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모음
강론을 위한 자료실
       
 
전체글 보기  
       
 logos
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7년 11월 13일 (화) 00:22
분 류 연중19-24주일
ㆍ추천: 0  ㆍ조회: 8939      
IP: 211.xxx.215
http://missa.or.kr/cafe/?logos.30.
“ 연중 제 21주일 ”
 

연중 제21주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터이다



제 1독서 : 이사 22,19-23

제 2독서 : 로마 11,33-36

 복음 : 마태 16,13-20



오늘 전례의 전체적 흐름은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어느정도 ‘총괄하고 있는’ 듯한 장중한 복음의 장면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오늘 복음이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총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의 엄숙한 신앙고백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 공관 복음서들의 구조상 그리스도의 신비가 계시되고 있는 전체 과정의 ‘임계점’에 와 있는 것이 분명하다 :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호감을 가지고 그분을 열광적으로 따라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마침내는 서서히 그분을 떠나기 시작했다. 오직 사도들만이 그 순간까지 당신 자신을 자기 백성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할 ‘고통받는’ 메시아로 점점 더 분명히 드러내오신 사실에 비추어 그분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실, 곧 다가올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한 것은바로 이때부터이다.

 둘째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 희생의 열매로 이루어주실 교회 전체에 대한 특별 ‘권한’이 베드로에게 약속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교회라고 하는 사회 조직이 자체적으로 존속되어 나가기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모든 봉사와 직무상의 연결은 베드로 안에서 총괄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내가 또한 다윗의 집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주리니...”



오늘 전례가, 잠시 후에 주석하게 될 아주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복음의 내용에 전체적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제1독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 오늘 제1독서는 히즈키야왕(기원전 716-687)의 궁중에서 보통으로 있는 시종장 직책의 교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셉나라는 사람-우리가 거의 하는 바가 없는(2열왕 18,26.37 ;18,18 참조)-대신에 엘리아킴이 유다왕의 궁중책임자로 임명되고 있다.

 아마도 십중팔구 셉나라는 사람은 아부와 권모술수로 국가의 가장 중요한 직책을 맡기에 이르렀던 정략적 수완가였을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 야훼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 그의 직책을 거두시어보다 더 적합한 인물 즉,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는 밑에 있는 사람들의 이익에 더 관심을 쏟는 그런 사람에게 그 직책을 부여하신다 :“내가 너를 파면시키고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리라. 그날, 내가 나의 힐키야의 아들 엘리아킴을 불러 네가 입던 관복을 입히고 네가 띠던 관대를 띠게 하고 너의 권리를 그의 손에 넘겨주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가문의 어른이 되리라. 내가 또한 다윗의 집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사람이 없으리라. 말뚝을 단단한 곳에 박듯이 그의 지위를 굳건하게 해주리니 그의 지위가 그의 가문을 빛내리라”(이사 22,19-23).

 보다시피, 이 대목은 권한의 이양(‘네가 입던 관복을 입히고’ 등)이나 권한의 행사를 뜻하는 여러 가지 상징적 개념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중에서도 특유한 것은 ‘열쇠’라는 상징적 개념이다. 왕궁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이스라엘의 궁정 책임자에 해당하는 고관의 역할이었다. 그러므로 ‘열쇠’라는 상징적 개념은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위임받은 충만한 권한을 의미한다.

 묵시록에서 요한은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부여받으신”(마태 28,18 참조) 분이라는 점에서 그분께 이개념을 적용한다 : “거룩하신 분, 참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 여시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시면 열자가 없는 분이 말씀하신다”(묵시 3,7). 성탄시기의 전례는 같은 내용을 12월 20일 성부일도에서 성모의 노래 후렴으로 반복하고 있다 :“오, 다윗의 열쇠여, 이스라엘 잡안의 홀이시여...”

 바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친히 베드로를, 유다 가문 전체를 통해 가장 뛰어낙 훌륭한 교회라는 당신의 ‘집’의 책임자로 세우신다는 의미로 그 개념을 베드로에게 적용시키고 계시다.

 그런데, 복음의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고 있는 해로운 ‘책임자’가 이스랑레 백성에게 행사해야 할 권한의 ‘형태’와 ‘특성’이다.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보자:“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가문의 어른이 되리라.”

 여기서 예수께서 신약에서 드러내시게 될 권위의 의미가 예견되고 있다 : 그권위는 힘이나 우월감의 표현이 아니라 ‘사랑’의 표명일 것이다. 정혹히 말해 ‘아버지’께서 자기자녀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당신 양떼의 ‘목자’로 세우시기 전에 ㅏ로 이러한 사랑의 능력을 그에게 요구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7). 그러므로 베드로의 사랑은 그리스도에게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해 그분의 양떼 모두에게도 향해지고 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이제 우리의 주 관심인 복음의 내용에로 들어가 보자. 물론 주인공은 베드로이다 : 아니 어쩌면 그리스도를 주인공이락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분을 베드로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리라고 공적으로 고백하고 있고, 또한 베드로가 모든 세대의 대표자로서 이어받고 있는 것이 바로 크리스찬 전승이 아주 일찍이 표현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유명한 신앙고백의 이야기는 학자들간에 적지 않은 논쟁을 야기시킨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권한’에 관련된 중요한 말마디들이 다른 두 공관 복음사가들의 글에서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마르 8,27-30 ; 루가 9,18-21 참조). 우리가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그리스도론적’ 관점 외에 ‘교회론적’ 관점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마태오 복음사가는 아마도 예수께서 다른 상황에서 하신 진지한 의미가 담김 말씀들을 여기에 갖다놓음으로써, 베드로의‘역사적’ 형상뿐만 아니라 그가 세상 끝날까지 지속될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에 대한 공동 신앙의 항구한 ‘고백자’로서 행해야 할 ‘역할’을 더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이 대목의 ‘그리스도론적’ 관점은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하시는 다음 물음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마태 16,13). 또 예수께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가를 알고자 해서라기 보다는 사도들로 하여금 당신의 ‘신비’에 더욱더 깊이 다다르도록 하시 위해서임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생각을 전해 들으신 후 즉시 이어서 하시는 말씀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면 너희는 너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15절).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은 그분 자신이 간직하고 거의 드러내시지 않는 그분의 참된 ‘실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모든 사람으 대신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다른 두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그것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때 이중적 의미를 띠고 있다 : 여기서는 베드로가 예수를 단지 마르코나 루가 복음사가의 경우처럼 에언자들이 보증해왔고 또한 사람들이 기다렸던 그런 메시아로서만이 아니라, 성부와 절대 유일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로서도 고백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행위를 철저히 깨닫고 그분이 진정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외에도 그분에 대한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 모든 사람들에 의해 버림받은 그분의 십자가상 죽음을 생각해 보라! 사실 베드로는 뒤이어 언급되고 있는 주님의 수난의 첫 번째 예고를 듣고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한다(마태 16,21-23).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므로 너는 복이 있다”



이 모든 사실은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순전히 이성의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예리한 지성으로도 결코 입증할 수 없는, 또 그러한 지성을 넘어서는 어떤 사실에 대해 항상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다. 믿음은 예수께서 즉시 이어서 설명해주시듯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순수한 ‘선물’이다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17절).

 여기서는 주님의 환희의 찬미가가 반향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거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마태 11,25-26). 믿음의 영역에서 우리가 해야 할 단 한가지 사실은 하느님앞에서 철부지가 됨으로써 우리가 그분의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으로부터 판단받기를 바라며 믿음을 갈망하느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라면 믿음은 누구에게나 아무런 차별없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다. 즉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단순히 개인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교회에 항구히 바쳐져야 할 ‘봉사’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 말하자면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온시대 모든 믿는 이들의 신앙의 ‘대변자’이다. 사실, 교회는 오직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마리아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교회는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불러모다 구원하시는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단순한 사회 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론적’인 내용이 어째서 곧바로 ‘교회론적’인 내용-마태오복음에서만 드러나고 있는-으로 이어지게 되는 지를 알아들을 수 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터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그 다음 ㅁ라씀 즉, 비록 그가 나약하지만 당신께서 이세상에 세우러 오신 구원의 모든 질서의 ‘지주’와 기준점으로 그를 삼으시겠다는 말씀은 큰 어려움 없이 이해될 수 있다. 과연 그토록 크나큰 일을 한 사람에게 맡겨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은 너무나도 명백하고 엄숙하게 울려퍼져 우리로서는 달리 어떻게 해석할 도리가 없을 정도이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18-19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그의 후계자들에 있어서도 같은 고백이 이어질 것이다-를 당신 교회를 끊임없이 세워 나갈 주춧돌로 삼으신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상징적 개념들은 학자들 모두가 인정하고 있듯이 셈족 언어의 배경으 상기시켜주고 있다 : 이같은 사실은 이 대목의 고대성을 분명히 입증해준다. 원래 ‘게파’라는 아라메아어는 ‘바위’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그 말의 의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적용시키고 계시는 ‘바위’의 기능이다. 분명 ‘바위’ 위에 세워져 굳건히 서 있는 건축물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 : 폭풍우가 밀어 닥치자 이내 무너지고 마는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의 비유를 상기해 보라(마태 7,26-27 참조).

 그러므로 베드로는 교회 안에서 주춧돌의 기능과 또한 결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 그는 이러한 열할을 ‘살아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대한 유일한 믿음을 항상 새로이 제시하며 진지하게 해석해줌으로써 행하게 된다.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 예수께서 부활 후에야 실제로 베드로에게 권한을 넘겨주시겠다는 사실(요한 21장 참조)에 대한 암시일까,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의 ‘봉사적 역할’이 그의 ‘역사적’ 형상을 넘어서 ‘영속적으로’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가톨릭 교회의 전승은 분명히 이 두 번째 의미로 해석해왔다 : 교회가 유일한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될 때까지는 베드로와 같은 또 베드로를 대신하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확고히 선언함으로써 그 무한히 큰 건물의 주춧돌 역할을 할 사람이 항상 필요할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사람들을 영적인 ‘죽음’의 감옥에 가두어 마침내는 육적인 죽음에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구원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모든 악의 세력들(‘죽음의 힘’)도 교회를 ‘누르지’ 못할 것이며 뒤흔들어 파괴하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의 믿음의 바위가 이 세상 끝날까지 교회를 지탱해 나갈 것이다!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믿음’이란 비록 유일한 불변의 것이긴 하지만 보다 깊이 발전시키고 추구해 나가야 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상황들과 접하며 거기에서 새로이 제기되는 문제들을 마주 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또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주님께 대한 충만한 신뢰심 속에서 사람들의 새로운 요구에 맞춰 복음을 해석해주는결정적인 가르침을 주어야 할 것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19절).

  ‘열쇠’라는 상징적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 다음, ‘매고’ ‘푼다는 것’은 성서에 나타나 있는 신적 요구와 관련이 있느 어떤 일정한 행동을 금하거나(맺거나) 허락하는 것(푸는 것)을 권위있게 선언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신법을 해석하는 역할을 이행하는 랍비적 형태의 표현이다. 그러나 종교규율의 차원에서 본다면 그 표현들은 공동체에서 제외시키는 권한 내지는 받아들여주는 권한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믿음의 영역과 또 그믿음을 해석해주는 영역에서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서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사실이다.

 ‘베드로의 신비’의 근거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생각된다 : 베드로안에는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한다. 베드로와 그의 모든 후계자들 안에는 우유부단하고 불확실한 인간이 아니라, 그 옛날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레미야와 베드로와 바울로를 붙잡아주셨듯이 우리의 형제를 붙잡아 주시는 그리스도의 ‘현존’ 자체가 당신 은총의 성사로 베풀어주시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 대한 유일하면서도 확고부동한 믿음을 우리 모두에게 선포하여 알려주시고 또한 해석해주신다.



“오, 심오한 하느님의 지혜여”



 그러므로 우리도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신학자의 말을 수긍할 수 있다:“베드로는 형상적으로 볼 때 무능하다. 그의 능력은 오로지 그를 이루고 있는 원천적인 의지에 있다”(H. Urs von Balthasar, Il complesso antiromano, Queriniana, Bresdia, 1974, p.353).

 오직 믿음만이 이성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껏을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바울로가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에 놀라 터뜨리는 다음의 찬미가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부하시는 하느님의 그 ‘신비’ 외에 우리의 경우를 보더라도 얼마나 진실된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부늬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로마 11,33-36).



  0
3500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1317    
행사강론
새사제 첫미사 강론 요한신부 2011-01-08 27485
  1316    
부활시기
나해 부활 제 5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4-12 13865
  1315    
연중25-30주일
나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13640
  1314    
나해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3-06-13 13343
  1313    
장례
장례미사 강론 모음 위령미사 2008-08-13 11936
  1312    
행사강론
전교주일 강론 모음 전교주일 강론모음 2008-09-06 11621
  1311    
혼배
혼배미사 강론 모음 혼인, 결혼, 주례 2008-08-13 10602
  1310    
대축일 강론
Re..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 대축일강론 모음 2008-09-20 10573
  1309    
연중25-30주일
나해 연중 제 29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10208
  1308    
대축일 강론
Re..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 대축일 강론 모음2 2008-09-20 10137
  1307    
연중25-30주일
다해 연중 제 28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9716
  1306    
김화태 신부의 장례미사 강론 장례미사 강론 2003-01-21 9413
  1305    
행사강론
성모성월 강론 모음 2008-09-06 8985
  1304    
연중25-30주일
다해 연중 제 29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8974
  1303    
연중19-24주일
연중 제 21주일 말씀과 전례 2007-11-13 8939
  1302    
연중25-30주일
나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8861
  1301    
대축일 강론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대축일강론 2008-09-20 8734
  1300    
연중19-24주일
나해 연중 제 2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8074
  1299    
대림시기
나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7841
  1298    
성모의 밤
성모성월 강론 모음 강론모음 2008-05-08 7591
  1297    
연중31-34주일
가해 연중 제 33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0 7521
  1296    
행사강론
성 요셉 성월 강론 모음 2008-09-06 7385
  1295    
대축일 강론
Re..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 말씀연구 2008-09-20 7312
  1294    
연중25-30주일
다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7309
  1293    
대림시기
Re..가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 2007-11-25 7228
  1292    
행사강론
세례식 강론 <요한 3,1-8> 새롭게 태어나는 분들에게 2008-09-06 6990
  1291    
대축일 강론
Re..8월 15일 : 성모 승천 대축일 ,성모 몽소승천 대축일 강론 모음 2008-08-09 6989
  1290    
행사강론
성녀 소화데레사 축일-포교사업의 수호자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2008-09-06 6961
  1289    
행사강론
교무금이란? 2008-09-06 6906
  1288    
대림시기
가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6813
1234567891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