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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1:08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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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29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29주일

        11. 김영남 신부(나)/21                   12. 김정진 신부(나)/22

        13. 조순창 신부(나)/24                   14. 조광호 신부(나)/26

        15. 표준관 신부(나)/28                   16. 강길웅 신부(나)/30

        17. 김의철 신부(나)/32                   18.변희선 신부(나)/33

        19. 박기준 신부(나)/35                   19. 박제원 신부(나)/36

        20.작자미상(나)/37                 21. 작자미상(나)-참전교의 길/39

        22. 작자미상(나)-준신자를 붙잡자/41

        23. 작자미상(나)-땅 끝까지..../43



11       연중 제29주일+ 전교주일   마태 28, 16~20(삼위일체 복음) (나)

ꡒ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ꡓ

                                                             김영남 신부



(전교주일인 오늘의 복음은 지난 '삼위일체 대축일' 때 들었던 복음과 같다. 그래서 이번 주의 '복음생각' 은 지난 '삼위일체 대축일' 의 것을 기초로 삼되, '선교' 에 초점을 두었음을 미리 밝혀 둔다)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교회는 만민에 대한 선교사명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마태 28, 16~20의 말씀을 복음 으로 듣는다. 이 대목은 마태오 복음서의 제일 끝자리에 놓여 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집약적이다. '선교사명' 과 관련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몇 가지 생각해 본다. '선교' 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오늘 복음 말씀에서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파견되기 전의 상태' 이다. 그 때 그들은 심한 패배감, 절망감 에 빠져 있던 상태였다. 그들은 스승을 배신하였다는 수치심과,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신 성 금요일의 충격과 절망 속에 아직도 깊이 빠져 있던 상태였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 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를 통해 갈릴래아로 가면 당신을 만날 것이라는 '기쁜 소식' 을 보내 주셨다. 그들은 먼저 이 '기쁜 소식' 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야 했다.



제자들이 '파견되는 장소'가 '갈릴래아의 어느 산' 이라는 점은 깊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갈릴래아는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처음 소명을 받은 곳' 이었고, '제자로 양성 된 곳' 이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후 당신의 제자들을 새 출발 시키시려는 예수께서는 그들을 당신과 그들 사이의 '첫 사랑' 이 있었던 갈릴래아로 불러내신 것이다(참조: 호세 2, 16). '산'도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 분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던 것과 비슷 하게,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제자들은 '산' 에서 '산상설교' 라는 새롭게 해석된 '계명' 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 이렇게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갈릴래아의 그 산' 으로 다시 부르셨다는 것은, 당신의 제자들을 '모든 민족들에게 파견' 하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근본적인 가르침을 상기시켜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선교의 목표' 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 을 갖고 계신 분, 즉 죽음까지도 그분의 권한 아래에 두고 계신 '주님' 으로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사명의 핵심은 "만민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것" 이다. 언뜻 보면 매우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이다.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 이 핵심사명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 점은 지상 생애 동안 예수께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 제자 들의 공동체를 형성' 하려고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좀 더 이해가 될 수 있다. 무릇 제자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 가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사명은 복음선포를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열 한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 로만 남아 있었는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까지고 체험한 이제 그들은 만민에게 파견되어,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에 하셨던 말씀대로 "사람 낚는 어부들이 되는" (마태 4, 19)것이다.



마태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진복선언' 으로부터 시작하여 '최후 심판 말씀' 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을 줄곧 가르치셨다. 이제 부활 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새롭게 출발되는 제자공동체는 예수님이 하셨던 '가르침' 의 임무를 이어받는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제자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의하면 넓게 볼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교의 삶' 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람들은 성자 예수님과 결합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성자 예수님과 가장 깊은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는 성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 때 성령은 이런 친교를 근본적 으로 가능하게 해 준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 이 말씀은 부활 하신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탄생되어, 계속 자라나야 할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인 교회에 주어진 가장 든든한 보증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 (마태 5, 13~16)의 역할을 하려면, 제자들은 갖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그들의 공동체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 을 뜻하는 '임마누엘' (참조: 마태 1, 23)이신 주님께서 "그들과 늘 함께 계시겠다" 고 약속해 주신 공동체이다. 생각할수록 깊은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이다.



모든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오늘 우리는 복음 말씀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기 전에, 그들을 당신께 대한 그들의 '첫 열정' 이 타오르던 갈릴래아로 부르신 것을 들었다. 우리들도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신앙의 첫 시기' , '소명의 첫 시기' 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영세할 때의 '첫 마음' , 사제서품식 때나 서원 때의 '첫 마음' 등, 하느님의 사랑에 감격하던 순간을 잊지 말고 때때로 회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 과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 이야말로 선교활동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12          연중 제29주일  마르 10,35-45 (나)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청원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 오늘 복음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 제자들의 순 인간적인 면이 묘사되어 있고 제자들도 역시 우리 인간의 약점의 테두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다분히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청한 것도 이상하려니와 다른 제자들이 이를 지켜보다가 화를 내며 울분을 터뜨린 꼴은 가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야고보와 요한은 제베데오의 아들들로서 일찍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지상 천국을 세우실 줄로 생각하고 그렇게 되거든 자기들에게 우의정과 좌의정 감투를 주십사하고 청한 셈입니다. 이들은 <내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요한 18,36)라는 예수님의 의도와 계획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하는 행동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나 오늘이나 하느님의 나라에 관하여 곡해하고 그릇되이 선전하는 무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에는 생각하기를, 메시아 예수님이 내림하시면 뭇 제왕들을 정복하고 영토를 관장하여 지상에 일대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라고 커다란 꿈에 가슴이 부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예수님의 부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건설하시는 나라는 지상 왕국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란 점을 잘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무지몽매한 일부층에는 종교를 하나의 부귀공명의 수단으로 착각하는가 하면 질병 치료의 온상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가소롭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서 치부하고 하느님을 공경한답시고 자기 육신의 안락과 무사태평을 추구한다면 그런 경천지례는 있으나 마나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느님께 크게 욕되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 봅시다. 야고보와 요한이 우의정과 좌의정 자리를 청하였을 적에 예수님은 두 제자가 장차 겪을 고난에 관하여 예언적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것입니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면서 두 제자들이 장차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서 고난을 당하고 순교가지 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실상 야고보 사도는 헤로데왕 때에 참수형으로 치명하였고(사도 12:1) 요한 사도는 불가마에 몇 번이고 던져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차원을 높여 한층 더 깊은 뜻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다른 열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화를 내는 것을 보시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간곡히 타이르십니다. 세속의 권력가나 세도가들은 흔히 백성을 억압하기 일쑤이지만 여러분 가운데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서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하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는 정반대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려면 봉사하고 종노릇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모범을 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고 하신 예수님은 당신 생애를 통하여 봉사하고 수난하신 길을 걸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봉사를 받기보다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권의식(全權意識)(마태 28:18)을 지닌 스승이었지만 당신 제자들을 막 부려먹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무척 아끼셨습니다. 예수님은 최후 만찬시에 봉사자로서 또는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까지 씻겨 주시며 스승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관하여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십자가, 거기에 달린 몸, 거기에 흐린 피 자체가 값진 제사 - 제물이 아니라 -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이 값진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에 있어 값진 것은 고통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철저한 겸허와 사랑과 세계 만민에게 봉사하고 아량을 베푸신 그 폭넓은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사도들은 예수님의 철저한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본받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참되고 성실한 제자라고 일컫는 이들은 모두가 봉사와 사랑의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이웃을 도와주고 타인의 행복을 도모해 준 이들입니다. 그들은 남의 사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마음의 문을 열어 따뜻한 정을 베풀었고 타인이 행복되이 잘 살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의 수고와 노동력을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는 자기 재산마저 희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실천한 가장 높은 사람이 되고 으뜸이 된 사람들임을 우리는 명시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13          연중 제29주일  마르 10,35-45 (나)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청원

                                                             조순창신부



우리는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짧은 한 토막을 단 한 번만 살고 갑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미련한 듯해도 지혜롭고 뜻 있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한편 꾀가 많은 듯해도 미련하고 보람없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의 조그마한 일을 가장 소중한 책임으로 알고, 어떤 희생도 무릅쓰며 헌신하는 각계 각층의 인물들이 말없이 연구하고 지키기 때문에 이 사회는 지탱되고 발전합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국자, 맡은 일을 다하다가 숨져 간 순직자, 신앙을 지키고 전파하다가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과 남기신 유업은 길이 현양 될 것이며 그 은공은 큽니다.



좀더 평안히 고생하지 않고 적당히 살아갈 수 있지만, 그 길보다는 ‘희생과 봉사와 사랑으로 사는 것이 더 뜻 있는 길’이라는 신념 속에 살아간 분들이 많습니다.

인류가 구원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아무 죄 없이 좋은 일을 한다고 미움을 받아, 사람들에게서 십자가형을 받으시고, 어리석은 듯이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죽음에서 당신 전능으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으며, 희생과 봉사와 사랑의 깊은 뜻을 주시고, 이로써 삶의 보람과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내 목숨을 내주러 온 것입니다.” 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자기 신분과 처지, 능력과 환경에 따라서 서로 봉사하도록 부르셨습니다. 봉사란 남의 뜻을 받들어 섬기되, 희생이 따라도 자기를 돌보지 않고 노력함을 뜻하며, 개인뿐 아니라, 교회와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제직은 참된 봉사직으로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해 파견된 이들입니다. 그 재능이나 신심보다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구원의 성사를 집행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직을 수행하며, 복음을 전하는 말씀의 봉사자입니다.

또 수도자들은 복음적 권고를 따를 것을 서약함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의 부르심에 응하여, 전 생애를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 바치며, 사도적 사랑을 가지고 교회의 사명을 다하기에 헌신합니다.



평신도는 성직자와 수도자와 함께 하느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에 참여하며, 사회에 살면서 교회의 목적인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전하고,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현세 질서를 완성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백성으로 봉사하도록 불리었습니다. 자기만을 아는 이기심과, 잡스런 일에 빠지는 미련함과, 구원의 길을 떠나는 안일을 버리고, 해야 할 일에 충실하며, 모두 연관된 속에서 사는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내일을 봉사적 정신으로 하고, 더 나아가서는 희생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참고 견디며, 헌신적인 사랑으로 가정과 사회와 교회에 나를 제물로 바칠 각오로 봉사합시다.



그 희생과 고난은 우리 구원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스승과 제자, 고용주와 고용자, 위정자와 국민, 지도층과 대중, 사제와 신자, 각기 서로 사이에 소중히 받들어 모심으로써, 사회는 발전하고 복음화됩니다. 모든 직업은 사회 봉사직으로 알고 헌신합시다.



교회 안의 사도직도 봉사직이요, 각 단체에서의 활동은 바로 봉사 직분입니다. 평신도는 모두 교사직․성가대직․청년직․연구직․활동직․신자직에 충실합시다. 교회는 봉사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이웃 본당, 공소 신자, 지역 사회, 불우한 이웃돕기, 복음 전파, 성사, 미상 집행 등에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다합시다.









14         연중 제29주일   마르 10,35-45 (나)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청원

                                                            조광호신부



불과 2-30년전 만 하여도 시골 동네 아낙네들이 모이면 누구 누구네 집 아무개는 얼굴이 「달판」같다고 하는 애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달처럼 희고 둥근 얼굴이 그 당시 여인들의 이상적 미(美)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지만 만약에 오늘날 서양 처녀들에게 똑같은 말로 「당신 얼굴은 보름달 같습니다」하고 말한다면 즉시 뺨을 맞게 되기 십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보름달」이란 말은 그들 문화권에서는 오늘날 우리말의 「호박」 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의 17세기, 바로크시대의 그림을 보면 한결같이 여인들의 얼굴은 둥글고 복스럽게 생겼다. 미적 감정은 시대를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이러한 변화의 근저에는 「문화의 선호성」이라는 인간의 심리적 배경이 있다고 본다.

다산(多産)이 무엇보다도 큰 축복이었던 여인상은 오로지 많은 출산을 가능케 할 수 있는 「튼튼함」에 그 기준이 있었다. 오지리 빌렌도르프에서 발굴된 2만년 전의 여신상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이 사실을 우리는 오늘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산업사회에서 여성의 외모는 「안락함과 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날씬한 서구적 여인의 모습이 모든 여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듯하다.



인류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유행 가운데서도가장 민감한 것이 여인들의 옷차림과 머리모양이 아닐까. 고대 중국은 물론 3천이란 장구한 세월동안 불변의 양식으로 전승되어 온 이집트 미술에서도 여인들의 머리모양은 끊임없이 변해왔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서양의 어느 작가는 모든 유행이 「변덕스러움」이라는 「여성적인 것」에 기인한 것이라고 규정했지만 유행은 여인들의 전유물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유행은 예외가 아니었다. 그 한 예로써 미트라(Mitra;교황․주교의 관)의 모양은 시대에 따라 끈임없이 변천해 왔다. 한 시대에 유행하던 미트라의 형태는 전 세계교회 안에 유행되었다.



이러한 미트라의 역사 속에 한가지 특이한 점은 교회의 권위가 막강한 시대 일수록 미트라의 높이가 낮아지고 교회의 권위가 실추될수록 미트라의 높이는 상대적으로 높아졌다는 점이다. 얼마 전 어느 교구 성체대회에서 주교님이 미트라를 쓰고 금빛 지팡이를 짚고, 행렬하는 장면이 잠시 TV 화면에 비친 적이 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성체,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과 금칩 미트라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거동하는 주교님.... 화려한 저 「권위의 상징」 뒤에 있는 「실재」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전통과 관례」라는 막연한 의미가 아니라 보다 원초적인 「인간의 원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어느 교황님과 주교님이 삼복더위에 그 무거운 제의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미트라 쓰기를 원하겠는가.



그것은 다만 신도들이 그들의 대표자로서 또 제관으로서 화려하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주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서양의 중세기적 상징이 더 이상 우리에게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고 본다. 사실 권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관적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라 볼 때 우리 교회 안에서 성직자의 권위를 어디에 근거해서 바라보아야 하는가는 참으로 중요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본다.



마르코 복음 10장 35절에서 45절에 바로 이러한 제자들의 권위가 어디에 근거해야 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제자들과 함께 걷고 있는 참으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알아 듣기는 커녕 온 천하를 호령하게 될 메시아의 나라를 기대하고 잔뜩이나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급기야 그들 중에 두 젊은이가 나서서 예수께 말씀을 건넨다. “선생님, 저희가 선생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요”(35-37절) 자기들의 원의를 말하기도 전에 예수께 다짐부터 받았던 이 두 사람은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을 지닌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었다.



약삭빠르고 자기 중심적인 성향이 짙은 이 두 제자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사실은 그들과 같은 심정이었다는 것을 다른 제자들이 이들의 말을 듣고 「몹시 언짢아했다」는 것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어리석은 인간의 탐욕에 대한 분노 보다는 연민을 느끼시며 이들을 향해 「당신들은 스스로 청하는 것이 무엇이지도 모릅니다」하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 하느님의 의지와는 언제나 빗나가는 인간의 어리석은 의지, 자신의 눈먼 이기심과 탐욕으로 어둠 속으로 헤매는 인간의 비극을 느끼게 하는 이 사건은 모든 세대를 통해 인간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의 「잔과 세례」 즉 그분의 「수난과 죽음」 보다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남보다 먼저 자기만의 영광과 영화를 꿈꾸는 인간의 본성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두 가까이 불러모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백성들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엄하게 지배하고 그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억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이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남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인자도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



국가의 왕좌와 교회의 제단을 동일시하여 심자가 대신에 영광된 정복자의 깃발을 꽂고 다른 모든 민족들을 야만인, 미개인, 이방인으로 취급하여, 그리스도 교화를 문명화로 착작했던 선교 시대를 우리 교회는 살아왔다. 아울러 교회는 성직자를 교양인으로 평신도는 무식하고 보잘 것 없는 우둔한 무리로 치부하고 「기도하기, 순종하기, 헌금하기」 만을 권장하여 교회를 철저히 위계사회로 만들어 놓았던 시대를 교회는 살아왔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러한 우둔하고 미련하 인간의 욕심 속에서도 또 다른 「인간을 통해」 끝없이 창조와 쇄신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시대에도 잘못된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을 통해 하느님의 신령하신 역사(役事)는 이루어 졌으니 신학자 「왓벗 뷜만」은 이를 가르켜 「하느님의 엄청난 모험」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교적 모든 권위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봉사적 권위이다. 이러한 「섬김과 희생」을 위해서 만이 권위는 비로소 참된 의미가 있음을 복음 성사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남을 지배하려는 생각」 그것이 비록 남을 좋게 변화시키는 것일지라도 자신의 힘에 의해 하려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 이 교회를 이끌어 가는 우리 모두가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분 앞에 끊임없이 성찰 할 때 만이 우리는 그분의 「잔과 세례」를 함께 받아 마실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5        연중 제29주일   마르 10,35-45 (나)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청원

                                                               표준관 신부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사람이란 누구나 아니가 들면 들수록 명예욕과 권세욕이 강하게 발동한다고 합니다. 즉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남보다 위에 서고 싶고 남을 부리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남 앞에 으시대며 큰 소리 치기를 좋아하고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곧장 화를 내곤 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단체에서나 보는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조그마한 직책이라도, 아니면 최소한 하찮은 명예직이라도 하나 가져야만 흐뭇해하고, 남들 앞에 거드름을 피우면서 나타나곤 합니다. 조그마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데 하물며 한 나라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도무지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입니다.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을 짓밟고, 눈에 거슬리면 마구 죽여 버리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죄한 사람들을 죽이고 하는 사람들이 허울 좋게 백성의 은인으로 자처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천상 천하 유아독존을 부르짖으면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도락만 일삼는 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힘으로 남을 억누르고, 남에서 봉사만 받는 사람들은 참으로 높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본다면 이 세상에서도 너무나 엄연한 사실이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힘과 권력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자들을 싫어하며, 위대한 자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이솝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소들이 수레를 끌고 가는 데, 소래 바퀴들이 삐걱삐걱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자 소들은 수레바퀴 쪽을 바라보면서 「모두들 그런 소리는 가만 멈췄으면 좋겠어! 무거운 짐은 내가 끌고 있는 데, 너희들이 소리를 지르는 이유를 알 수 없구나」 하고 말하였습니다. 애쓰고 고생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데 공연히 제가 피로하고 땀 흘리는 체하는 사람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우둔하고 말없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남의 공로를 가로채려는 사람을 비난하는 소리입니다. 한 마디로 혼자 잘난 체하며, 수고하지 않고 큰 소리만 치는 자는 높은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설령 이런 자들이 온갖 권모 술수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도 위대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남을 과대평가 하므로, 남에게 봉사 받기만 하므로  자신이 높아지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들의 생각은 비뚤어진 것이며, 역사의 심판만 초래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그러면 참된 높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높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남을 섬겨야 합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하신 대로하면 되는 것입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듯이 그분은 우리에게 섬기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즉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에게 봉사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으며 죽는 순간에도 자기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모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십자가 상에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도 예수님의 정신에 따라 불쌍한 사람, 소외된 사람들에게 붕사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이 시대는 예수님의 봉사 정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의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때입니다. “주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우리에게 한 자리 주십시오” 하며 간청하기 전에 불쌍한 내 이웃 내 형제에게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죽기까지 봉사하신 그리스도를 부활시켜 영광의 자리에 앉히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높은 자가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너희 중에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으며,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 44-4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 미사 중에 기억하면서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16        연중 제29 주일   마르 10,35-45 (나)   상처없이 영광없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3,10~11 (주님의 뜻을 따라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으니,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제2독서 히브 4,14~16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의 옥좌로 가까이 나아 갑시다) 

복 음 마르 10,35~45 (사람의 아들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슬픈 사람에게는 세상이 슬프게 보이고 기쁜 사람에게는 세상이 또 기쁘게 보입니다. 어린이들을 보면 그런 현상이 더 실감납니다. 탄광촌에서 사는 어린이들은 사람들을 모두 새까맣게 그립니다. 바닷가에 사는 어린이들은 사람 옆에 으레 배와 바다를 그립니다.



백성들도 마찬가집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불렀던 노래는 슬프고 애절하며 한이 많은 곡들이었습니다. 문학도 예술도 다 그 시대의 모습을 반영해 줍니다.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에집트를 탈출한 뒤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고 약속의 땅에 정착한 뒤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열강의 세력 속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멸망한 뒤로는 유배생활에서 엄청난 고난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들이 바라봤던 하느님은 고난받는 하느님이었습니다. 백성 자신이 고난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의 상도 역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노래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종은 웬일인지 억울하게 당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반역죄로 몰려서 죄없이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게 도대체 뭐냐? 안 믿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것은 실로 개죽음입니다. 그리고 그게 또 운명이라면 전생에 죄가 많았거나 팔자가 사나운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짓궂게도 사정없이 때리고 찌르는 아픔과 슬픔 으로 표현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애정이라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박해의 세상으로 위협당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성모님을 봐도 그렇고 순교자들이나 성인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고난이라는 것이 다 뜻이 있어서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는 다 뜻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 뜻이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답답하고 창피한 현실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내고 난 뒤에 돌아보면 그때 하느님의 뜻이 비로소 보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이 조금 늦게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황금이 불 속에서 단련되듯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때리고 찔러서 아주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을 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수고와 아픔은 또 감수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께 둘째 자리와 셋째 자리를 염치좋게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별 수고도 없이 영광과 명예의 자리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높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그 형제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봉사하는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잠을 적게 자고 또 적게 놀면서 공부해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 서 참다운 은혜를 얻고자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처럼 밑으로 내려 가서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고난을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은 고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초등학교 1학년 짜리가 자기만한 동생을 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딱해서 지나가던 사람이 "너보다 큰 아기를 업고 있으니 무겁겠다."하고 한마디 하자 그 1학년 짜리가 아주 의젓하게 대답하더랍니다. " 하나도 안 무거워요. 얘는 제 동생이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그 십자가가 아무리 크다 해도 무겁지 않은 것입니다. 대개 불평과 비난이 많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비난과 욕설이 나오는 사람은 사랑할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속에 미움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사제 연수회에서 본당의 신자들을 보다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본당 신부가 밑으로 내려가서 좀 죽어 있어야 한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얘깁니다. 위에서 소리만 크게 치고 있으면 신자들이 다 숨습니다. 제 자신이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혼자서 다 하려고 하니까 신자들은 할 일이 없었고 또 그들이 하고 싶어도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꼴찌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존심이 상해도 크게 상하게 되는 아픔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자기에게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 보통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아들의 고난과 또 우리의 고난을 통해 서 영광의 상을 주시려 하십니다. 따라서 고난의 잔을 용기있게 마시도록 합시다. 그것이 은혜의 잔입니다.







17          연중 제29주일   마르 10,35-45 (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김의철 신부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활약하던 당시 팔레스티나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서 주눅들어 사는 신세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난세에 메시아로서의 소명의식에 가득차 기댈 곳 없는 민중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고취시키며, 기쁜 소식을 전파해 나가셨다. 특히, 예수님은 유다이즘의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선조들의 신앙을 진실하고도 절정의 형태로 구현시키고자 했으나, 유다 지도자들은 부정적 태도를 취하고 충돌을 일삼았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잡고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민감한 세금 문제를 들고 나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한다. 카이사르(=체사르, 시저)에게 세금을 내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하시면 로마의 권위를 부정하는 셈이고, 세금을 내라하면 이스라엘을 배신하는 꼴이었다. 예수께서는 ꡒ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ꡓ고 답변하신다. 여기서 카이사르의 것은 국가 즉, 정치 권력을, 하느님의 것은 교회 혹은 종교를 가리키는 말이라 생각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구분하여 혼동을 피하라는 말씀으로 해석되어 왔다. 불행히도 이 원칙은 오랜 역사 동안 시행착오를 일으켜 충돌해 왔다. 인류 역사를 이끌어왔던 두 축 종교와 정치의 충돌은 서로가 상대방을 지배하고 종속시키려 했기 때문에 빚어졌다. 종교가 주도권을 쥐었을 때 정치측에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라고 부르짖었고, 반대로 정치의 세력이 막강하여 전제적으로 치달을 때 종교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고 요구했다.



서로가 상대방을 종속시키려 할 때 파탄에 빠진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되었고 이러한 논쟁을 계기로 민주 정치 이론이 발달하게 되었다. 양자가 서로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인정하여 적극적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정치가 그릇된 길을 갈 때 종교는 시정을 요구하고 현실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정치 권력도 종교의 도덕적 판단과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릇된 정치가 계속되어 민중이 고통을 당할 때, 교회는 이를 방관하기보다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용기가 필요하다. 











18                     전교주일   마태 28,16-20 (나)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

                                                               변희선 신부



  나의 아버님은 재작년 어린이날 작고하셨다. 5월4일 밤 아버님께 폐렴 증세가 있다는 형님의 연락을 받은 나는, 심상치 않은 예감도 있고 해서 일주일간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인천으로 달려갔다. 임종을 예감하신 아버님께서는 자꾸만 눈물을 보이셨다. 어머님의 묵주기도와 선종을 위한 기도가 계속되는 동안, 어린이날을 밖에서 지내지 못하게 된 조카들도 할아버지 곁에서 그분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다.



 아버님은 숨이 가쁘셔서 그런지 별 말씀은 없으셨고, 단지 우리 가족 모두에게 눈길을 보내시느라고 바쁘신 듯 했다. 아버님을 떠나 보내야 하는 어머님과 우리 형제들은 이별의 슬픔으로 경황이 없는 듯 했지만, 나로서는 아버님의 영혼을 돌보고 장례 절차 등을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눈물이 나올 겨를이 없었다.



  사제로서 가끔 임종하는 분들을 지켜본 적은 있었으나, 아버님의 임종순간은 나에게 생경한 느낌과 특별한 의미를 제공해주었다. 나는 아버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날에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에 대해 예민하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분은 편히 쉬시거나 맛있는 음식을 마지막으로 드시거나, 당신 묘지의 비석을 어떻게 세우면 좋을지 등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아버님의 관심사는 한순간이라도 당신의 가족들을 좀더 만나고 바라보는 일이었다. 즉 마지막 남은 정을 우리와 함께 조금이라도 더 나누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평소에는 주로 주무시던 분이 이 날만은 아침부터 오후 7시경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로 눈을 감지 않으려 하셨다. 아버님의 이러한 모습은 나에게 그분의 마지막 유언으로 들려왔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할까, 무엇이 나의 명예나 위신을 높여줄 수 있을까 등등의 관심은 적어도 아버님의 유언은 아니었다. 아버님께서 몸과 마음으로 나에게 남긴 무언의 유언은, 가족들 모두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었다. 즉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잠을 자는 일도 아니고, 먹는 일도 아니고, 명예나 체면도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일이라는 유언을 우리 가족들에게 남기신 것이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일종의 유언을 남기신다. 유언은 마지막으로 남기는 가장 중요한 말씀을 담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오늘의 유언 말씀은 여러 모로 중요하며 자주 묵상해야 할 구절이다.



  우선 예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예수님의 관심은 전 인류의 복음화를 통한 구원에 있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며, 예수님은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버지의 뜻이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 계속 이뤄져야 함을 당부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거처도 없이 떠돌아다니시며 제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신 젓,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모욕과 박해의 고초를 감내하신 것,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몸소 부활

하시고 성령을 약속하신 것 등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것은 온 인류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복음화 사업이다.



 이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그리하여 그들이 나의 제자가 되어, 그들 또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여라. 너희가 복음을 전하는 그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



  예수님의 유언은 우리가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에 새기고, 그 어떤 일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단지 성직자나 수도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의 가

장 중요한 보편적 사명이다 .



  나의 아버님이 임종하시느라 그 바쁜 와중에서도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가장 강렬하고 소중한 유언을 남겨주신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시급한 말씀을 하신다. 「가서 무조건 복음을 전하여라. 나도 너희와 함께 있겠다.」









19            연중 제28주일  마태28,16-20 (나)초대받은 나의 모습? 

                                                      박기준 신부



계획되었던 잔치가 깨졌습니다. 초대받은 자들이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새로운 잔치 마당이 열립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참석합니다.  처음부터 사람을 구별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있어 그는 잔치자리에서 쫓겨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임금님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 나라의 보편성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찾아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대를 받았지만 그 초대에 응하지 않고 자신의 일, 자기 자신의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스스로 어두움 속에, 멸망에 빠져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ꡒ그러나 초청 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 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ꡓ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의 처지는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매 주일마다 최고의 잔치인 미사성제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영광스런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피곤하다, 술 마신다, 돈번다, 약속이 있다, 등등의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는 거룩한 미사의 잔칫상에 참여함으로써 주님과 함께 주님이 누리는 행복의 극치를 맛보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잔치 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 집에 간 사람은 초대를 거절한 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헌옷(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예복(새 인간)으로 갈아입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 오만, 자만, 교만의 옷을 벗어버린 겸손의 예복을 입고, 인내의 옷을 입고, 사랑의 옷을 입고, 존경의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도끼를 나무뿌리에 대시기 전에 회개하고 개심하여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예복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20               연중 제29주일 마르 10,35-45 (나) 말짜 신부

                                                      박제원․알베르또 신부



어느 신부는 66년에 세례를 받았고, 77년에 ꡐ하느님은 있음ꡑ을 확신하였고,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98년 ꡐ하느님은 나를 사랑하면서 있음ꡑ을 믿게 되었다. 하느님의 있음은 나를 위하면서, 사랑하면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면서, 봉사하면서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신부는 ꡐ하느님은 있음ꡑ을 확신한지 20년이 지나서야 ꡐ하느님은 나를 사랑하면서 있다ꡑ고 믿게 되었으니 신부치고는 말짜 신부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였다.



하느님은 그 신부에게 ꡐ하느님은 나를 사랑하면서 있다ꡑ는 신앙을 주었고 그 신부는 그것을 인정하였다. 이 날은 그 신부의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그 신부의 생애 최고의 날은 신품성사를 받은 날이 아니었다. 어떤 다른 신부도 그가 지은 기도문에서 ꡐ내 생애의 가장 귀중한 선물, 신앙의 은총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무엇을 전해야 할지 그 신부에게 분명히 드러났다. 하느님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면서 있다.



그 신부는 예비자에게 ꡐ당신은 알지 못해도 당신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려고 당신에게 생명을 주셨고, 지금 이 시각까지 돌보아 주시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한결같이 돌보아 주실 사랑의 하느님ꡑ을 선포한다.

신앙이 나의 마음에 자리잡으면 나의 마음은 뜨거워져서 고마운 하느님을 선포하지 않고 배길 수 없게 된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믿지 않는 사람은 나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에게 가정과 직장과 돈이 있다. 그래서 그는 ꡒ나는 복되다ꡓ고 말한다. 당신은 ꡐ복되다ꡑ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최고로 행복하다고 생각합니까? ꡒ그렇지는 않습니다. 모자라는 행복입니다.ꡓ하고 그는 대답한다. 모자라기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안달하고, 괴로워하고, 쫓기고 짓눌리는 생활을 한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 믿는 사람은 현재 내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얼마나 큰 선물인가! 믿는 사람은 마음의 여유가 있고, 관대하고, 겸손하고, 용서하고, 항구하고, 자비롭다.



하느님은 나를 내리사랑하면서 있다. 나는 하느님께 내리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나도 이웃을 내리사랑 한다. 전교는 내리사랑의 가장 뛰어난 방법이다. 하느님은 그냥 있지 않다. 하느님은 나를 내리사랑하면서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나에게 복음이다. 나는 복음을 전한다.









21      전교주일   마태28,16-20 (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인간의 한없는 갈망)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혼자서는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고독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 안에 자기 자신이 채울 수 없는 결핍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고독이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현혹시키는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생각이 깊어질수록 자신이 고독하다는 것을 더 깊이 느끼게 된다. 이 때 사람은 고독 속에서 자신 안에 자기가 채워줄 수 없는 굶주림이 있고, 자기가 풀어줄 수 없는 갈증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이 결코 채울 수 없으면서도 채워지지 않으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허무의 심연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 허무의 심연에서 채워 주기를 요구하는 무한한 갈망이 솟아오른다. 그러기에 인간은 유한한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무한한 갈망을 가진 존재이다. 이 갈망이 만족되지 않는 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갈망을 만족시켜줄 대상을 찾고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 있는 것들 즉, 돈 명예 권력 향락 등을 더 많이 소유함으로써 이 갈망을 채우려 한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느냐로 행복의 척도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유한하다.



  사람이 혼자서 세상에 있는 것을 모두 다 소유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무한한 갈망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오직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은 불행하다. 그 행복의 추구가 좌절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막연하게 느끼는 이 무한한 갈망의 정확한 이름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다. 홀로 한없이 완전하신 하느님, 자신 안에 행복을 주는 모든 것을 완전히 소유하고 계시기에 스스로 한없는 만족을 누리시는 하느님만이 사람의 이 무한한 갈망을 채워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사랑에서 나오는 순수한 호의로 하느님의 한없이 행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기 위해 사람들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느님에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음으로써만 무한한 갈망이 완전히 채워지고 더 바랄 것이 없는 완전한 행복을 얻게 된다.

  사람은 일생을 통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걸어 인생의 궁극 목적인 하느님께 도달해야 한다. 무한하신 하느님은 인간을 한없이 초월하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하느님 없이 인간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인간의 길을 비추시고 인도하신다.



  사람이 하느님을 버리면 그 길은 갈 수 없는 길이 된다. 불행하게도 사람은 하느님을 버렸고 그래서 길을 잃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을 등지고 떠나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버리고 악의 길을 선택한 이래 사람들의 인생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었다. 이제 사람이 가는 인생의 길은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는 길이 되었다. 사람은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근본적인 불행이 있다.



  하느님을 떠난 사람은 하느님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피조물을 통해서 채우려 하게된다. 그리고 사람이 이렇게 피조물에 집착하면 할수록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리 이탈하고 타락하게 된다. 즉 명예에 집착하면 할수록 교만을 키우게 되고, 재물에 집착하면 할수록 탐욕을 키우며,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 자극적인 쾌락을 원하게 된다.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더 깊이 자신을 타락시키게 되고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은 허무와 절망의 심연이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성부께서는 하느님을 떠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을 구원하라고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성자께서는 당신의 것을 모두 버리시고 한없이 당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악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생을 통해 인간이 하느님께 도달하는 길을 가르치고 보여 주셨으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심으로써 인간이 갈 수 없었던 길을 갈 수 있는 길로 만드셨다.

  이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기쁜 소식이 인류에게 선포된다.



  오늘 마태오 복음에 소개되는 데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명령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보다 더 큰 의무는 없고 비신자들에게는 복음을 들어야 할 권리보다 더 큰 권리가 없다.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여기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 16,16).









22                 전교주일   마태 28, 18-20 (나) 참 전교의 길



  어느 시골 마을에 가난한 한 가족이 도시에서 이사를 왔다. 도시에서 별별 일을 다해 보았으나 결국은 빈털터리로 밀리고 밀려서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마침 구회관이 비어 있어서 그리로 들어왔는데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젊은 부부는 어린아이 둘을 집에 남겨 둔채 매일 날품팔이를 하며 근근이 살아갔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은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근사한 차나 타고 나타나서 별장 짓고 돈을 물쓰듯하며, 술을 사고 밥을 사면 관심이 많았겠으나, 이 젊은 부부는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김씨네만은 달랐다. 그들을 친절하게 대해주고 어려울 매면 도와주었다. 김씨네도 넉넉지는 않지만 별식이 있으면 오라고 하여 함께 먹고, 답답할 때 함께 해주며 하소연을 들어주고, 울면서 인생을 서글퍼할 때 위로해 주는 그런 정도의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젊은 부부는 너무도 고마워하였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타향에서 자신들을 사람 취급해 주는 유일한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김씨네가 천주교 신자라면 그 젊은이들이 성당에 다니는 것은 시간문제다. 심씨네의 삶을 보고 그들은 김씨네가 믿는 하느님은 정말 좋은 신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전교는 입으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다. 요즈음 주위에서 거리선교 새복음화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인간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삶을 신자들이 살아갈 때 비신자들은 자발적으로 주님을 영접하게될 것이다,



전교는 우리의 임무



  아무리 못된 자식이라도 세상을 하직하는 부모가 손을 붙잡고 유언을 하면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한다. 하물며 보통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녀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하고 마지막 유언을 하셨다, 우리는 이 마지막 말씀을 지켜야 한다.



  선교교령 제2항에도 “나그네 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선교의 사명을 확언하고 있다.

  교회의 탄생일은 언제인가? 우리는 성령강림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이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강림 때에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선교하려고 떠났기 때문이다. 겁쟁이였던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달라졌다, 굳셈의 은사로 충만해진 그들은 전교하려고 나섰다. 그러므로 전교의 역사는 교회가 생겨나면서 시작됐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는 전교하기 위해서 생겨났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선교에 있는 것이다. 전교는 그리스도를 알리는 일이다.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그리스도와 친교를 갖게 해주고,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얻게 해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예수님은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 일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루가 4,43)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야겠다.



  전교의 방법



  바오로 사도는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였다, 옳은 말이다, 여기에서 전교의 방법을 살펴보자.



1. 복음은 말로 전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점잔만 빼느라고 말로써 전교하는 데 너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는 무엇이건 다 해주고 싶다. 우리 가족, 우리 친척, 우리의 친구, 우리의 이웃에게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어찌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전교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주님께 대한 믿음이 돈독해야한다. 잔은 차야 넘치는 법이다. 나도 주님을 믿고 행복하지 않은데, 확신이 없는데, 어쩌 남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2, 복음은 기도로 전할 수 있다. 소화 데레사는 수녀원 밖에서 전교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분은 전교의 주보가 되였다. 기도로 전교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 없이 주님을 전할 수 없다,



3, 경천애인해야 한다. 신자들이 굳은 믿음으로 무장하고 어려움 중에도 기뻐하고, 희망을 보일 때 비신자들은 감동한다. 신자들이 미지근한 믿음으로 비신자와 똑같은 인생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면 비신자들은 실망할 것이다. 성당에 나올 마음이 없을 것이다. 열렬한 믿음으로 고난을 이기고, 고난 중에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믿음,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가지는 그런 믿음에 감탄한다. 또 이웃

을 사랑하고, 특히 소외된 이들을 사랑할 때 이웃은 우리를 따라오고, 주님을 만나 행복해 할 것이다. 행동이 따라주는 전교가 아쉬운 때다,



  복음의 메시지

 아시아의 전교 현황은 아직도 인구의 2~3%정도로 부진한 상황이다. 한국의 경우는 8%정도라고는 하지만 많은 쉬는 신자가 있고, 아직도 우리가 전교해야 할 대상자가 부지기수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전교했는가? 영세한 뒤로 몇 명에게 복음을 전했는가? 한 명도 없다면 나 자신의 신앙을 반성해야 한다. 내가 기쁘지 않기에, 남에게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3         전교주일   마태 28,16~20 (나) (연중 29주일) 준 신자를 붙잡자!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1926년 교황 비오 11세께서 10월 끝에서 두 번째 주일을「전교를 위한 기도와 활동의 날」로 정하셨으며, 1970년 한국 주교회의에서는 17월 한 달을「전교의 달」로 제정하여, 신자 여러분들에게 전교의 중요성을 깨우쳐주고 있다. 오늘은 선교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비신자인 비누 만드는 사람이 선교사와 길을 같이 가게 되었다. 그때 비누 만드는 사람이「여보시오, 당신이 전파하는 그 복음이 아직까지 한 일이 무엇이오? 자, 세상을 보시오 .아직도 죄악이 많고 악한 자도 많소」라고 질문을 던졌다. 선교사는 아무 말 없이 그냥 걸어 가다가 도랑에서 더러운 흙장난을 하며 노는 흙투성이 꼬마 아이를 발견했다. 이때다 싶어 그는「비누도 뭐 한 일이 별로 없군요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세상을 더럽게 하고 다니는 사람과 더러운 곳이 너무 많으니 하는 말이오」라고 말을 꺼냈다. 이 때 비누 만드는 사람은 「어허 참, 그러니까 비누는 사용할 때만 효과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선교사는「바로 그것이오.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도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한다.



  선교, 전교, 포교는 다 똑같은 뜻이다. 선교란 무엇인가? 선교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알려주신 복음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다.

첫째로는, 미신자에게 세례를 주어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것이며. 둘째로는, 이들이 끊임없는 쇄신을 통해, 보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될 수 있도록, 사상, 사고방식, 가치관, 문화 등 생활자체를 복음화하는 행동까지도 포함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가 다 충족되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복음화라할 수 있다.



  전교의 대상은 누구일까? 「누구나 다」이다. 보통 사람은 물론 교도소의 죄수, 군인, 환자, 가난한자, 권력자, 창녀 등 누구든지 다 대상이 된다. 우리 주변에는 다행이도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좋게 보고 있다. 이른바 「준신자(準信者)」들이다.

「나는 종교를 가지려면 천주교를 믿겠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다행한 일이다. 또 「안 믿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좀더 후에 여러 가지로 형편이 나아지면 꼭 믿겠다」고 말하는 분들도 많다.



  1984년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의 해에는 전국적으로 16만5천명이나 영세했다. 외국 교회에서 깜짝 놀랐다. 이렇게 천주교를 좋게 보는 사람들을, 시각을 달리하기 전에 붙들어야 한다. 또 다른 대상은 바로 여러분의 가족이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 또는 아이들, 부모부터 시작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을 예수님에게서 선물로 받았다. 예수님은 이 선물을 온 세상에 가서 나누어주라고 명령하셨다. 고로 우리는 모두 복음 전파자가 되어야 하겠다.



  어떻게 전교 해야 할까? 어떤 선교사가 낚시질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웠다고 한다.

 첫째, 고기는 스스로 바구니에 뛰어들지 앓는다. 고기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둘째, 고기는 미끼를 찾아온다. 셋째, 고기를 낚기에 적당한 때와 시기가 있다. 넷째, 어떤 장소에는 고기가 몰려온다. 다섯째, 고기는 협동심이 강하고 끈기가 있다. 여섯째, 고기는 잡아서 바구니에 담는다 등이다.



 1. 우선 우리 스스로 전교 하려는 열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계속 열의를 갖고 기도하고 권면한다면 결국엔 나오게 될 것이다. 대부분 새 영세자들의 말에 의하면 첫발을 내딛기가 힘들다고 한다. 따라서 예비자 교리 때나 주일미사에 몇 번만 인도하여 함께 있어 준다면, 그리하여 교회생활에 적응이 된다면, 큰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2. 우리도 교리를 확실히 알아야한다. 성경을 많이 읽는다든지, 교리책을 다시 공부한다든지 해서 뭣좀 알아야 전교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무턱대고 「성당에 나가면 참 좋으니 나가 보라」고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신앙교육은「평생교육」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복음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워지며, 교리서적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영세 전 몇 달 동안 들었던 예비자 교리만이 유일한 교리지식의 근원이요, 그나마도 영세한지 오래 되어 모두 까맣게 잊고있는 실정이다. 우리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3. 복음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라는 점을 인식시켜야 할 것이다. 복음이 내게는 자랑거리라고 말씀하신 바오로 사도께서는「하느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맛서겠습니까?(로마 8:31)라고 말씀하셨다. 신명기 31:23에 야훼께서 모세에게 「힘을 내라. 용기를 가져라. 너는 내가 주겠다고 맹세한 땅으로 이 백성을 이끌고 들어가야 할 몸이다. 내가 정녕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격려의 말씀을 하신다. 사도 베드로께서는「이 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다」(사도 4,12)고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 우리가 믿는 복음을 이웃에게도 전파하여 그들도 복음의 빛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기고 다짐하자 .용기를 내자. 예비자 여러분! 여러분들도 끝까지 항구하시어 세례를 밖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4           전교주일   마태 28,16-20(나)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



  묵상 :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이는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남기신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다. ‘복음화' 그것은 교회의 근본 사명이다. 새 순이 돋아나지 않는 가지는 죽은 가지다. 선교 열은 항 상 교회 활력의 척도다.



 선교는 교회의 유일한 사명



  교회는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교회는 의료사업, 교육사업, 사회사업을 하면서 성당을 지어 예비신자를 모아 교리를 가르치며 포교사업도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포교사업은 교회가 하는 여러 가지 사업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나그네의 길을 가고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선교교령, 2항)고 하였다. 말하자면 성부께서는 성자와 성령의 파견을 통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 세상에 전하고자 하셨고, 이 목적을 위해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이다. ’복음화'는 ‘교회의 첫째가는 사명'이 아니라, ’유일한 사명'이다. 이는 교회에는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외에 제2, 제3의 다른 사명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조직과 인력과 힘은 복음화를 위해 있는 것이다.



  복음화란 무엇인가?

 ‘복음화(Evangelizatio)'란 무엇을 뜻하는가? 쉽게 말하자면, 복음화란 ’세상을 변화시켜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질서 지우는 것'을 뜻한다, 세상의 모든 분야에 복음의 빛을 스며들게 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화에는 두 가지 갈래가 있다,



  첫째는, 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주고 성사와 신앙교육 등 사목촬동을 통해 한사람 한사람을 변화시킴으로써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적 가치와 맞지 않는 제도, 조직, 구조 등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를 사회사목이라고 한다. 사회사목은 사회운동(농민사목, 노동자사목, 도시빈민사목 등)과 사회사업(고아원, 양로원, 정신지체장애아 시설 등의 복지사업)으로 나누어진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사회사업은 항상 의미있는 것으로 인정받아 왔으나, 사회운동은 깊은 이해를 받지 못한 때도 있었다. 어느 하나의 방법만으론 복음화를 이룩할 수 없다, 함께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신자증가의 황금기는 끝났는가? 물론 세례를 주는 것만이 복음화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세례는 각자의 변화의 확실한 방법임이 사실이다. 한국교회사를 보면, 크게 신자가 증가했던 시기가 세번 있었다,



첫번째는,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난 후,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찾게 됨으로써 신자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두번째는, 6․25동란이 끝난 후였다. 전쟁의 비참함을 체험하고 난 뒤 새롭게 인생의 의미를 찾으면서 신앙을 찾은 것이 그 계기였다. 그리고 여기엔 외국의 구호물자도 교세확장에 기여하였다.

세번째는, 70-80년대 군사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교회가 벌인 인권운동과 민주화 투쟁에 힘입어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마지막 보루로 여기고 신앙의 길을 찾았던 것이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도성소나 사제성소뿐 아니라, 신자증가율도 현저히 둔화되고있는 실정이다. 이런 시점에서 서울대교구에서 앞으로 10년 안에 본당 200개를 증설하고 복음화 비율 18%까지 교세를 확장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혀, 교회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이것은 몇몇 본당의 사례를 보면 결코 황당한 계획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에 “천주교 신부"라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그리고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앞으로 신앙을 갖게 되면 어떤 종교를 택하겠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천주교를 택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런데도 신자 증가율은 예배당보다 못하다.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신자들이 열심히 전교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전파에 무관심한 신자는 참 신자가 아니다, “교회 역사에서 선교 열은 언제나 교회 활력의 표지였으며, 반대로 선교 열의 감퇴는 신앙약화의 표지였다."(교회의 선교사명, 2항)



  교황은 금년 전교주일 담화에서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은 기도, 고통의 봉헌, 삶의 증거를 통하여 선교활동에 협력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최선을 다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거나 주저앉는 것은 패배주의이고, 성령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새 순이 돋아나지 않는 가지는 죽은 가지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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