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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1월 19일 (토) 09:53
분 류 부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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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부활 제 6주일 주일 강론 모음 ”
 



부활 제6주일





아버지께 청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시라



제 1독서: 사도 8,5-8,14-17

                                                   제 2독서: 베드 3,15-18

                                                   복    음: 요한 14,15-21

이 주일에는 성령에 관한 주제가 제 1독서와 복음을 연결시켜주고 있으며 또 한편 얼마 남지 않은 성신강림을 예고해주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마리아에서 행한 필립보의 설교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수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하여 그를 뒷받침해 복음 전파 사업을 권위 있게 펼치고, 아울러 무엇보다도 특히 교회와 그 새로운 공동체 사이의 형제적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한다 :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로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았지만 아직 성령은 받지 못했던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그들도 성령을 받게 되었다”(사도 8,15-17). 성령은 빠스카의 가장 감미로운 열매이다 : “사실 그때는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와 계시지 않으셨던 것이다”(요한 7,39).

 그리고 성령의 주제와 더불어 제 2독서와 복음에서는 빠스카에 관련된 일반적인 주제들, 예를 들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스승이신 주님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참여 또 그분께서 성부께로 돌아가신 후에 더 크게 나타나는 그분의 친밀한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기쁨’ 등에 관한 내용들이 언급되고 있다.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하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제라도 답변할수 있도록 준비해두십시오”



특히 제 2독서는 이런 의미에서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거기서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1 베드 1,1)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그들을 괴롭히는 어떤 박해에도 굴하지 말고, 아무 죄도 없으셨지만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죽음을 달게 받으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라고 권고한다. 그 ‘시련’ 이 야말로 그리스도신자가 자기 생애를 통틀어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참된 ‘예배’ 이며 진실한 찬미의 행위이다 !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보시고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십시오. 그러나 답변을 할 때에는 부드러운 태도로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여러분은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사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헐뜯던 자들이 바로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얼마나 낫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하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 죽으심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 (1 베드 3,15-18).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특히 옛 신앙고백의 내용을 반항시키고 있는 마지막 구절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 : 18절)에서 빠스카적 배경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으며 그것은 그 다음 구절에서도 계속 나타나고 있다 (19-22절). 여기서는 죽음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몸’ 과 반면에 계속 살아 있는 그분의 ‘영혼’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그 죽음과 ‘성령’ 의 힘에 의한 그분의 부활 사이의 대립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성령은 우리의 부활도 이루어 주실 것이다 :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입니다” (로마 8,11).

 이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삶 사이의 고무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변증법적 논리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매일매일 자기 안에서 거듭거듭 되풀이하는 체험이다. 이것은 그가 세상에 설명해주어야 할 ‘희망’ 의 신비이다. 바로 그가 중상모략으로 박해를 당하고 파멸의 지경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될 때 그는 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부끄럽고 조심스러운 태도’ (16절)와 자기 자신의 ‘그리스도를 믿는 착한 행실’ (16절)을 통하여 참된 승리자는 바로 그 자신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흘러나오는 억누를 수없는 무한한 생명력이 그 안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적개심과 악의 그리고 중상모략보다 훨씬 더 강하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자는 “그가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15절) 사람들에게 그의 삶과 그 삶을 드러내는 모든 외적 표현을 통해 답변해야 한다. 이 대목은 신자가 자신의 믿음을 확신을 가지고 자신있게 드러내고 또한 지켜나가기 위해 갖는 의무를 표현하는 데 자주 인용되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 크리스찬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생활 전체로써 선포해야 한다는 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추방시켜 죽음의 어둠 속에 영원히 매장시키려 했지만 그분은 그 죽음의 감옥을 막고 있던 바윗돌을 굴려내셨다. 그리스도 신자는 바로 이 명명백백한 사실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신앙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희망’의 메시지의 선포자가 될 수 있다 : 만약에 사람들이 ‘부활의 빛’ 즉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봉사를 위해 완전히 무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힘’에 자신들을 기꺼이 내맡긴다면 불의, 부정, 폭력, 고문 그리고 죽음까지 모든 것이 뒤엎어져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고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할 것이다”



우리가 지난주에 주석하기 시작했던 ‘위로’의 대화를 계속하고 있는 오늘 복음은 바로 사랑의 주제로 시작해서 사랑의 주제로 끝나고 있다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요한 14,15.21).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의 죽음에 대해 ‘걱정할’(14,1) 필요가 없는 여러 가지 이유를 말씀하신 다름, 다시 지극히 위로를 주는 말씀을 덧붙이 신다 :즉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항상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시겠다고 하신다(‘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하지만 그 사랑은 행동을 통하여 입증되는 참된 것이라야 한다. 그 사랑의 진실 여부를 가리는 시금석은 각자의 계명을 지키는 능력이다(15절. 21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뜻을 드러내는 당신의 ‘말씀’ 이 곧 당신 자신임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계명’을 통하여 드러나는 그분의 뜻이 실현되는 바로 그곳에 그분 자신이 현존해 계시며 또한 그분의 모습이 더욱 친밀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분이 계신 곳에 ‘아버지’도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 사랑에 대한 응답의 범위가 더 확대되고 있다 :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 즉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그분들을 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들을 더 ‘사랑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 우리 안에 그분들을 내재화시키는 그 ‘계명들’을 보다 더 충실히 지키는 사람이다. 어쩌면 우리 크리스찬들이 주님의 이 말씀들을 너무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다 : 그러기에 우리에게 사랑의 열기가 부족하고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찬란한 빛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아직도,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그분과의 ‘신비로운’ 만남에로 불리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의 성령



예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당신 자신을 보다 더 친밀하게 ‘드러내 보여주실 것’ 을 약속하시는 외에도 성령의 ‘선물’ 을 제자들에게 약속하신다 :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17절). 요한 복음사가에서 있어 ‘보다(theorein)' 라는 동사는 순전히 외적으로 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역사적 사실 (예를 들어 예수의 삶이나 죽음)에 있어서 단순히 외적으로 드러나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의 표지를 깨달을 수 있을 만큼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 예리하게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어쨌든 세상은 하느님께서 개입하고 계심에 대해 이와 같은 개방적이면서도 수용적인 자세를 갖추고 있지 않다 : 마치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님과 같다. 장님이 빛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눈을 고쳐야 하듯이, 세상이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세상’이 기를 그쳐야 한다!끊임없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빛과 어둠간의 극적 사건이 제 4복음 전체를 처음부터 뒤덮고 있다 :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요한 복음사가가 성령을 제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 자체에도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성령을 ‘협조자’(회랍어로는 Paraclito)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요한 복음사가 고유의 용어이다.(요한 14,26.26 ; 15,26 ;16,7 참조) : 일반적으로 이말은 피고인을 돕는 사람 즉 변호사를 뜻한다. 그리스도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라고 할 때 이런 의미가 나타난다 : “나는 믿음의 자녀인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혹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1 요한 2,1). 하지만 복음에서는 그 개념이 변호사의 기능보다는 믿는 이들을 도와주는 자의 기능을 뜻한다 : 여기서 ‘기운을 돋우어주다’ ‘협조하다’ 의 의미도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은 신자들이 어려움에 부딪치게 될 때 그들을 위로 해주고 보증해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일 자체를 계속하는 ‘협조자’이다 :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실 것이다”(16절). 이 순간까지는 예수께서 친히 성부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지켜주셨고’(17,12) 그분이 떠나가시는 지금부터는 성령이 그분의 양떼를 보호해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보호가 좀 허술해지지 않을까? 천만에!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17절).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희랍어 전치사 para(함께), en(안에)의 연계적 의미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 para(함께)는 어떤 한 장소에 항구히 머무르는 상태를 뜻하기보다는 인격 상호간의 환대, 접대 또는 친교를 뜻하고, en(안에)은 성령의 현존이 지니고 있는 내재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전체적 의미는 성령은 그리스도 신자들이 그들의 주님께 충실할 수 있도록 내면으로부터 그들을 도와주고 위로해 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성령은 무엇보다도 특히 그리스도 신자들이 진리를 터득하도록 도와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셨으며 또한 실천적으로는 그분과 동일시되는(14,6 참조) ‘진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해준다 : 그래서 ‘진리의 성령’ (17절)이라고도 한다. 이 표현은 이미 후대 유다이즘 속에 잘 알려져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인식케 하고 그 진리와 일치된 삶을 살게 하시는 성령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Regola della comunita di Qumran, 3,18;4,26 참조).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 할 수도 생활화할 수도 없다: 이런 까닭에 사도들은 오로지 성령이 임하신 후에 비로소 완전히 비추임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오직 성령의 빛을 충만히 받아들여야만 실현될 수 있다:성령은 분명히 교회로 하여금 “온전히 진리를 깨닫게 해주실 것이다”(16,13). 하지만 그 진리는 새로운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진리와 다른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진리를 더 뚜렷이 전체적으로 드러내줄 뿐이다: 즉 ‘그리스도의 때’와 ‘성령의 때’  가 서로 결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분이 아니다: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를 더 잘 인식시키고 보다 강렬하게 그리스도의 더욱 친밀해진 새로운 현존을 생활화하도록 도와줄 뿐이다. 이에 관해 우리가 지금 주석하고 있는 이 이야기 중에서 특별히 감동적인 다음 몇몇 구절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기어이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지만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18-20절).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고아들’처럼 내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이다. 이 말은 아주 오랫동안 요한 복음사가의 심금을 울렸던 예수님의 고별사가 전개되었던 감동적 분위기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들은 결코 ‘고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의 죽으심 자체를 넘어서 여전히 그분을 뵙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만 그것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뒤에 이루어지는 그 제자들과의 첫 만남에서 비롯되는 항구하고도 다양한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해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그 후대 사람들이 하게 될 모든 체험을 말해주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앙을 통하여 느끼는 것은 그분과의 ‘실제적’ 접촉과 똑같이 강렬하고도 참된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19절). “요한 복음사가는 목격증인들의 개인적 체험을 신앙의 메시지를 통해 전수하고 또한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을 통해 자신의 신앙의식을 더욱 확실히 함으로써 그 두 가지를 무의식적으로 합치시키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그의 신앙상태는 그가 한 생활한 체험과 떼어서 생각될 수 없으며 또한 그 체험은 교회 안에 반향 되어 전해질 수밖에 없다…부활은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항상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교회는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부활 밤에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기쁨의 환호성을 터뜨리며, 부활 낮 미사의 입당송에서는 장중하고도 위엄이 충만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위로에 대한 확신을 기쁨에 차서 노래한다: ”나 부활하여 지금도 당신과 함께 있나이다, 알렐루야! ”(H.van den Bussche, Jean, Descleede Brouwer, 1967, p. 412).

 바로 이러한 확신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특별히 엄숙하게 말씀하신다: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0절). 이 신비에 찬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었던 것이다.(이사 2,17: 4,1이하 참조).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신적 개입이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고 있다. 믿는 이에게는 ‘매일매일’ 이 모두 ‘그날’ 일 수 있으며 또한 ‘그날’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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