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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1:22
분 류 행사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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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성월 ”
 

성모성월



1. 박도식 신부 / 2                2. 윤주병 신부 / 4 

3. 함세웅 신부(성모성월기도) / 10    4. 함세웅 신부(성모의 밤) / 19

5. 이기명 신부 / 20                       6. 강영구 신부 / 22

7. 성민호 신부 / 26                      8. 성모성월(1) / 30

9. 성모성월(2) / 31                       10. 성모성월(3) / 33

11. 성화에 나타난... / 36                       12. 자비로우신 어머니 마리아 / 37

13. Magnigicat / 38                       14. 묵주기도 기원 / 39

15. 묵주기도 신심 / 40



 1.           성모 성월 강론

1.               어머니는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밑거름      (박도식 신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는 일이다. 이 축복의 근원은 하느님이시고, 그로부터 받은 가장 귀한 보물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하나의 생명을 창조하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가장 숭고한 인간의 길이다.

  

어머니가 가진 자녀에 대한 사랑은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되는 그 순간 어머니라는 사명과 함께 없어질 수 없는 절대조건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모성애는 자기의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다. 그런데 ‘모성애’라는 귀한 선물을 받은 어머니들이 이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날 한 포수가 사냥총을 메고 숲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숲 입구에, 어머니 메추리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사냥하러 가는 포수를 보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포수님, 제발 다른 새는 다 잡더라도 내 새끼만은 잡지 말아 주세요”

  “좋아. 그런데 당신 새끼를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 숲 속에서 제일 예쁜 새는 모두 내 새끼 새들입니다.”

  “알겠소!"하고 포수는 보기 싫은 메추리 새들만 다 잡아서 숲 속을 나왔다. 그때 어머니 메추리는 통곡을 하면서 말했다.

 “아이구 포수님, 정말 너무했어요. 왜 잡지 말라는 내 새끼 새만 다 잡았습니까?”

 “숲 속에서 제일 보가 싫은 새만 잡았는데요."

 “그게 전부 나에게는 제일 예쁜 새들인데, 내 새끼 새들이기 때문에․.. "


어머니 눈에는 자기의 자녀들이 제일 예쁘게 보이는 법이다. 다른 집 자녀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자기의 자녀들이 사랑스럽고 귀엽게 보인다. 이것이 모성애의 본질이다. 그래서 일차로 세상의 어머니들은 동물과 같은 본능형의 모성애를 갖는다.

이 본능형의 모성애가 발전이 없을 때는 자녀들을 버리는 결과가 된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별 의미 없이 본능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예컨대 “엄마, 오늘 추워서 학교 가기 싫어" 했을 때, 본능형의 어머니는 “오냐, 알겠다. 학교 가지말고 아랫목에 누워 있거라"하는 식의 모성애이다.

  

두 번째는/ 허영형의 모성애이다. 자녀들을 사랑하되 진정 자녀들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부모들의 허영을 위해서, 그들의 세속적인 체면을 내세우기 위해서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자녀가 피아노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데, 어머니의 세속적인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해 강제로 개인교수를 불러, 아이들에게 피아노 공부를 시키는 형의 어머니이다. 

요즈음 공부를 했다는 어머니들이 범하는 모성애에 대한 모독이다.

  

자녀들의 입시를 앞두고 어머니들의 허영은 극에 이른다. “너 이번에 00대학에 입학 못하면 너 죽고 나 죽는다”하는 식의 어머니의 모성애는, 자녀들을 망치는 허망 된 교육정신이다.

  

세 번째는/ 자각형의 모성애이다. 순간 순간 어머니의 진지한 자각과 반성을 통해서 자녀들의 능력과 개성을 살려, 자녀들을 사랑하는 어머니형이다.

자기의 자녀가 입시에 불합격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할지라도, 어머니만은 자녀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면서, 용기를 잃지 않게 인도하는 어머니이다.

자녀들이, 친구 사이에 문제가 있을 때도 무조건 자기의 자녀들을 보호하지 않고, 시비를 가려서 자기 자녀들에게 엄한 꾸중을 하는, 자각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어야한다.

  

네 번째/ 마지막 어머니의 형은 절대형의 모성애이다. 자식이 불구자이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큰 장애물을 가졌을 때,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위대한 어머니의 이상형이다.

자식이 눈이 없다면 자기의 눈까지도 빼어줄 수 있는 절대형의 모성애이다.

위대한 어머니 밑에 위대한 인물이 난다는 것은, 자고로 널리 알려진 말이다. 특별히 성녀를 어머니로 모신 아들이, 성자가 된다는 원칙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니까 성녀 밑에 아우구스띠노 성인이 태어난 사실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회적 문제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분석이 되겠지만, 가장 올바른 그 문제의 초점은 어머니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자녀들의 신앙교육이나 종교생활에 있어서 미치는 어머니의 영향은 대단하다.

  

한 어머니의 눈물어린 정성된 기도가 자녀들의 영혼을 구제하는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어머니들이 모르고 있다. 하느님이 주신 귀한 어머니의 사랑! 이것이 제대로 우리 가정에서 싹이 틀 때, 그 가정은 살고, 그 가정이 사는 사회는 주님의 나라로 발돋움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만고에 빛나는 위대한 어머니의 상을 지닌 성모 마리아가 계시다.

마리아는 예수 아기를 돌보면서 모든 것을 침묵과 희생으로 일관하셨다.

마리아는, 드디어 아들이 골고타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녀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고, 그 고통이 드디어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이바지가 되는 초월적인 어머니가 되셨다.

  

마리아는 특별히 간택된 하느님의 어머니이지만, 예수님이 전 인류의 스승으로서 그의 생활이 인류의 모범이었다면, 마리아는 전 인류의 어머니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신 절대 이상형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는 처녀성과 모성애를 동시에 지니신, 뭇 여성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오늘에 많은 여성들이 순결을 잃고 있다면, 그들은 다시 한번 마리아 앞에 그의 순결을 본받아야 할 것이고, 이 세상의 많은 어머니들은 그들이 가진 모성애의 남용으로 자녀와 가정에 누를 끼치고 있다면, 진정 가슴에 손을 얹고 성모님 앞에 무릎 꿇고 자성해야 할 것이다.

  

위대한 것이 타락될 때에는 더욱 무서운 결과를 가지고 온다. 어머니의 위대한 모성애에 금이 갈 때, 그에 따르는 자녀들의 부패와 가정의 불화는 더욱 심각해진다.

어머니는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을 대변하는 가정의 등불이다. 어머니는 세상을 정화하는 소금이요 빛이다.



]드디어 어머니는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밑거름이다.

하느님의 아들을 기르신 성모 마리아여! 우리의 모든 어머니들이 당신과 같이 거룩한 어머니가 되어, 성가정의 주역이 되는 은혜를 주님께 빌어주소서. 아멘.











2.                        성모성월 강론

                                                     (윤주병 신부)





버드나무 가지가 푸르른 가지를 늘어뜨리고, 푸르른 신록이 대지를 환하게 수놓은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5월! 하면, 사회와 나라에서도 많은 행사와 축제가 벌어지는 달입니다. 특히 5월 하면 어머니를 생각지 않을 수 없고, 어머니하면 성모님을 연상치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 안에는 모든 인간을 위한 하느님께로부터의 생명의 약속이 있고, 모든 인간에게 천국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아름다움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밤 우리는 미약하나마 작은 우리의 정성을 모아 성모님께 꽃다발을 드리고자 이렇게 모였습니다.

  

청순한 마음과 겸손된 자세로 돌아가, 우리를 낳아주시고, 기르시고, 고생하신 우리 각자들의 어머니와, 특별히 신앙으로 맺어주신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생각해 봄은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라고 하는 이 말마디는, 그저 체면 불구하고 무작정 그의 품안에 껴안기고, 치마폭에 안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말마디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일컬어 사랑의 덩어리라, 또는 자녀 때문에 분수 없이 미친 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의학의 지식이 없는 의사입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와 간호원은 철저하게 모든 기구와 환자를 소독하고, 그리고 나서 수술을 합니다. 이것은 밖으로부터 환자에게 병균이 전염되지 않게 하기 위한 방법이며, 또 병균이 자기들한테 옮겨오지 않게 하기 위한 조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기 자녀의 피고름이 나는 것을 보면. 서슴치 않고 자기 혀로 그 고름을 짜냅니다. 그러기에 어머니는 의학을 모르는 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법률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훌륭한 변호사이십니다.

  자기 자녀가 잘못을 저질러 궁지에 몰리고, 혹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머니는 그 자녀를 대신해서 체면 불구하고 변호합니다. 궁지에 몰리고 하는 말은 “그 애가 모르고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이 몰랐다는 말에는, 법도 어처구니가 없고, 아무리 노한 법관도 그 말에는 허담을 집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언제 배웠는지 몰라도, 가장 훌륭한 이 변론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운명하시기 직전에, 십자가상에서 노하신 천주 성부의 의노를 풀고, 우리 인류의 잘못을 용서코자 했을 때, 이것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른다는 핑계로, 우리 인류의 죄를 용서케 하셨고, 그럼으로써 구속사업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논법을 언제 배웠는지는 몰라도, 무식한 어머님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을 위해서 이러한 훌륭한 변론법을 사용하시는 훌륭한 변호사이십니다.

  

어머니는 또한 한평생 자녀를 위해서 무통 봉사를 하는 분입니다. 어떤 보수를 바라지 않고, 오직 자녀의 행복만을 위해서 한평생을 고스란히 바쳤습니다.

우리는 좋지 않은 냄새만 나도 얼굴을 찡그리고 얼굴을 돌리지만, 어머니는 자녀의 똥, 오줌을 다 자기 손으로 치웠고, 그 어린이가 잠들기 전에는 자기 눈이 감지 않았고, 그 어린이가 웃음을 띠기 전에는 그 이맛살이 펴지지 않았던 것이, 바로 어머니들이십니다. 그러기에 어머니에 대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성애」 인간적인 사랑의 최고 절정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가끔 모성애로 빚어진 처절한 장면을 보고, 듣고 함으로써 눈시울을 적신 적이 많습니다.

화재가 났을 때 자기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불에 타 죽는 자식을 구하고자, 그 불 속에 뛰어들고,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어머니이시지만, 물에 떠내려가는 자기 자식을 구하고자 물에 투신하는 어머니의 모습! 그러기에 하늘 아래 그 무엇이 어머니의 마음보다 넓고 높겠습니까?

  

우리의 발끝에서부터 머리털 끝까지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 미친 곳이 있다면, 이것은 다 거짓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게 살은 이가 누구냐 하면, 또 어머니들입니다.

그렇게 불쌍하게 살으시면서도, 마지막 시간에 또 가장 불쌍하게 눈을 감으시는 분이 어머니십니다.

  

그렇기에 격언에 오직해서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을 위해서 한평생을 고스란히 바쳤지만, 한평생을 두고 그 지긋지긋 속을 썩인 것은 남의 아들딸이 아니라, 자기가 낳은 아들딸로부터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이러한 고통을 받을 줄 알았더라면, 무엇 때문에 그러한 희생을 바쳤겠습니까?

  

오늘 시간에도 자기 마음이 울렁거리고, 자가 속만 썩이고 있다는 그것은, 남의 자녀가 아니고,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고 자기가 생명을 다 바친 그 자녀들일 것입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사랑덩어리이며, 어머님은 자녀 때문에 분수 없이 미친 사람이라고 한 말은 합당하고 옳은 말인 듯 싶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어머니시며 예수님이 운명하시기 직전에 우리에게 유언으로 남겨주신 말씀으로,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께 대해서 고찰해 보십시다.

우선 성모 마리아께서도 자기 아들 예수님 때문에 한평생을 오늘 우리 어머니들과 같은 갖은 고통과 찌꺼기를 다 마셨습니다.

  

첫아들을 배시고, 오늘과 같은 주민등록 같은 것을 하시기 위해서, 교통수단도 발달이 안 되었기에, 나귀를 타시고 수 백리 길을 가셔서, 저녁에 예루살렘에 도착 하셨습니다.

초산을 치루는 첫아기를 낳은 부인들의 심정을 우리 어머님들은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 마음이 설레이고, 정신이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기 때문에, 대개 친정 어머니를 찾아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친정 어머니가 오셔서 해산바라지를 해주지는 것이 보통이라 하겠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 몸이 만삭이 되고, 산기가 있고, 고통이 다가왔을 때 이집 저집 수습할 곳을 찾았지만 방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다 낡아 쓰러져 가는 마굿간에서 여장을 풀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셨습니다.

  그 뿐입니까? 당신 아들을 낳은지 불과 일년도 못되어서, 그 당시 유대왕 헤로데는 자기 권리와 지위를 상실 할까봐 겁을 집어먹고, 전 유대아 지방에 명령하여 2살 아래 아기들을 죽이라고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이때 성모님은 수 천리 떨어진 이집트로 몇 달을 걸려 피난의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 당시는 오늘처럼 교통수단이 없던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때문에 그 길을 고달프고 먹을 것 마실 것이 없는 광막한 사막의 길이었기에, 생과 사가 엇갈리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1951년 1.4후퇴를 생각하시면서 매우 적절한 실례인 듯 싶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가 남부여대(男駙女軩 )하고, 다시 말하면 아버지는 등에 피난꾸러미를 지고,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자녀들을 이끌고 남으로 남으로 피난했을 때, 어떠한 고초를 겪었습니까? 이 고초를 성모님은 가슴 쓰라리게 다 겪으셨습니다.

  

또한 12살 때 실종한 줄 알았던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흘만에 찾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애야, 왜 우리를 애태우느냐?" 하시는 성모님의 걱정스러운 말씀. 「당신 아들의 수난의 괴로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다 쓰러지고, 일어나다 또 쓰러지고, 매맞으시고, 조롱당하시고, 끝에 가서는 당신의 아들이 기절참절한 십자가상에서 유다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으로 몰려 운명하시는 것을 보셨고, 또 당신 품에 그 시신을 내려 안고, 그 시신을 모셨습니다.



이렇게 성모님도 당신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서 한평생 우리 어머님들과 같은 갖은 시련과 고통을 다 겪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오늘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다 같은 어머니로서, 이러한 고초를 겪었기에 우리와 상통할 수 있고,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고, 우리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성모님과 제자 요한을 내려다보시며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시고 요한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심으로써, 하느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세상 사람들과 신앙인인 우리들의 생활

태도는 어떠합니까? 너무나 많은 잘못으로 성모님의 마음을 상해 드린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오늘날에도 이기적이고, 권세욕에 또는 물질적 위주로 생활하는 자들은 불우한 이웃의 아픔과 고뇌를 백안시하고, 이웃과의 대화가 단절되고, 이웃과의 협력이 원만치 못합니다.

보이는 네 이웃을 사랑치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냐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반문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다시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 가정도 사회의 이러한 추세에 편승하여 물질위주로, 신앙보다는 현실체면과 타협하고, 너무 집착하는 경우가 농후합니다. 이러한 가정 안에서 자란 자녀들도 부모의 영향을 받아, 정신보다는 물질 위주로, 남을 위하기보다는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히는 그릇된 양심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참된 의미는, 아동으로 하여금 완전하고 조화있게 자기존재를 실현하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실현은 건전한 신체발육, 판단력, 창의력, 이해력, 책임감 및 성실성과 함께 양심적인 인간일 때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인격형성은 아동으로 하여금 올바른 양심으로 도덕적 가치를 평가하고, 그것을 개인의 결단으로 긍정하며, 더 깊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권장 받는데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제 2차 바티칸공의회 그리스도교 교육에 관한 선언문 1항에서 명백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정은 인격형성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 첫 번째 학교이며, 부모님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제일 첫째가는 선생님들입니다. 더욱더 어머니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아동들은 무방비라고 합니다. 자기의 주위에 있는 특히 부모님들의 생각, 행동 자세를 모방하고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종교실천은 아동의 종교생활 실천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종교사회학자들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가정심리학에 의해서 종교심의 형태가 옳게 또는 그르게 발달된다고 합니다. 즉 가정의 구조가 가정의 분위기가 종교적일 때 다시 말하면 부모님들의 종교적 행동 자세가 능동적이고 열심할 때 그 가정의 자녀들의 행동 자세도 능동적이고 열심하였고, 그렇지 못할 때 자녀들의 신앙생활이 소극적이고 무관심하고 문제학생이 많다는 것이 한 연구조사에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자기 자녀들의 종교교육에 무관심하고, 가정교육의 목적을 입신출세주의적, 학업 제일주의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인간이 살아나가기 위해서 돈도, 명예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도 우선적으로 기본적인 인간됨됨이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학교에서 스승신부님들로부터 신부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 말씀을 누누히 들었습니다. 이것은 참다운 인간, 성실한 인간, 남을 이해하고 포용적인 인간, 다시 말하면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인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기들의 일거일동을 하나도 빠짐없이 사진 복사하듯이, 그대로 본받고 있는 자녀들에게 자기들의 성실한 생활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자기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요행을 바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먼저 부모님들이 올바른 생활과 열심한 신앙생활로 그들의 모범이 되어줄 때, 모든 것이 자기가 바라는 대로 훌륭한 인격자로 성장 발육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인간은 물질의 풍요와 기계문명의 이기 속에서 풍요롭게 살지만 고귀한 정신을 잃고 영성이 메말라 비인간화된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하여 진실보다는 허위, 정의보다는 불의, 인정보다는 계산에 빠른 실리주의로 치달아 성모님의 마음을 수없이 괴롭혀 드리지만, 그러나 성모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고독한 산마루에서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악한 마음을 한탄하시며, 눈물을 홀리시던 성모님이십니다. 루르드와 파티마에서 발현하시어, 죄인의 회개와 세계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해야될 일을 신신당부하시면서 기도하시던 성모님이십니다. 지금도 항상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면서 당신 품안으로 들어오도록 회개를 재촉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성모님의 생활태도와 신앙심을 본받고 우리의 잘못을 솔직하게 뉘우쳐야 할 시간입니다. 성모님은 가난하고 겸손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한 가정의 주부로서 사치하지 않으셨고, 이웃사람에게 생색을 내지 않으시고, 허영적이거나 교만치 않으시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 본능적 모든 욕망을 잘 조절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묵상했습니다. 성모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순명 행위에 기초를 둔 신앙심을 갖고 살아가셨습니다. 마리아는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시는 엄청난 역할을 수락하십니다. 마리아는 이 사명을 자신을 위한 영광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봉사로써 받아들이십니다. 주님께 대한 이 봉사자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된다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올 모든 수모를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따져 묻지도 않

으시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십니다.

  

우리들도 성모님과 같은 순명하는 행위가 요구됩니다. 부모에게, 또는 가정에서 부부간에, 서로 우열다툼을 하지 않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아끼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지 말고 어려운 일을 함께 극복해 나가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성모마리아는 당신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하는 신뢰행위에 기초를 둔 신앙심을 갖고 살아가셨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 인사말에 순간적인 마음의 동요를 느끼신 후, 즉시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실 것에 동의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씀을 의심치 않고 다만,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기가 어떻게 어머니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방법에 대해 물으셨지만, 자기 친척 엘리사벳이 노령에 아들을 갖게 된 것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온전히 신뢰하시며,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서 자신을 바치신 것입니다. 성모마리아의 신뢰 행위는 바로 우리 생활 속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서로 믿지 못하고 불신하는 풍조! 부모간에도 서로 믿지 못하고, 부모 자식간에도, 형제지간에도, 부부지간에도 믿지 못할 때, 그 가정은 올바르고 건전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님의 생활은 겸손과 순명 그리고 신뢰행위를 통해서 자기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는 생활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를 감사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모님의 이러한 생활자세를 본받아 끊임없이 새로운 마음, 자아 폭이 너그럽고 남을 인정하는 사랑을 갖고 나갈 때, 우리는 새로운 변화된 모습으로 이웃과 하느님께 기쁨을 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직하며 세상과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성모의 성월을 마지막 보내면서, 지금까지 성모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와 정성은 어떠하였으며,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고생하신 우리 어머님께 얼마만큼 효성을 바쳤는지? 그리고 부모님들은 특히 어머님들은 자애로운 어머니로써의 직분을 이행하였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내가 눈으로 볼 수 있고, 함께 말할 수 있는 나의 어머니를 공경치 못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 신앙으로 맺어진 성모님을 어떻게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주 더욱더 열성적으로 어머님께 갖은 효도를 다하고, 이미 고인이 되셨다면 그분을 위해서 성의껏 미사봉헌으로 제사를 드려, 하느님의 은총을 구해야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성모님의 은총으로, 성모님의 간구로 우리나라가 하루속히 안정을 되찾아 평화스러운 그러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5월 성모님의 달!

일년 중 우리에게 사랑을 실감케 하는 의미 있는 달입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사랑 덩어리이며 자녀 때문에 분수 없이 미치신 분이십니다.

천상의 모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아멘.











3.                      성모 성월 강론

                                                                     함세웅 신부



요한 복음 19.25-27에서 보면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클레오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던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은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당신의 어머니요’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5월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 성모님께 그동안 바쳐왔던 우리들의 마음과 정성, 그리고 또한 장미꽃 꽃다발을 한 아름 묶어서 바치는 오늘, 성모의 성월, 즉 성모의 밤에 약간 날씨가 쌀쌀해서 우리 모두가 춥습니다만, 바로 십자가 밑에서 계셨던 마리아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이 잠깐의 추위를 우리 모두의 회생의 제물로 성모님을 통해서 주님께 봉헌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한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을 정의할 때,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서나, 그것을 딛고 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동물이다." 이렇게 자기의 체험을 기주로 하여 사람을 정의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의를 내리게 된 동기는, 바로 도스토예프스키가 1850년경 사회주의 사상을 받았다고 해서, 러시아 황제 암살음모 사건의 협의를 받아 사형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아주 추운 지방에서 12명과 함께 사형대 앞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3명씩 한 조가 되어, 세명 그 다음에 세명, 그 다음에 세명 이렇게 4조로 나뉘어 있었는데, 바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두 번째 조에 속하였습니다.

  

첫 번째 조가 죽음을 당하고 나면, 그 다음 조가 죽어야 할, 바로 죽음을 눈 앞에 둔, 그러한 아주 심각한 장면, 즉 어려운 지경에 있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 모두다 옷을 벗기우고, 추운 날씨에 영하 25도에서 25분간이나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사형 직전에 러시아 황제의 특명으로서 이 모든 사람들에게 특사, 즉 사형을 면하고 대신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보내도록 다시 감형조처가 취해졌습니다.



이 때에 당한 상황을 항상 상기하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영하 25도에서 아무런 옷도 입지 않고 25분간이나 서있었지만, 나는 그때 아무것도 추운 것을 몰랐다." 이렇게 자기 전기체의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수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이 어떠한 역경이나 어려움을 이겨 나갈 수 있는 위대한 힘은, 자기의 정신력, 또 우리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굳은 신앙만이 어려운 모든 문제를 하나도 어렵지 않게 이겨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그러한 위대한 능력의 주인공이, 오늘 우리가 기리고 있는 십자가 밑에서의 한 여성, 한 어머니, 바로 마리아가 그러한 인물이라는 것을 또한 우리가 기억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강론가였던 풀톤․쉰 주교님은 하느님과 함께 그 창조물에 대한 아름다움을 찬미하면서, “하느님께서 위대한 예술가라고 우리가 비교할 수 있다면, 그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은 바로 성모 마리아이다." 이렇게 그도 역시 강론과 함께 자기 의 책에서 여러 군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마리아는 우리 전 인류의 모델임과 동시에,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완전한 인간상, 에와에서 이루지 못했던 그것을, 마리아를 통해서 완성하였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우리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징표이며, 상징이며, 모델이며, 또 길잡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의 역사로 다시 우리의 눈길을 모을 수가 있겠습니다. 아담과 에와가 창조되면서 “너희들이 나의 계명을 지키면, 바로 나와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하는 이러한 약속을 받았습니다만, 아담과 에와는 자기 본성의 욕구에 따라서 우선 첫번째 실책을 하였고, 하느님의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그것을 원죄의 타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본래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을 모두 빼앗겼다는 것을 창세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3, 15에서는 아담과 에와의 잘못 때문에 사탄을 저주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이 두 사람을 낙원에서 쫓아내는 그런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창세기 3,15에 바로 죄악에 대한 처벌과 동시에, 메시아를 약속해 주시는 희망의 첫 번째 복음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을 저주하시면서, “사탄, 너는 항상 흙을 먹으면서 땅으로 기어다닐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있는 여인의 후손이 너의 머리를 짓밟으리라."

  

바로 여기에 나오는 여인이란 첫 단어에 우리가 눈길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 여인은 에와로서 실망을 하게 되었지만, 바로 여인의 후손, 그를 통하여 구원이 회복된다는 첫 번째 기쁜 소식과 함께 희망의 메시지, 창세기 3,15은 바로 그 때문에 원주적인 복음이라고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에와의 한 후손이 메시아로서, 그는 사탄의 머리를 짓밟는 승리자로서 나타날 것이다 하는 약속의 말씀을 이미 창세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보통 이러한 여성의 후예를, 예수 그리스도로 직접 우리가 상징적으로 알아듣고 있지만, 그와 반면에 또 다른 측면에서 켜기에 나오는 여인의 후손으로 바로 성모 마리아를 암시적으로 지칭한다고 영성신학자와 함께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이러한 약속과 이사야 7,14 또 마태 복음에도 인용되고 있는 말씀이긴 하지만, 그 당시 유다지방에서 바로 솔로몬 후에 아카스 왕이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으면서 위협에 빠져 있었을 때, 이사야 예언자가 아카스 왕에게 ‘당신은 인간의 힘을 항상 믿고 있지만,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항상 하느님이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과 신앙심에 살 때, 우리는 바빌론이라든지, 앗시리아의 강대국의 이러한 침공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께 하나의 기적을 청하시요." 이렇게 이사야 예언자가 아카스 왕에게 말했을 때, 아카스왕은 너무나도 두려웠던 나머지, “저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아니하겠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을 시험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징표를 청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자기는 징표 청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때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은, “보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르리라." 다시 마태 복음에 그대로 인용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보라 한 동정녀" 또는 “보라, 한 처녀" “한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르리라"하는 “임마누엘" 이라는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 즉 하느님과 인간의 갈릴 수 없는 완전한 합일치를 의미해 주는 성서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면 창세기에 나오는 여인의 후손, 그리고 이사야서 7,14에 나오는 “한 여인이 아기를 낳을 것이다‥‥‥‥ 이러한 예언의 의미가, 역시 성서가 항상 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시 미케아 예언서에서 바빌론의 침공을 받기 직전에, 구약 북왕국에서 활약했던 미케아 예언자는, 당시 유다 땅 베틀레헴을 찬미하면서, 노래하면서, “유다 땅 베틀레헴아, 너는 비록 보잘것 없으나, 이스라엘을 다스릴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여인이 아들을 낳기까지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버려두실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여인이란 말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15에 나오는 여인과, 그리고 미케아 예언서의 여인, 그와 함께 갈라디아서 4,4에서 “보라, 때가 차매 한 여인이 아들을 낳아서, 그가 모두를 구원하리라." 바로 이렇게 하나의 이름을 지칭하지 아니하고, “여인"을 지칭하였다는 것은 여인으로 인해서 빼앗겼던 은총을 여인의 힘으로 되찾는다는 회복의 의미를 성서가 강조하고 있다는 뜻으로, 우리가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요한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을 우리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술이 떨어졌을 때 바로 성모님께서 “여기에 술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예수께 간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하신 말씀이 공동 번역에는 "어머니"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원래 희랍어의 그러한 의미는 또한 아라메아어의 그러한 어휘는 “여인이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요한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 방금 우리가 예를 들은 요한 복음 19장, 십자가 밑에서의 요한과 마리아와 예수님과의 그러한 대화에도, 공동 번역에는 “어머니, 이는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나와 있지만, 역시 원래는 “여인이여, 여기 있는 사람은 당신의 아들입니다"이다.



여기에 나오는 이러한 여인이란 이름은 요한이 마리아를 무시해서, 어머니라는 칭호대신 여인으로 쓴 것이 아니라, 에와가 받았던 그러한 “여인"이라는 이름, 창세기 3,15 : 이사야7,14 :미케 5,2에 나오는 말씀, 갈라 4,4 또한 요한복음의 가나 흔인잔치와 요한 19장에 나오는, 이러한 여인과 일맥 상통하는 구원사에 있어서의 여인들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성서학자들이 항상 강조하기 위해서 쓴 말씀입니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한 여인에 의해서 잃었던 것을, 이제는 여인에 의해서 완전히 회복된다는 이 성서적인 발단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공관복음서에서 우리가 마리아에 대한 모든 이름을 잠깐 훑어 볼 수 있다면, 루가복음에서 우리는, 천사가 갈릴레아에서 마리아께 인사하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이러한 의미는, 바로 하느님께 대한 축복을 충만히 받았다는 의미와 함께, 에와에 대한 원주적인 그런 은총의 회복을 성서가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고, 여기에서 “기뻐하소서 " 하는 이런 의미는 메이아 사상에서 나오는 성서 말씀으로서, 바빌론의 유배생활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동안 이민족에게 조국을 빼앗기고, 왕도 침입을 당하고, 예언자도 죽임을 당하고, 사제도 도망가고, 아무도 없었을 때 희망이 하나도 없었을 때, 모든 예언서의 마지막 귀절에, “너희들은 항상 기뻐하라, 너희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곧 너희에게 오리라." 하는 메시아니즘에 대한 암시로서, 바로 “기뻐하라"그것은 이제는 구원의 때가 왔기 때문에 최악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할 한 여인, 그리고 그로부터 탄생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임박했다는 성서의 말씀을 다시 천사가 종합적으로 반복해서 성모 마리아께, 인사의 노래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은 바로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 그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는데서 완전한 소명, 한 여성, 한 처녀가 잉태했다는 하나의 모험을 수락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마리아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성모 마리아는 막니피깟, 즉 우리가 성모찬가라고 말하는 그러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바로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과 그 모든 12지파에 나오는 그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구약의 백성을 자기 안에 수용시키면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노래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리아 안에서 유다 시온의 딸의 의미를 보며, 전 인류의 상징적인 의미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아기를 안고서 탄생한 다음에 마리아는 성전에 봉헌했을 때, 시므온이 예언했습니다. 바로 “예리한 칼이 당신의 마음을 사무쳐 뚫으리라." 어떻게 보면 기구한 운명의 한 여인이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런 인간적인 길을 걸을 수 있었기에, 걸었기에 마리아에게는 승리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성서적인 바탕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는 우리가 마태오 복음에서 잘 알 수 있듯이, 헤로데의 칼날을 피해서 피난길에 올랐고, 밤길에 무작정 걸었던 한 피난민이었습니다.

또한 성전에서 예수 아기를 잃었을 때, 예수님께로부터는 따뜻한 그런 어머니로서의 사랑도 받을 수 없었던 냉정한 예수님의 답만 받았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찾으셨습니까?" 아마 인간적인 측면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다 미쳐 깨닫지도 못하셨지만, 또 슬펐다는 것을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흔히 우리가 개신교 형제들이 바로 천주교하면, 어느 성당이나 마리아 상이 있기 때문에 “아,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교회구나" 이렇게 좀 멸시적인 또한 조롱적인 비난을 받아온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아는 마리아 공경에 대해서 바로 지탄하는 가장 근본적인 바탕은, 마르꼬 복음이나 다른 복음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공생활하실 때, 바로 제자들과 또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서 “주여, 밖에서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일러 주었을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며, 나의 형제들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다 나의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며, 자매입니다." 바로 이런 성서 말씀을 가지고, “보라, 진정 예수께서 마리아를 들어 높이고저 하셨다면, 이렇게 찾아왔을 때 어떻게 이렇게 냉정하게 말을 할 수 있었던가?" 이렇게 개신교에서는 성서의 말씀을 해석하고 있지만, 우리 가톨릭에서는 이런 성서 말씀이야말로 들어 높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말씀이라고, 다시 역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나의 어머니라고 해서, 이분을 공경하라고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좀더 유치한, 또는 육체적인 것을 강조한 조소를 받을 수 있는 그러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서 그리스도가 강조한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따르는 자, 그가 바로 내 어머니며, 형제며, 자매이다."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형제, 자매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신앙의 견지에서 마리아 보다 누가 더 하느님 말씀을 듣고, 또 그 뜻을 따를 수 있었던가?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성모 마리아야말로 바로 두 가지 의미에서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낳아서 길러주신 육체적인 어머니 일 뿐 아니라, 영신적인 측면에서도 마리아에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에, 바로 진정한 영신성의 어머니로서의 그러한 자격도 지니고 계시다고 것, 즉 신앙에 있어서 우리의 표양과, 우리의 길잡이가 된다는 것을 이러한 성서 말씀에서 우리가 연역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 어려운 지경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각자가 체험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로 수용소, 감옥, 또는 갇혀서 있을 때, 바로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알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들의 조그마한 체험을 기주로 해서 마리아께 적용시킬 수 있다면, 적어도 항상 감옥에 갇혀있는 학생들에게 힘을 주는 원천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를 길러주고 이끌었던 어머니 였다는 것,



어머니가 넣어준 하나의 선물을 받고서 그들이 항상 울었을 때, 그들이 울고 있는 것은 그들의 고통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때문에 고통 받고 있을 그러한 밖에서 계신, 부끄러운 죄수들의 대열에 계신 그런 어머니의 그런 모습 때문에, 더욱 마음 아파한다는 것, 이것이 그 학생들의 마음을 울려주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목사님들과 개신교 형제들이 마리아에 대한 공경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과 거부 반응을 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아내와 자녀를 항상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로소 갇혀있을 때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인간학적인 견지에서 가장 깊게 느낄 수 있었다는 것, 그 누구보다도 바로 한 몸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딸, 아내가 자기의 목숨을 걸고서 그런 현장에 뛰어 들어 올 수 있었다는 것,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갇혀있는 그런 현실보다도, 밖에서 안타까워하는 바로 어머니와 가족들에 대해서 더 마음 아파하는, 또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의 고백을 우리가 다시 옮길 수 있다면, 그들도 천주교에서 마리아를 공경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를, 자기들의 고통의 길, 십자가의 길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계신 예수님이나, 또는 그 밑에서 그러한 죽음을 처절하게 쳐다보시는 마리아, 그 둘은 별개의 고통이 아니라, 바로 하나의 고통을 말하고 있고, 또한 동시에 예수의 부활과 함께 성모의 승천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같았기에, 스승이 같았기에,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영광과 또한 승리가 같다고 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어머니의 사랑을 우리들은 희생의 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성체성사 축일을 지냈습니다. 그 때 성 토마스의 성체 찬가에서 우리는 주 예수의 사랑을 펠리칸이요, 이렇게 펠리칸이란 노래를 그리스도께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펠리칸이란 새는 북 아프리카와 중동 지방 신화에 나오는 하나의 상징적인 새로서, 그 새는 바로 먹이를 주면서 새끼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피를 직접 자기 새끼에게 줌으로써 양육하고 보호하고 영양을 준다는 이런 의미를 지닌 새 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래서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의 의미를 다른 먹이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 몸과 피를 우리에게 완전히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사랑의 펠리칸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렇듯이, 이러한 사랑의 원천인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피와 살을 준, 그 주인공이 성모 마리아일진대, 우리는 어머니들의 사랑과 비교해서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의 사랑 중에 최고의 극치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사랑을 이해할 때, 길가에서 놀던 자녀들이, 차도에서의 위험, 또는 기차 길에서의 위험을 항상 당했을 때, 자기의 위험을 무릎쓰고도 그 자녀를 구하기 위해서 그러한 죽음의 현장에 뛰어드는 내적인 힘이야말로 천주성신의 힘인 것입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를 이끌었던 천주 성신의 힘‥‥‥ 그 힘이 이제 마리아를 통해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 힘이 우리 모두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는 것, 말하자면 마리아의 승리는 우리 모든 인간이 그러한 길을 따라가서 승리할 수 있다는 보증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 이렇게 우리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꽃과 함께 신앙을 연결 지을 수 있겠습니다.

  

사도행전 첫 장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12사도와 함께 성모 마리아가 기도 바쳤던 그러한 사실에서, 교회가 어렵고 고통스럽고, 또한 위험에 직면해 있었을 때에, 마리아를 중심으로 해서 그리스도께 또한 하느님께 기도를 바칠 때, 그러한 뜻은 꼭 이루어지리라는 것, 이러한 신앙심을 우리가 오늘 묵상하고, 배울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성서적 바탕을 통해서, 하나 오늘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성모 마리아 하면 너무나 아름답게 꾸며진, 우리와 무관한 먼 하늘에서 온 여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도처에서 발견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또 우리의 주위에서, 우리의 직장에서, 우리의 삶의 주변에서 마리아를 만날 수 있고, 우리의 자신이 마리아가 될 수 있다는 것, 가정의 어머니들과 할머니들, 특히 여성들은 이러한 사랑을 기초로 해서 마리아의 길을 가장 완전히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에 대한 희생과 고통, 그리고 남편에 대한 희생, 또는 사회에 대한 봉사, 교회에 대한 신앙의 증거, 이 모든 것이 바로 마리아의 뒤를 따라가는 또 다른 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누구든지 성모 마리아가 될 수 있고, 성모 마리아가 될 수 있다는 그것은 그와 함께 승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하나의 보증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이렇게 아름답게 꾸며진 성모상이라든지, 성전에 모셔진 성모상, 또는 아름다운 성화를 볼 때, 아름다운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성모 마리아야말로 미켈란젤로가 자기의 한 평생의 노작으로서, 마리아에 대한 극치를 십자가상에서 이렇게 고통 받았던 아들을 자기 몸에 안고 있었던 그러한 조각작품, 즉 삐에따 상에서 마리아 모성의 극치를 드러낸 것을 묵상해 볼 때, 고통받는 삶과 가정에서의 희생의 삶을 지내는, 그러한 여성의 얼굴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 중에서 기쁨의 빛이 환히 비출 수 있다는 것, 말하자면 마리아는 우리와 아주 가장 가까이 우리의 부엌에서, 우리의 삶에서, 또는 우리의 사회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각자 각자 우리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마리아상을 아름답게 닮을 때, 바로 성모의 밤의 기도의 열매가 우리에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태리의 어느 사제가 마리아에 대한 훌륭한 책을 쓰면서. 책의 첫 페이지에 나를 위해서 기도 바쳤던 나의 어머니, 그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도록 자기 손에서 묵주를 떨어뜨리지 않고, 수 백번, 수 만번 굴렸기에, 내가 성실한 사제로서의 길을 걸어 올 수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이 책을 마리아께, 그리고 나의 어머니를 통해서 봉헌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헌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이러한 신앙인의 자녀를 이끌어 준 것이, 역시 우리 어머니들의 사랑일찐대, 이러한 사랑의 원형을 우리가 마리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가정적일 수 있고, 가장 인간적일 수 있는 것은, 한 여성, 우리와 똑 같았던 한 어머니의 사랑을 음미하면서, 다시 한번 묵상하면서, 이렇게 주위에 모여 있다는 것이, 교회가 가정이라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진정 마리아를 통해서 기도 바칠 때, 그러한 기도는 언젠가는 꼭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은 가나의 혼인 잔치의 기도에서, 마리아의 기도가 얼마나 효과를 냈는가를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또한 실감할 수 있고 결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5월달의 모든 것, 우리 아쉬웠던 점, 우리 가정을 위해서, 우리의 자녀를 위해서, 우리 남편을 위해서, 얼마나 성실한 삶을 지녀 왔던가? 이렇게 반성하면서, 5월을 다시 종합하면서, 마리아께 하나의 열매로서 찬미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친 이러한 기도는 꼭 커다란 30배, 60배, 100배의 결심을 우리에게 또 우리 가정에, 우리 본당에 내려 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 교회가 오늘도 마리아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모님께, 한 여인이 걸어간 이러한 길을 음미하면서, 창세기, 이사야서, 미케아 그리고 복음서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음미하면서, 마음의 기도를 잠깐 바치겠습니다.



 (기도)

   

5월을 보내면서 한 달을 묶어 하나로 만들고 싶습니다.

어린이 달, 청소년의 달, 또한 우리 모든 어버이의 달 일 수도 있는 5월, 꽃피고 아름다운 달, 이 5월을 저는 어떻게 보냈나, 한번 반성해 보고, 다시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이 달은 또한 성모의 달이었는데, 나는 정녕 신앙인의 자녀로서 정성껏 기도 바쳐 왔습니까?

  

나는 진실로 기도 올린 적이 있습니까? 나는 내 자녀인 어린이를 위해서, 또는 청소년을 위해서 무엇인가 뜻 있는 일을 하였습니까? 나는 나의 남편, 아내, 가정, 또한 부모님께 얼마나 성실하였습니까? 나는 나의 임무, 책임, 나의 일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신앙에 충실하였습니까? 나는 이웃에 사랑을 실천하였고, 그 의무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었습니까? 이 모든 것, 너와 나와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고 싶어, 나는 이 밤 5월이 가고 꽃이 지고, 포근한 이 밤에 나의 마음을 하늘로 올려 보아야만 하겠습니다.

  

때묻고 헝크러지고, 더럼에 집착되었고, 병들었던 그 모든 것을 훌훌 떨어버리고, 내 모습을 다시 살피며, 깨끗이 닦아야 하겠습니다.

밤하늘의 별, 그것은 내 마음의 거울입니다. 기도 바치는 성모님의 모습, 또한 그것도 내 마음의 거울입니다.

길잡이 구실을 충실히 해오는 가장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기쁨과 사랑, 그리고 모두의 뒷  바라지를 위해서 헌신하는 가정의 주부들 엄마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는 이날, 이 날은 주위가 가장 아름답게 나타나는 날이며, 한 가정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마리아 앞에 모인 우리들, 우리들은 성모님이 걸어간 그 길을 살펴봅시다. 그 길은 정녕 한 인간이, 한 여인이, 한 어머니가 걸어간 길이였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나의 가정에서 내 사회에서 이 길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밤, 마음의 거울을 보며, 기도 바치는 이 밤, 우리는 한 성실한 신앙의 여인이 주는 깊은 의미를 깨닫고, 앵무새가 아닌, 형식적이 아닌, 진실한 나의 기도를 바치고 싶습니다.

  

씨가 뿌려지고 꽃이 피면, 언젠가는 꼭 열매를 맺게 줍니다.

5월이 가는 이 밤, 나는 더욱 큰 희망을 안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마음의 기도를 저 하늘로 날려보냅니다.

  천주의 성모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아 멘.











4.                              성모의 밤

                                                                     함세웅 신부



5월은, 한 달을 묶어 하나로 만들고 싶습니다. 어린이 달, 청소년의 달, 그리고 또한 어버이의 달일 수도 있는 5월. 꽃피고 아름다운 달, 이 5월을 나는 어떻게 보냈나 한 번 반성하고 다시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이 달은 또한 성모님의 달이었는데, 나는 정녕 ‘신앙의 자녀'로서 정성껏 기도를 바쳐왔는가. 나는 진실로 기도를 올린 적이 있는가. 나는 내 자녀인 어린이를 위하여, 청소년을 위하여 무엇인가 뜻 있는 일을 하였는가. 나는 나의 남편, 아내, 가정 그리고 부모님께 성실하였는가. 나는 나의 임무, 나의 책임, 나의 일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신앙에 충실하였는가. 나는 이웃 사랑의 의미를 진정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실천하려고 노력했었는가.

  

이 모든 것, ‘너'와 ‘나'와 ‘우리'의 모든 것을 또 하나로 만들고 피어나는 이 밤, 5월이 가고, 꽃이 지고, 봄이 가는 이 밤에 나의 마음을 날려 봅니다. 때묻고, 헝클어지고, 더러워지고, 집착하고, 옹졸했던 그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내 모습을 다시 살피며 깨끗이 닦고싶습니다

  

밤 하늘의 별, 그것은 나의 거울입니다. 기도를 바치는 성모님의 모습, 그것도 나의 거울입니다. 귀엽고 순진한 어린이들의 찬미, 묵주알을 굴리는 할머니들의 정성, 희망 속에서 미래를 꿈꾸는 중고교생, 삶의 진지한 의미를 찾고 선택을 하려는 청년들, 지나온 일을 생각하며 무게있는 미소를 짓는 노인들, 힘든 여정에서 길잡이 구실을 충실히 하려는 가장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기쁨과 사랑, 그리고 모두의 뒷바라지를 위해서 헌신하는 가정의 주부들과 엄마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날입니다. 이 밤은 교회가 가장 가정적이며 인간적인 모습을 나타내 줍니다.

  

성모 마리아님 앞에 모인 우리들, 우리들은 마리아가 걸어간 그 길을 살펴봅니다. 그것은 정녕 한 인간이, 한 여인이, 한 어머니가 걸어갈 길이였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나의 가정에서, 내 사회에서, 내 본당, 내 교회에서, 내 이웃에서 이 길을 볼 수 없을까.

그렇습니다. 이 밤, 거울을 보며 기도를 바치는 이 밤, 나는 성실한 한 여인이 주는 깊은 의미를 깨닫고, 앵무새가 아닌 참되고 진실한, 그 ‘나'의 기도를 바쳐 봅니다. 꽃이 지면 열매 맺게 되리라. 5월이 가는 이 밤, 나는 더 큰 희망을 안고 하늘을 쳐다봅니다. 











5.                      성모성월 강론

                                                                 이기명 신부



이제 우리는 5월의 성모성월을 맞이했습니다. 주위에 온갖 수목과 화주들의 새로운 생명이 피어오르는 봄을 맞이했습니다. 주위에는 꽃의 화려함! 나날이 짙어만가는 나뭇잎들! 벌, 나비 이름 모를 새들까지 그 사이를 누비며 우짖어 대어, 사람의 메마른 마음까지도 부드럽게 적셔주는 봄의 새 생명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어린 시절 철모를 때 동산에서, 잔디 위에서 뛰놀며 딩굴던 동심을 그리워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러한 봄의 수목과 화주들이 자리잡고 있는 그곳! 울창한

수목들이 자기의 새 생명을 노래하며, 자랑하고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생활 속에서 별로 고맙게 여겨 주지도 않는 「흙」입니다.

  

꽃이 저만 고운 것처럼 자랑하지만, 그 밑에는 비옥한 흙이 뿌리를 감싸고 있는 것이며, 아무리 울창하게 치솟은 나무가지라도, 풍만한 흙이 긴 뿌리를 덮어주며 지켜 주지 못할 때 그 나무는 시들어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흙은 칭찬 한마디 듣지 못하면서, 그러한 꽃과 나무를 감싸며, 지켜주고 키워주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뭇 짐승에 수없이 짓밟혀도 마다하지 않고, 더러운 것도, 냄새나고 보기 흉한 것도, 모두 자기 품에 받아 파묻어 주며, 침묵을 지키면서‥‥‥ 땅위에 새로운 생명을 낳아주고, 먹여주고 키워주며 가르치는 대자연의 어머니 노릇을, 글자 그대로 마다하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대자연을 통해서도 주께서 우리에게 일러주듯이, 오늘에 누가 자기자신을 떳떳이 자랑할 수 있다면, 자신을 만족하게 여기기 이전에,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이 있었음을 깊이 알아 항상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류는 어머니의 공적을 칭송하기를 : “어머니의 희생 없이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은 없고, 어머니의 자비심 없이 홀로 키워진 위인은 없다"고 합니다. 사람은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을 물고,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으로 웃음을 처음 배웁니다.

또한 맨 몸으로 태어나서, 모든 것을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에만 의지했던 어린 생명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의 바탕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부터 갖게됩니다.

 

이와 같이 오늘의 우리가, 떳떳이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을 뿌리내리게 한 온상이, 다름 아닌 부모님의 회생과 사랑에 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에 나를 생각하기 이전에, 나를 위해 희생과 사랑을 바치신 부모님의 마음과 그 정성을 알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화초와 수목이, 흙으로부터 수분을 못 받을 때 말라죽듯이, 그러한 부모의 회생과 사랑을 어느 누가 받지 못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으며, 부모가 계셔도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 얼굴에 웃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처지를 마음 아프게 표현한다면, 우리는「고아」라고 부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으시고, 죄 중에 죽을 우리에게 천상생명을 낳아 주시며 보살펴 주시는 어머니를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9,27에서 보면 : 성자 예수께서는 골고타 십자가상에서 구원의 문을 여시며 -

    “어머니, 이 사람은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분이 당신의 어머니요!" - 하시는 말씀으로, 당신 모친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천상 어머니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어떻게 모시고 있습니까?



마치 어미 닭이 제 새끼를 날개 밑에 품어 보호하려고 노력하듯이! 성모님은 우리 구원의 모친으로서 죄 많은 우리들을 당신의 자녀로서 키워주시려고 사랑을 베풀고 계시지만, 그러나 우리들은 기회만 있으면 어머니의 사랑을 거부하고, 모정과 사랑에 메말라, 마음은 성모님 곁을 떠나 삐뚤어지기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성모님은 우리의 육신생명은 직접 낳아 주시지는 않았을 지라도, 육신보다 더 귀한, 영원한 죄의 죽음에서 천상 새 생명을 주시며, 보살피시는 천상 어머니로서의 쏟아주시는 그  정과 그 마음은, 어떠하시다고 표현하겠습니까!

구세주 성자를 잉태하여 낳으시고, 기르시고, 그 아드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언제나 지극한 정성으로 뒤따르시던 똑 같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죄 많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보시며 보살피시는 성모님의 정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저버린 곳에, 남녀간의. 부부지간의 참된 사랑도 있을 수 없고, 참된 우정도 있을 수 없으며, 건실한 삶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떠나서는 인간의 모든 정이 금이 가는 것이며, 있다 해도 길지를 못합니다. 이유는 자연스럽고 순수한 사랑의 바탕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모정의 결핍은 어떠한 성품을 만드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우리의 안전한 구원도 성화도 가질 수 없고, 기대하기도 어렵다고 옛 성인성녀들은 일러주고 있습니다.



대지가 모든 생물에게 주는 고마움!

세상의 어머니가 자녀에게 주는 희생과 사랑의 고마움! ‥‥‥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영원한 죄의 죽음에서 천상생명으로 우리를 보살피시는 천상 어머니께, 자녀인 우리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 살펴보며, 5월의 성모님의 달을 더욱 의의있게 보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6.               성모의 밤 <로마 5,12-21/루가 1 46-56> 가장 복된 여인

                                                        강영구 신부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5월 성모님의 달을 맞아서 성모님의 믿음과 겸덕을 본받고, 성모님의 전구(轉求)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5월은 축복의 달입니다. 성모님의 믿음과 겸덕을 기리면서 성모님을 공경하는 달이기도 하지만, 이 달은 가정의 달이며 어버이의 달입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의 달이기도 합니다. 5월은 모든 생명들이 푸르게 되살아나는 달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축복 가득한 달에 주님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어머니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앞에 모여서, 자녀들인 우리의 기도를 꽃다발처럼 엮어서 바치며, 성모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청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며 기쁜 일입니다. 이 밤에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사랑으로 충만한 은총 받으시기를 빕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있습니다. 사람, 동물, 식물, 곤충, 그리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살아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생명체들은 어머니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어머니 없이 이 땅에 생겨나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생명의 관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밤에 성모님 앞에 모여 온 것은, 성모님이 이 땅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 주셨고, 그래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그 크신 믿음과 겸손으로 우리 인류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 창세기를 보면,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낙원에서 쫓겨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짝으로 지어내신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서 스스로 하느님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교만함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인간의 죄는 시작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채 고통스러운 삶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밤 우리가 기리는 성모님은 겸손과 순명,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채 살아가던 우리 인류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주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는 구세주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를 받으시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시고자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응답하셨습니다. 마리아의 이 응답은 하와와 같이 하느님처럼 높은 자, 흑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겠다는 야심에서 출발한 응답이 아니라, 믿음과 겸손에서 출발한 응답이었습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겠다는 마리아의 이 결단으로 말미암아, 하와의 교만과 불순명으로 인해 어둠 속에 살고 있던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의 시대, 메시아의 시대가 막을 열게 된 것입니다.

 

나자렛이라는 시골 마을의 이름 없던 처녀 마리아가 이토록 엄청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남다른 재능이나 재주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마리아가 남다른 큰 믿음과 겸손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1장 20-21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면,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는 사람이므로, 이처럼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믿음입니다.



자신을 주장하거나 내세우지 않는 사람, 자신을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겸허하게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철저히 자신을 비워서, 하느님의 뜻으로 충만코자 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처녀 임신하여 고민에 빠진 마리아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또한 복되십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칭송하고 오늘 우리도 성모송을 외울 때마다 마리아를 복되신 분이라고 일컫는 것은, 마리아가 믿음과 겸손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구원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지, 다른 무슨 세속적인 명예와 영화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마리아의 복됨은 이렇게 믿음과 겸손을 바탕으로 한 복됨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는 마리아에 대하여 그렇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고,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기 위하여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서가 마리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대목들은 예수와 관계되는 곳에만 국한하고 있습니다. 복음서가 오늘 우리에게 마리아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 역사에 있어서 마리아의 역할을 과소 평가하거나 성모 마리아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믿음으로 하느님 구원 역사의 도구가 되기로 결단하신 어머니 마리아 없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고, 또 인간으로서 마리아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깊이 동참하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으시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심으로써, 인류 구원의 문을 여시는 마리아(루가 1,38),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낳으신 마리아(루가 2,1-7), 아기 예수와 함께 헤로데의 손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난살이를 떠나신 마리아(마태 2,13),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봉헌하시는 마리아(루가 2,22), 12살의 소년 예수와 함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참배하시는 마리아(루가 2,41),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께서 첫번째 기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실 때 거기 함께 계시는 마리아(요한 2,1),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 사업을 성취시키고자 고통받으시고 숨을 거두실 때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신 마리아(요한 19,25),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교회가 그 모습을 드러낼 때 거기 함께 계신 마리아(사도 1,12-14)‥‥ 이렇게 마리아는 인류 구원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는 언제나 그 자리에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

  

마리아는 단순히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낳으심으로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라기보다, 그 누구보다도 큰 믿음으로 아들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셨고, 아들 예수께서 구원 사업을 성취시킬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심으로써, 어머니의 역할을 다하신 분입니다. 교회가 마리아를 어머니로 받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복됨과 위대함은 이렇듯 자신을 송두리째 비워서 평생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신 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응답하셨기에, 당하셨을 그 큰 고통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마르 8,34) 하신 아들 예수의 말씀대로 사신 분이고, 묵묵히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아들 예수의 뒤를 따르신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자신을 곧게 세우시고, 겸손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시어 흔들림이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그래서 복된 여인이며, 구세주의 어머니이시자, 교회의 어머니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듯 마리아 역시 인류에게 구원의 문을 여신 생명의 근원이시기도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은 단순히 마리아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누구보다도 큰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겸손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로 공경하는 우리는 마리아의 믿음과 겸손을 본받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믿음 안에서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삶에 지쳐서 고달플 때에 성모님의 모습을 바라본다면,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온갖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하시며, 꿋꿋하게 서 계시던 마리아의 모습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외로움에 빠졌을 때도 성모님의 모습을 바라본다면, 성모님은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으로 우리를 감싸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 십자가 아래서 계시던 성모님을 바라본다면, 큰 용기와 희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시면서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하셨던 성모님께서 힘없는 우리를 믿음의 팔로 부축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손에 촛불을 밝혀 들고 성모님의 발아래 모여와 성모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이 밤은 참으로 좋은 밤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을 본받는 성실한 자녀가 될 것을 다짐하면서 성모님의 사랑과 전구를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축복이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통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풍성히 내리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7.                  성모의 밤              우리의 어머니

                                                                  성민호 신부





때는 바야흐로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꽃향기 그윽한 화창한 봄철입니다. 교회가 일년 중 가장 지내기 좋고 마치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한 5월을 성모성월로 정한 것도 성모 마리아의 훈훈한 사랑을 더욱 느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특별한 정성으로 성모님을 모시고, ‘성모의 성월이여'를 노래하며 마음껏 찬미합시다.

  

옛날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늙은 어머니를 고려장시키려고 깊은 산중으로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식 등에 업혀 산중으로 가는 도중, 내내 그 어머니는 나뭇가지를 꺾어 하나하나 땅에 떨어뜨렸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자식이 늙은 어머니를 놓아두고 돌아서려 할 때, 그 어머니는 자식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얘야, 네가 돌아갈 때 혹시 길을 잃을까봐 걱정이 되어, 이곳에 오는 동안 나뭇가지를 꺾어놓았으니 잘 찾아가거라." 이 말을 들은 자식은 어머니의 조건없는 사랑에 그만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청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일이지만,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보살펴주시는 자애로운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에는 언제나 포근한 기쁨을 느낍니다. 때로는 사랑스런 어머니를 생각만 해도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용기와 힘이 솟아납니다. 세상의 어머니들도 이럴진대, 하물며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천상의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에겐 그지없는 영광이요 행복입니다.


 그러면 먼저 하느님이 정해주신 우리의 천상 어머니는 어떤 분이신지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언제나 하느님께 순종하는 여종의 정신을 간직하고 기쁜 마음으로 맡겨진 일을 완수하셨습니다. 성가정의 주부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집안 일을 알뜰히 보살폈으며, 일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장부 요셉에게 존경과 사랑과 순명으로 내조하였으며, 아들 예수님을 정성껏 보살펴드렸습니다.

  

참으로 성모 마리아는 인간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인 현모양처이셨으며, 성자의 모친으로 선택되시기에 충분한 덕을 쌓은 분이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위대한 분으로서 당연히 우리의 찬양과 존경을 받으셔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천주 성자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놀라운 사실 한 가지만 생각해도, 그분께 아무리 지나친 공경을 드린다 한들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찬사와 아름다운 글귀를 다 동원한다 하더라도 성모님의 높으신 품위와 놀라운 덕행과 자애로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마치 유명한 예술가의 걸작품을 예술의 '예'자도 모르는 사람이 충분히 감상하거나 논평할 수 없듯이, 우리도 성모님께 아무리 지나친 공경을 드린다 해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옛부터 그분께 더욱 어울리는 찬미가, 기도문 축일 예술품을 만들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일부 갈라진 형제들은 우리의 진심도 모르고, 성모 마리아를 지나치게 공경하는 마리아 교회라고까지 비난합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자기 어머니를 칭찬하고 받들어 모신다고 야단하거나 싫어하겠습니까? 우리가 스승이나 친구 또는 배우자를 사랑한다면, 그들의 부모나 형제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낳아주신 어머니도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예술품을 찬양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창작한 예술가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걸작품인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는 것 역시, 따지고 보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성서를 보더라도, 성모님은 합당한 찬미와 찬사를 받으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명을 받고 마리아에게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고 인사하였고, 엘리사벳도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소리로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외쳤습니다. 또한 어떤 부인도 주님께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7"라고 외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일찍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실 때부터, 하느님의 인류 구원사업에 깊숙이 동참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구세주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아서 길러주셨고 그분과 함께 일생을 같이하면서 전도여행을 도우셨으며, 마침내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고통에 참여하시어, 십자가상 제사의 한 물을 천주 성부께 바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과 함께 성령을 받으시고, 초대교회 창립을 도우셨으며, 지금도 천국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가장 밀접하게 구세주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분의 인류 구원사업에 지대한 공을 세우셨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성모 마리아를 주님과 함께 인류의 공동 구속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모친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로 주셨을 뿐 아니라, 받들어 모실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마땅히 그 지체들인 우리의 어머니가 되셔야 하기에, 주님의 십자가상 유언은 너무도 당연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는 주님의 모친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어머니로서 찬양과 존경과 효도를 받으셔야 합니다.

 

성모님은 장차 많은 사람이 당신을 찬양할 것을 예견하시고, 저 유명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즉 마니피캇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당신을 복되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천한 여종의 신세를 돌보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덕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노랫가락만을 보더라도 성모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교회 헌장은 성모 공경이 우리 신심의 기초임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언하고 있습니다. “성스런 공의회는 복된 성모 마리아께 대한 공경을 철저히 행하도록 권하는 바입니다 ‥‥어떤 이는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그리스도께만 드릴 공경을 위태롭게 한다며 업신여기지만, 많은 형제들이 아직 갈라진 상태 하에서도 마리아께 대한 가톨릭의 교리를 고상하고 객관적 교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께 대한 공경이 아무리 열광적으로 나타난다 해도, 마리아는 인간인 이상 천주 성삼께 바쳐지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특은으로 모든 피조물 위에 높여진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시며, 우리의 어머니로서 초창기의 교회에서처럼 오늘도 당신의 전구로써 전 인류가 참된 자유와 행복 속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도록 도와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

  

우리가 어떤 분에게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직접 청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우면 그분과 가까운 분을 통하여 간접으로 청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은총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느님께 직접 청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분께 직접 청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미약하고 부족한 존재들이라고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강력한 전구자(배경) 성모 마리아가 계시기 때문에 안심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소박한 소원과 함께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십사 하고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간청합시다. 하느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리들이기에 성모님께 그 은혜를 부탁드립시다. 우리의 영혼과 육신, 현세와 후세에 필요한 도움, 특별히 보람있는 삶과 영생을청합시다. 그러나 우리의 욕심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시다.

  

마지막으로, 성모 마리아께 청할 줄만 알고 바칠 줄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성모님이 기뻐하시는 선물을 바치도록 합시다. 탐스러운 꽃, 아름다운 노래도 좋지만, 가장 좋은 선물은 역시 마음의 꽃다발입니다. 우리 자신을 성모님께 바치는 파란 꽃다발, 이웃사랑을 다짐하는 빨간 꽃다발, 선행과 봉사를 약속하는 노란 꽃다발, 순결한 마음의 옥잠화 꽃다발, 로사리오로 엮어진 장미 꽃다발,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려는 향기로운 꽃다발을 바칩시다.

  

현대는 불신과 불안, 고민과 갈등, 불목과 전쟁이 팽배한 시대이며 갈수록 인간성이 상실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아쉬운 것은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입니다. 천상 어머니의 사랑은 여러 곳에 나타나 하신 말씀을 미루어 볼 때, 반드시 인류평화를 약속해 주실 것입니다.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도 험악하고 위험한 현대사회를 구제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천상 어머니께 의탁하는 길밖에 없음을 아시고, 교회를 하자없으신 성모성심께 봉헌하시면서 당신과 뜻을 같이할 것을 우리에게 명하였습니다.

  

우리 다 같이 성모님의 자녀로서 사랑과 평화의 사도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하신 성모님의 정신이 바로 우리의 신앙태도여야 함을 명심하면서 정성껏 성모 마리아를 찬미합시다.

8.              성모 성월 (1)        <성모 마리아의 삶을 본받자!>



5월은 성모성월이요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계절의 여왕이리고 부르는 이 5월에 교회가 특별히 성모 마리아를 기리며 그분을 본받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인류 구원계획에서 성모 마리아가 차지하는 위치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마리아는 일생을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하심으로써 구세사에서 탁월한 역할을 하셨다. 동정녀의 몸으로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마리아는 천사의 전갈에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심으로써, 구세주의 모친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은 단지 예수를 낳으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면서,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듯이 아픈 예언의 말씀을 들었을 때나, 사랑하는 아들이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을 때, 그리고 마침내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마리아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면서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던 것이다,

  

이로 인해 마리아는 구원사업의 가장 위대한 협력자가 되셨고, 교회의 전형이자 또한 모든 믿는 이들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교회가 마리아를 모범으로 삼아 각별한 공경을 바치면서, 그분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모 성월을 맞아 마리아께서 온 생애로 보여주신 겸손과 순명의 모범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아, 순경에서나 역경에서 항상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며, 그분의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기를 모든 신자들에게 당부한다.

  

더욱이 우리는, 이 5월에 가정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가정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시 되새기는 가정의 달을 지낸다. 사회의 기본 세포인 가정은 인간 공동체를 건설하고 지탱하는데 힘이 되는 사랑과 일치의 원천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 가정은 '집안 교회'로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꽃피우고 드러내는 일차적인 장소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많은 가정이 이러한 고유한 품위를 지키지 못한 채 위기에 처해 있거나, 해체되기도 하는 슬픈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또 최근의 가정위기는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탓 못지 않게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정의 위기는 곧 가정 자체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심각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신뢰와 사랑으로 가득찬 가정을 가꾸어가기를 바란다. 특히 그리스도인 가정은 언제나 기도 안에서 힘을 얻고 가정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노력함으로써 가정 생활의 모범인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 가정을 닮아가기를 당부한다.

  

나아가 어려움에 처해있는 이웃 가정에 대해서도 형제적 사랑으로 다가가, 그들의 아픔을 나누는 가운데, 그 가정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

주기를 바란다.










9.                         성모성월 (2)



               성모성월의 유래와 의미



성모성월은 동방교회에서 먼저 지내기 시작했다. 이집트 중심의 콥틱 전례는 11세기부터 예수의 탄생과 예수를 낳은 마리아를 찬미하기 위해 12월10일부터 1월 8일까지를 성모성월로 지냈다. 이 기간 중 신자들은 성탄을 준비하기 위해 단식을 하고 마리아와 관련된 내용의 기도를 한 달간 매일 저녁에 바쳤다.



비잔틴 전례는 13세기부터 8월을 성모성월로 정해 8월15일 ‘성모안식 대축일(오늘날의 성모

승천대축일)' 전 15일간 단식하고 이후 15일은 축제의 연속으로 기쁨을 표현했다(한국가톨릭대사전 제7권 참조),

  

서방교회는 일반 민중들의 봄 축제나, 5월 축제가 서서히 그리스도교화함에 따라 13세기말부터 5월을 성모성월로 봉헌하는 관습이 생겼다.

5월과 마리아를 처음으로 연관시킨 사람은 카스틸랴의 왕 알폰소 17세 (1221~1284)로 그는 5월이 주는 자연의 풍성함을 노래하며, 영적으로 풍요함을 가져다주는 마리아에게 기도할 것을 권고했다.


로마에서는 필립보 네리 (1515~1595) 성인이 젊은이들에게 5월 한달 동안 성모 마리아에게 꽃다발을 바치거나,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선행으로 마리아를 공경하도록 함으로써 미약하나마 성모성월을 지내기 시작했다.

  

5월이 성모성월로 구체화된 것은 17세기말부터다. 피렌체 부근 도미니꼬회 수련원에 1677년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한 단체가 생겨, 이 지역의 5월1일 마리아 축제를 지내다가 1701년부터는 5월 한달 동안 매일 축제를 열었다.

  

성모성월 신심행사는 그 뒤 프랑스와 스페인 벨기에․스위스․독일 등지로 퍼졌으며, 1758년과 1785년 '성모성월' 책자들이 출판되면서, 이를 정착시킨는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교황 비오 9세가 1854년 12월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 교리를 반포한 후, 마리아 공경은 절정에 달해 성모성월 행사가 장엄하고 공적으로 거행됐다. 역대 교황들도 성모성월 신심을 잘 지켜가도록 권장했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교서를 통해 “성모성월 신심이 엄격한 의미에서는 전례에 속하지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전례적 예배행위로 간주할 만한 신심"이리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교항 바오로 6세도 1965년 발표한 ‘성모성월에 관한 교서'에서 “성모성월은 세계 도처의 신자들이 하늘의 여왕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달"이라고 말했다.



         올바른 성모 신심



성모성월 신심행사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돼 있다. 한국교회도 다른 성월에 비해 성모성월 행사를 장엄하게 거행하고 있다. 각 본당마다 성모상을 아름답게 꾸미고 ‘성모의 밤'을 거행하거나 매일 성모성월 기도회를 봉헌하고 있다. 특히 성모의 밤 행사 때에는 마리아에게 드리는 시낭송, 성모호칭 기도, 꽃이나 촛불 봉헌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성모에 대한 공경을 드러내고, 성모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한다.



이는 한국교회 신자들이 그만큼 성모신심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모에 대한 신자들의 공경을 그리스도께 대한 흠숭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성모에 대한 사랑과 공경이 크면 클수록,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마리아 공경이 그리스도와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잘못된 성모신심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헌장은 마리아와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연관성, 마리아와 교회와의 친근한 관계, 마리아와 우리와의 관계(제8항)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도 1974년 발표한 교황 권고 ‘동정마리아 공경'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예배의 본질적 요소이므로, 마리아 공경을 적절히 가르치면, 신자생활에 있어 사목적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리아 공경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그리고 우리에게 오셨듯이 우리는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께' 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일치를 이루는 데 마리아가 옆에서 도와주기 매문이다.

우리 신앙에서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다. 다만 마리아는 예수와 뗄 수 없을 만큼 예수와 합치된 분이어서, 마리아와 일치할수록 예수와 일치하게 되고, 예수와 일치할수록 마리아와 일치하게 된다.

결국 성모신심의 핵심은 마리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마리아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를 생활의 전부로 삼아서 살아가는데 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께 가는 지름길이리고 할 수 있다.

  

교황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리아 신심운동이 기적이나 발현에 치우치지 말고, 전례적인 공경 안에서 올바로 행해져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또 성모신심의 대가인 성 루이 몽포르(1673~1716)는 마리아에 대한 잘못된 신심과 참된 신심을 이렇게 구분했다. 잘못된 성모신심을 가진 신자들은 마리아에게 신심은 있으나, 자기 중심적인 신심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성모를 공경하는 이들을 무시한다.

또 성모 공경이 마치 그리스도께 대한 공경을 감소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으로 우려하는 경우

 도 있어서, 이런 신심을 가진 사람은 성모에게 드리는 기도가 성모를 통해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심 없이 형식적이고 외적인 신심행위에 치중하고, 현세적 욕망에 빠져 살면서도 외적 신심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잘못된 신심이다. 항구성 없이 기분에 따라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열렬하다가 냉랭해지는 경우, 자신의 어떤 유익을 위해서나, 재난을 피하기 위해 마리아에게 의지하고 기도하는 경우, 위선적인 신심 등도 잘못된 신심에 해당된다.



이같이 잘못된 신심을 극복, 마리아와 일치해 성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와 결합함으로써 완덕에 이르는 참된 성모신심은 무엇보다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올바른 성모신심을 위해 무엇보다 마리아가 어떤 분이고,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히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성모의 겸손, 생생한 신앙, 하느님께 대한 순명,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사랑, 인내와 극기, 절제, 지혜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마리아의 성덕을 제대로 본받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10.                   성모성월 (3)



교회는 특정한 달을 정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 성인들께 봉헌하며 은총을 청하고, 신앙의 모범을 따르도록 노력한다. 5월 성모성월은 성모신심을 특별히 복돋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달이다.

451년 에페소 공의회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보급, 권장된 성모공경은 성모성월에 절정을 이룬다.

      

         성모성월의 참뜻

  

이 한달 동안 우리가 특히 기리고 되새겨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동정 마리아를 통해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시어 구원사업을 완성하셨고, 이것은「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대답한 마리아의 순종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믿음으로 순명한 성모마리아를 본받아, 하느님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 없더라도 예수님 편에 서서 생각하고, 기도하고, 협력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성모성월 기도의 참뜻이다.



            성모성월의 시작



성모께 특별한 공경을 표현하는 성모성월의 시작은 동방교회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 중심의 콥틱전례는 11세기부터 예수 탄생과 마리아를 찬미하기 위해, 12월 10일과 1월 8일 사이를 성모성월로 지냈다.



비잔틴 전례는 13세기부터 8월을 성모성월로 정해 축제를 열었다.

5월을 성모성월로 정한 것은 옛 로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로마인들은 5월이 되면 겨울 악신을 몰아내고 풍년을 기약하는 다산신(多産神) 축제를 거행했는데, 교회는 이런 미신행위들을 바꾸기 위해 중세 때부터 5월을 성모의 달로 바꿔 기도하게 했다.

서방교회에서는 13세기 말부터 5월을 성모의 달로 봉헌하는 관습이 시작됐고,

1921년 교황 베네딕도 15세가 마리아를 「모든 은총의 중개자」로 선포하면서 교회에서 공식 인정됐다.

  

오늘날과 비슷한 성모공경 예절은 16세기 성 필립보 네리(1515-1595)가 공동체적 신심행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이어졌다. 그는 로마의 젊은이들과 함께 시골길을 걸으면서 들꽃을 꺽어 성모께 바치고, 걷는 도중 짤막한 강론과 기도, 노래를 하며 성모신심을 드러냈다.

더불어 선행을 통해 성모공경을 표현했는데, 이 행사는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성모성월 신심을 위해 교회가 공식적으로 정한 전례예식은 없다.

단지 본당이나 교구, 단체별로 성모상을 아름답게 꾸미고, 「성모의 밤」 행사를 하거나 자체적으로 마련한 성체 행렬, 피정, 성월기도회,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는 특별기도 등을 마련한다.

성모성월의 대표적 행사인 성모의 밤은「말씀의 전례」양식을 빌려 새롭게 구성한 것으로, 이때 성모 마리아에게 드리는 글이나 시낭송, 성모 호칭기도, 꽃이나 촛불 봉헌 등을 한다.



           한국교회의 성모신심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높은 성모신심을 보이는 한국교회는 성모마리아와 깊은 관계가 있다.

1841년 8월 22일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의 청원으로「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를 조선교구의 수호성인으로 허락받았고,

제4대 조선교구 장 베르뇌 주교는 조선교구 내, 각 선교사들이 담당하는 구역을 성모와 관련된 호칭으로 부르게함으로써, 한국 전 지역을 성모 마리아의 보호 아래 두도록 했다.

1954년에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교리선언 100주년 기념 성모성년대회에서 한국교회를 다시 한번 더 성모께 봉헌했고,

1984년 5월 6일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명동성당에서 한국교회를 마리아에게 봉헌했다.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50년대 이후 레지오 마리애, 푸른군대, 성모의 기사회, 마리아의 사제운동 등 마리아 신심운동이 활성화돼 있다. 올바른 성모신심 성모공경은 결코 교회의 성사와 전례에 우선돼선 안되며, 교회 사목규범에 따라 마리아를 공경해야 한다.

특히 교황 바오로 6세와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리아를 신격화하거나 신심행위가 기적, 성모발현 등에 치우치지 않도록 강력히 밝혔다.



우리 신앙에서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다. 성모마리아가 교회에서 존경받는 이유는, 하느님의 지극히 거룩한 어머니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해 아들의 생애와 구원사업

에 일치한 어머니이기 때문이고, 하느님 은총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높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모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오셨듯이 우리도 성모마리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다가가는데 도움을 받는다. 성모신심의 핵심은 마리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삶의 전부로 삼는데 있는 것이다.













11.                 성화에 나타난 자비로우신 마리아



마리아의 자비는 동서방의 예술에서도 찬양을 받는다. ꡒ사랑의 동정녀ꡓ라 불리는 성화에서 마리아께서는 다시 한 번 자비와 연민의 어머니로 드러나신다. 이 성화는 아들을 어머니와 맺어 주는 깊은 애정을 강조한다. 사랑의 동정녀는 ꡒ아기를 안고ꡓ 볼을 비비시는 성모자상의 한 변형인데, 마리아의 얼굴에서는 어머니의 애정이 그대로 묻어 난다.



아기를 향하여 살짝 기울인 마리아의 얼굴은 보호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 표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1-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모상의 많은 변형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이름이 ꡒ자애로우시고 아름다우신ꡓ 성모님이다. 이 성화에서 마리아께서는 어머니의 애정으로 예수 아기를 꼭 껴안고 계신다. 어머니를 아기와 묶어 주는 애정, 그리고 어머니와 아기의 커다란 신뢰가 강조되고 있는데, 아기가 어머니의 볼에 자기 볼을 비비며 마치 어머니에게 뽀뽀하려는 것 같다.



이 유형의 또 다른 성화가 저 유명한 ꡒ블라디미르의 성모ꡓ인데, 교황님께서는 “구세주의 어머니” 33항에서 이 성화를 언급하신다. 마리아는 오른팔로 아기를 안고 있으며, 아기는 어머니를 안고 볼을 비비며 사랑의 눈길로 어머니를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동정녀께서는 보호 자세로 머리를 약간 기울이신 채 눈은 앞을 바라보시며 신자들에게 하느님이신 당신 아들을 가리키고 계신다. 10월 혁명 때에 금 치장을 떼어내고 복원한 성화는 그 예술적 영성적 광휘를 모두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이는 비잔틴 예술이 만든 성모 성화의 정수이며 가장 아름다운 성모 성화다. 러시아인들은 8월 26일, 축일 성무일도에서 마리아의 자비로우신 보호에 달아 든다.



ꡒ오 놀라우신 모후, 천주의 성모님, 당신에게서 사람이 되신 우리 하느님 그리스도께 전구하시어, 당신 도읍을 지켜 주소서. 또한 그리스도교의 모든 도읍과 마을을 위험에서 건져 주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시니, 저의 영혼을 구원하시도록 전구하여 주소서.ꡓ



성모 마리아께 대한 우리의 고찰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신 이 성부의 해를 두고 한 말씀에 이르게 된다. ꡒ이러한 투신의 폭넓은 전망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총애를 받으시는 딸,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서는 신앙인들의 눈앞에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완전한 모범으로 드러나실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구세사에서 유일무이한 사명, 오랫동안 기다려 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는 사명을 위하여 그분을 선택하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완전히 열린 마음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ꡐ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ꡑ(루가 1,38). 나자렛에서 시작되어 예루살렘의 십자가 발치에 이르기까지 그지없이 강렬하게 사셨던 그분의 모성은 이 해에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애정 어린 간곡한 권유를 하십니다. ꡐ무엇이든지 그리스도께서 시키시는 대로하여라ꡑ(요한 2,5 참조). (「제삼천년기」, 54항)

12.                 "자비로우신 어머니 마리아"



마리아에게 ꡐ자비의 어머니ꡑ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부여 한 사람은 사루그의 야고보(+ 521)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ꡐ살베 레지나(10세기)라는 마리아 기도가 보여 주고 있듯이, 나중에 이 호칭은 유럽, 특히 중세 라틴계에 널리 퍼져나가게 된다. 음악가 로마누스(6세기 초)는 ꡐ자비로우신 분께는 자비로운 어머니가 어울린다.ꡓ라고 노래한다.

증거자 막시무스(+ 662)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ꡒ그분의 자비는 단지 친척들과 아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과 원수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원수요. 반역자들인 우리 위에 당신의 자비를 쏟아 주시기 위해 그분은 참으로 자비의 어머니이시고 ꡐ자비로우신 분ꡑ의 어머니…,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어머니이셨기 때문이다.ꡓ



요안네스 키리우티스(10세기 말)는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선교에서 ꡐ자비로우신 어머니ꡑ를 잘 요약하고 있다. ꡒꡐ자비로우신 분ꡑ의 어머니께서는 자비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 그분이 살아 계실 때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접대, 중재, 필요한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를 낫게 하신 사실이 이 점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분, 사람들을 돌보시는 사랑 때문에 그녀를 선택하시고 그녀를 자비로운 어머니로 세우셨을 뿐 아니라, 그분 곁에서 중재자요. 화해시키는 자가 되게 하신 그분은 더욱더 자비롭게 되십니다. 이렇게 하여 아버지 곁에 계시는 우리의 변호인은 계속적인 탄원을 받으시고 당신 곁에 다른 변호인, 곧 끊임없이 당신의 노여움을 가라앉히시고 모든 이에게 당신의 자비와 배려가 미치게 하시는 동정녀를 두고 계시기 때문에, 또 다른 동기에 의해서 우리에 대해 호감과 결정적인 타고난 애정을 보여 주십니다.ꡓ



성 베르나르도(+ 1153)에 따르면, 만일 우리가 아버지의 자비에 호소하기가 두렵다면, 우리와 똑같이 사람이 되시고 우리의 ꡐ자비로우신ꡑ 형제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호소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 너무 크신 분이라 여겨 그분께도 호소하기를 두려워한다면, 우리 어머니시요 자비로우신 변호자이신 마리아께 호소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의 말씀을 들어주시듯이, 마리아는 당신 자녀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니케아의 테오파네스(+ 1381)는 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ꡒ그녀는 참으로 하느님의 자비이시다. 왜냐하면 그녀는 너그러움과 자비, 존속하는 사랑으로 충만해 계시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모든 자비를 당신안에 가득 채우실 수 있는 그릇이시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느님의 자비로 충만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성 알폰소(+1787)도 어머니의 눈으로 모든 이를 향하는 마리아의 눈길에 대해 강조한다. ꡒ모든 이들이 나를 자비의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사실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자비가 나로 하여금 모든 이들에게 그토록 자비롭도록 해 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이에게 이토록 자비롭고 죄인들을 돕고 싶어 어쩔 줄을 모르는 나에게 달려오지 않고 괴로움을 겪는 자는 영원히 불쌍하고 참으로 불쌍하다.ꡓ

13.               "Magnificat"



성부의 해에 우리는 ꡒ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표지이신 마리아ꡓ를 묵상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사랑을 전적으로 거저 주신다. 아버지의 이 무상의 사랑은 마리아를ꡒ은총이 충만하게ꡓ(루가 1,28항)한다. 은총이 충만하다는 것은 마리아께서 거룩하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그분을 축성하셨다는 것, 그리고 구세주의 어머니로서의 그분의 사명을 가리킨다. 마리아께서는 아버지의 이 사랑에 대해 ꡒ이루어지소서(Fiat)ꡓ와 ꡒ찬양하나이다(Magnificat)ꡓ라는 말로 응답하신다. 마니피캇(마리아의 노래)에서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신다.



ꡒ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주님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ꡓ



17세기에 마리아론으로 널리 알려진 학자인 에띠엔느 비네는 이 노래를 이렇게 주석한다.

ꡒ하느님께서는 나의 겸손을 보시고, 아니 나의 비천함을 보시고 나를 측은히 여기시어 내게 당신의 모든 은총을 다 쏟아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에게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나의 무한한 비참을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 가득 채워주시는 것을 좋게 생각하셨다.



그분께서 나를 은총으로 가득 채우시면 채우실수록 나는 더욱더 아무 것도 아닌 나 자신을 보게 되고, 내가 부당하고 약한 존재라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세가 나를 복되다 하는 것은 나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밖에 없으며 그것도 형편없는 것이다. 나를 복되다 하는 까닭은 오히려 내가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으로부터 엄청난 자비를 받았기 때문이다.ꡓ



이렇듯이 ꡒ마니피캇ꡓ의 근본 주제는 겸손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위해 가난하고 겸손한 동정녀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ꡒ마니피캇ꡓ과 더불어 마리아라는 모든 인간에 대한 아버지의 자비의 표징이 되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를 예언하는 분이 되고 그 자비를 그대로 보여 주는 분이 되신다. 사실 마리아는 갈바리아에서 그 절정에 이르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다.

성탄 때에 하느님의 자비가 육신을 취하시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동정녀는 갈바리아에서 자비로 넘치는 당신의 마음을 모든 자녀들에게 확장시키심으로써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  자비의 표지이신 마리아를 묵상하는 이 성부의 해에 우리도 우리의 비천함을 돌보시어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또 하나의 자비의 표지가 되어 마리아와 함께 피앗과 마니피캇의 노래를 불러드려야 하겠다.

- 성부의 해 교리서,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에서 -

14.                 묵주기도의 기원           박경희 기자



          라틴어 로사리움서 유래 현재 형식 15세기에 태동



묵주기도는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로 복음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묵주기도를 로사리오라고도 하는데, 이는 라틴어 로사리움 (Rosarium), 장미꽃다발에서 유래한다. 묵주기도 기원은 초기교회 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이교도들은 신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의미로 머리에 장미꽃을 엮은 화관을 쓰는 관습이 성행했다. 초기 교회 신자들도 이 영향을 받고 기도 대신 장미꽃다발을 바치기도 했다.

특히 박해 당시 신자들은 사자밥이 되기 위해 원형 경기장안에 끌려들어갈 때, 장미화관을 머리에 쓰고 들어갔다. 신자들은 밤중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며 떨어진 장미꽃들을 모아놓고, 꽃송이마다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이밖에 은수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해 시편 50, 100, 150편씩을 매일 외우던 관습이 묵주의 기도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도 있다. 은수자들은 작은 돌멩이나 곡식 낱알을 둥글게 엮어 하나씩 굴리며 기도 횟수를 셌다. 이때 글을 모르는 이들은 시편 대신 주의기도를 바쳤 는데, 수를 세기 불편해 열매나 구슬 150개를 줄에 꿰어 사용했다.



12세기 들어 삼종기도가 널리 보급되자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도 매우 깊어졌다. 그래서 시편으로 바치던 주의기도를 대신해 성모송을 외우기도 했는데, 이를 '성모의 시편' 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13세기부터는 영광송이 더해져 처음에는 성모송마다, 그후부터는 성모송 열번마다 영광송을 했다. 특히 오늘날 묵주 기도가 활발히 보급되기까지 도미니꼬회가 지대한 공헌을 했다. 묵주기도 형식은 13세기 성 도미니꼬(1170~1221)에 와서 더욱 체계화됐는데, 150번의 성모송을 연속적 으로 바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이 '도미니코 묵주 기도' 이다.



성 도미니꼬는 당시 이단들이 교회를 위협하자 각 지방을 순회하며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호소했다. 이에 신자들은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쳤고 그 결과 이단 세력은 점차 축소됐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의 환희에 대한 묵상을 '묵주기도'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날과 같은 묵주기도는 15세기에 들어 생겨났다. 도미니코 수도회 알랑 드 라 로슈(Alan de la Roche) 수사는 1464년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강생과 수난, 부활에 따른 환희, 고통과 영광 등 세가지로 나눴다. 이 기도가 널리 퍼져 15단 형식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묵주기도이다. 이외에도 성모 마리아의 칠락을 묵상한 '칠락 묵주의 기도' 또는 '칠단묵주' 라고 불리는 '프란치스코 묵주기도' 가 있다.









15.                   묵주기도 신심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에서 「묵주기도는 복음 전체의 요약이자 구원적인 강생에 집중하는 기도이며, 그리스도께 대한 끝없는 찬미」이고, 「묵주기도야말로 순수한 기도요 그 내용은 오로지 성서적이며, 구원의 역사에서 성모님이 하시는 여러 가지 역할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하였다(46항). 즉, 묵주기도 신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모 마리아와 함께 묵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묵주기도 신심은 1830년 이후 성모 마리아가 발현해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칠 것을 호소하면서부터 더욱 가속화됐다.



세계 성모 발현지 가운데 특히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호소한 곳은 프랑스 루르드와 포르투갈 파티마다.

1858년 루르드에서 발현했을 때, 성모 마리아는 오른쪽에 묵주를 늘어뜨리고 양손을 가슴에 모은 모습으로 베르나데트에게 직접 기도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또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파티마에서 발현한 성모 마리아는 자신을 「로사리오의 여왕」이라 밝히고 매일 묵주기도를 15단씩 바치면 전쟁이 끝나고 죄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총 6번의 발현 중 세 번째 발현 때는 각 단을 바친 후 「구원을 비는 기도」를 할 것을 지시했으며, 마지막 발현에서는 자신을 「묵주기도의 어머니」라고 선언했다.



이와 함께 역대 교황 가운데 레오 13세는 세계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호소하였고, 비오 10세도「묵주기도처럼 아름답고 은총을 많이 내리게 하는 기도도 없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묵주기도에 대한 신심은 한국 초기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

1801년 순교한 흥낙민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가 매일 묵주기도를 열렬히 바침으로써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얻어 처음에 배교했다가 마침내 순교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또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성 김대건 신부가 중국서 귀국할 당시 풍랑을 만났으나 성모님께 전구를 청함으로써 구원을 얻었다고 적고 있다. 이 책은 김신부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선교사들이 조각배를 타고 황해를 건널 때 성모 마리아에 전구했으며 뱃길의 위험 뿐 아니라 그후 박해의 위험도 여러 차례 모면했다고 전한다.



초기 한국교회의 이러한 묵주기도에 대한 깊은 신심으로 교우들은 맨일 묵주기도를 5단씩 바쳤고, 주일이면 15단씩 바치는 것이 일상화됐었다고 한다.

한국교회가 1841년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교회 새 주보로 모시게 된 것도 이러한 초기교회의 전통과 무관하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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