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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3월 29일 (토) 13:08
분 류 부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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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부활 제 2주일 주일 강론 모음 ”
 



        1. 정종표 신부(가)/2                     2. 유재국 신부(가)/4

        3. 최경환 신부(가)/6                     4. 조순창 신부(가)/8

        5. 강길웅 신부(가)/9                     6. 민병섭 신부(가)/11

        7. 홍금표 신부(가)/13                    8. 함세웅 신부(가)/15

        9. 부활의 의의/18                 10. 팔일후에 예수께서 오시다/19

        11. 토마스의 변신/20                     12. 서울주보/22

        13. 최인호/23                       



1.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당신들에게 평화 있기를

정종표 신부



평화를 전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을 보여주어야 함을 인식시킨다.



“마리아여, 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우리에게 말하라”(부활 미사 부속가). 이 말은 사도들이 그들에게 황급히 달려온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던진 물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여읜 제자들의 답답한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부활하신 것을 아직 모르고 슬픔과 근심에 떨고 있던 사도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캐물으며 자신들의 불안으로부터 헤어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대답하기를 “나는 보았노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무덤과 부활하신 자의 영광을!”(부활 미사 부속가) 하고 기쁨에 넘쳐 말했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이 한 마디 말은 그들의 부활과 의혹을 씻어내 주었고 그리스도를 따르던 그들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발현하시어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자 제자들은 모든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요한 20,20).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내오 보여 주신 그의 양 손바닥과 옆구리로 부활의 증거이지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는 그리스도의 인사, 즉 그리스도의 평화도 부활의 증거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평화는 부활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어느 때보다도 평화를 기다립니다. 평화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으로 고백하는 삶은 자연히 평화의 분위기를 탄생시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평화의 사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는 세상의 외적인 평화와는 다릅니다.



열왕기 하권에 보면 「므나헴」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기원 전 743년부터 737년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을 살해함으로써 정권을 쥔 사악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통치자였습니다. 그는 하느님 백성의 적인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입하자 은 천 달란트를 「불」이라고 하는 아시리아 왕에게 지불했습니다. 그리하여 성서에 의하면 “아시리아 왕이 돈을 받고 이스라엘 땅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돌아갔다”(2열왕 15,20)고 합니다(2열왕 15,17-22).



그러니까 「므나헴」의 뇌물로 이스라엘의 외적 평화가 회복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평화를 위해서 「므나헴」은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했습니까? 「므나헴」은 돈으로 얼마간의외적인 평화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평화, 마음과 영혼의 평화는 아무리 많은 재력이라도, 또한 아무리 강대한 권력이라도 살 수도 없고 줄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그리스도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냥 무상으로 아무 대가도 없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의 보배로운 피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고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에게 “평화가 당신들에게” 하시며 인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평화가 손과 옆구리의 상처와 고통으로 산 귀중한 것이라고.



우리는 오늘날 인류가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고 그리스도께 대한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요청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평화를 위해서 분투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믿음과 희생적인 삶만이 가능하게 합니다.



이 세상에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해야 하고, 믿게 하기 위해서는 희생적인 사랑의 흔적인 그리스도의 못뚫린 손바닥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완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턱대고 나무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죄 많은 인간인 한에는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남을 탓할 것 없이 힘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인내롭게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찬 인류는 사도들과 같이 우리에게 “크리스챤이여! 너희는 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묻습니다. 또한 토마스 사도처럼 손바닥과 옆구리에 손을 대 보자고 요구합니다. 그래야 믿을 수 있고 불안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부활을 증거하여 평화를 온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사람들의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우리는 보았노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무덤과 부활하신 자의 영광을!” 하고 대답하며, 우리들 각자가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몸에 지니고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 용감하게 생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손과 옆구리를 대신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살 때 비로소 사람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고, 이 믿음의 깊이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평화는 세상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갈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빌어 마지않는 바입니다.











2.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유재국 신부



제1독서 : 사도 2,42-47

부활의 교리



부활은 나자렛의 예수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그의 교회인 공동체를 낳게 하였다. 부활부터 교회는 부활 사건을 통하여 강생한 하느님의 아들의 신비에 대한 전적인 계시의 중요성을 더 깊이 깨닫기 시작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은 살아 계신 분이다. 예루살렘의 나약한 공동체를 그의 창설자에게 연결시키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교회가 바로 주님의 연장이며 가시적이고 항구한 공동체로 드러났다. 교회는 세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직무를 계승하고 드러내기를 원하였다. 첫째로 복음을 선포하고(Gerigma), 둘째로 홰해를 위하여 일하며(diaconia), 셋째로 그리스도의 성령으로부터 탄생한 새로운 집단의 정통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Communio).



예루살렘의 교회는 새로운 도시의 표지가 될 것이며, 보다 많은 사람들을 성부께로 인도하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게 할 것이다. 이미 교회를 통하여 구원된 인류의 모습을 식별하기에 이르렀다. 교회는 결코 젊음을 상실하지 않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재산을 공동소유로 하며, 함께 기도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빵을 나누어 먹었던 것이다.(성체성사)



제2독서 : 1베드 1,3-9

본 일이 없으면서도···



베드로의 첫째 편지는 축복의 찬미가로 시작되며, 아마도 성세 성세의 전례와 관련되는 것이다. “흩어져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던 ··· (1,1) 우리 초대 신자들은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다시 낳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분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합니다”라는 짧은 구절이 베드로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3년 동안이나 보았다. 그런데도 그의 사랑은 형편 없었다. 베드로는 아직도 호숫가에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베드로 너 나를 사랑하느냐?” 또한 닭이 우는 소리도 그는 듣는다.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의 축복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요한 20,29).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신자의 마음은 보다 절망적인 시간에도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고, 세례 때 받은 부활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복음 : 요한 20,19-31

그분은 부활하셨는가?



토마에게 나타난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요한은 의심의 동기를 극화한다. 초대 교회도 예수 부활을 인정하기 위하여 우리처럼 의심을 품었다. 구원의 역사의 중심적인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토론되고 있다. 90년경에 적은 요한 복음서는 육체와 물질의 가치와 실재를 부인하는 도쎄 띠스타의 사상을 겨냥하고 있다. 이성적인 인간들에게 있어서 예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을 증거하고 설명해야만 한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증언한다.



말씀의 육화는 하나의 사실이며, 육화된 예수는 부활한다. 부활한 예수는 귀신도 아니고, 공기도 아니며, 육체가 없는 생물도 아니고, 우주에 날아다니는 존재도 아니다. 예수는 나자렛 사람이다. 신비가인 요한은 예수의 육체를 강조한다. 그의 주장은 초교론적이지만 이 사건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토마스의 이야기는 모든 세대를 통해서 “보지 않고 믿는다”는 유일한 자세를 깨우쳐 준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힌 육체는 아무도 모르게 연화된 것이 아니다. 나자렛 예수와 영광의 그리스도는 같은 인물이다. 부활 주일 이전이나 이후나 항상 육화된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요한이나 바오로에게 있어서 “나”라는 용어는 전인격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영과 육이 분이하지 않은 한 인격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성서상에 나타나는 인간은 영과 육의 단일체로서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발현에 대한 이야기에서 보면 복음사가들은 부활한 예수의 육체를 지적하지만 아주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문이 닫힌 채 드나드신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선택한 자들에게만 계시되신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신다. 예수께서 다락방에 나타났을 때 빌라도나 가야파는 예수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사도들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던 것이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육체를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신앙의 대상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우리의 신앙은 “그분은 죽은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이 핵심에서부터 발전하는 것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요한 복음서는 토마스에게 나타난 예수의 이야기로 끝맺는다. 사도 토마스의 외침과 주님의 축복은 요한의 그리스도론을 결론짓는다. 그 목적의 하나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도 믿는 신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현존하시며, 오늘도 부활의 표지인 성사를 통해서 현존하신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 외침 속에서 요한은 육화된 말씀의 신비를 굳게 확인하고 있다. 이같은 확인은 복음서 서언을 연장하는 것이다. “말씀은 하느님이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교회는 주님에게 이같은 흠숭을 드리고 있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계속된다. 교회는 부활의 자녀들을 계속 낳는 어머니인 것이다. 왜 이와 같은 영광을 우리는 그렇게도 믿지 못하는가?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라고 선포하는 용기가 왜 부족한가? 예수는 수난 전에 하느님이었다. 부활 후에 그분은 사람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이며 사람이었고 지금도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분이다.











3.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참된 신앙

최경환 신부



오늘은 부활 제 2주일이며 사백주일(卸白主日)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2천년의 역사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적 사명을 준수하면서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굳게 믿으며, 착한 이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이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의 문을 열어주기 위하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왔고, 또 이같은 구원의 성사를 주 그리스도께서 구원 성업을 완성하신 부활 대축일 전야에 거행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죄를(원죄) 통회하고, 자기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그 영혼의 결백함과 아름다움을 뜻하기 위하여 흰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부활 제 2주일인 오늘, 그 흰 옷을 벗는 예식을 함으로써, 죄와 불의가 난무하는 이 사회에 다시 뛰어들어, 그 안에서 소금과 빛으로서, 온갖 죄악과 불의와 마귀를 거슬러 용감히 싸워야 한다는 것도 가르쳐 왔던 것입니다.



영세자들이 세례 때 입었던 흰 옷을 벗는다 하여 오늘을 사백주일이라 하였고, 이미 영세 입교하여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도, 세례 때에 하느님과 약속했던 굳은 신앙과, 세속과 마귀를 거슬러 싸워야 한다는 우리의 의무를 새삼 새롭게 하면서 특히 우리의 나약한 믿음을 반성하기 위하여, 사도 토마스의 불신앙에 대한 성서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20장 19절부터 31절 사이에 나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 모시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왔고, 또 많은 기적을 보아 왔던 토마스 사도의 당돌하고도 어이없던 불신앙에 대하여 들려주고 계십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고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였고, 그리스도께 직접 배웠으며, 수많은 기적과 영적을 보고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토마스의 불신앙은 그리스도의 엄중한 꾸중을 들어 마땅한 것이었으니 “토마스! 나를 보고야 믿소? 보지 않고도 나를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은 과연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생명의 법전인 복음서를 갖고 있고, 2천 년 교회 역사가 증명한 구원의 진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또 부활의 진리를 굳게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석연치 않은 불신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불신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영생에로의 진리의 말씀이 역사적으로 증명된 시점에서, 토마스의 불신과는 그 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토마스는 “손가락을 그리스도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노라” 했지만, 우리의 불신은 “나는 내 병을 낫게 해주지 않으면 믿지 않겠노라” “출세케 해주지 않으면 믿지 않겠노라” “우리 집안을 잘 살게 해 주지 않으면 믿지 않겠노라” “농사를 잘 되게 해주지 않으면 믿지 않겠노라” “우리 아이들을 시험에 합격시켜 주지 않으면 믿지 않겠노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의 불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것이었지만, 우리의 불신은 이 세상의 행 불행에 두고 있어서, 우리가 세례받을 때의 서약과는 위배된다는 것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의 불신은 우리의 잘못이라는 것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부조리와 죄악과 불신 풍조가 난무하는 사회의 여건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마귀의 온갖 유혹이나 세속의 허무함을 단호히 물리쳐, 하느님만을 섬기고, 하느님께로만 가겠다고 굳게굳게 서약한 세례 때의 약속을 저버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2천 년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부활이 증명해 준 영생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또 세례 때에 오직 하느님께로 가겠다는 욕망과 열망 때문에 조건 없이 발했던 굳은 맹세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준엄한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받을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거라”(마태오 25,41). 오늘 우리는 세례 때의 결백함을 뜻하는 흰 옷을 벗는 사백주일을 맞이하여,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과 우리의 불신앙에 대하여 잠시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불신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오직 영원한 생명과 끝없는 기쁨을 얻기 위해 조건 없이 맹세했던 세례 때의 서약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굳고 굳은 믿음으로 영복과 영생의 문을 향해 매진해야 하겠습니다.











4.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복음적 삶을 살아야 빛이 되고 소금이 된다.

조순창 신부



오늘은 부활 제 2주일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는 축제 기간중인 오늘은, 요한 복음을 통하여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에 성령이 계시고, 사죄권이 있음을 강조하며, 아울러 토마의 신앙으로 우리의 믿음을 다지게 합니다.



하늘같이 믿었던 스승 예수님을 잃은 제자들은 절망과 허무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사형에 처한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을 때에 뜻밖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셨습니다. 이 때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서야 비리소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확인하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주시고, 죄 사하는 사죄권을 주셨습니다. 이어서 ‘내 눈으로 보고야 믿겠다’고 한 토마가 끝내 보고야 믿는 것을 보시고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믿음의 소중함을 확신하고, 또 다지게 하여 주십니다.



이런 말씀은 첫째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기쁨과 평화와 희망의 모습을 제자들이라는 ‘공동체’ 안에 보이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도 가족이라는 공동체나, 오늘의 모임과 같은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은 위로와 격려와 축복의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심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 안에 새생명으로서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며,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사도들에게 사죄권을 주신 것이요, 오늘도 교회에서 ‘세례와 고백성사로 사죄받을 수 있다’는 이 점은 죄 많은 우리에게는 희망이요, 회심하고 사죄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 되고 ‘구원된다’는 것은 크신 사랑과 은혜입니다.



셋째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의 신앙 고백은, 보고 믿는 합리주의에서 벗어난 확신을 말하며, 그것은 삶의 새로운 변화의 갈림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하느님을 기적적으로 목격했으나, 사도들의 증언을 들은 새 개종자들은 부활한 예수님을 뵙지 못하였어도, 새 삶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만사에 서로 믿고 두터운 사랑으로 뭉쳐 살았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같이 모두 부러운 새 모습의 생활을 했고, 신앙을 지키고 증거하기 위해서 죽음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도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희망이시오, 성령이 우리 생명이심을 믿는다면, 믿는 이답게 새 삶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무거운 바위를 깨고 살아나셨듯이, 나를 싸고 있는 이기심과 배타주의의 껍질을 깨야 하며, 파벌과 독선의 벽을 깨야 하며, 미움과 욕심의 탈을 벗어야, 새 생명으로 부활한 모습으로 사죄와 기쁨과 평화 안에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도, 기업가도, 정치인·교육자·군인·학자·근로자도 복음 정신으로 변화되어, 부활의 신비 안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복음으로 삶으로써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민족 구원의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5.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믿으면 행복, 의심하면 불행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2,42-47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어놓았다) 

제2독서 베드 1,3-9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복 음 요한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께서 오셨다)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커다란 꿈과 희망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생각과 원대한 포부가 있기 때문에 지금 오늘의 삶을 풍요롭게 살찌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며 오직 있다면 그건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뿐입니다.



인생은 그런 의미에서 허무요 절망입니다. 오로지 죽음이라는 어둠을 향해서 걸어가는 불쌍한 나그네일 뿐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모든 것을 삼켜 버립니다. 모든 것을 부수고 깨뜨리며 뺏아갑니다. 그래서 죽음이 도둑이요 강도이며 원수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분이 죽자 죽음의 세계가 일시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분이 죽음을 뚫고 지나가시면서 죽음 속의 어두운 휘장과 모순을 벗겨 주셨는데 거기에는 부활이라는 놀라운 세계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죽음은 결코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인생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비굴했습니다. 그리고 비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분이 열어 주신 세계를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믿는 것만큼 행복합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토마가 의심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토마를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확실하고 분명한 성격이 우리 맘에 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토마에게 나타나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사실 이 말씀 앞에서 비굴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땐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않으며 기도를 바치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도 믿지 않습니다. 믿는 신앙인 안에 불신이 가득 들어 있으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어떤 형제가 집에서 막내로 귀여움만 받다가 군대에 왔는데 자기 형이 마침 육군 대령이라 더 편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형에게 떼를 썼습니다. 그러나 형 생각은 달랐습니다. 일단 군대에 들어왔으니 고생을 배워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더 힘든 전방부대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형의 남자다운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형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형을 미워하고 부모를 원망하더니 한 달도 못 되어 이북으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으며 형은 장군이 될 시점에서 군복을 벗게 되었고 부모는 화병으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불신들이 자신을 망치고 이웃을 망치는지 모릅니다. 믿으면 편안하고 행복한데 믿지 못하기 때문에 무서운 지옥을 살게 됩니다.



어떤 형제가 의처증을 가지고 있는데 눈으로 못 봅니다. 매일 얻어맞고 지내는 부인도 불쌍하지만 더 비참한 것은 의심하는 본인 자신입니다. 하루 종일 그가 하는 일은 마누라 의심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혼자 쓰레기 같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신앙은 한마디로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이 아니라면 우리의 미래는 실로 절망이며 아무리 잘살고 잘먹어도 허무요 불행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속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주님만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있게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신앙은 머리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서 이웃으로 튀어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봉사라는 단어가 그런 것들입니다. 이해와 용서라는 말들도 그렇습니다.



삼랑진 '평화의 마을'에서 버려진 인생들을 따뜻하게 돌보아 주는 것도 부활신앙 때문이며 '꽃동네'에서 죽어가는 이들 곁에 참 사랑을 쏟고 있는 봉사도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레지오나 빈첸시오를 통해 서 숨은 봉사를 하는 것도 부활신앙 때문이며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를 끝까지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도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활신앙 안에서 빛나는 인생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함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켰는지 모릅니다. 믿으면 실로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믿는 것만큼 행복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남들이 봉사와 사랑을 하거나 말거나 제 고집대로 살겠지만 믿는 이들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 때문에 진정 멋지고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믿음 때문에 손해보고 우리가 또 혹 믿음 때문에 잃었던 것들이 있다면 부활의 새벽에 몽땅 다 찾게 될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도록 합시다.











6.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토마 사도의 불신앙

민병섭 신부



  오늘의 복음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파스카 축일 당일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심과 그들에게 성령의 힘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시는 부분이며(19-23절), 둘째 부분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하는 다른 사도들의 말에 대한 토마스의 불신 부분이고(24-25절), 셋째 부분은 8일 후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심과 토마스가 신앙을 고백하는 부분이며(26-29절), 마지막 넷째 부분은 요한 복음의 결론과 저술의 목적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30-31절)이다.



  첫째 부분은 자체의 신학적, 문학적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더구나 요한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여러 개념들의 상징적인 내용들을 분명하게 규명해 줄 정도로 충분히 묘사적이다. 이 구절은 특히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처럼 들린다.



  요한은 제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해 주지 않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불안해하며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락에서는 제자들의 두려움과 은둔,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것들을 극복하시는지가 묘사되고 있다. 두려움과 은둔의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스러운 자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한가운데 서 계시게 만들며, 부활절 평화의 인사를 하게 한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장 큰 선물이다.



  세상의 생명을 위해 바친 예수님의 죽음으로 시작된 위대한 세상의 화해가 이 평화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고통받으심으로써 성취한 평화이며, 고통과 죽음으로써 처음으로 성취해 낸 평화이다. 그 평화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온 평화이며, 예수님께서 극도로 고조된 갈등에 연루되어 이루어진 평화이다. 이 극도로 고조된 갈등을 성서는 죄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소외, 갈라짐, 자신과 이웃으로부터의 은둔 등이다. 결국 세상에 대한 부활이라는 승리는 본질적으로 모든 갈등을 이겨내는 궁극적 승리인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발현에 이어 예수님께서 교회를 설립하시는 행위, 곧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파견하는 목적은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그 평화를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파견과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완수할 힘으로써 성령을 부여하신다. 성령을 주시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생명의 수여는 죄의 용서라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개념으로 묘사되고 있다.



  요한은 죄의 용서를 부활의 핵심으로 그리고 새로운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그의 부활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에 참된 화해와 평화를 주셨으며, 이 평화는 온 세상에 삶이 새로운 기점으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자 공동체의 존재 이유이다.



  둘째와 셋째 단락은 토마스의 불신앙과 관련된 대목이다. 요한은 이미 부활 사화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 곧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활 신앙은 부활 발현에 무조건 의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 받던 제자는 단지 빈 무덤만을 보고 믿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직접적인 확인을 요구한다.



   그는 '믿는다는 것'을 물질적인 차원에서의 '보는 것'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보는 것과 달리 물리적인 시각의 차원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것은 감각이나 예리한 지성의 도움이 필요 없는 내면 깊은 곳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에 의탁하는 사람만이 감각적인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을 볼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토마스의 요청은 그리스도가 약속대로 여드레 뒤에 나타나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자 토마스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28절)이라고 예수님께 가장 완전한 신앙 고백을 한다. 이 신앙 고백은 초대 교회 전례에서 사용하던 신앙 고백 형태의 재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마스의 신앙이 아무리 훌륭했다 하더라도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 순수한 믿음 안에 포함된 행복은 결코 얻어 누릴 수 없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마지막 단락에서 요한은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다행스러운 조건에 있었던 독자들과 또한 같은 조건에 있는 우리에게 이 책을 쓴 목적을 말해 주고 있다. 이 마지막 구절은 복음 전체의 결론이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토마스에게 나타나신 데 대한 이야기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요한은 자기의 글로써 우리가 토마스와는 달리 완전한 신뢰로 믿을 수 있고 또한 믿어야 하는 사도적 증언을 우리에게 제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7.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하느님의 현존

홍금표 신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문제는 나쁘다」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고, 문제가 없는 상황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긴다. 때문에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금의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다 잘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다 문제를 가지고있는 것이 문제의 참된 속성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공동체에서 일정한 역할을 맡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도 역시 많은 문제를 가지게 된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우리가 신앙을 가지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으로 생각하는데, 실상은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왜 그런가 하면 참된 신앙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 것이고, 문제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문제에 함몰되지 않고, 그 문제와 더블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참된 신앙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 중의 하나가,「신의 존재」문제가 아닌가 여겨진다. 어떤 경우에는 이해되는 듯도 하지만, 그러나 삶의 위기의 순간 다시 한번 질문해보면, 또 다시 의문부호를 붙일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이 문제인 것이다. 필자도 역시 살아가면서 이 같은 문제 때문에 갈등을 겪기도 하는데, 그 문제에 대해 많은 위로를 받은 체험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경남 진주에 한 양로원이 있는데, 그곳을 신부가 되고 나서 얼마 후 방문하게 되었다. 봉사자들의 모습과 노인들의 모습, 그리고 역한 약 냄새와 노인들의 냄새가 그곳의 첫 인상이었다. 어떻든, 그곳에서 하룻밤 묵어 갈 예정으로 잠을 청했지만, 건물 곳곳에 배어있는 냄새 때문에,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새벽녘 간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광주로 떠나게 되었다.

  

버스에 몸을 실으면서, 양로원에서의 짧은 20시간 정도의 생활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러자 제일 먼저 눈에 스쳐 지나가는 모습은, 낮에 환자 노인들의 오물을 치우는 한 수녀의 웃고 떠드는 모습이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할까! 나는 단 하루도 살기 힘들어 잘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 화가 나서 새벽녘 인사도 못하고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는데, 어떻게 그곳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며, 오물을 치우면서 가지 웃고 떠들을 수 있을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무어라고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그때 그곳 봉사자들의 모습 속에, 하느님이 함께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역시 그들도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똑같이 더러움과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그 역겨움과 더러움을 느끼면서 그것을 인간적인 의지로만 이겨내려 한다면, 그들은 결국 지쳐버리고 말리라. 아마도 하느님이 그들을 변화시켜 주지 않고 위로해 주지 않는다면, 그러한 생활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그 후 그곳에서 봉사하는 분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오늘날 하느님이 당신을 계시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봉사자들의 모습을 통해서일 것이다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 복음은 너무나 유명한 토마 사도의 이야기이다. 토마 사도는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과 발의 상처를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 라고 고집하고, 결국 예수님을 뵙고서야「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완전한 신앙고백을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토마 사도의 이러한 성향 때문에, 어떤 이들은 토마 사도를 의심이 많은 사람, 또는 보고야 믿는 합리적이고 명확한 사람,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요구하는 현대인과 같은 사람 등, 특별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활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토마 사도는 항상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때로는 의심과 회의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마 사도의 “나는 그분의 상처를 보지 앓고는 믿지 못하겠다.”란 그 말은, 단지 그분의 상처를 보고 싶다는 욕망이기보다는, 정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확신하고 싶다는 절규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바로 토마 사도의 이러한 소망은,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때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문제는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님을 뵙고, 흔들리는 신앙에 대한 위로를 얻을 수 있는가 점이다.



그 하나의 가능성을 1독서에서 찾을 수 있다. 1독서에서는 초대교회시대의 사람들에게 “기적과 놀라운 일들”이 하느님 현존의 간접 증거였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분명 모습과 방법은 달리 할지라도, 그분의 현존을 보여줄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여겨졌고, 그 하나의 해답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봉사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게 되었다.











8.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희망의 길

함세웅 신부



오늘의 전례는 오래 전부터 새 영세자들을 위한 주일로서, 성세 때에(부활 전야) 받아 입었던 횐 옷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는 주일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독서는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 1독서(사도 2,42-47)는 사도행전 1, 2장의 요약과 같은 내용으로 초기 사도교회의 생활을 이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모든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지침이기도 한 것입니다. 즉 그들이 모두 ①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② 서로 도와주며 ③ 빵을 나누어 먹고 ④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2,42의 내용은 바로 하느님과 교회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 이웃을 돕고, 기도해야 하는 신앙인의 실천적 사명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표현은, 거짓말을 하여 죽음의 벌을 받은 아나니아와 삽피라의 이야기(사도 5,1-11)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는 표현으로서 하느님을 감히 속여서도 안되지만, 하느님을 속일 수 없다는 진리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어서 재산의 공동 소유와 공동 생활은, 바로 사랑과 친교의 생활을 가리킵니다. 빵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서 ① 가난한 형제들을 돕는 행위와 ② 미사 성찬례 때 행해지는 영성체를 동시에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한마음이 되어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였습니다. 성전은 야훼께서 머무시는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 그 곳은 유다의 전 역사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요소입니다. 바로 그 성전이 이제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백성의 사랑과 삶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의 현장은 구체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바로 본당입니다.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성당,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서 모시는 성당, 또 기도를 바치고 사랑을 나누며 성체를 받아 모시는 성당, 나는 진정 이 성당, 이 본당, 이 주님을 중심으로 해서 나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 아니, 그저 무심히 왔다 갔다 하는 의무만을 채운다는 생각으로 부담감을 덜기 위한 형식적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는 늘 성전(聖傳), 즉 전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 오늘의 나는 도대체 누구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사도들이 전해 주고 초대 신자들이 생활한 그 전통, 죽음을 무릅쓰고 지킨 로마 박해시 대하의 순교자들의 신앙, 또 이 땅에 복음 전파와 그 증거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교 선열들, 우리 성당의 주보인 김대건 신부님, 나는 이들을 알고 있는가. 나는 이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나는 이들이 살았던 그 삶의 정신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진정 이들의 전통을 지니고 그 전통을 따르고 있는가.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삐 뛰고 있는가 등등..... 꼬리 없이 물어오는 이 모든 질문에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숙고하며 다시 사도행전의 말씀을 음미해 봅시다. 그리고 되씹어 봅시다.

그래서 초대 교회가 지향했던 그 이상(理想)의 세계-그것이 이미 예수 부활로 실현된 바로 이 현실에서 가능한 사랑의 공동체-를 향하여 달음질치며 ‘한마음'이 되어 봅시다. ‘너'와 ‘나'와 한마음이 되는 것 그것은 곧 하느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제 2독서( I베드로 1,3-9)는 제 1베드로 서간의 말씀으로, 사도 베드로가 당시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새 입교자들이, 불의에 당한 박해와 수모 그리고 시련 가운데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말고 살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더욱 실감 있게 들려지는 내용입니다. 그 서두는 ‘하느님을 찬미'하자는 말로 시작됩니다.



즉 신앙인들의 인사는 하느님의 찬미입니다. 신자들이 편지를 쓸 때, 또는 인사를 나눌 때 ‘찬미 예수' 또는 ‘주의 평화'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도들의 서간에서 따온 말로서, 깊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함은,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구체적으로 재현됩니다. 그 때문에 영세를 새로운 탄생, 영신적 탄생, 영혼의 탄생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한 번 받음으로 끝나는 예식이 아니라, 거듭 거듭 새로 나야 하는 연속적 삶으로서 뉘우치고 회개하며 하느님께로 되돌아오는 그 과정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새로 나고 되돌아온 그 믿음의 아들에게는 월계관이 주어집니다. 그 월계관은 더 이상 지상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천상의 은총이며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것은 전쟁 속에서

도 망쳐지지 않고 원수들에게도 짓밟힐 수 없으며, 잠시 지나갈 이 시간도 시들게 할 수 없는 불멸의 월계관입니다. 그 보증이 또한 하느님 자신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늘 희망을 안고 기쁨 속에서 살아갑니다.


기쁨, 기쁨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며 그리스도인의 표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말은 바로 나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슬픔과 시련, 고통, 안타까움, 유혹, 절망, 답답함, 허탈감이 짓누른다 해도, 눈보라와 먹구름, 천둥소리 그 뒤에 늘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알고 있듯이, 이 모든 시련의 과정을 이를 깨물며 이겨내고 극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패배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는 결코 운명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는 인간적 난관에 두 눈을 부릅뜨고 맞서는 신념의 사람입니다. 지쳐 쓰러질지라도 그는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의 스승 예수님이 이러한 길을 걸으셨고, 피땀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바치며, 그 쓴 잔을 치워 주셨으면 하는 인간적 간구에도 불구하고 대답 없는 하느님, 침묵만 지키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결코 잃지 않으셨듯이, 그도 결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당한다는 것 어려운 고뇌를 안고 있다는 것, 그것은 어찌 보면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훠꼴라레(Focolare) 운동의 창시자인 끼아라 루빅(Chiara Lubich)은 “고통,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고통받는  예수의 모습, 그것은 곧 기쁨의 얼굴입니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십자가의 길 제13처의 성모님의 고통스러운 모습, 그것도 곧 기쁨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미켈란겔로가 조각한 삐에따(Pieta)상의 성모님 모습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한,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의 기쁜 웃음 띈 모습과, 죽은 이들을 안고 울고 있는 성모의 모습을 동시에 나타낸 작품으로, 이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기쁨과 고통, 그것은 같은 실체의 양면성입니다. 그것은 수난의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일깨워 주는 필연적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그 어떠한 역경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기쁨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은 보지 못하면서 희망을 거는 힘이며, 우리를 구원하는 힘입니다. 구원은 미래의 것뿐 아니라 신앙으로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것은 신앙의 항구성 및 불변성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깊은 의미를 오늘의 복음(요한 20,19-31), 불신의 토마가 신앙의 토마로 옮겨지는 장면에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오늘의 복음 말씀을 절정으로 하여 끝맺어지고 있습니다.

우선 요한은 12제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비록 배반하고 떠나갔지만 12지파와 함께 전 인류의 보편성을 암시하고 제자들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대명사이기에, 이런 12란 수자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드레 뒤란 표현은, 바로 1주일 뒤를 가리키는 것으로, 초대 교회의 모임이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기 위하여, 매주일 공식적으로 모인 사실을 일러 주는 전례의 초소이기도 합니다. 토마가 예수님을 뵙고 고백한 내용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란 표현은 바로 헬헤니즘 문화권에서나, 이스라엘 구약에 있어서의 전능하신 야훼께 주어진 칭호로서, 신학적으로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시에 당시 로마 황제가 지니고 있었던 그 칭호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선언한 초대 교회의 공동 고백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고백은 신앙인인 나의 진실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자원하여 죽으신 예수님,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공동체 안에서 전해진 가르침에 따라 신앙 안에서 살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내적 평화입니다. 그가 평화를

지녔을 때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있고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은 이것을 믿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보이지 않는 이 주님을 애덕과 사랑의 실천으로 만나 뵈었습니다.

바로 공동체 안에서 한마음이 되어 모일 때, 우리는 주님을 체험하며, 내 이웃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는 그러한 신앙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 가족, 형제뿐 아니라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형제 자매에게서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과 평화를 맛보는 것입니다. 











9.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부활의 의의



다가온 봄철에 부활 축일을 맞이했다. 온갖 생물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신 분이 죽어 계실 리가 없다. 살아 계셔도 늙으실 수가 없다. 생명 자체시고 청춘 자체시기 때문이다.

생명의 근원이시니 마르거나 시들거나 쭈그러드실 수가 없다. 청춘은 젊음이요 젊음은 또 아름다움이다. 주님은 청춘 자체시니 젊음 자체시고, 아름다움 자체시다. 부활도 그 때문에 하신 것이다. 주님은 죽어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무덤에 묻혀 있거나, 더구나 썩으실 수가 없다.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한 사도 베드로의 첫 강론을 들어보자. “당신은 내 영혼을 죽음의 세계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종을 썩지 않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으니 나는 당신을 모시고 언제나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사도 2,27-28).

청춘과 젊음과 아름다움에서 자연히 기쁨이 생겨나 이제는 부활하셨으니 다시는 죽으실 수가 없다. 이제는 우리에게 더 많은, 더 풍족한 젊음과 기쁜 삶을 주시게 되었다.



그럼 왜 죽으셨을까? 남을 위해 죽는 것만큼 더 큰 사랑과 희생이 없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그 굴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처럼, 우리 인간이 제일 무서워하고 감당할 수 없는 죽음을 잡으려면 죽음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있는 이가 그 죽음 속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1고린 15,55).











10.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팔일 후에 예수께서 오시다.



오늘은 부활 제 2주일이다. 온 천하는 주님의 부활로 다시 새 생명을 되찾았으며 죽음도 죄악도 소멸하고 영생과 환희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이 부활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그 후에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으며, 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 더러는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1고린 15,5-6). 이 엄연한 사실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있다.



오늘의 복음은 이러한 인간의 대표로서 토마의 불신앙에 대해 전해준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고 하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다른 사도들이 주님을 뵈었다는데도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복음서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고, 그 당시의 목격자들이 그것이 참되다고 증언하여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내려오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한낱 지어낸 이야기거나 그저 그러려니 하고만 생각해 버린다면 이 얼마나 스스로에게 불행한 일인지···.



그래서 예수께서는 토마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시오. 또 당신의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시오.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시오.” 토마는 그제서야 의심이 풀려 무릎을 꿇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부르짖었다. 어떻게 보면 강직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믿음은, 오늘날의 완강한 고집을 부리는 불신의 무리에 대한 주님의 경고를 유발케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주님은 토마에게 “당신은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라고 타이르셨다.



이 말씀은 현대인들에게 들려주는 참으로 복된 말씀이시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참다운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보이지 않는 사물을 확증해 주는 것”(히브 11,1)이기 때문이다. 즉 신앙이란 초자연적인 광명이며,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무한한 영원의 것이다.



무한한 빛과 영원의 황홀함은 인간적인 감각으로는 결코 감지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육체적, 현실적인 감각에만 의존하려는 자들에게는 느껴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이미 천상의 기쁨 속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복된 자들이다.



토마는 너무나도 감각에만 의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동료 사도들의 증언만으로써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사도들의 증언을 못 믿는 어리석음이여! 현세에 있어서도 이것은 되풀이되고 있다. 교회의 증언이 그것이요, 순교자들의 피와 목숨으로 증언하는 것들을 못 믿으니 말이다.

그렇다, 우리들 신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현대의 이 불신앙자들에게 주님의 부활하신 현존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부활한 자로서, 즉 새사람으로서 살아가야만 한다. “새 사람이란 거룩하고 진리의 생활을 하는 자”(에페 4,24)이다.











11.          부활 제2주일   요한 20, 19-31> (가)  토마스의 변신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지 않고서는 못 믿겠다고 말한다. 그것도 당당하게…. 생전에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였는데 참으로 의아스럽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보았고 그 자리에 토마스는 있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일 때도 토마스는 기적의 음식을 먹고 감격에 겨워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주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언제나 평화를 기원하셨다. ꡒ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ꡓ 이 말씀 속에는 주님의 진심이 들어있다. 진정 그분은 평화를 기원하셨다.

평화만이 삶의 의심을 몰아낼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의심과 평화는 공존하지 않는다. 의심은 인간의 것이고 평화는 하느님의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주셔야만 평화는 가능해진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평화를 주시고자 하셨다.



토마스에겐 평화가 없었다. 스승이 죽은 뒤 그는 평화를 잃었다.

그토록 믿고 따랐던 스승이었는데 허무하게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렇게 죽지 않아도 되는데, 스승의 무능한 죽음을 토마스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스승이 다시 부활했다고 한다. 동료들의 확신에 찬 말이 토마스에겐 혼란으로 다가왔다. ꡒ아무리 그래도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단 말입니다.ꡓ 토마스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토마스의 의심은 타고난 천성이었는지 모른다. 스승이 살아있을 때도 그는 꼬치꼬치 따져야만 직성이 풀렸는지 모른다. 예수님도 토마스의 그런 천성을 아셨기에 두 번이나 다시 발현하셨을 것이다. ꡒ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ꡓ

토마스는 스승의 발현 앞에서 외친다. 더 이상 무슨 고백이 필요하랴.

그러나 토마스의 이 외침은 그가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했기 때문에 토해낸 것은 아니다.

주님의 부활은 확인하고 검증하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닌 까닭이다.



토마스의 변신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복에 있다. 의심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자신을 위해 다시 한번 발현하여 주신 스승의 사랑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다.

부활사건마저 외면하고 있는 고집쟁이 제자 토마스는 자신의 처지를 몰랐지만 스승의 발현으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이렇듯 의심으로 평화를 잃었던 토마스를 위해 또다시 발현하신 것이다. 사랑의 발현이었다.



사랑이 없으면 의심하게 된다. 누구라도 하느님에 대해 의심이 생긴다면 그분을 사랑해야 된다. 토마스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란 표현으로 사랑의 길을 고백했다.

ꡒ나의 주님, 나의 주인님이란 말이 아닌가. 당신이 바로 내가 소유하고 나에게 속한 모든 것의 주인님이란 고백이 아닌가.ꡓ 토마스는 이 고백을 실천하며 일생을 살았다.



오늘 복음을 접하면서 우리에겐 토마스의 모습이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의심으로 멀어져 가는 평화를 느낀다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을 다시 고백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나타나실 것이다. 우리가 겪는 사건과 만남 속에서 그 분은 우리에게도 말해주실 것이다.

ꡒ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ꡓ











12.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믿는 사람의 행복

서울대교구 홍보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오늘 요한 복음은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사명을 부여하는 발현사화 (發 現史話), 예수 부활 발현에 대한 제자들의 증언과 토마스 사도의 불신, 그리고 복음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1.발현사화(요한 20,19-23)

안식일 다음날 부활한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그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 믿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선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리고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 이 말씀에는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는 것과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주어졌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2. 예수와 토마스(24-29절)

예수께서 처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동료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소” 해도 말을 전혀 믿지 못했습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까지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나타나 “내 손을 만져보고 또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 에페소에서 씌어진 것으로 전해옵니다. 당시에는 영(靈)적인 것만을 중요시했던 영지주의(靈智主義)의 영향으로 사람은 한번 죽으면 육적으로 부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런 이단사상에 대항하여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육적으로도 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로고스 찬가’(1,1-18)와 부활한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생선을 잡수신 이야기(21,1-14)가 대표적입니다.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란 보는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뜻입니다.



3. 동기와 목적(30-31절)

요한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집필한 까닭은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간직한 교회 공동체와 그 구성원인 우리는 부활한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받아 세상에 나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하며 이 시대에 양심과 도덕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합니다











13.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평화의 푸른 지팡이

최인호 베드로 작가



톨스토이(Tolstoi, 1828-1910)는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문호이자 사상가입니다. 그는 50대까지는 「전쟁과 평화」 등으로 작가적 명성을 누리지만 후반에는 죽음의 공포로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고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생애를 지배했던 것은 어린 시절 형제들과의 놀이였습니다. 톨스토이는 70세가 넘었을 때 이 추억을 ‘푸른 지팡이’란 소품 속에서 회상합니다.

“내 큰형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비밀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 비밀이 밝혀질 때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고 행복하게 살 텐데, 그 비밀은 ‘푸른 지팡이’에 적어 뽈랴나의 골짜기에 묻어놓았다고 말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도 믿었지만 지금도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는 푸른 지팡이의 존재를 믿는다.”



톨스토이는 82세에 집을 나와 시골역에서 숨을 거두고, 마침내 고향인 뽈랴나에 묻힘으로써 자기 자신이 푸른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전인류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진리의 비밀은 바로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 예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톨스토이즘이란 사상을 낳았습니다. 이는 화내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맹세하지 말 것, 악에 대해서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는 무저항주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형제애 등 다섯 가지로 요약됩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 세 번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그 첫마디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었습니다. 의심 많은 토마스 앞에 나타나실 때도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란 인사말로 시작하십니다. 살아생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 5,9).



주님은 자신의 말씀처럼 줄곧 평화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심으로서 유다인들은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나기도 하는 대혼란”(루가 2,34 참조)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있어 평화는 반대받는 표적이 되어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죽음의 공포와 폭력, 갈등과 의심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 환희로, 의심의 미망(迷妄)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란 찬양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참평화 그 자체이신 주님의 실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타나실 때마다 항상 우리들의 ‘한가운데’에 서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주님이야말로 진리의 중심이시며 톨스토이가 평생을 통해 추구했던 참평화의 푸른 지팡이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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