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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1월 19일 (토) 09:54
분 류 부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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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부활 제 5주일 주일 강론 모음 ”
 

부활 제5주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제1독서: 사도 6,1-7

제2독서: 1베드2,4-9

                                                          복  음: 요한14,1-12

참으로 놀랍고도 풍부한 신학적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주일의 독서들 상호간에는 빠스카적 배경 - 복음에서는 명백히 나타나고 있고 부분적이지만 제 2독서에서도 그 흔적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 - 을 제외하고 보면 다른 어떤 일치점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사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을 받은 귀한 돌”(1베드 2,4 ; 7절 참조)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특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 사람들은 그분을 ‘배척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희생적 봉사를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시어 이 세상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러이 들어 높여주셨다.

 복음에서 빠스카적 배경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 첫째, 오늘 복음 대목이 요한복음 사가가 최후 만찬과 주님의 수난 사이에 삽입하고 있는 소위 ‘고별사’(13,31-38 ; 14-17장)의 일부이기 때문이고 ; 둘째로는, 바로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께서 장차 제자들과 영원한 빠스카를 지내시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해 성부께 올라가셨다가 그들을 데리러 다시 돌아오실 것을 이야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 분은 또한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신다 :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요한복음 14장 전체는 ‘위로’의 주제로 일관되어 있다. 실제로 그것은 슬픈 순간이 있다 할지라도 항상 평온한 마음으로 기쁨 속에 지내라는 거의 동일한 표현으로 시작이 되고 있고 또 끝맺어지고 있다 :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떠나갔다가 다시 오겠다는 말을 너희가 듣지 않았느냐?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훌륭하신 분이니 만일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14,1.27-28).

 오늘 전례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대목은 그 고별사의 시작부분으로서 토마와(5절) 필립보가(8절) 등장하는 대화의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 이들은 주님을 이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계속해서 주님께 당신의 신비를 밝히 알려주시기를 요구한다. 이제 바야흐로 주님의 여정이 시작되는 그 죽음이야말로 다른 어떤 행위나 가르침보다 더 확실히 그분의 참된 신원을 ‘드러내준다’ : 빠스카의 사건이 아니하면 예수께서는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유다의 배반을 선언하신 뒤 당신 자신의 죽음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얼마나 큰 혼란과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탄에 잠기게 되었을지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진정 그들의 기가 꺾인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들보다 더 사랑하기를 배웠던 그분과의 주체할 수 없는 이별 때문만 이라기보다는 그 이별이 그들로 하여금 모든 신뢰와 희망을 저버릴 수 있는 위기로 그들을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당신의 비범한 심리적 관찰력으로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도들이 침착하게 신뢰심을 잃지 않도록 하시려고 애쓰신다, 예수께서는 이 대화 속에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보다는 제자들을 더 걱정하시며 그들의 믿음이 약화될 필요가 없는 이유들을 제시하신다 :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만일 거기에 있을 곳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겠느냐?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1-4).

 예수께서는 인간 존재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느낄 수 있는 피할 수 없는 마음의 ‘불안’을 하느님과 당신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맞서게 하신다(1절). “너희는 믿어라”(1절)라는 그 명령이 성부와 성자를 똑같은 차원에다 올려놓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품의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제자들이 보다 더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주기 위한 것이다 : 성부와 성자의 권능과 사랑은 그들을 위한 것이다!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갈 것이다“



 이러한 이유 외에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를 말씀하신다 :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기에” 당신께서는 바로 그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시며 자리가 마련되면 다시 와서 그들을 데려가 영원히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하신다(2-3절).

 그런데 여기서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일까? 주님께서 ‘종말에 다이 오심’은 분명히 중대한 사건이다 : 그러나 아마도 아직은 멀고 또는 거의 의식되지도 않는 그 사건이 사도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했을까? 그렇기 때문에 보다 더 가까운 직접적 어떤 사실, 예를 들어 부활하신 그리스도-마지막 날을 기다리실 필요가 없으신-의 ‘현현’같은 것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부활 후에 그리고 또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 그리스도의 현현(14,18-24;16,16)은 어떤 일시적인 현상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즉 그리스도께서 항구히 현존하여 계시다는 사실을 확증해준다. 따라서 비록 주님의 재림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고 여기지는 않을지라도 마지막 심판에 대한 기다림은 생생하게 그대로 남아 있다. 그 결과 관심이 마지막 주님의 재림으로부터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내적 실체로 또 공심판으로부터 모든 신자의 개별적 운명에로 옮겨진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장 3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주님께서 자기 오신다고 하는 이야기는 주님께서 공동체 가운데 현존하심에 대한 증거로서의 부활(요한 20,19.24.26;21,13참조)에 대한 암시로도 볼 수 있고 또 주님의 제자들 각자 각자의 죽음에서 충만히 실현되는 주님과 그들 사이의 재결합에 대한 암시로도 볼 수 있다”(H. van den Bussche, Jean, Desclee de Brouwer, 1967, p.396 ).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하지만, 사도들은 예수께서 하기는 그 말씀들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온통 물질적 차원에서만 알아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말씀하기는 ‘길’이라는 말을 그들은 어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따라가야 할 물질적 공간 그 자체로 알아듣는다 : 그것이 예수 자신을 가리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여기서 토마가 의문을 제기한다 :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5절). 그러자 예수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대답을 해 주신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가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6-7절).

 우리는 지금 특히 요한복음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그리스도론적 서술 가운데 한 대목을 접하고 있다 : ‘아버지’께 이르는 길을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서 찾았던 토마에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말씀해주신다. 바로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십자가의 길’이다 : 그 이유는 그분 자신이 곧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잠시 뒤에 필립보에게 말씀하신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11절).

 문맥 전체에 비추어 볼 때, 비록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진리요 생명’이라고도 하시지만, 오히려 강조점은 ‘길’에 있다 :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수 없다”(6절). 그러므로 생명과 진리는 예수께서 안내하시는 목적지라기보다는(목적지는 아버지이다!) 그분이 자신을 ‘길’이라고 선포하실 수 있는 근거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그분은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길’이신 것 이다. “그분은 성부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진리요 생명’이시며, 인간이 되심으로써 ‘길’이 되셨다. 이것은 진리와 생명에 이를 수 있기 위한 길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야. 일어나면 된다. 그 길 자체가 다가오기 때문이다…일어나서 걸어야 한다!”(S. Agostina, Tract. in Joann., 9).

 어쨌든, ‘길’과 ‘진리’사이의 이러한 밀접한 관계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요한 복음사가가 추상적 개념으로 보이는 그러한 것들에 부여하고 있는 실질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 복음사가 관점에서 말하는 ‘진리’는 드러나는 존재의 본질을 뜻하는 회랍적 개념과 다르며 또한 우리의 역사를 벗어나 있는 신적 실체를 뜻하는 헬레니즘적 영지주의가 말하는 개념과도 다른 것이 분명하다. 요한 복음사가에 있어서 “진리란 저 세상의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드러난 계시의 선물이다 : 그것은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또 역사적인 차원에서 활동하며 계시를 전해주는 그리스도와 성령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의 움직임은 하향적이다. 즉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고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내재화되는 계시의 움직임이다”(I. De La Potterie, La verite dans st. Jean, vol.Ⅱ, Roma 1977, p. 1009).

 바로 이런 까닭에 인간은 순수한 사변적 노력으로도 또 극도의 수덕주의적 노력으로도 ‘진리’를 획득할 수 없다 : 오직 육화의 신비를 통해 또 당신 성령의 선물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러 오신 그리스도라는 ‘살아 있는’ 길 (히브 10,20 참조)에 자신을 내맡기는 겸손한 믿음을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다.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제자들이 별 어려움 없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내용이다. 사실, 필립보는 예수께서 말씀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7절 참조) 다른 어느 곳에서 그리고 다른 어떤 거창한 표지를 통해서야 하느님을 뵈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 요청한다 :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읍니다”(8절). 그러나 이러한 요청은 예수께 보다 더 놀랍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시게 하는 기회가 될 뿐이다 :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니 무슨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9-11절).

 예수께서 당신 사도들이 아직도 당신을 당신과 ‘하나이신’(요한 10,30 ;17,11. 21-22) 성부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신다. 거기에는 분명 그분과 하느님이 동일한 분이심을 입증해주는 뚜렷한 ‘징표들’이 있다 :그분의 ‘말씀’과 더 나아가 그분께서 하시는 ‘일’ 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보는 데는 육신의 눈만으로는 부족하다. 즉 믿음의 눈이 필요하다. 그래서 계속해서  ‘믿음’ 의 주제가 등장하고 있다,(10,11절).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위험을 동반한다. 마치 수난사에서 사도들에게 닥치듯이 매순간순간 위기에 부딪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성부께로 인도하는 ‘길’ 이 되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오늘 제 2독서는 ‘돌’이라는 또 다른 상징적 개념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 이 돌은 사람들에 의해 내버려졌지만 하느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다 : 그리스도 신자들은 바로이 모퉁이의 머릿돌 위에다 매순간순간마다 자신들을 쌓아 나감으로써 교회라는 거대한 ‘신령한 집’을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

 “여러분,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선택을 받은 귀한 돌입니다.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 …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서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줄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합니다” (1 베드 2,4-5,9).

 이 대목의 내용은 매우 풍부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다만 부활을 중심으로 몇 가지 내용만을 다룰 수밖에 없다. 부화의 실체성은 그리스도의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 그러나 우리의 것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살아 있는 돌’ 이신 그분과의 결합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세례 받은 모든 이는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5절) 드리는 ‘사제직’을 부여받고 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세례 받은 개개인으로서든 공동체(‘하느님의 백성인 거룩한 겨레’)로서든 위대한 품위를 지니고 있다 : 그러나 그 품위가 항구하게 유지되려면 크나큰 정신력과 희생정신을 필요로 한다. 이것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실천적으로 요구하시는 ‘신령한 제사’이다.

 “매일 아침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우리의 하루를 받고 있다. 그 하루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하신 하루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길지도 부족하지도 않으며 별로 쓸데없는 허망된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하루를 ‘걸작’이 되게 살라고 요구하신다. 우리는 하루를 몇 월 며칠로 표시된 한 장의 메모처럼 여기고 있다. 마치 한 장의 종이처럼 가볍게 다루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을 속속들이 파헤쳐 이 하루가 오래 전부터 만들어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인간적 차원에서 지니고 있는 중요성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이 하루를 크리스찬적 차원에서 열심히 살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힘, 즉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과 불가능을 허용치 않는 희망과 온 세상을 뜨겁게 할 수 있는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드높은 뜻을 겸손되이 받들어야 한다”(M. Delbrel).

  또한, 제 1 독서 (사도 6,1-7)가 전해주고 있는 ‘일곱’ 부제를 세우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듯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에 대한 ‘봉사’도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부여받고 있는 그 ‘왕다운 사제직’ 의 요소이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은 결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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