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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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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1월 19일 (토) 10:02
분 류 부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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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예수 부활 대축일 강론 모음 ”
 

예수 부활 대축일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전에 말씀하긴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제 1독서: 사도10,34a.37-43

                                                   제 2독서: 골로3,1-4

                                                   복 음: 마태 28,1-10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모두가 ‘놀라움’의 징표를 지니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부활의 신비는 놀라운 경이로 가득 차 있다.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뒤 이루게 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하께 1,9;즈가 1,17 참조)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듯한 오늘 부활축일의 응송은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일으키셨도다. 주님의 오른손이 큰일을 하셨도다 …집짓는 자들 내버렸던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 주께서 이루신 일이옵기에, 우리 눈에 놀랍게만 보이나이다.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시편 117,16.22-24).

 이 거룩한 날에 우리가 느끼게 디는 그 ‘기쁨’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는 ‘놀라운 일 중의 놀라운 일’ 때문이다. 인간들보다 더 현명한 건축가이신 하느님께서는 “집 짓는 자들이 내버렸던 돌”인 그리스도를 그와 더불어 죽음을 이겨낸 모든 구원된 자들의 새로운 ‘성전’을 짓기 이한 “모퉁이의 머릿돌”(마태 21,42; 사도 4,11 참조)로 삼으셨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죽음에 처한 반면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사도 10,42)로 세우시고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도록”(사도 4,12)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다”



 이러한 ‘놀라운’의 의미는 베드로가 하늘에 나타났던 환시를 통해 이방인들에게도 이미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백부장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하는 설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베드로는 나자렛 예수께서 하신 일들에 관해 언급한 뒤 그것들이 예루살렘에서 얼마나 비극적으로 끝났는지를 회상한다 : 예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지만”(사도 10,38) 유다인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다!”(사도 10,39)

 바로 이러한 유다인들의 ‘몰이해’가 우리에게 ‘놀라움’을 자아내게 한다 : 어째서 하느님께서 현존해 계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거의 믿기 어려울 만큼 터무니없는 이 어리석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베드로는 보다 더 큰 놀라움을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찾는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케 하심으로써 인간들의 몽매하게 굳어버린 마음에 되갚아주신다 :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시고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읍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증인으로 미리 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자기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로 정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모든 예언자들도 이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고 증언하였읍니다”(사도 10,40-43).

 사도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사도 10,41;루가 24,41-43;요한 21,9-10.13참조) 그리스도의 그 친근한 우정의 행동 또한 베드로를 감격케 한다. 하지만 그 행동은 동시에 예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으며”(루가 24,34참조) 또한 이미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활케 하실 수 있는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 되셨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사도 10,43).

 이미 부활의 힘이 마치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과도 같이 역사 속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 무덤을 막았던 돌이 부수어지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폭발하기 시작한 이 ‘새로운’ 생명의 힘에 의해 자신을 ‘변화’시키느냐 못 시키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살든지’ ‘죽든지’ 하게 된다. 사도 바울로는 오늘의 제 2독서(골로 3,1-4)를 통해 이와 같은 사실을 보다 훌륭히 말해주고 있다.



“여자들은 가까이 가서 그의 두 발을 붙잡고 엎드려 절하였다.”



 오늘 복음도 전체적으로 놀라움과 경이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다른 복음사가들보다 특히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이 부활하기는 순간에 일어난 ‘큰 지진’과 무덤의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있던 천사의 찬란한 모습을 상기시키면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시체와 더불어 모든 생명의 희망을 영원히 매장했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곳에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하고 있음을 묵시문학적 형태로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수난의 역사가 다음과 같은 주석과 저불어 무의미하게 끝난 것이 아니다 : “그들(즉 유다인들)은 물러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세워 무덤을 단단히 지키게 하였다”(마태 27,66)

 자, 이제 좀더 자세히 오늘 복음 내용을 분석해 봄으로써 거기에 담김 특별한 메시지를 파악해 보자. 사실, 마태오 복음사가의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다른 복음사가들의 이야기와 일치를 이루고 있지만 그는 자기 나름대로 몇 가지 독특한 요소들을 이끌어들여 일어난 사실들을 ‘재해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즉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마르 16,1;루가 24,10 참조)와 같은 여자들의 증언을 아주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복음사가들도 말하고 있듯이 무덤에 갔을 분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를 제일 먼저 만났다(9-10절). 또 그들이 무덤에 간 것은 마르코복음이나 루가복음에서처럼 주님의 몸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덤을 ‘보러’(1절) 갔던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빈 무덤을 발견한다. 이로써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에 대한 확고한 근거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상한 사실은 사도 바울로는 유다의 전승에 충실하면서 그 어떤 여자의 증언도 받아들이지 않는 반면에(1 고릴 15,3-8) 마태오 복음사가는 여자들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우리는 아무 동기가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 어떤 확실한 역사적 전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 여자들이 맨 처음 만났고 또 그 소식을 맨 처음으로 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믿음, 순수함 또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상급인 것 같다 : 그들은 오로지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의 일편단심으로 무덤에로 달려간다. 반면에 사도들은 실망과 겁에 싸여 있었으며 마음이 넓기보다는 계산적이어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 솔직히 말해 그들은 그 여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고 헛소리 정도로 생각하였다(루가 24,11 참조).

 또한 그 여자들과 예수의 만남이 아주 감격적이고 애정에 찬 분위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께서 그 여자들을 향하여 걸어오셔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들은 가까이 가서 그의 두 발을 붙잡고 엎드려 절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9-10절).

 여기서 마태오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절하는 행위’(προσεκδνησαν : 9절)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표현하며, 또한 그분을 손으로 감싸 포옹할 듯 넘치는 기쁨과 환희도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분이 진정 다시 살아나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사랑에서 생겨나고 사랑을 생기게 함으로써 그분과의 깨어질 수 없는 생명의 결합을 이루어준다. 요한복음에서(20,11-18) 상당히 감동적으로 서술되고 있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신 이야기도 이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먼저 여자들에게 당신 모습을 보이셨다고 하는 그 이야기는 교회 안에서 차지하는 여자들의 중요한 역할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신앙의 선포에 있어서 ‘사랑’과 또한 ‘기쁨’이 차지하는 수위성을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를 찾고 있으나…“



  ‘기쁨’의 주제가 특히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큰 지진이 일어나고 천사가 무덤을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있는 장면에 뒤이어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 “이 광경을 본 경비병들은 겹에 질려 떨다가 까무러쳤다. 그때 천사가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를 찾고 있으나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누우셨던 곳을 와서 보아라. 그리고 빨리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당신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거기에서 그분을 뵙게 될 것이오> 하고 일려라. 나는 이 말을 전하러 왔다.’ 여자들은 무서우면서도 기쁨에 넘쳐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무덤을 떠나 급히 달려갔다”(4-8절)

 경비병들의 ‘겁에 질린’ 태도와 여자들에게 주어지는 ‘기쁨’에의 초대는 분명히 대조를 이루고 있다: “무서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를 찾고 있는 것을 안다.” 기쁨과 공포를 각기  서로 다른 마음의 상태에서 생겨난다: 여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찾는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이미 그 들의 마음속에 부활해 계신다 ! 반대로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은 그분의 두려워한다: 그분의 부활이 곧 그들을 심판하고 단죄한다. 그들은 그분이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

 그 여자들의 마음속에도 어떤 두려움이 있었다면(8절) 그것은 단다: 그들은 그 엄청난 사실의 의미를 확인하자마자 보다 더 기쁨에 사로잡혀, “무서운면서도 기쁨에 넘쳐”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러 달려간다(8절). 여기서 마태오 복음사가가 특히 기쁨의 의를 강조하고 있는 사실은 마르코복음의 병행구와 대조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마르 16,8).

 분명히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나중에 알아들은 바에 비추어 부활사건을 재해석하고 있다: 그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되었음을 깨닫고 있고 또한 그들이 이미 체험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자신들의 부활 즉 영신이 이미 체험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자신들의 부활 즉 영신상의 현실적 부활과 미래에 맞게 될 육신 자체의 부활을 내다본다. 그렇다면 어찌 그 기쁜 마음을 깨뜨려버릴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부활성야에 읊어지는 부활찬송은 그 ‘기쁨’ 을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노래한다: “용약하라 하늘나라 전사들 무리, 환호하라 하늘나라신비, 구원의 우렁찬 나팔소지, 찬미하라 대왕의 승리, 땅도 기뻐하라, 찬란한 광채 너를 비춘다. 영원한 대왕의 광채 너를 비춘다. 비춰진 땅아 깨달으라. 세상 어둠 사라졌다. 기뻐하라. 자모신 성교회, 위대한 광명으로 꾸며진 성교회, 백성의 우렁찬 찬미소리 여기 들려온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이 모든 사실은 어째서 복음사가들이 주님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선포할 때 단지 과거의 크나큰 사건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에도 믿는 이들의 마음과 역사의 흐름 속에 작용하고 있는-  구원의 신비를 기념하여 거행하고자 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사도 바울로는 바로 이 점을 고린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상기시키면서 부활의 빛에 비추어 살라고 권고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당신 자신과 당신의 ‘몸’인 우리를 위하여 천상의 문을 열어주시고 우리를 하느님과 다시 결합시켜주셨다면 이것은 우리도 천상으로 옮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순전한 지상 것을 넘어서 있는 천상 것을 추구하게 하는 발효력을 지니고 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골로 3.1-4).

 여기서 사도 바울로는 확실히 우리로 하여금 죄를 끊어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생명’의 신비로 들어가 그분과 더불어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세례성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 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에페 2,5-6). 이 다시 살아난 우리들의 생명은 이미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영광’의 빛을 발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소박한 일상적 행동의 표지 안에 ‘감추어져’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부터 ‘부활의 자녀’ 답게 살므로써 우리의 모든 형제들과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도 이 부활의 강한 세력 안으로 이끌어 들이는 일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도 성 아타나시오가 그의 ‘부활 서간’에서 말하듯이 “이 주님의 축일을 말로써만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거행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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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3월 14일 (금)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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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예수 부활 대축일 강론 모음 ”
 

주님 부활 대축일



18.              부활 대축일 마태 28,1-10 (가) 갈릴래아로 먼저 가시리라

                                     -이갑수 주교





“주께서 오실때까지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전하며 주의 부활하심을 굳세게 믿나이다”



오늘 온세계 성당에서는 신앙의 신비를 노래하는 기쁨의 종소리가 울려 퍼져 나온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앙의 중심이요 기초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숙명적인 죽음과 생명욕에 대한 욕구의 수수께끼를 풀어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쉴새없이 발동하는 영원히 살고자하는 욕망과 틀림없이 맞이해야할 죽음의 갈등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울음으로 시작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인 매일 다가오는 고통에 의해 끝을 맺는 일이다. 왜 죽어야 하나? 무엇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하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죽음의 그늘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는 없는가? 이같은 질문은 인류역사를 통해서 계속 이어왔고 오늘도 말없이 인간은 이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다.



고통과 죽음은 절망과 아픔을 주는 것이고 아픔을 주는 것은 또한 벌이다. 매를 맞거나 감옥살이를 하거나 간에 벌은 아픈 것이다. 인생이 이 고통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연대적으로 치러야 할 벌이고 벌을 받게끔 저지는 잘못인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비극적 뿌리는 죄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을 초래한 죄를 없애기 위해서 속죄의 제물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운데 오셨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부활하신 것이며, 죽음의 원인인 죄를 없이했기 때문에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되찾아 주시려고 부활하신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 즉 부활은 신앙의 신비이며 교회는 사도들의 뒤를 이어받아 부활을 증거 하는 증인인 것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부활사신 다음 비어있는 그의 무덤을 목격하고도 제자들은 의심하였고, 주님의 시체를 항유로 바르기 위해서 여자들이 걸음을 내디디면서도 주님의 부활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무덤 앞에 가로 놓여진 돌을 누가 치워 줄것인가를 걱정했다.



문이 닫힌채 제자들이 모여있는 방에 나타나시어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도깨비나 귀신인줄로 여겨 겁에 질렸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신앙으로써만 가능하다. 제자들이 스승의 부활을 믿고 그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어떠한 고통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했다.



현재 인간의 여건으로서는 고통과 그 총결산인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부활이란 있을 수 없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 비로소 부활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기계가 고장이 났을 때 고장난 일부분만 수리한다면 얼마가지 않아서 또 말썽을 부린다. 완전히 수리하려면 그 기계를 완전히 부숴버리고 새로 만들어야 한다. 죄로 고장난 인간을 근본적으로 고치려면 완전히 부셔버리고 새인간으로 개조해야만 한다. 인간을 완전히 부셔버린다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을 의미하며, 죽음은 또한 부활에 이르는 필수조건이다.



죽음과 반대인 부활이란 형식으로 인간의 끝없는 수수께끼를 풀어준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신앙의 신비이며 이 신앙이 있기에 우리는 고통과 죽음에 희망을 둔다는 모순된 표현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전생애에 깔려있는 가시밭을 부활에 이르는 필수과정으로 알고 삶의 보람을 느끼며 웃음을 머금은채 살아갈 수 있다.



오늘의 세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의 결핍과 물질주의의 만연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 지구를 두갈래로 나누면 반은 유물론적 공산주의 이념으로 신이 없는 세계이며, 또다른 반쪽은 민주자유진영이다. 민주자유진영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삶의 목적과 행동의 동기가 현세물질의 가치에 두고있다면 이념상으로 그들은 물질주의를 따르는 자들이다. 그러면 과연 이 민주자유진영에 몸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일상생활의 목적을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을까?



이렇게 볼 때 현대는 신앙을 잃어가며 유물론이 득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는 지금 실질적으로 공산주의 이념인 유물론으로 물들어가고 이 상태로 나아간다면 인류는 결국 공산주의로 몰락하고 말 것이다.



오늘의 세계는 그 어느 때 보다 물질주의의 허황됨에서 정신을 차리고 자기의 과오를 때달으며 떠나버린 아비의 품으로 발길을 옮겨야하며 신앙을 되찾아야 할 때라고 본다.

이 신앙을 찾을 때 비로서 모든 고통과 죽음까지도 웃으며 맞이할 것이며 참된 빛이요, 희망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에로 이끄는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이 생명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실천하며 부활의 빛을 향해 걸아가야 할것이다.

















19.          부활대축일 요한 20,1-9 부활하신 예수

               - 이문희 대주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참된 삶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매일같이 새로이 시작합니다. 우리가 매순간을, 살아 나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매순간 우리에게 삶을 허락하시고 우리에게 삶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아온 삶은 말하자면 이미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를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은 어제의 나는 어떻게 죽었느냐고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어떻게 죽어갔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뜻없이 죽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이 보람 있어야 하고 보람 있는 삶은 뜻없는 죽음을 낳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을 성실하고 바르게 살면 성실하고 바르게 산 사람으로 죽는 것이고 쓸데없는 일만 하고 살면 쓸데없는 일만 하고 산 사람으로 죽는 것입니다.



어제의 우리의 삶은 다시 찾을 수 없고 이미 죽음에 넘겼지만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듯이 마지막 이 세상의 삶이 끝날 때 영원한 삶이 우리에게 있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영원한 삶이 결정될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만을 행하고 살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릴 것입니다.

영원히 삶을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를 버리고 이 세상을 죽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죽음이 삶이 되는 부활의 신비 가운데 우리는 더욱 성실히 하느님이 주신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희생이 되고 희생이 영광이 되는 진리를 이 세상에 널리 펴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전하며, 주의 부활하심을 굳세게 믿나이다.”



미사 때마다. 그리고 또 엄숙한 순간에 우리는 이런 환호성을 올립니다. 오늘도, 아니 오늘따라 더욱 이 말은 새롭고 뜻깊이 여겨집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주님을 피해서 대면하지 아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그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신 바로 그 주님이십니다. 주께서 오실 때 우리는 그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사흗날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목격자들이 말을 전하고 증인들이 대를 이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굳세게 굳세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이웃 중의 많은 사람도 모르고 있습니다. 내 가족 가운데도, 내 친구 가운데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묻히신 분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분을 따라 살면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드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제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활메세지 (1999년)                  전주교구장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를 기원하며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ꡓ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이 첫 마디 말씀으로 부활의 인사와 함께 축하를 드립니다. ꡒ평화가 여러분과 함께!ꡓ



요한 복음사가는 그날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ꡒ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ꡐ평화가 여러분과 함께!ꡑ 하고 인사하셨다ꡓ(요한 20,19). 그 때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주고 싶어 하셨던것은 ꡒ평화ꡓ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ꡒ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ꡓ(요한 14, 2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인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참다운 평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평화, 일체의 두려움이나 걱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킬 힘이 있는 그런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모든 두려움과 걱정에서 구해주실 수 있는 것은, 당신 스스로 ꡒ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ꡓ(마르 14,32) 하고 실토하실 만큼 극도의 두려움과 걱정을 겪으신 다음에 그것을 이겨내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맨 처음 만나신 여인들에게도 ꡒ평안하냐?ꡓ 하고 물으신 다음 ꡒ두려워하지 말아라!ꡓ(마태 28,9-19)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걱정과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걱정거리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미 직장을 잃어 생계가 막연한 이들은 ꡒ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ꡓ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이들도 언제 실직자가 될지 몰라 불안해합니다. 그런 걱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이들 가운데에서도 건강, 자녀교육, 미래 등에 대한 걱정에 눌려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사람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는 ꡒ걱정한다고 해서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ꡓ(마태 6,27)가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는 모든 걱정의 뿌리입니다. 사는 동안에 만나는 걱정거리들은 거기서 돋아나는 싹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쳐이길 수 만 있다면 사람은 모든 걱정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과연 제자들은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로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때부터는 닫아 걸었던 문을 박차고 나가 바로 전까지 두려워했던 유다 군중을 향해 외쳤습니다. ꡒ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나자렛 예수는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되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주셨습니다ꡓ(사도 2, 22-24).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일체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바오로 사도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ꡒ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ꡓ(로마 8, 35-39).


우리 그리스도교는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참되고 보람있는 삶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주시는 분, 참다운 ꡒ길이요 진리요 생명ꡓ이심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분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 부활로 이어지는 길임을 깨닫고 그 길 전체를 걸어 가기로 한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길에 들어섰던 것입니다. ꡒ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ꡓ(로마 6, 3-4). 또한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인 <성체성사> 곧 미사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무한한 사랑의 신비를 우리 삶 속에 되살아나게 합니다. ꡒ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ꡓ(1고린 11, 26).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탄생 2천 주년을 기념하는 대희년을 바로 앞두고 있습니다. 이 대희년은 무엇보다도 사람이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ꡓ(1고린 2, 9)을 해주신 하느님의 이 위대한 능력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전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죽음과 그 그림자가 드리우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부활하신 예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참 평화와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 평화가 먼저 우리의 마음 속에 굳건히 자리잡을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와 함께 저는 끝으로 이렇게 기원합니다.

ꡒ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된 것입니다ꡓ(골로 3, 15).

















 21.     예수 부활 대축일 (다) 부활을 새롭게 체험하고 증거하는 삶

                                                        윤종국 신부



오늘은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부활 대축일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교파를 막론하고 다함께 경축하는 가장 큰 축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오직 부활축제만을 기념했으며, 이때부터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는 주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에 계속 경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사도들은 자신들의 신원을 ‘부활의 증인'이라고 할 만큼(사도 1,22), 예수의 부활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부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부활에 대한 신앙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독특하고도 중요한 신앙 내용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신앙 내용에 대해서 만일 누가 “부활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고 질문한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또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부활신앙의 중요성에 비해서는, 부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있지 않는 듯합니다.

오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해서, 부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실망과 좌절에서 깨어난 제자들



예수께서 붙잡히시어 처형당하신 후, 제자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기에 급하였고, 실제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본 것은, 몇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부터 제자들은 다시금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활동의 내용인즉 “죽은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의 진위를 가리기 이전에 한가지 확실한 것은, 제자들의 모습과 태도가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제자들이 겪었던 좌절과 실망,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먹구름을 한꺼번에 몰아내 버린 폭풍과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위험 인물을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르침은 전혀 새로운 힘을 가지고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니,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자기들의 스승 예수가 처형당하자, 자기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던 겁 많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성 토요일 밤, 즉 예수께서 돌무덤에 묻히신 그 날밤에, 무덤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밤은, 마치 출애굽기에 나오는 빠스카의 밤처럼, 죽음이 생명으로 바뀐 ‘대역전'의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그 대역전의 증거로 ‘빈 무덤'에 대한 기사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이상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 빈 무덤이라는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 유다인들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했고(마태 28,11-15),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부활사건은 예수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들을 구분해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죽음조차 극복할 수 있는 희망



부활은 ‘단절'을 전제로 합니다. 제자들이 겪은 단절은 바로 예수의 죽음이었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안일한 생각들, 그리고 편안하고 영예로운 전망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존 관념들은 깡그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부활은 ‘새로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러 곳에서 제자들에게 신비롭게 나타나셨다는 복음서의 증언은, 예수께서 마치 귀신이나 유령처럼 홀연히 출현했다가 다시 사라지는 식으로가 아니라, 이런 ‘새로움'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런 새로움에 대한 경험과, 새로움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부활은 ‘변화'입니다. 신약성서는 부활이 어떤 것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예수님의 부활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즉,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집트 제국의 힘없는 노예집단이었던 히브리 족속이 빠스카의 밤을 겪고 난 후, 이스라엘 백성으로 형성되었던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소수 추종자들의 무리였던 제자들이 부활을 체험하고, ‘사도들'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부활은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활동하실 때부터 지니고 계셨던 하느님의 뜻에 대한 믿음이었으며, 고난과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 확신이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줄만큼 강력한 희망이었고,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전파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매년 우리는 예수 부활 대축일을 기념하고 있고, 오늘이 바로 그 날입니다. 기념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이고,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일을 더 이상 과거의 망각 속에 묻어두지 않고, 다시 현실로 끌어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을 기념한다는 것은, 파괴적인 단절을 뛰어넘은 부활사건을, 제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그 강력한 힘을, 그리고 부활신앙으로 자리잡은 희망의 힘을, 이천여 년 전의 과거에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이 사건으로 다시 끌어내서 같은 체험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실현할 책임



성 토요일 부활성야의 전례는, 온통 새로운 변화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빛의 예식에서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건너가는 것을, 말씀의 전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넘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던 빠스카를, 성세 예절에서는 우리 자신이 세례 때 새로운 사람이 될 결심을 고백했던 사실을 다시 상기시킴으로써, 우리 자신이 다시금 새롭게 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세례를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나서, 그분과 하나가 된"(로마 6,5)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부활의 사건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고, 세례를 통해 체험한 부활사건은 매년 성 토요일의 성세 예절 때 반복됨으로써, 우리

에게 다시금 부활의 삶을 살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단절'물 전제로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현재 삶이 예수를 알기 전의 삶과 분명히 단절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옛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례받기 전의 삶이 세례받은 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예를 많이 보고, 또 스스로의 삶에서도 체험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예수 부활의 의미를 묽게 만들고 있으며, 부활신앙을 화석처럼, 박제처럼 생명력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태도는 우리 자신에게서 부활의 체험을 앗아가게 하는 것이며, 부활로 얻은 새로운 생명을 다시금 무력한 것으로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을 되돌릴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살고 전할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움과 변화를 위한 단절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통찰하고 고백하면,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직을 수행할 것인지 마음을 다잡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22.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공통)      선의 승리

                                                       함세웅 신부



 교회가 권위 있게 우리에게 전하며 외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던 사도들이 체험한 바였고, 또 신앙의 여인들이 목격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을 믿고 또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무리가 피를 흘리면서도 증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걱정과 근심이 있는 우리에게, 어려운 사회에, 방향을 잃은 사회에 기쁨과 희망을 안겨 주는 힘찬 외침이기도 합니다.

  

그 기쁨은 내 마음 속에서 생동합니다. 부활하신 승리의 그리스도를 체험하였다는 기쁨, 악을 누르고 이길 수 있다는 선의 승리, 죽음을 물리치는 삶의 보증, 어두움과 썩음을 막는 빛과 소금의 구실이, 모든 의미를 새롭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야말로 부활의 기쁨을 받아야 합니다.

포기적이고 염세적인 이 사회에, 불신하고 불안한 이 현실에, 부정과 권력만이 지배하는 우리 주변에, 그래서 불평 불만, 원성만이 나오는 이 우리에게, 바로 부활의 승리와 기쁨이 더욱더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알려 주는 주님의 부활, 더욱더 착하고 의롭고 아름답게 형제적인 관계와 우애를 넓혀 주는 사랑의 가르침 때문에, 그 어떠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해결되지도 않는 현실 문제 앞에서, 부정과 악이 날뛰고 승리한 것같이 보이는 이 사회에서, 잔꾀를 부리며, 횡재하며 성공하는 그 무리 앞에서도 절대로 용기를 잃지 않고 좌절감을 갖지도 않습니다.

  

온 대지가 푸른 싹, 삶으로 격동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 마음이 부풀어오르지 않습니까? 그것은 정녕 삶의 누룩, 부활의 기운이 내 안에 움트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기도 합니다. 성세 성사로 씻기워진 나, 성체 성사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는 나, 나는 다시 뿌듯한 신앙의 기쁨과 부활의 승리를 담뿍 맛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웠던, 쓰라렸던 과거사도 돌이켜 보면,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나입니다. 그리고 어쨌든, 역사의 흐름에는 올바른 방향 제시가 항상 있었습니다 고통, 가난, 굶주림, 악이 많은 그만큼 역시 부활의 기쁨과 희망은 더 많이, 짙게 보장되었습니다. “죄악이 넘치는 그

곳에 하느님의 은총은 더 철철 넘쳐 흐른다"고 하신 사도 바울로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그것은 구체적으로 미사 성제에서 재현됩니다. 신앙으로 체험하고 행동으로 증거할 때가 바로 부활 축일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끈질긴 반복과 노력이 요구되며, 양심의 가르침을 따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고 증언하는 사람, 신앙인은 또 곧 용맹한 사람이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일치를 확신하면서, 이 확신의 무리들 모임이 바로 교회임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만민의 빛'인 예수님은, 이제 완성 단계에서 어두움을 제거하는 원천인 ‘구원의 빛'으로 나타나십니다. 부활 전야의 예전에서 바로 우리는 그 빛의 의미와 또 제대 옆에 놓여진 ‘부활초'의 상징인 사랑, 빛, 태움, 희생을 음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다'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모든 것, 우리의 신앙과 외침이 모두 헛것이었을 것이라는 사도의 가르침은 이 점을 명백하게 해 주셨습니다.

  

진정 우리, 신앙인이라면, 예수 부활이 1년에 한 번 지내는 축제, 으례 성당에서 듣는 것, 잊어 버릴만 할 때면 누가 지껄여 주는 것, 이런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바로 내 스스로가 그것을 믿고 체험하고 체험한 것을 다른 이에게 외칠 때, 예수 부활은 나의 부활이 되

는 것입니다.









  23.        주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31> (공통)           믿음과 불신

                                                    함세웅 신부



 오늘은 부활 제 2주일로 그 전에는 ‘사백 주일'이라고 했었습니다. 부활주일에 새로 영세 입교한 교우들이 흰옷을 받아 입고 영혼이 깨끗하게 씻겨졌던 것을 상징한 것으로 1주일이 지난 오늘 그 횐옷을 갈아입는다는 뜻에서 그러한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당신은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불신과 고집에 찬 토마에게 하신 이 주님의 말씀은 불신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피부로 느껴야만 직성이 풀리고 눈으로 보고 감각하는 것만을 인식하는 현대인에게, 이보다 더 큰 책망의 말씀은 없을 것이며 ‘보이지 않는 사물을 확증'(히브리 11,1)해 주는 믿음의 세계로 눈을 돌린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축복받은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현대의 인간사회는(어느 시대, 사회도 그러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특히 현대사회는) 물질 만능주의, 감각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에, 표면에 나타나 있는 얄팍한 것만을 알고, 그 표지 밑에 잠재해 있는 진실된 내면적 가치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 직접 오관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에 대해서까지도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 말은 현대인들이 무수히 되풀이하는 말입니다. 아마 현대인처럼 이 말을 익숙한 말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역시, 인내로 또 자비로운 시선으로 현대인을 내려다보시며, 불신이 가져오는 비극과 불행이 얼마나 큰가를 알려 주시면서 피와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현대인의 불신이 가져온 비극과 불행은 여기에서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습니다. 돈과 권력의 가치를, 즉 눈으로 보고 직접 누릴 수 있는 감각적인 권력과 쾌락을 너무나도 숭상한 나머지, 그와 반비례해서 인간의 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인간 이하로 가치가 추락했을 때,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겠으며, 이보다 더 슬픈 비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 결과가 오늘날과 같은 사회 풍조를 자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신문 3면을 메꾸는 끔찍한 기사만 보아도 알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율법을, 인간 이상으로 내세우는 것도 역시 하나의 악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당시에 유태인들의 바리사이 파가, 바로 그러한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주님이 가장 미워하시던 것도 역시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율법도 인간의 행복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기쁨과 감사를 느끼는 자는 믿음 안에 있는 자요, 교회의 품안에서 평온함을 얻는 자는 사랑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느님 나라를 획득하는 길이며, 사랑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고 확장시키는 일입니다. 











24.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부활하신 예수

                           - 김몽은 신부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달음질을 하여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가서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곧 떠나 무덤으로 향하였다. 두 사람이 같이 달음질쳐 갔지만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곧 뒤따라 온 시몬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 가 그도 역시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수의와 함께 흩어져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그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중추를 이루는 대사건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에 대한 신앙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의 범주에 속해 있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Ⅰ고린 15,17)



그러나 무덤에 찾아간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 같다. “그 사도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 날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부활에 대한 영신적 준비가 얼마나 부족했는지, 그리고 이 일이 믿기가 얼마나 어렵고 시간이 걸렸는지 복음서에 잘 나타나 있다.



주님께서 그렇게 여러번 되풀이해서 말씀하셨는데도, 그 깊은 신비와 감동, 믿음의 기쁨이 그들의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었다.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실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그분은 죽음에 속해 있지 않고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을 믿는 사람도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더 알아듣기 힘든 믿음일지도 모른다. 현세적인 것에만 혈안되어 살고 있는 현대인들, 특히 자칭 지성인들이라 자처하는 자들에게는 더욱 더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가소롭게 여기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으로 가소로운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그것이 아니라, 저 세상의 일을 이 세상의 척도로 측정하려는 태도가 가소로운 것이며,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두뇌로 생각하려는 것이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인간적인 면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신비이다. 따라서 부활신앙은, 외부적인 것, 낮은 것, 세속적인 것, 인간적인 욕망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깊은 내면의 영혼에 성령의 감도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인간의 차원을 초월한 드높은 하느님의 차원으로 승화된 영혼만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하늘나라의 특권이다.



이 부활신앙의 특권은, 추악한 인간이 찬란한 빛을 발하는 고상한 인격자로 변모하는 신앙이요, 탐욕스런 이기주의자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이타주의자가 되어 거룩한 하느님나라의 시민이 되는 믿음이다. 그것은 곧 새생명의 시작이요, 썩을 육체가 불사의 옷으로 갈아 입음을 뜻한다. 또한 그것은 참 사랑과 참 기쁨과 참 평화를 가져다 주며,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늘나라에 속한 자로서 살아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 두십시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 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박 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 할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Ⅰ고린 15,50-53) 이어서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하고 성서의 말씀을 인용한다.



참으로 부활신앙은 영원한 생명의 강에 뿌리를 뻗고 있는 나무와도 같다.





25.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부활하신 예수





여러분도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당신이 돌아가신후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우리에게 하신 이 말씀은 우리들 개개인이 살지 않으면 않되는 테마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오주(吾主) 예수 확실히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금요일 저녁 해가 지기 전에 무덤에 묻히시고, 다음 날 새벽에 다시 살아나 부활하셨다. 이러한 부활의 의미는 결국 오주 예수 당신이 먼저 부활하시고, 우리에게 너희도 부활하리라는 것을 약속하시면서 한편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드리고 죽음의 과제를 풀어주신 사건이라는 데 있다.



성서에 나타난 또 다른 부활 사건을 보자.

한번은 오주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친구 나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자 곧 그가 살던 곳으로 가셨다. 슬픔에 잠긴 나자로의 여동생 말따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가시던 도중에 스승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나온 자매를 만나셨다. “주여, 당신이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멀리 계셨기 때문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슬픔에 잠겨 하소연하는 자매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위로하시면서 “내가 부활시킬 터이니 너희들은 울지 말아라. 너희는 내 말을 정말 믿느냐?”고 하셨다.



그러자 말따와 마리아는 “스승의 말씀을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하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말따와 마리아의 대답은 무슨 뜻이냐 하면, “스승이 말씀하시면, 어른이 말씀하시면 듣겠습니다.”라는 말이었다. 자매는 부활의 깊은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오주 예수 마리아에게 “어디다가 네 오라버니를 묻었느냐?”고 물으시자 마리아는 오라비를 묻은 장소를 가르쳐 드렸다. “가서 그 무덤에 들어가보자. 내가 그를 부활시키리라”하시자, 마리아 막달라는 예수님을 붙잡았다.



“벌써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송장 썪는 냄새가 날텐데요. 주님 가시지 마십시오.”라고 그러자 오주 예수 하시는 말씀이 “마리아야, 너는 조금 전에 내가 한말을 그대로 믿는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 네 죽은 오빠를 다시 살리겠다고 하는데 너는 못믿겠다는 말이냐?” 막달라 마리아가 스승의 말씀을 들을 때는 그저 “언젠가 죽은 사람이 한번은 살아나겠지”하는 이런 어렴풋한 신앙이었다. 그런데 당장 가서 살려내겠다 하시니 도대체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러기에 죽은지 벌써 사흘이 되었고, 가보았자 시체 썪는 냄새만 날것이니 아예 그만두자는 뜻이겠다.



이런 것이 아마 인간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오주 예수는 실제로 나자로를 부활시켰다.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 사흘이나 되는 나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당신 부활의 예표였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이라 해서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대답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거듭 말하거니와 너희 자신은 지금 얼마만큼 이것을 믿고 있는가? 어느 정도 믿고 있느냐? 이런 논제를 심각히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이 몸이 죽어서 땅에 묻혔다가 그 어느 때에 한번 이 육신이 살아나서 내 영혼과 합한다는 이 부활의 도리를 정말 믿느냐 안 믿느냐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러나 나 이제 담대히 말하거니와 신앙인이 부활 도리를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느냐? 사람은 영혼과 육신이 합해진 존재이며 사람은 천사가 아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이 합해서 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영혼은 존속한다 하더라도, 살기를 계속한다 하더라도 육신과 합하기 전에는 영혼만 살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과 육신이 합해져야만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육신 없는 인간이 완전한 인간일 것이며, 그런 인간이 누리는 행복인들 완전한 것이겠는가? 이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산다고들 말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물질에 구애를 받지 않고 순전히 이성으로써만 살 수 있다는 것이리라. 과연 그렇게 될 수 있느냐? 마치 예로니모 성인 모양으로 광야에 가서 신앙으로써만 살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예로니모 성인 역시 겉을 보면 즐거움을 누렸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맛보았다.



그도 역시 추운 것을 알았고, 더운 것을 알았으며, 그도 역시 거친 것을 아는 한 인간이었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이 같이 합해서 살지 않으면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일단 사람이 죽으면 그 육체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해체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혼만이 홀로 살아서 완전한 한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육신을 떠난 인간이 천당에 가서라도 육신이 맛볼 수 있는 음식이 그리울 것이고,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꽃이 복 싶을 것이고, 육신을 떠난 영혼도 이 세상에서 제가 사랑하던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고 싶을 것이다. 육신을 떠난 그 영혼도 역시 육신이 있어야 그 육신이 감지하는 소위 즐거움이라는 것을 맛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인간은 마땅히 그런 복락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인간에게 맺혀진 가장 큰 마음의 사랑이 있다면 아마도 어머니의 사랑일 것이다. 그런데 어머님이 보싶다고 하자. 이때 우리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혼만을 보고자 하는가, 아니면 영혼 육신이 결합된 어머니를 보고자 하는가? 아마도 영혼 육신이 결합된 어머님을 뵈옵기가 우리의 희망이요 기원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신앙인이 아니다. 해체되었던 육신이, 죽었던 육신이 그 언젠가 한번 살아서 또 다시 영혼과 합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믿음이 다 헛되다고 바오로 사도께서도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거니와 인간 생활의 목적은 행복이다. 그런데 행복이란 그 자체는 영혼과 육신이 떨어져서는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더불어서 한 사람의 인간성이라는 것이, 달리 말하자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이 영혼에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혼과 육신이 합한 소위 완전한 인간을 두고 존엄성을 운운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천주교는 어떤 종교인가? 희망을 가진 종교이다. 그 희망은 또한 어떤 것인가? 영혼과 육신이 합체된 인간으로서 영원히 사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된다. 즉 우리가 이 부활의 도리를 믿느냐 안믿느냐가 신앙의 관건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부활의 도리는 어디에 깊이 뿌리를 박았느냐 하면 인간 자체에, 영혼과 육신이 합해 있는 인간 자체에 뿌리 박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부활사건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의 상징이다”하셨다. 삶과 죽음 또는 부활을 내가 주장하는 바이며, 이 세상에서의 33년간의 삶을 통해서 내 몸으로써 이것을 내가 증명해주고, 이것을 너희에게 알려야겠다는 것이 주님의 일생이었다. 오직 예수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짚은 도리이다. 깊고 오묘하며 알아듣기 어려운 도리이다. 그야말로 진정으로 믿기가 어려운 도리이다.



마리아 막달레나 모양으로, 누가 우리에게 물었다면, 즉 “부활의 도리를 믿느냐? 혹은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얼른 “믿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며, 그것도 정말 확신에 찬 정신에서 우러나오고 우리 마음에 깊이 사무치는 대답이 되어야 한다. 마리아 막달레나 모양으로 금방 믿는다고 해놓고, “스승의 말씀이야 우리가 다 믿어야죠” 해놓고 이제 주님께서 무덤에 가자니까 냄새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겠느냐는 의구심의 표현이다. 철의 장막도 있다지만 죽음의 장막은 과연 절대적인가보다.



사람이 일단 죽은 후에 “내 죽어서 보니 모든 일이 이렇고 저렇더라”하는 사후 세계의 체험을 전해주는 예가 인류 역사에 없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던 아버지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에 아들 딸에게 “나 죽어보니까 이렇고 저렇더라”하는 말씀이 없었다. 한번 죽은 후에 죽음의 장막이 일단 내리면 그 뒤 정경은 도저히 인간 사회에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되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인류의 체험이다.



인류 역사에도 있지 않았고, 시간의 제한을 넘어서며, 내 몸이 죽어 그 뼈가 땅에 묻힌지 십년, 백년, 천년, 만년이든 한번은 무사히 살아서 내가 영속하는 영혼과 합한다는 것을 믿기가 실제로 어려운 것이다. 이것을 정말 믿고 이 신앙을 따라 산다면 많은 면에서 생각하는 점과 행동하는 점이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반신반의 하기도 하고, 그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스승의 말씀이니까 부활한다는 것을 믿었다가 또 얼른 인간의 물질세계로 되돌아와서 부활을 믿기가 어렵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흔히 당황할 수 있다는 점이 인간의 오늘날까지의 대부분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너희에게 묻노니, 이 부활축일을 맞으면서 이 기회에 스스로 네 마음에 물어보라, 과연 나는 부활을 믿느냐? 부활축일은 즐거움의 축일이라 하여 알렐루야를 노래하며 지낸다. 물론 돌아가셨던 그리스도 부활하셨으니 즐거움의 알렐루야를 부르는 것이 당연하리라. 그러나 정작 그들이 부활을 진정으로 믿느냐 안믿느냐 여기에 바오로 사도 말씀대로 우리 신앙의 기본이 있다는 것이다. 이 기본 자체를 너희가 믿느냐 안믿느냐, 여기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죽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말씀그대로 진리의 길을 따라 갈 것이다. 부활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에게는 모든 영광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확실히 깨달아서 실천에 옮긴 예가 무수히 많다. 새남터에서 쓰러져간 우리 선조 치명자들은 어떠했던가.



옥에서 나와 이제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흔연히 또 즐겁게 알렐루야를 노래부르며 걸어갔고, 목에 칼을 받아 죽을 때에 조금도 굴함이 없이 흔연히 아까운 생명을 희생했던 정신이 어디에서 솟아났겠는가. 결국 그들은 내 육신이 당장 칼에 맞아 죽어도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 어느 때 그리스도 미리 언약하신 그 날에 내 육신이 살아나서 내 영혼과 합하리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풀이해서 말하거니와 부활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기초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리스도의 제자 개개인의 생활의 기반은 부활신앙에 달려 있다. 이 부활도리를 믿는 것이 어느만큼 강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맞는 자세도 달라진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우리 육신은 영혼과 다시 만날 수 있다. 내가 너희 얼굴을 보고 싶고 너희가 또한 내 얼굴을 보고 싶은 것처럼, 영혼과 육신 역시 서로 보고 싶다는 것이 인간이다. 영혼과 육신이 자유로이 결속되어 있을 것이고 이것이 완성되는 그때만이 하나의 안간으로서 참다운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26.                       부활 대축일 마태 28,1-10 (가) 갈릴래아로 먼저 가시리라

                                    - 김창석신부





요즘 사람들은 부활절보다 성탄절을 더 성대하게 지내는 경향이 있다. 성탄절은 연말의 들뜬 분위기와 어울려 더 큰 흥분을 자아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부활절이 더 중요한 날이다. 왜냐하면 고린토 전서 15장 14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교 자체가 헛된 것이 되며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사명은 스승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일이었다. ‘사도’란 말 자체가 부활의 증인이란 뜻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스승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고 그의 빈 무덤도 보았으니까 문제없이 증인 노릇을 수 있었겠지만,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천 년이나 된다. 그리므로 이제 우리 크리스찬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해야 할차례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증인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 노릇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스스로가 부활하는 것이다.



과거에 그리스도가 부활했으니까 우리 사람들도 미래에 닥쳐 올 최후의 심판 때 모두 부활할 것이라는 말은 요즘 현대 사람들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 우리 크리스찬들이 부활하는 것만이 그리스도 부활의 가장 힘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스스로가 부활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우리 안의 신(神)이, 즉 하느님이 부활해야 한다는 말이다.

과거에 신학생이었던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주장했다. 요즘에는 신학자들 중에서도 신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신이 ‘밥’을 주지 않고 신을 믿는 사람들은 더 못 사니 그런 신은 죽었다고 주장한다.



신은 조국의 근대화와 수출 증대에 도움이 안 되니 죽었다는 말이다. 신은 호화 주택이나 고급 승용차를 주니 않으니 죽었다는 말이다.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병을 고쳐 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신은 아무 반응도 없으니 죽었다는 말이다.

왜 하필이면 내 외아들을 죽게 하고, 왜 하필 나만이 과부가 되어야 하나 항의해도 신은 아무 반응도 없으니 죽었다는 말이다. 신은 거만하고,  모든 좋은 신의 은혜이고 나쁜 것은 인간의 탓이라고 말할 정도로 무책임하니, 그런 신은 죽었다는 말이다.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신은 마음이 약한 노인들이나 부녀자들이 믿는 것이지 달나라에 가는 이 시대에 신을 믿는 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권력이 신이요, 돈이 신이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기왕에 우리가 믿던 신은 죽었다는 말이다.

왜 신이 죽었다고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그들이 신을 부인하는 것은, 신을 믿는 사람들이 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신을 믿는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프로이트의 제자 에리히 프롬은 “19세기에는 신이 죽었다고 했는데 20세기에는 인간이 죽었다”고 표현했다. 신이 부활하려면 먼저 신을 믿는 사람들, 신을 믿는 내가 부활해야 한다.

나 스스로가 부활해야 한다는 뜻은 신이 지금 내 안에 부활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신이 부활해야 하나? 십자가를 보라.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신에게 그 십자가를 피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신에게 짓밟히고 십자가의 사형수로 죽어간다. 그러한 그는 신의 아들이었다.



이러한 신이 내 안에서 부활해야 한다. 이 말뜻은 인간 앞에 무릎을 꿇고, 인간의 발을 씻어 주고 입맞추는 겸손한 신이 부활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가난할 때 우리를 고쳐주기보다는 오히려 같이 아파하는 신이 부활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죽게 되면 우리를 다시 살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와 같이 죽어 주는 신이 부활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 외아들이 죽으면 당신의 외아들도 죽게 하는 신이 부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신은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이다. 바로 내가 그러한 신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그러한 나 자신이 부활해야 한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다. 예수 부활 주일 제단 위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다. 예수가 부활했으면, 그 십자가는 없어졌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왜 부활 제단 위에 십자가가 남아 있는가? 십자가 없는, 즉 고통 없는 부활이란 생각할 수도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따지고 보면 형틀이다. 어리석음과 수치와 모순의 형틀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있을 수 없다. 이 십자가는 우리가 매일 당하는 고통이다. 누구나 다 당하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이 고통을, 이 십자가를 딛고 일어서는 것이 부활이다. 고통이 끝이 아니라 고통 후에 기쁨이 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부활이다. 원망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부활이다. 원망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부활의 신앙이다. 불상이나 성모상 앞에서 고통을 없애 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기복 신앙이지 부활의 신앙은 아니다.

마침내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고, 죽는 날이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참된 생일이라는 사실을 믿고 증거하는 것이 현재의 부활이다.



남을 위하여, 특히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고 억압받고 정의를 위해 외치다가 감옥에 갇힌 이들의 십자가를 우리기 같이 짊어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별수 없이 부활의 증인은커녕 물질 만능주의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27.       예수 부활 대축일 <마태 28,1-10. 요한 20,1-9>  기쁨 그리고 빈 무덤

                                                      김현준 신부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시편 117,24)

  

부활은 이 세상의 어떤 사건보다도 큰 사건이며, 어떤 기쁨보다도 큰 기쁨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로써 이 세상과 인류의 운명이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광명으로, 죄의 사슬에서 자유와 해방으로, 죽음에서 구원으로 인류의 모습이 새로워졌기 때문이다,

참으로 부활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역사하심이기에, 부활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뿌리이며 핵심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부활하심의 징표로서 “빈무덤"(요한 20,1)을 보여주셨다.

  

오늘 복음에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 눈물과 한숨 속에서 밤을 새우고 ‘살아계셨을 때 좀더 그분을․..'하는 후회와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희망으로 그분의 시신에 바를 향료를 들고 무덤으로 향했다, 그분과 함께 한 지난 시간과 일들, 이제는 추억이 된 그것들로 인해, 지난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서둘러 무덤으로 향했다.

어찌된 일일까? 무덤은 비어 있었고 수의는 흩어져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누가 주님을 꺼내갔구나!"(요한 20,2) 하는 말과, 지난 밤을 여기서 새우지 못한 후회감이 밀려왔다. 그때였다. “마리아!"(요한 20,16) 하는 예수님의 음성이 마리아의 혼을 일깨웠고 “라뽀니!"하고 마리아의 입이 열렸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내 형제들에게 가서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마태 28,10) 하시곤 옛날처럼 걸어가셨다.



부활은 믿음 ․ 희망의 뿌리



  그렇다. 예수님의 부활로써 이 세상과 인류는 의미를 되찾았고, 믿음과 희망을 튼튼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희망도 부질없는 소리이며, 사랑도 무의미해진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부질없는 헛소리"(루가 24,12)나 “시체를 훔쳐갔다"(마태 28,13)고 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빈무덤은 예수님의 수난에서 영광의 부활에 이르는 징표이다. 그래서 빈무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죽음이 더 이상 무덤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며, 무덤이 종착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을 비워서(필립 2,7)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비워 이웃을 위하는 삶을 살으신 예수에게, 아버지 하느님은 그분이 부활의 영광 속에 있음을 빈무덤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요, 첫째가 말째 되고 말째는 첫째 되는,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당신 진리를 내보이는 방식대로 당신 부활도 빈무덤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을 비워 빈무덤화하는 사람들이다. 그 비워둔 마음 속에 자기 자신을 비워 세상을 꽉 채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죄가 흘러들어 심장이 따뜻해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친절하고 겸손하다. 보통 사람들은 죽는 것이 아주 죽는 것이고, 비우는 것이 빈털터리 되는 것이라, 생각하여 죽기를 두려워하고, 비우기를 꺼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자신을 비워 빈무덤화하는 사람들이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용서와 반성을 통해 과거를 비우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보통 마찰 속에 어두웠던, 서운했던, 한스러웠던, 상처 입었던 과거의 기억들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살아간다. 때로는 아니 필요할 때마다 그 기억들을 “꺼내 가지고"(요한 20,2) 상대방을 비난하고 현재를 어렵게 한다, 그래서 서로의 사이가 멀어지고 절망할 때가 많다.                



과거사 아닌 현재 진행형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꺼내 갔구나"하는 과거 사실에서 부활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는 현재의 자리에서 부활을 체험하였다. 예수님은 죽은 라자로를 부활시키면서 “살아서 믿는 사람은" 하시며, 부활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과 연결시키어 현재화하신다. 그러하기에 과거의 사실을 꺼내어 상처 입히거나 잘 살려는 결심에 발목을 걸지 않고, 용서와 반성을 통해 과거를 비우고, 과거를 현재화시키는 것이 부활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부활 대축일, 우리 모두 무덤에서 부활하심을 상징하는 부활 달걀을 이웃과 기쁘게 나누며, 그 이웃과의 잘못된 과거를 지우자.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듯이 우리의 과거를 비울수록 현재 우리의 모습은 새롭게 부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은총인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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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작성일 2008년 3월 14일 (금) 14:45
분 류 부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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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11.xxx.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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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예수 부활 대축일 강론 모음 ”
 

예수 부활 대축일

제 1 독서 : 사도 10, 34a.37-43

제 2 독서 : 골로 3, 1-4

복     음 : 요한 20, 1-9



제 1 독서: 로마 군대의 백인 대장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사도 베드로가 선포한 말씀이다. 이 선포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시작이 세례자 요한의 활동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주님의 공생활 시작을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때부터 계산하는 것이다. 이런 연결은 사도 1, 21에도 나타난다.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오시는 동안,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도 세례자 요한은 초대 교회에서 계속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었다는 증거의 하나이다.

둘째는,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 대한 증인이라는 점이다. 사도들은 특별히 주님의 부활의 증인들이다. 사도 1, 22에 이미 이것이 강조되어 있다.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기 전에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줄곧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 중에서 하나를 뽑아 우리와 더불어 주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해야 할 임무를 맡았다는 점이다. 사도들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제 2 독서 :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그리스도 신자의 새 생활 원리에 대한 말씀이다. 죄를 용서하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신자들은 천상의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상의 것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새로운 삶을 말한다. 이 삶은 지상의 것에 마음을 두는 삶과 반대된다.



복     음 :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보는 이야기이다. 두 제자는 빈 무덤에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20, 8). 그러나 유의할 점은 제자들이 먼저 들었다는 사실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난 후에 빈 무덤을 보았다는 순서가 중요하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신앙은 들음에서 온다(로마 10, 17). 보기 전에 먼저 들어서 믿기 때문이다.

빈 무덤이 주님의 부활을 완전히 증거하지는 못한다. 무덤이 비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비어있다. 이 빈 무덤 앞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누군가 무덤에서 주님의 시체를 가져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초로 빈 무덤을 목격했던 막달라 마리아도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고(요한 20, 13), 유다인들은 지금까지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마태 28, 11-15). 이것은 무덤이 비어있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현대인들의 설명이기도 하다. 둘째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태도이다. 우리 신자들은 그분께서 부활하셨다고 믿는다. 그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이지, 무덤이 비어있기 때문에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 그분은 참으로 부활하셨다. 무덤은 그분을 자기 속에 가두어 둘 수 없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분을 부활시키셨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부활 대축일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 부활의 참 기쁨이 넘쳐흐르길 빕니다.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부활이 우리 각자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잠깐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화창한 봄에 맞이한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집 짓는 자들이 내버렸던 돌인 그리스도를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아 새로운 성전을 지으셨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이 성전은 죽음을 이겨낸 모든 구원된 자들을 위한 삶의 안식처요 피난처인 것입니다.

즉 인간이 포기하고 절망한 가운데서 희망을 이끌어내시고 그를 통해 영원한 삶, 구원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모든 이들의 희망이요 삶의 참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어느 러시아 시인의 시구(詩句)를 연상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모든 이에게 참 기쁨과 희망, 즉 그를 믿는 이는 죽더라도 죽는 것이 아니요 영원한 삶으로 옮아간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부활은 우리에게 참된 신앙을 심어주고, 이 신앙은 두려움과 기쁨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알게 해줍니다.

경비병들의 겁에 질린 태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여자들에게 주어지는 기쁨으로의 초대는 분명히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 여자들이 최초로 만나 그의 부활 소식을 전한 사실은 그들이 예수의 부활에 기쁨으로 충만하였음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사도들은 실망과 겁에 싸여있었으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들은 그 여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고 괜한 헛소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전에 예수께서 부활하시리라 하신 말씀을 믿지 않았고 부활 자체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는 일찍이 그런 일은 없었고 있을 수도 없는 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그 여자들이 처음에는 두려워한 것이 사실이지만 “평안하냐?” 하시면서 그들에게 다가온 예수께 가까이 가서 두발을 붙잡고 엎드려 절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기쁨과 환희에 넘쳐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또한 천사가 그들에게 “빨리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당신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거기에서 그분을 뵈게 될 것이요.’ 하고 알려라.”라고 했을 때 무서우면서도 기쁨에 넘쳐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무덤을 떠나 급히 달려갔다는 이야기는 그들의 기쁨에 찬 태도를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점점 세력이 기울어 가는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하나, 둘, 수도원을 찾는 신도수가 줄어들더니 결국 다섯 명의 수사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맥이 풀린 다섯 명의 수사들은 하루 종일 불만스런 표정으로 앉아있을 뿐이었습니다. 양지쪽에 뿔뿔이 흩어져 앉아있는 수사들을 멀리서 지켜본 수도원장이 걱정스런 나머지 율법학자를 찾아갔습니다. 수도원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요, 이제 남은 다섯의 수사들은 서로를 예전처럼 존경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하는 일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수도원장의 걱정을 듣고 난 율법학자가 말했습니다. “가서 전하십시오. 내 예언에 의하면 다섯 명의 수사들 중 한 사람이 구세주가 될 것입니다.”

놀란 수도원장은 부리나케 달려가 이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수사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잠자리에 든 다섯 명의 수사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제외한 다른 수사들 중 한 명이 구세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다음날, 여느 날보다 일찍 잠에서 깬 수사들은 혹 구세주가 될지도 모르는 동료 수사를 위해 방을 청소하고 마당을 쓸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특별한 존경심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말 한마디라도 진심을 다해 예를 갖추었으며 동료들을 바라보는 수사들의 눈동자에는 깊은 신뢰심과 존경심이 서려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원에서 성스러운 분위기가 흘러 나왔습니다. 다섯 명의 수사들에게서 나온 깊은 존경심이 수도원 곳곳에 스며들었던 것입니다. 우연히 수도원에 들른 마을의 한 사내가 평온하고 고요한 수도원과 수사들의 진지한 눈빛, 조근한 발걸음에서 깊은 감동을 느끼고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하나, 둘, 사람들이 수도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원은 그 마을의 빛과 영혼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도 바로 이 수사들과 같은 존경과 기쁨에 넘친 마음과 태도에서 우러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리고 기쁨에 가득 찼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여자들이 있었기에 예수의 부활은 전해질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복음선포가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누리게 되는 기쁨으로, 이 기쁨은 온 세상 안에서 골고루 나누어야 하고 기쁨이 더 커질 수 있도록 사방으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제 1 독서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을 전하면서 누구든지 그분을 믿고 따르며 죄를 고백하면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구원의 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우리가 묵은 생활에서 벗어나 새 생활로 넘어갈 때, 즉 지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둘 때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제 2 독서 골로사이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면서 주님과 늘 함께하는 기쁨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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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1월 19일 (토) 10:02
분 류 부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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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부활 제 2주일 주일 강론 모음 ”
 



부활 제2주일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



제 1독서: 사도 2,42-47

제 2독서: 1베드 1,3-9

복음: 요한 20,19-31

 “갓난아이처럼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1베드2,2).

 이처럼 오늘 부활 제 2주일 전례는 세례에 의해서 교회의 수많은 세 자녀들 안에 확산되고 있는 새 생명의 놀라운 사건에 대한 기쁨에 찬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있다. 분명이 가르침은 모든 믿는 이들을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쇄신적’ 사건을 통하여 갓 태어난 어린아이들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지극히 아름다운 부활 감사송(2)을 통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고…그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죽음이 구원을 받았고, 그의 부활로 무든 이의 생명이 부활하였나이다.”



크리스찬적 생활의 쇄신



 오늘 제 1 독서는 이러한 견지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성령’이 임하신 후 전개되는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의 그리스도 신자들의 참으로 ‘독특한’ 생활을 특색있게 짤막한 형식으로 요약해주고 있는 사도행전의 대목들(2,42-47; 4,32-35; 5,12-16)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성령’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선물 이어서 성신 강림 자체가 빠스카의 완성인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오늘 전례의 배경이 온전히 빠스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근본적으로 생활을 쇄신한 그 사실은 주님의 ‘부활’ 의 신비에 놀랄만큼 진실된 참여로써만 설명될 수 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사도 2,42.44-47). 진정 그들은 ‘부활한 이들’ 다운 생활을 하였다. 즉 그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사회적 종교적 환경에 의한 옛 생활을 끊어버렸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며 시작하신 다른 ‘세상’의 ‘시민들’ 같았다!

 이 새로운 세상의 으뜸가는 특징은 마음의 ‘일치’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일치는 가진 바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어놓아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줄 만큼 무한한 사랑의 표지하에 나타난다. 사실, 자기의 가진 바를 파는 목적은 다른 사람과 갈라서고자 해서가 아니라 ‘함께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것의 보다 드높은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거듭거듭 가르치신(마태 5,3;2 고린8,9 등 참조)가난을 정신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소박하게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어떤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짜여진 하나의 경제조직 체계를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원동력을 전체적 인간관계에 전이시켜 구현시키고자 했던 하나의 깊은 종교적 체험을 접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같은 신앙을 함께 나누고 있다면, 어째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운이 좋아서든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시든― 풍성하게 가지고 있는 재물 역시 ‘함께 나누지’ 못하겠는가?

 이런 까닭에 사도행전의 저자는 여기서 코이노니아(koinonia, 42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의 직접적 의미는 재산을 ‘공동소유로 내어놓다’(Koina :44절)로 나타나고 있지만 우리가 볼 때 거기에는 훨씬 더 풍부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즉 ‘영신적 친교’ 또는 ‘형제적 일치’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이러한 형제애가 없었다면 그들의 그 용기있는 행위는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또 사실상 그들의 행위는 예루살렘 교회의 만성적 빈곤을 해결하는 데 경제적으로도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볼 때 그들의 이 같은 행위는 그들의 ‘새 생활’ 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요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열중함, 성찬의 전례(‘빵을 나눔’), 특별한 때와 장소에 따라 함께 모여 기도함 등등 거기에는 서로서로 마음을 열어 굳게 결합함으로써 교회의 특성을 활성화시키는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과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는 동기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부활’의 체험은 전염되듯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어 나갔다.



 “예수께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을 믿기 위해서는 그분을 개인적으로 직접 뵙기보다는 그분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생활한 증거를 통해 그분을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복음에 담긴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된다: 오늘 복음은 믿음에 대한 두 가지 간절한 호소로써 끝난다.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어떻게 해서든 손으로 만져보고자 했던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다른 하나는 요한 복음사가가 자기가 책을 쓴 목적을 밝히고 있는 결론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0―31).그러므로 신앙은 사도들을 통하여 전해지며, 그들은 그리스도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정말로 다시 살아나셨음”(루가 24,34 참조)을 우리 대신 보았고 또한 자신들의 새롭게 변화된 인간적 생활로 그 사실을 보증한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뚜렷이 나누어지고 있으며 그 두 부분은 동시에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동일한 빠스카적 분위기 때문에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예수께서 빠스카 축제 당일에 사도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이 펼쳐진다: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19-23).

 요한 복음사가의 관심은 자기의 독자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았던 예수와 다른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데 있는 것이 분명하다 :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자진하여 “손과 옆구리”(20절)를 사도들에게 보여주신다. 또 얼마 뒤에는 그 자리에 없었으므로 의혹의 도전장을 내는 토마에게 눈으로 그리스도의 새로운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는(25절) 그 옆구리의 상처에 그의 손을 넣어 보라고 하신다(27절). 다만 달라진 것은 그분의 새로운 존재 양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문이 잠겨 있었는데도”(19절)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 들어가실 수 있었다.

 그런데, 요한 복음사가의 보다 더 큰 관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참으로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주는 데 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이미 당신이 들어가셨고 이제는 당신 제자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된 그 새로운 생명의 ‘담보’ 즉 평화와 성령의 선물을 당신 제자들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두 번씩(19. 21절), 그리고 토마가 같이 있을 때 다시  한번 말씀하시는(26절)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라는 말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던”(19절) ㅔ자들의 ‘두려움’에 대한 요한 복음사가의 주해를 고려해 보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그 ‘두려움’은 곧 닥칠지도 모르는 어떤 위험에 대한 공포감 내지는 불안감을 뜻한다 :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자기 자신을 완전히 끊고 절대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이 그 제자들에게 하느님은 우리 인간들의 나약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자체를 지배하실 수 있는 강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려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평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첫 선물이다. 더우기 그분은 몸소 당신의 고별사에서 그 선물을 약속하셨다 :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요한 14,27).

 이처럼 ‘평화’는 구원적 선이 충만한 상태이며 이로써 믿는 이는 모든 사물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까지 해방된다 : 그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미 인간들의 내적 평온과 모든 인간관계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모든 적대 ‘세력’을 물리쳐 이겼다. 하느님께서는 특히 오늘날 우리 세계가 처해 있는 이 비극적 시기에 그 무엇보다도 평화의 선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 !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빠스카는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라”



‘평화’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선물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새로운 ‘창조’의 표지이며 동시에 그 결실이다.

 사실, 사도들에게 ‘숨을 내쉬는’ 행위는 성서상징학적 측면에서 볼 때 새로운 ‘창조’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진흙덩이에서 아담이 만들어질 때도 하느님께서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 2,7)고 한다. 또 에제키엘 37장의 커다란 환시에서는 야훼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37,9)ㅡ히브리어인rύach는 ‘입김’이나 ‘숨’의 뜻도 가지고 있다.

 더우기, 여기서 사도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은 죄의 ‘용서’와 관련 되어 있다 :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22-23절). 인간과 창조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것은 분명히 ‘죄’이다. 또 그 죄를 통하여 “죽음도 이 세상에 들어왔다”(로마 5,12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구원해주신 인간들의 마음에 성령의 선물로써 항구한 쇄신과 성화의 힘을 부어 넣어주시고자 하신다 : 불행히도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자체 안에 성령을 통하여 받은 죄를 용서할 ‘권한’에 의해 악에서 해방될 수 있는 능력과 새 생명을 찾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에서는 예수께서 두 번째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이 전개되고 있는데 예수의 이 두 번째 나타나심은 바로 다른 사도들의 말을 믿지 않는 토마의 불신에 기인한다 :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26-29절).

 이 말씀은 토마의 도전적인 발언에 대한 예수의 응답이지만 그것은 맞도전의 의도에 기인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사랑과 자비에 근거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결국 토마는 믿기를 아주 어려워하고 또 자주 신앙을 과학적인 추론이나 증거가 뚜렷한 사실과 혼동하는 모든 사람들-그러므로 우리도 포함해서- 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신앙은 따르고자 하는 마음과 겸허한 지성으로써만이 마주 대하여 극복할 수 있는 모험과 같은 것이다: 즉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1요한 3,20 참조)우리의 사리보다 밝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다. 하느님이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것처럼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신다면 그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우리를 억누르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우리를 당신 영광에 참여케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랑의 행위이다!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믿을 수 있는 ‘징표’를 요구하는 것은 그분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토마를 꾸짖으신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모든 향복은 우리를 위하여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그 이상의 것을 ‘보지 않고서’ 또 요구하지 않으면서 그분을 믿는 것이다: 과연 그분께서 그 이상 무엇을 더해주실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조건에서 믿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이미 우리 안에 작용하고 있고 우리가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겨드릴 마음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토마가 하는 신앙고백(“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28절)의 의미이다. 그것은 신앙의 일치를 뜻하지만 더 나아가 이제와 영원히 자기 생명의 참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철저한 의탁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오늘 제 2독서에 담겨 있는 의미이기도 하다. 거기서 베드로는 그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비록 온갖 고통과 박해의 시련을 당할지라도 ‘기쁘게’ 살라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뵙지는 못했을지라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믿음과 희망을 주시겠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결국 영혼을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1베드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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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말씀연구
작성일 2008년 3월 29일 (토) 12:02
분 류 부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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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부활 제 2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1.말씀읽기: 요한20,19-31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마태 28,16-20 ; 마르 16,14-18 ; 루카 24,36-49)

예수님과 토마스

복음서를 쓴 목적



2.말씀연구

 토마스 사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믿지 못했을 때의 모습과,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모습이. 나도 그렇게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이렇게 인사하셨습니다.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이렇게 인사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물질적인 제약도 받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를 건네십니다.



이 평화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진(죄)으로 집이 무너져 아이들이 지하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공기가 없어서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고 있었는데(죄의 결과), 그래서 아버지가 무너진 폐허를 걷어내고, 온 몸에 상처가 나는 것을 감수하며 파 내려가 마침내 아이들이 있는 곳 까지 피땀을 흘리며(수난과 죽음) 굴을 팠습니다. 신선한 공기가 아이들에게 전해지면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괜찮니?”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얻은 평화입니다. 그 평화를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구멍 난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의 상처. 유령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바로 처절하게 고통당하시고,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당신의 능력으로 죽은 체, 아픈 체 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고통 없는 기쁨과 희망은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함께 죽었었지만(꿈, 희망, 삶의 의미)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도 부활을 맞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런데 그 전에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을 하면서 불평과 불만 속에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일을 하면서 기쁨이 솟아나야 하고, 예수님의 일을 하면서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라는 말씀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통 근심 걱정과 불만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① 섬겨야 합니다. ②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③ 용서해야 합니다. ④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예수님을 대리할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갈 때 예수님의 구원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면서 힘을 주십니다. 그 힘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숨을 불어넣으시는 모습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 아담을 지어 내시고 숨을 불어 넣으시어 생명을 주시는 것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어 아담은 살아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제자들이 이제는 예수님의 사도로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바로 성령을 통해서 말입니다. 제자들이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골방에 숨어있을 때, 성령께서는 제자들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문을 박차고 나가서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그분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전했습니다. 신앙인이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성령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변합니다.

①하느님을 공경하고,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관심을 갖는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② 성경을 읽으면서 어떻게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통달하여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③ 선과 악을 구분하여 구원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원문제에 대해 의견이 있는, 생각이 있는, 그래서 어떻게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분별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④ 내가 가진 신앙의 힘으로 죄악과 악마를 거슬러 용감히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마침내는 순교까지 하면서 신앙을 굳세게(굳셈) 증거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⑤ 교리와 성경의 뜻을 잘 알아듣는 지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 믿어야 하는 것과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⑥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참 아버지로 모시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신뢰하며 하느님께 효성을 다하는(효경) 사람입니다.

⑦ 내 잘못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릴까봐 걱정하며 두려워 하는(두려워함)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의 시초이니 슬기를 가진 자는 두려워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슬기와 통달함과 의견과 굳셈과 지식과 효경과 두려워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바로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용서받았다는 것은 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받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도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용서를 청하며 하느님께 고개를 숙일 때, 교회는 그 죄를 풀어 줍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은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것입니다. 이 죄의 용서는 바로 부활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죄의 용서권한을 주신 이유는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을 고통 속에서 벗어나 기쁨과 희망 속에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을 것이다.”는 말씀을 통해서 그대로 두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답이 나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기쁘고,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나 구원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사실 성령을 통하여 새로 나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영원한 생명에 도움이 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결코 온전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용서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만이 완전한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용서를 받으려면 그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온전한 신앙인이어야만이 나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주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런데 열두 제자 가운데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습니다. 토마스 사도 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하지 못했던 토마사도와 직접 목격한 제자들과의 접촉이 없는 나는 같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직도 그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스 사도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 덜 죄송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3년을 함께 했지만 한 순간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등졌던 토마스 사도. 그 또한 제자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싶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동료들이 본 것을 그도 보고 싶어서 이렇게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 안에서 공동체의 모습을 발견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10명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고 토마스에게 말 하였습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너무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기에 믿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부활을 전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동료들입니다. 동료가 말하면 믿어야 합니다. 함께 일하는 봉사자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봉사자에게 믿지 못할 말을 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어찌 보면 열두 제자들은 아직 한 팀이 되지 못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누가 더 높은 사람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사실 높고 낮은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주님 안에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참조 2,19-22)에서 하느님의 한 가족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그래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아니라 무척 중요한 사람입니다. 내가 바닥이라면 그는 천장이고, 기둥이요, 벽인 것입니다. 바닥만 있는 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천장만 있는 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멋진 집이라 할지라도 문이 없다면 어떻게 들어갈 수 있으며, 어떻게 도둑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들이 처음에 잊은 것이 바로 “하나”라는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섬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그를 받아들이고, 섬겼다면 나는 그의 말을 듣습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한 말씀만 하시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옆에 있는 이가 말하니 나는 그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될 것 같은 말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신자들이 신자를 권면하면 잘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타종교의 신자나, 신흥종교의 신자가 유혹을 하면 그곳으로는 넘어갑니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가톨릭 신자들도 성당에 봉헌이나 교무금을 내는데 있어서 인색한 사람들이 좀 있습니다. 그런데 타 종교나 신흥종교로 간 사람들은 많은 것을 기부합니다. 뭔가 방법이 잘못 된지도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진실한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이상한 쪽으로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열려 있어야 보이고, 들리는데 닫혀 있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고, 형제요 자매라고 지내왔지만, 동료로서 함께 지내왔지만 그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도 문제요,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우리 예수님 만났어!”

토마스: “정신들 차려! 너무 충격이 커서 그럴 거야.”

제자들: “진짜라니까?”

토마스: “3일전에 돌아가실 때 그 모습 생각 안나? 어떻게 그렇게 돌아가신 분이 살아나셔. 너무 보고 싶으니까 환영을 본거야!”

제자들: “진짜라니까?”

토마스: “난 내  손가락으로 그분의 손에 난 상처에 넣어보고, 옆구리 상처에 손을 넣어 보지 않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어.”



이럴 때 내가 제자들 중의 하나라면 어떻게 말할까요?



제자들의 공동체도 그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다음에는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 신앙인다워야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입니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스도 같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잠겨 있는 문을 통과하셔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리고 토마스 사도 앞에 서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한 주일 동안 토마스는 아마도 홀로 의심 속에서 움츠리고 있었으며 다른 제자들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기 위해 이리 저리 찾아 다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토마스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토마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보통의 경우 고집 부리다가도, 일 한번 당해야 그제야 정신을 차립니다. 토마스 사도가 믿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토마스는 이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부활을 내가 믿어야 만이 그분께서 부활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셨기에 내가 믿어야 하는 것이고, 내가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결코 내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토마스는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넣어 보아야만이 믿겠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보았겠지요. 토마스 사도는 다른 사도들이 본 것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 모든 것이 사랑에서 나오지 않았을까요? 너무도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자신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겠습니까?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공의회 이전에는 신자들이 거양성체 때 “내 주시요, 내 천주시로다.”라고 고백을 했는데, 지금 어르신들은 속으로 나지막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면 내 삶도 바뀌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삶이 바뀔 때, 토마스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지 않았음에도 믿고 있는 나를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욱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나도 보지 않고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듣고, 그분께 지금 믿음을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실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제자들이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는 목격 증인들이 사라져 가면서 말씀의 왜곡이나 변형 등을 우려했고, 금방 오실 줄 알았지만 더디 오시니까 신자들의 믿음을 위해서,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바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필요한 것들을 모아서 기록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것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많은 표징들을 모두 기록했다면 엄청난 양의 말씀들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짧게 기록된 이유는 신자와 비신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1. 참된 용서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참된 용서가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를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2. 토마스의 불신앙은 다른 이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나는 예수님께 뭔가를 보여 달라고 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토마스와 같은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었는지 함께 이야기해 보고, 신앙인으로서 내가 해결해야 될 문제가 무엇인지 함께 나눠 봅시다.



3.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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