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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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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8월 9일 (토)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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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24주일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주지 않았느냐



제1독서: 집회 27,30-28,7



제2독서: 로마 14,7-9



           복 음: 마태 18,21-25



  이미 지난 주일에 시작된 마태오 복음사가의ꡐ교회론적ꡑ담화는 교회의 혼(魂)과도 같은 사랑과 형제애에 관한 주제를 계속 발전시키면서 오늘은 그 중에서도 특히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중대한 의무로 요구되는 형제적ꡐ용서ꡑ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인간들에게 그지없이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경우를 예로서 우리에게 제시하신다. 사실, 구약성서에서 자주 찬양되고 있는 하느님의 속성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분의ꡐ자비ꡑ이다.



ꡒ그분은 네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ꡓ



  오늘 전례는 하느님 자비의 특성을 찬양하는 대목들로 온통 가득차 있다. 응송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 야훼의 자비와 신성을 노래하는 장엄한 시편 102(히 103)의 일부를 전해주고 있다:ꡒ야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안의 온갖 것도, 그 이름 찬양하라. 내 영혼아 야훼님 찬양하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말라. 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니 죽음에서 네 생명 구하여내시고, 은총과 자비로 관을 씌워주시는 분, 꾸짖으심이 오래 가지 않으시고,앙심을 끝끝내 아니 품으시도다.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대로 갚지도 않으시니 저 하늘이 땅에서 높고 높은 것처럼, 경외하는 자에게는 너무나 크신 그의 자비. 동녘이 서녘에서 사이가 먼 것처럼, 우리가 지은 죄를 멀리하여주시도다ꡓ(시편 102,1-4. 9-12).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이ꡒ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신다ꡓ는 것이다. 이 말은 그분의ꡐ정의ꡑ는 곧 사랑이며 그 무엇도, 심지어 죄까지도 주고받는 엄한 규범에 따라 행동하도록 그분을 묶어놓지는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진정 하느님은 사랑하시고 용서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죄악과 무감각하게 굳어버린 마음 앞에서도 그분은ꡐ자유로우시다ꡑ:그분은 인간을 사랑을 통하여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수 있으시며 인간의 한없는 불행을 이해하실 수 있는 무한하신 능력 외에는(ꡒ우리의 됨됨이를 알고 계시며, 우리가 티끌임을 아시는 탓이로다ꡓ:시편102,14) 어떤 규범에도 얽매이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영성체송도 주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ꡒ주여, 당신 은총이 어이 이리 귀하신지 인간의 자손들이 당신 날개 그늘로 숨어드나이다ꡓ(시편 35,8).

  본기도는 하느님의ꡐ창조적ꡑ능력과 그분의ꡐ자비ꡑ를 놀랍게 결합시킴으로써 그분의ꡐ자비ꡑ또한 인간의 마음에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역사의 흐름에까지도 새로운 상황을ꡐ창조해주는ꡑ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한다. 다만 이 점을 생각해 보라:성아우구스티노와 같은ꡐ용서받은 사람ꡑ이 교회와 인간적 사상 자체의 역사 속에서 무엇을 대변해주고 있는가?



ꡒ제 형제에게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ꡓ



  이제, 형제적 용서에 대한 베드로와 예수와의 짤막한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자:ꡒꡐ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읍니까?ꡑ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ꡐ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ꡑꡓ(마태 18,21-22).

  유사한 내용의 문장을 루가복음에서도 볼 수 있다:ꡒ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 했다고 하면 용서해주어야 한다ꡓ(루가 17,3-4).

  마태오의 편집 내용에 따르면 두 가지 점에서 수정되고 있다. 첫째는 용서의 포용력이 훨씬 넓어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즉 무한히 용서하라고 하신다. 베드로의 생각으로는 일곱 번 정도만 해도 아주 충분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마음이 아직 너무 좁아서 그 마음을 무한히 넓힐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여기서ꡒ카인을 해친 사람이 일곱 갑절로 보복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치는 사람은 일흔 일곱 갑절로 보복받으리라ꡓ(창세 4,24)고 라멕이 자기의 적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할 것을 위협하고 있는 창세기의 대목에 반대 입장을 나타내시는 것이 분명하다.

  둘째로는 이 형제적 용서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루가 복음사가에 의해서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베드로의 역할이 신중히 고려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앞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나름대로 교회론적 구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구상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들 상호간에 형제애를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 용서의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 일에 있어서나, 또 그가 교회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어쩌면 가장 심하게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그가 우선 용서의 모범이 되어야 함에 있어서 특별한 역할을 맡고 있다.

  즉시 이어서 나오고 있는ꡐ무자비한 종ꡑ의 비유는 무한히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보다는 오히려 순수하게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점과 또한 복음의 표현대로 진심으로 용서해준다는 것(35절)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신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무한히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것은 용서한다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다.

  예수께서 생각해내신 장면은 연이어서 나오고 있는 대립적인 상황들을 통하여 극적 대조를 연출해내고 있는 세 가지 행위로 전개 되고 있다.



ꡒ하늘 나라는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는 것에 비길 수 있다ꡓ 



  첫째 행위는 왕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종이 왕에게 셈을 바쳐야 하는데 왕이 관대하게도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준 것이다:ꡒ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ꡐ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ꡑ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ꡐ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드리겠습니다ꡑ하고 애걸하였다.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 보냈다ꡓ(23-27절).

  성서 대목에서 표현되고 있듯이 정말로 어떤ꡐ왕ꡑ에 관한 일이라면 그 종들은 분명 그 나라의 지방관리들이거나 행정관들일 것이다. 어쨌든 사실인즉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무능력한 탓으로든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정말로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빚을 지었다.ꡐ일만 달란트ꡑ라는 액수는 대략 칠십억 원에 해당하는 돈이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부자ꡐ상인ꡑ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종들은 아마도 그의 노예들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사건의 본질은 마찬가지다: 그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신의 재산 전부를 팔아도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때 뜻하지 않게 왕은 관대함을 베풀어 그 종의 청을 받아들여 모든 빚을 탕감해준다:ꡒ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 보냈다ꡓ(27절).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희랍어 splanchnisthéis(가엾게 여기다)라는 말은 구약성서의 배경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시게 하는 억제키 어려운 내적 힘을 뜻한다. 신약성서 특히 마태오복음에서는(9,36; 14,14; 15,32; 20,34참조) 예수께서 인간적 불행을 위로하시는 측은지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용어 자체가 문학적 상징적 의미를 넘어서 비유에 나오는ꡐ왕ꡑ의 지극히 관대한 모습을 이해토록 도와주고 있다.

  첫 번째 행위가 감동적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행위는 참으로 우울한 기분을 자아낸다: 그 종으로 하여금 주인과 똑같은 관대한 자비심을 가질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편협한 마음에 사로잡히게끔 하는 것 같다. 실제로,ꡒ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ꡐ내 빚을 갚아라ꡑ고 호통을 쳤다. 그 동료는 엎드려ꡐ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ꡑ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 까지 감옥에 가두어두었다ꡓ(28-30절).

  왕의 태도와는 정면으로 대립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첫째, 그 종은 화를 내고 그가 주인에게 한 것과 똑같은 간청을 들음에도 불고하고 전혀 동정심을 느끼지 않고 그의 동료를ꡒ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ꡓ(30절) 감옥에 처넣는다. 둘째, 이 두 번째 경우에는 그 빚을 탕감해주거나 연기해주기가 앞의 경우에 비해 쉬웠다. 왜냐하면ꡒ백 데나리온ꡓ이라는 돈은 칠천 원 정도에 해당하는 그다지 심각히 여길 만한 액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비유가 두 경우에 있어서 금액 차이가 아주 큰 점을 강조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마음의 편협성과 폐쇄성을 인식시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때 세 번째 행위가 극적으로 등장한다: 다른 종들이 그 광경을 보고ꡐ분개하여ꡑ모든 사실을 주인에게 알린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렇게 말한다:ꡒꡐ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ꡓ(32-34절).

  주인의 이 마지막 엄한 태도는(ꡒ몹시 노하여ꡓ) 처음에 이해하고 용서해주었던(ꡒ가엾게 여겨ꡓ:27절) 그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다. 사실 그는 단순히 사랑의 행위를 행한 것만이 아니라 삶의 태도의 모델을 제시해주었던 것이다.

  그는 정의의 규범을 넘어서 있는 새로운 법 즉 인간들 상호간에 용서를 베풀고 새로운 일치의 관계를 창조케 하는 사랑의 법을 새로이 세워놓았던 것이다. 반대로 그 무자비한 종은 여전히 낡아빠진 율법주의적 사고-―요구할 줄만 알고 베풀 줄은 모르는-―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사고 속에서는 항상 적개심과 분노와 의심과 복수심만이 인간관계를 얽어맬 것이다. 그는 사랑과 용서를ꡐ다시 나누어줌으로써ꡑꡐ성부ꡑ께서 매순간 새롭게 회복시켜주시는 사랑과 용서의 정을 항상 새롭게 살아가도록 서로 도와주고자 하는 믿는 이들의 새로운 형제애, 새로운 공동체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너무나도 관대해 보였던 그 왕의 태도가 끝에 가서는-- 무섭도록 돌변하여 그 종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준 선물을 되돌려받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우리가 사랑을 다시 나누어줄 줄 모른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분(성부)은 우리에게서 그 사랑을 되거둬가실 것이다.



ꡒ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ꡓ



  예수께서 이 비유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항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된다. 그러므로ꡒ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ꡓ(35절). 이 대목에서 사용되고 있는 동사들이 미래형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즉 이 대목은 우리 각자가 성부께 지은 무한한 빚을 전제한다면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ꡐ감옥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지금 이 순간부터 하느님의ꡐ심판ꡑ에 달려 있다: 그분은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 즉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교회안에서 그 정체가 확인될 수 있는 인간들 상호간의 형제애의 실천 능력에 따라 우리를ꡐ심판ꡑ하신다.

  비유의 베일을 벗기고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ꡐ기쁜소식ꡑ을 전해주는 참된 이야기가 들어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용서는 예수를 통하여 주어졌기 때문이다:ꡒ여러분이 전에는 잘못을 저질렀고,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으나 이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주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달갑지 않은 조항이 들어 있는 우리의 빚문서를 무효화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버리셨습니다ꡓ(골로 2,13-14).

  그래서 그분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을 용서하심으로써 당신의 전생애를 가장 위대하게 마치셨다:ꡒ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ꡓ(루가 23,34). 일부 그리스도교 필사본가들은 이 말씀을 못마땅히 여겨 자기들의 사본에서 빼버리기도 했다. 아마 그들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너무 지나친 표현을 쓰신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그분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곱 번만이 아니라ꡒ일곱 번씩 일흔 번ꡓ이라도 용서해주라고 명하시는 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그분은 그보다 더 즉 무한히 우리를 용서하셨다!

  더욱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모범에 충실히 따름을 끊임없이 입증해야 할 교회와 같은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우리 모두야말로 베드로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한 신자에 이르기까지 다같이 언제나 서로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 과연 우리 중에 누가 하느님과 이웃에게 해야 할 바를 항상 성실히 완수하고 있는가? 만일 우리 모두가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교회는 그 구성원들이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용서를 받고 그리고 서로간에 겸손되이 또 진실되이 용서를 나눌 때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ꡒ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ꡓ(마태 6,12).

  존재하는 단 하나의 교회는ꡐ용서를 해주는 자들ꡑ이 될 수 있는ꡒ용서받은 자들ꡓ의 교회이다.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이미 교회 밖에 있는 자이다: 교회라는ꡐ그리스도의 몸ꡑ으로부터 내적 체제상으로 우리를 제외시켜버리는 유일한 죄가 바로 이 죄이다.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볼 때, 화해의 성사 자체는 참으로 중요하며 절박히 요구된다: 화해성사는 성체성사와 더불어 교회를 항구히 새롭게 건설해 나간다. 즉 그 고유한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때때로 불행히도 서로간에 생겨날 수 있는 반목과 대립을 뛰어넘어 서로간에 이해와 존경과 사랑의 대화를 재개할 수 있도록 하게 함으로써 말이다.



ꡒ우리들 가운데는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ꡓ



  용서와 형제적 화해의 필요성은 오늘 전례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집회서에 의한 제1독서의 의미심장한 대목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는 이미 신약의 정신이 숨쉬고 있다:ꡒ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자기 이웃에 대해서 분노를 품고 있는 자가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으랴?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자기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는가? 자기도 죄짓는 사람이 남에게 원한을 품는다면 누가 그를 용서해주겠는가?ꡓ(집회 28,2-5).

  쉽게 알아들을 수 있듯이 용서를 하라는 주장의 근거는 우리가 먼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산상수훈 가운데 다섯 번째 행복에 대한 예시와도 같다:ꡒ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ꡓ(마태 5,7).

  사도 바울로가 신앙에 있어서ꡐ나약한ꡑ형제들에 대해 사랑을 가지라고 로마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권고하고 있는 문맥에서 취해지고 있는 제2독서도 비록 감정과 느낌이 다를지라도 다른 형제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의무를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 각자가 하느님과 또 다른 형제들에게 맺어져 있는 필연적인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로마 14,7-9).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고 용서해주심으로써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시는 그리스도의 모범이 다시 한번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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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0:46
분 류 연중19-24주일
ㆍ추천: 0  ㆍ조회: 4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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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24 주일



        1. 최기산 신부(가)/ 2          2. 강길웅 신부(가)/ 3

        3. 이병돈 신부(가)/ 5          4. 김창석 신부(가)/ 8

        5. 교구 주보(가)/ 9             6. 최인호 작가(가)/ 11

        7. 용서는 선으로(가)/ 12      8. 무조건 용서(가)/ 14

        9. 용서는 가장(가)/ 15         10. 일곱번씩 일흔번(가)/ 17

        11. 애덕과 용서(가)/ 19        



1.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용서의 한계      

최기산 신부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것 같으나 만만치 않다. 특히 가까이 있는 사람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다. 현재의 국제정세를 보더라도 가까이 있는 나라끼리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과 대만, 러시아와 체첸, 미국과 쿠바, 우리의 남북이 그렇다. 또 겉으로는 안그런척 하면서도, 용서한 것 같으면서도 가슴깊이 새겨있는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는 용서가 쉽지 않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가까이 있는 나라들이 서로 용서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미움은 ꡐ용서ꡑ의 싹이 트기도 전에 질식시켜 버리기 일쑤다. 부부 사이의 마음이 용서로 치유되지 못한 채, 이혼법정에서 남남이 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만 가는 것을 보아도 용서란 참으로 어려운 우리의 과업임을 알 수 있다.



용서란 가능한 것인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치 않다. 내 부모를 죽인 사람, 내집을 망쳐놓은 사기꾼, 내 아내를 겁탈한 놈, 그런 인간들을 과연 인간의 힘으로 용서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의 도전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은총이다. 기적이다. 원수처럼 지내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용서할 마음이 생기는 것은 기적이다. 자기자식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을 자기자식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기적이다.



용서를 위하여



ꡒ너희가 일어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용서하여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ꡓ(마르 11,25)



ꡒ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ꡓ(마태 5,23) 위의 성서구절들에서, 기도나 미사 전에 우선 해야 할 것은 용서라고 강조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으면서, 용서하지 않으면서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용서가 쉽게 될 수 있는가?



앞서도 언급했지만 용서란 쉽지 않다. 해를 끼친 사람의 상판만 보아도 구역질이 날 지경인데 어떻게 용서하란 말인가? 그의 발뒤꿈치만 보아도 오장이 소스라치며 손이 떨리는데 어찌 용서하란 말인가? 참으로 용서란 우리에게 큰 숙제중의 숙제다. 그러나 성서는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권한다. 원수까지도 용서하여 사랑하라고 명한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긴 해야 하는데 나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나의 결심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주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 ꡒ주님, 제가 용서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은총을 주십시오.ꡓ예수님의 충고



베드로가 으스대며 7번 용서하면 어떻겠느냐고 나섰다. 유대인들에게는 남의 잘못을 3번 용서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있었으니 7번이면 대단한 자비를 베푼 셈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7번씩 70번 용서하라.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머쓱해서 머리를 긁으며 되돌아갔을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왜 한없이 남을 용서해야 하는 지를 설명하신다.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을 졌다. 우리돈으로 약 100억쯤 되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러나 그는 탕감받았다. 그런데 빚을 탕감받은 자는 100데나리온, 우리돈으로 약 1만원 정도의 돈을 빚진 자를 만나서 돈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그는 정말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많은 빚을 탕감받은 자가, 그 가난한 자의 돈을 탕감해주지 않고 감옥에 쳐넣는, 눈물도 피도 없는 짓을 하였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을 죄에서 탕감받은 자 곧 1만 달란트 이상 탕감받은 자가 되었으니 우리에게 죄지은 자, 조금 빚진 자를 용서하라신다.복음의 메시지



내 자존심을 건드린 사람, 내 재물을 손해 보게 한 사람, 내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의 기도에서 내가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 만큼 내가 용서받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내가 용서한만큼만 용서받는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막힌 기도다. 나의 가슴 속 어디에 숨겨둔, 내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의 명단, 그의 인상을 찾아내어 용서해야 한다.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고 있는한 나의 가슴은 쓰리고, 나의 머리는 몽롱해진다. 그 결과 속병이 심해지고 간도, 심장도 나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는 것은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내가 용서할 수 있는 것은 과감히 용서하고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 간구하자. 그러나 정의와 용서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용서는 남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하는 것이다. 남이 남에게 잘못하는 것을 보면서도 ꡐ용서해야지ꡑ를 외치는 것은 비겁하다. 바른말을 해주고 버릇을 고쳐주는 것이 사랑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성전에서 민중의 피를 갉아먹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시며 채찍을 휘두르시고 환전상들의 좌판을 뒤엎어버리셨다. 정의와 용서는 그래서 구분되는 것이다.











2.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용서는 위대한 사랑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집회 27,30~28,7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제2독서 로마 14,7~9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복 음 마태 18,21~35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평생 갚을 수 없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 줘야 하는 빚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미 받은 하느님의 용서도 언제나 유보된 채로 남아 있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성서의 내용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놀라운 지혜가 등장합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많은 강대국들로부터 오랫동안 박해와 고난을 겪어 왔습니다. 그들은 실로 약소 민족이었으며 '동네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일어서고 재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압제자들을 용서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지혜입니다. 실제로, 미움과 복수는 악순환만 계속 불러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유대인들도 용서로써 탁탁 털고 일어서기를 강조한 것입니다.



용서는 굴욕적인 것 같으나 위대한 것입니다. 용서는 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참되게 용서할 수 있으며 크기가 좁쌀만도 못한 인생들은 평생을 걸어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에 대한 말씀이 비유로서 잘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1만 달란트의 돈을 빚지게 되었습니다. 1만 달란트의 돈은 우리 돈으로 1조 원이 훨씬 넘는 돈으로서 서민들은 평생 벌어도 벌 수가 없고 평생 갚아도 갚을 수가 없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 사람의 불쌍한 처지를 생각하여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왕은 바보처럼 한 푼도 건지지 않고 전액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그런데 많은 돈을 탕감받은 사람은 나오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자 그걸 탕감해 주지 못하고 무자비하게 감옥에 넣어 버립니다. 100데나리온은 지금 돈으로 2백만 원쯤 됩니다. 2백만 원이 큰 돈이긴 하지만 자기가 탕감받은 1조원 이상의 돈에 비하면 60만분의 일도 안되는 아주 작은 돈입니다. 다시 말해 눈꼽만한 잘못도 결코 잊지 않고 따져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용서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불행합니다. 남의 잘못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못하는 자신의 옹졸함 때문에 불행합니다.



어떤 자매가 어렸을 때가 자기 계모한테 많은 구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도 좋고 아버지의 경제력도 좋아서 의대를 나와 의사가 되었습니다. 시집도 병원을 가진 의사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의사이면서도 자신의 얼굴에 돋아 있는 피부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원인도 병명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성령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오랫동안 잊어 왔던 계모에 대한 잘못을 크게 뉘우치게 됩니다.

그리고는 병이 나아 버렸습니다.



학자들의 주장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두통, 불면증, 고혈압, 위장장애, 신경성 질환, 또는 정신질환 등이 생긴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도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가슴에 독한 쓰레기를 담고 있는 사람이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 더러운 것을 꺼내지 않으면 바로 그 찌꺼기 때문에 육신이 병들고 정신이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용서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죽어야 하는 처절한 아픔이 있습니다. 자기가 죽지 않고는 절대로 상대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죄많은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서는 당신이 직접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죽어서 용서가 되면 그는 평생 자유로운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면 그는 평생을 끌려 다니면서 천번 만번 죽어야 합니다. 그보다 더 비참한 인생도 없습니다. 미움은 세상 끝까지 인간을 따라다니며 괴롭힐 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까지 따라가서 괴롭힙니다.



참 사랑은 용서에서 옵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애긍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가 진정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아직 사랑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가 아무리 어렵다 해도 우리가 마지막 심판 때에 하느님께 매달릴 자비와 용서에 비한다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1조 원과 2백만 원의 차이보다도 더 큽니다.



인생은 아무리 잘못되었다 해도 용서받고 용서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썩은 찌꺼기를 깨끗이 씻고 다시 일어선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럽고 또한 아름다운 일입니다. 인생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며 지식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 때 그가 세상을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이 됩니다. 누가 여러분을 괴롭힙니까? 바로 그 사람을 사랑합시다.











3.       연중 제24주일   마태 18,21-35 (가) 무한히 용서하여라

                                                            이병돈 신부



모 본당에 외아들을 두고 있는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외아들은 3대 독자였으며, 노부부에게는 희망이요, 삶의 의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외아들은 과속으로 달리던 트럭에 목숨을 앗기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운전사의 잘못이었습니다. 잚은 혈기에 술 마시고 기분나는대로 차를 몰은 것이, 한 목숨을 앗아갔고, 한 부분의 삶의 의의를 빼앗아 가고 말았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노부부에게 여러 위로의 말을 주었으며, 동시에 젊은 운전사에게는 저주와 욕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노부부는 커다란 슬픔 중에도 오히려 젊은 운전사의 장래를 걱정하였고, 또 경찰과 법원에 운전사를 용서해 줄 것을 탄원하였으며 그 운전사를 자기의 아들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운전사는 눈물로써 자기의 과오를 뉘우쳤고, 주위의 사람은 노부부의 크리스천적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예화입니다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 특히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을 가지고서도 실천하기 힘든 것임을 체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용서하라는 가르침은 완덕에 나아가려는 소수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가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타인을 용서해 주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심으로써 용서의 중요성을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원수를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당시 상황으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는 동태복수법이 성행하던 시대에 일곱 번 정도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했던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일곱번의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곱번의 일흔 번은 글자 그대로 사백구십번이 아닌 무한히 용서하라는 내용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채무자의 비유를 들어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 용서받을 희망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 우리가 용서받는 조건은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정신입니다. 용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증오심을 굳어 버리게 하는 것이며 증오심은 형제를 미워하는 격렬한 감정의 한 형태로서, 과격한 행위를 일으키며, 그 자체가 파괴적이며, 이런 증오심은 바로 사탄의 것입니다.

성 요한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살인자”(1요한 3,15)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용서하는 것만큼 용서받기를 바라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당신들도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도 당신들에게 이같이 하실 것입니다.”(마태 18,35)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길 빌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반대하고, 조롱하고, 모욕한 사람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 생활에서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순전히 공상이 아닌, 우리 모두가 지켜야만 할 계명이기에 우리 모두는 힘껏 노력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어느 본당에 한 젊은 청년이 자기의 명예를 더럽힌 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기에 이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본당 신부님께 상담하러 왔었습니다. 그때 본당 신부님께서는 “당신도 타인에게 잘못하지 말고, 그리고 하느님께 앞으로 조그만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결코 그를 용서해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을 듣고 청년은 깨닫고 돌아간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흔히 남의 잘못을 찾아내고 남이 나에게 끼친 해에는 극도로 민감하나, 우리 자신이 타인에게 저지른 과오나 더 나아가 하느님께 매 순간 죄짓고 또 용서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티는 잘 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웃과 하느님께 더 심각한 해를 끼쳤을지 모른다는 생각과 또 하느님께 용서받고 있다는 신앙으로 우리가 남에게 받은 피해를 용서해 주도록 노력합시다.



우리가 누군가에 피해를 받아 분노가 우리 마음을 휩싸고 있을 때에 화해하기를 힘써 노력합시다. 주님께서는 화해를 빨리 해야 할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십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4). 혹시 우리는 먼저 화해를 청하기보다는 화해를 청하여 온 우리의 형제를 저버린 일은 없습니까?



교형 자매 여러분, 그러나 이러한 용서와 화해는 순전히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이룩될 수 없고 오히려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힘을 받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께 지은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또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가 올바른 길로 돌아 올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죄를 미워한 나머지 죄지은 사람까지 미워하여 하느님께 우리 자신이 또하나의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가 이웃을 용서할 때에 우리는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고, 그분과 같아질 것이며, 더 순수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6).











4.            연중 제24주일   마태 18,21-35 (가) 위대한 용서

                                                            김창석 신부



얼마 전 우리 성당에 다니는 대학생 한 명이 등산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청량리 역 안에서 동료 대학생에게 피살된 사건이 있었다.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일어난 불의의 사고였다. 뜻밖에 아들을 잃은 부모와 가족의 슬픔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죽은 학생의 어머니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사람들이 많은 길거리에서 뒹굴면서 통곡하였다. 가해자 학생은 즉시 수감되었다. 그러나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었으므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 학생의 부모에게 가해자 학생을 용서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 부탁을 받은 피해자의 부모가 용서할 마음이 생길 리가 없었다.



가해자 학생의 가족은 결국 나를 찾아왔다. 피해자의 가족이 우리 성당의 신도였기 때문에, 주임 신부인 나더러 그 부모를 설득해서 용서를 받아내도록 중개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나서서 여러가지로 설득해 보았지만 피해자 학생의 부모는 쉽게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부모는 결국 나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피해자 학생의 아버지는 가해자 학생의 석방을 위한 합의서에 ‘나는 그 학생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한다’고 썼다. 이렇게 어려운 용서를 한 후에 아들을 잃은 그 가정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예기치 않았던 즐거운 평화가 그 집안에 찾아든 것이다. 근처에 가기도 싫던 죽은 아들의 방에 대한 무서움이 사라지고, 죽은 아들이 어딘가 집안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식구마다 가지게 되었다. 어려운 용서를 해낼 수 있었다는 기쁨이 식구마다의 마음에 가득했다. 이것은 분명히 놀라운 변화요 예기치 않았던 행복이었다.



그 부모는 죽은 아들 대신 가난한 대학생 한 사람을 골라서 학교를 마칠 때까지 장학금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매월 그 학생에게 학비를 줄 때마다 그 부모는 죽은 아들이 살아있다는 기쁨과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초월하는 부활의 힘인지도 모른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 때 자기 아들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은 공산당 청년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해서, 아들로 삼은 어느 목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 아버지에게 청하였다.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 용서해 주면 되겠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는 대답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1-22).



스페인의 어느 수도원 성당에 고해소가 있는데, 그 고해소 위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의 오른팔은 축 처져 있다.

안내하던 수사의 설명에 의하면, 오래 전에 그 고해소에서 어느 신자가 신부에게 죄의 고백을 했는데, 그 죄가 엄청나게 커서 그랬던지 신부가 그 신자의 죄를 사하는 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때 그 위에 있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오른팔이 움직이며, 그 신자의 죄를 사하라는 뜻으로 십자가 표를 그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의 오른팔이 축 처져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아주 쉽게 용서해 주시는데 비해 오히려 사람이 쉽게 용서를 안 한다는 것을 풍자해 주는 것같다.

<성경>에는 하느님이 얼마나 쉽게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지를 말하는 구절들이 얼마든지 있다.

<지혜서> 12장 19절에는 ‘죄를 지으면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셔서 당신 자녀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셨다’는 말이 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사도 바오로는 말하기를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연약한’ 우리를 대신해서 ‘성령께서’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하였다.

<복음 성경>에는 간음하다가 들켜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여자를 구해 주고 용서하는 예수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한 끝에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둘째아들을 맨발로 뛰어나가 반갑게 맞아주는 아버지의 이야기 등, 하느님이 우리 죄많은 인간을 얼마나 쉽게 용서하시는지를 말해주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의 잘못이나 죄를 용서하는데 매우 인색하다. 하느님이 용서하시는데 사람이 용서하지 않는다니 말이 되는가? 부부끼리, 고부(姑婦)끼리, 식구끼리, 이웃끼리, 친구끼리 마음이 맞지 않을 때, 하느님은 상대방을 이미 용서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가 직접 만들었다는 <주의 기도>에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라’는 기도의 내용이 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하느님이 용서하시는데 사람이 용서하지 않으면 말이 안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 주위에는 하느님을 따라 용서의 미덕을 보여준 사람들이 더러 있다. 서해의 외딴 섬에서 전도하던 어느 미국 신부는 자기 비서가 사무실에 있는 금품을 훔치는 것을 알고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한다. 도둑질하는 것을 지적하면 그 비서의 자존심이 상하고 그의 부인이 충격을 받게 될까 봐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용서의 훌륭한 예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용서하는 것은 신적(神的)인 행위”라고 말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닮는다는 뜻이리라.











5.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용서의 체험을 통해서 서로 용서

교구 주보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용서하고 또 용서받으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마태오 복음을 통해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에 대해 생각해보자.



1. 끝없는 용서의 삶

사도 베드로는 예수께 잘못한 형제를 일곱 번 정도 용서해주면 되느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절)고 말씀하셨다. 즉 잘못한 형제가 회개하면 끝없이 용서해주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무제한적 용서’의 가르침을 현실에서 실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끝없는 용서는 고사하고 일곱 번, 아니 단 한 번의 용서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의 인격을 모독하고 상처주고 재산 손해를 끼친 사람들을 어떻게 무제한으로 용서할 수 있을까?

2. 무자비한 종의 비유

이런 의문을 가진 우리들에게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특례비유(特例比喩)를 말씀하셨다. 왕은 자기에게 엄청난 빚을 진 종의 처지를 가엾게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다. 그런데 자유롭게 된 종은 자기에게 몇 푼 안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호통치고 감옥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33절)라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에게 넘겼다.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하는 까닭은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과거). 그처럼 큰 용서를 이미 받았으니 이제 교우들과 이웃의 작은 허물을 마땅히 용서해주어야 한다(현재). 만일 교우들이 서로 용서해주지 않으면 장차 종말에 엄청난 심판을 받을 것이다(미래).

3. 하느님의 용서, 우리의 용서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실생활에서 서로 용서하며 살 수 있을까? 그런 삶을 가꾸기 위해서는 먼저 개개인이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를 깊이 체험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를 용서해주신다. 만일 우리가 잘못했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셨다면 그 누구도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끝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오늘날에도 이 같은 하느님의 용서는 교회 안에서, 특별히 고해성사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용서란 잘못이나 죄를 꾸짖거나 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용서한다는 것에는 훨씬 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다시 당신의 소중한 자녀로 받아주심을 뜻한다.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지은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를 다시 나의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는 사랑의 한 표현이며, 서로간의 용서를 통해서 가정과 교회, 사회와 세상의 모

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6.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용서의 전문가

최인호 베드로/작가



중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페루기니는 독실한 가톨릭 교우였습니다만 평소에 고해성사에 대해서 회의적(懷疑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벌을 받을까 두려워 고해성사를 보려는 생각이 드는 경우에는 아예 성사를 보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다만 벌을 받을까봐 하는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징벌을 막아주는 보증서로 전락되어 하느님의 자비보다 사제의 사죄(赦罪)를 더 신뢰하게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임종을 맞게 되었을 때 그의 부인이 고해성사를 안 보고 죽는 것이 두렵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페루기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 난 평생동안 그림을 그린 화가요. 내 전문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고 제법 뛰어났었다고 자부하오. 하느님의 전문은 용서하시는 일인데 그 하느님께서 당신의 전문일을 잘 하신다면 내가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겠소.”

베드로가 “주님,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 용서해주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하신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7×70=490’, 그러니까 490번 용서해야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웃의 잘못을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문에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라는 구절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를 무한정 용서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남을 용서할 수는 없다’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인 것 같지만 실은 교만인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남을 단죄할 수 없듯이 내가 남을 용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는 이미 ‘용서받은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용서는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너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한다면 일곱 번도 용서할 수 없겠지만 그 형제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수만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용서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나는 너희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용서야말로 하느님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화가 페루기니의 말처럼 용서의 전문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웃이 이미 아버지로부터 용서받았으니 저희도 아버지의 용서를 배우게 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7.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용서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



 타인으로부터 크나큰 은혜를 입었으면 남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 사람이 너무도 무자비하게 굴었으니, 그 광경을 본 다른 관리들이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일어난 그 일을 왕에게 일러바쳤다.

그러자 왕은 그를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건만, 너는 네 동료에게 얼마 되지 않는 그 돈도 탕감해 주지 못하고 협박까지 하였도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여봐라, 저놈을 당장 감옥에 처넣어라"고 호통쳤을 것이다.

감옥에 갇힌 그 종은 빚진 액수로 보아 아마도 종신형을 받았을 것이고, 그의 가족은 모두 노비가 되었을 것이다.



   “일곱번씩 일흔번 "



  주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데 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베드로가,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주님께 질문한 부분이 나온다. 그는 셈족인들의 논리이자 사고방식에 따라 “일곱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일곱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성스럽고 완전한 숫자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일곱번도 힘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다교의 어떤 랍비는 하느님은 세번까지 용서하신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방법을 본받아 세번까지 용서하면 최고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의 용서 방법은

달랐다. “일곱번이 아니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이를 계산해 보면 490번이 된다. 이 말씀은 ‘언제나' 용서하라는 뜻일 것이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 부분을 “형제가 그 이상 죄를 범하지 않게 될 때까지 용서해주어야 한다"라고 해석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 우리의 잘못을 진정으로 용서받고 싶다면, 우리의 이웃이 나에게 잘못한 것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어떤 때에는 경우와 정의를 앞세워 대화하고, 따지고 항의할 수도 있으나, 마지막에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 비록 그 사람이 나의 밥줄을 끊어버린 직장 상사라도, 인사 명령을 통해 나를 한직으로 보내도, 심지어 나를 국외로 추방해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자, 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다.



  어렵고 고통을 동반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어 가시면서도, 당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지금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나이다."

우리도 이런 주님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길은 영광으로 나아가는 부활의 길이리라.



  이런 신자가 있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영성체하고, 적어도 한 달에 한번 고해성사를 보고, 매일 묵주의 기도를 수십단 바치고, 사순절에는 금요일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고,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할머니 신자다. 그 할머니는 누가 보더라도 훌륭한 신자이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자기 며느리의 잘못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며느리의 실수로 삼대 독자인 손자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그 할머니는 성당에 다녀와서 집에 들어갈 때 며느리가 보이면 “이 죽일 년. 내 손자를 죽인 년, 집안의 대를 끊은 년---"하면서 며느리를 호되게 욕하곤 한다. 절대로 용서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고 신자들이 말해도 막무가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며느리를 용서 못하겠다고 한다. 본당신부가 부드럽게 충고를 해도 듣지 않는다. 매일 주님의 기도를 수없이 바치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영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용서는 어려운 것이다.



   참으로 하기 힘든 용서



  용서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에는 복수가 있다. 이는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원한을 갚기 위하여 해를 주는 행위다. 복수가 자기 보존의 유효한 수단이라는 사고 방식도 있다. 역사이래 부족과 부족, 나라와 나라, 개인과 개인 사이에 얼마나 큰 복수가 자행되어 왔는가? 구약시대 모세 율법의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복수동태법은, 무제한 보복을 바로잡아 일대일의 보복을 그치도록 제한한 것으로서, 황야지역에서 지켜져야 할 사회정의의 표현이었다(레위 24,17-21).



  그러나 주 예수님은 복수동태법을 폐지하시고 제자들에게 원수까지도 용서하도록 가르치심으로써, 복수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도록 하셨고, 사도 성 바오로 역시 선으로써 악을 이기도록 가르쳤다.











8.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무조건 용서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면서 용서를 청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모두 용서해 주신다. 성서에서 드러나는 대표적인 예는 루가 복음사가가 전하는 탕자의 비유(15장)다. 둘째 아들은 자유와 독립, 그리고 자기 실현을 위하여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해방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까지 억눌려왔던 모든 굴레에서 스스로 해방되었다고 느끼면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해보고 마음가는 대로 놀아보았다. 그러나 결국 자기에게 돌아온 것은 파산, 비참, 그리고 좌절뿐이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결과가 그렇게 드러난 것이다. 그는 하느님을 떠나 자기의 원의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뿐 아니라, 죄를 지어 방황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도 그는 자포자기하지 많고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살아 돌아온 것만도 장하다" 그 아버지는 한없이 아들을 기다렸다. 아들의 잘못을 보지 않고,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본 아버지는, 사랑으로 아

들을 감싸안는다, 아버지는 “네가 왜, 이런 몹쓸 짓을 했느냐?"하거나 “이 죽일 놈아, 썩 나가거라"고 호통치지도 않는다, “이놈아, 네가 죽은 줄 알았더니 죽지 알고 살아 돌아온 것만도 장하다. “무조건 용서하시는 그 아버지는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이시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이것이 자기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태도다.



  잘못을 징벌하지 않으시고 뉘우치는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이런 식으로 드러난다. 한편 동생의 비행을 못 참는 형은 옹졸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아들도 너그럽게 수용한다. 역시 사랑이신 하느님의 관대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은 “자애롭고 자비로우시며 화를 참으시고 사랑이 지극하신"(시편 145,8)분이다. 또 그분은 “비록 어미는 혹시(자기가 낳은 아이를)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노라"(이사 49,15)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이런 하느님을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께서는 자애롭고 불쌍히 여기시며, 역정에 더디시고, 사랑이 지극하시오이다. 주님께서는 온갖 것을 선으로 대하시고 일체의 조물들을 어여삐 여기시나이다. 넘어지는 이는 누구라도 붙들어주시고 억눌린 사람이면 일으켜주시나이다"(시편 145).



  이런 내용을 잘 아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면서 하느님께 나아가 용서를 청한다. 작은 죄는 뉘우침이나 고해성사로, 큰 죄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



  그런데 우리는 각자의 잘못은 하느님께 말씀드리고 용서를 청하지만, 이웃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너그럽지, 못할 때가 있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이런 주제와 연관된 비유 중에서 가1장 대표적인 것은, 복음사가 마태오가 전하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18장)다. 이 내용을 모르는 이들은 꼭 읽어보기

바란다. 줄거리는 대충 이러하다.



  옛날에 어떤 왕(또는 대지주)에게 ‘1만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있었다. 달란트는 로마제

국에서 사용되던 금화로서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참고로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라는 장군이 기록한 ‘유대고사'에 따르면 그 당시 유다와 사마리아를 통치하던 헤로데 아르켈라오 임금의 연수입은 600달란트,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통치하던 혜로데

안티파스 임금의 연수입은 270달란트, 이두레아와 트라코니티스를 다스린 헤로데 필립보의 연수입은 100달란트였다. 그러니 1만달란트나 되는 돈은 너무나 엄청난 액수라,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금액이다. 요즘 우리 식으로 계산하여, 하루 일당을 5만원이라 하면 1달란트는 3억원이? 1만달란트는 3조원이 될 것이다. 하루에 10만원 버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6조원이나 된다.



  이렇게 엄청난 돈을 빚진 사람이 도저히 갚을 길이 없자, 그를 가엾게 여긴 왕은 그 빚을 모두 탕감하여 주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그는 너무 기분이 좋아 하늘에라도 오를 것 같은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단지 100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났다. 그는 빛을 갚으라고 호통을 쳤다. 그 동료는 시간을 좀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료의 사정을 들어주기는커녕 골탕을 먹이고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이런 몹쓸 짓이 어디 있겠는가?











9.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용서는 가장 큰사랑의 표본



  얼마 전 어느 텔레비젼 프로그램에서 한 부인이 자신의 어머니를 찾는 장면을 보았다. 그 부인은 어릴 때 어머니가 자신을 버려서 고아원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가정에 입양되어 살았는데 새 어머니와의 불화로 스무살이 되기 전에 집에서 가출하고 말았다. 낳아주고 길러준 두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이 불쌍한 여인은 세상의 온갖 고생을 겪으며 마음속으로는 두 어머니, 특히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증오하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지금의 착하고 부지런한 남편을 만나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낳게 되었다. 세상에 태어나 사랑을 처음으로 맛보고 행복한 삶을 살게된 것이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성당도 나가게 되었다. 신자생활을 하면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두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길러주신 어머니를 찾아가 용서를 청하고 또한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도 화해를 하고 싶어 방송 프로그램에 나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 여인의 절규와 오열하는 모습이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용서의 가르침은 율법을 초월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용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이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겸손되이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해주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 받은 용서는 빛이다. 그 빚은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심판과 경고의 의미를 지닌다. 임금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나 빛을 탕감받은 종이 풀려나서는 백 데나리온 빛을 진 동료를 감옥에 처넣는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임금은 몹시 노하여 무자비한 종을 형리에 넘긴다.

마지막날 모든 것을 분명하게 셈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시다. 은총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 용서를 받고 다른 이를 용서해주지 못하는 편협한 사람,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용서가 아닐까! 특히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치고, 고통을 안겨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준 사람에게 똑같이 복수하고 싶은 심정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인간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용서하라, 무한히 용서하라‥‥ 」 어쩌면 용서하라는 것은 사랑하기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표현은 바로 용서에 있다.

  내가 다른 이를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 때 우선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다른 이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을 주고 살았는가?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또한 내 주위에 많은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혔는지를 솔직하게 반성해야 한다.



  사랑의 계명은 한 마디로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다. 내가 나에게 잘못한 이를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의 결과이다. 나는 잘못이 없지만, 동정과 사랑으로 내가 너를 용서한다는 마음을 지닌다면 그것은 교만한 생각이다.



  용서는 단순히 잊어버리거나, 상처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베푸신 지극한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또한 나와 너, 우리 모두 약하고 죄 많은 인간임을 겸손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할 수 없을 때도 많다. 그러므로 용서의 기도를 바쳐야 한다. 또한 하느님은 내가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바로 그 마음을 가상히 여기실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형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용기가 생겨난다.



  내가 화해하지 못하고 미움과 증오에 사로잡혀 주님 대전에 나가 제물을 바쳐도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주님께서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의 제물이 무엇인가?











10.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



무자비한 종의 비유 



준비기도를 드린 후 마태오복음 18,21-35을 한두 번 읽는다. 내용은 이러하다. 형제가 죄를 지을 때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듣고 있던 베드로의 머리에는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이것은 셈족의 논법이자 사고방식이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에게 성스럽고 완전한 수(數)인 일곱을 내세워 일곱번 용서하면 되느냐고 물어본다. 그는 아마도 일곱 번만 용서하는 것도, 매우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다인들의 스승인 랍비들은 세 번만 용서하면 족하다고 가르쳤다, 주님은 “일곱 번 뿐아니라 일곱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라고 하신다. 계산을 해보면 490번이다. 아마도 이 숫자는 상징적일 것이다. 이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언제나 용서하라는 가르침이다.



용서받은 종의 혹독한 처사



  그리고 이어서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가 등장한다. 우선 화폐의 가치를 알아보자.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며, 1데나리온은 그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다. 그러면 1만 달란트는 얼마나 될까? 노동자의 하루 품삯도 사람에 따라 다르니 계산하기 나름이다, 시골에서 남자들의 하루 품삯은 추수할 때 5만원 정도이며, 여자들은 그 반을 받는다. 5만원으로 계산해 보면 3조원이나 된다. 어마어마한 돈이다,



이만한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나와, 가족과 재산의 모든 것을 다 팔아 빛을 갚으라고 하니, 그는 사정을 말하고 애걸복걸하였다. 구약 율법에는 물건을 훔친자가 그것을 갚지 못할 때는, 그를 팔 수 있었다.(출애 22,2) 빈털터리도 팔려갈 수 있었다. (레위 25,39)

그러므로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라면, 그 채무자를 팔아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비 지극한 임금은 사정을 다 듣고는,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밖으로 나가다가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나자 멱살을 잡고는 빚을

갚으라고 호통을 쳤다. 이는 지위가 낮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일이다. 그 사람이 사정을 하자 그는 용서해주기는커녕,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이 일을 지켜본 다른 동료가 그 혹독한 처사에 분개하여 그 사실을 왕에게 일러바쳤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대노하여, 그 잔인한 사람을 불러들여 그의 비인도적이고 무자비한 처사에 대하여 야단을 치고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에게 넘겨 감옥살이를 하게 하였다.



  오늘 묵상의 주제는 용서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처럼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 하며, 만일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내용이 아닌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나약하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다음에도 자주 실수하고 죄를 범하므로, 매일 용서를 받아야 한다. '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수시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도록 대자대비하신 주님께 청해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이웃 사람들의 잘못까지도 용서해주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원수가 나를 싫어하여 공격해와도 그 사람을 끝까지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태도이다,

영원을 향한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별 이상한 일을 당할 때가 있다. 사소한 일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문제가 생기는가하면, 오해와 모함을 사는 경우도 있고, 직장에서 윗사람들로부터 압력을 받을 때도 있다.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무조건 그들을 용서해주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 용서는 바보스럽고, 누가 보든지 당하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 더구나 복수하지 말아야 한다. 복수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것이다. 우리는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다. 그분이 그렇게 사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면서도 당신을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도록 아버지 하느님께 청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11.           연중 제24주일   마태 18,21-35 (가) 애덕과 용서



성교회의 달력의 연말에 접어든 시절의 복음 성경은 최후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강조하는 대목들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이 심판의 특별한 면을 강조한 것을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즉 애덕과 용서의 면입니다.



오늘 비유의 교훈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몇 백만원을 빚진 사람이 그 주인으로부터 그 빚을 면제받았는데, 그는 자기 동료가 자기에게 백원 빚진 것을 벌어서 갚겠으니 좀 참아달라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 사악한 종은 크나큰 자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자비를 베풀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비열한 짓을 하고 무사할 리가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그의 동료에 의해서 보고되었고 그 결과 주인한테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 악한 신하야, 네가 빌기에 네 모든 빚을 면제해 주었으니, 내가 네게 자비를 베풀었듯이, 너도 마땅히 네 동료 신하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 주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누구나 제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에게 이와같이 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마음에 찔리지 않는 한 그 악한 종을 멸시하려들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내가 바로 그 악한 종입니다. 그가 한 짓을 나는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서로간의 관계, 따라서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핵심을 찌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죄악, 우리의 빚을 면제해 주셨습니까? 고백의 성사를 몇번이나 받았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하느님께 빚을 진 큰 죄의 수효를 헤아려 보십시오. 몇 백만이 아니라 몇 억이 될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간청하는 까닭에 우리를 거듭거듭 용서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이가 우리의 감정을 손상시켰다거나, 우리를 약간 낮추 대하였다거나 또는 자칭 생각하는 자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경우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용서하기는커녕 앙갚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은 저 악한 종의 행동보다 더 경멸을 당해야 마땅합니다. 돈을 빚진다는 것과 지존하신 하느님을 거슬러 범죄한다는 것과는 결코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저 악한 종은 단지 한번만 용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한테 항상 용서를 받으면서도, 너무나 자주 남을 용서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중대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현세에서 뿐 아니라 내세에서의 행복의 관건이 되는 문제입니다. 우리 교우들간에는 육신의 죄악만이 참으로 중대한 죄악이라고 여기는 불행한 정신 태도가 있습니다. 애덕을 거스른 죄는 거의 죄로도 여기지 않습니다. 소설가들은 이러한 신자들의 참담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대단히 열심하고 꼿꼿하며, 순결하고 교회 유지를 위해 경제적 뒷받침을 잘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냉정하고 뒤를 헐뜯거나 중상 비방하거나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박해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그러한 교우들을 묘사한 소설이 적지 않습니다.



남을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은 불순결한 죄처럼 우리 본성의 나약함의 표가 아닙니다. 이것은 고의적인 것입니다. 감정이 상했다거나 교만이 손상되었다고 느낀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용서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성숙한 어른이 아직 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행동은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 비유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이웃에 대해 용서해 주지 않는 태도는, 현세에서는 우리의 정신의 평화를 점차로 파괴하고, 영원한 세상에서의 하느님과의 일치 생명을 파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덕을 배우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만일 여러분이 누구나 제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에게 이와 같이 하시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이 끝날 때 셈을 바쳐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과의 영원한 사랑의 일치를 위한 조건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무력하고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치료되기를 원하며 또 용서하는 정신 태도에 계속 발전되기를 원한다면, 주께서 어김없이 우리를 치료해 주실 수 있고 또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미사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미사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미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계속하십니다. “성부여, 그들은 그들이 하는 바를 모르오니, 그들을 용서하소서”하고 기도하시기를 계속하십니다. 미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용서하시는 마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실제로 손상을 입었거나 혹은 손상을 입었다고 여겨지더라도,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을 통하여 우리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사에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내 영혼이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당신 말씀에 희망을 거옵나니, 내 천주여, 언제나 나의 원수들을 심판하시려나이까? 간악한 자들이 나를 박해하오니, 내 천주여, 나를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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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광훈 세자요한 신부님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11:15
분 류 연중19-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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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
 

1. 안광훈 세자요한

1.1. 연중 24 주일



제 1 독서 : 집회 27, 30-28,7   <주 석>

30절 : 저자는 복수심이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서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분노와 진노는 사람을 죄악으로 이끈다. 곧 분노와 진노를 지니는 사람은 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1절 : 유목민들에게 일반화되어 있던 사적인 복수 행위는 하느님 백성에게 맞지 않는 관습이었다. 하느님 백성은 자기에게 가해진 불의한 행위에 대한 복수를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2절 : 예수께서는 율법의 정신을 상기시키면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주라고 가르친다. 하느님께로부터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해줄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이점을 강조하셨다.

3-5절 : 분노를 품는 사람을 병자에 비유하고, 이 자가 어떻게 주님께 치유를 청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이 치유는 바로 죄의 용서이다. 곧 그의 죄를 용서해주신다. 두 번째, 이웃에게 자비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죄의 용서를청할 수 있는가? 주님의 자비로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세 번째,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용서해주겠는가? ‘누가’는 주님을 암시한다. 이웃에게 분노를 품고 있는 한 주님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6-7절 : ‘생각하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주님 앞에서 지녀야할 중요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강조한다. 생각의 대상은 종말과 죽음 그리고 계명과 계약이다. 이 생각과 함께 미움을 버리고 계명에 충실하며 남의 잘못을 눈감아줄 것이 요구된다.



제 2 독서 : 로마 14,7-9    <주 석>

7절 :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 바오로는 교회 생활 영역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하여 성도들이 취해야 할 생활 원리들을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구분해서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성도들이 취해야 할 소극적인 생활 원리 중 첫 번째는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란 말은 하느님의 법과 반대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현세의 연락(宴樂)과 육체적인 즐거움을 취하는 '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바오로의 신앙 고백이며(갈라 2:20) 삶의 원리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불신자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이다. 성도의 소극적인 생활 원리 중 두 번째는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는 것이다. 성도의 삶은 죽음도 자신에 의하여 주관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예속된 것임을 나타낸다(Olshausen). 바오로는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주를 위해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바오로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삶의 원리들을 권면하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주를 위한 일관된 일사 각오(一死覺悟)의 삶을 살고 있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므로 얻는 확신에 근거하여 다른 성도들을 향한 권면에서도 성도의 삶의 원리를 근본적인 모든 문제의 해결점으로 선언한 것이다.

8절 :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바오로는 본절에서 좀 더 본질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내적인 삶의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도의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Tholuck).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생(生)과 사(死)에 있어서 궁극적인 표준이 되신다(Hendriksen). 따라서 성도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거나 자신을 스스로 주장할 수 없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1코린 6:19, 20)는 의미이다.

9절 :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 이 말씀은 앞 절에 대한 확증적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죽은 자의 주님이 되시고 다시 살으심은 산 자의 주님이 되기 위해서임을 말하는 것이다(Bruce).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主)가 되시기 위하여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심은(1코린 15:3, 4; 2코린 5:15), 우주적인 만물에 대한 통치권과(Kasemann) 신자에게 있어서 모든 인생의 주권자가 되심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Calvin). 그것은 새로운 삶이 주를 위해서 예비되었으며 그의 성도에 대한 주권과 능력이 영원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복 음 : 마태 18,21-35    <주 석>

21절 : 이제는 질문자 자신에 대해서 가해진 죄가 언급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에게서 용서가 보복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한계에 대해서 묻게 된다.

22절 : 베드로도 역시 여전히 수를 센다. 그러나 예수는 일곱 번씩 일흔 번으로 아니면 일흔 일곱 번으로 든지 모든 한계를 폐지한다.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까지도 용서하도록 권고한다. 따라서 인간은 결코 사랑의 한계에 도달할 수 없다.

23-24절 : 이 비유는 의도적으로 과장되었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행동이 모든 인간적인 행동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한 데나리온이 한 노동자의 정상적인 하루 수입이었으며, 헤로데의 일년 전체 소득이 단지 구백 달란트였으며, 갈릴래아와 베레아에서 걷히는 세액이 모두 이백 달란트에 불과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이 빗은 어느 한 지방 전체의 지배자에게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액수의 빚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25절 : 빚진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온 가족까지도 판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법이 아니다. 그러나 이방 왕들은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26-27절 : 빚진 사람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그의 절박함을 나타내 준다. 주인의 자비는 전례없던 것이다. 그는 연기해 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면제시켜준다.

28절 : 동료 종의 빚은 그에게 방금 선사된 것의 오십만 분의 일이다. 그러므로 ‘네가 내게 빚진 것이 있으면 갚으라’는 도덕적으로 정확하고 법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이 문구는 공허하고 기이하게 들린다.

30절 : 앞서 일어난 것과 비교하면 이 반응은 파렴치하며 아주 불쾌하다.

34절 : 마지막 문구는 희망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가 빚진 그 거대한 액수의 돈을 어떻게 갚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의 표현 용법은 그 종 자신이 그의 동료 종에 대해서 한 표현 용법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이 비유는 모든 인간적인 법과는 모순되는 상상할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의 행동이 아주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살지 않고 그의 이웃과 해후할 때에 방금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도외시할 경우에 하느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바오로 역시 이와 같이 말한다. 공동체는 상상할 수 없이 크신 하느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으며 또한 이것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마태오 자신은 용서하면서 살지 않을 경우에는 그들에게도 해당되는 마지막 심판의 위협만을 강조한다. 용서받은 사람이 실제 생활에서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을 때, 그 때 이 용서는 쓸 데가 없게 되며 사장된다.



연중 24주일 강론



찬미예수님!



 지난주에 이웃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조용히 타일러 주고 더불어 자신을 돌아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함께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이 타일러 주는 행동은 충고와 단죄하는 그런 관점이 아니라 그를 보듬어 주고 감싸주는 차원, 그리고 힘을 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잘못을 타일러 주는 행동이 도리어 서로의 관계에 나쁜 영향만을 미치기에 우리가 행하는 충고는 애정과 관심 차원에서 그리고 그를 용서해 주고 받아주는 차원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자못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을 확인이나 받으려는 것처럼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그러면 저에게 제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넉넉잡고 일곱번이면 되겠습니까?”하고 묻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지그시 바라보시면서 “베드로야! 일곱번뿐 아니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말씀하십니다. 또는 일흔 일곱 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나, 일흔 일곱 번이나 한가지로 무한히 용서해 주라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처럼 우리도 하느님으로부터 우리 죄를 무한히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의 잘못을 몇 번 용서해 주었다고 그것이 자랑거리 되고, 그것이 본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웃의 조그만 잘못도 용서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오늘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서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못하는 몹쓸 종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만 달란트는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해 보면 1달란트가 6,000드라크마입니다. 그리고 일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일 데나리온과 같은 값입니다. 1달란트는 6,000일의 노동 품삯이다. 오늘날 하루 품삯이 5만원이라고 해도 3000만원*10,000달란트니 3000억원이다. 여기에 비해 1 데나리온은 오늘날의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 100데나리온이라고 해야 오늘날의 50,000원 * 100이며 5백만원 정도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주인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한한 자비와 용서의 삶을 보여주신 것처럼 너희도 무한한 용서의 삶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용서의 삶이 오늘 복음에서 비유처럼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어라, 원수를 사랑하라,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이러한 말씀은 딱 들으면 ‘아! 참 좋은 말씀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내가 그렇게 살려고 하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완전한 존재일 수 없기에 끝없는 용서란 불가능 할 것입니다. 처음 한 두 번은 ‘뭐 그럴수도 있지!’하면서 너그럽게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계속 반복되면 쌓였던 것이 폭발을 합니다. 더 이상의 용서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용서해 주었던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용서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용서하기에 앞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먼저 용서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용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로만 용서를 빌고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용서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사실 용서의 삶이란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탄처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용서만 바란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싶어도 용서해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태도가 진정 용서를 바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탄이 이래서 용서를 받지 못한 것이지 하느님이 관용을 베풀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자세를 보면 용서를 베풀 때, 우리는 의인이 되고 상대는 죄인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그로인해 자신의 주가를 올립니다. 이것은 진정한 용서의 삶이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란 상대방의 인격을 올려주는 행위여햐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맺혀있는 불필요한 요소들을(악의, 시기, 질투 등) 용서란 매개체를 통해 씻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응어리뿐 아니라 남의 응어리도 씻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기도’를 많이 바칩니다. 이 기도문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청원이 들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용서에 대한 청원이 나옴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일을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과 주의 기도의 기도문처럼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먼저 용서해 줌으로서 하느님의 용서를 받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아직까지 내안에 용서 받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 채 쌓인 것이 있다면 이 미사 중에 용서를 청합시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의 죄를 용서 하시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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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작성일 2008년 8월 9일 (토) 21:08
분 류 연중19-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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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24주일



제 1 독서 : 집회 27, 30-28, 7 

제 2 독서 : 로마 14, 7-9

복     음 : 마태 18, 21-35



제 1 독서 : 아주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하느님이 그들의 원수들을 쳐부수고 복수해 주시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화되었다. 기원전 2세기에 벤 시라는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가 어떤 것인지를, 인간에 대하여 가지고 계시는 하느님의 이해심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미움을 버리고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권고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제 2 독서 : 사도 바오로의 죽음에 대한 묵상이다. 사도 바오로는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삶을 거부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을 거부하는 것은 영적인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적인 죽음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바로 이런 새로운 삶에서부터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형제의 짐을 져주는 애덕이 가능한 것이다.



복      음 : 숫자의 상징성으로 볼 때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는 것은 490번을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라 끝까지 완전하게 용서하라는 뜻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용서함으로써 용서받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주시지만 아무것도 받는 것이 없다. 하느님 자비의 무상성은 이를 말한다. 반면에 우리 인간은 순수하게 주는 것이 없다 아무도 받는 것 없이 줄 수 없다. 항상 줌으로써 받는다. 용서해 줌으로써 이미 용서받고 있는 것이다.

용서는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는 그 용서를 거저 받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사고파는 대상이 아니라 거저 베푸는 것이다. 거저 베푸는 용서만이 폭력의 악순환을 제거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성서 말씀은 조건없는 용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베드로께서는 예수께 몇 번이나 형제들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묻고 일곱 번 용서해 주면 되느냐면서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시면서 용서란 숫자로 따질 문제가 아니라 한없이 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예로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임금에게서 빚을 탕감받고도 가지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이야기를 비유로 들면서 용서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달란트’는 화폐가 아니라 금액 계산 단위인데, 한 달란트는 6,000드락메입니다(1드락메 = 1 데나리온). 헤로데 대왕의 연간 수입이 900달란트였다고 하니 일만 달란트의 빚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빚을 뜻합니다. 결코 비교되지 않는 일만 달란트와 일백 데나리온과의 관계는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용서가 천문학적 숫자로도 이야기될 수 없는 엄청난 것이라면 인간의 용서란 지극히 미소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용서도 베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요, 이 용서도 못하는 자는 하느님의 엄청난 용서를 받을 자격마저 없어서 내려진 용서의 은총도 다시 거둬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한다면 인간들 사이의 그 무엇도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는데 속 좁은 인간들이기에 서로 으르렁대며 살거나 앙심을 품은 채 인사도, 말도 않고 서로 오랜 원수인 양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큰 선심을,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합니다.

일본의 나까무라 고오지가 그의 「청빈의 사상」에서 극구 찬양을 아끼지 않았던 양관화상이란 스님이 오홉암이란 산중의 작은 암자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오홉암은 한 사람이 겨우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식량 다섯 홉씩을 매일 본사에서 공급해 준 데서 나온 이름입니다. 그런데 양관이 오홉암에서 지낼 때는 이 다섯 홉의 식량마저 여의치 않아 손수 산아래 마을로 내려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탁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근근히 끼니를 이어가며 지내던 이 가난한 암자에 어느 날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날도 양관 스님은 마땅히 덮고 잘 이불이 벗어 낮 동안 깔고 앉아 좌선을 하던 방석을 이불 대신 살짝 몸에 덮고 잠이 들었습니다. 도둑은 방안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가져갈 물건이 눈에 띄지 않자 스님이 덮고 자는 방석을 훔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도둑의 조심스런 몸놀림에 설핏 잠이 깬 스님은 누군가 방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곧 눈치챘지만 가만히 자는 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도둑이 스님의 방석을 집어들려고 손을 댄 순간 잠결에 살짝 몸을 뒤척이는 척하면서 방석을 가져가기 쉽게 모로 돌아누웠습니다. 도둑은 냉큼 방석을 집어들고 잽싸게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시간이 흘러 양관 스님은 방석을 도둑 맞은 일조차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어떤 사나이가 이불 한 채를 어깨에 둘러메고 오홉암을 찾아와 양관 스님 앞에 내려놓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습니다. 깜짝 놀란 스님이 사나이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누구시기에 제 앞에 무릎을 꿇으시는지요.” 그러자 사나이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몇 해 전에 스님께서 이불 대신 덮고 자는 방석을 훔쳐간 사람입니다. 그때 저는 스님께서 일부러 자는 체하시면서 방석을 쉽게 가져가도록 하신 일에 두고두고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사나이는 양관 스님의 그 말없는 너그러움과 청빈한 생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몇 해 동안 자책하다가 아내와 의논하여 이불 한 채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용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벌써 그분의 심판을 받아 이 세상에서 사라져 엄청난 벌을 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매순간순간마다 우리의 용서를 청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을 보시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화해의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시편 102장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야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안의 온갖 것도, 그 이름 찬양하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말라. 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니 죽음에서 네 생명 구하여 내시고, 은총과 자비로 관을 씌워주시는 분, 꾸짖음이 오래가지 않으시고, 앙심을 끝끝내 아니 품으시도다.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대로 갚지도 않으시니 저 하늘이 땅에서 높고 높은 것처럼, 우리가 지은 죄를 멀리하여 주시도다”(1-4. 9-12).

아무튼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과 가족, 이웃을 용서하고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 자비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란 결코 침묵이나 회피가 아니라 받아들임이요, 대화요, 사랑이요, 포용인 것입니다. 용서란 모든 냉랭한 것을 녹아들게 하는 따뜻함이요, 아량이요, 참사랑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용서는 내가 내 힘으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나를 용서하셨으므로 나는 다만 하느님의 능력과 은총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전달해 주는 용서의 사신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죽을 때까지 용서해도 우리의 용서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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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8월 9일 (토)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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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연중 제 23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23 주일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



제 1독서: 에제 33,7-9

제 2독서: 로마 13,8-10

 복음 : 마태 18,15-20



이 주일과 다음주일의 전례는 소위 ‘교회론적’담화(마태 18,1-35)의 일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흩어져 있던 많은 이야기들과 예수의 비유 말씀들을(잃은 양의 비유와 무자비한 종의 비유) 여기에 한데 모아 제시함으로써 자기 독자들에게 신자 공동체의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내적 생활의 ‘이상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다.

 이 담화의 내용에서 마태오 복음사가가 관련되어 있는 공동체내의 크리스찬 생활의 확실한 상황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 공동체는 순진무구한 자들이나 성인들의 공동체도 아니요 신앙상으로 ‘원숙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출세 제일주의가 판을 치고 일부 야심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배욕을 키워나가고 있었으며 ‘보잘것없는 이들’ 즉 실망과 좌절의 시련과 위기에 부딪혀 흔들리는 나약한 신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다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공동체 전체와 특히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중대한 공동생활의 문제들을 야기시키는 범죄자들조차 현저하게 많았다. 교회내의 형제애는 개인간의 공격감정과 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원한의 감정 등으로 뒤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되겠는가?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상기시키면서 교리교사요 사목자의 자격으로 자신의 공동체에 특히 다음과 같은 두가지 관점에 있어서 실천적인 충고를 한다 : 즉 이해하는 마음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결국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유일한 ‘규범’이어야 할 사랑의 두 가지 관점에 불과하다.

 어째서 이 모든 것이 오늘날에도 세계도처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물론 더 나아가 그것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전체 교회에도 필요한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오늘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복음은 우리가 조금 전 언급한 바와 같이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신앙생활에 있어서 나약한 사람들인 ‘보잘것없는 이들’을 존중하고(18,5-11)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떠나버린 사람들에게 친절하라는(“잃어버린 양”: 12-14절) 교훈적 가르침에 뒤이어 나오고 있다.

  오늘 복음은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죄에 떨어지게 하거나 또는‘성인들’의 공동체를 지향해야 될 교회에 불안과 불신을 조장할 만큼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를 다루고 있다.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죄짓는 이’를 그의 운명에 그대로 맡겨버릴 것인지 아니면 그의 일에 개입해야 할 것인가?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다:“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그러나 듣지 안거든 한사람이나 두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라’는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혀라.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5-17절).

  몇몇 권위있는 성서사본과 불가타 성서에도 이 첫 대목(“누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은 공동체내의 다른 형제에 대한 사랑의 결핍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실제로 이에 대한 대답은 조금 뒤에(21-22절) 나오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서는 그 본질상 인정할 수 없고 또 공동체 전체의 영적 성성과 내적 일치를 위협하는 어떤 중죄에 관한 문제로 다루고 있다. 그래서 형제를 다시 ‘얻기 위해’ 일련의 판단 절차에 의뢰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다 :‘kerdáinein'(얻다)라는 동사가 랍비들의 세계에서는 공동체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학자들에 의해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실천적 관행은 꿈란 공동체에서도 이행되었던 바로 그런 것이었다(F. Gnilka, Die Kirchedes Matthäus und die Gemeinde von Qumran, in Biblische Zeitschrift, 7 1963, pp.54-56).

  맨처음 시도해야 할 방법은 보다 세심하고 우애적이어야 한다:“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15절). 형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굴욕감을 주지 말고 그로 하여금 애정의 공감대를 되찾고 다른 형제들과의 일체감이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 방법이 좀 서툴거나 신중하지 못하게 되면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경직시켜 자존심이나 분노를 폭발시킬 우려가 있다.

  그래서 만일 일이 성사가 안되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라”(16절)고 한다. 이것은 모세법 자체가 재판심리를 위해 정해놓은 소송 절차이다(신명 19,15 참조). 하지만 여기에서의 권고 핵심은 그 과정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혀 화해를 촉구하는 노력을 확대하라는 데 있다 : 목적은 여전히 ‘형제를 얻는 것’(16절)이다.

  이 두 번째 시도도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에 그 문제는 공동체 ‘전체’에 위임되어야 한다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17절).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ekklesía라는 희랍어 개념은 분명히 구성원 전체와 특히 집단을 권위있게 대표하여 말할 책임을 지고 있는 윗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지방 공동체를 뜻한다. 이것이 형제를 다시 찾아 얻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고발의 행위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잘못을 깨닫고 다시금 공동체의 건전한 구성원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마지막 비탄에 젖은 호소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오직 이 마지막 시도조차 실패한 후에야 전형적 유다식 표현 형태를 빌어 그 죄인을 파문에 처하게 된다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 사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밖의 사람들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본래 고유한 의미에서의 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적 상황 즉, 어떤 규범보다는 공동체 생활의 본질 자체를 해친 자신의 죄를 깨달으려 하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미 범한 ‘교회’로부터의 실제적인 이탈을 인식케 하는 데 있다.



ꡒ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다ꡓ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은 공동체가 가지는 권한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임하신 생명적 구조와 은총의 부에서의 이탈이냐 아니면 일치냐를 권위있게 판단해줄 수 있는 그 ꡐ권한ꡑ을 정당화하고자 한다:“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ꡓ(18절).

  우리는 이 말씀들이 이미 앞에서 베드로에게 주어지는 것을 들었다(16,19):이것은 그리스도가 지금 와서 전에 베드로에게 주었던 것을 빼앗아 모든 사람들에게 준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교회가 진정 자기규제의 권한은 분명 예수께서 설정하신 방법에 따라 이루어지며―예를 들어 베드로와 열두 사도의 권한처럼―복음의 다른 대목에서도 이해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은 구성원 각자가 모두의 선익에 공동책임을 지는 완전한 공동사회의 형태 그것이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자기 독자들에게 복수형으로 말하기에 앞서(“너희가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ꡓ) 계속해서 ꡐ너ꡑ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ꡒ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를…ꡓ)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만일 교회가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라고 한다면 형제들에 관한 일에 있어서도 ꡐ나ꡑ라는 일인칭의 위치에 서게 됨으로써 나와는 별개의 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잘못을 내 잘못으로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잘못들이 실제로 공동체 자체의 모습을 더럽히고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대해 느낄 수 있는 매력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권위는 오직 이러한 공동 책임의 의미를 촉진시키고 조장할 의무를 지닌다.

  교회 안에서 세례받은 모든 이들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과 더불어 하느님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을 통해 원하시거나 또는 원하지 않으시는 바를 잘 알아들으려고 노력함으로써 ꡐ맺고ꡑꡐ풀어나가는ꡑ충만한 조화 속에서 그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켜나가기로 노력한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이점에 관해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그렇듯 빨리 끝나버린 교황직에 선출된(1978년 8월 26일) 다음날 전세계에 보내는 첫 번째 라디오 메시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ꡒ현세의 고통스러운 문제들에 대하여 공동책임을 지고 응답해야 할 교회는 세계 도처에서 호소해오고 있고 또 유일하게 구원을 보증해줄 수 있는 ꡐ영혼의 지원ꡑ을 온 세상에 베풀어야 할 사명을 부여받고 있다.ꡓ



ꡒ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ꡓ

 이와 같은 ꡐ공동체ꡑ로서의 교회에 대한 언급은 그 다음에 이어 나오는 두 구절에서 더 명백히 그리고 더 내면화되고 있다. 그 두 구절의 내용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말해온 사실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높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ꡒ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ꡓ(19-20절).

 ꡐ둘이나 셋ꡑ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공동체를 떠들썩한 군중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으신다. 오직 하느님만이 당신 교회를 불러모으신다. 그러므로 그 수효는 그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오히려 중요한 사실은 기도를 통하여 같은 원의 같은 요구를 똑같은 믿음과 사랑의 결합 속에서 바칠 수 있을 만큼ꡐ그리스도의 이름으로ꡑ서로 결합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작은 공동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ꡒ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ꡓ(19절).

  교회의 힘은 수자나 또는 그 조직적 위계적 구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 하에 결합되어 있음을 깨달으면서 바치는 ꡐ기도ꡑ의 능력에 있다. 만일 이것이 말 그대로 참된 사실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의 모든 사목적 실천방안이 완전히 뒤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 표현은 더욱더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다. 왜냐하면 교회가 생겨나는 궁극적 뿌리를 지적해주고 있기 때문이다:ꡒ단 두세 사람이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ꡓ

  하느님은 불러모으시지만,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시고 믿는 이들 가운데 함께 자리하시어 그들을 가르치시고 타이르시며 그들 안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여기서 고찰되고 있는 것은 특별히 장엄한 어떤 전례의 순간이 아니라, 교회가 자기 현존의 매순간순간에 지녀야 할 본질 자체이다. 즉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만이, 오직 이렇게 할 때만이 교회는 이루어질 것이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께 일어난 사건처럼 외적인 실체이기보다는 내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세울 수 있는 모든 체계를 항상 넘어서 있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제1장의 제목이ꡐ교회의 신비ꡑ라고 붙여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ꡒ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보초로 세운다ꡓ



  다른 두 개의 독서 내용은 지금까지 전개해온 내용에 대비시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에제키엘서의 의한 제1독서에서는 야훼께서 그 예언자에게 이스라엘 가문 전체의ꡐ보초ꡑ로서의 책임에 대해 상기시키고 있다. 만약 그가 타일러주지 않아 죄인이 회개하지 않는다면,ꡒ그 죄인은 자기 죄값으로 죽겠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그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죄인에게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주었는 데도 그가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 죄값으로 죽겠지만 그는(예언자) 죽지 아니하리라ꡓ(어제 33,8-9).

  그러므로 에제키엘 예언자는 모든 형제들의 봉사를 위해 있다:그가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전하는 일 뿐이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개개 신자들의 책임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가 앞서 말한ꡐ공동체성ꡑ이라고 하는 사실은 하느님이 베풀어주시고 또한 우리 각자에게 요구하시는ꡐ봉사ꡑ의 척도에 따라 모두가 공동책임을 진다는 의미이다.



ꡒ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ꡓ



  교회론적 가름침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는 제 2독서는 교회 안에 보다는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로마 13,1-7)그리스도 신자들의 생활 규범이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목숨을 다해서도 갚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의무라고 한다!ꡒ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ꡓ(로마 13,8-10).

 교회는 사목자들이건 평신도들이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ꡐ법ꡑ으로서 사랑이라는 법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ꡐ자리ꡑ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ꡒ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ꡓ(마태 18,20)는 그 말씀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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