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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3년 6월 13일 (금)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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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 모음 ”
 

삼위일체 대축일


         9. 김영진 신부(나)/15               10. 강길웅 신부(나)/16

        11. 김영남 신부(나)/18               12. 허영업 신부(나)/20

        13. 표창준 신부(나)/24               14. 교구 주보(나)/26

        15. 김명순 박사(나)/27               16. 세상 끝날 때까지(나)/28

        17. 세상 끝날 때까지(나)/31          18. 사랑의 친교(나)/33

        28. 신은근 신부/55

        29. 최상범 신부/56                    30. 성삼위께 찬미와 흠숭을/57

        31. 삼위일체의 신비/58



9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나) 사랑x사랑x사랑 = 하느님

김영진 신부


신학생 시절 방학이 되면 외국 신부들이 본당신부를 맡고 있는 곳에 가서 지내며 교리를 가르치곤 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교리를 가르치면서 어렵게 느껴지고 이해시키기 힘든 교리 하나가 있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각각의 위격을 지니고 계시면서도, 한 하느님이시라는 교리다.

물론 성서의 이 구석 저 구석에 이 교리를 뒷받침할만한 구절들이 있지만, 그래도 삼위일체교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그냥 믿을 수밖에 없는 교리라는 것을 깨닫게되었다.

이 교리에 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하루는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하면 잘 깨닫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하여 고민하면서 바닷가를 산책하고 계셨다. 하루종일 바닷가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쪽 구석 백사장에서 아이들 세명이 역시 하루종일 모래성을 쌓아 놓고 작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부으며 놀고 있었다. 성인께서 가까이 가서 “애들아, 너희들 무엇을 하고 있어"라고 물으시자, 어린이들은 “저희들은 저 바닷물을 이 모래성에 모두 퍼담으려고 합니다"라고 답했다. 성인께서 웃으시며 다시 “애들아, 너희가 죽을 때까지 해도 그 일은 못 끝낼 것이야"라고 하시자, 아이들은 “그래도 선생님께서 삼위일체교리를 깨닫는 일보다 더 쉬울 거예요"라고 답했다고 했다.

 

이 일화는 소중한 교훈을 준다. 바닷물을 퍼담으려면 그릇이 바다만큼 커야 하고 하느님의 신비인 삼위일체 교리를 깨달으려면 인간의 지능이 하느님의 지능만큼 커야 하는데, 이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삼위일체 교리는 그냥 믿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교리다.


조개껍질로 바닷물, 퍼담기


예비신자 교리를 배우던 교감선생님 한 분이 집에 가서 신자인 부인에게 말하기를 “천주교 교리는 그냥 무조건 믿어야되는 것이 많더구먼.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의 위격이면서 한 몸이라는 것 등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냥 믿어야지 뭐"하더라는 것이다,

 

흔히들 삼위일제에 대한 교리를 설명할 때 여러가지 비유를 든다. 예를 들어 클로버의 잎은 셋이지만 한 잎이고, 사람은 지, 정, 의(智情意)가 있지만 한 사람이며, 촛불과 태양은 빛과 열과 모양이 있지만 하나의 촛불이요, 태양이며, 삼각형은 각이 셋이지만 하나의 삼각형이고, 꽃은 모양, 색깔, 향기가 있지만 하나의 꽃송이며, 물체도 길이, 폭, 두께가 있지만 하나의 물체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일 뿐, 삼위일체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냥 믿어야 할 교리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함박눈을 이해시키고 설명하기 어렵듯이, 천상의 신비인 삼위일체 교리를 우리인간의 유한한 두뇌로써 이해하고 설명하기란 어려우므로, 무조건 믿고 받아들일 때만이 이해와 설명이 가능하다.

책상에 하루종일 앉아서 어떻게 하면 삼위일체교리를 보다 쉽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궁리해 보아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호우주의보 속에 쏟아지는 빗속을 거닐다 성당 뒷좌석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는데, 하느님께서 내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을 심어주셨다.

1곱하기(X) 1곱하기(X) 1은 1이 되듯이, 사랑 곱하기 사랑곱하기 사랑은 하느님이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느님의 사랑은 폭탄과 같은 위대한 힘이 있는 것으로서, 더하는 것이 아니라 곱하는 것이다. 성부도 사랑이시고 성자도 사랑이시며 성령께서도 사랑이시다.


하나 x 하나 x 하나는 하나이듯


이 세 위격의 사랑은 서로 다른 역할의 사랑이시면서 또한 한 하느님이시다. 사랑만이 하나가 되는 힘을 가진다. 갈라진 부부, 흩어진 민족, 상처받은 인간관계는 사랑으로서만 하나가 되고 치유될 수 있다, 1x1x1은 하나이듯이, 그리고 사랑x사랑x사랑은 한 하느님이듯이, 또 성부, 성자, 성령도 한 하느님이듯이, 나와 너 그리고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10               삼위일체 대축일 (나해)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신명 4,32~34.39~40 (그분 밖에 다른 하느님은 없다)

제2독서 로마 8,14~17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복 음 마태 28,16~20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우주를 보면 그 웅대함과 오묘함에 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무엇이 저 넓고 깊은 우주를 형성하고 운행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태양 하나만 봐도 너무도 신비롭습니다. 무엇이 저렇게 이글이글 타고 있는데도 끝이 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학자들은 수소가 탄다고 합니다. 1초에 약 6억 톤에 가까운 수소가 타는데 1시간이면 2조 톤에 가까운 수소가 탑니다. 그것이 무려 45억 년이나 탔는데도 아직 반도 안 탔습니다.


태양은 또 지금 어디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1초에 약 17km이상의 속도로 저 깊은 우주 속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혼자만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와 화성과 금성 등 태양계의 작은 별들을 거느리고 달려갑니다. 그러면 태양의 무엇이 이 별들을 끌어당기면서 달려가고 있을까요. 학자들은 중력이라고 합니다. 그 중력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수십억 년 동안 지구로 하여금 1분 1초도 틀리지 않게 자신을 공전하게 하 는 것입니까. 모릅니다. 다만 보고 감탄만 할 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만 해도 너무 오묘합니다. 지구가 현재처럼 23.5도로 기울어져 있어서 사시사철의 계절을 구경할 수 있지 만일에 그 각도가 기울지 않았더라면 지구는 사람 살 곳이 되지 못했을 정도로 뜨겁거나 춥거나 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다의 면적이 지구 표면의 70%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에 물의 순환이 이루어져 생물이 존재하고 있지 만일에 바다보다 육지가 더 넓었다면 지구는 죽음의 땅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숨을 쉬는 대류권의 층의 두께도 지금보다 더 높거나 낮아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됩니다.


그렇게 볼 때 무엇 하나 오묘하고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지구는 차치하고라도 인간의 육신 하나만 해도 너무 신비롭습니다. 여러 장기들과 뇌의 기능을 보면 컴퓨터보다 수천 수만 배 더 정밀하고 치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식을 섭취하면 각 장기에서 양분을 흡수하고 저장하며 배설하여 순환시키는 그 모습과 기능들을 보면 위대한 공장이요 산업시설이면서 동시에 생명의 놀라운 약동이요 환희입니다. 무엇이 저것들을 형성케 하고 또한 운행케 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하기나 하며 또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인간은 인간 자신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작품인 우주 만물 그 어느 하나에 대해서도 뚜렷하고도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작품을 인간의 눈과 머리로써는 온전하게 이해할 수도 없고 또한 탐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 자신도 모르는데 어찌 감히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태양이나 우주보다도 몇만 배 더 놀랍고도 위대한 신비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사람이 되시고 어떻게 죽음에서 부활로 빠스카 하셨는지 또한 성령이 어떻게 우리와 교회 안에 역사하시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머리와 지혜를 통하여 그분 의 신비를 파헤쳐 보고 또한 적으나마 맛들여 봐야 합니다. 그것이 또 하느님의 뜻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신비를 말할 때에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씁니다. 인간에게 인격이 있다면 하느님께는 위격이 있습니다. 그 위격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각각 다르고 독립적입니다. 세 위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면서도 체는 오직 하나입니다. 몸이 하나이기 때문에 절대로 세 분이 아닙니다. 위격이 셋이면 세 분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 위격을 가지셨으면서도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 개념이나 지식으로써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믿어야 합니다.


성서에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없습니다. 이것은 성서의 가르침을 토대로 해서 교회가 만들어 낸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하느님'이라는 단어도 그 자체는 '하나'라는 단수이지만 그러나 그 내용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이루는 복수가 됩니다. 마치 가정에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으며 자녀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 가정은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물론 크게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이를테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삼위일체에 대한 명백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비야말로 모든 구원 질서의 원천이요 또한 우주 만물의 형성과 운행의 근본입니다. 모든 에너지가 거기서 나오며 모든 완성이 그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고 가야 합니다. 사랑의 완전한 일치요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을 닮고 따라가야 합니다.






11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 (나)

김영남 신부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오늘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관하여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마태오 복음서의 제일 끝자리에 나오는 말씀을 듣는다. 먼저 복음 말씀 자체를 묵상하고, 이어서 ‘삼위일체 대축일’인 오늘 축제의 의미에 관하여 묵상하겠다.


오늘 주일 복음의 내용은 매우 집약적이다. 특히 “열한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갔다”라는 오늘 복음의 첫 문장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복음서의 앞 부분에 이미 나왔던 내용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지면 관계상 몇 가지만 집중하여 살펴보겠다.


“갈릴래아에 있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마태 28,10; 참조: 26,32의 예고), ‘갈릴래아’라는 장소는 제자들에게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던 곳이었다.

왜냐하면 갈릴래아는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처음으로 소명을 받은 곳이었고, ‘제자로 양성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후 당신의 제자들을 새 출발시키시려는 예수께서는 이제 그들을 그들의 ‘첫 사랑’이 있었던 갈릴래아로 불러내신 것이다(참조: 호세 2,16).


산으로 갔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산’도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성서를 보면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 분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제자들은 ‘산’에서 ‘산상설교’라는 새롭게 해석된 “계명”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갈릴래아의 그 산”으로 다시 부르신 것은 매우 의미 깊다. 그것은 당신의 제자들을 ‘모든 민족들에게 파견’하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당신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상기시켜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갖고 계신 분, 즉 죽음까지도 그분의 권한 아래에 두고 계신 “주님”으로서의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민에게” 파견하신다. 그런데 이 때 그분이 주시는 제자들의 사명의 핵심은 “만민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것”이다. 언뜻 보면 매우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이다.


‘제자로 삼다’, ‘제자가 되게 하다’가 핵심사명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 점은 지상 생애 동안 예수께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제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좀 더 이해가 될 수 있다. 무릇 제자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사명은 복음선포를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열 한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로만 남아 있었는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까지고 체험한 이제 그들은 만민에게 파견되어,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에 하셨던 말씀대로 “사람 낚는 어부들이 되게”(마태 4,19) 된 것이다.


“나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새롭게 탄생되어, 계속 자라날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곧, 교회에게 주어진 가장 든든한 보증의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6)의 역할을 하려면, 갖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그 공동체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뜻하는 “임마누엘”이셨던 분이신 주님께서 “그들과 늘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공동체이다.


이제는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의 주제와 직접 관련되는 말씀에 대하여 묵상할 차례가 되었다.

사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관한 신앙 교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적 이해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었던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계시’된 것으로서, 인간 인식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할 줄 아는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초기의 몇 세기 동안 교회는 ‘세상의 지혜’에 비추어 ‘쉽게’ 이해하려는 경향에 맞서, 이 신앙교리를 지키기 위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했다.


오늘 복음말씀에 의하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포괄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사랑의 친교”안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람들은 성자 예수님과 결합되고, 성령을 받는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성자 예수님과 가장 깊은 사랑으로 ‘일체’가 되어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 때 성령은 이런 친교를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해 준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 성령의 삼위로 되어 계시다는 가르침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을, 예수님의 삶 전체를 통하여 증언된 것처럼,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참조: 1요한 4,8.16)라는 점과 연결시켜 묵상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사랑은 역동적이다. 사랑은 가만히 정체되어 있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그토록 충만하셔서, 피조물인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 삼위일체적 사랑의 친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부르시기까지 하신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삼위일체이시며 사랑이신 이 하느님 안에 든든한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늘 경탄하며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12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나) 세상 끝날때까지 너희와 항상

허영업 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그리스도교인은 한마디로 '유일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믿으며,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신 성령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나 식사를 할 때, 무슨 일을 하든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고 십자 성호를 긋는다. 이것은 무엇을 할 때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이다.


  한 하느님 안에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세 위가 계시는데, 모두가 같은 하느님이시다. 교회는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 삼위일체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고백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신비는 그리스도께 받은 계시의 교리이며, 하느님의 신적 생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하느님 자신에 관한 신비이다.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성삼께서 서로 나누시고 사귀시는 사랑이시다. 끝없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 온전히 의탁하는 아들의 사랑, 아버지와 아들을 일치시키시는 성령의 사랑이시다. 이 모든 사랑은 하나의 사랑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흘러넘친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이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는 어려운 가르침이 아니라 삶을 통해 본받아야 하는 하느님 사랑의 가르침이다. 또한 실제로 삶을 통해 이해되고 체험되는 사랑의 진리인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실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을 주님 앞에서 약속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함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세례를 받고, 모든 일을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사랑으로 행한다는 의미이다. 위격이 서로 다른 성부와 성자, 성령께서 하나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는 것도 바로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일치시키고, 화해시키고, 변화시킨다. 사랑은 바로 다른 사람을 진정한 마음으로 인격적으로 받아들인다. 부부나 형제 사이처럼 가까울수록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서로 인격을 존중해 주고 소중하게 여길 때 사람들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그 사람들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표현'이 아닐까. 표현의 의미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표현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간은 그분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성부께서는 당신의 크신 사랑을 성자라는 표현적 존재로 구현하셨다. 육체와 세상 속에 존재하는 우리 인간은 이 표현이라는 양식으로 사랑에 접근하고 사랑의 실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표현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지만 분명히 제외될 수 없는 수단이요 방법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도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자신의 사랑을 전달하며 표현하신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성서적으로는 파견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곧 성자와 성령의 파견이다. 이 파견 역시 표현이라는 형식 속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절대적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표현은 우리 삶의 모델이며 지향이다. 그 표현은 분명히 손이 닿는 곳, 곧 나의 삶 안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표현의 삶을 충실히 할 때,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대로 삼위일체의 신비는 절대적 신비로서 이성적으로는 분명히 관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신비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체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대로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의 신비에 "나는 믿나이다."라고 응답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일 것이다.


    제1독서/신명 4,32-34.39-40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내신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나간 어느 세대에서나 물어 보아라"(32절).

   이스라엘은 주님을 무엇보다 당신 백성의 역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으로 인식하였다. 이 하느님의 백성은 동시에 그분께서 창조주이시며, 사람과 모든 것의 원천이심을 깨닫는다. 이 구절은 신명기에서 유일하게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곳이다. 구약 성서의 하느님은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시는 분으로 드러난다. 우리 인간과 이야기를 나누고, 듣고, 분노하시는 등 인간과 똑같이 감정을 갖고 행동하시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런 표현들은 하느님을 우리 인간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살아 계시는 분, 곧 활동하시고 위격을 지니신 분으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곧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 역사에 깊이 개입하시고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 곁에 살아 계시고, 내 삶에 깊이 개입하시는 분으로 믿고 있는가? 나에게 하느님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한 번 솔직히 자문해 볼 일이다.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 될 것이다"(40절)라는 표현은 우리 삶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좋은 땅'에서 '행복'을 발견할 것이다. 히브리 말에서 '좋다'와 '행복'은 어근이 같다. 이 행복 가운데 하나가 이 땅에서 누리는 평화로서, 사람들은 여기에서 오래 살 수 있다.


    제2독서/로마 8,14-17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4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을 직역하면 '아들들'이다. 곧 신앙과 세례를 통해 시작된 하느님의 양자 신분은 영의 힘으로 구현된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서간에서 자주 '영'과 '육'을 대조하고 있다. '육'은 죄에 기울어지고 이 세상 가치에 집착하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의미한다. 반대로 '영'은 하느님께로 자신을 회두시키는 인간 존재를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권능을 의미한다.


  양자 신분(15절)이라는 말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권에서 어떤 사람을 법적으로 양자로 삼아 가족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을 표현하는 전문 용어였다. 바오로는 위의 용어를 채택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 하느님의 부권에 속해 죄와 죽음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17절)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부활의 영광을 상속받으셨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인이 되어 영의 중개로 영광으로 상속받기 위해, 곧 아버지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살기 위해 그분의 죽음에 참여해야 한다. 다른 서간에서는 그들이 영광(로마 8,21), 하느님의(1고린 6,9


.10; 15,50; 갈라 5,21) 불멸(1고린 15,50)을 상속받는다고 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마태 28,16-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전에 갈릴래아에서 이스라엘 전도를 시작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같은 땅에서 제자들을 시켜 세계 만민을 상대로 한 전도를 시작하신다(16절).


  만민 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도 들어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 절대 다수는 예수님의 전도도 교회 사도들의 전도도 배척한 까닭에, 마태오 복음서 집필 무렵의 교회는 이스라엘 전도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니 만민을 상대로 한 전도는 주로 이방인들을 향한 전도였다. 유다 지방과는 달리 갈릴래아 지방에는 이방인들이 많았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신 것은 이방인 전도를 의도하신다는 상징 행위이다.


  구체적으로 어느 '산'인지 따질 필요는 없다. 마태오의 경우 산은 계시가 내리는 곳, 곧 상징적인 장소이다. 모세가 하느님께 율법을 받았고(출애 19,3), 엘리아가 하느님을 체험한 장소(1열왕 19,8-18)도 바로 산이었다. 갈릴래아의 산에서 열한 제자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명령을 받는다.


  “절하다"(17절) 동사는 마르코에 두 번 루가에 세 번 나오는데 마태오서는 무려 열세 번 나온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성(神聖)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절하는 행위는 예수님께만 표현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18절) 받으셨으니 우주적 통치권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19절)라는 말씀대로 온 누리에 대해 통치권을 행사하신다. 종말 심판에 앞서서 이미 부활 순간부터 저 무한한 전권을 행사하신다. "너희는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 26,64).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는 구체적 방편은 두 가지, 곧 세례 수여와 계명 준수 교육이다(19-20절). 두 번째 방편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명하신 것들을 모두 다 지키도록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다. 세례를 받은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익혀야만, 특히 산상 설교와 공동체 설교에 실린 그분의 윤리적 지침들을 일상 생활에서 지켜야만 참 제자들이 되어 참 교회 공동체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20절).


  우리와 세상 종말까지 늘 함께하신다(20절)는 말씀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 약속이다. 곧 교회 공동체를 돕고자 늘 함께 계시겠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는 현존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하면서 안심하고 종말을 향해 머나먼 순례의 길을 떠날 수 있다.






13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 (나해) 세상 끝날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표창준 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신데 성부, 성자, 성령이십니다. 하느님은 단세포와 같은 분이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 구별이 뚜렷한 셋이 일치를 이루시어 한 분이라는 말입니다. 얼른 이해가 가질 않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삼위로서 일체이신 하느님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을 무슨 필요가 있어서 구태여 생각하고 말하는지, 우리 사람의 일상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이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욕망 중에 가장 강한 욕망은 무엇입니까? 식욕, 성욕, 명예욕, 소유욕, 사랑하고 싶은 욕망 등 인간에게 여러 욕망이 있는데 끝까지 없어지지 않는 가장 강한 욕망은 무엇입니까? 어떤 욕망을 채우게 되면 뿌듯해지고 기뻐집니다. 어느 욕망이든지 욕망이 이루어지면 내게 무엇이 얻어지고 채워짐으로써 내 생명이 더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만족과 기쁨을 느낍니다.


돈이 생겼다거나 지식이 늘었거나 음식을 먹었거나 직접, 간접으로 내게 얻어지고 내 생명에 보탬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뿌듯함과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사랑하면 기뻐진다’  ‘사랑하면 살리라’ 같은 이치로 생각해서, 사랑하면 즉 사랑의 욕망을 이루게 되면 내게 얻어지는 것이 있고 내 생명에 더해지는 것이 있어서 기뻐지고 살게 된다는 말이겠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고 나를 희생하고 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희생하고 내주는 사랑이 다른 이와 더 가까워지고 일치되게 하면서 결과적으로 내게도 얻어지고 생명이 더해지는 것이 되어 뿌듯함과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나의 이익을 타산하지 않고 나를 희생하는 것이 사랑인데 이 남을 위하는 사랑이 더 근본적으로 나를 채워주고 생명을 더해주는 효과를 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더해주고 살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데에서 옵니다.


유태인 정신병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나치시대에 강제 수용소에 수용당했던 사람인데 그는 그 강제 수용소에 있을 때,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극한 상황인 그 강제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의 행동들에서 한 가지 공통된 점을 보았다고 합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계속 처형당하고 죽어가는 암흑과 같은 그 생활에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 손을 잡고 걷거나, 등을 대고 앉거나, 서로 손을 얹고 눕거나, 몸의 어떤 부분을 맞대고 있으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함께 가까이 접촉을 유지하며 고독을 면하는 것을 생명선으로 하여 살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 사람의 파트너가 죽으면 예외 없이 이쪽 사람도 며칠 안 가서 죽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끊어질 때 살 힘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50대, 60대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시각, 청각이 약화되고 일할 능력도 줄어들고 기력이 쇠하여지며 식욕, 성욕도 점차 기울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랑의 욕망은 줄어들지 않으며 끝까지, 한 사람이 살아있는 한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서 사람은 자신도 살게 되는 생명력이 솟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나 아닌 ‘너’를 독립된 주체로 긍정하고 존중하여 도와주고 이해하고 자기를 내주는 사랑은 나와 너의 일치를 가져오게 하면서 동시에 둘 사이에 구별을 뚜렷하게 합니다. 사랑이 클수록 일치가 커지고 구별도 더 뚜렷해집니다. 이때 둘의 일치는 둘만으로 머물지 않고 또 다른 사람에게로 확대되어 나아가면서 일치를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침묵 속에 기도하는 중에 어떤 사람을 생각하며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갔을 때 그 사람 한없이 가까워지는 느낌이 생생하게 들면서 그가 뚜렷이 부각되어 나와 구별된 존재로 떠오르고 제 자신 안에 생기와 평화와 기쁨이 솟아났었습니다. 그와의 일치감으로 생동하게 된 이 마음은 그 한 사람만을 생각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마음으로 다가가게 합니다.


그래서 둘의 일치를 느끼는 데에서 출발하여 여러 사람과의 일치도 느끼게 했으며 하나인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게 하고, 이로써 제 마음은 생기를 띠며 무한히 넓어지고 평온함과 힘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구별된 둘 사이에 일치를 가져오고 이 둘의 일치는 또 다른 이와 일치케 하면서 공동체를 낳게 하는 폭발하는 생명력을 지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는 누구와 누구 사이입니까? 예를 들어, 주인과 강아지, 부모와 자녀, 부부 사이를 생각해 봅시다. 강아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언제나 주인의 손안에서 움직이면서 주인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치해 있습니다. 한편, 자녀는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로서 부모의 뜻과는 독립된 자유의사가 있어서 부모의 뜻과 구별된 독립된 행동을 하기 때문에 강아지처럼 부모의 손안에 있지 않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된 주체로서의 자녀는 부모를 생각해 드리고 존경하며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부모와 가까이 일치해 있습니다. 부모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도 자녀는 부모를 위한 마음에서 하기로 합니다. 부모는 강아지보다도 자녀를 더 가까이 느끼고 아끼며 사랑합니다. 강아지보다는 자유의지로 엄연히 구별되고 독립된 자녀와 더 가까운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유의지에 의해 구별과 독립성이 커진다고 해서 일치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깊고 지속적인 일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다음으로 부부 사이는 어떻습니까? 본래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남남이었고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들로서 독립되고 구별된 각각이었으나 자유의사로 자발적으로 ‘너’인 상대방을 향한 사랑을 하게 되면서 가장 깊은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엄연히 구별된 둘이 이렇게 일치케 하는 것이 사랑의 효과입니다. 그리고 그 둘의 일치는 둘만으로 끝나지 않고 둘의 사랑의 일치로써 자녀를 낳고 그 자녀를 부부는 함께 기뻐하고 사랑하며 자녀와도 일치를 가져옵니다. 이렇게 사랑은 구별을 뚜렷이 하며 일치를 낳고 또 다른 구별된 너를 대하면서 기뻐하고 일치를 넓혀가고 깊게 하면서 공동체를 탄생시킵니다.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심도 셋이 뒤섞여서 구별이 없어진 하나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이 뚜렷하면서 사랑으로 일치하고 그 일치는 또 하나의 ‘너’인 성령을 낳아 구별된 그 성령을 기뻐하고 일치케 되어 구별이 뚜렷한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으로 일치되어 한 분이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사랑의 일치에 참여시키시어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사랑의 하느님과 일치되어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나, 너로 구별이 뚜렷한 주체로서 개체들이지만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면서 생명력을 얻고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멘.






14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서울대교구 홍보실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시는 발현사화입니다.

예수께서 평소에 일러주신 대로 열한 제자들은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뵈옵고 처음에는 의심도 했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어 그분께 경배했습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으셨다고 선언하시면서 열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들이 받은 사명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본디 갈릴래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만을 상대로 전도하셨는데, 이제 같은 땅에서 제자들을 시켜 모든 민족을 상대하여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제자들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해야 할 일은 ‘세례수여’와 ‘계명준수교육’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평소에 명하신 것들을 다 지키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면서 “보시오,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그대들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를 돕고자 늘 함께 계시겠다는 현존약속이라 하겠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이는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를 거치면서 형성된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말하는 언어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끊임없이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무상으로 모든 이들에게 베푸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에 베푸심을 계속해 나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외형적으로만 볼 때 분명히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교회 내적으로는 인구 증가율만큼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 외적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는 그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외형적인 성장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내적 성장을 꾀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현존 약속을 믿고 끊임없이 베푸시고 사랑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세상에 전해야 하겠습니다.






15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나)   아름다운 세상

김명순 루피나/영문학 박사


지금 저는 환갑이 지난 나이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거리가 먼 것이 아니라 바로 제 주위에서 머뭇거리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떠나는 것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사가는 것”이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은 하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즐거운 소풍 길”이라고도 했습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한 여기자는 “먼 바다를 나서는 배는 이쪽에서 보면 점점 멀어지지만, 바다 저쪽에서 보면 점점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이 죽음이다.” 즉, 하늘나라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저는 20여 년간 살던 집에서 지금의 집으로 이사올 때 묵은 짐을 과감히 정리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버릴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자라는 모습이 속속들이 배어있는 것들, 아스라한 추억이 담겨있는 저의 발자취 하나하나가 모두 제 삶에 발자국이 박힌 것들이었습니다. 아끼던 물건과의 이별이 이렇거늘 하물며 사랑하는 남편, 나의 분신인 세 딸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손자 손녀들, 몇십 년을 두고 사귀어온 정다운 나의 친구들, 허물없이 지내는 이웃들을 두고 어찌 이 세상을 떠나겠습니까?


아기가 태어날 때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더욱 힘껏 움켜쥐려고 하듯, 더 많이 가지려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큰소리로 울며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이 세상과 하직할 때는 모든 것을 떨쳐 내린 듯, 편안히 두 손을 활짝 펴고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고 “돌아가셨다”라고 말합니다. 즉 주님의 품으로 영원히 돌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니 얼마남지 않은 저의 생애에 그 동안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하지 못하던 일들, 사랑과 시간을 나누고 능력과 재물을 나누며, 섬김과 나눔과 베품의 생활을 하며 하루하루를 주님의 사랑 속에 마무리지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천상병 님의 시가 생각납니다.


    귀 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저는 여기에 다음 한 구절을 보태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






16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 (나해)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당신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고 말씀하신다.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으시오.” 기쁜 소식이란 무엇인가? 이 기쁜 소식은 인간들 사이에 오셔서 그들을 위해 돌아가시고 그들에게 당신 성령을 보내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아들에 의한 인간들의 구원의 성취인 것이다. 이 구원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졌고, 복음이 선포된 성탄에서부터 성령강림까지 축일을 지낸다.


이 복음을 믿을 사람들에게 예수의 제자들은 세례를 주었고, 이 세례는 신앙으로 동의한 구원의 표지인 것이다. 이 구원이란 무엇인가? 마태오에 의하면 예수님이 세례의 양식을 가르쳐 주신다. “내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시오.” 이 신비로운 양식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안에 인간들의 신앙을 일으키는 설교의 내용이고, 성령에 의해 세례자들에게 전달된 생명의 신비를 요약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의 전해준 하느님 생명의 신비를 계시하였다.

신자들이 성세성사에서 받는 은총은 성령으로서 그들을 그리스도와 일치시켜 주면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계시되고 우리를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천상적 생명의 신비를 지적하기 위해서, 교회는 성서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성경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교회가 만들어 낸 것으로서 하느님 안의 일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느님은 세분이지만, 하느님의 이름은 오직 한분이신 참 하느님이시고,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이시다. 왜 교회는 성령강림축일 다음에 이 신비를 묵상하게 하는가? 그것은 성령강림이 어떻게 교회가 탄생했는지를 회상케 해주며, 성령의 은총이 무엇인가를 회상케 해주기 때문이다. 삼위 일체 축일은 교회가 어떤 생명으로 태어났는지를 가르쳐 준다. 즉 교회는 하느님 아버지가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신 생명으로 태어났다고 가르쳐준다.


삼위일체 축일은 오늘만이 아니라 모든 전례주년에서 이 신비를 거행하도록 교회는 강조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신비는 모든 신비를 비춰주는 근본적 신비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자 생활이란 나와 살아계신 하느님 아버지, 아들, 성령과의 개인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관해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간에서 전개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면서 우리가 하느님과 대화할 때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고 가르친다. 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효도와 사랑을 드려야 한다. 또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해 주셨고 계속 보살펴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은 구약시대에 한 백성을 선택하여 그들과 계약을 맺으셨고, 당신의 증거자가 되게 하셨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한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분께 의탁하고 살았다.


그런데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면서 아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이 분이 예수로서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유일하신 분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당신 아들을 주셨고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은 너무나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 상호간의 사랑의 폭발이 성령이시다.


이것이 생활하신 하느님의 신비로서 고립되지 않고 한분이신 하느님이시며 언제나 새로운 은혜 안에 완전히 일치되어 있는 하느님이시다. 예수는 언제나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예수의 제자들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영원한 생명의 원천으로 믿었다.

마태오는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루가는 그저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친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자녀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은총이며, 성세성사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 성령의 활동이 없이 우리는 아버지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도 없고, 예수를 믿을 수도 없다.


우리는 성령의 활동과 그의 내적 작용과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주심으로써 비로소 성령을 알 수 있다. 성령만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다. 바오로는 이것을 강조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로마 8.14, 16)

성령은 일치시켜 주시는 분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일치시켜 준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들처럼 사랑이기 때문이다. 성부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당신 아들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다. 성령은 우리에게 신앙을 주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부어 주신다.


성령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 신자 생활의 원천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신앙, 희망, 사랑을 북돋아 주신다. 성령께 충실하는 것은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당신 사도들을 떠나면서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당신들과 함께 있겠습니다.”라고 선포하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언제나 신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착실히 살고, 또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령께 의탁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자자가 되게 해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용감하게 따라 가도록 사랑의 생활을 함으로써 당신 아버지와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성령께 기도하자.






17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 (나해) 세상 끝날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천주 성부와 그 독생 성자와 성령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니, 찬미받으소서”(봉헌송).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반년을 지내온 오늘 이 노래를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천주 성자이심으로써 또 당신의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리아와 요셉께서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셨을 때 예수께서는 “나는 내 성부의 일에 마음을 써야 할 것을 모르고 계셨습니까?”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마음을 쓰신 일은 성부의 영광입니다. “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나와 성부는 하나입니다.” 예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성부여,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주께서는 부활하신 후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부께서 나를 보내셨음같이, 나는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사도들과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주께서는 성령께 대해서도 아주 똑똑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하면, 그는 내 말을 준행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빠라끌리또 성령께서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시겠고,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한 바를 다 회상시키실 것입니다.” “아버지한테서 내가 보낼 빠라끌리또께서 오시면, 아버지께로부터 좇아나신 진리의 성령 그분이 나를 증언하실 것입니다.” - 이렇게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께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간추려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하면 그는 내 말을 준행할 것이니, 나의 어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겠고 또한 우리가 그 사람에게 가서 함께 살겠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 신앙의 크나큰 신비입니다. 천주 성자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람이 되신 것도 이 신비를 계시하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교리를 깨우치시기가 매우 힘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교리를 얼마나 깨닫고 있습니까? 하여간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그리스도와 성교회에서 매우 중대하며 따라서 우리 인생에게도 중대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세를 받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도 성삼위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하면서 성호를 긋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또 우리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에는 성삼위의 이름으로 성유를 발리우는 병자의 성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는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저 교리일 뿐입니다. 이 교리가 신자들의 마음을 따뜻이 하거나 영신적 생각이나 생활 태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듯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한 분이신 하느님께 세 위가 계시며, 세 위께서 각각 온전히 천주성을 차지하고 계신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완전히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성삼위께 진정으로 관련을 맺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천주 성자이신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안에 사시게 하여,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 정신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가득 차고 우리 마음은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를 충만케 하시도록 하여 하느님의 사장을 맛들이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우리 마음의 귀빈으로 모시기를 더욱 더욱 원해야 합니다.

끝으로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대로,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사랑과 기도와 우리 전체를 성부께로 향해야 합니다. 미사 때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더불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온갖 영예와 영광을 세세에 영원히 받으시나이다. 아멘”


우리는 언제나 미사로 돌아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절정이요 결정이듯이, 미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주님의 구원과, 성부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기도를 알려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외로운 인생의 구렁에서 건져내시어 하느님의 가족, 성삼위의 가족에로 다시 이끌어 들이십니다. 우리는 미사 때 우리 기도를 올바로 드려서 성삼위께 대하여 올바른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도 올바르게 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주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만백성을 가르쳐 나의 자자가 되게 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다 지키도록 가르치라. 보라, 나는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노라.”






18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나)  사랑의 친교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오늘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관하여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마태오 복음서의 제일 끝자리에 나오는 말씀을 듣는다. 먼저 복음 말씀 자체를 묵상하고, 이어서 「삼위일체 대축일」인 오늘 축제의 의미에 관하여 묵상하겠다.

 

오늘 주일 복음의 내용은 매우 집약적이다. 특히 「열한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갔다」라는 오늘 복음의 첫 문장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복음서의 앞부분에 이미 나왔던 내용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지면 관계상 몇 가지만 집중하여 살펴보겠다.

 

「갈릴레아에 있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레아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마태 28,10: 26,32), 「갈릴레아」라는 장소는 제자들에게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던 곳이었다. 왜냐하면 갈릴래아는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처음으로 소명을 받은 곳」이었고, 「제자로 양성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후 당신의 제자들을 새 출발시키시려는 예수께서는, 이제 그들을 그들의 「첫 사랑」이 있었던 갈릴래아로 불러내신 것이다(참조: 호세 2,16).

「산으로 갔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산」도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성서를 보면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 분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제자들은 「산」에서 산상설교라는 새롭게 해석된 계명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갈릴래아의 그 산」으로 다시 부르신 것은 매운 의미 깊다. 그것은 당신의 제자들을 「모든 민족들에게 파견」하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당신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상기시켜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갖고 계신 분, 즉 죽음까지도 그분의 권한아래에 두고 계신 주님으로서의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민에게 파견하신다. 그런데 이 때 그분이 주시는 제자들의 사명의 핵심은 만민을「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것」이다. 언뜻 보면 매우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이다.


「제자로 삼다」「제자가 되게 하다」가 핵심사명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 점은 지상 생애 동안 예수께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제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좀 더 이해가 될 수 있다. 무릇 제자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사명은 복음선포를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열한 제자는「예수님의 제자」로만 남아 있었는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까지 체험한 이제 그들은 만민에게 파견되어,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에 하셨던 말씀대로 「사람낚는 어부들이 되게」(마태 4,19) 된 것이다.

「나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새롭게 탄생되어, 계속 자라날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곧, 교회에게 주어진 가장 든든한 보증의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6)의 역할을 하려면, 갖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그 공동체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뜻하는 「임마누엘」이셨던 분이신 주님께서 「그들과 늘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공동체이다. 이제는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의 주제와 직접 관련되는 말씀에 대하여 묵상할 차례가 되었다.


사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관한 신앙 교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적 이해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었던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계시」된 것으로서, 인간인식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할 줄 아는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초기의 몇세기 동안 교회는 세상의 지혜에 비추어 쉽게 이해하려는 경향에 맞서,이 신앙교리를 지키기 위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했다.

오늘 복음말씀에 의하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포괄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사랑의 친교」안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람들은 성자 예수님과 결합되고, 성령을 받는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성자 예수님과 가장 깊은 사랑으로 「일체」가 되어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 때 성령은 이런 친교를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해 준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 성령의 삼위로 되어 계시다는 카르침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을, 예수님의 삶 전체를 통하여 증언된 것처럼,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참조: 1요한 4,8․16)라는 점과 연결시켜 묵상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사랑은 역동적이다. 사랑은 가만히 정체되어 있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그토록 충만하셔서 피조물인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그 삼위일체적 사랑의 친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부르시기까지 하신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삼위일체이시며. 사랑이신 이 하느님 안에 든든한 기초를 두고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늘 경탄하며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28                           삼위일체 대축

신은근 신부



삼위일체는 한 분 하느님 안에 계신 세 위격을 뜻한다. 세 위격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단순한 교리건만 늘 꼬리표가 붙는다. 삼위일체란 신비에 속한다. 하느님에 대해 인간은 완전히 알 수 없다. 대충 이런 말들이다. 정말 인간은 하느님을 완전하게 알 수 없는 것일까. 신비에 속한다면 왜 공적축일로 정해놓고 의미를 되새기려는 것일까.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완전하게 아는 자식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다 자식을 낳고 살면서 비로소 부모의 심정을 깨치게 된다. 하느님을 알게 되는 과정도 비슷하다. 처음부터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다.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은총과 축복으로 끌어주시는 하느님을 느끼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게 된다.


그러니 깨달음에는 이론이 중요하지 않다.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데 무슨 이론이 절대적이겠는가. 그분들이 어떻게 사셨고 어떻게 대해주셨던가. 이것을 깨닫고 느끼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삼위일체 교리도 이론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삼위일체는 그저 하느님께서 사시는 모습(존재 양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이 모습이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이것을 깨닫는 일이다.


삼위일체 교리 안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다. 세 위이신 하느님 안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분은 높고 저 분은 낮다는 그런 삶이 아니라 서로 똑같은 일치의 모습으로 계신다는 것이다. 일치가 얼마나 심오하던지 하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갈수록 세상은 물질화 되고 있다. 물질을 가운데 두고 일치한다. 사랑을 중시하고 신의 때문에 일치하던 세상은 지나가고 있다. 결과는 불신이다. 물질이 떠나면 마음도 떠나버린다. 삭막하고 단절된 관계가 된다. 그러니 위안을 찾는 쪽은 본능이다. 쾌락에서 위로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돌아갈 본래의 위치는 사랑의 관계다. 그리고 사랑의 관계는 일치에서 시작된다. 일치는 획일화가 아니라 조화의 관계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도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셨지만 일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이 삼위일체다. 우리의 가정에는 삼위일체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부모와 자녀사이에, 부부 사이에 일치의 모습이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아버지는 야훼의 역할을, 어머니는 예수님의 역할을, 자녀들은 성령의 역할로서 희망과 기쁨을 불어넣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전에는 너무나 우리를 간섭하시고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살피시는 분으로만 오인되어 왔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들은 일치의 모습으로 계신다. 그리고 그 일치 속으로 우리들을 초대하고 계신다. 그러니 먼저 우리는 가족 안에서 일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축일의 메시지인 것이다.






29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최상범 신부


많은 경우 청소년 문제의 원인은 청소년 자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문제를 갖고 있고 균형잡히지 못한 삶의 태도를 가진 어른들과 함께 사는 청소년들은 사실상 어른들의 문제를 마치 거울처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왜 적응하지 못하는가? 왜 문제를 일으키는가?하는 질문을 하다보면 그것은 그 청소년을 돌보고 교육하고 키우는 어른들과 연결돼 있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과 학교, 교회와 사회가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분위기라기 보다는 지시하고 요구하고 주문하는 분위기이기에 그들은 대화의 빈곤과 제대로 수용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하는 오늘 청소년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시는 아버지,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아들, 그리고 서로 한 몸이 되도록 일치시켜주고 그 일치에로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영의 신비는 청소년과 맞물려 있는 가정과 학교, 교회와 사회에 중요한 원리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통한 균형잡히고 건강한 문제해결은 가정의 복음화를 현실안에 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의 불일치를 극복하고 성가정을 이루려는 노력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대학별로 또 동아리 활동이 가능한 중고등학교 별로 복음화에 대한 활동을 더욱 촉진시켜서 신앙에 갈증을 느끼는 학생들이 보다 쉽게 신앙에 다가 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일선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는 교육자들의 관심과 희생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면에서 전구교구 중등교육자회의 재기가 요청됩니다. 얼마전 어떤 변호사 한 분이 특별한 어려움에 처한 청소년들이 있다면 법률적인 면에서 자문과 도움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음악, 미술, 교육, 심리, 매스콤, 레크리에이션, 상담 등 각계 각층의 능력과 지식을 갖춘 신앙인들이 청소년들을 위한 기획과 협의에 물심양면으로 관심을 가질 때 교회내의 청소년 문화가 보다 더 복음적인 방향으로 촉진돼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과 일치안에 청소년에 대한 개인개인의 관심과 사랑과 경험을 합쳐서 보다 더 복음화되어 나가는 교구 공동체를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30                 삼위일체 대축일 :   성삼위께 찬미와 흠숭을!

4세기말 정립된 교리 : 하느님의 초월적 특성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부, 성자, 성령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또한 하루에도 수 없이 여러 번 성호경과 영광송으로 성삼위께 찬미와 흠숭을 드린다. 그러나 한 분이면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삼위일체 신비’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내적 신비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정리해본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位格)으로 계시며, 이 위격들은 선후(先後)나 높고 낮음이 없이 같은 신성(神性)을 지닌다는 것이 4세기말 정립된 삼위일체 교리의 주요 내용이다. 초기 교회 신자들은, 신약성서에 명시된 이 신비를 주로 세례 때 고백함으로써 신앙생활의 바탕으로 삼아왔다.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반포된 '가톨릭 교회교리서'는 이를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261항)라고 강조하면서, 오직 하느님만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당신을 계시해 주심으로써, 이 신비를 깨닫게 해줄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가톨릭 신앙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삼위일체를 한 분의 하느님으로 흠숭하되 각 위격을 혼동하지 않으며, 그 실체를 분리하지 않는다'(266항)고 이 교리를 요약한다.

 

현대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신비를 하느님의 초월적 특성이기도 한 동시에,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드러내는 신비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열어 보이고 기꺼이 내어주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라는 것이다.

  즉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고, 지극히 사랑해주는 하느님 아버지로서의 성부, 인간과 세상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예수 그리스도인 성자, 교회와 세상을 은총으로 이끌어가는 협조자로서 우리와 친교를 나누는 성령의 세 위격이, 구세사 안에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해방신학자 세군도는, 성부는 우리 앞에 계시는 하느님으로, 성자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그는 사랑으로 일치,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성삼위의 신비를 우리도 엮시 매일의 삶 속에서 생활화해야 한다고 강조하고있다.

교회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성신강림 대축일 후 첫 주일에 기념한다, 이는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교회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삼위일체 신비를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 원리로 삼도록 권고하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하느님께서 삼위로서 인간과 관계를 맺고 계시듯이 우리도 삼위의 사랑을 이웃과 함에 나누도록 초대하고 있다






31                   삼위일체 대축일 :   삼위일체의 신비



▲ 성서 안에 감추어진 삼위일체 신비 = 구세주로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사실 '삼위일체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밝혀주신 하느님의 존재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마태 28,19)"고 제자를에게 가르쳤다. 또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14,16-17)며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해 강조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성삼위의 신비를 추상적인 언어가 아닌 구체적인 계시의 말씀으로 풀이해 주었다.

 

▲ 교부들의 비유 =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많은 이단들이 발생하자, 교부들은 여러 비유를 이용해 삼위일체를 설명했다. 그 대표적인 비유가 ‘태양' , ’새 잎 클로버' , ‘정삼각형'이다.

  “태양은 불꽃과 빛 그리고 열로 구성돼 있다. 이 셋은 서로 각자 존재하고 고유한 역할을 하지만 하나의 태양을 이루고 있다. 하느님도 성부․성자․성령으로 구분되는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시나, 한 분

이시다. "

“세 변의 꼭지점이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듯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도 성부․성자․성령께서 서로 고유하게 계시면서, 완전한 일치를 통해 한 하느님으로 존재하신다."

 

▲ 이콘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느님 = 신약성서에서는 삼위일체를 표현할 때, 성부를 ‘아버지'로, 성자를 ’아들'로, 성령을 ‘비둘기'로 묘사하고 있지만, 구약성서에서는 그처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구약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표현하는 이콘 그림도 사뭇 다르다.

  루블료프가 그린 구약의 삼위일체 이콘을 보면, 성 삼위가 같은 천주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똑같이 푸른 빛 옷을 입고 계신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배경 전체를 노란색으로 칠해 성삼위가 따뜻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인간처럼 영혼과 육신을 가진 존재가 아닌, 순수한 영적인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 삼위일체를 천사의 모습으로 그렸다.

신학자들은, 이런 교부들의 비유는 전통적으로 존중돼야 하겠으나, 삼위일체 신비를 표현하기에는 부적당한 비유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신학자들은 성서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본성을 찾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성서는 복되신 성삼위를 이해하는 데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목표가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성삼위께서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 가톨릭 기도문 안에 드러난 삼위일체 신비 = 삼위일체 신앙을 가장 간결하면서도 제대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성호경'이다. 십자가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부르는 기도인 성호경은, 천주 성삼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또 교회는 초세기부터 ‘사도신경’을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께 대한 믿음을 선언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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