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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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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녀들을 위하여
작성일 2008년 9월 14일 (일) 09:17
분 류 설,추석
ㆍ추천: 0  ㆍ조회: 6712      
IP: 218.xxx.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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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님 은혜를 생각하라고... ”
 

부모님 은혜를 생각하라고...



부생모육 그은혜는 태산보다 높고큰데

청춘남녀 많다지만 효자효부 안보이네

시집가는 새색시는 시부모를 마다하고

장가가는 아들들은 살림나기 바쁘도다



제자식이 장난치면 싱글벙글 웃으면서

부모님이 훈계하면 듣기싫은 표정이네

시끄러운 아이소리 잘한다고 손뼉치고

부모님의 회심소리 듣기싫다 빈정대네



젊어서는 돈없으면 부모님께 전화해도

이런저런 이유삼아 부모재산 가져가도

명절때나 생신때나 생색한번 내고서는

안부전화 부모방문 잊은지가 오래됐네



애완동물 병이나면 가축병원 달려가도

늙은부모 병이나면 그러려니 태연하고

열자식을 키운부모 하나같이 키웠건만

열자식은 한부모를 귀찮다고 멀리하네



자식위해 쓰는돈은 아낌없이 쓰건만은

부모위해 쓰는돈은 하나둘씩 따져보네

자식들의 손을잡고 외식함도 잦건만은

늙은부모 위해서는 외출한번 못하도다



신앙생활 강조해도 바쁘다고 냉담하고

혼인조당 이혼문제 신앙에서 멀어지네

부모손에 묵주기도 떨어질날 없다만은

자식들은 저바쁘다 부모마음 몰라주네



평생다닌 성당에서 장례미사 못해보고

부모장례 간편하게 화장으로 끝마치네

죽은부모 위해서는 연도한번 안바치고

자기이익 챙기려고 큰소리가 담을넘네



보고있네 보고있네 아이들이 보고있네

제아비가 부모에게 한행동을 보고있네

잊지마소 잊지마소 그행동을 받을지니

당신자식 당신행동 그열배로 갚을지니.



잊지마소 부모님들 신앙교육 잊지마소

잊지마소 부모님들 가정교육 잊지마소

내가잊어 자녀들이 그렇게들 변했으니

누구원망 하시겠소 내가슴을 쳐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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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론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11:17
분 류 설,추석
ㆍ추천: 0  ㆍ조회: 5244      
IP: 218.xxx.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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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위 ”
 

1. 박인용 베다

1.1. 한가위



1. 1독서 주해 : 요엘 2,22-24.26ㄱㄴㄷ      

 2장을 끝맺는 부분이다. 21-24절은 감사의 시를 위한 도입구의 문체로 되어있다. 보통 때에는 신현현 때 사용되던,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이 두 번 나오고, 환호하고 즐거워 하라는 권고가 거듭 나오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 재앙의 무서운 곤경과 현재의 행복 사이에 갑작스런 변화가 있었음이 표현된다. 모든 감사의 노래에서 주제가 되는 하느님의 도움의 위대함을 나타낸다. 들판의 짐승들도 즐거운 감사에 초대받은 사람의 합창에 동참한다.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들이 일치단결한다는 것은 이미 언급된 사실에 대한 확인이다. 또한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을 가득 채우는 세속적인 복에 대한 즐거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축복을 통해 다시 자기 백성에게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자신에 대한 즐거움에도 있다. 또한 주님께서 내려 주시는 비는 하느님의 정의를 제시해 준다. 하느님의 정의는 곤경은 밝게 빛나고 그 곤경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목적달성을 통해 그 의미가 획득된다. 끝으로 기적을 베푸는 하느님의 위력이 크다는 것을 깨닫고 찬양한다. 땅의 소산을 향유한다는 것은 그의 수여자에 대한 찬양이다. 하느님의 백성의 실존과 명예는 하느님의 은혜의 기적에 달려 있다. 기적과 하느님의 도움이 예상치 못할 만큼 크다는 느낌은 온전히 하느님께 의존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러한 살아 있는 신념의 특징인 것이다. 이곳에서도 최종 목적은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정의감을 만족시키기 위해 세속적인 균형을 이루는 옛 질서의 회복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약속의 끄트머리에서 하느님이 도와주는 최종적인 목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하느님의 독점적인 생생한 현실적 임재와 그의 위대함에 대한 인식과 계시이며 경종이다. 하느님께만 관심을 갖고 있는 이 신탁이 거룩한 신현현 전승에서 비롯된 문구(이 문구는 에제키엘서에서 자주 사용되었다.)로 끝난 것은 유효적절하다.



2. 2독서 해설 : 묵시 14,13-16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은 행복하다고 한다. 죽음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은 주님을 믿다가 죽은 이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수확을 언급하며 심판을 말하고 있다. 포도 수확처럼(18-20절) 곡식 수확도 가끔 종말의 심판을 가리키는 표상으로 쓰인다.(예컨대 이사 63,3;요엘 4,13; 마태 13,39참조) 여기서 추수는 의인들을 거두는 것보다 불신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신탁과 방향을 같이하면서도 다른 길을 걷는 묵시 문학의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절박한 것으로 드러난다. 독자는 “주님의 날”과 심판날이 다가왔음을 예감하기에 이른다. 모든 예언자의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묵시록은 하느님의 계획의 현시성과 그에 따라 우리의 전 존재를 투신해야 하는 절박성을 선포하며 현 시대와 그것의 완료를 초자연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3. 3독서 해설 : 루카 12,15-21

 13-34절에는 현세의 재물을 어떠한 자세로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한 예수님의 여러 가르침이 모아져 있다. 곧 예수님께서 특수한 문제를 계기로 내리시는 일반적 경고(13-15절),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6-21절), 양식과 의복 걱정에 대해 제자들에게 내리시는 권고(22-32절), 그리고 자선에 관한 권면이다.(33-34절)

 먼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의 도입이라고 할 수 있는 13-15절을 살펴보자. 13절에서 유다인들은 랍비들에게 중재를 요구하던 모습이 드러난다. 그들도 예수님께 중재를 요청하였다. 현세적 직무를 맡아 주십사는 청을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고 말씀하시며, 거절하신다. 이로써 자신을 “지도자와 판관”으로 내세운 모세와(탈출 2,14 그리고 사도 7,27-35 참조) 당신을 구분 지으시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왜 돈 문제에 개입하기를 거절하셨는지 설명된다. 돈은 구원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무엇이 참 부인지 부각시킨다. 곧 12,33절과 18,22절에서도 볼 수 있는 대로(16,9 참조), 결론적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권고를 하신다.

 루카 복음서의 비유에서는 주인공들이 가끔 독백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드러낸다. 부자는 독백으로 자기 영혼에게 말한다. 그런데 “영혼”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프쉬케’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그러하듯, 생명체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생명, 목숨’으로(6,9; 9,24; 12,20.22.23; 14,26; 17,33; 21,19), 때로는 여기 첫째 문장에서처럼 인칭 대명사(자신)로, 때로는 둘째 문장처럼 자기 자신을 부르는 말(자)로 옮겨야 한다.

 생명 전체를 가리키는 이 말을 자신에게 사용하며, 하느님의 영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착각하며, 하느님을 잊고 있다. 이런 부자에게 20절에서 목숨을 되찾아 가신다고 한다. ‘되찾아 가다’가 그리스 말에서는 복수 3인칭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비인칭 용법으로 하느님을 가리킨다. 주님께서는 이 부자를 죽음으로써 이 세상에서 불러 가시는 것이다. 21절에 “하느님 앞에서는” 대신에 “하느님을 향해서는”, “하느님과 관련된 것에서는”, “하느님을 위해서는”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다는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을 가리킨다.



4. 강론 주제

①1독서의 내용을 토대로,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다.(하느님의 은총)

②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자.(감사)

③2독서의 내용을 토대로, 주님을 믿다 떠난 조상을 기억하며 기도하자.(합동위령)

④3독서의 내용을 토대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수확에 대한 우리의 자세(나눔)

5. 강론

찬미예수님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아오신 모든 분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기 모인 모든 분들께 주님의 은총, 가득하시길 빕니다.


오늘 강론은 어느 책에서 읽었던 한 가지 이야기로 시작할까 합니다.

 오아시스에 조그만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맑은 샘물과 우거진 야자수가 있는 그곳에서 나그네들에게 샘물을 퍼주는 일에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그네들이 물을 얻어먹고 노인에게 얼마의 동전을 건네주었습니다. 노인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금고에 동전이 자꾸 쌓여가자 은근히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노인이 먼저 나그네들에게 본격적으로 돈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이었습니다. 노인이 무심코 샘을 들여다보자 샘물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노인은 돈을 벌게 해주는 샘물이 더 이상 말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어 그 원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문득 잎이 무성한 야자수가 샘물을 흡수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노인은 과감하게 야자수를 몽땅 잘라버렸습니다.

 얼마 후, 그늘이 없는 샘물은 말라버렸고, 아무도 노인의 오두막집을 찾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뜨거운 햇볕을 견디지 못한 채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어리석은 노인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늘 무엇인가로 끊임없이 채우려고만 하는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버리는 것에 서툴고 채우려고만 하는 우리의 태도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어리석은 부자가 나옵니다. 이 부자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창고에는 그 많은 곡식과 재물을 쌓아둘 곳이 없어 고민하였습니다. 고민 끝에 더 큰 창고를 짓겠다고 계획 합니다.

 이 부자는 너무나 어리석습니다. 자신에게 큰 부를 허락하신 분이 누구인지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풍성한 은총은 깨닫지 못하고, 온통 자신의 재산에 온 마음이 가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재물로 가득차 있으니, 하느님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이 부자의 마음에, 재물에 대한 욕심이, 차고 넘쳐서, 주님께서 머무실 공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이 어리석은 부자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신데, 우리의 작은 것 하나라도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인데, 우리의 마음 안에 온통, 가득차 있는 것. 끝이 없는 욕심, 욕망들로 인해, 주님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물음을 제 자신에게 던져 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일까?

 그 답은 추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추석은 한 해의 수확에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우리는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우리의 마음을 모아, 감사의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감사의 삶입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믿고,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잘했기에, 주님께서는 주시는 것입니까? 성경에 나온 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의 공과 덕의 대가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거저 주셨는데, 우리가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인이 아니고, 관리인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내 소유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받은 물질만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주셨을 때,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의 마음은 ‘나’를 기억하는 마음,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마음, 이웃을 향한 관심과 배려, 사랑의 마음을 주님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참으로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매일의 필요한 양식을 받았고, 슬픔과 고통 중에는 위로와 격려를 받았고, 죄를 지었을 때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많이 받은 자는 더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줄 때입니다.

 추석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총에 감사드리며, 감사의 보답으로 이웃과 나누는 삶 실천하도록 합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6.10.6 금요일  한가위 대축일



요엘2,22-24. 26ㄱㄴㄷ 요한 묵14,13-15 루카12,15-21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오늘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절인 한가위 추석입니다. 아마 일년 중 추석을 중심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때일 것입니다. 어제 동아일보 1면의 고향을 찾는 자녀를 맞이하는 어느 부모 사진과 그 부모의 짧은 한마디 말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 “뭣 하러 왔니? 힘들게”

   할머니는 반가우면 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단 한 줄 머리기사이지만 얼마나 고마움과 반가움이 가득 담겨 있는 말인지요?

힘들어도 이렇게 와 주어서 정말 고맙고 기쁘다는 진심이 함축되어 있는 말입니다.

저 역시 예전 추석 때, 오랜 만에 밤늦게 고향 집을 찾아 대문을 두드릴 때 반겨주시던 어머니의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 “어, 누구여! 수철이 아녀?” 주무시다 말고 반가움에 잠깨어 신발도 신지 않으시고  허겁지겁 나오시던 어머니셨습니다. 한가위 대축일,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명절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함께 만나 모두가 형제가 되어 감사와 기쁨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우리들 또한 좋은 한가위 추석을 마련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기 위해

이 거룩한 한가위 대축일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추석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요엘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간곡한 당부이기도 합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최고의 농부인 하느님께서 봄비와 가을비를 때 맞춰 쏟아 주셨기에 저희 배 밭 역시 배 열매들로 가득하고 곧 창고는 배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아침부터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하신 우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 성무일도를 힘차게 바쳤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다는 자각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느님 밖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그 기쁨, 즐거움은 영혼 육신에 활력을 줍니다. 외부 환경의 영향을 최대한 줄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을 찬양할 때 진정한 행복입니다. 마침내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 요한 묵시록에서 보다시피 하늘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입니다. 바꿔 말해 주님을 믿다가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는 것이며, 이들은 고생 끝에 안식을 누릴 것이니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주님을 믿으며 한 모든 일들이 그의 상급이 되어 그를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십시오. 이래야 하느님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는 하느님의 것이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전부가 되어 버립니다.

최고의 보물인 하느님이 우리의 전부가 될 때 비로소 탐욕 없는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머리 좋아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욕심 없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무욕의 지혜입니다.

아무리 학식 많고 머리 좋아도 탐욕이 그 마음의 눈을 가려버려, ‘있는 그대로’ 못 보는, 말 그대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돈 욕심 앞에 바보 되는, 똑똑한 바보들 말입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전적으로 생명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손에 달려있습니다. 허상인 재산을 주인인양 착각하여 쫓다가

몸과 마음 망가지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지요?  많은 재산을 쌓아두고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것을 꿈꾸는 어리석은 부자를 향한 하느님의 말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쌓아 놓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참 어리석고 인색한 사람입니다.

이래서 옛 사막의 현자들, 이구동성으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충고를 줍니다.

지나친 탐욕 역시 영혼의 질병입니다. 탐욕에 대한 최고의 처방, 하느님뿐입니다.

평생 꾸준히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양할 때, 탐욕은 치유되어 하느님 향한 사랑의 에너지로 바뀝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 들여가면서 돈맛도 잃어 초연한 자유와 사랑을 누리게 됩니다. 이 은혜로운 한가위 대축일 미사시간, 말 그대로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시간입니다. 좋으신 주님은 우리의 탐욕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당신 생명과 사랑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하늘의 모든 천사와 조상과 함께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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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론모음
작성일 2008년 1월 31일 (목) 23:33
분 류 설,추석
ㆍ추천: 0  ㆍ조회: 5025      
IP: 218.xxx.180
http://missa.or.kr/cafe/?logos.993.35
“ 한가위 추석 명절 ”
 

한가위 명절 대축일





        1. 성민호 신부/ 2                 2. 성민호 신부/ 4

        3. 강영구 신부/ 7                 4. 심상태 신부/ 11

        5. 제사예식 어떻게 되어가나/ 13

        6. 선조를 기억하는 차례예식/ 14

1     한가위 명절 대축일   루가 12,15-21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성민호 신부



오늘은 한가위라고도 하는 추석 명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옛날부터 이날을 명절 중의 명절로서 일년 중 가장 즐겁게 지내왔습니다.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들에게 차례를 올리고 산소에 성묘를 다녀오며 가족들이 서로 만나 풍성한 결실을 즐기면서 하루를 경축하였습니다.

  

조상들의 대를 이은 우리도 이날이 오면 선조들의 아름다운 풍습을 이어받아 고향을 찾게 되고 조상들에게 맞갖은 예의를 바치며 일가친척들을 만나 삶의 기쁨을 나눕니다. 아무리 바쁘고 얽매인 현대생활이라 할지라도, 이날만은 시간을 내어 고향을 찾는 귀성객의 행렬을 바라볼 때, 조상들이 물려준 고귀한 정신이 우리들 핏속에 그대로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객지에서 고생하는 수많은 근로자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세상살이에 몰두하다가 그만 본의 아니게 잠시 잊어버렸던 부모를 찾아주는 효심이나, 흩어졌던 혈육이 한자리에 모여 풍요로운 오곡백과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함께 조반이라도 나누는 기쁨이나,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언제나 우리 핏속에 살아있는 조상들을 추모하는 일이나, 모두 다 흐뭇한 삶의 보람이며 생활의 미덕입니다.

  

이처럼 추석 명절은 만남의 날이요, 만나서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날이며 서로 정을 나누면서 기쁨을 만끽하는 날입니다 고향을 찾아가 살아있는 부모 형제를 뵙고 효도와 우애를 다짐하는 것이나, 산소를 찾아가 돌아가신 조상들을 뵙고 그들의 고마움을 추모하는 것이나, 똑같이 훌륭한 인간의 도리이며 아름다운 정신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정성을 다하여 살아있는 어른들을 기쁘게 해드려야 할 것이고 돌아가신 조상들에게는 차례나 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조상께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였습니다. 너무나 가난하여 초근목피로 연명을 할망정 때에 따라 조상께 제사를 올리는 일에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으며, 비록 생업에 바빠 다른 때에는 별로 조상을 생각하지 못하던 사람들도 명절 때만 되면 조상을 만나뵈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차례를 올리고 성묘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적어도 명절날만은 그들의 은덕을 추모하고 감사의 예의를 바치며, 저 세상에서나마 이 세상에 사는 자손들을 지켜달라는 기원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조상 이야기를 하면 픽 웃어넘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핵가족으로 점점 확산되어 가는 세상에 살아있는 부모도 잊어버리는 판국인데 죽은 조상까지 기억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상 없이 자기들이 어디서 나왔단 말입니까? 같은 혈통을 이어준 우리의 뿌리와 어찌 무관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같은 나무 뿌리와 잎사귀가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땅속에 묻혀있는 조상과 세상에 사는 우리도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뿌리를 무시할 수 없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삶을 이어준 조상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들의 유업을 기리고 그들을 위하여 제사를 바치는 것이 살아있는 우리의 도리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우리는 조상들이 누워있는 이곳에 모여 그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들을 하느님께 부탁드리기 위하여 합동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비록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대를 이어주신 조부모님도 누워 계시고, 바로 우리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도 누워 계시며, 평소 우리에게 잘해주던 일가친척들도 누워 계십니다.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함께 살자더니,  의리없이 먼저 떠나 지금 이곳에 잠들어 있는 사람도 있고, 비록 유명은 달리하고 있지만 언제나 잊지 못할 친구도 여기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인생의 포부를 다 펴지도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식구들도 이곳에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우리에겐 소중하고 그리운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그들이 누워있는 이곳에서 그들을 추모하면서 잠시나마 살아생전에 못다한 정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하늘나라 고향에서 편히 쉬고 있을 그들을 마음껏 그리워하면서 우리의 효성과 사랑을 바칩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나라를 허락하신 하느님을 큰소리로 찬양하면서 혹시라도 그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우리의 정성을 보시고 용서해 주십사고 간청합시다.

  

세월은 유수와 같습니다. 이곳을 찾아준 우리도 머지않아 그들처럼 이곳에 눕게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편안히 이곳에 누울 준비를 지금부터 서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남의 무덤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남이 우리가 누워있는 무덤 앞에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이곳에 누워있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남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예사로이 지나쳐버렸습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죽어서 이곳에 눕는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서글프고 아찔하게 느껴집니다. 앞길이 창창하고 건강한 우리가 태산같이 할 일이 많은데 어떻게 벌써 이곳에 누을 수 있단 말입니까? 멀쩡한 체격에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우리가 애써 모은 재산과 명예와 권세를 버리고 어떻게 여기서 썩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정말 말도 안됩니다.

  

하지만 이곳에 누워있는 사람들도 옛날엔 모두 우리처럼 생각하다가 그만 별안간 닥친 죽음을 맞이하였답니다. 만일 무덤에 묻혀있는 사람들이 우리 앞에 다시 서서 말을 할 수 있다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오늘은 우리가 성묘를 받지만 내일은 당신들 차례라오. 우리도 제상에 살 때에는 재산도 모아보고 권세도 뽐내보았으며, 미모도 자랑해 보았다오. 하지만 지내놓고 보니, 모든 것이 참으로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알았다오. 인생이 아무리 멋있다고 하지

만 결국 나그네길인 걸 모르고 몇 천 년 살 것처럼 살다가 결국 이 모양이 되었다오.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 인생을 가치있게 보내지 못하고 허송세월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답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당신네들은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살아생전에 좋은 일 많이 하소. 착하게 사는 것이 복되게 죽는 길이랍니다. 그리고 살아있을 때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너무나 부족했던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 이다음 천국에서 다시 만나 하느님 아버지를 영원히 찬양하면서 지낼 날을 기약합시다. 

  

죽은 이들의 변을 듣고 보니 공수래 공수거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고 쓸쓸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에게는 꿈과 희망이 있고 밝은 미래가 있습니다. 야훼가 우리의 목자시니 언제나 마음이 든든하고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고 말씀하신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죽음에 관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너무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마지막날에 모두 살려주겠다. "(요한 6.44)고 약속하신 주님이 계시는데 어찌 우리가 실망할 수 있으며 세상에 무서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 어떠한 환난이나 역경이나․ 박해나 시련을 당하더라도 결코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맙시다. 용기를 가지고 주님이 계시는 고향에 갈 때까지 지상 나그네생활을 보람있게 영위합시다. "세상낙이 도대체 그 무엇이며 세상고가 도대체 그 무엇이뇨. 지내노면 흩어진 연기 같은 걸 수덕입공, 왜 그리 주저하시오."라는 사말의 노래 한 구절을 묵상하면서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죽은 모든 교우들의 영혼이 천주의 자비하심으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2     한가위 명절 대축일   루가 12,15-21    만나고 모이고 나누는 기쁨   

                                                         성민호 신부



오늘은 한가위라고도 하는 추석 명절입니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조상들을 만나는 기쁨과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쁨, 그리고 풍성한 오곡백과를 나누는 기쁨을 동시에 얻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조상들은 옛날부터 이날을 명절 중의 명절로서 일년 중 가장 즐겁게 지내왔습니다. 식구들이 함께 모여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고, 산소에 성묘를 다녀오며, 가족들이 서로 만나 풍요로운 결실을 즐기면서 하루를 경축하였습니다.

  

조상의 대를 이은 우리도, 그들의 아름다운 풍습을 이어받아 적어도 이날만은 시간을 내어 고향을 찾게 되고, 조상에게 맞갖은 예의를 바치며, 일가친척들을 만나 햇곡식이나 햇과일을 들면서, 삶의 기쁨을 나눕니다. 아무리 바쁘고 얽매인 현대생활 속에서도 만사를 제쳐놓고 고향을 찾는 귀성객의 행렬을 바라볼 때, 조상이 물려준 고귀한 정신이 우리들 핏속에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객지에서 고생하는 수많은 근로자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세상살이에 몰두하다가 그만 본의 아니게 잠시 잊어버렸던 부모를 찾아주는 효심이나, 흩어졌던 혈육이 한자리에 모여 풍요로운 오곡백과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함께 조반이라도 나누는 기쁨이나,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언제나 우리 핏속에 살아있는 조상들을 추모하는 일이나, 모두 다 흐뭇한 삶의 보람이며 생활의 미덕입니다.

  

이처럼 추석 명절은 만남의 날이요, 만나서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날이며, 서로 모여 정을 나누면서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날입니다. 고향을 찾아가 살아있는 부모 형제를 뵙고 효도와 우애를 다짐하는 것이나, 산소를 찾아가 돌아가신 조상들을 뵙고 그들의 고마움을 추모하는 것이나, 똑같이 웃어른들께 바쳐야 하는 존경심의 발로이며 훌륭한 정신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정성을 다하여 살아있는 어른들을 기쁘게 해드려야 할 것이고, 돌

아가신 조상들에게는 차례나 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조상께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였습니다.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여 겨우 초근목피로 연명을 할망정, 때에 따라 조상께 제사를 올리는 일에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으며, 비록 생업에 바빠 다른 때에는 별로 조상을 생각하지 못하던 사람들도 명절 때만 되면 조상을 만나뵈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차례를 올리고 성묘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적어도 명절날만은 그들의 은덕을 추모하고 감사와 존경의 예의를 바쳤으며, 저 세상에서나마 이 세상에 있는 자손들을 지켜달라는 기원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조상 이야기를 하면 픽 웃어넘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핵가족으로 점점 확산되어 가는 세상에 살아있는 부모도 잊어버리는 판국인데, 죽은 조상까지 기억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잘못되면 조상을 탓하고, 잘되면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조상이 물려준 것이 무어냐고 따지면서, 오히려 조상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삶을 이어준 조상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같은 혈통을 이어준 우리의 뿌리와 어찌 무관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같은 나무 뿌리와 가지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땅속에 묻혀있는 조상과 세상에 사는 우리도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다고 뿌리를 무시할 수 없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대를 이어준 조상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들의 유업을 기리고 그들의 유산을 발전시켜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제사를 봉헌하는 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도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조상을 위한 합동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 중에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한 조부모님도 계시고, 바로 우리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도 계시며, 평소 우리에게 잘해주던 일가친척들도 계십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함께 살자더니 의리없이 먼저 떠난 사람도 있고, 비록 유명은 달리하고 있지만 언제나 잊지 못할 친구도 있으며, 불의의 사고로 인생의 포부를 다 펴지도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가족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우리에겐 소중하고 그리운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추모하면서 살아생전에 못다한 효성과 사랑을 바칩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나라를 허락하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혹시라도 그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우리의 정성을 보시고 용서해 주십사고 미사 중

에 간청합시다.

  

세월은 유수와 같습니다. 이번 추석에는 우리가 남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하지만, 언젠가 다음번 추석에는 남이 우리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지상 나그네생활에만 급급하지 말고 영원한 고향 천국을 그리워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다음 조상을 대할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은 여생을 뜻있게 보내야 하겠습니다. 공수래 공수거 인생임을 명심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노력해야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마지막날에 모두 살려주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을 잊지 말고, 어떠한 역경과 시련을 당하더라도 결코 신앙의 길에서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맙시다.

  

또한 오늘은 살아있는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을 나누는 날입니다. 아무리 바쁜 세상이라 하더라도 이날만은 고향을 찾아가 부모님을 모시고 하루를 기쁘게 지냅시다. 고향에 계신 부모들도 이날이 오면 객지에서 고생하는 자녀들이 고향에 돌아오기를 은근히 기다립니다. 이처럼 흩어져 사는 부모 형제들이 함께 모여 한 혈육임을 체험하면서, 조반이라도 함께 나누는 것이 얼마나 흐뭇한 모습이며 삶의 보람입니까? 따라서 웃어른들께는 효도와 존경을 다짐하고 형제들에게는 우애와 친교를 돈독히 하는 추석의 아름다운 전통을 길이길이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이웃, 특히 불우한 이웃들도 모두다 우리의 형제요, 가족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일반사회에서도 추석을 맞이하면 불우이웃 돕기를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 신자들이 앞장서서 해야 할 일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찾아서 인정을 베풀고 송편 하나라도 이웃과 나누는 미덕을 간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추석 명절을 가장 보람있게 지낼 수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가족끼리 모이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혈육을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는 실향민들이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이산가족들이 남북한 상호방문을 통하여 오랫동안 떨어져있던 가족을 상봉하는 극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던 핏줄끼리의 만남은 남북한간의 두터운 장벽을 무너뜨렸고, 많은 사람들의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특별히 실향민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하루빨리 남북통일을 허락하여 주십사고 하느님께 간청합시다

  

마지막으로,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풍요로운 결실을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는 기근이 심하여 하루에도 수백 명씩 굶어죽는다고 하는데, 그곳에 비하여 우리는 축복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떻든, 우리에게 조상을 만나는 기쁨, 가족끼리 모이는 기쁨, 그리고 풍성한 오곡백과를 맛보는 기쁨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오늘 추석 명절을 잘 지냅시다.











3     한가위 명절 대축일   루가 12,15-21       조상들의 삶의 지혜

                                                           강영구 신부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우리의 고유 명절인 추석(秋夕), 한가위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우리 고유의 명절인 오늘을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가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을 대축일로 받아들이고 지내는 것은, 각 민족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전통과 문화 속에서 복음이 뿌리내리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한가위 대축일은 신앙인인 우리에게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추석 명절이 단순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축제일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조상들의 유업을 기리면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축제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참으로 의미 깊은 복음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떤 부자가 농사를 지어 추수를 하였는데, 풍작이 되어서 엄청난 수확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부자는 작은 창고를 헐고 큰 창고를 새로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흔아,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부자가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어떻게 하면 그 많은 수확을 혼자서 독차지하면서 즐길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부자는 그 날 밤에 횡사(橫死)하고 말았습니다. 그 부자는 그 많은 수확을 혼자 독차지하지도 못했고, 실컷 쉬고 먹고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거둔 곡식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부자가 그 많은 수확을 혼자 독차지하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기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그는 죽음의 길에 들어서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부자는 죽을 짓만 골라서 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선 그 부자는 어떻게 해서 그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되었는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지어 보신 분들은 어떻게 곡식이 열매 맺는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노력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도우심이 없다면 아무리 우리 인간이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한 톨의 쌀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때맞추어 비를 내려 주셔야 하고, 적절한 햇빛과 기후를 주셔야만 농사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요즘같이 농사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하늘의 도움이 없으면 결코 풍성한 수확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농사는 하늘이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늘이 짓는 농사에 작은 노력을 보탤 뿐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이 점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부자는 자기가 땀을 홀려 애를 썼기에 풍성한 수확을 거둔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가 하늘에 감사할 줄 모르고 풍성한 수확을 거둔 것은 오직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오만한 마음을 먹은 것이 근본적인 잘못이었습니다.

그 부자가 그 많은 곡식들을 서로 나눌 줄 모르고, 혼자 독차지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그 수확이 자신의 노력으로만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그 부자의 주위에는 가난한 형제들과 굶주리는 형제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자의 눈에는 가난한 형제들과 굶주리는 형제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늘에 감사할 줄 모르는 오만함으로 눈멀어 있었고, 탐욕으로 눈멀어 있었습니다.

  

부자의 눈에는 하느님도 보이지 않았고, 하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형제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곡식 더미와 재물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많은 것들을 가난한 형제들과 나누어 가질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혼자서 그 많은 것을 다 먹어 치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혼자서 독자치할까 하고 고민한 것입니다.

  

그 부자는 살 궁리가 아니라, 죽을 궁리만 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감사할 줄도 모르고, 하늘이 두려운 줄도 모르는 오만함이 그에게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부자는 창고에 재물만 잔뜩 쌓아 놓고 있으면, 얼마든지 호의 호식하면서 잘살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는 창고에 쌓인 재물을 더 믿었습니다. 그러나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인 재물이 그의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은 것입니다.

  

부자는 서로 나누고 함께 누리면서, 더불어 살려고 하지 않고 혼자만 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부터 죽음의 세력은 이미 그를 덮치고 있었습니다. 그가 혼자서 향락과 호사(豪奢)에 빠져 있을 때, 그의 주위에서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당하면서 죽어 가야 했습니다.



혼자서 독차지하는 것은 부자가 되는 길이 아니라, 가난하게 되는 길이자 죽음의 길입니다. 왜냐하면 탐욕은 죽음의 늪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탐욕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입니다. 한번 빠지면 여간해서는 빠져 나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언제나 부족하고 언제나 불만족스럽습니다.

  

부자가 이렇게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 그의 주변에서는 이웃과 형제들은 가난 때문에 서서히 죽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혼자 독차지하려는 탐욕이 자신도 죽이고 이웃과 형제도 죽이게 됩니다. 그래서 부자는 창고 속에 엄청난 재산과 재물을 쌓아 놓고도 죽었던 것입니다.

  

이 부자의 어리석음은 또 있습니다. 부자는 자기 운명의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자신이 쌓아 둔 재물에 희망을 걸면서, 혼자서 그 모든 것을 영원히 누리리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내일 나의 운명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한 시간 후의 나의 운명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살아서 숨쉬고 있지만, 내일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일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지금 서로 사랑하고 서로 나누고 베풀면서 성실히 사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내일을 대비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부자는 내일 어떻게 될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 모든 것을 혼자 독차지하면서 내일을 대비하려 했습니다. 그것 또한 죽을 짓을 골라서 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재산을 자랑하고, 돈을 자랑하고, 지위와 명예를 뽐내고, 그러면서도 하늘을 두려워할 줄도, 감사할 줄도, 서로 나누어 가질 줄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세상에는 어둠과 죽음의 세력이 더 크게 판을 치게 되고, 이 세상은 더욱 살벌한 세상이 되고 맙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 고유의 명절, 한가위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우리의 선조들은 오곡 백과가 무르익는 이 가을에 추석 명절을 정하고, 풍요로운 결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고, 조상들의 은덕에도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로부터 농사를 본업으로 해서 살아온 우리 민족은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알았고, 하늘에 감사드릴 줄 아는 순박하고 슬기로운 민족이었습니다. 알맞은 기후와 적당히 때맞추어 비를 내려 주시어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신 하늘에 새로 수확한 곡식으로 빛은 음식과 햇과일로 상을 차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자연의 섭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뉴월 농부, 팔월 신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우리 조상들은 땀 흘려 농사를 지어서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되는 것은 하늘의 도움 때문이지, 결코 자신들의 노력으로만 그렇게 된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덥지도 춥지도 않고 모든 것이 풍성하게 결실 맺는 이 계절에, 한가위 명절을 정하고 하늘에 감사를 드리는 축제를 벌였던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 민족은 조상의 은덕에도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지지도 않았고, 땅에서 솟아나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고, 선조들이 물려준 땅과 그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의 나는 조상들의 은덕을 바탕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존재할 수 있도록 삶의 바탕을 마련해 주신 조상들의 은덕에 감사를 드리면서, 그분들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바쳤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내는 추석 명절은 나눔과 사랑의 축제일이기도 합니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햇곡식으로 빛은 음식과 풍성한 햇과일을 장만하고 서로 사랑을 나누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웃과도 장만한 음식을 서로 나누면서, 사랑과 우의를 돈독하게 하는 날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가 산업 사회로 바뀌면서 우리 민족의 아름답고 고유한 풍습과 전통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유물론적인 사고와 찰나적인 퇴폐 향락 문화가 스며들어서,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농자 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땀 흘려 농사짓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고, 더 편하고, 더 쉽고, 더 돈 잘 버는 일을 찾아서 젊은이들이 모두 농촌을 떠나고 있습니다.

  

대가족 제도가 무너지면서 핵가족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살면서, 조상의 은덕도 망각한 채 예의 범절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기적인 가정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오직 돈과 재물과 출세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면서, 안일과 향락을 추구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오늘 지내는 이 추석 명절을 통하여 사라져 가는 우리의 고유한 풍습과 전통을 되살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순응하고 감사하는 생활과, 조상들의 은덕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날이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즐거운 축제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조상들의 명복을 빌면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풍성하기를 진심으로 빌어 마지않습니다.



4       한가위 명절 대축일   제사의 참다운 의미와 올바른 자세 

                                                                심상태 신부



조상의 은공에 감사하면서

“신자 가정은 온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세상을 떠난 부모뿐 아니라 잊혀지거나 고통받는 이들까지 하느님의 사랑에 의탁하는 마음을 제사에 담아야 합니다. 

20여년 전부터 한국교회의 토착화에 심혈을 쏟고 있는 한국 그리스도사상연구소장 심상태(수원가톨릭대 교수)신부는, 한가위나 설 명절에, 신자 가정에서 거행하는 제례가 일반 비신자가정의 유교적인 제례와는 의미가 달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잊혀진 영혼 하느님께 의탁

일반 가정의 제사가 조상과 자손의 일치 도모에 역점을 둔 가족 중심적인 분위기의 제사라면, 신자 가정의 제사는 조상의 은공에 감사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인류와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고, 특히 잊혀진 영혼들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이 담긴 제례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신자 가정에서도, 조상들의 은공에 감사드리는 예(禮)를 거행하지만, 일반 비신자 가정의 유교적인 제례와 구별이 모호합니다. 따라서 신자 가정을 위한 상제례 양식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 심 신부는 특히 ‘신자 가정은 보본추효(報로本追孝)로 드리는 제사의 축문을 읽을 때 적절한 복음 구절을 낭독하고, 잊혀진 이들을 기억하는 위패도 조상의 위패 옆에 같이 모셔서, 온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신 하느님의 구원행위 안에 담긴 보편적인 인류애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한국교회는 1939년 교할 비오 12세의 ‘중국 예식에 근한 훈령'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조상 제사를 미신 행위로 여겨 금지해왔고, 이것이 박해의 구실로 작용하기도 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이 훈령에서 조상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닌, 그 나라 민속으로 교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나아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여러 종족과 민족의 훌륭한 정신적 유산을 보호 육성한다. 또 민족들의 풍습 중에, 미신이나 오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나 호의를 가져 고려하고, 할 수 있다면 잘 보존하고자 한다”(전례헌장 제37항)고 밝히고 있다.



한국사목연구소(소장 김종수 신부)는, 심 신부를 비롯한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유교 제사를 바탕으로 가톨릭 상제례 토착화 시안을 내놓은 바 있으나, 아직까지 조상 제사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인 예식서는 마련되지 않은 실정이다.        



명절 예식서 빨리 나와야



“설이나 추석 명절 미사 때, 신자들이 개인, 또는 구역별로 정성껏 마련해온 음식을 봉헌하고 절(拜)을 드리며, 공동체성을 드러내는 것도 좋겠습니다. 조상 은공에 감사하는 우리의 제사 예식을, 미사 중에 포함시키는 명절 예식서가 빨리 나왔으면 합니다."

  

심 신부는, 또 많은 가정이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성당에 가서도 미사 예물을 봉헌하는 등 ‘이중과세'를 지내는 신자들이 있다며, 이 같은 이중 부담을 덜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공식적인 차례 예식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심 신부는 한국교회의 토착화 작업과 관련해 “교회 지도자들이 방향을 제시하면서, 관련 전문가들의 연구가 이뤄지도록 분위기를 초성하고, 현실적인 지원으로 뒷받침할 때 ’토착화' 작업은 실효를 거둘 수 있는데, 우리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연숙 기자>



◇ 준비 사항 ◇



▲ 몸과 마음 준비 :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며칠 전부터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가능하면 온 가족이 어려운 이웃을 찾아 자선을 행한다. 불목하고 있는 이웃이 있는지를 살펴 기꺼이 화해하기로 다짐하며 고해성사를 한다.

  

▲ 제상차림 : 제상은 집안의 관습에 따라 차린다. 그러나 향상(香床)에는 향로와 향합, 촛대 외에, 중앙에 십자가를 모신다.

  

◇ 예식 순서 ◇

  1) 제사 준비가 되어 영정(또는 위패)을 모시면, 제주(祭主)는 제사의 시작을 알리고, 십자성호를 긋는다.

  2) 참석한 모든 사람이 함께 두 번 절한다.

  3) 다음에 제주가 영정(위패) 앞에 나아가 무릎 꿇어 분향하고, 잔을 받아 미리 준비한 그릇(모사기 : 茅沙器) 위에 삼제(三祭 : 술을 세번 조금씩 따르는 것을 말한다)를 한 다음, 제사를 돕는 이에게 주면, 돕는 이는 잔을 올리고, 메와 탕 그릇 뚜껑을 열어놓는다. 제주는 두 번 절하고 물러난다. 참석한 모든 이가 차례로 나아가서 잔을 올린다.

  4) 이러한 절차가 끝나면, 제주가 조상께 고한다.

     “주님의 보살핌으로 오늘 다시 (      )께 제사를 올리게 되었나이다. 이 맑은 술과 여러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드리는 저희의 정성과 사모하는 마음을 받아주소서, 저희는 언제나 (      )를 기억하여 이 제사를 올리오니, (       )께서는 저희가 주님의 뜻에 따라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아가도록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5) 제주는 아래의 말이나, 다른 알맞은 말로 참석자들이 조상을 기억할 것을 권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전해 줍니다. “성서에는 '눈으       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초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1고린 2,9)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로마 14,7-9).

이 말씀으로 우리 (       )께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시며, 주님 안에서 우리와 하나되시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 한 가족입니다.

  

6)  이어서 돕는 이가 나아가, 숟가락을 메에 세운다.

7)  제주와 모든 참석자는 두 번 절한다. 절한 다음 조상을 생각하며, 잠시 묵상한다

8)  이어서 국그릇을 거두고, 냉수나 숭늉을 올린다.

9)  제주는 모든 참석자와 함께 작별 배례로, 두 번 절한다.

10) 제사를 마치면서 조상과 가족, 친척들과의 통교를 더욱 깊게 할 것을 결심하고, 주님께 감사하며 성가를 부른다.

11) 영정(위패)을 따로 모신 다음, 참석자들은 술과 음식을 나눈다.

    이 식사는 사랑과 일치의 식사이며, 조상과 가족 간의 통교를 더욱 깊게 하는 의미가 있      다. 이러한 축제의 기쁨은 이웃, 특히 소외된 형제들에게도 확장되어야 한다.





※ 차례상 차림은 화려하지 않은 병풍을 치고, 상을 편 후 영정 (위패)을 놓는다.

영정 앞 1열은, 숟가락을 담아 놓는 대접과 잔과 받침대, 송편을 놓는다.

2열에는, 어동육서(漁東肉西)라 하여, 상의 오른쪽(동쪽)에 어적(생선 구운 것), 가운데에 소        적(두부 구운 것), 왼족(서쪽)에 육적(고기 구운 것)을 놓고,

3열에는, 3가지 종류의 탕을 놓는다.

4열에는, 좌포우혜(左脯右醯)라 하여 왼쪽에 포를, 오른쪽에 식혜를 놓으며,

5열에는, 홍동백서(紅東白西)라 하여, 붉은 과일을 오른쪽(동쪽)에, 흰색 과일은 서쪽에 놓는           다.



                제사상 그림 별도 부착



5     제사 예식서 어떻게 되어가나



(주교회의 전례위원회에서는 발간 안 하기로, 원하는 신자에겐 예식 시안 알려줘)



지난 84년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는 상제례 토착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신자들을 위한 상제례 예식서 발행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목연구소는 93년 제사예식을 포함한 ‘상제례 예식서’ 기초 시안을 마련했다.



특히 제사예식은 유교적 제례 풍속과 가톨릭 전례의 접목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주교회의 전례위원회는 최근 한국천주교회 차원의 이 조산제사 예식서를 별도로 발간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유는 “지역과 가문의 전통에 따라 조상제사 예식에 차이가 있고, 또 구체적인 예식서를 배포한다는 것은, 가톨릭적 제사의 의미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제사예식을 신자들의 선택에 맡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원회는 개인적으로 별도의 자료를 만들어 배포하거나, 개별적인 요구가 있을 경우, 예식시안을 알려주는 것은 허용키로 하였다.



한국교회에는 현재 이 예식시안 외에, 김수창 신부의 ‘차례예식’, 최기복 신부의 ‘가톨릭 조상제사의식’, 그리고 대구대교구의 ‘위령례와 위령기도’ 등이 나와있는 상태이다.











6                      선조를 기억하는 차례(茶禮) 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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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가족이 모여 조상이 평소에 즐겨하던 음식을 차려놓고 적당한 자리에 조상의 영정과 십자가를 모시고 촛불을 밝힌다.

① 성호경

② 성가 : 가톨릭 성가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부른다.  (예 - 2장, 34장, 44장, 50장, 59장, 423장, 434장 등)

③ 독서 : 감사와 축복에 관계된 성서 구절을 선택하여 봉독한다.  (예 - 신명기 30, 15-20 역대기상 29, 10-18, 이사 12, 1-6, 시편 48,1-14,  요한 17,1-5; 20-26, 마태 5, 1-12, 에페 1, 3-14) 독서 후 독서자가ꡒ 주님의 말씀입니다ꡓ하면 가족들은 ꡒ하느님, 감사합니다ꡓ라고 답한다. 독서후 잠깐동안 묵상을 한 다음 가장의 말씀을 듣는다.

④ 가장(家長)의 말씀  

         가장은 오랜만에 가족들을 환영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권고하며 대화를 나눈다.

   ㉠ 먼저가신 선조 들의 가르침과 가훈과 가풍을 전해준다.

   ㉡ 그 동안의 가족들 소식과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한다.



⑤ 가장의 말씀이 끝나면 서열순으로 영정에 큰절을 올린다.(남녀 가리지 말고)

⑥ 위령기도 : 가톨릭 기도서 74쪽의 위령기도를 드린다. 이외에도 기도서를 참조하여 부모를 위한 기도, 자녀를 위한 기도, 부부의 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 등을 바친다.

⑦ 신자들의 기도 : 가족들은 돌아가면서 감사나 은혜를 청하는 기도를 바친다.

⑧ 성가 : 가톨릭 성가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 (35장, 77장, 445장, 481장 등)

⑨ 주님의 기도 : 모두 다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⑩ 식사 : 모두들 편하게 앉아 준비한 차례 음식을 나눈다. 

















 
  1
작성자 강론모음
작성일 2008년 1월 31일 (목) 23:32
분 류 설,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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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명절 ”
 

9-01.     설





1. 정달용 신부 / 2   

2. 김현종 신부 / 3

3. 배문환 신부 / 4

4. 김경식 신부 / 5

5. 성민호 신부 / 6   

6. 강영구 신부 / 9

7. 최인호 작가 / 11

  1.         음력 설    마태 6, 19-21 ; 25-34

                                                               정달용 신부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기 속에 하나의 ‘나라’ 하나의 ‘왕국’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내가 세웠습니다. 바로 나 자신이 이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됩니다. 그리고 이 ‘왕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내 말을 잘 듣습니다. 내 뜻을 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는 내가 임금이요, 바로 나 자신이 이 ‘왕국’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나의 나라’ 그리고 이러한 ‘나의 왕국’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귀한 것입니다. 더할 수 없이 값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위해 땀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나라’를 무척 아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왕국’을 유지하고 보존해 나가기 위해서 온갖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이러한 ‘나의 나라’를 보다 더 훌륭하고 큰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바쁘게 뛰어 다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나의 왕국’을 보다 더 강대하고 부강한 왕국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눈코 뜰새 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말씀은 하나의 다른 ‘나라’에 대해서, 하나의 다른 ‘왕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나의 나라’가 나에 의해서 세워진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나의 왕국’이 나의 손에 의해서 건설된 것처럼, ‘하느님의 왕국’은 하느님의 손에 의해서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나라’에서는 내가 임금이며, ‘나의 왕국’에서는 내가 왕인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하느님이 임금이며, ‘하느님의 왕국’에서는 하느님이 왕이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으라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왕국’을 추구하라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나라’가 아니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왕국’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의 왕국’을 값진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하느님의 나라’를 보다 더 훌륭하고 큰 나라로, 그리고 이 ‘하느님의 왕국’을 보다 더 강대하고 부강한 왕국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 그리고 ‘하느님의 왕국’을 떠나서 우리는 ‘나의 나라’ 그리고 ‘나의 왕국’을 유지하고 보존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음력 설     마태 6, 19-21 ; 25-34

                                                         - 김현종 신부-



새해의 첫날이 밝아 왔습니다. 대지 저 끝에서부터 불게 타오르는 태양을 향해 새 맑은 새 아침의 목소리를 더 높이어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고 아무리 뛰어도 고단치 않는(이사 40, 31) 힘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고 서로의 사랑을 나누어 가지도록 합시다.



풍속은 의식주에 바탕을 두고 시대의 흐름과 문화의 발달에 따라 변해오고 있으며 여러 천년 전부터 우리에게 있어온 우리의 풍습은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속은 대개 신앙의 요소나 오락의 요소, 노동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앙의 요소는 축원과 감사와 주술적인 성격을 지니며, 오락의 요소는 계몽과 사회나 처첩제도나 파계승에 대한 풍자와 순수한 향응을 위주로 한 여가 놀이의 성격을 지니며, 노동의 요소는 두레행사, 공익사업을 위한 계절적인 행사 따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맞이한 설날은 원단, 원일, 원근, 정조라고도 하는데 이는 새해의 첫날, 또 으뜸의 날이라는 뜻이며 해, 달, 날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삼원이라고도 했습니다. “동국세시기”에서는 제사 지내는 것을 차례, 새옷을 입는 것을 세장, 친척과 연장자를 찾아다니는 것을 세배, 이때에 오르는 음식을 세찬, 마시는 음식을 세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믐날 밤에는 묵은 세배를 하며, 마을과 가족 단위로 사당을 찾아 참배를 합니다. 이러한 설날에는 아무리 구차한 집이라도 총떡 또는 가래떡을 해 먹는데 그래서 나이를 물을 때, “떡국 몇 그릇 먹었니?”라고도 합니다. 이날에는 함부로 거동하지 않는 습속이 있는데 일년을 무사태평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이날을 근신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런 설날의 풍속 가운데서 우리는 몇 가지 좋은 것을 찾아내고 지켜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수신의 의미입니다. 이는 일년을 주님의 축복 속에서 무사하게 지낼 수 있도록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와 기도 드리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부모님, 웃어른께 대한 효도와 예의입니다.



우리 자신이 오늘 여기에 있기까지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으신 부모님과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고 지켜봐 주신 웃어른을 이 날만이라도 깨끗이 마련한 옷을 입고 찾아뵙는다는 것은 사랑을 나누는 만남의 시간이고, 오해와 불신으로 가득찬 세상에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부모, 형제들을 위해 바쳤던 음식물 대신에 이제 우리는 최고의 제물인 그리스도를 성부께 봉헌하는 미사성제는 더없이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설날을 맞이하여 올 일 년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언제나 사랑과 자비로서 우리를 키워주시고 지켜봐 주시는 부모님, 웃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드림으로써 참된 사랑과 기쁨을 나누는 하루가 될 뿐 아니라, 나아가 언제나 예의를 지키고 효도를 다 하겠다는 결심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새해의 원대한 꿈을 가득 담은 태양이 솟아올랐습니다.

출발의 아침, 사랑으로 출발합시다. 싱싱한 기쁨을 노래합시다.













  3.            음력 설   마태 6, 19-21 ; 25-34  - 배문한 신부 -





먼저 여러분 가정에 주님의 풍성한 은혜가 내리어 새해엔 더욱 평화롭고 명랑한 가정을 이룩하시길 빕니다.

고서에서 설은 ‘신일’(愼日) 혹은 ‘담도’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월의 처음인 上子, 上辰, 上亥날에 모든 일은 忌愼(기신)하여 거동을 함부로 하지 않는 습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일년동안에 아무 탈 없이 무사태평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이날은 특히 근신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또 이날은 조상 영전에 차례를 지내고 어른에게 세배를 드리며 세화를 문짝에 붙이고 삼재(三災)를 쫒아내기도 하였습니다. 또 자손들은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합니다.

그렇다면 조상들의 이 설날은 종교적인 요소를 굉장이 많이 가졌다고 보겠습니다. 좀 양식은 다르달까...... 발전되었다고 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요 미사성제를 올리는 것은 조상 전래의 전통과 풍습의 근본정신에 부합된다고 하겠습니다.



첫째, 일년을 하늘의 축복 속에 지내기 위하여 이렇게 근신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와 기도 속에 보내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돌아가신 부모 형제를 위해서 제물 중의 최고 제물인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께 봉헌하는 미사성제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세째로, 세상을 떠난 영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술이나 밥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기도를 바침으로써 연령을 위로하고 가장 기뻐하게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방의 예의도덕을 지키며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는 물론 살아 계신 보모에게도 효도할 것을 결심함이 이날을 의의 깊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 음식을 아무리 산더미처럼 쌓아놓는다 하더라도 살아 생전의 한 술만 못하다 했습니다.

또 우리가 우리 보모에게 얼마나 효도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늙을 때 얼마나 효성있는 아들딸을 갖는가 하는 것이 달려있다는 것도 잊지 맙시다.



옛날 얘기에 늙은 아버지를 고려장을 하려고 산에 묻으러 갔었는데, 조그만 아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 지게는 왜 안 가지고 와요” 하고 묻더랍니다. “지게는 뭣하게” 하니 “아버지 늙으면 또 써야지요”하더라는 얘기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풍성히 내릴 것을 빌면서, 구정에 살아 계신 어른이나 돌아가신 어른들에게 효성스런 자녀가 되어주실 것을 당부합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4.          음력 설   마태 6, 19-21 ; 25-34          -김경식 신부-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

엄동설한을 벗어나면서 설날(구정)을 맞았습니다.

해마다 지켜온 날이지만 이제는 온 겨레와 함께 맞는 새해의 첫날이라기 보다는 한 명절로서 그 의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절을 맞고 보내던 우리 조상들의 아름다운 마음은 우리가 이어 받아야 할 것입니다.



집안 어른들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어른들의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나신 어른들께 차례를 드리는 마음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더구나 흩어졌던 가족들이 고향을 찾아 자신의 뿌리를 되새기고, 부모 형제 친척들과 정을 다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관습에 젖어오신 어른들께서 얼마나 이 날을 기다리셨을까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어린이들이 설날을 기다림보다는 훨씬 더 하리라 여겨집니다.

현대는 고향 떠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핵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기 때문에 어른들의 외로움은 대단히 클 것입니다. 이 외로움을 달래드리고 지난날의 상처를 잊게 해드릴 좋은 기회가 바로 오늘과 같은 설날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을 기다리는 분들이 또 계십니다. 연옥에서 하느님의 지엄하신 정의를 채우고 계신 선조들의 기다림은 오직 하나, 우리의 기도와 희생입니다. 이것 외에 그들에게 위로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시든지 돌아 가셨든지 어른들의 바람이 이런 것이라면 우리의 태도는 좀 더 진지해야 하겠습니다. 치루어야 할 행사로서 설날을 보내지 말고 따뜻한 마음과 겸손한 사랑의 자세를 보여드려야 하겠습니다.



“너는 네 아비가 늙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말아라.

 그가 설혹 노망을 부리더라도 잘 참아 받고

 네가 젊고 힘있다고 해서 그를 업신여기지 말아라.

 아비를 잘 섬긴 공은 잊혀지지 않으리니

 네 죄는 용서받고 새 삶을 이룰 것이다.

 네가 역경에 처했을 때,

 주님께서는 너의 효도를 기억하시겠고

 네 죄의 얼음이 햇볕에 녹듯이

 스러질 것이다” (집회 3, 12 - 15).













 5.              설날       뿌리    

                                                            성민호 신부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오늘은 옛부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설날입니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돌아가신 조상들을 추모하고 웃어른들을 찾아가 세배를 드리며,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혈육의 정을 나누면서 큰 명절로 경축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민속이요 교훈적인 풍습이기 때문에, 옛날 어른들은 이날을 명절 중의 명절로서 일년 중 가장 즐겁게 지내왔습니다.

  

그러기에 나라에서도 이날을 공휴일로 설정하여 자꾸만 흐려져 가는 효도사상과 경로사상, 그리고 형제애를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방예의지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도 빛나는 조상들의 얼을 물려받은 후예답게 이날만은 짬을 내어 고향을 찾게 되고, 돌아가신 조상들과 살아계신 일가 어른들에게 맞갖은 예의를 바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얽매인 현대생활 속에서도 만사를 제쳐놓고 고향을 찾는 귀성객들의 행렬을 바라볼 때, 조상들이 물려준 고귀한 정신이 우리들 핏속에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객지에서 고생하는 수많은 근로자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세상살이에 몰두하다가 그만 본의 아니게 잠시 잊었던 부모를 찾아뵙는 효심이나, 어쩔 수 없이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조반이라는 나누는 기쁨이나,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언제나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조상들을 추모하는 일이나 모두 다 흐뭇한 삶의 보람이며 생활의 미덕입니다.

  

이처럼 설날은 평소에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우리에게 여간 고마운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날은 특별히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을 나누면서 우애를 돈독히 하는 날이며, 우리의 뿌리인 조상들의 고마움을 추모하는 날인 동시에 살아있는 웃어른들에게 효도와 존경을 다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정성을 다하여 조상들에게는 차례와 성묘를 바치고 어른들에게는 세배와 큰상을 차려드림으로써 최대의 예우를 바쳐야 합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조상께 대한 존경심과 부모에 대한 효성이 대단하였습니다.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궁색한 생활을 할망정, 때 맞추어 조상께 제사를 올리는 일에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으며, 비록 생업에 바빠 다른 때에는 별로 조상을 생각하지 못하던 사람들도 설날이 오면 조상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차례를 올리고 성묘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적어도 이날만은 그들의 은덕을 추모하고 감사와 존경을 바쳤으며 저 세상에서나마 이 세상에 있는 자손들과 함께 있어주기를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조상 이야기를 한다거나, 삼강오륜을 들먹이면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라고 웃어넘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기야 핵가족으로 번져가는 세상에 살아있는 부모도 잊어버리는 판국인데, 죽은 조상까지 기억한다는 것이 번거로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잘되면 자기에게 돌리고 잘못되면 조상을 탓하면서 그들이 물려준 것이 무어냐고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삶을 이어준 조상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우리에게 같은 혈통을 이어준 우리의 뿌리와 어찌 무관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같은 나무 뿌리와 가지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듯이, 땅속에 묻혀있는 조상과 세상에 사는 우리도 사실상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다고 뿌리를 무시할 수 없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대를 이어준 조상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들의 유업을 기리고 그들의 유산을 발전시켜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조상을 위한합동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함입니다.

  

얼마 전 자기의 조상을 추적하여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뿌리」라는 소설과 영화가 세계적으로 대단한 관심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였기에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공감을 샀습니다. 그것은 조상께 대한 뿌리의식이 누구에게나 자신의 근원을 돌아보게 하고 자신을 재발견하여 후대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생명을 이어준 조상들을 차례로 찾다보면, 마침내 생명의 근원이시며 우리의 원 뿌리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도 유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조상공경과 더불어 뿌리의식을 강조하는 설날의 관습이야말로 분명히 신앙과도 일맥상통하며 교회의 정신과도 부합합니다. 그러기에 성서는 “야훼를 찾아라. 옆에 와 계신다."는 이사야의 말을 전해주고 있으며,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은 살아있는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을 나누면서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날입니다. 아무리 바쁜 세상이라 하더라도 이날만은 고향을 찾아가 부모에게 효도를 바치고 일가 어른들에게 존경을 표시하며 형제들과 우애를 다짐하면서 모두가 한 혈육임을 체험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미풍양속이며 길이길이 보존하고 후대에 넘겨주어야 할 전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우리는 이웃 모두가 다 우리의 형제요, 우리의 가족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가장 관심있게 대해주신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 약하고 억눌린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바로 주님과 형제애를 굳건히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신자들은 명절 때마다 강조되고 있는 불우이웃 돕기를 앞장서서 실천해야 할 뿐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찾아서 인정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는 일입니다.

복음에서, 주님은 세상 걱정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본고향인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면서, 설날의 정신을 생활화하는 것, 다시 말해서 조상들을 기억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들과 우애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느님을 최상의 아버지로 섬기는 일이 곧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설날이면 누구나 다 한다고 해서 그저 형식적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고 부모에게 세배를 드리고 어려운 이웃에게 약간의 온정을 베푼다고 우리의 본분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의무를 1년 동안 계속해서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즐거운 설날을 맞이하여 돌아가셨거나 살아계시거나, 웃어른들에게 맞갖은 예의와 존경을 드리면서, 우리의 모든 혈육이 주님의 축복 속에서 항상 평안하기를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훗날 하늘고향에서 우리 모두가 다시 만나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고 영원한 잔치를 벌일 날을 기약합시다.













6.          설 대축일  민수 <루가 12, 35-40>  벽사 초복

강영구 신부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고유의 최대 명절인 설날을 맞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올 한 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또 여러분의 가정이 주님의 평화와 기쁨 누리는 가정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을 대축일로 정하고 우리 겨레 모두와 함께 설날의 기쁨을 함께 나누려고합니다. 설 혹은 설날을 한자로 신일(愼日)이라고 씁니다.



설날 곧 신일이란 근신하여 경거 망동을 삼가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슬기로운 우리의 조상들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에, 그 해의 운수가 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은 법입니다. 그래

서 우리 겨레는 옛날부터 한 해의 첫날을 설날이라고 이름을 짓고 몸과 마음가짐을 경건하고 바르게 가짐으로써, 벽사초복(辟邪招福), 즉 사악함을 몰아내고 복을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설날에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기 위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경거 망동하여 화를 불러들이고 재앙을 초래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날은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리길이 멀다 하지 않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신 조상들을 위하여 제사를 바치는 것도 그 때문이고, 웃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향을 찾음으로써,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 고향이라는 텃밭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고향은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고, 친척과 가족들, 그리고 정답던 이웃들이 살던 곳입니다. 고향, 바로 그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합니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 하지만, 그러나 타향은 남남이 모여서 사는 곳입니다. 타향에서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남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향은 그렇지 않습니다. 끈끈한 인정으로 서로 인간 관계를 맺고 살았던 곳이 고향입니다. 고향 안에서 나는 조상들의 후손이며, 한 가족의 대를 이어 온 사람이며, 아버지이며, 아저씨이며, 그리고 자식입니다. 그래서 고향은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하며 아늑할 뿐 아니라 나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명절이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으로 고향으로 발길을 향하는 것은, 그곳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명절이면 조상들을 위한 차례를 지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조상 제사를 통해서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이며,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온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단순히 우리보다 먼저 가신 조상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조상들의 유업을 기리게 하고, 그분들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로부터 충효(忠孝)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던 우리 겨레는, 이렇게 제사를 통해서 선조들의 유업을 기리게 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법과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법을 터득하게 했던 것입니다.

  정조 차례(正朝茶禮), 즉 설날 아침에 조상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나면, 웃어른들에게 새해의 첫 인사를 큰절로써 올렸는데, 이것을 세배라고 합니다. 이 세배 역시 우리 자신들이 누구이며, 또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어른들은 어른답게 아랫사람들로부터 세배를 받고, 절 값과 더불어서 덕담(德談)으로 아랫사람들에게 한 해의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아랫사람들은 어른들에게 세배를 함으로써,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자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알게 되는 지름길이 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그리고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하게 되는 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풍습을 잘 지키고 따를 때,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경거 망동으로 화를 자초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이며, 그리고 자신이 앉을 자리와 설자리가 어디인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륜 도덕의 타락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인륜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날은 이 땅의 인륜 도덕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참으로 좋은 풍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분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종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지 주인을 반갑게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종은 참으로 축복받을 종입니다. 그러나 종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마치 주인이나 되는 양 행동한다면 주인으로부터 호된 꾸중과 질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종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란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제대로 깨닫고, 그 위치에서 신분에 걸맞은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종다운 생활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합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독불장군처럼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서도 안됩니다.



人間이라는 글자가 잘 말해 주듯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사람다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을 때 여기에 참된 평화와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은, 이런 관계를 바르게 해주는 축복된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명절을 우리에게 물려주신 우리 조상들은 오늘 우리와 같은 신앙 생활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더 철저한 신앙인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알았고, 돌아가신 부모님들은  물론이지만 살아 계신 부모님들을 잘 모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우의를 나누는 데도,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만큼 철저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고유의 명절을 잘 지냄으로써 우리 조상들의 삶을 본받아야 할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이 아름다운 전통을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되면서 옛날 우리 조상들이 물려주었던 아름다운 전통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온갖 사조와 풍물들이 밀려와도 우리가 우리의 것을 제대로 지키기만 한다면, 우리 민족 우리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본받아서, 우리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의 종다운 삶을 지키는 것이고,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일입니다.

  

오늘 설날이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 가득한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히 내려서 올 한 해는 모두 건강하시고 또 소망하시는 일들이 성취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7.                   하느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최인호 베드로/작가



새로운 천년대가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시 증가할 것 같아 우려됩니다. 특히 여러 가지 사회불안 요소와 이상 기후 및 자연재해, 소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등에 편승해 더욱 기승을 부릴 것 같습니다.



일부 이단자들이 주장하는 시한부 종말론이란 예수님의 재림 연대를 정해놓고 세상의 역사를 그때까지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 날짜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종말이 언제 오는지 알 수 있다는 근거로 다음의 성서구절을 인용하지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암흑 속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그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1데살 5,4).



아울러 그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6일간 창조하시고 하루를 쉬셨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답니다. 1일은 천년을 의미하는데, 6일 즉 6000년이 지난 다음 쉬게 되는 것, 종말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지창조부터 매 천년마다 중요한 인물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즉 1000년에는 노아가 탄생했고, 2000년에는 아브라함이, 3000년에는 모세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000년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는데, 그 후 2000년이 되는 시기, 즉 창조 후 6000년에 종말이 오며, 이후 1000년 동안은 천년왕국이 지속된다는 주장이지요.



특히 그들은 종말 전에 대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더 큰 문제입니다. 1992년에도 휴거(携擧)소동이 있지 않았습니까? 종말에 믿음이 있는 자들은 휴거, 즉 하늘로 ‘들려 올려지고’ 그 외의 모든 피조물들은 7년 대 환란을 거쳐 마침내 멸망하고 만다는 그들의 주장입니다.



당시 휴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들이 받은 계시에 의하면 1999년에 최후의 심판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 전에 먼저 7년 동안의 환란이 있을 것이며, 그 시작은 1999년의 7년 전, 즉 1992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서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1데살 4,17)라는 구절을 임의로 해석하여 휴거가 있을 거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죽음이 끝이 아니요 결국은 하느님의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니, 그날을 위해 깨어 있으라는 격려이자 위로였습니다(1데살 5,1-10 참조).



우리가 알다시피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계속하여 주장해왔던 종말의 날짜는 하나도 맞지 않았지요. 이에 그들은 ‘성서 해석을 잘못하여 날짜 계산이 잘못되었는데, 사실은 언제다.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또는 ‘원래 날짜는 맞는데 우리들이 열심히 기도했기에 하느님께서 얼마간 연장해주신 것이다. 하지만 몇 년 후 그 날이 올 테니까 준비하라’라고 변명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4,36). 그럼에도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이 특은을 받아 그 날을 안다고 주장한답니다.



종말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종말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종말신앙은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고 완전함에 이르게 되리라는 하느님 약속에 대한 믿음이며, 우리들의 희망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재림은 파멸이 아니라 우리 구원의 완성을 가져다 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더욱 성실한 삶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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