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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1:04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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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28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28주일

      24. 김선호 신부(다)/40

        25. 강영구 신부(다)/41                   26. 강길웅 신부(다)/44

        27. 작자미상(다):몸이 깨끗해진 사람이 10사람(1)/46

        28. 작자미상(다):몸이 깨끗해진 사람이 10사람(2)/47

        29. 작자미상(다):몸이 깨끗해진 사람이 10사람(3)/50



23               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30 (나) 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



오늘 복음말씀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로 끝나고 있다.



예수께서는「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우선 몇 개의 계명을 열거하신 다음, 「이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이신다.



이 말씀에는 질문자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그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자 질문자는 즉시「그 모든 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라고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한다. 그런데 이 대답을 듣고 예수님은, 그 질문자를 「대견해 하시면서」도 그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맡씀을 하신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루가복음서에 나오는「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를 보면 이해가 잘 된다. 그 비유에 나오는 부자 사람은 살인강도질이나 도둑질과 같은 큰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나, 문간에 누워 병으로 괴로워하며 굶주리고 있던 라자로와 같은 사람들을 모르는 체했기 때문에 死後(사후)에 그런 벌을 받아야 했다.



비슷하게 오늘 복음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큰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거나, 율법에서 하라고 명하는 것을 어기지 않았다는 소극적인 삶만으로는 부족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을 포함하는 실행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사실 율법서 자체는 근본적으로 이런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 (예컨대 신명기). 예수님은 율법이 가지고 있는 이런 정신을 잊어버리고, 율법서의 문자에만 매달리며 그 문자대로 지켰느니 안 지켰느니 하며 따지고 살던 사람들에게 율법의 근본정신을 일깨워 주신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 질문자가 위의 예수님의 요청을 듣고 그만「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적으면서 그 이유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인다.

질문자가 떠나간 뒤에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에는, 재물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나온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가장 큰 짐승인 낙타와 가장 작은 구멍인 바늘귀를 연결시키신다. 문자 그대로 이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부자에게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제자들도「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며 서로 수군거릴 정도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나오는「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라는 격언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부자를 재물에 대한 애착에서 해방시켜 그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말씀은 참다운 신앙실천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려낼 수 있는 기준 하나를 오해할 여지없이 분명히 가르쳐 준다. 그 기준이란 바로「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재물을 나누고 사느냐 아니냐」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질문하였던 부자에게는 하느님의 뜻을「아는 데」있어서는 탓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 뜻을「실천하는 데」있어서도 자신에게는 흠잡을 것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듯한 이 질문자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결국「재물에 대한 애착」이라는「걸림돌」에서 넘어지고, 예수님 추종을 포기하고 말았다.



오늘의「나」는,「우리」는 어떠한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진지하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지만,「재물에 대한 애찬」 때문에「소명의 길에서 비틀거리고 있지는 않은가?」



사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도「진지하게」「영생의 길」을 추구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 「달려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질문을 하는 그의 태도와 그의 대답을 듣고 「대견해 하시는」 예수님의 긍정적 반응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진지한 태도를 끝까지 견지하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재물은 분명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큰 도구가 될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 재물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남아, 결국에는 하느님도 이웃도 다 잊어버릴 정도로 교만과 허영의 도구가 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도구로 사용 될 때, 본디 선물로 주어졌던 그 재물은 구원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되고 만다.

성서는 많은 재물의 소유가 탐욕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자주 경고하고 있다. 성서에 의하면 탐욕은 온갖 죄악의 온상이다.



오늘 복음 말씀은 신앙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뿐 아니라, 단체적 차원(교회의 단체, 기관)에서도 반드시 명심해야 할 말씀이다. 예수님의 정신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관심사에서「재물」이 결코 윗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한다.

24           연중 제28주일   루가 17, 71-19 (다) 은혜에 보답하는 삶

                                                              김신호 신부



  사람은 일반적으로 누구에게 은혜를 베풀 수도 있고, 누구로부터 은혜를 일을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는 과정에서 은혜만 계속 베푸는 사람도 없고, 또 은혜만 계속 입을 수만도 없는 것이 현실

적인 상황이라고 보아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은혜를 입고, 입은 은혜에 대해 보답을 할 수도 있지만, 또한 은혜를 보답하기는커녕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머리 검은 짐승에게는 은혜를 베풀지 말라는 중국의 고사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물론 받은 은혜에 대해 사람이 취하여야 할 태도가 문화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기도 하지만, 적어도 공통된 사실로 나타나는 것은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에 대하여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마움을 어떻게 표시하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문화의 차이에 따라 또한 다르게 나타날 수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모의 은혜는 바다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평생을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노력하면서 사는 것이 적어도 양식 있는 사람이 취하여야 할 삶의 태도였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자식은 이러한 사랑을 부모가 노인이 된 다음에 부모를 부양함으로써 갚게 되어 있었다.



  정말 자식을 위해서인가!



  이러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세태의 변화와 더불어 많이 변화되고 있다. 부모도 자식을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키운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위신을 세워주는 도구같이 생각하고 자식을 교육시키는 데 열을 올리고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식의 성적이나 자식의 눈에 보이는 능력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이 자신의 뜻에 맞추어 성적도 올리고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줄 때, 부모는 어깨를 펼 수 있게 되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자식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든 간에 학원이나 과외라는 경쟁방법 속에 자식을 내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부모들이 말로는 자식의 장래와 자식이 잘되는 것을 원하는 부모의 심정에서 이러한 것들을 한다고 표현들을 하고 있지만, 정말로 그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인지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렇게 몰리는 자식들은 부모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보다는, 당연히 부모들은 자식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오히려 자식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어떻게 보면, 메마른 거래와 비슷한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사회나 가정을 매우 거칠게 만들고 있고, 이러한 거친 사회분위기 속에서는 심성이 약한 학생이나 어린이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대상자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과도한 은혜에 대한 강조는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갖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고, 또한 자신이 당연히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도 있게 된다.



  사람은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소망이 이루어졌을 때 사람은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치유된 나병환자들도 아마 이러한 굉장한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혼자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리고 있다. 어쩌면 다른 아홉 사람은 유다 사람들로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이 정도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고, 또 사제에게 가서 정상인으로 판정을 받는 것이 더 급선무에 해당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보다 행동을 잘한 것으로 예수님께 평가되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현 세태를 매우 잘못된 것으로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부터 하느님께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은혜를 베푼 사람을 먼저 기억하기 시작할 때에, 왜곡된 사회현상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설 수 있게 될 것이다.











24           연중 제28주일   루가 17, 11-19 (다)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28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나병에 걸린 사람들이 치유받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 독서에서 들은 열왕기 하권 5장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시리아에 나아만이라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둔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그가 한때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이스라엘 소녀 하나를 붙잡아 와서 자기 부인의 하녀로 들여보냈습니다. 그 어린 소녀가 주인 나아만 장군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는데, 그 예언자에게 찾아가면 문둥병쯤은 문제 없이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아만은 그 소녀의 말을 듣고, 시리아 왕의 친서를 받아 들고, 이스라엘의 왕을 찾아갔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시리아 왕이 보낸 친서를 읽어 보고는 대단히 분노했습니다. 왜냐하면 시리아 왕이 나아만의 병을 구실로 삼아서 다시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예언자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왕에게 나아만 장군을 자기에게 보내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 기회에 이스라엘에 하느님의 능력 있는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있음을 알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 예언자 엘리사가 사람을 보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시오.” 나아만은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나아만이 생각하기를 자기는 그래도 시리아의 장군인데, 예언자가 뛰어나와서 자신의 상처를 손으로 어루만져서 고쳐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별 볼일 없는 예언자라는 작자는 코끝도 알 보이고 사람을 시켜서 이래라저래라 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시리아에는 요르단 강물보다 훨씬 깨끗하고 좋은 아바나 강과 발바르 강이 있는데, 더러운 요르단 강물에서 몸을 씻으라고 하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머리를 돌려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 때 그의 부하가 가로막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군님, 만일 예언자가 장군님께 더 어려운 일을 시켰더라면 틀림없이 장군님은 그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르단 강에서 목욕하는 일이 뭐 그리도 어렵습니까?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예언자가 시키는 대로 해 보시지요?“ 이 부하의 말을 듣고 나아만은 마음을 고쳐 먹고,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그랬더니 문둥병으로 문드러진 피부가 거짓말같이 깨끗이 나아서 아기의 피부 같아진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나아만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다시 예언자 엘리사에게로 돌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밖에는 신이 없습니다.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으십시오.”그러나 엘리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모시고 있는 야훼 하느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결코 그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선물을 거절하는 예언자 엘리사 앞에서 나아만은 이렇게 맹세했습니다. “저는 앞으로 야훼 하느님말고는 그 어떤 신도 섬기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 흙을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병이 나은 나아만은 이스라엘 땅의 흙을 가지고 시리아로 돌아갔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나아만이 치유를 받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까?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요르단 강물이 시리아의 아바나 강물이나 발바르 강물보다 깨끗하거나 약효가 있어서 그가 나음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요르단 강을 보았습니다. 말이 강이지 개천 같습니다. 그리고 물도 그리 깨끗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나아만이 죽음 같은 문둥병에서 치유를 받게 된 것은 예언자 엘리사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만일에 그가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서 예언자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거나, 혹은 요르단 강물이 더럽다는 핑계로 목욕하기를 거부했더라면 그는 병마의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인생살이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서를 가까이해야 하는 것도, 매일 성서를 읽어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진리가 있고 구원과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허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능력이신 하느님의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아만이 시리아 군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서 예언자의 말을 배척하고 시리아로 그냥 돌아가 버렸다면, 그는 병마에서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자신의 자존심을 꺾고 하느님의 사람 예언자 엘리사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나아만은 거기서 새 생명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육체적인 병을 치유받았을 뿐 아니라, 살아 계시는 야훼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고, 하느님밖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아만 앞에는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다시 돌아와서 엘리사에게 이렇게 맹세합니다. “저는 이제부터 야훼 하느님 외에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나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나아만은 능력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체험하고 난 후에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느님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이 능력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그 이유가 간단합니다. 나아만이 처음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지나치게 합리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 있고, 황금 만능, 물질 만능의 사고에 빠져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한낱 2천 년 전의 이야기책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서를 옆에 두고도 읽지 않을 뿐 아니라, 읽더라도 옛날 이야기책 읽는 기분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요한 복음 5장 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즘 사람들은 어디에 눈이 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생과 구원의 길이 있는 생명의 말씀은 내팽개치고 엉뚱한 곳에서 삶의 길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 곧 하느님의 말씀 아닌 다른 곳에는 생명의 길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도 나아만처럼 우리의 자존심과 교만한 마음을 꺾고 성서를 읽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 성서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이 우리 가운데 드러나도록 합시다.











26          연중 제 28 주일   루가17,11-19 (다) 감사는 믿음의 축복

       강길웅 신부


제1독서 Ⅱ열왕 5,14~17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돌아와 주님 께 신앙고백을 하였다) 

제2독서 Ⅱ디모 2,8~13 (우리가 끝까지 참고 견디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복 음 루가 17,11~19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오늘 성서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백성도 아닌 자들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감사드리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하느님의 백성은 도무지 믿음이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열차표는 선민이나 세례 자체보다도 신앙의 감사 행위에서 얻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1독서에서는 이방인이었던 시리아의 장군인 나아만이 이스라엘 의 예언자 엘리사를 찾아가서 자신의 문둥병을 고친 내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께서는 당신의 백성 중에서는 한 사람도 고쳐 주시지 않고 믿지 않는 이방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도 원수의 장군을.



이유가 뭐냐? 말할 것도 없이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도대체 믿음이 없었습니다. 지도자부터 썩어 있었고 더군다나 우상을 섬겼습니다. 여기서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모독이요 또 자존심 파괴 행위였습니다. 가정 부인이 외간 남자와 줄곧 놀아난 격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결국 하느님의 백성에서 멀어집니다. 아예 떨어져 나갑니다.



믿음이 없으면 감사도 없습니다. 불효자는 달리 불효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마움을 모르니까 불효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마움을 아는 것 하고 모르는 것 하고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납니다. 알면 행복합니다. 고맙다는 그 자체가 큰 행복입니다. 그러나 모르면 불행합니다. 고마움을 모른다는 그 자체가 불행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구제불능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그 즉시 치유받게 됩니다. 여기서 병이 나았다는 것은 저주받은 천형의 삶에서 축복받은 은총의 삶으로 구제받았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커다란 축복을 받으면서도 감사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반면에 하느님의 백성으로부터 천대받고 배척받은 사마리아 사람만은 예수께 와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속담에 "화장실에 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꼭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붙잡고 매달리고 사정해서 도움을 받았지만 그러나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아무리 육체적인 나병에서 해방되었다 해도 영적인 나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를 찾아가서 살려 달라는 애원을 하면서 돈을 빌려 갔는데 약속날이 되자 안 주는 것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미루고 미루다가 나중에는 아예 먹고 뒹굴어 버렸습니다. 떼어 먹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돈을 준 자는 큰 일이었습니다. 사실은 자기 돈도 아니었습니다. 사방에서 얻어다 준 것이었습니다.



친구 사이라 차용증을 써 준 일도 없고 또 증인을 대고 내세울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저쪽에서는 법대로 하라면서 버티는데 이쪽에서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고통을 아주 많이 받았습니다. 돈 주고 뺨 맞은 격입니다. 세상에 그처럼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철면피의 인생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돈을 떼인 분이 나중에 그러는 것입니다. "신부님, 저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하고요. 돈을 크게 떼이고도 얻은 것이 많다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잃으면서도 얻는 사람이 있고 얻으면서도 잃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으면 잃으면서도 얻습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으면 얻으면서도 잃게 됩니다.



어떤 분은 세례받은 지 10년이 되었는데도 은혜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감사가 닫혀져 있으면 세상이 닫혀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효자들이 늘 그럽니다. 부모님이 자기에게 해 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없다고 판단하니까 행패를 부리는 것입니다.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누구는 고달픈 십자가를 무겁게 지고 있으면서도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마치 그분의 선물인 양 감사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래서 행복합니다. 돈이 있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요 건강하다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할 줄을 알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은 감사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병들어도 은혜로우며 가난해도 감사드리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말씀 드릴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분은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감사할 것이 없다고 해도 감사하다고 외쳐 보십시오. 믿음의 축복을 만날 것입니다.











27          연중 제28주일   루가 17,11-19 (다) 몸이 깨끗해진 사람이 10사람?



오늘 주일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중 아홉 사람은 그 길로 사라져 버리고 한 사람만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예수께로 되돌아 왔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많은 환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육신 병을 고쳐 주신 것은 단순히 그 환자들이 불쌍해서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이로써 영혼의 병인 죄의 상처를 치료하려 오신 당신의 구세사명을 알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의 은혜로 우리 죄의 상처가 치료되는 순간은 세례 물이 우리 이마에 흐를 때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나병환자는 세례성사를 받기 전의 우리 영혼을 상징합니다. 우리도 모두 다 한때는 영혼의 나병인 거의 불치에 가까운 죄의 상처를 지니고 있었으나 세례 때에 구세주의 피로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완전히 치료되었습니다.



예수께 치료받은 나병환자 열 사람 중에서 단 한 사람이 예수께로 되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홉 사람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베푸신 예수께서는 얼마나 섭섭히 생각하셨겠습니까? “깨끗이 나은 사람이 열 명이 아니냐? 아홉 사람은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려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외에는 보이지 않는 구나!” 하시었습니다. 그들의 배은망덕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배은망덕한 아홉 사람 가운데서 열심치 못한 오늘의 교우들도 함께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영세 입교함으로써 구세주의 은총을 받아 영혼의 병인 죄의 상처를 깨끗이 치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드릴 생각도 않고 교우 본분을 저버리며 주일 미사에도 나오지 않는 무관심한 교우들을 예수께서는 저 아홉 사람의 배신자와 함께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명에 가까운 신자 수를 가진 우리 본당에서 주일 미사에 나오는 신자 수는 ○○○명도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명은 어디 있습니까? 어디서 무엇을 하며 받은 은혜를 남들이 감사하는 이 날, 함께 감사드릴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까? 어디 있냐고 예수께서 물으시면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자모이신 성교회는 오늘 입당송에서 저 냉담자들을 생각하며 애절히 간구하고 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영영 버리시나이까? 당신 목장의 양떼를 진노로 대하시나이까? 주여 당신 언약을 살피시어 이 가난한 자들의 영혼을 영영 버리지 마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교회의 뜻을 받들어 우리 본당의 냉담 교우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냉담한 교형자매들을 영영 버리지 마옵소서! 저들은 주의 집으로 가는 길을 외면하고 주의 복음도 들으려 하지 않으며 온갖 향기와 온갖 단 맛이 넘쳐흐르는 천상 면병도 받아 모시려 하지 않사오나 주는 인자하시고 능하시니 저들을 영영 버리지 마옵소서” 하며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열심히 기도한다면 우리들 자신만을 그래도 예수께 되돌아와서 하느님께 찬미를 바치던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가끔 영혼에 상처를 입습니다. 영세 전에 가졌던 상처를 치료한 후에도 너무나 자주 죄에 떨어졌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고마우신 은덕으로 그 상처의 완쾌를 보았습니다.



이 은혜를 감사하기 위하여 우리는 주일마다 예수님을 찾아 모여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하여 모여옵니다. 더 많은 은혜의 약속을 받으러 모여옵니다. 받은 은혜를 사례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현재와 장래에 요긴한 모든 은혜를 구하는 것이 우리 기도의 본질이며 주일 미사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또한 주일 미사에 나올 때마다 우리와 함께 나오지 못하는, 아니, 나오지 않는 불쌍한 형제자매들도 항상 기억하고 그들에게도 감사의 정을 일으켜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열렬히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적 마음의 자유를 잃고 세속살이에만 골몰하는 그들도 우리와 함께 감사미사에 참여하도록 도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8       연중 제28주일   루가 17,11-19 (다) 몸이 깨끗해진 사람이 10사람?



오늘은 연중 제28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하느님의 은총은 국경을 넘어 이방인에게도 전달된다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이제 이방인들도 구원의 주체가 되며 오히려 이들이 하느님께 더 큰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는 또 다른 역설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구원의 소식은 모두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1독서는 시리아의 나아만이 나병의 치유를 받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 위대함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예수께서는 복음에서 이 대목을 인용하시면서 유대인들이 지닌 선민의식과 자만심에 쐐기를 박고, 엘리야 시대에 사렙다 마을의 과부가 기적의 은총을 받고 엘리사 시대에는 이방인인 나아만이 나병의 치유를 받았음을 상기시키고 계십니다.(루가 4,25-27 참조)



이것은 예수 특유의 역설적 교육방법이며 구원사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기원전 850년을 전후로 하여 활동한 예언자로 유대 및 이스라엘 왕정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열왕기의 저자는 예언자들의 역사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예언자들의 신원, 능력, 권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파견된 사람, 하느님을 믿고 사는 사람, 하느님을 삶의 원천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권력과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언자가 외친 말은 진리에 연유되고 있기 때문에 꼭 이루어진다는 교훈입니다. 개인의 삶이나 역사의 크고 작은 변동사항은 모두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고백이 유대인들의 신조였습니다. 예언자들은 바로 하느님의 대변자이며 따라서 그 말씀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실현능력을 지닌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침공을 받고 한 소녀가 포로와 인질로 끌려가게 되는 것도 결국 그 사건들을 통해 이방인인 나아만이 엘리사에 대한 소식을 접하며 그래서 예언자의 땅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높은 지위에 있는 이 이방인 장군을 합당하게 맞이하지 않고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명했습니다. 이에 나아만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비록 나병에 걸린 신세이기는 하나 그는 자신의 지위와 체면에 합당한 예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하가 그에게 간청했습니다. 예언자가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을 시켰어도 그대로 할텐데, 요르단강에서 씻는 것이 뭐 그렇게 어렵다고 거부하는가 하며 장군을 설득시켰고 나아만은 예언자의 말대로 요르단강에서 목욕을 하여 나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 일화는 전례적으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전례에 있어서 하찮은 예절 하나 하나에 정성을 다하라는 교훈과 함께 세례성사의 효력을 미리 상징으로 보여준 내용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유일신 사상과 그 절대성을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겸허해야 하며 하느님만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믿음을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2독서인 디모테오 후서는 그 친저성에 있어서 논란이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도 바오로의 것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유언과 같은 이 말씀은 제자 디모테오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용기와 확신, 그리고 인내입니다. 수없이 고통을 당하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바오로는 디오테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은 곧 고난을 통해서만 전달된다는 이 원칙을 디모테오가 깨닫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고난은 십자가의 고통으로 다만 부활을 위한 필연적 과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바로 바오로의 믿음의 기초이며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 매맞으면서 기쁨을 잃지 않고, 경멸을 당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께서 자신과 함께 있다는 확신과 믿음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으로 인간의 이 모든 고통을 용해하여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힘입니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모름지기 인내하며 항구해야 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면 우리에게는 꼭 승리의 날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희망입니다.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이러한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있습니다. 거대한 로마제국의 구조 아래 감옥에 갇힌 보잘것없는 한 죄수의 읊조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지만 역사의 현장은 분명 바오로와 로마제국의 또 다른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목격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고난의 현장에서 많은 의인들은 역사의 심판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현실의 부조리, 구조적 악, 제도적 폭력을 극복하겠다는 인간 의지의 결단입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바오로가 말한 용기와 인내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 모두 바오로 사도의 유언인 진실을 따라 사는 신의의 사람이 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오늘의 루가복음은 1독서와 직결되는 내용으로 이방인의 구실을 예수께서 들어 높이고 계십니다. 열 명의 나환자가 예수께 치유의 은혜를 받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하느님을 찬미하며 예수를 찾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는 이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며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고 계십니다. 찬미와 감사는 신앙인의 특징입니다. 많은 경우 크리스천인 우리보다 비크리스천들이 더욱 성실할 수 있으며 이 이방인처럼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래서 더욱 칭찬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 실천과 행동이 바로 믿음의 기준일진대 오히려 그들이, 믿음의 사람이라 자처하는 우리보다 훨씬 더 큰 믿음의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혈연의 관계를 뛰어넘는 정신적 가치, 곧 믿음의 가치를 제시한 예수는 오늘의 복음을 통해 타성화 된 믿음, 형식적 믿음, 틀에 박힌 믿음은 질타하시며, 명목뿐인 모든 크리스천을 내리치시고 계십니다.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 밖에 없단 말이냐?” 자만에 빠져 하느님을 잊고 사는 사실상의 불신자들인 우리들에게 묻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삶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매사에 있어서 하느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사실 미사는 감사의 제사입니다.



그 감사는 하느님과 이웃과 맺는 올바른 관계이며 그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이웃과의 나눔, 이웃과의 만남,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 표명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약한 사람, 억울한 사람, 짓밟힌 사람, 빼앗긴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만이 참다운 감사, 곧 미사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미사가 바로 이러한 감사의 기도가 되도록 우리의 눈을 크게 세상으로, 이웃에게로 돌려봅시다.











29        연중 제28주일 루가 17,11-19 (다) 몸이 깨끗해진 사람이 10사람?



크리스천 생활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로 그 특징들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감사하는 생활’이라는 대답만큼 가장 적절한 대답은 없을 줄 압니다. 실로 ‘감사하는 생활’이야말로, 우리들 신자들의 것이며, 또한 그것은 우리의 보람이며 자랑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즉, 열 사람의 문둥병 환자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크게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제관들에게 당신들의 몸을 보이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법으로는, 나병환자는 일반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나병이 나았다는 것은 제관들에게 보이고, 그들의 사인을 받은 연후에야 다시 친척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관들에게 당신들의 몸을 보이시오” 하신 말씀은, “당신들의 몸이 깨끗해졌으니, 가서 몸을 보이고, 나병이 나았다는 사인을 받아 가지고 일반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하시오” 하고 말씀한 것이나 다름없는 말씀입니다.

과연, 그들이 제관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단 한 사람만이, 그것도 예수님과 같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만이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 돌아와, 그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의 복음말씀을 두고, 서로 가슴에 손을 대고 반성해 봅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이 바로 이 성당에 와 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서도, 여러분은 주님 앞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천만번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5천만을 헤아리는 동포가 살고 있습니다. 2천만에 가까운 동포들은, 무서운 공산치하에서, 종교의 자유는커녕, 제대로 숨도 크게 쉬지 못할 정도로 억압당한 생활을 하면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북 땅에 살지 않고, 이 이남 땅에 살고 있다는 이 고마움을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남의 4천만에 가까운 인구 중에서, 1백만을 헤아리는 가톨릭 신자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이 사실은 또 얼마나 큰 주님의 은총입니까?



우리는 말로는, 신자가 되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고들 합니다만, 그 은총으로 된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크게 감사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서까지도 감사할 줄 모르는데, 다른 일반적 생활에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간에, 그 모두가 주님의 은총으로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설령 우리에게 고통이 닥쳐오고, 병고가 생겼다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매(견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 때문에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기 때문에 채찍질하신다”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 “아버지로서 아들을 견책해도 우리가 그를 존경한다면, 영적인 아버지께 더욱 더 잘 복종해서 진정한 생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히브 12,6.9)라고 말하면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데살 5,16.17)라고 깨쳐주었습니다.



진정 감사할 줄 모르는 생활은 크리스천 생활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은총이 내리지 않습니다.“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는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외국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인가!”



우리는 항상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아니 고통을 당했을 때, 더욱 감사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생활을 해 나갑니다. 그리하여 결코, 주님의 책망을 듣는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나환자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예수의 말씀으로 치유되는 사건을 들었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사제에게 가는 길목에서 병의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나병 환자들은 적어도 예수를 구원하시는 분, 새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예수께 이렇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나병으로 세상에서 내쫓김을 받은 그들이 예수께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병마에서부터의 해방, 그래서 얻게 되는 새로운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과연 그들이 원하던 대로 새로운 삶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마치 나아만이 아무 것도 잘한 것이 없지만 예언자 엘리사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공짜로 샌 생명을 얻게 된 것처럼, 열 명의 나병 환자들도 말씀에 순종한 대가로 공짜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능력 있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무상으로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은 우리가 그 무엇을 잘했거나 공덕을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당신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의 그 자비하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치유를 받게 된 나아만은 예언자 엘리사에게 되돌아가서 감사를 드렸고, 야훼 하느님만 섬기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열 명의 나병 환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께 돌아와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되돌아 와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시리아 군사령관 나아만이나 사마리아 사람이나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절실하게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그들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하는 새로운 삶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아홉 사람은 왜 돌아와서 하느님께 찬양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돌아와서 하느님께 찬앙을 드리지 않은 것은 예수를 존경하는 태도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예수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권능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홉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그 어떤 인간들도 특전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구원과 새 생명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짜로 하느님께서 선물 주시는 것이지, 어떤 자격과 지위를 갖추었거나 공덕을 쌓은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리아 군사령관 나아만이나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한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자신들의 지위나 처지 등을 내세우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아만이 시리아의 군사령관이라는 지위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사람 역시 말씀에 순종하고 하느님의 권능을 깨달았기에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믿음이 그들을 살렸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미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하느님을 믿음으로 새 생명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은총에 감사합시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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