 우리는 가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홍콩은 가짜의 천국이라는 말을 들었다. 가짜 를렉스시계가 진짜 뺨친다는 것이다.



          가짜 세상



  어디 그뿐이랴? 우리나라 이태원에서도 가짜 외제물건이 날개 돋친듯 팔린다고 한다.

가짜 양주 마시고 두통, 복통 앓았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가짜 휘발유를 넣고 자동차가 왜 이리 말생이냐고 투덜거린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가짜 수표? 가짜 돈, 가짜 계약서 때문에 울고불고 한탄하며, 이 모양 이 꼴로 된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가짜 기자들의 등쌀에 돈 빼앗긴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가짜 청와대 직원한테 속아서 재산을 탕진한사람도 보았다. 어디 이뿐이랴? 이제는 외제를 가짜 국산으로 속여서 파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제 종교계로 넘어가 보자. 다른 종교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가톨릭에까지 신부행세를 하면서 사기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생겼다고 한다. 참으로 막 가는 세상이다.

  이러한 불신의 골은 어디서부터 생겼을까? 해질녁이면 모락모락 굴뚝마다에서 연기가 솟아나오는 시골엔 아직은 가짜들이 별로 없는 듯하다. 가짜 도토리 가루로 쑨 묵도 없고, 가짜인데 국산으로 둔갑하여 식탁에 오른 고춧가루, 참깨도 없다. 그러고 보면 가짜의 등장은 문명의 부산물이라고나 할까?



         세례자 요한에게 닥친 시련



세례자 요한이 살았던 그 당시에도 가짜들이 많았던가 보다. 가짜 예언자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있었으나 신통치 않아 보였던지 “당신 가짜 아냐?"라고 물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도 구세주로 오셨다는 분이 구해주질 못하고 있는 것이 이상했던가 보다.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이 많이 있었다. 어떤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가? 그들은 로마인들에게 점령당하여 있는 형편이었기에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임꺽정처럼 나타나서 로마놈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고, 나라의 주권을 찾아줄 메시아를 바라고 있었다. 감히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위대한 권능의 소유자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소문을 들어보니, 예수님은 별 볼일 없는 위인같아 보였다. 그래서 직접 말할 수는 없고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예의를 갖추어 듣기 좋게 한 질문이지만, 질문의 요지는 “당신 진짜야, 가짜야?"였다. 예수님께서는 우회적으로 대답하셨지만 결론은 “나는 진짜다"였다.



  세례자 요한이 왜 예수님을 의심하였을까?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조금은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면 예수님께 실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열심히 성당에 다니는 사람에게 시련이 닥쳐올 수 있는데,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를 실망시킬 수 있느냐"면서 노발대발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현실문제를 다 풀어주실 수 있는 만능박사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실망할 수 있다. 당신은 가짜라고 소리를 지를 수 있다. 루가복음 23장을 보면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 기적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다. 헤로데 역시 “진짜 인물인 줄 알았는데 가짜 아냐?"라며 실망하였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진짜이시다. 그분은 진짜 메시아이시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날로 가짜 구세주가 많이 나타나서 가정을 파괴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인간을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진짜 메시아이시다. 문제는 가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진짜 메시아로 고백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가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진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셨고, 종말의 날에 우리의 눈에 보이도록 오실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셔야 한다. 때론 믿음으로 오는 시련이 있을 것이다.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돌진하며 순교자들의 믿음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시편을 통해서 더욱 믿음을 고양시켰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데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믿음은 시련을 통해서 더욱 강건해졌다.

  “믿는 사람에게는 안되는 일이 없다. "(마르 9,23)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은 진짜 메시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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