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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혼인, 결혼, 주례
작성일 2008년 8월 13일 (수) 19:11
분 류 혼배
ㆍ추천: 0  ㆍ조회: 10221      
IP: 211.xxx.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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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배미사 강론 모음 ”
 

혼배미사강론<Ⅰ>



                            



                                   독서 : 1고린 13,1~8

                                   복음 : 요한 15,9~12







 오늘 우리는 한 쌍의 부부가 탄생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 여기에 모였습니다. 또한 신랑 신부 두 분은 하느님 앞에서 이제부터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길을 시작하기 위하여 여기 오셨습니다. 우리를 이 곳으로 모이게 하고 또한 두 분이 자신들의 공동의 길을 시작하게 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단어 만큼 흔하게 사용되거나 또한 남용되는 단어도 없기 때문입니다.‘사랑’이란 말은 정말 빈 말껍질이 되거나 포장된 상품일 뿐일까요? 오늘날 우리 시대에서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합니까? 도대체 사랑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기쁜 날의 주인공인 신부(   )양이 전해준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그 바른 뜻을 밝혀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 공동체 사람들에게 사랑에 대해 전해줍니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더라도, 산을 옮길 수 있는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해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나는 놀라운 일과 희생을 이겨 낼 수 있고 삶을 가치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우리의 노력과 능력으로써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안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으로 그것들을 실현시키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랑만이 우리의 행위를 뜻깊게 만들어 줍니다. 이 같은 사랑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 열쇠가 됩니다.

 사랑은 자신의 것을 찾지 않습니다. 사랑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이 내게 주어질 것인지를 묻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바라봅니다. 내가 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한 나는 혼자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눈을 돌리면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다른 사람을 발견하고 그에게 열려진 존재가 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 나는 나의 가면을 벗을 수 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줄 수 있으며, 상대로부터 실제 모습의 나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나는 연극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상대가 나를 이용하지 않고 나를 받아들이며 나를 도울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신랑 (   ), 신부 (    )

사랑은 또한 삶을 생기있게 합니다.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자기 생명을 바치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성서의 말씀은 바로 사랑의 신비를 표현해 줍니다. 항상 자기 자신 주위로만 맴돌고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끌어들이려 하는 사람은 성숙하지 못하고 외로워지며 그리고 언제나 내적인 고독과 어둠에 홀로 서 있게 됩니다. 이에 반해 상대를 신뢰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면 그의 삶은 보다 풍성하고 따스하며 밝아집니다. 우리 모두는 바오로 사도께서 하신 말씀의 깊은 진리를 잘 알고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서 크던 작던 이 진리를 경험하곤 합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다시금 자기 위주의 삶으로 되돌아가곤 합니다. 이 같은 실망은 우리 자신의 사기를 꺾어 버리고 좌절에 빠지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실하게 살아갑니다.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심리학적, 인간학적으로 보아서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부모님, 형제자매, 친척, 친지들의 보살핌과 사랑이 내 주위에 있었기에 우리는 태어나고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은 그들 모두에게 빚지고 있느니 나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그들 삶의 전달자가 됩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우화가 있습니다. 지옥의 광경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풍성히 차려진 식탁 주위에 앉아 있습니다. 앉아있는 그 많은 사람들 손에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긴 젓가락이 주어졌습니다. 아무도 이 젓가락으로는 한 점의 음식도 자기 입으로 가져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서로가 먼저 음식을 집어먹으려고 수라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자 그 많은 음식은 모두 쏟아졌고 어느 누구도 그 맛있는 음식을 한 입도 맛보지 못한 채 야위어만 갔습니다. 우화는 계속해서 천국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똑같은 상에 앉은 수많은 사람들은 같은 긴 젓가락으로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의 음식을 한사람도 예외없이 배불리 먹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사람들은 자기 입으로 음식을 가져가지 않고 맞은 편에 앉아있는 다른 사람을 먹여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서 우리는 천국을 실현시킬 수도, 지옥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물론 우화에서 애기하는 음식이나 물건이 아니라 바로 다른 사람, 내가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신뢰하고 희망을 둘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 자신은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도 또 어디에서 살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선사해 주어야 합니다. 그 첫째 장소가 바로 부부입니다. 오늘 여기서 두 분은 서로에게 “나는 당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드리고자 합니다. 당신에게나 자신을 선물로 드리고자 합니다”하고 약속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으실런지도 모릅니다.“이야기 된 것들은 아주 아름답게 들린다. 그러나 현실은 꿈같은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하고 말입니다. 좋은 때도 잠시 뿐이지 시간이 지나면 싸우게 되고 뜻이 다르고 마음이 맞지 않아 갈등을 겪게 되며 사랑하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것보다는 어쩔 수 없이 또는 자식 때문에 산다고들 합니다. 그러니 사랑은 단지 환상의 말뿐이지 않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사랑으로 완전하게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는 사랑을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셨습니다. 죄인들과 병자들, 외롭게 사는 사람들, 소외받은 사람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사셨습니다. 그러한 삶, 위하는 삶은 결코 고통을, 십자가를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길은 곧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고독과 좌절과 체념, 의심의 밤들을 거쳐서만이 밝은 햇살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이제 두 분이 시작하는, 함께 하는 길에 언제나 함께 기쁨을 느끼고 또한 삶에서 오는 온갖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 이겨내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하느님께서 두 분의 마음과 가정에 함께 하시면 서로의 사랑과 서로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신뢰와 서로를 위하는 희망은 깊어질 것입니다. 주님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새 삶을 가꾸십시오.





 끝으로 두 분에게 개인적으로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두 분은 여러분 바로 뒤에 계시는 부모님에게 감사드리고 효도하십시오. 부모님 마음을 지금 여러분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언젠가 여러분의 자녀가 지금 이 순간과 같이 여러분의 자리에 있고 여러분 자신이 지금 부모님의 자리에 앉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혼배미사강론<Ⅱ>



                         

                                          독서: 룻 1,16~19

                                              복음 : 루가 24,13~35







 사람들은 결혼식 때 가끔은 신랑 신부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소리를 내게 하는 신랑 신부의 사랑의 소리 일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사랑의 이 박동 소리를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특별하게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는 그런 순간입니다.





신랑(   ) 신부(   ), 오늘 저는 기꺼이 독서와 복음의 말씀에서 두 분을 이 자리에 인도한 두 분의 사랑을 비추어 보고자 합니다. 신부(   )가 봉독한 독서에서 한 부인이 놀라운 말을 합니다.

 “당신이 가는 곳으로 나도 가겠으며, 당신이 머무는 곳에 나 역시 머무렵니다. 당신의 민족은 나의 민족이요, 나의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입니다.” 이방인 모압 여자인 룻은 이 말을 자기 시어머니인 이스라엘 여자 나오미에게 합니다. 두 여자 모두 자기 남편을 잃어 버렸습니다. 룻은 자기 시어머니 곁에 머물렀고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나중에 다윗왕의 조상 부인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려졌습니다. 룻의 신의는 우리 인간과 함께 한 하느님의 구원역사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 성서 말씀의 구체적인 배경을 바로 오늘 여러분의 결혼에 직접적으로는 결부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의의 가치에 관한 룻의 이 말은 어제나 입에 올려집니다. 결혼식에서야말로 바로 이 말이 특별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최고의 경우입니다. 두 분은 이제 곧 서로에게 성실과 신의에 관한 약속을 하게 됩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일생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우리는 이 표지를 필요로 합니다. 또한 부부가 되는 여러분이 서로에게 신의를 지키고자 하는 그 원의를 필요로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의 관계가 좋은 한도 내에서 는 우리는 서로 충실하다고 말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소로의 관계가 좋아지기 위해서는 신의가 필요하지 않습니까?”하고 되묻고자 합니다. 사랑이 지켜진다면 신의는 언제나 함께 합니다. 반려자 사이에서 그 모든 것이 잘되어 가는 한 사랑은 상대적으로 쉬워집니다. 그러나 사랑이 힘들고 짐이 되면 그 사랑은 신의와 성실로써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면 한 반려자가 다른 편을 신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이에 오늘 성서의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어머님이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하는 말씀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혼자이고자 하지 않고 함께 하고자 하는 희망이 두 사람 사이에 살아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서로에 대한 신의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함께 있고자 하는 이 희망이 정당하다는 것을 우리는 복음성서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에서 루가 복음사가는 하느님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생의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신랑 신부 두 분은 이 성서의 이야기를 결혼생활에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혼인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걸어가시는 하나의 길이 될 것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 함께 하는 길 위에서 서로에게 따스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웃음이 있고 밝은 나날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또한 험난하고 힘든 돌 길도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먼지와 더위가 여러분을 짜증나게 만듭니다. 피곤해지면 여러분은 휴식처를 찾을 것입니다. 함께 걸어가는 공동의 인생길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때도 있지만 여러분 중의 한 사람이 더 이상 계속 걸어갈 수 없는 때도 올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결혼의 길일 수 있습니다.

 인생은 내가 계획하고 꿈꾸어 왔던 것처럼 항상 편안한 길 만을 걸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의 길은 어떻든 그리스도교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십자가의 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에 놀라지 마십시오. 위의 이야기는 함께 하는 길을 보다 밝게, 희망차게 그리고 삶을 열려지게 만듭니다. 또한 용기와 신뢰를 만들어 줍니다. 왜냐하면 혼인의 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길 안에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분과 함께 길을 가십니다. 우리가 혼배성사라고 말할 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혼생활의 길을 함께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이같 은 신앙 안에서 두 분은 마치 엠마오 제자들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부활이 밝게 비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길 안에서 부활의 길, 생명의 길을 희망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이 항상 여러분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여기 있는 우리 모두의 바램이자 축하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표지로써 곧 두 분은 혼인 초에 불을 붙일 것입니다. 이 촛불이 여러분의 부부생활을 밝히고, 공동생활을 주님께 인도하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분께 부탁 한가지 드리고자 합니다.

 “부모님께 효도하십시오.”



혼배미사강론<Ⅲ>





복음 : 마르 4,35~41





 사랑하는 (   ), (    )! 부모님 그리고 친척, 친구, 하객 여러분, 아마도 여러분들은 오늘 복음에 대해서 의아스럽게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결혼식인데도 한 마디 ‘사랑’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고 또 혼인데 대한 표현이 전혀 없는 성서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오늘 이 혼인식에 이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선택했습니다. 제가 결혼생활을 풍랑이 이는 예측 못 할 생활로 여겼기 때문도 아니고 앞으로의 생활이 그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오늘 성서의 이야기가 제게는 두 분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아름답고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길을 가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잊어버리거나, 주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말씀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분은 주무십니다. 주님께서 주무신다는 이 사실은, 우리는 그분을 모시고 있지만 우리가 사는 데 있어서 그분은 마치 기억을 더듬게 해 주는 낡은 사진 한 장과 같습니다. 사랑의 모습을 찍는 사진이라도 짧은 시간 안에서는 사진만 보면 즉시 그때의 느낌과 감정을 새롭게 기억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사진 빛이 바래지듯이 기억도, 감정도, 느낌도 죽어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쁘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즉 생존경쟁에 던져져 있기에 마음의 여유도 쉽게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위기가 닥쳐옵니다. 목에까지 물이 차는 위험이 나에게 다가옵니다.

 하느님은 주무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는 온갖 어려움과 고통, 생의 좌절감 앞에서 무력해져 어쩔 줄 몰라서 멍하게 있는 우리 앞에서 하느님은 주무십니다. 많은 경우에 아니 거의 대부분의 우리는 어느 곳에도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하느님을 푹신한 베개 위에 묻어 버립니다.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외적인 불행 앞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분께 소리칩니다. 그것도 원망의 소리로,

 여기서 그분은 우리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제서야 우리 눈을 그분에게로 돌립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이야말로 인간을 도우실 수 있는 큰 힘을,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며 우리를 잊어버리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항상 계셨던 그리고 계신 분이심을 깨닫고 놀라와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처럼“도대체 이 분이 누구신가?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하다니”하고 놀라며 새로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두 분 (    ), (    )!

 두 분은 서로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두 분은 오늘의 서약으로 맺을 사랑의 공동체을 처음에 서로 알게 되었던 때처럼 서로 받아들입니까? 아래의 격언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누구로 하여금 나를 만들어 보려고 결코 시도하지 말라.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하느님께서는 너는 너 하나로서 충분하시다.”



여러분은 첫 번 사랑을 느꼈던 날, 그 날의 마음의 사진의 사진을 갖고 계십니까? 어려움과 풍랑이 일어날 때도 빛 바랜 종이 한 장에 불과한 사진이 아니라 아름답고 살아 있는 모습의 사진을 계속 나누려고 하십니까?

 저는 청합니다. 항상 서로 서로 자신을 살펴보기를, 내 감정과 기분,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실망하기 보다는 서로에게 처음 가졌던 사랑의 사진을 계속 살아 있게 만들기를 청하고자 합니다.

















































혼배미사강론<Ⅳ>







 다 가올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설계하는 것이 오늘날 보편화 되었습니다. 심지어 미래학이라는 학문의 분야도 생겨났습니다. 과학자, 기술자, 정치가들은 인간의 미래가 어떠할 것인가 하는 표본이나 구상을 계발해 냅니다. 각 나라의 민족들이나 국가들, 연구기관들은 미래를 제시하는데 열정적으로 달라붙습니다. 인간은 미래를 추구하거나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미래나 앞날은 과학자들의 실험실 안에서, 기술자들의 계획실 안에서, 정치인들의 회합실 안에서 시작될 뿐만 아니라 미래는 인간 각자의 구체적인 생활 안에서도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서로에게 “예”라고 약속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어떤 새로움이 여러분에게 시작됩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이제 새로운 미래의 시작 앞에 서 있게 됩니다. 이제까지 떨어져서, 혼자서 걸어왔던 길을 여러분들은 오늘부터 함께 걸어가고자 합니다.





 모든 새로운 시작, 앞날을 향해 내딛는 모든 발걸음은 동시에 이제까지 친했던 사람들로부터 작별을 고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해야만 어떤 독자적이고 고유한 그 무엇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계획하고, 원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생겨납니다. 여러분들은 부모님 집과도 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부모나 형제자매들이 더 이상 여러분 삶에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는 두 사람 함께 하는 삶이 그보다 더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두 분이 이제까지 부모님 집에서 겪어왔고 배웠던 안락함과 인간애, 형제애, 서로간에 키워왔던 신뢰를 이제 여러분은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스스로의 집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여기에는 이제까지 직접 보아왔고 경험했던 바에서 여러분 고유의 집이, 형태가 새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새로운 삶의 길, 그 시작에 결코 혼자 서 있지 않습니다. 미래에로 내딛는 그 걸음을 혼자 시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길을 동행하셨던 분께서 두 사람을 위해서 이제 시작하려는 첫 걸음의 길에 계속 함께 하실 것 입니다.



 두 분의 부모님, 형제 자매들, 친구 그리고 친지들이 계속해서 여러분과 함께 걸어 가십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계획하고, 하려고 하는 바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실 것입니다. 글들은 또한 계속해서 두 사람의 성공이나 실패에, 기쁨이나 고통에도 그 한 몫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분들의 이해와 충고와 좋은 조언들, 필요하다면 그분들의 도우심이 계속해서 두 사람과 더불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분의 삶은 결코 혼자가 아니며 함께 지켜봐주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축복된 출발인 것입니다. 누구나 출발을 잘못하기를 바라지 않고 결과가 어설프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10~20년 뒤의 모습이 신혼에 설계한 계획대로 즐거운 웃음을 지을 수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하얀 백지장에 첫 잉크를 새기듯 조심스레 신중히 설계하고 새 삶을 출발해야 합니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그런 출발을 바라고 그 삶이 영원히 지속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의 기대  보다도 하느님의 기대는 더 크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기대만 하시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해 결혼생활을 가장 잘 해나갈 수 있는 지혜의 말씀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그 보다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두 분은 오늘, 이 결혼식을 항상 기억하시고, 늘 서로의 마음을 알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어렵고 힘들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억하시고 그분에게서 위로와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새 출발부터 이런 삶을 차곡차곡 쌓아갈 때 하얀 백지 위에 시작한 결혼의 설계는 빛을 내고 향기를 풍기게 될 것이며, 그 때 하느님은 늘 행복한 삶을 선사하실 것입니다.

 이제 두 분은 “나는 당신을 원합니다. 나를 받아주십시오”라고 서로를 내어놓게 됩니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실망과 눈물, 걱정과 슬픔을 생각하고 그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지혤 살아가리란 각오를 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마주 잡은 두 손을 영대로 감쌀 때, 두 분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함없이 이 각오를 저버리지 않고 서로 함께 살아가겠다고 하느님께 서약하는 것임을 가슴에 깊이 새기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조언과 함께 하느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며 두 분의 결혼생활에 빛과 향기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늘 복된 결혼생활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당부 한 가지를 드리고 싶습니다.

 “두 분은 오늘이 있기까지 보살펴 주시고 또 앞으로도 늘 함께 해 주실 부모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부모님께 효도하십시오.”





















혼배미사강론<Ⅴ>



                           



                                           독서 : 시편 139,1~18. 23~24

                                    복음 : 마태 14,22~33







 어느 고고학자가 로마 시대의 유적지에서 작은 장신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열쇠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열쇠에는 한 젊은 로마인의 자기의 사랑하는 부인을 위한 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길을 가고자 하는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사랑이 우리를 지탱시켜 줄 것입니다.” 우리는 열쇠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 열쇠가 없으면 우리는 잠겨진 문 앞에 그냥 서 있을 뿐입니다.





 두 분은 이 혼인날에 앞으로의 삶의 열쇠가 되는 말씀을 마태복음, 그중에서도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수 위를 걸어가시는 이야기에서 찾아냈습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게네사렛 호수 위에 떠 있는 배 안에서, 주님의 제자들은 풍랑에 이리저리 나둥그러집니다. 오늘 두 분은 배에 올라 타셨고 이제 항해를 시작합니다. 이 신뢰가 두 분으로 하여금 오늘 서로에게 간략하면서도 의미 깊은 “예”라는 동의의 말을 하게 했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예”, 선함과 악함, 강함과 약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예”라고 하는 동의를 했습니다. 아울러 서로에게 배울 수 있고, 서로를 성숙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예”하고 동의했으며, 다른 사람과 함께 같이 늙어가고 싶은 원의도 알렸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겪게 될 수많은 실망에도 불구하고 신뢰하겠다는 데 동의 했습니다. 두 분의 길이 이제부터는 각자의 다른 길이 아니라 하나의 같은 길이라는 뜻으로 “예”하고 동의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약속했던 “예”라는 이 동의가 두 분의 인내심과 서로 함께하는 두 분의 대화를 통해서, 서로 존경하고, 함께하는 공동의 책임과 서로 잘못을 용서해 줌으로써,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짧고, 의미 깊은 “예”라는 동의가 오늘 이 혼인날 작은 소리로 말해졌을 것입니다. 앞으로 많은 나날들에, 수많은 시간을 통해서 이 동의가 지켜 나가기가 어렵고 힘들게 여겨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럴 때는 “예”라고 한 자기 동의를 후회하거나 “예” 대신 “아니오” 라고 말할 껄 하는 유혹도 받을 것입니다. 풍랑과 고통 안에서 보존되 사랑은 더욱 강해지고 풍성해질 것입니다.

 알렉산더 솔제니친의 유명한 소설 ‘암병동’에서 젊은 청년 제프렘은 그가 만난 사람에게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가는가?”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 대답은 여러 가지 다르게 나옵니다. “공기로 살아간다, 가진 재능으로 혹은 이념으로 혹은 돈으로 살아간다.” 제프렘은 이 대답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톨스토이로 하여금 말하게 합니다. “인간은 사랑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솔제니친은 이 톨스토이의 대답에 더 보탭니다. “사랑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 이 사랑에 다른 그 무엇이 들어와야 한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이제 이 생각에서 게네사렛 호수의 이야기로 되돌아 갑시다. 높은 파도에 이리저리 나뒹굴어지는 죽음의 위험 가운데 있는 작은 배 안에서 겁에 질려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서 오십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유령을 보는 것으로 여겨서 겁에 질려 소리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나다” 하시며 그들을 진정시키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용기를  얻어서 배 가장자리 위로 발을 올리며 주님의 눈을 바라보면서 물 위에 계신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한 순간, 주님을 바라보는 눈길을 잃고 넘실거리는 높은 파도를 쳐다보았을 때 그는 물 속으로 빠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손을 잡아 주시며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을 하느냐!”하고 책망하시면서 배에 오르시고 바람을 잠잠하게 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여기에 서있는 두 분을 위한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분이 간직하고 있는 서로에 대한 사랑은 보다 깊은 뿌리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랑이 간직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입니다. 그 희망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항상 두 분을 찾으시고, 항상 두 분에게 오십니다. 그분은 어떠한 어려움이나 모험에서도 두 분에게 성실히 머물고자 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오늘 시편 139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길을 신뢰하시고, 두 분을 이 신뢰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배에 오르시고, 모든 날에 바로 두 분 곁에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 당시 가졌던 바와 같은 이 희망을 이제 여러분이 가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눈길, 그분의 말씀에 던지는 여러분의 눈빛은 물 위를 걸어가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이 그리스도에게서 눈길을 돌리실 때는 폭풍이, 풍랑이 들이닥칠 것이고 물 속에 가라앉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길에서 두 분은, 그리스도께서 두 분의 배에 오르시고 항해를 함께 하시며 바람을 잠재우신다는 확신을 얻게되며, 주님은 여러분의 동반자가 되십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의 사랑을 간직하게 하고 그 사랑을 지탱시켜 주실 것입니다.

 한 젊은 로마인의 열쇠에 새겨진 말 “나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길을 가고자 하는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이 열쇠를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두 분에게 선사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분은 부모님께 감사드리십시오.













































































혼배미사강론<Ⅵ>







 복음 : 마태 7,24~27







 오늘 복음은 집짓는 일에 대해서, 더 정확히는 집을 짓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을 수도 있지만 만일 위험이 닥쳐오면 그 집은 부서져 버리고 맙니다. 기초가 단단하면 그 집은 위험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주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세운 집은 마치 반석 위에 지은 것과 같이 튼튼하다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집을 짓는다는 복음 말씀이 오늘 교회의 혼인식에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집이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단순히 4개의 벽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집은 내가 나 자신을 만들 수 있는 삶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이 삶의 공간 안에서 각자는 자신의 고유한 성격이자 꼴 그리고 맛을 새기게 됩니다. 지금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이 삶의 공간 안에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식사하고 잠을 자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내 자신이 될 수 있는 가장 뚜렷한 장소이자 공간이 바로 집입니다. 그러나 이 공간은 어느 특정한 장소에 굳이 관련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평수, 즉 크기에 관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공간은 사람에게 관계합니다. 우리가 보통 집이라고 말할 때는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 또는 자기 가족,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 함께 사는 공간을 생각합니다.

 4개의 벽이 있는 거주하는 숙소는 사실 삶의 공간인 집의 외면적인 장소입니다. 4면의 벽이 생활공간을 만드는 집의 고유한 특성은 그 안에 속해있는 사람으로, 서로 말을 나누는, 함께 사는 사람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빈집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누구든 이 점을 조금이라도 깊이 생각한다면 생활의 공간인 집은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토대로 하고 있으며 이 공동체는 “우리는 서로 함께 살고자 합니다”라는 말씀에 그 근간을 두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같이 쉽게 사라지고 빨리 잊어버립니다. 또한 말은 자칫 바람에 날려가면서 소리만 내는 나뭇잎 같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감정이나 내 마음 깊은 신념이나 결심을 표현하는 말이 되면 그것은 대단한 깊이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혼인하는 사람들이 “나는 당신을 원합니다. 나를 받아 주십시오.”하는 이 말은 곧 “나는 당신에게 당신 자신이 될 수 있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당신에게 만들어 드리고 싶습니다”하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삶이 가능해지는 집, 가정의 기초가 됩니다. 이 기초가 모래입니까? 아니면 단단한 돌입니까? 이 기초는 위기나 위험에서 견뎌낼 수 있는가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확실한 보증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말씀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이 종교적인 축제라는 장소에서 주어진다는데 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보살핌 아래에서 이 말이 서로에게 건네지는 것입니다. 혼인성사는 바로 두 분의 공동체를 확증해 줍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다른 성사와는 달리 혼인성사는 신랑, 신부 두 분이 바로 주례자이기 때문입니다. 두 분을 제외한 우리들 모두는 바로 두 분 곁에 서 있습니다.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두 분의 서로에 대한 약속의 말씀에 대한 증인으로서 함께 여기 있습니다. 우리들은 두 분이 단단한 기초 위에 집을 짓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들은 두 분 말씀 안에서 성실과 신뢰를 쌓아가기를 두 분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해지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곧 단단한 바위이십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두 분이 하느님과 공동체 앞에서 이제 서로 약속하는 말씀에 기초해서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당부하고자 합니다.

 “부모님께 효도하십시오.”











































“밀씨가 죽어야 한다”<Ⅶ>







복음 : 요한 12,23~26





 한 알의 밀씨의 기적이 우리 눈 앞에서 항상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한 알의 밀씨가 땅에 뿌려집니다. 그러면 곧이어 싹이 트고, 따스한 태양 볕 아래에서 그리고 생명을 공급하는 비를 맞으면서 어느 듯 푸른 잎을 내면서 자라납니다. 성장하고 꽃을 피우고 때가 차면 익어가고 결실을 맺습니다.

 하나의 작은 밀알에서 또 다시 수많은 밀알이 만들어집니다. 지극히 작은 하나의 밀알에서 엄청나게 큰 것이 생겨납니다. 어떤 놀랍고 큰 결과인 밀과 빵을,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음식을 가져다 줍니다. 다른 것들 또한 바로 이 밀알의 기적에 속합니다. 즉 큰 것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밀씨가 던져져야, 밀씨가 선물로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는 곳에서만 생명의 기적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숨은 모습에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에서 놀라운 결과를,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은 자연의 법칙이자 생명의 원리입니다. 오늘날처럼 드러내길 좋아하는 세상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또한 이 밀알의 법칙, 자연의 법칙을 잊고 있습니다.





 방금 우리가 들은 한 알의 밀알에 관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진리를 올바르게 파악하십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 내용을 말씀하시며 바로 앞 절의 말씀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습니다”를 통하여 이 진리의 실현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추수와 결실의 때가 도래했던 것입니다. 그 시간은 부활과 승천, 삶의 완성 안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 모든 창조물을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우연히 생명의 빵으로 지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성찬의 빵의 표시로 우리에게 우연히 선물하시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밀알이 먼저 땅에 떨어져 죽기 때문에 가능해 집니다. 예수께서 먼저 자신을 천주의 모친이신 마리아의 품에 선물하시게 했기 때문에, 또한 아버지이신 성부께 온전히 바치는 희생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시는 끝없는 사랑 안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근본 원칙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항상 소망하는 행복과 생명의 길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이제 함께 삶을 살아가고 함께 행복해지려는 부부의 길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한 알 그대로 있는 것, 혼자 있는 것, 외로움, 오늘날 사람들은 이 외로움을 겁내고 도망가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외로움에서 도피할 수가 없습니다. 두 번, 세 번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혼자이지 않습니까? 많은 부부들이 내적인 외로움으로 인해 부부생활이 파괴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밀알의 법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하고, 즐기고 누리길 원합니다. 그들은 함께가 아니라 자신만을 스스로 실현시키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밀알의 법칙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은 항상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사랑과 희생, 자신을 내어주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바치고, 희생하는 사랑의 부산물이자 선물이라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찾아주려는 사랑의 결실이 행복이라고 알려줍니다.

(예.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이러한 자기 희생이 쉽다고 아무도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교회의 모든 성자들은 구세주의 열려진 마음, 자기를 바치는 희생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성사들은 우리를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신비 안으로 인도합니다. 혼인 성사에서도 그리스도는 두 분의 인간적인 사랑을 맏아들이셔서 그 사랑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자신의 죽음으로 이끄십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잊어버리는 희생 안에서만 이기적인 자신이 죽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또한 두 분을 당신의 부활로 이끄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여러분의 사랑을 맑고 순수하게 하며 밝게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여러분을 인간적인 완성으로 인도하시고 전상 혼인잔치 때 두 분을 완전하게 해주십니다. 만일 부부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삶의 끈을 쥐시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들을 주님 사랑의 증거자로 만드십니다.





 동화 이야기 하나 할까요. 옛날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던 착한 마음을 가졌던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 그 나라에 대단한 흉년과 기근이 덮쳤습니다. 굶주림으로 인한 고통이 온 나라를 덮었는데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사람들이 이제 서로를 불신하고 원수가 되버린 것입니다. 흉년이 덮치기 훨씬 이전에 이 부인은 반지 하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반지를 받을 때 다음의 말을 들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큰 어려움에 처해졌을 때 이 반지를 끼면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부인은 이 말을 기억하고는 그 반지를 끼고 자신을 엄청나게 큰 빵으로 바뀌게 했습니다. 이 부인의 아들들이 밖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보니 빵이 집안에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빵이 바로 어머니인 줄은 전혀 몰랐죠. 아들들은 그 빵을 쥐려고 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배가 고파서 빵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빵을 한 조각 잘랐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이웃 사람들이 몰려와서 빵 한 조각 만이라도 주기를 청했습니다. 나중에는 마을 사람 전부가 다 와서 빵을 얻어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온 마을을 이 빵으로 다시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 빵은 마을 전체를 변화시켰습니다. 싸움과 질투가 끝이 나고 기근도 마침내 끝났습니다. 곡식들은 다시 자라고 밀도 익었습니다. 마지막 빵이 잘려졌을 때 그 부인은 다시 살아났으며 그 어떤 때보다도 더 행복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두 분 (    ), (    )

 서로 반지를 끼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빵, 배고픔을 잠재울 수 있는, 소망을 채우고, 걱정과 불안을 덜게하는 빵으로 여러분을 변하게 하십시오. 서로를 위한 빵, 다른 사람을 위한 빵이 되십시오. 만일 우리가 살기 위해서, 생명의 빵으로서 항상 새롭게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바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점점 크게 자라나면 우리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하십시오. 어머니 혼자 힘으로 두 분을 지금 이 자리에 서게 하셨습니다.  
























혼배미사강론<Ⅷ>





독서: 1베드 1,18~25







 15여년 가까이 두 분은 함께 공동생활을 하셨고 벌써 오랜기간 동안 서로를 알고 지냈습니다. 이 긴 기간 동안에 두 분은 벌써 많은 것, 아름답고 기쁜 일을, 힘든 일, 성공과 아울러 실망도 체험하고 경험하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두 분은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의 강한 점이 무엇이고 약한 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두 분이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면 여러분의 서로에게 향한 사랑이 확실히 바뀌어졌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셨고 많은 실망도 체험하셨고 갈등과 싸움의 시기도 이겨내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두 자녀의 탄생을 체험하셨고, 한 쌍에서 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두 분이 이미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신 후 오늘 교회적인 혼인을 서약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습니까? 이 예식이 단순히 화려한 의식을 되찾아 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것은 두 분의 인간적인 사랑이 보다 더 심화되고 깊어짐을 경험하고 이 사랑의 깊이는 바로 오직 하느님께서만이 선물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두 분이 열려진 그리고 솔직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시면 다른 사람의 코고 작은 잘못이나 약점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하느님을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두 분은 하느님의 아름답고 선하심과 강함을 눈에서 잃어버리지 않고 그 위에 집을 지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과 기쁨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소외되지 않도록 당신의 아들까지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당신 아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우리의 형제가 되셨으며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그로인해 우리들은 멸망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그분과 함께 영원한 미래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방금 우리가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들은 바와 같이 우리를 위해서 그분은 자신의 피와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이것을 하셨으며 그분에게 여러분, 저, 우리 모든 인간은 큰 의미를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부부이신 두 분 또한 그분을 온전히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두 분과 함께 계실 것이고, 주님은 두 분의 가정생활을 통해서 여러분과 함께 길을 가시며 성령과 당신의 사랑으로 두 분을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은 두 분이 서로를 사랑하는 그 사랑과 묶여지고, 이제 인간적인 사랑을 훨씬 뛰어넘어 두 분을 강하게 만들어 주셔서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함께 하시듯이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서로를 신뢰하게 하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서로에게 충실하게 합니다. 주님과 함께 이제 앞으로의 두 분 혼인생활은 마지막이 있는 길이 아니라 영원히 주님의 기쁨 안으로 인도되는 길을 함께 가십니다. 두 분이 이제 곧 베풀어지는 혼인잔치에서 각자가 상대방에게 하는 받아들임의 “예”라는 약속을 새롭게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서 하시는 약속입니다.

















































































혼배미사강론<Ⅸ>







복음 : 요한 15,9~17







“이 날과 이 밤에 행복을 우리가 믿는다면

평온이 당신과 내 곁에 찾아 오리라.

 이 시간들은 우리는 즐거워하자.

우리의 삶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네.

우리만이 자신들을 위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한다네.

이 날만이 아닌, 이 밤만이 아닌 행복을 우리가 믿는다면

평화가 당신과 내 곁에 찾아들리라.”





저는 이 請을 통해서 표현된 그 원의를 오늘 이 시간, 하느님과 공동체 앞에서 부부로 서약하는 이 거룩한 시간과 연결시켜 보고 싶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인생길, 두 분이 믿을 수 있는 행복한 공동의 인생길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행운 또는 이 희망은 곧 두 분의 사랑을 통해서 삶이 가꾸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행운과 함께 희망도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왜냐하면 이 희망이 두 사람 관계를 새겨놓는 그 곳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때에도 침착과 인내와 평온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서 삶은 행복하다는 느낌을 주는 힘이 자라나고 상대에 대한 사랑 안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삶을 이끄는 능력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와 이 자리에 두 분의 결혼을 축하하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라는 우리 모두의 원의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을 압니다.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행복이란 말만큼 상대적인 뜻을 가진 단어는 드물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처해진 상황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건강, 장수, 가정 안에서의 조화, 삶을 밝게 만드는 자녀들, 삶에 있어서의 서로간의 이해와, 직장에서나 사업에서의 성공 또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수입, 이 모든 것들이 행복 또는 행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방금 우리가 헤아려 본 여러 행복들이 제게는 확신을 주지 못합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인생에 모든 좋은 것들이 그렇게 노력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누가 행복을 오래 지속되는 기분 좋은 상태로 대치시킨다면 그는 마치 복권에 당첨되는 것과 같이 아주 드물게 오는 실제상황을 생각하고 삶을 그냥 지나쳐 버리는 사람이 됩니다.

 인생에서 어렵고 힘든 운명에서 도피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의 어려움을 견뎌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삶이 선물이라는 생각은 더구나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오직 좋은 것만, 완전한 것만을 자기 인생에서 기대하는 사람에게 그 기대는 반드시 좌절되고 말 것이며 자기 인생을 한번이라도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행복하다는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말이 생각납니다. “행복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가 하는 것을 좋아하는 데 있다”는 표현입니다. 저는 이제 두 분이 시작하려는 결혼생활에서 기다리는 바를 두 분이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기원하고 싶습니다.

 또한 저는 서로에게 향하는 두 분의 사랑이 언제나 살아 있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기를 기원하고 싶습니다. 함께 더불어서 이룩하는 인생사에 던져진 바를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즐겨 배우는 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이란 언제나 개인적인 관심사나 기대에 부합하는 것이 무엇인지 골라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공동의 인생길에 위험이 됩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관심사와 기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긍정하고 부부생활에서 오는 임무를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서로를 향하는 관심과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되기에는 힘이 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 이 성전, 기도의 집에 와서 하느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마음을 바꾸어 어려운 인생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도록 자신을 변화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서는 무거운 것이 가볍게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의 말씀을 두 분이 언제나 기억하시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은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까지 온갖 괴로움에 맞서면서도 당신의 사랑을 끝까지 지키실 수 있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에 넘치신 아버지로서 강하게 느끼셨고 하느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시다는 것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아심으로써 예수님은 사랑으로 사실 수 있으셨고 그 사랑을 변함없이 지킬 수가 있으셨습니다. 이 앎을 통해서 예수님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신랑, 신부!

 저는 여러분이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오는지를 알고 삶을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분 곁에, 두 분의 삶 안에서 두 분과 함께 길을 걸어가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이제 시작하는 공동의 인생길에서 언제나 하느님의 손길 아래서 함께 하는 삶을 가치있는 것으로, 고귀한 것으로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러한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여러분의 공동의 삶을 통하여 계속해서 선사하시기를 두 분에게 기원합니다. 그로인해 자신의 책임을 스스로 지는 가운데 평화가 두 분 가정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모님께 효도하십시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혼배미사강론<Ⅹ>







                                  독서 : 창세 2,18~24   1역대 12,31~13,8

                                  복음 : 요한 15,9~13









 서양의 옛 속담 한 토막.

“먼 바닷길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은 한 번 기도하고, 전쟁에 나서는 사람은 두 번 기도하고, 누가 결혼하려면 세 번 기도한다”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먼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모험적인 일이고, 전쟁에 나서는 일은 더욱 위험하고, 가장 모험적인 일을 결혼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혼을 통해 서로 부부가 되는 것에 대한 옛 사람의 경험을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결혼은 하나의 커다란 모험입니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물질적 사고가 점점 더 팽배해 가고 있는 시대에는 더욱 그러한 생각이 강해집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속담에 하나를 더 첨가하고 싶네요. 결혼은 사랑이신 하느님께 뿌리를 둔 모험이라고요.

 모험을 시도하는 목적은 성취시키는 데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은 성취하고자 하는 그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목적을 잘 이루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과 과정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오늘 혼인의 주례자인 두 분과 부모님들, 가족 친지와 공동체 앞에서 예식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는 과정의 표시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    ), (     )

 무엇보다도 중요한 표지는 여러분이 하실 여러분의 동의입니다. 두 분은 서로 인생에 있어서 혼자가 아니라 함께로서, 생의 반려자로서 서로를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부부가 되는 서약을 맺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 서약은 “나는 당신을 내 아내로, (혹)내 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로 표시됩니다.

 하나의 과업과 사랑을 이룩하기 위해 두 사람은 서로를 서로에게 선물하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를 서로에게 주는 바침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봉독한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바로 그 방향을 알려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참 사랑의 본질을 밝혀줍니다.

 사랑은 단번에 불길처럼 타오르지 않습니다. 서로 보살피고 이해함으로써 자라나고 익어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꾸준히 계속되어야 합니다. 믿는 이들로서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이 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가없는 사랑에 대한 인간의 추구, 욕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벌써 오래 전에 만났고 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전 삶을 완전히 나누고 받아들이는 그 첫걸음을 오늘 걷기 시작합니다. 그 걸음에 그 길의 동행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표시로 주례사제는 영대로써 내민 손을 묶어줍니다. 이는 혼인의 계약이 맺어졌음을 그리고 주께서 이 계약을 맺어주심을 서로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표시로서 두 분은 이제 오랜 전통을 가진 의미심장하고 놀라운 표시를 서로 나누게 됩니다. 누군가 반지를 제공하는 사람은 그것을 받는 사람과 묶여집니다. 그것도 영원히.

 사랑하는 두 분, (    ), (    )

 여러분이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반지를 끼워드릴 때 여러분의 사랑이 결코 중단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그분의 사랑은 끝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복음은 두 분에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합니다. 참사람은 한 순간으로 만족하지 않고 영원해야 사랑이 삶을 변화시킨다면 반대로 사랑을 또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두 분 이제부터 가지게 될 그 힘(능력)은 평범한 일상생활을 그리스도의 빛으로써 변화시키는 데 나타납니다. 그로인해 사랑은 성장하게 되고 해가 감에 따라 익어갑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라는 것은 곧 매일 매일 서로를 새롭게 발견하고 부드러움을 담기로 서로 노력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서로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고통스러운 실망과 좌절을 느낀 후 서로 용서하고 화해살 수 있는 충실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건네주는 반지는 바로 이런 충실함과 변치않을 사랑의 약속에 대한 증거이자 표시입니다.





세 번째 표시는 두 분이 오늘 이 자리에 봉헌한 초에 불을 밝히게 하는 빛입니다. <부활초>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서로를 밝게 비출 뿐 아니라 주위에 빛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모두가 사물과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기에 더듬게 됩니다.  삶은 더듬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바로 보아야 하고 비추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세상을 비추듯 이 그 빛을 받은 두 분도 이제 서로를 비추고 세상을 밝히십시오.

  마지막 당부 :

 부모님께 효도하십시오. 두 분을 오늘 이 자리로 내보내고 그 뒷자리를 차지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여러분은 지금 헤아리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언젠가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를 지금 이 자리처럼 내 보내고 지금 부모님께서 앉아 계시는 그 뒷자리에 자리하실 때에야 비로소 지금 위에 계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부터 시작하십시오. 두 분이 드리는 효도는 언젠가 여러분의 자녀들로부터 받게 될 효도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두 분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혼배미사강론<Ⅺ>







                                독서 : 1고린 13,4~13

                              복음 : 마태 7,24~27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머물 곳을 찾습니다. 머물 곳을 찾아낸 사람만 이 고향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중의 누구라도 자신이 거처할 수 있고 그 곳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머물 곳을 필요로 합니다. 시대와 세상 사이에서의 방랑자들인 우리들은 정착할 수 있는 곳을 필요로 합니다. 머물 곳이 없이는 시련과 걱정이 많은 우리 삶이, 유랑하고 떠돌아다니는 우리 인생이 그냥 헛되이 지나가 버릴 뿐입니다.

 사랑하는 신랑 신부, 두 분. 오늘 우리는 두 분의 혼인날에 여러분이 이제 첫 발을 내디디는 공동의 삶을 위하여 머물 곳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소유의 거처할 공간과 그에 알맞은 시설을 갖추는 것은 확실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함께 하려는 삶의 전부이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이룩해야 할 것은 바로 내적 고향을 꾸려 나가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머물 곳을 필요로 합니다. 두 분이 오늘처럼 기쁜 날 직접 골랐던 1고린 13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같은 머물 곳, 지나가 버리는 덧없거나, 불완전한 것이 아닌 참다운 머물 곳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 세상 것에 대한 평가절하가 절대 아닙니다. 그렇지만 삶을 진지하게 살았던 사도 바오로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知的 으로 보이는 많은 것들은 우리 삶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습니다. 젊음이나 아름다움은 우리 주위에 오래 함께 하지 않습니다. 재산이나 재물은 변할 수 있습니다. 직업이나 거처할 공간도 무조건 항상 고정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끝없이, 또한 변함없이 지속될 수 없습니다. 지식도 재능도 색이 바래지거나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에게 남아있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3가지 실체 즉, 믿음·희망·사랑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신랑 신부 두 분은 서로를 깊이 신뢰합니다. 여러분이 상대방을 서로 신뢰하기에 혼인의 끈으로 더욱 친밀히 결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 좋은 날들이나 괴로운 날들에도 언제나 두 분은 각각이 아니라 함께 삶을 꾸려 나가기로 이제 서로에게 서약하셨습니다.

 두 분은 이 약속을 바로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하셨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계신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두 분은 하느님이 언제나 먼저 우리를 보고 신뢰하신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에 대한 변함없는 충실과 믿음을 보여주셨다는 증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충실과 믿음을 이제 두 분은 삶을 통해서 서로 나누고 증거하셔야 합니다. 삶을 서로 나누고 나의 삶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여기 있어주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공동 삶의 모토입니다. 이 모토는 앞으로 닥쳐올지도 모르는 불안과 슬픔, 절망과 고뇌를 막아줄 뿐 아니라 함께 하는 삶에서 서로에게 지쳤을 때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용기를 일으켜 줍니다,

 두 분은 서로 사랑하기에 이제 서로를 믿고, 서로에게 희망을 두고,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합니다.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모든 희망과 신뢰의 뿌리입니다. 오늘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와 (하객) 여러분 앞에서 두 분은 서로가 깊이 사랑하고 있고, 또 서로 더욱 깊이 사랑할 것임을 선언 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뿌리는 바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사랑이 없이는 두 분의 사랑은 순전히 인간저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그에 따른 희망과 신뢰는 뿌리없는 것이 될 뿐입니다. 사랑은 사람의 심장이며, 두 분이 영위하려는 공동 삶의 심장이며 영혼입니다. 사랑만이 고통과 십자가를 이겨낼 수 있으며 삶의 어두움을 물리치는 밝은 빛입니다.

 두 분의 사랑은 뒤로 돌아 볼 때 두 분을 이 자리에 서 있게 하신 두 분의 부모님께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며, 앞으로 나아가서는 미래의 잔들과 함께 이루는 가정의 뿌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마침내 하느님께서 두 분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응답하는 올바른 대답이 될 것입니다.

 만약 진정으로 두 분이 오늘부터 시작하는 공동의 삶에서 참되게 머물 곳을 원하신다면, 함께 믿고 함께 희망하고 서로 사랑하십시오. 신앙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사랑이며 이 사랑 안에서만이 지나가지 않는 참되게 머물 곳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두 부 분의 혼인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하느님의 풍성한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혼배미사강론<Ⅻ>



                             



                                              독서 : 시편 23

                                                     룻기 1,16~19







 사랑하는 (     ), (     )

이 시간에 여러분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하게 됩니다. 두 분은 이제부터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언제나 서로에게 “예”라고 말하며 오늘 둘째 독서인 룻기에서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자 합니다.

 “당신이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당신이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무르고자 합니다. 당신이 눈 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을 감고 곁에 같이 묻히고자 합니다. 당신의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요, 나의 하느님이 당신의 하느님이십니다. 오직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두 분의 서약과 이제 시작하는 두 분이 함께 하는 길을 진심으로 축복하고자 합니다. 이제 함께 하는 이 길이 어떻게 펼쳐지고, 얼마나 지속될런지는 오직 하느님 만이 아십니다. 우리는 한 시간도 예측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이 길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두 분은 이 결단을 충분히 숙고하였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자신과 자기 반려자를 알고 또한, 하느님을 알기에 이 길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각자는 고유하고 한 사람 뿐이기에 그리고 두 분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시기에 함께하는 이 길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오랫동안 기다렸고, 서로를 위한 희생들을 바쳤습니다.

 두 분은 작가가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알고 있으며 여러분이 아시는 바를 또한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객 여러분들을 모시고 함께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또한 사람이 상대로부터 무엇을 바랄 수 있고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불행히도 수많은 부부들이 이와같은 전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함께 하는 공동의 삶을 성공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혼인이라는 모험은 너무나 크기에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은 언젠가 한계에 도달하게 되고 더 이상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앞에 밝힌 상대에게 바치는 증여, 여기에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덧붙여져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물건이 아니라 바로 인격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여러분이 시작하려는 공동의 삶에 주께서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주께서 여러분의 목자로서, 또 주인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시편의 저자는 이 사실을 아주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아쉬울 것 없노라. 파아란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치도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주님은 여러분 곁에 계시고 여러분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분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주께서 여러분 곁에 계신다면 그분은 당신의 교회에 선사하셨던 바를 두 분에게 선사하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신뢰입니다. 어떤 사람도 신뢰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신뢰가 두 분 사이에 깃들면 참다운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신뢰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며 상대를 향한 위선과 거짓을 꾸미지 않게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꾸미지 않는 나를 알게하고 받아들이기에 그 안에서 사랑이 싹트고 그 결실을 맺게 합니다. 이 사랑은 바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신뢰의 열매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만큼 많이 사용되는 말도 없으며 그러기에 또한 그 만큼 남용되는 말도 없음을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십니다. 사랑은 장난이나 유회가 결코 아닙니다.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고 사도 요한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무엇을 선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무엇은 모든 것보다 훨씬 작기 때문이며, 그러나 모든 것은 나보다 작습니다. 사랑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자신의 일부나 내가 가진 그 무엇을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나 자신 자체 전부를 선사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놀라운 선물입니다. 사랑은 유일하며 서로를 선사하게끔 성장시키는 유일한 가치입니다. 바로 이것이 두 분 가까이 계시는 주님께서 오늘 두 분께 주시는, 주님 축복의 선물입니다. 그렇다고해서 두 분은 이제 지상천국에 살지는 않습니다. 두분에게 천국의 문이 오늘 활짝 열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두 분은 수많은 어려운 시간을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두 분이 이제 시작하는 이 길이 언제나 푸른 초원으로만 인도되지 않고 때로는 사막을 거쳐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함께 같이 지고 가는 짐처럼 두 분을 강하게 묶어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아는 사람만이 빛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의 삶이 가장 쉽게 함께 할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으며 그 함께 하는 삶에서 행복이 찾아옵니다. 주님의 축복은 바로 함께 하는 삶에 대한 굳은 신뢰를 만들어 줍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에서 이제 두 분은 서로에게 동의의 말을 나누게 되고 서로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함입니다. 행복은 만들어 가는 이라고들 합니다.





혼배미사강론<XIII>




 복음 : 요한 15,12 이하







두 분은 아름다운 젊은이 Narzis(나르찌스)에 관한 그리스 신화를 알고 계십니까? 나르찌스는 메아리 신인 님프의 사랑을 거절했기에 심장이 부서져 죽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젊은이 나르찌스는 호수의 물 위에 비춰진 자기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졌기에 야위어져 가는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그리스 신화는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재앙이며 결국에는 자기 파멸로 이끈다는 점을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성숙, 자기실현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보는 것으로서 자기 실현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나’만을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라고 말하는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성숙시킬 수 있습니다.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삶의 의미를 놓치고 싶지 않은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애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람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공동체를 발견해야 합니다. 부부생활은 확실히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게하는 뛰어난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누가 결혼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젊은이 나르찌스와는 전적으로 달리 행동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자신만을 사랑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자신의 상대를, 자기의 동반자를 찾고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쉽거나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가끔 자기 사랑일 수 있습니다. 비록 그러한 사랑이 쌍방에 기초를 둔다하더라도 오래 가지 않으며 참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유일하고 진실로 행복하게 만드는 참사랑은 우리에게 알려진 계명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보다 훨씬 더 뛰어넘는 가치를 가집니다.

 이 계명은 원래 구약의 법이고,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즐겨 인용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사랑은 좀체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이 계명을 인정하셨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이보다 더 뛰어나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자기 벗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바침, 바로 그것입니다.

 아름다운 청년인 나르찌스에게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반복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다른 사람을 우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 중의 누구라도 다 자기 안 에 작은 나르찌스의 모습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참다운 사랑, 희생하는 자세를 먼저 성장시켜야 합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잘못하고 실수하며 크든 작든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올바른 방향을 세울 수는 있습니다. 언제나 나는 새롭게 함께 있는 다신에게로 나아가야지 함께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위한 당신을 이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거울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범이 되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참되고 진실한 사랑의 실현을 위한 협조자가 되십니다. 교회의 혼인식은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의 축복과 도우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서 사랑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두 분이 이제 나르찌스적인 사랑으로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하고 상대를 발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두 분을 끝까지 지켜주시고 살펴 주실 것입니다.













































혼인계약<XIV>









독서 : 예레 31,31~34

       로마 8,31~39







 방금 들은 두 가지 성서 말씀은 오늘 여러분이 이제 그 첫발을 내딛는 혼인의 의미를 밝혀줍니다. 먼저 첫째 독서에게 예레미아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체결하시고자 하시는 새 계약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계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법적으로 효력을 발생하는 행위를 설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도 서로 간에 의무화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아에 따르면 새 계약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능력과 사랑으로 백성이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끔 보살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이 계약에 대해 마음을 쓰실 것입니다.





 신랑 신부 두 분은 오늘 혼인의 계약을 체결하십니다. 두 분은 오늘날의 관습에 입각하여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서로에게 약속합니다. 그리고 이로인해 법에 따라 죽음이 그 사이를 갈라 놓을 때까지 이 계약은 서로에게 의무화됩니다.

 그러나 오늘 두 분이 체결한 새 계약은 서로간의 사랑과 애정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지며 생생한 실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계약의 의무를 쉽게 하도록 온갖 염려를 하시듯이 그렇게 여러분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 가능하도록 서로를 염려하고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제부터 함께 하는 길은 하느님의 인간창조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리라”(창세 2,18) 이 말씀은 분명히 부부를 두고 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상용하는 반려자와 도움의 반려자”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르면 혼인에서는 상응하는 그러니까 동등한 가치의 자립하는 인격이 자리하며 어느 한 쪽도 상대에 비해서 못하거나 미약하지 않습니다. 혼인은  바로 반려자 관계입니다. 반려자 사이에서는 각자는 상대방에 의해 좋은 점과 나쁜 점, 장점과  단점을 함께 지닌 한 인간으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누구도 상대보다 위해 자리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결혼생활에서 고유한 두 인격이 자리하지 못하고 군림하거나 복종하는 관계가 괸다면 이 혼인의 계약은 파기되고 상전과 하인의 관계인 과거의 노예상태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내용인 ‘도움’또는 ‘협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두사람, 남편과 아내는 서로 도와주고 보완해야 합니다. 어디에서 부부가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관계가 되는 것은 모든 부부 사이에 다를 것입니다. 나의 아내 또는 나의 남편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항상 던지는 것 또한 결혼생활의 과제에 속합니다. 동시에 두 분은 많은 점에서 자신의 반려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나는 무엇일까 하는 점을 항상 깊이 자각해야 합니다. 이 점은 곧 자신이 반려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할 것이며 동시에 행복하게 됩니다.

 이제 둘째 독서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하느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은 여러분의 전 삶에 적용되며 특별히 여러분의 혼인에도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혼인의 공동생활은 구원의 효과적인 표지가 됩니다. 왜냐하면 혼인생활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결합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의 이 부분은 인간존재가 불완전하다는 체험하에서 저술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인에게서 영원한 구원과 완성을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세상의 모든 부부도 이 인간의 불완전함에 한 몫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자 부부는 닥쳐온 난관에 눈을 감지 않고 그럴 때마다 더욱 더 하느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확신합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란이나 역경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께 속할 뿐입니다. 불란서의 유명한 작가인 뽈 끌로델(Paul Claudel)은 말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한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아내 또한 남편을 위한 만족한 존재도 아니다. 오직 약속일 뿐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두 사람 안에 함께 하는 제 3의 하느님의 손길이 언제나 함께 하셔야 함을 깨우쳐 줍니다. 하느님은 이 혼인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삶<XV>











 오늘 두 사람의 젊은이가 자신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크고 기쁜 잔치의 시간을 거행합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하는 삶의 결단을 내렸고 이제 함께 하는 삶을 생각합니다. 여기 하느님의 제단 앞에서 서로에게 엄숙히 약속합니다. “나는 일생동안 당신을 위해서 있고자 하며 당신과 함께 나의 삶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나의 인생은 당신의 인생과 결합되어 우리의 인생이 되고 우리 공동의 사랑에서 축복이 자라나며 그 축복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공동체에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삶에 대해서 오늘날 공개적으로 떠도는 거짓말이 활개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수긍하고 있으며 그 거짓에 매료되어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짓의 결과를 우리는 수많은 파괴된 관계에서 봅니다. 첫 번째 거짓은 “내 인생의 주인은 나 자신이며 나의 삶은 전적으로 나에게 속해 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세상에 존재한다”하는 표어입니다. 이 구호에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사실을 쉽게 간과합니다. 우리 중의 그 누구도 자신이 직접 자기에게 생명을 선사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협력으로 곧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에게 생명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부모는 우리를 세상에 낳아 주셨고 양육하였으며 교육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우리가 있게 된 데까지 부모와 협력하여 우리를 가르치고 보살폈습니다. 우리 중의 아무도 자기 자신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 수 없습니다. 인간창조의 기원에서도 이미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서로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이제 오늘날 다시금 공개적으로 선포되어 많은 사람들을 불안을 이끄는 두 번째 거짓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사랑을 느끼고 나눈다면 우리 인간은 충족되고 만족할 수 있다”하는 구호입니다. 모든 사람은 한번은 어디에선가 실망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약속한 것을 끝까지 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약속의 기대에서 실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한정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도, 그 어떤 물건도 인간의 마음을 충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충만과 충족은 우리가 오직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 뻗쳐질 때 발견됩니다.





 사랑하는 신랑, 신부.

 두 분은 오늘 삶에 대한 위의 두 가지 거짓에 여러분을 맡기지 않았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십니다. 두 분은 서로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창조되었으며 우리는 서로를 위해 살고자 합니다.” 두 분은 여러분의 결혼을 혼인성사 안에서 결합시키기 위해서 성당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사랑 안에 영원하신 분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 됩니다. 두 분이 서로를 위해 존재하고 어려울 때 함께 고통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여 사랑의 삶을 추구하면 영원하신 하느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에 저와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하객 여러분들은 두 분의 결혼에 언제나 행복이 따르기를 축원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들은 두 분과 함께 두 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두 분이 함께 시작하는 새 삶의 여정에 동행하시어 축복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의 하느님이 되고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XVI>

  





독서 : 예레미야 7,23







 두 분은 오늘 하느님 앞에서 서로에게 약속하기 위하여 이 곳 성당에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나를 선물하고, 나 또한 선물인 당신을 받아들이고자 합니다”하는 의미의 약속을 나누기 위해서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두 분은 이 약속의 말을 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준비해 왔습니다. 아마도 두 분은 아직도 가끔씩 여러분의 사랑이 처음으로 싹트고 서서히 서로에게 자신을 맡길 수 있다고 여겨져 함께 공동의 인생을 살아가려는 결심을 했을 때를 돌이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함께 살아가려는 원의가 바로 오늘 하느님 앞에서 여러분의 계속되는 삶의 길을 결정하는 기초가 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더 이상 혼자이지 않고 함께 길을 걸어갑니다. 두 분은 이제 서로에게 속하여 있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마치 좋건 나쁘건 한 삶이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된 것처럼 그렇게 잘못 이해합니다. 누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부부관계, 더 나아가서 인간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결코 서로에게 소속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깊은 의미에서 서로에게 속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소속된 것은 누구의 말을 듣고 서로에게 속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소속된 것은 누구의 말을 듣고 서로에게 속해있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서로를 소유하는 형태, 즉 각자의 자유와 고유함, 특성을 무시하고 속박하는, 마치 물건을 소유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서로 가까워져 함께가 되며 더 잘 들어주려 노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참다운 의미에서 서로에게 속하여 있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말이 진실되고 참된 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고 맡길 수 있는 말은 모두가 참되고 지실한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들을 가치가 있는 말은 지금 여러분이 서로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곧 “나는 당신의 남편이 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아내가 되고자 합니다”하는 약속의 말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도 어떤 여러분을 위해서 이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약속의 말은 두 분의 인격적인 결단이며 여러분 반려자에게 주는 자유로운 선물입니다. 이 약속의 말 안에서 두 분은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고자 한다는 진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어떤 친구 중의 하나로서가 아니며, 직장 동료로서도 아니며, 그냥 좋아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삶을 함께 나누는 서로를 위해서 있는 존재로서 입니다.

 이 약속의 말 위에 혼인이 근거하며 혼인에서 하는 이 말 안에서 앞으로 서로를 맡기고 신뢰하며, 이 말 안에서 여러분이 서로가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또한 이 말은 반려자의 약속의 말에 대한 대답도 됩니다. “예! 나는 당신을 내 아내로, 내 남편으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하는 대답입니다.

 이 짧은 대화 안에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스스로 말하지만 않고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고자 하는 사실을 서로 알리는 곳에, 그리고 사람이 진실된 이 말을 듣고 그에 응답하는 곳에서 인간적인 결속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한데 모이게 됩니다. 여기에서 사람다운 삶이 가능해집니다. 반대로 우리 삶의 고통은 우리안에 이런 진실된 말이 부족하고 그리하여 인간적 유대의 결속이 얕은 곳에서 생겨납니다. 즉 인간적 삶의 기초가 되는 서로를 위하는 관계성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삶의 어려움이 시작되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신랑, 신부!

 제가 왜 독서에서 예레미아 예언서의 짧은 구절을 여러분에게 읽게 했는지 아마도 이해하실 겁니다. 여기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느님 백성의 삶을 위한 토대가 되는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어느 신부처럼, 어느 신랑처럼 여기서 이스라엘과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한 신이 아니라 우리에게 속하고 그렇기에 우리 또한 그분께 속하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앞서 하느님은 “나의 음성을 들어라”라는 전제를 내세우십니다. 이 전제는 마치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과 같이 윤리적인 의미로 좁게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는 결정적인 말씀에 귀기울이는 것을 뜻합니다. 누군가 이 말씀을 건성으로 듣게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대답도 등한히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누구에게 속해있는 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하느님께 속하여 있는 사람은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고 삶에 축복을 받으며 성공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여러분의 오늘 혼인전례에 사람들과 하느님 사이에 맺은 계약을 관련시켜 줍니다. 이 계약은 하느님 백성을 위한 삶의 뿌리이며 아울러 바로 여러분 공동의 삶에서도 그 토대가 됩니다.





 혼인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며 또한 단순한 사회적 발전의 결과도 아닙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제공하셨던 공동체의 모상입니다. 사람들이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함께 더불어 있음의 행복을 체험하는 곳, 그 곳에서 그들은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과의 유대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혼인생활의 보이지 않는 주인은 바로 두 분을 묶어주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두 분을 축복하시고 그 길에 보이지 않는 손님으로 항상 동행하실 것입니다.

































































이제 제 손을 잡으십시오!<XVII>



   





 이제 몇 분 뒤에 두 분은 하느님과 여기 모인 공동체, 여러분의 부모님과 친지, 그리고 하객들 앞에서 새로운 삶의 서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김 데레사, 나는 당신을 내 아내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이 알렉산델, 나는 당신을 내 아내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저는 하느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체결하신 이 혼인서약을 선언할 것입니다. 그리고 증인들은 자신들의 서명으로 또한 이 혼인서약을 증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두 분 앞에서 많은 분들이 이 잔치에서 기원했던 마음 속의 기도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럼 이제 제 손을 잡으시고 우리 삶이 다할 때까지 나를 이끄십시오”라고 교회의 혼인전례를 잘 모르시는 하객들도 진심으로 두 분의 결혼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몇 년 전에 혼인생활을 시작하셨던 우리 중의 많은 분들은 이 같은 축복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또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되돌아 보실 겁니다. “이제 제 손을 잡으세요”라는 말은 마음 속의 깊은 동경을 표현해 줍니다. 즉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반려자가 되어, 태양이 밝게 비쳐지는 행복과 기쁨의 시간 뿐 아니라 괴로움과 외로움, 그리고 좌절과 실망의 어두운 시간에도 언제나 함께 길을 걸어가자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두 분은 서로의 손을 잡을 것입니다. 이는 지금부터 함께 길을 가고자 하며 서로를 위해 살고 싶고, 곁에 서 있고 싶다는 표지인 것입니다. 이제 두 분은 “나는 당신에게 나의 손을 건네주며, 당신은 나에게 당신 손을 주십시오”라는 행위를 통해 서로간의 신뢰와 사랑과 성실의 힘있는 표지를 나타냅니다. 당신에게 내 손을 건네주고, 나는 당신의 손을 잡습니다. 이는 ‘당신이 길을 보지 못하면 내가 당신을 인도하며 내가 길을 보지 못하면 당신이 나를 끌어주십시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끌어 주고 서로의 동반자가 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혼자서는 자주 지치고 어찌할 바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이같은 이끌어 줌과 동반하는 것에 힘이나 강요가 개입되어서는 안됩니다. 손을 건네주고 건네받는 것은 반드시 조심스럽고 자상해야 합니다. 인사할 때나 감사의 표시를 할 때, 그리고 용서를 청하거나 화해의 표시를 할 때, 내미는 손은 따스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더 이상 손을 건네주지 못하는 사람의 삶은 외롭고 쓸쓸하며 더 나아가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두 분이 항상 자신의 손을 건네주기를 바랍니다. 아침에 집을 떠날 때 그리고 저녁에 집으로 되돌아 올 때, 서로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언제나 새롭고 진실한 손을 건네주고, 같은 마음으로 그 손을 잡아 주십시오. 용서를 청하는 손을 건네고 용서하는 손을 자주 내미십시오. 그리하여 화해하는 마음이 두 손안에서 건네어지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이끌어 주고 서로의 동반자가 되는 것에 끝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그렇게 머무십시오. 특히 서로를 필요로 할 때, 곧 무엇보다도 슬프고 어려울 때, 병고와 고통의 시간에 서로를 이끌어 주고 서로의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손을 잡고 나를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언젠가 죽음이 나에게 닥친다면 이때는 동반자의 손길을 간절히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의 손 안에서 죽고 싶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을 때와 죽음의 시간에 동료나 친구로서, 아버지나 어머니로서 형제나 또는 자매로서 남편이나 혹은 아내로서 다른 사람에게 손을 건네준 사람은 자산의 자상하고 부드럽고 용서하는 손길로서, 감사하고 진정시키는 손길로서, 그 자체로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해 줍니다. 그의 손길 안에서 우리는 자상하신 하느님의 사랑 자체를 느끼게 됩니다. 성서는 자주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하느님의 손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시편 작가는 37편 24절에서 “야훼께서 그의 손을 붙잡아 주시니 넘어져도 거꾸러지는 아니하리라”하고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앞뒤를 막으시고 당신의 손 내 위에 있사옵니다”(시편 139,5)하고 그 이유를 노래합니다. 또한 지혜서의 저자는“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에 있어서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다”(지혜 3,1)하며 하느님의 손길을 전적으로 확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일으키시고 낫게 하셨던 바로 하느님의 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분이 서로에게 건네어 주고 건네받은 손은 하느님의 손에 의해 이끌려져야 합니다. 언제나 함께 “나의 하느님이신 주님, 내 손을, 아니 우리들의 손을 받아주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두 분의 손은 하느님의 손으로 감싸져야 합니다. 그분의 손은 염려하고 보호하고 축복하시는 손길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두 분의 손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이제 저의 손을 두 분이 서로 맞잡은 손위에 건네주며 사제의 영대를 그 위에 놓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두 분의 손 위에 언제나 머물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혼배미사강론<XVIII>



   





                                

                                                독서 : 필립 2,1~11

                                               복음 : 마태 5,1~11







 어린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어떤 노인에 관한 러시아 이야기 한 토막이 있습니다. 어떤 한 노인이 놀이를 하던 아이들에게 한참 후에 “애들아 도대체 너희들은 무슨 놀이를 하고 있니?”하고 묻자 아이들은 “전쟁놀이를 하고 있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애들아 그런 놀이는 좋지 않아요. 전쟁이란 나쁜 것이란다. 전쟁놀이를 하지 말고 반대로 평화놀이를 하려무나”하고 노인이 말하자 “아!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아이들이 소리치곤 즉시 그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 갑자기 아이들은 조용해 졌습니다. 잠시 후에야 아이들은 노인에게“할아버지, 평화놀이는 어떻게 하나요?”하고 물었답니다.

 우리 삶의 체험이 이 이야기 안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은 평화와 인간다운 삶에 대한 갈망과 동경을 가지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들은 언제나 서로서로 평화롭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라고 한때 영국의 철학자 홉스는 표현했습니다. 살아가면서 불행히도 우리는 가끔 홉스의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랑 신부 여러분은 나름대로 각자 많은 어두움을 체험하셨고, 또한 자신들의 한계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을 여러분의 혼인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상대에게 맡긴다는 혼인초대장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서로를 서로에게 의탁하는 혼인잔치에 사도 바오로가 필립비 공동체에 보내신 구절을 두 분의 새로운 삶에 기초로 만들게 하고 싶습니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필립 2,3~4)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애쓰는 사람은  그 얼마나 중요한 사람입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살기가 또한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람은 언제나 반복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살아갑니다. 조그마한 오해와 불일치가 큰 싸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이 되지 못하는 무능력과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긍정하지 못하는 연약함을 불행히도 너무나 자주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힘들 수 있으며, 힘들어 합니다. “스무살이 되어서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해 꿈꾸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하지 못하고 마흔이 되어서 아직 사랑에 실망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이다”라는 글을 어디에선가 읽었습니다.

 “할아버지, 평화놀이는 어떻게 하는데요?”하고 아이들이 노인에게 물었답니다. 우리는 또한 마찬가지로 “예수님,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배웁니까? 하고 여쭈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마도 그분은 “나를 바라보아라!”하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산상 수훈을 설교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피로써 서명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평화와 정의, 그리고 사랑은 우리를 위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 자신을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분은 위에서 내려오셨지만 아리에서부터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 삶의 참 가치는 미움이 있는 곳이 사랑하고, 모욕하는 곳에 용서하고, 어둠이 자라는 곳에 빛을 밝히고, 불안과 걱정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끔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만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신랑 신부! 바로 이같은 뜻에 따라 여러분은 이제 서로에게 서약하게 됩니다. “나는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고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서약하는 그같은 조건없는 사랑을 얻기를 소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그런 서약을 해야한다 하더라도 각자가 “이 약속은 나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이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인간에게 언제나 되풀이되어 체념되고 파괴되는 채워질 수 없는 동경에 불과한가? 누가 그렇게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그렇게 살 수 없지 않은가? 예,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도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혼인전례 안에서도 이 점은 아주 잘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서로를 바라보고 혼인서약을 말할 때, 서로의 손을 마주 잡습니다. 이는 말만으로는 다 표현해낼 수 없는 내용들, 곧 ‘우리는 이제 함께 길을 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제 서로를 위해 존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제 언제나 상대방에게 도움과 용서의 손을 건네주고자 합니다’라는 의미를 드러내 주는 표시입니다. 그런 다음 사제는 여러분의 맞잡은 손을 영대로 감쌉니다. 영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이 표지로써 예수님은 두 분에게 말씀하십니다.

 “(   )와 (   ), 너희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좌절하지 말고 네 자신만을 바라보지 말고 먼저 나를 바라보아라! 네가 향하는 나의 사랑을 보고 나에게서 사랑하는 것을 배워라. 그러면 너는 언제나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실제로 자신의 안녕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안녕도 생각하게 될 것이다”하고 말입니다.

 이제 두 분이 일으켜 세우시는 집의 보이지 않은 주인은 바로 두 분을 한 몸으로 결합시켜 주신 주님이십니다. 두 분이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두 분을 결합시켜 주심을 항상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교회혼인의 참 뜻입니다.













































































혼배미사강론<XIX>








                                       독서 : 전도 3,1~8

                                        복음 : 요한 2,1~11









 여러분들은 아마도 동화를 읽거나 들어보신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대부분의 동화에서 보통은 해피엔드(Happy end)로 끝이 나는데, 주로 왕자와 공주가 결혼하는 것으로서 아래와 같은 간단한 문장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들은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동화이야기에서는 결혼이 절정의 순간이자 목적입니다. 보통은 결혼으로써 이야기를 마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의 이해에 따르면 결혼은 이제 그 시작이 됩니다. 결혼과 함께 비로소 머나먼 인생길을 시작합니다. 이제 시작되는 함께 걸어가는 이 길은 동화 이야기처럼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는 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겪어야 할 수많은 역경과 난관, 갈등과 오해의 어려움이 가로놓여 있는 길을 지나야 합니다. 그러기에 노늘 두 분은 서로 힘을 합해서 서로를 믿고 신뢰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이 길을 걸어가고자 결단을 내렸고, 그 결단을 오늘 하느님과 친지 및 공동체 앞에서 서로에게 하는 약속으로 서약합니다.

 “나는 당신을 내 남편으로, 혹은 내 아내로 맞아 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이 서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서로를 믿고 상대에게 자신을 맡기는 이 신뢰는 결혼생활의 뿌리이자 초석입니다. 혼인이란 말은 변하지 않고 영속적으로 지속한다는 말뜻이기도 합니다. 두 분의 혼인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 바램, 그 사랑이 지푸라기에 붙는 불이 아니라 계속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리고 항상 새로이 타오르는 마음으로 두 분이 항상 서로가 사랑 안에 머물고 그리하여 두 분의 기쁨이 완전해 지기를 바라는 이 원의가 지금 혼인미사를 드리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신랑신부, 가족 및 친지 여러분, 그리고 하객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는 약 2000년 전의 한 혼인잔치에 대해서 보고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의 인연을 맺는 혼인은 오늘날의 혼인과 견주어 특별한 점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알려주는 이 혼인의 독특한 점은 잔치에서 없어서는 안될 포도주가 떨어지는 낭패가 생겨났다는 점입니다. 준비된 포도주가 다 떨어짐으로써 이제 혼인잔치의 분위기가 깨어지게 되고 집안에 망신살이 뻗치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이 언급됩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다른 모든 참석자들은 더 이상 알려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성모님만이 수치를 당할지도 모르는 이 집안을 위해 몰래 항아리에 준비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킵니다. 주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하객들을 깜짝 놀라게 하시고 잔치의 분위기를 더 한층 돋우십니다. 주님은 포도주가 떨어져 잔치를 더 이상 계속 할 수 없는 집안의 염려와 걱정, 불안과 낭패를 없애주셨습니다.

 2000년 전 성서의 이 기적 이야기가 오늘 우리와 관계가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신랑 신부 두 분은 오늘 여러분의 혼인잔치에 친지들과 친구들을 초대하셨습니다. 두 분에게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두 분의 삶에 깃들이는 기쁨과 행복, 신뢰의 항아리가 비어 버리는 때입니다. 그 항아리를 무엇으로 목까지 채우시겠습니까? 바로 실망과 눈물, 걱정과 슬픔의 물로써 항아리를 가득 채우십시오! 여러분 가정에 주님이 머무시면 그 항아리의 물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삶에 놀라움이 없다면 너무나 무미건조할 것입니다. 혼인잔치의 포도주인 사랑은 날마다 점점 익어가야 하고 해가 갈수록 맛을 더해가야 합니다. 두 분만이 서로를 신뢰한다고 해서 포도주는 결코 금방 숙성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두 분의 혼인계약에 주님께서 자리하셔야 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 두 분의 혼인잔치에서도 주님은 함께 하시며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님으로 함께 하십니다.

 부부지간에 이루어지는 사랑과 성실 그리고 신뢰는 주님 안에서 세워지고 충만해 질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두 분이 주님과 그 자녀들이 공동체 앞에서 혼인을 체결하심에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는 바입니다.

























혼인 반지<XX>



  





오늘 양가 부모님과 친지 및 하객 여러분을 모시고 하느님 대전에서 이제 부부로 태어나신 신랑 신부 두 분은 아마 이제까지 살아오신 나날들 중에서 최고의 기쁨을 느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신랑 신부,

 여러분은 오늘 단순히 사회법적인 결혼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혼인성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분은 오늘 교회에서 하느님 앞에서 서로에게 “예”라고 서약하셨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충실의 표지로 상대의 손가락에 혼인반지를 끼워줍니다. 이제 이 혼인반지는 여러분에게 항사 이 은총의 날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혼인반지는 금이나 다른 귀한 보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금이나 보석은 녹슬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천년 이상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 반지가 여러분의 손을 예쁘게 장식합니다. 두 분은 아래의 내용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혼인생활은 귀하고 가치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기쁨으로 서로를 바라보시고 자신에게 귀한 생의 반려자를 얻은 행운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에게 향하는 사랑을 잃어버림으로써 이 선물을 내던지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이제부터 시작하는 두 분의 삶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의 사랑이 성장하고 강건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경제가 불안하고 확실하지 못한 때가 오면 사람들은 금본위주로 기울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금값은 올라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어려움에서 두 분이 간직한 사랑의 가치도 상승합니다. 여러분의 공동체는 여러분을 강하게 만들고 비바람을 이겨내게 합니다. 서로 서로 도우고 희생하며 서로를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게 합니다. 사랑이 깊으면 어려움이 닥칠 때 서로는 보다 강하게 결합됩니다. 서로와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힘이 생겨납니다. 여러분의 혼인반지를 한번 자세히 보시면 누군가 아주 섬세하고 아름다운 세공작업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문가인 세공업자가 이 반지를 만들었습니다. 반지를 정성스레 갈고 닦아서 빛이 나게 합니다. 반지는 모가 없이 둥글기에 어디가 시작인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조화롭게 두 분의 혼인도 반지의 모습과 같아야 할 것입니다. 반지를 만드는 전문가가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그리고 끈기있게 작업하듯이 두 분의 사랑도 점점 익어가고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를 자상하게 생각하고 이해함으로써 신뢰가 쌓여갈 것입니다. 이제부터 두 분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해야 합니다.

 만약에 반지 안에 서로의 이름과 오늘 혼인날을 새겨 넣었다면 두 분은 자주 그것을 보고 오늘을 생각하십시오. 두 분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는 세상에서 하나뿐일 정도로 고귀하고 가치 있는 사랑의 징표가 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손을 들게되면 즉시 금반지를 쳐다보십시오. 사랑을 약속한 징표인 반지로써 파괴를 불러 일으킨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반지를 바라보는 눈길은 상대를 생각할 뿐 아니라, 자신을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두 분을 부부의 인연으로 결합시키신 하느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반지를 축성할 때 드리는 기도를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오.“주여, 이 신랑 신부의 사랑에 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이 반지를 신의의 표지로 삼아 서로 사랑의 정을 간직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혼인예식서 111항 P.58).

 하느님 자신이 바로 여러분의 혼인의 증인이십니다. 두 분께 향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없으며 확고하십니다. 두 분이 서로의 약점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때 하느님의 사랑에 의탁하십시오. 고통에서 조차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축복을 내리십니다. 두 분이 서로를 위해서, 앞으로 태어날 자녀를 위해서 하는 모든 희생과 염려와 고통과 사랑은 바로 여러분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하늘에서의 영원한 상급을 선사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자신이 거룩한 혼인의 성사 안에 두 분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두 분의 혼인을 축하드립니다.













































1886년경 어느 신부님의 혼배미사강론









 오늘 이 자리에서 신랑 신부 두 사람이 혼배성사를 받게 된 것을 하느님의 큰 은혜로 알고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 본시 혼배성사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성사입니다. 당신의 창조사업과 구속사업의 협조자로 세우신 성사입니다. 성교회의 일곱가지 성사 중에 하느님께서 어느 성사를 먼저 세우셨나 물으시면 혼배성사를 먼저 세우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구요? 구약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하느님께서 만물을 다 만드시고 끝에 가서 사람을 내셨는데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혼을 불어넣어 살게 하시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여 갈비대를 뽑아 여자를 내셨다고 합니다. 아담이 깊이 잠들게 하여 갈비대를 뽑아 여자를 내셨다고 합니다. 아담이 잠을 깨어보니 옆에 자기와 가은 사람인 하와이를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얼싸안으며 ‘이는 내 뼈요 내 살이라’하셨답니다. 아담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고 하와는 아담의 늑골로부터 창조된 것은 한 아버지 하느님 밑에서 부부일신으로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계명이겠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서로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누가 자기 자신을 미워하여 때리며 벌 줄 수 있겠습니까? 만일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니고 서는 못할 것입니다. 누구라도 자기 처지에 맞게 힘자라는데 까지는 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합니다. 그러나 개체인 부부를 사지백체가 다른 딴 몸을 어떻게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렵게들 생각마십시오. 마음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못할 일을 명하시지 않았고, 마음과 행동으로 실천하기를 힘쓰는 자에게는 은혜로ㅓ 도와 주시므로 행하기도 쉬고 즐거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계명을 달고 즐겁다”라고 하십니다. 괴로울 때 같이 울고 즐거울 때 같이 웃고 근심할 때 위로하고 병들 때 서로 도와 화목하게 사는 가정은 실로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전복팔단에도 화목하는 이는 진복자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 하셨습니다. 부부가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면 거기에 태어나는 자손들도 다 부모의 본을 따라 화목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좋은 것은 사랑하고 나쁜 것은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부부 간에도 서로 어느 편이 잘났고 못났나 하는 것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얼굴이 잘나도 마음이 못된 사람도 있고 그와는 반대로 얼굴이 못나도 마음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얼굴만 보고서 살아갑니까? 얼굴이 곱다고 항상 찌윽리고 욕하고 싸우면 쓰겠습니까? 얼굴이 못나도 마음이 고와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 교우들은 하느님 공경에 열심하여야 하겠습니다. 구약시대의 도비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부친의 명을 받아 꾸어준 돈을 받으러 갈 때에 라파엘 천사의 인도로 채부인의 딸과 혼인할 때에 얼마나 놀랄 일이 있었습니까. 그 처녀는 일곱 번이나 신혼 첫날밤에 신랑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처녀에게 장가 가는 것은 죽음을 앞에 둔 것이나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신의 말씀같이 먼저 온 신랑들은 사탄의 인물만 취해서 왔기 때문에 마귀의 해를 받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도비아느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마귀의 해를 면하지 않았습니까. 이 자리에 계시는 신랑 신부도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을 당신 모상대로 내셨고 당신의 창조사업의 연장을 부부들에게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 그렇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은 즉 부부는 한 몸이요 죽도록 서로 갈라지지 못하는 것이요, 헤어지는 날은 죽는 날입니다. 이렇게 긴밀하게 죽기까지 맺어주신 부부의 계약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성서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성교회를 당신 정배라 하셨습니다. 정배는 즉 부부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당신 생명을 희생하시기까지 하신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부부의 사랑을 들어 말씀하셨으니 부부의 사랑이야말로 가히 표현하기 어렵겠습니다. 그렇게도 긴밀하게 사랑으로 감싸 맺어주는 부부의 사랑도 세상은 헌신짝처럼 벗어 던지는 바람도 있고 의복 갈아입듯 예사로 벗고 입는 심리며 하느님의 의도를 거스리는 벌이 무섭지 않는지.

 부부의 의도는 자식을 낳아 좋은 사람되게 하는데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식을 낳고 못낳는 데는 부부의 힘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전능에 매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식을 주시면 감사히 받아서 기를 것이요, 안주시더라도 또한 하느님의 뜻을 순종하여 착히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낳아 천하에 채우기를 힘씀은 착한 부부의 힘씀이라 합니다.

 세상은 부부생활인 가정에서부터 사회로 옮아가고 사회는 국가로 옮아갑니다. 국가와 사회의 기초는 가정입니다. 이렇게 국가와 사회의 기초인 가정은 부부의 단합과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요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불목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싸우지도 않습니다. 항상 평화롭고 우애있고 서로 도와서 삽시다.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병들 때든지 슬픈 때든지 서로서로 위로하며 도와 살아갑니다. 아내는 가장의 중심이 되고 가장은 아내의 머리가 되어 화목하게 살아 갈 때에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히 내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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