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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1:10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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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29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29주일

        

        24. 소원석 신부(다)/46                   25. 강길웅 신부(다)/48

        26. 김정진 신부(다)/49                   27. 강영구 신부(다)/52

        28. 강길웅 신부(다)/없음                 29. 김신호 신부(다)/55

        30. 정현준 신학생(다)/57                 31. 최기산 신부(전교주일)/59

        32. 최창무 주교(사순특강)-전교주일/61

        33. 이차룡 신부(전교주일)/62

25         연중 제 29주일   루가 18, 1-11(다) 이 과부가 하도 성가시게구니

                                                         소원석 신부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연중 제 29 주일입니다.

요즈음은 조간 신문 보다는 석간 신문이 더 잘 팔린다고들 합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데 원동력이 되는 아침의 상쾌한 기분을 망쳐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종종 신문을 펼쳐들면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하면서 주저 물러앉을 수 밖에 없다는 심정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진실과 진리가 짓밟혀 버린다는 생각이 들때면 더욱 그렇고 불의가 의로움으로 둔갑하여 판을 친다고 느낄 때에는 울분마저 치솟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당하실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알려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하신 후 믿음 때문에 자신들에게 닥쳐올 박해와 시련을 예상하고는 근심과 불안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근심과 불안에 싸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시간, 저의의 시간, 평화의 시간이 반드시 온다는 확신을 주시며 ‘낙심하지 말고 언제나 기도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끝까지 충실하게 믿음을 지켜야 하며, 하느님의 자비로우심과 그 도우심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권고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기도를 가르쳐 주셨고, 또 자주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두 가지 측면을 특별히 강조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언제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에페 6,18) 바오로 사도께서도 언제나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자주 듣게 되는 단어가 있는데 아마 ‘기도’라는 단어도 그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처하게 되는 의문은 ‘도대체 무엇이 기도일까?’ 하는 것입니다.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께서는 ‘기도는 하느님을 알아보는 것이다’라고 하셨고, 아빌라의 성녀 대 데레사께서는 ‘기도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샤를르 드 후고 신부님께서는 ‘기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비추어 기도의 정의를 내려본다면 매주 우리는 주일을 거룩히 지내기 위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집에 모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모이는 이유는 하느님의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아버지이신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기도하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성전에 모이는 이유와 성인들의 가르침을 함께 생각해 볼 때, ‘기도란 하느님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리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기도는 어떤 형식이나 틀에 구속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말을 하듯이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에게 말을 할 때 무든 격식이나 형식을 찾지 않습니다. 엄마도 그런 격식이나 말을 멋지게 할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아름다운 미사 어구로 장식된 말마디가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항구하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오늘 복음에서 강조되고 있는 점은 비록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용기를 잃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용기를 잃게되면 자신이 청하고, 기다리고, 바라고자 했던 모든 것들이 다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리며, 하느님과의 대화는 중단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제 1 독서를 보면,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에서 하느님 백성의 승리를 쟁취하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나오는 과부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달라고 끈질지게 간청합니다. 모세의 간구와 과부의 끈질긴 요구의 뿌리에는 온갖 역경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반드시 자신들을 구해 주시리라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그와 같은 확신은 그냥 손쉽게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확신은 땀과 고통과 수난을 끝까지 참아 견디는 용기가 있어야만 유지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루가 18,10) 고 하신 예수님의 질문은 믿음에 대한 큰 시련이 닥쳐올 때라도 꾸준히 기도하고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걸쳐 믿음을 더하여 주기를 청하였고(연중 27주), 믿을 때에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음을 보았습니다.(연중28주)



오늘 다시 진정으로 믿는 이는 용기를 잃지 않고 기도할 줄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언제나 기도하며, 용기를 잃지 않는 이가 참으로 믿음을 지닌 사람일 것입니다.







26        연중 제 29주일   루가 18, 1-11(다) 이 과부가 하도 성가시게구니

                                                             강길웅 신부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성서의 내용은 우리가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해야 적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했을 때 대화가 없다면 하느님과 우리 사이는 단절되고 맙니다. 「하느님은 그저 하느님이고 우리는 그저 우리」가 됩니다. 이를테면 끝장인 셈입니다.



어떤 부부가 있다고 했을 때 서러 말을 하지 않으면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대화가 없으니까 만나면 지옥입니다. 남편이 밖에서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면 불안합니다. 집에 들어가야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아내도 그렇습니다.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되면 안절부절입니다. 남편 만나는 것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서로 대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싫어도 대화를 해야 하며 억지로라도 대화를 해야 하며 억지로라도 말을 붙여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말을 하는 것하고 하지 않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됩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대화를 하면 숨통이 열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가시다고 말을 하지 않으면 세상이 닫혀지고 은혜도 묶여집니다.



제1독서(출애 17,8-13)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반도에서 아말렉 사람들과 싸울 때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팔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모세가 팔을 들고 있으면 이스라엘이 전투에 이기며 팔을 내리고 있으면 싸움에 패하게 됩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나서서 모세의 팔을 억지로 떠받치고는 내리지 못하게 하루 종일 붙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손을 들고 있다는 것은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기도를 그치면 싸움에 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을 내리지 못하게 모세의 팔을 붙들고 억지로 떠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억지로라도 기도하는 것이 안하는 것 보다는  백배, 천배 나은 것입니다. 기도는 그 자체로 은혜로운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어찌보면 그분의 약혼자요 달리 말하면 그분의 핏줄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싸울 때는 하느님이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보다 오히려 하느님 당신이 직접 싸움에 개입하고 싶어하십니다. 당신과의 깊은 관계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를 통해서 그분의 백성이 되었고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시련과 역경에 시달릴 때 하느님은 우리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직접 그 사건에 나서시어 악의 세력에 대항하시고 우리를 지켜 주시고자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치지 말고 부담없이 그분 앞에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나가서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은 또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당신께 가지고 나오는 것을 굉장히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진정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들 때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도움을 청하면 그 자체로 그분께는 영광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억울한 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부당한 처사에 많은 상처를 받았고 도 누가 그녀의 대변인 노릇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단념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재판관에게 매달립니다. 이를테면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매달립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습니다. 기도는 그처럼 끈질기게 매달려야 합니다.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모세의 경우처럼 억지로라도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복음에서 과부의 경우와 같이 실망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적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인간의 자존심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태오 복음 15장 21절 이하에 보면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 나옵니다. 그녀는 예수께 자기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으니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면전에서 거절했습니다. 그때 여인이 매달립니다. 강아지라는 천대를 받아도 좋으니 쓰고 남은 은혜라도 던져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겸손되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억지로라도 끈질기게 하면 그분 자신이 늘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그 자체로 은혜입니다. 따라서 힘들고 어려울 때 간절한 기도를 바치도록 합시다.











27      연중 제 29주일  루가 18, 1-11(다) 이 과부가 하도 성가시게구니

                                                             김정진 신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신 오늘 복음의 비유의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며 기도에 관하여 일대 각성을 일으켜 줍니다. 우리는 기도할 줄을 모른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떤 모양으로 기도할 것인가를 차츰 배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기에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후 하느님은 우리의 소원을 거절하지 못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그분 앞에 나와서 우리의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기에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후 하느님은 우리의 소원을 거절하지 못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그분 앞에 나와서 우리의 소망이나 갖은 사연이나 남모르는 근심 걱정을 솔직하게 말씀 드리며 열심히 기도 바칩시다. 우리의 가장 훌륭한 기도는 미사 성제에 참여하는 것이며 주의 기 기도문과 성모송은 우리 일상 생활에 있어 절대로 궐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제 1독서를 보면 재미있게도 모세가 기도하는 자세로 팔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피로해서 팔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패배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신 전쟁에 있어서도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꾸준히 그리고 항구하고도 끈질기게 기도해야 됨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비양심적인 한 재판관이 끈질기게 찾아오는 과부의 하소연이 귀찮아서 소송을 해결해 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악하고도 비정의 인간도 그렇다면 인자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본시 재판관은 약한 자와 고아를 감싸주고 낮은 사람, 없는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책임이었습니다.



재판관은 당연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을 편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비유에 나오는 재판관은 하느님의 율법이나 권리와 정의 등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그 재판관에게 선물을 줄 형편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집요하게 재판관에게 매달려 졸라댔습니다. 재판관이 이 진저리를 낼 때까지 성가시게 굴었습니다. 마침내 재판관은 동정심이나 자비심에서가 아니라 그 과부가 하도 성가시게 굴기 때문에 판결을 내려 주었습니다. 그 과부는 끈기 있게 졸라댐으로써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그 과부는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하느님은 고약하고 양심 없는 재판관과는 아주 다르십니다. 비유에 나오는 재판관처럼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도 순수한 이기심에서 계속적인 간청 때문에 마음이 누그러졌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섬기고 공경하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얼마나 잘 들어주시겠습니까. 하느님은 의로운 재판관이실 뿐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비유 말씀의 중심 사상은 하느님께서는 착한 모든 사람들의 계속적이고 끈기 있는 기도를 기꺼이 들어주시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간청을 들어주시리라는 확신과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허락하실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과 동시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구세주로서, 재판관으로서 오십니다. 주님의 재림이 구원이 되느냐 멸망이 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은 곧 끊임없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간단 없는 기도로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느님과 친근하여지고 따라서 구원을 약속받게 됩니다. 하지만 참으로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리라는 것을 굳이 믿습니까. 우리는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이렇게 끝맺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당시의 제자들과 오늘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안토니 블룸 주교님이 「기도의 체험」이란 책에서 소개 한 어느 수사 신부의 기도를 들어봅시다.  스타레츠 실로우안이란 수사 신부는 러시아의 농부로서 20대에 아토스산에 들어가 50년 동안 거기서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한 분입니다. 어느 책에서 성모님이 이 산에서 하느님께 일생을 헌시하는 사람을 위해 특별한 은혜를 전구해 주겠다는 내용을 읽고 아토스산의 수도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내 편에 서 주신다면 거기로 가겠다. 나를 구원하시는 걸 그분이 책임지실테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와서 오랫 동안 수도원의 일터 책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 일처에는 1,2년 동안 돈을 벌어서 집으로 돌아가 결혼할 준비를 하려고 온 러시아의 젊은 농부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다른 일터를 책임지고 있는 수사들이 「실로우안 신부님, 당신 일터에 일하는 사람들이 당신이 감독도 안 하는데 어떻게 그처럼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은 늘 지켜 보고 있는데도 우리를 속이려 드는데요」하고 물었습니다.



실로우안 신부님은  「나도 모릅니다. 내가 하는 일은 말씀을 드리자면 아침에 나올 때 이 사람들을 위해 먼저 기도하고 나면 내 마음은 그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으로 가득 찹니다. 그래서 일터로 들어서면 이들에 대한 가엾은 생각으로 내 영혼은 눈물에 젖습니다. 하룻 동안 할 일을 맡겨 두고 그들이 일할 때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려고 내 방에 들어가 그들 하나 하나를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 이 얼마나 흐뭇하고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실례입니까. 우리는 다 같이 기도하는데 큰 관심을 갖고 미사 성제에 참여하는 열성과 가정에서의 기도에 더욱 분발하도록 합시다. 아멘.















27    연중 제29주일 -전교 주일   루가 18, 1-8 (다)  기도-권능에의 참여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29주일이자 전교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와 복음 말씀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힘과 능력이 어떤 것인가?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전례 주제입니다.

우리가 오늘 들었던 제1 독서 출애굽기는 기도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약속된 땅 가나안을 향해서 가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한 여정 중에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목마름과 굶주림도 큰 장애였고, 야훼 하느님을 배신하고 우상 숭배의 유혹에 떨어지려는 것도 큰 장애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이방인들의 무리가 가장 큰 장애 중에 하나로 등장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나이 산 가까이에 있는 르비딤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아말렉이라는 족속들이 몰려와서 그들의 길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아말렉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출중한 장수인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아말렉을 맞아 싸우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형 아론과 후르를 데리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지팡이를 손에 들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은, 모세가 두 팔을 펼쳐 들고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팔에 힘이 빠져서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시 팔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모세의 기력이 빠져서 팔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론과 후르는 큰 바위를 굴려와서 그 위에 모세를 앉힌 다음에 아론과 후르가 양쪽에서 모세를 팔을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팔은 해가 질 때까지 처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쳐부수고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도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쳐부순 것은 자신들의 힘으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지켜 주고 보살펴 주시는 야훼 하느님의 능력으로 아말렉을 쳐부술 수가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모세의 팔이 처져서 기도를 중단하면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팔을 쳐들고 기도를 하면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이기게 된 것은 자신들의 힘이나 무력(武力)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기도로써 자신을 무장하고 하느님의 능력에 참여하는 사람은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된 땅 가나안을 향해 나그네길을 갔듯이,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도 우리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그네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에는 수많은 장애물과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 여정에 가로놓여 있는 이 수많은 장애와 유혹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장애물과 유혹들을 극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오늘 제1 독서에서 찾게 됩니다. 기도로써 우리자신을 무장함으로써 이 장애물과 유혹들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능력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잘 훈련된 병사들과 훌륭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말렉을 쳐 이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두 팔을 들고 기도함으로 하느님의 능력 있는 팔이 그들을 지켜주었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서 아말렉을 쳐 이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복지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기도로 우리 자신을 무장하여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_ 우리가 우리 자신을 무엇으로 지키며 무엇으로 이 세상의 악과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돈이나 재물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지식과 지위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들로 우리 자신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훈련된 군사들과 무기로 아말렉을 이기려 했더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패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돈이나 재물이나 지식이나 지위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것들 때문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압니다. 우리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이며 힘이 없는 사람들인지를‥‥ 그러나 기도하는 우리는 무한히 강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실제로 기도 생활에 충실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강한 사람들입니다. 그 강함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느님의 권능의 팔에서 그 강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그 어떤 곤경과 환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늘 기도함으로써 언제나 하느님의 권능과 능력 가운데 머무르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은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는 돈도 없고 빽도 없는 가난한 과부가 파렴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호소함으로써,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하게 된다는 비유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자세가 그 과부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과부가 파렴치한 재판관이 귀찮아할 정도로 끈질기게 달려든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이 귀찮아할 정도로 그렇게 졸라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칫 예수의 말씀을 그렇게 알아듣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 말씀의 참뜻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기도하는 우리의 자세가 과부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부는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까? 과부는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그 누가 과부의 편을 들어 주지도 않습니다. 과부는 혈혈 단신 혼자입니다. 만일 과부가 돈이 있거나 ’빽'이 있었더라

면 그 뻔뻔스러운 재판관을 그렇게 귀찮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지닌 돈으로 혹은 ‘빽'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는 아무 것도 지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 재판관이 뻔뻔스럽고 파렴치하기는 했지만, 과부에게는 그 재판관이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길이 없는 과부였기에 그에게 희망을 걸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과부는 그 재판관에게 매달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도 하느님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깨닫는 사람만이, 그 과부와 같은 심정으로 절실한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며, 어떤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지를‥‥!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만 희망을 거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반대로도 말할 수 있는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느님말고 따로 믿는 데가 있으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흔히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을 비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어라.” 참으로 가소로운 말이지요. 인간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감히 이런 소리를 입 밖에 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 자신의 주먹을, 즉 자신이 지닌 돈과 재물과 지위와 재능을 더 믿고 거기에 더 큰 희망과 기대를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돈과 재물과 지위와 재능을 믿는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일 뿐 아니라 시간 낭비라고 생각됩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눈에 기도하는 사람은 힘없고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하는 그 시간에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의 손길보다는 자신이 지닌 돈과 재능과 지위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이며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돈을 믿지도 않고 재능과 지위를 믿지도 않습니다. 또한 거기에 희망을 걸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분은 하느님 한 분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요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부와 같은 심정으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적으로나 무기에 있어서 별 볼일 없는 족속들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권능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아말렉은 강력한 군사력으로도 보잘것없는 이스라엘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강한 사람, 흔들림이 없이 자신의 인생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돈과 재물과 지위와 재능을 믿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재판관이 절실하게 졸라대는 과부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면, 하느님께서 자녀인 우리가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를 왜 들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형제 자매 여러분, 기도는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세상이 험하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걷는 인생 길이 고달프다고 불평하지도 마십시오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의 권능과 은총 속에 머물고, 기도로 우리 자신을 든든히 무장함으로써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권능의 손길이 기도하는 여러분을․언제나 지켜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29     연중 제29주일   루가 18,1-8 (다)   끊임없이 기도하라! “편견을 벗어나야!”

                                                              김신호 신부



  사회심리학적인 면으로 인간을 분석해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편견은 여러 가지 동기에서 형성되고 있지만 한번 형성된 편견은 없애거나 변화시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한번 습득된 편견은 사회의 현상이나 여러 가지 이유에서 변할 수도 있지만 사람의 사고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된다.



  편견은 한번 형성되어 자기의 편견과 같은 현상을 만나게 되면 그 편견이 옳다는 것으로 확인되어 편견이 더욱 강화되고, 편견과 다른 사실이 발견되면 편견을 수정하기보다는 오히려 편견과 맞지 않는 사실이 예외에 속한다고 단정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편견을 고수하게 된다.


  그러므로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범 사회적으로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한동안 유전 무죄이고, 무전 유죄라는 자조적인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이것은 분명히 편견에 가까운 말이지만 이것을 듣는 사람들 중에 사실 무근한 말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마도 매우 적은 숫자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홍보수단을 통하여 전해지는 권력을 가진 자나, 재산을 가진 자들이 재판을 받거나 또는 재판의 결과에 따른 벌의 내용을 보면, 실제적으로 편견이 옳다는 것을 어느 정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고있다.



  그러나 건전한 상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거의 모두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독일에서 이행된 조사에 의하면 교통경찰이 자동차를 검문할 때에 고급스러운 자동차와 값이 싸고, 볼품 없는 자동차를 차별해서 검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어느 장소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때, 누군가 몰래 고약한 냄새가 나는 물질을 땅에 떨어뜨려 냄새를 나게 하면 거기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그 중에서 옷을 제일 남루하게 입은 사람을 쳐다보게 된다고 보고하고 있다.



편견에 사로잡힌 사회



  물론 이 사람이 냄새를 피운 장본인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편견에 의해 그 사람이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표시로 그 사람을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또 교통경찰이 좋은 차와 허름한 차를 차별하는 것은, 좋은 고급 차는 당연히 사회에서 지위가 높고 점잖은 사람이 타고 있고, 허름한 차에는 사회의 이탈자가 타고있을 것이라는 편견에 기초한 심리적인 상태에서 이러한 현상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재판관도 아마 편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과부는 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이 있기 때문에 불평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편견이 있기 때문에, 과부의 억울함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항구하게 기도하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비유적인 이야기이지만,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실제적으로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으며, 자신의 편견에 의한 독단적인 관점을 고수하게 된다는 현실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독선적인 재판관도 결국 과부의 끊임없는 호소에 손을 들고 사정을 들어주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나쁜 재판관도 청을 들어준다면, 하물며 하느님께서야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는 사실은 분명한 결론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여기에 필요한 것은 항구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면서 계속해서 기도하는 자세이다.



믿음, 희망을 잃지 말아야



우리도 하느님께 편견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자의 기도는 들어주고, 나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는 따위의 것이다. 그러나 편견은 스스로 우리자신이 하느님께로 가는 것을 막는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편견이 없어질 때에 우리는 하느님께 진정으로 우리가 필요한 신앙을 청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벗어나야 되는 가장 큰 편견은 세속에 뿌리내리려는 우리 삶의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편견에서 벗어날 때에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섬길 수 있게 될 것이다











30                연중 제29주일   루가 18,1-8 (다)

              온갖 곤경 중에 기원  “언제나 끈질기게 기도하라” 

G2 정현준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뜻으로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사회적으로 또한 경제적으로 약자에 속했던 과부가억울한 일을 당하여 재판관에게 가서 그 일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교만한 재판관은 그 과부의 청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과부가 끈질기게 졸라대는 바람에, 그 교만했던 재판관도 과부의 잦은 부탁이 귀찮아 그것을 기어이 들어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마치시며, 우리들의 청을 하느님께서는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고 기어이 들어주심을 강조하십니다.

과부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탁했던 것처럼, 우리들의 기도도 끈질긴 지구력을 가지고 그분께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렸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어 올바로 판결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기도가 꼭 이루어진다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여러 해 전에 TV에서 “거대한 바위를 깨는 기술자”에 대한 프로그램을 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폭약이나 기중기를 이용한 햄머 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과 사람의 힘으로 하는 햄머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그 때 ‘과연 저렇게 작은 두 개의 도구로, 보통 집보다 더 큰 바위를 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 시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술자들이 수십 회의 햄머질을 반복하니까, 바위가 ‘쩍’ 하는 소리를 내면서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리포터가 기술자에게, 어떻게 그 바위를 쪼갤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기술자들은 바위의 크기강도, 그리고 을 보고,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해 한 점을 택한 다음, 그곳을 계속 때리게 되면 쪼갤 수 있다는 답변을 하였습니다.



  물론 폭약을 매설하여 스위치 한 번 누름으로써, 혹은 기중기를 이용한 햄머로 단 한 번 혹은 몇 번 때려서 편하게 바위를 쪼갤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편안함을 이용한 작업을 하지 않고, 왜 그렇게 힘들게 하느냐?는 질문에, 바위에 있는 고유의 결을 살리고, 어느 정도의 형태의 갖춘 것을 얻기 위함이라고, 그 기술자는 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접하게 되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 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부순다는 것은, 단순한 우리의 이해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바위를 깨는 장인들처럼 바위의 한 부분에 계속적으로 계란을 던진다면 충분히 바위를 깰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끈질긴 노력과/ 깰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약 45일 뒤면, 5학년 형제님들이 30일 피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저도 금년 초에 이 피정을 하면서/ 기도의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피정 지도 신부님들께서 힘을 빼라고 하신 말씀들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없었고, 또한 이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실까! 하는 의문도 여러 번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피정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안에서도 자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들어주셨습니다. 저의 자그마한 믿음과 어찌 보면 30일 동안의 무식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시고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일상 생활에서도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신다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기도는 끈질기게, 그리고 항상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성자께서도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언제나, 그리고 끊임없이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성부께서도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중도에 포기하는 일없이,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언뜻 보면 불가능해 보이지만, 우리 속담에 “ 낙수물이 주춧돌을 뚫는다.” “열번 찍어서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한느님께 은혜를 받을 수 있고, 우리의 기도가 꼭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31       연중 제29주일  (전교주일= 삼위일체 대축일 복음)   마태 28, 16―20 (다)

전교는 우리의 의무

최기산 신부

  

어느 시골 마을에 가난한 한 가족이 도시에서 이사를 왔다. 도시에서 별별 일을 다해 보았으나 결국은 빈털터리로 밀리고 밀려서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마침 구회관이 비어 있어서 그리로 들어왔는데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젊은 부부는 어린아이 둘을 집에 남겨 둔 채 매일 날품팔이를 하며 근근히 살아갔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은 그들을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근사한 차나 타고 나타나서 별장 짓고 돈을 물쓰듯하며 술을 사고 밥을 사면 관심이 많았겠으나 이 젊은 부부는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김씨네만은 달랐다. 그들을 친절하게 대해주고 어려울 때면 도와주었다. 김씨네도 넉넉지는 않지만 별식이 있으면 오라고 하여 함께 먹고 답답할 때 함께 해주며 하소연을 들어주고, 울면서 인생을 서글퍼할 때 위로해 주는 그런 정도의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젊은 부부는 너무도 고마워하였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타향에서 자신들을 사람 취급해 주는 유일한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김씨네가 천주교 신자라면 그 젊은이들이 성당에 다니는 것은 시간문제다. 김씨네의 삶을 보고 그들은 김씨네가 믿는 하느님은 정말 좋은 신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전교는 입으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다. 요즈음 주위에서 거리선교, 새 복음화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인간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삶을 신자들이 살아갈 때 비신자들은 자발적으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



전교는 우리의 임무 아무리 못된 자식이라도 세상을 하직하는 부모가 손을 붙잡고 유언을 하면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한다. 하물며 보통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ꡒ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ꡓ하고 마지막 유언을 하셨다. 우리는 이 마지막 말씀을 지켜야 한다. 선교교령 제2항에도 ꡒ나그네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ꡓ라고 선교의 사명을 확언하고 있다.



교회의 탄생일은 언제인가? 우리는 성령강림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이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감림 때에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선교하려고 떠났기 때문이다. 겁쟁이였던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달라졌다. 굳셈의 은사로 충만해진 그들은 전교 하려고 나섰다. 그러므로 전교의 역사는 교회가 생겨나면서 시작됐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는 전교하기 위해서 생겨났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선교에 있는 것이다. 전교는 그리스도를 알리는 일이다.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그리스도와 친교를 갖게 해주고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얻게 해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예수님은 ꡒ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 일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셨다ꡓ(루가 4,43)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야겠다.



전교의 방법 바오로 사도는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였다. 올은 말이다. 여기에서 전교의 방법을 살펴보자



1. 복음은 말로 전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점잔만 빼느라고 말로써 전교하는 데 너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는 무엇이건 다 해주고 싶다. 우리 가족, 우리 친척, 우리의 친구, 우리의 이웃에게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어찌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전교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주님께 대한 믿음이 돈독해야 한다. 잔은 차야 넘치는 법이다. 나도 주님을 믿고 행복하지 않은데, 확신이 없는데 어찌 남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2. 복음은 기도로 전할 수 있다.

 소화 데레사는 수녀원 박에서 전교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분은 전교의 주보가 되었다. 기도로 전교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없이 주님을 전도할 수 없다. 3. 경천애인 해야 한다. 신자들이 굳은 믿음으로 무장하고 어려움 중에도 기뻐하고, 희망을 보일 때 비신자들은 감동한다. 신자들이 미지근한 믿음으로 비신자와 똑같은 인생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면 비신자들은 실망할 것이다. 성당에 나올 마음이 없을 것이다.

열렬한 믿음으로 고난을 이기고 고난 중에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믿음,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가지는 그런 믿음에 감탄한다. 또 이웃을 사랑하고 특히 소외된 이들을 사랑할 때 이웃은 우리를 따라오고 주님을 만나 행복해 할 것이다. 행동이 따라주는 전교가 아쉬운 때다.



복음의 메시지 아시아의 전교 현황은 아직도 인구의 2~3%정도로 부진한 상황이다. 한국의 경우는 8% 정도라고는 하지만 많은 쉬는 신자가 있고 아직도 우리가 전교해야 할 대상자가 부지기수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전교했는가? 영세한 뒤로 몇 명에게 복음을 전했는가? 한 명도 없다면 나 자신의 신앙을 반성해야 한다. 내가 기쁘지 않기에, 남에게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라면 복음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먼저 깊이 인식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열망과 확신이 우리들 가슴에 있어야 한다. ꡒ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ꡓ(요한 3, 16). 이 말씀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린 이 소식을 전해야 한다.







32         전교주일 <사순 특강> 선교, 성부의 사랑이 드러남

                                                            최창무 주교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며 구원의 하느님이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다.”

“선교는 근본적으로 복음화이며, 복음화가 되면 그리스도인은 곧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복음선포는 성부께 대한 사랑의 실천」이란 주제로 네 차례 강연이 있었다. 그 요지는;---

1. 선교와 신앙은 인간에게 있어 영혼과 육신에 비유될 수 있는 불가분의 관계며, 동전의 양면과 같은 점이다. 이는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신 성령, 곧 하느님의 역사이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보람이며 말할 수 없이 기쁘게 새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다.



2. 그런데 한국교회의 선교상황은 어떠한가? 복음이 전파되던 초기에는 죽음이나 혹형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루살렘의 초기교회 신자들처럼 기쁨에 넘쳐 선교하며 살았고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고 눈부신 성장을 해온다. 그러나 최근 10여년 불행하게도 선교열의가 식었을 뿐 아니라 냉담교우를 양산하는 아픔과 부끄러움을 반성하는 교회가 되었다



3. 이 현상을 극복하는 길은, 초대교회 신앙인들이 체험한 살아있는 신앙, 곧 메마른 교리만을 배우는 지식 습득이 아니라, 살아있는 진리 인생의 길을 가르치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주선되어야 할 것이다. 복음을 모르고 죄에 머무르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는 일이며, 박힌 못을 빼는 일이다. 복음선교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신앙인 자신은 물론이고 그가 사는 사회도 변할 것이다.



 4. 이를 위해 한국 주교단은 2천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마지막 해「성부의 해에 새날, 새삶을 실천운동으로 펴자고 한 것이다. 즉 「나부터 새롭게」「참된 가정 이루기」「좋은 이운 되어주기」「함께 가요. 우리」다.

  우리가 이런 신앙인들이 된다면 우리의 삶이 선교이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이다.



5. 구세사에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

  가)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약속을 알려주는 책이다.

 첫째,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늘.땅 물, 공기 한마디로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을 다 마련해 주시      고 당신을 위해서. 당신을 대신해서 이 세상에 살도록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다.

  둘째, 구원의 하느님이시다. 불행하게도 사람이 이 행복을 차 버리고 하느님을 배신했으나 하느님은 인간을 잊지도 버리지도 않는 분이시다. 인간의 축복을 위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스스로 은혜를 약속하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너희는 내가 하는 일이 부당하다고 한다마는.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가 하는 일이 부당하지 내가 하는 일이 부당하냐? ‥‥ 너희의 행실을 고쳐라. 거역하며 저지르던 죄악을 모두 버리고 마음을 돌려라. 그래야 올가미에 걸려 망하지 아니할 것이다. 거역하며 저지르던 죄악을 다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먹고 새 뜻을 품어라.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사람이 죽는 것은 나의 마음에 언짢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살려느냐? 마음을 고쳐라」(에제 18,27~32/ 창세 12.1~3,/ 출애 3,6~7).

  셋째. 하느님은 무한히 자비로우신 어버이 이시다. 어떤 어머니 보다 더 그윽한 사랑을 지니신 하느님이며 (이사49.14~15). 어떤 아버지 보다 자비로우시며 (미가 7.14~20),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어버이시다 (호세 14.2~9. 지혜 11,21~12,2).

  마치 철부지 아이들이 부모님 속상하게 한 뒤 철들어 보속하고, 부모님의 사랑을 본받아 어진 부모가 되듯 남의 잘못을 대신해서 고통을 참아 받고 벌을 피하게 하는 종들을 통해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가르쳐 주신다 (창세 18,16~32, 호세 14: 이사 50,4~9,52.13~53,12).



  나) 신약성서는 구약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

첫째. 약속대로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시어 죄스런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이사 9.1~5 : 루가 2.8~1,) ; 요한 3,14 ~17).

둘째.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우리 죄인을 위한 대속물이 되셨으며, 하느님과 인간. 인간자 인간, 인간과 자연의 화해의 이치가 되시고 원리가 되셨다. (2고린    5,14-21/ 1고린 1,18-2,16)

셋째. 이 신비는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신 성령에 의하여 죄인들을 새생명에 이끌어 주시고, 그 오묘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신다(루가 1,26-38/ 요한 14,15-17/ 15,26-27/16,4-15).

넷째. 이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에 약속하셨고 내려주셨다.(사도1,4.14/2,1-4)



 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에 계시며, 교회를 통해서 당신 구원사업을 계속하신다.(마태 28,18-20/ 1고린 12-14). 그러므로 선교는 근본적으로 복음화이며, 복음화가 되면 그리스도인은 곧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마태 5,13-16). 곧 나부터 새롭게, 우리 모두에게 새롭게 삶을 가꾸는데 있다고 하겠다.       1999.3.24









33                     전교주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이차룡 신부





  지금 전국 각 교구는 선교의 뜨거운 열기로 불타 오르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전국에서 두드러지게 많은 예비신자가 입교한 본당을 보면 선교열정에 불탄 신자들이 새로운 양과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가두선교와 가정방문, 선교의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세례 이후 지금까지 몇 사람이나 선교하였으며, 그들의 신앙을 계속 지도하고 있는가? 선교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선교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는 주님의 지상 명령을 받고서도 선뜻 복음을 전하기가 두렵고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선교의 어려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선교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선교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선교의 정확한 개념은 주님의 지상명령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f):19-20).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가라」「제자로 삼아라」「세례를 주라」「지키도록 가르쳐라」의 네 가지 동사로 구성되어 있다.



 1) 가라

  우리는 가야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 이 말은 사무실에 간판을 걸어놓고 「구원받기 원하는 분은 누구나 안으로 문의하세요」라고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그들을 찾아내야 한다.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마르 1:38).  실제로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찾아 나섰다(자캐오. 우물가의 여인, 마태오. 베드로).


 2) 제자로 삼아라

  복음을 전하라는 말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을 온몸으로 소화해 내야한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구원이 되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로마 1:16).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그 복음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거나 복음에 따른 합당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을 알아도 복음에 대한 확신과 체험이 없다면 신앙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선교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가 이 문제에서 나온다. 제자로 삼으라는 말은 사람들을 인도해 오라는 것이며 나가서 사람들에게 구원하는 방법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세례를 주라



  세례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나를 위한 나의 사건임을 복음을 통해 깨닫고 믿어 그 사건에 동참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했지만 세례는 아무에게나 주지말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라고 명령하셨다. 세례를 줄 수 있는 대상은 그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옛사람이 이미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예수님과 결합하여 하느님과 성령과 하나됨을 믿는 사람이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고백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실한 세례인 것이다.



  4) 지키도록 가르쳐라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것이다. 지상명령을 제대로 이행했다면,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온 누군가에게 첫 번째로 가르칠 것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오는 방법인 것이다. 지상명령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연속적인 순환을 일으킨다. 먼저 나는 간다. 집으로, 가게로, 일터로, 시장으로 가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만나고, 그에게 회개하는 법을 말해 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세례를 받을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을 회개시켜 세례 받을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가서 그렇게 한다. 한 사람에게만 전교하여 구원받게 할 것으로 끝내지 말라. 내가 회개시킨 사람이 다른 사람을 회개시켜 세례 받을 수 있도록 하라. 내가 누군가를 회개시킴으로써 긴 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상명령은 사람들에게 가는 법을 가르치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는 법을 가르치고 다른 사람을 세례받게 하는 법을 가르치라고 한다.



  이것이 선교에 대한 주님의 기본계획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이 분부하신 것을 지키고 가르쳤다면, 복음은 벌써 땅 끝까지 전파되었을 것이다. 주님의 지상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해야 한다. 주님이 가라 했으니, 다른 사람이 가야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야한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이사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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