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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4월 12일 (토) 10:35
분 류 부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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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부활 제 5주일 강론 모음 ”
 

부활 제 5주일

        10. 강길웅 신부(나)/21

        11. 김영남 신부(나)/23           12. 민병섭 신부(나)/21

        13. 신은근 신부(나)/28           14. 정성만 신부(나)/21

        15. 권완성 신부(나)/30           16. 최영철 신부(나)/31

        17. 김성진 신부(나)/32           18. 조순창 신부(나)/33

        19. 교구주보(나)/35                       20. 노순자 소설가(나)/36

        21. 나는 포도나무요(나)/37              22. 그리스도 신비체(나)/39

        23. 참된 교회의 모습(나)/41    



10                     부활 제5주일 (나해)   소원 성취의 길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9,26~31 (바르나바는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뵈온 일을 사도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제2독서 Ⅰ요한 3,18~24 (믿고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복 음 요한 15,1~8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포도나무는 올리브, 무화과나무와 더불어 팔레스타인 지방에 주로 자생하는 나무입니다. 성서에 보면 그래서 포도나무에 대한 비유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즉 이스라엘은 포도밭이요 하느님은 포도밭 주인으로 등장이 됩니다 (예레 2,21. 이사 5,1. 호세 10,1. 에제 15,1~8 등).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꿈과 소망이 담긴 선택받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는 부실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정성을 들여 가꾸셨지만 기대했던 포도 열매는 맺지 못했습니다. 이파리만 무성했지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수백 년 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지만 헛수고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하느님을 배반했고 그들을 충고했던 예언자들을 오히려 박해하고 배척했 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느님의 포도나무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 자신이 당신이야말로 새로운 포도나무라는 사실을 선언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그러시면서 덧붙이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의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며 하느님의 꿈과 미래가 담긴 백성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요한 15,4).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무도 고마운 말씀이고 너무도 각별한 애정의 말씀이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면 우리가 당신과 늘 함께 있기를 원하셨겠습니까? 우리는 그래서 그분의 사랑을 알고 그분과 함께 사는 길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분과 함께 있어야 된다고 해서 십자가 고상을 몸에 걸고 다니라는 것이 아니며 상본이나 묵주를 옷에 지니고 다니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결혼한 어떤 신혼 부부가 있습니다. 결혼은 몸과 마음의 결합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신랑, 신부가 하루 종일 방에만 붙어 있어야 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남자는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하고 여 자는 집안에서 살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며 더더구나 갈려진 사이는 아닙니다. 거리와 시간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그들은 늘 일치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일치를 이루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최고의 비결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안되는 것이 없이 소원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는 그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양심이 떳떳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구하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다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7). 이처럼 소원 성취의 길이 하느님의 계명에 있으며 만사형통의 길이 주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되는 것이 없는데 우리가 계명을 지켜 주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되면 정말 걱정할 것이 없고 부러울 것이 없게 됩니다. 그것은 돈이나 권력이나 세속적인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수녀님과 함께 멧돼지고기를 파는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한 일이 있는데 그때 종업원으로 일했던 어떤 아줌마가 아주 인상적으로 친절했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듯했지만 당당했으며 궂은 일을 하면서도 항시 생글생글 웃음을 띠면서 손님들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참 좋은 분을 만나게 되었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때 자매가 그랬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나게 해 주셨어요." 우리는 그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믿느냐고 물으니까 자기는 개신교 신자라고 하면서 가정이 어려워 30리 길을 버스를 타고 그곳 음식점에 와서 하루종일 일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어려우시겠다고 위로의 말씀을 드리자 그녀가 그랬습니다. “주님이 다 채워 주셔서 부족한 것은 없어요." 그 말에 우리는 또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주님과 함께 있다면 무엇이 걱정이고 아무리 일이 많아도 주님이 거기 계신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 일 자체가 복이고 은혜이며 천국이고 행복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신다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꿈과 소망이 담긴 위대한 백성들입니다. 하느님은 특히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포도는 돈이나 지식이나 명예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떳떳한 양심,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포도의 열매를 영그는 일이요 또한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길입니다.











11           부활제5주일 요한 15,1-8:(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김영남 신부



아름다운 5월, 성모성월인 요즈음 나는 생명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느낀다.

내 방은 5층 꼭대기에 있다. 남동쪽 작은 창문에 다가서면 숲이 생명력으로 출렁거림을 느끼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신학원에서 이쪽 방향의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은 상록수가 거의 없는 숲이다. 그래서 겨울 동안에는 앙상하게 가지들만 있었다.

그런데, 봄이 되어 연두색의 작은 잎이 하나 둘 나오는 듯 하더니, 어느덧 요즈음은 그 곳이 햇볕도 잘 들어오지 못할 만큼 울창한 숲이 되어 있다.

 작지만 ‘검은 숲’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더구나 심하게 가물다가 비도 몇 번 흠뻑 내리더니, 그 생명력이 더욱 왕성해 보인다. 저 깊은 뿌리에서부터 저 꼭대기의 잎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쉴새없이 왕성하게 오르내리는 수액의 움직임이 보이고 들리는 듯 하다.



이러한 생명의 계절에, 부활제5주일을 맞아 듣게되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관한 오늘 주일 복음의 말씀은 더욱 실감이 간다.

오늘 복음말씀은 요한 복음서 안에서 예수께서 수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는 자리에서 그들 제자들에게 하신 일련의 고별-말씀들 중의 하나로서, 떠나가시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을 신신당부하는 어조를 띠고 있다.

그 요점은 “내 안에 머물라!”는 요청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오늘 복음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주님 안에 머무는 삶”이야말로 의미충만한 삶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오늘 복음 말씀 안에는 “머물다”라는 동사가 짧은 글 안에 여러 번 사용되어 있다(공동번역에는 ‘떠나지 않다’라고 의역되어 있음).

요한 복음서 안에서 이 “머뭄”의 주제는 중요하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머물라’라는 요청은 요한 복음서의 앞 부분에서 이미 나왔던 일련의 “머물라”라는 요청의 정점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이미 첫 제자들을 부르는 대목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던 두 제자에게 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와서 보시오”(1,39; 참조 1,46; 4,29)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갈릴래아에서 한 때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크게 실망하여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하는 베드로의 대답 곧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6,68)는 말씀도 “내 안에 머물라.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과 맥을 같이한다.



이처럼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접촉’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포도가지가 포도나무[줄기]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처럼’, 지속성[인내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교류가 이루어지는 ‘만남’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머뭄’은 ‘정체나 안주의 머뭄’이 아니라, 포도나무와 가지들 사이에 수액이 쉴새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지속적인 주님과의 사랑의 교류(친교)가 있는 머뭄이다(“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9절]).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은 이러 저러한 일을 많이 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일들이 ‘주님과의 일치의 삶’에서 맺어지는 열매가 되도록 하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병고나 사고 또는 노약함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분들이 주님과 일치하여 충직하게 살아감으로써, 건강하여 바쁘게 지내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공동체를 위하여 오히려 훨씬 더 풍요로운 ‘열매’를 맺어 주는 예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다음 말씀처럼 말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5절).

다음 말씀도 새겨 두어야 할 말씀 중의 하나이다: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영적으로 풍요로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한다.

주님의 말씀은 마치 그 안에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씨앗과 같아서, 우리가 그것을 마음 안에 품고 있으면 언젠가 싹이 트고 자라나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준다.



그런데 우리 각자의 마음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리 공동체의 모습은 어떠한가? “사랑, 기쁨, 평화” 등의 영적 열매(참조: 갈라 5,22)가 주렁주렁 열릴 수 있도록 싱싱하게 자라는 나무가지의 모습인가? 

아니면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하고는 있지만, 내적인 평화는 전혀 없이, 바짝 메말라 비틀어져 있는 나무가지들의 모습인가?

일을 많이 한다는 미명하에 마음들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 가시덤불이 뒤엉켜 있는 듯한 모습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혹시라도 우리의 삶이 그렇게 메마른 삶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 그러한 때일수록 “사랑의 주님과 일치하는 것”만이 의미있는 삶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용기를 내어 주님께 다가가자











12      부활 제5주일  <요한 15,1-8>   (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라

민병섭 신부



    오늘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대한 비유는 예수님의 두 번째 고별사(요한 15--16장)의 시작 부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두 번째 고별사의 주제는 첫 번째 고별사(13,31--14,31)와 비슷하지만 강조점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곧 첫 번째 고별사에는 주로 공동체와 예수님의 새로운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부활 이전 공동체와 이후 공동체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 특성을 규명하고 있는데, 두 번째 고별사는 공동체 자체가 좀더 본질적인 존재로 부각되고 있으며 교회론적인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두 번째 고별사는 바로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라는 상징적인 문구로 시작하고 있으며, 이 곳에서 복음서의 저자는 공동체의 기초와 삶에 주안점을 두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사실, 구약성서에서 포도밭의 비유는 사랑의 표지와 동시에 불충실의 표지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또한 자비의 계약인 동시에 단죄의 심판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은 이사야의 유명한 포도원의 노래(5,1-7)나 예레미야의 "특종 포도나무를 진종으로 골라 심었는데 너는 품질이 나쁜 잡종으로 변하였구나."(2,21)라는 탄식의 음성으로써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에제키엘도 이스라엘을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로 묘사하면서 돌아올 징벌을 예고하였다(15,1-6). 곧 마른 포도나무 가지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서 땔감으로 불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라는 나는 ...... 이다."라는 그리스도론적 자기 계시의 정식을 통하여 복음서의 저자는 포도밭의 상징으로 표현된 사랑과 충실성의 완전한 충만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던 결실을 이루신다.



  이 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선언하신다. 이 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형용사 '참'이란 말은 하느님의 계시자이시며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의 특성을 규정하려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들만이 포도나무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서의 포도나무'로 자신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전개 과정 없이 대두되고 있는 가지들"(2절)이란 말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참 포도나무의 개념에 이미 가지 개념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나 유다교 사고에서도 포도나무에 대한 질문을 할 때 반드시 '열매를 맺는' 가지에 대해 언급이 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 혼자서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가지들'이라고 불리는 다른 모든 사람이 당신의 생명을 살도록 그들을 당신에게 결합시키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로써 예수님께서 왜 당신을 '포도밭'으로 비유하시는 대신 '포도나무'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전승이 보여 주듯이 두 개념은 서로 바꾸어 쓸 수 있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단일한 위격을 통한 집합적 상징(포도밭)의 구체적인 실현을 표현한다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포도 가지)이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됨을 표현하기에는 '포도나무'라는 개념이 더 적절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포도 가지들의 공동체적 운명은 예수님과의 공동체적 결속과 관련을 갖게 된다.



  그분과의 결속만이 약속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며, 그분에게서 떠나면 결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을 떠난 채 살고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치 잘려 시들어 버린 가지가 불에 태워져 버리는 것처럼, 누구든지 쫓겨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예수님 안에 머물며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들여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 줄 수 있을 만큼 개화되어야 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결실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곧 말과 머리로써만이 아니라 진정한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 머물며 열매를 맺는 것, 곧 예수님과 일치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느님의 더욱더 큰 영광, 그리고 모든 이들의 참된 삶을 위한 것이다.



제1독서/사도 9,26-31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회개한 지 3년이 지난 후(갈라 1,18-24 참조) 예루살렘 공동체에 끼여 보려고 했을 때 당하는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모습을 드러낸 바오로 사도는 양쪽의 위험을 당하고 있다. 한 쪽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이다. 바오로는 그 동안 매우 열정적으로 그들을 파괴하려 했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오로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은 유다인들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반자며 변절자로 여기고 있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완전히 자각하고 행동했다. 하느님의 부름이 여전히 그의 귓전에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소명의 긴박성에 대한 인식에도 그는 교회 공동체에 대한 순명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교회의 부정할 수 없는 요구와 심오한 의미를 깨달았고 교회의 권위에 순명하였다.



  비록 바오로 사도는 3년 동안 애써 온 봉사 안에서 이제 그는 단순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가 아니라 위임받은 주님의 대사로서 활동하면서도 말이다. 이러한 사도의 행동에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순종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특은은 교회 밖에서나 교회를 거슬러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교회를 통하여 활동하고 계시다. 주님의 무한한 은총을 입은 바오로 사도도 교회의 공적인 인정을 받기를 원하였고 또 받았다면 우리는 과연 교회와 어떠한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독서에서 교회 공동체 생활에 대해서도 바라볼 수 있다.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그 수효가 차츰 늘어났다(31절)고 말하고 있다. 이 곳에서 늘어났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곧 교회 공동체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성령의 격려'로써 이루어지고 발전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같은 목적을 위해 다양성 안에서도 단일성을 추구하는 조화 있는 성장의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측면에서 좋은 뜻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성실성과 변화시키고 강화시키는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제2독서/1요한 3,18-24



    예수님께서 지상에 살면서 행하신 모든 것은 목숨을 내어 주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순명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도 역시 형제들을 사랑하는 계명이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형제애는 형제들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며, 이는 우리 자신의 의지를 없애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 스스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러한 사랑에는 십자가의 능력과 지식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독서의 서두에 나타나고 있듯이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과 진실로써 상호 신뢰와 참된 사랑을 갖게 될 때만이 우리는 주님의 가지에 붙은 참된 포도나무의 가지로 머무를 수가 있다.

    

  그러하기 위해서 요한이 말한 대로 하느님과의 친교, 더 나아가서 우리가 죄인임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친교를 맺고 계시다는 확고한 믿음이 필요하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크신 분이시다. 그러하기에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양심의 가책 또는 양심의 고발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믿음이며 확신이다.

    

  이어 요한 사도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하나의 유일한 계명을 형성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의무와 사랑해야 할 의무는 한 계명의 두 가지 측면일 뿐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신앙은, 그러한 믿음에서 나오는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을 땐 거짓된 믿음이 되는 것이다.











13             부활 제5주일 (요한 15.1-8) (나)   포도나무의 비유

신은근 신부



내가 포도나무라면 너희는 가지다.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힘이 있고 열매를 맺지만 나무를 떠난 가지는 말라버린다.

비유의 핵심은 이 말씀에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포도나무인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인가.



세상이 불안하면 사람들은 내세에 관심을 가진다. 사는 것이 허무하면 사람들은 신비스런 것을 찾게 된다. 고사를 지내고 부적을 지니며 굿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불안과 허무가 지워질까. 어떤 이는 묘를 잘 쓰면 재앙이 사라진다면서 멀쩡한 묘를 옮기기도 한다. 터가 좋으면 복이 오고 터가 나쁘면 화가 미친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간의 미래는 하느님의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주님 안에 있다.

평범한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불안을 극복하는 첫 걸음이다.

모든 나무는 뿌리에서 오는 생명의 힘을 받아야 자란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력을 받기에 건재하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는 운이나 재수에 매달리고 있다면 불안은 당연한 것이다.

인생의 뿌리는 주님이심을 거듭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된다.



그래도 세상은 불안하다. 갑작스레 멀쩡하던 사람이 죽음 저쪽으로 가고 어제의 권력가와 재산가들이 힘없이 몰락함을 본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고통이다.

믿음이 없는 이들에겐 절망과 무서움이다. 우리는 어떤가. 인정하며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포도나무의 살아있는 가지가 된다.

그리고 살아있는 가지라면 상처를 입더라도 뿌리의 힘을 받아 생기를 되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의 증인들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빠르게 바뀌고 있다. 얼마나 많은 정보들이 쏟아지고 있는가. 그러나 뉴스의 태반은 우리가 몰라도 되는 소식들이다.

삶의 활력은커녕 생기를 빼앗아 가는 뉴스들이 더 많다.

앞으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사람들은 어디서 안정을 취하며 힘을 얻을 것인가.



세상은 아무리 발달해도 포도나무가 될 수 없다. 영적 힘을 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곳에서 삶의 영양분을 찾으려 한다. 모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니다. 이것을 고백해야 저 세상의 힘을 만날 수 있다.

 언젠가는 두고 갈 것들임을 깨달아야 종말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하느님을 향한 기대와 희망으로 끊임없이 바꾸려는 노력이 포도나무를 떠나지 않는 마지막 행동일 것이다.



잘려나간 가지는 뿌리가 전해주는 양분을 흡수하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의 생활이 뿌리를 떠나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신앙생활이 기쁨보다는 멍에와 구속으로 느껴진다면 포도나무의 뿌리에서 떠나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예수님과 함께 해야만 인생은 즐거움으로 바뀔 수 있다.











14                     부활  제5주일 (나)  주께서 함께...

정성만 신부



주님, 감사드립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앞으로도 함께 계실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평온한 심경으로 함께 모인 이 곳에, 바람과 태풍 그리고 우리를 어지럽히는 모든 사물에서 단절된 오늘, 주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기도중에, 찬미중에

우리와 함께 계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서로 붙들어 줄 때에,

단순히 침묵으로나 분별있는 봉사나

서로 조심을 다함으로써

상부상조 할 때에 주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내일도 모레도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계실 것에 감사드립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계실 것입니다.

주여, 이 확신을 받아들이게 해주십시오.

이 확신이 우리의 두려움을 온전히 가시게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속마음을 바꾸게 해 주십시오.

주여, 하느님 아버지시여, 감사드립니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성령은 우리 마음에 이 확신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이 확신은 세세에

영원히 불변할 것입니다.

아멘.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며, 협조자 성령을 그들에게 약속하신다.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의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일깨워준다. 이 영이 우리 안에서 하는 말을 듣고, 순종할 때, 우리는 평화를 느낀다. 이 평화는 심오한 내적 만족이며, 우리가 하느님 곁에 다가가고 우리 안에 그 분이 계실 때 느끼는



 충만한 기쁨이다.

ꡒ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기어이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ꡓ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약속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15                         부활  제5주일  (나) 두 갈래의 길

권완성 신부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책에 보면 ꡐ두 갈래길ꡑ이라는 시가 있었다. 한 길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요, 넓어서 가기가 쉽다. 그러나 목적지가 선명치 않다. 또 다른 길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이요. 소수의 발자국이 있는 생명의 길이다. 저자는 이 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걷지 않는 생명의 길을 동경하며 표현하였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ꡒ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ꡓ고 말씀하신다. 신앙인에게도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누구나 가는 평범한 길이요, 또 하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생명, 진리의 길이다. 많은 신앙인은 욕심이 많아서인지 한 길을 선택하지 못하고 이 두 길을 다 가고자 한다. 한편으론 세상이 주는 부, 명예, 권력등을 다 얻으려 하고, 또 한편으론 신앙이 주는 행복, 진리를 얻고자 한다.



구약에서 예언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들은 소리를 높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섬기면서도 세상의 풍요를 주는 또 다른 신, 바알을 섬기는 태도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우리도 이 비판의 소리를 겸허히 받아 드려야 한다. 하느님을 따르는 길, 성가정을 이루는 길, 깨끗하게 사는 길은 분명 힘든 길이요, 생명의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길을 가야 한다.



ꡒ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길이 험해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ꡓ(마태 5, 13-14). 옳는 길을 가자. 내 자신을 조금 낮추고 나의 사랑하는 자녀, 배우자, 부모, 나의 사랑하는 이웃등에게 생명을 비추는 작은 촛불이 되는 길을 가자. 이것이 내가 사는 의미가 아닐까.











16            부활 제5주일   <요한 15,1-8> (나) 나는 참 포도나무

최영철 신부



오늘 복음의 전체적인 내용을 현실적인 안목으로 볼 때한 인간의 삶의 변화가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 공동체적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제1독서(사도9,26-31)에서 변화된 사도바오로의 모습을 전하고 있고, 제2독서 (I요한 3,18-24)에서는 실천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삶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안간과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그 가지로 비유한다(요한 15, 1-8). 즉 변화된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그것이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된 삶일 때라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삶의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린 후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한 인간의 참다운 삶을 위한 가치관의 변화는 그 한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를 위한 구원적 가치임을 볼 수 있다.



사실상 사도 바오로의 변화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위해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분은 먹고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면서, 예수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다시 말해서 변화된 사도 바오로는 보통 사람들처럼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와 같은 사람에 불과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을 통해서 구원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고, 그것은 실천적 삶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적 삶의 모습이 현대적 가치관에서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어떤 면에서는 아름다운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전설적 이야기로 전락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도 실리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현실적 가치관으로서는 바보스럽고 부질없는 일일 수도 있겠다는 말이다. 그러한 실천적 삶이 주는 현실적 이익이 무엇인가 하는 계산이 앞서는 우리의 삶의 각박함이, 오늘 복음의 말씀을 우리와는 무관한 것으로 떨쳐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가치관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라는 자신의 삶의 내용, 즉 삶의 철학을 갖고있지 못하는 한 그는 끊임없는 허무와 고달픔에서 허우적거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현대적 문명과 여가선용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일시적인 안락에 불과할 것이다.



나의 의식변화를 통해, 오늘 복음 말씀에서 전하는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인간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 생명의 뿌리, 삶의 원천은 하느님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사실상 우리의 생명은 신비이다. 따라서 그 신비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 그 신비는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에서 그것을 제시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의 실천적 삶은 그 분만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분은 그분의 성격과 상황에 맞게 변화된 삶을 산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의 성격과 상황에 맞게 변화될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음에서 제시하는 실천적 삶인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복음적 변화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을 수 있다는 관념이다. 따라서 나는 그런 사람일 수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그런 사람이 나일 수밖에 없다는 의식의 변화가 오늘 복음의 핵심적 메시아라면 나의 이러한 의식변화와 함께 ‘주님 나는 당신의 가지로소이다' 라는 기도 한마디부터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나의 변화뿐만 아니라 그런 나를 통해서 공동체를 변화시킬 것이다.











17               부활 제5주일 요한 15,1-8 (나) 포도나무의 비유

김성진 신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통로이다. 신적 생명으로 충만한 신앙인은 훌륭한 결실을 맺어야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포도원의 농부이시고, 당신은 포도나무이시면 신앙인은 포도나무 가지라고 하십니다.“나는 참 포도나무이다”(요한 15,1)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하시는 당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참되신 분이십니다. 곧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적인 생명을 신앙인에게 나누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포도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뿌리에서 흡수한 양분을 각 가지에 전달하듯이 예수님은 신앙인에게 하느님 생명의 전달과 역할을 하시고 계십니다. 신앙인은 곧 영원하고 충만한 신적 생명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앙인은 포도나무 가지입니다. 포도나무가 훌륭한 결실을 맺으려고 농부의 손길이 닿아야 합니다.



농부는 2-3월경에 불필요한 가지를 사정없이 잘라 버립니다. 그리고 8월경에는 곁가지를 잘라 줍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포도원의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도 같은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통하지 않는 포도나무 가지, 즉 이웃사랑과 신앙인으로서의  임무에 충실치 못하는 가지를 잘라 버리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이 통하여 이웃사랑과 복음선포에 전념하는 충실한 신앙인은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배려하십니다.



그러기에 일단 예수님과 생명의 유대를 맺은 신앙인은 계속해서 예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론 결실도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가지는 밖에 버려질 것입니다(요한 15,6). 곧 예수님을 저버린 사람은 참혹한 운명에 부딪치게 됨을 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열매는 포도나무가 공급하는 양분으로써만 맺어 집니다. 양분을 공급하시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6-7) 무엇이든지 청하면 들어주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다만 예수님과 생명의 유대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때에만 청을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에게 받은 생명으로 이웃사랑에 헌신하여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될 때에 들어주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를 간청할 때 바라는 소망이 성취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욕망인 물욕이나 명예욕 따위를 채워 주시는 분이 아님을 명백하게 보여 주십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포도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머루나 들 포도의 열매를 맺는다면 그 가지는 쓸모 없는 가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신적 생명을 공급받고 있는 우리는 그에 맞는 결실을 거두어야만 할 것입니다.











18         부활 제 5주일 요한 15,1-8 (나)신앙의 열매 얼마나 맺었는가?

조순창 신부



1964년 5월 7일에 설립된 우리 불광동 본당의 역사 열 여덟 해를 지내는 오늘입니다. 교회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여 주신 역대 신부님과 수녀님, 본당 회장님과 사목위원, 각 구역장님과 단체, 그리고 교우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하느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성전 건립의 해’인 금년에는 성전 신축에 모든 정성을 바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의 바자회에 많은 교우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500만 원의 기금을 마련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오늘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십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조리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십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구약에서의 포도나무는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켰고, 포도원은 평화로운 전원 생활을 일러 왔습니다.



오늘 복음의 포도나무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믿음과 세례와 성체로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의 교회로서의 포도나무가지의 열매는 개인으로 활기찬 산 믿음의 생활을 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 하나입니다. 우리 본당을 거룩한 본당 공동체를 이루고, 믿음과 희망의 본당 공동체를 이루고, 예배하는 본당 공동체를 이루고, 사랑과 친교의 본당 공동체를 이루고, 선교하는 본당 공동체를 이루어 갈 때에, 공동체로서의 송이 송이가 결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이로되 신자로서의 생활과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나, 본당이로되 본당으로서의  기능울 다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로서 존재 가치가 없는 상태이고, 있어도 행함이 없는 상태이며, 외형은 커지고 나뭇잎이 무성해도 열매가 없듯이, 내실이 없으면 소용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 잘 가꾸어진 가지로서, 신앙의 공동체로서,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는 데의 기본은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여야 하듯이, 주님 안에 모으는 믿음이어야 참 믿음입니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믿음을 버리고는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어도 봉사와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또 영세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해도 신앙의 공부가 없으면, 하늘에 재물을 쌓는 선공이 없으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1장을 보면, 예수께서 성안으로 들어오시다가 길가의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잎사귀뿐이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벌을 주시니 곧 말라 버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믿으시고 세례 받으신 후에, 기도와 주일이나 평일 미사와 성사와 성경 공부에 바친 시간이 얼마나 되십니까? 이웃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로 인도한 분은 몇 명이나 됩니까? 구역 모임이나 단체 활동에 기쁘게 참여하고, 이웃의 환난 자를 돌본 일은 몇 번 있으십니까? 교무금과 주일 헌금과 성전 건립 기금을 수입의 몇 분의 일로 얼마만큼 성의 있게 하였으며, 얼마나 봉헌하였습니까?

주님 안에 머물며 드린 기도와 전례 공부와 활동, 희생과 봉헌, 형제애와 자선은 바로 신앙의 열매입니다.

20년 가까운 우리 본당의 역사에서 금년에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새 성전을 지어서 주님께 헌당하여 드리면, 이제까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주님께 드리는 가장 값지고 훌륭한 열매가 될 것입니다.











19         부활 제5주일 <요한 15,1-8>(나) 나는 포도나무요, 그대들은 가지

서울대교구 홍보실



1.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포도나무 가지들에 관한 비유를 통한 예수님의 상징적인 설교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십니다”라고 하시면서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않으면서 붙어 있는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깨끗이 손질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해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이미 깨끗해졌기 때문에 하느님(농부)께서 깨끗이 손질하실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자신들이 열매를 맺지 못해 혹시나 잘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위로입니다. 제자들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은,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가지, 곧 예수님 안에 머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저버린 사람은 단죄받는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에서도 추수 때 가라지를 뽑아 불에 태워 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인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머물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때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의 청을 들어주시고, 많은 열매를 맺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면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비유와 우화의 경계에 걸쳐있는 말씀입니다. 비유로 본다면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예수님께 꼭 붙어있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밖에 나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과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농부와 포도나무 그리고 가지에 견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화로 본다면 그리스도인은 참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생명력을 얻고 그 생명력을 열매들에 나누어주어 풍성한 열매를 맺어 참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느님께서 가차없이 그 가지를 잘라내어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예수님의 말씀을 익히고 지켜서 지옥불에 던져지는 불행을 겪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의 관계, 예수님 말씀의 기능, 전도의 중요성, 하느님의 심판 등의 다양한 의미를 상징들을 통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비유로 보든 우화로 보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익히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예수님 말씀 배우고 예수님 삶을 본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20           부활 제5주일 <요한 15,1-8>(나)     자빠져도 깨지는 코

노순자 젬마/소설가



얼마 전 동료에게서 아무 말 말고 사이버소설 심사를 맡으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시간도 안되고 사이버 소설이란 게 생소했으나 그런 사정 다 안다는 데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어 사이버 소설 심사운운의 전화가 왔기에 원고를 프린터로 뽑아 보내 달랬는데 다시 전화가 와서 여전히 사이버소설 운운입니다. 이미 원고를 받았다니까 아니라고 지금 원고를 택배로 보내려는 중이랍니다. 먼저 받은 전화는 다른 곳이었던 것입니다.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아니 이건 확인하지 않은 경솔함 때문에 자빠지면서 코가 깨진 거로구나 싶어 얼결에 두 곳의 심사를 동시에 떠 안았습니다. 시간만 허락되면 작품을 읽는 작업은 거절할 이유가 없겠는데 시간이 빠듯하니 읽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심에 오른 단편 세 편만 읽으면 된다던 원고는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박스에 담겨 택배로 왔습니다.

알고 보니 사이버 소설은 단편이 2백자 원고지 1천2백 장 정도, 단행본 한 권 분량이고 장편은 3천6백 장 이상, 즉 단행본 3권 이상의 분량이랍니다. 세상에 단편과 장편의 분량도 모르면서 어떻게 심사를 하는고 싶어 한숨이 나왔습니다. 잠자고 일하는 것으로 매일 매일이 빠듯한 와중에 두 곳의 응모작, 줄잡아 4천 5백 장 정도를 읽으려니 눈앞이 노랬습니다.



다른 곳의 소설은 인터넷에 올릴 작품이기는 해도 정통 단편 소설이어서 한편의 분량이 8십 장에서 백 장 정도로 7편이고 읽기에도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판타지 소설은 그 분량만 큼이나 내용도 웅장해서 대체 내가 이걸 심사할 자격이 있는 건가 그러며 버스 안에서도 읽 고 전철 안에서도 읽고 목욕탕에서도 비닐에 싸서 읽으며 촉박한 시일 안에 심사평을 넘기 느라 나중엔 잠자는 시간을 희생할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눈과 머리 속이 아득해진 이 일은 생활을 곰곰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글장이 노동자라 불렀던 것이 교만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과연 땀흘리며 사는 것만이 최선이었을까? 방송이건 인쇄매체건 가림 없이 일 중독에 가까울 만큼 잡글쓰기로 혹사해온 삶이 사랑 아닌 학대는 아니었을까?



가지가지 빛깔과 자태로 생명을 찬미하는 예쁘고 향기로운 꽃들은 일은 알맞게, 사랑으로 하는 것이라고 속삭이는 듯 합니다. 그 속삭임은 연한 오월 식물에 어려있는 성모님의 마음인 듯 느껴집니다. 

자빠져도 깨지는 코는 자빠지면서도 코를 다치게끔 잘못된 자세로 살아온 책임임을 이 찬란한 부활시기에 무릎꿇으며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1         부활 제5주일 <요한 15,1-8> (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름다운 5월, 성모성월인 요즈음 나는 생명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느낀다.

내 방은 5층 꼭대기에 있다. 남동쪽 작은 창문에 다가서면 숲이 생명력으로 출렁거림을 느끼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신학원에서 이쪽 방향의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은 상록수가 거의 없는 숲이다. 그래서 겨울 동안에는 앙상하게 가지들만 있었다. 그런데, 봄이 되어 연두색의 작은 잎이 하나 둘 나오는 듯 하더니, 어느덧 요즈음은 그 곳이 햇볕도 잘 들어오지 못할 만큼 울창한 숲이 되어 있다. 작지만「검은 숲」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더구나 심하게 가물다가 비도 몇 번 흠뻑 내리더니, 그 생명력이 더욱 왕성해 보인다. 저 깊은 뿌리에서부터 저 꼭대기의 잎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쉴새없이 왕성하게 오르내리는 수액의 움직임이 보이고 들리는 듯 하다.

  

이러한 생명의 계절에, 부활 제5주일을 맞아 듣게되는「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관한 오늘 주일 복음의 말씀은 더욱 실감이 간다. 오늘 복음말씀은 요한 복음서 안에서, 예수께서 수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는 자리에서, 그들 제자들에게 하신 일련의 고별-말씀들 중의 하나로서, 떠나가시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을 신신당부하는 어조를 띠고 있다.



그 요점은 “내 안에 머물라!”는 요청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오늘 복음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주님 안에 머무는 삶」이야말로 의미 충만한 삶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오늘 복음 말씀 안에는「머물다」라는 동사가, 짧은 글 안에 여러 번 사용되어 있다(공동번역에는「떠나지 않다」라고 의역되어 있음). 요한 복음서 안에서 이 “머뭄”의 주제는 중요하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머물라”라는 요청은 요한 복음서의 앞 부분에서 이미 나왔던 일련의 “머물라”라는 요청의 정점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이미 첫 제자들을 부르는 대목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던 두 제자에게 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와서 보시오”(1,39. 1,46. 4,29)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갈릴래아에서 한때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크게 실망하여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하는 베드로의 대답 곧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6,68)는 말씀도 「내 안에 머물라.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과 맥을 같이한다.

 이처럼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접촉」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포도가지가 포도나무(줄기)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처럼, 지속성(인내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교류가 이루어지는 「만남」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머뭄」은「정체나 안주의 머뭄」이 아니라, 포도나무와 가지들 사이에 수액이 쉴새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지속적인 주님과의 사랑의 교류(친교)가 있는 머뭄이다.(「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9절).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은, 이러 저러한 일을 많이 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일들이「주님과의 일치의 삶」에서 맺어지는 열매가 되도록 하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병고나 사고 또는 노약함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분들이 주님과 일치하여 충직하게 살아감으로써, 건강하여 바쁘게 지내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공동체를 위하여 오히려 훨씬 더 풍요로운「열매」를 맺어 주는 예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다음 말씀처럼 말이다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5절)

  

다음 말씀도 새겨두어야 할 말씀 중의 하나이다 :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영적으로 풍요로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한다. 주님의 말씀은 마치 그 안에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씨앗과 같아서, 우리가 그것을 마음 안에 품고 있으면 언젠가 싹이 트고 자라나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준다.

  

그런데 우리 각자의 마음,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있는 우리 공동체의 모습은 어떠한가?「사랑, 기쁨, 평화」등의 영적 열매(참조 : 갈라 5,22)가 주렁주렁 열릴 수 있도록 싱싱하게 자라는 나무가지의 모습인가? 아니면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하고는 있진만, 내적인 평화는 전혀 없이 바짝 메말라 비틀어져 있는 나무가지들의 모습인가? 일을 많이 한다는 미명하에, 마음들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 가시덤불이 뒤엉켜 있는 듯한 모습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혹시라도 우리의 삶이 그렇게 메마른 삶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 그러한 때일수록 「사랑의 주님과 일치하는 것」만이 의미 있는 삶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용기를 내어 주님께 다가가자











22       부활 제5주일 요한 15,1-8 (나) 사회를 그리스도 신비체로서 이룩하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신 후 아담과 이브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온 땅을 정복하여라”(창세기 1,28)



이 말씀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대로 창조된 인류의 대가족을 꿈꾸셨고 인류의 일치를 원하시는 창조 사업을 완성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원죄가 이 일치의 꿈을 깨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 노아의 자손들 역시 하늘에 오를 수 있다는 오만과 욕심으로 바벨탑을 쌓기 시작하였으나 곧 하느님께서 크게 노하시어 그 사람들 사이에 각각 다른 방언을 쓰게 하시어 결국 그들은 더욱 분열을 일으키게 되고 말았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우리는 분열하는 불행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인류는 벌써 한 가정 한 정신이 아니고 많은 가족 많은 백성들과 많은 종족들이 서로 대항하게 되었고 평화를 이룩하기는커녕 서로 분열하고 서로 싸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느님의 꿈은 아직도 인간 마음속에 기록되어 남아 있습니다. 모든 시대에 걸쳐 있었던 형제적 불화에 대하여 피곤을 느낀 인간은 국가를 초월하여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공동체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이 꿈은 오늘도 사라지지 않고 인류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는 또 갑자기 「새 바벨탑」의 꿈을 안고 하늘 높이 건설하겠다는 기세를 보이다가 또 다시 혼란과 불화를 안고 헛된 꿈이 되어버리곤 하고 있습니다.



일치와 진리와 형제애에의 장애물은 바로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선 형제끼리 논쟁으로, 사회에선 정파간의 싸움으로, 국제사회에서는 국가적 이기주의로 인한 국제분쟁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장애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이 세상 모든 분열의 상징이었던 희랍인과 이방인을 화목하게 하시었음을 에페소서 2장 11절-1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승천하신 후에도 그리스도는 당신 교회 안에 계속 살아 계십니다. 세상 마칠 때가지 교회는 「마치 나의 배필인 그리스도와 하나인 것처럼 너희도 하나가 되어라」고 외치십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께서도 그리스도 신비체를 강조하여 말하기를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1고린 12,12)라고 하시었습니다. 성직자에 속하거나 평신도에 속하거나 그들이 모두 포도 넝쿨에 달린 가지와 같이 그리스도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에서 깨닫는 바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깊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



사람이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자기의 정당한 활동을 영위하게 될 때 모든 노동은 신성하고 당신 구원사업이 계속 되며 그 속에서 구속력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과격한 오류가 삼투하고 관통하여 심각한 혼란에 빠져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선을 위한 길이 교회를 향하여 열린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 모든 신자는 합작하는데 용기를 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또 그것을 동경하고 천상적 선을 누리기를 보장하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는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밝히며 불을 붙이며 불꽃이 타오르게 하여 그 따뜻한 소리가 만대에 퍼지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증가하는 궁핍과 현대생활의 박탈과 불안에 대한 효과 있는 적절한 구제책을 항상 제공하도록 하여야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이 일치는 세상 모든 백성에게 미치기에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먼저 크리스천 사이에 분열을 해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은 어디에 일치가 발견되어야 하는지를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이 이 일치의 증거가 되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리된 형제 사이에 그리스도의 더 큰사랑과 복음과의 더 큰 친밀성과 더 열렬하고 더욱 깊은 기도로 가끔 대하여 있는지? 더욱 더 나아가서 복음정신을 거슬리는 모욕을 주지 않고 우리의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는지를 반성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겸손하고 자애롭고 의롭고 정결 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실지에 있어 우리의 생활은 이러한 덕으로 무장되고 있는지? 얼마 전 그리스도 안에 일치를 이룩하기 위한 공의회가 활발하게 열렸던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의 생활이 완전하게 변화를 가져오기 위하여 적어도 더 거룩하게 사는 것, 그리스도 복음의 원칙에 의하여 참으로 일치된 인류의 재건이 우리의 표양으로 인해 이룩되는 것이라면 우리 각자의 생활 개선에서 시작해야만 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 입니다.”(1고린 1,30)



인류의 거룩하신 구원자께서 만대를 통하여 만사에 있어 만민을 다스리시옵고 영광스러이 승리하시옵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또한 인류 사회가 질서를 재건하여 만인의 번영과 평화를 길이 길이 누리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23               부활 제5주일 요한 15,1-8 (나)참된 교회의 모습



우리가 오늘 여기에 모인 것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이다. 예수란 무슨 뜻인가?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이고, 우리를 비쳐주며 우리 모두가 증거자가 되어야 하는 기본적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이룩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죽음이 패배 당하고 새로운 생명을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믿는 구원이 예수에 의해서 실현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 드리기 위해서 우리를 모은다. 또한 성체는 우리를 구세주께 일치시키고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신앙에 충실하도록 우리를 하나로 모은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실현하는데 협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는 하느님께 봉사하고 인간들에게 봉사하는 신자들을 일치시켜 준다. 환언하면 성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불리는 생생하고 개방된 공동체를 만들어 준다. 이와 같은 의향에서 예수는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교회가 참으로 일치되어 있고 모든 이에게 개방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가 일치되어 있다고 솔직하게 답변할 수 있는 때가 바로 성체를 거행하는 이 미사 시간인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참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성체성사의 거행에서 부활의 신비를 거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상으로 하는 하나이고 개방된 이 교회는 인간적 유토피아는 아니다. 우리의 이상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데 따라서 우리 마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령이 드러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생명의 원천으로서 신자들인 우리는 그리스도부터 모든 힘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미사에 모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공동체 안에 폐쇄된 채로 남아 있고, 일치가 되어 있지 않으며, 성체 안에서 생명의 원천으로 모여야겠다는 자각을 해야 하며, 우리 주위의 모든 이에게 이 원천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 책임감을 갖는다.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우리 각자는 교회를 비신자들의 세계에서 볼 수 있게 드러내야 할 책임이 있고, 예수를 증거 할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 무엇을 증거 해야 하는가? 먼저 인간들에게 유일하신 구세주를 알리는 일이며, 그 분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다고 깨우쳐 주는 일이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들이고 우리와 함께 증거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우리 공동체의 형제로 받아들이는 일도 중요하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일은 바로 예수께서 요구한 것이고, 선의의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수께서 원하신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구세주께서 요구하신 대로 충실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어렵기에 교회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사도들 시대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루가 복음사가는 오늘 이것을 우리에게 자각시킨다.



사도행전에서 루가는 초대 교회에서 성령의 작용으로 이룩된 놀라운 결실을 드러낸다. 그분에 대한 곧은 신앙과 깊은 사랑! 가난함과 일치! 이러한 교회의 참모습과 훌륭한 모델 앞에 20세기의 오늘의 교회가 참모습을 닮을 수 있으며, 초대교회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지 자문해 보자. 루가가 쓴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초대 교회의 발전과정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조건 안에서 교회가 발전되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대 교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외적 위험과 반대세력은 언제나 있었고, 유대 공동체는 예수의 제자를 대항하여 과격하게 반대했으며 스테판을 돌로 쳐죽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대한 일이 있었다. 교회 내부에 있어서까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교회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루가는 이것을 감추지 않으면서 신중하게 사실을 이야기한다.



성령의 개입이 없이는 교회가 유대교의 교파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교회는 이교인들에게 개방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일치를 가져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원하신 것은 당신 교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고 아무 차별도 없이, 당신께 대한 산 신앙밖에 다른 조건을 원하지 않으셨다. 교회가 모든 이에게 개방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영광된 부활을 드러내시면서 바울로를 회개시키셨다. 그런데 새로 회개한 바울로 교회는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환영하지 않았다. 바울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하면서 공포와 불안을 교회공동체에 주었다.



바울로의 열렬한 신앙을 보고 두려워했다. 유대인으로서 바울로는 신자들을 박해했고, 신자들은 그의 회개 이후 그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바울로의 회개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는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을 회개시킬 수 없다고 의심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의 신앙의 약함이 드러났고 이교 백성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예수에 의해 선택된 바울로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동조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성령의 인도를 받은 바르나바가 바울로를 믿었고, 사도들의 신임을 받도록 하였다. 그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체험하고 열렬한 신앙으로 증거 한 바울로를 그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현대 교회에 있어서도 이러한 일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얼마만큼 성령께 충실하고 있으며, 말로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모든 이를 우리의 형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참으로 우리는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이 세상에 참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가? 반성해 보자. 우리의 마음은 폐쇄되어 있고, 그릇된 교회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개인주의, 배타주의, 아집에 사로 잡혀 있지 않는가.



어떻게 반응을 일으키는가? 사도 요한 말하기를 우리의 마음 보다 무한히 크신 하느님의 용서를 믿어야 한다고 한다. 이 같은 신뢰심으로 우리는 성령께 전적으로 의탁해야 하고, 예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을 믿자.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인 포도밭에서 풍성한 포도나무가 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언제나 머물 수 있다. “너희들은 내 안에 머물고 나는 너희 안에 머문다.” 이 말씀은 바로 주님을 닮으라는 말씀이고 당신이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시듯이, 우리도 당신 안에 언제나 머물러 있으라는 말씀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언제나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면서 활동하신다. 이분이 우리를 일치시켜 주시고, 제자로 만들어 주신다. 이것을 믿고 사랑으로써 당신 교회의 멤버가 되며, 당신 성령의 후사에 온전히 순응할 때, 예수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하여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고, 세상과 충돌하지 않고 참된 그리스도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좁은 마음을 활짝 열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풀 때,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에 언제나 깃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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