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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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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7년 11월 13일 (화) 00:20
분 류 연중14-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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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 18주일 ”
 

연중 제18주일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 1독서: 이사 55,1-3

제 2독서: 로마 8,35.37-39

복음: 마태 14,13-21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하리라



 “형제 여러분,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5.37).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깨어지지 않는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 있는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하고 있는 이 열정에 찬 표현은 오늘 전례 전체를 꿰뚫으며 흐르고 있는 근본적인 사상을 잘 종합해주고 있다. 비록 제 1독서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에서도 ‘음식’,‘잔치’ 그리고 많아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지고 있는 ‘빵’과 ‘물고기’에 관한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사실들과 상징적 표징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각별하신 사랑이 표현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선물을 항구히 베풀어주시며 교회라는 당신의 찬란한 ‘왕국’의 잔치에 한2번만이 아니라 수없이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다.

 바로 이런 까닭에 우리도 바울로 사도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확언할 수 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 38-39)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계약은 ‘영원하며’ 어떤 사건도-기쁜일이든 슬픈 일이든-또 어떤 권력도 그것이 아무리 무지하고 악의에 찬것이라 하더라도 인간 스스로가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지만 않는다면 결코 그 계약을 무너뜨릴 수 없다.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리라”



 이사야서에 의한 제 1독서는 분명히 ‘계약’의 개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바야흐로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온전한 마음으로 당신께로 돌아서는 사람들에게 야훼께서 약속하시는 미래의 행복과 번영의 상태를 시적인 표현으로 서술하고 있다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라. 야훼께 돌아오너라. 자비롭게 맞아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리라”(이사 55,7).

 귀양살이중에 겪는 가난과 기아와 고통과는 반대로 원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거저 베풀어지게 되는 풍성한 잔치와 행복이 내다보인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없이 양식을 사도 먹어라. 값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 데 써버리느냐?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이사 55,1-2).

 낯선 이국 땅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는 얼마 안되는 돈마저 뭔가 조금이라도 더 얻어 먹기 위해 다 써버리지만 결국 배도 부르지 못한 채 허기만 지고 말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와 정반대가 될 것이다. 귀양간 이들은 돌아오고 노예들은 해방될 것이며, 배고픈 이들은 배부르게 되고 기쁨과 생기에 찬 ‘잔치’를 즐기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라”



 ‘잔치’라는 개념은 상징적인 의미 외에도 야훼와 그분의 백성 사이의 우정과 친교 그리고 새로운 일치의 현실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야훼의 백성은 장차 다윗 가문에서 나와야 할(2사무 7,1 참조) 메시아에게 신앙으로 달아들 모든 사람들의 상징적 예표이다. 다윗 가문에서 메시아가 나오게 되리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과거에 맺어주셨고 또 지금엄숙하게 재확인해주고 계시는 ‘영원한’ 계약이다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라. 다윗에게 약속한 호의를 지키리라”(3절).

 바로 ‘들음’과 ‘귀기울임’에 강조점이 있기 때문에 계약은 ‘말씀’에 대한 순명과 충실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하느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진짜 ‘잔치’는 그분의 메시지를 듣는 잔치이다.

 그러므로 잠언에서 하느님의 계시와 섭리의 표현인 ‘지혜’가 자기의 손님들을 잔치에 초대하고 있는 훌륭한 부인의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혜가 일곱 기둥을 세워 제 집을 짓고 소를 잡고 술을 따라 손수 잔치를 베푼다. ‘와서 내가 차린 음식을 먹고 내가 빚은 술을 받아 마시지 않겠소’?”(잠언 9,1-2.5).

 만일 우리가 ‘말씀의 식탁’(계시 21 참조)을 먼저 갖지 않는다면 성찬의 식탁은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첫 번째 빵을 많게 한 기적


 ‘말씀’의 능력은 매일매일의 식탁에 준비되는 음식을 증가시키는 일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편집활동에 의한 첫 번째 빵을 많게 한 기적사화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14,13-21). 그는 정확히 말해 마르코 복음사가처럼(마르 6,30-44 ; 8,1-10) 두 번째 빵을 많게 한 기적도 우리에게 서술해준다. 반대로 루가(9,10-17)와 요한(6,1-13)은 두 개의 기적사화 중 하나만을 인정하고 있다.

 여러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에는 분명히 이중적으로 다룬 것 같고(마태 16,9-10 참조) 아마도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른 전승에 의해 제시된 것 같다 : 보다 오래된 것은 팔레스티나의 전승에 근거한 것 같고 좀더 후대의 것은 헬레니즘적 배경에 근거한 것 같다. 물론 논의의 여지가 있는 얘기다. 어쨌든 사실이 그렇다 할지라도 똑같은 이야기를 두 번씩이나 반복했다고 하는 사실은 그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이라든가 초세기 그리스도 신자들이 그 이야기에 부여했던 중요성이 컸었다는 점을 입증해준다.

 하지만 이런 비관적 성격의 문제들은 일단 제쳐두기로 하고 다만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이 기적사화가 지니고 있는 몇가지 근본적인 의미만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사가보다 더 단순화시켜서 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기적이 “한적한 곳”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그때에 예수께서 이말을 들으시고 거기를 떠나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그러나 여러동네에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육로로 따라왔다”(마태 14,13). 이어서 또 말하기를 “저녁 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15절).

 어째서 이러한 면을 강조하고 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교적인 사실을 모두 구약성서의 빛에 비추어 재해석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의 모습에서 자기의 백성을 사막을 통해 인도하며 만나의 기적(탈출기16장 참조)에 못지 않는 기적으로 그 백성을 배부르게 먹이는 새로운 모세의 모습을 보기 때문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이야기 뒤에 즉시 다음 주일에 읽게 될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사화를 서술하고 있는데(14,22-33) 거기서도 예수의 모습을 야훼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홍해를 무사히 건너는 옛 해방자(모세)의 모습에 비교하고 있다.


 “참 보기에 안되었구나”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구체적인 문제에 참여하신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여러 ‘동네’(13절)에서 모여와 그를 열광적으로 따랐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했으며, 또 자기들의 병을 치유받고자 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배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시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주셨다”(14절).

 여기서 “측은한 마음이 들다”라는 표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입장에 서 계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느끼시는 “측은한 마음”의 의미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물질적인 상태는 물론 영신적인 좌절의 상태에까지 확대시킨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목자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주셨다”(마르6,34).

 빵을 많게 하는 기적도 다른 사람들의 궁핍에 참여한다는 이런 의미로 일어나게 된다 : 그 기적은 신앙이나 또는 더 나아가 사람들의 일시적인 열광에 대한 보상이라기보다는 그 사람들이 필요로하는 것을 사랑으로 이해하는 행위의 결과라 하겠다.

 오늘 복음 끝부분에서는 “먹은 사람이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 되었다”(21절)고 밝히고 있다. 그들은 모두 다른 먼 지방에서 모여온 사람들이었으며 이미 허기가  져 있었고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가까운 마을로 보내 “음식을 사 먹도록”(15절) 하자고 예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 번째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사화에서 다음과 같이 당신 심정을 토로하신다 :“이 많은 사람들이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나와 함께 지내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참 보기에 안되었구나.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 보내서야 되겠느냐?”(마태 15,32).

 그러므로 기적은 능력의 행위자로서가 아니라 사랑과 동참의 행위로서 생겨나는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또한 기적은 ‘함께 나누는’ 행위에서 생겨난다. 실제로 그 기적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나눔으로써 일어나게 된다. 나눌 것은 적었지만 형제적 친교와 일치의 태도를 창출해낼 수 있는 사랑의 행위는 충분했다. 이로써 기적은 실현될 수 있었으리라!

 분명, 기적을 이루어준 것은 예수의 권능이었다. 그러나 그 기적은 바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던 ‘얼마 안되는 것’을 함께 나누려고 했던 제자들의 마음 자세에 의해 더 순조롭게 야기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자는 제자들의 제안에 대해 이렇게 응답하셨다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이르셨다. 제자들이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리 가져오너라’하시고는...”(16-18절).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랑으로 베풀어지는 얼마 안되는 음식에다 기적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 인간들의 협력을 필요로 하신다!



 성체성사의 예표로서의 기적



이외에도 고찰해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즉 이 기적은 최후만찬 때에 선언되는 말마디를 제외하고 보면 바로 그 당시에 설정되는 성체성사를 예시하는 여러 가지 개념과 해것을 내포하고 있다 :“군중을 풀 위에 앉게 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19절).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마태 26,26과 지금 이 구절을 비교해 보면 된다 : 예수께서 성체성사를 설정 하시는 그 장면에서도 ‘빵을 드시어’ 축복과 감사를 드리시고 나서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다.’

 그러므로 마태오 복음사가가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서 성체성사의 예표와 예시를 본 것은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단 한 번 물질적으로 그 기적을 행하셨지만 ‘성사적으로는’ 영원히 그 기적을 완성 시켜주고 계시다!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가 물질적인 음식보다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의 양식으로 취해야 하는 이유이다.

 만일 이 세상에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사람이’-비록 깨닫지는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에 대해 굶주리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굶주림이 없다면 어째서 이 세상-특히 젊은이들의 세계-을 뒤흔들어놓고 있느 자유와 정의와 형제애와 보다 큰 공동협력과 행복에 대한 갈망이 있단 말인가? 사실, 우리의 소비문화가 일으켰던 모든 신화가 깨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오직 그분에게서만 결코 실망하지 않을 희망과 안전한 미래가 있음을 본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 복음의 소위 성체성사의 담화에서(빵을 많게 하는 기적 뒤에 즉시 이어 나오고 있는) 예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 하시는 말씀이 분명히 입증해주고 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빵에 대한 굶주림과 그리스도께 대한 굶주림



만일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 바라셨고 또 부추겨주셨던 사랑과 동참의 힘을 깨달을 수 있고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의 빈곤한 지역에서 터져 나오는 배고픔의 탄식을 들을 수 있어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팔레스티나 지방의 사람들에게 하신 것처럼 실질적으로 그들을 “측은히 여길 줄” 안다면, 빵에 대한 굶주림과 그리스도께 대한 굶주림의 두 문제는 서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하겠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우리들의 필요로 하는 것을 빼앗아 가리라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실제로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은 해석으로 끝나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러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 되었다”(20-21절).

 그 남은 조각 ‘열두 광주리’로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던 사람의 너그러운 마음을 보상해 주기에 충분하지 않았겠는가!

 어떤 무명시인은 과거에 자기가 살았으나 지금은 그의 무덤이 된곳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내가 베푼 만큼 받고 있다.” 이 말은 단순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크리스찬적 차원에서도 통용되는 진실이다. 오늘 복음과 또 그리스도교적 성성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들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이 계속되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고찰해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우리가 지금 주석하고 있는 오늘 복음에는 그리스도론적, 성체성사적 차원외에 ‘교회론적’ 차원도 들어 있다. 이미 우리가 언급한 내용에 부분적으로 나왔지만 이제 그것을 좀더 명확히 밝혀 보고자 한다.

 무대의 주인공으로 예수 외에도 사도들이 등장하고 있다. 예수께 저녁이 되었다고 알려드리는 사람들도 그들이고 사람들을 가까운 마을로 보내어 끼니를 때우게 하자고 하는 이들도 그들이다. 또 사람들에게 그 기적의 음식을 나눠주는 이들도 그들이다 :“예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19절). 그러므로 사도들은 예수의 협력자들이며 예수와 사람들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재해석을 통하여 예수께서 당신 교회에 행동 지침을 이와 같이 제시하셨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비록 하늘에 올라가셨지만 사도들과 또 그들의 사도직을 이어받는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 백성들과 계속 함께 계실 것이다.

 사도적 봉사는 그리스도께 달아드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그 당시 베풀어주셨던 그 선물을 베풀어 주는 것이다. 그분의 구원의 ‘말씀’과 그분이 몸과 피로 이루어주시는 놀라운 기적의 ‘잔치’는 우리에게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몇 개의 빵과 얼마 안되는 물고기를 언제든 함께 나누려고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기를 요구한다.

 오직 이렇게 할 때만이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복음을 거행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우리가 처음에 강조했듯이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왕국’이 될 것이다.

 오로지 교회 안에서는 필요하다면 오늘날에도 이 세상의 모든 배고픈 사람들-육체적으로 또 특히 정신적으로-을 위해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기쁨과 형제적 사랑의 메시아적 ‘잔치’가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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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작성일 2008년 8월 2일 (토) 09:55
분 류 연중14-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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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연중 제 18주일 ”
 

연중 제18주일

제 1 독서 : 이사 55, 1-3

제 2 독서 : 로마 8, 35.37-39

복     음 : 마태 14, 13-21



제 1 독서 : 바빌론 유배 중(기원전 587-538년)에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의 빵을 얻기 위한 고된 삶을 체험했다. 제2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새롭게 부흥될 미래를 말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양식이 거저 주어진 때를 예고한다. 거저 주어지는 이 양식은 거저 베풀어지는 구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빵이 아니라 하느님의 호의로 맺게 된 계약이다(3절).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2절) 이 말씀은 루가복음 15장의 탕자를 연상시켜 준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일군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루가 15, 17)라는 자각이 탕자의 발길을 아버지의 집으로 돌려놓았듯이, 매일의 빵을 얻기 위한 고된 삶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상의 구원을 알게 해주었다.



제 2 독서 :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주신 데에서 우리는 거저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기쁨의 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한 사람에게 있어서 삶은 기쁨에 찬 용약이 된다. 비록 일상의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는다.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살게 하는 참된 양식이다.



복      음 : 두 가지 이야기(병자의 치유와 빵의 기적)에서 공통점은 예수의 측은지심이 다. 예수께서는 “군중을 보시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주셨다”(14절).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자고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16절).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서도 예수께서는 군중이 불쌍하다고 말씀하셨다(마태 15, 32; 마르 8, 2).

예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서나 당신의 말씀에 무게를 싣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다. 예수께서 기적은 이웃이 당하는 불행 때문에 상처받은 마음의 즉각적인 반응이었으며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표지였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복음 말씀은 빵의 기적을 통해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충족시켜 주시는 분이 바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빵으로 표상되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 그 양식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주고 계시고 그 양식으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분 안에서 편히 쉬게 하시고 위안을 받도록 해주십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바다같이 넓고, 하늘같이 높은 거룩한 마음 자체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의 말씀에 넋을 잃은 채 귀기울이고 있었지만 허기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기신 측은지심의 예수께서는 아버지 성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은 수많은 병자들의 병을 낫게 하셨으며 그들의 목말라하는 갈증을 사랑의 샘으로 해소해 주신 것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도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먹고 마시라고 하시면서 하느님이 진정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로니아 유배생활 중에 목말라한 것은 일시적으로 배부르게 하는 빵이 아니라 생활이신 하느님 곁에 사는 삶,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나날의 매순간순간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어떤 외로움이나 쓸쓸함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께서 제2독서 로마서에서 어떤 것도, 즉 박해와 환난과 핍박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고 신앙 고백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우리와 같이 알아줄 사람,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고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불신을 살 때, 그리고 모든 이들이 우리에게서 떠나갔다고 느낄 때,  그 때 바로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실의와 좌절과 절망의 바다에서 우리가 표류할 때 희망의 지표로 우리를 비추어주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조용한 가운데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서로 가진 바를 나누려는 그 사랑의 마음을 보시고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은 장정만 오천 명이 넘는 군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미소한 것이었지만 이 미소함을 바탕으로 엄청난 능력의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몹시 추운 날 밤, 뉴욕 전화 회사의 회장 버치 포래커는 다른 회사의 사장들과 영화를 관람하고 극장을 나서고 있었습니다. 극장 문을 열자 찬바람이 훅 밀려들어 왔습니다. 포래커는 일행들과 추위에 떨며 운전 기사가 자동차를 가져오기를 기다리고 서있었습니다. 그때 포래커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 ‘수리 중’이라는 글씨가 쓰여진 삼각대가 놓여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뉴욕 전화 회사의 인부들이 맨홀에 들어가 전화선을 수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포래커는 일행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사 중인 지점으로 걸어갔습니다. 구멍 밑에서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포래커는 땅바닥에 주저앉는가 싶더니 사다리를 타고 기어 내려갔습니다. 포래커의 생각대로 지하에서는 두서너 명의 작업조가 전화선을 수리하고 있었습니다. 인기척에 놀란 인부 한 명이 손전등을 비추었습니다. “누구슈?” “어~! 날세. 버치 포래커!” 눈이 부신 포래커가 손등으로 눈을 가리며 대답했습니다. 포래커가 누구인지 안 인부들이 몹시 당황하자 포래커가 얼른 말했습니다. “이 추운 날, 고생이 많구만. 내 지나가다가 모두 무사한가 보려고 잠시 들른 것일세! 내가 방해를 한지 모르겠네. 그럼 나 먼저 올라가지.” 포래커는 수고하라는 말을 끝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러자 인부들이 일제히 포래커의 발 밑을 손전등으로 비춰 길을 밝혀 주었습니다. 포래커가 엉금엉금 기어서 밖으로 나오자 일행들이 무슨 일이냐는 듯 잔뜩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서있었습니다. 포래커는 손바닥에 묻은 흙을 털며 그들을 향해 웃어보였습니다. “아, 저희 직원들인데 인사나 하고 가려구요.” 포래커의 이런 행동은 5분도 안 걸리는 것이었지만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게 만들었습니다.

포래커의 자기 직원들에 대한 작은 관심은 곧 그의 직원들에 대한 큰사랑이 되었고 직원들로부터 큰사랑을 불러일으킨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나눔을 통해서 더 많아지고 풍성해진다는 진리가 바로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이 나눔의 잔치를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풍요 속의 빈곤,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드러내는 오늘날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모든 이가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서로 아낌없이, 거짓없이, 가식없이 나눌 때 거기에 사랑의 기적이 있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생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체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급, 신분, 빈부, 교육, 인종 차이를 넘어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받기를 바라지 않고 스스로 기꺼이 봉사하는 자로서 꾸밈없고 가식없는 진정한 사랑과 겸손한 자세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그 모습 안에서 사랑의 기적은 나날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기적이 매일의 생활 안에서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0
작성자 강대원 즈카르야 신부
작성일 2008년 8월 2일 (토)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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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연중 제 18주일 ”
 

1. 강대원 즈카르야

1.1. 연중 18주일(가해)


 제 1독서 : 이사야 55:1-3

 제 2독서 : 로마서 8:35, 37-39

  복음 : 마태오 14:13-21



제1독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데 써버리느냐?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 보아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라. 다윗에게 약속한 호의를 지키리라.”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말하고 있다. 현세 생활 안에서 우리가 찾고 가지려 애쓰는 모든 것들은 인간을 일시적으로 만족시켜 줄런지는 모르지만 영원한 행복과 변하지 않는 만족감을 주지는 않는다. 바로 그런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과 영원한 행복은 하느님께서 주신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 후에는 하느님과 성조들이 맺었던 계약을 맺는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생기를 얻게 되는 것이고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꼭 지키시는 하느님을 믿고 그 계약을 충실히 따르게 된다면 인간은 이 세상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을 하느님에게서 받게 되는 것이다.



제2독서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라사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인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시련과 고통들로부터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며 하느님 안에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복음

 “그때에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들으시고 거기를 떠나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가셨다. 그러나 여러 동네에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육로로 따라왔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시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이르셨다. 제자들이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하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을 풀 위에 앉게 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 되었다.”



 하느님을 간절히 찾고 있으며 진리에 굶주리고 있는 이들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충족시켜 주시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보이고 보잘것없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오천 명을 먹이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을 훨씬 뛰어 넘으실 뿐 아니라 감히 생각지도 못할 일들을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고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그들을 모두 현세적 배고픔으로부터 해방 시켜주심은 물론이고 그들의 영적인 허기짐까지 채워주신다.



강론

 우리는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는 슈퍼맨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엇이나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빼면 아무것도 아니시다. 즉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시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은 바로 그런 분이시다. 그 사랑의 증거는 우리가 미사 때 받아 모시는 성체를 통해 알 수 있다. 우리의 눈으로 보았을 때 성체는 작은 밀떡으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이 작은 빵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다. 바로 그 사랑의 성체를 통해 하느님과 떨어져 살고 있던 우리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주시고자 당신의 몸을 주신다. 이런 사랑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복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오늘 선포된 복음 말씀을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측은히 여겨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시고, 병든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면 풍성히 채워 주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마음은 ‘목자가 양들을, 어머니가 자녀들을 바라다보는’ 그런 애정과 동정이 가득 찬 마음이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참 의미가 드러난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모여든 군중의 믿음이나 일시적인 열광 때문이나, 더욱이 당신을 드러내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여든 군중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딱한 처지 때문에 기적을 베푸신다.

 이 기적은 인간의 눈으로 보아도 정말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들, 아무 짝에도 소용없을 것 같은, 코흘리개 어린아이가 가진 것들로 하신다. 이 세상을 무에서 창조하신 분은 그런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기적을 베푸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의 의미가 ‘함께 나누는’행위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어린아이가 가져온 빵과 물고기로 기적을 베푸신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 혼자서 기적을 하신 것이 아니고, 당신의 기적에 인간, 즉 인간이 가진 것과 그들의 노력을 동참시키는 것이다. ‘빵의 기적’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을 나눔으로써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무엇인가를 주시려 하신다. 때로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주시기도 하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있을 때에도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시기 위해 늘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해 오늘도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신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그 사랑을 잘 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을 얼마나 소중히 간직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없는데 그 사랑을 알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명을 받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자식이 부모의 마음과 모습을 닮기 위해 애쓰듯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모습은 바로 성체에 있다. 성체는 예수님의 생명이다. 그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 그 나누어 주신 사랑으로 우리가 사랑의 모습을 살기 원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우리의 생명을 내 놓아야 할 것이다. 바로 내 옆에 있는 형제를 위해 사랑을 살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성체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살기 원하시기에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성체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계신 것이다.

 사랑의 삶은 그 시작이 어려운 것이다. 예수님께서 수난 받으시기 전날 저녁 게쎄마니 동산에서 고난의 잔을 거두어 주시기를 아버지께 청하셨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고 그 뜻대로 이루셨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생명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보도록 하자. 비록 그 첫 걸음을 내 딛기가 어려울 뿐 시작하는 그 순간 우리의 삶이 되는 것이 사랑의 삶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시듯 우리의 시간과 가진 것과 모든 것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려 노력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노력하자.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우리 형제의 모습 안에 계신 예수님의 사랑하도록 하자. 우리가 가진 시간을 형제들에게 내어주며 사랑하려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며 사랑하려 하자. 그것이 바로 성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다.

 
  19
작성자 말씀연구
작성일 2008년 8월 2일 (토)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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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연중 제 18주일 ”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님

1. 말씀읽기: 마태14,13-21(마르 6,30-44 ; 루카 9,10-17 ; 요한 6,1-14)

2.말씀연구

예수님께서는 잠시도 쉬실 틈이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향합니다. 특히 병자들은 예수님께 치유를 받으려고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러하시듯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해서 외면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군중들과 예수님께서 만나신 곳은 외딴 곳입니다. 말씀을 듣고, 치유를 얻은 군중들에게 이제 배고픔이 밀려옵니다. 제자들은 그 사실을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13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좀 쉬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의 행선지는 알지 못하였지만 배가 동북을 향하였기 때문에 벳사이다로 가는 것이라고 짐작하고 약 8키로의 거리를 달려서 예수님을 앞질러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들은 길이 멀든, 괴롭든, 먹을 것이 있든 없든, 오직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길 잃은 양을 발견한 착한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돌보십니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제자들에게는 한 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외딴 곳에 있는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이들의 배고픔을 달랠 수가 없으니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참으로 손쉬운 해결책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원하실까요?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쉬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유혹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 유혹을 당할 때,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하죠.”,“없던 걸로 하죠.”라고 해서는 안 되겠지요.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일을 열심히 하고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이라도 한잔, 밥이라도 한 그릇 먹여서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손쉬운 방법은 그냥 보내는 것입니다. 알아서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나는 그것을 할 수 없으니 내가 사서 그들과 함께 먹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먼저 움직일 때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군중들을 돌려보내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무슨 재주로 그 많은 이들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출발점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당신의 양떼로 보고 계시고, 제자들은 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일과 기쁨의 거리는 너무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갈 것입니다.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나의 작은 노력으로 형제자매들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기쁨이고, 기쁘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일과 기쁨은 다릅니다. 행위도 다르고 결과도 다릅니다. 봉사를 하면서 일로 하는 사람은 힘들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대가를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기쁨이 될 때, 나는 기쁘게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독거노인을 찾아서 방문하고, 돌보아 드리고, 신앙을 이야기 해 주는 것. 이것을 일로 생각하며 하기 싫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도 기쁨이 되고, 하느님께서도 나의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욱 열심히 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신앙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끊임없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모습도 그렇게 변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은 예수님께서 계시니 모두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할 때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고,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옆에는 든든한 후원자이신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제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하고 자신들의 상황을 말씀드립니다. 어쩌면 이 고백 안에는 “주님! 지금 저희 코가 석자인데 누구를 돕는단 말씀입니까?”라는 불평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의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그렇게 풍족하게 먹으면서 전도여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부족한 능력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할 수 있을 만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주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이제 주님께 맡겨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 앞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배고픈 군중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군중들이 자신들의 빵과 물고기를 내 놓아서 모두 배불리 먹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많게 하셨기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이 기적을 내가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처럼 많게는 하지 못하지만 내 것을 나눌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나눌 때 조그마한 기적들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여 밥과 반찬을 제대로 준비할 수 없는 가정에서 “그것만이라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면서 함께 식사를 하는 집과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차서 식사를 하는 집”감사하는 가정에는 분명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의 식탁이 풍요로워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에 웃음이 흘러나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웃음이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기적을 일으킵시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것을 가지고 군중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기적을 이루십니다.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먹이실 수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 너무도 관대하셔서 백성들을 풍족하게 먹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은 것을 모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꺼내도 꺼내도 부족하지 않는 12광주리, 그리고 남을 것을 모아도 넘치지 않는 열두 광주리. 제자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지,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먹는 식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그것을 남기거나 소홀히 취급한다면, 그래서 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내 것을 내어 주면서 오는 기쁨들을 묵상해 봅시다. 분명 기쁘게 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은 기쁨들이 있습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청하는 이를 물리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예수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으며, 혹시 예수님이 어려워서 내가 예수님께 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② 신앙인의 기본자세는 감사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언제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나는 얼마나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감사드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18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7월 17일 (목) 16:04
분 류 연중14-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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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연중 제 18주일 ”
 

연중 제18주일

        1. 김정진 신부(가)/ 2                 2. 김몽은 신부(가)/ 3

        3. 함세웅 신부(가)/ 5                 4. 최기산 신부(가)/ 6

        5. 강길웅 신부(가)/ 8                 6. 안규태 신부(가)/10

        7. 정덕진 신부(가)/11                 8. 최인호 작가(가)/12

        9. 교구 주보(가)/13                   10. 배고픈 이를 먹이시는(가)/15

        11.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가)/17




1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빵을 불리신 기적

                                                           김정진 신부



  오늘은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5천 명이 훨씬 넘는 많은 백성들을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신 아름답고 흐뭇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몇 개의 빵으로 이를 불리시어 피곤하고 허기진 수많은 사람들을 곤경에서 완전히 구출하여 주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같은 두드러진 기적을 행하시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기적을 행하실 적마다 예수님은 우선 둘레의 사람들의 신앙을 전제조건으로 하셨습미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실 때에도 백부장의 신앙을 보셨고(루가 7,10) 12년동안 하혈하던 부인의 경우에도 <안심하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낫게 하였소>라고 말씀하셨고(마태 9,20-22), 맹인 두 사람을 보게 하실 적에도 <예, 믿습니다. 선생님>하는 대답을 들으신 후에 <당신들의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마태 9,27-31)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기적의 경우, 백성들의 믿음과 열성이 얼마나 지극하였던가를 살펴 보기로 합시다. 예수님이 전교하고 막 돌아온 제자들을 위로하고 휴식시키기 위하여 배를 같이 타시고 벳사이다라는 한적한 곳으로 향하여, 가시어 배에서 내리시자 이미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 20리나 되는 길을 뛰다시피하여 예수님의 일행보다 먼저 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길이 멀건, 힘들 건 더구나 식사에 관해서도 조금도 관계치 않고 오직 예수님을 만나보려는 마음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두터운 믿음과 참된 신뢰를 가졌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렇게도 열성적으로 쫓아 온 것을 보시고 불쾌한 생각을 가지기는커녕 깊은 동정심을 나타내시어 그들을 측은히 여기자 예수님은 병자들을 일일이 고쳐 주시고 용기를 잃은 사람들을 격려하시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시고 그들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날이 저물자 그들에게 줄 먹을 것까지 걱정하신 나머지 저 유명한 오천 명을 먹이신 대 기적을 행하여 주셨습니다.

  

신자 여러분! 예수님이 빵을 많게 하시어 또한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주신 것은, 앞으로 당신이 세우실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빵의 기적에 관해서는 복음사가 네 분이 모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주님께서 하시는 일 중에서 특히 성체성사가 우리에게 크나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빵을 불리신 기적을 통하여 장차 세우실 성체성사 제정의 기반을 튼튼히 하시며 백성들이 성체성사의 현의를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기적이 없었다면 성체성사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5,56-59)하고 성체성사를 세우실 적에 많은 제자들 중에는 <너무 어려운 가르침이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고 불평을 털어놓았는데, 너구나 빵을 불리신 기적을 행하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성체성사의 도리를 알아들은 자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의 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적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이 일용할 양식이란 영원한 천상의 빵, 생명의 빵, 천상의 만나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지상의 빵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의 기도문을 외울 적에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의 빵을 청하는 동시에 현세의 빵도 아울러 청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세리들 및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하시며 나누어주신 빵도, 최후 만찬 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 빵도 이 지상의 평범한 빵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음식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음에 붙여진 예수님의 몸이었으며 천상의 빵이었습니다.

  

결론을 말씀 드린다면, 예수님께서 피로하고 허기진 5천 명이나 되는 군중을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신 이상으로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천상 양식인 성체 성사로 우리를 먹여 주시고 살찌게 해 주십니다. 우리의 인생항로는 고해라고도 하는 힘들고 험준한 비탈길과도 같습니다. 자칫하면 힘없고 기운 빠지고 허기져서 쓰러질 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의 길이 사막의 길과도 같아서 메마르고 굶주리고 고독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중도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천상의 생명의 빵을 주십니다. 또한 오아시스와 같은 생명의 물도 함께 주십니다.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천상의 음식인 성체를 자주 영하여 우리의 영혼을 더욱 튼튼히 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2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모든 이가 배불리 먹었다

                                                              김몽은 신부



  예수께서 제자들의 신앙심을 굳혀주시기 위해 빵을 증가시키는 기적을 보여주신다. 사도들의 사명이 무엇이며, 수난의 의미와 그 무한한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앙의 신비 안에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오늘의 복음은 궁핍한 처지에 놓여 있는 군중들에 대한 염려로부터 제자들이 스승에게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여쭙는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이르신다.

  

사도들의 사명은 이기심을 떠나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임을 깨우쳐 주신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돌봐 주어야 한다고 시야를 넓히도록 일러주신다. 모든 사도들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명의 일익을 담당하고, 그분의 십자가에 동참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한다.

  

오늘의 복음에서도, 사도들을 예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일 뿐이다. 어느 시대고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제자들은 자기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호소한다. “우리에게는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진정 인간의 힘은 한계가 있는 것이고, 또 인간이 가진 것은 너무나도 빈약한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인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궁핍한 처지 하나를 완화시키지 못하는 한계성, 장정만 해도 5천명이 넘는 군중을 외딴 곳에서 어떻게 먹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것들까지도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라면, 하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랴. 아무리 다른 이들을 돕겠다는 의지가 있고, 또 책임을 느낀다 해도, 힘에 넘치는 일이며, 전혀 방안도 서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의 힘(성령)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적을 행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기적의 행위를 위탁하신다. 빵을 나누어 준 사람들은 사도들이며, 남은 것을 거두어들인 것도 사도들이다. 주님은 이렇게 사람의 손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계속 기적을 행하신다. 사제의 손을 통한 성체의 빵은 전세계 어디서나 나뉘어지고 있으며, 각 강단에서는 말씀의 빵이 나뉘어지고 있다. 그리고 신도들의 손을 통해서 자선의 빵이 도처에서 나뉘어진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풍요로우신 분이시다. 따지거나 계산하시지 않고 풍요로히 주신다. 그 많은 군중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 “내가 온 것은 양들로 하여금 그 생명을 풍성이 얻게코자 함이다”(요한 10,10).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한 사람들은 누구나 그분으로부터 풍요로이 받아 얼마든지 풍성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을 거절하면 인간은 항상 가난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지위가 높아도, 인간은 그것으로 만족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고, 인간 세계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것은 무한하고 한계가 없으므로 아무리 가져도 끝이 없고, 누구나가 원하는 대로 풍요로히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만이 인간을 채울 수 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4).

  그러나 하느님나라를 나눈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나 지식, 또는 인간적인 물질로써 이룩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신앙의 신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럴지라도 인간은 자기가 가진 바, 최대의 것을 내놓아야 한다.











3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기적의 빵, 그것은 곧 나

                                                           함세웅 신부



오늘의 복음 말씀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배부르게 한 기적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기적은 무슨 마술사나 요술사의 괴상한 힘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바로 오늘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모인 이 미사 성제의 중심인 성체 성사의 신비를 위해 전표로 주신 한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전능을 생각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중요한 날들을 기념하고 더욱 뜻깊게 기억합니다. 생일이나 축일이 의미 있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이 날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기억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날에 우리는 내복 한 벌이라든지, 또는 용돈 얼마라든지 또는 혼배시에는 결혼 반지 같은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이러한 선물들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접촉하며 그들의 현존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접촉 또는 현존에는 물리적인 접촉과 정신적인 접촉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고향과 집을 떠나 공부하거나 일하는 자녀들이 부모님들의 사진을 귀중히 간직하며 기억하는 현존은 바로 우리가 손으로 접촉할 수 있는 물리적 접촉보다 훨씬 더 차원이 높고 깊은 것임을 우리는 모두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접촉보다 더 강하고 고귀한 것은 하느님과의 접촉인 신앙적인 접촉입니다.

  미사 중의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중동 지방에서의 식생활의 기본 요소입니다. 그것은 삶의 상징뿐 아니라 삶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취하면 그것이 완전히 소화되어 바로 우리 생명 자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바로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셨습니다. 무슨 기념을 위해서 기억하는 기념물로서가 아니고 완전히 ‘너와 나’가 하나가 되는 표지로 성체 성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배부르게 하신 예수님의 그 기적, 그 기적을 우리는 호기심으로 지금 바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그것이 기적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과 나, 이웃과 나, 나와 교회 이러한 삼각 관계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계기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보리빵의 기적은 흘러간 옛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 순간에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2000년의 시간 차이를, 공간의 간격을 우리 모두 우리의 정신력 또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모두 보리빵의 기적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기며 우리 모두 기적의 보리빵, 기적의 물고기가 되어야 하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가족, 나와 이웃 그리고 우리와 하느님, 모두와 미사 중에 사랑으로 맺어지는 일치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4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최기산 신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못할 짓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도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도둑질 한 사람은 법정에서 정상참작을 받을 것이다. 3일 굶고 나면 도둑질 안 할 사람이 없다는 말도 있다. 눈이 뒤집힌다는 것이다. 아무리 금강산이 좋다해도 배가 쪼르륵 소리를 내면 구경도 시시해지고 귀찮아질 것이다.



그 옛날 훈련소에서 나와 훈련을 받던 사람 하나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소위 짬밥통에 손을 넣고 콩나물을 한 움큼 집어서 입에 털어 넣고 씹다가 조교에게 걸렸다. 조교는 무자비하게 그의 ꡐ아구창ꡑ을 주먹으로 갈겼다. 그는 피와 콩나물을 주르륵 흘리며 울고 있었다. 지금도 콩나물만 보면 그 생각이 나서 먹을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얼마나 배고팠으면 돼지나 먹는 음식찌꺼기 통에 손을 넣었겠는가! 지금은 군대가 자유배식이라니, 격세지감이다. 설움 중의 설움



설움 중의 큰 설움은 배고픈 설움이다. 남들은 배불리 먹고 있는데 나의 배만 쪼르륵 소리를 내고 있다면, 더구나 내 자식들이 배고파서 울고 있다면 그 설움이야 오죽하겠는가!



예수님은 배고픈 자의 설움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을 받고 싶어서였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예수님 주변은 사람들로 붐볐다. 예수님은 매일 그 일을 위해서 여기저기 나다니셨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쉬고 싶으셨다. 그래서 한적한 곳으로 피신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곳까지 찾아와서 애원하였다.



예수님은 팔을 걷은 채 하루종일 병자들을 낫게 하셨다. 해가 서산에 걸려서 이젠 집으로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제자들은 걱정하면서 어서 돌려보내자고 예수님께 재촉하였다. 그들은 지쳐있었다. 사람은 많은 사람을 만나면 지치는가 보다. 그래서 관공서나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불친절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들은 하루종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래서 지쳐있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어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좀 쉬면서 맛있는 음식과 대포 한잔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당연한 소망같아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를 더 내다보고 계셨다. 그분은 수많은 사람들이 배고프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계셨다. 그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해 줘야 한다는 것을 가슴에 품고 계셨다.



인간의 배고픔을 그 누구보다도 걱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ꡒ너희가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ꡓ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 들려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눈이 휘둥그래졌을 것이다. 이분이 하루 종일 시달리시더니 맛이 좀 가셨나 보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장정만도 5000명이라면 적어도 어린이와 부녀자를 합할 땐 만명도 넘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외딴 곳에서 어떻게 빵을 구하여 먹일 수 있겠는가! 제자들에게는 불가능한 것 같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다고 생각하셨다. 인간과 예수님과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오라 하셨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수천명, 아니 만여명의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이셨다.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불가능하게 보이던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구세주로서 본때를 보여주셨다. 다시는 의심치 못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셨다.



복음의 메시지



구약성서도 하느님의 능력으로 빵이 많아진 기적이 나온다. 엘리사는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였다.(Ⅱ 열왕 4. 42―44 참조) 엘리야는 사렙다 마을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보였다.(Ⅰ 열왕 17, 8―16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 그러나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장정만 5000명을 먹였다는 것은 예수님이 범상치 않음을, 즉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배고픈 자에 대한 연민의 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 분은 우리 교회더러, 우리 각자에게, 먹을 것을 배고픈 자에게 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것을 바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작은 것으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여주신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 북한의 동포들이 배고파서 죽음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건너간다고 한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도 한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서도 굶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란다. 예수님은 그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ꡒ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나에게 주라.ꡓ 우리는 가난할 수도 있다. 우리가 동전 한 닢, 1000원 짜리 지폐를 들고 이것으로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킬 수 있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정성을 가지고 큰 기적을 이루어내신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연민의 정이 가득하셨던 예수님처럼 그렇게 배고픈 자를 가엾게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귀찮은 존재로 보아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은 이 성서를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영혼의 빵인 성체는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로써 수많은 영혼들이 배부르게 되고 생기 넘치게 된다고 말한다.













5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느님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5,1~3 (어서 와서 먹어라) 

제2독서 로마 8,35.37~39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복 음 마태 14,13~21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배부르게 먹는다는 것은 먹을 것이 변변치 못했던 유대인들에게 는 하나의 커다란 꿈이요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배가 고팠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계속적인 불신과 그리고 역대 왕들의 썩은 정치 탓으로 나라는 피폐할 대로 피폐되었고 앗시리아와 바빌론,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에 차례로 멸망당하면서 나라와 백성은 허탈과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바빌론에게 망한 뒤의 처참한 현실 앞에 백성들이 망연자실할 때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때는 나라만 망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 거의 모두도 바빌론에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했는지 모릅니다. 죽느니만도 못한 참혹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시련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다 높으신 분의 뜻이 담겨져 있는 사랑의 섭리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성찰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멀리했을 때 과연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었던가를 뼈저리게 체험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예언자가 나타나서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잔칫상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하느님께서 무엇을 주실 때는 항상 넉넉하게 주십니다. 결코 인색하거나 째째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값싼 것도 아닙니다. 돈으로도 결코 살 수 없는 아주 귀한 것이면서도 돈도 받지 않습니다.



그냥 주시는데 그것도 후하게 넘치도록 주십니다. 옛날 광야에서의 만나도 그랬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자라지 않게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남자만도 5천 명이나 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도록 그렇게 후하게 베푸셨습니다. 성서의 내용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아주 계획적으로 오늘 사건을 만드셨습니다. 백성들을 이끄시고 일부러 먼 곳으로 데리고 가셔서 식사 때가 되어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도록 안배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뭣도 모르고 그냥 따라간 것입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이 그저 감탄스럽기 때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조건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다가 황송스럽 게도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잔칫상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치밀하면서도 극적으로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당신께서 누구시라는 것을 알리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이적이면 충분했습니다. 바로 그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배부른 것을 느낄 때 예수님이 어떤 사명을 가지고 그들 앞에 등장하셨는지를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그들의 굶주린 배가 가득 채워진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오셨지만 백성들의 현실적인 배를 채워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다른 복음 에 보면 배부르게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하자 예수님이 슬그머니 피하신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현실 문제를 지금 당장 해결하시는 그런 식의 메시아는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단식을 하실 때도 사탄으로부터 받은 유혹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세상의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또 썩어 없어질 양식에는 별 관심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위대한 포부가 계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초대하신 잔칫상이 나 또는 광야에서 모자라지 않게 40년 동안 후하게 내려 주셨던 만나,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신 사건은 다 성체성사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른 양식은 다 어떤 징표요 상징에 불과합니다. 오직 생명의 양식이 그 핵심이요 포인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성체의 그 진정한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성서가 지향하고 가르치는 빵과 잔치는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성사의 양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썩는 양식에만 치사하게 묶여 살 것이 아니라 썩지 않는 양식에 보다 관심을 갖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음식을 모셔야 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위대하고 값진 음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잔칫상에 감히 나설 수도 없는 자격 없는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런 돈 없이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도록 베푸셨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모시면 세상을 다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내주지 못하고 베풀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도 나누고 베풀도록 합시다.











6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도움과 나눔의 존재

                                                             안규태 신부

  



으앙……. 갓 태어난 아기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포근한 모태에서 바깥 세계로 나온 다음 이 차갑고 낯선 세상에 대하여 처음으로 나타내는 갓난아기의 반응이 울음이다. 갓난아기의 울음 소리는 이렇게 외치는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절 좀 도와주세요.” 당신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연약한 저에게 좀 나눠주세요. 그래야만 저는 살 수 있어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우리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진실을 향해 부르짖는 외침인 것입니다.

  

첫째로, 인간은 처음부터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 아니 남의 도움없이는 살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닌 존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의 도움을 받고 살기에 당연히 남을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 남과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는 존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듯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애써 외면하고자 통밥 굴리기에 여념이 없는 자들도 있습니다.

  

자기 혼자서 저절로 성장한 듯이 부모를 구박하는 사람, 자기 노력 하나만으로 부자가 된 듯이 가난한 이웃을 무시하는 사람, 자기 능력 하나만으로 국회의원이 된 듯이 떠벌이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는 삭막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그들에 의해서 동물적인 행태가 자주 저질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면서부터 타인의 도움을 받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항상 당연히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남에게 얻어먹었으니 이제 내가 이웃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이 삭막한 세상은 살맛나는 세상으로 변하리라.











7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기적의 의미

                                                             정덕진 신부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따르던 5천여 백성들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많게 하여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그 조각을 모은 것만도 열두 광주리라 하니 그 기적이야말로 실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기적은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큰 기적입니다. 하느님의 안배는 실로 사람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묘한 것입니다. 외따른 무인지경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을 만큼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은 대단히 놀랄 기적이지만 이와 같은 기적은 지금도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성서에 사도들은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들은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예수님께 제기했습니다. 실로 많은 군중은 예수님을 따라 여러 시간을 같이 있었으므로 배고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말도 당연한 말이었습니다만 예수님은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먹을 것을 당신들이 주시오”하고 말씀하실 적에 이미 당신 마음속에는 배고픈 군중에게 먹을 것을 마련하실 의도가 계셨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배고픈 사정,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정, 헐벗고 병들어 있는 사정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들의 모든 사정을 확실히 보시고 그때 그 백성들에게 베푸신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도 나타내시고 계시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전연 모르시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도 알아듣지 못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머리카락의 수까지도(마태 10,30) 헤어 두고 계시다니 예수님은 우리 사정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우리를 항상 눈여겨보시고 지켜보시며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크나큰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면서…….

  

둘째: 그리스도는 지금도 끊임없이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오늘도 내일도 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세계의 인구가 40억을 넘고 있고 그 많은 사람들을 매일 매일 먹이고 계십니다. 한 알의 씨앗을 땅에 묻으면 백 배 천 배의 많은 결실을 하는 것, 오곡백과가 먹고 남을 만큼 결실맺도록 일기를 고르게 하시는 것 등 이것이야말로 큰 기적 중의 기적이요, 빵을 많게 하셔서 오천 여명을 먹이신 기적에 비하여 얼마나 더 큰 기적입니까? 전 한국의 오천 만의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먹는 음식물을 생각할 때 이같은 기적 외에 더 큰 기적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오늘 하루 뿐 아니고 내일, 모레, 글피… 계속해서 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생양 보존하시는 기적이야말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때 감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셋째: 이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은 장차 성체를 세우셔서 우리 만백성의 영혼의 양식이 될 표상인 것입니다. 예수님 이래로 세상에 나서 성체를 영하고 영혼의 양식을 삼아 주님께로 나간 사람이 실로 몇 억만 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참으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위하여 자기 몸과 피를 음식으로 주시고 우리와 영원토록 같이 계시려는 이 사랑을 알아들어야 하겠고 한편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8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만남과 나눔

최인호 작가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만남’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다소 내용이 애매하지만 어쨌든 너와 나의 만남이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랑을 노래하기에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채울 정도로 남았다는 이야기는 ‘나눔’의 상징으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기적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 교 교우들이 자기가 가진 재물을 주님처럼 나눌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잘살 수 있다는 예화로 이 이야기가 가장 많이 인용됩니다.

물론 주님은 이 기적을 통해 ‘나눔’의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님께서 ‘나눔’의 기적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만남’의 소중함을 더욱더 강조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많은 군중이 모이자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시는데 제자들은 불가능하다고 변명합니다.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나눌 수 없는 이유’의 보편적인 세 가지 변명입니다. 그것은 ‘외딴 곳’이라는 공간적 변명과 ‘시간이 늦었다’는 시간적 변명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는 소유적 변명입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변명은 오늘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그것이 불가능함을 변명하는 우리들의 입에서도 똑같이 흘러나옵니다. “난 시간이 없어” “우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구” “나누기에는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없어”

주님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시간적․공간적․소유적 변명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입니다. 주님은 ‘나눔’의 사랑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만남’의 절대성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오천 명의 군중을 하나의 군중으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측은한 마음’으로 보셨으며 따라서 그들과의 만남을 절대적인 만남으로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나눔입니다. 그러나 그 나눔이 참사랑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나눔’의 행위보다 먼저 ‘만남’의 행위에 더 운명적인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만나셨습니다. 주님에게 있어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또한 나와 주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 노래의 가사처럼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바랄 수는 없지만 주님과 나는 함께 영원을 태우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해 너를 사랑해’라는 노래말은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사랑의 고백인 것입니다.











9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교구 주보



오늘 마태오 복음(14,13-21)은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異蹟史話)이다. 네 복음서의 이적사화를 크게 둘로 나누면 사람을 구제하신 치유․구마 이적사화와 자연을 상대로 한 이적사화이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는 자연 이적사화에 속한다. 특히 자연 이적사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나타내는데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의 전례(前例)가 구약성서에도 있다.

1. 구약성서의 빵 기적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가장 비슷한 이야기는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다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었다는 이야기(1열왕 17,8-16)와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이야기(2열왕 4,42-44)이다. 엘리사의 이적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떡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그것을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먹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가 ‘어떻게 이것을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야훼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니, 과연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2. 신약성서에서의 빵 기적

따라서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 담긴 뜻인즉, 엘리사 예언자도 위대하지만 예수님이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빵 스무 개로 고작 백 명을 먹였지만 예수님은 빵 다섯 개로 무려 오천 명을 먹이셨다. 아무리 엘리사가 능력있고 위대한 예언자라 해도 어찌 주님이신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시고 구원자이시다. 이것이 바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 담긴 뜻이다.

3. 기적에 담긴 의미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는 성만찬례(聖晩餐禮), 곧 미사의 풍요함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있다.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마태 14,19)는 말씀은 예수께서 최후 만찬 때 하신 말씀(마태 26,26; 마르 14,22;  루가 22,19; 1고린 11,23)과 흡사하다. 따라서 예수님의 최후 만찬을 되새기며 토요일 밤이나 일요일에 성만찬례를 지내던 초대교회 교우들은 틀림없이 성만찬례 때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말씀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는 성만찬례, 곧 미사의 풍요함을 밝히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 성만찬의 의미와 아름다움은 ‘나눔’에 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먹을 것을 배고픈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 그러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을 것이다. 양식이 적어 부족할 것 같지만 나누어 주니까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아름다운 뜻이 오늘 이적사화에 담겨있다.                                               























10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배고픈 이를 먹이시는 사랑의 기적



  마가렛 호레라는 아일랜드 태생의 여인은,「고아들의 어머니」 라 불린다. 어려서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 열병으로 부모를 여의고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다행히 나중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행복한 생활을 했으나,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가 사고로 죽고 만다. 다시 혼자가 된 그녀는 작은 호텔에서 빨래를 하며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결심을 했다.

「고아원에 가서 일을 해야겠다. 돈은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도울 일이 있을거야, 이것이 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인 것 같아‥‥」그녀는 작은 고아원을 찾아갔는데, 어려운 사정을 보고, 불쌍한 고아들을 도울 궁리를 하게된다.



  드디어 그녀는 젖소 두 마리를 사서 우유를 짜서 팔아 고아원을 도왔다. 우유가 잘 팔려 젖소 한 마리를 더 사고, 빵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장사가 굉장히 잘되어 큰 이윤을 남겼다. 마가헷은 돈을 많이 벌어도, 항상 자신은 누더기 옷을 입고 열심히 일을 했다. 자신이 번 돈을 항상 고아들을 위해 사용했다. 고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그녀를「고아들의 어머니」로 존경받게 했던 것이다.



  그녀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녀의 사랑스런 마음을 기리며「뉴올린즈」에 초라한 옷차림을 한 그녀의 동상을 세워주었다. 그녀가 엄청난 사랑의 기적을 이룰 수 있던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고아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오늘 복음에서 보면, 주님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다. 오늘 군중을 배불리 먹여주시는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인간의 영혼의 목마름과 배고픔도 해결해 주신다.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성체성사와 말씀의 신비 안에로 인도하신다. 예수님의 근처로 큰 군중이 몰려든다. 예수님은 배고파하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그들을 배불리 먹여주시고자 생각하신다.



  예수님은「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우리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제자들은 인간적인 계산과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우리는 늘 이런 실수를 한다.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으로만 무언가를 하려는 습관에 빠져있을 때가 많다.

주님은 기적을 이루시는 능력의 하느님이란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는 태도이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도와주십시요!」 라고 겸손된 마음을 지녀야 한다.


  빵의 기적은 어떤 아이가 갖고 있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즉, 기적을 하찮은 것.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손에 얹어졌을 때, 주님을 통했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비록 내 자신이 부족하고, 보잘것 없다하더라도 나의 능력과 시간과 재물을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이 쓰시도록 했을 때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큰 능력과 결과로 바꾸어 주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먹고 난 후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모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부스러기를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낭비를 해서는 안된다. 또한 작은 정성과 힘을 모아도 큰 결과가 나온다. 그 남은 열 두 광주리의 빵은 또 다른 배고픈 사람들의 몫이 된다. 우리는 쪼들리지 않고 돈이 넉넉하다고 낭비를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큰 죄악이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낭비하는 시간과 돈이 다른 이에게는 생명처럼 소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빵의 기적은 사랑의 실천



  예수님이 빵의 기적을 이루는 계기는, 배고픈 군중들이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물론 측은한 마음은 동정심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진정한 삶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주시려고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셨다. 빵의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과 삶을 보여주셨다.



  우리 주위에는 마음과 영혼이 배고픈 이들이 많다. 정신적으로 멸시를 당하고,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영혼의 배고픔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그들과 사랑과 관심을 나눌 때, 우리는 복음의 예수님처럼 사랑의 빵의 기적을 이루게된다. 우리 공동체,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이 항상 배고픔이 없는 공동체와 가족이 되도록 서로 나누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 사랑은 나눌수록 더 커진다는 사랑의 신비를 몸소 실천하도록 해야 하겠다.























11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못할 짓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도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도둑질 한 사람은 법정에서 정상 참작을 받을 것이다, 3일 굶고 나면 도둑질 안 할 사람이 없다는 말도 있다. 눈이 뒤집힌다는 것이다. 아무리 금강산이 좋다해도 배가 쪼르륵 소리를 내면 구경도 시시해지고 귀찮아질 것이다.



 그 옛날 훈련소에서 나와 훈련을 받던 사람 하나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소위 짬밥통에 손을 넣고 콩나물을 한움큼 집어서 입에 털어 넣고 씹다가 조교에게 걸렸다. 조교는 무자비하게 그의 ‘아구창'을 주먹으로 갈겼다, 그는 피와 콩나물을 주르륵 흘리며 울고 있었다. 지금도 콩나물만 보면 그 생각이 나서, 먹을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얼마나 배고팠으면 돼지나 먹는 음식찌꺼기 통에 손을 넣었겠는가! 지금은 군대가 자유배식이라니, 격세지감이다.



 설움 중의 큰 설움은 배고픈 설움이다. 남들은 배불릴 먹고 있는데 나의 배만 쪼르륵 소리를 내고 있다면, 더구나 내 자식들이 배고파서 울고 있다면 그 설움이야 오죽하겠는가! 예수님은 배고픈 자의 설움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설움 중의 설움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서였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고 싶어서였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예수님 주변은 사람들로 붐볐다. 예수님은 매일 그 일을 위해서 여기저기 나다니셨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쉬고 싶으셨다.



  그래서 한적한 곳으로 피신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곳까지 찾아와서 애원하였다. 예수님은 팔을 걷은 채 하루종일 병자들을 낫게 하셨다. 해가 서산에 걸려서 이젠 집으로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제자들은 걱정하면서 어서 돌려보내자고 예수님께 재촉하였다. 그들은 지쳐있었다. 사람은 많은 사람을 만나면 지치는가 보다. 그래서 관공서나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불친절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들은 하루종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래서 지쳐있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어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좀 쉬면서 맛있는 음식과 대포 한잔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당연한 소망 같아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를 더 내다보고 계셨다. 그분은 수많은 사람들이 배고프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계셨다. 그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해 줘야한다는 것을 가슴에 품고 계셨다.



  인간의 배고픔을 그 누구보다도 걱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 들려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눈이 휘둥그래졌을 것이다. 이분이 하루 종일 시달리시더니 맛이 좀 가셨나 보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장정만도 5000명이라면 적어도 어린이와 부녀자를 합할 땐 만 명도 넘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외딴 곳에서 어떻게 빵을 구하여 먹일 수 있겠는가! 제자들에게는 불가능한 것 같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다고 생각하셨다. 인간과 예수님과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수 천명, 아니 만여명의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이셨다.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불가능하게 보이던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구세주로서 본때를 보여주셨다. 다시는 의심치 못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셨다.



  복음의 메시지



  구약성서도 하느님의 능력으로 빵이 많아진 기적이 나온다. 엘리사는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였다. (2열왕 4,42-44) 엘리야는 사렙다 마을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보였다. (I열왕 17,8-16) 이스랄엘 백성은 40년 간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 그러나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장정만 5000명을 먹였다는 것은 예수님이 범상치 않음을, 즉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배고픈 자에 대한 연민의 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 분은 우릴 교회더러, 우리 각자에게, 먹을 것을 배고픈 자에게 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것을 바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작은 것으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여주신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 북한의 동포들이 배고파서 죽음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건너간다고 한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도 한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서도 굶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란다. 예수님은 그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나에게 주라." 우리는 가난할 수도 있다.

우리가 동전 한 닢, 1000원 짜리 지폐를 들고 이것으로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킬 수 있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정성을 가지고 큰 기적을 이루어내신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연민의 정이 가득하셨던 예수님처럼 그렇게 배고픈 자를 가엾게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 성서를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영혼의 빵인 성체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로써 수많은 영혼들이 배부르게 되고, 생기 넘치게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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