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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1:12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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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30주일

        7. 방윤석 신부(나)/15                    8. 강길웅 신부(나)/17

        9. 김영남 신부(나)/19                    10. 이재만 신부(나)/21

        11. 조광호 신부(나)/22                   12. 박명준 신부(나)/24

        13. 장춘호 신부(나)/26                   14. 김창석 신부(나)/28

        15. 신은근 신부(나)/30                           16. 교구주보(나)/32

        17. 전옥주 작가(나)/33           



7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눈 뜬 장님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방윤석 신부



오늘 복음은 바르티매오라는 시각 장애자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는 내용이다. 시각장애자의 특징을 생각해 보자.



  1. 앞을 보지 못한다. 눈뜬 자라도 앞과 뒤를 못 보는 것은 미래가 없고 희망이 없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눈을 떴어도 장님과 같다는 얘기다.



  2. 항상 깜깜한 상태에 있다. 여러분들도 눈을 감아 보시라. 깜깜할 것이다. 영혼의 장님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빛이 될 만한 어떤 가치관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으며, 기준도, 원칙도 없다.



  3. 만져 봐야 안다. 혹은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눈으로 안 보이는 것을 못 보는 장님들도 얼마든지 있다. 누구일까? 소위 과학주의자, 실증주의자, 특히 공산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실험을 통해서 눈에 보여야, 또는 어떤 기계를 통해서 화면에 그래프로 나타나야만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도 영혼의 장님인 것이다.  도마 사도가 「나는 주님의 못 박힌 자국을 눈으로 확인해야 밑겠소」 라고 했다가, 예수님에게 호되게 혼났다. 지금도 제2, 제3의 도마사도들이 많다.



  4. 소경의 또 다른 특징은 빛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태생 장님은 처음부터 빛을 모르며, 중간에 장님이 된 사람들도 빛이 무엇인지 잊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참 빛」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들도 영혼의 장님들이다. 한국천주교회는 200주년을 맞이하여 주제를 「이 땅에 빛을」이라 정했었다. 왜냐하면 빛이신 그리스도를 다수의 우리 민족이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눈먼 분들에게 개안수술을 해줬다. 지금도 죽어 가는 사람에게서 안구를 기증 받고 있다. 「참 빛」을 알려주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5. 소경은 앞을 구별 못하기 떼문에 가끔 헷갈리고, 한 번 헷갈리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우리 주번에도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면 자기의 목숨이 귀중한지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자가 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그렇다. 「나도 자가용이 있다, 면허도 땄겠다, 신나게 달리고 놀러 다니자, 마음껏 즐기자, 교통법규가 뭐 말라비틀어진 것이냐?」



그래서 운전대만 잡으면 착한 사람도 난폭해진다. 대다수가 운전에 관한 한 아직 형편없는 소경들이다. 세발 자전거를 가지고 노는 어린이들과 같다. 교통사고가 많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어야 될까? 몇 년 전 제가 본당신부로 있을 때 우리 고3신자학생 하나가 오토바이 충돌사고로 선종했다. 유가족과 중고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울음바다 속에서 장례미사를 치렀다. 더구나 부모도 신자가 아니며 학생회장까지 했던 모범 학생이어서 너무도 안타까웠다. 우리 교우분들도 자가용이나 오토바이 가진 분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 오토바이 타는 분들은 조금만 어두워도 라이트 켜시고, 자전거 타는 사람도 야광 옷 입고 뒤에 야광 테잎을 붙이고, 경운기도 조금만 안개 껴도, 앞에서 연기만 피워도 시야가 가린다면 라이트를 켜라. 밧데리와 목숨을 바꿔선 안된다. 야광판을 붙여 따라 오는 운전자가 확실히 볼 수 있도록 하라. 「내가 가고 있으니 네가 알아서 비켜 가라」고 말이다.



얘기가 빗나갔지만 제발 정신들 차리라. 눈을 좀 뜨라. 그 밖에도 정신차려야 할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특히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에만 눈이 먼 고위급 정치인들부터 눈을 떠야 한다. 눈 뜬 장님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오늘 복음 중 소경의 태도를 보자. 그는 나자렛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가 병을 고쳐주시는 용한 분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주위에서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예수님이 부르시니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서서 다가왔다. 거지에게 있어서 옷은 재산에 속한다. 더군다나 소경 거지에게는 재산목록 1호다. 자기를 감싸고 있는 옷, 그 옷은 남루하고 형편없는 옷이었을 것이다. 2천년 전의 거지 소경인데 오죽했겠는가? 그런데도 재산목록 1호인 겉옷까지도 던지고 벌떡 일어나 다가갔다고 한다.



우리 신자들도 본받아야 한다. 그는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한 말씀으로 눈을 뜨게 해 주셨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따라나셨다고 했다.

그의 행동은 구도자(求道者)의 자세이기도 하다. 부자 청년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부자 청년은 재산을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예수님 곁을 떠나갔다. 바르티메오는 그렇지 않았다. 자기가 가진 재산목록 1호인 겉옷까지 벗어 던져 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고 예수님께로 달려갔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신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빛이시다. 동방박사가 예수님 태어난 곳을 찾아갈 때 별의 인도를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빛을 밭아야만 영생의 길을 갈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내 멋대로 조절하지나 않았는지 반성하야 한다. 빛이 너무 세다 하여 색안경을 쓰지나 않았는지, 빛을 싫어해서 일부러 눈을 감지나 않았는지, 또는 요리조리 프리즘으로 걸러서 대했는지 반성해 보자.









8         연중 제 30 주일   마르 10,46~52 (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예레 31,7~9 (소경과 절름발이가 위로받으며 돌아오리라) 

제2독서 Ⅰ데살 1,5c~10 (하느님을 섬기며 성자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복 음 마르 10,46~52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옛날에 앞을 못 보는 소경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소경의 원인이 아무리 순수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하느님의 벌로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병환자나 귀머거리, 소경 등은 신체적인 어려움과 함께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다는 죄책감과 수치심 때문에 세상이 더 참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바로 그 비참한 상태에서 빛나게 됩니다.



오늘 거지 소경은 나자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는 온 힘을 다해 외칩니다. 누가 뭐라 하거나 말거나 죽자사자 식으로 외칩니다. 제발 좀 살려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과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본래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칭호며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말은 오직 하느님께만 드릴 수 있는 간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못난 거지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고 하느님으로 바라봅니다. 세상에서 오직 그분만이 자신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눈먼 거지라고 무시했지만 그러나 소경은 믿음을 굽히지 않고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이 이때 물으셨습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소경은 바로 그 기회를 만나 애원합니다.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자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눈먼 거지는 드디어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 눈먼 소경이요 또 어찌 보면 구제불능의 비참한 처지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닫혀진 경우가 많습니다. 감사의 눈이 닫혀져 있고 사랑과 용서의 눈이 감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삭막한 세상을 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새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수도원에 갔더니 현관 입구에 “사랑하면 보게 될 것이고, 보게 되면 더 사랑할 것이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올바른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하면 마음으로 볼 수 있지만 사랑을 하지 못하면 닫혀진 눈으로만 보기 때문에 혼자 답답해서 짜증을 부립니다.



며느리를 몹시 미워하는 시어머니가 있었는데 며느리가 뭘 잘못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공연히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며느리가 주눅이 들어서 자꾸만 실수를 합니다. “못한다", “못한다"하고 뒤따라 다니며 나무라니까 더 못하게 됩니다.



한번은 이 할머니가 성사를 볼 때 그 사정을 잘 알고 계시던 신부님이 보속을 엉뚱하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루에 열 번씩 일주일 동안 며느리를 칭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로서는 큰 일이었습니다. 보속을 안 하자니 영성체를 할 수가 없고 매일 미사에 나오자니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며느리를 칭찬해야만 했습니다. 속이 터질 일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튿날 새벽이었습니다. 부엌에서 며느리를 만난 시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피곤할 텐데 일찍도 일어났구나." 목에서 억지로 그 말이 나왔는데 그 소리를 들은 며느리는 그만 감복하게 됩니다. 새벽 아침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습니다.



식사 때의 일입니다. 시어머니가 밥 한 수저를 입에 넣더니만 또 한마디했습니다. “오늘 아침밥이 참 잘 됐다. 며느리는 밥을 맛있게 하는구나." 그러자 며느리 가슴에는 작은 꽃이 피게 되었습니다. 청소를 하면 청소를 칭찬해 주고 빨래를 하면 빨래를 칭찬해 줍니다. 그렇게 칭찬해 주다 보니 하루에 칭찬을 열 번도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밤의 일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잠을 자려고 누우니까 갑자기 며느리 이쁜 생각이 났습니다. 며느리나 자기나 이 집에 고생하러 왔는데 당신이 너무했구나 하는 반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더 칭찬을 해 주고 더 사랑해 줘야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며느리도 그날 밤은 잠이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를 그 동안 오해했던 것이 죄송했으며 더 잘 해 드려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사소한 고생에 대해 너무 쉽게 불평을 가졌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따뜻한 사랑을 갖자 아주 다정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사랑을 하면 보게 되고 보게 되면 더 사랑하게 됩니다.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그 때문에 닫혀진 세상에서 소경처럼 캄캄한 인생을 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래서 자주 예수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만이 생이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오늘 소경의 외침은 바로 우리 자신의 외침입니다.





9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예리고 거지소경의 치유

                                                          김영남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우리는 그 시작과 끝을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바르티매오」라는 「소경 거지」가 예리고의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예수님을 만나 시력을 되찾고, 그분을 따라갔다. 중간에 전개되는 이야기는, 소경이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를 말해주는데, 그 강조점은 소경과 예수님의 태도에 있다. 구체적 치유방법에 관한 언급은「말」외에는 하나도 없다.



소경과 예수님의 태도는 각각에 해당되는 동사들을 연결시켜보면 매우 뚜렷해진다. 소경과 예수님의 적극적인 태도가 강조되어 있다.

먼저 소경의 태도를 보자.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는 소경의 적극적인 믿음의 외침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그가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용기있게 외친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잠잠히 있으라고 말리는 데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더 큰 소리로 외친다.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신다고 하자, 그는 아마 그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는 전체였을「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다가간다」



여기에는 예수님께 대한 소경의 철석같은 믿음이 잘 드러난다. 이 소경의 태도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은 무엇보다도, 그의「용기 있는 신앙태도」이다. 이 소경은 남을 탓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방해하더라도 거기에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에 비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한가?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데 있어서도 남에게 탓을 돌리기 쉽다. 예를 들자면, 자기 가족 중의 누군가(시어머니, 며느리, 아내, 남편, 자식들 등등)가, 또는 교우들 중의 어느 누군가가  자기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거나, 큰 실망을 주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신앙생활을 계속 못하겠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리고의 소경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향해 표현하고 있는 적극적인 태도에서 본받을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적극적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강조되어 있다. 소경의 경우에서처럼 여기서도 예수님과 관계된 동사만을 연결해 묵상해 보면, 예수님의 적극적인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분은「소경거지」의 외침을 들으시고「걸음을 멈추신다.」 그리고는 소경이 당신께 다가오는 것을 옆의 사람들이 막으려고 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까이 “불러오라”고 명하신다. 그리고는 당신에 다가온 그 소경에게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자상하게 「물으신다」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동사들이 보여주듯이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불쌍한 사람에게 자비로이 다가가시는 예수님의 단면을 볼 수 있다.「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거지 소경의 태도가 신앙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치유받은이 소경이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말에서 「따라나서다」라는 동사는 마르코 복음서에서 여러 경우에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길가에 앉아(첫 구절, 46절) 불쌍하게 구걸을 하던 어느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받은 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른다(끝 구절, 52절)는 뜻이 된다. 더구나 마르코 복음서의 문맥을 볼 때, 예수님은 지금 고난을 받으시기로 되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는 중이시다. 바르티매오는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나선 셈이다.

  

예리고의 소경 치유이야기는 이 이야기가 나오는 문맥을 살펴볼 때, 거기에 담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예리고의 소경이야기의 바로 앞에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관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예고가 있었고, 이 예고를 그분의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였다는 것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이 대목을 예리고의 소경이야기와 관련시켜보자.

사실, 제자들은 외적으로는 멀정한 눈을 갖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뜻을 알아보는데 있어서는「소경」이었다. 반면에 예리고의 소경은 비록 육체적으로는 소경의 상태였지만,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있어서는「밝은 눈을」 가지고있었다. 거지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정리해 보자. 예리고의 소경치유에 관한 복음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세가지 점을 생각하게 한다: 첫째, 이 복음말씀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초대한다.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소경에게 가까이 가시어 그를 자비로이 만나주시고, 그를 치유해 주신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으라고 초대한다.



둘째, 이 복음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예리고 소경의 용기 있는 신앙태도를 본받으라고 초대한다. 특히 꾸준히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기도하라고 초대한다.

셋째, 이 복음은 우리도 마음의 눈이 멀어있는 소경이 되어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한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전혀 볼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고 산다면, 우리는 소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우리가 가족의 사랑도, 이웃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씀도 볼 줄 모르고, 모든 것이 다 “내 노력 덕분이다”라며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도 마음의 눈이 멀어있는 소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고도 못 본다면 이 어찌 소경의 처지가 아니겠는가? 만약 이런 상태에 있다면 우리 모두도 주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절히 청해야 할 것이다: 「주님, 저희도 소경입니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10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생명의 주님을 믿어라

                                                       이재만 마르코 신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은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주님으로 나타난다. 하느님 나라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길을 가시는 도중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함께 하며 가르치신다. 바르티메오라는 앞 못보는 거지는 여느 때처럼 길가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는 문득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즉시 예수님에게 ꡒ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ꡓ라고 외친다. 그가 예수님에게 붙인 호칭인 ꡐ다윗의 자손ꡑ은 신약성서에 이따금 나타나는 것으로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유대인이었으므로 다윗 가문에서 구세주가 나올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과 군중들은 이 거지를 예수님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다. 그들은 그 거지에게 조용히 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심을 깊이 깨닫고서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일, 즉 자신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을 이루어 주시도록 청한다. 결국 예수님은 소경의 소리를 듣고 그를 부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 예수님은 오늘 앞 못보는 거지를 고쳐준 것이 바로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인정해 주셨다.



즉 예수님은 스스로 한 사람의 믿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을 생명을 주시는 주님으로 믿는 소경과 그런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군중이 서로 비교가 된다. 오늘 복음과 비슷한 대목이 요한 복음 9장, ꡐ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ꡑ이란 대목이다. 여기서는 거지인 맹인이 눈을 뜨게 해달라는 부탁이 없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눈을 뜨게 해주신다.



그러나 이 맹인은 눈을 뜨고서는 예수님을 안식일 법을 어긴 죄인으로 옭아매려는 유대인들의 살기등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ꡒ예수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내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 이상합니다.ꡓ라고 고백을 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안식일날 일을 한 죄를 끈질기게 물고늘어진다.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말씀을 전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일은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과 이웃에게 생명을 주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세상과 이웃에 어떻게 생명을 줄 수 있는가? 그것은 용서와 자비를 베풀고 사랑과 평화를 행동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 우리 자신의 나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거짓을 일 삼는 일, 잘못된 주장을 하는 일, 원수를 복수하는 일, 폭력을 일삼는 일 등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죽음의 길을 따르는 모습으로 의사들의 파업, 각종 병원들 부정, 정치인들이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 모습, 북한을 용서 못하고 통일의 물길을 막으려는 각종 세력들, 죽음의 재인 방사능을 만들어 내는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서 밀어붙이는 정부와 여러 세력들… 등을 보면서 살고 있다.











22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조광호 신부





설악산에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 온다. 중국 당대의 시인, 두보(杜甫)는 “봄은, 보는데 또 지나가나니”라고 노래했지만 시간의 흐름은 물과 같아 그 경계를 가늠할 틈도 없이 그 누구도 막아 낼 수 없는 무상한 변화 속에 우리를 서게 하는가 보다.



며칠 전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서울 근교 어느 산을 올랐다. 성미 급한 단풍나무들은 이미 붉은 빛을 띄우고 있었지만, 여름날 그 무성했던 나뭇잎들은 청정한 가을바람결에 더욱 더 푸른빛으로 마지막 녹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빛 보다 더 밝은 그늘’ 아래를 걷다 보니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매연으로 뒤덮인 도시, 거대한 괴물처럼 누워있는 그 도시의 잿빛 하늘 위에서 이름 모를 별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가던 길을 멍추고 명멸해 가는 그 별빛에 시선을 모았다. 태양의 주위를 끊임없이 돌고 있는 이 작고 아름다운 떠돌이 별, 지구 위에서 지금 나는 그 어느 은하계의 혹성으로부터 수십억 광년을 달려온 저 별빛을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살아 있음이 기적같이 느껴졌다.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나에게 달려온 저 빛과 만남, 나의 이 순간적인 만남은 저 별빛이 전달된 시간과 공간에 비교한다면 차라리 무(無)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무한한 빛이신 그분 앞에서 인간정신은 ‘어둠’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 토마스 머튼의 고백은 하느님 앞에서 발가벗은 인간의 자기실존에 대한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무’로써 표현할 수 있는 ‘어둠’이라는 낱말보다 더 적절하게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의 자기실존을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을 것이다. 살아 계시고 끊임없이 창조하시는 야훼 하느님은 ‘나자렛 예수’라는 구체적 인물을 만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예수와의 만남을 통하여 믿음을 고백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모두 하느님 앞에서의 자기실존에 대한 어둠의 체험 즉 무의 체험을 통해서 신앙의 극치에 이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상 예수를 직접 만났던 사람들, 그들도 예외 없이 자기 실존에 대한 이 깨달음을 통하여 형언할 수 없는 은혜의 순간을 맞이했고, 그들의 이 어둠의 체험은 빛으로 충만 되었고, 깊고 깊은 밤은 낮이 되었고 믿음은 더 큰 깨달음으로 이어져 예수와 함께 「예수의 길」을 걷는다. 세리였던 마태오가 그렇고, 창녀였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렇고 예리고의 맹인거지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가 그렇지 아니한가.



우주의 신비를 벗겨내는 인간의 위대함을 얘기하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스스로 자기 육안으로 직접 자기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거울과 같은 반사매체를 통해서 자기 얼굴을 본다. 인간의 외적 조건이 이러하다면 하물며 인간의 내면세계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은 누구나 ‘만남’을 통해서만 자기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한 눈으로서 ‘거리’를 측정할 수 없듯이 우리의 내면 세계의 눈도 결국 ‘마음의 눈’과 또 다른 ‘믿음의 눈’을 지닐 때만이 자기의 실존의 위치를 바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영혼의 눈’으로 ‘나자렛 예수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그 대표적 믿음의 세계를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는 예리고 소경의 치유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권세 있는 자들과 많이 배운 사람들, 소위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붐비던 고도 예리고의 거리를 바람에 날리는 쓰레기처럼 그들의 발치에서 구걸하던 맹인거지, 바르티매오. 그에게도 예외 없이 ‘나자렛 예수의 소문’은 들려 왔을 것이다. “너희들 모두가 한 형제이니 서로 사랑하라는 것”과 “하늘나라가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도 듣고 있었을 것이다.



뭇 사람들의 멸시와 학대를 통하여 오는 고난과 고통의 의미를,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를 거쳐오면서도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끝없는 희망의 불씨를 간직하며 살아 왔을 것이다. 이제 그의 내면의 불씨에 ‘나자렛 예수’라는 이름으로 하여 뜨거운 불길이 솟아나게 된 것이다. 살아 생전에 그를 만나 그의 따뜻한 목소리와 그의 손을 잡아 보고 싶은, 그 만남의 원의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다. 그는 온갖 주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린 채 나자렛 예수를 향해 돌진했다.



『“그를 막지 말라...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합니까?”(49절)하고 마침내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선생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51절) 하고 그가 말하자 예수께서는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했습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는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51-52절)고 마르코 사가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나자렛 예수를 향해 “다윗의 아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47절)라고 한 그의 외침은 위험 천만한 것이었다. 이것은 나자렛 예수가 곧 「메시아」라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지배하던 로마인들과 유대인 지도자들, 그들을 의식하던 모든 군중을 당황하게 만든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소리치며 달려갔고, 자기의 육신을 마지막으로 지켜 주는 ‘겉옷을 내동댕이치고 예수를 향해 벌떡 일어나 갔다’(50절)고 한다.



맹인거지 ‘바르티매오’는 예수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였으니 그는 태생 소경이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살이에서 언젠가 눈먼 사람이 된 것을 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원의는 단순히 육체적인 눈이 열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와의 만남, 그 필사적인 결의는 마침내 그의 눈을 뜨게 했고 나자렛 예수 안에서 메시아를 볼 수 있는 제2의 눈인 영혼의 눈뜸으로 깨달음에 이른 것이라 할 것이다.



불길 속에 녹아드는 흰 눈송이처럼 흔적도 없이 자신의 실존이 무로 돌아가듯, 예수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그는 이루어 낸 것이다. 빛을 향한 열망, 그것은 ‘노력하는 한 인간은 괴로워한다.’는 파우스트적 절망을 뛰어넘어 ‘노력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는 불가적(佛家的) 태도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불을 발견 해 낸 최초의 인류가 그 캄캄한 밤에 최초의 불씨를 당겨 황홀하고 흥분된 설렘으로 언 몸을 녹였듯이 추위가 몰려오는 이 계절, 우리도 예리고의 맹인거지와 같은 ‘영혼의 불’을 당겨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황량한 겨울벌판 같은 이 세상살이에서 우리도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길을 떠난 바르티매오와 같이 뜨거운 사랑의 불길로 자신을 소진시켜 이 캄캄한 밤을 밝히고, 생명과 부활의 아침을 앞당겨야 되지 않을까.











23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예리고)

                                                              박명준 신부



지금으로부터 이 천년 전, 유대나라의 조그만 도시 예리고의 길가에 앉아 있던 거지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놀랄만한 기적과 말씀으로 온 이스라엘을 떠들썩하게 하신 그분을 꼭 만나 뵙고 싶었던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선생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조용히 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큰 소리로 주님을 부릅니다. 예수께서 그의 음성을 듣고 부르시자 겉옷을 챙길 생각도 없이 서둘러 예수께로 달려갑니다. 그는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음성으로 자기의 소원을 예수께 청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예수께 매달림으로써 은혜를 받는 바르티매오의 믿음을 생각해 봅시다. 먼저 그의 끈덕진 부르짖음을 행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지란 신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계시는 스승 예수님을 노상에서 함부로 불러대니, 주위 사람들의 입닥치라는 꾸지람은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의 불행을 예수께 호소하기로 오랫동안 마음먹고 벼르던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부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 편이라는 소문대로 자기를 모른 척하고 지나가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또 그의 즉각적인 응답을 들 수 있습니다. 겉옷이 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낮에는 의복이지만 밤에는 그의 잠자기라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순간에 그에게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시지만 자기가 부탁만 하면 틀림없이 들어주리라 믿었기에 서슴없이 예수께 말씀드립니다.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열심한 신자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가만히 반성해 봅시다. 우리는 말로서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상은 세상의 영화나 재물에만 너무 눈이 어두워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구원이나 생명보다도 현세 사물에 더 열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영적 소경들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여기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천상 사물에 대하여 소경들인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신다는 암시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해 얼마나 알고 그분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또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우리 모두가 구원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줄도 모르고 현세의 쾌락이나 행복에만 도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생명과 기쁨이 얼마나 더 큰 것인가를 판단하지도 못하는 소경들입니다. 기껏해야 인생 70년을 잘 살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정력과 시간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수 천년 수 만년 아니 영원한 그날을 위해서는 과연 얼마나 노력을 하였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경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히도 예수님 덕분에 눈을 뜰 수 있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또 우리 귓전에는 주님의 발자국 소리가 뚜벅뚜벅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앞에 놓여있는 현세 생활의 안일함에만 파묻혀 지내지 날고 주님께로 달려갑시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실 분, 즉 우리를 부활시키어 천당 영광 속에 불러주실 분 주님께 목청껏 소리칩시다.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아멘.



24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예리고)

                                                   장춘호 신부



우리 신앙인들에게 늘 따라 다니는 질문이 있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믿음의 고백과 삶을 연결 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문제는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는 어떤 분이며,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것과 직결되며, 결국 정확한 목표를 세우고 출발한 사람과 그렇지 아니한 사람과의 엄청난 차이를 낳게 하는 것이다.



상처를 고쳐주는 분에의 체험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목표를 향해 도전하며, 확고한 믿음의 고백을 통해 구원의 길에 이르는 어느 소경의 치유 이야기이다. 이 기적 이야기는 예수와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예리고라는 작은 도시에서 시작된다.



예리고는 요르단 저지대의 오아시스에 있는 해면보다 250미터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 신약성서 시대의 예리고는 구약성서 시대의 예리고 남서쪽에 있는데 이 도시는 이곳에 궁전을 짓고, 궁전을 중심으로 구획된 도시를 건설했던 헤로데의 건축사업의 결과로 생겨났다. 바로 이 도시에서 예수의 일행은 맹인 거지 바르티매오를 만났다.



맹인 바르티매오는 이 도시에 나자렛 사람 예수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더듬더듬 지팡이를 앞세우고 군중이 모인 곳을 찾아 왔다. 앞 못보는 맹인이 예민하게 발달한 귀로 군중들의 소란한 음성 사이에 나지막이 들려오는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있는 힘을 다해 목청껏 예수를 부른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한마디 외침 속에는 평범한 사람이 느낄 수 없는 피맺힌 한이 서려 있다. 한 생애를 빛을 못보고 살아 왔으며, 그렇게 살아갈 그의 외침은 전존재를 열어 보이고 군중의 따가운 꾸짖음을 개의치 않을 만큼 한마디 생존의 절규였다.



이분이 나의 삶을 바꾸어줄 분임을 믿고 고백할 때, 얼굴을 알 수 없는 군중의 무리는 그에게 침묵하라는 명령을 하며 그를 나무란다. 병신이고 죄인인 주제에 어딜 끼어들어! 라는 냉혹한 거부를 가슴에 받으면서 더욱 큰소리로 예수를 부른다. 군중의 숲을 뚫고 예수의 시선은 이 가난하고 연약한 맹인 거지에게 머물며, 그를 가까이 부른다. 사랑과 연민이 넘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시며 그의 애환과 마음을 함께 하려는 예수의 자비로운 모습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씀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한마디 선언으로 소경은 눈을 뜨고, 그 동안 상처로 뒤얽힌 마음의 치유와 함께 새로운 삶, 생명의 삶을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그다지 뜨거운 감동을 준다기보다는 잔잔한 파도의 속삭임처럼 우리의 무딘 마음속을 파고든다. 이 복음 말씀을 통해 성서의 소경은 두 가지 상징적 특성을 드러낸다. 하나는 거짓된 삶이요, 다른 하나는 진리에 대한 무지, 즉 진리 자체인 예수에 대한 무지로 나타난다. 결국 신앙인에게 진리를 향한 깨달음의 길은 구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주님 앞에 겸손되이 자신을 고백할 때 시작된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자신을 감추기에 급급한 나에게 정직한 나를 드러내고 우리의 친구인 예수께 도움을 청할 때, 그분은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고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주시는 분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소외당한 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선택을

맹인 거지 바르티매오는 자신만이 싸매고 살아야 했던 가슴 아픈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그가 군중 앞에서 “나를 고쳐주소서”라고 청한 것은 하나의 자기 고백인 것이다. 즉, 죄인인 나에게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솔직하고 겸손한 자기 인정을 대중 앞에서 드러낸 것이다. 동시에 자신이 앞을 못 보는 맹인임을 고백한 것은, 거짓된 삶의 모습과 진리에 대한 무지를 시인한 것이다.



이 같은 고백의 자세는 거짓과 껍데기가 큰 소리를 내를 오늘의 우리 실정에 절실히 요구되는 모습이 아닐까? 겸허한 마음으로 우리의 무지와 거짓됨을 예수 앞에 고백할 때 그분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안심하라! 너의 진실된 고백이 너의 무지를 깨우치고 너를 둘러싼 껍데기를 벗겼느니라.”



또한 오늘 복음은 우리가 믿는 분이 어떤 분인가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우리가 믿는 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참된 신앙이 시작된다고 할 때, 수많은 무리 사이에서 들려온 약하고 왜소한 맹인에게 향한 예수의 마음을 헤아려야만 한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셨던 예수는 약자와 소외당한 어린양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자세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신다.



한국 사회 안에는 절대다수의 종교인이 있다. 그럼에도 아직 이 사회가 타락하고, 불목하는 까닭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 작은 반도 땅에 상채기나고 칼로 난도질당하고 버려져 가는 무수한 생명을 볼 때,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의심케 된다. 그리스도를 삶의 가치와 의미로 선택한 그리스도인이 이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다면 이 같은 현실이 초래되었을까 싶다.



우리는 다시금 그리스도로 의식무장을 해야만 한다. 지금 이 순간, 어는 작은 독방에 앉아 통일의 그 날을 몸과 마음으로 염원하고 계신 가난한 선배 신부와 이 땅의 부정과 불의에 대항하다가 옥에 갇힌 많은 의인들을 기억하며, 나의 의식을 정비해야 한다.

몸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독가스가 스며 나오는 쓰레기더미에서 쓰레기를 주우며, 거기 있는 형제, 자매들과 하나임을 삶으로 증거하는 작은 자매들을 생각하면서, 나의 몸가짐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한다. 너는 누구를 선택하는가? 가난한 바르티매오인가? 다수의 힘깨나 있는 군중인가?를 되묻는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자 곧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나선 소경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따라나섬은 내 믿음의 형태가 바뀌어져야 하는 것을 말한다. 당신이 계신 곳 - 내가 싫어하는 곳, 역경 속에 계신 예수께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다. 예수님이 빛이신 것을 믿어야 하는 데도 내가 거부하고, 믿지 않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점검해야 하며, 온전한 신뢰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마음의 눈을 크게 뜰 수 있도록 그분의 자비를 구하기 전에, “하느님은 너 없이 만드셨지만, 너의 원의가 없이는 네 죄를 사해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선 나는 부족한 죄인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고, 또한 나를 고치고자 하는 뜻과, 원의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분만이 나를 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전폭적인 신뢰감을 가져야 한다.

그때 비로소 내 힘, 내 능력만 믿고 살아왔던 가리운 삶으로부터 빛이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크게 뜨게 될 것이다. 크게 떠진 빛의 눈으로 예수님만을 믿고 그분의 힘으로 살아갈 것이며, 그분의 모습을 재생하도록 살아야 하는 몫을 그분에게서 배우며 살게 될 것이다.









25       연중 제 30주일 마르 10,46-52 (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예리고)

                                                         김창석 신부





며칠 전에 한 소경을 만났는데, 그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고 태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자기 잘못이나 부모의 잘못도 없이 선천적인 장애를 입는 경우를 운명 또는 팔자라고 부른다.

인간의 운명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의 어머니는 나의 아버지와 혼담이 있었을 때 시집 안 간다고 도망을 갔는데, 공교롭게도 아버지 집 굴뚝 모퉁이에 가서 숨었다. 때문에 속으로는 시집가고 싶으면서도 겉으로는 내숭 떤다고 흉을 잡혔다고 한다. 그 때 만일 나의 어머니가 멀리 도망갔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게 아닌가?



나는 내가 원해서 김가가 된 것이 아니다. 나는 대머리가 된 것이 고민거리이다. 몇 개 안 되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면 작은 거울과 빛을 꺼내어 빗는데, 사람들은 빗을 게 뭐 있느냐고 비웃는다. 이것이 매우 싫은데, 내가 원해서 대머리가 된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

나는 내가 원해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원해서 참혹한 전쟁 시대에 태어나 고생을 한 것도 아니다.



일전에 성당에 십자가를 기증한 어느 여 신자의 남편이 교통사고로 급사했는데, 슬퍼하는 미망인에게 뭐라고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환자들의 미감아들을 보면 운명의 장난이 기구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천진난만하고 예쁜 천사처럼 생긴 그들이 나환자 부모들 때문에 사회로부터 천시를 받는다는 생각을 하면 불쌍하기 짝이 없다. 운명의 장난을 열거하자면 한이 없는데, 누가 그런 운명의 장난을 하느냐가 문제이다. 흔히는 하느님이 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어 주는 한편, 인간에게 그 운명을 초월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그 능력은 무엇이냐? 바로 자유이다. 자유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창조주의 선물이요 특권이다. 독사에게 물리면 죽지만, 독사를 잡아먹으면 약이 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같은 불행을 당해도 그것을 극복하면 행복이 되고, 극복을 못하면 불행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유 때문이다.



이사악의 쌍둥이 아들 에사오와 야곱의 경우를 보자. 똑같은 처지에서 에사오는 저주받은 민족이 되고 야곱은 축복 받은 민족이 되지 않았는가? 이것이 모두 자유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바다 면보다 땅이 낮아서 풍차를 이용하여 부강한 농업국을 이룩했고, 스위스는 산악투성이의 땅을 개발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국 또는 정밀 시계 산업국을 이룩했다. 이것도 역시 자유의지로 운명을 극복한 좋은 예이다.



우리나라는 아름다운 강산, 특히 맑은 물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강산이 훼손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헬렌 켈러 여사는 강한 자유 의지로 자기의 운명을 극복한 가장 훌륭한 예이다. 그녀는 소경이었고 귀머거리였고 벙어리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피눈물나는 노력을 한 끝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선 사업가가 되지 않았는가?



앙드레 지드의 소설 《전원 교향악》에 나오는 소녀가 눈을 뜬 후에 본 것은 질투와 시기와 증오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반면에 <요한 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이 예수의 능력으로 눈을 뜬 후에 본 것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투와 시기와 증오뿐이었다. 그러나 그 소경은 나중에 주님을 발견했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차이점은 신앙이었다. 신앙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최근에 우리 성당의 신자 한 사람이 자동차 사고를 내서 어린이를 다치게 했다. 나도 근처 병원에 입원한 그 어린이를 찾아가서 문병도 하고 기도도 해주었는데, 개신교 신자인 그의 부모는 이것이 다 주님의 뜻이고 그 동안 자기들이 신앙 생활을 소홀히 한 데 대한 하느님의 경고라고 말했다. 이런 것이 바로 운명을 신앙으로 극복하는 태도인 것이다.



로마의 시인 세네카는 “운명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사람 자신이 운명을 무겁게 짊어지기도 하고 가볍게 처리해 버리기도 한다. 어떤 역경이라도 이성으로 과감하게 극복해 나가는 사람이 위대하다.”고 하였다.











26           연중 제30주일   마르 10, 46-52 (나) 소경 바르티매오

                                                           신은근 신부 





다윗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소경 바르티매오는 이렇게 외친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그의 외침이 얼마나 애절한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장님의 심정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보이지 않는 순간은 답답하다. 그것을 영원히 지속하며 살아야 하는 그의 운명은 분명 십자가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프고 무거운 십자가였다.



바로 그 사람,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의 능력에 희망을 가진다. 혹시 그분이라면 눈을 뜨게 해주실지도 몰라, 그는 희망을 믿음으로 바꾸며 애절하게 매달렸다. 그리곤 마침내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지난 세월 자신을 가두었던 어둠이 이 한 말씀으로 걷히다니, 눈을 뜬 그는 평생 이 말씀을 심장에 새기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바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고. 바르티매오의 이 감동에 우리도 동참해야 한다. 그의 놀람과 느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에게 내려졌던 은총이 얼마나 위대하고 따뜻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우리에겐 애절한 무엇이 없는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 없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풀리지 않는 그 어떤 것이 없는지. 있다면 우리도 바르티매오의 심정이 되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주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희망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복음의 교훈이다. 우리는 소경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경일 수 있다.

왜 믿음의 길을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모를 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르티매오처럼 청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 보게 하여 주십시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복받는 행위라고 너무 쉽게 판단한다. 기도하는 것도 복을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잘 믿으면 고통도 재앙도 없어질 것이라 여긴다. 물론 우리가 청하는 것에는 이러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있지 복을 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어떤 길로 걷기를 원하시는지 그 뜻을 찾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매일이 비슷한 생활이더라도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고통과 시련이 오더라도 주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축복이 오고 기쁨이 넘치더라도 그것 역시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감사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



주님 보게 하여 주십시오. 무엇을 보게 해달라는 것인가.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래야 바르티매오처럼 변신할 수 있다. 다윗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바르티매오는 이 단순한 기도를 수없이 반복했다.

삶이 무미건조하고 신앙생활이 권태롭다면 우리도 이 기도를 반복해야 한다.

단순한 기도가 힘있는 기도다. 그분 앞에서 복잡해질 이유는 없다. 소경 바르티매오는 기도의 단순함과 믿음의 끈기로써 눈을 뜬 사람이다. 우리도 그 은총을 청하며 이 계절을 보내자.











27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교구주보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예리고의 소경을 눈뜨게 한 치유이적사화입니다. 어느 날 예리고에 사는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경은 나자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아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크게 “다윗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시켜 그를 부르시자 그 소경은 겉옷은 내동댕이치고 예수께로 왔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랍니까?” 하고 물으십니다.

소경이 “랍부니,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경은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2. 우리의 이해

  네 복음서에 수록된 치유이적사화는 흔히 그리스 치유이적사화의 양식을 따라 상황묘사, 기적적 치유, 치유 실증, 목격자들의 반응 순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리고의 소경을 눈뜨게 하는 치유 이적사화에서는 예수께서 말씀이나 행동으로 고쳐주시지 않고 그 대신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하시며 믿음의 힘을 강조합니다(52절). 또한 목격자들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치유이적사화에는 믿음의 힘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특히 바르티매오는 여러 면에서 신앙인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참으로 비참한 걸인 소경이었습니다.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그였기에 어느 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구원자로 알아보고 그분께 매달렸던 것입니다. 소경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내동댕이치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소경 바르티매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자비로우시고 용서하시고 눈을 뜨게 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소경 바르티매오를 구원한 것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체험한 다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경 바르티매오처럼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그 자비하심을 실천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그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겉모양만 교인이 아니라 진실로 바르티매오와 같은 참 신앙인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빛이 날 것입니다. 



28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성서 공부

전옥주 가타리나 / 작가

새로운 천년이 되면 새 세상이 펼쳐지기라도 하는 듯, 지난 연말연시 한 동안은 어떤 흥분과 기대로 많은 사람들이 가슴 벅차했습니다.

  저 역시도 그 분위기에 휩싸여 이천 년부터는 무언가 달라져야 하며 새로운 도약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떤 식으로 시작해야 할지 확실한 대안은 없었습니다.

  그때 들려온 소식은 우리 본당에서 성서대학을 개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지 못했음을 늘 부끄럽게 생각해 왔고, 영세도 태중교우인 남편의 도움으로 겨우 통신교리로 받았으니 성서나 교리에 대해서 누군가로부터 질문이라도 받게 되면 당황하기가 일쑤였고, 더러는 대답이 궁해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닿으면 제대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해 왔었기에 새 천년의 첫 실행으로 성서공부를 한다는 것은 가슴 뿌듯한 시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2월 마지막 목요일, 그날을 입학식 날이었습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성당에 조금 일찍 도착한 저는, 입구에서부터 즐거움이 넘쳐 흘러나는 잔치집 분위기가 감돌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성당 안에는 촛불을 든 교우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꽉 차있었고, 미처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한 교우들이 마당에도 수십 명이나 보였습니다. 내 편협한 생각에는 지금 성당 안에서 미사가 진행중이니, 성서 공부할 사람은 아마 마당에서 담소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습니다. 성당 안에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성서 공부를 하러 온 교우들이었던 것입니다.

  ‘많아야 100명 정도 되겠지…’라는 생각을 뒤엎고 600명이 훨씬 넘었으며, 추가 희망자가 많았지만 더 이상 장소와 교재 사정으로 수강 신청을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그렇게 많은 교우들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며, 모두 그렇게 일찍 왔다는 사실도 놀라움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성서 공부하라고 불러주신 그 많은 형제자매들의 얼굴에는 모두 기쁨이 흘러 넘쳐 보였습니다. 저도 덩달아 기뻤습니다.

  공부할 사람은 100명도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 보겠다는 저를 주님께서 어여쁘게 보아주셔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운 것들이 모두 저의 기우(杞憂)였고, 오만(傲慢)에서 비롯된 것임을 가슴깊이 느꼈습니다.

  열심히 살려는 젊은 교우들이 많은 우리 본당에서,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 싶어 생각하신 끝에 성서대학을 운영하기로 결심하셨다는 신부님. 저희들은 열정적이신 두 분 신부님의 성서강의를 들으면서,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 성서 공부를 시작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신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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