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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대축일 강론 모음2
작성일 2008년 9월 20일 (토) 10:20
분 류 대축일 강론
ㆍ추천: 0  ㆍ조회: 8569      
IP: 218.xxx.160
http://missa.or.kr/cafe/?logos.1273.
“ Re..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
 

순교자들의 피는 신앙의 씨앗 

  이성만 신부 

1984년 여의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전 세계 교회에 신앙의 귀감이 될 한국의 순교자들 중 103위를 성인품에 올리신다고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과연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그분들과 다른 많은 순교자들의 피흘린 신앙의 증거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떼르뚤리아누스 교부께서 “순교자들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다.”말씀하신 바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20여년이 지났지만 그분들의 축일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그분들의 생활은 “하느님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100여년의 박해중에 2만명 이상의 순교자들의 생활은 하느님 한분을 위해 생활뿐 아니라 생명까지를 봉헌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103위 성인들중에 어떤이는 학자였지만 어떤이는 일자 무식에 아침기도, 저녁기도도 못하고 교리도 모르는 분도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 마리아”밖에 모르던 김성임 마르타 성녀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 하느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지극히 하느님 사랑에 열렬한 분들이었습니다. “사대부나 다른 이들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하느님께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천명한 생활들이었습니다. 기억력이 둔하여 교리문답과 기도문을 외우지 못했던 박 안나 성녀는 “나는 천주를 내가 원하는 대로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마음껏 사랑하기로 힘쓰겠다”고 하며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셨습니다.



또한 우리 순교자들은 진리를 배우고 깨우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셨습니다. 스스로 모여 연구하고 배우는 정신은 세계 교회사의 유래없는 자생의 교회를 만들었고, 100여년간의 박해 기간중에 30여년 밖에 성직자를 모시지 못했지만 60여년간을 찾고 배끼고 쓰고, 외우면서 신앙을 유지하고 신앙을 전해왔습니다.



성교회의 도리를 더 알기 위해 한양에서 함경도 무산까지 조동섬을 찾아가는 정하상 성인의 노력은 실로 경탄스러운 것입니다. 순교자를 심문한 기록에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유식하냐?”하고 관장이 감탄합니다.



성인들의 문초기록에서 두드러진 것 하나는 어려움, 고통에 대한 인내심입니다. 모진 고문과 형벌, 그리고 병고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는 정신은 우리들 생활에 많은 채찍이 됩니다. 고문하다가 화가 난 관장이 고문 중에 신음 소리만 내어도 배교를 간주하겠다는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신음 소리하나 내지 않았다는 성인들의 기록을 보면서 우리들의 고통에 대한 태도를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이 살으셨던 그곳에 우리도 살고 있어서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로 가겠다.”고 청해서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참수 치명하신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띠노 순교자의 하늘을 우리도 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 주님과 함께 

  박윤배 신부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이날은 우리나라의 103위 순교성인들 뿐만 아니라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못한 순교자들과 이름조차 남겨지지 않은 많은 순교자들의 순교를 기념하는 축제의 날이지요. 흔히 순교자의 죽음은 죽었다고 표현되지 않고 하늘나라에서의 태어났다, 하늘나라에서의 생일이라고 표현됩니다.



여러분은 ‘순교’하면 무엇이 우선 떠오르나요? 하느님 때문에 피를 흘리는 일이 가능할까? 또는 어떤 강렬한 것이 있었기에 순교자들은 목숨까지도 걸고 지키려고 했을까? 과연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라는 등등의 물음들을 적어도 한번쯤은 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순교자들이 하나뿐인 생명을 걸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입니다. 성령께서 내려주신 신앙의 힘, 바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입니다. 우리나라 교회를 위해서 순교하신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모든 순교자들은,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묶인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시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받게 되는 박해를 용기 있게, 기쁘게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와 순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순교 성인들이 약 200년 전의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사람들의 박해를 받고 순교했다면 지금 우리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박해를 받고 순교를 요청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박해를 받는 것은 무엇일까요? 작게는 식당에서 성호를 자신 있게 긋지 못하고 밥을 먹는 것,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형제인데도 불구하고 딱 편을 갈라놓고선 동료들을 있는 그대로 대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막상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하느님 안에서보다는 자신의 능력으로, 혹은 한탄으로, 때론 욕설로 받아드리는 것 등이 스스로에게 박해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보내면서 우리는 이런 점에서 다시 마음을 잡고 한 주간 살아봤으면 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하기 싫지만 해야 할 일 앞에 닥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이번 주간은 싫지만 꼭 해야 될 일, 싫지만 누군가가 해야 될 일, 싫지만 했을 때 분명 옳은 일, 하기는 쉽지 않지만 하고 나면 분명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에 신앙 안에서 용기 있게 해 봅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우리에게 편하고 좋은 것을 잠시 뒷전으로 두고... 매일 나에게 십자가로 다가오는 일들을 주저 없이 해보는 건 어떨까요? 각자 혼자서가 아니고 바로 우리가 함께 그리고 주님과 함께 말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산다는 것 

  임형락 신부 


“너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너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엄청난 재산을 모으고 장수를 누릴 것인가? 너는 이 미사가 끝난 뒤에 오랫동안 은총 상태에 머무를 것인가? 너는 구원받을 것인가? 그러나 한 가지 질문에서만 다른 대답이 있다. 너는 죽을 것인가? 그렇다. 틀림없이 그렇다.”



인간만이 자기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내 목숨을 내가 살리고 죽이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누구나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에 있어 자기중심을 주장하고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신앙인은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사! 람들입니다. 따라서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을 따라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면 ‘버리라’고 하십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버리고 있습니다. 쓰레기도 버리고 양심도, 신의도, 가족도, 신앙도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따르려고 버린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내 중심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버리는 것들 입니다. 정작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구는 분명하십니다.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곧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가운데 생기는 어려움과 희생, 아픔을 감! 수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버리는 것과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동일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삶만이 자신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바로 나라고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 바로 자신의 목숨을 살리는 길이요, 구원의 길이다.’이 신앙의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친 분들이 바로 ‘순교자’들이십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고, 우리 삶이 될 수 있기를 함께 기도 드립시다.





오늘을 살아가는 순교 정신 

  김영춘 신부 


호주 시드니에서 있었던 세계 청년 대회(7월15일~20일)를 마치고 생드니 교구의 교구장이신 오영진(Olivier de Berranger) 주교님과 청년 120여 명이 프랑스로 귀국하는 길에 열흘 간의 일정(7월21일~31일)으로 한국에 들렀습니다. 1976년부터 17년간 서울 구로와 영등포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사목을 하셨던 오영진 주교님은 청년들에게 한국 교회의 역동성을 보여 주고, 1800년대 조선에서 선교하다 순교한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의 순교 정신을 그들의 마음에 심어 주고 싶었습니다. 평화방송․평화신문에서는 명동성당을 방문하는 날, 주교님과 두 명의 청년을 인터뷰하기로 했습니다.



방문단은 오전 덕수궁의 문화체험을 마치고 명동성당에 12시30분에 올 예정이었지만, 교통이 지체되어 오후 1시15분쯤 도착했습니다. 늦게 도착하신 주교님은 죄송하다며, 인터뷰와 방송 녹음을 하기 위해 길 건너편의 평화방송․평화신문 빌딩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습니다. 방송실에 가기 전에, 승강기 안에서 제가 주교님께 말을 건넸습니다. "점심 식사를 아직 못하셨으니, 우리가 준비한 샌드위치를 먼저 드시고 인터뷰를 하시죠." 주교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저와 청년들이 우리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 정신을 체험하러 왔는데, 그분들이 겪었을 고생과 고통에 비하면 점심 조금 늦게 먹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송 녹음부터 먼저 합시다."



순교 정신으로 점심의 허기를 이겨 내자는 주교님의 생활에서 살아 숨쉬는 순교 영성은 방송 녹음과 신문 인터뷰가 끝난 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함께 나눈 대화에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호주에서 세계 청년 대회 마치신 후 바로 한국에 들어오셔서 또 다시 강행군을 하시는데, 무척 피곤하시겠습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들이 사제서품을 받고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이역만리 이 곳 조선에서 신앙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바쳤던 것에 비하면, 우리들이 한국에서 열흘 간의 일정 동안 잠시 머무르면서 겪는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죠."



"갈매못 순교성지 순례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17년을 살았지만 갈매못 순교성지를 이번에 처음 가봤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용감하게 순교의 칼을 받은 다블뤼(Antoine Daveluy, 조선교구 5대 교구장) 주교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프랑스 청년들은 이번에 한국 천주교회 역사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를 생생하게 배우고 느꼈습니다". 방송국에 녹음을 하기 위해 함께 자리한 프랑스의 앳된 두 청년도 그 옛날 고국의 선교사가 동방의 이 먼 곳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의 피를 흘렸다는 사실에 놀라웠고, 자신들의 신앙 선조들을 본받아 어떠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땅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이 이제 가톨릭 신앙의 종가라 할 수 있는 프랑스 젊은이들의 가슴에도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한국에서 체험한 순교 정신을 일상의 삶 안에서 살아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모진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신앙의 제단에 바친 수많은 순교자를 신앙 선조로 모시고 있는 우리에게도 순교 정신이 삶의 현장에서 굳건히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詩)는 시(詩)가 아니다 

  김태영 신부 

제가 있는 성당에는 유치원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성모상 앞에서 성모송을 노래하고 유치원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기쁜 웃음이 나올 때도 있지만 이유 없이 슬퍼질 때도 있습니다. 작은 아이들이 겪게 될 고통들이 눈앞에 보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조용히 기도합니다. ‘주님. 아무것도 모르는 저 아이들도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까? 삶이 지니고 있는 고통들이 저 아이들을 지나쳐 가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희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십니까!’



다산(茶山) 정약용은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詩)는 시(詩)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시대가 겪고 있는 불의한 상황에 체념하거나 못 본 척 하지 말고 같이 아파하며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회의 구조적인 악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와 녹아 없어질 위로를 말한 것이 아니라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진리와 정의를 선포하시다가 외로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모순되고 불합리하며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진리와 정의에 목말라 하던 민초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삶 속에서 갈증을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두 눈으로 보고 들은 진리를 목숨을 바쳐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높기만 한 양반과 평민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정치적인 혼탁함 속에서 몸을 사리며, 물질적인 궁핍 속에서 고통 받던 선조들은 정의로움에 목말라 했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바쳐 진리와 정의를 외친 그리스도 예수를 책을 통해 보고 들었습니다. 선조들은 보고 들은 진리를 실천했습니다. 세상의 억압과 폭력 속에서 기도하고 서슴없이 진리를 증언하다 망나니의 칼 아래 죽어갔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시대에 영합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뒤쳐질까 두려워 아이들을 사교육 시장에 밀어놓고 ‘우리 아이’만 좋은 학교와 직장에 들어가면 된다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을 못 본 척하며, 다른 이들을 착취하는 경제적 구조 속에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웰빙’의 주문에 걸려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가 흘리고 있는 피눈물을 비웃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아니라 신자들의 사교 모임에 치중하며, 진리와 정의의 외침이 아닌 기교가 난무하는 듣기 좋은 소리로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리와 정의에 목말라 하시던 신앙의 선조들은 이 땅에 피와 눈물의 시(詩)를 새기셨습니다. 선조들이 쓰신 순교의 시(詩)에 우리의 눈물로 마침표를 찍지는 못할지언정 그분들을 팔아먹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보고 들은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며, 불의한 사회를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으로 바꾸기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고 침묵한다면,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우리의 아이들은 더 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입니다. 




 바윗 덩어리 최경환 성인 

  여친천 신부 


지난 18일 배론성지에서 있었던 순교자 현양 대회에서 대성당에 김대건 신부님과 가톨릭 의대 응용해부 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한 최경환, 남종삼 성인의 유해를 모셨습니다. 대성당 왼쪽 최양업 신부님에 관한 그림이 있는 곳에 '최경환 성인의 무릎뼈'라고 표기된 유해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지난 3월 봉인된 유해를 열어보니, 무릎뼈가 아닌 오른쪽 넙다리뼈와 왼쪽 종아리 뼈 일부가 있었는데, 종아리뼈는 보존처리가 시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뼈를 보는 순간 고단한 삶 속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켜온 강인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인은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고, 정직하고 순박하면서도 강인한 성품을 타고 났습니다. 오롯한 신앙생활을 위해 이 산골에서 저 산골로 이사다니면서 가시덤불과 돌자갈밭을 개간하였습니다. 자주 깊이 묵상하고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열변과 달변으로 교리를 강론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들으러 왔습니다. 집이나 밭에서 일을 할 때에, 또는 길에서 누구와 이야기를 할 때에 항상 천주교 교리와 신심 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가면서 힘차게 말하는 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저녁 기도를 가족 모두와 함께 공동으로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장을 보러 갈 때에는 제일 나쁜 것이나 흠있는 것을 골라서 사왔습니다. 이러한 애덕은 자라나서 재난이 닥쳤을 때는 영웅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가장 좋은 과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등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었습니다.



1839년 7월 침통같이 더운 날 40명이 넘는 수리산 교우촌 신자들이 서울로 끌려갔습니다. 앞장 선 성인은 큰 목소리로 "형제들이여, 용기를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생각합시다."고 격려하였습니다. 법정에서, "이 세상에서 자기 주인에게 불충실한 것도 흉악한 범죄이거늘 하물며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대주재(大主宰)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하라고 하십니까? 저는 결단코 배교는 못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40일 이상 갇혀 있으면서 고문을 받아 팔과 다리뼈가 어그러졌고 곤장을 110대나 맞아 온몸의 살이 한 치도 성한 데가 없이 뭉그러지고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은 채 감방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혹독한 고문을 끝까지 항구심으로 견디어 낸 성인에게 고문자들이 '바윗덩어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해 9월 12일 감옥에서 38세의 나이로 영광스럽게 순교하였습니다. 성인의 후손인 우리는 또 다른 바윗덩어리가 되어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였으면 합니다.



순교자, 하느님이 전부였던 이들! 

  표창연 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우리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자. 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가? 무언가 나에게 이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사실 사도들조차도 예수님 뒤에서 자리싸움을 했다. 수많은 군중들도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세울 생각을 했다. 우리 또한 그런 생각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오늘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그래야지만 그분의 뒤를 따를 수 있다.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라 예수님께로부터 무언가 이득을 바라고 따른다면,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외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자들이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면서도 결국 십자가의 길에선 예수님을 배반한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땐 환호를 외치던 군중들이 그분의 십자가의 길에서는 돌변하여 야유를 외쳤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진정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이들은 그 어떤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의 뒤를 따를 것이다. 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처럼 말이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우리나라의 103위 순교성인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신앙을 위해 자신을 포기한 채 날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른 분들이다. 자신의 지위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한 모든 것을 포기하였고, 박해의 고통이라는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죽음’도 피하지 않으신 분들이다. 순교자들이라고 자신이 소중하지 않았거나 고통과 죽음이 두렵지 않았겠는가! 단지 그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를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 성부 하느님이 전부였듯이 그들에게도 하느님이 전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도 말릴 수 없었던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하느님을 향한 사랑!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7-39).



순교=신념에 대한 투신(投身) 

황병석 신부 


오늘의 성서 말씀은 모두 현실을 뛰어 넘어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혜서는 의인들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서 그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로마서간은 이 세상 어느 것도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기에 어떤 두려움도 가질 필요가 없음을, 복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구원과 영원한 삶에 있기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경하는 순교 성인들은 바로 이러한 신념속에 부끄러움 없이 자신의 전 삶을 투신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목숨을 걸면서까지 자신의 신념과 진리를 지켜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두렵기 때문에, 혹은 현실적 이익과 욕망 때문에 신앙까지도 때로는 뒷전으로 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입으로 ‘순교자 믿음 본 받아 충성하리라’고 노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작은 유혹에도 흔들리고 게으름에도 흔들리며 세상에 대해 너무 쉽게 신앙이 무너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매일 매일 신앙생활을 하는데서 오는 어려움을 잘 견디어 내라고, 또한 일시적인 목숨을 부지할려고 하다가 영원한 생명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세상 재물을 탐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현재, 지금 신앙의 태도를 어정쩡한 상태로 살다가 훗날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도록 살라고 당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버리고 매일 우리 십자가를 잘 짊어지면서 주님을 따르자 

  정재성 신부 


불란서에서 유학하던 시절, 성 빈첸시오 수도원에서는 한국교회의 축일을 맞이할 때 마다,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유일한 한국인 사제였던 저에게 미사집전을 할 수 있도록 항상 배려해주었습니다. 저는 강론 때 기쁜 마음으로 한국교회에 대해서 소개하곤 했었는데, 미사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제 말을 귀담아 듣곤 했었습니다. 특히 아시아 선교에 주력해온 파리외방전교회에서는 9월 20일이 되면 한국교회의 대축일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식당에서 100인분 이상의 음식을 주문해서 아시아 여러 나라 신부들과 함께 한국음식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제가 한국인이고, 또 자랑스러운 순교자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해지곤 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조건들을 알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과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 2가지입니다.



각자 저마다 갖고 있는 알량한 자존심을 과감하게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을 올바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잘 따라가기 위해서는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부모, 가족, 건강, 사업, 결혼생활 등 남들이 알든 모르든 십자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어린 아이라고 해서 십자가가 하나도 없겠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분명 십자가는 있을 것입니다.



또 나이 든 노인이라고 해서 세상 모든 십자가 중에서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지겠습니까?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밖으로 나타나든지 그렇지 않든지 누구나 십자가는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때때로 내 십자가보다는 남의 십자가가 더 가벼워 보이기도 하지만, 십자가의 무게는 저마다 다 무겁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힘든 십자가는 예수님이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에 비하면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너무나 작고 가벼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나가는지 크게 2가지로 구분해본다면 한 가지는 늘 불평불만하면서 짊어지는 것,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무슨 일에나 늘 감사하며 기쁘게 극복해나가는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낙관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분명 후자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고 따르려는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도, 죄 많고 부족한 우리를 위해서 세상의 모든 죄와 가장 무겁고 험난한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는 이토록 고마우신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기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한국의 순교자들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주님을 위해서 단 하나뿐인 목숨을 기꺼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더욱 더 굳게 믿고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버리고, 매일 우리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따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아멘.



주님을 따르는 길 

  이건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3절)’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가는 세 가지 조건 안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번째, 자신을 버리는 것은 집단(가족, 마을)생활을 해왔던 우리 민족에게는 익숙합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헌신, 부모에 대한 효(孝)….

두번째,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일상 안에서 우리에게 항상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데 저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마지막 조건인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은 한국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어떤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교회도 순교자가 아닌 다른 성인들이 나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해 마십시오. 순교의 숭고함을 낮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의 방향 문제입니다. 순교는 유행이 아닙니다. 옷, 액세서리 등은 유행 따라 갈 수 있지만 순교는 다릅니다. 우리 선조들은 죽음을 통해 전혀 다른 죽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의연하게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 모습에서, 일반 사람들은 그 사람들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본 것입니다.



또 생각해 봅니다. 가끔 우리들의 삶에서 십자가 없는 영광을 바라는 모습을 봅니다. 반대로 영광 없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모습 또한 보게 됩니다. 합치면 우리가 희망해야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한 영광이라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우선순위인 하느님 때문에 따라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닐까요?



가정에 불화가 있어서, 힘든 일이 있어서, 오늘은 성당 갈 기분이 아니라서, 급한 일이 있어서, 가기 싫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생활-특히 미사-을 소홀히 하는 경우를 봅니다. 우선순위는 하느님인데,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한다면 선후가 바뀌어 있는 것이겠지요.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쓰고 나서 남는 시간, 재물, 열정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소중한 시간, 재물, 열정을 드리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기억합시다! 우선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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