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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3월 29일 (토) 13:27
분 류 부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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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부활 제 3주일 주일 강론 모음 ”
 

        1. 강길웅 신부(가)/2                     2. 김정진 신부(가)/4

        3. 유재국 신부(가)/5                     4. 강현홍 신부(가)/7

        5. 허영민 신부(가)/9                     6. 우리 삶의 진정한 목표(가)/10

        7. 최인호(가)/11                   8. 민병섭 신부(가)/13



1.       부활 제3주일   루가 24,13-35 (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2,14.22b-33 (예수께서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제2독서 Ⅰ베드 1,17-21 (여러분은 티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해방되었습니다) 

복 음 루가 24,13-35 (그들은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줍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은 과연 어디에 계시는 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믿고 있으면서도 '지금, 바로 여기에' 그분이 계시다는 사실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믿으면서도 결국은 그 믿음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들이 안고 있는 모순입니다.



쌩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라는 책에 보면 여우가 왕자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올바른 것은 마음으로 봐야지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틀림없는 말입니다.

어떤 부인이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위로 올려가지고 왔는데 이틀이 지나도 남편이 모르더랍니다. 화가 난 부인이 남편에게 " 당신은 마누라라는 여자가 집에 있는 줄이나 알고 있는 거예요?" 하고 대들자 신문만을 보던 남편이 쳐다도 보지 않고 “당신은 그 성질이나 고쳐요."하면서 대답하더랍니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마누라 머리가 위로 올라갔는지 아래로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이 도대체 요즘 무엇을 원하고 있고 또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평생 살아도 모르게 됩니다. 그런데 실로 많은 사람들이 어처구니없게도 서로 바라보지 못하는 모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 초파일을 맞이하는 법어에서 조계종의 이성철 종정은 "사탄도 부처"라는 말을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눈을 뜨면 불자들에게는 세상이 온통 부처며 눈을 뜨면 크리스천들에게는 세상이 모두 주님이 됩니다. 이처럼 눈을 뜨고 못 뜨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흑과 백'이라는 미국 영화가 있습니다. 유명한 배우 토니 커티스 와 시드니 포이티어가 주연한 영화입니다. 둘 다 아카데미 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백인과 흑인 두 사람이 한 수갑에 채인 죄수로서 이송되는 도중에 함께 탈출하게 됩니다. 그런데 둘이는 피부색뿐만 아니라 생각도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서로 원수처럼 미워하며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과부가 사는 농가를 만나서 수갑을 풀게 되며 백인은 그 집에 머물게 되었고 흑인은 다시 도주의 길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였습니다. 집에 남은 백인이 과부에게 "그 검둥이가 지금쯤 어디까지 갔을까?"하고 물어 봅니다.



그때 여자는 "아마 죽었을 것이다."라고 지나가는 말로 대답합니다. 이 말에 백인이 깜짝 놀라 묻자 과부는 말하기를 아까 길을 가르쳐 줄 적에 수렁에 빠지는 길을 일러줬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백인의 감겼던 눈이 번쩍 뜨이게 되었습니다.



불쌍한 검둥이가 결코 그렇게 죽어서는 안됩니다. 비록 원수처럼 미워했지만 고생을 함께했던 형제를 불행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백인은 반사적으로 흑인을 구하기 위해 뛰어갑니다. 여자가 총으로 말려도 다 버리고 흑인을 살리기 위해 달려갑니다. 결국 백인은 흑인을 구했으나 두 사람은 다시 잡혀서 한 수갑에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평화롭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눈만 뜨면 세상은 온통 진달래꽃 피는 봄날이 됩니다. 원수가 없고 모두가 예수요 부처입니다. 그러나 눈을 못 뜨면 1년 365일이 모두가 쓰레기 같은 지옥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의 눈을 떠야 합니다. 지금 내 곁에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믿는 우리가 어려울 때 붙잡고 매달릴 분은 오직 예수님뿐인데 그 주님이 지금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면 도대체 신앙의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또한 때때로 힘든 세상을 어렵게 걸어가는 우리들인데 우리 곁에 동행해 주시는 주님을 뵙지 못한다면 도대체 부활의 은혜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이 주님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는 중대한 이유는 어떤 고정 관념이나 편견, 또는 고집이나 완고함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못 보며 오로지 자기만 바라봅니다. 술꾼은 술만 보며 노름꾼은 화투짝만 보듯이 자기 머리 속에 갇혀 있는 그 옹졸함 밖에는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제가 시골 본당에 있을 때 일흔이 넘은 어떤 할머니가 외딴 집에 혼자 사셨습니다. 한번은 찾아가서 "할머니는 외롭지 않으셔요?" 하고 물었더니 그 할머니가 나를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더니만 " 예수님과 함께 사는데 무엇이 외로워요."하면서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그때 저도 함께 웃으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실감있게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만 계시고 땅에는 인간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생하신 주님,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 곁에 계십니다. 늘 우리와 함께 동행해 주십니다. 따라서 믿고 늘 행복하게 삽시다. “주님, 오늘도 우리와 함께 묵어 가십시오."











2.          부활 제3주일   루가 24,13-35 (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교훈,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에서 듣게 되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부활절의 기쁨과 향기를 한층 더 북돋아 줍니다. 이 두 제자는 예수님께 걸었던 희망과 기대가 예수님의 비참한 죽음으로 산산이 깨어지자 실망과 실의에 가득 차서 낙향하는 도중 뜻밖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옵고 하도 기뻐서 그 날 밤 총총걸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왔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의 엠마오 두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 슬하에서 몇 년 간이나 기거를 같이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충분히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예수님과 같이 용기를 갖지 못하고 또한 예수님과 같이 기도할 줄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러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세말까지 같이 있겠노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덕분으로, 또한 입으로 숨을 내 부시며 주신 성령의 은총으로(요한 20:22)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도 잘 이해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자신들도 기도를 잘 하게 되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기를 발휘하여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온 세계에 전파하고 예수님과 같이 자기 목숨까지 하느님께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 부활의 효과인 것이며 부활자 예수님은 세상 마칠 때까지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엠마오의 두 제자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는 예수님 부활의 의의를 너무나도 잘 설명해 줍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발현하신 이야기 중에 우리는 두 가지의 큰 뜻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예수님 부활에 대한 증인을 두 사람 더 증가시켜 부활의 확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할 수 있겠는가를 엠마오의 두 제자들을 통해서 잘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중 첫째로 만나 뵐 수 있는 방법은 성경입니다. 두 제자들이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성서를 해석해 주실 때였습니다. 20세기에 사는 우리 신자들도 성서를 통해서, 달리 말하자면 성경을 연구하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을 만나뵐 수 있고 그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은 성경 안에 그대들과 같이 계신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심으로 육체적으로는 우리 앞에서 사라졌지만 성경을 통해서 그 강한 말씀을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하시며 우리와 같이 계시며 우리의 신앙을 북돋아 주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경 말씀을 실천하는 데서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엠마오의 두 제자들이 엠마오에 다다랐을 적에 낯선 나그네가 더 멀리 가려는 것을 보고도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필연코 나그네가 예수님이시란 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는 나그네를 잘 대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이것을 설명하기를 <그들의 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적에는 열리지 않았으나 성경의 말씀을 실천할 적에 열렸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근본 정신은 사랑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거듭 거듭 말씀하시기를 <성경이 인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가, 또한 우리들 인간이 하느님과 인간을 얼마나 사랑해야 되는가를 명시해 주는 것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성인은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심중에 사랑을 갖고 있다면 그는 성경 전체를 알고 있는 자이다>라고 말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 불우한 자, 울고 있는 자, 배고픈 자, 슬퍼하는 자, 병고에 고생하는 자, 감옥에 갇힌 자, 인간사회에서 저버림을 받은 자, 고아들, 양로원 노인들 중에 예수님은 계시며 우리가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적에 참으로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되는 것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셋째 방법은 성체 성사에서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영성체 할 적에 예수님을 만나 뵈올 뿐더러 예수님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드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을 적에 엠마오의 두 제자들은 비로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성경과 사랑의 실천과 영성체라는 세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음을 깊이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3.        부활 제3주일   루가 24,13-35 (가) 그리스도는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유재국 신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빠스카 이야기는 잊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절망에 찬 이 두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루가의 의도는 복음서를 통해서 주님이신 예수를 본받도록 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가 바로 크리스찬의 모델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다. 고통과 사랑을 우리 형제들에게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 각자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신앙은 순례하는 사람들의 실을 밝혀주는 동시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다. 무덤으로부터 나오신 지 얼마 안되며, 아직 빛이 가시기도 전에 희망을 잃고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부활한 그리스도가 드러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그리스도는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무슨 모습으로 그들에게 드러나야 하며, 그들의 텅빈 마음을 채우실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도는 우선 장황하게 설명을 해 주신다. 상심한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답변하는 사람을 회피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를 듣고 이해하려고 한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의 길은 멀다. 예수는 시간을 넉넉히 잡으시고, 그들과 함께 걸으신다.



빈 무덤? 걱정하는 부인들의 이야기. 이 두 가지가 “예수에게 일어난 일”에 관한 제자들의 마지막 이야기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다 해버린다. 그때에 낯선 사람이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예수에게 일어난 일”을 달리 설명하기 시작한다. 제자들은 설명한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재판과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은 스캔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슬픈 눈으로 보는 대신에 다른 빛을 그들에게 내려주면서 달리 설명하신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설명하신다.



낯선 사람은 조용히, 그러나 확신에 찬 말씀으로 이 모든 사건을 다른 각도로 설명함으로써 그들을 내적으로 감동시킨다. 점점 그들의 마음은 변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의심이 끌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열리기 시작했고 폭풍이 지난 다음의 고요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 후에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뜨거운 감동을 느끼지 않았던가?” 하느님 말씀의 위력이 “마음으로 묵상하는 사람”에게 전달된 것이다.



제자들은 그들의 집에 도착하였지만, 그리스도는 길을 계속 하시려 하신다. 그때에 제자들은 예수를 붙잡는다. 그러면서 주님을 초대하는 말이 아름다운 기도로 변한다.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 가십시오. 이젠 하루해도 다 가고 저녁이 가까웠습니다.” 예수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신다. 어떻게 나누시는가?



그는 말씀을 나누고 빵을 나누신다. 그는 성목요일 최후만찬 때와 마찬가지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신다. 당신 자신을 주시는 이 행동으로 그리스도는 계시되며, 살아 계신다. 그분이 계시지만, 이제는 계시지 않는다. 이제 그리스도와의 모든 접촉은 신앙으로써만이 가능한 것이다. 마리아 막달라에게 말씀하셨고, 사도 토마에게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를 기억하기로 행하는”(루가 22,19) 성체성사가 거행될 때에 현존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베드로가 그의 부활의 첫 증인인 교회 안에 현존하신다. 주 참으로 부활하셨고,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 그리스도는 두 제자의 증언으로 언제나 현존하신다. 그 두 사람도 길에서 당한 일과 예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 분을 알아보게 되었다. 내 생활의 증거를 통해서도 그 분이 현존하시는가?











4.              부활 제3주일   루가 24,13-35 (가)  부활의 희망,

강현홍 신부



두 주일 전에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고 계속해서 예수 부활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연중 부활시기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기초입니다. 참으로 부활의 사실은 우리가 신봉하는 종교의 가장 중대한 요점입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업적이요, 기적 중의 최대의 기적은 죽은 자의 부활입니다. 부활 중에도 가장 큰 기적은 죽은 자가 스스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성자의 신성을 증명키 위해 부활과 스스로 부활하는 이 두 가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부활은 주의 신성을 높이 부르짖는 가장 유력한 증명이기에 하느님께서 다윗이나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로 하여금 1천 년, 7백년 전부터 예언케 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이 성전을 허물어 보시오. 사흘 안으로 내가 다시 세우겠소” (요한 2,19)라든가 “요나가 큰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삼 주야를 지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땅속에서 삼 주야를 보낼 것입니다” (마태오 12,40), “사람의 아들은 머지 않아 사람들에게 잡혀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마태오 17,23)고 몇 번이고 밝히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언대로 죽으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서는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약한 사도들이 갑자기 대담한 증인이 되어 주님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버리게 된 것도 확실히 부활하신 주님을 본 때문이 아닙니까? 무덤을 지키던 군인, 제사장들도 부활을 의심할 수 없어 다만 어떻게 하면 이 사실을 은폐해 버릴까 하고 고심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개종, 수많은 순교자들의 불요불굴의 용기, 이것이 모두 주님의 부활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만일 부활이 하느님의 업적이라면 스스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심을 증명하시고자 미리 예언하셨고 예언하신 대로 과연 부활하셨다면,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증명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의 교리, 그분의 도덕, 그분의 교회, 그분의 성사는 모두 신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고, 영원한 생명도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바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러한 기초 위에 견고히 서 있으니 어떠한 일이 있다 하여도 아무런 흔들림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산처럼 바위처럼 굳건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은 우리 영혼을 부활시킬 좋은 기회입니다. 성 야고보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동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믿음에는 실행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성교회가 명하는 대로 부활시기에 임무를 다하여 영혼의 부활을 도모해야 되겠습니다.



부활, 이 영혼의 부활로 말미암아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평화와 환희가 창일 되고 가슴에는 행복이 가득 찰 것입니다.

여러분! 꼭 부활절을 이용하여 영혼을 부활시키십시오. 영적 죽음에서 은총의 생명으로, 냉담에서 열심으로, 열심에서 완덕의 생활로 부활시켜 지금까지의 생활을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됩시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생각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말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훌륭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합시다. 그것도 하루, 이틀, 한두 주일에 그치지 말고 세상을 마칠 때까지 새로이 부활한 생명을 계속하도록 힘씁시다.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경사로운 육신의 부활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망덕은 이 세상을 지내는 데 극히 중대한 덕으로서 이 덕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슬프고 참기 어려울 정도이기는 하나 마음을 높이 들어 무덤을 바라보고 육신의 부활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도 한번은 부활할 것입니다. 현세 생존시에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믿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며 현세에서 성의껏 영혼의 부활을 원한다면 언젠가 우리의 육신도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육신과 같이 빛나는 부활, 영광스러운 부활을 맞이할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악인에게 있어서는 괴롭고 참기 어려운 것이나, 선인을 위해서는 말할 수 없는 위안이 가득한 교리가 아닙니까?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욥 성인은 부활에 대한 생각으로 용기를 냈던 것입니다. 모든 의인, 모든 순교자, 모든 착한 신자들도 이 희망에서 위로를 받고 이 희망에서 힘을 얻으며 이 희망으로 격려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희망을 마음속 깊이 새겨둔다면 어떠한 싸움에도, 어떠한 십자가도 힘있게 뚫고 나아가 용기 있게 지고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5.         부활 제3주일   루가 24,13-35 (가)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

허영민 신부



오늘 복음은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루가 24,13-16), 함께 이야기하고(17-27절),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28-31절) 순서로 되어 있다. 그 장면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자 낙담한 제자들은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터벅터벅 힘없이 걷고 있는 이들 앞에 이름 모를 한 나그네가 나타나 말을 건넨다. “길을 걸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소?” 두 제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한 일이요. 그분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그 하신 일과 말씀에 큰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나그네에게 말한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지만 다시 살아나셨다고 해서 자기 동료들이 확인하려 했지만 그분을 볼 수 없었다고. 나그네는 두 제자에게 모세와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나자렛 예수에 관한 내용을 설명해준다. 이야기가 얼마나 깊이 심금을 울렸는지 금세 서산에 노을이 질 만큼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그때의 심정을 제자들은 이렇게 고백한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엠마오 동네에 거의 다다랐을 때 제자들은 “날이 저물었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가십시오” 하고 나그네를 붙든다. 두 제자의 청을 듣고 나그네는 집으로 들어간다. 식탁에 앉은 나그네는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린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준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마음의 눈이 뜨인다. 성서를 풀이해주고 빵을 떼어준 분이 바로 예수님이 아니신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대담하시고 함께 식사하시는 내용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두 제자는 성경풀이를 들었을 때 뜨거운 감동을 느꼈고 빵을 떼어 나눠주실 때야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단서를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진 빵을 서로 나누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절망에 빠진 제자들과 동행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하고만 동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

지금도 주님은 말씀을 통해, 그리고 성찬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오늘의 우리 삶이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좌절하지 말아야겠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주셨기에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우리 삶을 나누어야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나날이 부활하는 길일 것이다.











6.         부활 제3주일   루가 24,13-35 (가)  우리 삶의 진정한 목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오늘날 가장 무서운 절망은 삶의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라 했다. 즉 문화와 물질문명이 발달해서, 의식주는 더 풍족해졌지만 사람들은 삶의 가치를 잃어버려 육체적 쾌락과 술과 마약에 빠져 방황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유태인인 빅터 프랭클 부부는, 2차대전 때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죽음의 고통을 겪게 된다. 그는 짐승 취급을 받느니 차라리 죽는게 더 낫다고 하는 생각도 여러 번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삶 어디에서도 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다. 삶의 목적도 의미도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목표를 두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내를 다시 만나 못다한 사랑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아내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 그것이 숱한 괴로움과 슬픔을 견디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 그의 아내는 이미 죽고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처절한 삶의 질곡 속에서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그는 다시금 삶의 목적과 존재 의미를 회복하게 되었다. 오늘날 그의 체험과 연구, 그리고 저서들은 많은 이에게 희망과 도움을 주고 있다.



루가 복음서는 부활의 기사를 세 번 알려준다. 맨 처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24,13~35), 그리고 베드로(24, 34)와 열 한 제자에게(24,36~49) 나타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루가는 그리스도의 부활 체험이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있다.



루가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구원의 중심지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삼십리쯤 떨어진 엠마오라는 동네로 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토록 존경하고 따랐던 스승 예수님의 죽음으로 두려움과 절망감 속에서 예루살렘을 떠났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에 소문으로 전해들은 예수님 부활 소식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다가갔지만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서를 인용하시면서 당신 죽음의 참 뜻을 깨닫게 하셨다. 주님은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때 비로소 두 제자는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기쁨과 희망을 안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낙담과 절망 속에서 낙향하여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다시 구원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결정적인 계기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인생은 하나의 긴 여행에 비유된다. 그 여행길은 때로는 실망과 실패 속에서, 때로는 희망과 기쁨 속에서 걷게 된다. 특히 우리는 삶의 목적과 희망을 잃었을 때 방황하게 된다. 여태껏 추구해온 인생의 목표가 한 번에 무너질 때, 참담한 실패감은 무엇으로도 보상될 수 없을 것이다.



몇 년 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주님의 죽음 앞에서 느꼈던 실망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런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상실된 삶의 목표와 의미를 다시 회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수없이 많은 갈등과 방황을 경험한다. 삶의 목표를 잃고 의미를 상실한 채, 이리저리 헤매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그때 그 모든 것을 다시 본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길은 성체성사 안에서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이기심, 인본주의, 욕심, 죄 등에 물들어 있을 때 눈이 가리워져 주님을 볼 수가 없다. 이제는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아 나서고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본래 우리의 모습과 자리로 돌아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예루살렘, 거기에 우리 삶의 목적과 의미도 함께 존재한다. 이번 한 주간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회복해야 하나, 어디로 나는 돌아가야 하는가를 묵상하도록 하자.











7.          부활 제3주일   루가 24,13-35 (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

최인호 베드로 / 작가



박목월(朴木月, 1917-78)은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난 우리 나라 대표적 서정시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조지훈, 박두진과 더불어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했는데 이 작품집에는 널리 애송되는 ‘나그네’란 시가 실려있습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짧은 이 시에는 구름 사이로 스쳐가는 달처럼 남도 삼백리의 외길을 걸어가고 있는 나그네 모습이 꿈처럼 황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달과 구름, 강과 저녁노을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흘러가는 나그네의 모습은 우리들의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의 하룻밤’이라고 표현한 대(大) 데레사 수녀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 시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는 도중에 일어나는 일은 우리들의 인생을 압축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나그네가 되어 다가서서 나란히 걸어가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이처럼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기 전에는 너무나 평범하여 몰라보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동산지기처럼 보였으며(요한 20,15).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도 요한을 빼놓고는 그 누구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요한 21,4).

엠마오로 가는 두 나그네 역시 하루종일 함께 주님과 걸었으면서도 바로 곁에 있는 그분이 주님이심을 전혀 몰랐습니다. 끊임없이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주님에 관한 소문을 전하면서도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 바로  주님이심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주실 때에 야 비로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이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두 나그네의 여정과 같습니다. 바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의 현존을 우리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들 인생의 궁극 목표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하신 모습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려 주님의 현존을 발견할 때, 우리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돌아간 사마리아 여인처럼(요한 4,28), 찾아가던 동네를 버려두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두 제자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길을 걷고, 이야기를 나누고, 낯선 여인숙에서 함께 묵고,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십니다.

시인 박목월이 노래했던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 남도 삼백리의 먼길을 가는 나그네는 우리들이 잠들어 있을 때도 우리보다 더 멀리 가시려는 지친 주님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아서, 우리의 인생에 나그네가 되어 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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