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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0:43
분 류 연중19-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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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23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23 주일

        10. 최익철 신부(나)/ 18

        11. 김영진 신부(나)/ 19            12. 박종탁 신부(나)/ 21

        13. 강길웅 신부(나)/ 22            14. 김영남 신부(나)/ 25

        15. 신은근 신부(나)/ 26            16. 공한영 신부(나)/ 28

        17. 김병열 신부(나)/ 29            18. 방윤석 신부(나)/ 31

        19. 안경렬 신부(나)/ 33            20. 교구 주보(나)/ 37

        21. 이규희 작가(나)/ 38



10.          연중 제23주일   마르코 7,31-37 (나) 믿음,

                                                     최익철 신부



예수님이 무슨 기적의 은혜를 베푸실 때에는 꼭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도 믿음을 보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1-2; 마르 2,5; 루가 5,20)하셨으며 소경을 고치실 때도 애원하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다고 믿느냐?”하고 물으셨을 때 “예, 믿습니다.”하는 대답을 들으시고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9,27-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처럼 12년 동안이나 하혈병으로 고생하던 부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면 나으리란 믿음을 가지고 접근하자 예수님은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사렸다”하시며 돌려 보내셨고 12살 먹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 가는 도중 아이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도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 예수께 나아가려다 물에 빠져들게 되었을 때도 주께 도움을 청하는 베드로에게 손을 잡아 주시면서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하시며 나무라십니다(마태 14,22-31; 마르 6,45-52; 요한 6;15-21).

가나안의 여자가 마귀 들린 딸을 구해 주십사 간청하였을 때 짐짓 거절하시자 다시 애원하는 모습을 보시고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태 7,21-28; 마르 7,24-30)하시었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아이를 데리고 제자들이 그 마귀를 쫓아 보려고 하였지만 되지 않았을 때, 제자들이 예수께 그 연유를 물으니,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리로 옮겨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하셨으며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백부장의 믿음은 우리를 매료시킵니다. 백인대장이 자기 하인의 병을 낫게 하여 주기를 청하자 주께서는 “가서 고쳐 주마”하셨음에도 백인대장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하며 수고스럽게 오실 필요까지 없음을 말하는 그를 보시고 그 믿음을 칭찬하시며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8,5-13; 루가 7,1-10; 요한 4,43-54)하십니다. 이렇듯 믿는 마음이 있는 곳에 기적은 주어졌으며 당신을 알아보는 이를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가까이 있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은 수없이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예수를 유대인들은 몰랐으며 30년을 나자렛에 살으셨을 때도 목수의 아들이란 사실밖에 몰랐습니다. 그 알아보지 못함이 갈바리아 산에 못박히게까지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장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눈을 열어 주시고 당신을 봄으로써 성부를 알아보게 해 주시어 하느님과 사람과의 거리를 좁혀주셨음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오스딩 성인은 “지나가는 예수를 무서워하라.”하셨습니다. 예수를 예수로 못 알아보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 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못 만나는 차이는 커다란 차이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생활하면서 만날 수 있도록 하시고 또 만나면서도 못 알아보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아오스딩 성인은 “주님을 찾기 위해서 알프스 산을 넘거나 바다를 건널 필요는 없고 다만 네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사이에 계시고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함은 아직도 우리가 장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님의 모습을 계속 지니게 된다면 나중 주께로부터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하시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눈을 뜨기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그것은 보고자 하는 열의와 끈질긴 매달림입니다. 주께서는 거절치 않으실 것이며 당신을 알아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겐 안 되는 일이 없다.”(마르 8,23)라고 하셨으니 분명 믿고 구하는 우리에게 주께선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루가 17,19)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불가능이 없는 믿음이기에 믿음이 있는 이에겐 절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인생이든지 그 일생을 살아 나가는 동안 캄캄한 어둠과 절망적인 순간이 오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주 우리 옆에 와 계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지적으로만 살려는 사람은 주님이 바로 자기 옆에 계심을 알지 못합니다. 감각이나 지각을 통해서 믿음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신뢰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깁시다. 그리고 조건 없이 신뢰하는 믿음을 원하시는 주님께 우리를 드립시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산 믿음, 실천하는 믿음이어서 하느님 안에 뿌리를 박고 생활해 나가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도 백부장의 믿음을 허락하여 주십사 간청하면서 건강한 날들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서 25,12)











11.        연중 제23주일   마르코 7,31-37 (나) 살아있는 송장  

                                                           김영진 신부



 6․25사변 때 8사단 용사의 하나로, 전투하다 충주에서 중공군에 체포되어 평양근처까지 포로로 끌려가셨던 아버지는, 신발 하나 없이 볏짚단 하나에 몸을 숨긴채 남쪽으로 도망을 쳤다고 한다.

폭격이 심한 낮에는 수풀이나 웅덩이에 볏짚을 덮고 위장한 채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이동하여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포로가 되었을 당시 인민군에게 매를 많이 맞은 이유와, 탈출시에 온갖 시련으로 아버지는 한쪽 귀를 잘 듣지 못하였다. 남들은 쉽게 눈치를 채지 못하였으나, 아버지는 가끔 당신의 귀가 잘못된 경위를 말씀해 주시곤 했다,


세상을 떠나시기 얼마 전에도 이 말씀을 하시며 “나는, 귀는 나쁘지만 눈은 아주 좋아, 그러니 내가 죽으면 내 눈을 다른 이에게 주면 좋겠어"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어리석게도 그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하는 불효자가 됐다. 소경이나 귀머거릴 그리고 벙어리에 대한 성서 말씀을 읽을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은, 어느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셨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소경 중에 소경은, 자신이 소경이면서도 소경인지 모르는 사람이요, 귀머거리 중에 귀머거리는 자신이 귀머거리이면서도 귀머거리인 줄 모르는 사람이며, 벙어리 중에 벙어리는 자신이 벙어리이면서도 벙어리인줄 모르고 사는 사람이다. 누가 아무리 눈이 좋다 하여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만도 못한 것이 사람의 눈이요, 누가 아무리 귀가 밝다 하여도 개나 박쥐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사람의 귀는 최대한 19에서 2만 사이클밖에 잡지 못하는데 비하여, 개는 25만 사이클, 박쥐는 80만 사이클, 심지어 돌고래는 1백82만 사이클까지 잡는다고 하니, 사람이란 눈과 귀가 좋다고 자랑할 것이 못된다. 사람의 눈이 좋다는 것은 다만 물리계를 초월하여 계신 분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비로소 사람의 눈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요, 눈다운 눈을 가졌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또 사람의 귀는 아무리 좋다해도 자랑할 것이 못된다. 이유는 여타 동물에 비하여 보잘 것 없는 것이 사람의 청력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귀를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물리계를 초월하여 계신 분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귀를 소중하고 귀하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눈과 귀가 좋다는 이유



하느님이 계시지만 하느님을 볼 수 없는 장님이 얼마나 많으며,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귀머거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도 스스로 장님인 줄도, 귀머거리 인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사람의 말이 세련되고 좋다고 하는 것은, 그 입으로 사랑과 진실을 말하고, 격려화 감사를 말하는 하느님의 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입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만일에라도 그 입으로 독을 품어내고 부주의하게 함부로 말을 내 뱉으며 시기와 질투, 잘난척하는 말만 만들어 낸다면 그는 스스로 벙어리 인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리로이드 존 오길비」는 그의 저서 ‘하느님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샜다. ’어느 날 나는 이비인후과 의사를 찾아갔을 때, 그는 진찰하기 위하여 먼저 나의 귓속을 청소해 주었다. 그는 강력한 펌프를 사용하여 오랫동안 쌓였던 내 귓속의 귓밥을 빼내 주었다. 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이렇게 많은 귓밥을 담고서 듣는데 별지장이 없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요." 그랬더니 의사는 나에게 멋진 말을 해주었다.



 “귓밥이 조금씩 쌓이고 떡이 되면, 그때에 청력장애가 옵니다. 그렇게 되면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크리스천처럼 귀머거리가 됩니다."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크리스천처럼 귀머거리가 된다는 이 말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읽고 있는 독자 그대에게 향하는 말은 아닐까? 살아있는 송장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 주변에서 수없이 볼 수 있는 것이 살아있는 송장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이야말로 살아있는 송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귀머거리․소경․벙어리 신앙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시는 말씀이 나온다. 또 다론 복음에서는 소경을 보게 하시는 말씀도 있다. 이는 물리적인 귀머거리, 벙어리, 소경에 대한 치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못 들으며, 입이 있어도 하느님의 혀가 되어주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치유의 말씀이신 게 아닌가!

  

한쪽 귀는 잃었으나 하느님의 말씀을 뛰어나게 듣고 살으셨던 아버지, 육신의 눈도 좋으셨으나 영적인 눈이 참으로 맑으셨던 아버지, 한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해야 된다며 가족들도 피하는 폐결핵 환자에게 밤새도록 교리를 전하시던 아버지, 사제이면서도 귀머거리, 소경, 벙어리로 살아온 나의 삶! 마치 살아있는 송장처럼 살아온 삶을 반성해본다.











12.      연중 제23주일   마르코 7,31-37 (나) 마땅히 해야 할 일

                                                 박종탁 신부



한 탈주범이 세상을 소란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였지만 더 역설적인 것은 탈주범죄 행태에 비추어 볼 때 벌벌 떤 것은 시민이 아닌 경찰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탈주범의 행적에 따라서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법과 도덕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삶과 질서유지를 위하여 윤리규범인 도덕과 강제규범인 법을 만들어 운용합니다.



경찰이 책임을 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법으로써 정해진 경찰의 직무 즉 마땅히 해야 할 경찰로서의 할 일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일반 시민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삼엄한 경계와 검문 검색에도 불구하고 그의 탈주행동과 범죄행위를 막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법의 적용을 받는 경찰이 그렇고 윤리 도덕의 적용을 받는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 사랑의 법 적용을 받는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이 점을 명확히 보여 줍니다. 흔히 우리 믿는이들은 ꡐ하지 말라ꡑ라는 계명에 익숙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쉽게 죄를 짓지 않는 것에 만족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에 만족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의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를 적극적인 모습으로 만듭니다. 충고와 같이 거절당하기 쉽고 주제넘은 일같아 보이지만 사람 하나를 얻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하라고 이르십니다.



특별히 그것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더욱 큰 관심과 사랑을 촉구하시면서 엄중한 경고를 하십니다. ꡒ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너에게 물으리라.ꡓ는 말씀은 ꡒ너도 같이 죽으리라.ꡓ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비록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고 세상은 더욱 더 무관심한 세상으로 가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임을 신앙인들은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13.    연중 제23주일   마르코 7,31-37 (나) '그 날'은 이미 왔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35,4~7a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고 벙어리는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제2독서 로마 13,8~10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복 음 마르 7,31~37 (예수께서는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도 말을 하게 하셨다) 



오늘 1독서는 유배생활 전후로 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사야가 들려주는 구원의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의 자녀가 죄를 지을 때에도 그 곁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이스라엘은 일찍이 하느님의 계명에 불충실했기 때문에 혹독한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서 참혹한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좌절한 백성에게 희망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구원의 날이 언제고 온다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그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여기서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말을 한다는 것은 백성의 모든 소망과 꿈이 그 날이 오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꿈을 간직하게 되었으며 그 날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 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이 오려면 먼저 그 분이 와야 합니다. '그 분'이 와야 '그 날'이 옵니다. 그분은 즉 메시아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몇 백 년이 지나도 메시아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쳤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옛날 이사야의 예언이 과연 어디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묘한 것은 사람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그러나 막상 메시아가 왔을 때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그 엄청난 능력을 보면서도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일찍이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와 자기 백성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과연 예수님 그 분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물어 봤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던 분이 바로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때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전하거라.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걸어다니며 귀머거리가 말을 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



이게 무슨 말씀인고 하니 그러한 것들이 바로 이사야가 말한 구원의 날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표징을 통해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그 날의 그 분이며 메시아요 꿈의 완성자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신이야말로 백성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른 의미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집스럽게도 세속적인 차원에서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날'을 현세적인 사건이 만족되고 해결되는 날로만 믿고 기대했습니다. 즉 나라가 해방되고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되며 사회가 안정된 질서를 찾게 해 주는 그분을 기다렸는데 예수께서는 그 문제에 있어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거부하고 지금도 여전히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모순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어떤 열심한 부인이 있는데 갑자기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왜 안 나오는지 사람을 시켜 알아 봤더니 아들이 대학에 떨어져서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예수님이 안 들어주시니까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눈먼 이들이 많습니다.



언젠가 냉담자 방문 때에 한 형제가 그랬습니다. 자기가 30여 년 전에는 아주 열심했답니다. 성당에 다니는 재미로 살았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 나옵니다. "왜 안 나오느냐?"고 물으니까 쉬었다 나온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구호물자 나올 때 구호물자 받는 재미로 성당에 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실제로 깨닫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습니다. 성서에 보면 그래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얘기해도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자기 편견, 자기 아집에 빠져 있기 때문에 진실된 것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귀가 트여야 합니다.



유대인이 수백 년 동안 기다렸던 참 메시아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분은 우리가 평생 찾고 만나야 할 주님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인간의 어떤 문제도, 세상의 어떤 모순도 다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내 계산으로만 그분을 바라본다면 그 신앙은 무너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날이 구원의 날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14.           연중 23주일(나)   마르 7,31-37 

에페타 (열려라) 차가운 내 마음을 열어라

김영남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방인 지역에서 어느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셨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예수님의 이 치유행위는 오늘 주일 제1독서에도 나오는 다음의 예언을 회상시키는 것이었다.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 (이사 35, 5). 복음사가는 이 치유 이야기를 통해 기다렸던 '메시아 구원의 시대' 가 드디어 다가왔다는 것을 선포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성경은 육체적인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뿐만 아니라, 영적인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아무리 기적이 많이 일어나도 '믿지 않으려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은 "눈은 있어도 보질 못하고, 귀는 있어도 듣지를 못하는 사람"(참조: 이사 6, 9~10; 마태 13, 14~15)이라고 탄식한다.



아무리 우리의 귀가 건강하여 갖가지 소리를 잘 듣는다 하여도 정작 우리가 듣고 따르며 실천해야할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귀머거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무리 우리가 건강한 입과 혀를 가지고 있다 하여도 우리의 입에서 탐욕스러운 말이나, 남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듯한 말이나, 남의 삶에 독침을 쏘는 듯한 말만이 나간다면, 우리 또한 '참된 말' 을 할 줄 모르는 벙어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우리의 눈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이웃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돈이나, 권세, 영예만을 본다든지 또는 우리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줄 모른다면, 우리 또한 하느님 앞에서 눈뜬 소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많은 경우에 우리들 자신도 영적으로 여러 가지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깨닫고, 주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주님의 마음과 눈과 귀로 다른 사람들, 특히 어려움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다가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귀먹은 반벙어리를 치유하실 때 "에파타!"('열려라!' 를 뜻하는 아람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께서 오늘의 우리에게도 다음과 같이 열려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차갑고 굳게 닫아걸고 있다면, 더욱 더 그렇다.



“차가운 네 마음을 열어라! 보아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어있는 네 눈을 떠라! 들어도 듣지 않으려는 네 귀를 열어라! 진리와 사랑의 말이 잘 나오지 못하는 반벙어리가 된 네 입과 혀를 열어라!"



여기서 세례예식 때, 들은 적이 있는 말씀을 기억하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다. 교회는 오랜 옛날부터 어린이 성세예식 때 (흔히 생략하기도 하지만) 이른 바 ‘에페타' 예식을 가져왔다. 세례예식을 거의 마치면서 세례받은 어린이의 귀와 입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면서 사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신 주 예수여, 이 자녀가 오래지 아니하여 귀로 주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천주성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세례 때 들었던 이 말씀을 우리가 지금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하겠다.



지금까지 위에서는 주로 우리 인간 편에서 마음과 눈과 입을 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자세에 앞서야 하는 더 중요한 태도가 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귀먹은 반벙어리' 가 체험한 것처럼, 우리가 당신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을 열어주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이 있기 전에 이미 주님의 사랑이 앞서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우리 신앙인의 희망의 근거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은 말을 주고받으면서 즉 대화를 해가면서 '인간' 이 되어간다. 핏덩어리 갓난아기가 하루하루 자라나 어느덧 "엄마! 아빠!" 하고 말을 걸어오면 그 부모들이 얼마나 기뻐하는가? 그런데 사실 그 맑은 소리의 아기의 부름은 그 아기 엄마 아빠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다. 그 아기가 그렇게 엄마 아빠를 부르기 전에 먼저 그 아기의 부모가 사랑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가 수없이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부르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수없이 부르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기도, 우리의 '부름' 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끝으로 오늘 주일의 복음 말씀의 정신을 잘 담고 있는 어느 기도를 인용한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시어 신앙으로 부유케 하여 당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 천주여, 길 잃고 방황하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여, 기도할 힘을 잃고, 기도할 수조차 없는 병든 인간이 당신 기적의 능력과 은총으로 당신을 한없이 찬미하게 하소서"











15.          연중 제23주일   마르코 7,31-37 (나) 에파타

                                                     신은근 신부



사람들은 귀먹고 벙어리 된 누군가를 예수께 데려왔다. 그의 딱한 처지를 보신 예수님은 에파타라는 말씀으로 고쳐주신다. 얼마나 놀랐을까. 기적의 자리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발음 그대로 적어놓았다. 에파타(열려라)였다. 모두가 포기했던 사람인데 에파타라는 말씀을 듣자 귀가 뚫리고 말문이 열렸던 것이다.



듣지 못했던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대입시켜 볼 수는 있다. 물론 우리는 건강한 귀를 지녔으며 바람소리 하나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소리는 얼마만큼 듣고 있는지. 한번이라도 그분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지. 아니,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는 자체를 생소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는지. 그렇다면 복음의 귀먹은 사람은 우리 자신일 수 있다.



하느님의 소리는 사건 속에서 들린다. 우리가 매일 겪는 좋은 일 좋지 않은 일, 행복한 일 불행한 일, 이 모든 것 속에서 주님은 말씀을 건네고 계신다. 하느님의 소리는 만남을 통해서 들린다. 우연의 만남이든, 필연의 만남이든, 똑같은 매일의 만남이든, 그 만남 속에서 당신은 끊임없는 메시지를 주고 계신다. 이것이 하느님 안에서의 인생살이다. 정말 우리는 얼마만큼 그분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그분의 소리를 한번이라도 인정한 적이 있는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면 복음의 말씀처럼 마음을 열어야 한다. '에파타', '열려라' 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열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의 말씀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분이 나와 내 가족에게 하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은 기적의 연속이다. 아무 걱정거리가 없는 것을 기적이라 생각하지 말자.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걱정한다고 미래가 바뀌고 운명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열어주셔야 바뀐다. 에파타 라고 그분이 말씀하셔야 달라진다. 그분은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고 있다면 어찌 하겠는가. 어떻게 통교가 이루어지겠는가. 어떻게 매일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귀먹고 벙어리였던 사람은 자신의 부족한 처지를 예수님께 보여드렸기에 에파타 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송두리째 드러냈기에 예수님의 시선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주님 앞에 나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에파타의 말씀처럼 먼저 마음의 문을 여는 일이다. 그리하여 매일의 사건과 만남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사는 일이다. 갈수록 불확실한 삶을 견디어야 하는 우리들에게 에파타는 꼭 필요한 가르침이다.











16.            연중 제23주일   마르코 7,31-37 (나) 열려라,

                                                        공한영 신부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중에는 귀가 먹고 말 못하는 벙어리는 없을 것이다. 성령쇄신 운동가인 맥나드 신부님이 한국에 와서 서울, 부산, 광주에서 치유의 밤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광주에서 가진 치유의 밤에 그렇게 많은 병자와 불구자들이 모인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병자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은 모두 맥나드 신부에게 자기 자식에게 안수하여 병을 고쳐 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갈릴래아로 돌아오시는데 시돈으로 올라 가셨다가 데가블리를 돌아 갈릴래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긴 여행은 8개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여장을 풀고 계실 때 그 마을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 하나를 데려와서 고쳐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이 벙어리는 혀가 맺혀 있기 때문에 대화를 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대화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유익을 상실하며 살아 왔으며,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자기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는 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이를 불쌍히 여겨 예수께 데려와서 마치 선지자들이 자기의 손을 얹고 야훼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처럼, 예수께서 그에게 “안수하여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군중에서 따로 데리고 가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벙어리가 말하는 것을 보고 “그분의 솜씨는 능숙하기만 하다” 하며 경탄했습니다.



“귀먹은 반벙어리”-어떤 면에서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음이 눈먼 봉사보다 더 답답하고 불쌍합니다. 예수께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셨다는 이야기는 넓은 의미에서 마음의 귀를 뜻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가 열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의 발언, 양심의 선언, 참 애국자의 부르짖음을 듣지 못하는 정신적 귀먹음이 오늘날 우리의 비극입니다. 귀가 있어도 바른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입이 있어도 바른 말을 할 수 없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오늘 성경에 나오는 바로 그 귀먹은 반벙어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周)의 무왕이 사람을 보내어 은 나라를 정탐하게 했습니다.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은나라는 어지러워 있습니다.’하고 보고했습니다. 무왕은 ‘어느 정도 어지러워 있더냐’고 묻자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무왕은 ‘아직도 멀었다’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다시 나갔던 첩자가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대단히 어지러워져 있습니다’ , ‘어느 정도냐’, ‘어진 사람들이 밖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아직 멀었다’ 그 뒤 나갔던 첩자가 다시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몹시 어지러워져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갔더냐?’, ‘백성들이 불평을 입밖에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무왕은 ‘됐다. 이제는’하고 급히 태공에게 명령하여 전차 3백대와 용사 3천명을 뽑아 갑자 날 아침을 기해 출전하여 주(周)를 사로잡고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는 것은 죽어버린 과거가 아니라 현재 속에 살아있는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라로 합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숨어서 하는 얘기가 얼마나 많으며 정치에 대한 불평 불만을 털어놓지 못하고 마음에 쌓아 두고 넘어가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등 언론기관은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정부는 총력 안보를 내세워 국민이 귀먹은 반벙어리로 살아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정신적으로 귀먹고 반벙어리가 된 사람들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복음에서처럼 귀먹은 반벙어리를 측은히 여겨 고쳐 주셨고, 세도 있고 많이 가진 자들 보다 잊혀진 사람, 쓸모 없는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셨습니다.



불구자의 자식을 등에 업고 ‘치유의 밤’에 쫓아다니는 어머니의 마음같이 우리는 우리 주변에 정신적으로 반벙어리가 된 사람들을 주님께 데려가 입과 귀를 열어주는 사랑을 가져야겠습니다. 주님만이 귀를 열게 하고 입을 풀어 바른 말을 하게 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세상의 흐름을 보고 막힌 귀를 뚫어 주는 크리스천의 예언직이 필요한 때입니다.











17.         연중 제23주일   마르코 7,31-37 (나)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자,

                                                           김병열 신부



사도 바오로는 “큰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만 아니라 나무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어떤 것은 천하게 쓰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귀히 쓰는 그릇이 될 것입니다”(디모 후 2,20-22)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큰집은 교회요 그릇은 신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궁전의 그릇이 되었으니 천히 쓰는 그릇이 되지 말고 귀해 쓰는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됩니까?



첫째,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한 가정 살림을 하자면 많은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 많은 그릇 중에는 깨끗한 것도 잇고 더러운 것도 있는데 부정한 그릇은 물도 마실 수 없으나 깨끗한 그릇은 보기만 하여도 기분이 상쾌합니다.



어떤 부인은 그릇을 씻을 때 거죽만 깨끗하게 하고 안은 잘 씻지 않으며 반대로 안은 씻고 거죽은 더러운 대로 내버려둡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를 보면 미숙하고 불완전한 신자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겉만 씻습니다. 잘 먹던 술도 안 먹고 미신을 다 버려서 겉으로는 깨끗하여진 것 같으나 그 마음속에는 더러운 것이 가득하여, 불평과 불만 시기 질투가 가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속은 그다지 더럽지 않지만 말 뿐이요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을 보면 더럽기 한량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안팎이 다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지 표리 부동한 그릇이 되어서는 귀히 쓸 수가 없고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린 이런 그릇이 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둘째, 깨지지 않고 쓰기 좋은 그릇이 됩시다. 가정에서 귀히 쓰는 그릇은 이가 빠지지 않은 그릇이요 쓰기에 편리한 그릇입니다. 금이 갔다든지 이가 빠진 그릇이나 좋아도 쓰기에 불편하면 귀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깨지지 않고 쓰기 좋은 그릇입니까. 낙심하지 않고 순종하는 자입니다. 신자 중에는 무슨 일을 좀 하자고 하면 자기는 할 수 없다고 하고, 왜 주일날 잘 나오지 않느냐고 하면 남편이 못 나가게 해서 또는 너무 분주해서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일에 할 수 없다고 낙심하는 자는 깨진 그릇이니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신자 중에는 쓰기 불편한 그릇이 많이 있습니다. 잘못을 충고하면 불순명하고 불만을 품고 불평을 일으키며 교회 일에 해독을 끼치며 방해하는 자가 많습니다. 

이런 자는 깨진 그릇과 같아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자기는 할 수 없다고 낙심하는 신자가 되지 말고 주께 순종하여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값있는 그릇이 됩시다.

아무리 쓰기에 편리하고 깨지지 않았다고 해서 바가지를 귀빈 상에 놓을 수 없습니다. 손님상에는 값진 그릇이라야 합니다. 그러면 값있는 그릇이 무엇입니까? 불로 단련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할 금보다 더 귀한 믿음입니다.



매주일 빠지지 않고 다닌다고 해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 없으며 헌금을 많이 한다고 기도를 잘 한다고 값진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헌금을 못할지라도 굳은 믿음만 있으면 값진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이요 쌀을 가득히 싸놓고도 쌀 걱정을 하며 열심한 것 같다가도 조그마한 손해라도 있을 것 같으면 신앙을 헌신짝 버리듯 하나 신앙이 있는 사람은 이런 것을 염려하지 않고 먼저 주님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믿음만 있으면 모든 어려운 문제는 다 해결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잠깐 자기는 어떤 그릇인지 생각해 보며 값진 그릇 안과 겉이 깨끗하고 쓰기 좋은 그릇이 되도록 합시다.











18.  연중 제23주일   마르코 7,31-37 (나) 열린 눈, 열린 귀, 열린 마음으로

                                                          방윤석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 주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곳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를 예수께 데려와서 그에게 안수해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따로 불러내어 손가락을 귀에 넣어 들을 수 있도록 뚫어주십니다. 이어서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에파타!」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귀머거리는 예수님께 달아 들었기 때문에 그의 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귀가 제대로 열리기 위해선, 예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귀가 열린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세속의 것은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어 합니다. 즉 듣지 않아도 될 것에는 귀가 지나치게 밝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말아야 하고 들어야 할 교리나 복음의 메시지에는 귀가 어둡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육신 사정에는 날래나 영신 사정에는 둔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교리서를 읽어도 무슨 소린지 잘 모릅니다. 그나마 예비자 교리교육 때 6개월 간 받은 것이 전부입니다. 그 당시에 배운 내용이란, 신앙상의 안내 말씀 정도에 불과한 것인데, 그나마도 영세한지 몇 년이 지나다 보니 다 잊어버렸습니다. 왜 우리가 교리책을 멀리하게 될까요? 다른 책과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책은 한 번 눈으로 보면 그만입니다만 교리서나 복음서는 읽은 다음 반드시 묵상(黙想)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묵상을 전혀 안하니 귀가 뚫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하죠. 묵상이 뒤따라야만 귀가 열린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둘째로, 소경처럼 간절히 청해야합니다. 고해성사 때 받은 보속이니까 마지못해 성경을 읽거나, 마음의 준비 없이 건성으로 읽는다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잠이 안 올 때 수면제 대용으로 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귀가 열려 있으면 외국말이라도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라도 감(感)을 잡을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항상 말씀하시기 전에「들을 귀 있는 자는 알아들으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처럼 들을 귀를 가지라고 세례예식 때에도 귀를 만지는「에파타」예식을 거행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입에 십자표도 그어줍니다.

  

셋째로, 귀를 열어야 들을 수 있으며 신앙은 들음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로마서 10,17에 「그러므로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뒷걸음질치는 사람」에 대한 말씀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0,38에 『나를 믿는 올바른 사람은 믿음으로 살리라. 만일 그가 뒤로 물러서면 내 마음이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으리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청하면서 귀기울여 들을 때 주님의 말씀이 내게 와 닿을 것입니다.



 요즘「열린 음악회」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돼서 그런지「열린」이란 이름을 붙인 각종 프로그램이 많아졌습니다. 학교 연구 수업도「열린 교실」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눈도 열린 눈, 귀도 열린 귀, 마음도 「열린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 좋은 독서의 계절에 우리는 교리서나 성경책을 열린 눈, 열린 귀, 열린 마음으로 읽어봅시다.



우리 국민들은 책을 잘 안 읽는다고 합니다. 기껏 읽어도 별것 아닌 주간 잡지류를 많이 읽는답니다. 학교 교육이 끝나면 책하고 굳바이입니다. 왜 그럴까요? 학교 교육이 평생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입시니 뭐니 너무 지겹도록 책과 씨름하게 만들어 왔기 때문에, 책이라면 이가 갈려서, 꼴도 보기 싫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교육제도에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아는 것이 힘」이라던데, 공부 안하는 국민으로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 실린 성서나 교회서적까지 멀리해서야 되겠습니까?

 

네째로, 사람들은 예수님께 안수해 주기를 청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손을 귀에 넣는 동작과 침(입안에서 나오는)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 (儀式)입니다. 의식을 무조건 형식주의라고 비판하며 안수만을 인정하는 프로테스탄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구절입니다. 성사를 형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판단해선 안되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어봅시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널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마태오 13.12이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려주시는 분들, 특히 주일학교 교사들, 전교에 힘쓰시는 모든 분들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마음 안에 와닿도록, 그래서 내 안에 자리잡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오늘 미사 중에 은혜를 간구합시다. 그리고 꾸준히 주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은혜를 청합시다.











19.       연중 제23주일   마르코 7,31-37 (나) 청빈에 대하여,

                                                             안경렬 신부



1. 서론



전통적으로 크리스천의 삶 가운데 풍요로움과 진보의 방향을 척도 해주는 것을 덕이라 하며 덕은 Virtus란 라틴어로서 “어른 됨”이란 뜻으로 성숙된 삶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에 기본적인 크리스천적 덕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신망애 삼덕과 삶의 완성에 요청되는 윤리 사추덕으로 이미 앞서 배웠고, 오늘 우리가 다루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완전하심같이 너희도 완전한 자 되어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충실히 따르려는 하는 이들이 추구하는 이른바 복음 삼덕으로 청빈, 정결, 순명 중의 청빈이며, 이 청빈은 특히 수도자들이 일생을 바쳐 추구하며 실천하겠다고 허원하는 목표들이다.



흔히 가난하게 산다고 해서 청빈의 덕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구약에서의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정신을 살펴보고 신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청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실천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다.



2. 구약에서의 가난한 이들



가나안 정착 이전의 부족사회며 반유목민적인 시절의 가난한 이들은 비참한 사람들로 일컬어졌던 과부와 고아와 이민 온 사람들(어떤 씨족 안에 몸 붙여 살고 있는 이방인)이었다.

구약의 관습과 법은 이들을 특별히 보살피도록 명하고 있다. 과부를 위한 수혼법, 고아의 입양관습, 이민자와 나그네를 위한 사막의 환대법에 의해 보호받았다.



특히 이 유목민 시절엔 강한 혈연의식과 연대의식 하의 일체감 속에 살았고 빈부격차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가나안 정착과 왕정이 시작되면서 도시화 현상이 일어나고 목축과 농업이 아닌 새로운 장인들이 많아지며 교환경제로, 세습적인 군주제가 생기며 특권층이 형성된다. 평화롭고 평등한 유목민적 사회, 이기적이며 잔인무도한 ‘도시사회’ 사이에 긴장이 싹튼다.



불의에 가득 찬 도시문화는 사막의 형제적인 사회를 죽여버렸고 하느님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했다. 예언자들은 불의한 왕과 판관과 제사장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고발하고 있다. 하느님을 부족과 민족의 참 임금으로 모시며,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요 백성이라 믿는 그들 형제들 안에 극심하게 대두되는 불평등과 부익부 빈익빈은 하느님의 뜻에 크게 어긋난다고 외친 것이다.



하느님만이 온 세상의 창조주요, 참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이스라엘이라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보호하고 사랑해야 했다. 예언자들의 경고대로 이스라엘은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 제국에, 기원 후 70년에 로마제국에 의해 국가 멸망의 참변을 겪는다.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정의를 외쳤던 아모스 예언자에게 한 국가의 흥망은 그 나라가 추구하는 정의구현과 정신문화의 높은 수준 그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울이는 배려와 사랑, 인간의 존엄성과 신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들과 성문서집들에서 나타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와 외침과 기쁨을 들어보자.



몇 가지 예 - 계약의 법전

- 돈을 꾸어 줌에 대한 구절 출애 22,24

- 겉옷 담보 출애 22,25-26

- 이민자 보호 출애 22,20

- 과부와 안식년 소출 출애 23,10-12

- 노예 해방 출애 21,2-4

- 신명기 법전의 빈자의 권리

- 3년마다 소출의 십일조



레위사람, 이민자, 고아, 과부 몫으로 신명 14,28-29 ; 26,12-15 이상과 같이 구약 안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관한 법 구절들을 들거니와 이스라엘의 역사는 법만 준수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법 정신을 어겨갔다. 이제 예언자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법을 어기며 소흘히 하는 사람들 특히 지도층을 비난하며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고 나서지만 극도의 이기주의에 물들어간다. 이에 예언자들은 정의의 미래가 반드시 오리라고 선포함으로써 실망한 이스라엘 민중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시편 72,11-14; 예레 23,5; 이사 61,1-3)



구약의 지혜문학에서 현자들은 가난을 어떻게 보는가.

어떤 이들은 가난의 원인을 게으름이나 무지에서 혹은 방탕한 생활에서 온다고 하며 죄악의 대가라고도 한다. 그러나 다른 많은 현자들은 부와 가난은 그 자체로 볼 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부와 가난은 인간의 윤리적 태도에 따라 가치 혹은 무가치로 탈바꿈한다고도 생각한다. (잠언 30,7-9; 집회 13,24; 잠언 28,6; 전도 4,13)

가난한 자의 기쁨의 원천은 주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확신 때문이다(집회 21,5; 시편 35,10; 시편 69,33-34).



구약 특히 시편에서 말하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경제적 약자들만이 아니라 고통 당하며 불행한 이들 소외된 이들도 포함되고 사회 어느 지도 계층에도 호소하지 못하고 야훼 하느님께(시편 10,17-18; 146,3-4; 89,15; 146,7-9; 70,6; 113,7-8; 5,12-18) 부르짖게 된다.



3. 신약에서의 가난



신약에 있어서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와 가르침은 풍부하다. 예수님 자신이 가난하게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시고 자라시고 공생활시초 사막에서의 유혹에서도, 굶주리면서도 돌을 빵으로 바꾸려 들지 않으셨고 부귀와 명예와 인기를 마다하셨다.

당신을 믿고 떠나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만이 아니라 그들의 육신의 아픔, 배고픔까지도 배려하셨지만 당신 자신을 위해 유보하시지 않고 자신까지도 완전히 희생하시고 소모하셨다. 가난한 이들 온갖 장애자들 고통에 짓눌린 자들로 둘러싸이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복되다 하시며 완덕에 나가려는 이에게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 그래야 하늘에 부를 쌓게 되리라”하신다.



4. 복음적 청빈과 수도생활



모든 수도자와 더욱 완전히 주의 길을 뒤따르려는 이들은 외적인 청빈에서 오는 제약과 불편과 부족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오히려 천상적인 기쁨과 소박과 겸손의 풍요로움을 간직하며 살려한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 사랑과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사랑에서만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오늘의 수도자들은 모름지기 이것에 대한 증거자들이며 특히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와 현대의 샤를르 후꼬, 데레사 수녀의 삶이 빛난다. 수도자가 추구하는 복음적 청빈과 사회적 가난은 외형적으로는 깊게 보이나 받아들이는 이의 지향과 자세에 따라 내적으로는 크게 달라진다. 복음적 청빈을 식별하는 기준을 열거해 본다.



복음적 청빈

청빈은 하나의 은총이다.

은총에 응답하여 스스로 선택한다.

그리스도의 비움을 자신도 살고 나누고자 한다.

청빈을 잘 이해할수록 이 신비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간다.

자기 희생과 이탈로써 청빈을 사는 사람은 성장한다.

희망에로 열리고 평화를 주위에 준다.



사회적 비참(가난)

가난은 한 현상이다.

때로는 마지못해서 겪는다.

좋은 지향이나 가치를 갖지 않는다.

가난이 없어지기 위해 투쟁한다.

가난에 의하여 인간은 인간이하의 차원에로 내려가고 야비해진다.

반항심을 품게된다.



수도자는 청빈의 삶을 통하여 자기를 비우는 대신 자기 안에 주님을 채우려는 노력의 삶이다. 사물에서의 이탈, 자유, 자기 희생적 삶 뒤에 따라오는 기쁨 이것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행복이요, 지상에서부터 은혜로 주시는 보상이다. 이같이 성서에 비쳐진 청빈,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은 안락하거나 안일함이 없이 목적을 지향해 나가는 과정이며 자유로운 해탈, 겸손, 봉사의 자세 거룩한 의탁의 생활임을 가르쳐 주고 특히 삶의 일치성을 강조한다.

하느님과 재물 두 가지를 함께 추구하지 않는 생활은 지상과 천상의 삶의 일치를 이루려는 노력이다.



5. 복음적 청빈과 우리의 신앙생활



인간에게 소유욕은 자연적이다. 사물의 획득, 소유, 소비의 과정에 정의 사랑이 깃들어야 한다. 마냥 그렇지만 못 한데에 갈등이 생긴다. 이 같은 올곧지 못한 상태는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 지속될 것이다. 인간이 모두 개조되지 않는 한 여기 수도자는 이 같은 이기적인 인간본성에 물들어 창조자인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그림자인 피조물에 집착할까봐 소유에 대한 애착을 끊으려 자기를 비우려 노력하며 절약하거나, 사용하거나, 사랑이란 목적아래 행동하려 한다. 청빈서원의 목표는 하느님과 이웃을 보다 완전히 사랑하기 위하여 물질적 애착에서 자유로워지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복음삼덕은 향주삼덕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듯이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창조자요, 구세주요, 아버지임을 믿음에서만 이 같은 서원이 가능하며 먼 훗날 아니 지금부터라도 청빈과 나눔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나와 우리 안에 넘치리라는 소망으로 살려는 것이다. 음식과 정의와 사랑에 대한 갈구는 결국 하느님 자신에 대한 갈구인 것이다. 이제 우리가 비록 삶에 여유가 있거나 가난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 청빈의 덕에 나아갈 수 있는가 청빈의 덕을 다만 맹세한 수도자만이 지킬 것인가.



이 대답은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지지 못했던 동양의 현자 공자의 가르침에서 배울 것이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자이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좋지, 하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 할 줄 알고 부자이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지”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야훼 하느님은 아버지를 믿는다면, 예수를 스승이라 따른다면, 어찌 청빈의 정신을 마다할 수 있는가. 청빈의 삶으로 나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것이다.











20.     연중 제23주일   마르코 7,31-37 (나) 모든 일을 좋게 하시는 분

교구 주보



1. 복음이야기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낫게 하시는 전형적인 치유이적사화입니다. 예수께서 어느날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를 데려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하고 간청합니다. 예수께서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군중 가운데로 따로 데리고 나오시어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었다가 침을 뱉어 그의 혀를 만지신 후 하늘을 우러러보고 “에파타”(열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굳은 혀도 풀려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셨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널리 알리면서 “그분이 모든 일을 좋게 하셨구나. 저 귀머거리들은 듣게 하시고 저 벙어리들은 말을 하게 하셨구나”하고 말했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은 전형적인 치유이적사화로서 상황 묘사(31-32절), 기적적 치유(33-34절), 치유 실증(35절), 목격자들의 반응(37절) 순으로 짜여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 치유이적사화의 양식과 닮았다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은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요,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을 알리시는 계시자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치유이적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위력, 곧 하느님의 구원능력을 드러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목격자들의 반응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분이 모든 일을 좋게 하셨구나. 저 귀머거리들은 듣게 하시고 저 벙어리들은 말을 하게 하셨구나”(37절).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선하신 일을 드러내시는 분이시고, 구원을 이룩하는 메시아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치유은사를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더러는 치유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곤 합니다. 치유은사를 받은 이들은 예수님의 처신을 본받아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능력을 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치유를 비롯한 육신적인 치유를 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눈을 뜨고 바로 깨달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양들이 자기 목자를 알아보고 따라 가듯 우리도 하느님을 알아보아야 하며, 오로지 하느님께만 모든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21.          연중 제23주일   마르코 7,31-37 (나) 국화전

이규희 지따 / 작가



편안한 마음으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아늑한 일방통행 골목을 순조롭게 차를 몰고 나가다 별안간 전방에 역으로 과속질주 해 오는 다른 차를 발견했을 때, 그 순간의 경악감. 그러나 경악감을 느낄 새도 없습니다. 곧 차는 번개처럼 부딪힐 것이고, 속력만큼이나 차체는 무섭게 산산조각이 나겠지요. 그 안에 탄 사람은 어찌 될까요. 저의 신혼기는 그런 정황의 연속이었습니다. 교통법규 위반은 어느 쪽이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제 생각으로 피해자는 언제나 저였습니다. 상대방도 같은 생각이었겠지요. 전혀 미리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어서 신혼의 단꿈은커녕 저는 언제나 아슬아슬한 위기일발의 순간을 맞아야 했습니다.

  

저는 가사노동에 원체 맹문이었습니다. 공부한답시고 객지로만 돌다보니 제대로 배울 수도 없었지만 어쩌다 부엌에 들어가려 하면 걸리적거린다고 못 들어오게 해 마실 물조차 떠다 바쳐 준 상팔자였던 것이 큰 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탈은 꾸지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여태까지의 삶이었습니다. 시집오기 전까지 부모님은 저라면 무조건 신임했고 긍정적인 격려의 박수만을 보내주신 편입니다. 학교생활에서도 이렇다 할 벌칙을 받은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고 칭찬만을 들으며 성장한 셈입니다. 노력하면 마음먹은 대로 풀리어나가는 생활이었습니다. 세상살이는 다 그런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집살이에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꾸지람거리만 만들어냈습니다. 꾸지람에 대한 면역성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저의 약점이었습니다.

  

친정과 시댁의 생활 문화가 많이 다른 점이 저를 애먹였습니다. 가장 직접적으로 자주 충돌이 심했던 건 음식입니다. 선호하는 음식의 종류도 다르지만 그걸 만드는 자료, 순서, 가열요령, 맛 등이 판이한 것입니다. 추석전후 무렵이면 친정어머니는 노랗게 피어난 식용 국화로 화전을 부쳤습니다. 국화꽃의 향기와 달큰함이 햇 찹쌀과 어우러져 사르르 녹는 감미로움에다 파실파실 거피낸 팥고물 속까지 넣으니 모양도 눈부셨지만 맛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막힌 일미의 국화전이 시댁에서는 시들한 반응이었지요. 가정과 가정, 개인과 개인간의 차이가 이처럼 크다는 걸 저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존 그레이라는 인간관계 전문가는 “상대가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처럼 당신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될 때 상대를 변화시키려 애쓰는 대신 그 차이를 받아들이면 더불어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차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서로가 다른 점을 존중해 주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면 나와 다른 그 행성을 이해하는 것이 될 테고, 이해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세계가 그 만큼 더 열려졌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자신의 잣대만 고집하는 사람은 캄캄한 감옥에 갇힌 거나 다름없습니다. 마음의 문을 연 만큼 세상의 아름다움은 다가올 것입니다. 주님, 제 어둠이 두텁나이다, 밝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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