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모음
강론을 위한 자료실
       
 
전체글 보기  
       
 logos
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1:13
분 류 연중25-30주일
ㆍ추천: 0  ㆍ조회: 6396      
IP: 218.xxx.165
http://missa.or.kr/cafe/?logos.1247.
“ 다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30주일

        18. 김신호 신부(다)/35

        19. 변희선 신부(다)/36                   20. 강길웅 신부(다)/38

        21. 한상호 신부(다)/40

        22. 작자미상(다):겸손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기도)/41

        23. 작자미상(다):겸손한 이(를 들어 높이시는 주님)/45

        24. 작자미상(다):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47

        25. 작자미상(다):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48



29             연중 제30주일   루가 18,9-14 (다) 껍떼기는 가라!

                                                                김신호 신부



  사랑의 심리적인 상태나 또는 그 사람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인간은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말 중에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마음 속은 알 수가 없다‘는 표현이 있듯이, 사람의 속을 파악한다는 사실은 매우 어려운 일로 나타나고 있다.



  어떤 관찰이나 실험 또는 현상의 통계에 의하여, 어느 정도 사람의 심성이나 심리적인 상태가 파악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아직도 사람을 알고자 하는 시도는 사람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는 가능성과는 거리가 먼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된다.

옷을 잘 입고 행동이 점잖은 사람을 대하는 것과, 옷을 남루하게 입은 사람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같게 나타나는 것은 매우 드물게 관찰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좀더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를 원하고, 인정받으려는 심리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심리적 경향은 실제적으로 옷을 좋게 입는다거나, 또는 상표가 있는 옷을 선호하게 만들며, 자동차 도 고급스러운 차종을 선택하도록 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이러한 인간의 겉모습과 그 사람의 소유물에 기준하여 우선 사람을 평가하게 된다.



  어떤 분이 이야기하는 중에, ‘얻어먹는 사람일수록 옷을 깨끗하고, 고급스럽게 입어야 한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얻어먹는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거지나 옷을 잘입은 사람이나 같지만, 하나는 멸시받으면서 얻어먹고, 한 사람은 인정을 받으면서 얻어먹게 되므로, 이왕이면 자존심을 세우고 체면이 좀 덜 상하는 쪽이 낫다는 의미를, 이 말은 함축하고 있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이러한 겉 껍데기에 해당하는 요소에 의해 많이 좌우되고 있다. 현실적인 삶에서 보면 이러한 외적인 요소에 일생을 허비하면서 삶을 마치는 존재가 곧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



     겉모습만 보고 평가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두 사람, 즉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는 인간 사회에 통용되는 이러한 판단과 삶의 방식이 얼마나 잘못 되였나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선 바리사이파사람은 사회에서 존경받고 남에 인정받는 삶을 살아나가는 전형적인 타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비해 세리는, 이름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경멸과 업신여김을 당하며 사는, 그야말로 사회에서 가장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전형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이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한 내용을 보아서도 입증이 되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그야말로 잘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을 자신의 기도로 삼고 있고, 세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기도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세리보다 인간적으로 잘못 살았다거나 또는 세리가 오히려 잘 살았다고 하는 인간적인 평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겸손해야 실체 파악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들의 평판이나 판단은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관계성에 놓여있는 당사자의 태도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인간적으로 볼 때 완벽한 삶을 살고 있고,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에 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성전에서 기도하고 난 후의 정황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진정한 겸손은 인간의 실존을 깨닫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실체를 똑바로 보았을 때에 인간은 사회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하느님과의 관계 정립은 당사자와 하느님 사이에만 성립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30               연중 제30주일   루가 18,9-14 (다) 세리의 기도

                                                                  변희선 신부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명문 집안에서 풍족하게 자라났다. 서울의 강남에서 이름난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S대학 재학당시에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판사가 되었다.

  그는 남을 해치거나 나쁜 일에 의도적으로 가담한 기억이 없다. 열심히 성당에 다니며 장학기금, 수해의연금도 남보다 더 많이 희사했다. 예의바르고 모범적인 이 판사를 존경하기를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여러모로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좋은 학교를 다니지도 못했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여러 직장을 다니다가 술집을 경영한다.

  지은 죄가 많고 직업상의 어려움도 있어서 성당에는 큰 축일에 어쩌다가 참석한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아픈 것은 법과 도리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남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동네 관할 파출소에 돈을 주고 표창장을 받은 적은 있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밝은 곳에서 사는 이들도 있고, 어두운 데에서 어렵게 사는 이들도 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판사와 같은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술집을 경영하는 사람을 의롭다고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오늘의 복음에도 비슷한 두 사람이 등장한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유대교 율법에 따라서 열심히 산 모범적인 사람이다. 그는 밝은 곳에서 살면서 타인의 존경을 받는 부류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그러나 세리는 스스로 하늘을 바라볼 면목도 없는 부끄러운 사람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바리사이보다 세리를 의인으로 인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이유는,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바리사이의 삶의 출발점과 환경이 세리보다 훨씬 유리했음을 염두에 두신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살아온 세리에게 가산점을 주신다.



 둘째 이유는, 두 사람이 하느님께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바리사이는 자기가 잘 나고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자기 스스로를 자랑한다. 그리고 부족한 죄인인 세리를 깔본다. 그러나 스스로 부족함을 잘 아는 세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하느님께 정직하게 인정하고 잘못을 뉘우친다.



  셋째 이유는, 하느님의 가치관 때문이다. 하느님의 가치관은 인간 중심적인 가치가 아닌 모든 것을 뛰어넘는(초월적) 가치관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보면 하느님의 작품이다. 바리사이가 아무리 잘난 사람이더라도, 세리가 아무리 못난 사람이더라도 하느님의 입장에서 보면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한 정도의 차이다. 여기서 근본적 차이는 바리사이는 하느님의 은총과 도움이 거의 필요 없다고 느끼고 있지만, 세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전적으로 자신을 의지한다. 이 점은 하느님의 입장에서 보면 중대한 차이점이다.


 사실 바리사이도, 세리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참회의 눈물로 구한 사람은 세리뿐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만들거나(창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착각과 오만에 빠져서 자신의 노력과 성공을 과시하느라고 하느님과 이웃을 무시하고 있다. 더 나가서 자신의 삶이 여러 사람들의 협력과 도움에 의한 것임도 잊고 있다.



  우리는 혹시 바리사이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지는 않나? 아니면 비록 세리와 비슷하게 살고 있지만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둘 수 있다고 믿는가? 다시 질문하자면 우리의 희망은 자기 자신의 노력뿐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인가? 즉 나는 나를 믿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믿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자신의 노력파 성공보다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희망을 두시요! 그 것이 기쁜소식입니다」.











31          연중 제 30 주일   루가 18,9-14 (다) 겸손한 자의 하느님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집회 35,12~14.16~18 (겸손한 사람의 기도 소리는 구름을 꿰뚫는다) 

제2독서 Ⅱ디모 4,6~8.16~18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복 음 루가 18,9~14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겸손한 사람의 기도 소리는 구름을 꿰뚫는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구름을 꿰뚫는다."라는 말은 겸손한 사람이 바치는 기도의 힘이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하느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다른 것은 다 못나고 어리석어도 그 사람의 어딘가에 겸손한 기운이 있으면 하느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십니다. 따라서 그의 죄가 얼마나 크고 많으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죄가 크고 많다 해도 겸손 하나로 그 모든 악행을 덮을 수 있고 또 건질 수 있습니다. 겸손의 힘이 그렇게 셉니다.



반면에 교만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의 기도와 공적이 아무리 크고 많다 해도 그는 교만 하나로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게 됩니다. 많이 기도하고 많은 봉사를 하고 또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해도 그가 교만하다면 그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그처럼 겸손은 하느님을 얻고 교만은 하느님을 잃습니다. 오늘 성서의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모든 이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욕심도 적었고 부정직하지도 않았으며 음탕하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을 했으며 십일조도 꼬박꼬박 바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이 의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겸손이 없는 선행과 덕행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보다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좋은 일은 많이 하면서도 다 헐어 버립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온갖 죄를 뒤집어쓰며 살면서도 그의 어딘가에 겸손의 그림자가 있으면 그는 또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교만이 암적인 존재라면 겸손은 마치 불사약과도 같습니다.



오늘 세리는 저주받아 마땅한 인생이었습니다. 보나마나 손이 더러운 사람이었으며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모리배였습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거짓과 착취와 음행을 일삼았을 것입니다. 그는 누가 봐도 지옥에 빠져야 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죄 많고 행실이 더러운 세리에게는 그의 어딘가에 조그마한 겸손이 보물처럼 감춰져 있었습니다. 자기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아니라면 그는 비참한 신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떨구고 하느님의 용서만을 빕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용서받습니다.



하느님은 진정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사정없이 물리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자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우리 자신이 올라가 있다면 얼른 내려와야 합니다. 그것이 잘사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 통 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플라톤의 집을 방문하자 방안에는 화려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습니다. 이때 디오게네스는 일부러 흙발로 방에 들어가서는 양탄자를 마구 짓밟으며 “나는 플라톤의 교만을 짓밟는다."하면서 외쳤습니다. 플라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플라톤이 디오게네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랬더니 방안에는 너덜너덜한 양탄자가 구멍이 숭숭 뚫린 채 걸레처럼 놓여 있었습니다. 이에 플라톤은 막대기로 그 구멍을 쑤셔대면서  “디오게네스의 겸손은 이렇게 구멍이 뚫렸다."하고 외쳤습니다. 이번에는 디오게네스가 그렇다고 인정을 했습니다.



실패한 사람이 다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그 성공을 길게 유지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패한 사람이 그 실패로 겸손할 수만 있다면 그는 다시 성공합니다. 또 성공한 사람이 그 화려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겸손할 수 있다면 그 성공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교만에 얽매이게 됩니다. 교만과 겸손, 이 둘은 어쩌면 끝까지 서로 물고늘어지는 라이벌이며 또한 앙숙입니다. 잡느냐 잡히느냐 하는 이 둘의 문제가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어쩌면 겸손 하나로 좌우되는 사람들입니다.



겸손해집시다. 겸손하면 천하를 얻는 것이고 교만하면 천하를 잃는 것입니다. 올라갔으면 내려가고 내려갔으면 기뻐합시다. 바로 거기에 구름을 꿰뚫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32          연중 제30주일   루가 18,9-14 (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한상호 신부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오만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그저 죄인임을 자처하여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참다운 인간의 겸손과 구원을 위하여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참회의 기도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오, 하느님!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거나 하지 않으며 또 이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을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일 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루가 18,11)하는 이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는 비천한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겸손된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다만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한 오만한 지껄임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비천함을 절감한 세리는 멀리 서서 하늘을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한 채 말과 행동이 완전히 무가치한 죄인이라는 의식 속에 사로잡혀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고백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당시 도덕기준으로 보아 의로운 자들이었고 존경을 받는 무리였으며 세리들은 협잡꾼이고 천덕꾸러기의 부류였지만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마음의 태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습니다. 전자는 하느님의 자비의 시냇물이 흐를 수 없는 바람 센 산꼭대기와 같았고, 후자인 세리의 마음은 자비의 샘물이 용솟음치는 골짜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이 감히 읊조릴 말씀이 있다면 오직 “주님 당신께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겸손된 참회의 울부짖음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간혹 우리는 진실한 참회를 그릇되게 혼동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가 “아! 나 같은 사람이 어찌하다 이런 죄를 범하였을까? 정말 부끄럽고 마음이 괴롭다”하고 푸념을 한다면 이는 참회가 아니라 오히려 교만스러운 인간의 발버둥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께 의합하기 못하고 또한 그분의 사랑을 배신한 데 대한 깊숙한 내면의 참회야말로 기쁘게 용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참회를 하기 위해서 우선 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무능과 나약을 인정하고 범한 과오에 대한 확실한 수긍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참회의 눈물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도 어떤 핑계를 대어 합리화시키고 그럴싸하게 덮어두다가 곧 잊어버리려 합니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이는 행위로서 참회의 가능성을 희박하게 할 것입니다. 과거의 여러가지 죄과에 대한 부끄러움과 불쾌함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오직 진정한 수긍에서 오는 겸손한 굴복이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습관적이고 도식적인 신자생활을 하면서도 만족을 느끼고 있다면 이는 독선적이고 오만한 바리사이파 사람과 다를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어떤 극적인 계기가 마련된 후 참회의 순간이 오리라고 기다려서도 안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진정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런 적극적인 하느님께의 귀의는 우리에게 평온한 마음의 안락과 풍요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줄 것이며 참다운 구원의 희망을 안겨 줄 것입니다.











33         연중 제30주일   루가 18, 9-14 (다) 겸손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기도



오늘은 연중 제30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도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기도하는 사람들인가? 하느님은 어떤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가?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이 오늘 가르침의 주제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이 참된 기도를 바칠 수 있는지를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겸손한 사람이 창된 기도, 바른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겸손이란 터무니없이 자기를 낮추는 행위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터무니없이 자신을 낮추는 것을 겸손이라 하지 않고 비굴함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참된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의 정직함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성전에 들어와서 보라는 듯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 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기의 기도대로 그렇게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의 오만 방자한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자랑이었고 남을 깔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리사이파 사람은 왜 그런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하느님 앞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직한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겉껍질만 보았습니다.

  한 주일에 두 번 단식하는 자기,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자기, 세리와 같지 않은 자기, 이런 겉껍질만 번드르르한 자기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모습이 자기 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착각 속에 빠진 바리사이파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청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랑을 늘어놓음으로써 하느님 앞에 자신을 뽐내려 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과 도움이 없이도 자신이 한 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침으로써, 쌓아 놓은 공덕으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은총에 힘입어서 하느님 나라를 얻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쌓아 올린 공덕으로 하느님 나라를 쟁취하려 했습니다.

그 바리사이파 사람은 분명히 착하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은, 그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 올린 공덕을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얻으려 했습니다. 이런 그의 교만함이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그 선행과 공덕마저도 아무 소용없는 것으로 돌아가게 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앞에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앞에 많은 공덕을 쌓고 선행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 앞에 죄인일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열심히 성실히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선행을 해야 하고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도 우리는 루가 복음 17장 10절의 가르침대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세리는 어떻게 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까? 그의 기도가 어떻게 해서 하느님께 도달하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세리는 세금을 거두는 사람입니다. 예수 시대에 세리는 죄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사람들에게 고용되어서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서 갖다 바치는 일을 했습니다. 실제로 그 세리가 부정직한 사람인지 혹은 정직한 사람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는 세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언제나 무거운 죄 의식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도 먹고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로마 사람들의 앞잡이가 되어서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제나 미안한 생각과 동족을 배신한 매국노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볼 때, 그 무엇 하나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에 기도하러 갔을 때 감히 제단 가까이 나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는 그 세리는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리의 솔직하고 겸손한 기도 자세는 무엇이든지 주면 받겠다는 열려 있는 자세입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며 가난한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그렇게 많은 공덕을 쌓지도 못했고 선행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가난한 자신의 모습, 죄로 얼룩진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

신의 가슴을 활짝 열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은 오만 방자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하는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리의 그 열려있고 비워져 있는 가슴에 당신의 은총과 축복을 쏟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가 죄인이긴 했지만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정직과 겸손은 하느님께 다가가는 첫걸음입니다. 정직과 겸손은 자신의 눈을 맑게 하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되고 진솔한 기도를 바칠 수가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고 착하게 살았지만, 그는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공덕과 선행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해서 기도했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공덕과 선행을 자랑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슴은 교만으로 가득했고 거기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들어갈 빈 자리가 없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성실하고 열심한 기도 생활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겉꾸미고 자랑하고 뽐내기 위해서 그는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성실하고 열심한 생활이 하느님 앞에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것도, 그의 기도가 하느님께 도달하지 않은 것도 모두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 스스로 하느님 앞에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갈구했습니다. 비록 그는 죄인이긴 했지만 그의 가슴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그의 그 비워진 가슴에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담길 수 있었습니다.

  

세리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큰 선행과 공덕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수많은 동족들로부터 질책과 비난과 손가락질을 당하는 처지였지만, 하느님으로부터는 자비와 은총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삶을 지탱시켜 주는 것은 오만함과 교만함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랑하는 맛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세리의 삶을 지탱시켜 주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었습니다. 세리는 자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외면한다 하더라도 하느님만은 그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는 오만한 의인을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는 겸손한 죄인을 더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 그 분명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자비와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직하게 자기의 모습을 바라볼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회개하여 자신의 가슴을 깨끗이 비울 수 있고, 그 빈 가슴에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 위에 세우는 사람이 됩니다. 비록 인간적인 약점과 죄 때문에 그 삶이 그늘지고 얼룩진다 하더라도, 겸손한 사람이 결코 쓰러지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은, 그의 삶을 지탱시켜 주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이 바른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1 독서 집회서에서도 이런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는 공정하신 분이시라 누구에게도 한쪽에 치우친 판단을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반대편을 두둔하시지 않고, 억울한 사람의 호소를 들어 주신다.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그의 간청은 하늘에 다다를 것이다. 겸손한 사람의 기도 소리는 구름을 꿰뚫는다.”

  

하느님 앞에 서면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겸손되이 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여러분 위에 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언제나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34         연중 제30주일   루가 18,9-14 (다) 겸손한 이를 들어 높이시는 주님



묵상 : 외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행동이라도 그 안에 교만이 스며들면 즉시 변질되고 만다. 법을 지키고 선행을 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내적인 동기가 더 중요하다. 자신을 과시하는 자선사업가보다 겸손한 거지가 하느님 앞에 더 의롭다.



  고해성사인가? 규탄대회인가?



  고해소에 앉아서 고백을 듣다 보면 때로는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인지, 누구를 규탄하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부님! 저는 지금까지 계속 참아왔는데, 우리 며느리가(시어머니가) 워낙 자꾸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내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그 쪽에서 그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주위 사람들 말처럼 그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닌 것 같은 데 저는 꾹 참고 있습니다."/ “신부님, 저는 해마다 연말이면 불우이웃을 위해 100만원정도는 봉헌을 했는데, 이번에는 어려워서 50만원밖에 하지 못해 죄송스럽습니다"하는 식이다, 그래서 이것이 고해성사인지 누구

규탄대회인지, 아니면 자기 자랑인지 알 수 없는 때가 가끔 있다,



  자기과시를 위한 선행은 선행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잘난 척하는 바리사이와 스스로 죄인임을 의식하고 겸손해 하는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바리사이들은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경건주의자들로서, 그 당시 6000여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보통 유다인들은 매년 ‘속죄의 날'에 한번 단식을 하였지만, 바리사이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 단식을 하였고, 일반 유다인들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에 대해서만 십분의 일을 바쳤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야채 (푸성귀 )'와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에도 십일조를 바쳤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리사이들이 다른 유다인들에 비해 월등히 엄격하고 경건하게 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리는 일반적으로 부정과 부패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로마에 협조하는 관리였으므로 민족배반자로 치부되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바리사이보다는 세리가 하느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다고 하셨을까?



  세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자인하고 눈을 들지도 못하고 하느님 앞에 죄의 용서를 청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는 매주 두 번을 단식하고 모든 것에 대해 십일조도 바쳤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오만함과 자기를 과시하고픈 마음으로 꽉 차 있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하느님 감사합니다'로 시작하지만, 실상은 자기 자랑이요 세리와의 차별화를 통해 세리를 규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을 향한 기도라기보다 다른 사람을 의식한 자화자찬이요, 자기 과시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실적보다는 내적 지향(동기)이 중요하다



  우리 속담에 ‘길로 가나, 모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즉 ‘동기나 과정, 방법이야 어떻든 많은 실적을 올리고 결과가 좋으면 그만이다'는 자세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신앙생활에선 받아들일 수 없는 자세다. 바리사이는 외적으로 볼 때 일반 유다인들이나 세리와는 너무나 다르게 철저히 율법을 지키는, 한치의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다.



  우리 주변에도 매사에 철저하고 책임감 있고 능력도 있는, 한마디로 ‘똑 소리나는' 신자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신자들 중에는 자신들처럼 그렇게 똑 부러지게 살지 못하는 신자들을 향해 “아이고 저런 사람들은 성당에 좀 나오지 말지! 성당 창피하게---"하는 자세로, 다른 사람에 대해 칼처럼 비판하는, 배타적인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이는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 닮은 데가 있다.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은 외적인 율법의 준수나 실적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 마음 속의 자세(지향)를 보시는 분이시다, 많은 희사와 선행을 하고, 열심히 활동한다 하여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을 과시하거나 다른 인간적인 이익을 위해 한다면, 또 그것으로 교만에 빠진다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법을 지키고 선행을 하는 행동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을 하는 내적인 자세(동기)다. 그 마음속 에 참으로 하느님을 위하고 인간을 위하는 사랑과 겸손이 있어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내가 천사의 말을 하고 온갖 신비를 깨닫고, 모든 재산을 남에게 주고 남을 위해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1고린 13,1-3)고 하셨다. 교만은 모든 가치를 변질시키고 부패시키며 파괴하는 암세포임을 잊지 말자.



35          연중 제30주일   루가 18,9-14 (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우리는 오늘 복음은 그저 의당한 것으로 알고 조금도 놀라지 않고 듣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비유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백성들은 바리사이들을 두려움과 존경이 섞인 태도로 우러러보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그분에 거슬렸다가는 회당에서도 쫓겨나고 따라서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스러운’ 사람들이었고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으며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사이와 세리를 비교하여 전자를 호되게 비난하신 예수님의 용기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 비유에는 아주 강력한 교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께서는 세리를 우리에게 본보기로 보여주십니다. 그는 자기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고 있는 죄인이었고, 죄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또 그는 자기 죄를 솔직히 시인할 만큼 정직한 사람이었고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겸손하게 용서를 청할 수 있을 만큼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의인인 줄로 믿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자’인 바리사이는 도리어 더 고약한 죄인이었습니다. 그의 죄는 교만과 미움이었으며 또 그들 스스로가 덕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죄의 참된 의미를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가 죄라고 말할 때 단지 “하느님의 법률을 깨뜨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의 법률과 교회의 법규를 지켜야 하지만 어떠한 법률도 궁극적으로 죄의 참된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죄의 척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성덕과 사랑이며, 그것이 우리와 관계 있을 경우의 것입니다. 단지 법을 지키는 것만은 덕행이 아닙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그의 유명한 사랑의 명언(1고린 13장)에서, 우리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법률을 지키고 겉으로 어떤 일을 몇번을 했다 해도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를 뽐내며 의인이 되지 못하고 돌아간 그 바리사이가 행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태도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 나는 나쁜 짓이라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일마다 성당에 갑니다. 그리고 금육과 단식일을 꼭 지킵니다. 나는 내 아내를 속이거나 우리 회사의 돈을 몰래 쓰지도 않습니다.”하는 태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세리는 이교도인 로마 제국과 그 관리들을 상대하는 사람으로서 때때로 인색하고 동물적인 성품이 그들과 같았습니다. 그 세리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러한 성품이 있으며 하느님의 선민중 한 사람인 유대인이면서도 이교도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세속 정신이 너무나 충만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야심이 숭배를 받고, 사치를 탐하며, 교활하며,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모른 체하기 일쑤인 사회, 어떻게 보면 복음의 교훈은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 오늘의 사회입니다. 우리 자신의 사상과 태도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행동 원칙이나 우리의 사업 윤리에 비친 태도는 세속의 그것과 아주 다르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저 세리는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하느님께 그것을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앞으로는 생활을 바꾸어 자기동료들과는 다르게 살고,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법률적인 하자가 없는 것으로 보지 않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교회의 공식기도가 항상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바와 같이 우리가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 자체도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에 솟아나며, 우리의 사랑은 항상 죄를 뉘우치는 죄인의 사랑이란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리의 이러한 기도만이 하느님을 참으로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그 기도가 용서하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합당한 존경을 드렸으며,

둘째로 우리는 항상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해 주며, 자기 자신을 항상 지켜보며 솔직한 태도를 갖게 해 주며,

셋째로 우리를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하여 죄에서 우리를 정화하고 굳세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바리사이적인 태도의 위험성에 대해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의인으로 생각하고 남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우리의 기도를 저 세리의 기도처럼 겸손하고 솔직담백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36           연중 제30주일   루가 18,9-14 (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겸손한 사람의 소리는 구름을 꿰뚫는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집회 35,17) 여기서 ‘구름을 꿰뚫는다’라는 말은 겸손한 사람이 바치는 기도의 힘이 그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하느님도 어쩔 수 없는 듯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다 못나고 어리석어도 그 사람의 어딘가에 겸손한 기운이 있으면 하느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십니다. 따라서 그의 죄가 얼마나 크고 많으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죄가 크고 많다 해도 겸손 하나로 그 모든 악행을 덮을 수 있고 또 건질 수 있습니다. 겸손의 힘이 그렇게 셉니다.



반면에 교만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의 기도와 공적이 아무리 크고 많다 해도 그는 교만 하나로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게 됩니다. 많이 기도하고 많은 봉사를 하고 또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해도 그가 교만하다면 그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그처럼 겸손은 하느님을 얻고 교만은 하느님을 잃습니다. 오늘 성서의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모든 이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욕심도 적었고 부정직하지도 않았으며 음탕하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을 했으며 십일조도 꼬박꼬박 바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이 의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겸손이 없는 선행과 덕행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보다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좋은 일은 많이 하면서도 다 헐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온갖 죄를 뒤집어쓰며 살면서도 그의 어딘가에 겸손의 그림자가 있으면 그는 또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교만이 암적인 존재자라면 겸손은 마치 불사약과도 같습니다.

오늘 세리는 저주받아 마땅한 인생이었습니다. 보나마나 손이 더러운 사람이었으며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재물만 탐하는 이였습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거짓과 착취와 음행을 일삼았을 것입니다. 그는 누가 봐도 지옥에 빠져야 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죄 많고 행실이 더러운 세리에게는 그의 어딘가에 조그마한 겸손이 보물처럼 감춰져 있었습니다. 자기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아니라면 그는 비참한 신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떨구고 하느님의 용서만을 빕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습니다.

하느님은 진정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사정없이 물리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자신이 내심 교만스러움으로 남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있다면 얼른 그곳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것이 잘 사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 통 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플라톤의 집을 방문하자 방안에는 화려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습니다. 이 때 디오게네스는 일부러 흙발로 방에 들어가서는 양탄자를 마구 밟으며 “나는 플라톤의 교만을 짓밟는다.”하면서 외쳤습니다. 플라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맞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플라톤이 디오게네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랬더니 방안에는 너덜너덜한 양탄자가 구멍이 숭숭 뚫린 채 걸레처럼 놓여 있었습니다. 이에 플라톤은 막대기로 그 구멍을 쑤셔 대면서 “디오게네스의 겸손은 이렇게 구멍이 뚫렸다.”하고 외쳤습니다. 이번에는 디오게네스가 그렇다고 인정을 했습니다.



실패한 사람이 다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그 성공을 길게 유지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패한 사람이 그 실패로 겸손할 수만 있다면 그는 다시 성공합니다. 또 성공한 사람이 그 화려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겸손할 수 있다면 그 성공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교만에 얽매이게 됩니다. 교만과 겸손, 이들은 어쩌면 끝까지 서로 물고 늘어지는 라이벌이며 또한 앙숙이기도 합니다. 잡느냐 잡히느냐 하는 일들의 문제가 바로 우리 자신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어쩌면 겸손 하나로 좌우되는 사람들입니다.



겸손합시다. 겸손하면 천하를 얻는 것이고 교만하면 천하를 잃는 것입니다. 올라갔으면 내려가고 내려갔으면 기뻐합시다. 바로 거기에 구름을 꿰뚫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0
3500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1317    
행사강론
새사제 첫미사 강론 요한신부 2011-01-08 24509
  1316    
대축일 강론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대축일강론 2008-09-20 7293
  1315    
대축일 강론
   Re..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 대축일 강론 모음2 2008-09-20 8761
  1314    
대축일 강론
   Re..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 말씀연구 2008-09-20 6414
  1313    
대축일 강론
   Re..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 대축일강론 모음 2008-09-20 8756
  1312    
설,추석
부모님 은혜를 생각하라고... 자녀들을 위하여 2008-09-14 4854
  1311    
행사강론
교무금이란? 2008-09-06 5757
  1310    
행사강론
생명의 날 메시지 이기헌 주교 2008-09-06 3564
  1309    
행사강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0월 3일) 2008-09-06 4426
  1308    
행사강론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 강론모음 2008-09-06 5246
  1307    
성모의 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 성민호 신부 2008-09-06 4937
  1306    
행사강론
성녀 소화데레사 축일-포교사업의 수호자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2008-09-06 5878
  1305    
행사강론
주님 봉헌축일 성민호 신부 2008-09-06 4784
  1304    
행사강론
성금요일 <요한 18,1-19> 강영구 신부 2008-09-06 3901
  1303    
행사강론
주님 만찬 저녁 미사 <요한 13,1-15> 강영구 신부 2008-09-06 4509
  1302    
행사강론
십자가 현양 축일 <요한 3,13~ 17> 강론모음 2008-09-06 4842
  1301    
행사강론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축일 (요한 2,13~22) 방윤석 신부 2008-09-06 4081
  1300    
행사강론
세례식 강론 <요한 3,1-8> 새롭게 태어나는 분들에게 2008-09-06 5491
  1299    
행사강론
예수 성심 성월 강론 모음 2008-09-06 5027
  1298    
행사강론
성모성월 강론 모음 2008-09-06 7807
  1297    
행사강론
성 요셉 성월 강론 모음 2008-09-06 6339
  1296    
행사강론
교회일치주간 교회일치주간 강론 2008-09-06 4678
  1295    
행사강론
성서주간, 성경주간 강론 그리스도왕 대축일 2008-09-06 3382
  1294    
행사강론
전교주일 강론 모음 1 전교주일 강론모음 2008-09-06 10084
  1293    
행사강론
군인주일 강론 모음 군인주일 강론모음 2008-09-06 5500
  1292    
연중25-30주일
다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6396
  1291    
연중25-30주일
나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7425
  1290    
연중25-30주일
다해 연중 제 29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7946
  1289    
연중25-30주일
나해 연중 제 29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8321
  1288    
연중25-30주일
다해 연중 제 28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7622
1234567891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